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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사태 관계자들의 증언.송기숙외(월간조선, 1985. 7)

본문

光州사태

관계자들의 證言

이 증언은 광주사태를 직접 겪은 관계자들의 체험담을 본지 취재기자들이 정리한 것이다.

月刊朝鮮특별취재반

證言者

宋基淑(당시 수습위원)

金鍾培(당시 학생투위 위원장)

李梁賢(당시 학생투위 기획위원)

南東成(당시 전투경찰관)

曺喆鉉(신부)

■宋基淑(50, 전남대교수, 당시 수습위)

계엄군이 확산되고 계엄군이 학교에 진주하고 난후 5월18일에 벌어진 상황을 나는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 5월19일은 통근버스가 정상 운행되어 9시경 학교에 출근했다. 물론 교수와 학교직원들만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맞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우리 몇몇 교수들은 (명노근, 김동원 등 6명)서동에 있는 총장집으로 閔俊植총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민 총장은 「어용교수」라고 학생들에게 규탄당하자 그해 5월 들어서면서 칭병한 채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총장을 찾아가 『총장께서 직접 나서서 수습하지 않으면 사태가 계속 악화될 것 같으니 학교에 나가 사태를 수습해달라』고 건의했다. 민총장은 『나는 몸도 아프고 내가 나선다해도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느냐』고 말했다. 이에 분개한 우리는 『아니, 이 판국에 총장이 칭병만하고 있으면 어쩌란 말입니까. 총장이 나서서 말리기라도 해야할 것 아닙니까』고 총장의 출근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민총장은 우리의 강권에 밀려 그날 오후 학교에 출근했다. 그러나 우리교수들도 학생·시민 데모가 점점 확산되는 데 속수무책이었다. 더구나 사태가 악화되자 겁이 나 도저히 광주에 더 이상 머물수가 없었다. 20일 새벽 우리교수 6명은 승용차 두 대를 구해 나눠타고 광주를 빠져나왔다. 기차를 갈아타고 대전으로 가 대전서 하룻밤을 지냈다. 21일 서울에 도착하고 중구청 부근 여관에 숙소를 정했다. 바로 그날 저녁 「광주사태」를 처음으로 알리는 TV보도가 있었다. 오후 6시경 여관에서 이 보도를 본 우리는 도저히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광주가 저렇게 되고 있는데 우리만 살겠다고 여기에 있을 수 있느냐. 광주를 빠져나온 게 부끄럽다』는데 의견을 모은 우리는 죽더라도 광주로 되돌아가자고 결정했다. 안진오, 김성기, 노희관 교수는 다음날인 22일 오기로 하고 명노근, 김동원 교수와 나는 곧바로 기차를 타기위해서 서울역으로 나갔다. 이미 호남선은 불통이고 전라선만 다니고 있었고 그것도 곡성까지밖에 못간다는 것이었다. 기차를 타고 다음날 새벽 4시 곡성에 도착한 우리 세명은 택시를 대절, 광주로 향했다. 담양에서 처음으로 계엄군과 접한 우리는 『서울서 사업하는 사람들인데 광주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돼 가는 길』이라고 속여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무등산 뒷편 창평에서 택시를 내린 우리 세명은 무등산 고개길을 걸어서 넘었다.

잣고개를 넘기 전 우리는 어색한 옷차림에 가방을 하나씩 든 사람 10여명을 만났다. 어떤 사람은 추리닝을 입기도 했고 옷이 몸에 맞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광주가 어떻게 됐는가』물어도 아무대답이 없었다. 얼마쯤 가다가 같은 차림의 사람을 5명, 얼마후 또 10여명을 만났으나 이 사람들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광주에서 도망치는 전경들이었다. 광주 전망대에 도착한 것이 9시경. 조선대 뒷산으로 후퇴하는 공수부대와 학생·시민군이 교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총소리가 콩볶듯 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광주시내 지원동으로 들어서니 열서너 살밖에 안된 어린애들이 카빈총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동차는 숲속에 감춰져 있었고 가끔 애들이 장난으로 총을 쏴대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 우리는 오전 11시경 도청을 방문하여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계엄당국에 건의할 7개항 수습안이 결의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곳서 돌아온 우리는 오후 1시경 남동성당에 따로 모여 별도의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도청에 모인 수습대책위원회으로서는 진정한 수습이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남동성당에 모인 사람은 홍남순 변호사, 명노근 교수, 외에 김성용, 조철현 신부, YWCA의 조아라, 이애신 여사, 이기홍 변호사 등이었다.

우리는 도청에서 결의된 7개조항에 그대로 따르기도 하고 사망자들의 장례문제를 논의하고 헤어졌다. 나머지 문제는 계엄당국의 반응을 봐서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친구집에서 점심을 먹고 명교수와 나는 그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 도청앞 광장으로 나갔다.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도청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전혀 질서나 지휘체계가 잡혀져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우리들은 실제 싸운 사람들도 수습에 참여시켜야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명노근교수가 핸드마이크를 잡고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을 불러모았다. 도청앞 남도예술회관 앞에 모인 학생이 1백여명이었다. 명노근 교수는 정시채 전남부지사를 만나야겠다고 갔고, 나는 전남대 10명, 조선대 10명, 모두 20명의 학생을 데리고 서서 왼쪽으로 큰 방이 두 개 있었는데 도청 점령군의 본부격이었다. 한쪽 옆에는 김밥이 쌓여있었고 공수부대원 한명이 잡혀와 한쪽에 앉아 있었다. 구석에 놓인 무전기에서는 군인들간에 교신하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일은 간첩용의자로 잡혀와 심문을 받고 있는 사람이 20여명이나 된다는 사실이었다. 지나친 과격발언이나 행동을 하다가 잡혀온 것이었다.

나와 학생들이 방에 들어서자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전남대 학생들이 『전남대 교수로 유신정권때 해직됐다 복직된 송기숙 교수』라고 내소개를 하자, 다시 『뮛 때문에 왔느냐?』고 다그쳤다. 나는 『더이상 사태가 악화되어서는 안된다. 모두 한 발짝씩 물러서서 수습의 길을 찾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러자 그중 한명이 나서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수습은 무슨 수습이냐』며 내 목에 총을 들이댔다. 두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야, 이자식아. 그러면 이렇게 개죽음을 당해도 좋단말이냐. 이제 개죽음은 그만하고 살아야할 것 아니냐』고 소리쳤다. 한참 설득 끝에 간신히 사람들을 진정시켜 자리에 앉혔다. 조금 있다보면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와 비슷한 말을 하며 총을 들이대곤 했다. 그 방에 있던 세시간(6시∼9시)동안 서너차례 그런 곤욕을 치러야 했다.

밤 9시경에 가서야 학생수습대책위가 구성됐다. 위원장에는 전남대의 김창길이, 부위원장 겸 장례위원장에는 조선대 김종배가 지명됐다. 그날밤은 12시가 다 돼서 귀가했다. 다음날 새벽 나는 민총장댁으로 전화, 어제 저녁 학생들이 임시수습위원회를 만들었으니, 총장을 비롯한 보직교수들이 도청에 나와 추인을 하고 교수들이 나서서 수습을 주도해나가야 할 것이라는 요지의 건의를 했다. 나는 총장 외에도 여러 교수들에게 전화를 해 같은 요지의 말을 하고 연락이 되는대로 전부 도청으로 나와 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23일 오전, 도청에 모인 교수는 교무처장 등 50∼60명이 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교수들은 22일밤에 결성된 학생수습위를 그대로 인정하고 헤어졌다.

23일, 24일 양일간은 상당히 평온을 되찾았지만, 수습책에는 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여러의견이 오고 갔다. 25일이 되자 수습분위기가 강경한 노선으로 바뀌었다. 25일은 비가 무척 많이 쏟아진 날이었다. 오전 11시경 YWCA 2층 총무실에서 홍남순 이성학(기장 장로)조아라 이애신 이기홍 박석무 명노근 등과 내가 모였다. 학생을 대표해서 이 자리에 참석했던 정상용(전남대 제적학생)이 『계엄당국이 우리의 수습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체로 싸운다는 건 개죽음밖에 안되니 계속 계엄당국과 협상을 통해 우리의 주장을 관철해 나가자는 입장이었다. 별 신통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25일은 또 그동안 자취를 감췄던 많은 학생들이 도청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한 날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 남동성당측 수습위와 도청측 수습대책위가 도청에 같이 모였다. 남동성당측은 『계엄당국이 7개조항 중에서 「총을 들었던 학생·시민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한가지만 들어주면 무기를 수거하고 수습의 길을 찾도록 하자』는 중이었고, 도청과 수습위는 『무조건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하자』는 입장이었다. 이에 반해 학생과 젊은 시민들은 『계엄당국과의 접촉으로 봐서 하나도 실현될 게 없으니 끝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우리 남동성당측 수습위와 학생들은 도청파 수습위를 퇴장시키고 회의를 계속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동안 간간이 있어왔던 계엄군 진주소식이 본격적으로 나돌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분위기는 무척 싸늘했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학생 시민들에게 『이제 각자 자기가 알아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딴 사람의 행동을 책임질 수 없다.』는 말을 했다. 각 성당에 모여 있는 청년들을 모아와서 도청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저녁 9시경 명노근 교수와 함께 도청을 나온 나는 동구청뒤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에게 줄 과자꾸러미를 옆에 낀 채였다. 한 학생이 뛰어오더니 YWCA강당에 학생들이 모여 있으니 같이 가담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YWCA에 모여 있던 학생들에게도 도청에서와 같이 『계엄당국이 우리 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으니 각자 알아서 행동하라』고 말한 후 귀가했다. 도저히 수습의 길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26일 아침 명노근·김동원교수와 같이 광주를 빠져나와 서울로 몸을 피했다.

金鍾培(31·학생투위 위원장)

나는 도청을 점거한 학생 시민들로 구성된 학생수습위원회의 부위원장겸 장례위원장을 맡고(나중에는 위원장을 맡았다)계엄군이 27일 새벽 진입할 때까지 도청에 남아 항거하다 체포되어 실형을 살았다. 21일 저녁 남도 예술회관 앞에 전남대·조선대 학생들이 모여 학생수습위를 구성했다. 학생수습위는 전남대 송기숙 명노근 두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로 구성됐다. 위원장 김창길(전남대), 부위원장 겸 장례위원장 김종배(조선대), 총무 정해민(전남대), 대변인 양원식(조선대), 무기 수거반장 허규정(조선대), 보급부장 구성주 등이었다. 처음 구성됐던 이 수습위 간부들은 그후 여러번 바뀌었다. 그후 위원장인 김창길은 주로 어른들과 계엄사를 오가며 수습책을 논의했고 나머지 학생들이 도청에서 자체 수습에 나섰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나는 도청안 마당에 시체를 입관시켜 놓고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시민들을 한 사람씩 들여보내 신원을 확인시켰다. 시체는 신원이 확인되는 대로 상무관에 안치시켰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일은 관구입이 용이하지 않은 것이었다.

23일, 정시채 부지사가 도청직원을 출근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해, 우리는 국장급 이상의 직원만 출근하도록 조치했다. 그날 오후 4시 도청에서 구용상 광주시장 주재 아래 도청 국장연석회의가 있었다. 구시장이 학생대표의 참석을 요구해 와 나와 허규정이 회의에 참석했다. 구시장은 『우리가 행정적으로 지원할 사항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우리는 『시체를 옮길 앰블런스가 없고, 식량이 부족하니 하루쌀 세가마니를 공급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관 구입에 애를 먹고 있으니 관을 좀 구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 시장은 모든 것을 되는 방향으로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또 사망자들의 장례식은 광주 시민장으로 치를 수 있도록 행정적 지원을 요청해 시장의 응락을 받아냈다.

24일 오후 6시에 김창길의 계엄사를 다녀온 결과를 놓고 학생수습위 회의가 열렸다. 김창길은 『계엄사에서 총기를 반납 않으면 군을 진주시키겠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모두 죽게 되니 무조건 총기를 반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나는 무조건 총기를 반납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면서 4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하자고 말했다. 즉 ①광주시민이 폭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매스컴을 통해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②구속된 학생 시민을 전원 석방할 것이며 ③사망자뿐 아니라 부상자에 대해서도 충분한 피해보상과 치료를 약속하라 ④장례식은 시민장으로할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 한 결코 총을 놓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처음 도청을 점거할 때부터 도청내의 학생 시민들간에는 의견이 상당히 엇갈렸다. 대별해서 무조건 총을 놓고 투항하자는 측과 학생 시민들이 내건 요구조건의 관철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측이었다. 전자를 「온건파」, 후자를 「강경파」라고 불렀다. 내 의견으로는 후자를 주장한 측이 결코 「강경파」라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내건 주장이 정당한 것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날 저녁 양측의 안을 놓고 격론을 벌이던 우리는 책상을 뒤엎고 싸우기까지 했다. 그후에도 「온건파」과 「강경파」는 수시로 대립, 총으로 서로 위협하는 사태가 자주 있었다. 두 파간에 대립이 너무 심해 「강경파」를 지지하던 박남선 상황실장은 내게 경호 두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만큼 양측의 대립이 심했고 총을 휴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했다.

24일 저녁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속에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났다. 그날 저녁 늦게 도청에 와있던 전남대 사대학장 오병문 교수가 나를 불렀다. 오교수는 장형태 전남지사의 친구로 며칠 전부터 사태를 원만히 수습하기 위해 도청에 자주 드나들며 학생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나는 오교수에게 『현재 구성돼 있는 시민수습대책위는 계엄사 입장만 대변하고 있어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양식있는 시민들로 수습위가 재구성됐으면 좋겠습니다』하고 말했다. 오교수는 『그렇다면 내가 가톨릭 신부를 한명 소개해 줄테니 같이 얘기해 보라』며 조철현 신부를 모시고 왔다. 조신부는 『그동안 남동성당에서 따로 모여 수습책을 강구해온 사람들이 있으니 같이 이야기하자』며 다음날 홍남순, 김성용, 조아라, 이애신씨 등을 모시고 왔다.「시민수습위」와 「남동성당파」인사들, 학생들이 같이 모여 논의한 결과 얘기가 통하지 않는 「시민수습위」측을 모두 내보내고 「남동성당파」와 학생 시민들만 남아 수습위가 재구성됐다. 홍남순 변호사가 위원장, 김성용 신부가 대변인으로 선출됐다.

25일에 소위 「독침사건」이란게 있었다. 도청에 들어와있던 장계범이란 사람이 간첩의 독침을 맞고 쓰러졌다고 알려진 사건이었다. 내가 아는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시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도청 1층 지방과에서 누가 독침을 맞았다는 얘기가 들렸다. 내가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 장계범과 독침맞은 부위를 입으로 빨던 정향규도 같이 쓰러져 전남대 병원으로 실어 보냈다는 것이었다. 독침이란게 현장에 남아 있었는데 보통 우리가 쓰는 볼펜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병원에 사람을 보내 자세한 내용을 알아오라고 시켰다. 그러나 장계범과 전향규 두 사람은 이미 병원에 없었다. 담당의사는 독침을 맞은 흔적이 없다고 말하더라고 했다. 장계범의 집을 안다는 사람이 있어 나는 윤석루를 시켜 장계범을 잡아오라고 시켰다. 윤석루는 황금동의 장계범의 집에는 아무도 없어 대문짝을 부숴버리고 그냥 돌아왔다고 전했다. 장계범은 22일 도청을 처음 점령할 때부터 같이 들어왔는데 항상 군용무전기를 들고 다니며 계엄군의 교신내용을 잡는다고 설치고 돌아다녔던 사람이다.

실지로 가끔 게엄군의 동태가 어떻다는 등 떠들고 다녔다. 언젠가 3층 빈방에서 무전기에 대고 무어라고 말하는걸 본적이 있는데, 장계범이 지나치게 놀라 조금은 이상하게 느꼈었다.여하튼 25일 오후에 시민 수습대책위원의 한 사람이던 장세균 목사가 외신기자들을 불러놓고 간첩의 독침에 두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그날 저녁 TV에 이 사건은 독침사건으로 보도됐다. 이 사건으로 도청내에는 불신감이 만연되고 「강경파」는 빨갱이로 몰렸다. 나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이대로 그냥 있다가는 「온건파」에 밀려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YWCA에 있던 윤상원과 의논해 YWCA에 있던 학생 백명을 밤 10시에 도청으로 진입시켰다. 우리는 도청 상황실에서 이들을 무장시켜 김창길을 비롯한 「온건파」10여명을 쫓아냈다. 이들을 쫓아내는데는 상황실장 박남선이 앞장섰다.

「온건파」들은 도청에서 쫒겨나가며 식당에서 취사를 담당하던 여학생과 외곽경계를 서고 있던 사람들에게 『계엄군이 곧 진주한다』고 설득, 이때 상당수의 사람이 빠져나갔다. 「온건파」들을 쫓아낸후 나는 정상용, 윤상원 등과 의논, 수습위를 투쟁위로 개편했다. 계엄사가 우리의 요구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을뿐더러 계엄군 진입설이 본격화된 판국에 수습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식명칭을 시민학생투쟁위원회로 정하고 내가 총위원장에 선출됐다. 그밖의 간부들은 다음과 같다. 외무부위원장 정상용, 내무 부위원장 허규정, 대변인 윤상원, 기획실장 김영철(위원 이양현 윤강옥), 민원실장 정해직, 상황실장 박남선,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부대장 이재화)등.

26일엔 그동안 보이지 않던 장형태 도지사가 도청에 출근했다. 오병문교수가 와서 도지사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정상용과 나는 도지사실을 찾아가 도지사를 만났다. 우리는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는 계엄사와 더 이상 대화를 못하겠으며, 이대로 총을 놓을 수는 없다. 우리의 최소한의 요구가 관철되도록 주선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또 사망자들을 도민장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건의했다. 장형태지사는 『방금 상무관에 안치된 시체를 보고 왔다. 특히 일가족 3명이 몰살된 것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사망자에 대해서는 28일 도민장을 치를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또 그날 시장과 도청 국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민들이 불편을 느끼고 있으니 버스를 운행하도록 하고 시장을 개방하도록 조처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학생들로 홍보반을 편성, 시내를 돌아다니며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시가지 청소에 힘썼다. 그럐서 26일은 시장도 어느 정도 개방되고 평온과 질서가 상당히 회복됐다.26일 오후 계엄사는 수습위를 통해 5시까지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면 계엄군을 투입하겠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최소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한 끝까지 버티겠다고 나섰다. 수습위는 계엄사에 가서 군병력 투입만은 막아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예정된 5시가 돼도 계엄군은 진주하지 않고 계엄사에 갔던 수습위원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저녁 5시가 훨씬 지난 뒤에 수습위원들중 조철현 이애신 조아라씨가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도 대책이 없었다. 계엄사는 곧 군을 투입시키겠다는 입장을 강경히 내세우더란 얘기였다.그날 낮에 정시채부지사가 허규정과 나를 불러 『계엄군이 곧 진주할 텐데, 내가 미리 귀뜀해 줄테니까 학생들은 모두 빠져나가라』고 말했었고, 우리는 『만약 계엄군이 진주하면 도청 지하실에 있는 폭약을 폭파시키겠다』고 말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청 지하실의 폭약은 계엄군에 의해 이미 뇌관이 제거된 상태였다. 우리는 정형태지사의 28일 도민장 거행약속도 있고 해서 설마 계엄군이 그때까지는 투입되지 않을 줄로 생각했다.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다고 느낀 것은 정작 계엄군이 진주한 후였다.

어쨌든 계엄군이 투입된다는 불안감속에 26일의 밤이 찾아 들었다. 수습위원들도 모두 돌아가고 학생과 시민들만이 도청을 지키고 있었다. 단지 처음에 구성됐던 시민수습대책위의 이종기 변호사만이 도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변호사는 『수습위원을 맡았는데 수습을 못했으니 학생들과 같이 죽겠다』며 2층에 자리잡았다. 이변호사는 학생들과 같이 죽을 작정으로 목욕을 하고 왔다는 것이었다.밤 12시가 넘어 시민들에게서 계엄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제보 전화가 도청으로 걸려왔다. 우리는 차마 계엄군이 들어올까 반신반의 하며 기동타격대에게 순찰을 내보냈다. 시내로 나갔던 기동타격대에게서 정말 계엄군이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27일 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도청 안에 비상을 걸고 박영순(여·송원전문대)과 이경희(여·목포전문대), 두 여학생들과 데모진압용 개스차에 태워 시민들에게 방송하도록 시켰다. 계엄군 진입을 알리는 두 여학생의 가두방송이 나가자마자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때가 2시15분이었다고 기억된다.우리는 수류탄과 실탄을 새로 지급하고 학생, 시민들을 도청 곳곳에 배치시켰다. 3시30분경 도청 후문쪽에 군인의 모습이 보였다. 30분 이상 교전이 계속됐다. 2층 부지사실에 있던 우리 일행 5명은 1층이 점거됐다는 얘기를 듣고 4층으로 올라갔다. 한참 지난 후에 아래층이 조용해졌다. 아마 우리 5명이 마지막 남은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4층복도까지 올라와 있던 계엄군이 총을 쏘았다. 계엄군은 핸드마이크로 『상황이 끝났으니 총을 버리고 나오라』고 소리쳤다. 일순간 우리는 싸우다 죽을 것인가, 나갈 것인가 망설였다. 한명이 『어차피 모두 끝난 모양인데, 나갑시다』하고 말했다. 한참동안 망설이던 우리는 그말에 총을 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결국 포승에 묶여 연행되고 모든 상황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 李梁賢(35·학생투위 기획위원)

나는 19일 시민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걸 10여미터 후방에서 보고서 군이 발포를 했으니 상황이 어렵게 됐다고 생각하고 운동권 청년들이 모이는 녹두서점으로 갔다.우리 운동권 젊은이들은 비겁하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는데 뜻을 모으고 각자 몸조심하자면서 헤어졌다. 나는 지금도 이때 나의 행동이 비겁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후 나는 승용차를 타고 동료 10여명과 함께 함평으로 내려가 피신했다.함평에서 라디오를 들으니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했다고 했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토의했다. 우리는 광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정상용, 김성애, 나, 이렇게 셋이서 40㎞를 걸어서 광주로 돌아왔다.상무대 근처에 오니 피난민들의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광천동에서 오후 2시반쯤 「시민자율버스」를 얻어 타고 녹두서점에 와서 들으니, 우리 운동권에서 윤상원, 윤강옥, 안길정씨 등이 도청안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투사회보도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정보수집과 행사기획 등의 일을 보기로 했고, 후배등과 연락협의하는 업무를 맡기로 했으며, 윤상원씨는 계속 도청에서 일을 보기로 일단 잠정적으로 우리 몇몇이 업무를 분담했다. 이런 일을 계기로 해서 녹두서점 그룹이 광주시위의 중심에 파고들기 시작했다.사실 군이 퇴각한 이후 도청을 장악하는데 앞장섰던 그룹은 재수생, 식당 종업원 등 단순근로자들이었다. 가장 용감했던 재수생 김모군은 가슴에 수류탄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총격전을 벌이는 등의 과감한 행동은 다 이들이 했다. 이들은 집도 없어서 밤에 들어갈 것도 없이 밤낮으로 뛰어다녔다.

22일엔 김창길을 위원장으로 하는 학생수습위가 구성돼서, 그룹을 형성하지도 못하고 설치기만 하던 단순근로자 그룹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도청을 장악했다.24일 우리 녹두서점 그룹은 YWCA에 본부를 설치하고 궐기대회준비를 했다.투사회보도 많이 찍었다. 도청팀과는 윤상원씨가 채널이 돼서 수시로 연락했다.오후 3시 「화형식」을 도청앞에서 성공리에 마치고 5시에 시가행진을 했다. 이 행사부터 우리팀이 주도한 것이다. 25일, 광주 민주학생투쟁위원회가 조직돼서, 그동안 도청안에 머물고 있던 학생수습위를 사실상 흡수·통합했다. 이 투위는 녹두서점 그룹을 중심으로 조직됐다. 기성 학생수습위측의 김종배 박남선이 우리를 도청으로 들어오라면서 호의적으로 일을 추진했다. 투항을 주장하던 김창길은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도청이 우리 녹두서점 그룹이 중심으로 구성된 투위의 장악아래 들어옴에 따라①재수생, 일부학생, 단순근로자들에 의해 움직였던 시위의 중심이 운동권 그룹으로 옮겨왔으며, ②그렇게 됨에 따라 그 성격도 투항주의에서 상황지속주의로 바뀌게 되었다.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도청을 장악했지만 실제로 활동을 한 것은 26일뿐이었다. 그리고 24일부터 비가 오는 바람에 외곽경비를 하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그때부터 사실상 외곽경비가 없다시피했고, 그런 경비팀들과의 지휘계통도 제대로 서 있지 않았다.26일 오후 5시, 계엄군으로부터 최후통첩이 왔다. 진주하겠다는 것이었다. 투항주의자들이 설치자 박남선 상황실장이 권총을 쏘며 그들을 내쫓았다. 나는 홍보부장한테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시민들에게 알리라고 했다. 홍보부는 「내일이면 계엄군이 진입할지 모른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광주를 사수하자. 그런 분은 돌아와 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의 가두방송을 했다.

그랬더니 시민 2백명이 모였다. 상황실장이 총 한 방을 쏘니 투항주의자 5∼6명이 나가고 싸우겠다는 2백여명이 들어온 셈이었다. 그 가운데는 고등학교 학생도 있었다. 그들을 YWCA에 집결시켜 역시 자진해서 나온 예비군 대위가 간단한 군사교육을 시켰다. 그런후에 부대를 편성해서 도청, YWCA등에 나누어 배치했다.과연 계엄군이 쳐들어올 것인가? 그렇다면 나가야 할 것인가, 윤상원씨는 도청을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도 결국 남기로 했다.우리는 4∼5일동안 밥 한끼를 제대로 먹지 못했다. 여고생, 운동권 청년들의 부인, 자원봉사자, 이런 여성들이 식당에 와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가끔 요구르트 같은 음료수를 주면 그걸 받아 마시고 허기를 때우곤 했다.우리는 허기와 피곤에 지쳐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최후통첩을 받고도, 상황실에 1명만 남겨두고 곯아 떨어졌다.

12시에 시내전화가 끊겼다.27일 새벽 3시 도청 1층에서 자고 있는데 사람이 와서 깨우기에 상황실로 가보니, 양동시장, 서방쪽, 백운동쪽에서 계엄군이 진주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쪽을 경비하던 사람들을 무전으로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3시5분쯤 비상을 걸었다. 도청안에 힜던 5백여명이 모두 일어나서 무장을 하고 도청 전면과 후면을 경비했다. 도청안에 있던 전등을 모두 껐다. 한편, 김종배 위원장은 중앙청상황실직통으로 연결된 전화를 들고 소리쳤다. 『지금 계엄군이 오는데 광주시민 몰살하겠는가?』『모르겠다』『정말 그러면 여기 있는 TNT로 자결하겠다』후에 안 일이지만, 그 TNT엔 계엄군의 공작에 의해 뇌관이 빠져 있어 폭발할 수 없는 것이었다.잠시 후에 또 전화통을 들고 『못하게 하라』고 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반응이 없자, 우리 간부들도 할 수 없이 총을 들고 나섰다. 나는 윤상원, 김영철씨와 함께 당시 임시식당으로 쓰던 도청 2층에서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밖을 향해 숨어 있었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밖을 보니 나뭇잎이 한들거리는 게 어슴프레 보였다. 먼동이 터오는가 보았다.

그럴즈음 도청입구와 YWCA쪽에서 총소리가 콩볶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늘엔 비행기가 떠 있었는데, 거기선 선무방송을 했다. 그 순간, 「아 진압을 하는구나. 우리는 여기서 죽는구나 잡혀도 구덩이에 파묻겠지」이런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내가 옆에 있던 윤상원씨에게 이렇게 속삭였다.『우리 저승 가서 만납시다. 거기 가서도 학생운동 합시다』윤상원씨도 그러자고 대답했다.그때 정문쪽이 아닌 후문쪽에서 시위대 1명이 뛰어오며 「총을 뺐겼다」고 했다. 그걸 보고 우리가 후문쪽을 향해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콩볶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그순간 내 옆에서 『아이쿠!』하는 소리가 들렸다. 윤상원씨가 총을 맞았다.그때 밖은 이미 동이 터서 사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수협 공판장 앞에도 8∼9명의 계엄군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몇몇은 우리가 LMG를 설치해 놓은 전일빌딩으로 달려갔다.계엄군이 도청 수위실을 점거하는 것도 보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카빈총으로 탄환 한 클립을 다 쐈는데도, 그리고 내가 특등사수였는데도, 이상하게도 한 방도 맞지 않았다.

그때 등뒤가 시원한 것 같아 돌아보니, 김영철씨가 없었다. 옆방으로 가니까 그가 유리창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그러다가 창너머로 총을 한 차례씩 갈겼다. 김영철씨는 카빈으로 이미 창밖 베란다에 바짝 접근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총을 한 방 탕 쏘고 주저앉고, 또 한 방 탕 쏘고 주저앉고 했다. 그러자 계엄군도 M16을 드르륵 갈기고 숨고, 또 드르륵 갈기고 숨곤 했다.나는 그 방에 들어가 그걸 보면서 순간 다른 생각이 싹 없어지며 「이제 죽는구나」하는 생각만 떠올랐다. 그때 내 눈엔 계엄군이 보였는데, 총이 쏴지질 않았다. 그 계엄군도 나를 봤는데 총을 못 쏘는 것 같았다. 그저 보지 않고 방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갈기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총을 들어 그를 쏘려했다. 그 순간 「항복」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항복! 항복!』밖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총버리고 나와!』나는 총을 버리고 밖으로 나가면서 김영철씨에게 말했다.『영철이형, 항복합시다. 그냥 죽을지도 모르지만 증언이라도 남깁시다』밖에 나가 마루 바닥에 꿇어앉아 코가 땅에 닿도록 엎드려 있었다. 그러면서 또 소리쳤다.『영철이형, 항복히시오!』그 소리를 듣고 김영철씨가 항복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나오자 계엄군이 그 방안에다 사정없이 총을 갈겼다. 한참 그런후에 계엄군이 『항복하고 나와!』하고 소리치니까, 아까는 한 명도 안 보이는 것 같았는데, 열 댓 명이나 손을 들고 나왔다.

■ 南東成(가명·전투경찰·상경)

나는 경북 대구의 경북대학교 정외과 2년을 마치고 전투경찰관으로 입대, 전남 도경 2기동대 소속으로 광주에서 근무하다가 광주사태를 맞게 됐다.광주사태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던 5월 20일 밤 나는 전남도청앞에서 데모대를 막고 있었다. 광주의 밤하늘은 여기저기서 타오르는 불길로 환했다. 「타닥타닥」―불타는 소리와 가끔 「펑!」하면서 치솟는 화염이 전장을 방불케 했다. 우리 전경부대는 도청 앞의 네거리 중 노동청 광주지방 사무소쪽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네 줄로 늘어서 저쪽의 군중들과 대치히고 있었다. 노동청 사무소쪽으로 약 1백m떨어진 곳에 주유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군중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데모대는 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퍼내 차에 불을 질러, 불타는 차들을 우리쪽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트럭, 버스, 승용차, 지프 등 갖가지 차들이 슬금슬금 밀려오다가 불탄 차들이 서로 뒤엉켜 절로 바리케이드가 쳐진 형세였다.

밤 9시쯤 됐을까, 군중 쪽에서 버스가 한 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 버스는 부서지고 불탄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와 우리 전경부대를 향해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피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그 버스를 향해 돌을 집어 던졌다.그때 우리는 최루탄이 거의 떨어져 데모대가 몰려오는 투석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전경들은 양쪽으로 쫙 흩어졌다. 버스는 속도를 늦추며 오른쪽으로 비켜 오른쪽에 있는 담벼락을 긁으면서 스르르 멈추었다.버스쪽으로 달려가 보니 어둠속에서 비명이 새나오고 있었다. 버스와 담벼락사이에 경찰관들이 여러명 끼거나 깔려 뒤엉켜 있는 게 아닌가. 『어머니! 어머니!』하는 신음이 들렸다. 우리는 끌어내려고 팔, 다리를 잡아당겼다. 벌써 축 늘어진 팔, 다리였다.

거의 같은 순간 운전석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오더니 담벼락을 넘고 달아나는 게 보였다. 한 사람은 이미 달아났고 다른 한 사람이 담벼락에 다리를 걸친 순간, 두명의 경찰관들이 달려들어 이 뚱뚱한 사람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 사람이 뒷발길질을 하여 뿌리치고는 달아났다.우리는 플래시로 버스 바퀴를 밝히면서 사상자들을 끌어내 병원으로 옮겼다. 이들 경찰관들은 사고 당시 담벼락 밑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었다. 전열(前列)에서 있었던 젊은 전경대원들은 달려오는 버스를 보고 피해 달아날 수가 있었으나 이들 경찰관들은 앉아 있다가 뒤늦게 버스를 피하기 위해 담벼락에 꼭 붙어 서 있다가 버스와 담 사이에 끼이거나 깔린 것이었다.(편집자 주:이 사고로 함평경찰서 소속 정춘길 경장, 강정웅 순경, 이세홍 순경, 박기웅 순경 등 네 명이 숨졌고 김대민 순경 등 네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버스를 몬 운전사 김갑진, 배용주씨 등 2명은 그 뒤 경찰에 구속, 복역하다 석방됐다. 이들은 군중들이 버스를 탈취, 밀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몰고가다가 연기 등으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차를 세웠는데 그런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

20일 자정인지, 21일 새벽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 밤에는 데모대가 밤새워 시위를 했다. 중학생에서 노인까지, 여대생에서 할머니까지 남녀노소 구별이 없었다. 골목골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은 손에는 몽둥이, 쇠파이프 등이 들려져 있었다. 모두가 악에 바쳐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자가 마이크로 군중들을 격려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광주시민 여러분, 경찰이 던지는 것은 수류탄이 아니고 최루탄입니다. 맞아도 죽지 않으니 전진합시다』도청에서 가까운 충장로로 우리 부대가 진압차 출동했다가 돌아오는 도중, 데모군중의 습격을 받고 우리 몇 명은 고립됐다. 군중들이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왔다. 곁에 있던 동기생 한 놈이 『우린 여기서 죽는다』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렸다. 나는 달아나다가 쓰러졌다. 『여기서 맞아 죽는구나』고 생각하는데 저쪽에서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 1개 소대 병력이 횡대로 우리를 구원하려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군중속으로 돌입했고, 군중은 흩어져 달아났다.

21일 낮 1시쯤이라고 기억한다. 우리는 도청 정문 앞에 포진하고 있었다. 금남로의 전일빌딩 부근에서 군중이 대치중이어서 그 DMZ(?) 와 도청사이는 텅 비어 있었다. 데모 진압은 전방을 계엄군 후방을 전경 및 일반 경찰이 맡는 형식이었다.이때였다. 저 아래 금남로의 군중쪽에서 버스가 한 대 계엄군들이 서 있는 쪽으로 질주해 오는 게 보였다. 유리창은 박살나 있었고, 그 안에는 수십명의 시위자들이 타고 있었다. 몽둥이로 차체외벽을 두드리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차체에는 구호를 쓴 천이 붙어 있었다. 이 버스는 계엄군쪽으로 돌진했다. 두명의 군인들이 차에 들이받혀 나뒹구는 것이 보였다. 이때 한 장교가 권총을 빼들더니 운전사를 향해 사격을 했다. 운전사가 맞았는지 버스는 분수대 근방에서 두 바퀴쯤 돌더니 멈추었다. 도청 앞에서 사격이 시작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한다.

얼마 뒤 군중들이 무장을 하고 장갑차 등을 몰고 도청앞으로 진격해 오자 전경들은 일단 도청안으로피해 들어갔다. 도청안에는 전경, 사복경찰, 계엄군 등 수백명이 뒤섞여 있었다. 계엄군의 지휘관은 중령인 듯했다. 도청안의 세면대에서 나는 계엄군 통신병을 만났다. 병장인 그는 얌전한 인상이었다. 내가 『경상도 군인만 왔다는 게 사실입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싱긋 웃으면서 『당신 무슨 바보같은 소리요?』라고 반문했다. 그는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나는 도청에 모퉁이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몇시쯤 됐을까. 누가 깨웠다. 우리 기동대장 許모경정이 전경들을 집합시키더니 말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일단 해산한다. 각자 집으로 가거나 적당히 피신하라. 사태가 수습이 되면 방송으로 연락할테니 라디오를 잘 듣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광주에 사는 동료전경에게 『날 좀 숨겨달라』고 했다. 그는 『南상경님은 사투리가 거세어서…』하면서 곤란하다고 거절했다.우리는 도청 담을 넘었다. 도청앞은 광장처럼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총성과 함성이 뒤섞여 들려왔다. 나는 비로소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여러 전경들과 함께 나도 어느 가정집에 들어갔다. 주인은 달아난 듯 텅 빈 집이었다. 20, 30명의 전경대원들이 이 집의 옷장을 뒤져 서로 사복으로 갈아 입었다. 여자 털 외투만 입고 그대로 뛰어나가는 사람, 바지만 갈아입고 나가는 이도 있었다. 아무사복이라도 걸쳐야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나 붙들고 『돈 좀 빌어달라』고 했다. 『이 사람아, 이 판국에 돈이 어디 있어…』하면서 거절만 당했다. 집 바깥으로 나와 우리는 기었다. 머리위로는 총탄이 스쳐가고 있었다. 어느 가정집 앞을 기어가는데 대문의 틈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는 여자의 눈과 딱 마주쳤다.

나는 무조건 그 집으로 뛰어들었다. 그 아주머니는 처음엔 거절하다가 내가 『숨겨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라고 애원하자 아이들이 쓰는 방으로 들어가 숨으라고 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 썼다. 그 아주머니는 대구에서 오랫동안 산 적이 있다면서 『데모대가 오면 내 동생이라고 이야기할테니 말을 미리 맞춰놓자』고 했다. 그 집에 네 남매가 있었는데 이불 밑에서 이름들을 외어두었다. 집 주인은 부동산업을 하는 분인데 생활은 넉넉한 것 같았다. 고마운 이분들의 보호를 받아 나는 5월 27일까지 1주일 동안을 무사히 숨어 있을 수 있었다.

이 집 주위는 주택가였는데, 시민들이 도청을 점거한 뒤, 도청 지하실에 다이너마이트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거의가 집을 비우고 피난을 가버렸다. 내가 피신한 집에서도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다 데리고 친척 집으로 가버리고 나와 주인 아저씨만 집을 지켰다.광주사태와 지역감정을 연결시키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경상도사람인 나는 광주시민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지금도 그 집의 주인을 「광주 아버님」이라고 부르면서 찾아 뵙고 있다.

曺喆鉉(47·신부)

5월22일 광주시내가 시민들에 의해 장악된 날 다른 위원 10명과 함께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뽑혔다. 독립운동가 최한영씨가 위원장이 됐고 나는 천주교 대표로 뽑힌 격이었다. 우리는 7개항의 요구사항을 가지고 이날 상무대의 전남지역 계엄분소로 갔다.우리는 7개 요구사항을 제시했다.『계엄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구속학생 석방하라』『계엄군의 진입을 금지하라』『인명·재산피해를 보상하라』『수습된 뒤 보복을 일체 하지말라』등등이 요구사항이었다.이 자리에서 나는 이번 사태의 책임이 계엄군의 진압행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저쪽에선 시민에게 있다고 반론, 말다툼이 오고갔다. 나는 『시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루니 이판사판으로 들고 일어난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계엄군측은 연행 학생들은 주모자를 제외하고 모두 석방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회수해간 1백60자루의 총기를 건네주었다. 그날 아마도 8백여명이 석방됐을 것이다.(편집자 주:22일에 8백48명, 23일에 34명 석방)계엄사측에선 시민들이 먼저 발포하지 않으면 시내진입을 않겠다는 것도 약속했다. 나는 『우리의 약속을 녹음해 두자』고 했으나 『서로 믿자』고 해 녹음은 하지 않았다.23일에 동구 남동 소재 남동 천주교회에서 별도의 수습위원회가 구성됐다.이 모임에도 참석했는데, 홍남순·이기홍·김성용·조아라·이애신·위인백·이영상·조봉환·김천배·장기언씨 등이 참석했다. 종교계 인사들이 주축이 된 이 수습위원회가 도청 수습위보다도 시민들로부터 더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나는 도청에 머물면서 사망자 확인과 무기회수에 나섰다. 민간인 병원들을 다훑고 국군통합병원을 방문, 17구의 민간인 시체를 확인했다.통합병원장은 다친 계엄군 장병들 76명의 치료받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우리는 『헬리콥터로 시민시체를 이곳으로 날랐다고 하는데…』라고 물으니까 병원장은 『그건 유언비어요』라고 했다.광주시 외곽의 요소요소에선 이른바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었다.아세아 자동차 공장 부근, 교도소 부근, 무등산 입구, 백운동, 학동, 고속도로 진입로 부근 등등이 대치점이었다. 이런 곳에는 「시민군」30∼50명씩 카빈으로 무장, 배치되어 있었다. 구성원은 제대병이 많았고, 음식점·구두방 등 영세업체 종업원들도 상당수 있었다. 책임자는 총기를 다룰 줄 알고 각개전투의 원칙정도는 아는 이들이었다.이들을 찾아간 우리 회수반(나, 장세균 목사, 이종기 변호사, 남재희 신부 등)은 무기반납을 사정했다.그들은 상당히 강경했다.『당신들은 우리가 흘린 피를 보상받게 해 줄 수 있나』『그럴 자신은 없다. 그러나 무기를 반납해야 앞으로 희생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그러면 못한다. 죽으면 죽었지』흥분한 「시민군」은 우리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험악한 욕설을 하곤 했으나 별다른 사고는 없었다. 우리는 대치점을 2∼3번씩 방문하여 끈질기게 설득했다. 24일 오전으로 기억하는데 화순쪽으로 통하는 학동의 대치점에 갔더니, 중간지역에 민간인 한 사람이 저쪽 계엄군의 총격을 받고 쓰러져 있었다.

대치선을 건너다가 맞은 것이었다. 그 사람은 죽은 것 같았는데, 시체도 끌어 낼 수가 없었다. 우리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25일 오후까지는 대부분의 대치점에 있던 「시민군」이 무기를 도청에 반납했다. 당시 도청엔 「시민군」지휘부가 있기는 했으나, 대치점의 「시민군」은 이들의 명령을 잘 듣지 않는 독립부대들이었다.끝까지 무기반납을 거절한 곳은 국군통합병원쪽의 「시민군」이었다. 우리 수습위원 10명은 그들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제발 우리 시민들을 살려다오』결국 그들도 설득이 됐는데, 총을 직접 도청까지 들고 와서 반납을 했다. 총을 내어준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도청에 남고 일부는 돌아갔다.「시민군」에 대해서 바깥에선 오해가 많지만 그들은 극한상황에서도 양식을 지켰다. 경찰관과 군인을 한 명씩 잡아와서도 일체의 가혹행위 없이 옷을 갈아 입혀 풀어주기도 했다.

26일 밤 9시까지 있다가 도청을 떠났다. 내가 시무하는 계림동의 성당에서 그날 중요한 축일 미사가 예정돼 있었다. 신도들이 모여서 나를 부르러 왔다. 밤늦게까지 미사를 올렸는데 온통 눈물바다가 됐다.미사를 마치니까 그 동안 밀렸던 허기와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져 몸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나를 깨운 것은 『광주시민여러분!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나와서 같이 싸웁시다』라는 여자의 마이크소리였다. 이 마이크소리는 시내를 한 바퀴 돌고 두 번째로 성당 가까이에 왔다. 그러자 드르륵하는 사격소리가 들리고 마이크소리는 뚝 그쳤다. 벽시계를 보니 새벽 3시30분이었다.나는 며칠 뒤 계엄사에 연행되어 내란 중요임무종사 방조죄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다가 여섯달만에 풀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