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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지 관련기사] 광주 사태와 정웅 사단장『쨍그랑!』『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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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작성일 :2007-05-30 조회2,45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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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사태와 정웅 사단장

『쨍그랑!』『꽝!』

지난 8월27일 새벽 2시쯤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번지 23호 다세대 주택. 2층 침실에서 곤히 잠자던 전씨는 한밤의 정막을 깨뜨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두워야 할 방안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난데없이 집에 불이 난 것이었다.

전씨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안에는 전씨는 혼자였다. 남편은 예감이 좋지 않다며 전날 저녁 집을 비운 터였다. 전씨는 우선 옷가지로 급히 불을 끄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물을 가지러 방밖으로 나왔다. 3층에서 자던 친척들이 내려와 있었다. 3층에서 자던 친척들이 내려와 있었다. 3층에도 화염병으로 베란다 등에 불이 붙었고 돌멩이에 유리창이 많이 깨졌다는 것이다.

전씨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저기 유리창 조각과 돌멩이가 떨어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전씨가 자던 바로 머리맡에 떨어져 있었다. 순간 전씨는 아찔했다.

『따르르릉!』『따르르릉!』

잠시 후 새벽 2시40분쯤. 집안을 정리하던 전씨는 심야의 전화벨 소리에 촉각이 곤두섰다. 조카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에서는 젊은 남자의 거친 음성이 들렸다. 『민주협 부의장이 된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알아라. 오늘은 이 정도지만 앞으로 온 가족을 몰살시키겠다.』

이상은 지난 8월27일 일어난 민추협 부의장 정웅씨 집 화염병 투척 사건의 개요를 정씨의 부인(50)씨의 진술에 따라 재구성해 본 것이다. 전씨는 『이미 지난 7월13일부터 「광주 사태에 관해 입을 열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 전화가 매일 왔다』며 『이미 지난 7월13일부터「광주 사태에 관해 입을 열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 전화가 매일 왔다』며 『이번 일도 그들의 소행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전씨의 집에서는 화염병 5개와 돌멩이 20여 개가 발견됐다고 한다. 한편 경찰은 인근 청담 파출소에 수사 본부를 설치하고 , 사건 발생 5시간 전에 범인들이 정씨의 집을 사전 답사했고, 사건 당시 7명의 청년들이 서성거리는 것을 목격했다는 주민들의 진술을 받았으나, 수사는 별 진전이 없는 상태이다.

80년5월19일 오후6시의 「중대 결단」

사건이 나기 하루 전인 8월26일자 석간 신문들에는 이 집 가장인 정웅씨에 관한 짤막한 기사가 보도됐었다.

「민추협은 업무가 바쁜 민주당사무총장 대신 80년 광주 사태 당시 현지 사단장을 맡고 있다가 해직됐던 정웅 예비역 소장을 부의장에 임명했다.」

정웅. 59세. 전남 순천 출생. 1980년 광주 사태 당시 광주 지역 ○○사단장 80년 육군 소장 예편. 81년 제 사단장. 80년 육군 소장 예편. 81년 제 11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중도 사퇴. 81년부터 6년간 정부 투자 기관인 근로 복지 공사 부사장 역임. 현 민추협 부의장

정웅. 그는 누구인가?

군장성 출신인 그가 어떻게 해서 재야 단체와 연계되었는가? 정가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정치 신인인 그가 일약 야당인 신민당과 민주당 탄생의 모체라 할 수 있는 민주화추진협의회의 부의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광주 사태 당시 그는 현지 사단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후 군에서 왜 전역했는가? 11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의 동기는 무엇이며, 왜 중도에 사퇴했는가? 누가 그의 집에 화염병과 돌을 던졌으며, 그를 협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건이 알려지자 민추협 대변인은 사건 당일인 8월27일 『본회는 정웅 부의장 댁에 화염병과 돌을 던지고 협박 전화를 걸어 위협하고 있는 무법 적 작태에 대해 개탄을 금할 수 없으며 당국에 대해 엄증 항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 8월31일 오후4시 민추협. 정웅씨는 이날 열린 민추협의 의장단 회의에 부의장으로서 처음 참석했다. 사회자로부터 소개를 받은 정씨는 인사말을 통해 『이번 사건은 우연이 아니라 그 동안 계속돼 온 상황의 연속』이라고 주장하고『남은 일생을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기자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이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으며, 민추협 등의 관계자들도 그의 연락처를 모른다고 했다. 그가 전화를 해야 연락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부인 역시 사건 이후 집을 비웠다. 기자는 그와 처음 수 인사를 한 후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그와의 인터뷰는 몇 번의 접촉이 더 있은 후에야 가능했다.

『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국가의 지상 명령이라고 본다. 군은 국방에만 전념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정웅씨는 광주 사태 당시 현지 사단장으로서 그가 한 역할에 대한 질문에 매우 조심스러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에 그때처럼 결심하기가 어려운 적이 없었습니다. 사단장의 직분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사태를 가장 슬기롭게 수습하는 길인지 무척 고민했습니다. 아주 어려운 경우였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가 1980년 5월19일 오후 6시였습니다. 무려 40분간의 기도를 통해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도를 하는 동안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세 가지의 영감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 첫 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 1조 제2항이었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인은 국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둘째는 「한 사람의 생명은 만천하보다 귀하다」는 성경 구절이었다. 그만큼 인간의 생명은 귀중한 것인데, 모든 일은 인명 위주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셋째로 「너 하나 죽음으로써 사태가 원만히 수습될 수 있다」는 영감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정웅 장군은 기도를 마치고 「필사 즉생」필생 즉사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죽을 수 있는 경우를 찾아보았다고 한다. 군법회의에 관한 책을 갖다 놓고, 계엄령 하에서 적용되는 전시 군법을 찾아보았더니 사형에 해당하는 경우는 이적행위, 항명, 전지 이탈 등등이었다. 정 장군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정웅 민추협 부의장이라 지만 그는 아직도 정웅 장군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키 1백63cm 에 몸무게 63kg으로 단단한 체격이다. 뜀틀, 철봉 등 기계체조로 다진 몸매라고 한다. 한참 때는 가슴둘레가 1백3cm까지 된다고 한다. 내년이면 환갑을 맞는 퇴역 장성이자만 그의 걸음걸이는 아직 절도가 있다.

운동을 매우 좋아하지만 광주 사태 이후 골프, 테니스 등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오락을 겸한 운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쁘지 않으면 거의 매일 새벽기도에 갈 정도로 기독교에 신앙이 깊다. 지난 84년에는 장로가 됐다.

육군 호국 사관 학교 출신

정웅씨는 1928년 4월7일 지금은 시로 된 전라남도 순천국 순천면 제전리에서 정종구씨(작고) 슬하의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은 경주. 아버지는 현 고려 대학의 전신인 보성 전문 상과를 졸업하고 은행에서 일하다 해방 후 조흥 은행 순천 지점장을 맡았다. 아버지의 기독교 신앙은 후대에도 이어져 가족이 모두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정씨는 집안이 넉넉히 산 편이어서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지냈다고 한다. 4살 때부터 아버지가 설립한 유치원에 다니다, 집 가까이에 있는 순천남소학교를 거쳐 지금의 중 고등학교 과정인 순천 공립 중학교를 1945년 3월에 졸업했다.

학교를 마친 정씨는 그해 5월 순천 군청에서 서기로 일하다 45년 8월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감에 따라 승진이 빨라져 20살이 되기 전에 지금의 사무관 급이 됐다. 그후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고 호국 군 제도가 신설되자 그는 군수의 권유로 육군 호국 사관 학교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호국 군은 미국의 주 방위군과 같은 것으로 당시 병역법에 「국군은 현역과 호국 군으로 유지한다」고 돼 있어, 현역은 전방에서 정상적인 군 복무를 하고, 호국 군은 1달에 3주는 직장 근무를 하고 , 1주만 군 복무를 하는 것이었다. 정씨는 49년 3월 호국 사관 학교 4기로 입교해 군 생활을 시작했다. 훈련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한 그는 호국 군의 창설 요원이므로 군에 전념하라는 지시에 따라 군청에 사표를 내고 49년 9월 순천 ○연대 군수 장교로 부임했다. 그런데 부임한 지 7개월만에 호국 군이 해산되고 국민 방위군이 창설되었다.

호국 군의 해산으로 다시 군청에 복귀할 것인가를 망설이고 있을 때 6.25가 발발하여 , 정씨는 다시 육군소위로 소집됐다. 전쟁 동안 그는 호남 지구 공비 토벌 전과 저격 능선 등 전방 근무에서 여러 번 생과 사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정씨는 당시 전형적인 전투부대의 중대장으로서 중요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국가관이 여기서 확립됐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단장으로서 「운명의 땅」광주로

휴전 후 소령으로 진급한 정씨는 고등 군사반 과정을 수료하고는 교관으로 남았다. 5.16이 일어난 후에는 육군본부 감찰관 실에서 조사 관으로 활동했다.

중령으로 진급하고 다시 야전군 부대 대 대장으로 나갔다가, 육군대학 교육과정을 이수하고는 다시 교관으로 남았다. 정씨는 교육을 받고는 항상 교육기관의 교관으로 남았다고 한다. 해서 32년간의 군대 생활에서 15년을 교관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후 합동 참모 대학을 이수하고, 전방 사단으로 나가 정보 참모와 작전참모를 했다. 정씨는 , 사단에서 일반 참모를 한번 하기도 힘든데, 한 사단에서 두 개의 참모를 해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68년 대령이 되면서 연대장으로 근무하다 전북대 ROTC단장으로 부임했다. 그후 사단 참모장과 육군본부 작전 참모국을 거쳐, 74년○○사단 부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여기서 그는 국방부로부터 유엔군 참전 기념비 건립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6.25에 참전한 유엔군 16개국 중 미국, 프랑스, 필리핀, 그리스 등 12개국의 기념비를 건립했다.

76년 장군으로 진급한 그는 관구 참모장을 거쳐 ○군사령부 인사참모로 근무하면서 79년의 10.26사건과 12.12사태를 겪었다.

그후 80년 1월1일부로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그는 ○○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돼 「운명의 땅」광주로 부임했다. 계엄령 하에 있던 당시 그는 전라남. 북도 계엄 사령부의 지도하에 있는 작전 부대의 사단장으로서 전라남도 지역을 관할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80년 5월18일부터 9일 밤 9일 낮의 역사를 직접 경험했다.

-광주 사태의 발단은 무엇이었다고 보십니까.

『제가 보기에 광주 사태는 당시 대학생들의 순수한 데모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대학생들이 주장하던 중요한 이슈는「확대 계엄 철폐」「학원 자율 보장」「민주주의 실천」등이었습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당시 대학생들의 순수한, 하나의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엄청난 사태로 확대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지만 흔히 지금 많이 말하는 과잉 진압이 큰 원인이었다고 봅니다.』

-광주 사태 당시의 심경은 어땠습니까?

『내 평생에 그렇게 어려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 심정을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군 지휘관으로서 그런 어려운 입장에 놓이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입니다. 상대가 적군이라면, 부대와 함께 싸워 적군을 패퇴시키거나 아니면 내가 전사하게 되는 것은 군의 사명이요 본분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대는 적이 아니라 광주 시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련과 연단을 주시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길인가 알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그 당시 일을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흐릅니다.』

5.18당시 발포 명령을 거부(?)

-참모 진과도 상의를 했습니까?

『결심을 다 하고 나서 참모, 지휘관들을 모아 차를 마시며 개별적으로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중 80%정도는 나의 결론과 같았고 20%정도는 조금 모호한 견해였습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에 차를 한 잔씩 더 마시면서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결론은 처음과 비슷했습니다. 물론 군에서의 결정은 지휘관이 내리는 것이므로 그들의 의견이 나와 달랐더라도 나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현지 사단장으로 사태에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나는 대한민국 헌법이 당시 사단장에게 위임한 권한으로,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광주 시민의 생명과 재산, 크게는 국가와 민족의 안위를 위하여 사단장으로서의 할 바를 다했다고 명백히 얘기할 수 있습니다.』

-당시 광주에 있던 사람들은 정 장군이 시위 진압에 있어서 온건한 방법을 택했으며, 또 발포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 장군이 말하는 어려운 결단이란 발포 명령에 항명했다는 뜻입니까.

『언론이나 기타 많은 사람들이 내게서 관심 있게 듣고자 하는 사항의 하나가 광주 사태에 관한 얘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광주 사태에 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은 군사기밀에 속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군복을 벗었지만, 31년 동안 군의 기밀을 취급 해 왔던 군의 간성으로서 군사기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광주 사태를 목격했다는 박 모씨(38)는 『광주 사태 때 광주 시민들이 정 장군의 향토 사단 병력에는 빵, 음료수 등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공수부대는 얼룩무늬 군복을 , 향토 사단은 초록빛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향토 사단 병력은 시민들을 과잉 진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 향토 사단마저 발포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민추협도 성명을 통해 『정웅 부의장은 5.18당시 광주 지역 현지 사단장으로서 발포 명령을 거부했으며, 그로 인해 예편되어 제 11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했으나 협박에 의해 강제 사퇴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광주 사태 초기 공수부대를 비 무장한 학생 시민의 시위대를 상대로 투입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군이 광주에서 철수한 뒤인 5월23일 사복 차림의 공수 부 대원들이 트럭을 타고 광주 시내에서 시외로 빠져나가던 중 외곽을 차단하고 있던 계엄군이 이들을 무장 시위대로 오인하여 바추카포를 쏴 9명이 죽고 40여명이 부상당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또 향토 사단 병력도 광주시 외곽의 KBS송신소 부근에서 다른 계엄군의 오인 사격을 받고 사상자를 냈다고 하는데요.

정웅씨의 입장은 확고했다. 군사기밀은 절대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는 국회에 광주 사태 진상 조사 위원회가 구성될 경우는 예외라고 했다. 즉 조사 위원회에서 자신의 증언을 요청한다면, 국가에 대해 선서를 하고 국가의 명령에 의해서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휘관은 예편, 부하는 승진

정웅 장군은 광주 사태가 진압된 후 1980년 6월4일 사단장 직에서 해임되어 육군본부에서 대기하다가 그해 9월30일자로 전역했다.

-사단장 직에서 해임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공식적으로는 뚜렷한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통상 한 지휘관이 근무하던 곳에서 사건이 있으면, 뒷일은 새사람이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는 관례에 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주영복 국방 장관은 1980년 6월16일 출입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책임을 물어 교체했다」고 했습니다(월간 조선85년 7월호). 또 정 장군이 계엄 업무에 비협조적이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당시 내가 계엄 분 소장도 아니었으므로 책임을 물을 일도 없었고 , 시위대에 탈취 당한 총기는 모두 경찰의 관할 책임 하에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또 계엄 업무에 비협조적이었던 일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 시점에서 국가가 어떻게 조치를 하는 것이 옳은 가를 현지 지휘관이 스스로 판단해서 조치한 사항을 , 계엄 업무에 비협조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예편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난 지금까지도 뚜렷한 이유를 모르고 지냅니다. 그때 나는 연령 정년, 계급 정년, 근속 정년의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광주 사태에서 정 장군이 수행한 역할 때문에 예편된 셈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넌센스입니다. 그 엄청난 광주 사태가 있고 나서 군 내부나 대한민국 전체에서 내가 군을 떠났으니까. 나 하나에 대해서만 책임을 추궁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작전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일 계급 특진을 했어요. 그런 그들은 전체적으로 나의 작전 지휘하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잘못했는데, 나의 작전 지휘에 따라 움직인 사람들은 잘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정 장군이 예편 후 제 5공화국이 들어서고, 11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정씨는 11대 국회 의원 선거에 광주시 동. 북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유세를 두 번이나 마친 후 중도에 사퇴했다.

정씨는 11대 국회 의원 선거에 출마한 동기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정씨가 예편된 지 1주일이 지나면서 자신을 「민족 반역자요 작전 불 동조자」라고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다. 정씨 자신은 광주 사태 당시 사단장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소리를 들으니 매우 격분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당시 광주 시민들은 「폭도 또는 난동자」로 규정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오명을 씻어 주는 일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느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은 법률상 국회의원 피선거권에 아무 하자가 없으므로, 광주 사태 당시 작전 지휘를 했던 자신이 국회라도 진출해서 광주 시민들의 억울함을 벗겨 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광주 시민의 오명을 씻기 위해 출마

셋째는 자신은「명예만 먹고 살아온」군인으로서 강제 예편이라는 치욕적인 불명예를 씻고 싶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피해를 입은 광주 지역에서 자신이 광주 사태 당시 취했던 조치가 어떠했는가를 심판 받으려 했다는 것이다.

정씨는 막상 출마하기로 마음을 정했지만 이것저것 걸리는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정당의 공천 문제를 비롯해 선거 자금, 선거 운동 기간 등이 걸렸다는 것이다. 우선 공천을 받기 위해 모 정당의 관계자를 찾아갔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유는 정국을 안정시켜야 할 시점에 정웅씨가 국회에 나가면 도리어 정국이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정씨는 무소속을 택했다.

그리고 이미 다른 사람들은 4,5개 월 전부터 선거 운동을 시작 해 왔다는 데도 1981년 2월 초 에야 광주에 내려갔다. 광주 사태 후 광주를 떠난 지 8개월 만이었다.

정씨는 이때 자신의 지지도에 대한 표본조사를 해보았다고 한다. 공무원, 교사, 대학생, 운전기사 등 각 직종에 10명씩 12개 직종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중 20%정도는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판단됐다는 것이다. 당시 광주시 동 북구의 유권자 23만 명의 20%면 4만6천 표로, 과거의 득표 결과를 볼 때 충분히 당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였고(11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당선된 두 후보는 각각 3만 6천 여표, 2만8천여 표를 얻었다), 게다가 앞으로 후보 등록을 하면 매스콤을 타고, 유세도 있으므로 확실히 승산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조사를 통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 정씨는 서울로 올라왔다가 2월 11일 선거 운동을 위해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우선 친구 12명을 모아 놓고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선거에는 지연, 학연, 혈연, 조직, 자금, 기간 등의 몇 가지 요건이 있는데 정씨는 그런 요건들이 모두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정씨는 어쩔 수 없이 가족과 친지를 위주로 해서 선거 운동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선거 사무장은 고모부, 총무는 부인, 조직 담당은 조카 등등 이런 식이었다.

출마 후 계속되는 후보 사퇴 압력

이렇게 선거 사무소를 구성하면서 정씨는 자주 모처에 불려 다니며 출마 포기를 종용받았다고 한다. 그러고 있을 때 3월 5일부터 일주일간의 입후보 등록 기간이 공고됐다.

정씨는 3월7일 오전 9시5분 선거 사무소가 문을 열자마자 서류를 접수했다고 한다. 서류가 탈취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류도 이를 대비해 3부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거 사무소 측은 다른 사람에게는 서류 제출과 동시에 주던 등록 필증을 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오후 7시쯤 되자 기관에서 불러 출마를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가라고 종용했으나, 정씨는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고 돌아오니 오후 8시 라디오 뉴스에 비로소 입후보 사실이 보도되더라는 것이다.

또 밤이 지나고 나면 정씨의 벽보와 플래카드는 찢어져 버려지고, 아침 일찍 선거 사무실에 나가면 불온 책자와 삐라가 뿌려져 있더라는 것이다.

유세가 시작되기 2,3일쯤 전에는 서울에서 모 기관의 장이 광주로 내려와 정씨를 만나자고 했다고 한다. 정씨는 거절했으나 그는 매우 바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광주에서 하루를 묵은 뒤 다음날 또 만나자고 하더라는 것이다.

정씨는 일이 심상치 않아지는 것을 느끼고 그들에게 제의를 했다고 한다. 현역으로 복귀시켜 주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군이 최고 훈장인 태극 무공 훈장을 수여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수락되면 자신의 불명예를 씻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후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유세는 언제부터 했습니까.

『첫 유세가 3월14일 서석 초등학교에서 열렸습니다. 4천 명 정도가 모였는데, 내 차례는 12명의 후보 중 아홉 번째였습니다. 그래서 앞의 후보들의 유세가 끝나면 청중이 다 가 버리지나 않을까 무척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청중은 오히려 더 늘어 있었습니다. 내가 30분 간의 유세를 마치고 내려오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 나왔습니다.

다음날 있었던 유세도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거 참모들을 모아 놓고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선거는 이 정도로 충분히 승산이 있는데, 나에 대해 제재가 가해질 것 같으니 이 시간부터 잠적하겠다」고 했습니다. 아직 두 번의 유세가 더 남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참모들이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광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출마했다는 입후보자가 그처럼 뱃심이 약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원칙론에 내가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납치되어 강제로 후보자 사퇴해

-그런데 왜 중도에 입후보를 사퇴하셨습니까.

『두 차례의 유세를 마치고 난 다음날인 3월16일 오전 9시쯤 서울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평소 존경하던 군의 선배 되는 이가 급한 일이니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오전 10시 광주 비행장에서 그를 만났더니 입후보를 사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떠나 보내고 나와 보니 타고 온 자동차와 운전사가 없었습니다.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두 사람이 양쪽 겨드랑이를 끼고는 강제로 다른 차에 태웠습니다.』

그는 모처로 끌려가 폭행을 당한 뒤 사퇴 서에 날인할 것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부인에게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있기 전 정씨는 부인에게 수상한 상황이 벌어지면 적절히 대처하라고 일러두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 그가 전화로 도장을 가져오라고 했을 부인도 대강 눈치는 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인이 도장을 가져오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 사퇴 서에 도장을 찍었습니까.

『나도 그것이 의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처에게 물어 보니 자기도 깜빡 속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전화를 한지 30분쯤 지나 전속부관이라고 밝힌 사람으로부터 「서울에서 온 분」이 정 장군과 함께 골프를 치고 있는데 부인에게도 위로의 말을 하겠다고 오라고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처는 「그분」이 군에서부터 나를 아끼고 이끌어 주었으니 어려운 처지를 얘기하면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해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속부관이라는 사람과 차를 타고 가는 도중 이상한 느낌이 들어 운전사에게 숙소에 잠시 들렀다 가자고 하자 전속부관이라는 사람이 처의 옆구리에 권총을 들이대더라는 것입니다.』

사퇴 서에 도장을 찍은 정씨는 그 길로 선거 사무소로 가 결국 사퇴 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는 광주 일보 사로 가 사퇴 성명을 발표하고는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는 것이다.

서울로 올라온 정씨는 교회를 다니며 조용히 지냈는데 3개월쯤 지나면서부터 일자리를 제의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건설 협회의 감사 자리였으나 그가 거절하자, 이번에는 증권거래소 감사, 그 다음에는 국민 투자 신탁 이사 자리를 제의 받았다는 것이다. 그후 광주에서 올라온 지 5개월쯤 지난 81년 8월에는 근로 복지 공사 부사장 자리를 제외 받아 , 놀고 지낸 지도 오래됐고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그후 정씨는 지난 8월7일 6년간의 근로 복지 공사 부 사장 직을 퇴임했다. 그리고 8월26일 민추협 부의장에 임명 됐다. 바로 그 다음날 새벽 정씨의 집에 괴한들이 화염병과 돌을 던진 사건이 일어났다. 정씨는 그날 집에 없었다.

전날 민추협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고는 예감이 이상해서 밖에 나가서 잤다는 것이다. 정씨와 가족들은 그날 이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민추협 부의장은 김대중씨 추천

-누구의 소행인 것 같습니까?

『협박 범들이 통상 사용하는 언어가 순수한 민간 생활을 하는 일반인들이 쓰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수류탄을 터뜨리겠다」느니 「총구멍을 내주겠다」느니 합니다. 민추협의 조사단은 정치 테러로 보고 있습니다.』

-정부의장께서는 동교동계의 조직인 헌정민권회의 지도 위원이기도 합니다. 동교동과는 언제부터 관계를 맺게 됐습니까.

『김대중 선생이 미국에 있을 때 1천회 이상의 강연, 세미나를 했는데, 그때 나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나는 지난 71년 대통령 선거 때 그분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았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지난 8월7일 근로 복지 공사를 그만둔 뒤 김대중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반갑게 맞으며 11대 선거에서 중도 사퇴한 얘기 등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모든 오해가 풀렸다. 면서 민추협 부의장 자리를 권하셨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정치적 들어섰는데 정치에 대한 소신은 무엇입니까.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다만 시대는 올바른 정치를 바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정치에는 신의가 있어야 합니다. 약속을 지키는 정치,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면서 민주화를 확고하게 실현시키는 정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12대 국회에는 왜 출마하지 않았습니까.

『기본적으로 11대 때와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정황에는 초년생이므로 민추협, 민권 회 등에서 많이 배울 생각입니다. 민주당에 들어갈 기회가 있을지 아직 모르지만 정당 활동이 어떤 것인 가도 배우고 싶습니다.

앞으로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등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선거에 들어가기 전에 무엇을 준비하고 , 어떻게 선거전을 치러야 하는지도 배우면서 활동해 나갈 생각입니다.』

-13대 국회에는 광주에서 출마할 것입니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한 단계가 아닙니다. 나는 이제 처음 정치에 받을 들여 놓았을 뿐 아니라 지금은 대통령 후보를 내세워 총 역량을 결집시키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정씨는 11대에는 광주시 동, 북구에서 출마했었다. 광주시의 현역 국회의원은 동, 북구 출신의 민정당 의원과 민주당 위원, 서구 출신의 민정당 의원 등이다. 서구의 경우 신민당 출신의 의원이 타계하여 현재 공석 중이다.

-정가에서는 9월 위기설이니 10월 위기설이니 하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군이 나서리라고 보십니까.

『나는 일생을 군에게 몸바쳐 온 사람으로서 군을 사랑합니다. 국민은 우리 군을 신뢰합니다. 군의 구성 요원들은 매우 우수하며 군의 판단력은 빠릅니다.

따라서 지난날의 5.16, 5,17을 겪은 군은 국민이 군에 대해 바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봅니다』

정웅 민추협 부의장은 지난 9월8일 김대중씨를 수행하여 6년 반만에 광주를 다녀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대전, 인천 등지를 다니는 등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에게는 「닳고닳은」정치인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역으로 「세련된 」정치인의 능란함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정치 초년생인 그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어떻게 설정해 나갈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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