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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3 절 항쟁지도부의 탄생과 활동 (25일 22:00 - 26일 밤) 새로 구성된 항쟁지도부는 그 명칭을 수습대책위원회에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바꾸고 무장투쟁을 준비해 가는 한편, 시민들의 민원사항 등을 처리하기 위해 행정체계를 정립해 갔다. 아침 일찍부터 각 부서별로 업무를 분담하여 시민생활 정상화에 노력했으며, 기동타격대로 재조직된 무장병력은 시내순찰과 계엄군의 동태 파악, 치안유지 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농성동 한전 앞까지 진입했다는 소식이 도청 상황실에 보고되자 전시민군에…

  • 제 2 절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23일 - 25일 오후)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23일 오후부터 매일 오후 2시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열었다. 노동자, 시민, 학생, 가정주부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분수대 위로 올라가 계엄군의 만행을 성토하고 앞으로의 수습대책을 토론했다. 또한 그때 파악된 피해상황이 보고되었으며 장례준비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청의 '수습대책위원회'는 시민들의 의사를 수렴하지 못하고 미온적인 태도로 계엄사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일방적인 무기반납만을 주장함에 따라…

  • 제 4 장 해 방 기 간 제 1 절 수습위원회의 구성(21일 20:00 - 22일) 계엄군이 물러가고 도청이 시민군의 손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밤사이 광주시 전역에 전해졌다. 흥분과 감격에 젖어 이른 아침부터 도청으로 몰려든 시민들은 속속 발표되는 사망자 숫자와 처참하게 일그러진 시체들을 보며 계엄군의 잔학상에 치를 떨었고 앞으로의 상황변화를 예의주시하며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가졌다. 시민들은 자체치안 확보와 질서확립을 위해 스스로 거리를 청소하고 경계근무를 섰다. 해방기간 광주에서는 큰 안전사고 없이 생활물자를 나누어 …

  • 제 2 절 계엄군의 퇴각(17:00 - 20:00) 계엄군은 22일로 예정되었던 철수작전을 하루 앞당겨 감행하게 된다. 전남대 내에 주둔해 있던 3공수는 오후 2시경 철수명령을 하달받고 교도소로 이동했으며, 도청에서 시민군과 교전중이던 35대대와 11여단은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 길목의 주남부락으로 철수했다. 시외곽지역으로 철수한 계엄군을 27일 충정작전에 투입되기까지 광주 외곽도로 차단 및 봉쇄 임무를 수행한다. 계엄군의 퇴각을 모르고 있던 시민들은 뒤늦게야 총소리가 멈춘 사실을 깨닫고 총을 쏘며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

  • 제 3 장 무 장 봉 기 제 1 절 무장시민군의 등장 (21일 오후 13:00 - 17:00) 화순, 해남, 나주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한 시위대는 지역주민들에게 광주의 참상을 알리고 지서, 경찰서, 군부대 등을 털어 다량의 총기를 탈취해 돌아왔다. 카빈, M1 소총, 탄약뿐만 아니라 LMG와 TNT도 시민들의 손에 들어왔다. 이 무기들이 오후 3시경부터 시민들에게 지급되어 총과 실탄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등장, 싸움은 이제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으로 전개된다. 시민군은 자신들의 손으로 광주를 지키기 위해 …

  • 제 2 절 집단발포 (21일 12:00 - 13:00) 12시까지 퇴각하겠다던 계엄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분노한 시민들은 차량을 앞세우고 한 발 한 발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장갑차 한 대가 전속력으로 시위대를 앞질러 분수대를 돌아 질주, 전남대 쪽으로 빠져나갔고, 트럭에 실은 기름통을 불질러 밀어붙이는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하자 전일빌딩으로 가로질러 포진해 있던 공수들이 분수대까지 밀려났다. 시민들이 이렇게 서서히 계엄군을 도청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귀를 찢는 총소리가 들렸다. 시민들은 건물벽과 골목으…

  • 제 2 장 계엄군의 발포 제 1 절 차량탈취(21일 오전) 광주역에서 옮겨온 시위대와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시민들로 금남로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많은 희생자를 냈던 지난밤의 충돌로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가 장갑차와 군용트럭 등 많은 차량을 끌고 왔다. 이렇게 동원된 차들은 외곽지역을 돌며 시민들을 중심가로 수송해 오기도 하고, 시외로 진출해 광주의 소식을 알리는 등 기동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차량시위가 전개된다. 시위소식은 더욱 빠르게 퍼져나갔고 시민들 …

  • 제 5 절 민주기사들의 봉기(20일 18:00 - 21일 아침) 버스와 택시를 세워놓고 젊은이들을 무작정 끌고 가는 과정에서 기사들이 구타, 연행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서 모여 대형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로 몰려왔다. 금남로를 가득 메운 이들의 경적과 헤드라이트 불빛은 시위대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가공할 무력으로 인한 패배감이 강한 연대의식과 자신감으로 전환되어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를 해방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시위대는 도청을 지키는 군경을 …

  • 제 4절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항거 (19일 오후- 20일 오전) 공수부대의 살륙전에 치를 떨던 시민들은 이제는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움에 가담하게 된다. 시민들의 이러한 참여와 투쟁은 학생시위에서 민중항쟁으로 질적인 변화를 함과 동시에 지금까지보다 훨씬 치열하고 공세적인 국면으로 상황이 변화된다. 개머리판과 대검을 휘둘러대며 점점 더 포악해지는 공수부대에 맞서 일부 고등학생까지 합세한 시위대는 비가 오는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한 싸움을 계속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뒤처진 공…

  • 제 3 절 일시적 소강상태 (19일 오전) 분노와 공포의 밤을 지새운 시민들은 시내상황을 살피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초.중.고등학교와 관공서, 일반기업체는 정상근무를 계속했으나 시내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했다. 대동고와 중앙여고 등 일부 고등학생들이 교내시위를 주도하게 되고, 오후로 접어들수록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날 오후 시내 중.고등학생들을 귀가조치시켰다. 7공수여단이 11공수여단에 배속되고 31사단 병력을 재배치시키는 등 전열을 정비하고 탱크까지 동원한 공수들의 잔인한 진압에 시위군중은 방화와 투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