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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서로 보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 죽은 자을 향한 산 자의 부끄러움은 고통으로 이렇게 남아 있다 · 부활하라 망월동 이여 민주 자주, 통일을 위해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죽지 않는 것이다. 이 땅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과 자주적 독립을 위해 · 저 묘지를 누가 옮기라 하는가? 한 움큼의 피 뼈 살이 흙이 되어라 했지‥‥‥‥‥아버지 쓰디쓴 독초가 돋아났습니까? .민족 · 민주의 불길이여 반역의 어둠을 불사르라 (대구대, 영장을 받고 어느 학우가 다녀가면서) ·백두 에서 한라 까지 하나 되는 그 날까지…

  • 전민련창립 광주 민중 항쟁 바탕 9년 각고 전국적 대중 조직으로 출범 - 창립 의의와 전망- Ⅰ.민주 변혁 지평의 확대 1989년 1월 21일 '전국 민족 민주 운동 연합'이 창립되었다. '전민련'의 창립은 창립의 배경, 과정에서부터 '전. 민. 련'이라는 명칭의 확정에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 민주 변혁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정치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 민족. 민주 운동의 발전이 전국적 수준의 조직 활동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그간 민족. 민주 운동은 지역적 분산성과 불균등성에 의해 민주 변혁 실천의 …

  •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검찰부 발표 전문 공개/[총구와 권력] (월간조선, 1995. 9

  • 5·18관련 전두환 측 미공개 검찰답변서 단독입수/전두환, 김대중에 직격탄. 양근만외(월간조선, 1995. 11)

  • 역사적인 피고인들의 법정 최후진술,전·노등 16명.최보식(월간조선, 1996.9)

  • 육사11기의 6인 실력자, 천금성(신동아, 1998, 1) 「12· 12사태」의 정리를 위해 「5· 16」과 「5·17」을 일으킨 군부세력들이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두 가지가 다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 내기 위해 구국이염의 차원에서 부득이 군인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그들 나름의 주장이 일치한다는 점과, 둘째로는 거사→군부 장악이 결국에는 정권 장악으로 연결되었다는 결과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공통점이 있…

  • 80년 5월 군의 정치 개입 결정한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 회의록 전문(신동아, 1988. 10) 합동참모본부 정보 국장(최성택) : (정세 분석 현황 설명) 국방 장관(周永福) ; 이제 정보 국장이 국내 정세를 소상히 얘기했습니다. 국기조차 위협되고 있는 현실계서 북괴의 도발을 대비해야 될 이 시점에서 어떤 단안을 내리지 않으면 안될 시기입니다. 오래 기다려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때는 때가 늦게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혼란요인을 배세하기 전에는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어떤 조치를 취하…

  • 20사단 충정 작전보고 국방부 원자료 전문(신동아, 1988. 12) 광주항쟁에 대한 군의 진압과정이 최근 상세히 밝혀졌다. 당시 진압부대로 투입된 육군 보병 제20사단(사단장 박준병 현 민정당 사무총장) 및 이에 배속된 공수여단의 진압작전기록인 「20사단 충정작전 보고」가 국회 광주특위에 공식으로 제출됐는데, 특위의 문서검증반은 육본 중앙문서관린단에 보고된 작전보고서 원본을 검증했다. 이 두 문서는 전반적으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사상자수 등에 많은 차이를 보여 말썽을 빚었다. 육본 문서관리소 원본에는 사살 17명,…

  • 광주와 미국, 45년 9월과 80년 이재의(말) 80년 5월 해방광주는 미국의 '배후조종'에 의해 함락됐다. 그러나 44년 전 미국은 배후조종이 아닌 직접공격으로 광주를 점령했다. 광주를 두 번이나 배신한 미국, 그들은 어떻게 광주시민의 자치에 '해방의 죽음'을 선사했는가. '역사를 살아온' 어느 할머니의 자각 80년 5월 21일 오후. 도청을 중심으로 한 금남로에 에서는 공수부대가 쏜 총탄에 맞아 시민들이 풀썩풀썩 쓰러지고 있었다. M16과 기관총의 사격소리에 시민들의 카빈소총이 불꽃을 튀기면서 교차되었다. 수많은 시…

  • 1947년 개원에서 1989년 폐쇄까지 광주 미문화원 공훈의(월간예향) " 공보사업의 본질적인 방향도 변화를 겪었다. 60년대까지는 대상을 한정하지 않고 모든 계층의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한 계몽활동을 벌였었다. 70년대 들어서는 이른바 중점주의 공보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대학교수, 관공서 고급간부, 문화계 및 언론계 인사등 소위 사회계층에 있는 인사들이 광주미국문화원의 초청대상이 되었다. 미국에서 초청인사가 도착하면 오찬은 사회지도계층 인사들과, 만찬은 소장 엘리트들과 함께 하는 패턴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