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특별시론 전두환 노태우 1심 재판 입체분석 - '5.18 실상'진실규명은 이제부터
본문
특별시론 전두환 노태우 1심 재판 입체분석
'5.18 실상'진실규명은 이제부터
한인섭(서울대 교수.법학)
세기의 재판, 역사적 재판이라 일컬어지던 12 · 12, 5 · 17, 5. 18 1심재판이 종결되었다. 1979년과 1980년, 그 시대의 주역들에 대한 유죄선고는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하고 어두운 시대에 대한단죄이다 한때 「구국의 결단」으로 자화자찬되었던 사건들은 「성공한 쿠데타」로, 끝내는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의 범죄행위로 규정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재판은 한 시대를 심판대에 세운 것이다. 건국 이래 사법부에 부과된 최대의 난제에 대한 1차 관문을 넘어선 것이다.
이 재판정에는 과거의 권력자와 재벌들이 운집했다. 전군지휘관회의에서 , 국무회의에서 , 혹은 전경련 회의에서 그 위세당당했던 인사들을 서초동의 검찰청사와 법원청사에서 대할 수 있었다. 군대와 정치와 경제를 주름잡던 그 인물들을 초라한 복색의 피고인으로 법정에 불러낼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그끗은 국민의 힘이다. 1980년을 온몸으로 체헌하고 증언했던 인사들, 80년대 거리와 감옥을 왕복하며 광야에서 진실을 갈구했던 민주인사들, 1997년 방방곡곡을 뒤흔들었던 학생과 시민들,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은 저항권 행사에 동참했던 시민들,소리 높여 외치지는 못할지라도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치를 분별해내는 국민의식 이 또두가 모여 오늘의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중에서도 5-17내란범들에 맞서 오직 홀로 떨쳐 일어나 마침내 꽃잎처럼 스러져간 빛고을의 영혼들에게 영광의 기념비가 바쳐져야 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어느 나라 역사의 행진이 순탄한 적이 있었으랴, 오늘의 재판도 수많은 우여곡절과 책략의 산물이기도 하다 들이켜보면 지난해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도 역설적으로 국민의 분노를 하나로 모으는 과녁이 되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노태우 측의 서투른 비자금 은닉기술 역시 타오르는 열기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대통령의 「역사바로세우기」도 정치책략의 산물인 측면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이 역사를 바로 세움으로써 득표를 하고자 한 의도였다면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16년 전이, 아니 작년 이맘때만 해도 공소시효 만료일을 단 하루 앞두고 검찰의 기소가 이루어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재판에 이르는 과정은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대로 "섭리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일대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하나의 재판부가 이렇게 큰 사건들을 한꺼번에 다루는 기회는 다시 없을 것이다. 2백28쪽의 판결전문, 96쪽의 판결이유설명문을 만들어내기까지 재판부의 노고가 적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상상하기 어려을 정도로 어려운 사건」이었다는 재판장의 회견에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개인에 대한 개인의 범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복잡한 사건흐름 속에서 증거를 선별하고 법리를 정교화하는 작업의 어려움은 같은 법률가로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법리 중 대다수는 이제껏 법률가들이 주장해왔던 바를 수용한 것이며 시민들의 법정서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재야의 법리가 제도권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판결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과 한계가 지적됨에도,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재판은 아직 항소와 상고심을 기다리고 있어 , 최종판이라 하기엔 이르다. 피고인측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일반 국민들은 상소심에서 보다 많은 진실이 밝혀지고, 피고인들에게 보다 합당한 책임이 추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1심의 기여는 무엇보다 법리의 뼈대를 만들어 세운데 있다. 하지만 진실규명, 그중에서도 5 · 18의 진실규명과 책임자의 책임범위에 대해서는 너무나 미흡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 점에서도 1심 재판은 끝이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판결을 위한 디딤돌로 해석되어야 한다. 더구나 「신군부」로 대표되는 세력들이 만들어낸 어두운 과거의 종합적 청산이라는 숙제는 그야말로 지금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1심재판 법리의 평가, 5 -18 살상행위에 대한 1심판결의 문제와 한계를 토대로 항소심의 과제를 도출해내고자 한다. 아울러 비자금 사건 재판의 의미를 살펴보고, 피고인들에 대한 사면론의 문제점을 분명히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앞으로 이루어내야 할 과거청산의 자제들을 적시함으로써 보다 구
체적인 해결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 재판을 계기로 더이상 권력을 남용하여 자행되는 불법과 부패가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어떤 불법과 비리도 법적 판단을 회피해갈 수 없다는 확고한 교훈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을 되새기면서 .이 재판에서는 12 · 12, 5 · 17과 5 -18, 전두환 등의 비자금 사건, 노태우 등
의 비자금 사건 등 4가지 범죄사실을 다루었다. 앞의 둘이 반란과 내란,내란목적살인 등 헌정을 파괴하교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한 범죄라면, 뒤의 둘은 권력을 이용한 부패와 축재를 범죄로 선언한 것이다.
폭력으로 시작한 권력은 부패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양자의 관련성은 필연적인 것이다 군사독재정권의 양대 무기인 폭력과 부패가 동시에 다루어지는 이 재판은 군사독재정권의 본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절호의 계기가 되고, 그럼으로써 제도와 관행 면에서 철저한 과거청산을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5 · 18과 비자금사건 재판 미흡
판결의 공과를 평가하자면 12 · 12와5 · 17이 훨씬 부각된 반면, 5 · 18 살상행위는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했으며, 1980년의 후속적인 권력정지작업들에 대해서는 사건명 이상의 접근이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자금 사건의 경우 재벌총수와의 관련성 때문인지 그 중요성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느낌이 있다.
김영일 재판장은 「12 · 12가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것이므로 12 · 12 가담자에 대해서는 5 · 18 가담 자보다 무겁게 다루었다』고 말했다. 검찰의 입장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같은 시각은 국민정서와 배치된다. 12 · 12가 군대를 향한 것이고(반란) , 5 · 17이 국가조직에 대한 것이라면(내란) 5 · 18은 국민에 대한 대량살상(내란목적살인, 살인)인 까닭에 5 · 18에 가장 큰 비중이 두어져야 마땅했던 것이다.
재판부의 관점이 바로 이 판결의 성공도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이 대목은 좌시할 수 없다. 피고인들의 군대 국가에 대한 범죄는 충분히 잘 다루어졌으나, 피고인들이 국가권력을 장악 이용하면서 국민에 대해 범죄한 부분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는데, 그 한 원인은 바로 검찰과 재판부의 이러한 시각 때문이다. 그 결과 살상행위에 대한 가해자의 범위가 지극히 좁혀지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피고인 중 일부가 무죄선고를 받는 결과가 빚어졌던 것이다. 정권탈취과정의 불법성보다 시민에 대한 대량학살의 불법성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다. 만일 5 · 18의 대량학살이 없었더라면 피고인들에 대한 처벌의 목소리가 그토록 광범하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을까는, 5 · 16의 경우와 대비해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죽어간 사람들은 망월동에 그토록 많은데, 가해자는 불과 몇명이고 그나마 일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기묘한 판결이 그동안의 고통과 기다림의 나날들을 얼마나 보상해 줄 수 있겠는가.
수사와 공판단계에서 피고인측이 보인 행동은 국민의 동정을 얻어내고, 재판을 정치재판으로 비치게 하기 위한 정치적 연출이었다. 전두환의 골목성명과 낙향, 단식과 법정투쟁, 지연전술, 변호인단의 집단사퇴 전략이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도전으로 인해 공판진행은 상당한 차질을 빛었고 국선변호 인을 선임해야 했으며, 구속만기에 걸려 일부 피고인을 석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공판의 성격을 요약하자면 범죄사안을 정치화하여 , 스스로를 「시대의 희생 양」으로 규정하려는 피고인측과 한때의 정치사안을 범죄화하여 형사처벌하려는 세력의 싸움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법정을 하나의 게임장으로 볼 때 가능한 것이다. 법정에서 양측은 승패를 다투지만, 중요한 것은 승패의 전략보다 우월한 진실과 정의의 목소리이다. 수사와 공판과정에 아무리 흠집을 내도 그들의 범죄가 법적 쟁점이 아니라 정치적 쟁점으로 전환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 그들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보다 적법절차는 훨씬 잘 준수되었으며, 동시대의 다른 재판에서보다 적법절차는 잘 유지되었다. 변호인들의 반대신문을 위한 시간적 여유도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신속한 재판을 위한 집중심리제는 오히려 권장되는 새로운 관행이다. 구치소내의 처우는 다른 재소자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특급이었다. 따라서 재판부의 공판진행이 설사 매끄럽지 못한 점이 있다고 해도, 이는 비난받을 정도는 아니다.
모든 국민의 재판에 적법절차는 엄격히 준수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헌정과 법치를 유린한 집단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이 유린했던 법치주의와 작법절차의 이점을 누림으로써 그들에게 법치주의를 실감케 해야 한다. 비록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남용하려 할 때도, 적법절차의 범위 내에서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본다 만약 본 재판에서 미흡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피고인측에 대한 차별적 처우 때문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형사절차 전반에서 인권보장 수준의 미흡한 때문일 것이다 피고인과 재소자의 처우에 관한 국제기준에 부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2 · 12, 5 · 17 법리 구성은 탁견
이번 판결의 가장 큰 의의는 12 · 12와 5 ·17, 5 · 18을 군사반란과 내란 내란목적 살인으로 법적 성격을 규정지은 데 있다. 먼저 12 · l2는 피고인들이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범죄로 규정되었다. 이같이 「박정희 시 해사건의 혐의를 수사하기 위한 행위」는 문민정부 초기에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정치적으로 규정되었다가, 이제 「군주도권 장악을 위한 반란」이라는 법적 정의를 얻은 셈이다. 판결문에서는 피고인측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으며, 그
를 통해 12 l2를 둘러싼 사실적 논란이 충분히 정리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12 · 12 이전에 합수부가 정승화의 무혐의를 거듭 확인했다는 사실에서 l2 -12 당일 정승화 연행조치와 무력불사조치는 당시 권력의 향방을 쥐고 있었던 군대를 장악하려는 선재공격 이었단는 것이다 정승화 참모총장의 강제연행. 병력동원등과 초병 및 상관살해행위를 통해 이미 『대통령의 국군통수권이나 계엄선포권은 그 권위를 도전받고 파괴』되었다. 그리고 연행 후 무려 10시간 동안 총리공관을 자파 경비병력으로 포위하고 재가를 압박한 결과 얻어진 대통령의 재가행위는 『위법상태가 발생한 이후에 이루어진 승낙으로서 그 승낙에 의하여 피고인의 위법상태가 해소되고 그 행위가 정당화된다고 할 수 없고 판시한다.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행위는 12 · 12와 5 · 17에서 쟁점으로 대두하고 있다.여기서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입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절대권력자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진공상태에 빠진 권력의 잠재적 핵심은 군부였고, 그중에서도 요직을 차지한 하나회 중심의 정치군인들이었다 군부의 지지도, 선거에 의한 국민적 지지도 없는 최규하 대통령의 권한이란 그야말로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즉음과 잠재적 권력경쟁자들 사이에 전혀 경쟁대상으로 꼽힐 수 없었기에 가능했다. 즉 무기력했기에 대통령 이 된 것이다.
권위주의정부에서 민주정부로 이행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최고지도자의 정치적 무기력은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게 마련이다. 군대의 요칙에 두루 포진하고 있던 하나회 세력들이 병력을 동원해 육본의 정규 지휘부를 무너뜨리고 반란상태의 기정사실화를 압박했을 때, 어떤 자파세력도 갖지 아니한 대통령은 이를 사후재가하는 도리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기껏해야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12 12에서처럼 재가를 몇 시간 늦추거나, 5 17에서 「소요배후조종 및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에 대한 체포 조사계획』을 보고하는 전두환에 대해 『그에 대하여는 적법하고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당부하는 정도였다. 즉 대통령의 국군통수권 행사가 결정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단호하게 통수권을 행사한다거나, 민간정부와 국회가 송두리채 유린되는 상황에서 국헌 수호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능력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권력의 향방이 분명해진 시점에 이르자 그가 할 일은 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사후를 보장받는 것 뿐이었던 것이다.
국군통수권을 행사하고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의 직무를 유기하고 내란범들의 행위를 기정사실화함으로써 내란행위를 도와준 대통령의 행위는 내란죄의 공동정범이거나 좋게 봐줘도 내란죄의 방조범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에게 가해진 유무형의 압력이 있었지만 그것이 항거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면 그의 책임이 면해지기는 어렵다. 재가행위가 자유로운 의사에 입각해서 이루어졌다면 그야말로 내란의 공동정범으로 처벌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5 · 17은 군부와 정보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이 민간정부와 국회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집권계획을 구체화하는 단계에 해당한다. 빈번한 상호모임과 「시국수습방안」 등에서 보이는 내란의 예비음모 단계, 그 실행행위인 학생 등 체포, 국무회의장 병력배치, 비상계엄 전국확대선포, 계엄군 배치, 계엄포고 10호 발령, 국회의원 등 체포와 구속, 신민당총재 가택연금, 국회의사당 점거 및 봉쇄, 광주시위의 초기진압.자위권 발동과 계엄군의 발포, 광주 재진입작전의 실행,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소요배후조종자 기소와 재판, 언론기관 통폐합, 정치활동 규제조치, 대법원판사 사직 강요 등이 숨막히게 전개되었다.
질식할 듯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행한 이같은 비상조치들은 모두 내란죄의 포괄적 일죄 (一罪)로 규정 되 었다.변호인단에 따르면 내란죄는 폭동행위와 함께 즉시 기수(旣遂)에 이르러 종료하는 즉시범이고, 이후 비
상계엄의 유지는 범죄 결과가 현존하고 있는 상태범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개개의 폭동행위는 기수에 이름과 동시에 종료된 것이어서 이미 공소시효(범죄가 종료된 지 15년)를넘겼다는 것이다. 반면 검찰측은 비상계엄 선포와 유지행위를 모두 내란죄로 보고, 그러한 상황에서 개개의 폭동행위를 포괄적으로 묶어 하나의 내란죄로 기소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법리를 채택하면서,개개의 폭동행위 간 관계를 접속범으로 이론화했다. 그 근거로는 개개의 행위가 국가존립의 기초 자체 또는 국헌적 법질서를 해치는 점에서 단일하고, 국헌문란의 목적과 폭동이라는 범의(犯意)의 계속성이 있으므로, 소위 접속범으로서 모든 행위가 포괄되어 내란죄라는 구성요건을 충족하는 것이며, 폭동행위가 최후로 종료하였다고 볼 수 있는 비상계엄 해제일 (1981.1.24)을 내란의 종료시점으로 잡 은 것이다. 그에 따르면 내란의 기수와 종료시기를 구분하고, 종료시점부터 공소시효가 진행된다는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따라 본 사건의 공소시효가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필자는 바로 이러한 법리를 「5 · 18, 법적 책임과 역사적 책임』(박은정과 공편,이대출판부)에서 제기한 바 있다. 이 판결은 그같은 법리를 더욱 정교화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개개 행위를 접속범의 이론으로 연결하기 보다는 연속범으로 이론화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적법한 외관 뒤 불법한 본질
80년 내란행위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권력을 이용해 때로는 적법한 절차를 통해, 때로는 불법한 절차를 통해 내란목적을 수행했다는 데 있다. 이 점은 군대와 국가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된 군내 소장층에 의해 주도된 5 16과 대비된다. 5 · 16쿠데타의 경우 그 내란성과 범죄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데 비해, 5 · 17세력은 자신들의 행위를 국가활동의 일환으로 은폐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l2 · 12를 통해 군권을 찬탈했고, 당시의 무기력한 최규하 · 신현확 내각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종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 12에서 정승화 연행에 대해 최대통령의 재가를 강요하고, 5 · 17과 이후의 일련의 행위를 법 제화하고, 국보위의 불법성을 치유하기 위해 5공헌법 부칙에 『국보위가 제정한 법률과 이에 따라 행하여진 재판 및 기타 처분은 이 헌법 기타의 이유로 제소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초법규적 조항까지 둔 것은 장차 문제화될 경우를 대비해 적법상의 안전판을 마련해 두려한 용의주도한 전략이었다. 물론 아무리 법치의 외피(外皮)로 치장하더라도 살상과 고문, 인권유린을 무수히 자행해야 했던 그들의 원죄는 부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이와 관련해 광주민중항쟁은 자신의 패배를 통해 군부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정권창출과 유지를 위해 폭력
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군사정권의 명을 재촉했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본 판결에서 가장 주목되는 두분은 바로 그러한 적법성의 가면 뒤에 있는 불법의 본질을 명확히 인정한 점이다. 예컨대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재가하는 형식을 밟은 것은 『외관상으로는 당시 헌법과 법률이 정한 테두리 내에서 대통령의 적법한 권리행사를 바라는 건의의 형식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피고인들에게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 적법한 외관 뒤에 가려져 있는 불법한 본질을 명쾌하게 선언했다.
비상계엄의 전극확대도 마찬가지다. 피고인들은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선포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적법하게 이루어진 대통령의 통치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무회의 자체가 집총한 병력의 위력하에 있었고, 중앙청의 전화선도 절단하고, 공무원들이 퇴근도 못하도록 연금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행위였던 만큼 그 자체가 불법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국무회의의 의결과 대통령의 재가가 있지 않았느냐고 피고인들은 주장할 수 있으며, 장차 시빗거리를 피하기 위해 이러한 형식적 절차를 밟아간 측면도 있다. 그에 대해 재판부는 『국헌문란의 목적을 가진 피고인들이 그 목적 달성을 위하여, 헌법상 대통령에게 부여되어 있는 국가긴급권의 발동행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일단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이루어지게 한 다음, 그 전국비상계엄의 상황을 이용하여 그 후에 일부 합법적인 절차를 가장하거나 또는 불법적인 절차를 통하여』 국헌문란의 폭동행위를 한 것으로 파악했다. 합법
적 절차와 불법적 절차는 형식적으로는 달리 평가될 수 있을지라도, 내란이라는 전반적 범죄계획 속에서 통일적으로 파악할 때 총괄적으로 범죄행위로 평가된다는 해석은 이 판결의 「백미」라 할 만하다
5 · 18관련자 모두 책임 물어야
5 17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계엄포고령 10호 공포 이후 전두환 등은 정권찬탈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했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받아야 할 시민들의 저항』을 조기진압함으로써 국면의 주도권을 확고히 장악하고자했다. 피고인들은 광주에서의 시위진압과 시민들에 대한 살상행위에 대해 『단지 조속한 시위진압을 목적으로 한 것일 뿐, 국가기본조직의 파괴라는 목적과는 직접 관련성이 없으므로」 내란죄나 내란목적살인 죄로 법규를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그에 대해 재판부는 「광주에서 시위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저항을 제거함으로써 전체적인 국헌문란계획을 달성하겠다는 목적 아래 그 목적 달성의 직접적인 수단』으로 강경진압 및 살해행위를 하였다고 판시했다.
판결의 취지는 기본적으로 타당하다.하지만 이 판결은 시민 살상에 대한 책임소재와 범위를 정확히 가려내는데 근본적 한계를 보이고 있다. 판결에 따르면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을 내란목적살인의 공동정범으로 인정하면서, 1980년 5월21일20:30경에 육본 정식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자위권 발동지시를 살인행위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한 지시에 의하여 『시위진압현장의 계엄군들로 하여금 위 자위권 발동지시를... 사실상의 발포명령으로 받아들여서 광주외곽도로 봉쇄작전 및 광주 재진입작전시 민가에 대한 무차별사격,... 시위대 탑승차량에 대하여 정차요구도 하지 않은 채 발포하는 등의 살상행위를 자행하였으므로』 자위권발동지시는 실질적으로 발포명령이었다고 볼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자위권 발동지시 이후의 광주외곽에서의 살인행위, 광주재진입작전시의 민가에 대한 무차별사격에 대한 책임만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우선 광주에서의 살상행위를 보다 세분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1980년5월18일에서 5월21일 13:00경 도청 앞 대학살에 이르는 기간이다. 이 시기는 공수여단이 비무장 시위대와 일반 시민에 대해 무차별의 유혈살상을 자행하였고, 그러한 진압에 견디다 못한 시민들이 항쟁으로 떨쳐 일어나 맞서게 된 시기이다.
신군부는 애초부터 자신들의 집권계획을 저지하는 어떤 움직임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최정예의 공수여단을 파견 증파해, 처음부터 공세적 섬멸적 타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잔학한 진압과 타격의 결과 광주시민들을 초주검으로 만들고 엄청난 인명살상을 빚었다. 그에 대해 시민들이 엄청난 규모로 떨쳐 일어나고 차량시위 등으로 맞서게 되었는데, 위기를 느낀 현지 지휘관들이 철수를 건의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일체의 후퇴명령 없이 도청분수대 앞에서 실탄을 분배하고 일제사격을 가하기에 이른 것이다.
공수여단의 현장 지휘관과 병사들은 비무장시위대와 일반시민들에게 직접 살상을 가한 자로서 도저히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상부에서 직접 자위권발동 지시도 없는 상태에서의 이러한 행위는 당연히 처벌되어야 하며, 비무장의 학생과 시민에 대해 살상을 자행한 점에서 정당방위나 사실상 자위권 행사의 주장도 나올 여지가 없다. 도청에서의 발포 자체는 시민들의 차량시위에 따른 위기적 대응이라 볼수도 있지만, 이는 스스로 도발한 침해에 대한 반격이기에 정당방위적 상황이 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공수여단 파견을 결정한 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공수여단을 증파하는 결정에 관여한 자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살상행위의 진행상황에 대해 보안사 측은 완벽하게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고, 공수여단이 지휘선을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한 증거도 없다. 증파족 결정한 것은 그때까지 자행된 유혈진압을 가일층 수행하라는 의사로 볼 수밖에 없다. 한 자리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지 않았더라도, 미리부터 가혹한 충정훈련을 통해 섬멸적 타격 위주의 시위진압을 훈련시킨 부대를 광주에 파견했고, 그들의 손에 진압봉과 착검한 소총을 쥐어준 신군부의 핵심지휘부가 살상에 대한 직접책임이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모든 시민들이 총궐기하도록 만든 초반기의 잔혹한 진압과 살상행위의 주모자, 오늘날까지 5 · 18이라고 할 때 누구나 떠올리는 그 처참한 주검들을 만들어낸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책임소재가 빠져버린 것이 이 판결의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자위권 발동설의 허구성
이 시기를 증언하는 많은 증거가 있지만, 최근 변주나 교수(전북대)의 당시의 총상 진단서와 탄흔 감정은 대단히 주목되는 새 증거라 할 수 있다 변교수의 감정에 따르면, 『80년 당시 진단서를 분석해본 결과 53% 이상에서 시위대가 카빈소총을 소지하기 전인 80년 5월21일 오후 1시30분 이전에 총사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총사 입 ·출구 역시 후면에서 정면으로가 32.4%, 측면에서 측면으로가 26.5%로 나타났다. 총상해자들의 연령분포를 보면 1세에서 9세가6.5%, 10세에서 19세가 8.5%, 여자가 38%였으며, 외상부위 역시 앞면 머리 그리고 척추가 50% 이상이었고, 파편보유 위치 역시 머리 목 가슴 등이 25% 이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가해자들이 주장하는 자위권 발동설은 허구다 즉 자위권보유 천명 이전에 발포가 시작됐고, 그것도 자위적 차원이 아니라 공격적 살상행위의 측면에서 상체를 향하여 정면으로 발포한 것이었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연령과 성별을 살펴볼 때 그 발포가 대단히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 국면은 공수여단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면서 외곽 봉쇄를 단행한 이후의 살인행위이다. 그에 대해서는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의 내란목적살인을 인정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무장한 시민군과 직접 교전하지 않는 상태에서 일종의 양민학살적 성격의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저수지에서 미역감던 9세의 아동이 총에 맞아 죽은 사건, 도망치다 벗겨진 고무신을 줍는 고사리 손에 총을 갈긴 사건들이 이 시기에 자행되었다 그에 대해서는 전두환 등의 책임은 물론이지만, 직접 이러한 행위를 자행한 병사 및 그 지휘관의 책임을 묻지 않고는 안된다.
마지막 국면은 광주재진입작전(상무충정작전)을 전후한 살인행위이다 이 경우에도 계엄군의 광주시위 진압행위가 『국가기관의 경찰행위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므로 적법한 행위』라든가, 『시위대의 공격에 대한 계엄군의 방어행위로 인한 살상행위는 계엄군의 입장에서 보아 정당방위」라든가 하는 피고인측의 주장을 용납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판결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당연히 배척했다. 그러면서도 판결문에서는 계엄군들이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피고인들이 명령계통을 통하여 하달한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진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진압 및 살상행위는「적법행위에 대한 기대가능성이 없어서(즉 위 명령이 위법하다고 생각하여 그 수행을 거부하기를 위 계엄 군들에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책임이 조각된다고 할것』,으로 판시했다. 그 근거로서 ▲당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선포되어 있었고 ▲계엄군들이 상명하복관계가 철저한 공수여단 소속인 점 ▲시민들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고 많은 시민들이 총기를 소지하게 된 상황인 점을 들었다.
이 부분 결론에 대해서는 판결과 견해를 같이 하지만 그 논거는 다소 수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비상계엄 하에서 항명하는 것은 1년이상 7년이하의 징역에 처해지며 , 비상계엄하 군사재판은 단심제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계엄하에서 개별 군인들의 자율적 판단과 행동은 극도로 억압될 것이다. 공수여단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
다. 그러나 그 명령이 시민에 대한 살상을 포함한 명령이라면 무조건 적법행위의 기대가능성이 없다고 볼 일이 아니다. 아무리 상명하복이 철저한 부대라고 해도 위법명령에 복종하는 것만으로 면책사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이제껏 확고한 판례의 경향이다. 비록 무장하고 도청을 점거했다고는 하나 병력과 훈련 정도, 화력 면에서 훨씬 열세인 시민군에 대해 적에 대한 폭도진압식 군사작전을 감행한 행위를 그대로 면책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같은 시민으로서 자신의 행위가 과연 옳은지에 대한 적절한 「양심의 긴장」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다 형법 제16조는 『자기의 행위가 법령에 의해 죄가 되지 아니하는 것으로 오인(誤認)한 행위는 그 오인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 한하여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살인행위,그 중에서도 시민에 대한 살인행위를 단지 어쩔 1수 없는 명령이었다고 해서 적법한 것으로 오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양심의 긴장이나 고뇌의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살상을 한 직후 군가를 소리높여 부르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본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전율감을 금할 수 없다.
유엔인권위원회의 45차 회의 보고서에도 중대한 인권침해범죄의 경우 『그가 정부나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하급자의 형사책임을 면제시키거나 법률적인 감경사유를 구성하지 못한다. 다만 양형에서 참작사유가 될 뿐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음을 보아도 명령 복종을 이유로 면책하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사병들의 행위를 처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대불가능성의 논리를 일반적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이 그토록 잔학한 행위를 자행했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내몰았는지 하는 점이 낱낱이 규명되어야 한다.
병사들과 하급장교들이 직면한 특수한 상황(예컨대 제도적 ·상황적 압력, 위협과 강제, 훈련과정과 내용, 그들에게 주입된 왜곡된 지식 )을 규명해내고. 그러한 상황하에서 주어진 명령에 따라 범죄한 자를 형법 제16조의 정당한 이유」에 해당하는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어느 정도의 재량권이 있었던 수준의 지휘관은 물론이고 같은 사병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잔혹한 인권침해행위를 한 자의 책임은 반드시 추궁되어야 한다
다시 유엔인권위 48차 회의 보고서는 중대한 인권침해범죄의 경우 「그 행위가 하급자에 의해 이루어졌을 경우 상급자는 범행이 행하여졌거나 행하여질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 그 범행을 예방·제지하는 데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모든 하급자의 행위가 상급자의 통제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면 상급자의 책임은 당연하다. 상명하복관계에 의해 엄격히 규율되는 군대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검찰의 가장 큰 잘못은 바로 이러한 사태전개에 대한 종합적 통찰 위에 시민에 대한 진압과 살상행위의 법적 성격을 엄밀히 가려내지 못한 데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이 아니라 전두환을 비롯한 5인의 내란목적 살인을 입증하는데 필요한 사실조사만 하였고, 자위권 발동지시 이전의 과잉진압과 살상에 대한 기소를 하지 못함으
로써 시민살상의 전모가 온전히 드러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전두환 등 ,5인에 대해서는 이 부분 역시 내란목적살인의 포괄적 일죄(一罪)에 포항되므로, 항소심에서 이 부분에 대한 본격적인 소추가 있어야 한다
내란목적살인의 성격과 입증방법
검찰은 내란목적살인의 죄책으로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 황영시 정호용 등 5인만 기소했다. 그 중에서 1심 재판부는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황영시 정호용에 대해서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 오직 증거재판주의에 따른 법리에 충실하고자 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국민감정을 설득하는 데는 부족하다는 중론이. 있는 만큼, 과연 이 부분이 증거와 법리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피고인 전두환은 자신이 내란목적살인에 해당되지 않는 근거로 ▲시위진압업무는 계엄사
령부의 고유권한인데 자신은 그와 무관한 보안사령관 직에 있었고 ▲1980년 5월21일 16:35경 국방부장관실에서 모인 자위권발동에 관한 회의에 참여한적도 없음을 들었다
이희성은 위 회의에 참여해 경고적 성격의 담화문 초안을 논의하여 이를 생중계를 통해 발표한 적은 있어도 자위권발동을 결정하여 사실상 발포명령을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주영복은 자위권발동보유 천명에만 관여했을 뿐 계엄사령관의 자위권 발동지시에는 전혀 관여한 적이 없음을 들어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 황영시는 자신이 내란목적살인을 사전에 공모한 적이 없고,자위권 발동결정이나 광주재진입작전 결정에 관여한 바 없으며, 이미 결정된 상무충정작전을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전달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정호용도 황영시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자신은 오직 공수여단의 모체부대장으로서 그의 임무인 행정 · 군수지원 등의 임무 및 작전통제부대장에 대한 지휘조언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광주에 자주 내려갔을 뿐 공수여단에 대한 실질적인 작전지휘를 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광주의 대량학살은 오직 현지지휘관들만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현지 지휘관들은 거의 재량권도 없이 명령대로 행동했다 그리고 그들이 상부와 명령을 잘못 해석했다고 볼 아무런 근거가 없다 살상의 규모가 너무 컸고 10여일에 걸친 살상이 이루어졌는데, 그 살상에 대해 책임진 현지지휘관도 없다 이같이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기묘한 논리는 타당한가.
분명히 명시적인 『발포」명령은 없었다 전두환은 자기 권한 밖의 일이었고, 이희성은 자위권발동을 중계발표했을 뿐이고,주영복은 회의에 참여했을 뿐이고, 황영시는 살상작전명령을 단지 전달했을 뿐이고, 정호용은 단지 지원과 조언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결과는 대량살상이었다.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이 직접 발포행위를 하
지도 않았고, 직접 발포를 명령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공수여단을 누가 파견 · 증파했는가 공수여단에 진압봉과.실탄을 누가 지급했는가. 후퇴를 건의하는 일선 지휘관의 건의를 누가 냉혹하게 자르고 시위대 앞에 노출시켜, 종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발포하도록 내몰았는가. 바로 이러한 행위를 결정하고 지원하고 조언하는 자들이 살상에 대한 책임자 아닌가.
여기서 개인에 의한 살상행위와 조직체에 의한 살상행위를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 전자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히 드러나며 , 그 법적 적용상의 난점은 없다 반면 후자, 즉 조직체에 의한 살상행위는 다수의 인사들이 관여하며, 상호 분업적 ·기능적 역할분담을 통해 최후의 살상이 이루어진다. 전자의 경우 최후의 행위자가 정범성 (正犯峻)을 가지지만, 후자의 경우 실제의 살상행위자는 대부분 일종의 도구로 이용된 측면이 강하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유태인 학살의 경우 마지막 집행자는 동료 재소자, 그것도 피해자와 같은 종족 가운데 선택되었다. 이들은 아무런 행위의 선택가능성이 없었고, 그들도 죽어가는 사람과 같은 운명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지휘권 행사에 여러가지 형태로 가담한 자들은 자신이 직접 죽였거나 죽이라고 명령한 적이 없기에 자산이 범죄자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을수도 있다 마치 나치의 인종말살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히만처럼 조직체는 이처럼 개개인의 책임감을 희석시키고 그 결과 더욱 가증스러운 범죄가 자행된다. 이러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순수하게 살인의 도구로 쓰인 병사들을 제외한 모든 책임자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이러한 논리가 아니라면 나치의 중간간부들이나 아이히만 처벌, 동독 국경수비대의 발포행위에 대한 간부들의 법적 책임이 다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
한 자리에 모여 회의하지 않았더라도 순차적으로 연락을 받고 그에 가담하였으며, 전체 범죄계획에 필요한 역할을 기능적으로 분담한 자는 (공모)공동정범이 적용될 수 있다. 더욱 정확하게는 형법 제34조 제2항의 『자기의 지휘 , 감독을 받는 자를 교사 또는 방조하여 전항(간접정벙)의 결과를 발생하게 한 자』에 해당되고, 그러한 행위를 공모하여 공동으로 한 자로 처벌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공동정범 가운데 내란목적을 지니고 있었거나, 그러한 범행이 적어도 내란목적을 위해 수행됨을 미필적으로 알고 있던 자는 내란목적살인으로 처벌되어야 할 것이다.
『5공전사』 증거가치 부인한 재판부
전두환 황영시 정호용 등은 당시 신군부의 실세로서 광주진압에 가담하였다고 널리 인정되어 왔는데, 이 재판에서는 『피고인 황영시가 같은 전두환, 같은 정호용과 함께 광주사태 진압작전 등을 지휘하고 실권자였다』는 김기석 김재명 이구호의 법정증언을 『막연한 생각을 진술한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여 배척했다. 김기석 등은 자신의 군체험을 통해 누가 실세였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당시 군지휘체계가 형식적 지휘권과 실질적 지휘권이 일치하여 행사되고 있던 상황은 아니었음이 분명히 인정되어야 한다
다른 예를 들자면 5 16 쿠데타의 대표는 장도영 참모총장이었지만, 그 실세는 박정희와 육사 8기생이었다. 쿠데타와 같은 비상시기에는 상급지휘관은 물론 하급지휘관도 누가 실세인지 민감하게 반응하며, 모두 실세의 명령에 복종하지 허수아비로 내세워놓은 명목상의 최고지휘관의 말은 듣지 않는다. 그런데 5 · 16쿠데타가 실패하고 쿠데타 과정에서 저질러진 제반 악행에 대하여 재판을 연다고 가정할 때, 장도영에게 주된 책임을 묻고 박정희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합당한 판결이 나을 수 있겠는가.
5 17의 경우 최대통령과 내각은 무기력하게 붕괴했고, 이희성 참모총장과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단지 전두환 측의 결정을 군전체의 의사로 포장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그들은 정해진 직책을 수행하긴 했지만. 상황의 주도권을 쥐고 결정권을 행사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조직의 지휘권을 관장하는 실세가 누구인가를 가려내는 것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의 책임소재를 정확히 가리는 데 결정적인 대목이다.
누가 실세인지는 누구나 느끼지만 그것을 가시적 증거로 드러내기는 쉽지 않은 점은 있다 그러나 당시의 전반적 상황 속에서 사태진행을 지배조종한 자, 정보의 흐름을 장악한 자, 주요 부대의 지휘권을 행사한 자, 군인사 배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그뒤 논공행상과 자리배분에서 요직을 차지한 자들을 분명히 가려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체험적 증언도 매우 중요하다.
이와 관련, 검찰이 발굴해 신군부측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결정적인 자료로 활용되었던 『제5공화국 전사』의 증거가치를 부인해버린 재판부의 판단은 대단히 문제라고 본다 재판부는 이 책자 자체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집필위원들이 관계자들의 진술 등을 듣고 종합하여 작성한 것으로서 진술을 듣는 과정에서 진술자가 사실과 다르게 과장하여 진술한 점 등이 곳곳에 보이는 등 그 기재된 내용이 사실이라는 점을 선뜻 믿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 책자가 신군부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적었고, 각 관련자가 자신의 활동을 과장진술했던 점은 인정된다. 일단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 읽어낸다면, 『5공전사』는 개개인의 활동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증거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인정된다.
이 기록은 ▲신부측이 자신들의 역사기록을 남기기 위해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점 ▲ 81년 초 편찬작업이 시작되어 82년 5월 9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작성되었으므로 16년 뒤 기억에 의존한 진술보다 더 정확도가 높을 수 있다는 점 ▲집필진이 오늘날 폐기된 상당수의 관계자료까지 확인했다는 점, 신군부측 관여자들의 육성진술을 자유로운 상태에서 직접 청취했고 그 진술에 대한 고도의 비밀성이 보장되었다는 점▲ 정리과정에서 상호 모순된 진술을 어느 정도 배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기록보다 증거가치가 높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특히 내란의 모의 , 내란과정에서 각자의 역할분담, 누가 실세인가 하는 점을 확인하는 데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료일수 있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러한 진술증거와 서류증거를 쉽게 배척해버린 데다,
이 부분에 대해 미진한 의문을 적극적으로 파헤치지 믓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호용 등에 대한 내란목적살인을 무죄로 단정하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전두환에 대해 내란목적살인을 인정함에 있어 재판부는 다음을 증거로 나열하고 있다. ▲계엄포고령의 문안 뿐 아니라 포고문 담화문 발표문 전단 등 일체에 대하여 합수부에서 문안을 작성하여 계엄사에 보내 왔으며, 이희성은 계엄사령관의 명의로 그것을 그대로 시행하기만 한 것에 불과하다. ▲광주시위의 발생초기에도 보안사 기획처장을 광주로 보내 정보수집 ·도고하게 하였고, 그 상황보고와 정보를 계엄사에 제공하였다. ▲보안사에서 광주지역에 병력증파 요청이 있었고 그것을 이희성 등에게 전달하였다. ▲시위진압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의 교체를 요구하여 이희성이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1980.5.21 국방부의 자위권발동 결정회의에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으로 하여금 미리 자위권보유천명 담화문을 작성 지참하여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럼으로써 결국 『군수뇌부로 하여금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도록 한 사람이 바로 피고인 전두환이라고 아니볼 수없다』고 판시 했다.
전두환 황영시 정호용의 죄책
전후 상황을 짚어보면 전두환은 보안사와 합수부를 핵심참모부로 삼아, 정보를 수집제공하고 계엄사와 국방부를 마음대로 조종했고, 군내 인사를 마음대로 했다.최규하와 마찬가지로 이희성과 주영복 역시 직책상 자위권보유 천명과 발동 지시 역할을 했을 뿐이다. 비유하자면 전두환은 자신의 보안사 부하에게 증요 역할을 맡겼고, 이희성과 주영복 등은 전화교환수 역할을 했던 셈이며, 정호용과 소준열등은 행동책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행위의 핵심에는 전두환이 있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황영시와 정호용에 대해 내란목적살인의 무죄를 인정한 부분은 어떻게 평가되어 하는가
판결에서 인정한 사실만으로도 내란목적살인에 대한 황영시와 정호용의 책임은 인정될 수 있다고 본다. 판결문에 따르면 황영시는 ▲이구호 기갑학교장 및 김기석 전교사부사령관에게 시위의 강경진압을 지시하고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전화하여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도록 요구하며 ▲광주재진입작전을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직접 전달함으로써 계엄군을 이용하여 광주시위를 강경진압하는 폭동행위에 가담하였음은 인정하면서 내란주요임무종사로 처벌했다 그러면서도 광주시민을 살해하는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위권발동 결정이나 광주재진입작전 결정에 직접 가담한 적이 없음을 내세워 『내란목적살인의 공모에 가담하였다고 인정하기에』
증거가 부족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재판부는 내란목적살인자를 내란목적살인의 계획을 위한 회의에 참석한 자로 협소하게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적어도 두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살인의 결의와 실행 사이에 중간단계의 연결(황영시의 경우 작전문서 전달, 정호용의 경우 행정군수지원 임무 및 작전통제부대장에 대한 지휘조언)이 있었음을 의도적으로 경시하는 인상을 받는다. 황영시의 경우 살인의 결의에 대해 중간전달자가 그 내용을 알고, 그것이 내란목적으로 이루어짐을 알면서 릴레이식으로 현지 사령관에게 전달할 때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없음은 공모공동정범의 법리상 너무나 당연하며 ,그에 관한 판례는 확고하다.
그리고 정호용의 경우 ▲재진입작전에 필요한 가발 등을 지원받고 ▲충격용 수류탄과 항공사진을 지원받고 ▲광주에 도착하여 예하부대원을 격려하였고 ▲작전부대를 소준열에게 추천했다
그가 한 모든 행정 군수지원임무란 살상을 위한물적 준비를 한 것이며, 이것이 살상에 대한지휘감독자의 간접정범 혹은 공동정범이 될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그런데도 재판부는 오직 자위권발동결정에 관여한 사전공모자에 대해서만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 황영시와 정호용 등을 무죄로 단정해버리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둘째, 재판부의 이러한 관점은 판결선고에서도 기묘한 결론에 이르게 했다. 내란목적살인의 사전공모행위에 관여한 이희성, 주영복에 대한 양형 이유를 보면,그들을 고위공직자로서 무겁게 처벌하기로 하되 그 피고인들이『5· 17, 5 · 18 사건의 초기모의에 배제되어 있다가 위 사건의 실행단계에 즈음하여 가담하게 된 점에 비추어 보면 주동적 위치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위 피고인들이 계엄사령관이나 국방부장관이라는 직분으로 인하여 다소 수동적으로 이 사건에 가담하게 된 점 등의 사정』을 고려한다고 했다 즉 그들은 직분으로 인해 수동적으로 내란목적살인에 이끌려간 것이며, 전과정에 주동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절인 직분과 무관하게 능동적으로 사건을 야기한 자와 초기부터 주동적 위치에 있었던 실세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이 판결에서는 전두환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능동적 · 주동적 역할을 한 자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대량살상이 어디 단독범에 의해 저질러질 사안인가. 실제 그러한 능동적 ·주동적 역할을 했다고 인정되는 황영시 정호용 등을 무죄로 선언하고 난 뒤 , 재판부는 직책상 부담을 떠안은 자들에게 양형상의 참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주요 관며자 모두가 대단찮은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되어, 실제의 주동자는(전두환을 제외하고는) 판결 속에서는 증발해버린 것이다
왜 이러한 기묘한 현상이 생겨났을까 초기모의행위만을 내란목적살인으로 인정한 재판부의 법리구성도 물론 한 이유가 된다. 그것보다 문제의 근원은 피고인의 범위를 축소기소한 검찰에 있다고 본다.내란목적살인의 실행단계 책임자인 소준열 전교사령관, 박준병 20사단장 등을 (내란목적살인이든 단순살인이든 간에) 전혀 기소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행위를 하도록 문서를 전달하거나(황영시) , 작전을 잘 수행하도록 행정군수업무를 지원한 행위(정호용)를 처벌하기 난처해져 버린 것이다. 이는 검찰의 수사가 내란목적 「살인」에 대한 단죄보다 「내란」에 대한 법리구성에 치중함으로써 생긴 문제인 것이다
만약 시민학살행위의 책임자를 가려내는 데 초점을 둔다면 현지의 하급지휘관과 병사 그리고 그 지휘선에 있는 자들이 각자 어떤 행위를 했고, 어떤 지시를 받고 그 지시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명령실행을 담당했던 책임자와 그 지휘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검찰은 책임을 위로부터 추궁해 내려오기만 함으로써 계엄사령관과 국방부장관 선에서 책임선이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항소심에서는 내란목적살인의 직접실행자로부터 상위의 명령자로 추궁해 들어가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접근방법』이 아울러 구사되어야 한다.
현재 소준열 박준병 현지공수여단장 등의 (내란목적)살인에 대한 기소는 없었으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하급지휘관 및 병사의 책임과 함께 별도의 수사 · 기소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번 재판이 최상급 명령자의 책임을 묻는 재판이라는 의의를 갖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살상행위의 구체적 실상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와 국가의 진실의무를 충족시키는 차원에서 실행지휘관에 대한 재판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법정에서조차 소외된 피해자들
1심재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하나의 문제는 5 · 18 피해자들의 증언을 제대로 청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가기관인 검찰과 피고인측의 공방으로 공판이 진행 되었고, 이 재판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던 피해자와 광주는 이 재판에서도 소외되었다.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 규정에 따르면 범죄피해자의 신청이 있는 경우에는 그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문하여야 하며 (헌법제2i조 제5항, 형소법 제294조의 2), 피해자를 신문하는 경우 법원은 피해자에게 당해 사건에 관한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형소법 제294조의 2 제2항) .피해자에게 단지 법원에 대하여 자신의
체험사실을 보고하는 증거의 객체를 넘어서 의견진술권까지 보장한 것이다. 광주의 피해자들이 이러한 피해자진술권을 얼마나 알고 신청했는지 모르지만, 이 공판정에서 피해자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방청석에서 울부짖고, 법원 밖에서 소복을 입고 항의하는 모습으로만 비쳤을 뿐이다. 공판정의 중심이 아니라 외부에서 울부짖는 것은 연민의 정을 더해주기도 하겠지만, 일부에서 지나치지 않느냐는 시선도 맞닥뜨리게 된다. 법정은 차분한 어조로 진실을 정확히 진술하는 태도가 가장 어울리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눈물과 고통과 한을 눈앞에서 느껴보지 않은 탓에 피고인의 오만스런 처신이 변함없이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무슨 명분을 내세우든 간에 피고인들은 그들이 자행한 끔찍한 범죄와 그 휴유증을 직시하고 청취
할 윤리적 의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라도 피해자의 법정진술권은 항소심에서 충분히 행사되어야 한다. 광주의 단체들은 이를 적극 주장해야 할 것이며 , 재판부 역시 이를 적극 수용해야 할 것이다.
집권가도에 저항했던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신군부 세력은 권력장악을 위한 일련의 숙정작업을 진행시켜 나갔다.전국계엄의 실시 비상기구의 설치,국회의 무력화와 국회의원 체포, 반대 정치인들에 대한 체포와 구속기소와 활동정지 , 학생과 시민들에 .대한 예비검속 등을 계획된 수순대로 집행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와 국가보위입법회의를 통해 행정권과 입법권을 장악하고, 대법관의 사직등을 강요하며 사법권의 독립을 유린했다 그리고 공직자숙정, 언론통폐합과 언론인해직, 주요 정치인에 대한 정치활동금지 , 삼청교육대 등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틀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개개의 행위를 따로 떼어놓고 보면 어떤 경우에는 내란의 폭동이라 보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행위자의 전체 범죄계획을 감안하고 보면, 이 모든 행위가 법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거나, 헌법적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국헌문란의 목적 (형법 제91조)에 정확히 부합되는 것이다
여기서 내란목적 달성을 위한 신군부측의 수순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즉 권력의 산실인 군에 대한 주도권 장악, 보안사와 중앙정보부 등 정보기관의 장악, 민간정부와 국회의 장악, 공무원과 언론의장악. 이 바탕 위에서 80년대 권력정치가 가동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자비한 인권유린 행위가 저질러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도 자신들의 국정지표를 「정의사회 구현」으로 내건 것은 아이러니의 극치를 보여 준다.
위 일련의 행위를 내란의 폭동으로 열거한 판결의 취지가 타당함은 물론이다. 그러면서도 이 재판은 몇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공직자숙정· 언론통폐합 등의 조치를 주도한 자(이상재 허문도 허삼수 등)에 대한 책임을 별도로 묻지 않은 것이다.
둘째, 광주항쟁이 종식된 후 단일규모로 최대의 피해자를 내며 적법절차를 송두리채 유린한 삼청교육대의 설치유지행위에 대하여 아무 언급이 없는 것은 대단히 유감이다.
셋째, 국보위의 계획과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며,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아무 언급이 없다. 이는 국보위의 각종 조치와 입법의 법적 효력과도 관계된 것이므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넷째, 5 18이후 폭동종료시점까지 자행된 영장없는 체포와 장기구금, 무자비한 고문, 강제연행 등 각종 불법과 인권유린행위에 .대한 체계적인 언급이 없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초래한 데 대한 일차적 책임은 법원보다는 검찰이 져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유죄판결에 나타난 가해자의 잘믓과 당시 피해자의 범위가 일치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5 · 15과 법원 · 검찰의 책임
1심 판결에서는 신 군부측이 법원을 어떻게 유린했는가에 대한 언급도 있다. 김재규 피고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김재규 등에 내란목적살인을 인정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을 낸 양병호 대법원판사를 보안사 분실로 연행해 사표를 강요하고, 함께 소수의견을 낸 민문기 임항준 김윤행 서윤흥 대법원판사를 일괄 사직하게
했던 것이다. 김재규 사건의 판결은 1980. 5. 20에 내려졌는데, 당시의 험악한 상황에서 신군부의 각본을 따르지 아니하고 소수의견을 낸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소신을 요하는 일이었다.
소수의견을 집필했던 대법원판사가 강제사직을 당한 한편, 다수의견을 집필했던 유태흥 대법원판사는 대 법원장으로 영전되었다. 그는 5공내내 좋은 세월을 보내다 국회에서 사상초유의 탄핵소추발의까지 받았을 정도로 불명예를 당했다 결국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한때의 영광」과 「영원한 명예」라는 선택의 갈림길 이었음을 알 수 있다.
80년 격변기에 대법원장이었던 이영섭은 퇴임사에서 『취임 초에는 포부와 이상도 컸으나 과거를 돌아보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것 이외에는 아무 젓도 아니었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법원 역시 이 시기에 오욕과 회한, 오명으로 기록될 판결을 양산했다. 내란행위자들이 집권의 정당화를 위한 발판으로 검찰과 사법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정승화 등을 내란방조로 판결하고, 김대중 등을 내란음모로 단죄하고, 광주의 피해자들을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으로 단죄한 것은 사법부였다. 5 · 18특별법에서 규정된 특별재심이 진행되지 않는 지금, 이들에 대한 유죄 확정 판결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상태이다.
피고인측의 변호인단은 바로 이를 걸고 넘어졌다. 즉 『정승화 등에 대한 내란방조의 유죄판결이 확정된 이상 그 확정판결의 기판력의 효과로서 내란방조의 사실관계는 더이상 다툴 수 없으므로, 그 정승화의 연행행위는 정당한 것이며, 그와 관련된 병력동원행위도 정당한 행위』라는 주장이다. 그에 대해 재판부는 정승화의 범행과 12 · 12반란은 『피고인 및 범죄사실면에서 서로 다르므로』 정승화에 대한 확정판결의 효력은 이 사건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은 사실인 만큼 변호인단의 주장은 잘못된 확정판결을 아직 유지하고 있는 법원의 아픈 부분을 찌른 셈이며, 역설적으로 기존의 확정판결에 대한 재심이 더 이상 유예될 수 없는 과제임을 일깨워준 셈이기도 하다.
변호인단의 논법대로라면 5 · 18과 관련된 일련의 판결에 대해서도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내란죄의 확정판결을 내세워 자신들의 행위는 오직 내란 기도를 제압한 구국의 결단으로 아직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변호인들로서도 차마 그러한 주장을 하지는 못했다
그들이 자행한 엄청난 살육의 피해자를 앞에 두고 자신들이 조작해낸 확정판결을 정당화의 명분으로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변호인단은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어떤 주장도 할 수 있으나, 사실 확정판결의 존재를 정당화의 방편으로 내세움은 파렴치한 것이다. 김재규 등, 김대중 등, 정동년등에 대한내란의 확정판결은 적법절차가 전혀 보장되지 않은 가운데 신군부의 각본을 재판부에 강요한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의 철권통치기간에서조차 소위 「내란사범」들을 사면하고, 나아가 민주화운동으로 승격하고, 보상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유죄의 확정판결이 그만큼 모순투성이였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80년의 거꾸로 된 확정판결을 만들어 내는 데 당시 검찰의 몫이 적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검찰로서 아픈 대목의 하나는 삼청교육대 실시에 직책상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 점 때문에 검찰의 공소장과 논고문에 유독 삼청교육대에 대한 언급만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1980년대 자신들이 고의 혹은 과실로 저질렀던 잘
못을 솔선하여 바로잡는 「사법바로세우기」를 통해 법원과 검찰은 변호인 단의 그릇된 주장을 논박할 도덕적 권위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항소심의 과제
위의 논의를 통해 12 · 12, 5 · 18과 관련된 검찰과 법원의 당면과제가 자연히 도출된다 그중 일부는 항소심에서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과제이며 나머지는 새로운 재판과 사법적 결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12 · 12와 i · 17의 법리를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보다 세련화시킬 것이며 ,미진했던 5 · 18살상행위에 대해서는 진실규명과 책임자처벌이란 각도에서 더욱 집중적인 심리를 해나갈 것
▲ 5 · 18 살상행위의 전모와 그것의 법적 성격을 정확히 이해한 다음, 그에 의거하여 내란목적살인과 단순살인을 구별지어 처벌할 것.
▲ 전두환 등에게 5 · 18의 전기간에 걸친 살인의 책임을 지우고, 대량학살의 기능적 분업적 특성을 고려하여 황영시 정호용 등 살인에 관여하고 원조했던 자들을 (공모)공동정범의 법리에 따라 응분의 책임을 물을 것.
▲ 검찰로서는 증거 보강과 새로운 방법의 증거를 확보 구사할 것. 그를 위
'5.18 실상'진실규명은 이제부터
한인섭(서울대 교수.법학)
세기의 재판, 역사적 재판이라 일컬어지던 12 · 12, 5 · 17, 5. 18 1심재판이 종결되었다. 1979년과 1980년, 그 시대의 주역들에 대한 유죄선고는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하고 어두운 시대에 대한단죄이다 한때 「구국의 결단」으로 자화자찬되었던 사건들은 「성공한 쿠데타」로, 끝내는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의 범죄행위로 규정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재판은 한 시대를 심판대에 세운 것이다. 건국 이래 사법부에 부과된 최대의 난제에 대한 1차 관문을 넘어선 것이다.
이 재판정에는 과거의 권력자와 재벌들이 운집했다. 전군지휘관회의에서 , 국무회의에서 , 혹은 전경련 회의에서 그 위세당당했던 인사들을 서초동의 검찰청사와 법원청사에서 대할 수 있었다. 군대와 정치와 경제를 주름잡던 그 인물들을 초라한 복색의 피고인으로 법정에 불러낼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그끗은 국민의 힘이다. 1980년을 온몸으로 체헌하고 증언했던 인사들, 80년대 거리와 감옥을 왕복하며 광야에서 진실을 갈구했던 민주인사들, 1997년 방방곡곡을 뒤흔들었던 학생과 시민들,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은 저항권 행사에 동참했던 시민들,소리 높여 외치지는 못할지라도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치를 분별해내는 국민의식 이 또두가 모여 오늘의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중에서도 5-17내란범들에 맞서 오직 홀로 떨쳐 일어나 마침내 꽃잎처럼 스러져간 빛고을의 영혼들에게 영광의 기념비가 바쳐져야 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어느 나라 역사의 행진이 순탄한 적이 있었으랴, 오늘의 재판도 수많은 우여곡절과 책략의 산물이기도 하다 들이켜보면 지난해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도 역설적으로 국민의 분노를 하나로 모으는 과녁이 되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노태우 측의 서투른 비자금 은닉기술 역시 타오르는 열기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대통령의 「역사바로세우기」도 정치책략의 산물인 측면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이 역사를 바로 세움으로써 득표를 하고자 한 의도였다면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16년 전이, 아니 작년 이맘때만 해도 공소시효 만료일을 단 하루 앞두고 검찰의 기소가 이루어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재판에 이르는 과정은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대로 "섭리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일대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하나의 재판부가 이렇게 큰 사건들을 한꺼번에 다루는 기회는 다시 없을 것이다. 2백28쪽의 판결전문, 96쪽의 판결이유설명문을 만들어내기까지 재판부의 노고가 적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상상하기 어려을 정도로 어려운 사건」이었다는 재판장의 회견에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개인에 대한 개인의 범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복잡한 사건흐름 속에서 증거를 선별하고 법리를 정교화하는 작업의 어려움은 같은 법률가로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법리 중 대다수는 이제껏 법률가들이 주장해왔던 바를 수용한 것이며 시민들의 법정서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재야의 법리가 제도권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판결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과 한계가 지적됨에도,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재판은 아직 항소와 상고심을 기다리고 있어 , 최종판이라 하기엔 이르다. 피고인측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일반 국민들은 상소심에서 보다 많은 진실이 밝혀지고, 피고인들에게 보다 합당한 책임이 추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1심의 기여는 무엇보다 법리의 뼈대를 만들어 세운데 있다. 하지만 진실규명, 그중에서도 5 · 18의 진실규명과 책임자의 책임범위에 대해서는 너무나 미흡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 점에서도 1심 재판은 끝이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판결을 위한 디딤돌로 해석되어야 한다. 더구나 「신군부」로 대표되는 세력들이 만들어낸 어두운 과거의 종합적 청산이라는 숙제는 그야말로 지금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1심재판 법리의 평가, 5 -18 살상행위에 대한 1심판결의 문제와 한계를 토대로 항소심의 과제를 도출해내고자 한다. 아울러 비자금 사건 재판의 의미를 살펴보고, 피고인들에 대한 사면론의 문제점을 분명히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앞으로 이루어내야 할 과거청산의 자제들을 적시함으로써 보다 구
체적인 해결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 재판을 계기로 더이상 권력을 남용하여 자행되는 불법과 부패가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어떤 불법과 비리도 법적 판단을 회피해갈 수 없다는 확고한 교훈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을 되새기면서 .이 재판에서는 12 · 12, 5 · 17과 5 -18, 전두환 등의 비자금 사건, 노태우 등
의 비자금 사건 등 4가지 범죄사실을 다루었다. 앞의 둘이 반란과 내란,내란목적살인 등 헌정을 파괴하교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한 범죄라면, 뒤의 둘은 권력을 이용한 부패와 축재를 범죄로 선언한 것이다.
폭력으로 시작한 권력은 부패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양자의 관련성은 필연적인 것이다 군사독재정권의 양대 무기인 폭력과 부패가 동시에 다루어지는 이 재판은 군사독재정권의 본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절호의 계기가 되고, 그럼으로써 제도와 관행 면에서 철저한 과거청산을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5 · 18과 비자금사건 재판 미흡
판결의 공과를 평가하자면 12 · 12와5 · 17이 훨씬 부각된 반면, 5 · 18 살상행위는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했으며, 1980년의 후속적인 권력정지작업들에 대해서는 사건명 이상의 접근이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자금 사건의 경우 재벌총수와의 관련성 때문인지 그 중요성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느낌이 있다.
김영일 재판장은 「12 · 12가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것이므로 12 · 12 가담자에 대해서는 5 · 18 가담 자보다 무겁게 다루었다』고 말했다. 검찰의 입장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같은 시각은 국민정서와 배치된다. 12 · 12가 군대를 향한 것이고(반란) , 5 · 17이 국가조직에 대한 것이라면(내란) 5 · 18은 국민에 대한 대량살상(내란목적살인, 살인)인 까닭에 5 · 18에 가장 큰 비중이 두어져야 마땅했던 것이다.
재판부의 관점이 바로 이 판결의 성공도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이 대목은 좌시할 수 없다. 피고인들의 군대 국가에 대한 범죄는 충분히 잘 다루어졌으나, 피고인들이 국가권력을 장악 이용하면서 국민에 대해 범죄한 부분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는데, 그 한 원인은 바로 검찰과 재판부의 이러한 시각 때문이다. 그 결과 살상행위에 대한 가해자의 범위가 지극히 좁혀지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피고인 중 일부가 무죄선고를 받는 결과가 빚어졌던 것이다. 정권탈취과정의 불법성보다 시민에 대한 대량학살의 불법성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다. 만일 5 · 18의 대량학살이 없었더라면 피고인들에 대한 처벌의 목소리가 그토록 광범하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을까는, 5 · 16의 경우와 대비해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죽어간 사람들은 망월동에 그토록 많은데, 가해자는 불과 몇명이고 그나마 일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기묘한 판결이 그동안의 고통과 기다림의 나날들을 얼마나 보상해 줄 수 있겠는가.
수사와 공판단계에서 피고인측이 보인 행동은 국민의 동정을 얻어내고, 재판을 정치재판으로 비치게 하기 위한 정치적 연출이었다. 전두환의 골목성명과 낙향, 단식과 법정투쟁, 지연전술, 변호인단의 집단사퇴 전략이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도전으로 인해 공판진행은 상당한 차질을 빛었고 국선변호 인을 선임해야 했으며, 구속만기에 걸려 일부 피고인을 석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공판의 성격을 요약하자면 범죄사안을 정치화하여 , 스스로를 「시대의 희생 양」으로 규정하려는 피고인측과 한때의 정치사안을 범죄화하여 형사처벌하려는 세력의 싸움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법정을 하나의 게임장으로 볼 때 가능한 것이다. 법정에서 양측은 승패를 다투지만, 중요한 것은 승패의 전략보다 우월한 진실과 정의의 목소리이다. 수사와 공판과정에 아무리 흠집을 내도 그들의 범죄가 법적 쟁점이 아니라 정치적 쟁점으로 전환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 그들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보다 적법절차는 훨씬 잘 준수되었으며, 동시대의 다른 재판에서보다 적법절차는 잘 유지되었다. 변호인들의 반대신문을 위한 시간적 여유도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신속한 재판을 위한 집중심리제는 오히려 권장되는 새로운 관행이다. 구치소내의 처우는 다른 재소자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특급이었다. 따라서 재판부의 공판진행이 설사 매끄럽지 못한 점이 있다고 해도, 이는 비난받을 정도는 아니다.
모든 국민의 재판에 적법절차는 엄격히 준수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헌정과 법치를 유린한 집단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이 유린했던 법치주의와 작법절차의 이점을 누림으로써 그들에게 법치주의를 실감케 해야 한다. 비록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남용하려 할 때도, 적법절차의 범위 내에서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본다 만약 본 재판에서 미흡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피고인측에 대한 차별적 처우 때문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형사절차 전반에서 인권보장 수준의 미흡한 때문일 것이다 피고인과 재소자의 처우에 관한 국제기준에 부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2 · 12, 5 · 17 법리 구성은 탁견
이번 판결의 가장 큰 의의는 12 · 12와 5 ·17, 5 · 18을 군사반란과 내란 내란목적 살인으로 법적 성격을 규정지은 데 있다. 먼저 12 · l2는 피고인들이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범죄로 규정되었다. 이같이 「박정희 시 해사건의 혐의를 수사하기 위한 행위」는 문민정부 초기에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정치적으로 규정되었다가, 이제 「군주도권 장악을 위한 반란」이라는 법적 정의를 얻은 셈이다. 판결문에서는 피고인측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으며, 그
를 통해 12 l2를 둘러싼 사실적 논란이 충분히 정리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12 · 12 이전에 합수부가 정승화의 무혐의를 거듭 확인했다는 사실에서 l2 -12 당일 정승화 연행조치와 무력불사조치는 당시 권력의 향방을 쥐고 있었던 군대를 장악하려는 선재공격 이었단는 것이다 정승화 참모총장의 강제연행. 병력동원등과 초병 및 상관살해행위를 통해 이미 『대통령의 국군통수권이나 계엄선포권은 그 권위를 도전받고 파괴』되었다. 그리고 연행 후 무려 10시간 동안 총리공관을 자파 경비병력으로 포위하고 재가를 압박한 결과 얻어진 대통령의 재가행위는 『위법상태가 발생한 이후에 이루어진 승낙으로서 그 승낙에 의하여 피고인의 위법상태가 해소되고 그 행위가 정당화된다고 할 수 없고 판시한다.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행위는 12 · 12와 5 · 17에서 쟁점으로 대두하고 있다.여기서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입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절대권력자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진공상태에 빠진 권력의 잠재적 핵심은 군부였고, 그중에서도 요직을 차지한 하나회 중심의 정치군인들이었다 군부의 지지도, 선거에 의한 국민적 지지도 없는 최규하 대통령의 권한이란 그야말로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즉음과 잠재적 권력경쟁자들 사이에 전혀 경쟁대상으로 꼽힐 수 없었기에 가능했다. 즉 무기력했기에 대통령 이 된 것이다.
권위주의정부에서 민주정부로 이행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최고지도자의 정치적 무기력은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게 마련이다. 군대의 요칙에 두루 포진하고 있던 하나회 세력들이 병력을 동원해 육본의 정규 지휘부를 무너뜨리고 반란상태의 기정사실화를 압박했을 때, 어떤 자파세력도 갖지 아니한 대통령은 이를 사후재가하는 도리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기껏해야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12 12에서처럼 재가를 몇 시간 늦추거나, 5 17에서 「소요배후조종 및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에 대한 체포 조사계획』을 보고하는 전두환에 대해 『그에 대하여는 적법하고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당부하는 정도였다. 즉 대통령의 국군통수권 행사가 결정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단호하게 통수권을 행사한다거나, 민간정부와 국회가 송두리채 유린되는 상황에서 국헌 수호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능력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권력의 향방이 분명해진 시점에 이르자 그가 할 일은 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사후를 보장받는 것 뿐이었던 것이다.
국군통수권을 행사하고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의 직무를 유기하고 내란범들의 행위를 기정사실화함으로써 내란행위를 도와준 대통령의 행위는 내란죄의 공동정범이거나 좋게 봐줘도 내란죄의 방조범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에게 가해진 유무형의 압력이 있었지만 그것이 항거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면 그의 책임이 면해지기는 어렵다. 재가행위가 자유로운 의사에 입각해서 이루어졌다면 그야말로 내란의 공동정범으로 처벌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5 · 17은 군부와 정보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이 민간정부와 국회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집권계획을 구체화하는 단계에 해당한다. 빈번한 상호모임과 「시국수습방안」 등에서 보이는 내란의 예비음모 단계, 그 실행행위인 학생 등 체포, 국무회의장 병력배치, 비상계엄 전국확대선포, 계엄군 배치, 계엄포고 10호 발령, 국회의원 등 체포와 구속, 신민당총재 가택연금, 국회의사당 점거 및 봉쇄, 광주시위의 초기진압.자위권 발동과 계엄군의 발포, 광주 재진입작전의 실행,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소요배후조종자 기소와 재판, 언론기관 통폐합, 정치활동 규제조치, 대법원판사 사직 강요 등이 숨막히게 전개되었다.
질식할 듯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행한 이같은 비상조치들은 모두 내란죄의 포괄적 일죄 (一罪)로 규정 되 었다.변호인단에 따르면 내란죄는 폭동행위와 함께 즉시 기수(旣遂)에 이르러 종료하는 즉시범이고, 이후 비
상계엄의 유지는 범죄 결과가 현존하고 있는 상태범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개개의 폭동행위는 기수에 이름과 동시에 종료된 것이어서 이미 공소시효(범죄가 종료된 지 15년)를넘겼다는 것이다. 반면 검찰측은 비상계엄 선포와 유지행위를 모두 내란죄로 보고, 그러한 상황에서 개개의 폭동행위를 포괄적으로 묶어 하나의 내란죄로 기소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법리를 채택하면서,개개의 폭동행위 간 관계를 접속범으로 이론화했다. 그 근거로는 개개의 행위가 국가존립의 기초 자체 또는 국헌적 법질서를 해치는 점에서 단일하고, 국헌문란의 목적과 폭동이라는 범의(犯意)의 계속성이 있으므로, 소위 접속범으로서 모든 행위가 포괄되어 내란죄라는 구성요건을 충족하는 것이며, 폭동행위가 최후로 종료하였다고 볼 수 있는 비상계엄 해제일 (1981.1.24)을 내란의 종료시점으로 잡 은 것이다. 그에 따르면 내란의 기수와 종료시기를 구분하고, 종료시점부터 공소시효가 진행된다는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따라 본 사건의 공소시효가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필자는 바로 이러한 법리를 「5 · 18, 법적 책임과 역사적 책임』(박은정과 공편,이대출판부)에서 제기한 바 있다. 이 판결은 그같은 법리를 더욱 정교화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개개 행위를 접속범의 이론으로 연결하기 보다는 연속범으로 이론화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적법한 외관 뒤 불법한 본질
80년 내란행위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권력을 이용해 때로는 적법한 절차를 통해, 때로는 불법한 절차를 통해 내란목적을 수행했다는 데 있다. 이 점은 군대와 국가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된 군내 소장층에 의해 주도된 5 16과 대비된다. 5 · 16쿠데타의 경우 그 내란성과 범죄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데 비해, 5 · 17세력은 자신들의 행위를 국가활동의 일환으로 은폐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l2 · 12를 통해 군권을 찬탈했고, 당시의 무기력한 최규하 · 신현확 내각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종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 12에서 정승화 연행에 대해 최대통령의 재가를 강요하고, 5 · 17과 이후의 일련의 행위를 법 제화하고, 국보위의 불법성을 치유하기 위해 5공헌법 부칙에 『국보위가 제정한 법률과 이에 따라 행하여진 재판 및 기타 처분은 이 헌법 기타의 이유로 제소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초법규적 조항까지 둔 것은 장차 문제화될 경우를 대비해 적법상의 안전판을 마련해 두려한 용의주도한 전략이었다. 물론 아무리 법치의 외피(外皮)로 치장하더라도 살상과 고문, 인권유린을 무수히 자행해야 했던 그들의 원죄는 부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이와 관련해 광주민중항쟁은 자신의 패배를 통해 군부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정권창출과 유지를 위해 폭력
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군사정권의 명을 재촉했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본 판결에서 가장 주목되는 두분은 바로 그러한 적법성의 가면 뒤에 있는 불법의 본질을 명확히 인정한 점이다. 예컨대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재가하는 형식을 밟은 것은 『외관상으로는 당시 헌법과 법률이 정한 테두리 내에서 대통령의 적법한 권리행사를 바라는 건의의 형식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피고인들에게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 적법한 외관 뒤에 가려져 있는 불법한 본질을 명쾌하게 선언했다.
비상계엄의 전극확대도 마찬가지다. 피고인들은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선포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적법하게 이루어진 대통령의 통치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무회의 자체가 집총한 병력의 위력하에 있었고, 중앙청의 전화선도 절단하고, 공무원들이 퇴근도 못하도록 연금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행위였던 만큼 그 자체가 불법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국무회의의 의결과 대통령의 재가가 있지 않았느냐고 피고인들은 주장할 수 있으며, 장차 시빗거리를 피하기 위해 이러한 형식적 절차를 밟아간 측면도 있다. 그에 대해 재판부는 『국헌문란의 목적을 가진 피고인들이 그 목적 달성을 위하여, 헌법상 대통령에게 부여되어 있는 국가긴급권의 발동행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일단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이루어지게 한 다음, 그 전국비상계엄의 상황을 이용하여 그 후에 일부 합법적인 절차를 가장하거나 또는 불법적인 절차를 통하여』 국헌문란의 폭동행위를 한 것으로 파악했다. 합법
적 절차와 불법적 절차는 형식적으로는 달리 평가될 수 있을지라도, 내란이라는 전반적 범죄계획 속에서 통일적으로 파악할 때 총괄적으로 범죄행위로 평가된다는 해석은 이 판결의 「백미」라 할 만하다
5 · 18관련자 모두 책임 물어야
5 17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계엄포고령 10호 공포 이후 전두환 등은 정권찬탈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했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받아야 할 시민들의 저항』을 조기진압함으로써 국면의 주도권을 확고히 장악하고자했다. 피고인들은 광주에서의 시위진압과 시민들에 대한 살상행위에 대해 『단지 조속한 시위진압을 목적으로 한 것일 뿐, 국가기본조직의 파괴라는 목적과는 직접 관련성이 없으므로」 내란죄나 내란목적살인 죄로 법규를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그에 대해 재판부는 「광주에서 시위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저항을 제거함으로써 전체적인 국헌문란계획을 달성하겠다는 목적 아래 그 목적 달성의 직접적인 수단』으로 강경진압 및 살해행위를 하였다고 판시했다.
판결의 취지는 기본적으로 타당하다.하지만 이 판결은 시민 살상에 대한 책임소재와 범위를 정확히 가려내는데 근본적 한계를 보이고 있다. 판결에 따르면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을 내란목적살인의 공동정범으로 인정하면서, 1980년 5월21일20:30경에 육본 정식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자위권 발동지시를 살인행위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한 지시에 의하여 『시위진압현장의 계엄군들로 하여금 위 자위권 발동지시를... 사실상의 발포명령으로 받아들여서 광주외곽도로 봉쇄작전 및 광주 재진입작전시 민가에 대한 무차별사격,... 시위대 탑승차량에 대하여 정차요구도 하지 않은 채 발포하는 등의 살상행위를 자행하였으므로』 자위권발동지시는 실질적으로 발포명령이었다고 볼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자위권 발동지시 이후의 광주외곽에서의 살인행위, 광주재진입작전시의 민가에 대한 무차별사격에 대한 책임만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우선 광주에서의 살상행위를 보다 세분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1980년5월18일에서 5월21일 13:00경 도청 앞 대학살에 이르는 기간이다. 이 시기는 공수여단이 비무장 시위대와 일반 시민에 대해 무차별의 유혈살상을 자행하였고, 그러한 진압에 견디다 못한 시민들이 항쟁으로 떨쳐 일어나 맞서게 된 시기이다.
신군부는 애초부터 자신들의 집권계획을 저지하는 어떤 움직임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최정예의 공수여단을 파견 증파해, 처음부터 공세적 섬멸적 타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잔학한 진압과 타격의 결과 광주시민들을 초주검으로 만들고 엄청난 인명살상을 빚었다. 그에 대해 시민들이 엄청난 규모로 떨쳐 일어나고 차량시위 등으로 맞서게 되었는데, 위기를 느낀 현지 지휘관들이 철수를 건의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일체의 후퇴명령 없이 도청분수대 앞에서 실탄을 분배하고 일제사격을 가하기에 이른 것이다.
공수여단의 현장 지휘관과 병사들은 비무장시위대와 일반시민들에게 직접 살상을 가한 자로서 도저히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상부에서 직접 자위권발동 지시도 없는 상태에서의 이러한 행위는 당연히 처벌되어야 하며, 비무장의 학생과 시민에 대해 살상을 자행한 점에서 정당방위나 사실상 자위권 행사의 주장도 나올 여지가 없다. 도청에서의 발포 자체는 시민들의 차량시위에 따른 위기적 대응이라 볼수도 있지만, 이는 스스로 도발한 침해에 대한 반격이기에 정당방위적 상황이 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공수여단 파견을 결정한 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공수여단을 증파하는 결정에 관여한 자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살상행위의 진행상황에 대해 보안사 측은 완벽하게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고, 공수여단이 지휘선을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한 증거도 없다. 증파족 결정한 것은 그때까지 자행된 유혈진압을 가일층 수행하라는 의사로 볼 수밖에 없다. 한 자리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지 않았더라도, 미리부터 가혹한 충정훈련을 통해 섬멸적 타격 위주의 시위진압을 훈련시킨 부대를 광주에 파견했고, 그들의 손에 진압봉과 착검한 소총을 쥐어준 신군부의 핵심지휘부가 살상에 대한 직접책임이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모든 시민들이 총궐기하도록 만든 초반기의 잔혹한 진압과 살상행위의 주모자, 오늘날까지 5 · 18이라고 할 때 누구나 떠올리는 그 처참한 주검들을 만들어낸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책임소재가 빠져버린 것이 이 판결의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자위권 발동설의 허구성
이 시기를 증언하는 많은 증거가 있지만, 최근 변주나 교수(전북대)의 당시의 총상 진단서와 탄흔 감정은 대단히 주목되는 새 증거라 할 수 있다 변교수의 감정에 따르면, 『80년 당시 진단서를 분석해본 결과 53% 이상에서 시위대가 카빈소총을 소지하기 전인 80년 5월21일 오후 1시30분 이전에 총사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총사 입 ·출구 역시 후면에서 정면으로가 32.4%, 측면에서 측면으로가 26.5%로 나타났다. 총상해자들의 연령분포를 보면 1세에서 9세가6.5%, 10세에서 19세가 8.5%, 여자가 38%였으며, 외상부위 역시 앞면 머리 그리고 척추가 50% 이상이었고, 파편보유 위치 역시 머리 목 가슴 등이 25% 이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가해자들이 주장하는 자위권 발동설은 허구다 즉 자위권보유 천명 이전에 발포가 시작됐고, 그것도 자위적 차원이 아니라 공격적 살상행위의 측면에서 상체를 향하여 정면으로 발포한 것이었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연령과 성별을 살펴볼 때 그 발포가 대단히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 국면은 공수여단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면서 외곽 봉쇄를 단행한 이후의 살인행위이다. 그에 대해서는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의 내란목적살인을 인정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무장한 시민군과 직접 교전하지 않는 상태에서 일종의 양민학살적 성격의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저수지에서 미역감던 9세의 아동이 총에 맞아 죽은 사건, 도망치다 벗겨진 고무신을 줍는 고사리 손에 총을 갈긴 사건들이 이 시기에 자행되었다 그에 대해서는 전두환 등의 책임은 물론이지만, 직접 이러한 행위를 자행한 병사 및 그 지휘관의 책임을 묻지 않고는 안된다.
마지막 국면은 광주재진입작전(상무충정작전)을 전후한 살인행위이다 이 경우에도 계엄군의 광주시위 진압행위가 『국가기관의 경찰행위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므로 적법한 행위』라든가, 『시위대의 공격에 대한 계엄군의 방어행위로 인한 살상행위는 계엄군의 입장에서 보아 정당방위」라든가 하는 피고인측의 주장을 용납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판결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당연히 배척했다. 그러면서도 판결문에서는 계엄군들이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피고인들이 명령계통을 통하여 하달한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진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진압 및 살상행위는「적법행위에 대한 기대가능성이 없어서(즉 위 명령이 위법하다고 생각하여 그 수행을 거부하기를 위 계엄 군들에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책임이 조각된다고 할것』,으로 판시했다. 그 근거로서 ▲당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선포되어 있었고 ▲계엄군들이 상명하복관계가 철저한 공수여단 소속인 점 ▲시민들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고 많은 시민들이 총기를 소지하게 된 상황인 점을 들었다.
이 부분 결론에 대해서는 판결과 견해를 같이 하지만 그 논거는 다소 수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비상계엄 하에서 항명하는 것은 1년이상 7년이하의 징역에 처해지며 , 비상계엄하 군사재판은 단심제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계엄하에서 개별 군인들의 자율적 판단과 행동은 극도로 억압될 것이다. 공수여단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
다. 그러나 그 명령이 시민에 대한 살상을 포함한 명령이라면 무조건 적법행위의 기대가능성이 없다고 볼 일이 아니다. 아무리 상명하복이 철저한 부대라고 해도 위법명령에 복종하는 것만으로 면책사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이제껏 확고한 판례의 경향이다. 비록 무장하고 도청을 점거했다고는 하나 병력과 훈련 정도, 화력 면에서 훨씬 열세인 시민군에 대해 적에 대한 폭도진압식 군사작전을 감행한 행위를 그대로 면책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같은 시민으로서 자신의 행위가 과연 옳은지에 대한 적절한 「양심의 긴장」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다 형법 제16조는 『자기의 행위가 법령에 의해 죄가 되지 아니하는 것으로 오인(誤認)한 행위는 그 오인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 한하여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살인행위,그 중에서도 시민에 대한 살인행위를 단지 어쩔 1수 없는 명령이었다고 해서 적법한 것으로 오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양심의 긴장이나 고뇌의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살상을 한 직후 군가를 소리높여 부르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본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전율감을 금할 수 없다.
유엔인권위원회의 45차 회의 보고서에도 중대한 인권침해범죄의 경우 『그가 정부나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하급자의 형사책임을 면제시키거나 법률적인 감경사유를 구성하지 못한다. 다만 양형에서 참작사유가 될 뿐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음을 보아도 명령 복종을 이유로 면책하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사병들의 행위를 처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대불가능성의 논리를 일반적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이 그토록 잔학한 행위를 자행했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내몰았는지 하는 점이 낱낱이 규명되어야 한다.
병사들과 하급장교들이 직면한 특수한 상황(예컨대 제도적 ·상황적 압력, 위협과 강제, 훈련과정과 내용, 그들에게 주입된 왜곡된 지식 )을 규명해내고. 그러한 상황하에서 주어진 명령에 따라 범죄한 자를 형법 제16조의 정당한 이유」에 해당하는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어느 정도의 재량권이 있었던 수준의 지휘관은 물론이고 같은 사병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잔혹한 인권침해행위를 한 자의 책임은 반드시 추궁되어야 한다
다시 유엔인권위 48차 회의 보고서는 중대한 인권침해범죄의 경우 「그 행위가 하급자에 의해 이루어졌을 경우 상급자는 범행이 행하여졌거나 행하여질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 그 범행을 예방·제지하는 데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모든 하급자의 행위가 상급자의 통제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면 상급자의 책임은 당연하다. 상명하복관계에 의해 엄격히 규율되는 군대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검찰의 가장 큰 잘못은 바로 이러한 사태전개에 대한 종합적 통찰 위에 시민에 대한 진압과 살상행위의 법적 성격을 엄밀히 가려내지 못한 데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이 아니라 전두환을 비롯한 5인의 내란목적 살인을 입증하는데 필요한 사실조사만 하였고, 자위권 발동지시 이전의 과잉진압과 살상에 대한 기소를 하지 못함으
로써 시민살상의 전모가 온전히 드러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전두환 등 ,5인에 대해서는 이 부분 역시 내란목적살인의 포괄적 일죄(一罪)에 포항되므로, 항소심에서 이 부분에 대한 본격적인 소추가 있어야 한다
내란목적살인의 성격과 입증방법
검찰은 내란목적살인의 죄책으로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 황영시 정호용 등 5인만 기소했다. 그 중에서 1심 재판부는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황영시 정호용에 대해서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 오직 증거재판주의에 따른 법리에 충실하고자 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국민감정을 설득하는 데는 부족하다는 중론이. 있는 만큼, 과연 이 부분이 증거와 법리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피고인 전두환은 자신이 내란목적살인에 해당되지 않는 근거로 ▲시위진압업무는 계엄사
령부의 고유권한인데 자신은 그와 무관한 보안사령관 직에 있었고 ▲1980년 5월21일 16:35경 국방부장관실에서 모인 자위권발동에 관한 회의에 참여한적도 없음을 들었다
이희성은 위 회의에 참여해 경고적 성격의 담화문 초안을 논의하여 이를 생중계를 통해 발표한 적은 있어도 자위권발동을 결정하여 사실상 발포명령을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주영복은 자위권발동보유 천명에만 관여했을 뿐 계엄사령관의 자위권 발동지시에는 전혀 관여한 적이 없음을 들어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 황영시는 자신이 내란목적살인을 사전에 공모한 적이 없고,자위권 발동결정이나 광주재진입작전 결정에 관여한 바 없으며, 이미 결정된 상무충정작전을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전달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정호용도 황영시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자신은 오직 공수여단의 모체부대장으로서 그의 임무인 행정 · 군수지원 등의 임무 및 작전통제부대장에 대한 지휘조언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광주에 자주 내려갔을 뿐 공수여단에 대한 실질적인 작전지휘를 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광주의 대량학살은 오직 현지지휘관들만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현지 지휘관들은 거의 재량권도 없이 명령대로 행동했다 그리고 그들이 상부와 명령을 잘못 해석했다고 볼 아무런 근거가 없다 살상의 규모가 너무 컸고 10여일에 걸친 살상이 이루어졌는데, 그 살상에 대해 책임진 현지지휘관도 없다 이같이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기묘한 논리는 타당한가.
분명히 명시적인 『발포」명령은 없었다 전두환은 자기 권한 밖의 일이었고, 이희성은 자위권발동을 중계발표했을 뿐이고,주영복은 회의에 참여했을 뿐이고, 황영시는 살상작전명령을 단지 전달했을 뿐이고, 정호용은 단지 지원과 조언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결과는 대량살상이었다.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이 직접 발포행위를 하
지도 않았고, 직접 발포를 명령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공수여단을 누가 파견 · 증파했는가 공수여단에 진압봉과.실탄을 누가 지급했는가. 후퇴를 건의하는 일선 지휘관의 건의를 누가 냉혹하게 자르고 시위대 앞에 노출시켜, 종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발포하도록 내몰았는가. 바로 이러한 행위를 결정하고 지원하고 조언하는 자들이 살상에 대한 책임자 아닌가.
여기서 개인에 의한 살상행위와 조직체에 의한 살상행위를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 전자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히 드러나며 , 그 법적 적용상의 난점은 없다 반면 후자, 즉 조직체에 의한 살상행위는 다수의 인사들이 관여하며, 상호 분업적 ·기능적 역할분담을 통해 최후의 살상이 이루어진다. 전자의 경우 최후의 행위자가 정범성 (正犯峻)을 가지지만, 후자의 경우 실제의 살상행위자는 대부분 일종의 도구로 이용된 측면이 강하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유태인 학살의 경우 마지막 집행자는 동료 재소자, 그것도 피해자와 같은 종족 가운데 선택되었다. 이들은 아무런 행위의 선택가능성이 없었고, 그들도 죽어가는 사람과 같은 운명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지휘권 행사에 여러가지 형태로 가담한 자들은 자신이 직접 죽였거나 죽이라고 명령한 적이 없기에 자산이 범죄자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을수도 있다 마치 나치의 인종말살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히만처럼 조직체는 이처럼 개개인의 책임감을 희석시키고 그 결과 더욱 가증스러운 범죄가 자행된다. 이러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순수하게 살인의 도구로 쓰인 병사들을 제외한 모든 책임자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이러한 논리가 아니라면 나치의 중간간부들이나 아이히만 처벌, 동독 국경수비대의 발포행위에 대한 간부들의 법적 책임이 다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
한 자리에 모여 회의하지 않았더라도 순차적으로 연락을 받고 그에 가담하였으며, 전체 범죄계획에 필요한 역할을 기능적으로 분담한 자는 (공모)공동정범이 적용될 수 있다. 더욱 정확하게는 형법 제34조 제2항의 『자기의 지휘 , 감독을 받는 자를 교사 또는 방조하여 전항(간접정벙)의 결과를 발생하게 한 자』에 해당되고, 그러한 행위를 공모하여 공동으로 한 자로 처벌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공동정범 가운데 내란목적을 지니고 있었거나, 그러한 범행이 적어도 내란목적을 위해 수행됨을 미필적으로 알고 있던 자는 내란목적살인으로 처벌되어야 할 것이다.
『5공전사』 증거가치 부인한 재판부
전두환 황영시 정호용 등은 당시 신군부의 실세로서 광주진압에 가담하였다고 널리 인정되어 왔는데, 이 재판에서는 『피고인 황영시가 같은 전두환, 같은 정호용과 함께 광주사태 진압작전 등을 지휘하고 실권자였다』는 김기석 김재명 이구호의 법정증언을 『막연한 생각을 진술한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여 배척했다. 김기석 등은 자신의 군체험을 통해 누가 실세였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당시 군지휘체계가 형식적 지휘권과 실질적 지휘권이 일치하여 행사되고 있던 상황은 아니었음이 분명히 인정되어야 한다
다른 예를 들자면 5 16 쿠데타의 대표는 장도영 참모총장이었지만, 그 실세는 박정희와 육사 8기생이었다. 쿠데타와 같은 비상시기에는 상급지휘관은 물론 하급지휘관도 누가 실세인지 민감하게 반응하며, 모두 실세의 명령에 복종하지 허수아비로 내세워놓은 명목상의 최고지휘관의 말은 듣지 않는다. 그런데 5 · 16쿠데타가 실패하고 쿠데타 과정에서 저질러진 제반 악행에 대하여 재판을 연다고 가정할 때, 장도영에게 주된 책임을 묻고 박정희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합당한 판결이 나을 수 있겠는가.
5 17의 경우 최대통령과 내각은 무기력하게 붕괴했고, 이희성 참모총장과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단지 전두환 측의 결정을 군전체의 의사로 포장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그들은 정해진 직책을 수행하긴 했지만. 상황의 주도권을 쥐고 결정권을 행사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조직의 지휘권을 관장하는 실세가 누구인가를 가려내는 것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의 책임소재를 정확히 가리는 데 결정적인 대목이다.
누가 실세인지는 누구나 느끼지만 그것을 가시적 증거로 드러내기는 쉽지 않은 점은 있다 그러나 당시의 전반적 상황 속에서 사태진행을 지배조종한 자, 정보의 흐름을 장악한 자, 주요 부대의 지휘권을 행사한 자, 군인사 배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그뒤 논공행상과 자리배분에서 요직을 차지한 자들을 분명히 가려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체험적 증언도 매우 중요하다.
이와 관련, 검찰이 발굴해 신군부측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결정적인 자료로 활용되었던 『제5공화국 전사』의 증거가치를 부인해버린 재판부의 판단은 대단히 문제라고 본다 재판부는 이 책자 자체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집필위원들이 관계자들의 진술 등을 듣고 종합하여 작성한 것으로서 진술을 듣는 과정에서 진술자가 사실과 다르게 과장하여 진술한 점 등이 곳곳에 보이는 등 그 기재된 내용이 사실이라는 점을 선뜻 믿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 책자가 신군부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적었고, 각 관련자가 자신의 활동을 과장진술했던 점은 인정된다. 일단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 읽어낸다면, 『5공전사』는 개개인의 활동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증거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인정된다.
이 기록은 ▲신부측이 자신들의 역사기록을 남기기 위해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점 ▲ 81년 초 편찬작업이 시작되어 82년 5월 9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작성되었으므로 16년 뒤 기억에 의존한 진술보다 더 정확도가 높을 수 있다는 점 ▲집필진이 오늘날 폐기된 상당수의 관계자료까지 확인했다는 점, 신군부측 관여자들의 육성진술을 자유로운 상태에서 직접 청취했고 그 진술에 대한 고도의 비밀성이 보장되었다는 점▲ 정리과정에서 상호 모순된 진술을 어느 정도 배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기록보다 증거가치가 높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특히 내란의 모의 , 내란과정에서 각자의 역할분담, 누가 실세인가 하는 점을 확인하는 데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료일수 있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러한 진술증거와 서류증거를 쉽게 배척해버린 데다,
이 부분에 대해 미진한 의문을 적극적으로 파헤치지 믓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호용 등에 대한 내란목적살인을 무죄로 단정하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전두환에 대해 내란목적살인을 인정함에 있어 재판부는 다음을 증거로 나열하고 있다. ▲계엄포고령의 문안 뿐 아니라 포고문 담화문 발표문 전단 등 일체에 대하여 합수부에서 문안을 작성하여 계엄사에 보내 왔으며, 이희성은 계엄사령관의 명의로 그것을 그대로 시행하기만 한 것에 불과하다. ▲광주시위의 발생초기에도 보안사 기획처장을 광주로 보내 정보수집 ·도고하게 하였고, 그 상황보고와 정보를 계엄사에 제공하였다. ▲보안사에서 광주지역에 병력증파 요청이 있었고 그것을 이희성 등에게 전달하였다. ▲시위진압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의 교체를 요구하여 이희성이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1980.5.21 국방부의 자위권발동 결정회의에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으로 하여금 미리 자위권보유천명 담화문을 작성 지참하여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럼으로써 결국 『군수뇌부로 하여금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도록 한 사람이 바로 피고인 전두환이라고 아니볼 수없다』고 판시 했다.
전두환 황영시 정호용의 죄책
전후 상황을 짚어보면 전두환은 보안사와 합수부를 핵심참모부로 삼아, 정보를 수집제공하고 계엄사와 국방부를 마음대로 조종했고, 군내 인사를 마음대로 했다.최규하와 마찬가지로 이희성과 주영복 역시 직책상 자위권보유 천명과 발동 지시 역할을 했을 뿐이다. 비유하자면 전두환은 자신의 보안사 부하에게 증요 역할을 맡겼고, 이희성과 주영복 등은 전화교환수 역할을 했던 셈이며, 정호용과 소준열등은 행동책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행위의 핵심에는 전두환이 있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황영시와 정호용에 대해 내란목적살인의 무죄를 인정한 부분은 어떻게 평가되어 하는가
판결에서 인정한 사실만으로도 내란목적살인에 대한 황영시와 정호용의 책임은 인정될 수 있다고 본다. 판결문에 따르면 황영시는 ▲이구호 기갑학교장 및 김기석 전교사부사령관에게 시위의 강경진압을 지시하고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전화하여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도록 요구하며 ▲광주재진입작전을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직접 전달함으로써 계엄군을 이용하여 광주시위를 강경진압하는 폭동행위에 가담하였음은 인정하면서 내란주요임무종사로 처벌했다 그러면서도 광주시민을 살해하는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위권발동 결정이나 광주재진입작전 결정에 직접 가담한 적이 없음을 내세워 『내란목적살인의 공모에 가담하였다고 인정하기에』
증거가 부족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재판부는 내란목적살인자를 내란목적살인의 계획을 위한 회의에 참석한 자로 협소하게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적어도 두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살인의 결의와 실행 사이에 중간단계의 연결(황영시의 경우 작전문서 전달, 정호용의 경우 행정군수지원 임무 및 작전통제부대장에 대한 지휘조언)이 있었음을 의도적으로 경시하는 인상을 받는다. 황영시의 경우 살인의 결의에 대해 중간전달자가 그 내용을 알고, 그것이 내란목적으로 이루어짐을 알면서 릴레이식으로 현지 사령관에게 전달할 때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없음은 공모공동정범의 법리상 너무나 당연하며 ,그에 관한 판례는 확고하다.
그리고 정호용의 경우 ▲재진입작전에 필요한 가발 등을 지원받고 ▲충격용 수류탄과 항공사진을 지원받고 ▲광주에 도착하여 예하부대원을 격려하였고 ▲작전부대를 소준열에게 추천했다
그가 한 모든 행정 군수지원임무란 살상을 위한물적 준비를 한 것이며, 이것이 살상에 대한지휘감독자의 간접정범 혹은 공동정범이 될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그런데도 재판부는 오직 자위권발동결정에 관여한 사전공모자에 대해서만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 황영시와 정호용 등을 무죄로 단정해버리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둘째, 재판부의 이러한 관점은 판결선고에서도 기묘한 결론에 이르게 했다. 내란목적살인의 사전공모행위에 관여한 이희성, 주영복에 대한 양형 이유를 보면,그들을 고위공직자로서 무겁게 처벌하기로 하되 그 피고인들이『5· 17, 5 · 18 사건의 초기모의에 배제되어 있다가 위 사건의 실행단계에 즈음하여 가담하게 된 점에 비추어 보면 주동적 위치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위 피고인들이 계엄사령관이나 국방부장관이라는 직분으로 인하여 다소 수동적으로 이 사건에 가담하게 된 점 등의 사정』을 고려한다고 했다 즉 그들은 직분으로 인해 수동적으로 내란목적살인에 이끌려간 것이며, 전과정에 주동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절인 직분과 무관하게 능동적으로 사건을 야기한 자와 초기부터 주동적 위치에 있었던 실세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이 판결에서는 전두환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능동적 · 주동적 역할을 한 자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대량살상이 어디 단독범에 의해 저질러질 사안인가. 실제 그러한 능동적 ·주동적 역할을 했다고 인정되는 황영시 정호용 등을 무죄로 선언하고 난 뒤 , 재판부는 직책상 부담을 떠안은 자들에게 양형상의 참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주요 관며자 모두가 대단찮은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되어, 실제의 주동자는(전두환을 제외하고는) 판결 속에서는 증발해버린 것이다
왜 이러한 기묘한 현상이 생겨났을까 초기모의행위만을 내란목적살인으로 인정한 재판부의 법리구성도 물론 한 이유가 된다. 그것보다 문제의 근원은 피고인의 범위를 축소기소한 검찰에 있다고 본다.내란목적살인의 실행단계 책임자인 소준열 전교사령관, 박준병 20사단장 등을 (내란목적살인이든 단순살인이든 간에) 전혀 기소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행위를 하도록 문서를 전달하거나(황영시) , 작전을 잘 수행하도록 행정군수업무를 지원한 행위(정호용)를 처벌하기 난처해져 버린 것이다. 이는 검찰의 수사가 내란목적 「살인」에 대한 단죄보다 「내란」에 대한 법리구성에 치중함으로써 생긴 문제인 것이다
만약 시민학살행위의 책임자를 가려내는 데 초점을 둔다면 현지의 하급지휘관과 병사 그리고 그 지휘선에 있는 자들이 각자 어떤 행위를 했고, 어떤 지시를 받고 그 지시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명령실행을 담당했던 책임자와 그 지휘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검찰은 책임을 위로부터 추궁해 내려오기만 함으로써 계엄사령관과 국방부장관 선에서 책임선이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항소심에서는 내란목적살인의 직접실행자로부터 상위의 명령자로 추궁해 들어가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접근방법』이 아울러 구사되어야 한다.
현재 소준열 박준병 현지공수여단장 등의 (내란목적)살인에 대한 기소는 없었으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하급지휘관 및 병사의 책임과 함께 별도의 수사 · 기소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번 재판이 최상급 명령자의 책임을 묻는 재판이라는 의의를 갖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살상행위의 구체적 실상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와 국가의 진실의무를 충족시키는 차원에서 실행지휘관에 대한 재판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법정에서조차 소외된 피해자들
1심재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하나의 문제는 5 · 18 피해자들의 증언을 제대로 청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가기관인 검찰과 피고인측의 공방으로 공판이 진행 되었고, 이 재판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던 피해자와 광주는 이 재판에서도 소외되었다.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 규정에 따르면 범죄피해자의 신청이 있는 경우에는 그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문하여야 하며 (헌법제2i조 제5항, 형소법 제294조의 2), 피해자를 신문하는 경우 법원은 피해자에게 당해 사건에 관한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형소법 제294조의 2 제2항) .피해자에게 단지 법원에 대하여 자신의
체험사실을 보고하는 증거의 객체를 넘어서 의견진술권까지 보장한 것이다. 광주의 피해자들이 이러한 피해자진술권을 얼마나 알고 신청했는지 모르지만, 이 공판정에서 피해자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방청석에서 울부짖고, 법원 밖에서 소복을 입고 항의하는 모습으로만 비쳤을 뿐이다. 공판정의 중심이 아니라 외부에서 울부짖는 것은 연민의 정을 더해주기도 하겠지만, 일부에서 지나치지 않느냐는 시선도 맞닥뜨리게 된다. 법정은 차분한 어조로 진실을 정확히 진술하는 태도가 가장 어울리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눈물과 고통과 한을 눈앞에서 느껴보지 않은 탓에 피고인의 오만스런 처신이 변함없이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무슨 명분을 내세우든 간에 피고인들은 그들이 자행한 끔찍한 범죄와 그 휴유증을 직시하고 청취
할 윤리적 의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라도 피해자의 법정진술권은 항소심에서 충분히 행사되어야 한다. 광주의 단체들은 이를 적극 주장해야 할 것이며 , 재판부 역시 이를 적극 수용해야 할 것이다.
집권가도에 저항했던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신군부 세력은 권력장악을 위한 일련의 숙정작업을 진행시켜 나갔다.전국계엄의 실시 비상기구의 설치,국회의 무력화와 국회의원 체포, 반대 정치인들에 대한 체포와 구속기소와 활동정지 , 학생과 시민들에 .대한 예비검속 등을 계획된 수순대로 집행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와 국가보위입법회의를 통해 행정권과 입법권을 장악하고, 대법관의 사직등을 강요하며 사법권의 독립을 유린했다 그리고 공직자숙정, 언론통폐합과 언론인해직, 주요 정치인에 대한 정치활동금지 , 삼청교육대 등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틀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개개의 행위를 따로 떼어놓고 보면 어떤 경우에는 내란의 폭동이라 보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행위자의 전체 범죄계획을 감안하고 보면, 이 모든 행위가 법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거나, 헌법적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국헌문란의 목적 (형법 제91조)에 정확히 부합되는 것이다
여기서 내란목적 달성을 위한 신군부측의 수순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즉 권력의 산실인 군에 대한 주도권 장악, 보안사와 중앙정보부 등 정보기관의 장악, 민간정부와 국회의 장악, 공무원과 언론의장악. 이 바탕 위에서 80년대 권력정치가 가동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자비한 인권유린 행위가 저질러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도 자신들의 국정지표를 「정의사회 구현」으로 내건 것은 아이러니의 극치를 보여 준다.
위 일련의 행위를 내란의 폭동으로 열거한 판결의 취지가 타당함은 물론이다. 그러면서도 이 재판은 몇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공직자숙정· 언론통폐합 등의 조치를 주도한 자(이상재 허문도 허삼수 등)에 대한 책임을 별도로 묻지 않은 것이다.
둘째, 광주항쟁이 종식된 후 단일규모로 최대의 피해자를 내며 적법절차를 송두리채 유린한 삼청교육대의 설치유지행위에 대하여 아무 언급이 없는 것은 대단히 유감이다.
셋째, 국보위의 계획과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며,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아무 언급이 없다. 이는 국보위의 각종 조치와 입법의 법적 효력과도 관계된 것이므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넷째, 5 18이후 폭동종료시점까지 자행된 영장없는 체포와 장기구금, 무자비한 고문, 강제연행 등 각종 불법과 인권유린행위에 .대한 체계적인 언급이 없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초래한 데 대한 일차적 책임은 법원보다는 검찰이 져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유죄판결에 나타난 가해자의 잘믓과 당시 피해자의 범위가 일치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5 · 15과 법원 · 검찰의 책임
1심 판결에서는 신 군부측이 법원을 어떻게 유린했는가에 대한 언급도 있다. 김재규 피고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김재규 등에 내란목적살인을 인정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을 낸 양병호 대법원판사를 보안사 분실로 연행해 사표를 강요하고, 함께 소수의견을 낸 민문기 임항준 김윤행 서윤흥 대법원판사를 일괄 사직하게
했던 것이다. 김재규 사건의 판결은 1980. 5. 20에 내려졌는데, 당시의 험악한 상황에서 신군부의 각본을 따르지 아니하고 소수의견을 낸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소신을 요하는 일이었다.
소수의견을 집필했던 대법원판사가 강제사직을 당한 한편, 다수의견을 집필했던 유태흥 대법원판사는 대 법원장으로 영전되었다. 그는 5공내내 좋은 세월을 보내다 국회에서 사상초유의 탄핵소추발의까지 받았을 정도로 불명예를 당했다 결국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한때의 영광」과 「영원한 명예」라는 선택의 갈림길 이었음을 알 수 있다.
80년 격변기에 대법원장이었던 이영섭은 퇴임사에서 『취임 초에는 포부와 이상도 컸으나 과거를 돌아보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것 이외에는 아무 젓도 아니었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법원 역시 이 시기에 오욕과 회한, 오명으로 기록될 판결을 양산했다. 내란행위자들이 집권의 정당화를 위한 발판으로 검찰과 사법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정승화 등을 내란방조로 판결하고, 김대중 등을 내란음모로 단죄하고, 광주의 피해자들을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으로 단죄한 것은 사법부였다. 5 · 18특별법에서 규정된 특별재심이 진행되지 않는 지금, 이들에 대한 유죄 확정 판결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상태이다.
피고인측의 변호인단은 바로 이를 걸고 넘어졌다. 즉 『정승화 등에 대한 내란방조의 유죄판결이 확정된 이상 그 확정판결의 기판력의 효과로서 내란방조의 사실관계는 더이상 다툴 수 없으므로, 그 정승화의 연행행위는 정당한 것이며, 그와 관련된 병력동원행위도 정당한 행위』라는 주장이다. 그에 대해 재판부는 정승화의 범행과 12 · 12반란은 『피고인 및 범죄사실면에서 서로 다르므로』 정승화에 대한 확정판결의 효력은 이 사건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은 사실인 만큼 변호인단의 주장은 잘못된 확정판결을 아직 유지하고 있는 법원의 아픈 부분을 찌른 셈이며, 역설적으로 기존의 확정판결에 대한 재심이 더 이상 유예될 수 없는 과제임을 일깨워준 셈이기도 하다.
변호인단의 논법대로라면 5 · 18과 관련된 일련의 판결에 대해서도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내란죄의 확정판결을 내세워 자신들의 행위는 오직 내란 기도를 제압한 구국의 결단으로 아직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변호인들로서도 차마 그러한 주장을 하지는 못했다
그들이 자행한 엄청난 살육의 피해자를 앞에 두고 자신들이 조작해낸 확정판결을 정당화의 명분으로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변호인단은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어떤 주장도 할 수 있으나, 사실 확정판결의 존재를 정당화의 방편으로 내세움은 파렴치한 것이다. 김재규 등, 김대중 등, 정동년등에 대한내란의 확정판결은 적법절차가 전혀 보장되지 않은 가운데 신군부의 각본을 재판부에 강요한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의 철권통치기간에서조차 소위 「내란사범」들을 사면하고, 나아가 민주화운동으로 승격하고, 보상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유죄의 확정판결이 그만큼 모순투성이였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80년의 거꾸로 된 확정판결을 만들어 내는 데 당시 검찰의 몫이 적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검찰로서 아픈 대목의 하나는 삼청교육대 실시에 직책상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 점 때문에 검찰의 공소장과 논고문에 유독 삼청교육대에 대한 언급만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1980년대 자신들이 고의 혹은 과실로 저질렀던 잘
못을 솔선하여 바로잡는 「사법바로세우기」를 통해 법원과 검찰은 변호인 단의 그릇된 주장을 논박할 도덕적 권위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항소심의 과제
위의 논의를 통해 12 · 12, 5 · 18과 관련된 검찰과 법원의 당면과제가 자연히 도출된다 그중 일부는 항소심에서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과제이며 나머지는 새로운 재판과 사법적 결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12 · 12와 i · 17의 법리를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보다 세련화시킬 것이며 ,미진했던 5 · 18살상행위에 대해서는 진실규명과 책임자처벌이란 각도에서 더욱 집중적인 심리를 해나갈 것
▲ 5 · 18 살상행위의 전모와 그것의 법적 성격을 정확히 이해한 다음, 그에 의거하여 내란목적살인과 단순살인을 구별지어 처벌할 것.
▲ 전두환 등에게 5 · 18의 전기간에 걸친 살인의 책임을 지우고, 대량학살의 기능적 분업적 특성을 고려하여 황영시 정호용 등 살인에 관여하고 원조했던 자들을 (공모)공동정범의 법리에 따라 응분의 책임을 물을 것.
▲ 검찰로서는 증거 보강과 새로운 방법의 증거를 확보 구사할 것. 그를 위
- 이전글[월간지 관련기사] 역사적인 피고인들의 법정 최후진술,전·노등 16명.최보식(월간조선, 1996.9)-냉무 07.05.30
- 다음글[월간지 관련기사] 전두환.노태우 사면하면 안되는 일곱 가지 이유 07.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