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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학살 원흉 7적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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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 원흉 7적의 현주소



노가원<소설가>



누가 쏘고 누가 쩔렀나


다시 5월이 오면 그 해 잔인한 오월의 '오월'이라는 노래가. 귓가에 쟁쟁하다. 더구나 1990년인 올해 오월에 듣는 그 '오월'은 우릴 더욱 슬프게까지 한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십 년이 가고 강산도 한 번 변했으니 이제 잊혀질 만도 하지만 더욱 큰 파장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오월'의 의미는 우리에게 뭘까. '여소야대'다. '청문회' 다 시끌벅적 거렸던 지난 10년이 가고 '광주'는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해 오월에 산화해 간 영령들은 망월동 묘지에 무덤 하나씩만 남겨둔 채 더욱 원통할 뿐이며 행방불명인 자는 아직도 소식조차 없고 부상자는 부상자대로 깊어 가는 상처만 어루만질 뿐이다.
  광주는 여전히 은폐되어 있다. 진상이 가려져 있으니 명예회복은커녕 골만 깊게 패일 뿐이다. 여지껏 달라진 것이 있다면 '광주폭동'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광주(민중)항쟁' 정도로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며, 또 그렇게 불러도 누가 잡아가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그날의 '폭도'는 오늘 '시민'으로 완전히 돌아왔는가 ! 정녕 광주 항쟁의 원인은 무엇이며, 누가 '쏘라'고 지시했는가 ! 아니면 여전히 '자위'인가 ! ‥‥‥ 물어봐도 10년의 허송세월과 함께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다. 이 글은 바로 '메아리'의 원인을 캐기 위한 작업이다. 즉 '광주항쟁'이 아닌 '광주사태'에 대한, '시민'이 아니라 '폭도'들로 보였던, 그 동안 광주사태를 들먹일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이름이 빠지지 않고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던 '광주사태 주역들'의 그 해 오월을 전후해서, 이후의 행적과 현주소를 밝히는 글이다.
  한때(어쩌면 지금까지도) '광주오적(光州五滅)'이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여지껏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떤 이유로든 그들 가운데는 억울한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광주사태의 주역을 들라하면 우선 그들을 거명할 수밖에 없다.
  전두환(당시 보안사령관),정호용(당시 공수특전 사령관), 노태우(당시 수경사령관) 박준병(당시 20사단장), 이희성 (당시 계 엄사령 관 겸 육군참모총장). 여기에서 '허수아비'소릴 듣든 어쨌든 최규하(당시 대통령)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광주 사태로 '반미'의 불씨에 기름을 끼얹었던 미국 내지 주한미군사령관 위컴 역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광주사태를 이야기하자면 79년 12 · 12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직접적인 발단은 5. 17쿠데타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로 5 · 17 이후부터 개인별로 대비할 것이다.
 

전두환(80년 보안사령관 겸 증정부장) - 80년대 벽두를 피로 물들인 장본인

  새삼 거론할 건덕지도 없이 천하가 다 아는 실세 의 기동이요 리더였다. 79년 10. 26 직후 군 · 검 · 경 수사권을 총괄하는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떠올랐던 그는 12 · 12를 주도, 이 후 줄곧 실세 의 리더로 활약해 왔다.
  국군보안사령관 겸 중앙 정보 부장 서리였던 전두환은 광주사태 당시 드러내놓고 활약하기보다는  막후에 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 진다. 그가 행동을 보인 5월 27일 도청앞 집단발포가 있던 날이었다.
허정환 당시 505 광주보안부대 수사관은 '양심선언' 에서, "서울에서 전두환 보안사령 관이 직접 광주 K-57비행장에 도착, 상무대 전투병과 교육 사령부에서 사태 진행과정에 대한 브리핑 을 받은 후 헬기로 광주 일원을 살펴보고 상경한 후 전교사 기밀실에서 505  보안부장 이재우 대령, CAC 사령관 윤흥정 중장, 공수특전 사령관 정호용 소장, 11공수여단장 최웅 준장,7공수여단장 신우식 준장,3공수여단장 최 세창 준장,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소장, 전교사 참모장 장사복 준장 등 계엄관계관 회의가 개최되었는바  (중략) 그리고 그 날 수사회의 과정에서 상기 505 대공과장 서의남 중령은 "오늘 사령관님 께서 부대에  들르시지는 않았지만 광주를 다녀 가셨고 전교사회의 결과 역시 자위력 구사를 최종 결정했으니 폭도들에게 곧 사살명령이 내릴 것이다 (중략) 그 때 저는 아 ! 이것이 정식 발포명령이구나 그리고 정말 역사적 순간이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4· 19의거 당시 발포문제로 시비가 있었던 점을 회상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자위권 발동과 관련된 것인데, 전두환은 그 날 상오 계엄 사령관실에서 결정한 군 수뇌부의 '자위권'건을 갖고 직접 광주에 내려와 광주 505보안부대와 공수부대 지휘관을 통해 21일 오후6시 현지 전교사 지휘관회의에서 공식 결정토록 한 것이 다.
  전두환은 그해 8월 22잎 육군 제1사단 사령부 연병장에서 전역식을 가졌다. 이 식장에서 그는, "장기집권에 따라 생겨난 직권의 남용 및 도덕의 결여로 새로운 역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보수주의의 수렁속에서 쇠약을 야기했을 뿐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다"라고 박정희 정권을 비판 하기도 했다.
  그해 8월 27일 잠실 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됐다. 이로써 전두환 정권이 발족한 것 전정권 7년에 대해서는 새삼 거론할 것도 없다. '태어나서는 안될 정권' '청산되어야 할 5공'을 남긴 채 전두환은 물러났고, 결국 백담사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89년 12월 31일. 광주사태라는 거대한 족적을 남겼던 80년대 '최후의 날'이자 그 해의 마지막 일요일. 백담사에 은둔한 지 1년만에 전두환은 국회 청문회 장에 섰다.
  이해찬 의원(평민)은 의사진행발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80년대 의 벽두를 피로 물들였던 증인(전두환)이 10년을 마감하는 마지막 날에 거짓과 위증으로 다시 80년대 말미를 더럽히는 과정을 지켜보며 서글픔과 분노와 저주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한때 전두환의 위증시비는 위증고발로 치닫는 듯했다. 야권뿐만 아니라 미국정부로부터도 "8O년 5월 북한위협경고 안 했다"고 반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대 야합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는 89년 12월 15일 '4당 합의에 의한 전씨의 국회증언'이라는 청와대의 덫에 걸렸다. 박희태(당시 민정당 대변인)는 성명을 발표. "전두환 전대통령의 증언으로 파란만장의 80년대는 역사의 장으로 넘어갔으며 이제 과거는 끝났고 청산의 막은 내렸다'고 말했다.
  과연 과거는 끝났는가! 전두환은 아직도 백담사에 은거하고 있다. 소식통에 의하면 '서울복귀'를 노리고 있다고도 하며. 제2의 은둔지를 물색중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정호용(80년 특전사령관)-행동개시는 내일 새벽 정각 4시

80년 '서울의 봄'을 무참히 짓밟은 것은 5 · 17쿠데타였다. 그날밤 자정을 기해 비상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서울의 봄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실로 길고 암담한 겨울이 거슬러 왔다 그 날의 쿠데타 이정표는 80년 5웜 17일 10시부터 15시까지 국방부에서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였다.
  이 지휘관회의는 최성택(당시 합동 참모 본부 정보 국장)이 '정세분석전황을 브리핑'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 주영복 당시 국방 장관은 "이 시점에서 어떤 단안들 내리지 않으면 안될 시기"라며 지휘관들의 의견 개진을 요청했고, 군수 기지사령관이 "군이 직접 개입한다는 것은 중요한 결과가 된다"며 국민여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할 때 계엄확대를 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피력했다.
  이 자리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국민이 원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그렇게 표현합니까. 각자의 소신과 정세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현재 보기에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만약 이것을 더 놔두면 점점 위험해 집니다 소수 주장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대다수는) 비상계엄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국회가 개회되면 국가를 오도할 사례가 많아집니다. 우리 나라의 장래가 극히 염려되는 시점입니다. 전 국민이 모여서 비상대책회의를 설치하여 (상황)타개가 요망됩니다. 이런 주장에는 학원 · 정치 · 경제문제 등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하루아침에 경제가 무너집니다. 어떤 일이 다가와도 달갑게 받아들일 것을 각오하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
  이날 지휘관회의는 '비상계엄 확대'건의 쪽으로 모아졌고 국방장관에 의해 국무회의에 상정됐다. 그러나 이날 21 : 40비상국무회의의 계엄령 확대실시 의견이 있기 전 정호용 특전사령관 휘하의 공수부대는 서울과 광주 등지로 사전 투입되었다. 후에 국회 청문회에서 이 문제를 추궁 당한 그는 '비상계엄을 전제로 해서 지시를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광주사태 당시 가장 바빴던 사람 중의 한 명은 정호용이었다. 그동안 발간된 자료들에 의하면, 5월18일 현지보고를 받은 그는 제3공수특전여 단 최세창 준장에게 광주로 출동할 준비를 갖추도록 지시한 다음, C-54 특별 기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현지를 시찰, 보고를 받고 급거 상경 , 전두환 등 군 수뇌부들과 대책회의를 하면서 "계엄군을 증파해야겠다"고 건의했다.
  이희성(계엄사령관) . "서울에도 산발적인 움직임이 있는데 ‥‥‥‥
  정호용 : "서울은 더 확대되지 않습니다‥‥‥제3여 단장에게 출동 준비를 지시했는데 11여단도 동시에 내려보내겠습니다. "
  전두환 : "20사단도 함께 진입시키는 게 좋겠어"  5월 26일 하오 정호용은 광주비행장 사령실에서 제20사단장 박준병과 3여단장 최세창, 7여단장 신우식, 11여단장 최웅을 불러놓고 이렇게 지시했다.
  'TOT(목표상 행동개시)는 내일 새벽 정각4시다. 절대로 정보가 누설되어서는 안돼."
  광주사태 후 정호용은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승진을 거듭, 83년 정규육사출신으로 최초의 육군참모총장이 된 그는 85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2년 후 내무장관에 발탁되었으나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으로 퇴임, 곧바로 국방장관에 기용되는 저력을 보였다. 이어 제13대 국회에 민정당 공천으로 대구서갑구에서 당선, TK(대구 · 경북의 이니셜)로 정치일선에 나섰으나 청문회 이후 된서리를 맞게 된다.
  1989년 하반기 정치권은 전두환 · 최규하 국회 청문회 증언과 정호용등 5공 핵심인사 처리 문제로 수놓아졌다. 90년 1월 8일 정호용은 광주사태의 책임이 아닌, 국가 안정을 위한다는 명분론 아래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4월 3일 대구서갑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또 한번 혼돈을 몰고 왔다.
  그는 결국 출마를 포기했으며, 현재 미국에서 장기체류 중이다.

노태우(80년 수경사령관)-"다음 차례는 나의 것"

5 · 17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그는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국민이 원하는 정부의 힘이 부족하면 군이 도와드려야 합니다. 정치는 완전히 불신입니다. 이렇게 나가면 정당은 없습니다. 학원은 무정부주의입니다. 여러 기업들도 항의하고 있습니다. 영세 기업이 50∼60만 달러 계약이 취소됐다고 원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부를 도와야 하는 시기에 왔습니다. 무기력하고 소신 없는 것이 개탄스럽고 생존과 안정 ,
국민이 바라는 민주역량비축의 장해요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각종 부패, 소신 없는 사항과 자기관성과 난국수습에 군이 이바지할 것을 건의합니다. "
  광주사태에 관한 한 그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수경사령관의 임무가 수도권의 방어이며, 역대 수경사령관이 정치에 민감했던 것과 전두환 · 정호용등과 함께 육사 11기라는 관계, 무엇보다도 12 · 12의 핵심인물이라는 점과 5공화국 출범과 함께 그가 기능해 온 역할에서 광주와 그는 '불가분'이라고 보여지지만, 역시 광주사태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은 확인할 수 없다. 물론 그는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5 · 17을 주도한 사람 중의 한 명이었고, 광주사태 기간동안 전두환 보안 사령관과 행동을 같이했다.
  80년 8월 13일 그는 중장으로 진급, 곧바로 국군 보안사령 관에 취임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일반 대중뿐만이 아니라 매스컴에도 좀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12 · 12이후 갑자기 인구에 회자되어 온 그를, "머리에 뿔이 달렸다"고 어느 외신은 보도할 정도였다.
  81년 7월 15일 서부전선 00사단 연병장에서 그의 전역식이 거행됐다. 대장으로 예편한 것이다. 당시 한 일간지는 "그는 전역식이 거행되는 동안 감회가 깊은 듯 서너차례 손수건으로 눈언저리를 닦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전역식 다음날 고는 제2정무장관에 임명됐다. 그가 정무장관 재임시 남긴 공적이라면 '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꼽는다. 82년 3월 초대 체육부장관에 선임됐으나 한 달 후 발생한 의령경찰관 난동사건으로 그해 4월 내무장관에 발탁됐다.
  그리 나 그는 83년 7월 서울올림픽 위원장에 선임돼 비정치적 자리로 옮겨 앉았다. 이듬해 10월에는 대한체육회장을 맡았고 대한올림픽위원장, 아시아경기 조직 위원장, 국민 체육진흥재단 이사장 등도 역임했다.
  서울올림픽 관계 업무에 줄곧 몸담아 오던 그가 정계 전면에 나선 것은 85년 2 · 12총선에서 전국구로 진출한 이후였다. 당시 정가 관측통들은 '제2인자로서의 노태우'가 제자리 찾기를 했다느니 흑은 '정치안(案)의 현실화'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항상 위험수위에 얹혀있는 2인자였다 87년 6월 1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그는 '하늘의 뜻'을 뇌이며 차기대통령후보로 지명받았다. 그러나 국민은 더이상 '체육관대통령'의 출현을 용납하지 않았다. 거대한 6월항쟁의 함성이 일어선 것이다.
그는 '6· 29'라는 항복선언장을 던졌다. 그러나 89년 12월 그는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준병(80년 20사단장)-가장 넓고 중요한 지역 맡음

  5 · 17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 그는 유일한 사단장급으로 참석했다. 육본 직할의 하나밖에 없는 서울 주둔 부대장으로 참석한 것이다.
  소위 '경복궁팀' 중의 한 사람으로 12 12에 참여했던 그는 5훨 20일 밤 10시 휘하 부대를 광주로 투입시키고, 자신은 21일 새벽에 사단사령부와 추가로 보내는 1개 연대를 이끌고 광주로 갔다.
  광주사태를 둘러싼 주요 쟁점 중의 하나는 진압작전이다 그는 88년 7월 한 월 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입은 우린 사단을 포함해서 31사단의 일부 병력, CAC의 보병학교 ·포병학교 병력,그리고 공수단 등도 함께 나누어 맡았습니다. 그중 우리가 가장 넓고 중요한 부분을 맡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작전명령은 지금 원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5훨 25일 오전 CAC사령부에서 26일 D데이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그 명령을 근거로 이후 사단에 명렁을 내렸습니다. "
  -진압작전을 할 때 20사단은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당시 광주시내의 도청 · YMCA ·사직공원에는 상당히 조직화된 시민군이 있다는 전제하에 그 지역은 일단 공수단이 제압한 후 우리에게 인계해주기로 했어요. 나는 우리 사단의 책임구역을 바둑판처럼 구분, 주요지역, 우리가 장악해야 할 지역마다 번호를 붙이고, 각 단위부대 별로 책임져야 할 지역을 분담시켰습니다. 모두 27일 새벽 4시반까지 책임지역에도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새벽 1시경에는 모두 주둔지를 떠났습니다. "
  그와 그의 휘하부대 20사단은 광주사태가 진압된 후에도 한 달가까이 광주에 있다가 철수했다.
  광주사태 후 그는 육본인사참모부장을 거쳐 81년 7월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 3년을 역임하고 대장으로 예편했다.
  "보안사령 관으로 있던 중 정년이 앞당겨지고 해서 옷을 벗기로 결심했어요. 당시 권익현씨 권유로 지역구를 맡게 되었지요. 그래서 84년 9월 13일 지구당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았어요,"
  이듬해 32대 국회의원에 고향인 충북 옥천에서 민정당 공천으로 금메달을 따고 등원한 그는 초선 의원으로서 민정당 국책조정위원장,중집위읜 그리고 국회 보사위원장 등을 역임,만만치잖은 실력자 임을 과시 했다.
  5공시절 한때 장세동 전 안기부장과 함께 '후계자'란 말이 은밀히 나돌기도 했던 그는 88년 13대 국회에 재선, 민정당의 사무총장을 맡았다. 국회 광주특위청문회에 증인으로 출두하기도 했던 그는 민자당 합당 후, 잠시 떠났던 사무총장에 복귀하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희성(80년 계엄사령관)-특수진압봉 수입제시

  12 · 12후 정승화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취임한 이희성은 5공 주동세력치 실세이면서 실세가 아닌 듯 보이지만, 광주사태 당시 그가 위치한 직위나 행위로 보아서 영낙없이 주역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80년 2월 18일 이희성은 1군, 2군, 3군 사령관과 특전사령관(정호용), 수경사령관(노태우) 앞으로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돌발적 소요사태에 대비하여 신속정연한 조치를 강구할 수 있도록 폭동진압 교육훈련, 일명 '충정훈련'을 실시하라는 것이었다.당시는 국내 소요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특별지시에는 1)매분기 1회씩 주기적인 교육을 실시하되 1 · 4분기는 2월 중에 완료할 것 2)폭동진압장비사용에 관한 훈련 중에 화염방사기와 진압봉의 조작요령이 들어 있었다. 김영진 (국회의원 · 평민당)은 「충정작전과 광주항쟁」에서"1980년에 들어와서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국민에게 북한의 남침야욕을 말하면서도 실제로 내부에서는 국민들의 저항을 억누르는 시일진압훈련에만 집중해 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충정훈련'의 정치적 목적은 신군부세력이 탈법적으로 권력을 탈취할 경우 예상되는 학생 및 국민의 저항을 초기에 분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광주사태 초기에 공수부대원의 진압봉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광주사태의 원인 중의 하나가 과잉진압이었다는 전제 아래, 진압봉이 그 일익을 담당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희성은 광주사태 초기인 5월 19일 「작상전 제 0-215호」에 의 해 공수부대뿐만 아니라 2, 3군과 수도군단에 총 1만개의 진압봉을 수령토록 지시했다. 광주에서 18-19일에 진압봉에 의한 소요진압이 작전상 큰 효과를 보이자 이를 전국에 추가 보급토록 한 것이다.
  광주역에서 군에 의한 최초의 집단 달포가 개시된 다음날인. ?월 21일, 이희성은 계엄사령관실에서 관계 지휘관 및 참모를을 참석시키고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은 △계엄군을 광주시내로부터 외곽으로 전환재배치 △자위권 발동 △(공수)1개 연대를 추가 투입 △ 폭도소탕작전은 5 -23 이후에 의명실시 등이었다. 이로써 광주사태와 관련한 최초의 자위권(발포권)이 군수뇌부에 의해 결정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폭도 소탕작전(상무충정작전)을 5월 23일 이후 명령에 따라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
  80년 당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은 이듬해 대장으로 예편했다. 81년방직협회장을 맡았던 그는 다음해 교통장관, 84년 5월 이후 대한주택공사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중 국회청문회 이후 5공핵심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줄곧 주목되어 왔다. 89년 12월 15일 청와대 영수회담이 '정호용 · 이희성 공직사퇴'에 합의될 때 그는,'4당이 합의한 5공청산을 위해 본인이 현직을 떠나야한다면 이에 기꺼이 승복한다"며 28일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는 현재 외부와의 접촉을 하지 않고 자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

최규하(80년 대통5)-예우 못받는 전직대통령

  최규하는 79년 10 · 26으로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고, 이어 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도 역시 국민앞에 '선서'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이유로든 대통령으로서의 그 선서를 지키지 못했다.
  80년. 5월 어수선했던 국내분위기 속에서 그는 8일간의 중동순방길에 올랐다. 그리고 예정을 하루 앞당긴 16일 밤 10시 5분 김포공항에 무거운 표정으로 도착했다.
  다음 날 밤·9시 30분 정부는 중앙청 회의실에서 비상국무회의를 열고 18일 10시를 기해비상계엄전국확대를 의결했다. 이날 국무회의에 앞서 전두환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수경사령관은 전군주요지회관회의의 결의사항을 최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전 ·노가 건의한 것은 △비상계엄전국확대 △긴급조치에 의한 국회해산 △각급학교휴교 △5 · 16 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은 기구 구성 등이 었다고 전한다.
  광주사태에 대해 최규하가 대통령으로서 취한 유일한 조치는 5월 2i일 광주로 내려가 KBS를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이었다.당 한 측근은 "광주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최 대통령은 사실상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광주사태 기간 중 최규하는 국보위 설치재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국보위원 26명 중 당연직 16명에 박충훈 총리서리를 비롯한 부총리 · 외무 · 법무 ·국방 ·문교 ·문공장관 등 각료와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 등의 민간인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 · 계엄사령관 ·합참의장 · 육 · 해 · 공군참모총장 · 국군보안사령관(전두환겸임) 등 군인이었다. 임명직 10명에는 백석주 육군대장과 전종채,유학성 윤성민 황영시 차규헌 등 5명의 육군중장, 김정호 해군중장, 그리고 노태우 ·정호용 소장 등 군인으로 구성됐다. 상임위원 30명 가운데 18명이 군 고위장성으로서 국보위를 주도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군이 통치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로써 최규하는 어떤 이유로든 직무를 유기했다. 88년 8월 전두환의 술회에 의하면 최규하 대통령은 80년 7월 초 전 보안사령관을 불러, "전 사령관이 아무래도 중책을 맡아야할 것 같소"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대통령을 사임했다.
  국회 청문회에서 그는 수차에 걸쳐 증인출두 요구서와 동행명령장을 받았다. 그는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들어 번번히 거절해왔다. 예우란 스스로 자청해서 될 일이 아니다. 과연 그에게 청문회 증인출두를 거절할만한, '예우받을 만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이 있었던가.

위컴(80년 미8군사령관)-쿠테타 조종의 명수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 전달통로는 대개 세 채널로 알려져 있다. 미대사관과 미CIA서울지부, 그리고 미8군사령부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광주사태가 군작전상의 개념이고 보면 미8군사령부의 채널이 정통할 것이다.
  광주사태 당시 미8군사령관은 존 위컴. '쿠데타 조종의 명수'라고 알려진 위컴은 전임 사령관 존베시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교체됐다. 1961년 주한미군 1기갑사단 제5연대 작전장교로 근무하면서 한국장교와의 인맥 관계를 긴밀히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진 위컴은 월남전쟁에서 전두환 · 노태우 등과도 교류가 있었다.
  광주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인 80년 5월 14일 위컴은 휴가 중으로 워싱턴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매스컴에서는 그의 귀국이 한반도 주변 정세 및 한국내 사태 등에 대해 워싱턴 당국과 협의하기 위한 짓이었다고 보도했다. 위컴은 27일까지의 워싱턴 일정을 취소, 광주사태가 발생하던 18일 오후 서울로 돌아왔다.
  미국방성 로스 대변인은 그 해 5월 22일 처음으로 "존 위컴 주한유엔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이 광사태의 진압을 위해 일부 부대에 대한 작전권을 한국측에 이양했다"고 밝혔다. 또한 워싱턴 포스트지는 "한국의 장성들이 광주사태진압을 위해 일반 예비병력 중 4개 연대의 병력을 요청, 미국측의 허락을 받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군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광주사태에 대한 방관 내지 관여는 이후 한국에서 반미의식을 행동으로 표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 ? )를 해왔다.그동안 미국의 알리바이를 주장하던 광주사태 주역들과 미 당사자들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군투에 찬성했다는 자료와 증언은 더러 나타난다..
  제임스 릴리 전 주한대사는 88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협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글라이스틴씨는 20사단이 민간인들을 다루는 데에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20사단을 광주로 보내는 데에 찬성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으며,또 그는 20사단은 특전부대들보다는 덜 잔인하게 문제를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라고 털어 놓았다. 20사단의 광주투입에 관해서는 유병현 당시 합참의장도 "거의 매일 위컴 대장과 만나 광주사태에 관하여 논의하였다"고 전제, "20사단의 이동에 대해서는 내가 위컴사령관에게 통보하였습니다. 20사단은 연합사 작전통제권 바깥에 있는 부대이므로 통보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대부대의 이동이므로 알린 것 입니다"고 말했다.
  광주사태 진압 후 전두환등 신군부는 집권을 향한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바로 이 때 위컴은 전정권의 탄생을 됫 받침 하는 제스처 를 취하기 시작했다.80년 8월 7일 그의 집무실에 서울주재 미국기자들을 모아놓고,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이 한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경우, 미국은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언명한 것이다. 그는 이 회견에서 "전두환 장군이 가을쯤에 가서 최규하 대통령을 사임시킬 가능성이 크며,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전 장군을 잠정대통령으로 지명할 경우, 미국은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인의 속성은 들쥐와 같아서 어떤 지도자가 나와도 따를 것"이라는 '들쥐발언'으로 익히 알려진 위컴은 전 정권이 들어선 이후인 82년 5월 미 육군참모차장에 임명됐다.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현대사는 청산해야 할 많은 '욕된 역사'를 왜곡 내지 미화시켜 왔다. 민족정기는 그렇게 상실됐고, 어두운 과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광주항쟁도 그런 과거의 하나로 묻혀 가고 있는 것이다.
  광주사태의 주역들은 1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집권층의 핵을 이루고 있다. 5공화국이 가고 여 소야대 국회가 생겨났을 때, 그런 정치구조 속에서 '광주특위'가 탄생되어 소위 청문회 정국이 펼쳐졌을 때 "혹시나? "하고 광주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희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애당초 그런 희망은 뜬 구름잡기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광주의 진상밝힘은 여야 야합에 의해 붕괴됐다.그리고 지난 1월 22일 가공할 덩치의 '거여'가 탄생했다.
  광주는 어디로 갔는가. 어두운 과거가 현재진행형이면 광주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