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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80년 광주, 정호용과 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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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 정호용과 정웅

김영택(신동아)

정호용씨가 국회의원직과 민정당 당직등의 공직에서 물러난다. 야당측의 강력한 요구에 완강하게 버텨오던 그가 드디어 공직사퇴를 결행하게 된 것은 연내 5공청산이라는 시한에 쫓겨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의 공직사퇴는 3야당총재의 합의사항이자 5공 호는 「광주」청산을 위한 최후의 요구조건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광주학살 주역의 한사람」으로 지목된 것이다. 그러나 정호용씨는 이를 받아들이기를 완강하게 거부한다. 정치적 돌파구를 열기 위한 희생양이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있으되 「광주」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될 일이라는 주장이다. 여권도 그의 「명예퇴진」을 강조한다. 그는 「광주」와 관계 없이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그는 「광주」의 주역이 아님을 수없이 강조해왔다. 자신은 광주에 보낸 공수부대의 최고지휘관이었지만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예하부대를 31사단장 지휘하에 배속시켰기 때문에 자신은 공수부대를 지휘하지도, 지휘할 위치도 아니었다고 주장해왔다. 어디까지나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을 받아 광주에 부대를 파견한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정씨는 특히 1980년 5월18일 광주시내에 투입된 당시의 공수부대원들은 피배속부대인 31사단 정웅사단장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군통수계통상의 지휘관이었던 정웅씨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웅씨는 자신은 이미 출동지휘의 책임을 지고 사단장직에서 해임됐고 또 군복을 벗게 됐다면서, 그것은 표면상의 지휘일 뿐 실질적인 지휘는 광주에 상주하다시피한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했다고 반격했다.

「광주」는 어디서 비롯됐는가

  광주민중항쟁의 원인이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있었다는 것은 국회 청문회 등을 통하여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과격시위」 때문에 「과잉진압」이 유발됐다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없지 않다.
  이 「논쟁」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공수부대가 광주시내에 투입된 것은 80년 5월18일 오후 3시30분 전후였다. 전남대에 진주해 있던 제7여단 33대대 무자비한 과잉진압 병력이 광주시 유동 3거리에 모습을 나타낸 시간도 오후 3시30분이었다. 그러나 조선대에 주둔해 있던 35대대 병력이 언제 시내에 투입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오후 1시30분, 오후 3시등 몇가지 설이 있다. 어쨌든 정웅사단장이 33대대에 시내출동을 명령한 시간이 오후 2시25분이고, 35대대에 대한 명령은 이보다 약간 뒤의 일이었다는게 정사단장의 증언이고 보면 33대대보다 늦은 오후3시30분 이후로 봐야 할 것이다.
  오후 3시·30분, 유동 3거리에 나타난 33대대 병력은 4백50m쯤 도청쪽으로 떨어져 있는 북동 180번지 앞 횡단보도까지 아주 느린 걸음으로 오는 동안 시위진압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횡단보도에 횡렬로 정돈해 있는 공수부대병사들에게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오후 4시였다. 녹색차 위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이같이 명령한 지휘관은 이에 앞서 『거리에 나와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라는 방송을 했었다. 그러나 이 방송은 권유가 아니었다. 이 방송이 나간지 1분도 채 안되는 시각에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 또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을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선무방송을 했다는 근거를 남기기 위한 하나의 요식행위일뿐이었다.

무자비한 과잉진압

체포명령과 동시에 공수부대 병사들은 방망이나 장작개비를 든 채 혹은 착검한 소총을 겨누어 잡고 금남로 거리뿐 아니라 점포와 주택과 심지어 신문사 사무실까지 쫓아들어와 시위와는 관계없이 일하는 사람까지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붙잡아 갔었다. 당시 이 대대를 지휘했던 권승민대대장은 「15분동안」 선무방송을 했다고 청문회에서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시민들은 1분도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한 권대대장은 시위대들이 거리뿐 아니라 건물 옥상에까지 올라가 공수부대원들에게 수없이 돌을 던져 자신을 포함해 거의 모든 부대원들이 부상을 당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져 상호 다친 사람이 많이 생겼다고 말했었다.
그는 「과잉진압」이라는 용어자체가 적절하지 않으며 『질서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으므로 과잉진압을 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시민들은 결코 돌멩이를 던진 적도 부상당한 군인들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옥상에서 돌멩이가 날아왔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또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을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시위대와 공수부대의 충돌도 전혀 없었다. 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부대원들이 일방적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연행했을 뿐이다.
  「동아일보」 광주지사에 들어와 시위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총무를 피가 낭자하게 구타한 후 개끌고가듯 연행한 점, 택시를 타고 떠나는 신혼부부를 무수히 구타한 점, 지나가는 처녀를 붙잡아 옷이 갈기갈기 찢기어 나체처럼 되도록 구타하며 희롱한 점, 이 처녀에게 옷을 갔다주려는 40대남자를 구타한 점, 공부하고 있는 방송통신고생들을 구타한 점, 지나가는 버스나 택시를 붙잡아 시위대원을 태워준다고 기사들을 무수히 구타한 점, 서석병원 원장이 장교를 설득해 군인들로부터 두들겨 맞아 중상을 입고 연행당하려는 20여명을 인수받아 치료해준 점 등에 대해 명백한 해명이 없는 한 「무자비한 과잉진압」이라는 지적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이같은 과잉진압은 19∼20일이나 그 이후에도 계속되지만 첫날인 18일의 상황은 곧바로 광주민중항쟁으로 이어진다. 이날의 공수부대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이에 저항하기 위해 다음날인 19일 쇠파이프나 몽둥이를 들고 금남로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도 공수부대의 시위진압방법이 누그러지지 않자 시민들의 저항은 에스컬레이트된다.
  20일의 택시 및 버스기사들의 차량 시위가 그렇고, 20일 밤을 새우는 시민들의 시위가 그렇다. 그러면서 시민들은 시위진압방법 완화건의와 협상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결실되지 않고, 21일 오후 1시 발포과정으로 발전함으로써 6.25이후의 한국사상 최대비극인 광주민중항쟁이 전개되고 말았다.

  공수부대와 「정치군인」들

  여기에서 「광주민중항쟁」으로 인해 한때 지탄을 받았던 공수부대의 위상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순수하게 국토방위임무를 맡고 복무한 장병들에게는 몹시 못마땅하고 불쾌할지 모르지만, 한때 광주에서만은 공수부대가「국민의 군대」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음이 분명하다.
  계엄군의 강제진압으로 표면상 광주민중항쟁이 끝난 5월27일 이후 공수부대복장으로 광주시내를 활보하던 몇명의 공수부대 원이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 이는 공수부대에 대한 일부 시민들의 분노의 표출이기도 했다. 지난번 광주청문회에서 일부특위위원들로부터 공수부대가 「정치부대」로 호칭되기도 했다.
  국민들은 공수부대를 가장 용감한 최정예부대로 알고 있다. 그만큼 신뢰하고 아끼기도 한다. 문제는 박정희전두환씨 등 집권자들이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 이들을 정치적으로 악용한데 있다. 5명의 대통령 경호실장이 공수부대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박정희씨가 정치적 야망을 채우기 위해 5·16군사 쿠데타를 기도하면서 앞장세운 부대가 바로 공수부대였다. 당시 공수부대를 지휘했던 차지철이 일개 대위신분으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며 경호실장까지 오른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차지철은 부마사태 당시 공수부대원을 투입,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할 때 3백만명을 학살한 캄보디아의 「풀포트」정권을 들먹이며 어느정도는 시민이 희생돼도 상관없다는 식의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고 전해진다. 차지철이 군의 통수계통상에 있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부산에 투입된 공수부대를 지휘했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부마사태 당시 부산에 파견했던 제7여단병력이 광주에 맨처음 투입됐다는 사실은 뒤에 「광주」가 처음부터 어떤 정치적 계산하에 저질러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숱한 의혹을 받게 된 요인이기도 하다.
  부마사태나 광주항쟁 이외에도 집권자들은 어떤.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위수령을 발동하면서 공수부대를 투입했었다.
  국군사상 최대하극상 또는 반란사건으로 기록되는 12·12때도 「정치군인」들은 공수부대를 앞장 세워 정치적 야욕을 달성했었다.

  5·17조치 이전에 병력이동

  제7여단 제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도착한 시간은 18일 새벽 2시26분으로 전투상보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5월17일 밤 11시30분이라는 일부 주장도 있다. 이것은 이 부대가 광주로 출동하기 위해 최소한 4시간전에 주둔지를 출발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는 전날 임시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확대조치를 결의하기 훨씬 전에 이동조치를 단행했음을 뜻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 결의안을 통과시킨 임시국무회의가 끝난 것은 17일 밤 9시40분이다. 그러니까 신군부세력은 비상계엄확대조차 결의안이 자신들의 의중대로 통과된다는 전제 아래 이미 공수부대의 광주배치를 5월17일 오후 7시40분 작전 통제명령으로 단행해 버린 것이다.
  특히 제7여단 33,35 2개 대대가 31사단에 배속된다는 사실은 이미 3일전인 15일 연락됐다. 이 연락에 따라 31사단은 도착 예정시간전인 17일 오후 전남대와 조선대에 2개 대대 숙영용 천막 24개를 설치했었다. 이는 곧 5.17조치가 오래전부터 계획되고 있었음을 뜻한다. 특히 1개 대대씩 파견했던 다른 지역과는 달리 2개 대대를 파견한 후 곧 증원부대파견까지 계획한 것은 사전포석이 치밀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신군부세력은 5·17조치를 취하기에 앞서 5·17과 같은 비상조치가 단행되면 광주에서 격렬한 시위가 있으리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서울의 대학생들도 모종의「비상조치」에 대한 풍문을 들었지만, 특히 광주의 대학생들은 『비상조치가 발동되면 다음날 아침 전남대 정문앞에 집결하자』는 것을 공개적으로 약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진압 명령자는 정웅

  전남대와 조선대 운동장에서 숙영하고 있던 공수부대 제7여단 제33대대와 35대대의 권승만 김일옥대대장에게 경찰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시내 시위진압에 출동하도록 명령한 지휘관은 이들을 배속받은 31사단의 鄭雄사단장이다.
  그는 18일 오후 2시25분 500MD헬기를 타고 전남대운동장에 도착, 권승만 33대대장에게 시내 출동을 명령했고 곧이어 같은 헬기로 조선대운동장으로 가서 김일옥 35대대장에게 역시 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는 두 대대장이나 정웅사단장의 증언이 일치하고 있다.
  정사단장의 명령을 받은 33대대 병력이 군용트럭에 실려 유동3거리에 도착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후 3시30분, 명령을 받은 뒤 1시간 5분 후이다. 이들은 이날 새벽에 도착했기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숙영지도 정돈되지 않아 명령을 받고도 상당한 시간을 끌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북동180번지 앞 횡단보도까지 도보로 진출한 후 오후 4시정각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전원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까 「光州비극]의 시작을 명령한 사람은 정웅 사단장임에 틀림없다.
  33,35대대의 두 대대장은 청문회에서 정사단장으로부터 『죽음을 무릅쓰고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정사단장은 이 증언을 전면 부인했다. 그는 18일 시위진압에 나선 공수부대 원들의 무자비한 행동을 안 것은 19일 오후라고 증언했다.
  『19일 15시로 기억되는데 光州의 모든 기관장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기관장들이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이놈의 군대가 어느 나라 군내냐. 왜 국민을 상대로 과격하게 진압을 하느냐‥‥‥』
  정씨는 이날밤 11시 33,35대대장과11공수여단장 경찰국장 그리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연대장 대대장 그리고 일반 및 특별참모를 불러 무혈진압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다. 광주시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강경진압으로부터 무혈진압으로 전환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정사단장은 이같은 무혈진압명령이 제대로 이행되는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20일 오후 두 대대장을 불렀으나 전교사 사령관실에 윤흥정전교사사령관 정호용특전사령관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에게 배속된 33,35대대에 대한 지휘권이 박탈당한 것으로 간주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그의 지휘권이 실질적으로 해제된 것은 21일 오후 4시다. 그 이후에는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이자 全南北계엄분소장 尹興禎중장에게 지휘권이 넘어갔다.
  어떤 형태였던간에 5월 18일부터 21일 오후 4시까지의 공수부대 제7여단 33,35대대에 대한 지휘권은 제31사단장에게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광주민중항쟁의 비극은 18,19일 이틀동안 벌어진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서 비롯되고, 18,19일 시위전압을 위해 투입돼 살상행위에 가까운 과잉진압작전을 편 33,35대대의 대대장에게 진압을 명령한 사람은 정사단장이다.

  정웅, 과잉진압을 몰랐는가

  그들이 31사단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사전에 어떤 내밀한 교육이나 명령을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부대를 직접 지휘한 정사단장은 광주민중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과잉진압」에 대한 지휘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특히 과잉진압 사실을 알게 된 그가 무혈진압명령을 내렸다면, 명령을 받은 지휘관들의 보고이전에 현장에 나가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그는 확인과정을 외면해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헬기를 타고 돌아보니 평온했다고까지 말했다.
  그가 「평온했다」고 증언한 20일은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는 시위와 농성을 계속하고 있던 날이었다. 시민과 공수부대간에 밀고 밀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내는 폭풍전야와 같았었다. 여기에 「평온하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헬리콥터에서 보니 평온한 상황이 유지되고 있었고 33,35대대로부터의 보고도 평온하게 진압해 정상적‥‥‥』이었다고 증언했다.
  여기에서 정사단장에 대한 한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대해 시민들로부터 어떤 제보나  항의를 받지 않았는지, 실제로 19일 오후 기관장 회의에 가서야 과잉진압을 알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윤흥정 계엄분소장은 18일밤 이미 시민들로부터 숱한 제보와 항의를 받고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다』고 증언했었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그는 다음달인 6월, 사단장직에서 해임되고 3개월 후인 9월30일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것을 두고 「광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신군부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정부에 대해 책임을 진 것일 뿐 피해자인 광주시민에게는 아직까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단지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는 표현만으로 광주시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13대 국회에 진출했다. 「광주」에 책임질 두 정씨가 모두 금뱃지를 단 것이다.

「광주」 시작 전의 출동명령

  그러면 광주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된다는 야권의 집중포화를 받은 정호용씨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정씨는 12·12당시 제50사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다음날인 12월13일 육군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당시 특전사령관이던 정병주장군이 12·12세력에 의해 체포된 후 그 후임자가 된 것이다. 정장군은 이때부터 12·12의 주역이었던 전두환 노태우장군과 함께 신군부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한다.
  그는 5·17조치를 취하기 위해 소집된 5월17일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10·26으로 발효중인 당시의 계엄령을「물」계엄이라고 표현, 보다 강경한 대 처를 위해 계엄확대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사람이다. 바꿔 말하면 5·17확대조치의 주역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그였기 때문에 광주시내 대학생들이 『어떤 비상조치가 단행되면 그 다음날 아침 전남대 입구에 모이자』는 공개적 약속사실로 나타나는 당시 학생들의 대응은 물론 김대중씨를 구속할 경우 광주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7여단 2개대대를 투입했을 것이라는 광주쪽의 의구심을 해소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그는 5월18일 오후3시쯤 서울 동국대학교에 진주해 있던 제11여단을 찾아가서 『지금 7여단 2개 대대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는데 소요진압작전을 못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崔장군이 지휘하는 11여단이 거기에 나가게 되었으니 가서 임무수행을 잘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1여단장이었던 崔雄씨가 청문회에 나와 증언한 내용이다.
  11여단은 이날 새벽 이미 광주로의 증파준비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이 여 단인 숙영편성을 거의 끝마칠 무렵에 정사정관은 동국대학교를 직접 방문,  崔여단장에게 위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2개대대의 공수 부대가 가있는 광주에서 아직 아무런 상황도 벌어지지 않고 있는 18일 새벽 또다시 1개여단병력을 증파하기 위해 준비명령을 내린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이날 오후 3시 정사령관이 11여단장에게 이미 투입된 2개대대가 고전하고 있다며 임무수행을 잘 하라는 명령은 무엇인가?
  11여단의 증파준비 명령은 18일 새벽이고 鄭사령관의 방문에 오후 3시경이라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전투상보에는 오후 3시43분 출동명령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18일 오후 3시는 33,35대대가 아직 광주시내에 투입되기 전이다. 다시 말하면 시위 진압작전에 나서지 않았던 시간이다.
그런데도 정사령관이 2개대대가 고전하고 있는 것으로 말한 것은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한 저의가 어디에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는 청문회에서 공수부대는 광주에만 투입된 것은 아니라고 증언했다. 그 말은 맞다. 그러나 다른 곳보다 많은 2개대대를 보냈고, 또 어떠한 상황도 벌어지지 않고 있는데도 「고전하고 있다」며 제3여단과 함께 2개여단병력의 추가 투입을 명령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특히 정사령관은 최장군에게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있다고까지 말했었다. 유언비어 역시 그 시점에서는 아직 나돌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제3공수여단은 다음날인 19일 아침 6시30분 광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그러니까 제7,제11,제3여단은 「광주」가 야기되기도 전에 이미 광주에 투입되려고 했음이 분명하며, 그 실질적인 지휘자는 사령관인 정호용장군이라는 광주측의 추정이 나오게 된 것이다.

『시집간 딸, 보러 갔을 뿐이다』

  정사령관은 20일 오전 C-54수송기를 타고 광주에 도착했다. 그는 기상이 나빠 전북 정읍 부근에 불시착한 후 그 부근 어느 대대에서 자동차를 빌어타고 광주에 도착해보니 12시 가까이 됐었다고 증언했었다.
  그는 전교사사령부 상황실에 차려진 7여단 지휘부에 들러 여단장들과 점심을 같이 먹고 얘기를 나누었다.
  이날 정사령관은 尹興禎전교사사령관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鄭사령관은 尹장군에게 사태를 우려하고 진압 등에 관한 조언을 했다. 이 조언에 대해 두 사령관은 그냥 「조언」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당시 신군부의 실세인 정장군이 尹장군에게 어떤 「조언」을 했는지 궁금하다.
  정사령관은 이날 오후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청문회에서 민정당의 金吉弘위원의 질문에 대해 광주에 내려간 이유를 시집간 딸을 비유해 이렇게 증언했었다.
  『‥‥‥그 부모는 그 딸이 보고 싶기도 하고, 또 거기에 가서 시집살이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걱정도 되고,  또 혹시 무슨 아쉬운 것이 있으면 몰래 갖다 주려고 하는 것이 친정어머니의 마음입니다. ‥‥ 배속을 받은 사단장에 권한이 있고 책임이 있고 ‥‥‥ 그러나 원래 부대의 장은 혹시 그 사람들이 밥은 잘 먹고 있는 것인지 또 잠자리는 편한 것인지, 그 외에 임무수행을 하는데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이런 등등은 원 소속부대장이 책임을 지고 지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증언대로라면 그는 배속시켜 보낸 자신의 부대 원들이 궁금해서 다시 22일 광주에 내려간다. 이에 앞서 21일 광주에서 정사령관이 서울에 있는 崔慶祿예비역 장군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느냐는 주장이 있었으나 본인은 부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실 여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22일은 尹興禎사령관이 옷을 벗고 (그 날 체신부장관으로 입각) 소극렬소장이 신임사령관으로 부임한 날이자 朴忠勳국무총리서리가 광주를 돌아보기 위해 갔던 날이다. 이때 정사령관은 별도로 광주에 가서 이곳에서 朴총리서리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웅사단장은 이날 朴총리 참석하에 열린 간담회에서 정사령관이 「전라도 싹쓸이」발언을 한 것으로 주장해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정사령관은 늦게 도착해 간담회에는 참석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저는 별도로 내려갔습니다. 아마 오전 11시 조금 지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총리께서 오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늦게 가서 그런지 몰라도 간담회하는 데를 들어 가보지도 못했고,  또 그후에도 누가 간담회를 했다는 얘기도 못들었습니다. 다만 총리께서 오셨으니까 그동안 돌아간 상황들을 토고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도 아다시피 전투병과 교육사령부는 광주에 있습니다. 거기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광주 또는 전남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뭐 「전라도 싹쓸어라」 「광주놈들 싹 죽여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 』

  정호용, 『조언만 했다』

  22일은 전날 오후 5시25분 공수부대뿐 아니라 경찰 행정기관이 도청에서 모두 철수, 이른바 「광주공화국」시대가 시작된 다음 날이다. 그러니까 별다른 작전상황이 없이 공수부대와 전교사 산하병력들이 광주시 외곽을 경비하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朴총리 서리를 수행하지도 않고 작전지휘권도 없는 정사령관이 왜 또 광주에 내려갔을까. 또다시 「시집간 딸」을 보러 갔을까?
  이날 도청앞 광장에서는 학생시민들이 「승리했다」는 자부심에 도취한 채 오후 3시경 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날은 시민군과 계엄군간에 충돌없이 평온( ? )한 하루를 보냈다.
  당시 「광주」가 진행되고 있을 때의 尹興禎계엄분소장(CAC사령관)은 신군부세력들의 선배였다. 신군부세력은 尹선배를 장관으로 「영전」시키고 그 후임에 비교적 한직에 있던 蘇俊烈소장을 임명함으로써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나 하는 오해도 있었다. 또 鄭사령관이 蘇사령관에게 어떤 다짐을 주기 위해 광주로 내려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기도 했었다.
  鄭특전사령관은 23일 오전에 상경했다가 다시 이날 오후에 광주에 내려갔다. 그리고 25일 최규하대통령과 함께 유토니-I 경비행기로 상경했다.
  그는 26일 오후 다시 광주에 내려간다. 그동안 23일에는 광주시 서구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원과 보병학교 병력이 상호 오인, 교전하는 사태가 벌어져 공수부대원 15명 등 2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현장에서 사태를 수습하고 통할병원에 가 부상장병들을 위문하기도 했었다.
  그는 주조 전교사 상황실 한 귀퉁이에 있는 제7여단지휘부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상 특전단사령부나 다름없었다. 鄭사령관이 상징적으로 지휘했다는 지적도 이런 요인에서 비롯된다.
鄭사령관은 蘇장군의 지휘에 조언했을 뿐이라고 증언했지만, 신군부세력의 실세인 정사령관이 상주하고 있었다는 상황은 간단히 보아 넘기기 힘든 대목임도 사실이다.
  『‥‥제가 직접 예하 지휘관에게 뭘  지시한다는 것은 위법이고 탈법입니다. 그런데 당시 저는 상황 돌아가는 것을 잘 몰랐기 때문에 한번도 거기에 대해서 무슨 충고나 또는 조언을 해드리지 못했고 다만 마지막 단계에 제가 22일부터는 주로 광주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蘇俊烈장군에게 여러가지 조언도 해 드리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
  민주당 金光一위원의 『공수부대지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인이 가서 한 것이 아니냐하는 의심을 갖는다』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대목이 있다. 鄭사령관은 22일부터를 마지막 단계로 표현했고 또 그때부터 蘇사령관에게 조언한 것으로 증언했었다. 그런데 蘇사령관은 22일 취임했기 때문에 정사령관은 처음부터 蘇사령관에게 조언(?)한 것이 된다. 지휘관 교체기에 그가 했다는 조언은 과연 어떤 성질을 띠는가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광주」 10일 중 7일 체류

  정사령관은 25일 최규하대통령과 함께 당시 육군참모차장으로 최대통령을 수행한 황영시장군과 함께 상경한 후 보안사령부로 전두환사령관을 찾아갔다. 便衣服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는 26일 밤 10l시를 다시 광주에 도착했다. 이날은 27일 개벽 진압작전을 불과 2시간 앞둔 때였다. 그는 이 진압작전에 대해서도 『내려가보니 蘇장군이 이미 작전계획을 세워 놓았었다. 나는 사전에 전연 몰랐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27일 진압작전에 성공하자 周永福국방부장관 일행과 함께 도청에 들르기도 했다.
  『최세창 신우식여단장과 함께 도청 위에 태극기를 꽂고 애국가를 불렀다』고 신기하위원은 주장했지만 그는 옥상에 올라가 본 일도 없다고 부인했다. 그리고 이날 오후에 상경했다.
「광주」의 임무( ? )가 끝난 것이다.  광주항쟁기간동안 정호용공수특전단 사령관의 행적은 청문회 증언과정에서 나온 이 정도이며, 더 이상의 구체적인 상황은 알 길이 없다.
  그는 광주항쟁 10일 동안 7일정도를 광주에서 보냈다. 그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거의 모든 시간을 전교사사경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진 23일 오후 송암동에서 있었던 공수부대와 보병학교 병력간의 충돌로 빚어진 현장과 부상당한 장병들이 입원해 있던 국군통합병원에 들른 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친정어머니」입장만을 강조했을 뿐 다른 역할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母體부대의 長은 경우에 따라 참모와 같은 역할도 할 수가 있고 조언자의 역할도 할 수가 있고 또 자문
  역할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증언하고 있지만 당시 막강한 실세의 한 사람인 그가 조언과 자문역할에 그쳤는가는 의문이다.
  정사령관은 청문회에서 『모른다』 『그런 보고를 받은 일이 없다』 『공수 부대의 과잉진압으로 시민들의 저항자체가 있었는지 모른다』고 증언했다.
뿐만 아니라 「국민의 군대」 「국민의 자식」들이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강조했다.

공수부대 지휘관은 누구인가

  그는 「광주」가 끝난 후 군의 최고영예인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朴俊炳 20사단장 崔世晶3여단장 등 3명만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한급 아래이거나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딸이 시집살이를 잘해 딸교육 잘 시켰다고 친정어머니에게 준 선물이어서 받았다」는 논법을 쓰고 있다. 그의 예하 장병들이 고생한 대가로 정부가 줬다는 이야기다.
그의 말을 빌리면 실제 작전명령을 내리거나 일정할 역할을 하지 않았는데도 다른 장군들을 제치고 충무무공훈장을 받은 것이다. 정씨의 증언을 옮겨보자.
  『31사단장이나 尹興禎장군이, 왜 못  탔느냐‥‥ 참 불행하게도 31사단장은 실패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尹장군은 장관으로 입각해 퇴역한 후였기 때문에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증언은 여러곳에서 허점이 드러난다. 우선 자신이 충무무공 훈장을 받은 경위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직접 지휘하지 않았는데 훈장을 줬다는 것은 군대생활을 조금만 해본 사람이면 금방 의아하게 생각할 대목이다. 또한 그는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별다른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가 계엄확대조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또 18,19,20일 상황을 전혀 보고 받은 바 없다고 했다가 공수부대원의 동태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말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직접 지휘할 부대도 없으면서 광주에 네차례나 내려갔다는 점이다. 그것도 제7여단 지휘부가 있는 전교사상황실에서 상주하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특히 21일 오후 4시, 33,35대대의 지휘권이 31사단장으로부터 전교사사령관에게 넘어 온 후 제7,제3,제11여단의 막강한 병력을 누가 지휘했느냐 하는 문제다.
  광주항쟁 10일동안 전교사사령관이 공수부대를 직접 지휘했다는 혼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정사령관은 끝까지 전교사사령관에게 조언했을 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같이 공수부대에 대한 실질적인 지휘내용이 밝혀지지 않음으로써 발포 명령자와 사망자수가 나오지 않고 있다.
  비록 정씨가 공직에서 물러난다 해도 「광주」의 문제, 발포명령자, 사망자수가 밝혀지지 않고 있는 한 「광주」 는 마무리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밝혀지고 말아야 할 발포명령자와 사망자 수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당시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지휘관 및 장병들, 관계자들을 상대로 10년, 20년 후 청문회를 다시 열어야 할지 모른다. 몇사람만이라도 가슴속에 맺혀있는 바른말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나게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광주」의 진상도 벗겨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