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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18계엄군의 「작전 상황 보고서」

본문

5.18계엄군의 「작전 상황 보고서」



이 보고서는 계엄군 입장에서 정부 최고권 자에게 보고한 서면의 일부이다.

정부는 19080년 5월 17일 밤 7시 30분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 5월 18일 0시부터 비상계엄을 전국 일원으로 확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공고

비상계엄 지역을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

제안 이유

1979년 10월 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 했는 바 현재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광대한 소요 사태 등을 감안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사태에 있다고 판단되므로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 선포 지역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하려는 것임.

계엄의 종류-비상계엄

실시 지역-전국 일원

제 7공수 특전 여단의 병력 이동

5월 18일 상오 10시 20분 경 비상계엄의 확대 조치로 각 대학에도 휴교령이 선포되었다. 그런데 유독히 광주의 전남대학교 학생들 500여명이 어제와 똑같은 양상으로 학교 교정에 모여들어 학교에 이미 주둔하고 있던 제 33대대 공수 병력과 충돌, 계엄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가 어제와 똑같이 가두로 진출하게 된다. 그때 광주 일원에는 공수 특전사 소속의 제 7공수 특전 여단(여단장 신우식 준장)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 18일 0시를 기해 계엄이 확대되자 병력의 주둔지를 이동하게 된다.

1)제 7공수 여단 제 31대대(대대장 박영일 중령)는 18일 새벽 1시 05를 기해 전북대학교 교정을 장악하여 42명의 학생을 연행한 후 그 곳에 주둔한다.

2)제 7공수 여단 제 32대대 (대대장 이종환 중령)는 18일 새벽 1시 25분 충남대학교를 장악하였다. 이미 학생은 없었다.

3)제 7공수 여단 제33대대(대대장 권성만 중령)는 18일 새벽 2시 전남대 교정을 장악하여 32명의 소요 학생을 연행한 후 주둔한다.

4)제 7공수 여단 제 35대대(대대장 김일옥 중령)는 18일 새벽 2시 30분 에 조선대학교 교정을 장악하여 23명의 소요 학생을 연행한 후 주둔하다.

제 33대대와 제 35대대의 작전

제 33대대 대대장 권성만 중령은 이와 같은 학생들의 시위에 대하여 즉시 2개 중대를 투입하여 시위 학생을 해산시켰다. 학생들은 투석으로 맞섰고 계엄군은 엠- 16자동소총을 어깨에 비껴멘 채 위력 시위만으로 대처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가 1시간 이상 계속되자 거기에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광주 시내의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계엄군의 진입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식어 가기는커녕 점차 과열화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낮 10시 45분 카톨릭 센터 앞에서 1천 여명으로 헤아려지는 데모대가 과격한 시위를 시작했다. 권성만 중령은 전남대 교정에서 카톨릭 출동하여 데모대를 해산시켰고 그 중에서 포고령 위반 혐의로 103명의 학생 시민을 체포 . 연행 하였다.

오후 2시 42분 또 다시 도청 앞과 금남로 일대에 1500여명, 충장로 일대에 1600여명의 군중이 데모를 시작했다. 데모 군중들은 경찰관들을 향해 보도 블럭과 콜라, 사이다 병을 던져 댔다.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했으나 갈수록 과격해지는 데모대의 진압에는 실패하였다. 데모대는 충장로 파출소 앞, 중소 기업 은행 앞에서 연좌 시위를 시작, 오후 3시경에는 2천 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제 35대대는 금남로 좌 우측 충장로 등을 차단,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데모 군중 273명을 체포, 연행하였다. 이때 경찰은 한국은 행 쪽을 담당해서 205명의 시위 군중을 체포, 연행하였다.

제 3공수 특전 여단 증파

공수 특전 사령관(정호용 소장)은 광주 일원의 사태가 격렬해져 심각하다는 제 7여단장 신우식 준장으로부터 현지 보고를 듣고 제 3공수 특전 여단(여단장 최세창 준장)에게 광주 지역에 계엄군을 출동시킬지 모를 형편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라는 지시를 하고 씨.54 특별 기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특전 사령관 정호용 소장은 육사동기인 노태우 장군과 함께 각각 제 7공수 , 제9공수 특전 여단의 창설 여단장으로 2년 반 동안이나 재임해 있었고 그리고 그 다음에 특전 사령부 참모장으로 약 1년여간 정호용 사령관이 제 7여단장의 여단으로 있을 때 같은 육사 동기인 전두환 장군은 최전방의 수도 방어 부대인 제 1사단의 사단장이었다.

광주에 도착한 정호용 사령관은 제 7여단장 신 준장으로부터 지금 까지 광주 일원의 사태에 관한 보고를 받은 다음 곧장 육군 전투 병과 교육 사령관(전 교사) 윤흥정 장군과 부사령관 김기석 장군을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윤흥정 장군은 정호용 장군의 육사 선배로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사이)윤흥정 장군은 정호용 장군에게 "이건 양상이 대단히 틀리게 돌아가는군. "정호용 장군이 윤흥정 장군에게 "중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계엄 확대 조치에도 이렇게 소요가 계속된다면 가만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계엄군의 확고한 결의를 보여줌으로써 초기에 군중들의 심리를 가라앉혀야 옳지 않겠습니까?"정호용 장군이 다시 진언,

"그런데 광주 시내의 기관장들이 대책을 협의하는데 그걸 보니까 이번 광주 시민이나 학생들의 데모가 오히려 정당한 것인 양 분위기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호용 사령관은 광주 현지의 모든 상황을 검정하고 다시 서울에 돌아갔다. 이때 주영복 국방 장관, 이회성 계엄 사령관, 전두환 보안 사령관 겸 중정부장서리등 군 수뇌부가 모여 광주 사태에 관한 대책 회의를 열었다. 여기에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브리핑을 하면서 제 3공수 여단과 제 11공수 여단을 동시에 증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 두환 장군은 "20사단도 함께 진입시키는 게 좋겠어. 계엄군이 집중적으로 나서면 그만큼 이쪽의 시위가 한결 위력적일 테니까." 이때 제 9사단장인 백운택 소장은 전두환 장군에게 제가 광주에서 희생하겠다고 자기도 보내 줄 것을 진언했으나 보류됐음. 제 11공수여단 (여단장 최웅 준장)은 정호용 사령관의 특별 명령으로 이내 (18일) 광주에 진주 해 , 제11여단의 4개 대대는 2개 대대씩 나누어 각각 전남대, 조선대에 배치되어 있었음.

제 3공수 투입과 제 7공수의 지역 대 편성

19일 상오 10시에 제 11여단의 계엄군이 트럭 30대에 분승, 시내 주요 도로에서 무력 시위를 감행하여 시민들에 대한 위기의식을 조성하고, 상오 10시 40분경 금남로 충장로에서 2000여명의 학생 시민이 계엄군에게 투석하며 사이다 병으로 만든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 시작. 11시 제 7여단의 35대대가 금남로에 투입, 김일옥 중령이 진두지휘 과정에서 군중들은 더욱 악화되었다. 11시 40분, 제 7여단 35대대를 제 11여단에 임시 배속케하여 금남로 일대의 데모 진압에 따른 작전을 감행했다. 12시 10분 , 제 11여단장 최웅 준장은 시가지로의 도로 사정을 잘 아는 경찰관 3명의 인내로 현장 출동하여 상황 점검에 나섰다. 이때 제 35대 대는 도청 앞에서 중소 기업 은행 쪽으로 시위대를 밀어 붙히기 시작했다. 제 11여단 병력은 중소 기업 은행에서 도청 쪽으로 시위대를 압축해 가기 시작, 이과정에서 시위 군중을 포고령 위반 혐의로 370명 연행했다. 오후 3시 4분 계엄군 1개 대대의 증원군이 도청 앞 광장에 도착하여 제 35대대와 합류하였다. (이때 5분간 경고문 방송) 오후 3시 권성만 중령이 이끄는 제 33대대 병력이 계림동으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33대대는 오히려 계림 극장 앞에서 군중들에게 포위 당하고 부상당하였고, 결국 밤 10시 20분 조대 교정으로 겨우 철수 하였다. 19일 밤 11시 10분 , 최세창 준장이 지휘하는 제 3공수 여단은 계엄군을 광주에 증파키 위하여 청량리역을 출발, 아침 07시에 광주역에 도착하여 전대 교정으로 주둔하면서 제 3공수 특전 여단 소속인

제 16대대(대대장 김길수 중령)가 전남대 입구 경계 임무,

제 15대대(대대장 변길남 중령)와

제 12대대(대대장 김완배 중령)를 광주 역에 배치시키고

제 11대대(대대장 임수원 중령)를 금남로를 경계하게 했다.

20일 새벽 01시 10분 제 7여단 계엄군은 서로의 지역 대를 편성하여 제 11, 12, 17지역대로 구분

제 11지역 대를 충장로 배치.

제 12지역 대를 광주 공원 배치

제 17지역 대는 광주 대교에 배치 작전을 수행케 했다.

이때 정호용 장군은 국군 보안 사령부 기획 조정 실장인 최애섭 준장과 함께 광주에 와서 장형태 지사와 안병학 도경 국장 경무관에게 "폭도의 총에 맞아 죽더라도 자리를 지켜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자리를 이탈하여 시외로 도피하였음 )이날 소준열 중장이 전남 북 지역 계엄 분 소장 겸 육군 전투 병과 교육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현지에 정호용 장군과 상의하였다. 소준열 장군이 정호용 장군에게 "이대로 방치하다간 큰일 나겠소. 하루라도 빨리 평정을 시켜야 되겠소."정호용 장군이 소준열 장군에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광주 지역 치안 부재 상황

금남로 일대를 경계하던 제 3공수 여단의 11대대는 15만여 군중에게 포위 당하여 위기에 처했다. 시청을 경계하던 13대대가 3만여 군중과 대치, 고립됐다. 오후 5시경 무등 경기장에 영업용 택시200여대가 집결 시위에 가담했다. 밤 8시 소방서가 점령당했다. 밤 9시 노동청 앞에서 1대의 버스가 전경 대의 저지선을 돌파하였다. 밤 9시 30분 , 엠.비.씨. 방송국 불길에 휩싸였다. 밤 10시 10분, 전남대 앞에서 대피 중인 제 3여단의 제 16대대의 병력을 행해 폭도들 차가 돌진했다. 밤 11시, 광주 역을 방호하던 제 3여단의 제 12대대, 제 15대대의 두 개 대대가 6만여 군중에게 포위 당하여 고립되었다. 이때 금남 로에서 20만 군중에게 포위됐던 제 11대대는 겨우 군중을 돌파하고 시청 앞에 고립된 제13대대와 합류하였다. 한편 12대대와 15대대가 21일 새벽 02시에 11대대와 겨우 연결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날 제 3여단이 소모한 가스 탄이 409발이다. 21일 새벽 0시 15분 도청 차고와 광주 세무서가 불탔다. 이때 제 3공수, 제 7고수, 11공수 여단의 모든 병력을 조선대학교에 집결하였다. 0시 30분 고속 버스 3대가 조대 돌파를 시도 했으며, 이 상황이 새벽 04시 40분까지 계속됨 . 새벽 2시 1만 5천여 군중이 도청에 집결하였다. 오전 09시 30분, 시민과 학생들에 의해 아세아 자동차가 피습 당했다. 국군 방위 산업체인 아세아 자동차 광장에 세워 둔 군수 차량 314대 , 민수 차량 82대, 기타 18대 도합 414대가 피탈 당하였다. 이어 화순에 있는 한국 화약의 폭약 고가 피탈, 3600상자의 티. 엔. 티 가 시민들에게 확보, 9이리역 폭 발의 2배 위력) 도청 지하실로 운반됐다. 오후 2시, 전남 지역 계엄 분 소장 소준열 장군이 담화문을 발표했다. 오후 4시 40분,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제 3여단에게 교도소를 사수하라고 명령 하달(당시 교도소 인원 3700여명)하였다. 이때 조대에 주둔한 제 11여단에게 화순

주답 마을로 철수하라는 명령 하달했다. 7시 30분에 완료. 제 7공수 여단에게도 화순 주답 마을로 철수 명령하달, 5시 30분에 철수 완료하였다. 오후 6시 자기 방어를 위한 응사 명령 하달, 이렇게 하여 제 33대대는 록동 마을을 숙영지로 삼고, 제 3여단은 광주 교도소에, 제 7,11여단은 주답 마을에 주둔하게 되었다. 오후 7시 경찰관들 사복으로 갈아입고 시내를 빠져나감.

제 20사단 광주 투입

21일 저녁 8시, 한양대학교 교정을 씨. 피로 잡고 있던 보병 제 20사단의 작전참모 함덕전 중령은 육군본부 작전 처장 이종구 준장으로부터 명령 하달을 받았다.

"현재 광주시가 일원에는 소요 군중이 20만 명 선을 돌파하여 그 양상이 최악의 상태에 달해 있다. 현지의 경찰병력과 계엄군이 숫적 열세에 빠져 있으며, 위력 시위 만으로는 도저히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보고이다. 이에 20사단의 1개 연대가 추가로 투입될 예정이니 준비하라."

보병 제 20사단 (사단장 박준병 소장)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음 이미 육군본부 작전 참모 부장 김재명 소장의 지시로 61연대 (연대장 김동진 대령)는 효창공원에 주둔하여 서강대, 홍익대, 단국대 담당, 62연대(연대장 이병년 대령)와 사단 사령부는 잠실 체육관에 주둔하여 서울산업대, 건국대 한양대를 담당하고 60연대(연대장 정수화 대령)는 경희대, 외국어대, 국민대를 담당하고 있었다.

(20일) 수도 경비 사령관인 노태우 소장은 20사단장 박준병에게 "진지를 동국대로 옮기고 사태에 대비하라"고 하달. 21일 저녁 8시에 20사단이 1개 연대로 광주에 내려가야 하니 61연대장 김동진 대령은 9시까지 용산 역으로 집결하라는 부대 이동을 지시하였다. 61연대는 특별 차편으로 용산 역을 밤 10시에 출발, 제 1대대부터 출발하여 송정리 역에는 22일 새벽 6시에 도착하였다. 그 병력은 전투 교육 사령부로부터 지원되는 차량으로 보병 학교에 집결하였다. 22일 김재명 소장이 박준병 소장에게 지시, "광주 전교사 사령관은 육군 박 소장이 지휘하는 20사단의 1개 연대와 즉각 출동하라"

이에 22일 새벽 0시 30분 . 사단 사령부와 62연대가 용산 역을 출발하였다. 이때 용산역 특별 열차 차량의 수만도 100여대에 이르렀다. 이들 병력은 22일 아침 7시에 송정리 역에 도착. 보병 학교에 주둔하게 된다. 이때 정호용 장군이 전두환 장군에게 광주 상황을 보고하며 전공 법을 써야 한다고 진언했다.(전공 법이란 전차를 앞세우고 대포를 허공에다 요란스럽게 쾅쾅 울리면서 위력적으로 밀고 들어가 적을 제압하는 방법) 제 20사단 제 61연대 제 3대대 (대대장 김인식 중령)는 고속도로 톨 케이트를 경계 임무 받았고, 제 62연대 2대대 (대대장 이종규 중령)는 상무동을 봉쇄하였으며, 또한 다른 대대는 목포간 도로를 차단했다. 22일 오전 8시 30분, 보사부 장관 유양수 동자부 장관 등이 광주 상황을 점검키 위하여 광주에 왔다. 23일 제 11여단은 이동 중에 송암동 삼거리에서 매복하고 있던 폭도들로부터 산발적인 총격을 받았으나 별 피해 없이 지나쳤다. 이렇게 제 11여단은 에이.피.씨. 장갑차를 앞세우고 그대로 전진하던 중 효천 역을 500미터 못 미친 곳에 왔을 때 갑자기 매복 자로부터 90미리 미터 무반동 총이 에이. 피. 씨 장갑차를 향해 사격해 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방으로부터 순식간에 화기 공격이 퍼부어지고 소총 사격과 수류탄까지 투척돼 왔다. 11여단 병력은 즉시 차량에서 하차 도로변에 산개 하여 응사, 순식간에 8명이 전사하고 3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선두에 섰던 에이. 피. 씨. 장갑차는 완전히 파손되고 트럭 4대도 파손되어 못 쓰게 되었다. 여단장 최웅 준장은 상대의 짜임새 있는 공격을 보고 이건 예사 폭도가 아니라고 판단, 사격하고 있는 90미리 미터 무 반동 총 공격 진지로 가서 우선 화력을 잠재우고 1명을 사살, 7명을 생포하였다. 생포된 자를 심문한 결과 당시 폭도들이 차량으로 다수 이동한다는 정보를 받고 이를 저지키 위해 매복 해있던 광주 보병 학교 교도 대임이 확인되었다.(당시 폭도들은 에이. 피. 씨 장갑차를 탈취,무섭게 몰고 다니며 군복으로 위장도 할 때였기에 착각하기 쉬웠다.)

광주 접수,

26일 정호용 특전 사령관이 서울에 다녀와 광주 비행장에서 제 20사단, 제 3여단, 제 7여단, 제 11여단장을 소집, 명령을 하달했다. 티오티(목표상 행동 개시 시간)는 내일 새벽 정각 4시다. 절대로 정보 누설이 되어선 안돼. 그 임무는 제 3여단에서 하라."고 했던 것을 그후 다시 그 임무를 바꾸어 명령 하달했다. 제 3여단은 전일 빌딩. 관광 호텔, 와이 더불 유 씨.에이. 접수 , 제 7여단은 광주 공원에서 특공 작전을 개시하라고 명령을 하달했다. 공격 시간은 27일 새벽 정각 4시, 이에 도청을 담당할 3여단장 최세창 준장은 티. 엔. 티. 관계로 임수원 중령이 이끄는 11대대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다시 임수원 중령은 제 1지역대장 변중식 대위와 함께 77명의 특공 조를 편성, 장교 11명 사병 66명으로 하고 복장은 보병과 같이 위장하였다. 이들은 조대 종합 운동장에 집결 …조대부중…도내기시장…전남기계 공고…담벼락…도청 후문에 도착(4시 정각). 이 과정에서 전남대 부속병원으로부터 켈리바 50이 날아왔다. 이미 조사한 정보에 의하면 80명 정도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200여명으로 추산됐다. 4시 10분 경 도청 후문을 진압하는 데 30여명의 폭도들이 발포해 왔다.

작전 성공 후 61연대에 인계하고 퇴각하였다.(이것은 작전이 공수 특전 요원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공원 담당은 권성만 중령이 지휘한 제 33대대가 그 임무를 부여받고 201명으로 특공조를 편성. 27일 새벽 1시 20분에 특공 조는 통합 병원에 도착하여 제 9지역 대, 제8지역 대 순으로 시내 잠입 …월산 동을 거쳐 4시 정각에 공원에 도착해 작전을 폈으나 의외로 그 저항이 빈약하였다. 전일 빌딩, 와이, 더불유. 씨. 에이. 관광 호텔을 담당한 제 11여단은 1개 지역대로 헬리콥터를 이용, 침투하여 작전을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광주를 수습하고 노획한 무기는 칼빈 500정, 엘, 엠지. 기관총 1정, 엔 203 유탄 1정, 엠- 16소총1정, 977무전기 1대, 기관총, 탄약 1상자 그 외 소총 탄환 수 백발 등이었다. 이 작전이 성공 후 전 교사 사령관 소준열 중장과 주영복. 정호용. 박준병 최세창. 신우식. 최웅 등은 명 지휘관으로 각광받음.

주사태로 인한 피해액은 260억원으로 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