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전 노 5.18 광주에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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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노 5.18 광주에 왔었다".
이규연(중앙일보분회.사회1부기자)
'5·18 진상을 캔다' 시리즈의 특별취재반이 구성된 것은 지난 4월의 어느 날이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재조명해 보겠다 취지에서 경찰기자팀은 시경 출입인 이우경선배의 지휘로 취재활동에 들어갔다.
13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지도 그 진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 광주문제를 문민정부 출범이라는 정치변동에 맟춰 보수언론의 틀안에서나마 새롭게 규명해 보자는 시도였다.
구체적으로는 5·18 진상규명을 위해 6공정권하에서 열렸던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의 한계를 극복해 보는데 취재의 초점이 모아졌다. 당시 청문회는 핵심사항을 놓고 가해자와 피해자측의 증언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양자간 대질신문도 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특별취재반은 경찰기자 l5명 전원으로 구성됐다. 다만 워낙 취재원과 접촉대상이 방대하고 집요한 추적이 필요한 사안인 만큼 전담자가 필요했고 필자와 후배인 이훈열, 권태동, 신성은, 내영후, 이상열등 모두 6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출입처를 포기한 채 단체합숙을 하며 이 취재에만 매달려야 했다.
취재반은 5·18이 매우 민감한 정치적 문제인데다 열심히 취재한다고 해도 어떤 '성과물'도 나오지 않을지도 모를 역사적 사안이라는 점을 감안, '대어'가 한 마리라도 걸려들 때까지 일절 취재계획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우선 필자의 셋방인 서을 성북구 돈암동 10평짜리 연림 주택을 '안가'로 삼아 취재준비를 위한 합숙에 들어갔다.관련기록과 단행본, 신문 스크랩을 분석하는 작업이 첫 순서였다. 깨알같은 글씨로 2천여쪽 분량인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속기록을 한번 훑어 보는데만 꼬박 사흘이 걸렸다.
말할 수 없다"는 가해자들
민주당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단 소속 의원들을 접촉하고 국회도서관을 뒤져 당시 투입된 공수부대의 작전기록과 피해자들의 증언륵, 관련자 명단 등을 입수했다.
일주일 동안의 자료수집 및 분석을 통해 취재항목과 방향, 접촉대상자등을 정한 계획서를 작성한 뒤 곧바로 취재에 들어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해자와 피해자가 논쟁만 벌이다 끝난 청문회의 테두리를 뛰어넘기 위해 5·18 가해자로 분류할 수 있는 군·공무원·경찰 관계자들한테서 새로운 증언을 끌어내는데 취재방향을 맞추었다.
새정부 출범이라는 정치상황 변화를 강조함으로써 지금까지 침묵해 왔던 이들의 입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주요 취재 항목은 아직도 의혹으로 남아 있는 ▲신군부 관련성 ▲공수부대의 양민학살 및 암매장 ▲유혈사태의 원인 ▲도청앞 집단발포 상황등으로 정했다.
취재방향과 항목에 따라 1백여명의 접촉대상자를 추려냈다. 이중에는 진압작전에 깊숙이 개입한 공수부대장과 지역 보안책임자등 예비역 장성이 20여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계획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우선 주소지가 파악되는 대상자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주소 이동이 잦은 군관계자들의 경우 더욱 어려웠다.또 겨우 주소지를 알아내 찾아가 설득을 해도 완강히 취재를 거부하기 일수였다.
한 장성의 경우 열흘 이상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계속 거부했고 나중에는 취재반을 피해 지방으로 내려가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취재거부의 압권은 장형태 당시 전남도지사(現해양도시가스 사장)였다. 광주 현지에서 취재반이 사무실과 집에 죽치며 일주일동안 괴롭혔으나 "5·18 기간의 일은 죽어도 말할 수 없다"며 끝까지 버텼다.. 또 인터뷰에 순순히 응한 취재원들은 대부분 종전 자신의 입장만을 되풀이하며 일정할 수준을 넘어서지 않으려 했다. 아직도 '그날의 주역'들이 군정계의 사회지도층 인사로 포진해 있기 때문이었다.
백대령의 새로운 현장증언'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으며 취재반은 몇가지 새로운 증언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특히 군 지휘체계상 당시 상황을 가장 소상하게 꿰뚫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작전참모 백남윤대령과의 접촉은 극적으로 이루어졌고 우리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취재반이 청문회에도 출두했던 당시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씨를 두번째 찾아갔을 때였다.
윤씨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한 채 선문선답으로 일관하다 지나가는 말처럼 "기자가 발로 뛰어야지. 작전참모로 있던 백남윤를 한번 찾아가 봐"라고 한마디 던겼다.
물론 백대령의 주소지나 연락처, 나이까지도 모르니 한번 추적해 보라는 식이었다.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간신히 서울 재향군인회에서 백대령의 주소지를 알아 낼 수 있었다. 보통 장성 승진이 보장되는 작전참모 자리임에도 불구 5·18이후 광주 진압작전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군부에 의해 예편당한 백대령은 한밤중에 찾아간 취재반에게 당시 군의 움직임을 소상하고 정확하게 증언해주었다.
기사를 작성해놓고 출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태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나왔다. 5·13 담화는 "현정부가 광주민주화운등의 연장선상에 있다", "광주시민의 명예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등 외견상 광주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작 알맹이는 빠져 있었다. "진상규명은 역사에 맡기자"고 선언함으로써 지금까지 광주 현지와 진보세력들이 요구해오던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사실상 거부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취재반은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90%가 넘는 국민적 지지도를 바탕으로 사정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대통령의 '뜻' 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단발성도 아닌 시리즈물을 굴절없이 보도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5·13 특별담화가 발표된 이틀 뒤인 ,5월15일 드디어 시리즈 첫 회가 보도됐다. 전두환 노태우등 신군부의 실세들이 당시 광주에 갔었다는 사실과 정호용 장세동 등이 진압작전 수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백남윤대령의 증언 내용이었다.
이날 낮 취재반이 안가에서 신문을 보는 순간 '우리의 불안'은 말끔히 사라졌다. 백대령의 증언이 1면과 사회면 머리기사로 모양 좋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용기있게 계속 보도해 달라"
보도직후 노태우 전대통령측으로부터 전혀 사실 무근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그후 광주에서 전 노 두 전대통령을 목격했다는 몇개의 증언이 더 확보 돼 기사를 뒤받침할 수 있었다.
▲도청 집단 발포시 공수부대원들은 이미 실탄을 휴대하고 있었다(공수부대장의 증언) ▲공수부대는 이미 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공수부대 수송병 증언과 관련 기록 분석) ▲부엉산 유골은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당시 부검 보고서)등의 보도가 이어졌다'.
시리즈 보도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지역의 호응은 그야말로 열광적이었다. 지역 신문들이 보도내용을 계속 머리기사로 받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관련 단체들의 목소리가 속속 터져 나왔다.
"정말 의미있는 기사였다", "용기있게 계속 보도해 달라"는 격려와 함께 제보전화가 연일 편집국에 울려댔다. 특히 두번째 시리즈가 보도된 다음날 새벽에 한 공수부대원이 편집국에 찾아와 "그동안 양심에 가책이 돼 괴로웠다"는 말을 시작으로 광주사태 기간중 폭도들을 보이는 대로 사살하라는 상관의 지시를 받고 시민군을 사살해 그 시체를 암매장했다는 등 당시 공수부대의 만행을 폭로했다.
반면 "군을 이렇게 비난해도 되느냐", "과거를 들춰내 좋을 게 뭐 있는냐", "중앙일보가 왜 그러냐"는 등 비난 또한 적지 않았고 협박전화까지도 심심치 않게 걸려왔다.
시리즈는 6회로 끝났다. 너무 짧게 끝났음을 아쉬워 하는 독자와 선후배들의 의견이 많았다. 취재의 벽에 부딪혀 당초 기대했던 목표에 크게 못미치는 성과 밖에 거두지 못했다는 자체 의견도 제기됐다.
또 증언을 해준 일부 군관계자들이 나중에 말을 뒤집기도 했고 모공수부대장은 언론중재위에 정정보도청구까지 내 취재반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들의 증언 내용이 보도되고 난 뒤 주위에서 "너만 살려고 하느냐"는 식의 압력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추측됐다. 하지만 취재반들이 증언 내용을 녹취하거나 취재수첩에 꼼꼼이 기록해 놓아 큰 문제없이 체결할 수 있었다.
시리즈는 끝났지만 추적은 계속
취재반은 시리즈를 끝낸 뒤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번 취재에서 얻은 수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진 나온 광주문제 기획물곽 달리 순전히 가해자 입장인 군인이나 공무원들의 증언을 통해 5·18이 당시 신군부의 권력욕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부각시킨 것은 큰 수확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5·18 문제를 어물적 넘어가려는 사회 분위기에 쐐기를 박았다는 얘기,젊은 기자들로서 역사적 의무에 등을 돌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아쉬움보다는 성취감이 더 크다는 후배들의 평가도 제기됐다.
끝으로 취재반은 미묘한 정치 상황과 사내외적인 어려운 여건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젊은 기자들의 견해를 지면에 반영시킨 사회부 데스크에 감사한다.
'5·18 진상을 캔다' 시리즈는 끝났다.하지만 특별취재 반은 남아 5·18의 진상을 계속 추적해 나갈 것이다.
이규연(중앙일보분회.사회1부기자)
'5·18 진상을 캔다' 시리즈의 특별취재반이 구성된 것은 지난 4월의 어느 날이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재조명해 보겠다 취지에서 경찰기자팀은 시경 출입인 이우경선배의 지휘로 취재활동에 들어갔다.
13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지도 그 진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 광주문제를 문민정부 출범이라는 정치변동에 맟춰 보수언론의 틀안에서나마 새롭게 규명해 보자는 시도였다.
구체적으로는 5·18 진상규명을 위해 6공정권하에서 열렸던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의 한계를 극복해 보는데 취재의 초점이 모아졌다. 당시 청문회는 핵심사항을 놓고 가해자와 피해자측의 증언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양자간 대질신문도 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특별취재반은 경찰기자 l5명 전원으로 구성됐다. 다만 워낙 취재원과 접촉대상이 방대하고 집요한 추적이 필요한 사안인 만큼 전담자가 필요했고 필자와 후배인 이훈열, 권태동, 신성은, 내영후, 이상열등 모두 6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출입처를 포기한 채 단체합숙을 하며 이 취재에만 매달려야 했다.
취재반은 5·18이 매우 민감한 정치적 문제인데다 열심히 취재한다고 해도 어떤 '성과물'도 나오지 않을지도 모를 역사적 사안이라는 점을 감안, '대어'가 한 마리라도 걸려들 때까지 일절 취재계획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우선 필자의 셋방인 서을 성북구 돈암동 10평짜리 연림 주택을 '안가'로 삼아 취재준비를 위한 합숙에 들어갔다.관련기록과 단행본, 신문 스크랩을 분석하는 작업이 첫 순서였다. 깨알같은 글씨로 2천여쪽 분량인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속기록을 한번 훑어 보는데만 꼬박 사흘이 걸렸다.
말할 수 없다"는 가해자들
민주당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단 소속 의원들을 접촉하고 국회도서관을 뒤져 당시 투입된 공수부대의 작전기록과 피해자들의 증언륵, 관련자 명단 등을 입수했다.
일주일 동안의 자료수집 및 분석을 통해 취재항목과 방향, 접촉대상자등을 정한 계획서를 작성한 뒤 곧바로 취재에 들어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해자와 피해자가 논쟁만 벌이다 끝난 청문회의 테두리를 뛰어넘기 위해 5·18 가해자로 분류할 수 있는 군·공무원·경찰 관계자들한테서 새로운 증언을 끌어내는데 취재방향을 맞추었다.
새정부 출범이라는 정치상황 변화를 강조함으로써 지금까지 침묵해 왔던 이들의 입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주요 취재 항목은 아직도 의혹으로 남아 있는 ▲신군부 관련성 ▲공수부대의 양민학살 및 암매장 ▲유혈사태의 원인 ▲도청앞 집단발포 상황등으로 정했다.
취재방향과 항목에 따라 1백여명의 접촉대상자를 추려냈다. 이중에는 진압작전에 깊숙이 개입한 공수부대장과 지역 보안책임자등 예비역 장성이 20여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계획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우선 주소지가 파악되는 대상자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주소 이동이 잦은 군관계자들의 경우 더욱 어려웠다.또 겨우 주소지를 알아내 찾아가 설득을 해도 완강히 취재를 거부하기 일수였다.
한 장성의 경우 열흘 이상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계속 거부했고 나중에는 취재반을 피해 지방으로 내려가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취재거부의 압권은 장형태 당시 전남도지사(現해양도시가스 사장)였다. 광주 현지에서 취재반이 사무실과 집에 죽치며 일주일동안 괴롭혔으나 "5·18 기간의 일은 죽어도 말할 수 없다"며 끝까지 버텼다.. 또 인터뷰에 순순히 응한 취재원들은 대부분 종전 자신의 입장만을 되풀이하며 일정할 수준을 넘어서지 않으려 했다. 아직도 '그날의 주역'들이 군정계의 사회지도층 인사로 포진해 있기 때문이었다.
백대령의 새로운 현장증언'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으며 취재반은 몇가지 새로운 증언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특히 군 지휘체계상 당시 상황을 가장 소상하게 꿰뚫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작전참모 백남윤대령과의 접촉은 극적으로 이루어졌고 우리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취재반이 청문회에도 출두했던 당시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씨를 두번째 찾아갔을 때였다.
윤씨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한 채 선문선답으로 일관하다 지나가는 말처럼 "기자가 발로 뛰어야지. 작전참모로 있던 백남윤를 한번 찾아가 봐"라고 한마디 던겼다.
물론 백대령의 주소지나 연락처, 나이까지도 모르니 한번 추적해 보라는 식이었다.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간신히 서울 재향군인회에서 백대령의 주소지를 알아 낼 수 있었다. 보통 장성 승진이 보장되는 작전참모 자리임에도 불구 5·18이후 광주 진압작전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군부에 의해 예편당한 백대령은 한밤중에 찾아간 취재반에게 당시 군의 움직임을 소상하고 정확하게 증언해주었다.
기사를 작성해놓고 출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태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나왔다. 5·13 담화는 "현정부가 광주민주화운등의 연장선상에 있다", "광주시민의 명예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등 외견상 광주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작 알맹이는 빠져 있었다. "진상규명은 역사에 맡기자"고 선언함으로써 지금까지 광주 현지와 진보세력들이 요구해오던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사실상 거부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취재반은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90%가 넘는 국민적 지지도를 바탕으로 사정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대통령의 '뜻' 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단발성도 아닌 시리즈물을 굴절없이 보도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5·13 특별담화가 발표된 이틀 뒤인 ,5월15일 드디어 시리즈 첫 회가 보도됐다. 전두환 노태우등 신군부의 실세들이 당시 광주에 갔었다는 사실과 정호용 장세동 등이 진압작전 수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백남윤대령의 증언 내용이었다.
이날 낮 취재반이 안가에서 신문을 보는 순간 '우리의 불안'은 말끔히 사라졌다. 백대령의 증언이 1면과 사회면 머리기사로 모양 좋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용기있게 계속 보도해 달라"
보도직후 노태우 전대통령측으로부터 전혀 사실 무근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그후 광주에서 전 노 두 전대통령을 목격했다는 몇개의 증언이 더 확보 돼 기사를 뒤받침할 수 있었다.
▲도청 집단 발포시 공수부대원들은 이미 실탄을 휴대하고 있었다(공수부대장의 증언) ▲공수부대는 이미 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공수부대 수송병 증언과 관련 기록 분석) ▲부엉산 유골은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당시 부검 보고서)등의 보도가 이어졌다'.
시리즈 보도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지역의 호응은 그야말로 열광적이었다. 지역 신문들이 보도내용을 계속 머리기사로 받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관련 단체들의 목소리가 속속 터져 나왔다.
"정말 의미있는 기사였다", "용기있게 계속 보도해 달라"는 격려와 함께 제보전화가 연일 편집국에 울려댔다. 특히 두번째 시리즈가 보도된 다음날 새벽에 한 공수부대원이 편집국에 찾아와 "그동안 양심에 가책이 돼 괴로웠다"는 말을 시작으로 광주사태 기간중 폭도들을 보이는 대로 사살하라는 상관의 지시를 받고 시민군을 사살해 그 시체를 암매장했다는 등 당시 공수부대의 만행을 폭로했다.
반면 "군을 이렇게 비난해도 되느냐", "과거를 들춰내 좋을 게 뭐 있는냐", "중앙일보가 왜 그러냐"는 등 비난 또한 적지 않았고 협박전화까지도 심심치 않게 걸려왔다.
시리즈는 6회로 끝났다. 너무 짧게 끝났음을 아쉬워 하는 독자와 선후배들의 의견이 많았다. 취재의 벽에 부딪혀 당초 기대했던 목표에 크게 못미치는 성과 밖에 거두지 못했다는 자체 의견도 제기됐다.
또 증언을 해준 일부 군관계자들이 나중에 말을 뒤집기도 했고 모공수부대장은 언론중재위에 정정보도청구까지 내 취재반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들의 증언 내용이 보도되고 난 뒤 주위에서 "너만 살려고 하느냐"는 식의 압력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추측됐다. 하지만 취재반들이 증언 내용을 녹취하거나 취재수첩에 꼼꼼이 기록해 놓아 큰 문제없이 체결할 수 있었다.
시리즈는 끝났지만 추적은 계속
취재반은 시리즈를 끝낸 뒤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번 취재에서 얻은 수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진 나온 광주문제 기획물곽 달리 순전히 가해자 입장인 군인이나 공무원들의 증언을 통해 5·18이 당시 신군부의 권력욕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부각시킨 것은 큰 수확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5·18 문제를 어물적 넘어가려는 사회 분위기에 쐐기를 박았다는 얘기,젊은 기자들로서 역사적 의무에 등을 돌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아쉬움보다는 성취감이 더 크다는 후배들의 평가도 제기됐다.
끝으로 취재반은 미묘한 정치 상황과 사내외적인 어려운 여건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젊은 기자들의 견해를 지면에 반영시킨 사회부 데스크에 감사한다.
'5·18 진상을 캔다' 시리즈는 끝났다.하지만 특별취재 반은 남아 5·18의 진상을 계속 추적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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