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간첩' 이창용은 실존인가, 조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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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간첩' 이창용은 실존인가, 조작인가
오연호 기자
10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은 의혹
다시 5월, 광주항쟁 10주년을 맞았다. 그간 광주항쟁의 진상과 의미를 파악하려는 정치권과 국민들의 노력은 '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폭도'를 '민주시민'으로 정정시켜 놓았다.
그러나 망월동묘지를 만들어 놓은 제5공화국의 양분을 먹고 자란 정치인들이 여전히 집권세력이 되어 있다.
보상금을 받는 것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광주시민들의 한의 응어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10년이 지나도록 밝혀지지 않은 채 의혹투성이로만 남아 있는 '광주사건'들도 아직 남아 있다.
이른바 '광주간첩 이 창용 사건'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광주항쟁이 정점에 달하고 있던 80년 5월 24일 석간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광주잠입시도 간첩 이창용 검거'를 내보냈다.
서울시경은 24일 학생과 시민의 시위가 극렬한 전남광주시에 잠입, 이들의 시위가 극렬한 전남광주시에 잠입, 이들의 시위를 무장폭동으로 유도하는 한편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반정부선전 및 선동임무를 띠고 남파된 북괴간첩 이창용(李昌龍 . 46, 평양시 중구역 경림동 36)을 서울에서 검거하고 공작금 1백93만5천원. 무전기 등 통신장비. 난수표. 독침 1개. 위조주민등록증 2장 등 22종 3백 93점을 압수했다고 발표했다.
…… 간첩 이창용은 지난 20일 상오 2시 안내원 2명의 인도를 받으며 남해안으로 침투해 21일 밤 순천에 도착, 광주 잠입을 시도했으나 군경의 검문검색이 심하고 모든 진입로가 막히자 이를 포기, 순천에서 1박했다. 간첩 이는 22일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 23일 상오 5시 서울역에 도착, 1시간 동안 역주 변을 서성거리다 상오 6시쯤 행인(70세)이 길을 묻자 "길을 가르쳐 주겠다"며 함께 가는 것을 수상히 여긴 시민 정을녀(49. 가명)와 최인자씨(48. 가명)가 근처에 있던 경찰관에게 신고함으로써 붙들렸다……(『중앙일보』80. 5. 24)
신문들에는 검거기사와 함께 이창용사진. 신고자. 검거자. 압수품 사진 등을 곁들여 실었다.
이 기사가 보도되자 "불순분자의 조종으로 광주가 폭도들의 무법천지가 되고 있다"는 정부발표를 믿고 있던 광주지역 외의 국민들은 공포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광주항쟁에 참여하고 있던 일부 광주시민들도 "북한이 우리를 이용하려 하고 있다"면서 움츠려들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 때마다 "간첩의 배후조종" 운운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역대정권들의 속성을 꿰뚫어본 일부 시민들은 '절묘한 시기에 또 터뜨렸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로선 아무도 이 검거사건이 사실인지 조작된 것이었는지를 확인해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 여유는 광주학살 피해자의 한 사람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내무위원 자격을 가지면서 비로소 마련되었다.
이창용은 어디에 있나?
1988년 7월20일 16시 5분 국회 내무위원회회의실에서는 제143회 국회내무위원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춘구 당시 내무부장관을 출석시킨 가운데 정동성(민정)내무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회의에서 두 번째로 질의에 나선 정상용 의원(평민)은 "80년 5월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묻겠다고 입을 열었다.
(정상용 위원)…… 첫째 남파간첩 이창용을 검거한 후 검찰에서 수사하고 기소한 사실이 있는지, 기소했다면 재판결과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답변해 주셨으면 합니다.
두 번째 현재 검거된 간첩이라고 하는 이창용은 어디에 있습니까?
세 번째 간첩 신고자로 보도되어 가지고 소위 보상금을 탔다고 하는, 가명 정을녀, 최인자씨의 본명과 현주소 그리고 보상금 수령내역을 공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체포 당시 및 방범대원의 인적사항 및 주소를 공개 또는 자료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섯 번째 당시 이창용의 남파목적 중에는 고정간첩과의 접선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통례로 보면 고정간첩과의 접선이 계획되고 있는 간첩을 체포했을 때, 는 접선대상자를 일망타진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고 수사를 진척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 이창용사건에 있어서는 23일 체포됐다고 했는데 곧바로 그 뒷날 시경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전례로 봐 가지고 어떻게 된 일인지 소위 국내에서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꼭 그 다음 신문지상에는 소위 간첩단 일망타진이라든가 이런 큰 사건들이 터지게 됩니다.
저는 혹시라도 이런 것들이 소위 광주시위의 본의를 호도하기 위해서 정부측에서 불순분자의 책동으로 꾸며대기 위해서 이창용간첩사건이 그때 발표된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곧바로 체포 다음날 발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무장관께서 답변해 주십시오.
(내무장관 이춘구) 갑작스럽게 80년대 것을 지금 얘기하라고 하면 아무 자료도 준비가 안됩니다. 지금 ……
(정상용 위원) 그렇다면 내일 회의 전까지 자료제시가 되겠습니까?
(내무장관 이춘구) 예, 한번 찾아보지요.
-이상 제 143회 내무위 2차 속기록-
"다른 간첩 18명 잡게 해 기소유예 석방"
내무위원회 회의는 18시42분에 중지되었다가 19시43분에 속개되었다. 따라서 정상용 의원의 질의에 대한 내무부 측의 당일 답변준비시간은 3시간 38분이었다.
조종석 당시 치안본부장의 1차 답변은 대강 이러했다.
"간첩 이창용은 남파간첩인 이연종 일당 등 18명의 간첩을 검거케 한 공적 등을 감안해서 82년 8월26일 서울지검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석방, 현재 사회활동주이며 주소는 파악치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 검거 자는 남대문 경찰서 경장 황규용이며 방법대원은 김준규 등입니다. 그러고 신고자 정갑용, 최정자 등 2명에 대해서는 법에 따라 3천50만원이 지급되었습니다. 발표를 신속히 한 것은 피의자가 모든 사실을 실토하고 신속히 조사가 마무리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며칠 후 치안본부는 추가답변으로 정상용 의원에게 16절지 10페이지 분량의 서면 자료를 제출했다. 그 가운데 중요내용을 요약하면,
①이창용의 본명은 홍종수이다.
②간첩 홍종수 사건은 주민에 의해 검거되었고 연행과정을 다수인 이 목격, 당시보도기관에 대한 보안유지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추후 연계 간첩검거를 위하여 가명을 사용하여 보도 하게 되었다.
③홍종수에 의해 검거된 간첩 이연종 일당 검거사건은 기히 보도한 남파간첩 홍종수 사건 과 관련된 사건으로 추가보도의 필요성이 없어 보도를 하지 않았다.
④홍종수에 의해 검거된 일당 18명중 두목 이연종(72세)은 59년 7월부터 60년 7월 사이 3 회에 걸쳐 경기지역에 침투 , 간첩활동을 하다 복귀하고 61년 9월 충남서천에 침투하여 경기지역 지하당 조직구축을 하려 암약했다. 홍종수 신문과정에서 첩보를 추출해 80년 6 월28일 검거하였고 81년 10월 27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현재 대전교도소에 복역중이다. 주소는 인천시 동구 송림 3동 70번지(나머지 17명중 이연탁(징역3년), 박점순(징역5년), 권 태윤(징역 2년)을 제외한 14명은 모두 기소유예, 집행유예 등으로 실형을 살지 않았음).
⑤홍종수 검거 방법대원 김종규(44)는 사건당시 남대문서 역전파출소 방범 원으로 서울 용 산구 후암동 358-87에 살았으나 87년 12월 30일 현재 무단전출 직권말소 처리돼 있다.
⑥당시 수사기록 치안본부 대공수사과 기록번호 가2 1510(80. 5. 27처리), 시경70(2380), 남대문서 정보기록실 등에 동일한 내용으로 돼 있다.
치안본부 답변의 의문들
그러나 이러한 치안본부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정상용 의원측과 국민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의혹 점을 떨쳐버릴 수 없는 실정이다.
우선 첫 번째 의혹은 간첩 홍종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치안본부는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홍종수를 왜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고 있지 못한 가이다.
정상용의원측은 최근 홍종수의 현주소를 치안본부 측에 확인해줄 것을 다시 요청했다. 그러나 치안본부 대공과에 서는 지난 3월 31일 "아직 확인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한다. 정의원측은 88년 7월20일의 국회내무위에서 행한, 이 사건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이래 계속 치안본부측에 홍종수의 현주소를 비공개 서면자료로 제출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그때마다 번 번히 "기다려달라"는 식의 답만을 되풀이 들었다.
이와 관련 정상용의원측은 "간첩은 자수하거나 석방된다 하더라도 정부에 의해 보호감찰이 되기 때문에 항시 적으로 현주소가 파악돼 있는 것이 상례인데도 불구하고 82년에 기소유예로 석방된 홍종수의 현주소를 당국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경찰의 '컴퓨터 신원조회'는 단 5분만에 특정인의 현주소를 알아낼 수 있다. 정상용의원측은 최근 치안본부 쪽이 아닌 다른 기관의 도움을 받아 문제의 홍종수를 컴퓨터로 신원 조회해 보았다.
그랬더니 56세 전후의 홍종수는 전국적으로 34명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본적이 간첩 홍종수의 본적인 평양으로 나타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간첩 홍종수가 당국의 협조를 받아 편의상 '창씨개명'을 했을 수도 있어 위의 결관 만으로는 홍이 실제인물이 아니라고 단언하기엔 대단한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당국이 홍종수의 현주소를 1년 8개월이 지나도록 정확히 알려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홍종수의 정체에 의혹을 사게 하고 있는 것이다.
88년 7월 20일 당시 조종석 치안본부장은 "필요하시다면 현주소도 확인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라고 답변한 적이 있다.
이연종 검거 사실 왜 보도 안하고 있나
두 번째 의혹 점은 검거 경위에 대해서다. 이에 대해 정상용 의원은 이렇게 의문점을 제시한다.
"검거행위를 보면 이창룡이가 70세 노인에게 길을 가르쳐 주러 가는 것을 수상해 여긴 40대 여인 2명이 파출소에 신고해 잡혔다고 돼 있습니다. 노인이 길을 물어와 가르쳐 주는 것이 왜 수상하게 여겨지는지 나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왜 발표를 검거 바로 다음날 했느냐는 정의 원의 질문에 대한 치안본부 측의 석연찮은 답변에 의혹이 남는다.
즉 치안본부는 연계간첩을 잡으려 했으면서도 "보도기관에 보안유지가 어려웠던 상황" 때문에 일찍 발표했다고 하나 당시는 계엄상황이었기 때문에 당국이 의도만 하면 얼마든지 언론을 통제할 수 있었던 '보안유지가 극히 쉬었던' 상황이다.
또 치안본부는 일찍 발표했지만 연계간첩을 잡으려했기 때문에 본명 홍종수 대신 가명(이창용)으로 발표했다고 했지만 이는 지극히 설득력이 부족한 대목이다. 왜냐하면 당시 『중앙일보』(80.5.24)에는 비록 가명으로 기사화되었지만 가로 4cm, 세로 5cm 크기의 얼굴사진이 정면으로 실렸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의혹 점은 홍종수의 공적으로 잡힌 연계간첩 18명의 검거소식이 왜 신문에 발표되지 않았는가이다. 치안본부는 "홍종수 사건과 관련된 사건으로 추가보도의 필요성이 없어 보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명의 간첩만 잡아도 대대적으로 보도해온 당국이 일당 18명을 추가로 잡고도 '겸손하게도' 언론보도를 안 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게 사실이다.
왜 당국은 검거하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이연종 등 일당 18명 검거를 큰 활자로 시커멓게 뽑아 보도케 하지 않고 있는가.
"이연종이 남파간첩임을 알고도 수사기관에 불고지"한 죄로 일당 18명중에 한 사람이 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이 모씨는 "우리도 왜 보도 안하고 있는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세상에 안 알려져 당국에 고마워할 따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홍종수와 이연종
마지막 의혹 점은 그렇다면 과연 간첩 이연종 일당은 홍종수가 실토하여 검거되었는가이다.
기자는 이연종이가 검거되기 전에 살았다는 인천시 동구 송림3동 70번지를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동사무소 인명카드에도 이연종은 없었고 70번지에서 30년을 살아왔다는 통장 모씨는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통장 모씨는 그 대신 70번지 일대에서 간첩사건으로 잡혀 들어가 징역살고 있는 이창국씨가 있다고 했다.
통장의 소개로 이창국씨가 집에 들어가 보니 며느리 송진 금씨가 있었다. 그녀의 첫마디는 "우리 시아버지는 당국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돼 억울하게 징역을 살고 있습니다."였다. 그는 서울 민가협에도 열심히 나가 시아버지의 억울함을 각계에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
"84년 5월1일 7시경 아버님은 자영하시던 문방구점에서 안기부요원들에게 끌려갔습니다. 영장 없이 77일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팔다리 묶고 주리틀기, 온몸 바늘로 찌르기, 성기를 지렛대로 비틀어 조이기 등의 고문을 당해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하고 화장실 벽에 머리를 찧다 이가 부러지기도 하셨습니다. 암호 쓰는 법, 난수표 해독하는 법, 호출부호 대는 법도 수사요원들한테 배웠다고 합니다. 두 차례 월북을 했다 하지만 아버님은 교회에서 철야기도회가 있을 때 외에는 전혀 집을 비우지 않으셨습니다."
며느리 송씨는 "이 일대에서 이연종이라는 다른 간첩이 잡혔다해서 확인하러왔다"고 했더니 "이 좁은 바닥에 간첩이 많기도 하네요"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며칠후 취재팀은 이연종 일당 18명중 불고 죄로 집행유예선고를 받았던 이모씨를 간접적으로 만남으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①이연종은 이씨의 큰 아버지로 북에서 남파된 간첩인 것은 사실이다.
②이 사건에 연루돼 고정간첩으로 실형을 산사람은 네사람 뿐이며 나머지는 불고 죄로 불기소되거나 집행유예를 받았다.
③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으나 수사과정에서 이연종씨가 광주침투간첩의 제보로 잡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상용의원측은 "그러한 사실 확인만으로는 홍종수가 간첩인지 아닌지를 판명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계속 의심만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독재정권들이 관례적으로 해 온 행태를 볼 때 이런 가정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즉 이연종은 홍종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고정간첩이었는데 당국이 이연종을 사전탐지하고 있다가 홍종수 건을 터트리면서 '홍종수에 의해 너희들은 검거됐다'고 연결시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홍종수를 확실한 광주간첩으로 증명할 수 있으니까요."
"장계범 독침조작사건과 유사"
정상용의원측은 그와 같은 가정은 전두환 정권이 광주항쟁에 대한 대응책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살인, 방화 등)썼음을 두고 볼 때 단순한 비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정의원측은 이창룡사건 발표 다음날 발생한 이른바 '독침 조작 사건' 도 광주항쟁에 대처한 전두환 정권의 '사건조작술'의 하나라고 말하고 "그 정도의 술수를 부린 전 정권 이어서 이창용사건도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끝내 떨쳐버릴 수 없다" 고 했다.
정의원측이 말하는 독침조작사건은.
5월25일 오전 8시경 장계범(24세, 광주시 금동 186번지 7통 3반)이 도청 농림국 장실로 쓰러지듯 들어오면서 어깨를 움켜쥐고 "독침을 맞았다"라고 소리쳤다. 이때 경비 중이던 시위대 신만식(방위병, 시민군)이 어깨를 살펴보려고 하자 장계범이 뿌리치면서 옆에 서있던 정향규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정향규는 장계범의 웃옷을 벗겨 상처부위를 몇 번 빨아 뱉는 시늉을 한 후 부축하여 전남대 병원으로 급히 실어갔다.
도청항쟁지도부 조사부장 김준봉씨와 몇 명의 순찰대원이 전대병원에 갔더니 장계 범의 가족과 기자들이 이미 와 있었다. 간호원한테 물으니까 " 저 환자가 직접 집전화번호를 알려주어서 전화를 해 가족들이 왔다"고 하였다.
응급실에 누워있던 장계 범은 "도청에 순전히 빨갱이들만 있으니까 그 놈들을 잡아서 조사해야 된다"고 말했다.
약물조사 결과가 늦게 나오자 병원, 11층으로 장계범을 옮기고 4명의 경비병을 세워 감시했으나 오후에 몰래 도망가버렸다.
독침은 재수생이었던 사람이 호신용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독침 끝에 묻어있는 노란 액체는 독극물이 아니었다.
독침사건으로 도청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고 시위대가 하나둘씩 도청을 빠져나갔다.
수습대책위원회는 도청내부에 불순분자들이 준 동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정보당국에서 보안사로 하여금 사건을 조작하게 만든 것이고 장계범과 정향규는 첩자였다고 발표했다. 정향규는 시민 군에게 붙잡혀 조사를 당했는데 "도청내 시민군의 동태를 모여인에게 보고해왔다"고 실토했다.
장계범의 아버지는 대공수사요원이었으며 도청진압이후 시민군이 체포되어 상무대 영창으로 연해됐을 때 장계범은 얼굴에 복면을 하고 항쟁지도부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보안사 끄나풀 노릇을 충실하게 했다.
의혹은 어디에서부터 풀릴 것인가
정의원측은 "끝내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것들이 행해질 때 진실은 좀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①당국이 홍종수 현주소를 즉각 정의원측에 알려주고 정의원측이 비공개로 홍종수를 직접 만나보는것.
②현재 대구교도소에 수감중인 것으로 알려진 이연종을 정의원측이 직접 만나보는 것.
③검거자인 당시 남대문 경찰서 황규용씨(현 만리3동 파출소장)가 검거경위를 소상히 밝히는 것.
물론 위와 같은 것이 행해진다 하더라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닌 이상 '있었던 그대로'가 밝혀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10년이 지나도록 조작인가 아닌가를 따져야 하는 분단조국의 현실이다. 이 불신의 시대는 "우리 아버지(남편)는 조작된 간첩입니다"라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가협 조작간첩 가족들 모임이 몇십 명에 달하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이 '조작간첩백태'라는 한 묶음의 책을 펴내는 것을 볼 때 엄중한 대한민국의 현실인 것이다.
민가협 조작간첩 가족들이 흘려오고 있는 눈물들이 환한 웃음으로 바뀌는 날이 오면 홍종수를 둘러싼 의혹은 저절로 풀려지지 않을까.
오연호 기자
10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은 의혹
다시 5월, 광주항쟁 10주년을 맞았다. 그간 광주항쟁의 진상과 의미를 파악하려는 정치권과 국민들의 노력은 '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폭도'를 '민주시민'으로 정정시켜 놓았다.
그러나 망월동묘지를 만들어 놓은 제5공화국의 양분을 먹고 자란 정치인들이 여전히 집권세력이 되어 있다.
보상금을 받는 것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광주시민들의 한의 응어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10년이 지나도록 밝혀지지 않은 채 의혹투성이로만 남아 있는 '광주사건'들도 아직 남아 있다.
이른바 '광주간첩 이 창용 사건'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광주항쟁이 정점에 달하고 있던 80년 5월 24일 석간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광주잠입시도 간첩 이창용 검거'를 내보냈다.
서울시경은 24일 학생과 시민의 시위가 극렬한 전남광주시에 잠입, 이들의 시위가 극렬한 전남광주시에 잠입, 이들의 시위를 무장폭동으로 유도하는 한편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반정부선전 및 선동임무를 띠고 남파된 북괴간첩 이창용(李昌龍 . 46, 평양시 중구역 경림동 36)을 서울에서 검거하고 공작금 1백93만5천원. 무전기 등 통신장비. 난수표. 독침 1개. 위조주민등록증 2장 등 22종 3백 93점을 압수했다고 발표했다.
…… 간첩 이창용은 지난 20일 상오 2시 안내원 2명의 인도를 받으며 남해안으로 침투해 21일 밤 순천에 도착, 광주 잠입을 시도했으나 군경의 검문검색이 심하고 모든 진입로가 막히자 이를 포기, 순천에서 1박했다. 간첩 이는 22일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 23일 상오 5시 서울역에 도착, 1시간 동안 역주 변을 서성거리다 상오 6시쯤 행인(70세)이 길을 묻자 "길을 가르쳐 주겠다"며 함께 가는 것을 수상히 여긴 시민 정을녀(49. 가명)와 최인자씨(48. 가명)가 근처에 있던 경찰관에게 신고함으로써 붙들렸다……(『중앙일보』80. 5. 24)
신문들에는 검거기사와 함께 이창용사진. 신고자. 검거자. 압수품 사진 등을 곁들여 실었다.
이 기사가 보도되자 "불순분자의 조종으로 광주가 폭도들의 무법천지가 되고 있다"는 정부발표를 믿고 있던 광주지역 외의 국민들은 공포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광주항쟁에 참여하고 있던 일부 광주시민들도 "북한이 우리를 이용하려 하고 있다"면서 움츠려들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 때마다 "간첩의 배후조종" 운운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역대정권들의 속성을 꿰뚫어본 일부 시민들은 '절묘한 시기에 또 터뜨렸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로선 아무도 이 검거사건이 사실인지 조작된 것이었는지를 확인해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 여유는 광주학살 피해자의 한 사람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내무위원 자격을 가지면서 비로소 마련되었다.
이창용은 어디에 있나?
1988년 7월20일 16시 5분 국회 내무위원회회의실에서는 제143회 국회내무위원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춘구 당시 내무부장관을 출석시킨 가운데 정동성(민정)내무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회의에서 두 번째로 질의에 나선 정상용 의원(평민)은 "80년 5월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묻겠다고 입을 열었다.
(정상용 위원)…… 첫째 남파간첩 이창용을 검거한 후 검찰에서 수사하고 기소한 사실이 있는지, 기소했다면 재판결과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답변해 주셨으면 합니다.
두 번째 현재 검거된 간첩이라고 하는 이창용은 어디에 있습니까?
세 번째 간첩 신고자로 보도되어 가지고 소위 보상금을 탔다고 하는, 가명 정을녀, 최인자씨의 본명과 현주소 그리고 보상금 수령내역을 공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체포 당시 및 방범대원의 인적사항 및 주소를 공개 또는 자료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섯 번째 당시 이창용의 남파목적 중에는 고정간첩과의 접선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통례로 보면 고정간첩과의 접선이 계획되고 있는 간첩을 체포했을 때, 는 접선대상자를 일망타진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고 수사를 진척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 이창용사건에 있어서는 23일 체포됐다고 했는데 곧바로 그 뒷날 시경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전례로 봐 가지고 어떻게 된 일인지 소위 국내에서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꼭 그 다음 신문지상에는 소위 간첩단 일망타진이라든가 이런 큰 사건들이 터지게 됩니다.
저는 혹시라도 이런 것들이 소위 광주시위의 본의를 호도하기 위해서 정부측에서 불순분자의 책동으로 꾸며대기 위해서 이창용간첩사건이 그때 발표된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곧바로 체포 다음날 발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무장관께서 답변해 주십시오.
(내무장관 이춘구) 갑작스럽게 80년대 것을 지금 얘기하라고 하면 아무 자료도 준비가 안됩니다. 지금 ……
(정상용 위원) 그렇다면 내일 회의 전까지 자료제시가 되겠습니까?
(내무장관 이춘구) 예, 한번 찾아보지요.
-이상 제 143회 내무위 2차 속기록-
"다른 간첩 18명 잡게 해 기소유예 석방"
내무위원회 회의는 18시42분에 중지되었다가 19시43분에 속개되었다. 따라서 정상용 의원의 질의에 대한 내무부 측의 당일 답변준비시간은 3시간 38분이었다.
조종석 당시 치안본부장의 1차 답변은 대강 이러했다.
"간첩 이창용은 남파간첩인 이연종 일당 등 18명의 간첩을 검거케 한 공적 등을 감안해서 82년 8월26일 서울지검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석방, 현재 사회활동주이며 주소는 파악치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 검거 자는 남대문 경찰서 경장 황규용이며 방법대원은 김준규 등입니다. 그러고 신고자 정갑용, 최정자 등 2명에 대해서는 법에 따라 3천50만원이 지급되었습니다. 발표를 신속히 한 것은 피의자가 모든 사실을 실토하고 신속히 조사가 마무리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며칠 후 치안본부는 추가답변으로 정상용 의원에게 16절지 10페이지 분량의 서면 자료를 제출했다. 그 가운데 중요내용을 요약하면,
①이창용의 본명은 홍종수이다.
②간첩 홍종수 사건은 주민에 의해 검거되었고 연행과정을 다수인 이 목격, 당시보도기관에 대한 보안유지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추후 연계 간첩검거를 위하여 가명을 사용하여 보도 하게 되었다.
③홍종수에 의해 검거된 간첩 이연종 일당 검거사건은 기히 보도한 남파간첩 홍종수 사건 과 관련된 사건으로 추가보도의 필요성이 없어 보도를 하지 않았다.
④홍종수에 의해 검거된 일당 18명중 두목 이연종(72세)은 59년 7월부터 60년 7월 사이 3 회에 걸쳐 경기지역에 침투 , 간첩활동을 하다 복귀하고 61년 9월 충남서천에 침투하여 경기지역 지하당 조직구축을 하려 암약했다. 홍종수 신문과정에서 첩보를 추출해 80년 6 월28일 검거하였고 81년 10월 27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현재 대전교도소에 복역중이다. 주소는 인천시 동구 송림 3동 70번지(나머지 17명중 이연탁(징역3년), 박점순(징역5년), 권 태윤(징역 2년)을 제외한 14명은 모두 기소유예, 집행유예 등으로 실형을 살지 않았음).
⑤홍종수 검거 방법대원 김종규(44)는 사건당시 남대문서 역전파출소 방범 원으로 서울 용 산구 후암동 358-87에 살았으나 87년 12월 30일 현재 무단전출 직권말소 처리돼 있다.
⑥당시 수사기록 치안본부 대공수사과 기록번호 가2 1510(80. 5. 27처리), 시경70(2380), 남대문서 정보기록실 등에 동일한 내용으로 돼 있다.
치안본부 답변의 의문들
그러나 이러한 치안본부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정상용 의원측과 국민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의혹 점을 떨쳐버릴 수 없는 실정이다.
우선 첫 번째 의혹은 간첩 홍종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치안본부는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홍종수를 왜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고 있지 못한 가이다.
정상용의원측은 최근 홍종수의 현주소를 치안본부 측에 확인해줄 것을 다시 요청했다. 그러나 치안본부 대공과에 서는 지난 3월 31일 "아직 확인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한다. 정의원측은 88년 7월20일의 국회내무위에서 행한, 이 사건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이래 계속 치안본부측에 홍종수의 현주소를 비공개 서면자료로 제출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그때마다 번 번히 "기다려달라"는 식의 답만을 되풀이 들었다.
이와 관련 정상용의원측은 "간첩은 자수하거나 석방된다 하더라도 정부에 의해 보호감찰이 되기 때문에 항시 적으로 현주소가 파악돼 있는 것이 상례인데도 불구하고 82년에 기소유예로 석방된 홍종수의 현주소를 당국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경찰의 '컴퓨터 신원조회'는 단 5분만에 특정인의 현주소를 알아낼 수 있다. 정상용의원측은 최근 치안본부 쪽이 아닌 다른 기관의 도움을 받아 문제의 홍종수를 컴퓨터로 신원 조회해 보았다.
그랬더니 56세 전후의 홍종수는 전국적으로 34명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본적이 간첩 홍종수의 본적인 평양으로 나타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간첩 홍종수가 당국의 협조를 받아 편의상 '창씨개명'을 했을 수도 있어 위의 결관 만으로는 홍이 실제인물이 아니라고 단언하기엔 대단한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당국이 홍종수의 현주소를 1년 8개월이 지나도록 정확히 알려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홍종수의 정체에 의혹을 사게 하고 있는 것이다.
88년 7월 20일 당시 조종석 치안본부장은 "필요하시다면 현주소도 확인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라고 답변한 적이 있다.
이연종 검거 사실 왜 보도 안하고 있나
두 번째 의혹 점은 검거 경위에 대해서다. 이에 대해 정상용 의원은 이렇게 의문점을 제시한다.
"검거행위를 보면 이창룡이가 70세 노인에게 길을 가르쳐 주러 가는 것을 수상해 여긴 40대 여인 2명이 파출소에 신고해 잡혔다고 돼 있습니다. 노인이 길을 물어와 가르쳐 주는 것이 왜 수상하게 여겨지는지 나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왜 발표를 검거 바로 다음날 했느냐는 정의 원의 질문에 대한 치안본부 측의 석연찮은 답변에 의혹이 남는다.
즉 치안본부는 연계간첩을 잡으려 했으면서도 "보도기관에 보안유지가 어려웠던 상황" 때문에 일찍 발표했다고 하나 당시는 계엄상황이었기 때문에 당국이 의도만 하면 얼마든지 언론을 통제할 수 있었던 '보안유지가 극히 쉬었던' 상황이다.
또 치안본부는 일찍 발표했지만 연계간첩을 잡으려했기 때문에 본명 홍종수 대신 가명(이창용)으로 발표했다고 했지만 이는 지극히 설득력이 부족한 대목이다. 왜냐하면 당시 『중앙일보』(80.5.24)에는 비록 가명으로 기사화되었지만 가로 4cm, 세로 5cm 크기의 얼굴사진이 정면으로 실렸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의혹 점은 홍종수의 공적으로 잡힌 연계간첩 18명의 검거소식이 왜 신문에 발표되지 않았는가이다. 치안본부는 "홍종수 사건과 관련된 사건으로 추가보도의 필요성이 없어 보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명의 간첩만 잡아도 대대적으로 보도해온 당국이 일당 18명을 추가로 잡고도 '겸손하게도' 언론보도를 안 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게 사실이다.
왜 당국은 검거하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이연종 등 일당 18명 검거를 큰 활자로 시커멓게 뽑아 보도케 하지 않고 있는가.
"이연종이 남파간첩임을 알고도 수사기관에 불고지"한 죄로 일당 18명중에 한 사람이 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이 모씨는 "우리도 왜 보도 안하고 있는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세상에 안 알려져 당국에 고마워할 따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홍종수와 이연종
마지막 의혹 점은 그렇다면 과연 간첩 이연종 일당은 홍종수가 실토하여 검거되었는가이다.
기자는 이연종이가 검거되기 전에 살았다는 인천시 동구 송림3동 70번지를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동사무소 인명카드에도 이연종은 없었고 70번지에서 30년을 살아왔다는 통장 모씨는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통장 모씨는 그 대신 70번지 일대에서 간첩사건으로 잡혀 들어가 징역살고 있는 이창국씨가 있다고 했다.
통장의 소개로 이창국씨가 집에 들어가 보니 며느리 송진 금씨가 있었다. 그녀의 첫마디는 "우리 시아버지는 당국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돼 억울하게 징역을 살고 있습니다."였다. 그는 서울 민가협에도 열심히 나가 시아버지의 억울함을 각계에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
"84년 5월1일 7시경 아버님은 자영하시던 문방구점에서 안기부요원들에게 끌려갔습니다. 영장 없이 77일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팔다리 묶고 주리틀기, 온몸 바늘로 찌르기, 성기를 지렛대로 비틀어 조이기 등의 고문을 당해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하고 화장실 벽에 머리를 찧다 이가 부러지기도 하셨습니다. 암호 쓰는 법, 난수표 해독하는 법, 호출부호 대는 법도 수사요원들한테 배웠다고 합니다. 두 차례 월북을 했다 하지만 아버님은 교회에서 철야기도회가 있을 때 외에는 전혀 집을 비우지 않으셨습니다."
며느리 송씨는 "이 일대에서 이연종이라는 다른 간첩이 잡혔다해서 확인하러왔다"고 했더니 "이 좁은 바닥에 간첩이 많기도 하네요"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며칠후 취재팀은 이연종 일당 18명중 불고 죄로 집행유예선고를 받았던 이모씨를 간접적으로 만남으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①이연종은 이씨의 큰 아버지로 북에서 남파된 간첩인 것은 사실이다.
②이 사건에 연루돼 고정간첩으로 실형을 산사람은 네사람 뿐이며 나머지는 불고 죄로 불기소되거나 집행유예를 받았다.
③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으나 수사과정에서 이연종씨가 광주침투간첩의 제보로 잡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상용의원측은 "그러한 사실 확인만으로는 홍종수가 간첩인지 아닌지를 판명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계속 의심만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독재정권들이 관례적으로 해 온 행태를 볼 때 이런 가정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즉 이연종은 홍종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고정간첩이었는데 당국이 이연종을 사전탐지하고 있다가 홍종수 건을 터트리면서 '홍종수에 의해 너희들은 검거됐다'고 연결시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홍종수를 확실한 광주간첩으로 증명할 수 있으니까요."
"장계범 독침조작사건과 유사"
정상용의원측은 그와 같은 가정은 전두환 정권이 광주항쟁에 대한 대응책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살인, 방화 등)썼음을 두고 볼 때 단순한 비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정의원측은 이창룡사건 발표 다음날 발생한 이른바 '독침 조작 사건' 도 광주항쟁에 대처한 전두환 정권의 '사건조작술'의 하나라고 말하고 "그 정도의 술수를 부린 전 정권 이어서 이창용사건도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끝내 떨쳐버릴 수 없다" 고 했다.
정의원측이 말하는 독침조작사건은.
5월25일 오전 8시경 장계범(24세, 광주시 금동 186번지 7통 3반)이 도청 농림국 장실로 쓰러지듯 들어오면서 어깨를 움켜쥐고 "독침을 맞았다"라고 소리쳤다. 이때 경비 중이던 시위대 신만식(방위병, 시민군)이 어깨를 살펴보려고 하자 장계범이 뿌리치면서 옆에 서있던 정향규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정향규는 장계범의 웃옷을 벗겨 상처부위를 몇 번 빨아 뱉는 시늉을 한 후 부축하여 전남대 병원으로 급히 실어갔다.
도청항쟁지도부 조사부장 김준봉씨와 몇 명의 순찰대원이 전대병원에 갔더니 장계 범의 가족과 기자들이 이미 와 있었다. 간호원한테 물으니까 " 저 환자가 직접 집전화번호를 알려주어서 전화를 해 가족들이 왔다"고 하였다.
응급실에 누워있던 장계 범은 "도청에 순전히 빨갱이들만 있으니까 그 놈들을 잡아서 조사해야 된다"고 말했다.
약물조사 결과가 늦게 나오자 병원, 11층으로 장계범을 옮기고 4명의 경비병을 세워 감시했으나 오후에 몰래 도망가버렸다.
독침은 재수생이었던 사람이 호신용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독침 끝에 묻어있는 노란 액체는 독극물이 아니었다.
독침사건으로 도청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고 시위대가 하나둘씩 도청을 빠져나갔다.
수습대책위원회는 도청내부에 불순분자들이 준 동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정보당국에서 보안사로 하여금 사건을 조작하게 만든 것이고 장계범과 정향규는 첩자였다고 발표했다. 정향규는 시민 군에게 붙잡혀 조사를 당했는데 "도청내 시민군의 동태를 모여인에게 보고해왔다"고 실토했다.
장계범의 아버지는 대공수사요원이었으며 도청진압이후 시민군이 체포되어 상무대 영창으로 연해됐을 때 장계범은 얼굴에 복면을 하고 항쟁지도부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보안사 끄나풀 노릇을 충실하게 했다.
의혹은 어디에서부터 풀릴 것인가
정의원측은 "끝내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것들이 행해질 때 진실은 좀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①당국이 홍종수 현주소를 즉각 정의원측에 알려주고 정의원측이 비공개로 홍종수를 직접 만나보는것.
②현재 대구교도소에 수감중인 것으로 알려진 이연종을 정의원측이 직접 만나보는 것.
③검거자인 당시 남대문 경찰서 황규용씨(현 만리3동 파출소장)가 검거경위를 소상히 밝히는 것.
물론 위와 같은 것이 행해진다 하더라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닌 이상 '있었던 그대로'가 밝혀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10년이 지나도록 조작인가 아닌가를 따져야 하는 분단조국의 현실이다. 이 불신의 시대는 "우리 아버지(남편)는 조작된 간첩입니다"라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가협 조작간첩 가족들 모임이 몇십 명에 달하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이 '조작간첩백태'라는 한 묶음의 책을 펴내는 것을 볼 때 엄중한 대한민국의 현실인 것이다.
민가협 조작간첩 가족들이 흘려오고 있는 눈물들이 환한 웃음으로 바뀌는 날이 오면 홍종수를 둘러싼 의혹은 저절로 풀려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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