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학살 훈장과 공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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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 훈장과 공적서
조 호 연<경향신문 월간경향 기자>
상은 받고 책임은 안져
지난 11월 19일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평민당의 김영진의원은 증인으로 나온 주영복씨(80년 당시 국방 장관) 에게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강경 진압에 대해 추궁한 뒤 "이렇게 진압한 군인들이 포장 ·훈장을 받았는데 신청 경위는 무엇인가 ?"라고 묻고 "육군
본부를 통해 상훈 신청이 올라와 결재한 기억이 있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주씨는 이어 정호용의원(민정당 ·당시 특전 사렁관) · 박준병의 원 (민정당 · 당시 20사단장) ·최세창장군 (합참의장 · 당시 3특전여단장) 등에 대한 충무무공 훈장 상신을 결재했으며 현재로선 그 포상에 대한 정당성이 재고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앞서 지난 11월 16일 총무처가 광주특위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광주민주화 운동 진압 작전과 관련해 상을 받은 사람은 위의 세 사람을 포함, 모두 79명으로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 화랑무공훈장 13명 ▲인헌무공훈장 20명 ▲무공포장 17명 ▲보국훈장 삼일장 1명 ▲보국훈장 광복장 4명 ▲보국포장 11명 등이다.
국어사전을 보면 상은 '잘한 일을 칭찬하여 주는 표적'으로, 훈장은 '나라에 대한 훈공이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해 내려주는 기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상훈은 타의 모범. 이 될 만한 훌륭한 언행을 널리 알리고 기리는 일종의 상징인 셈이다. 상을 탄 사람이 존경받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상훈법에도 무공훈장은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지난 12월7일 정호용 의원은 증인 신문과정 에서 충무무공훈장 수여 사실을 추궁받자 "부하들이 일을 잘했기 때문에 내게도 훈장
을 준 것 같다"고 대답하여 예각을 피해 나갔다.
정의원은 그 날 청문회 내내 지난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작전 당시 자신은 지휘 체계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으며· 광주에 내려가 총 7일간 체류했으나 직접 작전에 참가한 적은 없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정의원이 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상
훈법의 조항과 어긋난다. 만약 다른 부대에 잠시 배속된 부하들이 배속 부대에서 세운 공 때문에 훈장을 받았다면 바로 그 부하들에 의한 강경 진압의 책임 역시 모면키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편 총무처에서 광주특위에 제출한 「무공훈장부」에는 정의원의 공적 내용에 대해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공헌(광주 소요 사태)'으로 등재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군조직으로 알려진 공수 특전사의 사령관을 역임했고 육참총장, 내무·국방 장관을 지낸 정의원이 당시 훈장을 받으면서 공적 내용 속의 '참가했다'라는 말을 못 보았을 리 없고 그 말이 포괄하는 의미를 몰랐을 리 없다.
'참가했기 때문에 훈장 준 것'
따라서 야당 의원들의 주장대로 鄭의원은 진압 작전에 참가했거나 설혹 참가 하지 않았더라도 의심이나 이의 제기 없이 훈장을 받았던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게 청문회를 지켜본 사람들의 중논이다. 또 당시 전두환씨를 정점으로 하는 역학 관계로 살펴볼 때 비록 지휘 체계 안에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특전 사령관이 네번이나·광주에 내려가 현지 군 관계자들에게 준 '조언'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더구나 작전에 참가한 최웅 당시 제 11특전 여단장과 신우식 당시 제7특전 여단장이 군인으로서는 무공훈장보다 덜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는 사실로 볼때 정의원의 '역할'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게 된다. 즉 정 의원이 청문회에서 말한 "도의적 책임"이나 ,이미 다른 부대에 배속됐던 "부하들이 잘했기 때문에" 정도로는 무공훈장을 받을 만한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각종 훈 · 포장과 표창은 영원히 기억 될 영예이기 때문에 수여 결정 과정이 매우 복잡하며 엄격하다. 상훈 법에 따르면 추천을 위한 자체 공적 심사는 물론 중앙 공적 심사 위원회의 심의, 그리고 국무 회의의 심의 등을 거쳐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수여 대상자에게 결격 사유가 발견되면 당연히 서훈은 거부된다.
제출 서류만 해도 공적 조서, 자체 공적 심사 위원회 회의록 및 심의 의결서 사본1부 등 6가지나 된다. 특히 포상 춘천서가 접수되면 ▲정부 포상 정책 및 포상 관계 법령과 포상 기준에의 적합 여부 ▲사전동의 여부 ▲자체 공적 심사 위원회 심의 여부 등을 검토하게 되어 있다.
게다가 총무처의 「포상 업무 처리 지침」에 따르면 '포상의 전반적인 균형과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능한 한 수시 포상을 억제하려는 게 정부의 방침이기도 하다. 포상 대상자 선발에 있어서도 공적 내용이 정부 서훈 목적과 방침에 부합되는지의 여부, 공적의 객관적 타당성 여부, 공적의 사회적 효과, 유사한 내용의 타 공적자와의 균형 등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일단 포상 수여가 확정되면 훈장 ·포장, 대통령 표창 및 국무 총리 표창은 총무처에 비치된 훈기부 및 표창 기록부에 기록 유지하고, 기타 각급 기관장의 표창은 해당 기관에 비치된 표창 기록부에 기록 유지한 다음, 추천 기관에 통보하여 수여토록 돼 있다.
이런 물 샐 틈 없는 수여 결정 과정 때문에 부적격자가 훈 ·포장을 받는 일은 좀체로 발생하기 어렵다. 일단 훈 ·포장의 수여 결정이 나면 이것은 수여 당사자의 주관적인 판단과는 별도로 공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내려진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 밝혀진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작전과'관련해 훈 ·포장을 받은 79명 및 군부대는 충분히 그럴 만한 공적을 수행한 것이다. 더구나 그 수여 결정에 대해 한 번도 부당성을 주장하거나 공적이 미홉하다는 이유로 수상 거부의 의사를 표명했다는 얘기는 없었다. 당시 관련 정부 관료나 수상자들이 지금에 와서 수여 상신을 결재한 사실을 잘 모른다거나 부하들의 공 때문에 훈장을 받은 것 같다는 식으로 대답한다면 그 대답은 호소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윤장군은 영예 수여하지 말자'
이와는 별도로 훈장 ·표창 관련 행정 업무나 수상 당사자의 무분별함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구체적인 사례는 79명중 유일하게 군 출신이 아닌 추삼득씨 (당시 광주 경찰서 경장 ·국무 총리 표창)의 경우. 감식 요원이던 추씨는 진압이 끝난 뒤 곧바로 시작된 신원 확인 작업에 차출됐다. 당시 50여명의 지문을 채취했는데 이중 42명의 신원을 확인해 줬다.
"5월 27일 아침부터 계엄군 측의 정식 의뢰로 지문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광주 시내 각 대학병원 영안실을 돌며 작업했고 나중에는 산에 가매장된 시체들을 점검했습니다. 덕분에 유족들은 지금도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국무 총리 표창은 상신한 기억도 없고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통보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
추씨는 광주특위에서 그런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자신은 영원히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남 도경이나 광주 경찰서 관계자들도 "사무실에 보관 중인 표창상신장부에도, 표창 수여 장부에도 추씨의 이름이 없다"고 밝혔다.
추씨는 시중에 'M16 탄환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카빈 총탄에 의한 것이라고 판별해 준 대가로 국무 총리 표창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것과 관련해 자신은 "사망자의 신원만 확인했을 뿐 사인 규명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秋씨의 주장에 대해 관계 부처인 총무처에서는 아직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훈 ·포장 수여가 당시 숨가쁘게 돌아가던 정국을 반증하듯 실력자에게만 집중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즉 정웅 당시 31사단장이나 전남북 계엄분소장겸 전교사 사령관이던 윤흥정(진압 작전이 한창이던 중요한 시기에 갑자기 예편된 뒤 체신부장관에 임명됨) 등 좀더 온건한 진압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상당수 포상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1980년 9월 29일 있었던 제80회 임시 국무회의의 회의록 「양해 사항」에는 지난 제78회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의안번호 703호 국군의 날 영예수여 안건중 보국훈장 통일장의 육군대장 유병현장군과 예비역 육군중장 윤흥정 장군을 국방부 요청으로 제외키로 하였으니 양해
바랍니다'라고 나와 있다. 유씨는 80년5월 17일 있은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데 이의를 제기했던 장본인이다. 윤씨는 청문회에서 증언했던 대로 당시 상황이 공수부대의 동원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던 몇 안 되는 고급 지휘관 중의 한 명 이 다.
이같이 당시의 훈·포장 수여 대상자 결정이 뚜렷한 공로보다는 '정치적인 계산'에 보다 강하게 의존된 것임은 정호용의원의 "무공훈장은 대대장급 이하의 장병들에게나 주는 것이지 나와 같은 고급 지휘관이 받기에는 좀 뭐하다"는 증언이나 주영복씨의 "그 훈장은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한다면 재고될 수도 있을 것이다"는 증언에서도 시사되고 있다.
정의원은 증언을 통해 "휘하 부대가 공을 세우면 그 지휘관에게도 자동적으로 명예가 돌아간다. 육본에서 할당이 내려와 하급 지휘관은 내가 천거하고 육본에서 나를 천거해 받은 것이다"고 밝혔다. 이처럼 당시의 훈장은 총무처의 상훈법을 무시하고 '할당'되었음을 암시한 셈이다.
훈장의 가치가 시대에 따라 바뀐다면 앞서 언급한 훈장의 개념은 뿌리채 흔들리고 만다. 잘못 수여된 훈장 몇 개가 다른 수많은 훈장에 담겨 있는 고귀한 뜻과 존엄성을 깎아 내리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국회가 새 국회상 정립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각당 대표 등 여야 간부 의원 28명에게 훈장을 주라고 정부에 요청했다가 비난하는 여론이 일자 슬그머니 철회했던 적도 있고, 88년 2월 11일에 있은 국무회의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그리고 현직 각료와 기타 주요한 위치에 있는 전 ·현직 공직자 등 91명을 대거 서훈키로 의결했다가 대폭 축소한 일도 있었다.
광주 '진압'이냐 '학살'이냐
원래 퇴임한 국무 위원급 인사들에게는 의례적으로 훈장이 수여되는 게 관례적으로 시행했지만 그처럼 현직엔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훈장을 받겠다고 의결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쨌든 80년 당시 훈장 수여 자와 비수 여자의 '그 이후'는 정계의 실권자를 가늠하는 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준다. 즉 앞서도 얘기했듯이 현재 민정당 의원(대구 서갑구)인 정씨는 물론 이고 박준병의원은 국군 보안 사령관을 거쳐 민정당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최세창 장군은 현재 합참의장, 최웅장군은 전역후 주 파키스탄 대 사로 나가 있다.
이에 반해 윤흥정씨는 80년 5월 갑작스런 예편'으로 군문을 떠나 몇개월 간 체신부장관을 역임한 뒤 구미 수출 산업 공단 이사장으로 가는 등 비정치적인 길'을 걸어왔다. 80년 10월 예편한 정웅 의원은 11대 총선에서 강제 사퇴 당했다가 지난 13대 총선에서 전국 최다 득표 및 최고 득표 율을 기록하며 당선했다,
아직 청문회는 계속되고 있지만 심증만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은 많지 않다. 당시 무더기로 수여된 동 ·포장에 대한 의구심이 밝혀지는 날에야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정한 개념 규정이 이뤄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때야말로 8년 전의 광주 상황이 단순 시위자 '학살'인지 '폭도 진압' 인지 가려질 것이다.
아래는 '광주 항쟁' 직후인 80년 8월 20일 훈 ·포장을 받은 사람의 명단과 공적서이다.
충무무공훈장(3급) 3명
▲정호용(당시 특전사령관 · 소장 · 경북· 1932년 9훨 10일생 ·현민정당의원).
공적 사항 :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공헌 (광주 소요 사태 ) .
▲박준병(당시 보병 20사단장 · 소장 ·충북 · 1934년 3월 28일생 ·현민정당의원).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공헌 (광주 사태 ) .
▲최세창 (당시 제3특전 여 단장 ·준장 ·경북 · 1934년 4월 17일생 ·현 합참의장) .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공헌 (광주 소요 사태).
화랑무공훈장(4級) 13명
▲차정환(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소령 ·경기 ·1950년 10월 24일생 ·사망).
공적 사항 :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진압에 진두지휘 중 불의의 흉탄에 맞고 순직하여 추서함 (광주 소요) .
변상진(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소령 ·충북· 1955년 1원 15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시 조선대학교 철수시 폭도들의 흉탄에 순직 (광주 소요 사태 ).
▲최연안(당시 제7특전여단 33대대 소속·중위 ·전남· 1958년 11월 23일생 ·사망) .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을 위해 선두 지휘하던 중 5월 27일 폭도의 총탄에 순직(광주 소요 사태).
▲조창구(당시 제11특전 여단 63대대 소속·중위 ·경남·1944년 12월 1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공헌하다가 5월 24일 철수 지휘 하다 흉탄에 팔부상(광주 소요 사태).
▲박병수 (당시 제7특전여단 소속 ·대위 ·전북 · 1955년 2월 16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8일 무등산 일대를 수색 중 부하의 위험을 구출하고 본인은 우족이 절단되는 부상을 입은 자로 공헌 (광주 소요 사태).
▲김태용(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대위 ·경북 · 1949년 1월 20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치밀한 계획으로 단시일 내 안정에 공헌 (광주 소요 사태) .
▲김전찬(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대위 ·경남 · 1949년 3월 27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공헌(광주 소요 사태 5.18-5.28까지) .
▲임명전(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 중위 ·서울 · 1955년 3월 18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치열한 폭도들의 난동 진압에 공헌(광주 소요 사태 5.18∼5.28까지) .
▲임수원(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중령 ·경북 · 1942년 10월 7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04 : 00 전남 도청을 장악하는 특공 작전에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공헌 (광주 소요 사태).
▲고성준(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대위 ·서울 · 1950년 1월 30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조선대학교에서 부대 이동시 치밀한 작전 기획에 의해 성공적으로 이동한 공로 (광주 소요 사태 ) .
▲최영준(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대위 ·강원 · 1954년 8월 1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04 : 08에 대원 2명이 총상을 당했음에도 폭도 29명을 생포, 칼빈 500정등 노획에 공로 (광주 소요 사태 ) .
▲이종규(당시 보병 제20사단 소속 ·상병 ·서울 · 1957년 6월 20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7일 04 : 30 광주 시내의 보안 확보를 위해 폭도들과 교전하다가 흉탄에 순직하여 추서함.
▲변광열 당시 보병 제20사단 소속 · 상병 · 경북 · 1957년 6월 30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1일 16 : 00 광주 통합 병원 확보를 위해 공격을 개시, 폭도 3명, 카빈총 2정, 실탄 20발 등 공을 세우고 돌진 중 흉탄에 맞아 순직 (광주 소요 사태 ).
인헌무공훈장(5급) 20명
▲정관철(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상사 ·강원 · 1954년 10월 19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0일 22시경 폭도(가 탄)8톤 트럭이 과속으로 계엄군에 돌진하여 대퇴부 골절상으로 순직.
▲ (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상사·전북 · 1956년 6월 24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폭도의 흉탄에 순직.
▲이영권(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중사 ·충남· 19i7년 1월 12일생 ·사밍)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14일 12시 30분경 폭도들과 교전하던 중 순직하여 추서함.
▲김용석(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중사 ·서울 · 1956년 7월 30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폭도들과 교전하다 순직.
▲최갑규(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 중사 ·강원 · 1959년 3월 3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부대 철수시 폭도들과 교전하던 중 폭도 흉탄 에 순직.
▲김용구(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 상사 ·경기 · 1943년 10월 2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4일 부대 이동시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도 작전에 만전을 기하였음.
▲안희선(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중사 ·서울 · 1956년 8월 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무장 폭도들의 본거 점인 전남 도청 특공 작전 수행 중 좌측 발을 관통 당하였으나 맡은 바 임무 수행에 만전을 기하였음.
▲이동국(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중사 ·경남 · 1957년 5월 1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맡은바 임무 수행에 만전을 기하였음.
▲조진수(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중사 ·충남 · 1956년 11월 20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격렬한 폭도 난동에 흉탄을 맞아 우측 어깨를 사용하지 못하면서도 작전 임무 수행에 만전을 기하였음.
▲ 편종식(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대위· 경북 · 1950년 8월 22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전남 도청을 장악하는 데 특공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공헌.
▲ 전광수(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중위· 경기 · 1956년 10월 27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폭도를 진압하기 위한 야간 기습 공격시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고서도 지대원 지휘에 만전을 기하였음.
▲석희업(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대위 ·경남 · 1951년 4월 19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특공작전에서 1개 지대를 보내 광주를 평정하는 데 공헌.
▲정태덕(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소령·경북·1948년 4월 1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광주 폭도 진압 작전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
▲김성범(당시 보병 제20사단 소속·병장 · 충북) .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2일에는 계엄군으로 임무 수행 중 동일24시경 폭도와 대치 중 총탄에 두부 관통상을 입고 후송.
▲한윤수(당시 육군 포병 학교 소속 ·상병 ·서울 · 1958년 3월 6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2일 15시경 지산동 앞마을 지점에서 폭도 기습에 응수, 교전 중에 좌측 어깨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진압 작전에 공헌.
▲이명규(당시 보병 제20사단 소속 ·병장 · 서울) .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계엄군으로서 임무 수행 중 광주 보건 전문 학교 옥상에서 M6O기관총 거치중 총탄에 팔 관통상을 입고 후송됨.
▲윤태정(당시 육군 포병 학교 소속·일병 ·경기 · 1959년 5월 23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2일 지산동 앞마을 지점에서 우슬관절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폭도 진압에 공헌.
▲임춘수(당시 육군 포병 학교 소속·일병·경북 · 1959년 1월 26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수송 업무를 담당하여 5월 22일 지산동 앞마을 지점에서 폭도 기습에 응수, 교전 중에 우팔 우하퇴부 총상을 입고 끝까지 폭도 진압에 공헌.
▲강대농(당시 육군 화학 학교 소속 ·상병 ·전남· 1957년 4월 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극렬분자들이 쏘는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우군 환자를 앰블런스로 운반하던 중 총탄에 후두부 관통상을 입고 후송 입원.
▲이병택(당시 전투 병과 사령부 소속·중사 ·전북· 1956년 8월 7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11공수 대장과 에이피시 (APC)장갑차에 동승
하여 작전 임무 수행 중 광주시 송암동에서 폭도들을 제압 전진 중 90밀리 무반동 총에 저격 당해 장렬히 전사.
무공 포장 17名
▲ 김경룡 (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병장 · 1957년 12월 1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17일 광주 소요 사태에 긴급 출동하여 운전병으로서 병력을 목적지까지 수송하는 데 공헌하다 21일 폭도들의 흉탄에 맞아 순직.
이상수(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병장·경기 · 1957년 8월 14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1일 조선대학교에서 철수하던 중 폭도들의 흉탄에 맞아 순직.
▲권석원(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병장 ·경남 · 1957년 1월 6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부대 이동시 통신병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중 폭도들의 총탄에 순직.
▲이관동(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상병 ·충남 · 1958년 11월 5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운전병으로써 병력을 목적지까지 투입시키고 5월 21일 폭도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흉탄에 아깝게도 순직.
▲ 권용운(당시 제 11특전 여단 소속 ·상병 ·경북· 1958년 1월 17일생 ·사망).
공적 사항 :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1일 광주 폭도들이 차량을 몰아오는 것을 보고 동료들을 피하게 하고 본인은 폭도 차량에 치어 순직.
▲김인태(당시 제11특전여단 소속 ·상병 ·충남 · 1958년 12월 5일생 ·사망).
공적 사항 :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4일 광주 시민들을 인도하면서 폭도들과 교전 중 5월 24일 흉탄을 맞고 순직.
▲김지호(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상병 ·경남· 1959년 9월 12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작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다가 폭도들과 교전하다 흉탄에 순직.
김갑규(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하사 ·경기 · 1955년 6월 20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0일 광주 역전 광장에서 폭도와 대치중 폭도의 차량에 의해 우측 다리가 절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도 1명을 잡는 등 폭도 진압에 기여.
▲장원복(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하사 · 경북 · 1959년 7월 20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폭도들의 본거점인 전남 도청을 장악하는 특공 작전에서 무기고 습격 도중 무장 폭도들이 난사한 총탄에 목부분이 관통했음에도 불구, 맡은 바 임무 수행에 공헌.
▲배현수(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하사 ·경북 · 1958년 9월 3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폭도 진압 특수 작전 수행 중 폭도의 흉탄에 부상당한 자로서 임무 수행에 공헌.
▲이종열(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일병 ·서울 · 1958년 9월 2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광주시 소요 폭동 진압 의무를 충실히 수행타 폭도의 총탄에 발목 관통상을 입으면서도 소요 진압에 기여.
▲ (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일병 ·서울 · 1959년 2월 2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16일 광주 소요 사태 진압시 선두에서 작전 임무 수행 중 철수시 매복 폭도들의 기습을 받아 하체 관통상을 입고 혼자 고립 상태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공적.
▲강용내(당시 보병 제31사단 소속 ·병장 ·경북· 1957년 2월 25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광주 인터체인지 육교까지 진출하였다가 순직.
▲김명철(당시 보병제 31사단 소속 ·상병 ·경남 · 1959년 9월 7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순직 .
▲최필양(당시 보병 제31사단 소속 ·일병 ·충남 · 1959년 1월 17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폭도 진압 중 순직.
▲이종규(당시 보병20사단 소속 ·중령 · 경남 · 1945련 4월 7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1일 광주 통합 병원 확보 명령을 수령하고 완강한 폭도의 저항을 분쇄하고 병원 확보에 공헌.
▲배동환(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상병 ·충남 · 1957년 1월 20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지역에 매복한 폭도들의 기습을 받고 옆구리에 총상을 당한 후 고립되어 탈출에 성공, 작전에 크게 기여.
보국훈장 삼일장 1명
▲김연균(당시 국군 광주 통합 병원 소속 ·대령 ·서울 · 1932년 5월 9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 중 사망자 29명, 입원 환자 중 군인 1백14명, 민간인 1백33명을 응급 조치하였으며 5월 20일 08 : 00 폭도들에 의해 점령된 체 한 건의 불상사도 없이 병원을 고수, 1천여명 보호에 공헌.
보국훈장 광복장 4명
▲이기양 (당시 보병 제20사단 소속·대위 ·강원 · 1954년 7월 22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2일 16 : 00 광주 통합 병원 확보에 기여하였으며 광주시 소요 사태 진압에 공헌.
▲김용주(당시 육군 화학 학교 소속·병장 ·부산 · 1957년 10월 4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3일 작전 임무 수행 중 남평에서 병력 수송 중 기습을 받아 총상을 입은 동료를 구출하는데 기여.
▲박용근(당시 보병제20사단 소속 ·상병 · 경북) .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04 : 30 광주 시가지 점령 작전에서 소대장을 보좌하면서 소요 사태 진압에 공헌.
▲나승일(당시 전투 병과 교육 사정부 소속·군속·전남· 1954년 8월 1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20 : 30∼5월 25일 13 : 00까지 전남 도청에 잠입하여 수류탄 신관 2백79발과 최루탄 1백70발, 다이나마이트 2천1백개에 장치된 뇌관을 제거해 피해를 방지하는 데 크게 공헌.
보국 포장 11명
▲호근철 (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중사 ·서울 · 1954년 3월 22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소요 폭도 진압에 노력하다 폭도 차량에 부상을 당하였음에도 소요 사태 진압에 기여.
▲이영배(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중사 ·경기 · 1954년 2월 22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소요 사태 진압을 수행하던 중 5월 27일 부상을 당하고서도 맡은 바 임무에 기여한 공.
▲이연수(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중사·전남 · 1954년 1월 22일생).
공적 사항: 광주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0일 역전 광장에 대치 중 폭도의 차량에 머리에 부상을 당하고도 돌진하여 폭도 2명을 생포하고 쓰러진공.
▲안경상(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일병 ·서울 · 1959년 3월 24일생).
공적 사항 :광주 소요 사태 충공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7일 야간 기습 공격시 빗발치는 흉탄에 팔에 관통상을 입고도 폭도 진압에 앞장서서 헌신한 자임.
▲조용희(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하사 ·서울 · 1956년 2월 8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0일 복도들의 화염병과 투석에 굴하지 않고 폭도 진압에 헌신하다 부상으로 후송.
▲서영민(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일병 ·부산 · 1958년 10월 14일생).
공적 사항 :광주 소요 사태 충정 작전 임무 수행 중인 5월 24일 철수 중 폭도의 총탄에 부상.
▲강춘구(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하사 ·충남 · 1958년 5월 5일생).
공적 사항 :광주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전남대학교에서 교도소로 이동간 지휘관을 엄호하면서 이동 중 교도소 입구에서 관통상을 입은 자임.
▲신재덕(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일병 ·충남 · 1958년 2월 1일생).
공적 사항 :광주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8일 대대 수색 정찰시 중대장이 헬기 고장으로 인하여 부상당하는 순간 중대장을 구하다가 같이 부상당한 자로서 투철한 군인 정신 발휘.
▲김기종(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하사 ·전남 · 1956년 5월 4일생).
공적 사항 :광주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역전 및 KBS 건물에 잠입한 폭도 진압에 앞장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폭도 차량에 양다리가 골절 당하여 후송된 자임.
▲김 식(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일병 ·강원 · 1956년 12월 22일생
공적 사항 :광주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1일 조선 대학에서 차량으로 부대 이동 작전 중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서도 용감하게 폭도 진압에 기여.
▲ 손광식(당시 전투 병과 교육 사령부 소속 · 일병 ·전남 · 1959년 7월·4일생 ·
사망)
공적 사항 :광주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야간 경계 업무 수행을 위해 부대로 출근하다가 폭도의 흉탄에 순직한 자임.
대통령 표창 개인3명, 단체 2개
▲최 웅(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중장 ·서울 · 1934년 12월 3일생 ·현 주 파키스탄 대사).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18∼5.28까지 광주 소요 사태 진압에 세밀한 작전계획, 작전 수행에 만전을 기하여 폭도들 제압에 크게 기여.
▲신우 (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준장 ·경북 · 1933년 9월 13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폭도 소요 사태 진압 작전에 사전 계획 및 작전 수행에 만전을 기하는데 기여.
▲장윤태(당시 보병 제31사단 소속 ·중령 ·전남 · 1942년 12월 19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폭도 소요 사태 및 전남 지역 폭도 진압에 기여.
▲육군 특전 사령부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소요 폭도 진압에 기여한 부대.
▲ 육군 보병제20사단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사태 진압에 공헌.
국무총리표창 5명
▲오의근(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대위 ·충남 · 1952년 2월 27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1일 09 : 00 전남 대학 정문에서 폭도 진압 작전 중 우측팔을 부상당했음에도 계속 진격하여 폭도 진압에 기여하다 후송.
▲추삼득(당시 광주 경찰서 소속·경장)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감식반 근무 자로서 폭도 진압 기간 중 발생한 사망자 1백44구의 시체 지문 채취에 헌신
▲김정수 (당시 보병 제20사단 소속·일병 ·경남 · 1958년 7월 12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1일 16: 50 광주 통합 확보를 위해 공격하던 중 저항하는 폭도의 총탄에 맞아(좌측 대퇴부 총상) 부상을 당한 자임.
▲안부웅(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중령 ·서울 · 1942년 8월 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04 : 00 특공대를 결성하여 광주 소요 폭도를 완전히 평정하여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게 하는 데 공헌.
▲권승만(당시 제7공수 특전 여단 소속 ·중령 ·전북 · 1945년 9월 18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치밀한 계획과 완벽한 작전 수행으로 폭도 진압과 치안 회복에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하였음. *
조 호 연<경향신문 월간경향 기자>
상은 받고 책임은 안져
지난 11월 19일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평민당의 김영진의원은 증인으로 나온 주영복씨(80년 당시 국방 장관) 에게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강경 진압에 대해 추궁한 뒤 "이렇게 진압한 군인들이 포장 ·훈장을 받았는데 신청 경위는 무엇인가 ?"라고 묻고 "육군
본부를 통해 상훈 신청이 올라와 결재한 기억이 있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주씨는 이어 정호용의원(민정당 ·당시 특전 사렁관) · 박준병의 원 (민정당 · 당시 20사단장) ·최세창장군 (합참의장 · 당시 3특전여단장) 등에 대한 충무무공 훈장 상신을 결재했으며 현재로선 그 포상에 대한 정당성이 재고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앞서 지난 11월 16일 총무처가 광주특위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광주민주화 운동 진압 작전과 관련해 상을 받은 사람은 위의 세 사람을 포함, 모두 79명으로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 화랑무공훈장 13명 ▲인헌무공훈장 20명 ▲무공포장 17명 ▲보국훈장 삼일장 1명 ▲보국훈장 광복장 4명 ▲보국포장 11명 등이다.
국어사전을 보면 상은 '잘한 일을 칭찬하여 주는 표적'으로, 훈장은 '나라에 대한 훈공이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해 내려주는 기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상훈은 타의 모범. 이 될 만한 훌륭한 언행을 널리 알리고 기리는 일종의 상징인 셈이다. 상을 탄 사람이 존경받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상훈법에도 무공훈장은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지난 12월7일 정호용 의원은 증인 신문과정 에서 충무무공훈장 수여 사실을 추궁받자 "부하들이 일을 잘했기 때문에 내게도 훈장
을 준 것 같다"고 대답하여 예각을 피해 나갔다.
정의원은 그 날 청문회 내내 지난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작전 당시 자신은 지휘 체계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으며· 광주에 내려가 총 7일간 체류했으나 직접 작전에 참가한 적은 없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정의원이 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상
훈법의 조항과 어긋난다. 만약 다른 부대에 잠시 배속된 부하들이 배속 부대에서 세운 공 때문에 훈장을 받았다면 바로 그 부하들에 의한 강경 진압의 책임 역시 모면키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편 총무처에서 광주특위에 제출한 「무공훈장부」에는 정의원의 공적 내용에 대해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공헌(광주 소요 사태)'으로 등재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군조직으로 알려진 공수 특전사의 사령관을 역임했고 육참총장, 내무·국방 장관을 지낸 정의원이 당시 훈장을 받으면서 공적 내용 속의 '참가했다'라는 말을 못 보았을 리 없고 그 말이 포괄하는 의미를 몰랐을 리 없다.
'참가했기 때문에 훈장 준 것'
따라서 야당 의원들의 주장대로 鄭의원은 진압 작전에 참가했거나 설혹 참가 하지 않았더라도 의심이나 이의 제기 없이 훈장을 받았던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게 청문회를 지켜본 사람들의 중논이다. 또 당시 전두환씨를 정점으로 하는 역학 관계로 살펴볼 때 비록 지휘 체계 안에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특전 사령관이 네번이나·광주에 내려가 현지 군 관계자들에게 준 '조언'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더구나 작전에 참가한 최웅 당시 제 11특전 여단장과 신우식 당시 제7특전 여단장이 군인으로서는 무공훈장보다 덜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는 사실로 볼때 정의원의 '역할'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게 된다. 즉 정 의원이 청문회에서 말한 "도의적 책임"이나 ,이미 다른 부대에 배속됐던 "부하들이 잘했기 때문에" 정도로는 무공훈장을 받을 만한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각종 훈 · 포장과 표창은 영원히 기억 될 영예이기 때문에 수여 결정 과정이 매우 복잡하며 엄격하다. 상훈 법에 따르면 추천을 위한 자체 공적 심사는 물론 중앙 공적 심사 위원회의 심의, 그리고 국무 회의의 심의 등을 거쳐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수여 대상자에게 결격 사유가 발견되면 당연히 서훈은 거부된다.
제출 서류만 해도 공적 조서, 자체 공적 심사 위원회 회의록 및 심의 의결서 사본1부 등 6가지나 된다. 특히 포상 춘천서가 접수되면 ▲정부 포상 정책 및 포상 관계 법령과 포상 기준에의 적합 여부 ▲사전동의 여부 ▲자체 공적 심사 위원회 심의 여부 등을 검토하게 되어 있다.
게다가 총무처의 「포상 업무 처리 지침」에 따르면 '포상의 전반적인 균형과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능한 한 수시 포상을 억제하려는 게 정부의 방침이기도 하다. 포상 대상자 선발에 있어서도 공적 내용이 정부 서훈 목적과 방침에 부합되는지의 여부, 공적의 객관적 타당성 여부, 공적의 사회적 효과, 유사한 내용의 타 공적자와의 균형 등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일단 포상 수여가 확정되면 훈장 ·포장, 대통령 표창 및 국무 총리 표창은 총무처에 비치된 훈기부 및 표창 기록부에 기록 유지하고, 기타 각급 기관장의 표창은 해당 기관에 비치된 표창 기록부에 기록 유지한 다음, 추천 기관에 통보하여 수여토록 돼 있다.
이런 물 샐 틈 없는 수여 결정 과정 때문에 부적격자가 훈 ·포장을 받는 일은 좀체로 발생하기 어렵다. 일단 훈 ·포장의 수여 결정이 나면 이것은 수여 당사자의 주관적인 판단과는 별도로 공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내려진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 밝혀진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작전과'관련해 훈 ·포장을 받은 79명 및 군부대는 충분히 그럴 만한 공적을 수행한 것이다. 더구나 그 수여 결정에 대해 한 번도 부당성을 주장하거나 공적이 미홉하다는 이유로 수상 거부의 의사를 표명했다는 얘기는 없었다. 당시 관련 정부 관료나 수상자들이 지금에 와서 수여 상신을 결재한 사실을 잘 모른다거나 부하들의 공 때문에 훈장을 받은 것 같다는 식으로 대답한다면 그 대답은 호소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윤장군은 영예 수여하지 말자'
이와는 별도로 훈장 ·표창 관련 행정 업무나 수상 당사자의 무분별함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구체적인 사례는 79명중 유일하게 군 출신이 아닌 추삼득씨 (당시 광주 경찰서 경장 ·국무 총리 표창)의 경우. 감식 요원이던 추씨는 진압이 끝난 뒤 곧바로 시작된 신원 확인 작업에 차출됐다. 당시 50여명의 지문을 채취했는데 이중 42명의 신원을 확인해 줬다.
"5월 27일 아침부터 계엄군 측의 정식 의뢰로 지문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광주 시내 각 대학병원 영안실을 돌며 작업했고 나중에는 산에 가매장된 시체들을 점검했습니다. 덕분에 유족들은 지금도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국무 총리 표창은 상신한 기억도 없고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통보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
추씨는 광주특위에서 그런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자신은 영원히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남 도경이나 광주 경찰서 관계자들도 "사무실에 보관 중인 표창상신장부에도, 표창 수여 장부에도 추씨의 이름이 없다"고 밝혔다.
추씨는 시중에 'M16 탄환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카빈 총탄에 의한 것이라고 판별해 준 대가로 국무 총리 표창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것과 관련해 자신은 "사망자의 신원만 확인했을 뿐 사인 규명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秋씨의 주장에 대해 관계 부처인 총무처에서는 아직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훈 ·포장 수여가 당시 숨가쁘게 돌아가던 정국을 반증하듯 실력자에게만 집중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즉 정웅 당시 31사단장이나 전남북 계엄분소장겸 전교사 사령관이던 윤흥정(진압 작전이 한창이던 중요한 시기에 갑자기 예편된 뒤 체신부장관에 임명됨) 등 좀더 온건한 진압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상당수 포상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1980년 9월 29일 있었던 제80회 임시 국무회의의 회의록 「양해 사항」에는 지난 제78회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의안번호 703호 국군의 날 영예수여 안건중 보국훈장 통일장의 육군대장 유병현장군과 예비역 육군중장 윤흥정 장군을 국방부 요청으로 제외키로 하였으니 양해
바랍니다'라고 나와 있다. 유씨는 80년5월 17일 있은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데 이의를 제기했던 장본인이다. 윤씨는 청문회에서 증언했던 대로 당시 상황이 공수부대의 동원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던 몇 안 되는 고급 지휘관 중의 한 명 이 다.
이같이 당시의 훈·포장 수여 대상자 결정이 뚜렷한 공로보다는 '정치적인 계산'에 보다 강하게 의존된 것임은 정호용의원의 "무공훈장은 대대장급 이하의 장병들에게나 주는 것이지 나와 같은 고급 지휘관이 받기에는 좀 뭐하다"는 증언이나 주영복씨의 "그 훈장은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한다면 재고될 수도 있을 것이다"는 증언에서도 시사되고 있다.
정의원은 증언을 통해 "휘하 부대가 공을 세우면 그 지휘관에게도 자동적으로 명예가 돌아간다. 육본에서 할당이 내려와 하급 지휘관은 내가 천거하고 육본에서 나를 천거해 받은 것이다"고 밝혔다. 이처럼 당시의 훈장은 총무처의 상훈법을 무시하고 '할당'되었음을 암시한 셈이다.
훈장의 가치가 시대에 따라 바뀐다면 앞서 언급한 훈장의 개념은 뿌리채 흔들리고 만다. 잘못 수여된 훈장 몇 개가 다른 수많은 훈장에 담겨 있는 고귀한 뜻과 존엄성을 깎아 내리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국회가 새 국회상 정립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각당 대표 등 여야 간부 의원 28명에게 훈장을 주라고 정부에 요청했다가 비난하는 여론이 일자 슬그머니 철회했던 적도 있고, 88년 2월 11일에 있은 국무회의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그리고 현직 각료와 기타 주요한 위치에 있는 전 ·현직 공직자 등 91명을 대거 서훈키로 의결했다가 대폭 축소한 일도 있었다.
광주 '진압'이냐 '학살'이냐
원래 퇴임한 국무 위원급 인사들에게는 의례적으로 훈장이 수여되는 게 관례적으로 시행했지만 그처럼 현직엔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훈장을 받겠다고 의결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쨌든 80년 당시 훈장 수여 자와 비수 여자의 '그 이후'는 정계의 실권자를 가늠하는 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준다. 즉 앞서도 얘기했듯이 현재 민정당 의원(대구 서갑구)인 정씨는 물론 이고 박준병의원은 국군 보안 사령관을 거쳐 민정당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최세창 장군은 현재 합참의장, 최웅장군은 전역후 주 파키스탄 대 사로 나가 있다.
이에 반해 윤흥정씨는 80년 5월 갑작스런 예편'으로 군문을 떠나 몇개월 간 체신부장관을 역임한 뒤 구미 수출 산업 공단 이사장으로 가는 등 비정치적인 길'을 걸어왔다. 80년 10월 예편한 정웅 의원은 11대 총선에서 강제 사퇴 당했다가 지난 13대 총선에서 전국 최다 득표 및 최고 득표 율을 기록하며 당선했다,
아직 청문회는 계속되고 있지만 심증만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은 많지 않다. 당시 무더기로 수여된 동 ·포장에 대한 의구심이 밝혀지는 날에야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정한 개념 규정이 이뤄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때야말로 8년 전의 광주 상황이 단순 시위자 '학살'인지 '폭도 진압' 인지 가려질 것이다.
아래는 '광주 항쟁' 직후인 80년 8월 20일 훈 ·포장을 받은 사람의 명단과 공적서이다.
충무무공훈장(3급) 3명
▲정호용(당시 특전사령관 · 소장 · 경북· 1932년 9훨 10일생 ·현민정당의원).
공적 사항 :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공헌 (광주 소요 사태 ) .
▲박준병(당시 보병 20사단장 · 소장 ·충북 · 1934년 3월 28일생 ·현민정당의원).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공헌 (광주 사태 ) .
▲최세창 (당시 제3특전 여 단장 ·준장 ·경북 · 1934년 4월 17일생 ·현 합참의장) .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공헌 (광주 소요 사태).
화랑무공훈장(4級) 13명
▲차정환(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소령 ·경기 ·1950년 10월 24일생 ·사망).
공적 사항 :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진압에 진두지휘 중 불의의 흉탄에 맞고 순직하여 추서함 (광주 소요) .
변상진(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소령 ·충북· 1955년 1원 15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시 조선대학교 철수시 폭도들의 흉탄에 순직 (광주 소요 사태 ).
▲최연안(당시 제7특전여단 33대대 소속·중위 ·전남· 1958년 11월 23일생 ·사망) .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을 위해 선두 지휘하던 중 5월 27일 폭도의 총탄에 순직(광주 소요 사태).
▲조창구(당시 제11특전 여단 63대대 소속·중위 ·경남·1944년 12월 1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공헌하다가 5월 24일 철수 지휘 하다 흉탄에 팔부상(광주 소요 사태).
▲박병수 (당시 제7특전여단 소속 ·대위 ·전북 · 1955년 2월 16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8일 무등산 일대를 수색 중 부하의 위험을 구출하고 본인은 우족이 절단되는 부상을 입은 자로 공헌 (광주 소요 사태).
▲김태용(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대위 ·경북 · 1949년 1월 20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치밀한 계획으로 단시일 내 안정에 공헌 (광주 소요 사태) .
▲김전찬(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대위 ·경남 · 1949년 3월 27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사태 진압에 공헌(광주 소요 사태 5.18-5.28까지) .
▲임명전(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 중위 ·서울 · 1955년 3월 18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치열한 폭도들의 난동 진압에 공헌(광주 소요 사태 5.18∼5.28까지) .
▲임수원(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중령 ·경북 · 1942년 10월 7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04 : 00 전남 도청을 장악하는 특공 작전에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공헌 (광주 소요 사태).
▲고성준(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대위 ·서울 · 1950년 1월 30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조선대학교에서 부대 이동시 치밀한 작전 기획에 의해 성공적으로 이동한 공로 (광주 소요 사태 ) .
▲최영준(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대위 ·강원 · 1954년 8월 1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04 : 08에 대원 2명이 총상을 당했음에도 폭도 29명을 생포, 칼빈 500정등 노획에 공로 (광주 소요 사태 ) .
▲이종규(당시 보병 제20사단 소속 ·상병 ·서울 · 1957년 6월 20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7일 04 : 30 광주 시내의 보안 확보를 위해 폭도들과 교전하다가 흉탄에 순직하여 추서함.
▲변광열 당시 보병 제20사단 소속 · 상병 · 경북 · 1957년 6월 30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1일 16 : 00 광주 통합 병원 확보를 위해 공격을 개시, 폭도 3명, 카빈총 2정, 실탄 20발 등 공을 세우고 돌진 중 흉탄에 맞아 순직 (광주 소요 사태 ).
인헌무공훈장(5급) 20명
▲정관철(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상사 ·강원 · 1954년 10월 19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0일 22시경 폭도(가 탄)8톤 트럭이 과속으로 계엄군에 돌진하여 대퇴부 골절상으로 순직.
▲ (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상사·전북 · 1956년 6월 24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폭도의 흉탄에 순직.
▲이영권(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중사 ·충남· 19i7년 1월 12일생 ·사밍)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14일 12시 30분경 폭도들과 교전하던 중 순직하여 추서함.
▲김용석(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중사 ·서울 · 1956년 7월 30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폭도들과 교전하다 순직.
▲최갑규(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 중사 ·강원 · 1959년 3월 3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부대 철수시 폭도들과 교전하던 중 폭도 흉탄 에 순직.
▲김용구(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 상사 ·경기 · 1943년 10월 2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4일 부대 이동시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도 작전에 만전을 기하였음.
▲안희선(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중사 ·서울 · 1956년 8월 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무장 폭도들의 본거 점인 전남 도청 특공 작전 수행 중 좌측 발을 관통 당하였으나 맡은 바 임무 수행에 만전을 기하였음.
▲이동국(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중사 ·경남 · 1957년 5월 1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맡은바 임무 수행에 만전을 기하였음.
▲조진수(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중사 ·충남 · 1956년 11월 20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격렬한 폭도 난동에 흉탄을 맞아 우측 어깨를 사용하지 못하면서도 작전 임무 수행에 만전을 기하였음.
▲ 편종식(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대위· 경북 · 1950년 8월 22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전남 도청을 장악하는 데 특공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공헌.
▲ 전광수(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중위· 경기 · 1956년 10월 27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폭도를 진압하기 위한 야간 기습 공격시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고서도 지대원 지휘에 만전을 기하였음.
▲석희업(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대위 ·경남 · 1951년 4월 19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특공작전에서 1개 지대를 보내 광주를 평정하는 데 공헌.
▲정태덕(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소령·경북·1948년 4월 1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광주 폭도 진압 작전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
▲김성범(당시 보병 제20사단 소속·병장 · 충북) .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2일에는 계엄군으로 임무 수행 중 동일24시경 폭도와 대치 중 총탄에 두부 관통상을 입고 후송.
▲한윤수(당시 육군 포병 학교 소속 ·상병 ·서울 · 1958년 3월 6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2일 15시경 지산동 앞마을 지점에서 폭도 기습에 응수, 교전 중에 좌측 어깨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진압 작전에 공헌.
▲이명규(당시 보병 제20사단 소속 ·병장 · 서울) .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계엄군으로서 임무 수행 중 광주 보건 전문 학교 옥상에서 M6O기관총 거치중 총탄에 팔 관통상을 입고 후송됨.
▲윤태정(당시 육군 포병 학교 소속·일병 ·경기 · 1959년 5월 23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2일 지산동 앞마을 지점에서 우슬관절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폭도 진압에 공헌.
▲임춘수(당시 육군 포병 학교 소속·일병·경북 · 1959년 1월 26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수송 업무를 담당하여 5월 22일 지산동 앞마을 지점에서 폭도 기습에 응수, 교전 중에 우팔 우하퇴부 총상을 입고 끝까지 폭도 진압에 공헌.
▲강대농(당시 육군 화학 학교 소속 ·상병 ·전남· 1957년 4월 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극렬분자들이 쏘는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우군 환자를 앰블런스로 운반하던 중 총탄에 후두부 관통상을 입고 후송 입원.
▲이병택(당시 전투 병과 사령부 소속·중사 ·전북· 1956년 8월 7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11공수 대장과 에이피시 (APC)장갑차에 동승
하여 작전 임무 수행 중 광주시 송암동에서 폭도들을 제압 전진 중 90밀리 무반동 총에 저격 당해 장렬히 전사.
무공 포장 17名
▲ 김경룡 (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병장 · 1957년 12월 1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17일 광주 소요 사태에 긴급 출동하여 운전병으로서 병력을 목적지까지 수송하는 데 공헌하다 21일 폭도들의 흉탄에 맞아 순직.
이상수(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병장·경기 · 1957년 8월 14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1일 조선대학교에서 철수하던 중 폭도들의 흉탄에 맞아 순직.
▲권석원(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병장 ·경남 · 1957년 1월 6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부대 이동시 통신병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중 폭도들의 총탄에 순직.
▲이관동(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상병 ·충남 · 1958년 11월 5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운전병으로써 병력을 목적지까지 투입시키고 5월 21일 폭도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흉탄에 아깝게도 순직.
▲ 권용운(당시 제 11특전 여단 소속 ·상병 ·경북· 1958년 1월 17일생 ·사망).
공적 사항 :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1일 광주 폭도들이 차량을 몰아오는 것을 보고 동료들을 피하게 하고 본인은 폭도 차량에 치어 순직.
▲김인태(당시 제11특전여단 소속 ·상병 ·충남 · 1958년 12월 5일생 ·사망).
공적 사항 :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4일 광주 시민들을 인도하면서 폭도들과 교전 중 5월 24일 흉탄을 맞고 순직.
▲김지호(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상병 ·경남· 1959년 9월 12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작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다가 폭도들과 교전하다 흉탄에 순직.
김갑규(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하사 ·경기 · 1955년 6월 20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0일 광주 역전 광장에서 폭도와 대치중 폭도의 차량에 의해 우측 다리가 절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도 1명을 잡는 등 폭도 진압에 기여.
▲장원복(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하사 · 경북 · 1959년 7월 20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폭도들의 본거점인 전남 도청을 장악하는 특공 작전에서 무기고 습격 도중 무장 폭도들이 난사한 총탄에 목부분이 관통했음에도 불구, 맡은 바 임무 수행에 공헌.
▲배현수(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하사 ·경북 · 1958년 9월 3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폭도 진압 특수 작전 수행 중 폭도의 흉탄에 부상당한 자로서 임무 수행에 공헌.
▲이종열(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일병 ·서울 · 1958년 9월 2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광주시 소요 폭동 진압 의무를 충실히 수행타 폭도의 총탄에 발목 관통상을 입으면서도 소요 진압에 기여.
▲ (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일병 ·서울 · 1959년 2월 2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16일 광주 소요 사태 진압시 선두에서 작전 임무 수행 중 철수시 매복 폭도들의 기습을 받아 하체 관통상을 입고 혼자 고립 상태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공적.
▲강용내(당시 보병 제31사단 소속 ·병장 ·경북· 1957년 2월 25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광주 인터체인지 육교까지 진출하였다가 순직.
▲김명철(당시 보병제 31사단 소속 ·상병 ·경남 · 1959년 9월 7일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순직 .
▲최필양(당시 보병 제31사단 소속 ·일병 ·충남 · 1959년 1월 17생 ·사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폭도 진압 중 순직.
▲이종규(당시 보병20사단 소속 ·중령 · 경남 · 1945련 4월 7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1일 광주 통합 병원 확보 명령을 수령하고 완강한 폭도의 저항을 분쇄하고 병원 확보에 공헌.
▲배동환(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상병 ·충남 · 1957년 1월 20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지역에 매복한 폭도들의 기습을 받고 옆구리에 총상을 당한 후 고립되어 탈출에 성공, 작전에 크게 기여.
보국훈장 삼일장 1명
▲김연균(당시 국군 광주 통합 병원 소속 ·대령 ·서울 · 1932년 5월 9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 중 사망자 29명, 입원 환자 중 군인 1백14명, 민간인 1백33명을 응급 조치하였으며 5월 20일 08 : 00 폭도들에 의해 점령된 체 한 건의 불상사도 없이 병원을 고수, 1천여명 보호에 공헌.
보국훈장 광복장 4명
▲이기양 (당시 보병 제20사단 소속·대위 ·강원 · 1954년 7월 22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2일 16 : 00 광주 통합 병원 확보에 기여하였으며 광주시 소요 사태 진압에 공헌.
▲김용주(당시 육군 화학 학교 소속·병장 ·부산 · 1957년 10월 4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3일 작전 임무 수행 중 남평에서 병력 수송 중 기습을 받아 총상을 입은 동료를 구출하는데 기여.
▲박용근(당시 보병제20사단 소속 ·상병 · 경북) .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04 : 30 광주 시가지 점령 작전에서 소대장을 보좌하면서 소요 사태 진압에 공헌.
▲나승일(당시 전투 병과 교육 사정부 소속·군속·전남· 1954년 8월 1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20 : 30∼5월 25일 13 : 00까지 전남 도청에 잠입하여 수류탄 신관 2백79발과 최루탄 1백70발, 다이나마이트 2천1백개에 장치된 뇌관을 제거해 피해를 방지하는 데 크게 공헌.
보국 포장 11명
▲호근철 (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중사 ·서울 · 1954년 3월 22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소요 폭도 진압에 노력하다 폭도 차량에 부상을 당하였음에도 소요 사태 진압에 기여.
▲이영배(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중사 ·경기 · 1954년 2월 22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소요 사태 진압을 수행하던 중 5월 27일 부상을 당하고서도 맡은 바 임무에 기여한 공.
▲이연수(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중사·전남 · 1954년 1월 22일생).
공적 사항: 광주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0일 역전 광장에 대치 중 폭도의 차량에 머리에 부상을 당하고도 돌진하여 폭도 2명을 생포하고 쓰러진공.
▲안경상(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일병 ·서울 · 1959년 3월 24일생).
공적 사항 :광주 소요 사태 충공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7일 야간 기습 공격시 빗발치는 흉탄에 팔에 관통상을 입고도 폭도 진압에 앞장서서 헌신한 자임.
▲조용희(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하사 ·서울 · 1956년 2월 8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0일 복도들의 화염병과 투석에 굴하지 않고 폭도 진압에 헌신하다 부상으로 후송.
▲서영민(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일병 ·부산 · 1958년 10월 14일생).
공적 사항 :광주 소요 사태 충정 작전 임무 수행 중인 5월 24일 철수 중 폭도의 총탄에 부상.
▲강춘구(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하사 ·충남 · 1958년 5월 5일생).
공적 사항 :광주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전남대학교에서 교도소로 이동간 지휘관을 엄호하면서 이동 중 교도소 입구에서 관통상을 입은 자임.
▲신재덕(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일병 ·충남 · 1958년 2월 1일생).
공적 사항 :광주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8일 대대 수색 정찰시 중대장이 헬기 고장으로 인하여 부상당하는 순간 중대장을 구하다가 같이 부상당한 자로서 투철한 군인 정신 발휘.
▲김기종(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하사 ·전남 · 1956년 5월 4일생).
공적 사항 :광주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역전 및 KBS 건물에 잠입한 폭도 진압에 앞장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폭도 차량에 양다리가 골절 당하여 후송된 자임.
▲김 식(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일병 ·강원 · 1956년 12월 22일생
공적 사항 :광주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 21일 조선 대학에서 차량으로 부대 이동 작전 중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서도 용감하게 폭도 진압에 기여.
▲ 손광식(당시 전투 병과 교육 사령부 소속 · 일병 ·전남 · 1959년 7월·4일생 ·
사망)
공적 사항 :광주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야간 경계 업무 수행을 위해 부대로 출근하다가 폭도의 흉탄에 순직한 자임.
대통령 표창 개인3명, 단체 2개
▲최 웅(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 ·중장 ·서울 · 1934년 12월 3일생 ·현 주 파키스탄 대사).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18∼5.28까지 광주 소요 사태 진압에 세밀한 작전계획, 작전 수행에 만전을 기하여 폭도들 제압에 크게 기여.
▲신우 (당시 제7특전 여단 소속 ·준장 ·경북 · 1933년 9월 13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폭도 소요 사태 진압 작전에 사전 계획 및 작전 수행에 만전을 기하는데 기여.
▲장윤태(당시 보병 제31사단 소속 ·중령 ·전남 · 1942년 12월 19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폭도 소요 사태 및 전남 지역 폭도 진압에 기여.
▲육군 특전 사령부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소요 폭도 진압에 기여한 부대.
▲ 육군 보병제20사단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광주 사태 진압에 공헌.
국무총리표창 5명
▲오의근(당시 제3특전 여단 소속 ·대위 ·충남 · 1952년 2월 27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1일 09 : 00 전남 대학 정문에서 폭도 진압 작전 중 우측팔을 부상당했음에도 계속 진격하여 폭도 진압에 기여하다 후송.
▲추삼득(당시 광주 경찰서 소속·경장)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감식반 근무 자로서 폭도 진압 기간 중 발생한 사망자 1백44구의 시체 지문 채취에 헌신
▲김정수 (당시 보병 제20사단 소속·일병 ·경남 · 1958년 7월 12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1일 16: 50 광주 통합 확보를 위해 공격하던 중 저항하는 폭도의 총탄에 맞아(좌측 대퇴부 총상) 부상을 당한 자임.
▲안부웅(당시 제11특전 여단 소속·중령 ·서울 · 1942년 8월 5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5월27일 04 : 00 특공대를 결성하여 광주 소요 폭도를 완전히 평정하여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게 하는 데 공헌.
▲권승만(당시 제7공수 특전 여단 소속 ·중령 ·전북 · 1945년 9월 18일생).
공적 사항 :충정 작전에 참가하여 치밀한 계획과 완벽한 작전 수행으로 폭도 진압과 치안 회복에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하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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