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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육사11기의 6인 실력자, 천금성(신동아, 199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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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11기의 6인 실력자, 천금성(신동아, 1998, 1)



「12· 12사태」의 정리를 위해

「5· 16」과 「5·17」을 일으킨 군부세력들이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두 가지가 다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 내기 위해 구국이염의 차원에서 부득이 군인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그들 나름의 주장이 일치한다는 점과, 둘째로는 거사→군부 장악이 결국에는 정권 장악으로 연결되었다는 결과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공통점이 있는 반면에 이들을 부르는 호칭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5·16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혁명 주체 세력」이라 하고 5· 17을 비롯하여 제5공화국의 출범과 운영에 관여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개혁 주도 세력」이라 일컫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그 지칭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가 군복을 벗고 정치의 일선에 나섰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또 그러했기 때문에 군부 내에서만 통할 수 있는 강력한 명령 규범이 이 나라의 기왕의 모든 질서 규범을 일시에 변혁시키는 이른바 「개혁 작업」이 분수 되에 온 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전두환 대통령의 전기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집필한 바 있는데, 이의 출간을 마친 다음 고위층의 지시에 따라 「12· 12사태」라고 하는 미증유의 사건을 정리한 바 있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필자는 「12·12사태」에 관여한 많은 수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들과 장시간 면담을 하는 동안 느꼈던 한사람 한 사람의 연행에서부터 그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내면생활에 이르기까지를 「12 · 12사태」의 진상과는 별개로 정리, 소개하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지난 8년 동안 이 나라의 현대사에 그들이 미쳤던 공과와는 별개의 것이다. 그 평가 문제는 현재로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어서 후일의 역사가들에게 맡길 성질의 것이다. 다만 필자는 한 작가의 시각에선, 제5공화국 국정 운영을 주도한 전대통령을 정점으로 해서 이들의 얽히고 설킨 인맥 등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자 할 따름이다.

필자는 제5공화국의 주도 세력들을 세분하지 않고, 먼저 육사11기 출신의 핵심 세력부터 거론하고자 한다. 소개하는 순서는 전혀 철자의 편의에 의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노태우씨

노태우 장군을 만난 것은 1980년 9월초 노 장관은 당시 육군 중장으로 국군 보안 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장소는 그의 집무실인 보안 사령관 실.

면담 목적이 「12·12 사태」에 대한 내용이었으므로 처음부터 우회적인 표현을 할 필요도 없이 막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차분하고 조리 있는 말솜씨가 미리 준비를 해둔 것 같았다.

노장군으로부터는 대체적으로 「12·12 사태」에 대한 주역들의 생각과 사태의 발단, 그리고 그것이 종결될 때까지의 총체적인 상황을 들었다. 그 중에서도 「거사」나흘 전 자신이 서울로 외박을 나오게 된 동기와, 보안 사령관이던 전두환 장군과의 만남, 그리고 둘이 함께 나눈 말(거사키로 합의하는 데까지의 과정) 등에 대해 그는 완전히 강의를 하듯 이 야기했다. 아주 자신감 있는 듯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노태우 장군은 그의 큰 瑞로 해서 평소에도 남의 말을 잘 새겨듣는 편이었던 모양으로, 전 장군이 노장군에게 『어때 ? 오랜만에 외출을 나온 힘에 몇 사람 만나 보지 않겠어 ?』라는 제의에, 『그렇게 하겠네』하고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었다고 했다. 12·12를 나흘 앞두고 있던 12월 B일의 일이었다.

그 전날(12월7일) 보안 사령관이자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던 전 장군은 보병 제9사단장인 노장군에게 전화를 걸어,『내일 시간을 내어 서울로 꼭 나오라』고 당부했었다.

전 본부장이 노장군을 서울로 나오도록 한 것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의 수사가 막바지에 와 있는 그때 제기된 정승화 총장의 「의문점」과, 군부의 대동단결, 국민 여론의 합치를 위해서는 정 총장 스스로가 참모 총장직과 계엄 사령관 직 에서 용퇴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임을 내세우며, 육사 시절부터 막역지간인 노장군의 조언 내지는 도움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보안사령부를 나온 노장군은 그 길로 J일보의 당시 사회 부장이던 S씨를 비롯하여 서울대학교 K·J 교수 등을 차례로 만나 대략적인 시중의 여론을 들었다. 그때 노장군이 들은 시중의 여론은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큰일 나고야 말 것』이라는 데로 모아졌다고 한다. 그 중의 한 교수는 노장군에게, 『당신은 명색이 우리 나라 군부의 유수한 지휘관이면서 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 데도 가만히 팔짱만 끼고 있을 거냐 ?』고 마구 나무라기

까지 했다는 것이다.

두 장군의 이날 회동이 결국 「12·12사태」라고 하는 「숙군」으로 발전하게 된 것

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 12.12사태를 계기로 차규헌 · 유학성·황영시

라는 군단장 급의 선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군부의 주도권은 육사 11기 생에게로 넘어 갔다. 이것은 다음해 대통령령으로 설치된 「국보위」의 상임 위원장으로 전두환 장군이, 그리고 상임 위원으로 이기백소장(운영 위원장 당연직), 노태우, 정호도 중장(임명직) 등 4명이 보임 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노장군이 수도 경비 사령관을, 정장군이 특전 사령관을, 그리고, 전 장군이 보안 사령관(중정 부장 서리 겸직)직을 각각 맡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한국 군부의 가장 핵심적인 요직을 완전 장악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세 장군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육사 시절부터 이른바 「식스 멤버」중의 3인. 여기에 12월13일 노장군의 후임으로 제9사단장으로 보임된 백운택 장군도 「12·12」에 적극 가담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그 6명 중 김복동 장군(당시 육사 교장)과 최성택장군(당시 합참본부 제 2국장)만이 「12·12주도 대열」에서 제외된 셈이었다(두 장군의 주도 세력 탈락에 관해서는 해당 항목에서 상술한다).

「동노 모사는 안 된다」

보안 사령관 실에서 노장군과 세 시간에 걸친 면담을 끝낼 무렵 필자는 노 장관의 증언을 어떻게 정리해야 옳을지 몰랐다.

『자세한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나 장군님의 청산유수 같은 증언을 저로서는 정리하기가 매우 어렵군요. 전 장군과 노장군께서 12월8일 만나서 서로 나눈 이야기가 마구 뒤섞여 있기 때문에 어느 대목이 전 장군의 말이고 어느 대목이 노장군의 이야기인지 분간할 수가 없게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

그러자 노장군이 간명하게 잘라 말했다.

『아, 그건 작가가 알아서 적당히 나누어 정리하면 돼요. 내 말이 각하 말씀이고 또 각하 말씀이 내 말이니까요』

나는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노장군의 증언을 토대로 ,원고 정리를 해 놓고 보니 결과적으로 노장군에게 초점을 맞춘 꼴이 되어, 이것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다소 거부 반응을 받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이유를 필자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분위기가 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 대통령에게 주위의 충성심이 가히 폭발적으로 모아지고 있었

을 때여서 노장군의 비중을 다소 회석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아뭏든 30년 가까운 막역지간이긴 해도, 한 사람은 절대 권좌에 올라 있는 반면 노장군은 아직도 군부에 남아 그를 보좌해야 한다는 상대적인 위치 때문에 주위에서는 노장군의 자신감 넘치는 여러 언행을 서서히 견제하는 기운이 감돌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보면 노장군은 「12·12」를 전후하여 전 본부장과 거의 동등한 위치에서 기탄 없는 의견을 개진하고 이를 실행했던 것이 틀림없다. 『이런 식의 동격 묘사는 안 된다』는 발상 때문에 필자는 자구 하나 하나에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육군 대장으로 전역한 다음 노장군은 제2정무장관을 시발로 정치 일선에 나섰다. 이 무렵부터 그의 전 대통령에 대한 제반 언행은 옛날부터의 친구 사이로서가 아니라 엄격한 상하 관계의 틀 속에 맞추어졌다. 모 장군과는 달리, 호칭도 반드시 「각하」로 했다.

「12·12 거사」대목 가운데, 노장군이 경복궁 재30경비 단에 모였던 지회관들과의 합의를 거쳐 자신의 1개 연대 병력을 서울로 출동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선두에는 「족보 장군」 이상규준장이 이때 선두에는 5대의 전 차대가 앞서곤 그 뒤를 따른 연대 병력을 지휘했던 사람이 안병호 중령(단시 9사단 작전참모)이었다. 이 안중령이 노보 안 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면담 중 배석하고 있다가 노장군이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틈을 낸 사이에 잠간 끼어 들었다.

『그날(12월12일)밤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진주 고교를 졸업한 안 중령은 필자와는 동기뻘 이었다. 그는 처음 나를 보자 『경남고를 나왔지요?』 하고 물어서,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었더니 『이런 데 있다 보면 다 알게 되지요』 라고 말한 적도 있는, 상당히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서울로 나가신 사단장(노장군)님으로부터 참모장 구정회대령에게 전화가 왔어요. 「병력 1개 연대만 즉시 출동시켜라 ! 그리고 나머지 연대는 전방 방위에 이상이 없도록 비상 배치토록 하고!」그런 지시 였습니다. 구참모장은 사단장님의 이 지시를 즉시 연대장 이필섭대령에게 전달했습니다. 30분 후 우리는 출동했습니다. 출동 전에 나는 서울로 나가는 길목의 수경사 바리케이드 설치 상황을 점검하라고 1군단 헌병 대장 최동수 중령을 먼저 출발시켰습니다. 선두 전 차대는 모두 「벌집탄」을 장전하고 전차의 해치를 모두 닫고‥‥』

안 중령이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이야기해 주어 필자는 열심히 메모했다. 그때 전화를 끊은 노장군이『 그런 쓸데없는 말을‥‥』하고 안 중령의 말을 가로막았다.

필자는 「벌집탄」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기 때문에, 노장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벌집탄이 어떤 건데요?』하고 계속해서 안 중령을 채근했다. 그러나 노장군의 눈치를 보던 안중령은 설명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만 8년이 지난 오늘, 바로 노장군 자신이 필자에게 증언했던 이대목이 12·12사태를 둘러싼 논란의 불씨가 되고 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전방을 지켜야 할 병력을 마음대로 후방으로 빼내어서는 국가 방위가 제대로 되겠느냐」는 논란인 것이다.

노장군은 바로 이 대목이 나중 자신에게 어떤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선거 기간 중 첨예하게 제기된 이 쟁점에 대해 정공법으로 시인했다. 그게 그의 장점인지도 모르겠다.

「실패했어도 후회는 안해』

수 차례의 면담이 끝난 뒤, 필자는 마지막으로 노장군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12·12 거사」가 충성스러운 지휘관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구국일념」으로 출발한 그 거사가 합수 본부 쪽의 승리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공을 세운 사랑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건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정 총장을 성공적으로 강제 연행한 허삼수 대령이지요. 만약 허 대령이 실패해서 그쪽 경계병들에 의해 체포되거나 했다면 우린 모두가 낭패를 봤을 것이니까요. 허 대령은 기운이 장사입니다. 육사 시절 유도도 했고 또 럭비 선수도 했어요』

『그 다음으로는 요?』

『물론 사선을 넘으며 국방부와 육본을 평정한 박희도 준장이지요. 그때는 서울 시내 일원에 장태완의 명령을 받은 수경사 병력이 이미 깔려 있었지 않았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영웅적인 행동이었지요. 또 특전사를 평정한 최세창장군과 자신의 상관을 비롯한 육본 수뇌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수경사를 진압한 신윤희중령도 빼놓을 수 없지요』

『 지금에 와서도 거사 주역들의 행위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만에 하나 실패하여 불의의 응징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역사는 이 일을 정확히 기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식스 멤버」중에서 전 장군에 이어 두 번째로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던 그는 81년 7월15일 전역한 후 바로 다음 날 제2정무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체육부 장관, 내무부장관,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장, 민정당 대표위원, 민정당 대통령 후보 등으로 제5공화국의 전면에 나서서 정국을 주도해 왔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다.

정호도씨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정호도장군을 만났을 때에도 필자는 그에 대한 아무런 예비 지식도 갖고 있지 못했다. 육군 참모 차장실 옆 회의실에서 만나 본 정 장군은 수더분한 모습이 도무지 군인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12월12일 그날 정소장은 대구에 있는00사단 사단장이었다. 그날 저녁 정장군은 줄곧 부대에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서울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녁 8시경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었을 때도 무엇 때문에 비상이 발령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정 장군은 이 같은 시기에 갑자기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면 그것은 『북괴의 도발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한다. 그래서 그는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는 것을 보고 부대에 비상대기 명령을 하달한 다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사단장실 간이 침대에서 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 그는 서울 보안사령부로 전화를 걸었다. 당번 병 이 전화를 받은 모양으로 『사령관 계시냐?』는 물음에 『안 계십니다』라는 대답만 했다. 그때 전본부장은 수도군단장 차규헌중장,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 1군단장 황영시 중장 등 5명의 장군들과 함께 정총장 연행에 대한 최규하대통령 권한 대행의 재가를 얻기 위해 두 번째로 삼청동 총리 공관으로 가 있었을 때였다. 대구시 경찰국장, 중정지부장 등이 정 장군에게 비상

발령의 이유를 물어 왔으나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서울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야전 침대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고 있던 밤 11시나 되어서였다.

『나 운택이다. 너 서울로 빨리 좀 올라 와야겠다』

백운택 준장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정장군의 물음에 백준장은 『자세한 얘기는 올라와서 하자. 우리가 지금 하고 있다』 하는 알쏭달쏭한 말만 했다. 전화를 하는 곳은 보안 사령관 실이라고 했다.

정 장군은 다음날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가기로 하고 그대로 잠을 청했다. 서울에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한 모양이고, 그렇다면 내일 무척 바빠 질 것이니까 당장은 잠을 실컷 자두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정 장군은 새벽 2시경 당번 병이 깨우는 바람에 잠이 깼다. 0군사령관 진종채 중장의 전화 때문이었다.

『무어 ?자고 있다고 ? 참 배짱도 좋구먼. 이렇게 비상이 내려져 있는데 답답 하지도 않아 ?』

『김일성이가 쳐내려 오는 모양인데, 전투를 하려면 미리 잠이나 실컷 자두어야지요』

『아, 이 사람아. 지금 서울에서는 장태완이가 차규헌 · 유학성 · 황영시 · 노태우 · 백운택을 모두 잡아죽이겠다고 전차를 앞세우고 보안사령부로 쳐들어 가고 있다는 거야. 정병주와 3군 사령관(이건형)도 함께 병력을 출동시키고 있는 모양인데, 그냥 놔두면 쌍방이 일전 불사인 모양이야. 보안사령부에서 자네를 빨리 올려 보내라고 재촉이 성화 같은데 어떻게 할건가?』

그제서야 정 장군은 정신이 번쩍 났다고 했다.

『정 총장 때문인가 보지요? 사령관 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진 사령관은, 「첫째로 어떤 일이 있어도 유혈 사태는 막아야 한다, 둘째 정 총장에 대한 수사는 불가피하다, 세째 전 본부장의 용단에 대해 나로서는 극력 찬성한다」는등 세 가지 사항을 분명히 한다고 말하고, 『하여간 답답해서 못 살겠으니 당신이 좀 올라가 보지』하고 권유했 다.

정 장군은 집으로 가서 아내(김숙환)에게 『누가 찾으면 동해안으로 시찰 나갔다』고 말하라고 일러 놓고 다시 부대로 가서 똑같은 지시를 했다. 그리고 부관 최종대 대위로 하여금 Ml6으로 무장하게 하여 새벽 4시경 대구를 출발한다.

제3한강교를 통과한 시각이 아침 8시30분 경. 그때는 밤새 쳐져 있던 바리케이드가 철거되어 평소와 다름없이 교통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 장군은 그래서 간밤 내내 서울 일원에서 벌어졌던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전혀 느끼지 못 했다고 한다.

특전 사명분으로 전격

보안사령부에 도착한 시간은 9시 무렵. 사령관 실은 담배 연기로 자욱하고,그 연기 속에서 간밤 격전(?)을 치른 지휘관들이 연행 혹은 체포 등으로 공석이된 군 수뇌부의 후임자 보임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정 장군이 들어서는 것을 본 지휘관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특전 사령관으로 추대 하자며 즉씨 최권한 대행의 재가를 받아 냈다.

『나는 그 바람에 대구에서 이임식도 못 했어요. 보따리도 챙기지 못 했지요.

진종채 차령관의 「답답해서 못 살겠다」 는 말이 서울로 올라오게 된 계기였고 또 특전 사령관이 된. 계기였어요. 그 뒤로 이렇게 참모 차장까지 되었구요』

정 장군은 소탈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정 장군은 정병주 장군의 후임으로 특전 사령관에 임명되게 되어 있었다. 87년 모 월간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정승화씨는, 정호용 장군을 가리켜 『상당히 합리적이고 정치 문제에도 초연했으며 오로지 군인 정신으로만 충만한 사람』이라고 평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정병주 사령관의 후임으로 정호용 장군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었다. 육사 12기로 보안 사령관을 거쳐 육군 대장으로 전역한 박준병의원(민정당·국회 보사위원장)도 그를 가리켜 무리하지 않고 상식을 중시하는 온건론 자라고 표현했다.

정 장군은 81년 참모 차장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대망의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군사령관이 되었으며, 드디어 83년 12월16일 육군참모총장이 되면서 정규4년제 육사 출신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육군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정 장군은 필자와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다른 「식스 멤버」들에 대한 자신의 소견은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면담중 점심 시간이 되자 식사나 하고 계속 하자며 함께 육본 구내의 식당으로 갔다. 원탁의 식탁에 장군이 먼저 앉으며 필자에게는 바로 옆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식탁에 앉도록 했다. 식탁이 컸으므로 모두 8명이 둘러앉게 되었다. 동석한 사람들의 어깨에·부착된 계

급장을 보니 중장이 한 명(정호용 차장), 소장이 1명, 준장이 3명 등 5명의별이 있었고, 나머지 2명은 대령이었다.

이들 고급 장교들의 식후 한담 내용은「시국담」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정호용 장군은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큰 호기심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고, 재미를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아주 덤덤한 표정 이었다. 도무지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듯이 보였다.

「개혁성향」에 맞는 軍체제 확립

정 장군은 85년 12월16일 임기를 마치고 예편했다. 고교 재학 중 학도병으로 입대한 때로부터 무려 3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 있었다. 그가 현역에서 물러남으로 해서 11기 졸업 동기생 가운데 그는 가장 마지막으로 옷을 벗은 사람이 되었다.

「식스 멤버」 중 노태우씨는 정치 일선에서 부각되어 온 반면, 같은 행적을 가진 정 장군은 끝까지 군부에 남아 제5공화국 출범에 따른 「개혁 성향」에 맞는 군 체제를 확립시키는 데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87년 1월20일,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여파로 개각이 단행되면서 예편해 있던 그는 내무부장관으로 입각, 「지각 정치인」이 되었다. 이때 그가 한 말은 『모든 일을 순리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종철군 사건의 은폐 조작이 다시 문제되자 입각 3개월 여만에 물러났다.

그는 6·29 선언 이후 국방부장관으로 재 입각했다. 그러나 앞으로의 그의 정치적인 항로가 어떤 자침을 가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12·12」 때는 대구 지역 사단을 맡고있던 관계로 직접적인 참여를 못 했지만, 다음 해의 광주 사태 때는 특전 사령관으로서 예하 3개 공수 여단을 현지로 출동시켜 전남 지구 계엄 사령부에 배속시켰던 때문에 국회에서 닥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광주 사태를 두고 『국난 극복의 차원에서 이해를 해 야지‥‥』 하면서도 할 말을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고 백운택씨

「12·12」 이후 제5공화국이 출범한 다음에도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한 노태우, 김복동 등 3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백운택장군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그 무렵엔 「식스 멤버」에 관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12·l2」 당시 00방위 사단장(훈련 단장)이었던 백 장군은 다른 다섯 명의 멈버가 모두 소장으로 진급해 있었는데도 아직 준장에 머물러 있었다. 필자와 만난 백 장군은 자신이 장군으로 승진한 것은 순전히 『형님(전두환)덕분이었다』며 감격해 하고 있었다.

전 장군은 5· 16 직후 육사 생도들의 혁명 지지 퍼레이드를 실현시킨 공로로 그때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청와대, 중앙 정보부, 육본(서종철 육참 총장의 전속부관)등 중앙 핵심 부서에서만 근무했었기 때문에, 자신과 가까운 동료이거나 유능한 후배들의 진급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오늘날 한국 군부에서 우수한 지휘관으로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 중 전 장군의 후광을 받지 않은 사랑은 거의 없을 정도.

백 장군도 그 중의 하나였다.

전 장군은 30년 군 생활 동안 군부 내에서 이미 확고한 지위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한번 인연을 맺은 상관에게는 지극한 충성심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전방에 근무 중이 라도 서울로 외출 나오는 기회가 있을 때면 꼭꼭 찾아가서 경례를 붙이며 『충성 ! 전두환입니다! 」하고 인사 드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틈만 있으면 찾아와서 경례를 붙이는 후배를 싫어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그가 박 대통령의 지극한 총애를 받고 있는 장본인임에야.

白장군은 필자에게 부끄러움 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사 동기 중에서 1등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한 김성진씨는 잠시 일선 소대장을 한 다음 59년부터 70년까지 줄곧 육사 교관을 했습니다. 그 동안 서울대 사학과를 수료하고 이어서 미 일리노이 대(물리학)를 거쳐 플로리다 대학원에서 기계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글자 코대로의 학구파였습니다. 그 뒤로는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과 국방 관리소 소장을 지냈지요. 그런데 장군 진급 심사에서는 언제나 누락이었습니다. 군인은 역시 일선을 누비는 보병이어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인식이 심사 위원들에게는 있었기 때문이지요.

장군 심사 때 보안 사령관이었던 전 장군이 이를 보다 못해 심사 위원으로 들어가는 장군들에게 「현대전은 과학 전이 아닙니까? 형광등 아래서 첨단과학을 활용하여 신병기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두뇌도 필요한 것입니다」라며 김성진 대령을 장군으로 승진시켜 줄 것을 간청하여 진급이 된 겁니다. 거기에 비하면 저의 경우는 전혀 반대였지요. 「전쟁에는 주먹도 있어야 한다. 나중에 적의 진지에 태극기를 꽃아 야만 완전 승리를 확인하는 게 아니랴. 두뇌도 있어야 하지만 주먹도 있어야 전쟁에 승려할 수 있다. 백운택은 학구 파는 아니지만 용기가 있는 군인이 아니냐」 그렇게 설득하여 나도 별을 달 수 있었습니다』

「인의 장막을 치고 있어서‥‥」

그는 육사 시절부터 전두환 동기생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이 호칭은 전 장군이 대통령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무슨 일에서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생각하기보다는 다소 행동이 앞서는 편인 그는 그래서 입이 조금 가볍다는 핀잔을 듣는 편이었다. 「형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청와대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때, 그는 청와대 집무실로 「형님」을 찾아 간 적이 있었다.

『백 장군 어서 오게. 청와대는 처음이지?』

전 대통령이 반갑게 맞았다.

『아니 형님도, 박 대통령 때 한번 들어 온 적이 있었지요』

『그래 ? 부대(그때 백 장군은 노태우 장군의 뒤를 이어 제9사단장이었다)는 별일

없지 ?』

『아무 일 없습니다. 형님, 전방은 아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대답해 놓고 백 장군은 본론을 끄집어냈다.

『그런데 형님. 「형수」 때문에 안 되겠습니다. 아, 그래 형수가 언제부터 영 부인입니까? 그저께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반상회에서 형님이 말씀도 하기 전에 형수가 먼저 나서지 않았 습니까? 여자가 나서면 못씁니다.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는지 알아요? 공식 행사에도 대통령보다 형수가 먼저 나서고‥‥ 형님이 마누라에게 쥐여지낸다고 다들 그럽디다』

가만히 듣고 있던 대통령이 말했다.

『그래, 나도 주위로부터 그런 말을 여러번 들었어. 그렇지만 국민 대 화합이 절실한 이때, 대통령 부부가 나란히 나타나면 부부 화목한 우리 모습을 보고 국민들도 본받을 게 아닌가? 옛날 박 대통령은 육 여사와 때때로 부부 싸움을 벌여서 심지어는 육 여사 눈두덩에 시퍼런 멍이 들기도 했다는데, 그런데 비하면 우리 부부는 모범적이 지 않나?』

전 대통령의 이 같은 말에, 『그래도 앞으로는 시정을 하십시오. 말이 많습니다』하고 딱 부러지게 말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 놓고 백 장군은 필자에게 『틀림없이 이 말이 영부인의 귀에 들어갔을 거요. 얼마나 나를 미워하시겠어요. 하여간 내 입이 방정맞았지요. 앞뒤 생각도 않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내뱉어 버리니‥‥』 하며 자신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 장군은 12·12에 직 ·간접으로 참여한 「식스 멤버」 중의 하나였다. 12월13일, 육군 수뇌부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전두환 보안 사령관을 제외한 세 사람의 보직이 바뀌었다. 노태우소 장은 장태완 소장 후임으로 수경 사령관, 정호용 소장은 정병주 소장 뒤를 이어 특전 사령관, 그리고 백운택 준장은 노태우 소장의 바톤을 이어받아 제9사단장으로 각각 임명받았다. 그리고 5·17 이후 제5공화국 출범의 기틀이 되는 국보위가 설치되면서 백장군을 제외한 세 장군은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개혁 주도 세력」으로서의 자리를 굳혀 나간다. 백 장군은 자신만이 어떤 방식으로든 국보위에 영입되지 않은 데 대해 못내 서운해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형님」을 마음대로 뵙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도 매우 섭섭해했다.

그가 정보 사령관으로 재임 중일 때였다. 『그놈들(허화평 · 허삼수 두 냉석 비서관을

말함)이 야무지게 「인의 장막」을 치고 있어. 1년에 한 번밖에 못 뵙는다니 그게 될 말이요? 신년에 있는 주요 지휘관들의 인사 때밖에는 청와대에 들어 갈 수도 없게 해 놓았단 말이요. 단체로 만나니까 개인적인 인사도 못 하지 않아요 ?』

백장군의 대성 통곡

제9사단장으로 재임 중일 때 백 장군은 대성통곡한 일이 한 번 있었다. 바로 광주 사태 때였다. 5월25일,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는 그날 서울로 외출을 나왔다. 12월13일 사단장으로 임명된 후 전방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자주 서울로 나올 수가 없었다. 그는 전 보안 사령관을 만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게 그의 성격이었다. 참고는 못 견디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전 장군을 만난 백 사단장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형님, 저를 광주로 보내 주십시오』

느닷없는 백 사단장의 말에 전 보안 사령관은 깜짝 놀랐다. 광주 일원은 당시 치안 부재 상태였다.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가 탈취되고 청년들은 각종 무기로 무장하는 등 시가지는 완전히 무법 천지가 되어 있었다. 계엄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시 외곽 주요 도로를 봉쇄하고 있었고, 경찰은 모두 사복 차림으로 도주 해 버렸다. 이럴 때 백 장군이 그곳으로 들어간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

『무어라고 ? 』

전 보안 사령관이 백 장군의 다음 말을 가로막았다. 들어보나 마나 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형님 ! 제발 저를 보내 주십시오』

백 사단장은 다시 한번 간청했다.

『그런 말은 다시 꺼내지도 말어 !』

『아닙니다. 형님, 계급장을 달고 당당히 걸어서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들 청년들과 만나겠습니다. 그들과 가슴을 열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겠습니다』

『그자들이 백 사단장을 가만 놔둘 것 같애 ? 틀림없이 목숨을 잃고 말아』

『형님, 바로 그겁니다. 저는 죽기로 각오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협상을 해서 요행 저와 말이 통하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의 죽음으로 계엄군이 작전을 벌일 구실을 주자는 겁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전 장군이 말했다.

『부대로 돌아가라 ! 가서 전방이나 잘 지켜 ! 이런 일에 너와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다』

아무리 사정했으나 전 사령관은 듣지 않았다 한다. 상대가 「형님」이 아니었더라면, 백 장군은 혼자 그냥 광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고 한다. 두어 시간 넘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저녁 늦게 부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다음 날인 26일, 소준열 전남도 계엄사령관과 3개 공수 특전 여단 여단장 및 제20사단 박준병 소장에게는 극비리에 사태의 진압을 위한 작전 지시가 내려 졌다. 전남 도청과 YMCA · 광일 빌딩 부근 및 무등산 공원에 무장 시민들이 모여 있다는 정보에 따라 건제 편성으로 3개 특공 조를 편성했다. 이 작전은 27일 새벽 3시부터 시작되어 완전 진압되기까지 불과 1시간30분 남짓 걸렸다.

이날 27일 새벽, 사단장 실에서 잠을 자던 백 사단장은 당번 병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 5시가 조금 못 되어 있었다.

『보안 사령관 님의 전화입니다』

백 사단장은 얼른 송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긴장이 온몸을 전류처럼 찌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전 사령관의 말은 간단했다.

『운택이, 너 이제 죽을 필요 얼어 ! 광주 문제 오늘 새벽에 종결했어. 조금 후 라디오 뉴스로 나갈 거다. 각 예하 부대에 통보해 주고 다들 이제부터는 국방 업무에만 전념하라고 해 ! 』

전 사령관의 그 말이 끝나고서도 백 장군은 무어라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 했다. 전화를 끊은 백 장군은 그만 「형님 !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책이 나와야 유명해질텐데…』

필자가 「12·12」에 관련하여 1차 원고 정리를 끝냈을 무렵,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백 장군으로부터였다.

『그 책 언제 나오지 ? 그게 빨리 나와야 될 텐데. 노태우, 김복동이라고 하면 다 아는데 이 백운택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통 모르지 않아? 빨리 책이 나와야 나도 좀 유명해질 텐데 말이오』

필자는 곧 나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백 장군은 『도대체 누가 못 내도록 붙들고 있는지 말을 좀 해 줘요. 나도 로비를 할 수 있으니까 말이오』 라고 하면서 일본이나 미국으로 출장을 가서 그곳 고위층을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12·12가 무어냐?』고 묻더라고 했다. 그런 백 장군이 끝내 책의 출간을 못 보고 별세했다. 고혈압 때문이었다고 들었다.

김복동씨

필자는 사실 육군 사관 학교 교장으로 있던 김복동 중장에 대해서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노태우 장군과 처남 ·매부 관계라는 것까지도 몰랐다.

면담이 이루어진 것은 노태우 보안 사령관과 만났을 때와 비슷한 시기로, 장소는 육사 교장실 옆 회의실에서였다. 전통의 육군 사관 학교라는 선입관에 비해 회의실의 규모는 초라했다. 이것은 아마 당시의 김복동 장군의 위상이 그러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지금에 와서 든다.

김 교장과의 면담에는 같은 육사 11기 동기생인 육사 참모장 이동희준장이 동석을 했는데, 부드러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김 장군은 도대체 입을 열지 않았다.

『30년 가까운 죽마 지우 간이니까 기억 나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옛날 육사 시절 여섯 명이 그룹을 이루고 있었다지요? 노태우 장군으로부터 들었습니다. 항간에는 전두환 김복동 노태우하고 유독 세 명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곤 합니다‥‥』

그러나 김 장군은 도무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곁에 앉은 이동회 장군이 주제와는 거리가 먼 말을 거들려고 하는 경향이 더 했다. 이래서는 아무래도 김 장군의 입을 열게 할 수 없다고 필자는 판단했다.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지금은 대통령이지만 어릴 적의 소년이 대통령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고 필자는 전 대통령의 어린 시절을 참고 삼아 들려주었다.

『아무리 뛰어난 불세출의 영웅이어도 어렸을 적에 부모님의 지극한 치성이 없으면 홀륭히 자라나기 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두환 소년이 어렬을 때 어머님(광산김씨)의 치성은 눈물겹도록 지극한 데가 있었읍니다. 어머님은 자식이 잘 되라는 일념에서, 시주를 나온 떠돌이 스님의 말을 듣고 자신의 뻐드렁니를 뻰찌로 빼 냈습니다. 생 이빨을 빼 버린 그 후유증으로 어머님은 대번 얼굴이 퉁퉁 부어 올라 고통을 참지 못 하고 있는데 이를 본 완고한 시아버님이 「지독한 며느리가 들어 와서 집안 망신시킨다」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대밭 속에 숨어서 하루 밤을 떨고 지냈대요‥‥』

면담시 함구로 일관

그때까지 필자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 장군은 그제서야 무겁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나와 각하는 30년 가까운 친구 사이지요. 그런데 내가 지금껏 듣지도 못 했던 집안 이야기를 알고 있군요』

그렇게 말하는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무슨 석고상 같았다. 그 표정이나 몸짓으로 필자는 김 장군이 처음부터 죽어도 아무런 말을 않으리라고 작정했음을 알았다. 그저 육사 시절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참 친하게 지냈지요. 나는 덩치만 컸지 권투 같은 것은 해 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권투의 요령을 「그분」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왼손으로는 이렇게 커버하고 오른손으로 기회를 보아 상대에게 먹이는 것이야. 자! 내가 이렇게 커버를 하고 있을 테니까 한번 공격해 봐라 ! 」 그래서 내가 정말 사정없이 한방 먹여 줬지요. 그런데 그게 좀 심했던가 봅니다. 벌렁 뒤로 나자빠졌던 「그분」이 일어나면서 하는 말이, 「야! 연습인데 그렇게 세게 때리면 어떡하느냐 ?」고 그러더 군요. 지금 생각해도 왜 센 펀치였는데 원망을 않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지요.』

세상은 오로지 전두환 ·김복동 ·노태우만을 연호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이 분이 왜 이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가 하고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런데 그 연유를 필자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식스 멤버」 중의 한 사람이던 백운택장군이 「5·17」직전, 「형님」에개 이렇게 했다는 것이다.

『형님 ! 저 친구를 그대로 둘 겁니까 ?』 필자는 갑자기 「저 친구」라고 하는 바람에 백 장군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 거냐」고 물었다. 『육사 교장으로 있는 김복동이지요』하고 백 장군은 말했다. 백 장군은 신이 나서 계속했다. 백 장군은 그때 제 9사단장으로 있을 때 였다.

『우리가 목숨을 걸기까지 하면서 이 나라를 구해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그 친구는 우리가 무슨 쿠데타나 하는 줄 알고 섭섭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백 장군이 전 보안 사령관에게 한 말은「현재 육사 교장으로 있는 김복동 장군을 그대로 둘 수는 업지 않느냐」는 그런 뜻이었다. 그러자 전 장군은 『그래 알았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까지 30년 가까운 친구 사이가 아닌가? 그걸 어떻게 하루 아침에 정을 끊는단 말인가? 지금 「이 이상」 다른 자리를 안 주면 될 거 아냐 ?하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백 장군은 그러면서, 『각하께서는 마음이 너무 여리지 않아요? 정이 많으신 분입니다』하고 아무도 없는 데도 필자에게 귓속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거사」 참여를 일언지하에 거절

김복동 장군이 이처럼 주도 세력으로부터 경원 시 되었던 것은, 「12·12」를 앞두고 전 보안 사령관을 비롯하여 노태우 · 백운택 장군 등이 「거사」에 참여할 것을 전화로 전하자 김장군이 일언지하에 거절했기 때문이다.

『야, 이 친구들아! 군인이 정치에 참여 하는 것은 5· 16 하나로 족해! 우리들은 진해 교정에서(육사 입교 시절) 맹세를 하지 않았나! 모두가 장군으로 승진하여 이 나라를 목숨을 바쳐 지키자고. 그런데 지금에 와서 정치 판에 끼여들겠다고 ? 』

김 장군이 왜 그렇게 쏘아 붙였는지 모를 일이지만, 이때의 전화 응답 때문에 사이가 벌어진 것만은 틀림없다. 아무리 믿는 사이여도 김 장군의 정치관에 대해서 너무도 몰랐던 것이다.

아뭏든 김 장군은 제 5공화국의 주도 세력에서 제외되고 만다. 김 장군과 거의 같은 맥락에 서 있는 최성택 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육사 11기 동기생 가운데 선두주자로 달리고 있던 김 장군과 자신이 「12·12사태」라는 회오리 때문에 노태우 ·정호용 등의 동기생에게 추월을 당해 육군 중장으로 그치고 마는 비운에 처해졌다는 것이었다.

『각하께서는 너무 정이 많지 않아요?』 하던 백 장군의 귓속말이 나에게는 너무도 공허하게 들렸다. 정치라는 게 그런 것인가 ! 김 장군이 전역한 것은 82년 12월의 일이었다. 계급 정년도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육사 11기 중에서 최초로 장군으로 진급한 사람은 전두환·손영길 ·김복동 그리고 최성택 이었다. 73년 1월1일자였고, 임관된 지 17년 3개월만 이었다. 그 1년 후인 74년 1월1일엔 노태우 ·정호용 ·이상훈 ·안재석 등 4명이 별을 달았다. 하지만 그 때는 누군가가 「달아주어야」 했다. 그러나 12·12이후의 제 5공화국 때에는 「달아 주는 사람」이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이 모두 육군 대장까지 진급하여 영예로운 전역 식을

요란하게 하면서도, 선두 주자였던 김 장군과 최 성택 장군에게는 「이 이상」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전역하던 날 김 장군은 자기가 가르치던 육사 생도들에 의해 헹가래 쳐졌고, 그날 밤 그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뒤로 은둔자 적인 생활, 오로지 독서와 간간이 골프를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세상은 김 장군에 대한 기억을 차츰 일어 가기 시작했다.

「참여」거부하다 광진공사장으로

그런데 어쩐 일인지 김장군이 시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말이 세상에 떠돌기 시작하자, 군부에서 동요가 일었다고 한다. 결국 주도 세력 사이에서 김 장군을 영입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입각 문제는 미묘한 기운이 감돌 때였다. 특히 주도 세력 중의 허화평 ·허삼수 등 소장 그룹이 많은 견제를 했다고 한다.

이들 소장 세력들은 다음의 주인공이 자신들이라고 확신하고 서서히 기반을 구축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육사 17기였다. 따라서 11기 이후 16기까지는 모두가 견제의 대상이었다. 노태우 내무부 장관이 그랬고 수경 사령관이던 박세직 장군이 그랬다. 그런 살벌한 판에서도 김 장군의 영입은 시급했다.

포항 제철 사장 자리가 어떠하냐고 제안되었다. 김 장군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참여할 생각이 없어』. 대답은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 중에 「큰 손 장영자」

사건일 터졌다. 이 사건 바람에 영부인의 숙부 이규광씨가 구속되고 그는 공석이 된 광업 진흥 공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제 5공화국 한켠에 동참하게 된다. 취임 반년만에 강원도 일원에서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우라늄 광산을 발견하기도 해 세인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김 장군이 육사 교장으로 있을 때, 필자에게 한 말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미국에는 「웨스트 포인트」가 있지만 우리 나라에는 동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스트 포인트(EAST POINT)가 있다. 여기 화랑 대의 젊은이들에게 한국은 미래를 걸어도 좋다』

이 말은 김 장군이 LA 타임즈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그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런데 필자가 이 말을 전 대통령의 전기 『황강에서 북악까지』 중에 인용했더니 나중에 이 부분이 사정없이 지워져 있었다. 오늘에 와서도 나는 이 삭제를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그 뒤 필자는 다시 한번 더 김 장군을 만나 보고 싶었다. 그래서 광진공 비서실로 전화를 했다.

『김 장군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 대통령의 전기를 쓸 때 육사 교장으로 있던 장군님을 뵈었었지요』

나는 우선 내 소개부터 했다. 비서실장이 알았다고 해 나는 곧 용건을 전했다.

『「황강에서 북악까지」의 속편 성격인 「12·12의 진상」을 탈고했습니다. 한번 만나 보여 드리고 싶으니까 여쭈어 보시고 연락해 주십시오』

비서실장은 그러마고 했다. 그러나 그 뒤로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 때 김 장군을 만날 수 있었더라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최성택씨

대통령 선거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지난 12월 8일 오전의 일이었다. 국내 대륙붕 단독 광구인 동해 남부 제 6-1광구 중의 「돌고래Ⅲ 시추 점에서 양질의 천연 가스층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일제히 보도되었다.

시기적으로도 미묘한 때였고 더구나 10여년 전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고 성급하게 발표를 하여 「헛방」으로 끝난 아픈 기억이 국민들에게는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이를 보도하는 언론들도 매우 조심스러운 자세 였다.

이날의 TV뉴스에는 국민들에게 낮익지 않은 한 사람이 나왔다. 바로 한국 석유 개발 공사 최성택 사장이었다. 전혀 군인 같지 않은 수더분하고 여린 얼굴이었다. 최 사장은 TV와의 인터뷰에서 『포항 지역 소동 때와는 달리 사전에 정밀 탐사 과정으로 시추를 챘기 때문에 유전 개발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장량이나 경제성 평가는 내년 11월에나 가야 나올 것입니다. 어떻든 매우 희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육군 대장 한발 앞에서 예편돼

이 최성택 사장이 바로 유명한 「식스 멤버」중의 한 사람이다.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과 함께 육사 11기 졸업생 가운데 가장 먼저 별을 달았던 선두 주자였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만약 「10·26」이라는 「박 대통령 시해 사건」만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지금쯤 육군 대장으로 전군을 호령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그가 전혀 신의 의도와는 상반되게 육군 대장 바로 한발 앞에서 예편되어 버린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 육군 참모 총장이던 정승화씨로부터 유별난 사랑을 받았던 데 있지 않나 싶다.

「10·26A 당시 최 장군은 육군 소장으로 육군본부 정보 참모부 차장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식스 멤버」사이에는 30년 가까운 우정이 뜨겁게 교차되고 있었다.

다만 방위 사단장으로 있는 백운택 장군만이 계급이 하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소 소원한 관계였을 뿐이었다.

하루는 백 준장이 육군본부로 최 장군을 찾아왔다. 그는 최 장군에게 자신의 답답함을 이야기했다.

『보안 사령관에게 찾아가 봐. 그래도 우리는 30년 친구 사이가 아니냐? 전 장군은 의리가 있고, 한번 정을 주면 배반을 하지 않는 한 절대로 그 정을 저버리지 않지 않나? 가서 의논을 하면 틀림없이 도움을 줄 것이야. 지금 우리 군부에서는 전 장군의 영향력이 매우 크니까 말이 야』

최 장군은 그 자리에서 보안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운택이가 요즈음 좀 침울하니 만나서 기운을 붇 돋우어 주게』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 길로 백 장군은 보안사령부로 갔다. 10·26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쯤 지난 11월 초순께의 일이었다. 일견 오랜 친구 사이의 예사로운 상면 정도로 볼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바로 이 백 장군의 보안사령부 방문이 한국의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계기로까지 발전한다. (최 장군은 백 장군이 보안사령부로 가고 난 다음, 그 뒤에는 백 장군으로부터 통 연락조차 없었다고 한다)

백 장군의 보안사 방문이 한국 현대사에 한 전환점이 된다는 말은 10·26이후의 미묘한 시국 동향과 무관하지 않다.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 정승화 총장이 관련되어 있다, 김재규를 처단하기 위해서는 정 총장의 명쾌한 진술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 총장은 이의 수사 진행을 지연시키면서 공정한 수사를 방해하고 있다, 오히려 합동 수사 본부장을 경질하려 한다는 등의 복잡다단한 말이 떠돌던 게 당시의 정황이었다. 한번 말문이 열린 백 장군은 이후 시간만 나면 보안사로 혹은 연회동 숙소로 자주 전 장군을 방문한다. 바로 이무렵에 보안 사령관에 대한 경질 설이 나돈 것이었다.

백 장군은 12·12 일주일 전쯤 당시 항간에 나돌았던 전 장군의 동해안 경비 사령부에로의 경질 설을 듣고 『형님 ! 정말 조심 하셔야 겠습니다. 종이 한 장(인사 명령)이면 형님도 집에서 애나 봐야 합니다』하고 말함으로써 정 총장에 대한 반발심을 부추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사에서 제외된 이유

이렇게 제반 상황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최 장군은 함수 본부 측의 움직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이유를 오늘에 와서도 최 장군은 알수가 없다고 한다. 다만 백 장군이 그런 모험적인 거사에 참여하면서도 왜 자신에게 한마디의 언질도 주지 않았는지 섭섭할 뿐이라고 했다. 만약 자신이 알았더라도 30년 가까이 우정을 나누어 온 돈독한 친구 사이 에 이 같은 엄청 난 거사를 반대하거나 누설하는 등의 배반 행위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 했다.

자신이 거사에서 제외된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당시 노재현 국방 장관이나 정총장이 육사 출신보다는 일반 출신을 다소 선호하고 있어서 국방부나 육본 등의 중요 부서에서 육사 출신이 정보 참모 부 차장인 최 장군 정도만이 있었을 뿐이며, 또 밖으로 흘러나오는 말에 의하면 정 총장은 육사 출신 지휘관들의 동태에 대한 정보를 최 장군을 통해 수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운명의 12월12일, 최 장군은 보안 사령부로 전 장군을 찾아간다. 결과론이 긴 하지만 만약 최 장군이 이날 보안사를 찾아가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오늘날 「식스 멤버」중의 하나로 제5공화국의 운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전두환 · 노태우 · 정호용장군 등과 함께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여 30년간의 군

생활을 멋드러지게 마감하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최 장군이 보안사로 간 것은 당시 떠돌고 있는 전 장군의 인사 설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낸 국군 서울 지구 병원 김병수 병원 장(공군 준장)을 먼저 만난 최 장군은 이 같은 소문을 들은 적 이 있느냐고 물었다. 김 병원장도 그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최 장군은 빨리 이 말을 전 장군에게 전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보안사로 갔다. 오후 3시 반경이었다. 사령관 실로 들어가니 마침 전 장군이 나오고 있었다.

『나 지금 총장께서 부르셔서 가는 길인데 같이 가면서 이야기하자』

그때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 중령이 권총을 차고 수행했다. 평소에는 수행 부관인 손중위가 수행했는데 어쩐 일일까 하고 최 장군은 잠깐 생각했다고 한다. 육본으로 가는 차 중에서 전 장군이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성택이, 너는 참모총장을 어떻게 생각해 ?』

이때 전 장군은 그날 저녁의 「거사」를 이미 작정하고 있었다. 최 장군은 왜 갑자기 이런 것을 물을까 의아했으나 곧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는 야심이 없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장군 같더군』

최 장군의 이 말을 듣고 한참 가만히 있던 전 장군은 『그래 ? 하여튼 무슨 움직임이 없는가 옆에서 잘 보고 자주 연락해줘』하고 말했다.

육본에 차가 도착하자 두 장군은 다른 말을 나누지 않고 곧 헤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l2·12사태가 발생했다.

12· 12 사태가 종결되고 난 다음, 최장군은 합참본부 제2국장(정보 국장)으로 전보되었고, 81년에는 자신이 국방 정보 부를 창설하여 초대 본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3년 후에 중장으로 예편되었다. 이미 이보다 4년 전인 80년에 전 장군은 대장으로 전역하여 대통령에 취임해 있었고, 노태우 장군은 그 다음해 대장으로 전역했었다.

고인이 된 백 장군이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최 장군은 뛰어난 장군입니다. 말하자면 지장이 지요. 그런데 그런 미묘한 시기에 그런 말을 한 겁니다. 그 말 자체가 나쁘달 수는 없어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 총장에 대한 최 장군의 개인적인 인물평이었으니까요. 어쨌든 그 때문에 또 다른 이유의 김복동 장군과 함 께 주도 세력으로부터 다소 소외되었지요』

최 장군은 그러나 12·12 이후부터 제5공화국 출범에 이르기까지 막후에서 큰 기여를 한다. 바로 5·17조치라고 하는 「국보위 설치」에 앞선 준비 작업이 그것이다.

흔히 제5공화국의 출범 기점을 12·12사태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제5공화국 출범에 즈음하여 이와 관련한 여러 사실들을 정리하는 동안, 수많은 관련자들의 증언 행간 행간에서 도출해 낼 바에 의하면, 제5공화국의 태동은 바로 「5·17조치」였다.

「5·17」조치에 「한몫」 거들어

최규하 대통령이 원활한 유류 수급의 안정적인 장치 마련을 위해 중동 지역을 순방하고 있던 5월16일, 국방부 회의실에서는 비상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날의 회의를 위해 특전 사령관 정호용 장군과 최 장군은 전날 밤을 새웠다. 제5공화국의 결정적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날의 지휘관 회의 내용과 분위기를 보면 이의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회의는 주영복 국방부 장관의 주재 하에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 최 장군은 밤새껏 준비한 국가적 위기 상황과 북괴의 동향을 비롯한 제반 국제 정세에 대해 브리핑했다. 합참본부 정보 국장의 이 보고 내용은 참석한 지휘관 전원에게 충분한 공감을 얻었다.

그 뒤를 이어 정호용 장군이 『이 같은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여 국가 보위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계엄 당국과 행정부간의 긴밀한 협조로 조속히 위기를 극복하고 이와 함께 안정 기반을 구축하여 국가 발전의 기틀을 튼튼히 하기 위해 대통령의 자문 보좌 기관으로 「국가 보위 비상 책 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 중에는 비상 계엄을.제주도를 포함, 전국으로 확대할 것과 국회의 해산 및 각급 학교의 휴교 조치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 ·유병현 합창 의장은, 『국회 해제까지 우리 군부가 언급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라고 말하고 『만약 그렇게 하더라도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러자(이 대목이 매우 중요하다) 주영복 장관이 회의를 잠시 중단시키고는, 『지금 전두환 보안 사령관과 연결(전화)중』이라고 말한다. 그때 최 장군이 나서며 『보안 사령관에게는 본인이 사후에라도 말할 수 있으니 그대로 합의를 봅시다』 하고 재촉했다. 결국 이 회의에 참석한 지휘관들은 가까운 장래에 설치될 5공화국 출범의 첫째 고개인 국보위의 탄생을 결의하게 된다.

이날 하나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군수 기지 사령관인 모 소장이 이 같은 일사 불란한 회의 진행을 보고는 『이건 꼭 시나리오를 짜 놓고 하는 것 같군. 이렇게 해

서 국민들이 수긍할까?A 하고 투덜댔다. 물론 그 장군도 서명을 마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국방부 보안 부대장 백재기 준장에 의해 연행의 위기에 처한다. 이 소식을 들은 최 장군은 즉시 보안 사령관에게 전화를 했다.

『전 사령관, 이 조치는 아무래도 잘못 된 것 같애. 지금은 우리 군이 하나로 뭉쳐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런데 지휘관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이 조금 미묘한 말을 했다고 해서 잡아 넣으면 여론이 어떻게 되겠나?』

최장군 덕분에 그 장군은 무사했다 한다. 82년 중장으로 예편한 최 장군은 84년 정부 투자 기관인 석유 개발 공사 사장이 되었다. 그는 아직도 할 말히 많은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