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80년대, 광주사태 진상요구.반미의 시대/혼돈과 방황속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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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광주사태 진상요구.반미의 시대/혼돈과 방황속의 희망
최영재(월간조선)
전국민이 「 민주화」 투쟁
80년대 한국 사회가 격동의 시간을 보냈던 만큼 서울대의 80년대 역시 커다란 변화로 숨가빴던 시절이었다. 80년대의 서울대를 규정하고 특징지우는 사건은 85년 미문화원 점거 농성과 86년 이재호, 김세진의 분신이다. 이들 사건이 던져놓은 「 광주사태 진상 공개 및 책임자 처벌, 그리고 반미.반전.반핵」이라는 화두는 80년 이래 침울하게 정체되어 있던 서울대를 깨어나게 했다.
86년을 고비로 서울대의 학생운동은 이론화와 조직화의 길을 걸으며 끈질김과 힘을 갖추게 됐고, 민중성.과학성이 대학의 주류문화로 자리잡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열풍은 서울대 문화를 지배했으며 모든 전공 분야에서 좌파이론을 실험, 적용한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 광주와 미국 그리고 사회주의」를 논하는 담론이 넘쳐 흐르며 서울대는 나름대로 당시 우리 사회의 요구에 답할 수 있는 자기 기반을 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그해 6월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선언에 이르는 기간은 그간 축적된 대학의 대 사회적 역량이 훌륭하게 과시되었던 시간들이었다. 대학의 사회운동세력은 광범위한 사회계층의 지지와 참여를 성공적으로 유도해냈다. 대학인을 비롯한 전 국민이 「 민주화」를 열망하며 싸웠던 숭고한 시간으로 우리는 이 시기를 기억한다.
노동운동의 성장과 노태우 후보의 대통령 선거 승리, 88 서울올림픽 등 일련의 기간을 거치면서 서울대는 열광과 흥분의 시기로부터 벗어났다. 80년대 초, 대학의 자율성을 빼앗겼던 억압의 시간들과 80년대 중반, 과학적 이론으로 무장한 열정의 시기를 거쳐 이제는 대학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시기에 들어선 것이다.
80년대 서울대에 대한 위와 같은 간략한 소묘는 비단 서울대에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굳이 구분해 말하자면 80년대 사회 변화의 계기마다 서울대가, 서울대 학생이, 서울대 출신이 중심에 좀 더 가깝게 서 있었다는 점 정도가 아닐까. 또 좀 더 앞서 문제를 제기하고 행동의 선두에 섰었다는 점 정도가 아닐까.
80년대 서울대 교정의 풍경은 간단하게 정리하기 힘든 그 무엇이 있다. 혼돈 속의 희망과 같은.
아크로폴리스는 세계적인 명소였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매일처럼 모여 민족의 장래를 논의했다. 집회 때마다 많은 외신기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방송 카메라가 돌아갔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육박전이 있었는지 헤아릴 수 없으며, 한 학생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 주변의 벽마다 매직 펜으로 휘갈긴 대자보들로 가득했고 벽이 모자라면 땅바닥에도 가득 붙였다. 우리들은, 분단 조국 서울대의 아크로폴리스는 현재 세계의 주요 모순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결합되어 있는 장소라며 이 곳에서 역사와 호홉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하곤 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민중 문화에 반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우리는 말하기를 꺼려했고 주체사상까지도 스스럼없이 토론과 학습의 주제로 받아들였다. 전공 공부는 도외시했어도 온갖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며 사회변혁 이론을 학습하는 데는 분초를 다투어 열의를 보였다. 이러한 서울대의 「 생활환경」에 대해 기성 사회와 교수님들은 우려의 시선을 보냈고 어쩌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갑갑해하고 적응에 실패했다.
자신의 안일한 꿈꾸는 것은 죄악
대학이란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기관이며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대학은 그 대학이 속한 민족 사회의 요구에 충실히 답할 수 있고 그 요구에 합당한 기능을 할 때 평가받는다. 미국의 하버드와 일본의 동경대는 고도 자본주의 산업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 그네들 사회가 요구하는 최고의 의무이고 또 그에 합당한 기능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민족 사회가 민주화를 요구할 때 그것에 마땅히 답하는 것이 대학의 올바른 본분이라고 80년 당시의 우리들은 믿었다. 대학은 외부와 단절된 고고한 상아탑일 수 없으며 사회의 안정없이 대학의 안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위험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국립대학으로서 자신만의 안일을 꿈꾸는 것은 죄악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89년 이후의 서울대와 서울대인들은 많이 흔들리고 방황했다. 전체 국민의 양심적 대변자로서의 「 독점적 지위」를 상실하고 우리 사회가 개량화되면서, 서울대의 전체적인 기풍이 체제 내로 편입되어가고 학생들 역시 자유, 개성의 존중이라는 미명하게 퇴영적인 면모만을 보여주었다. 교정에서 치열함과 열정이 사라졌다.
자문해 보게 된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과연 건강한가. 그 당시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80년 대의 우리들은 과연 지금만큼의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원했던 것인가. 부정적인 모든 대답들에 대한 책임 또한 서울대인들이 지닌 계급적 속성에서 찾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최영재(월간조선)
전국민이 「 민주화」 투쟁
80년대 한국 사회가 격동의 시간을 보냈던 만큼 서울대의 80년대 역시 커다란 변화로 숨가빴던 시절이었다. 80년대의 서울대를 규정하고 특징지우는 사건은 85년 미문화원 점거 농성과 86년 이재호, 김세진의 분신이다. 이들 사건이 던져놓은 「 광주사태 진상 공개 및 책임자 처벌, 그리고 반미.반전.반핵」이라는 화두는 80년 이래 침울하게 정체되어 있던 서울대를 깨어나게 했다.
86년을 고비로 서울대의 학생운동은 이론화와 조직화의 길을 걸으며 끈질김과 힘을 갖추게 됐고, 민중성.과학성이 대학의 주류문화로 자리잡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열풍은 서울대 문화를 지배했으며 모든 전공 분야에서 좌파이론을 실험, 적용한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 광주와 미국 그리고 사회주의」를 논하는 담론이 넘쳐 흐르며 서울대는 나름대로 당시 우리 사회의 요구에 답할 수 있는 자기 기반을 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그해 6월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선언에 이르는 기간은 그간 축적된 대학의 대 사회적 역량이 훌륭하게 과시되었던 시간들이었다. 대학의 사회운동세력은 광범위한 사회계층의 지지와 참여를 성공적으로 유도해냈다. 대학인을 비롯한 전 국민이 「 민주화」를 열망하며 싸웠던 숭고한 시간으로 우리는 이 시기를 기억한다.
노동운동의 성장과 노태우 후보의 대통령 선거 승리, 88 서울올림픽 등 일련의 기간을 거치면서 서울대는 열광과 흥분의 시기로부터 벗어났다. 80년대 초, 대학의 자율성을 빼앗겼던 억압의 시간들과 80년대 중반, 과학적 이론으로 무장한 열정의 시기를 거쳐 이제는 대학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시기에 들어선 것이다.
80년대 서울대에 대한 위와 같은 간략한 소묘는 비단 서울대에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굳이 구분해 말하자면 80년대 사회 변화의 계기마다 서울대가, 서울대 학생이, 서울대 출신이 중심에 좀 더 가깝게 서 있었다는 점 정도가 아닐까. 또 좀 더 앞서 문제를 제기하고 행동의 선두에 섰었다는 점 정도가 아닐까.
80년대 서울대 교정의 풍경은 간단하게 정리하기 힘든 그 무엇이 있다. 혼돈 속의 희망과 같은.
아크로폴리스는 세계적인 명소였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매일처럼 모여 민족의 장래를 논의했다. 집회 때마다 많은 외신기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방송 카메라가 돌아갔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육박전이 있었는지 헤아릴 수 없으며, 한 학생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 주변의 벽마다 매직 펜으로 휘갈긴 대자보들로 가득했고 벽이 모자라면 땅바닥에도 가득 붙였다. 우리들은, 분단 조국 서울대의 아크로폴리스는 현재 세계의 주요 모순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결합되어 있는 장소라며 이 곳에서 역사와 호홉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하곤 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민중 문화에 반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우리는 말하기를 꺼려했고 주체사상까지도 스스럼없이 토론과 학습의 주제로 받아들였다. 전공 공부는 도외시했어도 온갖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며 사회변혁 이론을 학습하는 데는 분초를 다투어 열의를 보였다. 이러한 서울대의 「 생활환경」에 대해 기성 사회와 교수님들은 우려의 시선을 보냈고 어쩌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갑갑해하고 적응에 실패했다.
자신의 안일한 꿈꾸는 것은 죄악
대학이란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기관이며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대학은 그 대학이 속한 민족 사회의 요구에 충실히 답할 수 있고 그 요구에 합당한 기능을 할 때 평가받는다. 미국의 하버드와 일본의 동경대는 고도 자본주의 산업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 그네들 사회가 요구하는 최고의 의무이고 또 그에 합당한 기능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민족 사회가 민주화를 요구할 때 그것에 마땅히 답하는 것이 대학의 올바른 본분이라고 80년 당시의 우리들은 믿었다. 대학은 외부와 단절된 고고한 상아탑일 수 없으며 사회의 안정없이 대학의 안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위험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국립대학으로서 자신만의 안일을 꿈꾸는 것은 죄악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89년 이후의 서울대와 서울대인들은 많이 흔들리고 방황했다. 전체 국민의 양심적 대변자로서의 「 독점적 지위」를 상실하고 우리 사회가 개량화되면서, 서울대의 전체적인 기풍이 체제 내로 편입되어가고 학생들 역시 자유, 개성의 존중이라는 미명하게 퇴영적인 면모만을 보여주었다. 교정에서 치열함과 열정이 사라졌다.
자문해 보게 된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과연 건강한가. 그 당시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80년 대의 우리들은 과연 지금만큼의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원했던 것인가. 부정적인 모든 대답들에 대한 책임 또한 서울대인들이 지닌 계급적 속성에서 찾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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