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1979~80년 미 국무부 비밀 외교문서 4천 페이지 철저 분석 / 전두환, 카터를 농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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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80년 미 국무부 비밀 외교문서 4천 페이지 철저 분석
/전두환, 카터를 농락하다
조동준(월간조선)
박정희 사망에서 전두환 취임까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은 1961년 군사 쿠데타이후 형성되어온 체제를 재편시키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18년 동안 한 사람의 최고 권력자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체제에서 일순간 체제경영의 중추가 사라졌다.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35분부터 시작된 체제개편은 81년 2월 전두환씨가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 과정은 결코 평화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서울 한 복판에서 정규군간 무력충돌이 있었고,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 일부 지역에서는 내전에 가까운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그리고 「사회정화」라는 명목 아래 많은 사람들이 「벌거벗은 폭력」을 경험했다. 세이셸( Seychells)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소국으로부터 1980년 5월 「정부승인」을 취소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체제 개편과정에서 얻은 경험은 이후 한반도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결성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이 의문은 지난 10여년간 정치 담론의 핵심 주제였으며, 치열한 정치행동의 원천이었다. 지금까지도 미국의 역할은 추측의 대상이다. 그동안 일부 인사의 증언이나 당시 상황을 추적한 기사가 있었지만 미국의 역할을 전반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체제재편기 주한 미국 대사관의 국무부 사이에 오고 간 전문 중 1993년 비밀분류에서 해제된 전문은 미국의 역할을 좀더 명확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전문은 국무부-미대사관으로 이어지는 경로의 전문이다. 이밖에도 백악관(국가안보회의)을 정점으로 하여 국방부-주한미군, 국무부-미대사관과 CIA-CIA 한국지부로 연결되는 경로도 존재했다.
이런 모든 경로를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기는 해도 이번에 공개된 전문은 미국의 공식 입장을 보여준다. 또한 이 전문은 미국의 눈에 비친 당시 한국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A4 용지 4천 쪽에 가까운 공개 전문을 일일이 다 읽고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정확한 의미전달을 위해 원문 중 일부는 그대로 인용했으며, 삭제 부분도 표시했다.
제1부.유신정권과 미국의 관계
70년대 미국 대한정책의 두 원칙
미국무부 한국과장 리치는 미하원외무위원회 아태소위원회 주최 청문회(1980년 8월28일)에 대한 보고서(State 230941)를 8월29일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에게 보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국무부 동아시아국 홀부르크 차관보는 미국의 대한정책을 결정하는 두 원칙을 언급하며 한국문제에 관한 증언을 시작했다.
첫째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전략적 균형의 유지는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 미중관계, 한미안보관계는 이 지역의 전략적 균형의 버팀목이다.
둘째 서울에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폭넓은 지지를 받는(broadly based)」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한국 내부의 안정을 보장하는 핵심 요소이다.
이 두가지 원칙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의 핵심을 나타낸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원했다. 미국은 베트남과 북한을 구소련 팽창전략의 전위로 파악하고 있었다. 중국과 한국은 구소련의 팽창을 제어할 수 있는 국가였다. 따라서 중국과의 관계정상화, 한국과의 긴밀한 협조는 미국의 핵심 국가 이익이었다.
또한 미국은 유신정권이 「폭넓은 지지를 받는」 정권이 되기를 바랐다.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부는, 한국의 내부 안정이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위하여 필요하며,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는 정권 아래서만 한국의 내부 안정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원칙은 단기적으로는 상충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보완관계를 가진다.
1970년대 중반 미국 대한정책의 두 원칙은 상충했다.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는 강력한 한국군과 한국정부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러나 강력한 한국군은 유신정권의 지원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한국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는 유신정권에 대한 인정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양국간 이해는 일치하였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국제적으로 권위주의 정권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이란 사태에서 확인되었듯이, 장기적으로 볼 때 유신정권은 내부 붕괴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미국의 관점에서 보면, 반대세력에 대한 지나친 통제 그리고 체제 경직성 때문에 국민들이 유신정권으로부터 이반할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카터 행정부는 도덕성, 인권등의 개념을 대외정책에 도입했다. 이는 워터 게이트 사건 이후 「도덕성 회복」이라는 미국 내부의 요구를 국내정치는 물론 국제정치에 적용함을 의미했다.
카터 행정부의 새로운 대외정책은 한미관계의 변화를 초래했다. 미국은 한국내 인권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유신정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윤리적 개념을 대외정책에 도입하려던 카터 행정부의 기본 정책과 양립할 수 없었다.
미국은 긴급조치 해제, 정치범의 석방, 재야세력에 대한 탄압 중지 등 미국의 요구를 여러 경로를 통하여 전달했다. 유신정권은 이를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했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철수라는 극단적 쟁책을 취했다. 북한 도발시 미국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인계철선」으로 여겨지던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계획은 유신정권에 큰 부담이었다. 주한미군의 철수를 막으려는 한국의 공작은 코리아 게이트 사건으로 이어졌다. 격분한 유신정권은 「자주국방」으로 대응했다. 1978년 초반까지 양국관계는 최악의 상태였다.
유신정권에 대한 미국의 견해
카터 대통령 취임 이후 격렬했던 한미 갈등은 1978년 말부터 완화되었다. 한국 집권부는 독자노선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자주국방」을 위한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 투자는 경기침체로 이어졌다. 미국의 지원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인식이 한국 집권 핵심부에 확산되었다.
또한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보면 「한국 패배」는 미국에게 큰 부담이었다. 비록 구소련의 영향력을 감소시켰으나 미국에게 중국은 여전히 상대하기 거북한 존재였다. 양국은 상호 조정을 모색했다.
한국은 내부 통제를 위한 강경책을 일부 수정해 유화 정책을 취했고 미국은 미군의 추가철군 가능성을 유보했다. 양국은 정상회담을 통하여 양국간 관계호전을 표명하기를 원했다. 물론 정상회담을 적극적으로 원한 측은 유신정권이었다.
미국은 유신정권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가. 1979년 5월25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가 국무장관에 보낸 전문(Seoul 07654)은 유신정권에 대한 미국의 견해를 보여준다. 이 전문은 정상회담 기초자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작성된 것으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신정권은 여전히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비록 정당정치, 국민적 합의 없이 정책이 실시되고 있지만 안보, 경제성장, 국제지위 향상 등 유신정권이 내세운 정책목표는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유신정권의 권위적 통제는 지나치다. 유신헌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국내 반대 세력에 대한 과잉 반응이다. 하지만 권위적 통제에 대한 내부 반발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국민들은 정치자유화에 대한 기대보다 안보, 경제적 복지를 우선하기 때문이다.
1979년 1월31일 미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전문(Seoul 01427)은 1978년 12월 총선거에 대한 미국의 분석을 보여준다. 이 선거에서 공화당은 31.7%의 지지를, 신민당은 33%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미대사는 이 결과를 「유신정권에 대한 반대가 아닌 경제 정책에 대한 항의」로 해석했다.
또 다른 예로 1979년 통화억제를 위한 유신정권의 정책 변화를 유신정권이 국민들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처럼 미국은 유신정권이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고 파악했다.
대한정책의 네 가지 목표
1979년에서 1980년 사이 미국의 대한정책은 네 가지 목표에 기반하였다. 국무부 한국과장 리치가 기안한 「State 040887」은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을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1)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안정:이를 위하여 한미관계를 강화하고 한국군의 방위력을 중대시키기 위한 방법을 구상, 실천한다. (2) 경제관계에서 최대 이익 보장:세계경제로 한국경제가 순조롭게 통합되도록 지원하며 대미 무역흑자를 줄이도록 한다. (3) 한국의 정치발전:인권문제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강조하여 한국으로 하여금 정치발전을 이루도록 한다. (4) 양국관계 관리:변화하는 양국관계를 장기적 안목에서 관리할 준비를 한다. 특히 한국 방위산업의 역할을 미국의 세계 정책에서 평가하여 한국 방위 정책을 수립하도록 한다.
1979년의 국제정세 변화는 양국 관계를 호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발생한 세 사건은 미국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첫째 사건은 「이란 혁명」이다. 이란은 전통적으로 중동에서 구소련의 팽창을 제어하는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샤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는 이란 혁명으로 분출되어 반미, 반소 이슬람 정권이 탄생되었다.
이란 혁명은 미국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샤 정권으로 하여금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도록 한 미국의 노력이 샤 정권으로 하여금 반미 성향을 갖게 하였다. 또한 독재정권에 대한 미국의 맹목적 지지는 국민 대다수의 반미 감정을 초래하였다.
둘째는 니카라과 혁명이었다. 남미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뒷마당」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미국이 지원한 소모사 정권은 국민들의 반발로 붕괴되었다.
셋째 「아프가니스탄 사태」이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친소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친소 정권이 붕괴되자 소련은 직접 무력 도발을 감행했다.
카터 집권기 미국의 군사전략은 「1과 1/2 전쟁」이었다. 유럽, 중동, 극동, 남미 등 전세계에 걸쳐 있는 미국의 전략지역 중 만약 전략지역 두 곳에서 분쟁이 발생하거나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면, 미국의 해외군사력은 전략적 우선 지역에 집중하고 다른 지역은 현상 유지에 그치는 전략이었다. 전략적 중요성은 유럽, 중동, 극동 순이었다.
1979년 미국에게 있어 전략적 우선 지역은 중동이었다. 아프가니스탄도 이란의 유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는 점에서 중동문제의 한 부분이었다. 중동지역이 「1」이었다면 동아시아는 「1/2」이었다. 중동에 미국의 전력을 집중하려면 동아시아의 전략적 균형이 필요했다. 동아시아의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안정과 강한 한국군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변화로 인해 미국 입장에서 박정희 정권과 타협할 필요가 커졌다. 미국으로서는 유신정권의 통치방식이 불만족스러웠지만 유신정권은 미국의 세계 정책을 수행하는데 필요했다.
그러나 유신정권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이는 유신정권에 대한 인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카터 행정부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미국은 한국이 정상회담 이전에 실질적인 민주화 조치를 취하도록 다양한 압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 미국의 요구 사항은 긴급조치 9호 해제, 정치범 석방, 재야 세력에 대한 관용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국무부의 훈령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한 한국 집권 핵심부의 의사를 타진했다. 한국 집권부는 「긴급조치 9호 유지, 김대중 석방불가」의사를 강력하게 밝혔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79년 4월3일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전문(Seoul 4902)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정상회담은 인권문제에 대한 민국의 영향력을 조금 향상시킬 것이다. 한국측은 정상회담을 원하지만 미국의 요구를 전부 수용할 정도로 원하지는 않는다. 만약 인권문제를 한미정상회담 전에 거론한다면 중국, 중동국가들과 미국의 관계에 인권문제가 적용되지 않았던 사실로 (한국측이) 매우 분개할 것이다. 현재 미국에게 있어 최선은 인권문제를 정상회담에서 직접 거론하는 것이다. 공개적 비난이나 상징적 제재를 이용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만 발생할 것이다.
본인은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정식으로 요구하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긴급조치가 해제된다 하더라도 반공법 같은 대체 법안으로 강권통치는 계속될 것이다. 미국에게 가능한 선택은 정치범 석방이다.
(미대사)권고:본인은 인권문제에 대한 공개적, 공식적 논의는 삼가라고 권고한다. 정상회담 개최의 대가로 인권문제에서 진전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다른 경로를 통하여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 「가시적 조치가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좋게 할 것이며, 이것이 중요하다」는 미국의 견해를 전달하기를 원한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정책권고가 수용되어 미국은 우회 경로를 통하여 「정치범 석방, 재야 세력에 대한 관용」을 요구하였다. 유신정권은 미국의 압력을 일정 정도 수용하였다. 긴급조치 위반자들이 석방되고 학생시위에 대하여 관대한 처분이 내려졌다.
「자주국방」과 「미중관계정상화」
1979년 6월 한미 정상회담은 변화된 국제환경과 한국내의 변화를 반영하였다. 비록 한국내 변화가 미국의 기대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정상회담이 한국의 인권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기회로 자위하여 미국은 한미정상회담에 응했다. 유신정권은 한미정상회담을 통하여 미국이 유신정권을 지지한다고 알리고 싶어했다. 한미정상회담은 양국관계의 강화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했다.
정상회담에서 대한 안보공약과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이 재확인되었다. 미국은 정상회담을 통하여 정치자유화를 위한 압력을 행사했다. 국제사면 위원회와 한국교회협의회에서 입수한 정치범 명단을 전달하며 정치범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고,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경제성장에 걸맞은 정치발전이 아루어지길 바란다」는 문구로 인권 문제에 대한 미국의 견해를 표현했다.
6월 정상회담에서 10.26사건 발생 이전까지 미국 대한정책의 핵심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한국의 정치발전이었다. 전자에 있어서 양국의 이해는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양국간 이견은 한국의 「자주국방」과 미국의 「미중관계정상화」에 집중되었다. 한국은 중국 카드에 대하여 회의적 반응을 보였고, 미국은 한국의 의심을 완화시키기 위해 미중관계의 진전 내용을 한국에 알렸다. 반면 유신정권은 코리아 게이트, 주한미군 철군 등에 관한 한미 갈등이 완화됨에 따라 「자주국방」을 위한 노력을 그만두었다.
「한국의 정치발전」에 있어서 양국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미대사는 정상회담 개최 이전 이미 「눈가림용 유화책」의 가능성을 예견하였지만 미대사 자신도 정상회담 이후 전개된 유신정권의 유화책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
유신정권의 변화된 모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카터 대통령 방안 반대 시위 주동자와 미대사관 시위 주동자들이 석방되었다. 제헌절 특사로 긴급조치 위반자 86명이 석방되었다. 또한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던 이태영 여사의 출국이 허락되었다. 제적된 학생들에 대한 복교 결정이 내려지고 광복절 특사로 긴급조치 위반자 53명이 석방되었다.
8월 이후 전개된 한국 상황에 대하여 미국은 우려를 표명하며 국내 통치 방법에 대한 유신정권의 정책 변화를 촉구하였다. 8월11일 YH 사건,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 정지 가처분 결정, 김영삼 제명으로 이어지는 파행 정국은 유신정권의 민주화 요구 수용이라는 미국의 기대와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미국무는 공개적인 성명서 발표, 주한 미대사와 한국측 고위 인사의 연쇄접촉, 주미 한국대사와 홀부르크 차관보 면담을 통하여 미국의 우려를 공개적, 비공개적으로 전달했디.
모호한 언급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미국은 구체적 사건을 거명하며 유신정권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9월 11일 김용식 대사-홀부르크 차관보 면담에서 홀부르크는 김영삼 총재 직무 정지와 관련된 신민당 내분에 개입하지 말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또한 9월27일 박도진 장관-홀부르크 차관보 면담에서 홀부르크는 한국의 차관 신청(필자 주:당시 한국은 삼량진 곡물저장창고 건설, 인천항 개발을 위하여 아시아개발은행에 차관을 신청한 상태였다)에 미국이 반대하거나 기권하여 한국에게 불리하게 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이런 미국의 노력도 유신정권의 강경책을 변경시키지 못했다. 10월1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국무장관에게 발신한 전문(Seoul 15028)을 통하여 「10월8일쯤 김영삼 의원이 제명될 것이다」라고 보고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김영삼 제명이 한미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글라이스틴 대사의 예상과 달리 미국의 영향력이 행사되기도 전인 10월4일 김영삼 의원이 제명되었다.
미국은 김영삼 제명에 대한 「깊은 유감」을 표현하는 항의 성명과 함께 미대사를 소환하였다. 본국으로 소환된 미대사는 국무부 한국 관련자, 한국문제에 관심을 지닌 의회 지도자들을 만나 대한정책을 논의하였다.
또한 미국무부는 간접적 방법으로 유신정권을 압박하였다. 10월 9일 한국이 미국 방위 영역 밖에 있다고 밝힌 주일 미대사 맨스필드의 기자회견은, 비록 국무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 하더라도 안보공약을 건드렸다는 점에서 한국에 대한 경고로 해석되었다.
「유신정권은 상황을 극복할 여력이 있다」
미대사가 한국으로 귀환한 10월16일 우연의 일치로 부마항쟁이 발행하였다. 10월16일부터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17일 오후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미대사는 10월17일에서 20일 본국에 보고한 전문에서 부마항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부마항쟁의 발생 원인은 정치적 좌절, 경제적 좌절,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민의 염증, 정부의 강경책 등이다. 특히 김영삼 제명, 신민당 의원의 의원직 집단 사퇴가 직접적 원인인 듯하다.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이유는 시민들이 호응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권위적 통제로 많은 사람들이 통제에 반대하는 시위에 동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아직 유신정권은 붕괴 직전에 몰리지는 않았다. 유신정권은 현 상황을 충분히 극복해 나갈 여력을 가지고 있다.
10월18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우려를 전달하였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강경책에 대한 회의를 표현한 듯하다. 이런 반응에 기반하여 글라이스틴 대사는 긍정적 변화의 가능성을 예상했다.
또한 10월21일 유정희 회장 태완선을 만나 유화 분위기를 만들라고 권고하고 10월23일 박준규 공화당 총재 권한대행을 만나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0월17일 귀임 이후 집권 핵심부와 면담을 통하여 강경책에 대한 정부내 우려가 확산되고 있음을 본국에 보고했다.
10.26이전 미국은 유신체제의 급작스런 붕괴를 예상하지 않았다. 국민들의 불만이 있었지만 급격한 행동으로 분출될 정도는 아니었다. 유신정권에 대한 불만 세력의 집단행동 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물리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또한 집권세력 내부의 의견차이를 감지하고 있었지만 집권세력 내부 갈등이 표출되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건강에 이상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절대 권력자의 급작스런 이상을 예상하기도 않았다. 미국은 유신정권을 인정한 상태에서 유신정권으로 하여금 정치자유화 조치를 취하여 국내 반발을 약화시키고 국제사회에서 독재국가로 지탄받지 않기를 원했다.
「권력 이양」
그러나 10.26 이전 미국은 박정희 제거를 포함한 다양한 선택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는 「권력이양」에 대한 언급으로 간접 입증된다. 1979년 5월25일 미대사가 본국에 보낸 「정상회담 기초 자료1」이란 제목의 전문(Seoul 07654)은 권력이양에 관한 한국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비록 경제문제가 한국의 최대 관심사이지만, 정치적 걱정거리는 바로 「권력이양」이다.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인사를 포함한 사려 깊은 한국인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후계자의 부상또는 최소한 후계자 수업을 허용해야 한다고 느낀다. 만약 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우려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통령은 이런 우려를 만족시킬 만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또한 9월26일 김재규와 만난 자리에서 미대사는 「권력 이양」을 언급했다. 이 만남에 대한 보고서는 비밀 분류에서 해제되지 않아 김재규-글라이스틴 면담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1979년 11월 10.26사건에 대한 미국 개입설이 증폭되고 김재규가 재판 과정에서 미국 개입을 주장할 것에 대비하여 미대사는 11월 9일, 김재규-미대사 면담(9월26일)에 대한 설명 전문(Seoul 017592)을 작성했다. 이 전문에서 글라이스틴은 자신을 「미대사 또는 그」라고 표현할 정도로 객관적으로 9월26일 면담을 묘사하려 했다.
…면담이 거의 끝날 무렵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한국 국내 정치상황에 대한 미대사의 견해를 물었다… 정치 문제에 대하여 미대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정치상황을 보며 본인은 두가지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첫째, 국가를 심하게 분열시키고 정치적 불안정을 유발할 수 있는 정치의 분극화 현상이다. 최근 신민당과 관련된 국회내 정치혼란은 이런 경향을 보여준다.
한국인들을 우려하게 하는 두 번째 문제는 「평화적 권력이양」이다. 현상황에서 본인은 유신정권 또는 정치권이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한다. 본인은 한국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글라이스틴과 김재규와의 만남
10.26사건 이전 전문에서 흥미로운 점은 김재규의 반응이다. 카터 대통령의 방한 전 1979년 6월 글라이스틴 대사는 김재규를 최소한 세 번(1979년 6월20일 이전 어느 날,6월20일, 6월21일에서 26일 사이) 만났다. 이 자리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유신정권의 강경책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전달하여 정상회담 전후 한국의 온건한 태도를 주문하였다.
1979년 6월20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김재규 면담에 관한 전문(Seoul 09082)에서 「김재규는 본인이 말한 것들을 명확히 이해했다(이하 약 10행 정도 삭제)」고 보고했다.
11월19일 작성된, 9월26일 면담에 대한 설명 전문(Seoul 017592)은 「이행기」에 관한 「선문답」 같은 대화를 기록한다. 이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글라이스틴:한국은 국내적으로 매우 강하며 한국인들은 공통의 이해를 가진다. 그러나 이란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본인은 한국의 장래에 대하여 낙관적이다.
김재규:귀하의 판단은 정확합니다. 「이행기」또는 전쟁과 같은 국내 위기시 한국인의 가치는 불변할 겁니다. 한국의 발전과 안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기초는 정부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합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전문에서 6월 한미정상회담 이후 자신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본인과 딕 슈나이더(필자 주:당시 국무부 인권국 소속 부차관보, 1979년 7월24일부터 31일까지 한국의 집권 핵심부, 여야 정치인, 재야 인사와 접촉)는 「박정희 정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신호를 김재규를 비롯한 한국 집권측 인사에게 보내지 않았다... 본인은 박정희 대통령의 차기 임기 문제와 같은 다루기 힘든 문제를 건드릴 만큼 부주의하지는 않았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9월26일 면담 결과보고 전문(미공개)에서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한 어떤 특별한 언급도 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다만 자신이 아래와 같이 김재규를 묘사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한국 경제 상황과 정치 상황에 대한 본인의 의견에 평소와 다른 관심을 보인 김재규는, 기초 통제를 유지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는 반면 박정권과 경기침체에 대한 국민의 불만 누적에 대하여 우려하는 인상이었다. 명확히 그는 신민당의 분열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다양한 반대세력은(유신정권)과 대결을 계속하리라 가정하고 있었다. 비록 김재규는 본인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했지만, 그가 한국 안보당국(중앙정보부)의 자제를 선호하는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
제2부.최규하대통령 권한대행과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
10.26사건
10월26일 오후 7시35분께 궁정둥에서 발생한 총격은 한국 현대사의 극적 순간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으리라고 믿었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국무부로 발신한 「10월27일 오후 2시30분 한국 상황보고」란 제목의 전문(Seoul 16353)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야당 지도자들은 집권당과 협력할 의사를 비쳤고, 김영삼은 「이런 종류의 사건을 예견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며 유감을 표명했다...(중략)...한국 방송매체와 여론은 미국의 반응과 지지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다수 한국인들은 방송매체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우리가 제공하리라는 희망에서 (우리와) 접촉하려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위한)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비공식적으로 촉구했다. 일부는 미국이 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다는 외신을 반복하기도 하였다. 이런 의심은 기묘한 상황에 의하여 강화된다....
그러나 공개된 전문은 미국 개입에 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다만 공개된 전문의 행간, 공개된 전문의 전송 시간에서 몇 가지 단서만 발견될 뿐이다.
공개된 전문을 종합하면 미대사관측에 대통령 유고 상황을 전달한 한국측 인사는 유병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필자 주:당시 위컴 장군의 부재로 사령관 대행)이었다. 10월27일 오후 2시18분 글라이스틴 대사가 발신한 전문(Seoul 16331, 수신처:국무장관, 국방부,백악관,중앙정보부)에 따르면 유병현 장군은 「이 사건은 군사 쿠데타가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군은 상황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다」고 전했다.
미국은 사태 확인 이후, 기민한 대응을 하였다. 10월27일 아침 9시27분 미대사관에 한 전문이 도착했다. 이 전문은 동아시아국 설리반 부차관보가 기안하였고 발신자는 크리스토퍼 차관이었다. 전문의 수신처는, 주한미대사관, 주일 미대사관, 주중 미대사관, 주필리핀 미대사관, 그리고 마닐라에 머물고 있는 홀부르크 차관보였다. 이 전문의 제목은 「한국에서의 상황전개에 대한 국무부 성명」이었다.
우리는 한국에서의 상황전개에 대하여 조언을 받았다. 미국은 이 문제를 한국을 위한 국내 문제로 간주하며, 자제를 촉구한다. 미국정부는 한국의 상황을 이용하려는 외부 기도에 대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대응할 것임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이 성명서는 한국내 정치세력에 대한 미국의 입장인 동시에 북한에 대한 경고였다. 미국은 대북한 경고를 중국과 구소련을 통하여 전달했다. 또한 주한미군에 데프콘.3 발동, 위컴 한미연합사 사령관 귀임, 동지나해에 있던 키티호크 항공모함의 한국 방향 항진, 공중 경보 통제기 2대 발진 등 실제적 무력 시위로 북한의 모험을 차단했다.
이번 조치와 동시에 국무부는 미대사를 통하여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국무부는 10월 27일 오후 6시까지 정확한 사건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0월27일 주말레이시아 대사관(필자 주:당시 홀부르크 차관보는 동남아시아 각국을 방문하고 있있었다)에 보낸 크리스토퍼 차관의 전문은 「워싱턴 시간으로 27일 오전 5시까지 서울에 있는 미대사관의 보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관려된 상황은 아직 불분명하다」고 한국 상황을 설명한다. 10월28일 미대사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Seoul 16370)는 미국의 상황 파악 수준을 보여준다.
요약:우리는 10.26 사건이 계획된 군사 쿠데타인지, 정권 내부의 인사에 의한 지도자의 제한된 제거인지, 아니면 단순히 기묘한 사건인지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는 불확실한 상황을 초래했다. 주요 행위자들은 권위적 정치구조를 지향하는 정권내 세력이다...
본인이 귀임한 이래, 본인은 한국 집권세력 내부에서 강경 노선의 방향에 대한 우려가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박대통령과 18일 가진 대화에서, 심지어 박대통령 자신도 강경노선 결정이 현명했는지 여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박대통령의 사망과 관련된 불가사의와 함께, 청와대 내에서 존재하던 불유쾌한 사건(강온 대립)에 대한 인식으로 많은 사람들은 박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가정하게 되었다.... 박대통령 주변 소수인사, 아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이끄는 인사들이, 정부 구조는 건드리기 않으면서 대통령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을 가능성이 좀더 그럴 듯하다... 김재규는 박대통령의 강경책이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한다고 느낀 사람들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이런 제한된 설명도 위험 부담을 고려한다면 설득력이 없다....(이하 생략)
사건 발생을 처음 접했을 때,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사건을 군사 쿠데타로 판단했었다, 10월28일 오후에도 글라이스틴 대사는 상황 파악을 정확히 하지 못했다. 미대사관이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게 된 시점은 대략 29일이었다.
「최규하 정부를 인정하자」
글라이스틴 대사는 10.26 사건으로 불확실한 상황이 도래했다고 평가했다. 정부구조의 두뇌, 신경에 해당되던 박정희의 유고로 정부내 여러 세력을 통제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곧 혼란으로 이어지리라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북한의 위협으로 인해 내부결속이 강화돼 있으며 강력한 관료제 또한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요 행위자를 여전히 정부내 세력 특히 군부와 최규하 행정부로 파악했다. 단기간 내에 김대중, 김영삼이 참여하는 직접 선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미대사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군부 집권에 대하여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차기 후계자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규하를 중심으로 한 행정부를, 약속한 정치적 자유화를 준수하는 한 인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보고는 미국의 대한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상황을 파악하면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주요 집권세력을 만나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글라이시틴 대사는 10월27일 오전 8시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만났다. 이 면담의 결과보고 전문(Seoul 16336)은 미대사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본인은 공관에 있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아침 8시에 방문했다. 본인은, 몇 시간 전에 방송된 박정희 대통령은 유고에 대한 애도를 표현했다.... 본인은, 자정쯤 불명확한 사건 소식을 접했으며, 사건의 세부 사항은 새벽 2시경 알게 되었다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알렸다. 또한 지금까지 (미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하여 취한 조치와 우리(미대사관)가 이런 조치들을 알게 된 경위을 알렸다.
이 자리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군부의 중요성, 군부내 단합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전후 행간을 읽으면) 국민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하여 정치적 자유화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사건을 지난 몇달 동안 한국을 괴롭힌 정치적 상처를 치유하는 기회로 삼으라고 권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규하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박대통령의 유고로 인한 슬픔과 피곤함과 별도로, 최규하 권한대행은 자신에게 부여된 부담에 명확할 정도로 우려했다.
또한 미국은 위컴 장군을 통하여 미국의 입장을 군부에 전달하였다. 미국의 입장은 「군부 집권 반대」였다. 11월1일 크리스토퍼 차관이 미대사관에 보낸 전문(State 285736)은 다음과 같이 군부를 설명했다.
한국은 깊은 슬픔과 충격에 빠져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육군이 단기적으로 집권 유혹을 피하고 민간 내각을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아직 암살에 관한 불분명한 부분이 있지만, 정부는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며 사태의 추이에 따라 사건을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미국은 한국내 집권세력을 다루는 데 매우 조심했다. 한국의 집권세력이 미국의 요구를 고분고분하게 수용하던 1960년대 초와 판이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지나친 압력이 반미로 연결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특히 군부를 대하는 데 있어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미국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지시한다」혹은 「가르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하였다.
10.26을 변화의 기회로
미국은 10.26 사건을 한국의 정치자유화를 이루는 기회로 삼으려 하였다. 물론 이 목표는 한국인들의 변화 욕구,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집권세력과 접촉하면서 집권세력 또한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한다고 미국은 파악했다.
그러나 민주화 정도에 대한 주요 세력간 기대 차이로 미국은 곤혹스러워했다. 만약 최규하 행정부가 민주화 요구를 못한다면 야당과 재야는 거리의 정치로 나가고 결국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여 퇴행적 결과가 생기며, 만약 최규하 행정부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지나치게 수용하면 군부가 개입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양극단의 선택을 피하도록 최규하 행정부에서 정치 자유화 조치를 취하며 정치일정을 밝혀 국민들의 의심을 줄이며, 야당과 재야의 인내를 촉구하며, 민주화 요구에 대한 군부의 허용을 촉구했다. 미국은 한국의 주요 세력간 의사전달의 통로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11월2일 조문사절로 방한한 밴스 국무장관은, 박정희 유고에 대한 조의 전달, 대한 안보 공약의 재확인, 한국에서 민주적 정치발전을 위한 미국의 영향력 행사 등 세 가지 임무를 받았다.
그는 11월3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났다. 이 면담에서 10.26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의 골격이 보였다. 미국측 참석자(필자 주:밴스 장관, 카터 대통령 차남 칩 카터, 글라이스틴 대사, 홀부르크 차관보, 니콜라스 플랫 국가안보회의 참모) 대표 밴스 장관은 10.26 사건 이후 미국의 대응을 설명했고, 미국의 대한 안보-경제공약을 재확인했다.
국내 문제에 대해서는, 야당.재야 세력과 미대사는 실무진이 이미 접촉중이며, 야당.재야의 자재를 권고하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최규하에게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 반드시 다양한 정파와 사전 협의를 하라고 권고하였으며, 긴급조치 9호 해제, 김영삼 의원 제명 처분의 철회, 김대중 가택연급 해제,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과 YH 사건 관련자에 대한 기소 중지, 국회 정상화 등을 요구했다.
「한국은 미국의 조언을 듣고 있다」
11월7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났다. 이 면담에 대한 보고 전문(Seoul 17091)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본인은 솔직한 토론과 「삭제된 목적」을 위한 새로운 경로를 구축하기 위하여 11월7일 비공개적으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났다. 밴스 장관의 언급, 특히 공개적 비판을 피하며 정치 행동의 완화를 권하는 미국의 의지를 반복한 후, 본인은 한국 정부가 균형자의 역할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접촉한 모든 사람들은 무질서를 피하려 하는 동시에 일정 정도의 정치자유화를 원한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가 믿을 만한 방식으로 정부의 의도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행정부는 본인을, 한국군은 미군을 경유한 경로를 원한다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분명히 했다.
이 면담을 통하여 글라이스틴 대사는 향후 거취에 대한 최규하의 의중을 물었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질문은 완곡하게 「차기 정권이 정치개혁 작업을 하리라고 발표하실 의향이 있는지요?」였다. (삭제되었기 때문에 명확하는지 않지만 행간을 읽으면) 최규하는 유신헌법이 정한 90일 이내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최규하의 의중을 확인한 글라이스틴은 국민들의 의심을 줄이기 위하여 정치일정을 밝힐 것을 요구하였다. (삭제되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최규하는 이에 관한 미국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 면담에 대한 보고서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규하가 헌법 개정 작업을 주재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11월15일 글라이스틴 대사가 본국에 보낸 전문(Seoul 17417)은 10.26이후 미국의 요구와 최규하 행정부의 대응을 검토한다.
…우리는 정치권은 물론 행정부, 군부와 접촉중이다. 행정부와 군부에게는(정치자유화를 향하여) 계속 이동하여야 하며, 정치권에게는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거나 운을 믿고 지나치게 행동하지 말 것을 조언하고 있다. 성명서 발표 이전 야당과 협의하라는 미국의 노력은 실패했다.
(필자 주:11월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헌법 개정과 정치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함) 또한 한국 정부가 우리의 조언을 택하지 않는 더 많은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 반면 한국 집권세력은 서울의 분위기를 자유롭게 하는 조치를 매일 취하고 있으며 미국의 조언을 듣고 있다.
예를 들면 오늘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금된 인사들에 대한 재검토와 학문 권리를 박탈당한 학생들의 복학을 고려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최규하 취임식과 미국 입장
글라이스틴 대사는 11월21일 국무장관에게 발신한 전문(Seoul 17784)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12월 보선에서 당선되리라고 예상했다. 이미 글라이스틴 대사와 폴 쿤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열리는 선거에 참여하여 승리할 수 있다고 예상되던 김종필(11월16일)과 정일권(11월8일)을 만나 이들이 12월 대선에 참여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들을 만나서 개헌일정에 관한 공화당의 의견을 들었다. 또한 군부와 접촉한 결과 군부가 최규하 행정부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영삼이 헌법개정 이전에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통일 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성격상 당선되기 힘들다고 가정했다. 이런 사실인식과 가정에 기반하여 미국은 최규하 행정부를 인정하였다.
최규하 행정부에 대한 미국의 인정은 제한적이었다. 11월1일 크리스토퍼 차관이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발신한 전문(State 285736)에 의하면 국무부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과도정부 수반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이런 국무부의 입장은 박동진 외무장관(11월28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11월29일)을 만난 글라이스틴 대사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최권한대행과의 면담에 관한 보고 전문(Seoul 18153)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최규하 행정부가 유신의 단순 연장이라는 정계.지식인들의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노력해야 한다고 촉구하기 위하여, 특히 최권한대행의 과도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며, 과도 임기의 연장은 정당들의 합의에 따라 가능하다는 것을 공식적.즉각적으로 밝히기를 촉구하고, 비록 속도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협력 여하에 따라 결정되지만, 긴급조치 9호 해제, 정치범 석방, 검열 완화, 그리고 계엄해제 의사를 국민들에게 공표하길 촉구하며, 이 세가지 조치 중 정치범석방, 긴급조치 9호 해제에 관한 미국의 관심을 표면하기 위하여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박동진 외무장관을 사적으로 만났다(최규하 대통령 답변 생략)
본인은 이 면담이 시기 적절했다고 평가하며 우리는 군부와 접촉하면서 미국의 입장을 강화시킬 것이다.
이 면담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규하가 대통령직을 약 1년 정도만 수행하기를 바라고 있음을 외교적 용어로 표현하였다. 또한 성명서 발표전 야당.재야와 협의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유감을 전달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권한 대행이 미국의 의사를 명확히 이해한듯하다고 보고했다.
박동진 외무장관과 글라이스틴 대사 면담(보고 전문:Seoul 18075)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규하 행정부가 「과도정부」임을 이유로 최규하대통령 취임식 때 고위급 사절이 파견되지 않을 예정임을 통고하였다. 박장관은, 미국이 최규하 행정부를 지지한다는 증거로 고위급 파견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미 일본과 외교적 협의를 거쳐 일본 또한 고위급 사절을 파견하지 않을 것임을 통고했다.
미국의 두가지 정책목표
최규하 행정부에 대하여 미국은 두가지 정책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최규하 정부를 강화한다. 둘째, 최규하 행정부로 하여금 정치일정을 명확히 밝히도록 한다.
첫째 정책목표를 위하여 미국은 군부와 접촉하였다. 군부 접촉은 위컴 경로를 통하여 주로 이루어졌다. 군부가 최규하 행정부의 정치자유화 일정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미국은 한국 군부를 지원할 것임을 명확히 하였다.
이례적으로 11월30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만났다. 이 면담은 11월27일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김대중에 대한 명확한 반대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12월3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면담에 대한 보고 전문(Seoul 18323)을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보고 전문의 일부는 군에 대한 미국의 기본 정책을 보여준다.
본인은 11월30일 위컴 장군의 관저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처음으로 만나 대화했다. 위컴 장군은 한국군이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하여 경의를 표했고, 군의 주요 임무는 북한으로부터 (남한을) 방어하는 것이지, 민간인에게 맡기는 편이 좋은 일을 군이 대신 맡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정승화는 동의하는 듯했다. 몇 가지 질문에 대하여 정승화는 「소수 불평분자들의 행동(필자 주:명동성당 위장 결혼사건을 지칭)」에도 불구하고 계엄상태가 만족스럽게 유지되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는 「99%의 한국인들이 공공질서가 유지되지를 원한다」고 했다.
「정치 일정을 발표하라-」
군에 대한 미국의 기본 정책은 「정치개입 불가」였다. 미국무부는 10월 말 군이 쿠데타를 통한 조기 집권 유혹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했으나 상황이 악화되어 군이 개입할 가능성에 대하여 우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정치자유화에 대한 군의 허용을 촉구하였다.
미대사관은 신민당.재야 세력과 접촉하여 정치행동 자제를 촉구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미대사관 직원은 다수 재야 인사와 접촉하여 미국의 의견을 전달했다. 이 접촉을 통하여 「재야의 활동에 자동적인 미국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는 공식 입장이 전달되었다.
또한 미대사관은 신민당 중진들과 접촉하여 온건 노선을 주문하였다. 10.26 사건이후 신민당은 「90일내 개헌, 새로운 헌법 아래서 대선」을 주장했었다. 12월11일 송원영, 이기택, 박한상, 김수한 등 신민당 중진과 만난 글라이스틴 대사는 정치자유화의 현실적 정도를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였다. 네 명의 중진은 미국의 의중을 받아들였다.
미국이 접촉한 정치세력 중 윤보선 중심 세력은 미국의 협력 요구에 반대했다. 11월20일 글라이스틴 대사와 만난 윤보선은 한국 군부의 반응을 무시하는 반응으로 일관했다. 윤보선이 중심이 된 11월24일 YMCA 위장결혼 사건에 대하여 미국은 부정적 견해를 취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사건으로 군부가 긴급조치 9호 해제 약속을 취소하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하여금 정치일정을 명확히 하라는 압력을 강화했다.
미국은 야당.재야 세력 접촉에 있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미국의 일차 목적은 군부를 자극하지 않도록 야당.재야의 자제를 촉구하는 것이었지만 야당.재야의 반미 감정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
12월 말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최악의 경우 국가질서 보존을 명분으로 한 군사 쿠데타의 조짐은 보이지 않으며, 정치갈등이 완화되었다고 한국 상황을 분석했다. 아직 정치자유화의 속도, 방식, 정도에 대한 이견이 있지만 최규하 행정부는 양극단을 피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또한 한국 정치의 윤곽이 잡힘에 따라 미국의 역할이 좀 더 명확해 질 수 있게 되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둘째 미국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경치일정을 명확하게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11월29일), 박동진 외무장관(11월28일)과 연쇄 접촉한 자리에서 미대사는 대통령 취임식 때 일정 발표를 요구하였다.
정치일정 발표에 대한 미국의 압력은 군부에도 가해졌다. 11월30일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만난 글라이스틴 대사는 정치일정 발표가 야당.재야세력의 의심을 줄일수 있다며 한국 정부는 정치일정을 명확히 발표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미국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정승화는 이에 대하여 명확히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최규하 행정부는 일정발표를 미뤘다.
11월에서 12월 초 사이 글라이스틴 대사는 낙관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군부의 행동에 대해 우려는 했지만 한국이 정상궤도에 놓여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최규하 행정부, 군부, 야당.재야는 미국의 영향력을 받아들이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도 군부내 분열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이런 예상에 기반하여 글라이스틴 대사는 12월11일에도 신민당 중진을 만나 자제를 당부했다. 그러나 미국의 노력이나 예상과는 정반대의 일이 군부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제3부.신군부와 미국
12.12를 예상못한 미국
최소한 미국무부와 주한 미대사관에게 있어 12.12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또 예상하였다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 사건에 관한 전문 중 최초 전문(State 320837, 한국 수신 시간:12월 13일 오전 8시 51분)은 미대사관이 이 사건에서 소외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울에서 초기 단계의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고 후퇴선이 봉쇄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상황이 전형적 쿠데타로 진전되지 않고 몇 시간 내에 해결될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
서울 시간으로 12월12일 저녁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황영시 1군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육군 장교들이 정승화 육참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육본 근처에서 총이 몇 발 발사되었으나 사망자는 없다. 노재현 합참의장, 유병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위컴 유엔군 사령관, 미대사와 함께 조금 전까지 연합사 상황실(용산 벙커)에 있었다.
전두환은 노장관을 불러내려고 전화했었으나 노장관은 군부의 일질이 될 가능성을 염려하여 거부했다. 어느 정도 행동이 자유로운 노장군과 군 수뇌부는 두 시간 동안 (서울 시간으로 13일 1시까지) 주요 지휘관과 부대의 충성을 확인하려 했다. 군 수뇌부는 대부분 부대와 접촉 중이며 충성을 확보했다.
그들은 충성을 약속한 지휘관들에게 기존 명령 체계만을 따르며 현 위치에 머물 것을 지시했다. 이 시간 쿠데타 군은 단지 두 개 사단만 지휘하고 있다. 전두환측에 가담했다고 알려졌던 수도경비사령부도 쿠데타군의 지휘 아래 있지 않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보안사령부로 귀대했고, 중개자 역할을 하는 국방부 차관을 통하여 협상이 진행중이다. 워싱턴 시간으로 정오(한국시간 13일 1시) 노장관은 유리한 장소에서 협상을 진행하기 위하여 연합사 상황실을 떠나 국방부로 가기로 결정했다....
미대사는 최규하 대통령과 계속 접촉하고 있었고, 중앙정부부장을 포함한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메시지를 쿠데타 군에게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군내 충돌을 심각하게 보고 있으며, 미국의 여론, 언론, 의회는 군부의 권력찬탈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고, 10.26 사태 당시 미국의 반응과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미대사는 강조하고 있다.
미대사와 위컴 사령관은 고전적 쿠데타를 피하며 현재 상태에서 해결될 가능성을 믿고 있다. 쿠데타 공모자의 수가 이미 줄어들고 있으며, 쿠데타군이 표명한 공식적 요구는 제한적이다.
미대사의 정책권고에 따라, 우리는 현 상황을 규정하는 데 있어 매우 조심하고 있으며, 쿠데타를 암시하지 않고 있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이 문제를 군부 내부의 문제로 해결할 수도 있는 「체면 세우기 방법」에 도움을 준다....
이 전문은 12.12 사태에 대한 미국의 정보 수준과 12.12 사태에 대한 미국의 최소 대응을 보여준다. 미대사는 13일 오전 8시까지 정확한 상황을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이 전문은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사령관이 한국군내 「어떤 형태의」 충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미국이 「현 상태의 변경」을 원하지 않는다면 소극적 정책의 시작이었다.
「사실상의 쿠데타를 겪었다」
미대사의 권고에 따라 국무부는 12.12사태를「한국군 내부 문제」로 공개적으로 규정하고, 「이미 진행된 정치 자유화를 보존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고 하며 미국의 역할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또한 외부세력이 12.12 사태를 이용할 가능성에 대한 경고, 한미관계에 끼칠 부정적 영향에 관한 우려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성명서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2월13일 오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만났다. 이 면담에 관한 보고 전문(Seoul 18808)은 글라이스틴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오늘 아침 본인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최규하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지난 밤 사건에도 불구하고 질서 있는 「정치적 진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본인은 국무부 성명서 사본을 전달하며, 군부의 주요 행위자들(필자 주:전두환 보안사령관, 이희성 중장)에게 이미 사본을 전달했음을 밝혔다. 한국내 정치일정에서의 혼란에 대한 우려와 함께, 지난 밤 발생한 하극상으로 인하여 발생한 군부내 적대감과 북한의 오판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최규하의 사건 설명 삭제).
이 자리에서 미대사는 최규하 행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전달했다. 미대사는 「최규하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지시가 단절되고 신군부에 대한 의존이 심화된 상황을 활용하여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할 의사를 지녔다」고 보고했다.
12월13일 오후 10시 27분 미대사는 12.12 사태에 대하여 그동안 파악한 내용을 국무장관에게 보고 (Seoul 18811)했다.
우리는 「사실상 쿠데타」를 겪었다. 민간정부의 약한 외형은 남아 있지만, 모든 징후로 보아 「젊은 장교」들이 군부 요직을 장악하기 위하여 치밀하게 준비한 듯하다. 박정희 대통령과 가깝고 보안 문제를 담당했던 장교단에서, 보안과 조사 문제를 다루는 중장 전두환이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파악된다.
여러 동기가 작용했다: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에 대한 복수, 군 선배들이 정치 문제를 잘못 다루고 있다는 우려, 정치 문제를 단호하게 처리하지 못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사회불안에 대한 두려움, 오랜 경쟁 관계, 그리고 의심의 여지 없는 권력에 대한 욕망, 군 선배들보다 유능하다는 젊은 장교의 자만심 등이다.
(이름이 삭제된) 한 인사에 의하면, 쿠데타를 계획한 집단은 최소한 10일전부터 거사를 준비했고, 이미 군부내 젊은 장교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이들은 이미 군부내 주요 요직에 배치될 인사들의 명단과 김용휴 국방부 차관을 장관으로 승진시킬 준비를 했다...
미국은 신군부에 영향력 행사 못해
이 전문에 의하면 13일 오후까지 미대사는 신군부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다. 신군부는 반공, 친미, 질서 있는 정치 자유화 추진, 고위직 승진 등을 표명했지만, 미대사는 이들이 추구하는 바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군부의 의도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다음과 같이 신군부의 행동을 평가했다.
신군부는, 이 사건이 미국에 주게 될 영향을 무시했거나 또는 이 사건에 영향이 무의미하다는 냉철한 계산에 따라 한미연합사의 의무를 무시했다. 신군부는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 위험이 초래된다는 사실에 주의하지 않고 행동했다.
이 전문의 행간을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발견된다. 신군부는 12.12 사태 당시 미국의 경고를 무시했다. 특히 글라이스틴 대사가 간접적으로 접촉하려 했던 전두환과 이희성은 미 대사의 경고를 무시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신군부에 대한 미국의 실질적 영향력이 크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긍정적으로 미국의 실질적 영향력은, 한국인들이 군사적-경제적으로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상황이 진정되고 (한국인들이) 대미 의존을 인식하게 될 때, 우리의 영향력을 행사함에 있어 어젯밤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신군부측 장교 중) 이런 사실을 합리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장교들이 있다면 우리는 미국의 우려를 강조할 더 좋은 경로를 발견할 수 있다. 지난 밤 위컴 장군과 본인이 신군부와 구군부 양측에 강력한 경고를 전달했다....
12.12사태에 대하여 글라이스틴 대사는 「사실상 쿠데타(명목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쿠데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국무부는 「초기 단계의 쿠데타」라고 규정하였다. 그 이유는 쿠데타 군이 정부의 완전 전복을 기도하지 않고 민간정부를 온존시키면서 몇 가지 요구 사항을 관철하려 했기 때문이다.
14일 오후부터 글라이스틴 대사는 실질적 쿠데타라는 성격 규정을 철회하면서 『미국은 「12.12는 신군부의 계획된 행동이 아니며, 쿠데타를 기도한 행위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미대사는 이런 책략의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 회의적이지만 이런 미국의 태도가 「사실을 좀 더 잘 파악하기 전」까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한국 군부내 무력분쟁 우려
12.12 사태가 진행될 당시 미국 대한정책의 당면 과제는 「한국군내 무력 분쟁 방지」와 「군부 집권 방지」였다. 미국은 한국군내 무력분쟁을 가장 두려워했다. 이는 미국의 세계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한국군의 전력손실을 의미하고 북한의 도발은 미국의 개입을 초래할 수밖에 없고, 만약 한국에서 전쟁이 발생한다면 중동에 집중됐던 미국의 전력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미국은 신군부와 구군부에서 군사 행동의 자제를 촉구했다.
둘째, 미국은 군부의 집권을 반대했다. 군부의 전면적 집권을 대다수 한국인들이 반대하기 때문에 군부의 집권은 한국내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군부내 집권은 미의회로부터 반발을 유발하여 한미 관계의 악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미국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내부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국제사회에서 독재국가로 취급되지 않는 한국」을 원했다. 이런 미국의 필요가 전환기 대한정책의 근처에 깔려 있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12월 14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을 만났다. 12월15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면담에 관한 결과보고 전문(Seoul 18885)을 보냈다.
12월 14일 전두환과의 면담에서 본인은, 한국군내 분열, 북한의 행동, 자유화, 정치-경제적 안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의 측면에서 12.12 사태에 관한 미국의 우려를 전달했다. 본인은 대한민국이 군사-경제 분야에서 미국에 의존되어 있고, 우리(미국)가 12.12 사태에 대하여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전두환은 본인의 논평을 인정했으며....(삭제)
전두환측에서 본인과 전두환의 면담을 우리(미국)가 전두환의 권력장악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징표로 이용할 위험을 무릅쓰고 본인은 전두환을 만났다. 본인은 다양한 기제로 이런 위험성을 상쇄할 수 있다고 믿으며, 미국의 우려를 「빠르고 퉁명스럽게 그리고 직접」전두환과 그의 집단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에 그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본인은 전두환이 미국의 입장을 명확히 이해했다고 판단한다.
본인은 대화에서 세 가지 점에서 놀랐다...(삭제)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자리에서 「한국내 민간정부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표현으로 군부의 집권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현하였다. 이 자리에서(행간을 읽으면) 전두환은 10.26사건에 미국이 개입되어 있음을 강력히 비난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의 개입을 부정했다.
이미 12월5일 미대사관 직원과 면담한 자리에서 전두환의 강력한 경고(합수부가 행한 고문을 미국이 계속 문제 삼을 경우 한미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를 알고 있던 미대사는 전두환의 이런 태도에 몹시 놀랐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에게 한국이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음을 상기시켰다.
신군부를 다루는 방법
전두환과 글라이스틴 대사 면담에 대한 이후 국무부는 신군부에 대처 방안을 모색했다. 12월16일 밴스 국무 장관은 설리반 부차관보, 홀부르크 차관보, 그레그 국가안보회의 참
/전두환, 카터를 농락하다
조동준(월간조선)
박정희 사망에서 전두환 취임까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은 1961년 군사 쿠데타이후 형성되어온 체제를 재편시키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18년 동안 한 사람의 최고 권력자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체제에서 일순간 체제경영의 중추가 사라졌다.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35분부터 시작된 체제개편은 81년 2월 전두환씨가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 과정은 결코 평화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서울 한 복판에서 정규군간 무력충돌이 있었고,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 일부 지역에서는 내전에 가까운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그리고 「사회정화」라는 명목 아래 많은 사람들이 「벌거벗은 폭력」을 경험했다. 세이셸( Seychells)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소국으로부터 1980년 5월 「정부승인」을 취소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체제 개편과정에서 얻은 경험은 이후 한반도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결성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이 의문은 지난 10여년간 정치 담론의 핵심 주제였으며, 치열한 정치행동의 원천이었다. 지금까지도 미국의 역할은 추측의 대상이다. 그동안 일부 인사의 증언이나 당시 상황을 추적한 기사가 있었지만 미국의 역할을 전반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체제재편기 주한 미국 대사관의 국무부 사이에 오고 간 전문 중 1993년 비밀분류에서 해제된 전문은 미국의 역할을 좀더 명확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전문은 국무부-미대사관으로 이어지는 경로의 전문이다. 이밖에도 백악관(국가안보회의)을 정점으로 하여 국방부-주한미군, 국무부-미대사관과 CIA-CIA 한국지부로 연결되는 경로도 존재했다.
이런 모든 경로를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기는 해도 이번에 공개된 전문은 미국의 공식 입장을 보여준다. 또한 이 전문은 미국의 눈에 비친 당시 한국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A4 용지 4천 쪽에 가까운 공개 전문을 일일이 다 읽고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정확한 의미전달을 위해 원문 중 일부는 그대로 인용했으며, 삭제 부분도 표시했다.
제1부.유신정권과 미국의 관계
70년대 미국 대한정책의 두 원칙
미국무부 한국과장 리치는 미하원외무위원회 아태소위원회 주최 청문회(1980년 8월28일)에 대한 보고서(State 230941)를 8월29일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에게 보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국무부 동아시아국 홀부르크 차관보는 미국의 대한정책을 결정하는 두 원칙을 언급하며 한국문제에 관한 증언을 시작했다.
첫째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전략적 균형의 유지는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 미중관계, 한미안보관계는 이 지역의 전략적 균형의 버팀목이다.
둘째 서울에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폭넓은 지지를 받는(broadly based)」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한국 내부의 안정을 보장하는 핵심 요소이다.
이 두가지 원칙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의 핵심을 나타낸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원했다. 미국은 베트남과 북한을 구소련 팽창전략의 전위로 파악하고 있었다. 중국과 한국은 구소련의 팽창을 제어할 수 있는 국가였다. 따라서 중국과의 관계정상화, 한국과의 긴밀한 협조는 미국의 핵심 국가 이익이었다.
또한 미국은 유신정권이 「폭넓은 지지를 받는」 정권이 되기를 바랐다.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부는, 한국의 내부 안정이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위하여 필요하며,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는 정권 아래서만 한국의 내부 안정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원칙은 단기적으로는 상충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보완관계를 가진다.
1970년대 중반 미국 대한정책의 두 원칙은 상충했다.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는 강력한 한국군과 한국정부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러나 강력한 한국군은 유신정권의 지원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한국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는 유신정권에 대한 인정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양국간 이해는 일치하였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국제적으로 권위주의 정권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이란 사태에서 확인되었듯이, 장기적으로 볼 때 유신정권은 내부 붕괴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미국의 관점에서 보면, 반대세력에 대한 지나친 통제 그리고 체제 경직성 때문에 국민들이 유신정권으로부터 이반할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카터 행정부는 도덕성, 인권등의 개념을 대외정책에 도입했다. 이는 워터 게이트 사건 이후 「도덕성 회복」이라는 미국 내부의 요구를 국내정치는 물론 국제정치에 적용함을 의미했다.
카터 행정부의 새로운 대외정책은 한미관계의 변화를 초래했다. 미국은 한국내 인권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유신정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윤리적 개념을 대외정책에 도입하려던 카터 행정부의 기본 정책과 양립할 수 없었다.
미국은 긴급조치 해제, 정치범의 석방, 재야세력에 대한 탄압 중지 등 미국의 요구를 여러 경로를 통하여 전달했다. 유신정권은 이를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했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철수라는 극단적 쟁책을 취했다. 북한 도발시 미국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인계철선」으로 여겨지던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계획은 유신정권에 큰 부담이었다. 주한미군의 철수를 막으려는 한국의 공작은 코리아 게이트 사건으로 이어졌다. 격분한 유신정권은 「자주국방」으로 대응했다. 1978년 초반까지 양국관계는 최악의 상태였다.
유신정권에 대한 미국의 견해
카터 대통령 취임 이후 격렬했던 한미 갈등은 1978년 말부터 완화되었다. 한국 집권부는 독자노선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자주국방」을 위한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 투자는 경기침체로 이어졌다. 미국의 지원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인식이 한국 집권 핵심부에 확산되었다.
또한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보면 「한국 패배」는 미국에게 큰 부담이었다. 비록 구소련의 영향력을 감소시켰으나 미국에게 중국은 여전히 상대하기 거북한 존재였다. 양국은 상호 조정을 모색했다.
한국은 내부 통제를 위한 강경책을 일부 수정해 유화 정책을 취했고 미국은 미군의 추가철군 가능성을 유보했다. 양국은 정상회담을 통하여 양국간 관계호전을 표명하기를 원했다. 물론 정상회담을 적극적으로 원한 측은 유신정권이었다.
미국은 유신정권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가. 1979년 5월25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가 국무장관에 보낸 전문(Seoul 07654)은 유신정권에 대한 미국의 견해를 보여준다. 이 전문은 정상회담 기초자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작성된 것으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신정권은 여전히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비록 정당정치, 국민적 합의 없이 정책이 실시되고 있지만 안보, 경제성장, 국제지위 향상 등 유신정권이 내세운 정책목표는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유신정권의 권위적 통제는 지나치다. 유신헌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국내 반대 세력에 대한 과잉 반응이다. 하지만 권위적 통제에 대한 내부 반발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국민들은 정치자유화에 대한 기대보다 안보, 경제적 복지를 우선하기 때문이다.
1979년 1월31일 미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전문(Seoul 01427)은 1978년 12월 총선거에 대한 미국의 분석을 보여준다. 이 선거에서 공화당은 31.7%의 지지를, 신민당은 33%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미대사는 이 결과를 「유신정권에 대한 반대가 아닌 경제 정책에 대한 항의」로 해석했다.
또 다른 예로 1979년 통화억제를 위한 유신정권의 정책 변화를 유신정권이 국민들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처럼 미국은 유신정권이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고 파악했다.
대한정책의 네 가지 목표
1979년에서 1980년 사이 미국의 대한정책은 네 가지 목표에 기반하였다. 국무부 한국과장 리치가 기안한 「State 040887」은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을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1)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안정:이를 위하여 한미관계를 강화하고 한국군의 방위력을 중대시키기 위한 방법을 구상, 실천한다. (2) 경제관계에서 최대 이익 보장:세계경제로 한국경제가 순조롭게 통합되도록 지원하며 대미 무역흑자를 줄이도록 한다. (3) 한국의 정치발전:인권문제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강조하여 한국으로 하여금 정치발전을 이루도록 한다. (4) 양국관계 관리:변화하는 양국관계를 장기적 안목에서 관리할 준비를 한다. 특히 한국 방위산업의 역할을 미국의 세계 정책에서 평가하여 한국 방위 정책을 수립하도록 한다.
1979년의 국제정세 변화는 양국 관계를 호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발생한 세 사건은 미국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첫째 사건은 「이란 혁명」이다. 이란은 전통적으로 중동에서 구소련의 팽창을 제어하는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샤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는 이란 혁명으로 분출되어 반미, 반소 이슬람 정권이 탄생되었다.
이란 혁명은 미국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샤 정권으로 하여금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도록 한 미국의 노력이 샤 정권으로 하여금 반미 성향을 갖게 하였다. 또한 독재정권에 대한 미국의 맹목적 지지는 국민 대다수의 반미 감정을 초래하였다.
둘째는 니카라과 혁명이었다. 남미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뒷마당」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미국이 지원한 소모사 정권은 국민들의 반발로 붕괴되었다.
셋째 「아프가니스탄 사태」이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친소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친소 정권이 붕괴되자 소련은 직접 무력 도발을 감행했다.
카터 집권기 미국의 군사전략은 「1과 1/2 전쟁」이었다. 유럽, 중동, 극동, 남미 등 전세계에 걸쳐 있는 미국의 전략지역 중 만약 전략지역 두 곳에서 분쟁이 발생하거나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면, 미국의 해외군사력은 전략적 우선 지역에 집중하고 다른 지역은 현상 유지에 그치는 전략이었다. 전략적 중요성은 유럽, 중동, 극동 순이었다.
1979년 미국에게 있어 전략적 우선 지역은 중동이었다. 아프가니스탄도 이란의 유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는 점에서 중동문제의 한 부분이었다. 중동지역이 「1」이었다면 동아시아는 「1/2」이었다. 중동에 미국의 전력을 집중하려면 동아시아의 전략적 균형이 필요했다. 동아시아의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안정과 강한 한국군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변화로 인해 미국 입장에서 박정희 정권과 타협할 필요가 커졌다. 미국으로서는 유신정권의 통치방식이 불만족스러웠지만 유신정권은 미국의 세계 정책을 수행하는데 필요했다.
그러나 유신정권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이는 유신정권에 대한 인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카터 행정부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미국은 한국이 정상회담 이전에 실질적인 민주화 조치를 취하도록 다양한 압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 미국의 요구 사항은 긴급조치 9호 해제, 정치범 석방, 재야 세력에 대한 관용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국무부의 훈령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한 한국 집권 핵심부의 의사를 타진했다. 한국 집권부는 「긴급조치 9호 유지, 김대중 석방불가」의사를 강력하게 밝혔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79년 4월3일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전문(Seoul 4902)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정상회담은 인권문제에 대한 민국의 영향력을 조금 향상시킬 것이다. 한국측은 정상회담을 원하지만 미국의 요구를 전부 수용할 정도로 원하지는 않는다. 만약 인권문제를 한미정상회담 전에 거론한다면 중국, 중동국가들과 미국의 관계에 인권문제가 적용되지 않았던 사실로 (한국측이) 매우 분개할 것이다. 현재 미국에게 있어 최선은 인권문제를 정상회담에서 직접 거론하는 것이다. 공개적 비난이나 상징적 제재를 이용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만 발생할 것이다.
본인은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정식으로 요구하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긴급조치가 해제된다 하더라도 반공법 같은 대체 법안으로 강권통치는 계속될 것이다. 미국에게 가능한 선택은 정치범 석방이다.
(미대사)권고:본인은 인권문제에 대한 공개적, 공식적 논의는 삼가라고 권고한다. 정상회담 개최의 대가로 인권문제에서 진전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다른 경로를 통하여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 「가시적 조치가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좋게 할 것이며, 이것이 중요하다」는 미국의 견해를 전달하기를 원한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정책권고가 수용되어 미국은 우회 경로를 통하여 「정치범 석방, 재야 세력에 대한 관용」을 요구하였다. 유신정권은 미국의 압력을 일정 정도 수용하였다. 긴급조치 위반자들이 석방되고 학생시위에 대하여 관대한 처분이 내려졌다.
「자주국방」과 「미중관계정상화」
1979년 6월 한미 정상회담은 변화된 국제환경과 한국내의 변화를 반영하였다. 비록 한국내 변화가 미국의 기대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정상회담이 한국의 인권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기회로 자위하여 미국은 한미정상회담에 응했다. 유신정권은 한미정상회담을 통하여 미국이 유신정권을 지지한다고 알리고 싶어했다. 한미정상회담은 양국관계의 강화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했다.
정상회담에서 대한 안보공약과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이 재확인되었다. 미국은 정상회담을 통하여 정치자유화를 위한 압력을 행사했다. 국제사면 위원회와 한국교회협의회에서 입수한 정치범 명단을 전달하며 정치범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고,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경제성장에 걸맞은 정치발전이 아루어지길 바란다」는 문구로 인권 문제에 대한 미국의 견해를 표현했다.
6월 정상회담에서 10.26사건 발생 이전까지 미국 대한정책의 핵심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한국의 정치발전이었다. 전자에 있어서 양국의 이해는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양국간 이견은 한국의 「자주국방」과 미국의 「미중관계정상화」에 집중되었다. 한국은 중국 카드에 대하여 회의적 반응을 보였고, 미국은 한국의 의심을 완화시키기 위해 미중관계의 진전 내용을 한국에 알렸다. 반면 유신정권은 코리아 게이트, 주한미군 철군 등에 관한 한미 갈등이 완화됨에 따라 「자주국방」을 위한 노력을 그만두었다.
「한국의 정치발전」에 있어서 양국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미대사는 정상회담 개최 이전 이미 「눈가림용 유화책」의 가능성을 예견하였지만 미대사 자신도 정상회담 이후 전개된 유신정권의 유화책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
유신정권의 변화된 모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카터 대통령 방안 반대 시위 주동자와 미대사관 시위 주동자들이 석방되었다. 제헌절 특사로 긴급조치 위반자 86명이 석방되었다. 또한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던 이태영 여사의 출국이 허락되었다. 제적된 학생들에 대한 복교 결정이 내려지고 광복절 특사로 긴급조치 위반자 53명이 석방되었다.
8월 이후 전개된 한국 상황에 대하여 미국은 우려를 표명하며 국내 통치 방법에 대한 유신정권의 정책 변화를 촉구하였다. 8월11일 YH 사건,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 정지 가처분 결정, 김영삼 제명으로 이어지는 파행 정국은 유신정권의 민주화 요구 수용이라는 미국의 기대와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미국무는 공개적인 성명서 발표, 주한 미대사와 한국측 고위 인사의 연쇄접촉, 주미 한국대사와 홀부르크 차관보 면담을 통하여 미국의 우려를 공개적, 비공개적으로 전달했디.
모호한 언급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미국은 구체적 사건을 거명하며 유신정권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9월 11일 김용식 대사-홀부르크 차관보 면담에서 홀부르크는 김영삼 총재 직무 정지와 관련된 신민당 내분에 개입하지 말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또한 9월27일 박도진 장관-홀부르크 차관보 면담에서 홀부르크는 한국의 차관 신청(필자 주:당시 한국은 삼량진 곡물저장창고 건설, 인천항 개발을 위하여 아시아개발은행에 차관을 신청한 상태였다)에 미국이 반대하거나 기권하여 한국에게 불리하게 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이런 미국의 노력도 유신정권의 강경책을 변경시키지 못했다. 10월1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국무장관에게 발신한 전문(Seoul 15028)을 통하여 「10월8일쯤 김영삼 의원이 제명될 것이다」라고 보고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김영삼 제명이 한미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글라이스틴 대사의 예상과 달리 미국의 영향력이 행사되기도 전인 10월4일 김영삼 의원이 제명되었다.
미국은 김영삼 제명에 대한 「깊은 유감」을 표현하는 항의 성명과 함께 미대사를 소환하였다. 본국으로 소환된 미대사는 국무부 한국 관련자, 한국문제에 관심을 지닌 의회 지도자들을 만나 대한정책을 논의하였다.
또한 미국무부는 간접적 방법으로 유신정권을 압박하였다. 10월 9일 한국이 미국 방위 영역 밖에 있다고 밝힌 주일 미대사 맨스필드의 기자회견은, 비록 국무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 하더라도 안보공약을 건드렸다는 점에서 한국에 대한 경고로 해석되었다.
「유신정권은 상황을 극복할 여력이 있다」
미대사가 한국으로 귀환한 10월16일 우연의 일치로 부마항쟁이 발행하였다. 10월16일부터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17일 오후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미대사는 10월17일에서 20일 본국에 보고한 전문에서 부마항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부마항쟁의 발생 원인은 정치적 좌절, 경제적 좌절,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민의 염증, 정부의 강경책 등이다. 특히 김영삼 제명, 신민당 의원의 의원직 집단 사퇴가 직접적 원인인 듯하다.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이유는 시민들이 호응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권위적 통제로 많은 사람들이 통제에 반대하는 시위에 동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아직 유신정권은 붕괴 직전에 몰리지는 않았다. 유신정권은 현 상황을 충분히 극복해 나갈 여력을 가지고 있다.
10월18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우려를 전달하였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강경책에 대한 회의를 표현한 듯하다. 이런 반응에 기반하여 글라이스틴 대사는 긍정적 변화의 가능성을 예상했다.
또한 10월21일 유정희 회장 태완선을 만나 유화 분위기를 만들라고 권고하고 10월23일 박준규 공화당 총재 권한대행을 만나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0월17일 귀임 이후 집권 핵심부와 면담을 통하여 강경책에 대한 정부내 우려가 확산되고 있음을 본국에 보고했다.
10.26이전 미국은 유신체제의 급작스런 붕괴를 예상하지 않았다. 국민들의 불만이 있었지만 급격한 행동으로 분출될 정도는 아니었다. 유신정권에 대한 불만 세력의 집단행동 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물리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또한 집권세력 내부의 의견차이를 감지하고 있었지만 집권세력 내부 갈등이 표출되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건강에 이상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절대 권력자의 급작스런 이상을 예상하기도 않았다. 미국은 유신정권을 인정한 상태에서 유신정권으로 하여금 정치자유화 조치를 취하여 국내 반발을 약화시키고 국제사회에서 독재국가로 지탄받지 않기를 원했다.
「권력 이양」
그러나 10.26 이전 미국은 박정희 제거를 포함한 다양한 선택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는 「권력이양」에 대한 언급으로 간접 입증된다. 1979년 5월25일 미대사가 본국에 보낸 「정상회담 기초 자료1」이란 제목의 전문(Seoul 07654)은 권력이양에 관한 한국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비록 경제문제가 한국의 최대 관심사이지만, 정치적 걱정거리는 바로 「권력이양」이다.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인사를 포함한 사려 깊은 한국인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후계자의 부상또는 최소한 후계자 수업을 허용해야 한다고 느낀다. 만약 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우려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통령은 이런 우려를 만족시킬 만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또한 9월26일 김재규와 만난 자리에서 미대사는 「권력 이양」을 언급했다. 이 만남에 대한 보고서는 비밀 분류에서 해제되지 않아 김재규-글라이스틴 면담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1979년 11월 10.26사건에 대한 미국 개입설이 증폭되고 김재규가 재판 과정에서 미국 개입을 주장할 것에 대비하여 미대사는 11월 9일, 김재규-미대사 면담(9월26일)에 대한 설명 전문(Seoul 017592)을 작성했다. 이 전문에서 글라이스틴은 자신을 「미대사 또는 그」라고 표현할 정도로 객관적으로 9월26일 면담을 묘사하려 했다.
…면담이 거의 끝날 무렵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한국 국내 정치상황에 대한 미대사의 견해를 물었다… 정치 문제에 대하여 미대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정치상황을 보며 본인은 두가지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첫째, 국가를 심하게 분열시키고 정치적 불안정을 유발할 수 있는 정치의 분극화 현상이다. 최근 신민당과 관련된 국회내 정치혼란은 이런 경향을 보여준다.
한국인들을 우려하게 하는 두 번째 문제는 「평화적 권력이양」이다. 현상황에서 본인은 유신정권 또는 정치권이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한다. 본인은 한국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글라이스틴과 김재규와의 만남
10.26사건 이전 전문에서 흥미로운 점은 김재규의 반응이다. 카터 대통령의 방한 전 1979년 6월 글라이스틴 대사는 김재규를 최소한 세 번(1979년 6월20일 이전 어느 날,6월20일, 6월21일에서 26일 사이) 만났다. 이 자리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유신정권의 강경책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전달하여 정상회담 전후 한국의 온건한 태도를 주문하였다.
1979년 6월20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김재규 면담에 관한 전문(Seoul 09082)에서 「김재규는 본인이 말한 것들을 명확히 이해했다(이하 약 10행 정도 삭제)」고 보고했다.
11월19일 작성된, 9월26일 면담에 대한 설명 전문(Seoul 017592)은 「이행기」에 관한 「선문답」 같은 대화를 기록한다. 이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글라이스틴:한국은 국내적으로 매우 강하며 한국인들은 공통의 이해를 가진다. 그러나 이란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본인은 한국의 장래에 대하여 낙관적이다.
김재규:귀하의 판단은 정확합니다. 「이행기」또는 전쟁과 같은 국내 위기시 한국인의 가치는 불변할 겁니다. 한국의 발전과 안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기초는 정부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합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전문에서 6월 한미정상회담 이후 자신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본인과 딕 슈나이더(필자 주:당시 국무부 인권국 소속 부차관보, 1979년 7월24일부터 31일까지 한국의 집권 핵심부, 여야 정치인, 재야 인사와 접촉)는 「박정희 정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신호를 김재규를 비롯한 한국 집권측 인사에게 보내지 않았다... 본인은 박정희 대통령의 차기 임기 문제와 같은 다루기 힘든 문제를 건드릴 만큼 부주의하지는 않았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9월26일 면담 결과보고 전문(미공개)에서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한 어떤 특별한 언급도 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다만 자신이 아래와 같이 김재규를 묘사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한국 경제 상황과 정치 상황에 대한 본인의 의견에 평소와 다른 관심을 보인 김재규는, 기초 통제를 유지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는 반면 박정권과 경기침체에 대한 국민의 불만 누적에 대하여 우려하는 인상이었다. 명확히 그는 신민당의 분열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다양한 반대세력은(유신정권)과 대결을 계속하리라 가정하고 있었다. 비록 김재규는 본인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했지만, 그가 한국 안보당국(중앙정보부)의 자제를 선호하는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
제2부.최규하대통령 권한대행과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
10.26사건
10월26일 오후 7시35분께 궁정둥에서 발생한 총격은 한국 현대사의 극적 순간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으리라고 믿었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국무부로 발신한 「10월27일 오후 2시30분 한국 상황보고」란 제목의 전문(Seoul 16353)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야당 지도자들은 집권당과 협력할 의사를 비쳤고, 김영삼은 「이런 종류의 사건을 예견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며 유감을 표명했다...(중략)...한국 방송매체와 여론은 미국의 반응과 지지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다수 한국인들은 방송매체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우리가 제공하리라는 희망에서 (우리와) 접촉하려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위한)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비공식적으로 촉구했다. 일부는 미국이 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다는 외신을 반복하기도 하였다. 이런 의심은 기묘한 상황에 의하여 강화된다....
그러나 공개된 전문은 미국 개입에 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다만 공개된 전문의 행간, 공개된 전문의 전송 시간에서 몇 가지 단서만 발견될 뿐이다.
공개된 전문을 종합하면 미대사관측에 대통령 유고 상황을 전달한 한국측 인사는 유병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필자 주:당시 위컴 장군의 부재로 사령관 대행)이었다. 10월27일 오후 2시18분 글라이스틴 대사가 발신한 전문(Seoul 16331, 수신처:국무장관, 국방부,백악관,중앙정보부)에 따르면 유병현 장군은 「이 사건은 군사 쿠데타가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군은 상황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다」고 전했다.
미국은 사태 확인 이후, 기민한 대응을 하였다. 10월27일 아침 9시27분 미대사관에 한 전문이 도착했다. 이 전문은 동아시아국 설리반 부차관보가 기안하였고 발신자는 크리스토퍼 차관이었다. 전문의 수신처는, 주한미대사관, 주일 미대사관, 주중 미대사관, 주필리핀 미대사관, 그리고 마닐라에 머물고 있는 홀부르크 차관보였다. 이 전문의 제목은 「한국에서의 상황전개에 대한 국무부 성명」이었다.
우리는 한국에서의 상황전개에 대하여 조언을 받았다. 미국은 이 문제를 한국을 위한 국내 문제로 간주하며, 자제를 촉구한다. 미국정부는 한국의 상황을 이용하려는 외부 기도에 대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대응할 것임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이 성명서는 한국내 정치세력에 대한 미국의 입장인 동시에 북한에 대한 경고였다. 미국은 대북한 경고를 중국과 구소련을 통하여 전달했다. 또한 주한미군에 데프콘.3 발동, 위컴 한미연합사 사령관 귀임, 동지나해에 있던 키티호크 항공모함의 한국 방향 항진, 공중 경보 통제기 2대 발진 등 실제적 무력 시위로 북한의 모험을 차단했다.
이번 조치와 동시에 국무부는 미대사를 통하여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국무부는 10월 27일 오후 6시까지 정확한 사건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0월27일 주말레이시아 대사관(필자 주:당시 홀부르크 차관보는 동남아시아 각국을 방문하고 있있었다)에 보낸 크리스토퍼 차관의 전문은 「워싱턴 시간으로 27일 오전 5시까지 서울에 있는 미대사관의 보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관려된 상황은 아직 불분명하다」고 한국 상황을 설명한다. 10월28일 미대사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Seoul 16370)는 미국의 상황 파악 수준을 보여준다.
요약:우리는 10.26 사건이 계획된 군사 쿠데타인지, 정권 내부의 인사에 의한 지도자의 제한된 제거인지, 아니면 단순히 기묘한 사건인지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는 불확실한 상황을 초래했다. 주요 행위자들은 권위적 정치구조를 지향하는 정권내 세력이다...
본인이 귀임한 이래, 본인은 한국 집권세력 내부에서 강경 노선의 방향에 대한 우려가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박대통령과 18일 가진 대화에서, 심지어 박대통령 자신도 강경노선 결정이 현명했는지 여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박대통령의 사망과 관련된 불가사의와 함께, 청와대 내에서 존재하던 불유쾌한 사건(강온 대립)에 대한 인식으로 많은 사람들은 박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가정하게 되었다.... 박대통령 주변 소수인사, 아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이끄는 인사들이, 정부 구조는 건드리기 않으면서 대통령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을 가능성이 좀더 그럴 듯하다... 김재규는 박대통령의 강경책이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한다고 느낀 사람들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이런 제한된 설명도 위험 부담을 고려한다면 설득력이 없다....(이하 생략)
사건 발생을 처음 접했을 때,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사건을 군사 쿠데타로 판단했었다, 10월28일 오후에도 글라이스틴 대사는 상황 파악을 정확히 하지 못했다. 미대사관이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게 된 시점은 대략 29일이었다.
「최규하 정부를 인정하자」
글라이스틴 대사는 10.26 사건으로 불확실한 상황이 도래했다고 평가했다. 정부구조의 두뇌, 신경에 해당되던 박정희의 유고로 정부내 여러 세력을 통제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곧 혼란으로 이어지리라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북한의 위협으로 인해 내부결속이 강화돼 있으며 강력한 관료제 또한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요 행위자를 여전히 정부내 세력 특히 군부와 최규하 행정부로 파악했다. 단기간 내에 김대중, 김영삼이 참여하는 직접 선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미대사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군부 집권에 대하여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차기 후계자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규하를 중심으로 한 행정부를, 약속한 정치적 자유화를 준수하는 한 인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보고는 미국의 대한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상황을 파악하면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주요 집권세력을 만나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글라이시틴 대사는 10월27일 오전 8시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만났다. 이 면담의 결과보고 전문(Seoul 16336)은 미대사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본인은 공관에 있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아침 8시에 방문했다. 본인은, 몇 시간 전에 방송된 박정희 대통령은 유고에 대한 애도를 표현했다.... 본인은, 자정쯤 불명확한 사건 소식을 접했으며, 사건의 세부 사항은 새벽 2시경 알게 되었다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알렸다. 또한 지금까지 (미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하여 취한 조치와 우리(미대사관)가 이런 조치들을 알게 된 경위을 알렸다.
이 자리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군부의 중요성, 군부내 단합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전후 행간을 읽으면) 국민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하여 정치적 자유화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사건을 지난 몇달 동안 한국을 괴롭힌 정치적 상처를 치유하는 기회로 삼으라고 권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규하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박대통령의 유고로 인한 슬픔과 피곤함과 별도로, 최규하 권한대행은 자신에게 부여된 부담에 명확할 정도로 우려했다.
또한 미국은 위컴 장군을 통하여 미국의 입장을 군부에 전달하였다. 미국의 입장은 「군부 집권 반대」였다. 11월1일 크리스토퍼 차관이 미대사관에 보낸 전문(State 285736)은 다음과 같이 군부를 설명했다.
한국은 깊은 슬픔과 충격에 빠져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육군이 단기적으로 집권 유혹을 피하고 민간 내각을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아직 암살에 관한 불분명한 부분이 있지만, 정부는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며 사태의 추이에 따라 사건을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미국은 한국내 집권세력을 다루는 데 매우 조심했다. 한국의 집권세력이 미국의 요구를 고분고분하게 수용하던 1960년대 초와 판이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지나친 압력이 반미로 연결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특히 군부를 대하는 데 있어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미국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지시한다」혹은 「가르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하였다.
10.26을 변화의 기회로
미국은 10.26 사건을 한국의 정치자유화를 이루는 기회로 삼으려 하였다. 물론 이 목표는 한국인들의 변화 욕구,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집권세력과 접촉하면서 집권세력 또한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한다고 미국은 파악했다.
그러나 민주화 정도에 대한 주요 세력간 기대 차이로 미국은 곤혹스러워했다. 만약 최규하 행정부가 민주화 요구를 못한다면 야당과 재야는 거리의 정치로 나가고 결국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여 퇴행적 결과가 생기며, 만약 최규하 행정부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지나치게 수용하면 군부가 개입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양극단의 선택을 피하도록 최규하 행정부에서 정치 자유화 조치를 취하며 정치일정을 밝혀 국민들의 의심을 줄이며, 야당과 재야의 인내를 촉구하며, 민주화 요구에 대한 군부의 허용을 촉구했다. 미국은 한국의 주요 세력간 의사전달의 통로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11월2일 조문사절로 방한한 밴스 국무장관은, 박정희 유고에 대한 조의 전달, 대한 안보 공약의 재확인, 한국에서 민주적 정치발전을 위한 미국의 영향력 행사 등 세 가지 임무를 받았다.
그는 11월3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났다. 이 면담에서 10.26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의 골격이 보였다. 미국측 참석자(필자 주:밴스 장관, 카터 대통령 차남 칩 카터, 글라이스틴 대사, 홀부르크 차관보, 니콜라스 플랫 국가안보회의 참모) 대표 밴스 장관은 10.26 사건 이후 미국의 대응을 설명했고, 미국의 대한 안보-경제공약을 재확인했다.
국내 문제에 대해서는, 야당.재야 세력과 미대사는 실무진이 이미 접촉중이며, 야당.재야의 자재를 권고하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최규하에게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 반드시 다양한 정파와 사전 협의를 하라고 권고하였으며, 긴급조치 9호 해제, 김영삼 의원 제명 처분의 철회, 김대중 가택연급 해제,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과 YH 사건 관련자에 대한 기소 중지, 국회 정상화 등을 요구했다.
「한국은 미국의 조언을 듣고 있다」
11월7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났다. 이 면담에 대한 보고 전문(Seoul 17091)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본인은 솔직한 토론과 「삭제된 목적」을 위한 새로운 경로를 구축하기 위하여 11월7일 비공개적으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박동진 외무장관을 만났다. 밴스 장관의 언급, 특히 공개적 비판을 피하며 정치 행동의 완화를 권하는 미국의 의지를 반복한 후, 본인은 한국 정부가 균형자의 역할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접촉한 모든 사람들은 무질서를 피하려 하는 동시에 일정 정도의 정치자유화를 원한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가 믿을 만한 방식으로 정부의 의도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행정부는 본인을, 한국군은 미군을 경유한 경로를 원한다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분명히 했다.
이 면담을 통하여 글라이스틴 대사는 향후 거취에 대한 최규하의 의중을 물었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질문은 완곡하게 「차기 정권이 정치개혁 작업을 하리라고 발표하실 의향이 있는지요?」였다. (삭제되었기 때문에 명확하는지 않지만 행간을 읽으면) 최규하는 유신헌법이 정한 90일 이내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최규하의 의중을 확인한 글라이스틴은 국민들의 의심을 줄이기 위하여 정치일정을 밝힐 것을 요구하였다. (삭제되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최규하는 이에 관한 미국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 면담에 대한 보고서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규하가 헌법 개정 작업을 주재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11월15일 글라이스틴 대사가 본국에 보낸 전문(Seoul 17417)은 10.26이후 미국의 요구와 최규하 행정부의 대응을 검토한다.
…우리는 정치권은 물론 행정부, 군부와 접촉중이다. 행정부와 군부에게는(정치자유화를 향하여) 계속 이동하여야 하며, 정치권에게는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거나 운을 믿고 지나치게 행동하지 말 것을 조언하고 있다. 성명서 발표 이전 야당과 협의하라는 미국의 노력은 실패했다.
(필자 주:11월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헌법 개정과 정치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함) 또한 한국 정부가 우리의 조언을 택하지 않는 더 많은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 반면 한국 집권세력은 서울의 분위기를 자유롭게 하는 조치를 매일 취하고 있으며 미국의 조언을 듣고 있다.
예를 들면 오늘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금된 인사들에 대한 재검토와 학문 권리를 박탈당한 학생들의 복학을 고려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최규하 취임식과 미국 입장
글라이스틴 대사는 11월21일 국무장관에게 발신한 전문(Seoul 17784)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12월 보선에서 당선되리라고 예상했다. 이미 글라이스틴 대사와 폴 쿤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열리는 선거에 참여하여 승리할 수 있다고 예상되던 김종필(11월16일)과 정일권(11월8일)을 만나 이들이 12월 대선에 참여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들을 만나서 개헌일정에 관한 공화당의 의견을 들었다. 또한 군부와 접촉한 결과 군부가 최규하 행정부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영삼이 헌법개정 이전에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통일 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성격상 당선되기 힘들다고 가정했다. 이런 사실인식과 가정에 기반하여 미국은 최규하 행정부를 인정하였다.
최규하 행정부에 대한 미국의 인정은 제한적이었다. 11월1일 크리스토퍼 차관이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발신한 전문(State 285736)에 의하면 국무부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과도정부 수반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이런 국무부의 입장은 박동진 외무장관(11월28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11월29일)을 만난 글라이스틴 대사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최권한대행과의 면담에 관한 보고 전문(Seoul 18153)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최규하 행정부가 유신의 단순 연장이라는 정계.지식인들의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노력해야 한다고 촉구하기 위하여, 특히 최권한대행의 과도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며, 과도 임기의 연장은 정당들의 합의에 따라 가능하다는 것을 공식적.즉각적으로 밝히기를 촉구하고, 비록 속도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협력 여하에 따라 결정되지만, 긴급조치 9호 해제, 정치범 석방, 검열 완화, 그리고 계엄해제 의사를 국민들에게 공표하길 촉구하며, 이 세가지 조치 중 정치범석방, 긴급조치 9호 해제에 관한 미국의 관심을 표면하기 위하여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박동진 외무장관을 사적으로 만났다(최규하 대통령 답변 생략)
본인은 이 면담이 시기 적절했다고 평가하며 우리는 군부와 접촉하면서 미국의 입장을 강화시킬 것이다.
이 면담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규하가 대통령직을 약 1년 정도만 수행하기를 바라고 있음을 외교적 용어로 표현하였다. 또한 성명서 발표전 야당.재야와 협의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유감을 전달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권한 대행이 미국의 의사를 명확히 이해한듯하다고 보고했다.
박동진 외무장관과 글라이스틴 대사 면담(보고 전문:Seoul 18075)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최규하 행정부가 「과도정부」임을 이유로 최규하대통령 취임식 때 고위급 사절이 파견되지 않을 예정임을 통고하였다. 박장관은, 미국이 최규하 행정부를 지지한다는 증거로 고위급 파견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미 일본과 외교적 협의를 거쳐 일본 또한 고위급 사절을 파견하지 않을 것임을 통고했다.
미국의 두가지 정책목표
최규하 행정부에 대하여 미국은 두가지 정책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최규하 정부를 강화한다. 둘째, 최규하 행정부로 하여금 정치일정을 명확히 밝히도록 한다.
첫째 정책목표를 위하여 미국은 군부와 접촉하였다. 군부 접촉은 위컴 경로를 통하여 주로 이루어졌다. 군부가 최규하 행정부의 정치자유화 일정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미국은 한국 군부를 지원할 것임을 명확히 하였다.
이례적으로 11월30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만났다. 이 면담은 11월27일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김대중에 대한 명확한 반대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12월3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면담에 대한 보고 전문(Seoul 18323)을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보고 전문의 일부는 군에 대한 미국의 기본 정책을 보여준다.
본인은 11월30일 위컴 장군의 관저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처음으로 만나 대화했다. 위컴 장군은 한국군이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하여 경의를 표했고, 군의 주요 임무는 북한으로부터 (남한을) 방어하는 것이지, 민간인에게 맡기는 편이 좋은 일을 군이 대신 맡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정승화는 동의하는 듯했다. 몇 가지 질문에 대하여 정승화는 「소수 불평분자들의 행동(필자 주:명동성당 위장 결혼사건을 지칭)」에도 불구하고 계엄상태가 만족스럽게 유지되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는 「99%의 한국인들이 공공질서가 유지되지를 원한다」고 했다.
「정치 일정을 발표하라-」
군에 대한 미국의 기본 정책은 「정치개입 불가」였다. 미국무부는 10월 말 군이 쿠데타를 통한 조기 집권 유혹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했으나 상황이 악화되어 군이 개입할 가능성에 대하여 우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정치자유화에 대한 군의 허용을 촉구하였다.
미대사관은 신민당.재야 세력과 접촉하여 정치행동 자제를 촉구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미대사관 직원은 다수 재야 인사와 접촉하여 미국의 의견을 전달했다. 이 접촉을 통하여 「재야의 활동에 자동적인 미국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는 공식 입장이 전달되었다.
또한 미대사관은 신민당 중진들과 접촉하여 온건 노선을 주문하였다. 10.26 사건이후 신민당은 「90일내 개헌, 새로운 헌법 아래서 대선」을 주장했었다. 12월11일 송원영, 이기택, 박한상, 김수한 등 신민당 중진과 만난 글라이스틴 대사는 정치자유화의 현실적 정도를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였다. 네 명의 중진은 미국의 의중을 받아들였다.
미국이 접촉한 정치세력 중 윤보선 중심 세력은 미국의 협력 요구에 반대했다. 11월20일 글라이스틴 대사와 만난 윤보선은 한국 군부의 반응을 무시하는 반응으로 일관했다. 윤보선이 중심이 된 11월24일 YMCA 위장결혼 사건에 대하여 미국은 부정적 견해를 취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사건으로 군부가 긴급조치 9호 해제 약속을 취소하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하여금 정치일정을 명확히 하라는 압력을 강화했다.
미국은 야당.재야 세력 접촉에 있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미국의 일차 목적은 군부를 자극하지 않도록 야당.재야의 자제를 촉구하는 것이었지만 야당.재야의 반미 감정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
12월 말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최악의 경우 국가질서 보존을 명분으로 한 군사 쿠데타의 조짐은 보이지 않으며, 정치갈등이 완화되었다고 한국 상황을 분석했다. 아직 정치자유화의 속도, 방식, 정도에 대한 이견이 있지만 최규하 행정부는 양극단을 피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또한 한국 정치의 윤곽이 잡힘에 따라 미국의 역할이 좀 더 명확해 질 수 있게 되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둘째 미국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경치일정을 명확하게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11월29일), 박동진 외무장관(11월28일)과 연쇄 접촉한 자리에서 미대사는 대통령 취임식 때 일정 발표를 요구하였다.
정치일정 발표에 대한 미국의 압력은 군부에도 가해졌다. 11월30일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만난 글라이스틴 대사는 정치일정 발표가 야당.재야세력의 의심을 줄일수 있다며 한국 정부는 정치일정을 명확히 발표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미국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정승화는 이에 대하여 명확히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최규하 행정부는 일정발표를 미뤘다.
11월에서 12월 초 사이 글라이스틴 대사는 낙관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군부의 행동에 대해 우려는 했지만 한국이 정상궤도에 놓여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최규하 행정부, 군부, 야당.재야는 미국의 영향력을 받아들이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도 군부내 분열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이런 예상에 기반하여 글라이스틴 대사는 12월11일에도 신민당 중진을 만나 자제를 당부했다. 그러나 미국의 노력이나 예상과는 정반대의 일이 군부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제3부.신군부와 미국
12.12를 예상못한 미국
최소한 미국무부와 주한 미대사관에게 있어 12.12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또 예상하였다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 사건에 관한 전문 중 최초 전문(State 320837, 한국 수신 시간:12월 13일 오전 8시 51분)은 미대사관이 이 사건에서 소외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울에서 초기 단계의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고 후퇴선이 봉쇄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상황이 전형적 쿠데타로 진전되지 않고 몇 시간 내에 해결될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
서울 시간으로 12월12일 저녁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황영시 1군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육군 장교들이 정승화 육참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육본 근처에서 총이 몇 발 발사되었으나 사망자는 없다. 노재현 합참의장, 유병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위컴 유엔군 사령관, 미대사와 함께 조금 전까지 연합사 상황실(용산 벙커)에 있었다.
전두환은 노장관을 불러내려고 전화했었으나 노장관은 군부의 일질이 될 가능성을 염려하여 거부했다. 어느 정도 행동이 자유로운 노장군과 군 수뇌부는 두 시간 동안 (서울 시간으로 13일 1시까지) 주요 지휘관과 부대의 충성을 확인하려 했다. 군 수뇌부는 대부분 부대와 접촉 중이며 충성을 확보했다.
그들은 충성을 약속한 지휘관들에게 기존 명령 체계만을 따르며 현 위치에 머물 것을 지시했다. 이 시간 쿠데타 군은 단지 두 개 사단만 지휘하고 있다. 전두환측에 가담했다고 알려졌던 수도경비사령부도 쿠데타군의 지휘 아래 있지 않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보안사령부로 귀대했고, 중개자 역할을 하는 국방부 차관을 통하여 협상이 진행중이다. 워싱턴 시간으로 정오(한국시간 13일 1시) 노장관은 유리한 장소에서 협상을 진행하기 위하여 연합사 상황실을 떠나 국방부로 가기로 결정했다....
미대사는 최규하 대통령과 계속 접촉하고 있었고, 중앙정부부장을 포함한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메시지를 쿠데타 군에게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군내 충돌을 심각하게 보고 있으며, 미국의 여론, 언론, 의회는 군부의 권력찬탈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고, 10.26 사태 당시 미국의 반응과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미대사는 강조하고 있다.
미대사와 위컴 사령관은 고전적 쿠데타를 피하며 현재 상태에서 해결될 가능성을 믿고 있다. 쿠데타 공모자의 수가 이미 줄어들고 있으며, 쿠데타군이 표명한 공식적 요구는 제한적이다.
미대사의 정책권고에 따라, 우리는 현 상황을 규정하는 데 있어 매우 조심하고 있으며, 쿠데타를 암시하지 않고 있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이 문제를 군부 내부의 문제로 해결할 수도 있는 「체면 세우기 방법」에 도움을 준다....
이 전문은 12.12 사태에 대한 미국의 정보 수준과 12.12 사태에 대한 미국의 최소 대응을 보여준다. 미대사는 13일 오전 8시까지 정확한 상황을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이 전문은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사령관이 한국군내 「어떤 형태의」 충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미국이 「현 상태의 변경」을 원하지 않는다면 소극적 정책의 시작이었다.
「사실상의 쿠데타를 겪었다」
미대사의 권고에 따라 국무부는 12.12사태를「한국군 내부 문제」로 공개적으로 규정하고, 「이미 진행된 정치 자유화를 보존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고 하며 미국의 역할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또한 외부세력이 12.12 사태를 이용할 가능성에 대한 경고, 한미관계에 끼칠 부정적 영향에 관한 우려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성명서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2월13일 오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만났다. 이 면담에 관한 보고 전문(Seoul 18808)은 글라이스틴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오늘 아침 본인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최규하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지난 밤 사건에도 불구하고 질서 있는 「정치적 진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본인은 국무부 성명서 사본을 전달하며, 군부의 주요 행위자들(필자 주:전두환 보안사령관, 이희성 중장)에게 이미 사본을 전달했음을 밝혔다. 한국내 정치일정에서의 혼란에 대한 우려와 함께, 지난 밤 발생한 하극상으로 인하여 발생한 군부내 적대감과 북한의 오판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최규하의 사건 설명 삭제).
이 자리에서 미대사는 최규하 행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전달했다. 미대사는 「최규하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지시가 단절되고 신군부에 대한 의존이 심화된 상황을 활용하여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할 의사를 지녔다」고 보고했다.
12월13일 오후 10시 27분 미대사는 12.12 사태에 대하여 그동안 파악한 내용을 국무장관에게 보고 (Seoul 18811)했다.
우리는 「사실상 쿠데타」를 겪었다. 민간정부의 약한 외형은 남아 있지만, 모든 징후로 보아 「젊은 장교」들이 군부 요직을 장악하기 위하여 치밀하게 준비한 듯하다. 박정희 대통령과 가깝고 보안 문제를 담당했던 장교단에서, 보안과 조사 문제를 다루는 중장 전두환이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파악된다.
여러 동기가 작용했다: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에 대한 복수, 군 선배들이 정치 문제를 잘못 다루고 있다는 우려, 정치 문제를 단호하게 처리하지 못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사회불안에 대한 두려움, 오랜 경쟁 관계, 그리고 의심의 여지 없는 권력에 대한 욕망, 군 선배들보다 유능하다는 젊은 장교의 자만심 등이다.
(이름이 삭제된) 한 인사에 의하면, 쿠데타를 계획한 집단은 최소한 10일전부터 거사를 준비했고, 이미 군부내 젊은 장교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이들은 이미 군부내 주요 요직에 배치될 인사들의 명단과 김용휴 국방부 차관을 장관으로 승진시킬 준비를 했다...
미국은 신군부에 영향력 행사 못해
이 전문에 의하면 13일 오후까지 미대사는 신군부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다. 신군부는 반공, 친미, 질서 있는 정치 자유화 추진, 고위직 승진 등을 표명했지만, 미대사는 이들이 추구하는 바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군부의 의도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다음과 같이 신군부의 행동을 평가했다.
신군부는, 이 사건이 미국에 주게 될 영향을 무시했거나 또는 이 사건에 영향이 무의미하다는 냉철한 계산에 따라 한미연합사의 의무를 무시했다. 신군부는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 위험이 초래된다는 사실에 주의하지 않고 행동했다.
이 전문의 행간을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발견된다. 신군부는 12.12 사태 당시 미국의 경고를 무시했다. 특히 글라이스틴 대사가 간접적으로 접촉하려 했던 전두환과 이희성은 미 대사의 경고를 무시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신군부에 대한 미국의 실질적 영향력이 크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긍정적으로 미국의 실질적 영향력은, 한국인들이 군사적-경제적으로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상황이 진정되고 (한국인들이) 대미 의존을 인식하게 될 때, 우리의 영향력을 행사함에 있어 어젯밤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신군부측 장교 중) 이런 사실을 합리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장교들이 있다면 우리는 미국의 우려를 강조할 더 좋은 경로를 발견할 수 있다. 지난 밤 위컴 장군과 본인이 신군부와 구군부 양측에 강력한 경고를 전달했다....
12.12사태에 대하여 글라이스틴 대사는 「사실상 쿠데타(명목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쿠데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국무부는 「초기 단계의 쿠데타」라고 규정하였다. 그 이유는 쿠데타 군이 정부의 완전 전복을 기도하지 않고 민간정부를 온존시키면서 몇 가지 요구 사항을 관철하려 했기 때문이다.
14일 오후부터 글라이스틴 대사는 실질적 쿠데타라는 성격 규정을 철회하면서 『미국은 「12.12는 신군부의 계획된 행동이 아니며, 쿠데타를 기도한 행위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미대사는 이런 책략의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 회의적이지만 이런 미국의 태도가 「사실을 좀 더 잘 파악하기 전」까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한국 군부내 무력분쟁 우려
12.12 사태가 진행될 당시 미국 대한정책의 당면 과제는 「한국군내 무력 분쟁 방지」와 「군부 집권 방지」였다. 미국은 한국군내 무력분쟁을 가장 두려워했다. 이는 미국의 세계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한국군의 전력손실을 의미하고 북한의 도발은 미국의 개입을 초래할 수밖에 없고, 만약 한국에서 전쟁이 발생한다면 중동에 집중됐던 미국의 전력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미국은 신군부와 구군부에서 군사 행동의 자제를 촉구했다.
둘째, 미국은 군부의 집권을 반대했다. 군부의 전면적 집권을 대다수 한국인들이 반대하기 때문에 군부의 집권은 한국내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군부내 집권은 미의회로부터 반발을 유발하여 한미 관계의 악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미국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내부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국제사회에서 독재국가로 취급되지 않는 한국」을 원했다. 이런 미국의 필요가 전환기 대한정책의 근처에 깔려 있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12월 14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을 만났다. 12월15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면담에 관한 결과보고 전문(Seoul 18885)을 보냈다.
12월 14일 전두환과의 면담에서 본인은, 한국군내 분열, 북한의 행동, 자유화, 정치-경제적 안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의 측면에서 12.12 사태에 관한 미국의 우려를 전달했다. 본인은 대한민국이 군사-경제 분야에서 미국에 의존되어 있고, 우리(미국)가 12.12 사태에 대하여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전두환은 본인의 논평을 인정했으며....(삭제)
전두환측에서 본인과 전두환의 면담을 우리(미국)가 전두환의 권력장악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징표로 이용할 위험을 무릅쓰고 본인은 전두환을 만났다. 본인은 다양한 기제로 이런 위험성을 상쇄할 수 있다고 믿으며, 미국의 우려를 「빠르고 퉁명스럽게 그리고 직접」전두환과 그의 집단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에 그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본인은 전두환이 미국의 입장을 명확히 이해했다고 판단한다.
본인은 대화에서 세 가지 점에서 놀랐다...(삭제)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자리에서 「한국내 민간정부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표현으로 군부의 집권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현하였다. 이 자리에서(행간을 읽으면) 전두환은 10.26사건에 미국이 개입되어 있음을 강력히 비난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의 개입을 부정했다.
이미 12월5일 미대사관 직원과 면담한 자리에서 전두환의 강력한 경고(합수부가 행한 고문을 미국이 계속 문제 삼을 경우 한미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를 알고 있던 미대사는 전두환의 이런 태도에 몹시 놀랐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에게 한국이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음을 상기시켰다.
신군부를 다루는 방법
전두환과 글라이스틴 대사 면담에 대한 이후 국무부는 신군부에 대처 방안을 모색했다. 12월16일 밴스 국무 장관은 설리반 부차관보, 홀부르크 차관보, 그레그 국가안보회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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