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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광주의 진상」아직도 은폐되고 있다. 김영택(신동아, 1989. 2)

본문

「광주의 진상」아직도 은폐되고 있다



김영택(동아일보 여성동아부 차장)

광주 민중항쟁이 발발한지 9년째 접어들고 있다. 강산이 한번쯤 변한다는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의혹은 풀리지 않은 채 일부 국민들은 사회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상식 밖의 일]이라며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제5공화국 정권담당자들이 정확한 전모의 공개는 커녕 오히려 일방적으로 왜곡해서 발표해온 데다 일부 허위사실을 계속 조작해왔기 때문이다. 주요지휘관 회의록이나 상황일지가 없어진 것들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제13대 국회가 들어서면서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진상규명을 위해 문서검증·현장확인과 함께 청문회를 열어 관계자들을 소환, 신문하고 있으나 어떤 說의 타당성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주는 데 그쳤을 뿐 명확한 진상규명에는 거의 접근조차 하지 못한 채 숱한 의문만 남겨놓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이 진상규명이 진척되지 않고 있는 것은 정당간의 이해가 얽혀 있는 데다 여기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당시나 지금이나 권력과 밀착되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국민의 군대가 감히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하는 일반론적인 언어를 동원하는 한편 「모른다」 「그런 기억이 없다」는 등의 책임회피와 함께 진상의, 왜곡·은폐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에는 특위위원들이 상황판단을 정확하게 하지 못한 가운데 숲을 보기보다는 나무가지 한 토막만을 가지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데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일부 국민들 사이에 「상식적」인 판단과 「국민의 군대」에 대한 과신이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을 정확하게 인식하려면 상식론의 껍질에서 벗어나야 가능하다. 「상식적인 일」과 「국민의 군대」라는 입장에서 벗어나 저질러진 사건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이기 때문이다.

光州抗爭의 시작은 언제인가

  우선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을 언제부터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이 시점을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광주」를 보는 시각은 엄청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맨먼저 거론되는 것은 제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도착한 1980년 5월17일 밤 11시30분(또는 18일 새벽 2시)부터로 보는 견해다. 이는 민중항쟁 관계자,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부 피해자 쪽이 내세우는 견해로, 공수부대가 두 대학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있을 강경진압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온당치 못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공수부대는 5·17조치를 전후해서 유독 전남대와 조선대에만 투입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주나 서울에도 투입되었고, 유신 때는 고려대나 부산, 마산에도 투입된 바 있었다. 비록 이날 공수부대가 두 대학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다음날 데모가 없었거나 데모진압에 상식적인 진압방법만이 동원 줬다면 광주항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한 5월 18일 오전 9시30분쯤부터로 보는 견해다.
  이는 군부나 정부는 물론 여당 쪽이 계속 주장하고 있는 바다. 학생들이 데모를 했기 때문에 공수부대가 데모진압을 위해 투입된 것이고 진압과정에서 과격한 방법이 동원되어 광주사태가 발생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모를 시작했다 해도 종전처럼 경찰력만 동원했다면 광주사태는 절대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투입되었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데모진압 방법을 사용했다면 결코 광주민중항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5월14, 15, 16일 3일 동안 있었던 데모는 참가자수가 이날보다 훨씬 많았으나 어떤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고 질서정연했었다. 특히 3일전인 5월15일 서울역전에 모인 약10만명의 시위대에 광주에서와 같은 무자비한 진압방법을 사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공수부대가 강경진압을 시작한 18일 오후 4시 정각으로 보는 견해다.
  즉 18일 오후 4시 정각 광주시 북동 180번지 앞 큰길 횡단보도 상에 도열해 있는 공수부대원들에게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데모진압이 아닌 무자비한 살상행위가 자행된 것이고 이로 인해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 광주의 비극은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다. 필자도 이 견해가 옳다고 보는 사람 중의 하나다.

「강경진압」. 명령자는 누구냐

  그렇다면 누가 이 명령을 내리도록 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 현장에서 이같은 명령을 내린 사람은 위관급 장교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개 위관급 장교가 이렇게 엄청난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 명령을 내릴 때 명령에 따른 세부적인 주의사항이 있었을 법한데도 한마디의 군더더기도 없이 「체포하라」는 명령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시위자나 시위가능성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시위와는 전혀 무관한 시민이나 부녀자들에게까지 잔혹한 살상행위를 자행했다. 이 살상행위가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사무실이나 집안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가해진 것을 보면 이는 사전훈련을 통해 구체적으로 지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이같은 명령을 내리게 한 사람은 이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명령을 내리게 한 「높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지금까지 청문회가 네 차례나 열렸으나 이같은 명령을 내리게 한 사람의 규명은 커녕 명령하달 사실조차 추궁되지 않았으니 답답함만 더할 뿐이다. 바로 그 「높은 사람」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뒤에 언급하게 될 발포명령자나 사망자수도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청문회에서 당시 33대대장 권승만 중령(지금은 대령)은 「18일 오후 2시30분 쯤 배속된 지휘관인 정웅 31사단장이 주둔하고 있던 전남대 교정에 와서 「목숨을 걸고 진압하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함으로써 강경진압 명령을 정웅사단장이 내린 것으로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정웅 씨는 뒤에 행한 증언에서 그런 지시를 내린 바 업으며 강경진압 작전은 충정작전훈련계획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지역사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향토사단장이 목숨을 걸고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릴 리는 없을 것이고, 충정작전훈련계획도 적이 아닌 무고한 시민에게 몽둥이로 때리고 대검으로 찌르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멀쩡한 처녀를 대로상에서 옷을 벗기다시피 해놓고 피가 낭자하도록 두들겨 패거나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혼부부를 마구잡이로 개패듯 하라고 적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군부대는 그 소속부대장이 지휘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초기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일단 현지 담당이었던 31사단장에게 배속된 형식을 취했으며 실제 초동진압의 지휘는 31사단장이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공식적인 지휘계통은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제2군사령관-전투병과교육사령관(계엄분소장)-31사단장이다.
  5월15일 제7여단이 31사단에 이미 배속된다는 육군본부의 통고를 받았고, 5월17일 밤 11시30분 전남대와 조선대에 도착한 33대대장과 35대대장으로부터 전화신고를 받음으로써 지휘권을 승계한 정웅 사단장은, 다음날 오후 2시30분 시내 데모상황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림으로써 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분명하다. 여기까지는 군부대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지휘권 또는 명령계통이 확립된 것으로 나타나있다. 그런데 정음사단장의 명령을 받은 33대대와 35대대 병력이 시위를 진압하면서 상상을 초월한 살상 진압을 감행함으로써 계통상의 지휘권과 실질적인 지휘권의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정웅 사단장은 18일 시위진압이 무자비하게 자행되어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다음날 무혈진압을 지시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정씨는 그러나 이같은 무혈진압명령에 아랑곳없이 강경진압이 여전히 계속되자 대대장과 여단장을 소집한 결과 그들이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실에 가있는 것을 알고 자신의 지휘권이 사실상 박탈당한 것으로 간주했다고 말하고 있다. 정씨는 당시 계엄분소장실에는 윤흥정계엄분소장만 있었던 게 아니라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함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윤홍정 계엄분소장이 지역사령관인 자신에게 내려오는 상부의 명령이 『대대장에게나 내리는 명령정도로 극히 세부적이고 사소한 것까지 포

함되어 있었다』고 한 것과 『공수부대의 특질상 직속부대장 이외의 명령에는 잘 따르지 않는 속성이 없지 않다』고 한 증언은 당시 지휘권이 이원화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윤씨는 『육본으로부터 지휘권을 일원화하라는 지시를 받은 바 있는데 이는 이미 이원화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해 당시 공수분대의 위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 정호용특전사령관은 광주 내왕을 한 것은 지원 내보낸 예하부대의 활동이 궁금해서 「친정어머니의 심정」으로 자주 오고 갔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특히 18·19일에 있었던 자신의 예하병력인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내지 살상행위를 「전연 알지 못했다」「보고 받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정 사령관은 18일 오후 4시쯤 서울 동국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는 제 11여단을 찾아가 『광주상황이 복잡해져 이미 내려간 7여단 병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전제하고 이들에게 광주로 내려가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18일 오후 4시」는 공수부대가 강경진압을 막 시작했을 시간으로서 7여단 병력이 몰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권승만 대대장이 『학생들의 저항이 심해 부대원은 물론 나 자신도 돌멩이를 맞았다}고 한 증언도 사실로 믿기 어렵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모두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흩어졌을 때는 어느 누구도 감히 대항하기는 커녕 도망가기에 바빴었다. 「돌을 던지며 대항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發砲명 령자는 누구냐

  또하나 청문회에서 가장 논란이 심했던, 21일의 발포명령은 누가 내렸을까 하는 의문이다.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희성씨는 결코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자위권 행사만을 시달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공수부대가 발포하는 과정에서 결코 자위권이라고 보기에는 납득할 수 없는 무자비한 사격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에 앞서 광주민중항쟁 기간 동안 있었던 발포과정을 대충 훑어볼 필요가 있다. 더우기 공식발포가 시작된 21일의 사정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최초의 발포는 19일 오후 4시 30분, 계림동파출소와 광주고등학교 중간쯤에서 시위군중들이 장갑차를 포위하여 불을 지르려하자 그 안에 있던 군인이 발포함으로써 조대부고생 김영찬군이 부상당한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밤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다가오는 시위대원들에게 발포하여 2명이 숨진 것으로 나타났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발포는 21일 낮 12시58분부터였다.
  20일 밤을 새워 온 시내에서 시위를 벌였던 군중들은 21일 오전 장형태 도지사와의 협상을 제의해놓고 금남로 관광호텔 앞에서 공수부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협상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자 시위군중은 조금씩 밀고 도청광장 쪽으로 전진해 왔다. 공수부대와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그때 학생 중에는 극소수이기는 해도 카빈총으로 무장한 사람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쇠파이프·몽둥이·식칼 등으로 무장한 후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앗아 온 장갑차와 군용트럭을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오전 10시10분 뒷쪽 그러니까 도청광장에 있는 상무관과 도 경찰국 정보과 입구 사이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에게 실탄이 지급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때 사병 1명당 10발씩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군중들은 대치하고 있는 공수부대 쪽으로 한발자국씩 전진하기 시작해 충돌하기 직전이 되었다. 이때 뒷쪽에서 실탄을 받은 3개 소대 가량의 병력이 맨 앞쪽에서 군중과 대치하고 있던 병력과 교대했다.

시민들의 반격상황

10시45분. 張炯泰지사가 탄 경찰헬기와 군용헬기에서는 해산을 종용하는 방송이 계속되고 있었고 학생들은 중앙교회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투쟁과 질서를 다짐하고 있었다. 하늘과 땅에서는 온통 스피커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나왔다. 이러는 사이에 공수부대와 군중들의 대치대열은 금남로 앞 전남일보사(광주일보사)와 YMCA 앞까지 밀려왔다. 가슴을 맞부딪치는 듯하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보고 있었다.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달고 있는 트럭을 비롯한 각종 차량들이 시위대열 앞으로 모이고 있었다. 택시, 버스, 소방차, 군용트럭, 쓰레기차, 장갑차 등 1백여대나 되었다.
  12시58분 일부 과격한 군중이 갑자기 광성관광버스 2대를 몰고 대치대열로 들이닥쳤다. 순식간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재빨리 대열을 풀며 물러섰다. 2대의 관광버스는 흩어진 대치대열 사이를 뚫고 나와 도청광장 분수대를 돌고 있었다. 이때 관광버스에 발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제 발포는 아니었다. 시위군중들도 이에 대항해서 몇 발 발포했으나 곧 멈췄다.
  2대의 버스 중 1대는 분수대를 돌아 다시 군중 쪽으로 되돌아갔지만 1대는 분수대 옆에서 정차하고 말았다. 운전기사가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그때 숨돌릴 틈도 없는 사이에 아세아자동차에서 빼앗아온 앞이 뾰쪽한 장갑차 1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해 들어와 수협 전남지부 앞쪽을 거쳐 학동 쪽으로 빠져나갔다. 이때 2명의 공수부대원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이 장갑차에 치어 1명은 즉사하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
  그러자 시위군중이 뛰어내려와 땅바닥에 버려진 공수부대원의 Ml6소총 2정 중 망가지지 않은 1정을 가져갔다. 이 시위대원에게는 사격이 가해지지 않았다. 아마 바로 앞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동료가 살아 있을 경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1천여명의 공수부대 원들은 난데없이 버스와 장갑차의 기습을 받아 뒤쪽으로 물러났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앞으로 나와 광장을 장악했다.
  1시 정각이었다. 도청옥상의 4개 방향으로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의 리듬이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그 애국가에 때를 맞춘 듯 「따따따, 따따따」 요란한 총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몇 발씩의 총성이 울린 적은 있으나 이렇게 많은 총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은 광주항쟁 발발 후 처음있는 일이었다. 애국가 리듬이 발포명령인 듯 했다.

애국가와 함께 시작된 발포

  이때의 발포는 사전 예고성을 띤 듯 모두가 공중을 향해 발사되었다. 발포가 시작되자 군중들은 다소 동요의 빛을 보이는 듯했으나 오후 1시10분쯤 1천 여명의 군중이 다시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 집결했다.
  이때부터 공수부대는 장갑차 1대씩을 금남로와 노동청 쪽으로 향해 세워 놓는 한편 10여명의 사격수들이 금남로 쪽을 향해 앉아라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잠시 후 5, 6명의 젊은이들이 큰 길 복판으로 뛰어나가 대형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며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고 소리높이 외쳤다. 「따당」하고 20여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앉아쏴 자세를 취하고 있던 사격수들이 5, 6명을 향해 정조준 해서 쏘았던 것이다. 오후 1시 32분이었다.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던 5, 6명이 그대로 쓰러졌다. 머리와 가슴과 다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아스팔트길은 시체와 신음소리와 태극기와 피로 덮여 있었다. 몇 사람이 쏜살같이 시체와 부상자들을 끌어냈다. 그러더니 또다른 5, 6명이 역시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다시 일제 사격이 가해졌다. 그들도 쓰러졌다. 사격수들의 솜씨는 조금도 오차가 없는 듯했다. 그렇게 하기를 대 여섯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는 이들에게 누가 총을 쏘게 했는가? 이것이 자위권 발동이란 말인가.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이 자위권 발동을 시달했다는 시간은 이보다 6시간 30분 후인 오후 7시30분이었다. 그렇다면 자위권 발동 이전에 누군가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이야기다.
  정웅 11여단장은 도청앞 상황은 61대대장 안부응 중령이 현장에서 독단적으로 결정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일개 중령이 그런 명령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상황이었다. 앞으로 달려오는 장갑차나 관광버스에 대한 사격은 자위권 발동으로 간주한다 해도 평화적으로 태극기를 흔들고 시위하는 군중에게 정조준해서 사격한다는 것은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도 자위권 발동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발포 후 공수부대는 도청옥상에 올라가 사람이 눈에 띄기만 하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발포했었다. 도심빌딩 3층에서 머리를 내밀고 구경하고 있던 황효정씨(60)도 이날 총에 맞아 숨졌다.
  자위권을 벗어난 이같은 발포명령을 누가 내렸는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사망자수는 몇 명인가

  그러면 사망자수는 몇 명이나 되는가?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으니 사망자의 수가 밝혀질 리가 없다. 그러나 구천에서 헤매고 있을 광주의 넋을 위해서도 사망자수와 명단은 꼭 밝혀져야 한다.
  당국의 공식발표는 1백94명이고 광주 쪽에서 내세우는 인원은 2천 여명이다. 회생자의 수를 놓고 정부와 광주 쪽은 서로 믿지 않고 있음은 물론이다.
  광주 쪽에서는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는 이유로 첫째, 변두리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붙잡히기 만 하면 시위가담 여부에 관계없이 시민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주남부락에서 있었던 사건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18, 19, 20일 연행되어간 젊은이 1천7백30여명 중에서 군부대나 군점유 시설에서 잔인한 기합으로 숨져간 사람들에 대한 시체처리 결과가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5월19일 오후 6시쯤 전남대 입구와 무등 경기장 사이에 있는 롯데제과점 앞에서 붙잡혔던 강길조씨(46)의 증언을 들어보자.
  {길가에서 붙잡혀 상자가 씌워진 차에 실릴 때는 팔을 뒷쪽으로 묶은 다음 다시 1열로 엮은 채였다. 그 안에서는 공기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듯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차안에 독한 최루탄을 터뜨렸다. 전남대 교정에 도착해보니 그 안에서 3명이 숨져 있었다. 함께 온 다른 차안에서도 2, 3명의 시체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연행과정에서 10여명이 죽은 듯했다.
전남대 교실 안에 무릎을 꿇려놓고 3일 동안 밥은커녕 물도 주지 않았다. 물을 달라면 오줌을 군화에 받아주었다. 그것을 마신 사람도 있다. 부대가 출동 나갔다 들어오면 장교단, 하사관단, 사병 이렇게 세 그룹이 교대로 몽둥이로 두들기고 군화로 차며 지나가 하루면 3백대 이상씩 맞아야 했다. 어떤 사람이 고통에 못이겨 혀를 깨물어 피를 토해내자 「이 새끼 별종이네]하며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패자 팔과 다리가 바르르 떨리며 숨져갔다. 그러자 그들은 얼굴을 씻어내고 번호를 붙여 사진을 찍더니 시체를 끌어내 갔다.
  처음 1백8명의 일행은 나중에 2백80여명으로 늘어났는데 교도소 창고로 옮겨갔을 때는 한방에서 날마다 2, 3명의 시체가 처리되곤 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시체에다 오줌을 싸서 얼굴을 씻은 다음 가슴에다 번호 판을 붙여 사진을 찍고 그대로 끌고 나갔다.
  심지어 연행당한 어떤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발가락이 뒷쪽선 밖으로 나갔다고 해서 대검으로 찍어 버렸다. 그 사람은 피가 계속 쏟아져 발가락이 퉁퉁 부어 오른 채 결국 숨져갔다.
  어떤 상인인 듯한 사람은 날마다 맞고 기합 받는 것을 견디다 못해 정신이상이 생긴 듯 1만원짜리 돈 네 뭉치를 뿌리며 「돈이면 못할 게 있느냐」고 소리치자 군인들이 몰려들어 두들겨 패서 그 자리에서 숨졌다.
  아마 내가 붙잡혀간 그룹에서 숨진 사람은 적어도 30명은 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공수부대가 우리 일행을 상무대로 넘긴 후 교도소 앞뒤에 암매장되었다가 발견된 시체가 8구나 있었기 때문이다』

시체처리는 어떻게 했나

  이상은 극히 부분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당시 공수부대는 시내에서 연행해간 사람을 전남대·조선대·상무대에 수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연행될 당시 어느 누구도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 이미 시내에서 붙잡힐 때 몽둥이와 장작개비·대검·개머리판·군화발로 맞는 바람에 온몸이 피투성이었다.
  이들은 연행되어간 후에도 차분하게 앉아서 쉬거나 치료받은 게 아니라 물도 먹지 못한 채 계속 두들겨 맞고 기합을 받다가 쓰러지면 그대로 질질 끌려갔다고 연행되어 갔다 온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조선대에 주둔하고 있던 어느 공수부대 사병도 증언하고 있다.
  『조선대 체육관 안에는 수백명의 연행자가 팬티만 입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있었습니다. 그중 23∼24세 가량의 젊은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야, 씨 팔놈들아 죽여라」하고 악을 쓰는 것입니다. 온몸은 용으로 된 문신을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여단본부에 근무하는 하사관이 「그래 죽일까」하면서 진압봉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온몸을 때리기 시작하자 그 젊은이는 금방 고통을 못참고 다시 쓰러지는 것이었습니다. 「무릎꿇어」라고 고함을 치자 젊은이는 금방 지시대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하사관이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자  젊은이는 앞으로 쓰러지면서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그 외에 2,3명이 구석에서 거의 숨을 거두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숨져간 사람들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는가에 대해 군 당국이나 정부는 한마디도 밝힌 바 없다. 앞에서 증언한 강씨는 당시 숨진 사람의 시체사진을 지금이라도 공개하라고 요구하면서 당시 자신을 수용했던 장교나 하사관 몇 사람의 성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으니 이들을 불러 증언을 들어보면 그 시체처리결과는 어느 정도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찌됐건 연행되어 갔다가 억울하게 숨져간 사람들의 명단과 숫자가 밝혀지지 않는 한 1백94명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광주항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 「몇대의 트럭에 시체들이 북으로 실려갔다」 「서울 벽제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는 풍문이 나돈 바 있다.
  광주 쪽에서 주장하는 2천명설에도 상당한 무리가 있다. 여기에서 장황하게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지만 당시 나온 유인물 중에서 2천명 사망을 주장한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은 바로 며칠 전 2백명을 내세웠던 유인물이었으며 다른 유인물들이 주장한 숫자는 모두가 1천명을 넘지 않는다.

사고인가, 음모인가

  한편 그동안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수없이 제기돼온 본질적인 의문 중의 하나는 우발적 사고인가 아니면 계획된 음모인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정부 쪽이나 광주 쪽 공히 우발적 사고가 아닌 계획된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정부 쪽은 김 대중일당이 집권을 위해 봉기를 획책했다는 것이고, 광주 쪽은 신군부 세력이 5·17조치와 함께 집권을 위한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김대중 배후조정설부터 따져보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김대중·김상현·홍남순·정동년씨 등이 서로 만나면서 자금을 건네 주고 배후조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들은 돈을 받기는커녕 만난 적도 없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이 설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특히 김대중씨와 정동년씨는 만나기는 커녕 그 당시에는 일면식도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더욱 명백해졌다.
  이 사실은 민중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리더가 없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대부분의 운동권 지도자들은 이미 연행되어간 뒤였고 아직 붙잡히지 않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씨마저 18일밤 광주를 빠져나갔다.
  19,20,21일까지도 시위대의 리더는 없었다. 20일밤 전옥주씨가 등장해 격렬하게 시위를 주도했지만 그녀는 김대중씨와 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말하자면 광주항쟁은 18,19일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수부대가 철수한 다음날인 22일에야 겨우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 위원장은 끝까지 무기반납과 타협을 주장했던 온건파 김창길씨였다.
  그러면 광주 쪽에서 주장하는 신군부 세력의 집권을 위한 사전 음모설의 근거는 무엇인가?
  우선 5·17조치를 든다. 당시 5·17조치의 필요성이 전혀 없는 데다 그 자체가 불법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5·17조치 이틀 전의 공수부대의 광주이동지시는 어떤 조치가 있으면 그 다음날 전남대 입구에 모여 데모를 하자는 전남대생들의 공개된 약속을 이미 알고 있던 터라 이에 대비해 강경진압을 계획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철권정치로 정권을 잡겠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연행해 간 사람들을 김대중 배후조종으로 꾸며 나가고 있었다는 점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 5월22일 이후 난데없이 복면부대가 대거 등장한 점, 독침사건, 그리고 대학생들의 대거 입광 등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다.
  5월22일 오후 3시8분 도청광장에서는 서울에서 광주항쟁을 지원하기 위해 내려온 3백 여명의 대학생 환영식이 열렸다. 그러나 당시는 공수부대, 20사단 31사단 및 상무대 병력으로 광주 외곽이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어떻게 3백여명의 많은 젊은이가 광주에 들어을 수 있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교도소 습격사건도 수수께끼

  광주교도소습격사건 역시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 중 하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광주교도소를 31사단이나 20사단 병력이 보호하고 있을 때는 습격기도 사실이 전혀 없었다고 해당 사단장들이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공수부대가 지키고 있을 때만 습격기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도소습격사건은 분명 없었던 것으로 안다. 당시 필자의 취재수첩에도 적혀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들은 바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광주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자 터져 나온 것이다. 특히 작년 2월 있었던 민화위 증언에서 당시 한도희 교도소장은 습격사건이 있었다고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위 「교도소습격사건」은 왜 생겼을까? 이는 광주항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측에서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몰아붙이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그들은 담양, 곡성 쪽으로 빠져나가려는 시위대와 벌어진 교전을 두고 습격으로 주장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만행을 저지른 공수부대 원들이 교도소에 머무르고 있을 때 이들을 기습한 것을 과장해서 발표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