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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시인 김준태의 「광주항쟁」 현장일기(월간중앙, 1988. 5)

본문

시인 김준태의 「광주항쟁」현장일기



- 12일간(19980.5.16∼1980.5.27)의 현장목격 일기를 중심으로-



김준태(시인)

 

금남로는 사랑이었다

  돌이켜보면 80년 5월 광주는 이 땅의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듯이 6·25 이후 가장 참혹한 민족사의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시인 강인한은 당시의 상황을, [1980년 5월光州]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어 표현하였다.

허공에 높이 떠 있읍니다
내려갈 길도, 빠져나갈 길도
흔적없이 사라진 뒤
소문에 갇힌 섬입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한 주일만에 나선 오후의 외출에서
꽃상자 속에 담긴 꽃들을 만났읍니다
서양에서 들여온 키 작은 꽃들
가혹한 슬픔을 향하여
벌거벗은 울음빛으로 피어 있었읍니다
말못하는 벙어리 시늉으로 피어 있었읍니다.

  강인한 시인은 인도 변에 설치된 화분대위에서 팬지꽃이 피어있음을 보았는데, 아마 그는 도청이나 상무관 혹은 어딘가에 급조로 안치된 시체들을 보고 예의 그런 시를 썼을 것이다.  정말 그의 시귀처럼 5월 당시의 광주는 「소문에 갇힌 섬」임이 분명했으며, 외부와의 철저한 차단상태 하에 놓여있었으며, 그리고「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뿐인 피울음의 절해고도였다.
  지금은 1988년 봄, 필자는 아직도 들려오는 듯한 그날의 함성과 노래를, 그리고 무등산 저쪽으로 혹은 망월동으로 사라져 갔던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홀로 금남로를 걸어 본다. 그리하여 광주시민들이라면 너 나 없이 그 어떤 슬픔 속에서 걷고 걷는, 금남로 길 위에서, 가만히 숨 죽여 듣는다. 80년 그날 이후 끊임없이 넘치고 넘치던 저 바다같은, 아니면 푸른 보리밭같은 금남로 위에서, 노래,  노래, 노래를 듣는다.

꽃피고 눈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인데
아, 다시 못을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싸우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꽃잎처럼 금남로에 쓰러진 너의 붉은 넋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퍼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시린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년이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아, 귀를 막아도 그침없이 들려 오고, 들려 오는 노래, 저 노래 소리들‥‥ 그러나 필자는 언제부터인지, [절망하지 말라, 역사에 절망하지 말라, 밥 먹어라, 꿀꺽꿀꺽 밥 먹어라, 역사의 밥을 먹어라]하면서, 금남로를 걸으며 더러는 저 무등산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희망의 시를 썼는지 모른다. 맹목적인 희망이 아니라, 좀더 구체 적인 뻑적지근한 그런 희망의 시를 쓰려고 발버둥쳤다. 비로소 이 한반도의 한복판에서 튼튼히 역사(歷史)하는 광주를 보면서.
  그렇다. 「볼테르」같은 사람은 『역사란 옛날에 죽어버린 것을 갖고 노는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지만,「헨리·포드」같은 사람은 『역사란 시시터분한 소리(bunk )}라고 경멸했지만,「베어드」같은 사람은,「마르크·블로흐」같은 사람은, 사마천같은 사람은, 역사를 어떻게 버티어 내며 어떻게 이겨내려고 했던가,「베어드]는 『역사는 신념의 행동』이라 했고,「마르크·블로흐」는「역사란 시계제조업도 고급가구세공업도 아니다. 그것은 보다 나은 이해를 향해 나아가는 노력이다. 움직이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했고, 덧붙여서 [역사란 단수형 이 아닌 복수형태로서 인간들에 대한 힘』이라고 했지 않았던가. 사마천, 그도 역시 역사란 이겨냄, 버티어냄, 앞으로 나아감의 그것이라고 파악하지 않았던가.

역사의 참 스승, 광주

요컨대 80년 5월의 광주는 비록 이 땅의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슬픔을 주었지만, 결코 역사에 그리고 오늘과 내일에 패배주의와 절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산업사회 속에, 도시의 익명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삶이 무엇이고 참생명이 무엇이고 참민족이 무엇이고 참나라가 무엇인간를 진정 충격적으로 깨우쳐 준-어쩌면 1980년 5월 광주는 역사의 스승이었다. 민족정신의 참구현의 어느 길목에서 이윽고는 만나고야 말 처절한 그러나 역사의 참스승으로서, 오늘도 잠든 우리를 문득 문득 깨워 준다. 광주, 그날의 광주는 관념의 스승이 아니라 땀냄새나는 육체적 스승으로서 오늘도 남녘 한 복판에 외로이 우뚝 솟아있다. 그 어떤 지역의 고유명사로서가 아닌, 이 땅에서 가장 보편적인 보통명사로서 역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필자는 80년이 지나고 81년 어느날, 광주 5월의 치열한 몸부림의 상징이었던 금남로를 걸으며, 후줄근히 비에 젖으며, 아니 엉엉 울면서, 광주와 금남로를 노래하였다. 「살아있는, 틀림 없이 살아있는 광주를!」

12일간의 현장목격 일기<1980.5.16∼5.27>

  (註 :지금부터 읽혀질「12일간의 현장목격일기]는, 1980년 당시,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해서 1980년 5월 23일 오후 무렵, 당시 [월간중앙]의 기자였던 한천수씨와의 만남으로 하여 씌어진 일기다. 요컨대 이틀간에 12일 간의 일기를 한꺼번에 쓴 셈인데, 한기자는 그때 원고 청탁차 필자를 찾아 내려온 것. 그는 교통도 두절된 광주를 들어오기 위하여 서울→전주→영광으로 차편을 이용한 후, 영광에서 광주까지는 걸어서 왔다는 것이었다.  광주에 들어오면서 여러 차례 검문검색을 받고, 그야말로 천신만고끝에 필자와 만난 셈이었다. 당시 한기자는 필자더러 [들은 소문은 쓰지 말고, 김선생이 보고 체험했던 것만을 쓰십시오]라고 했다. 그때는 정말 엄청난 얘기들이 눈덩어리처럼 굴러다니기도 했고, 혹은 와전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6월4일, 이 일기 형식의 원고를 광주시 유동에 소재한 [중앙일보]광주지사를 통해, 서울 본사의 월간부로 보냈다. 그러나 1980년 6월 직후 [월간중앙]의 폐간조치와 더불어, 청탁받아 씌어진 이 부분의 일기원고는 오늘날까지 8년이나 묻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상황이 하도 어렵고, 또 문자화될 것이라는 모종의 생각 때문에 제대로 쓰지를 못했지만, 그러나 오늘에 와서 다시 읽어 보니 그 무슨 반성과 교훈같은 것도 있을 법하여, 필자는 그때 썼던 초고 그대로를 여기에 옮긴다. 몇 군데 어휘들과 문장들은 손을 보았지만, 제목 따위도 거의 그대로.)

  주여, 왜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하눌님이여,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글이란 무엇인가, 글이란 써서 도대체 무엇을 하잔 노릇인가. 아아, 나도 몰라라. 한 사람의 목을 축여 줄 수 없고, 한 사람의 눈썹을 흔들어 줄 수 없고, 한 사람의 죽어가는 육신을 마음놓고 어루만져 줄 수 없는 글이란 것이 일러 무삼 뜻과 힘이 있으리오. 아아, 어찌어찌 하여 살아남은 이 시대의 나는 정말 무엇인가. 도깨비인가, 바보인가, 머저리인가, 악마인가, 식충이인가, 나무토막인가, 쓰레기통인가, 아니면 나는 누가 먹다가 던져 버린 오뉴월 시궁창 속의 빈 깡통일가. 사람들이여, 사람들이여. 산 사람들이여, 죽은 사람들이여. 나는 죄인이올시다. 뭐가 뭔지 몰라도 나는 죄인인 것 같습니다. 선생도, 시인도, 두 아이의 아버지도 아닌, 아아, 나는 어떻게 살아야 옳습니까, 어떻게 걸어 다니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노래하고,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어떻게 똥을 누고, 어떻게 엎어질 줄 알고, 어떻게 울고 웃고, 어떻게 고개를 들고,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5월16일<금>. 횃불 대행진으로

며칠 전부터도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광주시내가 온통 어수선한 분위기인 것 같다고 전해진다. 전남대학, 조선대학, 교육대학, 그리고 9개교 이상의 전문대생들이 시내로 쏟아져 나가 문자 그대로 시위(데모)를 벌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몸담고 있는 고등학교에서도 사전에 불상사를 대비하고자 3학년 학생들은「가정 학습」이라는 명목하에 이틀간의 휴강조치를 내렸고, 교내에는 사실상 1,2학년 학생들만 남아 수업을 계속하는 중이 었는데, 오후에는 그것도 염려되어 학급별로 귀가시간을 세밀하게 분리하여 돌려 보냈다. 물론 담임선생님의 빈틈없는 교육과 지도가 있은 다음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전 선생님들은 시위장소인 금남로 일대에 나갔다. 어느 틈엔지 시위 군중 속에 끼여있을지 모르는 고등학생들을 지도하여 귀가하도록 종용할 심산에서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무등산 정상에 빛나던 마지막 저녁 햇살도 스러질 즈음, 전라남도 도청 앞 광장엔 분수대를 중심으로 시국성토대회에 참가한 학생과 구경 나온 시민으로 조금도 발을 옮길 수 없었다. 학생들은 연좌한 채 [내 게 강같은 평화/내게 바다같은 평화] 운운하는 노래들을 부르기도 했다. 이때 시위진압차 도열한, 방독마스크 착용에 경찰봉을 든 전투경찰과는 아무런 대결이 없었다. 학생대표들은 사회자가 스피커를 통하여 말하는 식순에 따라 힘차게 결의문을 낭독했으며, 이어서 운집한  학생들은 [애국가]를 비롯하여 [선구자][우리의 소원] 따위의 노래를 목이 터져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광주 시내 주요 도로 전역에 횃불행진이 있었는데, 여기에 쓰인 횃불은 대략 5백 여 개로 시위 행진대열의 사이마다 적당히 안배되어 훨훨 불타오르며 움직이었다. 학생대표측에서 실무를 담당한 지도학생 그룹들은 건널목에 서서 교통정리를 하는 등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그라지는 횃불에 기름을 요소요소에서 공급해 주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고, 행렬을 지켜보며 방패 들고 좌우로 따라가는 전투 경찰들조차 어쩌면 다정스럽게 보였다. 예컨대 학생들은 횃불시위조, 기름공급조, 질서조, 최종적인 횃불수거조 등등의 조를 편성하여 시위를 진행하였다. 물론 시국과 관련된 훌라송과 구호를 외치며.
정말 아무런 사고가 없이 민주주의를 위한 횃불행진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도청 앞 분수대광장→금남로→노동청→조대 앞→산수동→계림동→중흥동→전대 앞→유동 삼거리→양동→충장로→금남로를 거쳐 다시 도청 앞 분수대광장에 학생들과 시민들은 집결하였다. 출발했던 5백 여 개의 횃불도 학생대표측이 하나도 빠짐없 이 그대로 반납되었다.
밤 9시 40분경이었다. 학생 대표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인 박관현군이었는데, 그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오늘의 횃불 행진을 무사히 끝맺노라고 외쳤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말은 사자성 같았다. [최규하대통령이 곧 귀국하시면, 정부에선 정치일정을 소상히 밝히고, 우리의 민주회복운동에 부응하는 반응을 즉각 보여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에 희망을 걸고, 민주학생 여러분과 애국시 민여러분은 굳게 기다려 봅시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 납득이 안 가는 결과가 생길 것을 대비하여, 대학생 여 러분은 19일(월) 일단 도청 앞 광장으로 나와주실 것을 빌어마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학생들과 구경나온 시민들은 무언가 기다림에 벅찬 가슴으로, 그리고 초조한 가슴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학생들이 앉아서 혹은 서서 시위를 벌인 도청 앞 광장엔 담배꽁초와 휴지조각도 찾을 수 없이 깨끗했다. 학생들이 그만큼 질서를 지켰고 뒷정리를 잘했기 때문이리라. 무등산 위의 하늘엔 저녁 별들이 여기저기 돋아나고 있었고, 밤 11시를 넘어서자 금남로는 고요했다.

5월17일<토>. 春山의 어딘가에 불이‥‥

  남도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광주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충장공 김덕령장군을 다 알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간신모리배들의 모함에 그만 처형을 당한 그를! 의병장 김 덕령은 그러니까 당시, 왜적의 책략으로 적장과 통한다는 말이 나와, 더군다나 선조임금을 공략하려 한다는 모리배들의 말도 나와, 서울로 압송되어 고문을 당한 나머지 한많고 꽃다운 29세의 나이로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부인은 너무나도 슬프고 억울하여 마침내 담양군 추월산 학봉에 올라가 시국과 세상을 개탄하면서 스스로 추락사하였으니,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광주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하여 광주의 최대의 중심거리의 하나를 충장로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영조임금 때 그 억울함이 알려져 병조판서로 추종되고, 지금은 광주의 무등산 자락에 충장사를 세워 그의 영혼과 정신을 모시고 있는 터이다. 이렇듯 괌주 사람들은 일찌기 충장공을 비롯, 많은 의병장들을 고이 모시는 것을 긍지로 여겨온 것이다. 그 옛날부터 義에 강한 고장, 그래서 이순신 장군도 의병이 가장 많은 호남을 일컬어 若無湖南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이 또한 국가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라)라 칭송했던 바 아니었을까.
  16일의 횃불대행진 속에서, 그리고 오늘은 저 봄산의 무등산을 보면서, 그러나 문득 나는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시귀를 떠올렸다. 어떤 예감처럼, 오후를 지나면서 서울 쪽의 상황이 간헐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문득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임진년의 그날도 동시에 떠올리면서. 아, 봄산의 어딘가에 불이‥‥?

  春山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붓는다
  져 뫼 져 불은 끌물이나 잇거니와
  이 몸의 뉘업슨 불이 나니 끌물 업서하노라
  (봄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 저 산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 이 몸의 연기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어찌하랴)

5월18일<일>. 비상계엄확대선포와 더불어

  라디오를 켰다. 어슴푸레한 무등산 서쪽의 하늘에서, 예리하고 섬뜩한 전파가 날아와 나의 머리 속에 꽂혔다. 몇 시쯤이었을까. 라디오를 통하여 들으니, 전국적인 확대계엄령이 이미 선포된 후였다. 확대 계엄은 5월18일 0시를 기해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격적으로 선포되고, 그러나 새벽은 오고 농가의 수탉들은 어김없이 홰를  치는 시간이었다.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와 더불어 전국의 모든 대학들은 문을 닫게 된 것이다. 국회 역시 회의가 금지되고(5월20일에 회의를 개최할 모양이었는데), 현재는 물론 지난 시절의 정부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 내 지는 논의마저 금지하게 된 것이다.
  친구와 만날 일이 있어 아침을 먹고 시내로 나가 보았다. 버스칸이나 거리의 표정은 아주 굳어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이마를 맞대고 간밤에 일어난 일, 혹은 확대계엄에 대한 얘기를 주고 받는 것이었다. 수 백 명의 민주운동의 지도자들이, 정치가들이, 학생들이, 그리고 70년대 유신시대의 반체제 인사들이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70년대 이후 저명한 야당지도자요 한때 강력한 대통령 입후보자였던 김대중씨가 간밤에 동교동 자택에서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광주시내 곳곳에 퍼져 나갔다. 그 소문은 결국, 이제 광주에 사는 모든 민주세력인사들이 확대계엄발표 직전에 사전검거, 즉 예비검거되어 어디론가 끌려가 버렸다는 것이다.
  K다방에 잠깐 들렀는데, 거기 다방 안의 손님들도 불평과 불안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서울이나 광주의 학생들은 이미 5월 16일의 시위를 마치면서, 정부의 시국일정에 대한 바람직한 응답을 기다리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듯 불시에 확대 계엄을 선포해버렸다는 것이다. 5월15일 정부의 한 책임자인 신현확 국무총리도 역시 조속한 민주화의 일정을 밝히겠다고 했는데, 그리고 어제 오전의 경우에도 야당지도자인 김대중씨와 김영삼씨가 학생지도자들을 만나 최대한의 자제를 역설하며 약속받았지 않았는가, 하는 따위의 꽤 염려스런 푸념들을 쏟아 놓았다.
  친구와 다방에서 헤어진 후, 오랜만에 S친구의 서점에 가 보았다. S친구는 70년대 시절에 소위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루되어 구속된 바 있었고, 지금은 결혼한 엄연한 가장으로 시에도 퍽 조예가 깊은 사람이다. 그는 전남대 국문과 출신으로 문단에의 데뷔를 꿈꾸고 있는 젊은이다. 담배를 피워 문 채 나는 H서점 앞에서 그만 우뚝 서 버렸다. 그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흘러 내렸다.
  S친구의 서점은 문이 한쪽만 겨우 열려 있었다. 사실상 셔터를 내린 것이나 다름없이, 서점 앞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음산함마저 주었다. 서점 안쪽에 비좁게 딸려있는 단칸방, 거기가 바로 S친구의 전세방이요 신혼방이 아닌가. 그러나 서점을 지켜야 할 신랑은 없고 신부 혼자만이 달랑 주저앉아 시가댁으로인지 친정댁으로인지 쉬지 않고 다이얼을 돌리는 중이었다. 자꾸자꾸. 그러면서 S친구의 부인은 [S가 잡혀갔어요. 어둠 속에서 당한 일이라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S는 결혼한 이후 서점 살림 꾸리기에만 힘써 왔는데…]
  S친구의 부인한테 위로도 안될 위로의 말을 한 뒤 나는 총총히 집으로 향하였다. 전남대학교 앞을 지나 신안동 나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광주역 앞 고속도로 진입로에 이르렀을 때, 나는 완전무장한 군인들을 가득 실은 군용트럭 들을 보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계엄군들이 계속 증원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오 조금 지나 집에 당도하니 고향 해남에서 형님과 할머님이 올라 오셨다. 형님께서는 지게질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서 병원의사의 진단을 받으러 왔다는 것이다. 할머님은 올해 팔십이신데, 둘째 손자놈인 내가 보고 싶어, 이젠 너무 늙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광주 나들이를 형님 따라 왔노라고 말씀을 이으신다. 나는 허리를 다친 형님을 걱정하며 보고 싶었던 중인데 할머님은 정말 잘 오셨다고 몇 마디를 받아 넘겼으나 비상계엄확대령이 선포된 세상이 되었는지라 그저 멍해 있었던 것 같다.
형님과 할머님을 양림동에 있는 누이 동생집에 모셔다 드리고 광주의 중심도로인 금남로 쪽으로 나오고 있는 중이 었다. 나는 간장염에 위장병을 조금 앓고 있는 중이어서 평소 약국을 잘 찾았고, 이날 역시 한국은행 광주지점 근처에서 약 좀 살까 하고 가고 있었다. 아, 그러나 금남로 일대는 이미 차량이 끊겨 있었고 여기 저기서 페퍼포그와 이름도 모를 최루탄의 짙고 독한 가스가 터뜨려지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까진 그렇다치더라도 대학생 또래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군용트럭에 마구 던져 넣어지는 판국이었다. 숫제 도처에서 아우성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이때 내가 보았고 그리고 시민들이 말하는 계엄군들은 공수부대가 아닌가 싶었다.
금남로 일대는 학생과 시민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밀리고 하더니 나중에는 학생들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길가에서 뽑아낸 돌멩이로 맞서는 것이었다. 한국은행 옆 인도를 걸어가고 있던 고등학생 하나가 느닷없이 계엄군에 붙잡혀 끌려가는 것이 보였고, 시민들은 그러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 놓아라, 잡아가지 말아라].  나는 도로마다 그득한 가스를 마시며, 눈물을 흘리며, 약을 사러가던 놈이 어느덧 쫓기는 자가 돼버린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약을 사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지나치는 행인들마다 얼굴은 그 무슨 분노로, 두려움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금남로로 통하는 길목은 거의 모든 상점들이 문을 내렸거나 내리고 있었으며, 그리고 전남북계엄분소에선 통행금지 시간을 하오 9시부터 다음날 4시로 연장했다고 발표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전남대학생 5백 여 명은 18일 상오 비상계엄 확대선포와 대학휴교령이 내려지자 상오10시30분부터 교문 앞에 모이기 시작, 계엄군의 저지로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자 시내로 진출, 투석전을 벌이 며 시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군 헬리콥터가 계속 지상을 가까이하며 정찰 이행하는 중이었다. 층장로파출소와 동산파출소가 전파되었다는 소문과 더불어 학생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문이 서산에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광주시내 곳곳에 삽시간에 퍼져버렸다. 문득 서쪽 하늘을 보니 저녁놀마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름답다 못해 처절하게 붉게 타 올라 이윽고 서쪽으로 곤두박질 치는 듯이 떨어지는 태양! 그때 나는 신안동쪽에서 울려 나오는 또다른 개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5월19일<월>. 하늘에는 헬기, 땅에는 아우성

  할머님은 며칠 더 계시기로 하고, 형님은 모내기 철이 다가 온 관계로 하룻밤을 묵은 다음, 곧장 아침을 들고 고향 해남으로 내려가셨다. 몇 시간만 더 늦게 내려가려 했어도 아마 형님께선 사태가 끝날 때까지는 귀 향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후 2시 경부터 시외버스가 끊어지는 상황까지 와버렸기 때문이다.
  아침 일찌기 학교에 출근을 하였다. 오늘부터 5일간 1학기 중간고사가 실시되는 날이었으니까. 그러나 교무실 분위기는 한마디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아니 어떤 선생님은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그 어떤 분노를 삼켰다 냈다 했다. 예정대로 1교시 는 수업계에서 발표한 순서대로 시험감독을 들어갔으나, 2교시와 3교시는 그렇지를 못했다. 각 교실마다 웅성웅성 했기 때문이다. 결국 2,3교시는 학급담임들이 각각 자기 반으로 들어가 감독을 하여야만 했다. 아무래도 순진한 아이들은 과목선생님보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에 순종하니까 그런 방법을 썼다. 그러나 어떤 학급에선 거의 백지를 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학교에 대한 불만이 아닌, 이런 세상 속에서 어찌 시험을 차분히 보겠느냐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래 할 수 없이 4교시 시험은 보지 않고 학급시간을 두기로 했다. 담임들이 자기반 학급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아침에 학교에 나오면서 여러가지를 목격한 듯 학생들은 그 어떤 공포와 전율을 내내 감추지 못했다. 계엄군들이 시내버스 안에까지 뛰어들어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마구 끄집어 내려가는 것을 확실히 두 눈으로 보았던 고등학생들, 어쩌면 그들 자신이 당한 듯이, 고등학생들은 울먹이면서 털어놓았다. 나는 신분이 교사인지라 그 무슨 말도, 그 무슨 설교 따위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예민한 나이의 학생들인가. 나는 결국 시로써 4교시 학급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나는 「알퐁스·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불어선생님처럼, 멀리서 그러나 너무 가까이 들려오는 프로이센 병사들의 북소리와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 어쩌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나의 독일어 시간 ! 나는 저 1937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터져 올랐던 게르니카의 학살, 그리고 스페인 내란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어디에선가 총살되어버렸던 스페인어계통의 최고의 민요시인 「가르시아·로르카」를 마음속으로 불러 대고 있었다. [로르카! 로르카!] 그렇게 불러대면서 나는, 드디어[페데리코·가르시아·로르카]의「달이  떠오를 때](La Luna Asoma : The moon rising)라는 시를, 영어와 스페인어와 우리말로 칠판에 옮겨 써 주고, 아이들 모르게 속으로 깊이 울었다.

달이 또 오를 때
종들은 죽은 듯이 매달려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비로소 나타나 보이는구나.
달이 떠오를 때
바다는 뭍으로 둘러 싸이고
가슴은 망망대해의 섬처럼
울먹거리는구나.

떠오르는 둥근 달 밑에선
어떠한 사람들도 오린지를 먹지 않는구나
그러나 그 누군가는 차갑도록 퍼어런 열매를
먹기 마련인가 보구나.

달이 떠오를 때
일 백의 똑같은 얼굴을 가진 달
은빛 동전 부스러기들도
주머니 속에서만 흐느끼는구나.

  나는 [가르시아·로르카]의 [안녕](Despedida : Farewell)이란 시도 읊어 주었다. [내가 만약 죽으면/발코니의 문을 열어 다오]라고 노래했던 [로르카]! 그때 시내 쪽에서 함성이, 함성이 또 들려왔다. 오늘부터 가정학습이 실시된다고 전달한 다음, 학생들을 빨리 귀가시켜 놓고도 마음이 안 놓였다.
  중간고사 기간 중엔 대개 오전수업만 하는 게 상례인데, 그것을 잘못 안 계엄군들이 뛰쳐나온 학생들인 줄 착각한다면 필시 오해도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집에 전화가 있는 학생들에겐 꼭꼭 전화를 해서 집에 무사히 도착했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시내버스는 겨우 변두리로만 빙빙 돌고 있었으며, 시위 군중은 점차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늘에선 역시 헬리콥터가 고성능 스피커로 [시민들은 해산하라][시 민들은 해산하라]고 지상으로 폭음처럼 쏟아 내리고 있었다.  서무과에선 신분증을 만들어 내기에 바빴다. 어떤 젊은 선생은 교내 이발소에서 길지도 않은 머리를 더 짧게 깎으며, 자기 자신이 혹시 대학생쯤으로 보이지 않을까 염려하는 중이었다. 어여쁘게 생겼다고 평판을 받는 양호실의 여선생도 자기가 여대생으로 보일는지 어떨는지를 알아보고자 함인지 앞뒤로 몸을 돌리며 거울을 몇 번이고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지를 걱정하며 울상이 돼 있지 않은가. 아닌 게 아니라 광주시내의 젊은이들이라면 마음놓고 문 밖에 나갈 수 없는 지경이 돼버린 것이었다.
  미처 귀가하지 못한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말이 지도이지, 이런 세상에 어찌 지도같은 것을 할 수 있으랴),그리고 시내가 어떻게 돼 가고 있는지도 궁금해서 나가 보았다. 시내는 아아, 광주는 어느덧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삼엄하게 혹은 어떤 섬뜩함을 주며 뛰어다니는 계엄군들, 또 계속해서 증원되는 계엄군들, 투석전을 벌이는 시위군중의 외침과 아우성 소리로 수라장이었다.
  오늘 역시 온갖 루머가 여기 저기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 정말 그것들이 아무 일도 없는 루머로만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심지어는 지역감정을 부채질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민들은 지역감정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피해야 할 중요한 대의 명제 중의 하나라고 입을 모으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악성 루머를 뿌리는 자들은 누구일까. 일찌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그러니까 우리  민족의 단합성·단결성·항일운동성을 분쇄시키고 지역간의 연대의식을 파괴시킬 정책의 일환으로 악화·조장시켰었지 않았던가. 내가 보기엔 적어도 광주시민은 그따위 지역 감정 때문에 그렇듯 시위를 하는 것은 아니 었다. 민주주의를 쟁취 하고자 한, 사람다움의 자유와 삶을 쟁취하고자 한 몸부림의 그것으로 들끓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보았는데, 전국 최대의 규모인 공용터미널이 차량에 붙은 불길과 페퍼포그 연기로 휩싸이고 있었다. [사람이 죽었어요. 화장실로 끌려가 죽었어요. 그들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공용터미널 안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대인시장 쪽으로도 이미 길은 막혀 있었으며, 나는 골목길
을 이용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대인시장은 광주에서도 두 번째로 큰 시장이 아닌가. 시민들의 생필품들이 가득히 쌓여 있는, 그러나 대인시장은 공용터미널과 근접해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시장이 아니라 한쪽은 거의 아비규환이었다.
  오늘 광주기독교방송국은 많이 파손되고, 차고 안에 있던 승용차도 불탔으며, 광주MBC방송국 역시 하층 부분이 파손되고 5대 정도의 승용차가 불타버렸다 악성 루머는 그칠 새 없이 골목과 골목, 집과 집 사이, 거리와  거리,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번개처럼 파고 들었다. [어디서 00명 죽었다.][어떤 아주머니는 00울 대검으로 찔렸다][귀를 잘렸다]하는 등등. 간장병에 위장병까지를 앓고 있는 나는 이렇듯 무서운 소문의 소용들이 속에서 밥조차 입에 댈 수 없을 만큼, 온몸이 비틀거리기 시작하고 다시 병이 악화된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꺽꺽 앓다가 나는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5월20일 <화>, 최대의 봉기, 금남로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바다로 가고 있었다

  봉급날이다. 집에서 걱정하는 고향 할머님과 아내를 달래 놓고 학교에 나갔다. 어떤 선생님은 울먹거리고 있었고, 어떤 선생님은 죽은 듯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그리고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넋을 잃고 있어서, 교무실은 내가 일찌기 보지 못했던 숨막히는 현장이었다. 전화벨만 울려도 어디에서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가슴들을 조이고 있었다. p선생님은 자기의 친척 중에 택시 기사가 있는데, XX지점에서 장성 쪽으로 손님을 싣고 나가다가 총격을 받았다고 한다. K선생님은 불란서혁명을 이야기하고, L선생님은 이런 경우 학생지도는 이미 손댈 수 없이 돼버렸다고 한탄을 털어놓고, R선생님은 오늘 아침에 학교로 수사기관에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당신 학교 학생들의 누구누구가 시위에 참가했는지 조사해 보라]는 등의 전화 지시가 내려왔다고 투덜거렸고‥. 교무실은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가 어느새 공포,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여 들고 있었다. 어떤 선생님은 [스승이 학생을 고발하고, 학생 이 스승을 고발하는 세상이 돼버렸다]고 울음이 터질듯이 말했다.
  나는 교내에 설치된 공중전화 박스로 가서 문병란 선생님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무수히 많은 전화를 했지만.신호만 가고 누구 하나 전화를 받지를 알았다. 광주시내의 모든 학교가 휴강이 내린 판국인데, 하다 못해 집 에 아이들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시인이요 스승인 문병란 선생님, 도대체 선생님 댁은 전화도 안 받으니… 갑자기 나는 불안해졌다.
  오후 1시경에 봉급을 타 가지고 집 에 와서 아내에게 꼬옥 쥐어 주었다. 그 길로 옛 스승인 문병란 선생님댁을 들렀더니 옛 스승은 커녕 쥐새끼 한 마리 보이 지 않는 폐가로 남아 있었다. 담 너머 이웃집 아주머니를 불렀다. 한참 후에 그집 아주머니는 나오더니, 문선생님과 가족들이 어디에 갔는지 잘 모른다고 했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나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무렵 서석동, 지산동 일대에는 [대학생 찾아내기 작전]이  개시되고 있다고 했으니, 그 아주머니도 나를 아니 의심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사실은 내가 문선생님의 제자이고, 어디에 살며 지금은 전남고등학교 선생이고 어쩌고 하니, 그 아주머니는 그제야 안심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문병란선생님은 멀리 피신가시고, 사모님과 네 아이는 순천으로 어제 피난 비슷하게 내려 갔다는 것이었다. 순천은 문선생님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하얀 복슬개 한 마리, 그 개 한 다리만 처마 끝에서 눈알을 멀뚱거리고 있었을뿐, 창틈으로 들여다 본 문선생님의 서재 안은, 이미 모든 책들이 죽은 듯이 꽂혀 있었다.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발길을 뒤로 돌렸다. 대인시장 입구에서 아는 선생님을 만나 몸이 아픈 주제에 막걸리 두어 잔을 비웠다. 가슴은 그러나 아프고 터질 것 같았다. 광주 시내의 모든 거리는 계엄군들의 군화 발짝 소리가 가득가득 울리고 울렸다. 왜 이래야만 되는가, 왜 이래야만 하는가. 나는 혼백을 빼앗긴 짐승처럼 금남로 쪽으로 향하였다. 계림동으로 가는 동문다리 근처에 죽은 시체를 덮어 놓은 거적같은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거기에도 몰려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금남로 쪽으로 계속 걸었다. 사람들이,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가고 있었고 나의 시도 가고 있었다. 진정 한 시인이라면, 역사의 현장을 멀리 해선 안되니까. 하기야 무등산이 낳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김덕령장군은 자기 시에서 말하되, [문학이란 대장부 사내가 할 노릇이 아니니라」했지만 말이다. 아아, 시를 빌어 무엇을 사랑하고 시를 빌어 무엇을 부등켜 올릴 수 있으랴‥. 화가 나면 나는 불란서 시인이었던 「아르튀르·랭보」의 말을 기억해 낸다. [시에 다 똥이나 싸버려라!] 금남로 멀리에는 어디서 어느 쪽으로 뚫고 들어왔는지, 시위군중들이 엄청나게 출렁대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죽은 시민이 몇명이냐」 「죽은 학생들이 몇 명이냐」[구속학생 석방하라』외치고 있었다. 밀리고 있었다. 밀고 있었다. 쫓기고 있었다. 좇고 있었다. 앞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넘어지고 있었다. 쓰러지고 있었다. 일어서고 있었다. 잘은 몰라도 금남로에만도 20여만 명 이상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어둠이 하늘 멀리에서부터 광주 시가지를 내리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충장로통이며 금남로 일대에는 가로등마저 꺼져 있었다. 가로등 스위치를 계엄측이 일제히 내려버린 것 같았다. 통행금지 시간은 9시. 그 시간은 가까와 오고 있지만 사랑들은 떠날 줄을 몰랐다. 오히려 더 시위군중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이때 대형버스 5, 6대를 선두로 1백 여대의 한시택시·개인택시 등의 영업용 택시들이 라이트를 환하게 비추며 금남로 시위군중 사이로 밀려오고 있지 않는가. 정전된 칠흑의 금남로. 금남로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그런 바다로 가고 있었다. 학생을 포함한 시민들은 용기와 감격으로 울부짖고 있었다.「애국가][울밑에 선 봉선화야][선구자」 따위의 노래소리. 나도 어느 새 엉엉 울고 있었다. 싯가 9백40여 만원!(한시택시의 경우 표찰값까지 포함하여)의혹은 수 백 만원의 택시를 아낌없이 역사에 바치는 운전사들‥‥ 5월16일 이후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장면을 보았던 목격자들‥‥ 가난한 영세운수업의 택시기사들‥‥ 나는 그 순간 방림동에 사는 누이동생 의 남편을 생각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영업을 택시를 운전하던 매제를 생각하며 엉엉 울었다. 나는 그러나 자꾸자꾸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그것도 한 순간. 도청 앞에 빽빽이 도열한 계엄군들을 향하여 조금씩 조금씩 차량행렬과 시위군중이 밀려가고 있을 때, 우당탕! 페퍼포그와 최루탄에 휩싸인 시위 가담 차량들은 박살이 나버렸고, 아우성 소리, 쓰러지는 소리가 밤하늘 저 멀리까지 튕겨져 올랐다. 그때 나는 보았다. 불길과 연기가 어둠과 아우성속으로, 손 잡고 걸어 가버리던 두 여인을! 성난「잔다르크」와 같은 두 여인은  그러나 시위군중 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소방서로 가자][소방서로 가자』 시위군중들은 소방서로 달려가서 문을 부순다. 대형트럭으로 소방서 문을 부수고, 드디어 소방차량을 몰고, 사이렌을 울리며 도청 쪽으로 달렸다. 노동청 쪽에선 탱크와의 격돌이 있었다. 그러나 탱크와 중무장을 한 계엄군의 저지선을 뚫지 못했다. 소방차량의 호수로 금남로 일대의 매연과 최루가스를 제거하려했으나, 어느새 도로변에 설치된 비상시 대비 급수시설도 작동되지 않았고, 수도스위치마저 멈춰버렸다. 밤 10시를 가리키는 시간이었을까.

어둠 속에 불기등이 솟고 있었다
끝없는 아우성 소리 밤바람 소리
더욱 참혹하게 일어서 달리는
사랑과 평화와 자유의 갈증들
아아, 밤이었다 불 꺼진 밤 10시
텅 비어 있는 죽음과 죽음 속에
가득히 담겨 소용돌이치고야 마는
저 역사에 대한 명백한 진리의 확인
어둠 속에 부서진 라디오와
눈덩이처럼 얼어붙은 별빛이 뒹굴고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

  오늘저녁 광주신역 파출소가 불탔다. 신안동에 있는 KBS와 전남여고 앞 MBC 방송국이 완전히 불타버렸으며, 도처에서  파괴와 화재가 발생했다. 계림동 파출소 및 조선대학교 아래 농장다리 부근에선 총성이 울렸다. 신역에서도 총탄으로 인해 사람이 죽어 넘어졌다고 소문이 퍼졌다. 밤 12시경 광주일고 앞에도 많은 시위군중들이 몰려 있었는데,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공중전화 박스를 부수지 말라, 이것은 광주시민들의 소중한 재산이다][민간인 집들은 부숴선 안된다, 이것은 우리의 집이다』라고. 내가 보기엔 오늘 저녁엔 공중전화 박스 하나 깨뜨려지지 않았다. 밤 8시30분부터 텔리비젼 방송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KBS와 MBC의 라디오방송도. 물론 5월19일부터 [전남일보]와 [전남매일]도 신문제작을 포기한 채 굳게 문을 내 리고 닫쳐 버린 것이다. 집에 들어와 창밖을 내다보니 공설운동장 부근에서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까지도 개짖는 소리가 그치지를 않았다.

5월21일<수>. 피의 수요일, 그러나 계엄군은 물러나고….

  아우성 소리, 스피커 소리, 밀리고 밀려가는 소리에 일찍 잠이 깨었다. 간단히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거리에 나가 보았다. 시내 도처의 거리에는 이미 어린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전 광주시민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공설운동장에서 광주역 쪽으로 가면서 보니, 시위차량들이 3백50여대 이상이나 추산되어 보였다.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공장 앞에 선 여자 직공들이 몰려나와 사이다, 콜라, 빵을 시위차량에 넣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유동 아세아 극장 앞을 비롯하여 시내 곳곳에선 시위차량과 젊은이들을 위한 가두 모금운동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금남로 일대에만 하더라도 30여 만 명 정도가 시위에 참가한 셈이다. 그제 (5월 19일)는 계림국민 학교 학생들까지도 [우리들의 언니와 형님들을 다치게 하지 마세요]라는 데모를 했다고 하지 않는가.
  시위 군중들을 가득가득 태운 버스들,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탈취한 듯한 대형군용트럭, .APC장갑차, 민간인용 트럭들, 소방서 차들, 개인택시들, 관용차들, 고속버스들이 시내를 질주하며 [도청으로! 도청으로!] 외쳐대는 것이었다. 오토바이행렬들, 자전거 행렬들도 그렇게 도청으로 가자고 소리쳤다. 그 차량들을 향하여 시민들은 역시 청량음료를 비롯해 빵, 담배 등을 끊임없이 집어넣어 주고 있었다. 시위차량마다에는 거의가 대형태극기를 부착하거나 휘날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계엄군들은 일단 광주시 외곽으로 벗어나서 대치하는 중이었으나, 하늘에는 계속 군용헬리콥터가 빙빙 돌고 있었고, 그러가 도청 앞 광장엔 여전히 탱크와 중무장한 계엄군들이 시위군중과 팽팽하게 맞서거니 혹은 부딪치느니 하고 있었다.
  오후 1시경. 시위차량들이, 그러니까 탈취한 APC탱크와 버스와 트럭들이 도청 앞 계엄군의 저지선을 뚫으려고 하였다. 시위차량 몇 대가 계엄군 저지선을 돌격 적으로 통과했을 때, 어디서 쏟았을까. 빠바빵 ! 핑핑  펑 펑! 삐이잉! 뜨르륵 뜩뜩! 뜨르륵 뜩뜩! 아아, 이 어인 일인가. 이 어인 일인가. 시위군중들은 도망치며, [공포탄이 아r니다』라고 외치고 외쳤다. 아수라장, 아비규환, 전쟁터였다. 나는 금남맨션 도매상가 앞 골목에 있었는데, 이 골목에서만도 잠깐 사이에 15구의 총맞은 시체를 보았다. 그 시체들은 주로 용감한 젊은 사람들에 의해서 때마침 달려 온 트럭에 실려졌으며, 또는 어깨나 다리에 총상을 입은 사람들은『병원! 병원!』하며 주위 사람들에 부축되어 병원으로 옮겨져 갔다.
  그러나 시위차량들은 또 밀려가고 있었다. 도청을 향하여. 총소리, 총소리! 시위차량 위에서 펄럭이던 태극기도 어느새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피에 얼룩진 태극기! 아아, 피에 얼룩진 우리나라의 태극기! 그때 가톨릭센터 옆 S산부인과 앞에서 어떤 건장한 중년신사가 현관 오똑한 곳에 서더니 [광주시민들이여! 우리 총을 가지러 갑시다. 우리 이러다간 다 죽습니다]라고 울부짖자,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가자, 가자 총을 가지러 가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즉석 웅변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무서운 일이었다. 무서운 일이었다.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길래,  이렇듯 처참한 인간살육을 방관하고만 있단 말인가. 심지어 철없는 어린 소년이 쓰러져도, 멀리 고개를 돌리고 있단 말인가. 나는 이 세상에 하느님은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하느님이 어딘가에 계시다면 이토록 모른 척 하고 있을 것만은 아니었지 때문이다. 아아, 나도 이미 내가 아니었다. 혼백을, 영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내 몸의 어디가 아픈지조차 알지 못했다. 가슴에, 옆구리에, 머리에, 다리에, 어깨에 총탄을 맞은 사람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나는 집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날아오는 총탄을 피해 간신히 금남로를 빠져 나을 수 있었다. 전남여고 앞까지 오니 그만 나는 실신할 것 같았다. 전신에 힘이 빠져 버리고 눈도 잘 떠지질 않았다. 시내 곳곳에서는 여전히 총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으며, 마침내 젊은 시위학생들이  광주 시외의 면·군에 가서 층과 탄약을, 그리고 화순탄광에서 TNT를, 대형 고성능 다이너마이트를 빼앗아 가지고 다시 광주 시내로 달려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계엄확대 전에, 광주 시내 꼭 파출소에 소장한 총과 탄약은 이 미 회수돼 버렸다. 그러니 광주 시외만이 총과 탄약이 있다}고 외치며, 시위학생과 시민들은 광산군, 담양군, 화순군, 장성군, 나주군 등지의 지서와 파출소 혹은 예비군 무기창고로 달려가 예의 무기들을 탈취해 온 것이다. 어찌 할까, 어찌 할까….
  오후 5시경에 계엄군의 최후저지선이 무너지고, 그침없이 LMG 총성같은 것이 전 시내를 울렸다. 퉁퉁퉁! 오후 5시 30분 경, 도청은 시위대와 학생들의 손안에 들어간 것이다. 계엄군들은 시외로 밀려나가 대치 중인 모양이었다. 인제 광주는 섬이었다. 그 어떤 곳과도 연락이 두절된 절해고도였다. 그러나 광주는 바다처럼 파도가 치고 있었다. 멀리 그렇지만 너무도 가까운 무등산 위엔 달이, 붉은 달이 둥그렇게 떠오르고 있었다. 아아, 1980년 5월 21일! 최악의 날이었으며 피로 얼룩진 날이었다.

그대가 그리웠다
불속으로 가버린 여자
그대가 천지에 가득 와서
나는 강변으로 달려갔다
가슴이 부풀어 올라
갑자기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강변엔 갈대꽃이 흔들리고
어디선가 밤새들이 날으고 있었다

불속으로 가버린 여자여
이마 위에 부서진 돌을 얹고
가슴 위에 노오란 꽃잎을 받으며
멀리 달과 함께 떠 오르는 여자여

  나는 죽은 듯이 꿈꾸고 있었다. 무등산 위에서, 흰옷 입은 수천 명의 어머니들이 울부짖는 것을 꿈속에서 보았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땅을 지켜왔던 그 한많은 백의민족의 어머니들!

5월22일 <목>,「여보, 당신은 내게 잘해주었어요」

  아침에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측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1학년 김 선생님께서 어제(21일) 엄청난 불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전하는 소식인 즉, 김선생의 부인이 불의의 총상을 입고 숨을 거두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21일 낮 밖에 나간 남편이 걱정되어 애타게 기다리다가, 애타게 기다리다가 집 앞 골목길까지 무거운 임신부의 몸으로 나가 서 있는 중이었다. 아마 김선생님의 사모님뿐만 아니라, 예의 무서운 총성을 들은 광주 시내의 모든 아녀자들은 남편들이 밖에 나가면 조금도 마음을 놓지 못할 지경이었다. 김선생님의 사모님도 그런 아녀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리라. 그런데 어디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김선생의 부인은 올해 스물 네 살. 돌을 며칠 앞 둔 잘 생긴 아들녀석이 있었으며, 거기다가 임신 7개월이었다.
  우리집 근처에 사는 S선생과 함께 얼마간의 조위금을 해가지고, 불의의 비극을 당한 김선생님 집을 찾아갔다. 가는 도중에 얼마나 가슴 죄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치열한 시위현장 중의 하나였던, 그리고 어디엔가서 총알이 날아올 것만 같은, 그런 전남대학교 정문 앞쪽을 통과해야 가는 길목에 김 선생님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선생은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바로 집 몇 채 건너서 처가가 있는지라, 거기에 죽은 아내를 모셔놓고 있었다.
  아아, 김선생! 그는 이젠 영 말없이 가버린 아내의 시신 앞에서 엎드려 울고 있었다. 온몸이 부서지도록 울고 있는 것이었다. 찾아간 우리들은 정말 뭐라 위로의 말을 할 수조차 없었으며, 또 이런 비극 앞에서 그 무슨 넌덜거린 위로의 말이 소용이 있으랴 싶어 그저 아아, 그저 따라 울 수밖에 없었다. 김 선생은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더니 시종 내내 『우리집사람은 내게 잘해주었어, 아주 잘해 주었어요』하며 몇 번이고 신들린 사람처럼, 넋 나간 사람처럼 되뇌었다. 처가 마루에선 외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있는 김 선생의 어린 아들놈이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정말 너무도 야무지게 잘 생긴 놈이었다. 김 선생의 부인은 저 녀석을 남겨 두고 갔구나, 저 녀석을 남겨둔 채 영영 가버렸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 나는 와락 쏟아지는 오열을 참지 못했다.
  그때도 김 선생님의 집이 있는 중흥동 근방에선 총성이 울리고 있었다. 숫제 시신을 모셔 놓은 김 선생의 처가는 상가가 아니었다. 그 집은 공포와 그리고 그 공포로 얼룩진 무서운 슬픔이 응어리져 있었다. 시내 전역이 너무 긴장되어 있었고, 시외로 가는 길조차 막혔기 때문에, 시외 전화도 두절된 상태였기 때문에, 찾아오는  조문객들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우리말에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듯이 아무리 도시사회라 해도 이웃 아저씨들과 아주머니들이 모여 와서 상가의 일을 돌보고 있었다. 그 이웃들조차 없었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한  세상 속의 喪家임에 다름이 아니었다.
  김선생님의 고향집(영산포읍)에서 이런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비탄에 젖어 버릴까. 김 선생의 부인은 어렵사리 구한 나무관에 일단 입관되었다. 관마저 형편없이 부족해버린 이 무서운 세상! 장의차는 일체 구할 수 없고 사용할 수도 없기 때문에 리어카를 빌기로 했다. 그러나 리어카도 구하기 힘들어서 연탄 리어카를 빌었다. 깨끗이 물로 씻어서 그 위에 가마니를 깔았다. 시신을 우선 시 변두리에 가매장이라도 시켜 놓았다가 세상이 풀리면 공동묘지에나 아니면 영산포에 있는 선산에 모실 예정이었다. 아아, 그러나 광주시의 변두리로 나간다는 일은 정말 모험이었다. 지원동이나 백운동의 외각지대에서 이미 계엄군과 시민군들(시민들은 그렇게 불렀다)사이에 격전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고 했지 않았던가. 그래서 김선생님의 상가에 모인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 대한 슬픔 못지 않게 어디에다 이 시신을 우선 묻어야 할지 하는 문제로 고심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아, 죽은 사람도 마음대로 묻을 수 없게끔 돼버린 이 무서운 세상! 이 무서운 참극! 나는 광주가 갑자기 지옥이 돼버렸다는 것을, 혹은 우리나라 속에서 [오랑시」로 내버려졌다는 것을, 온몸을 떨며 서러워했다. 뒤늦게 찾아오신 우리 전남고등학교의 나이 많으신 친목회장 선생님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6·25때 보다 더 무서운 세상이 돼 버렸구나, 6·25때도 광주시는 이러했을까‥‥} 오후 늦게 김선생의 형이 영산포읍에서 부랴부랴 올라 왔다. 송정리 친척집으로 전화해서, 거기에서 중간 릴레이식 전화를 해서,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김 선생의 형은 영산포읍에서 30km 이상을 걸어서, 동생부인의 시신 앞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5월23일<금>. 시민투쟁은 계속되고

  주위에서 안부를 묻는 전화를 받았으며, 또 나도 안부겸 전화를 했다. . 그리고 하늘에선 L-19 정찰기, [올챙이」라고 일컫는 헬리콥터, 그리고 상어 모양의 헬기가 계속 무슨 말을 했으며, 비라(전단)를 지상으로 쏟아내고.있었다. 학부형으로 생각되는 여자가 전화를 해오기도 했는데, 자기 동생이 4일째 집을 안 들어오니 필시 행방불명이 된 게 아니냐는 듯 울먹거렸다. 나는 주변 학생들에게 물어 알아보겠다고 전하였다. 신안동을 지나 유동 삼거리를 거쳐 금남로의 도청 앞으로 갔다. 언제나 수습될 것인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방송매체와 매스컴의 뉴스가 완연 차단된 상황,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은 자연히 도청 앞에 가야 무슨 소식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측에선 이때 소위[시민군」이라는 것을 모집하는 중이었다. 도청청사와 상무관, 전남의대병원, 적십자병원 등에 일단 안치되어있는 확인된 시체, 미확인된 시체를 가족들이 와서 확인하라고, 도청의 스피커에선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확인된 시체의 사진과 사망자의 명단을 군데군데 붙여놓고 있었다. YMCA 옆 진내과  돌담길을 지나가고 있으려니, 흰 종이로 무수히 사망자 명단을 옮겨 놓고 있었으며, 그것들이 바람에 저승꽃처럼 펄럭이었다. 읽어보니, 사망자 명단 중엔 나이를 가장 많이 먹은 사람이 56세이었으며, 가장 어린 나이의 사망자는 5세이기도 하였다.
  또 시민군 측에선, 특히 대학생그룹 측에선 총기 오발을 대비한다는 구실로 총기회수를 위한 가두방송 내 지는 유인물을 쉴새없이 뿌렸다. 물론 대형 대자보를 통하여, 예컨대 중고학생들의 무분별한 총기소지를 금한다고 알리는 것이었다. 계엄군 측도 역시 쉴새없이 헬기를 통하여 전단을 뿌리고 시민들의 마음과 태도를 가라앉히려 했다. 5월 23일 하늘에서 떨어진 전단을 보면 대충 이러했다.
  『총기 버리고 유혈사태 막자, 이대로 가면 자신·집안·나라 다 망쳐

. 박충훈 국무총리는 5월22일 취임 직후 光州일대를 직접 둘러보고, 폭도에 휩쓸리지 말고 가정과 직장으로 돌아가 달라}{l정부는 22일 국무회의에서 광주지역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사태가 호전되는 대로 광주지역에 식량과 의약품 등을 공급하며 파괴시설을 곧 재건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었다},{무기 불법소지자나 탈취차량에 탑승, 배회하고 있는 자는 이를 가까운 관선에 돌려주고 한시바삐 집에 돌아가 달라}, {유언비어 믿지 말자』
  그리고 또 헬기에서 떨어진 전단에는 [문화공보부에서 전남도민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가 있었는데, 그 내용을 몇 군데 인용하면 이렇다.
  『광주에서는 시민들이 남녀 간첩 용의자 3명을 붙잡아 당국에 넘겼읍니다. 순천에 잠입한 간첩 1명도 붙잡혔습니다} {정부는 사태수습에 성의있는 노력과 최선을 다하고 있읍니다. 대화와 평화적인 방법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무기를 갖고 있는 사람은 [난동자]로 처벌받습니다}라고 쓰여진 전단, 전단이 하늘에서 무수히 떨어졌다.
  도청 앞에서 주운, 소위 [시민군]측이나 [운동권]측에서 작성한 1980년 5월 23일(금)로 되어있는 [투사회보] 제5호, 제6호는 내용이 이러했다.
  『광주지도급인사 시국 수습차 계엄사령부 방문, 재야·종교계·학계 등 광주지도급 인사들이 현시국을 수습키 위해 5월22일 오후 3시 계엄사령부를 방문했다. 광주애국시민여러분! 민주쟁취의 그날까지 우리의 무장을 더욱 강화합시다. 민주쟁취 시민궐기 대회 5월23일 오후 1시 도청 앞 광장},{중 고등학생 무기 소지 엄금}{중 고등학생 여러분은 무기를 어른들께 인계하여 오발사고를 방지합시다. 총기오발사고로 여러분의 동료가 죽어 갑니다}, {최규하 정부는 즉각 물러가라. 000는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라.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 구속중인 학생과 모든 민주인사들을 즉각 석방하라}, {광주 시민은 하나로 뭉쳐 더욱 힘을 내어 싸웁시다!},

{세계  각지의 언론기관은 광주사태의 진상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으며 한국기자협의회의 기자들은 광주에 잠입하여 진상취재에 앞장서고 있다}, {광주시민들은 대학인들의 질서 있는 투쟁에 전적으로 협력한다}, {계엄군이 발포하지 않는 한 우리가 먼저 발포하지 않는다}, {전남도민은 분연히 일어섰다. 광주, 목포, 담양, 장성, 나주,  보성, 해남 등 16개 시·군으로 확산되어‥‥}
  그런가 하면, 광주사태 수습을 위한 모종의 노력들이 시민·학생측과 전남북계엄 분소측과 오고 간다는 말이 라디오에서 혹은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와 넘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오늘이 D-데이다! 몇 시가 D-타임이다! 밤 x시에 계엄군들이 시내로 몰려들 것이다}라는 말들이 떠돌았다. 광주에는 시외전화가 막히고, 서울 중앙의 각 신문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TV도 오늘 늦게야 KBS만 나왔기 때문에 그럴수록 갖가지 소문, 혹은 유언비어가 그치질 않고 떠돌았다. 오늘도 역시, 그래서 거의 모든 시민들이 금남로 쪽에 나가, 혹은 시민군들이라는 젊은이들이 장악한 도청 안을 기웃거리게 마련이었다. 시가지 곳곳에 쌓여있던 유리조각, 돌멩이, 각목, 부서진 차량, 불탄 차량, 주인을 잃은 신발들이 오늘은 깨끗이 치워지고 있었다. 시민들과 학생들측은 어느새 금남로 일대를 말끔히 청소한 것이었다. 그런 사이에도 {민주시민에게 알립니다. 헌혈하실 분은 조대 병 원, 전대병원, 적십자병원에 헌혈하여 주십시오. 민주투사들이 죽어가고 있읍니다}따위의 짧은 전단을 돌리기에 바 빴으며, 시민들 역시 병원으로 가서 서로서로 헌혈하는 미덕을 보여 주고, 있었다. 특히 산부인과 같은 곳에서도 시위하다 다친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진땀을 뺀다는 모습이 전해지고 있었다.

5월24일<금>, 서로 나눠 먹고, 서로 함께 울어주는 세상

  라디오에선 광주에는 지금 생필품이 바닥이 났느니, 생업이 막혀 우선 먹고살기에 대단한 지장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어디 어디에선 금은방이 털리고 불량배들이 득실거린다고 한다. 한말로 라디오는 광주를 난장판으로만, 무법천지로만 몰고 있었다. 라디오는 기계이어서 그런지 정말 체온이 없는 냉랭함만 전해주는, 어쩌면 냉혈기계 바로 그것인지도 몰랐다. 아, 그럴까. 나는 채소류를 사러 나가는 아내를 따라 시장에 나가 보았다. 그러나 평상시처럼 물가는 거의가 그대로였다. 또 상점주인들이나 물건을 벌여놓은 사람들은 그렇게 비싸게 말하지 않았다. 서로 고생하는 처지에 {어디 나만 잘 먹고 잘 살겠소?}라는 대답이었다. 그들의, 상인들의 얼굴에선 한결같이 광주를 염려하고 있었다.
  평소에 아는 ㅈ신부님을 만났더니, 이런 말씀을 했다. {거리의 부랑아들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그런 젊은이들을 만났는데, 그러니까 혈혈단신 사고무친의 고아같은 부랑아 젊은이들을 만나, 그렇게 총기를 들고 다니면 안되네 했어요. 그러질 말고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여기 10만원을 줄테니, 다시 소속된 집으로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게나, 말했어요. 그러자 그 젊은이들은 [신부님, 우리에겐 그런 돈이 필요없읍니다. 우리도 광주시민입니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지만 우리는 광주시민이란 말씀입니다. 우리도 광주시민들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총을 든 것입니다]라고 하더군요}라고 ㅈ신부님은 울먹거렸다.
  전남여고 옆 광주전신전화국 앞을 지나갈 때, 나는 무장을 한 젊은이 몇을 보았다. 그들은 전신전화국 현관과 후문 쪽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전신전화국을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도청 시민군팀의 배려 속에서, 마치 사수하듯이 예의 건물을 엄호하고 있었다. 『전화는 광주시민들의 생명선이어요』라고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공동체정신, 이웃 사랑, 함께 살아가 보려는 시민정신을 보는 것 같아, 왠지 나는 목이 메었다.


  아아, 그러나 밤이 찾아오면 개 짖는 소리만 도처에서 하늘을 물어뜯는 듯 들려 온다. 거기다가 이따금씩 총성이 울러퍼지고, 별똥처럼 예광탄도 날고 있었다. 밤이 오면 2층의 옥상에 올라가기조차 무서울만큼 돼 버린 광주! 밤 9시쯤 되면 모든 집들은 소등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여름이불 같은 것으로 창문을 가리고, 날아오는 유탄을 피해보자는 생각들을 가진 집들이 많아졌다.
  오늘 역시 학생, 시민, 종교인으로 이루어진 수습대책위원회가 전남북계엄분소라는 X사단을 방문했단다. 시체반납 및 구속자석방을 놓고 논의를 했으나 결렬됐다는 말이 시내 전역에 번져 나갔다. 그런 사이에도, 조의를 표하는 일단의 장례식(광주사태 희생자시민장이라는)이 도청 앞에서 전개됐다. 찬송가와 노래와 울음으로  시민들은 그때 어떤 한 가닥 희망 같은 것을 말하기도 했으니, 그것은 우방 미국의 대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오키나와에선 조기 경보기 2대가 날아와 광주상황을 체크하는 것으로, 혹은 사태를 풀어주려는 것으로, 착각해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얼마나 단순한 심리인가. 어쨌든 각국의 외신기자들이 도청 앞을 오고 가면서 취재를 하기도 했다.
  상무관에서는 가족에 의해 일부 확인된 시체가 입관된 채 60여구 정도가 태극기로 포장되어 있었다. 반쯤 열려진 관뚜껑을 젖히고, 어떤 여인네들이 죽은 사내들의 피묻은 얼굴을 씻어주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조의를 표하는 검은 리번을 받았다. 도청 내에서는 신원이 미확인된 시체가 50여 구 있었고, 전남의대 역시 신원이 미확인된 시체 10여구 정도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속엔 시위군중에 의해 숨을 거둔 군인의 시신도 누워 있었다.
  도청 안에, 혹은 YWCA안에 모인 여자들은 조의를 표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나누어 줄 검은 리번을 계속 만들고 있었다. 젊고 용감한 여인네들은, 그리고 여대생과 여고생, 심지어는 황금동의 술집 호스티스같은 여인네들은 조를 편성하여 ,즉 <헌혈반>, <취사반>, <홍보반>, <리번반>, <방송반>, <헌금반>을 두었다. 헌혈반은 중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수혈을 하도록 시민들에게 권장하는 것이 주임무였으며, 취사반은 사태 기간 중 식사를 놓친 시민군 남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자 손수 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