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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내가 겪은 5월의 광주/다시 정리해 본 당시 취재기자의 수첩. 위정철(월간조선, 1988. 5)

본문

내가 겪은 5월의 광주

-다시 정리해 본 당시 취재기자의 수첩-



위 정 철<전 조선일보 광주주재기자>

일요일에 터진 광주의 난리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비록 오늘(18일) 0시를 기해 제주도에까지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었지만 일요일이기에 돌발사건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마음도 울적해서 무등산으로 등산을 갔다. 산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3시쯤에 중심사계곡 버스정류장으로 내려왔다. 집으로 가려고 택시를 탔다.
  택시에 오르자 운전사가 {광주 난리 났어요}한다. 그는 {학생들이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짚차를 불태우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운전사의 얘기를 들었어도 일요일이라는 이유로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전남대부속병원 로터리에서 택시를 멈추고 내렸다. 차에서 내려 막 도청 쪽으로 가려는데 제일X선병원 앞 도로에 경찰 사이카가 가로놓여 차량통행을 막고 있었다. 사이카 옆으로 다가서자 최루탄 냄새가 호흡에 지장을 주기 시작했다. 택시운전사의 얘기가 사실임을 실감했다.
  충장로 입구 도심다방 앞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도청 앞에는 전투경찰들이 도열하고 있었고, 차도 사람도 얼씬하지 못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최루탄 냄새는 더욱 심해져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되고 재채기는 연방 터져 나왔다.
  충장로 입구로 들어서서 우체국 쪽으로 가는데 얼룩덜룩한 군복에 M16소총을 등뒤로 엇갈려 맨 공수부대 군인이 보였다. 손에 70cm가량의 방망이를 들고 있는 군인은 젊은이를 붙들고 뭔가 조사를 하고 있었다. 무장군인의 옆을 지나려니 어쩐지 으시시해졌다.
  우체국에서 금남로를 바라보니 그쪽 입구에도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었고 경찰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목적지로 통하는 모든 길이 막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관광호텔 후문으로 들어갔다. 정문은 대형유리로 되어 있는데 문 앞에서 10여 명의 시민들이 금남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남로는 공포의 도가니였다. 벌써 차량이 통제된 도로에서는 공수부대 군인들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난타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지나가는 젊은이를 붙잡으면 방망이로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갈겼다. 어쩌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면 쏜살같이 달려가서 붙잡아 곤봉세례를 퍼붓고, 군화발로 걷어찼다.
  군인들은 공포에 질린 젊은이들을 도로 한 곳에 팬티만 입힌 채 모았다가 10여 명으로 불어나면 군용트럭에 태워 어디론가 실어갔다. 트럭에 실려 있는 젊은이가 어쩌다 밖을 내다보면 군인들은 몸을 날려 다시 곤봉으로 닦달하고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공수부대원의 무차별 곤봉세례

  이날의 사태는 오전 9시를 전후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16일 야간 횃불 데모를 마친 전남대생들은 휴교 등의 조치가 일어나면 매일 학교에서 모이자고 사전 약속을 했었다. 18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이 확대되자 학생들은 오전에 학교 정문으로 모여들었다. 이미 학교에는 계엄군이 들어와 학생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는 학생과 계엄군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곧 이어 투석전으로 발전했다. 군인들이 학생들을 쫒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광주역으로 도망쳐 집결했다. 이때 모인 학생수는 2백여 명이었다. 이때부터 공용터미널쪽으로 진출한 학생들은 [비상계엄령 철폐], [김대중씨 석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허를 찔린 경찰은 데모대가 공용터미널을 거쳐 광남로 4거리에 이를 무렵, 출동해서 제지에 나섰다. 경찰은 데모대의 전면만을 막지 않고 전면과 후면에서 동시에 압축하는 작전을 폈다. 학생들은 양쪽에서 덥쳐오는 진압경찰을 향해 보도블록을 깨뜨려 격렬하게 항거했으나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거세게 몰아붙이는 경찰의 샌드위치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학생들은 산발적인 데모를 하면서 충장·동산·산수동 등의 파출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박살냈다. 학생회관 앞에서는 경찰의 페퍼포그 차를 뒤집어 불태웠다.
  데모는 오후가 되면서 누그러들었다. 오후 3시를 전후해서 유동 3거리 쪽에서 공수부대 군인을 태운 트럭이 모습을 드러냈다. M16 소총을 등에 엇갈리게 메고, 곤봉을 든 군인들은 땅에 내려 시민들에게 빨리 귀가하라는 경고를 하고는 이내 행동을 개시했다. 유동 쪽에서부터 도청 앞까지 금남로 일대에서 대학생 같은 젊은이는 어김없이 공수부대원들의 표적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군인들의 행동무대는 확산되어갔다. 학생들이 이곳 저곳으로 도망치는 것을 붙잡기 위해 금남로에서 공용터미널, 양동시장, 계림파출소 앞, 광주고속터미널, 광주 MBC 앞, 충장로 등 곳곳으로 확산되어 갔다. 노상뿐만 아니라 달리는 택시와 시내버스를 멈추게 하고 젊은이는 끌어내려 곤봉을 휘둘렀다. 다방 가게 등으로 숨으면 2-3명씩의 군인들이 수색을 해서 잡히면 더욱 가혹한 구타가 뒤따랐다.

국군이 그럴 수 있나

  오후 6시. 온 시가는 쥐죽은 듯 적막했다. 도로에는 사람이 다니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이 서둘러 귀가를 했기 때문이다.
  도로에 인적이 끊기자 군인들은 금남로 일대의 여관 목욕탕 식당 등 접객업소를 뒤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창고 등을 뒤졌다. 여관에서는 신혼여행 온 신랑이 봉변을 당하고, 애꿎은 젊은 종업원도 피해를 입었다. 변두리를 오가는 시내버스도 이미 끊기고, 일부의 택시들만 운행되고 있었다. 때마침 보슬비가 아스팔트를 적시고 있었다. 월산동 로터리에서는 10여 명의 젊은이들이 건너편 원산파출소에서 경비근무를 하고 있는 계엄군을 노려보며 로터리의 쇠말뚝을 뽑으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통금시간인 밤 9시쯤 {광주고속터미널 앞에서 경상도 트럭이 불에 타고 있다}는 친지의 전화연락을 받았다. {경상도 군인이 광주를 때려잡으러 투입됐다}는 유언비어에 흥분한 광주사람들이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19일 오전 9시. 금남로 2가 동구청 앞, 3가 가톨릭센터와 건너편의 제일은행 앞 인도에는 1천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때 공수부대 군인들이 어제처럼 총을 등에 엇갈리게 메고, 손에 방망이를 쥔채 트럭에서 내렸다.
  차에 남아 있는 병력은 50m씩 거리를 두고 풀어놓았다. 도로에 나타난 군인들은 인도에 모여들고 있는 시민들을 차도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군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거나 자기들끼지 어제의 목격담이나 들은 소문을 얘기하고 있었다.
  [금남로 5가 K병원 앞에서 공수단이 여대생을 발가벗겨 트럭에 실었고, 이를 본 병원장 부인이 옷가지를 건네주다 봉변을 당했다], [키타를 갖고 시내버스를 타고 가던 대학생이 공용터미널 앞에서 군인에 끌려 내려와 자신의 키타로 머리를 얻어맞고 키타가 박살난 것을 보았다]는 등의 말이 오갔다.
  연도의 시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어났다. 가톨릭센터 앞에서는 군인이 인도의 시민들에게 [개새끼들]하고 욕을 하자 일제히 [우우]하는 가벼운 소동이 일어났다. 시민들이 동요하자 무전병이 통신기로 무언가 알리는 모습이 보였다. 10여 분이 지났을까 10여 명의 군인을 실은 트럭이 진입, 병력을 풀어놨다. 군인들은 인도를 향해 해산하라고 경고하더니 방망이를 휘두르며 시민들을 덮쳐 들었다. 이때가 오전 10시쯤이었다. 군인들은 황급히 도망치는 시민들 가운데 젊은이를 붙잡아 어제와 꼭같은 방법으로 난타하기 시작했다.

불순분자 첩자라며 기자도 맞아

금남로 일대에서도 동시에 다시 난타가 벌어졌다. 방망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젊은이들은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옷에는 선혈이 얼룩졌다. 군인들은 젊은이들을 팬티만 입혀 아스팔트 바닥에 꿇어 앉혔다. 관광호텔 앞에 꿇어 앉힌 10여 명의 젊은이에겐 팔꿈치를 땅에 대고 기게 했다. 엉덩이가 조금만 올라오면 군화발로 걷어찼다. 새파랗게 질린 젊은이들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호텔 옆 공사장 인도에서 한 젊은이가 도망치다 붙잡혔다. 군인의 방망이가 젊은이의 머리에 떨어졌다. 피가 이마를 타고 흰옷을 빨갛게 적셨다. 젊은이는 군인 앞에 꿇어앉으며 손을 비비며 빌고 있었다. 그런데도 군인은 방망이로 어깨 등 허리 등을 닥치는대로 갈기고 있었다. 그러고는 한사코 버티는 그를 질질 끌어다 다른 젊은이들을 앉혀둔 아스팔트에 꿇게 했다.
  다른 군인들은 동구청 뒷골목 충장로 등지에서 젊은이를 붙잡아 난타를 계속했다. 다방 식당 가정집까지도 찾아가 수색을 했다. 피를 흘리며 끌고 온 사람이 일정수에 이르면 트럭에 실어 보냈다.
  군인들의 난타를 보다 못한 전남도경 간부가 잡아다 모아둔 젊은이를 도망치게 했다. 이를 알아차린 군인은 도경 간부의 뺨을 후려갈겼다. 수미여관 앞에서 수칩을 들고 메모를 하고 있는 지방지의 L기자는 공수단 대위로부터 {불순분자의 첩자}라며 폭행을 당했다. 금남3가 꽃가게 주인은 군인들의 난타를 지켜보다 머리를 맞아 외국인이 병원으로 옮겨다 입원시켰다.
  충장로에서는 공수단 군인에게 쫓겨 남의 집 지붕을 타고 도망치다 지붕이 꺼져 방으로 떨어졌다. 날벼락을 당한 주인집 아주머니가 기절을 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양동 복개상가 다리에서는 젊은이가 양쪽에서 달려든 군인을 피할 길이 없자 4m의 하천으로 뛰어내려 상처를 입기도 했다. 시민들은 군인들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무차별 구타에 흥분한 광주시민

  군인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 시가는 한동안 조용해 졌다. 관광호텔 앞에는 군인들이 1백여 명쯤 밖에 없었다. 오후 2시로 접어들었다. 오전까지도 공포에 사로잡혀 움츠리기만 하던 시민들이 [세상에 저런 만행이 있느냐]며 울분을 터뜨렸다. 가톨릭센터 앞 인도에는 1천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때 가톨릭센터 6층에 공수부대 군인이 있다면서 시민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그곳에다 돌멩이 세례를 퍼붓고, 일부는 군인들이 있는 곳으로 돌진했다. 시민들은 군인들의 무기를 빼앗고 일부에게는 폭행도 가했다. 이때 일단의 군인들이 덮쳐들었다. 시민들이 도망치느라 아수라장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흩어졌던 시민들이 다시 센터 앞으로 모여들었다. 오후 3시쯤이었다. 2-3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센터 앞에 세워둔 CBS 방송국 소속 포니 웨곤 등 2대의 차량을 밀어 동구청 앞에 세웠다. 공중전화박스와 시내버스 안내판을 끌어내 바리케이드를 쳤다.
  광주백화점 신축공사장에 있는 2개의 경유드럼 중 1개를 도로에 쏟아 붓고, 1개는 세워진 채로 불을 붙였다. 화염이 솟아오르자 시민들은 공수부대를 향해 돌을 던졌다. 도열한 채로 서있던 군인들은 [돌격 앞으로]하는 중령의 구령이 떨어지자 시민을 향해 방망이를 휘두르며 난타전을 전개했다.
  시민들은 혼비백산하며 도주하기 시작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뚱뚱보 아주머니는 상업은행 모퉁이에서 군인들의 방망이에 수없이 얻어맞았다.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쫓겼던 금남로 2가의 도로에는 수많은 신발들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거의 같은 시간에 광주 MBC 앞에서도 1천여 명의 시민들이 4대의 차량을 불태우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보다 앞서 계림파출소 앞에서는 군용 장갑차가 시민들에 포위되어 최초로 총기사고가 발생했다. 시민들에게 포위된 장갑차의 군인이 겁에 질려 공포를 쏜 게 구경하는 소년에 맞아 부상을 입혔다고 한다.
  오전까지도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던 시민들이 오후가 되면서 적극 대응하는 분위기로 변해갔다. 이때부터 군용 헬기가 상공을 선회하며 시민들의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헬기가 군중들의 집결지를 지상의 공수부대에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군인들의 난타무대도 중심지에서 소방서, 광주공원, 복개상가 등으로 확산되어갔다. 자연히 병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적십자 병원 근처에서 5-6명의 군인이 모여든 시민들을 쫓았다. 시민들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도주했다. 한참동안 방망이를 휘저으며 쫓던 군인들이 대기시켜 둔 트럭을 타고 떠나버렸다. 그런데 한 명의 군인이 끝까지 도망치는 시민을 잡으려다 그만 낙오병이 되어버렸다. 시민들이 이 사이에 돌멩이를 던지며 군인을 에워쌌다. 뒤늦게 위급함을 느낀 군인은 광주천 제방 아래로 뛰어 내렸다. 흥분한 시민들은 군인에게 돌과 각목세례를 퍼부었다. 군인은 축 늘어지도록 얻어맞았다. 시민들이 물러간 후 병원에서 군인을 데려가 응급치료를 한 후 통합병원으로 보냈다. 사람들은 그 군인이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

시민들 군경에 맞서 투석

  20일 아침의 금남로는 무겁고 스산했다. 여전히 차는 다니지 않았다. 무등극장 앞 식당에서는 경찰의 주문에 따라 19일 점심때부터 9백50여명 분의 식사를 마련하고 있었다. 잡혀간 젊은이들에게 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경찰대원의 식사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오전 8시 구동 실내체육관 빈터에서 변사체가 발견됐다. 신원은 백운동 김모씨로 밝혀졌다. 김씨의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시민들은 군인들의 소행일 것이라고 믿었다. 간밤에 있었던 일로는 도로에 트럭 1대가 전소되어 있었다.
  오전 9시가 되자 금남로에 군인들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모습이 달라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박쥐마크를 달고 있던 어제까지의 군인들이 아니었다. 시민들간에는 옷만 바꿔 입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고, 다른 부대가 투입되었다고 보는 측도 있었다.
  군인들이 거리에 들어선지 1시간쯤 되었을 때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공사를 하다 중단된 충금지하상가 4거리를 중심으로 운집되어 있었다. 3천여 명이 한국은행 광주지점 쪽을 바라보면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한 시민이 군중들에게 군인들의 만행을 성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즉석 성금을 모아 핸드마이크를 구입해서 본격적으로 규탄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3백m 떨어진 관광호텔 앞에, 경찰은 50m 뒤쪽인 전남일보 앞에 도열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계속 지하상가 공사장에서 규탄대회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군인들도 제지하지는 않았다.
  오후 3시쯤이 되었을 때는 군중의 수가 약 7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나면서부터 운집한 시민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오후 5시가 넘을 때는 2천여 명으로 줄어들어 한산하게 보였다.
  그때였다. 한일은행 쪽에서 1백여 대의 택시가 라이트를 켠 채 경적을 울리면서 밀려오고 있었다. 택시들의 뒤를 이어 시내버스 트럭 등이 4차선의 금남로를 가득 메우며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며 꼬리를 물었다. 풀이 죽어 해산하려던 시민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여기저기서 만세를 불렀다. 군중들은 삽시간에 성난 데모대로 돌변했다. [와와] [영차 영차]하는 함성이 금남로를 진동시켰다.
  군인들과 경찰들은 느닷없는 사태에 당황하여 최루탄을 있는 대로 쏘아댔다. 거리는 자욱한 최루탄 가스로 피아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데모대는 군경의 저지선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데모의 열기는 가속화되어갔다. 인근의 시민들은 고무호스로 수돗물을 공급하고, 여기저기서 치약을 나눠주며 최루가스를 중화시키는 모습도 보였다. 얼마되지 않아 소방서의 불자동차까지 등장해서 길게 물을 뿜으며 가스의 독기를 제거하고 있었다. 시민들 가운데서 {소방차까지 끌고 오면 안되는데}하는 탄식도 들렸다.
  밤7시 도청 앞 광장. 도청으로 통하는 금남로는 물론 노동청 앞 도심다방 앞 등 3방면의 도로는 데모대로 꽉 차 있었다. 밖에서 들어 올 수도 없고, 안에서 나갈 수도 없게 되어 있었다. 밤9시를 전후한 시간에 광주 MBC에서 화염이 거대한 불기둥을 뿜어냈다. 얼마쯤 뒤에는 노동청 앞에서 대형버스 한 대가 청사 담을 들이받고 곤두박질을 했다.
  경찰의 저지선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대열이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4구의 시체가 상무관 앞으로 옮겨져 왔다. 앰브런스가 부상자를 싣고 병원으로 나가려다 길이 막히자 분수대를 몇 바퀴 돌고 있었다.

총성과 화염에 쌓인 광주 시가

  도청은 고도(孤島)로 변해 버렸다. 정시채 부지사실에서는 긴급간부회의가 긴장 속에 진행되고 있었다. 한참 후에 국장급 간부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나왔다. 그들 중의 몇몇 간부는 기자들에게 {빨리 피하라}고 알려 주었다. 간부들은 {데모대가 도청 뒷 담장을 헐어내고 있다}면서 함락(?)이 시간문제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일행은 간부 세 사람에게 양영학원 쪽을 지키고 있는 경찰에게 나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간부들은 일행을 인도해서 경찰의 저지선을 빠져나갈 수 있게 했다.
  도청을 벗어나기는 했어도 적당히 갈 곳이 없었다. 시내 전역은 성난 데모시민들로 가득차 있었다. 생각다 못해 동명동에 있는 전남도 교육위원회로 들어갔다. 교육위원회 숙직실에는 10여 명의 직원들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시내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앉아 있었다. 일행은 국세청 앞 도로로 나왔다. MBC방송국은 더욱 세차게 불길을 뿜어내고 있었다.
  갸냘프면서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대한민국 군인이 아닙니까. 광주시민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시민 여러분 모두 일어나 공수부대를 응징합시다} - 여자의 스피커 소리는 멀리 시민관 쪽에서 들리는 듯 하다가 가깝게는 불이 활활 타고 있는 MBC방송국 근처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데모의 규모는 밤이 깊어갈수록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시민들 속에는 국민학교 꼬마도 보였고, 저마다 각목이며 돌멩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밤 10시 무렵이었다. 광주역 쪽에서 요란하게 총소리가 들려왔다. 탄환이 곡선을 그으며 시내 쪽으로 섬광을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총소리는 10여 분 동안 계속 했다. 공중으로 쏘아 올린 것을 보면 위협사격인 것 같았다. 광주역에는 공수부대의 본진이 초진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여왔다.

석가탄일 정오에 터진 총소리

  데모의 열기가 수그러들지 않는 채 부처님 오신 날인 21일이 밝았다. 새벽 1시쯤이었을까. 서석동 광주세무서에서 불길이 솟아났다. 이어서 장동의 전남도청 차고에서도 불길이 일었다.
  광주역 부근에 임시로 들어있는 KBS광주방송국에도 불이 붙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광주주재 조선일보 기자들은 새벽 1시40분쯤에 광주의 상황을 송고했다. 30분 후인 2시가 약간 넘어서 시외전화를 걸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광주의 전화는 시외전화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시내의 데모열기는 변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일행은 교육위원회의 숙직실에서 눈을 붙이고 새벽 4시45분에 다시 시내로 나왔다. 1시간 전까지도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던 함성은 멎었고, 쥐죽은 듯 적막했다. 동계천을 따라 광주 지방 국세청 인도에 이르렀다. 도청차고는 불이 타다 말았고, MBC와 광주세무서는 전소되어 있었다.
  2·5t트럭 한 대가 빵상자 위에 검게 그을린 시체를 싣고 노동청 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조금 후엔 삼화 고속버스가 나타났다. 차에는 초췌한 모습의 청년들이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각목으로 차체를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고속버스는 오던 길을 되돌아 가 버렸다. 4명의 경찰관이 버스에 부딪쳐 희생된 노동청 앞에는 각종 차량들이 불에 탔거나, 이그러져 있었다.
  금남로 1, 2가에도 수습대의 택시·버스들이 흉칙스럽게 널려 있었다. 공용터미널 로터리에는 12t 트럭이 짐을 가득 실은 채로 전소되어 내려앉아 있었다.
  광주역 광장에도 크고 작은 차량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채소를 실은 트럭에서는 불길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레이 하운드 터미널과 광주 고속 터미널 측은 20여 대의 고속버스가 시위대에 의해 탈취당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오전 8시. 2시간 전까지도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던 금남로에는 수만 명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광남로 4거리를 지나고 있는데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서 군납용으로 만든 짚차 2대가 한일은행 쪽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중앙교회 앞 도로에는 8t 트럭에 30여 명의 시민들이 손에 낫과 괭이 등 연장을 들고 있었다.
  오전 9시. 밤을 새며 데모를 막았던 군인과 경찰들이 관광호텔 앞에서 엄청난 군중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군중들 사이로 리어카에 태극기로 덮혀 있는 희생자의 시체도 보였다. 선두대열에서 공수단 군인들의 만행을 규탄하며 열띤 성토를 하고 있었다. 구용상 시장이 나타나서 시민들을 설득하자 박수를 치는 사람, 야유를 하는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시민들은 당국에 시민들의 의사를 전달할 대표를 즉석에서 선출했다. 김상호(전남대) 김범태(조선대) 전춘심(가두방송의 주인공) 등이 뽑혔다.
  이들은 도청으로 들어가 장형태 지사를 만났다. 대표들은 장지사를 만나서 군인들의 과잉진압 사과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장지사는 시민들의 의사를 군당국에 건의하겠다는 답변만을 밝힐 뿐이었다. 대표들은 되돌아와 협상결과를 전했다. 결과가 전해지기 전까지는 시민들이 군인과 경찰에게 물을 떠다주는 등 우호적인 분위기가 한참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협상의 결과가 소득이 없었다고 전해지면서 분위기가 급격히 악화되어 갔다.
  장지사와 구시장은 경찰 헬기를 타고 금남로 상공에서 {더 이상의 희생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시민여러분 빨리 귀가하십시오}하며 마지막 호소를 거듭했다. 시민들은 장지사의 귀가 종용을 듣고서도 오히려 냉소를 보이기도 했다.
  우리 기자 일행은 동구청 뒤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도청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흘러 나왔다. 애국가가 멈추고 얼마 뒤에 총소리가 콩볶듯 귀청을 찢었다. 12시5분이었다. 식당을 뛰쳐나가 구청 뒷길로 나오자 벌써 시체를 둘러멘 사람, 부상자를 병원으로 옮기는 사람, 골목으로 숨는 사람으로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21일 오후 시민들 총을 들다

  동구청 3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전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금남로 2가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저기 아스팔트 바닥에는 선혈이 얼룩져 있고, 도망치다 벗겨진 신발들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도청 분수대 앞에는 군인들이 금남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고, 전남일보와 수협도지부 옥상에도 군인들이 도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총을 겨누고 있었다.
  살기가 온 시가를 짓누르고 있었다. 오후 3시쯤이었다. 국민은행 쪽에서 아시아 공장의 경장갑차가 막대기에 태극기를 펄럭이며 동구청 쪽으로 진입했다. 장갑차에는 젊은이가 한손에 카빈을 들고 있었다. 차가 구청 정문쯤에 이를 때 적막을 찢는 M16의 연발음이 터져 나왔다. 총소리와 함께 장갑차에 상반신을 내밀고 있는 젊은이가 푹 쓰러졌다.
  그대 차는 재빨리 되돌아 군중들이 모여 있는 국민은행 쪽으로 도망쳤다. 이 광경을 목격한 일행은 불안했다. 일행의 위치는 사정거리 안에 있었기에 초조하기까지 했다. 일단은 구청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살금살금 후문계단을 나서려는데 M1을 든 20세 가량의 까까머리 청년이 불쑥 나타났다. 가슴이 철렁했다.
  일행 중 K시가 {학생 조심 해}하자 청년은 {저 새끼들 한 놈 죽이고 죽을 겁니다}하는 것이다. 일행은 후문을 빠져 나와  건물의 벽 쪽에 바싹 붙어 걸음을 재촉했다. 전남일보 옥상의 군인에게 노출되지 않아야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사정거리를 탈출한 일행은 동명동의 D여관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광주가 객지인 2명의 동료를 남겨두고 각자 귀가를 서둘렀다. 오후 6시였다. 전남여고 입구 다리에서 동계천을 따라 Y경찰서장이 직원을 대동하고 점퍼차림으로 어디론가 바쁘게 가고 있었다.
  서로 목 인사만을 나눌 뿐이었다. 대인시장으로 접어들었으나 한 사람의 상인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신탁은행 앞의 금남로를 지나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도청 쪽의 군인들이 총을 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잔뜩 긴장하면서 길을 건넜으나 금남로 일대는 너무도 고요했다.
  다시 광주극장 앞에 이르렀는데 광주공원 쪽의 도로에 각종 차량들이 어지럽게 오가고 있었다. 가던 길을 그만두고 충장로로 들어가 광주일고 쪽으로 갔다. 광남로를 바라보니 그곳에도 차량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트럭에는 총을 든 사람들이 보였다. 다시 행선지를 바꿔 골목으로 들어가 복개상가 다리쪽으로 갔다.
  다리 오른쪽 4거리에는 이른바 시민군이 헌병 투구를 쓰고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거리를 질주하는 차량마다 무기를 소지한 시민군으로 가득차 있었다. 광남로의 양 옆 인도에는 남녀 노소의 시민들이 나와 시민군에게 박수를 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인도 사이에도 이따금씩 총을 들고 조작법을 배우려는 듯 만지고 있는 젊은이도 있었다. 5km 남짓한 거리를 걸으며 귀가하기까지 가장 불안스러운 것은 총기의 오발이었다. 총을 갖고 있는 시민군 중에는 총기 조작법을 모르는 10대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시간이 넘어서 귀가했을 때는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집에 돌아와 있는데도 목포방면으로 통하는 송암동 대단위 연탄공장쪽에서 총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간의 경험으로도 M16과 M1 또는 카빈소총의 소리를 들으면 구별할 수가 있었다. M16은 당당하고 연속성이었으나 M1 등은 한마디로 초라하게 들려왔다. 동네 사람들은 밤이 되자 담요로 창문을 가려 집안의 불빛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는 등 전시를 방불한 생활로 들어갔다.

시가전을 치른 듯한 광주의 도심

  22일 아침 6시. 집 앞 골목에서는 핸드마이크 소리가 들리며 소란스러웠다.
  {도청에서 시민궐기대회가 있으니 모두 참석하라}는 시민군의 호소였다. 아파트 앞에는 시민군이 몰고온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흰 천으로 머리를 두른 젊은이 10여 명이 총을 들고 있거나 각목으로 차체를 두드리고 있었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꼬마도 보였다. 도청 쪽으로 가는데 버스를 이용하고 싶었으나 그냥 걷기로 했다. 혹시라도 버스를 탔다가는 사후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도청까지의 거리가 수십리나 먼 거리처럼 느껴졌다.
  50여 분을 걸어서 금남로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경찰의 투구를 쓰고 있는 시민군, 머리에 타올을 덮어 모자를 쓴 사람, 눈만 보이게 복면을 한 사람들이 저마다 총을 들고 있었다. 도로를 질주하는 페퍼포그차며, 각종 차량에는 흰색, 붉은색으로 {○○○찢어 죽이자,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금남로 2가와 3가는 뒹구는 차량과 유리조각이 널려 있어 어제의 격전을 실감하게 했다. 동구청 후문 시멘트 바닥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혹시 어제 마주친 까까머리 청년이 희생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했다. 전남일보 건물 모퉁이에서는 여학생들이 시민들에게 희생자의 명복을 빌자며 검은 리본을 달아 주고 있었다. 금남로 입구 광장에는 석가탄일을 기념하기 위해 가설해 둔 탑 모양의 아치가 꼴사납게 찢겨 있었다. 상무관에는 어느 틈에 옮겼는지 희생자들의 관이 즐비하게 안치되어 있고, 조문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관에는 태극기가 덮혀 있었으나 심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계엄군이 그렇게 사수하려 했던 도청은 시민군이 장악해서 정문에는 모여든 시민들로 법석을 이루고 있었다. 민원실 앞에서는 시민군이 희생자의 얼굴을 흑백사진으로 찍어 가족들에게 확인시키는 모습도 보였다. 희생자 확인소에는 대부분이 부녀자들로 붐볐는데 더러는 목을 놓아 통곡하는 부인도 있었다. 도청의 스피커에서는 부상자의 수술용 피가 모자라는 생명이 위태롭다며 헌혈을 호소하는 방송이 반복되고 있었다.
  도청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신분을 확인했다. 신분을 밝혀도 시민군 보초는 {내신기자는 출입을 못한다}고 제지했다. 이와는 반대로 외신기자에게는 출입이 자유스럽게 허용되었다.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도청의 헌혈 호소방송을 들었는지 헌혈하려는 시민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헌혈차 줄이어

  대부분의 헌혈차는 남녀고교생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 도청 앞 광장으로 돌아 왔을 때는 넓은 광장을 가득 메울 만큼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4일간의 목격담을 주고 받거나 사태의 추이를 예상하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신안동에서는 임신 8개월의 최모 여인이 고교 교사인 남편을 마중가다 희생됐다] [도청 옆 도심다방 3층에 살고 있는 집주인이 어제 점심을 먹다 죽었다] [관광호텔 뒷편 삼양백화점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 밖을 내다보다 희생됐다] [광주 경찰서 앞에서는 길가던 국민학생이 죽었다] [화정동 어느 동네는 군인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빨래를 널던 여인이 죽는 등 희생자가 많았다]는 등의 얘기들이었다.
  또한 도청에서 계엄군과 경찰이 퇴각한 사실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목격담이나 소문을 대화의 주제로 삼고 있었다. 막강한 화력을 지닌 공수부대가 도청을 버린 시각은 대체로 21일 오후 5시30분을 전후한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이들이 물러난 결정적인 이유는 강진인가 어느 예비군 무기고에서 피탈한 LMG(경기관총)가 전남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 설치된 직후였다고 한다.
  문제의 기관총을 다루는 시민군은 전투경험이 많은 예비역인데 도청 쪽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붓자 군인들이 급히 퇴각하다가 증심사 계곡에서 낙오된 군인 2명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고 한다.
  군인들은 조선대 뒷산을 따라 증심사 계곡의 [배 고픈 다리]를 경유 화순 너릿재를 통과지점으로 삼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또 배고픈 다리 부근에서는 공수부대 지휘관으로 추측되는 준장의 신분증이 발견되었는데 지갑 속에는 장군의 가족사진도 들어 있었다고 한다.
  군인들이 퇴각하자 딱하게 된 것은 경찰이었다. 믿었던 군병력이 황급히 철수하자 도청 구내 있던 경찰은 개인별로 해산한 듯 했다. 저마다 구내 곳곳에 장비를 버리고 인근 주택가에 들어가 통사정을 해야 했다. 시민군에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우선 옷을 갈아입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장동, 서석동 일대의 민가로 들어간 경찰들은 사복을 구걸해서 입기에 소란을 피우는 촌극을 연출했다고 한다.
  어떤 집에는 한꺼번에 4-5명이 몰려와 옷가지를 주기는 했어도 신발이 없어 떨어진 운동화 슬리퍼를 주기도 했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려진 얘기지만 그때 경찰은 송정리에 있던 안병하 국장의 지시로 해산했는데 당시 안국장은 전화로 {각자 알아서 할 것}이라는 전갈을 보냈다고 해서 한 때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군인과 경찰이 없는 사실상의 치안 공백이 되자 광주시내 뜻있는 유지들은 곳곳에서 사태수습의 방안을 모색하자며 나섰다. 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청에서는 정시채 부지사 등 일부 간부들이 나와 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수습위 선정에도 이해 엇갈려

  여기다 78년에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바 있던 丁씨 등이 오전부터 도청으로 들어가 시민군의 곁에서 수습위원회 결성을 서둘렀다고 한다. 한편 N씨·C씨 등 언론계 출신들은 그들대로 이날 낮에 제일은행 뒷편에 있는 식당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독립유공자 C씨 등의 유지들로 대책위를 구성해서 사태를 수습해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들 인사들은 자신들의 복안을 갖고 도청으로 들어가 학생과 시민군측에 전달했으나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하자 흐지부지 물러나고 말았다.
  또 한편으로는 남동성당에서 김성용 신부·이기홍 변호사 등 재야측의 대책 모임도 있었다. 여러 갈래의 수습대책은 이해가 엇갈려 쉽사리 한 목소리를 내기는 처음부터 어려웠다. 그룹별로 보면 무기를 빨리 회수해서 반납하는 데서 실마리를 찾자는 측과 군부의 과잉진압사과·명예회복·보복금지의 사전보장을 요구하는 쪽으로 나누어졌다.
  여기다 잘만 하면 정치적으로 입신의 기회도 될 수 있다고 계산하는 부류까지 섞여 있었다. 더욱이 이런 유형의 인사들은 이날 광주에 올 예정인 박충훈 총리서리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마저 계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청 내에서 어떤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후 2시에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대회가 열렸다.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던 희생자들의 관이 광장으로 나왔다. 식순은 정권의 핵심인물 ○○○씨의 허수아비를 분수대 위에서 화형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허수아비가 불길에 휩싸이자 5만여 명을 헤아리는 시민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에 이어 오늘의 사태를 수습하는 방안을 토론하는 순서가 됐다.
  丁씨가 등단해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가 계엄군을 질타하는 연설을 할 때까지는 박수를 받았다. 그러고는 무기를 회수해서 반납하고…하는 말이 떨어지기 전에 어떤 젊은이가 마이크를 나꿔챘다. 젊은이는 {피의 보상도 없이 무기 반환이 있을 수 있느냐}면서 핏대를 올렸다. 군중들 속에서 옳소가 연방 터져나왔다.
  한참동안 그의 연설이 계속되고 있는데 갑자기 모여있던 군중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기자 일행도 덩달아 농협도지부 골목으로 달아났다. 잠시 후에 되돌아가서 알아보니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계엄군이 몰려온다}며 소리를 쳤던 것이다.
  군인과 경찰은 떠났지만 시민들 속에는 요소요소에 군경 등 정보요원이 많이 섞여 있음을 입증하는 해프닝 같았다. 시외전화가 불통되어 송고할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지혜(?)를 짜내 근처에 있는 전남도경국장 관사로 들어갔다.
  관사에는 가정부만 남아있고, 국장의 가족들은 아무도 없었다. 관사에서 경비 전화로 치안본부 기자실의 동료기자를 통해서 광주의 사정을 알린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계엄군 재진입 소리 때문에 한차례의 소동을 빚자 전남대생들이 남도예술회관 벽에다 학생들을 일정한 장소로 모이도록 안내문을 붙였다.
  학생들은 주체가 없이 혼란만 거듭하는 상황에 자신들이 본격적으로 대처해야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그들이 어디서 모여 어떤 대책을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오후 4시쯤부터 전남대 교수들의 얼굴이 많아졌다. 도청 내에서는 정씨 등 8명이 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 계엄분소에 통고했다고 한다.
  발족된 위원회는 비록 시민들에게는 공감을 받지 못했지만 계엄분소측은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었다. 그들은 오후부터 무기를 회수해서 23일중으로 대표들이 계엄분소를 방문하겠다고 통고했다는 것이다.

시민군, 무장하고 군인과 대치

  수습위와는 별도로 시민군측은 21일 오후 광주공원에서 허술한 것이지만 지휘계통을 마련했다고 한다. 낮 12시5분쯤 군인들의 집중사격으로 밀려나 국민은행쪽에 몰려 있던 시민들은 3-4시간을 버티다 공원으로 이동했다.
  오전 11시 이후부터 나주·화순·영광·강진 등지에서 경찰·예비군·탄광촌에 무기는 지원동과 백운동 등지에서 달라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급되었다. 그런 무기들이 12시 무렵에는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는 금남로의 군중 사이에도 상당히 등장했다고 한다. 무기가 등장하면서 계엄군에 대한 적극 대응의 분위가가 고조되었다.
  이때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군납용으로 제작된 경장갑차 한 대가 군인들의 저지선을 돌파했다고 한다. 수협 쪽에 있던 군인이 장갑차에 깔려 희생자가 발생하자, 일단 도청으로 철수한 군인들이 다시 도청 앞 분수대로 나타나 대오를 정리했다.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진 것을 신호로 발포 명령이 나왔을 것이라고 한다.
  군인들의 발포로 밀린 시민들은 사정권 밖에서 있다가 공원으로 철수했다. 공원에서는 경험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무기조작법, 조편성 등으로 전열을 가다듬어 이른바 시민군이 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전남대 부속병원의 LMG가 계엄군이 사수하고 있는 도청 쪽으로 불꽃을 토해내고, 얼마되지 않아 군병력이 퇴각했다.
  21일 오후 6시가 지나 군경의 퇴각 사실이 시민군에게 알려지고, 곧 이어 선발대가 도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들은 외곽경비대책을 세웠다. 화정동 공업단지 입구, 백운동 대동고교 앞, 지원동, 문화동 교도소 앞, 운암동 등지가 시민군의 경계지역이었다.
  수습대책을 싸고 진통을 하고 있는 22일도 시민군의 외곽경비선쪽에서는 간단없이 총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시민군의 경계지역 밖에는 벌써 21일 오후부터 군병력이 출동해서 차단하고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시민군과의 총격전이 벌어지고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한가지 특기할 일은 도청의 공수부대가 산길로 화순 너릿재와 송암동 대단위 연탄공장을 빠져나갈 때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력과 오인으로 인한 충돌이 벌어졌다고 한다. 뜻하지 않은 돌발 사건으로 공수부대원이 타격을 입고 인근의 주민들도 느닷없이 피해를 크게 입었다고 한다. 아베크 남녀가 다치고, 집안에 있던 젊은이가 목숨을 잃고, 하천에서 물놀이를 하던 어린이가 숨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날 송암동쪽에서는 군용 헬기가 산꼭대기를 반복하여 비행하는 모습이 보였었다.

질서 되찾은 광주 도심

  치안공백의 하루는 저물어갔다. 어제의 경험을 살펴 지름길을 택해 귀가를 서둘렀다. 월산동 월산국교 쪽을 거쳐 [수박등]을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월산동 로터리에서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 20대와 5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카빈소총을 들고 불쑥 나타났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불안했다. 수박등을 올라 갱생원을 바라보니 총을 멘 사람들이 서성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지름길을 택한 게 오히려 고행이었다. 9시30분에는 래광(來光)하여 계엄분소만 들렸다 간 박총리서리의 담화문이 라디오를 통해 발효되었다. 그의 방송내용은 사태를 호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 같았다. 그의 담화문은 {군의 발포는 자위권 발동}이라며 불순분자의 책동에 시민들은 현혹되지 말라는 요지였다.
  23일 새벽 순환도로쯤으로 짐작되는 지점을 지나고 있는 기계의 소음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군대의 탱크가 이동하는 소리 같았다. 오전 8시. 골목으로 나가니 신우아파트 6동 옥상에는 군인들이 기관총을 설치하고, 총구를 아래쪽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순환도로 곳곳에는 참호를 파고, M16을 든 군인들이 행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총구는 지나는 사람의 가슴쪽을 조준하고 있어 소름이 끼쳤다. 군대의 전진배치 지점은 백운국민학교 앞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농성동 농촌진흥원까지 조여왔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이날은 계엄군이 광주를 재장악하려는 D데이 였다고 한다.
  군의 작전계획은 장형태 지사에게 알렺 그가 중앙에 급히 알려 좌절되었다고 한다. 장지사는 {이날 장악작전이 강행되면 엄청난 출혈을 초래한다}면서 작전의 중지를 호소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군계통조직으로부터 미움을 사게 된 계기가 됐다고 한다. 백운동까지 출동한 군인들의 지역을 거쳐 국민학교 앞으로 갔다. 그곳에는 외신기자들이 시민군이 제공한 승용차를 타고 와서 촬영을 하는 등 열심히 취재를 하고 있었다. 금남로는 어제보다는 한결 질서가 있어 보였다. 시민들은 시청 청소부들과 함께 거리에 널려 있는 유리조각, 돌멩이 등 열심히 쓰레기를 쓸고 있었다.
  거리를 질주하는 차량은 거의 없었다. 시민들은 도청 앞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오전부터 도청 정문에는 시민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날부터 내신기자들도 대책위로부터 증명을 발급받아 출입이 허용되었다. 정부지사실에서는 일찍부터 수습위원회 구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었다. 논란 끝에 어제 구성된 8인위원을 전남·조대생 각 10명, 유지 10명 등 30명으로 확대 개편했다고 한다.

8개항의 협상문안 작성

  새로 개편된 수습위는 무기관리와 차량통제에는 쉽게 의견을 모았다. 경비근무는 조장의 통제하에 신분이 확실한 사람에게만 무기를 갖게 하고, 모든 차량은 도청 앞으로 집결시켜 통제반의 지시를 받게 했다. 위원회의 결정은 도청 스피커를 통해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에게 방송되었다.
  낮 12시 같은 장소에서 수습위가 속개됐다. 이번에는 계엄분소에 파견할 위원과 협상안건이 도마 위에 올랐다. 격론이 계속됐다. 학생측도 의견이 달랐고, 일반인도 두 갈래로 팽팽히 맞섰다. 조속히 무기를 회수해서 반납하자는 측과 그동안의 희생과 보복을 어떻게 하느냐는 주장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정씨 등이 주동이 되어 8개항의 협상문안을 작성되었다.
  오후 1시쯤에 도청 앞 광장에서 2일째 시민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는 협상대표를 파견한다는 사실과 약간의 회수된 무기를 반납한다는 사실과 약간의 회수된 무기를 반납한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고지했다. 3명의 대표들은 계엄분소로 가서 8개항의 협상조건을 제시했다.
  파견된 대표들은 돌아와 다음 날인 24일자에 발행한 유인물에서 계엄군의 시가진입 금지에 대해 {시민이 발포하지 않는 한 진입이나 발포를 않겠다}는 등의 협상성과를 거두었다고 밝혔다. 시민들은 대표들을 보낸 뒤에도 궐기대회를 계속했다.
  오후 5시쯤에는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금남로-유동의 거리-돌고개-진흥원 앞까지 가두행진을 벌렸다. 대열 선두에는 ○○○처단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도 보였고, 투사의 노래 등도 합창하고 있었다.

무기 반환 놓고 수습위 공전

  사태가 발생한 지 6일째, 군경이 외곽을 차단한 지 3일째로 접어들자 광주는 육지의 섬으로 변해갔다. 그 때문에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TV방송은 20일부터 중단되고, KBS방송은 송신소를 통해 청취될 수 있었다. 시외전화는 21일 새벽 2시를 기해 불통되었고, 시외버스·고속버스·열차도 이날부터 운행이 중단됐다. 초·중·고·대학도 교문을 닫았고, 2개의 지방지도 20일자를 발행하고는 중단되었다. 오로지 수돗물과 전기, 그리고 시내 전화만은 정상이었다.
  광주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은 반미 분위기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군인들의 가족·기관원들은 자기집을 나와 민간인 친지들의 집에서 신세를 지는 사람이 많았다. 한꺼번에 10여 명의 대식구를 맞은 집에서는 쌀이 동나 가게나 수퍼의 라면이 매진되기도 했다. 도청 인근의 주민들은 시민군이 이리역 폭발사건 때의 3배이상이나 되는 TNT를 도청 지하에 보관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피난가는 사람이 많았다.

  지원동 등 군인과 시민군의 경계선에는 매일 광주를 빠져나가려는 피난민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자동차로 경계지역을 나가려던 사람들은 목숨을 앗긴 경우가 많았다. 영암까지 매일 출퇴근을 했던 C모씨는 직원들과 함께 22일 오전 8시 백운동에서 송암동으로 걸었다.
  백운동을 출발할 때 검은색 승용차가 5명의 승객을 싣고 목포방면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자신들이 송암동 군인들의 초소 근방에 왔을 때 도로변에 문제의 승용차가 벌집처럼 총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C교감은 차속에 피가 묻어있는 점으로 미루어 승객들이 모두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실제로 외곽경비를 맡고 있던 군인들에게는 걸어서 손을 흔들어 통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신분증을 조사한 후 보내지만, 차량에게는 무조건 사격명령이 내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시민군의 활동을 분쇄하기 위한 작전 명령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24일은 토요일이었다. 협상대표들이 계엄분소에 찾아가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해 궁금했는지 시민들은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거리는 한결 깨끗했다. 덩치가 큰 차량의 잔해들은 방치되어 있었다. 오전 10시. 부지사실에는 위원들이 모였다. 계엄분소와의 협의 결과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보고대회를 열기로 했다.
  보고는 대책위 이종기 변호사가 맡기로 했다. 분수대 주위에는 시민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이 변호사는 협상결과를 보고하며, {이제는 무기를 조속히 회수하자}고 제의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학생 등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났다. {집어치워, 죽여버려} 등 욕설이 쏟아지면서 보고대회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수습위원들은 도청으로 들어갔다. 무기를 빨리 회수하자는 측과 보장도 없이 무기를 내주어서는 안된다는 측이 설전을 벌였다. 이때 김성용 남동성당 신부가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김 신부는 난상토론을 하고 있는 수습위원들을 향해 {대가없는 무기반납은 안된다. 그간의 희생이 너무 크다}는 요지의 주장을 하고 나섰다.
  수습회의는 난항을 거듭했다. 난항이라는 표현보다는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시민들 사태해결을 기대

  이렇게 되자 기존의 수습위원들은 설 자리를 잃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광장에서 도청 안의 수습결과를 지켜보며 기다리는 시민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의 항공모함 코럴시호와 E3A 조기경보기 파견 등의 소식을 들었다며, 카터행정부가 광주 시민을 위해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군부에 대한 획기적인 제재가 있을 것이라며 아전인수식 희망에 들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갖가지 좋지 못한 소식들이 전해져 시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라디오 뉴스에서는 이창용(46)이라는 간첩의 검거 사실이 발표되었다. 정부당국은 이가 광주에 들어가려다 군대의 삼엄한 경비 때문에 잡입에 실패했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광주에는 오열들이 들끓고 있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인식시키려 하고 있었다. 여기다 10·26사태의 주범 김재규의 사형집행 사실도 시민들에게는 불안한 소식의 하나였다.
  시민들 가운데는 김의 사형이 광주사태와는 상관이 없지만 정국이 강경 쪽으로 치닫고 있음을 예견하기도 했다. 주말도 오후로 접어들었다. 시민들은 행여 좋은 소식이 있을까 해서 광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오후 3시. 3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다시 시민대회가 열렸다. 이날도 허수아비 화형식이 있었고, 좀더 버티자는 내용의 호소가 주제를 이루었다.
  이날 집회에는 20일 철야데모 때 마이크를 잡고, 시민들의 참여를 절규했던 전모여인(32)을 간첩용의자로 붙잡았다. 시민군은 그 동안 사라졌다가 나타났고, 주소 등도 횡설수설하는게 의심쩍다고 여겨 계엄분소에 넘겼다. 시민군은 정부당국이 광주의 사태를 간첩 등 불온세력과 결부시킨게 마음에 걸려 22일에 이어 이날까지 2명의 혐의자를 잡아 이첩한 것이다.
  상무관과 도청 구내에 안치되어 있는 희생자들의 관에서는 심하게 악취가 풍겼다. 날씨는 더워가고, 수습의 실마리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광주시내 기독교병원·전남대 부속병원 등 종합병원이나 개인병원은 부상자들로 넘치고 있었다. 종합병원에는 병상이 부족해 환자를 복도에 두고 치료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중환자의 수술용 산소와 중요한 약품이 동이 나 의료진들은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여기다 매일 늘어가는 사망자의 시신을 입관시킬 관마저 부족해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병사했거나 자연사한 부모 등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차라리 고통이었다.
  관도 구하기 어렵고, 객지의 일가친척에게도 통지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시장이 문을 닫고 있어 제물도 준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갑작스럽게 사람이 많이 모이면 무슨 변고가 있을지도 알 수 없어 시내에 있는 친구들에게로 부음을 낼 수가 없었다. 장지는 군인들의 경계선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장의차도 운행할 수가 없었다.

최대통령 來光에 기대 걸어

  일요일인데도 시민들은 여전히 도청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날은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에 오게 되어 있었다. 라디오 뉴스를 듣고 대통령이 내광한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무언가 좋은 결단을 내려 줄 것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가 무슨 힘이 있느냐}며 기대할 게 없다는 시민도 있었다. 도청 내에서 며칠씩 철야를 하며 사태수습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각계 인사들도 모두 지쳐 가고 있었다.
  이런 판국인데 이날 오전 9시쯤에는 이른바 [독침사건]이 터졌다. 구내에서 장모씨(24)가 독침에 찔려 쓰러진 것을 옆에 있던 정모씨(23)가 입으로 빨아 같이 중독이 되어 대학병원으로  급히 옮겼다.
  시민군이나 도청 안의 수습위 관계자들은 크게 혼란에 빠져들었다. 시민군측이 이 사건을 [공작차원의 계략]으로 느낀 것은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이 소동을 계기로 온건파를 대변한 전남대의 김모군이 학생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나고, 강경파의 조선대 김모군이 나서게 됐다.
  수습위는 기능을 잃어가고, 한두 사람씩 자리를 떠났다. 남동성당의 김신부 등은 이날 오후 도청에서 수습위를 정비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내광한 최대통령에게 ① 정부의 과오 인정 ② 보복을 않겠다는 확약 ③ 피해 보상 등을 건의하기로 했다.
  김신부 등은 최대통령이 최소한의 수습의지가 있다면 윤공희 대주교는 불러서 만나 주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면 윤대주교가 대통령에게 광주의 분위기를 알려주며 수습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 것 같았다. 김 신부등의 이런 기대와는 달리 최대통령은 상무대 계엄분소에서 계엄군 지휘관과 장형태 지사만을 만나고는 특별담화문을 녹음한 뒤 서울로 떠나 버렸다.
  도청 앞에 모인 시민들은 7만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시민들은 계엄분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통령의 방문에 영향을 주려는 듯 평소보다 많이 운집했다. 그러나 수습위의 상태나 대통령의 동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후 5시쯤 분수대에서는 시민들의 결속을 다지는 궐기대회에 이어 진흥원까지의 시가행진도 있었다.

「즉각 무기를 반환하라」

  시민들은 25일 밤을 우울하게 지냈다. 대통령의 내광 특별담화를 라디오를 통해 들었으나 신통한 게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시민들은 아침부터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우려하고 근심했던 일이 터졌다. 하나는 26일 새벽 4시30분쯤에 서구 사구동 734-1 최던준씨(52)집에 무장괴한이 칩입, 최씨의 부인 최소례 여인(35)과 아들 등 일가족 3명을 쏘아 살해했다.
  다른 하나는 지난 23일에 이어 계엄군이 공업단지 입구 이른바 [판문점]을 넘어 농촌진흥원을 비롯한 순환도로에 전진배치된다. 군의 전진배치는 포위망을 압축하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맥이 빠졌고, 도청의 시민군은 대혼잡을 이루었다. 이날 새벽 5시 도청의 시민군 상황실에는 급보가 날아 들었다.
  농성동에서 걸려온 전화의 목소리는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쳐들어온다}는 다급한 전갈이었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던 시민군들은 여기저기서 웅성대며 수라장을 이뤘다. 도청에서 밤을 샌 김신부 등도 농성동쪽의 친지들에게 전화를 걸어 탱크의 침입을 확인했다. 김신부는 부지사실로 들어갔다. 정부지사는 의자에서 잠을 자다 문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김신부가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다고 말하자 그는 {내가 밖에 나가서 알아보겠다}며 나간 후로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김신부는 도청에 남아 있는 수습위원 등 17명을 향해 「우리가 나가 방패가 됩시다」하며 비장한 제의를 했다.
  이 제의에 따라 일행은 농성동 쪽으로 갔다. 김신부 등은 농촌진흥원 앞에서 계엄군의 탱크와 마주쳤다. 소령이 언짢은 표정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소령은 김신부 일행에게 「조금 후에 부사령관이 오면 말하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탱크 주변의 옥상과 도로 양편에는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약 5분쯤 지났을 때 검은 승용차가 탱크 쪽으로 굴러왔다. 차에는 소장 계급장을 단 장군이 부관을 대동하고 내렸다. 김신부는 장군에게 다가가서 「계엄군이 원위치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장군은 계엄분소에 가서 말하자며 김신부가 요구한 사항에 대해서는 묵살하는 태도였다. 신부 일행은 「군이 원위치로 가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완강히 버티었다. 그러자 소장은 소령에게 후퇴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탱크와 계엄군이 물러간 것을 보고 김신부 일행 중 11명이 상무대의 계엄분소로 향한 것은 오전 10시였다.
  사령부에는 소장 2명, 준장 2명,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는 헌병이 나와 일행과 대좌했다. 김신부는 「계엄군이 왜 진입 않는다는 약속을 어겼느냐」며 따지자 장군은 「대화할 시간은 30분이다」며 그 시간 안에 얘기를 끝내라고 잘라 말했다. 장군은 「나는 군인이니 정치를 모른다」며 ①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하면 ② 경찰로 하여금 치안을 회복하게 하겠다며 무기 반납시한은 26일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명령하듯 말을 끝냈다.
  일행은 오후 2시까지 버티면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하려고 발버둥쳤다고 한다. 성당으로 돌아온 김신부는 도청으로 들어가 남아 있는 50여 명의 학생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도청을 나와 서울로 떠나 버렸다. 김신부 등은 계엄분소에서 강제진압의 분위기를 느끼고, 자신들의 힘으로 이를 막아보려고 몸부림쳤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계엄분소의 그런 분위기를 며칠씩 잠을 자지 못하고 버티고 있는 학생들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었는지 모른다. 김신부가 도청을 떠날 무렵, 지난 21일부터 집무실을 떠났던 장지사가 등청했다. 도청에 돌아온 그는 상무관으로 들어가 희생자들에게 분향했다.
  이어서 그는 「이 이상 사태를 지연시키면 그 원인이야 어디에 있건 간에 사태 수습을 위하여 바람직스러운 일이 못된다」는 요지의 담화문을 마련, 시민들에게 뿌렸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의 담화문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의 시민들로서는 그가 18일 모친상을 당하고, 상무대에서도 별로 역할을 한 게 없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끝내 피를 뿌린 도청

  27일 새벽 3시를 전후한 시간이었다. 둔탁한 탱크소리가 들려오고, 얼마 되지 않아 M16의 연속성 파열음이 시민들을 선잠에서 깨게 했다. 어디선가 여학생의 자지러지는 애원이 스피커를 통해 귓전에서 부서졌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모두 일어나셔서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
  애절하다 못해 피를 말리는 듯한 절규를 듣고서도 시민들은 방안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콩볶듯 이어지는 총소리에 질려 있는 시민들은 누구하나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계엄군이 정확히 몇 시에 작전을 개시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1시간 30분-2시간 가량의 시간이 흐른 새벽 5시쯤부터는 총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올 뿐 계속되지 않았다. 그때쯤에는 시민군의 거점인 도청과 광주공원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잔인한 어둠이 걷히고 6시로 접어들었다.
  라디오에서는 「폭도들은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는 소리가 반복되고 있었다. 뉴스시간에 「계엄군이 광주를 완전히 장악했다」면서 공무원은 오전 7시에 전원 출근하라고 알리고 있었다. 시민들에게는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반복하고 있었다. 아침 7시. 공무원들의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신우아파트 옥상에는 군인들이 기관총을 설치하여 겨냥하고 있었다.
  도로 곳곳에는 참호가 파져 있고, 군인들이 착검한 총을 쥐고 있었다. 대성국민학교 정문 앞에서 검색을 받았다. 검색을 받고 현대극장 쪽으로 가자 그곳에는 극장 입구로 들어오라고 하더니 몸에 지닌 것을 모조리 꺼내라고 한다. 군인의 명령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검색을 끝낸 뒤에 통과를 허락받았다. 금남로에는 50m 간격으로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탱크가 서 있는데 도청 앞의 2대를 포함 모두 7대쯤 되어 보였다. P기자와 만났다.
  그러나 동명동 D여관에 투숙한 2명의 기자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웬일인가 싶어 그곳으로 가 보았다. 문제의 여관에는 옥상에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큰 소리로 신분을 알려주자 두 기자를 밖으로 보내 주었다. 두 기자는 간밤에 혼이 났다고 얘기했다. 새벽에 잠을 자고 있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서 문을 열자 2명의 군인이 칼을 꽂은 총을 들이대며 손을 들라고 했다. 손을 위로 올리자 신분을 조사했다. 아침이 되었어도 나가라는 지시가 없어 그때까지 방에서 그냥 앉아 있었다고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우리 일행은 도청 앞으로 나왔다. 육중한 탱크가 금남로를 바라보면서 버티고 있고, 그 옆에는 기관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