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사태 / 250장 최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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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 250장 최초 공개
미공개 자료·조선일보 취재일지
이 자료는 조선일보 사회부의 데스크 일지로, 여기에는 광주사태가 일어나서 끝날 때까지의 각종 보고 등이 수록돼 있다. 당시 검열 때문에 기사화할 수 없었던 기자들의 보고, 기사 등 관계 정보가 이 자료에 원형대로 담겨 있다.
내용이 다소 중복되거나 다르게 표현된 부분도 있으나,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자료라는 점에서 되도록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호흡 빠른 문장도,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원형을 살렸다.
-편집자
<18일>
● 오전 9시쯤 전남대생 1백 명 가량이 학교에 들어가려다 기동경찰과 대치, 투석전.
● 오전 11시30분쯤 학생들은 광주역 거쳐 번화가인 금남로로 들어갔으며, 숫자는 2백 명쯤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농성하며 {김대중 석방하라}고 구호 외쳤다. 기동경찰, 길 양쪽에서 다가서며 페퍼포그 발사, 해산시킴. 학생들은 흩어지면서 충장로, 대림동, 동산, 산수 등 5개 파출소를 파괴.
● 오후 3시 광주 학생회관 앞에서 학생들 페퍼포그차 1대를 전복시켜 화염병으로 불태움.
● 오후 4시 계엄군이 시내에 나타나기 시작. 전역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을 연행 시작.
● 오후 4시30분 공용터미널 앞에서는 기타 갖고 가는 학생, 기타로 머리를 때리기도. 헬기 3대 공중에서 비행(대학생 집결지 파악하는 듯).
● 오후 5시 계엄군이 조선대, 전남대 등 2개 대학교와 광주교대 등 7개 전문·초급대 진주함.
● 밤 8시까지 1백49명 연행설(경찰에 57, 군에 92명)
● 밤 8시15분까지 1백여 명의 학생들이 한일은행 뒤쪽에 모여 있었으나 별일 없었다. 일부 계엄군은 시민들이 학생 감싸면 {너는 뭐냐}고 구타.
● 밤 8시30분 계엄군은 연단병력으로 증강. 광주 시외 변두리와 대학가에 군인들 막사 쳐. 학교 정문에는 8명씩 무장하고 경계, 시가지 요소요소에 군인 배치.
● 밤 9시부터 통금한다고 지방 방송 통해 방송, 통금 실시.
<19일>
전반적 상황 메모
* 금남로는 완전 교통 차단 상태.
* 도청 앞 기동경찰 바리케이드 치고 군병력 요소요소 경계, 배치.
* 외신 카메라 기자들 눈에 띄기 시작.
* 포고령 위반 집중 단속.
*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해산시키자 골목으로 피신. 경찰이 청년 10명을 해산시키자 계엄군이 경찰관 윽박질러. 이들 청년들을 길 한복판에 앉혀 놓고 구타.
● 오전 11시부터 탱크진입, 30명 무릎 꿇려.
● 12시쯤 거리는 완전히 통행이 끊기고 군은 블록마다 차단.
● 오후 1시40분 트럭 18대분의 병력진입, 그 뒤 후속부대 진입, 진입 과정에서 학생·시민 4천-5천명이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에 모여 기동경찰과 대치 투석전(2시20분). 경찰, 최루탄 발사. 학생·시민들 도로변의 화분대(길이 1·5m, 폭 40cm), 공중전화박스, 버스정류장 입간판 등으로 길 가운데 바리케이드 설치, 제1교회 공사장 기름 2드럼에 불질러, 하나는 폭발.
도서관서 학생 연행
계엄군(트럭 8대분), 버스에서 학생들 끌어내 구타. 도서관에서도 학생 끌어내. 군인 점심 먹으러 간 사이 시민 집결.
19일 오후 상황
* 시내 거의 철시, 차량 완전통제. 건물·도서관·식당 등도 뒤져 젊은이는 트럭으로 실어 가.
* CBS차 1대, MBC차 3대, 승용차 2대를 불질러. 시민·학생들 바리케이드 쌓고 MBC(시내 중심가)앞, 금남로통 등 3개소에서 군인과 대치중(오후 2시 현재). 한 곳에 시민·학생 2천명 정도씩.
* 대동고, 중앙여고 수업 거부하고 데모할 기미 보이자 군인들 출동, 학교를 둘러싸 학생들 나오지 못하고 있음.
*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시민들 가정집, 가게 등에 뛰어들어 숨어.
● 오후 3시 광주 유지들 도청에 모여 부지사에게 무차별 구타에 항의, 이런 일 다시 없도록 건의해 달라고 요청.
● 오후 7시40분 광주고속터미널 앞, 1천 여명이 공중전화박스와 대형화분을 부숴 바리케이드 쳐. 경남 넘버 단 화물트럭 불질러.
● 오후 7시45분 유동에 있는 대형 아치 불질러.
* 시민들 몽둥이와 곡괭이 들고 군경과 대치하다가 군이 증원되자 흩어져.
* 9시경에는 거리에 인적 끊겨.
<20일>
● 오전 10시 별다른 상황 없음. 요소요소에 집총 군인들.
* 사망자 3명설. 시민들은 30-40명 죽지 않았겠느냐며 분노. 다방 등서 수군수군, 상가 점포 절반은 철시.
치안본부 발표
5월18일, 19일 이틀간 광주에서 연행 5백17명, 부상(경찰) 6명(중상 1명), 임동파출소 전소, 19일 서울역에서 41명 연행.
오전 12시15분 서청원 기자 송고
* 파악된 사망자 3명 : 적십자 병원에 김종철 김형렬(29·백운동) 두 명. 한 명은 신원 밝혀지지 않고 19일 오후 6시 사망했다는 것만 알려져.
* 부상자는 전남대 부속병원에 23명, 기독병원 4명, 조선대 부속병원 2명. 전남대부속병원에 있는 김영찬(19·조대부고 3년)은 19일 오후 4시30분 계림파출소 앞에서 총격받고 왼쪽 배 관통상을 입었다 함. 시민·학생들에 의하면 중태인 사람은 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사망자 늘어날 듯하다고 함.
* 요소요소에 군·경찰 배치, 현저한 움직임 없음. 상가 3분의 1철시, 시민들 분노. 언제 폭발할지 모름.
오후 2시30분 서기자 송고
* 19일 오후부터 전남·북에 걸쳐 내리던 비 오늘 오전에 멈춰. 시민들 {내 아들, 내 동생 어떻게 됐나} 신문사·방송국·경찰서 찾아다녀. ○사단에 시민·학생 1천여 명 연행설. 시민들 의견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야 하지 않느냐. 가면 갈수록 희생만 커진다} {계엄군을 교체해야 할 것 아닌가} 시민과 군인, 서로 적대감 느끼는 듯.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었는데 타도 사람으로 바꿨다]는 소문도 나돌아. 시민들이 저제 집단적·무차별적으로 당해 거리에는 나오지 않고 있음. 오늘 밤 게릴라식으로 군으로 붙을 우려.
* 오후엔 상가 3분의 2철시. 현재 중동지역에 군인들 가택 수색(대학생)한다는 소문. 광주에 유학보낸 서울 학부모들 사태 궁금해 광주에 내려와.
* 군인 한 명이 적십자 병원 앞에서 죽었다는 소문-학생들이 [나쁜 놈] [죽일 놈]이라고 욕하며 따라가다 개천에 떨어져 시민 학생들이 돌로 쳐 죽였다고 함.
* 오늘 밤 지켜봐야 할 듯. 사진은 4시40분에 서울에 도착 예정.
오후 4시20분 서기자 송고
● 오후 4시20분 금남로 2가 가톨릭 센터 앞에서 8백여 시민·학생들이 애국가 부르며 농성. [계엄해제] 외쳐. 계엄군 최루탄 발사, 일단 해산. 광주고 앞에서 4백여 명 계엄군과 대치.
* 번화가 충장로 등 교통차단. 골목길에서 계엄군·경찰이 시민 접근 차단.
* 배명인 광주지검 검사장 말에 의하면 어제(19일)까지 9백8명 연행(고등학생 13명, 대학생 4백95명, 시민 4백명). 이중 1백67명은 오늘 오후 석방한다고.
* 전남도 계엄분소, 전남 부지사·검사장·교윢감·목사·신부소집. 기관장등이 {데모 진압방법 너무 지나치다. 이 때문에 시민·학생들이 반발했다. 시민 선무가 급선무다. 석방할 사람은 빨리 가려 석방시키라}고 대책 건의. 계엄분소 대단히 고무적 반응. 실마리 조금씩 풀리는 듯.
* 오후 4시50분
광주 최계원 지사장 기사 고치고 추가할 내용 불러옴.
* [연행학생 1백67명을 오늘 중에 석방]을 [연행 학생과 일반시민 중 1백67명…]으로 고치고
* 추가 [계엄분소는 또 앞으로도 계속 주동자가 아닌 자는 선별 처리해서 석방한다고 밝히고 주동자는 엄히 다스린다고 발표했으며, 소요가담자 중 경상자는 군에서 치료하고 있고 중상자는 없다고 발표했다]
광주주재 조광흠 기자 송고
금남로 2-3가에 시민, 학생 모이기 시작. 4시에 3천여 명 [계엄철폐]외치며 애국가 합창, 일부 연좌 농성. 군인들 밀고 내려와 5시쯤 3백m 밀려 금남로 3가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서 군과 대치. 철책 토관 드럼통으로 바리케이드, 곧 강제 진압할 듯.
서기자 송고
광주시내 중심가 최루가스 꽉 차. 조선일보 지사(동구청 건물에 위치)도 근무 못할 정도. 군인들 지사건물 앞에서 못나가게 해. 군인 수백 명이 지사 근처에 깔려 있음.
● 오후 6시 택시운전사 2백여 명이 무등경기장에 모여 계엄군을 몰아내겠다고 결의.
시내버스 2대와 택시 2백대를 앞세우고 충장로 3가따라(데모대 운집해 있음) 전남도청 앞으로 헤드라이트 켜고 돌진중.
● 오후 7시쯤 충장로 3가에서 경찰과 군과 대치 진행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사태는 19일 택시운전사 4명이 시민을 실어나르다 계엄군에게 적발, 군이 {왜 학생들을 태워 주느냐}며 운전사 끌어내리고 구타. 이로 인한 반발.
오전 서로 연락 취해 모인 듯. 광주시민들은 {어저께 계엄군 나오라} 심히 흥분.
데모대 나올 때마다 박수치고 성금내고 있다. 사태가 더욱 악화된 듯.
최지사장 송고
동원차량 금남로에 버스 15대. 도청 향해 50여m 앞에 버스 1대 군이 페퍼포그 쏘아 멈추게 하고 타고 있던 학생들 연행. 일부는 공용터미널 앞에서 트럭 앞세우고, 또 노동청 앞에는 택시 15대가 밀려와 대치. 남광주 쪽에서 등 4면에서 도청으로 차량데모.
19일 사태후 운전사들 흥분.
서기자 송고
도경과 도청 중심으로 4개의 도로 나있다. 그 방향으로 압축, 제일 심한 곳이 금남로. 버스 10대 트럭 4대 택시 1백여 대가 1천여 시민 뒤따르며 도청 앞 5백m까지 육박.
다른 3개 방면도 택시 앞세운 2백-3백여 데모군중이 도청 향해 진격하다 페퍼포그에 주춤. 대치.
● 오후 7시20분 광전교통소속 전남5아 3701 시내버스를 타고 고교생차림 2명과 운전사가 경찰관 앞으로 돌진. 도청 앞 광장까지 갔다. 차를 세우고 도망가다 경찰에 잡혀.
● 오후 7시45분 도청 앞 광장까지 집결, 군중은 태극기 흔들고 구호 외치면 도청 쪽으로.
최 지사장 송고
● 7시부터 금남로 거리에 버스 8대 대형 트럭1대 택시 50대를 앞세우고 도청 앞까지(관광호텔) 진출. 구호(계엄해제)외치다.
● 8시쯤에 차안에 최루탄 발사하며 군인들이 강제진압. 8시에 물러나 군인들과 대치 중. 상당수 연행, 진압방법이 어제와는 달리 완화. 군인들 태도 누그러진 듯. 변두리 곳곳에서 차가 몰려와.
광주주재 조기자 송고
● 오후 6시 금남로 일대 수 만. 통운 대형 트럭 1대 버스 10대, 택시 70대가 4열로 도열. 도청 앞으로 진격, 관광호텔 앞까지 나갔다 페퍼포그에 차를 버리고 물러나. 계엄군이 차 유리창을 다 부수고, 주택가로 밀려난 데모대들이 [시민들 나오라]고 유도. 9시 이후에도 계속될 것 같다.
● 오후 8시30분 데모대들 소방차 여러대 뺏어 도청 앞에 모여 계속 사이렌 울리고 있음.
송기자 송고
● 오후 7시40분부터 40분 동안 소강상태.
● 오후 8시10분에 2-3대 소방차 탈취해 사이렌 울리며 금남로 도경앞 6백m 앞까지 돌진하면서 데모가 가열됨. 오늘이 고비일 것 같다. 5천-1만여 명 몰려 있다(8시40분 현재). 어제의 계엄군 목표로 갔다 함(예방키 위해). 도청 3갈래 길이 완전히 가득차 있다. 대치망 뚫리면 도청을 방화할 가능성.
● 오후 8시50분 데모군중이 시청에 침입, 점령(시청은 도청에서 6km 동북으로 떨어져 있음).
● 오후 8시부터 광주 MBC(도청에서 1km), KBS(도청에서 2km, 광주역 앞)가 방송중단. 시민 접수한 것 같다. 전일방송, CBS는 나와.
광주주재 조기자 송고
● 9시40분에 MBC 방화, 소방차도 못오고 타고 있다. 9시에는 학동 파출소와 그 앞에 있던 사이카 2대 전소. 노동청 앞에서 택시 1대 전소. 방화가 늘 것 같다. MBC는 빌딩이라 광주시내에서 다 불길이 보여 시민이 흥분할 것 같다.
서 기자 송고
● 오후 10시부터 데모대가 폭동화. MBC방화. 순경 강정우 등 4명이 도청 앞에서 돌진 버스에 깔려 사망(3명은 서기자 눈으로 확인) 2명 중상.
이들 순경들은 도청에서 2백m 떨어진 노동청 골목에 포진해 있다가 불을 지른 버스에 깔려, 이 버스를 다른 버스가 밀어 중상 순경은 앰뷸런스가 실어 가려해도 빠져 나가지 못해.
이 일대 버스 불탄 것만 4대. 도경을 중심으로 극렬히 데모. 군대는 포진하고만 있다.
밤 10시30분 서기자 송고
* 도경, 도청 함락 직전. 데모대들 도청 뒷담을 곡괭이로 허물고 있음. 도청에 있는 간부들이 대피. 생명의 위험이 있어 교육위원회로 피신 (서기자, 광주주재 위정철 기자). 도청을 중심으로 데모군중 2만-3만명 포위. 오늘밤 광주시내 큰 일 날 듯. 대단히 긴박한 상태. 시민들도 나와 지켜보는 상태. 경찰관, 군인들 포위 당하고 있음. 시민도 귀가 않고 있어 폭발 일보직전.
밤 11시5분 서기자 송고
● 10시55분 광주역쪽에서 군인들이 수백 발 발포하고 있음. 취재접근 어려움. 중요서류, 직원들이(도청) 옮김. 총쏘고 시민 함성 소리…무법천지 공포의 도시. 유탄피해 우려. 도청에서 서기자 탈출. 사진기자 이영배시 지사 쪽에 있는 듯.
발포 피해 상황 아직 모름.
광주주재 조기자 송고
* 중심지에서 (금남로)데모주력시민들이 강제진압 (군인이 페퍼포그 쏘아)으로 흩어짐. 중심지 옥상에 사진기자 이영배씨와 같이 있음. 광주 시청 옆에서 11시에 사격개시. 1백여 발 유탄 50여발은 공중으로 날아가고 나머지는 안보여. 공포위협 사격인 듯.
<21일>
새벽 1시40분 광주 위정철 기자 송고
● 새벽 1시15분 전후해 광주세무서에 불길이 올라 세무서 곁에 2개 주유소가 있는데 여기의 휘발유와 경유를 빼 불을 질러. 노동청-국세청 사이 현장에 여자 1명 남자 1명이 죽었다는 말이 있음. 계속 함성. 발포. 도청 주변에서 계엄군이 장갑차로 밀어붙이고 있다.
새벽 2시 광주주재 조기자 송고
* 동사무소 스피커와 앰프를 떼 차에 달고 외곽지대를 돌면서 도청으로 집결하라고 방송하고 다녀. 여자 목소리.
산발적으로 곳곳에서 충돌. 총소리가 계속 나. 도청에서 2백m 떨어진 곳에서 애국가.
오전 10시30분 서기자 경비전화 연락
* 고장이란 이유로 시외전화선 절단. 데모군중 장갑차 1대, 군지프 4-5대 뺏어 도청 반경 5백m내에 군경이 사수하고 그 외의 천지는 완전히 무법지대.
* 광주시장, 데모군중 설득하려다 군중에 납치설. 변두리지역 축제분위기. 새벽에 KBS 불에 탔고, 현재 2명의 시체를 리어카에 실어 태극기 꽂고 돌아다녀. 오늘 낮과 밤이 고비될 것 같다.
시경 경유 현지 기사 접수
* 오전 10시30분 도청에 있는 주요 기밀서류를 헬기로 대피시키기 시작.
* 오전 10시48분 군 헬기에서 방송, [공수단 병력을 철수시키겠다. 시민도 협조해달라] 그러나 시민의 호응은 없음.
* 오전 10시50분 도지사·시장도 헬기에서 설득 방송. 광주시민은 질서를 지켜달라고 설득하고 있으나 효과가 전혀 없음.
* 오전 10시53분 시민들 아시아 자동차를 두 번째 습격. 가스장갑차 1대를 탈취, 시내로 진입.
* 오전 10시56분 서울에서 경찰소속 대형 헬기로 2l 들이 CS액(코와 귀를 자극하는 액체) 10통짜리 20박스 수송. 이 비행기로 민간인 시체 1구와 중상자 2명 싣고 출발. 오늘 중으로 도청, 도경 함락될 듯. 비밀문서 후송은 이에 대비한 것. 경찰과 군인의 불만이 나타나기 시작.
경찰 : 동료들이 살상당하자 [왜 이런 식으로 지휘해서 피해를 입히느냐]고 공공연히 불만 토로.
군 : 땅을 치고 통곡하는 모습 보임.
① [왜 이런 식으로 우리 동료가 다쳐야 하느냐]며 흔들림. ②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고 아우성도. 군은 부상병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나 수송을 못해 더욱 자극되는 듯.
* 현재 데모군중은 10만 정도. 금남로에 5만 정도가 몰려 있고 자동차들은 이들을 도경, 도청 쪽으로 수송 중.
* 전남대 학생회에서는 제일교회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어떤 폭력과 방화도 막아야 한다. 광주 시민의 긍지를 살리자]고 설득. 그러나 효과 없음.
* 70노인까지 거리로 나와 [왜 죄없는 사람을 다치게 하느냐]고 흥분. 전반적인 현상은 갈수록 악화. 직접 보지 않고는 못 느낄 정도로 험악. 전남일보, 전남매일, 직원들 출근 안하고 못하는 등으로 신문 발행 못함. 금남로에 있는 관광호텔 외국손님 대피, 광주시장은 피납모면.
낮 12시 서울시경 林 伯 기자 접수
* 전남지역 학생 총연맹 이름으로 오후 2시 도청 앞에서 도민궐기대회하기로(전단). 각 대학별로 집결지 만들어 행진 집결키로. 주민들은 통·반별로 플래카드 만들어 참가요청.
* 오후 1시 도청, 함락 직전. 함락될 경우 통신 완전 두절될 듯. 곳곳에서 불길. 인근 읍면에서도 몰려오는 것 같은 움직임.
군중들의 구호 : [지방색이 웬말이냐] 기자들도 군중들이 [기자들 때려 죽여라] 구호 때문에 피신, 연락이 어려운 상태.
오후 2시20분 서기자 경찰경비전화로 치안본부 기자실에 전화
* 12시45분 시민에게 발포. 1명 사망, 수명 부상. [이 이상 연락할 길 없다]며 끊었다고. 치안본부 3부장실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오후 1시3분 군중이 도청으로 몰려와 가스탄 발사했다고.
오후 3시 서기자 서울시경으로 송고
* 오후 1시 발포명령 도경 쪽에 포위돼 있던 군·경이 군중에 총을 쏘기 시작.
옥상마다 군인이 올라가 총 쏘고 있다. 사상자? 수백발 쏘았다.
주변에는 시위대가 여전히 장악. 자동차 트럭 2백여 대 몰고 다니며 경찰도 도청 사수 각오로 임하고 있다. 교도소 무기고 탈취 기도하고 있다는 소문 있어 군·경이 대비하고 있다고.
* 발포동기 : 12시40분쯤 도청에서 5백m 떨어진 금남로에서 시위대가 차 몰고 도청 향해 진격. 군경 3명 사상설. 자세한 상황 모른다. 무서워 나갈 수 없다.
오후 3시15분 입전
학생들이 나주에서 예비군 무기고 탈취, 무기 40정과 실탄 갖고 와 군·경과 시가전 벌이고 있다.
타사 정보 종합(20일 밤 및 21일 상황 상보)
* 20일 자정 광주세무서 점거, 무기고 탈취, 카빈, M16 수십 정을 중고생들이 들고 다니고 있음.
* 오전 9시 동구 광천동 아시아 자동차를 2천명이 기습, 자동차 3대 탈취, 금남로 쪽으로 밀고 들어오고.
* 9시50분 제일은행 앞에서 군중 1만여 명 중 대표 김범태(27. 조대 법과 1년) 전옥주(32. 여) 등이 도청 상공국장실에서 지사 및 광주 시장과 협상.
요구조건 : ① 도지사가 군중 앞에 나와 공개사과하라 ② 연행학생·시민 석방 ③ 입원학생 생사와 소재 알릴 것 ④ 계엄군은 낮 12시까지 철수할 것 ⑤ 계엄분소장과 협상 주선할 것.
장형태 지사 {군철수는 최대한 노력하겠다. 나머지도 책임지고 수락하겠다}면서 10시에 대표자 3명 돌려 보냄. 그러나 분위기는 계속 고조(한때 시장 납치설).
* 전옥주는 밤새운 데모 주동자로 조대 무용과 중퇴하고 마산에서 무용학원 경영. 고향에 왔다가 유혈 사태보고 데모에 가담 주장. [시민들에게 마구 총질한 것은 용납할 수 없고, 이를 지시한 책임자도 용서할 수 없다] [일단 계엄군을 철수시킨 후 데모군중의 질서를 정리하여 계엄 철폐를 위해 끝까지 평화적 시위를 벌이겠다. 내 동생도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 20일 밤 9시50분 동구 하길동 주택가에서 계엄군이 덮쳐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곤봉을 휘둘렀다. 경향신문 박옥재(41)기자가 중상을 입는 등 수십 명 부상.
* 21일 오전 데모 계속 [광주시민 단결하라] 외치고, 여고생들도 태극기 들고 앞장, 주부, 꼬마들도 각목, 갈쿠리 등을 데모대에 건네주고, 도청 도경이 고립돼 군·경은 헬기로 진압 화기 공급. 고속버스 시내에 못 들어오고 있음.
21일 오전 총리실 입전 보고
* 9시20분 아세아자동차 공장 장갑차 1대, 군용차 30대, 기타 10대 탈취. 한국은행과 가톨릭센터 사이에 5천명이 각목들고, 군지프 2대, 그레이하운드 1대를 앞세운 채 행진. 시체 2구 손수레에 싣고 마이크로 [계엄군은 시체 인도하라]고 방송.
* 인명피해 : 경찰 1백15명(사망 4, 경상 90명), 군(사망 1, 중상 5명).
* 도청 : 버스 1대와 차고 전소, KBS, MBC 전소, 광주세무서 방화, 세무서 무기고 탈취(카빈 17정).
* 오늘 새벽 군병력 1천5백 명 서울서 광주로 출발.
* 군장갑차 1대가 군중에게 탈취됐다고. 아나운서실에서 변칙적으로 뉴스모아 방송하고 있음.
오후 4시 총리실 입전 보고
* 군중들이 카빈 3백정으로 무장, 전남 의대와 경찰국쪽으로 진출중.
* 오후 4시10분 광주 지원동 석산 화약고서 다이너마이트 1상자 탈취 시내로 진출중.
* 나주경찰서 무기피탈 내용 : 카빈 7백80정, M1 2백35정, 실탄 4만6천4백발, 38구경 12정, 45구경 16정.
* 군 트럭과 버스 30대 동원, 30명씩 분승하여 영광으로 무기탈취자 출동.
* 화순경찰서 무기도 피탈.
역전파출소서 카빈 8백정 수류탄 일부 피탈. 파출소장 납치. 또 다른 파출소 카빈 2백정.
총리실 정보비서실 입전 보고
* 오후 4시15분 시위대 전남의대 12층 옥상에 LMG 2대 설치, 5백m 떨어진 도청향해 발사중. 소방차 1대에 석유를 만재, 도청 방화위해 진출중. 일신방적 무기고에서 카빈 1백50정 피탈.
* 오후 4시21분 호남집중 무기고에서 카빈 1백80정, 실탄 9백발(화순), 승주지서에서 카빈 40정 탈취. ○○사단 병력지원 차 출동.
* 오후 4시25분 한국화약에서 화약 6트럭분 수송치 못함(경찰쪽으로). 서울 시내 중·고생 내일(22일) 오전 봉기한다는 정보있어 시교위, 문교부가 총동원, 교사 비상동원, 무마작업중.
총리실 보고
* 오후 4시 시위대를 카빈 3백정으로 무장, 전남의대에서 경찰국 쪽으로 진출중.
* 오후 4시10분 광주 지원동 석산 화약고에서 다이너마이트 1상자 탈취. 시내로 진격중. 나주경찰서 무기 피탈 내용, 카빈 7백80, M1 2백35, 실탄 4만6천4백발, 38구경 12정, 45구경 16정. 군 트럭과 버스 30대를 동원, 30명씩 분승, 영광으로 무기탈취자 출동, 화순경찰서 무기피탈, 역전파출소 카빈 8백 정, 수류탄 일부, 파출소 소장납치, 또 다른 파출소, 카빈 20정.
* 오후 4시45분 전남방적서 카빈 1백89정 탈취
* 오후 4시51분 전남연초제조창 무기고 탈취(수량미상).
* 오후 5시15분 상황악화로 도경상황실 폐쇄.
목포 주재 박흥서 기자, 부산 경유 보고
* 21일 오후 2시30분 광주서 시민 학생들이 전남 5아 1059 등 광주고속버스 6대와 승용차 2대에 분승, 목포 도착.
* 6시 현재 버스 1대 [계엄해제]등 외치며 시내 돌아다녀. 연도엔 3만여 명이 나와 박수로 환영. 밤엔 심각할 것 같다. 경관은 모두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신, 전파출소가 비어 있다. 시내에 군인들은 안 보여.
아직 파괴는 없다.
목포에서 서울, 광주 시외전화 안된다. 서울에서 전화해 주기를 바란다(밤 9시에 전화해 달라).
오후 6시 여수주재 이만영 기자 연락
* 광주에서 학생 시민이 여수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 전 경찰 비상. 여수경찰서는 유치인 33명, 보호인 15명 등 48명을 순천교도소로 호송중. 여수 분위기도 바뀌고 있다.
목포 주재 박기자 통화내용
* 20일 밤 9시 이후 KBS, MBC TV 중계가 중단(광주에서 중계해주는데 중계시설이 부서진 듯).
* 21일 오후 4시 목포 MBC에 광주학생을 실은 버스 1대가 도착, 안으로 들어갔다가 부수지 않고 그냥 나왔다.
* 오후 6시 광주 학생들 철수. 목포 학생(고교, 대학) 시내버스 7대, 시외버스 1대 탈취.
* 오후 6시15분 서울행 특급열차(8시15분 출발 예정)가 2시간 전에 미리 출발.
* 오후 7시20분 군용 헬기 1대 10분간 목포역 상공을 중심으로 정찰 비행 후 사라짐.
* 오후 8시 목포 학생들 시청 유리창 심하게 부숨.
* 오후 9시30분 흰머리띠 두르고 각목 든 사람들, 전남 5아 1060호(광천여객 소곡)에 [김대중 석방하라]는 플래카드 걸고 목포 시내 누비고 다닌다.
목포 박기자와 21일 자정 통화 내용
*21일 오후 9시 학생 1백여 명 목포 경찰서에 들어가 유리창 부수고 뒤뜰에 세워 둔 트럭(호송차) 1대 등 불태워.
* 오후 9시-10시 사이 영해, 대의 , 역전, 연동 파출소 기물 파손.
* 오후 9시20분-10시 사이 3차례에 걸쳐 목포 MBC 유리창, 기재 일부 파손.
* 오후 9시30분부터 MBC 정규방송 중단.
* KBS 초소와 현관 유리 깨짐. 목포 역전 부근 도로에 깨진 유리조각 널려.
* 오후 4시-5시쯤 일부 다방에서 데모 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조달하기 위해 모금했다는 설.
* 밤 12시30분 현재 시내버스, 공단의 통근버스, 덤프 트럭, 용달차, 8t트럭 등 20여 대에 학생들이 나눠 타고 시위하고 있음(22일 아침 정각, 목포 박기자와 통화키로 했음. DDD는 안되고 106번 불러 통화 바람).
<22일>
목포 박기자와 통화내용
* 새벽 1시20분 무안동 코롬방다과점, 수퍼마케트 일원 식품가게를 부수고 들어가 빵, 음료수를 실어가.
* 새벽 2시 목포역 대합실 전부 파괴, 연동 파출소 모기관 목포지부 방화. 항동 파출소 무기고 태우고, 시내 파출소 전부 파괴. 해안경찰서, 세무서 파괴.
* 새벽 3시 남양어망 공장 부수고, 열차불통, 시외·시내 버스 불통. 중·고 학교장 재량 휴교령. 각목, 카빈 공포 쏘고 다녀. 무기 휴대한 젊은이 복면하고 1백명 정도. 다른 데모대 1천여 명. 시민호응 안해. 시내상가 모두 철시. 군대는 안보여. 학생들은 질서지켜. 마이크로 [자중하자].
오전 10시40분 서기자 광주 도경국장관사에서 경비전화로 송고
* 서기자 눈으로 확인한 학생, 시민 사망자 20명.
* 총격전(시가전)은 21일 오후 4시부터 시작.
* 21일 오후 7시-8시30분 사이에 도청, 도경에서 군철수, 조선대 쪽으로(1만여 명). 도청 도경은 시민이 접수, 일반인 접근 금지 시켜. 학생들은 [헌혈하자]고 전단 뿌려(22일 오전).
* 오전 10시50분 수만시민이 도청 앞에 모여 궐기대회. 총리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학생들 수백명이 총 휴대. 시민들이 경찰 페퍼포그차, 장갑차들을 몰고 질주하고 다녀. 경찰 헬멧 등 장비도 학생들이 쓰고 다니고, 어제 시가전은 예상 이외로 심하지 않았다. 군이 철수하면서 경찰 무장해제, 경찰 간부들 권총도 빼앗아가. 그래서 경찰 불만이 심하다. 무장해제당한 경찰, 사복으로 바꿔입고 광주를 빠져나가.
22일 오전 현재 거리는 학생과 시민뿐. 곳곳에 핏자국, 불탄 자동차 잔해 등이 널려 있고, 22일 계엄사령관의 광주사태 발표는 시민들을 자극, 흥분시켰다.
중앙지, 광주지방지 없고 이곳 방송도 안돼 전주 KBS 방송을 듣고 있다. 학생들은 강경파(군이 우리를 쏘는데 우리만 당할 수 없다), 온건파(무기휴대 반대, 난폭한 행동반대)로 나뉘어 있음.
12시에 총리가 온다는 소문. 총리가 오면 학생·시민·군·경찰·총리협상. 협상이 잘되면 풀리고. 계엄사 발표 때문에 군이 들어오면 큰 충돌이 있을 것이다.
21일 도청, 도경 시민 인수 후 공공건물 파괴 전혀 없다. 기자가 사진 찍으면 박살. 도경국장집도 가정부 혼자. 이곳도 위험하여 피신하고 싶다. 다른 기자들은 빠져나갔다. 21일 오후 3시 이후 현지에서 전화하는 기자는 자신뿐. 신변위협 느끼고 있다.
오전 11시40분 내무부 보고
* 도청서 부지사, 기획관리실장, 내무국장이 학생대표들과 협상중. 도청은 학생들이 지키고 있다.
순천 상황
열차가 이리까지 밖에 못간다. 여수-서울간은 운행. 순천-목포간은 두절. 21일 밤 승주군 송강면 지서에 10여 명이 와 무기를 내놔라. 무기가 없자 유리창을 부수고 이불을 가져갔다.
오후 2시 여수 이기자
* 현재로는 조용. 민심은 안좋아. 중·고등학교 휴교령. 목포 관공서 모두 접수된 듯. 여수에서는 전화 안돼. 어제 광주에서 여수쪽으로 온다던 시위군중은 벌교까지만 왔다가 강진으로 돌아 강진 전경대 중대본부 무기고 접수, 무기 등 싣고 광주로 되돌아 가. 화순탄광에서도 화약 등 갖고 광주로 갔다는 소식.
오후 3시50분 목포 상황
* 목포역 옥상에 [광주 시민의 피를 보답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김일성 오판말라] 플래카드 걸려 있고. 대형 소방차 1대, 해군 지프 1대, 제일영동교회 선교용 버스1대를 타고 다닌다. 법원, 검찰에도 난입, 부숴(오늘 새벽). 목포서 버스 11대가 광주로 합세하러가 (오늘 아침).
* 오후 1시 오창근 목포대학장, 시내야당인사, 종교인, 이병대 시장 등이 모처에 모여 난폭해져가는 데모를 건전하고 평화적 시위로 설득키로 결의.
* 오후 3시 목포역 광장에 나와(시장은 제외) 군중들을 설득(4천여 명). 군중들이 박수쳐. [시내 대학생부], [고등학생부] 플래카드, 1천여 명이 이들을 앞세우고 평화적 시위, 연도에서 시민들 박수. 무기 든 사람들은 별도로 다녀, 이들은 호응안해 두갈래. 은행, 관공서 철시. 23개 중·고교가 무기 휴교령. 국민학교도 학교부근 학생들만 일부 등교했다가 곧 돌아가.
7시10분 광주 서기자
* 사망자 56. 데모군중이 시체 56구를 관에 넣어 도청 앞 광장에 놓고 7시부터 추도식. 시민, 학생사이에 강·온이 맞서.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것 같다.
통신 보도 내용
* 22일 오후 4시30분쯤 광주시내 국군통합병원 부근에서 데모군중틈에 끼여 있던 30대 여간첩 용의자 1명을 시민들이 붙잡아 대치중인 군인에게 인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민에 따르면 이 여인은 지난 19일 밤 데모때 [여기저기에 불을 질러야 한다]고 외치고 다니는 것을 수상히 여긴 데모학생들이 그녀의 행동을 계속 주시하던 중 이날 붙잡아 카메라 1대와 함께 군에 신병을 인계했다는 것.
10시25분 목포 박기자 전화
* 오후 4시30분 목포역 광장에 목포대학생 2백여 명 모여 평화적 시위를 위한 궐기대회를 갖고 3만여 명의 시민들에게 집으로 들어가도록 호소했다. 학생들은 또 무기를 휴대한 젊은이들에게 목포에는 계엄군이나 경찰관이 대치하고 있지 않은데 여러분이 공포를 쏘고 다니면 시민들이 오히려 불안감을 느낀다며 카빈이나 M1탄피 등을 회수했으나 일부는 계속 공포시위를 하고 있다.
* 오후 5시40분 목포청년회의소 회원들 30여 명도 [민주시민의 대행진] [현실을 슬퍼합시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목포대학생들과 함께 무기회수 운동과 함께 평화적 도보시위를 했는데 연도의 3만여 시민들은 이들에겐 박수로 호응했으나 무기를 들고 자동차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외면했다.
* 목포→서울 기차나 버스통행이 안되자 목포해안에선 1인당 1만원씩 받고 소형 모터선으로 30명만 모이면 목포에서 군산까지 수송하고 있음(군산서 서울 가는 것은 차편이 있음).
* 오후 10시30분 자동차 시위자 등 4백여 명, 무기일부와 수류탄 회수 못했음.
밤 10시30분 서울시경에 보고된 내용
* 대학생들은 협상 받아들였으나 일부 시위군중들은 반대하는 입장(현지 도청의 모 부이사관의 말). 학생대표들, 도청에서 계엄 분소장과 이야기 중이다.
학생들은 현재 사태가 크게 벌어지자 겁도 나고 해서 뒤로 물러서는 상태. [이제 우리는 모르겠다]는 식이라는 것. 현재 총기는 약 3천5백 정 정도가 시민들 수중에 가 있는데 회수된 것은 2백-3백정뿐이고 나머지는 시위군중이 갖고 있는 듯, 지금도 시가지 곳곳에서는 간간이 총성이 들림.
* 도청광장에는 3만여 명이 모여 추도식하려 했는데 오후 10시30분쯤에는 1천여 명으로 줄어들었음. 시체는 도청 앞 광장에서 관에 넣어 늘어 놓고 있으며 과격한 말들이 나오고 있음.
* 관에는 죽은 사람의 사후사진이 붙어 있는데 연고자를 찾기 위함인 듯. 사망자 중에는 고교생들도 있는 듯, 수습대책위원회는 학생들과 협의에 진전이 없자 귀가하고 있음. 총리의 헬기가 상공으 지나쳐 가자 시민들은 [허수아비 총리하고는 상대 안한다] [오려면 책임자가 오라].
* 관 옆의 시민들과 총기를 가진 시민들은 아직도 과격. 오늘은 소강상태로 넘길 듯. 그러나 내일은 모른다.
<23일>
S 신문 취재팀 서울시경 연락내용
시위 군중들이 소지했던 무기회수 시작. 많은 학생 시가지에 나가 쓰레기 치워. 대부분의 시민 거리청소.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대해 얘기 나눠. 총격에 놀란 시민 일부 보따리 싸 시외로 나가는 모습도. 일부 과격시민·학생들은 수습대책위의 수습방안에 불만을 품고 오전 10시 현재 도청 앞 광장 등에 다시 모여들기 시작해 사태 낙관 못할 상태.
* 학생들은 21일 밤에 접수했던 도청과 도경청사를 23일 아침 도와 경찰에 내주었다. 도직원 일부도 출근했다. 과격파 시위군중들은 도청과 전신전화국을 불태우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학생들이 만류.
오전 8시30분 광주 서기장 시경중계로 서울 林 伯 기자집에 전화
* 서기자 확인한 사망자 명단
<도청 뒤뜰 43구> 이중 17명 이름 확인, 미확인 26명.
임규수 김호중 정민구 정학근 홍성기 나종기 정창용 조남진 조사천 이상자(여) 박금희(여) 김재환 박기현 임순춘 양주접 전종호
<전남대 22구> 김안복(36) 김정웅(39) 박기웅 이세호 박기형(16) 신정대 최승희(여 21) 김재수 김호중 정민규(23) 최영호
오전 10시40분 광주 서기자 일반 전화
* 현재 학생들과 시민대표, 도청 간부들 협상 중. 어제부터 수습나섰으나 뚜렷한 결론 못내려. 수습전망 흐려.
* 이 전화로는 더 이상 기사 부를 수 없다.
오전 11시 동아일보팀 치안본부 전화
* 수습대책위 15명→10명으로 줄었다. 전남대생 10명, 조선대생 10명 등 20명 추가. 30명으로 다시 구성. 여고, 남고생 등 3백여 명이 스크럼짜고 시위. 구호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다] [언론 각성하라]
부녀자들 거리에 솥 걸고 시위자에 밥. 총기는 절반가량 회수.
오전 11시 이현구 차장 통화
* 11시 현재 서기자 등 지사에 나와 있고, 건강하다, 별일 없다는 말. 23일 오전 중에 조금 회복되었고 학생들은 무기회수 시작, 강도 등 범죄까지 뒤집어쓰지 말자고. 그러나 회수된 무기를 군에 돌려보내자, 학생들에게만 나눠주자는 양론.
도청 간부 등 직원 출근해 일 보고 학생들은 거리 청소하고 있다. 시민들 도청광장에 모여 대표들이 타협하는 동안 끼리끼리 강·온 양론.
또 시민들은 미국무성 성명(미국이 진압군 차출하는 것 양해했다는 내용)의 의미가 뭐냐고 궁금해해. 시민대표들 사망자 장례절차 논의중.
* 오전 5시 학생, 시민들이 나와서 거의 청소를 하고 난장판이었던 금남로를 말끔히 치웠다. 그러나 불탄자동차의 잔해 등은 그대로 남아있다. 학생들은 장례반, 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등으로 나뉘어 수습중인데, ▲ 장례반은 시체 43구가 안치돼 있는 도청 후정에 사망자 가족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여 보내고 있고, 사망자 중 신원 미확인자를 찾기 위해 가족들이 우왕좌왕 ▲ 총기회수반은 12시 현재 8백여 정 총기를 회수 ▲ 차량 통제반은 시위군중들이 몰고 다니는 버스, 장갑차, 페퍼포그차 등에 대해 함부로 못 몰고 다니도록 단속하고 있어 무질서한 차량통행은 통제됐다.
* 오전 5시부터 도청 앞 광장에 시민들이 몰리기 시작, 12시 현재 약 7만-8만명이 운집해서 도청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들의 회의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수습대책위원회들은 오전 10시부터 도지사실에서 회의중에 있고 위원은 30명(지역 유지들 중심)으로 늘렸고 독립투사 최한영씨를 위원장으로 뽑았다.
수습위원들은 22일 계엄사와 합의한 7개항의 내용을 문안으로 작성해서 마이크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이를 공지하기로 하고, 학생들에 대해서도 설득을 계속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내무국장실 옆방에서 학생대표들은 회의를 열고 있으며, 대표들 중 온건파는 수습대책위의 의견을 따르자는데, 한편 강경파는 계엄령 철폐 등 기본적 문제가 관철될 때까지는 끝까지 투쟁하자고 주장해, 의견 일치를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어서 사태 수습은 난항.
그러나 강온을 막론하고 광주시내 질서 회복을 하자는 데는 이견이 없어 대학생 7백-8백명(여대생 50여명 포함)이 23일 12시 현재 하얀 헝겊에 [대학생]이란 완장을 두르고 질서 회복에 나서고 있다.
이들 학생들은 {질서를 회복하자는 것은 대책위의 합의를 받아들여서 사태를 수습하자는 것이 아니냐?}는 우리 기자의 질문에 대해 {그것은 오산이다. 군부대에서 연행학생 79명을 석방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무기를 회수하여 반환할 것을 대책위를 통해서 요구했지만 석방한다고 해도 다시 잡아갈 것이 분명하지 않으냐. 우리는 계속 투쟁할 것이다}고 했다.
학생들은 총기를 회수하여 이를 반납치 않고 시민들로부터 회수한 총기를 학생들만 갖고 학생들이 치안을 맡아 자체 경계를 맡겠다는 움직임이 크다.
22일 스케치
* 22일 새벽 학생들이 계엄군 소속 김○○ 상사를 광주시 지원동 다리부근에서 붙잡아 군작전을 들은 후, 다른 곳에서 붙잡은 전경대원 2명과 함께 계엄사에 넘겼다. 3층 이상 건물들은 오후 8시만 되면 모두 소등했고, 일부 불량배들에 의해 변두리에서 강력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22일 도청광장에 모였던 군중들은 오후 8시쯤, 각자 귀가했고, 4백-5백명 학생들, 청소년들이 남아 시가지를 돌면서 치안을 맡았다. 유가족들은 시체 옆에서 밤을 새웠다.
* 22일 오후 2시쯤 광주전화국에 무장청년 1명이 들어와 전화국을 폭파하려고 했으나 학생들이 잇달아 들어와 이를 저지, 학생들이 경비를 섰다. 사태가 누그러지자 학생들은 국내기자들에 대해 태도가 나아져 기자들에게 학생대표들이 [증표]를 주어 도청에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전히 도청출입은 통제중.
23일 스케치
학생들은 경찰이 버리고 간 무전기를 듣기도 하며 도청 광장에는 부서진 문짝을 세워놓고 사망자 사진을 붙여, 유가족들이 구별하도록 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박충훈 총리서리의 발언에 분개, {광주시민이 어째서 폭포냐}고 흥분하고 있으며 취재를 하는 외신기자들에게 박수를 치고 학생들이 취재 안내까지 해주고 있는가 하면 {국내신문들은 뭐 하느냐}고 국내언론에 반감을 표시하고 있다.
* 23일 12시 도청광장 뒤쪽에는 군경이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헬멧, 경찰봉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또 주민들은 쌀을 살수가 없어서 이웃집 쌀을 꾸어서 먹고 있으며, 중심 지역 시민들은 대부분이 변두리로 피난하고 있다.
* 23일 학생과 군인이 대치중인 곳은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에서 국군통합병원으로 가는 길목. 이 지점은 화정동 고개로 시민·학생들은 판문점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탱크 2대로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으며, 5백m쯤 떨어진 지점에서는 무장학생 30여 명이 대치 중에 있다. ▲ 광주시 지원동 길목 ▲ 여수, 순천 방면으로 빠지는 문화동 길목 ▲ 서울 방향 고속도로 진입로 ▲ 목표방향인 대동고교 앞
* 23일 오전 11시30분쯤 전남대 뒷산에서 교련복 차림의 학생 1명이 절반쯤 매장된 시체로 발견됨. 발견한 시민이 학생들에게 연락.
이 시체를 도청 광장에 갖다 놓고 흥분상태에 있다.
* 사망자 수는 오후 3시 현재 우리기자 확인 1백21명에다가 추후 서울서 파견된 조남준 기자가 통합병원에서 4명의 사망자를 확인해 총 1백25명이 확인됨.
23일 목포 상황
* 낮 12시30분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대학생연합회(대학 1개, 전문대 3개 중 2개 대학참여)와 목포시민민주화투쟁위원회 주최로 목포시민민주화 궐기대회를 열어 시민·학생 3만여 명이 모여 [김대중 석방], [계엄해제] 등 플래카드와 구호를 외치며, 1시간 동안 성토대회를 가진 다음 시가행진에 들어갔다가 오후 3시 다시 목포역 광장에 돌아와 성토중임.
22일 밤 목포 스케치
22일 밤10시쯤 학생과 시민이 합세하여 무장데모대가 탄 차량(버스 7대)에 올라 카빈 등 무기 2백80여 정을 회수했고, 또 광주여객 1대를 이용, 목포에 왔던 학생 30여 명에게서 카빈 17정을 회수했다. 한편 광주에서 왔던 학생들은 이병대 목포시장에게 {광주로 돌려 보내달라}고 요구해 이 시장의 안내를 받아 학생 18명은 보내졌고, 나머지 7명은 영장을 발부받고 군에 입대를 않았던 학생으로 경찰에 보호 중에 있음.
* 23일 밤9시 목포역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를 갖고 시내 남녀 중·고·대학생·시민 5만여 명 횃불시위를 벌였다.
여고생 2백여 명이 횃불을 들고 대열 중간에 서고 남녀 학생과 시민들이 좌우로 선 횃불대열은 시내 20km를 보행시위하면서 구호를 외치며 10시40분 역전광장에 다시 모였다.
이들은 광장에 앉아 계속 연좌데모 중이다.
<24일>
오전 10시50분 광주 조기자 통화
* 학생대표들이 시민대표에게 지금까지 회수한 총기 3천여 정을 인계하고 시민대표는 이를 군에 전달키로 합의했는데, 학생 대표간에 이견이 있어 아직 인계 못하고 있다.
한편 군당국은 24일 낮 12시까지 무기를 회수해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가져 오라, 그러면 과거는 불문에 부치겠다고 KBS 방송 통해 계엄분소장이 권고하고 있다(학생, 시민이 갖고 있는 무기는 4천여 정).
헬기로 전단을 뿌려(오늘 새벽). 이미 회수된 무기는 도청에 보관, 도청 지키고 있는 학생과격파들은 무기를 주면 우리가 어떻게 저항하느냐며 반발.
현재 광주시내는 2개의 대표위원회가 있어 시민들로 구성된 5·18수습광주시민대책위원회(위원장 최한영), 학생수습위원회(위원장 김창길·전남대 농경과 3년). 시민대채위원회는 30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날마다 위원이 바귀고 영향력도 크지 않는 이 위원들은 23일 오후 3시에 대표 8명을 계엄분소에 보내 7개항 합의하고 7시에 돌아왔다.
이 타협에 따라 연행된 시민·학생중 34명을 인수해왔다. 이로써 군이 그동안 연행한 학생·시민은 9백97명중 40여 명을 남기고 모두 풀어줬다고 계엄당국이 말하고 있음.
학생위원회는 강·온으로 2원화. 온건파는 무기회수반납, 강경파는 무기반납하면 반항할 수 없다고. 군과 대치하고 도청을 지키는 측이 강경파, 온건파는 거리청소, 질서회복 호소.
* 23일 밤 2번에 걸쳐 교전. 밤9시쯤 지원동 화순가는 도로에서 교전 중 학생 5-6명 사망으로 알려져. 밤10시 국군통합병원입구 대치지역에서 교전 피해 양측 상황 몰라.
학생 온건파가 학생대책위원회를 주도하고 있는데, 이들의 입장은 우선 당국에서 광주시민학생들을 폭도로 몰아 붙이고 있고, 이 같은 원인은 학생·시민들이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기를 회수·군당국에 인계, 오명을 씻고 질서를 일단 회복시키자, 그 다음에 처음에 주장했던 정치적인 이념을 관철하기 위해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자고. 이에 과격파는 듣지 않음.
학생들의 분포는 과격이 더 많다. 24일 현재 일부 고교생, 과격시민들이 회수 무기를 보관하고 있는 도청에 찾아와 총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고 이를 학생들은 간신히 제지하고 있음.
* 24일 오전 11시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궐기대회를 갖기로 했는데 의견들이 서로 엇갈려 열지 못하고 있다. 23일까지 도청 앞 대형 스피커를 통해 상황을 알려주는 방송도 24일에는 중단됐다.
학생·시민들도 거리에서 수습한 시체 45구를 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 중. 이 빈소에는 시민들이 보내온 조화도 쌓여 있고 도청 국기 게양대에는 조기가 게양돼 있다. 학생수습대책위에서는 치안유지반원들을 동원, 차를 타고 다니면서 총기소지자들에게 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반발이 심하다
시내 치안은 학생들이 맡고 있는데 어젯밤 학생들이 야간통행증을 발급, 통행증 소지자에게만 통과허용, 차량들도 3백여 대에 일련번호를 붙여 번호부착차량만 운행토록 허가, 기타는 압류해서 도청 앞에 세워두었음.
도청·시청 등 관공서에는 총을 든 학생이 경비를 서서 학생들이 발급한 [秘]자 도장이 찍힌 출입증소지만 통과시키고 있음. 학생들은 청년회의소, 라이온서 클럽, 로터리클럽, 여성단체 등 민간단체들과 예비군 요원이 나와 함께 치안유지에 나서자고 권고중이다.
* 경찰관들에게는 시민·학생들이 {경찰에 반감을 갖고 있지 않으니 소속관서에 출근해서 근무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 23일 오후 6시부터 KBS 광주 탤리비젼이 방영을 재개했음.
* 22일 밤 박순휴 피부비뇨기과 의원에 약탈범이 들어가 3백여 만원 어치의 금품을 털어 갔고, 시내 변두리에서 약탈행위가 자행되고 있음. 시내 식료품 가게와 양곡상은 문을 닫고 있음. 식료품 시내 반입되지 않아 식량부족현상을 빚고 있다.
* 23일 밤 8시30분쯤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한다는 소문이 번져 모두가 피신하는 등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 23일 오후 4시30분 지원동 무등중학교에 군이 집결, 시내로 진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도청에 나와있던 간부들이 뒷담을 넘어 피신하는 등 소동을 벌였다.
* 24일 낮 광주시내 표정은 표면상 평온한 가운데 군데군데 시민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고, 일부 상가는 문을 열고 영업 중. 거리는 23일부터 시작된 청소작업으로 많이 깨끗해졌다. 노동청 사무소 앞에는 지난 20일 밤에 불에 탄 차량 7대가 아직 뒤집힌 채 있다. 시체가 안치된 상무관에는 유족들이 찾아와 울부짖고 있고, 학생 일부가 내일(25일) 시민장으로 치르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타협이 안되고 있는 형편. 도당국은 장례 방침이 결정되면 시설 등을 지원하려고 했으나 아직 미결.
* 23일 오후 시민대표가 계엄분소장을 찾아갔을 때 사망자들에 대한 보상문제를 거론했는데, 계엄분소장은 {사망자중에는 군이 발포로 죽지 않은 사람도 있다. 군인이 사용하는 총은 경찰과 다르니까 검시과정을 거쳐 군의 총에 맞은 시체에 대해서만 보상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
* 24일 오전 11시20분쯤 시민대표인 목사, 변호사, 신부 등이 화정동에서 무기를 들고 군과 대치중인 40여 명에게 무릎을 꿇고 빌면서 총기를 버리도록 설득, 이들 모두를 도청을 데리고 왔는데 아직도 총을 버리지 않고 있다.
24일 오전 경향신문 취재팀 송고
소요사태 7일째를 맞은 광주시는 24일 3일만에 처음으로 총성이 거의 들리지 않는 조용한 하룻밤을 지내고, 격노와 흥분에 휩싸였던 열기가 크게 누그러진 가운데 시민들은 수습의 길을 찾고 있다.
이날 오전에는 소요시민의 본부격인 도청은 무장청년들이 출입자를 엄격히 통제하는 가운데 전날에 이어 수습대책위원회가 열리고 무기, 차량 등의 회수와 반납도 학생과 시민에 의해 계속됐다.
이날 오후 전남북계엄분소장은 광주 지역의 시민들은 정오까지 국군통합병원에 무기와 탄약을 자진반납하라고 KBS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도청 앞 광장에는 무장청년들이 교통 정리와 경비를 맡고 있고 시민들이 간밤의 소식을 알기 위해 도청 앞 광장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으나 군중 수는 눈에 띄게 줄고 있다.
23일 오후 9시 이후부터 24일 아침까지 시내에서는 총성이 거의 들리지 않았으며 군과 대치중에 지원동(화순과의 통로)일대에서는 산발적으로 총성이 들렸고, 부상자를 내기도 했다. 이날 오전 6시30분쯤에는 신영미양(21. 용산동 280의 1)이 집 앞 도로에서 왼쪽다리에 총상을 입고 적십자 병원에 입원했으며, 20대 청년 1명도 두부에 총상을 입고 전남대 병원에 옮겼으나 중태다.
한편 24일 오후 5시 1만여 시민들은 도청 앞 광장에 모여 성토대회를 갖고 2시간만에 모두 해산했다. 이날 시민들 사잉는 군부대가 곧 시내로 진주하는 소문이 퍼져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거리기도 했다.
광주지역에는 지난 21일부터 신문·TV·라디오 등 보도기능이 끊겨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23일 오후 6시부터 KBS TV가 복구돼 광주사태를 집중보도했으나 시민들은 보도내용이 편파적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KBS TV와 라디오를 제외한 모든 보도기능이 4일째 마비되자 정부 및 계엄당국과 당국이 비행기를 통해 살포하는 전단과, [투사회보]등 시위주동자들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유인물만이 대향으로 나돌아 유일한 보도매체 구실을 맡고 있다.
사태 이후 이곳에는 AP통신, ABC, CBS, NHK 등 각국의 보도진이 들어와 학생들의 안내를 받아가며 취재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국내 보도진에 심한 거부반응을 보여 사진기자들이 카메라를 탈취당하고 TV 녹화기를 빼앗기기도 했으며 길바닥에 끌려 다녀 부상당하기도 했다.
광주 시청은 23일부터 기능을 거의 회복, 약 4백 명 직원이 출근하여 각 동에 나가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민심순화운동을 벌이고 있으나 민원처리 업무는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도경과 광주경찰서는 24일까지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고 굳게 잠겨져 있고, 광주경찰서 정문에는 [본 광주 경찰서는 우리의 재산, 기물파괴는 세금의 과중, 스스로 보호합시다, 학생일동]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고, 서부경찰서에는 총을 든 청년 3명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한편 22일 밤 시내 변두리 지역에 강도사건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23일 밤에는 성사맨션, 동인동 아파트 단지 등에서는 자체방범대를 편성, 주민들이 시간별로 나눠 보초를 서기도 했으며, 일부 시민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 피난을 가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시내 상가들은 문을 열어 시가의 모습은 다소의 생기를 되찾았고 광주에서 가장 큰 양동시장에는 23일 낮부터 야채류, 과일류를 리어카에 싣고 온 행상들이 수십 명 나타나 시장을 메웠다. 한편 모든 방면의 외부 교통이 완전두절, 농산물 등 생활필수품의 공급이 끊여 시민생활에 큰 불편을 주고 있고, 특히 육류·생선류의 공급은 전혀 없는 상태이다.
한편 도청에 본부를 정한 주동시민들은 23일 탈취차량에 일련번호를 적어 차량통제를 시작. 시내를 횡행하는 무장차량의 숫자는 23일 오후부터 크게 줄어들었고 무장청년들은 도청 주변을 제외하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시민들은 연일 길목마다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모여 사태의 추이와 수습책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으며, 무기탈취 이후 시위의 주동이던 대학생들이 전면에서 사라지고 대신 공원, 종업원, 무직 청소년 등이 총기를 휴대하고 거리를 누비게 되자 불안한 표정은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편 목사, 신부 등 성직자와 유지급 인사들은 24일 오전 6-7명식 조를 편성, 무장시위군중과 군이 대치하고 있는 지원동 두암동 농성동 등 외곽지역으로 설득작업에 나섰다. 이같은 조치는 전남·북 계엄분소장이 이날 정오까지 무기를 자진 반납하라는 시한부 담회를 발표함에 따라 계엄당국의 수습노력에 협조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23일 오전부터 도청에서 무기를 자진반납받는 학생·시민 수습반은 무기반납장소를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정한데 대해 이는 적합치 않은 장소라고 주장. 자진반납받은 무기를 군에 인계할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마련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편 수습반은 회수된 무기와 탄약의 정확한 숫자를 외부에서 악용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다. 회수된 무기 중에는 중기관총 2정을 비롯, M16 소총, M1 소총, 카빈소총, 수류탄, TNT, 통신기재, 페퍼포그 발사기 등이 포함돼 있다.
광주와 인접한 송정읍에서 20일 이후부터 22일 사이 시민들의 시위가 일어 시위군중들이 탈취하여 몰고가던 차량이 전복 등 사고를 일으켜 2명이 숨졌다.
24일 광산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22일 오전 광산군 동곡면 하산리 동곡교에서 시위군중이 몰고 가던 군용 진압차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용수로에 전복 추락, 신원 미상의 청년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는 것이다. 또 21일 오후 11시쯤 송정읍 영광동에서 시위군중들이 바리케이드로 사용하기 위해 불을 질러 밀고 가던 대한통운 트럭이 노인 1명을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송정읍 사태는 23일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군부대가 진주 진압됐으며, 광산경찰서는 시위군중들로부터 28정의 무기를 회수했다.
전남의사협회(회장 김제권씨)는 {현재 광주시내 4개 종합 병원에서는 부상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다}고 밝히고 산소와 수술에 필요한 의약품이 부족하다고 밝히고 대한의학협회와 적십자 등에서 구호반을 편성, 광주에 내려와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24일 오전 10시 현재 연행됐던 9백27명 가운데 8백94명이 풀려 나고 현재 33명이 풀려 나지 않았다.
오후 1시 서기자와 통화
* 계엄사 무기 반납 시한을 24일 낮 12시에서 오후 6시로 연장. 시체 45구가 안치돼 있는 상무관에는 유족이 흐느끼는 속에 일반 조객이 2백여m나 줄지어 기다리며 분향. 학생들, 전남일보 빌딩과 도청에 무기 회수반 설치, 군당국이 밝힌 총기 4천3백여 정 중 3천여 정 회수(24일 오후 1시 현재). M1, 카빈 등은 많이 회수되고 있으나, 권총 40여 정과 TNT 1백 개, 폭약 4상자는 거의 회수되지 않고 있다. 시가는 평온한 속에 시민들 도청 주변에 모여 학생들이 뿌리는 전단을 읽거나 마이크에 귀기울여 한 시민 {이젠 무엇보다도 질서회복이 문제다. 빨리 총기를 회수해서 정상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느냐}.
다른 한 시민, {정부에서 이번 사태 유발했다. 원인을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떻게 수습이 되겠느냐}는 회의론도.
* 23일에 이어 24일에도 시민들은 빗자루 들고 거리 청소. 시청 청소부들도 쓰레기 더미 치우고. 파손되거나 불탄 차량은 차주나 회사측에서 끌어가 거리는 한층 깨끗해졌다. 23일부터 기능을 회복한 시청에는 대부분의 직원이 나와 근무.
* 시는 이날 시비 3천 만원으로 영세민 6천 가구에 생활보조비 5천 원씩을 지급. 시는 또 종합 상황실 설치, 사망자, 행방불명자, 부상자를 동 단위로 파악 중.
* 각 병원에는 의료품이 부족, 산소는 24일 중으로 거의 떨어졌고 페니실린, 마이신 등 항생제, 포도당, 식염수 등도 태부족 상태.
* 낮 12시가 지나면서 사태 수습은 급진전, 총을 들고 도청을 경비하던 학생들이 총기를 회수반에 내주었고 학생 시민들이 착용하고 있던 헬멧 방석복 등 군경 복장 및 장비도 [폭도로 오인 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하여 반납하고 있다.
* 오전 11시20분쯤에는 시민 대책위원인 장세균 목사 등이 화정동에서 무기를 휴대하고 군과 대치 중이던 38명과 지원동에서 13명 등을 도청으로 데리고 와 울면서 설득. 1시간만에 무장해제 시키는 데 성공. 그러나 화정동 등 시외로 빠지는 6개의 외곽도로에서는 아직도 일부가 무장, 대치하고 있다. 특히 화정동 공단 입구에서는 인근 서광제재소에서 옮겨온 대형 원목 1백여 개와 버스·트럭·지프 등으로 바리케이드 치고 20여 무장대원이 지키고 있다. 4백여 시민들이 현장에 운집해 있으며 대원들은 신분 확인 후, 시내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는 시민을 통과시키고 있다.
* 주택가에서는 시위대원들이 찾아가 {밥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며 학생들이 문을 두드려 쌀을 얻어 가는 모습도 보였다. 대책위는 도청 2층에 1천명 분을 공급할 수 있는 취사시설을 갖추고 학생등에게 식사를 제공.
* 학생 수습위는 오후 1시쯤 7개 요구사항을 초안, 민간 수습위와 협의하고 있는데 민간수습위원 대부분이 더 강경한 내용으로 하자고 제의, 난항을 겪기도.
* 7개 요구사항은, ① 이번 사태의 수습 전에는 계엄군의 투입을 금지한다 ② 이번 사태의 원인은 계엄군측의 시민 살상으로 인한 것임으로 인정하라 ③ 연행자 전원 석방 ④ 부상자, 사망자의 치료 및 보상 확약 ⑤ 차후 보복않겠다고 확약하라(사북 같은 보복이 있으면 안된다) ⑥ 복구가 가능한 시내 방송을 즉시 재개하고 사실 보도하라 ⑦ 상기사항의 보장아래 무장해제.
이에 대해 계엄분소장은 {개인적으로는 다소 과격했던 진압에 사과하나 공적으로는 잘못을 인정할 위치가 아니다}, {보복은 절대 않겠다는 것을 보장한다}고 밝히고 있다고.
국방부 출입 조남준 기자 광주서 송고
* 5·18 수습대책위원회는 24일 오후 2시, 23일 계엄분소를 방문, 협의한 결과를 보고.
<내용> 문-계엄군의 시가진입을 일체 금지하라.
답-시민측이 먼저 발포하지 않는 한 시가진입이나 사전발포를 하지 않겠다. 또한 지금 시내엔 1명의 계엄군도 없다.
문-계엄군 공수부대의 지나친 진압을 인정하라
답-현장설명을 듣고 보니 과잉진압임을 시인한다.
문-연행자를 석방하라
답-연행자 9백27명 중 79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했으며, 수습대책위의 요구에 따라 추가로 5월23일 오후 34명도 석방했다.
문-사망, 부상자의 치료와 보상은?
답-보상은 물론 대책을 세우고 있으며 철저한 치료를 하고 있다(현정부가 발표함).
문-방송재개 및 사실보도를 촉구한다.
답-지역방송이 회복되는 대로 속히 사실 보도하도록 힘쓰겠다.
문-자극적인 어휘 사용을 금지하라(예 : 폭도).
답-순수한 시민을 폭도라 함이 아니요, 사태를 악용한 자를 말한다. 상부에 부드러운 어휘를 사용하도록 건의했다.
문-시외 통행로를 열라.
답-민간인은 출입할 수 있다.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면 보호해준다. 또 자동차나 무기휴대자는 접근할 수 없다.
문-사태수습 후 처벌을 금하라.
답-사태수습 후 절대 보복하지 않겠다(군지휘관과 대책위원회의 명예를 걸고 약속함).
계엄분소 부사령관이 24일 오후 2시 대책회의에 전화를 걸어와 단독으로 시내로 들어와 시민들에게 위의 약속한 사항을 재천명할 용의가 있다고 대책위측은 밝히고 부사령관이 자신의 신변보호를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 왔다고 말했다. 수습위는 부사령관의 요청을 시민과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이들의 승낙을 받는대로 시민대표를 계엄분소에 보내 부사령관을 데려올 예정.
24일 오후 5시 광주에서 서기자가 여수주재 李기자에게 행정전화로 송고한 내용을 여수주재 李기자가 다시 본
미공개 자료·조선일보 취재일지
이 자료는 조선일보 사회부의 데스크 일지로, 여기에는 광주사태가 일어나서 끝날 때까지의 각종 보고 등이 수록돼 있다. 당시 검열 때문에 기사화할 수 없었던 기자들의 보고, 기사 등 관계 정보가 이 자료에 원형대로 담겨 있다.
내용이 다소 중복되거나 다르게 표현된 부분도 있으나,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자료라는 점에서 되도록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호흡 빠른 문장도,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원형을 살렸다.
-편집자
<18일>
● 오전 9시쯤 전남대생 1백 명 가량이 학교에 들어가려다 기동경찰과 대치, 투석전.
● 오전 11시30분쯤 학생들은 광주역 거쳐 번화가인 금남로로 들어갔으며, 숫자는 2백 명쯤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농성하며 {김대중 석방하라}고 구호 외쳤다. 기동경찰, 길 양쪽에서 다가서며 페퍼포그 발사, 해산시킴. 학생들은 흩어지면서 충장로, 대림동, 동산, 산수 등 5개 파출소를 파괴.
● 오후 3시 광주 학생회관 앞에서 학생들 페퍼포그차 1대를 전복시켜 화염병으로 불태움.
● 오후 4시 계엄군이 시내에 나타나기 시작. 전역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을 연행 시작.
● 오후 4시30분 공용터미널 앞에서는 기타 갖고 가는 학생, 기타로 머리를 때리기도. 헬기 3대 공중에서 비행(대학생 집결지 파악하는 듯).
● 오후 5시 계엄군이 조선대, 전남대 등 2개 대학교와 광주교대 등 7개 전문·초급대 진주함.
● 밤 8시까지 1백49명 연행설(경찰에 57, 군에 92명)
● 밤 8시15분까지 1백여 명의 학생들이 한일은행 뒤쪽에 모여 있었으나 별일 없었다. 일부 계엄군은 시민들이 학생 감싸면 {너는 뭐냐}고 구타.
● 밤 8시30분 계엄군은 연단병력으로 증강. 광주 시외 변두리와 대학가에 군인들 막사 쳐. 학교 정문에는 8명씩 무장하고 경계, 시가지 요소요소에 군인 배치.
● 밤 9시부터 통금한다고 지방 방송 통해 방송, 통금 실시.
<19일>
전반적 상황 메모
* 금남로는 완전 교통 차단 상태.
* 도청 앞 기동경찰 바리케이드 치고 군병력 요소요소 경계, 배치.
* 외신 카메라 기자들 눈에 띄기 시작.
* 포고령 위반 집중 단속.
*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해산시키자 골목으로 피신. 경찰이 청년 10명을 해산시키자 계엄군이 경찰관 윽박질러. 이들 청년들을 길 한복판에 앉혀 놓고 구타.
● 오전 11시부터 탱크진입, 30명 무릎 꿇려.
● 12시쯤 거리는 완전히 통행이 끊기고 군은 블록마다 차단.
● 오후 1시40분 트럭 18대분의 병력진입, 그 뒤 후속부대 진입, 진입 과정에서 학생·시민 4천-5천명이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에 모여 기동경찰과 대치 투석전(2시20분). 경찰, 최루탄 발사. 학생·시민들 도로변의 화분대(길이 1·5m, 폭 40cm), 공중전화박스, 버스정류장 입간판 등으로 길 가운데 바리케이드 설치, 제1교회 공사장 기름 2드럼에 불질러, 하나는 폭발.
도서관서 학생 연행
계엄군(트럭 8대분), 버스에서 학생들 끌어내 구타. 도서관에서도 학생 끌어내. 군인 점심 먹으러 간 사이 시민 집결.
19일 오후 상황
* 시내 거의 철시, 차량 완전통제. 건물·도서관·식당 등도 뒤져 젊은이는 트럭으로 실어 가.
* CBS차 1대, MBC차 3대, 승용차 2대를 불질러. 시민·학생들 바리케이드 쌓고 MBC(시내 중심가)앞, 금남로통 등 3개소에서 군인과 대치중(오후 2시 현재). 한 곳에 시민·학생 2천명 정도씩.
* 대동고, 중앙여고 수업 거부하고 데모할 기미 보이자 군인들 출동, 학교를 둘러싸 학생들 나오지 못하고 있음.
*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시민들 가정집, 가게 등에 뛰어들어 숨어.
● 오후 3시 광주 유지들 도청에 모여 부지사에게 무차별 구타에 항의, 이런 일 다시 없도록 건의해 달라고 요청.
● 오후 7시40분 광주고속터미널 앞, 1천 여명이 공중전화박스와 대형화분을 부숴 바리케이드 쳐. 경남 넘버 단 화물트럭 불질러.
● 오후 7시45분 유동에 있는 대형 아치 불질러.
* 시민들 몽둥이와 곡괭이 들고 군경과 대치하다가 군이 증원되자 흩어져.
* 9시경에는 거리에 인적 끊겨.
<20일>
● 오전 10시 별다른 상황 없음. 요소요소에 집총 군인들.
* 사망자 3명설. 시민들은 30-40명 죽지 않았겠느냐며 분노. 다방 등서 수군수군, 상가 점포 절반은 철시.
치안본부 발표
5월18일, 19일 이틀간 광주에서 연행 5백17명, 부상(경찰) 6명(중상 1명), 임동파출소 전소, 19일 서울역에서 41명 연행.
오전 12시15분 서청원 기자 송고
* 파악된 사망자 3명 : 적십자 병원에 김종철 김형렬(29·백운동) 두 명. 한 명은 신원 밝혀지지 않고 19일 오후 6시 사망했다는 것만 알려져.
* 부상자는 전남대 부속병원에 23명, 기독병원 4명, 조선대 부속병원 2명. 전남대부속병원에 있는 김영찬(19·조대부고 3년)은 19일 오후 4시30분 계림파출소 앞에서 총격받고 왼쪽 배 관통상을 입었다 함. 시민·학생들에 의하면 중태인 사람은 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사망자 늘어날 듯하다고 함.
* 요소요소에 군·경찰 배치, 현저한 움직임 없음. 상가 3분의 1철시, 시민들 분노. 언제 폭발할지 모름.
오후 2시30분 서기자 송고
* 19일 오후부터 전남·북에 걸쳐 내리던 비 오늘 오전에 멈춰. 시민들 {내 아들, 내 동생 어떻게 됐나} 신문사·방송국·경찰서 찾아다녀. ○사단에 시민·학생 1천여 명 연행설. 시민들 의견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야 하지 않느냐. 가면 갈수록 희생만 커진다} {계엄군을 교체해야 할 것 아닌가} 시민과 군인, 서로 적대감 느끼는 듯.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었는데 타도 사람으로 바꿨다]는 소문도 나돌아. 시민들이 저제 집단적·무차별적으로 당해 거리에는 나오지 않고 있음. 오늘 밤 게릴라식으로 군으로 붙을 우려.
* 오후엔 상가 3분의 2철시. 현재 중동지역에 군인들 가택 수색(대학생)한다는 소문. 광주에 유학보낸 서울 학부모들 사태 궁금해 광주에 내려와.
* 군인 한 명이 적십자 병원 앞에서 죽었다는 소문-학생들이 [나쁜 놈] [죽일 놈]이라고 욕하며 따라가다 개천에 떨어져 시민 학생들이 돌로 쳐 죽였다고 함.
* 오늘 밤 지켜봐야 할 듯. 사진은 4시40분에 서울에 도착 예정.
오후 4시20분 서기자 송고
● 오후 4시20분 금남로 2가 가톨릭 센터 앞에서 8백여 시민·학생들이 애국가 부르며 농성. [계엄해제] 외쳐. 계엄군 최루탄 발사, 일단 해산. 광주고 앞에서 4백여 명 계엄군과 대치.
* 번화가 충장로 등 교통차단. 골목길에서 계엄군·경찰이 시민 접근 차단.
* 배명인 광주지검 검사장 말에 의하면 어제(19일)까지 9백8명 연행(고등학생 13명, 대학생 4백95명, 시민 4백명). 이중 1백67명은 오늘 오후 석방한다고.
* 전남도 계엄분소, 전남 부지사·검사장·교윢감·목사·신부소집. 기관장등이 {데모 진압방법 너무 지나치다. 이 때문에 시민·학생들이 반발했다. 시민 선무가 급선무다. 석방할 사람은 빨리 가려 석방시키라}고 대책 건의. 계엄분소 대단히 고무적 반응. 실마리 조금씩 풀리는 듯.
* 오후 4시50분
광주 최계원 지사장 기사 고치고 추가할 내용 불러옴.
* [연행학생 1백67명을 오늘 중에 석방]을 [연행 학생과 일반시민 중 1백67명…]으로 고치고
* 추가 [계엄분소는 또 앞으로도 계속 주동자가 아닌 자는 선별 처리해서 석방한다고 밝히고 주동자는 엄히 다스린다고 발표했으며, 소요가담자 중 경상자는 군에서 치료하고 있고 중상자는 없다고 발표했다]
광주주재 조광흠 기자 송고
금남로 2-3가에 시민, 학생 모이기 시작. 4시에 3천여 명 [계엄철폐]외치며 애국가 합창, 일부 연좌 농성. 군인들 밀고 내려와 5시쯤 3백m 밀려 금남로 3가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서 군과 대치. 철책 토관 드럼통으로 바리케이드, 곧 강제 진압할 듯.
서기자 송고
광주시내 중심가 최루가스 꽉 차. 조선일보 지사(동구청 건물에 위치)도 근무 못할 정도. 군인들 지사건물 앞에서 못나가게 해. 군인 수백 명이 지사 근처에 깔려 있음.
● 오후 6시 택시운전사 2백여 명이 무등경기장에 모여 계엄군을 몰아내겠다고 결의.
시내버스 2대와 택시 2백대를 앞세우고 충장로 3가따라(데모대 운집해 있음) 전남도청 앞으로 헤드라이트 켜고 돌진중.
● 오후 7시쯤 충장로 3가에서 경찰과 군과 대치 진행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사태는 19일 택시운전사 4명이 시민을 실어나르다 계엄군에게 적발, 군이 {왜 학생들을 태워 주느냐}며 운전사 끌어내리고 구타. 이로 인한 반발.
오전 서로 연락 취해 모인 듯. 광주시민들은 {어저께 계엄군 나오라} 심히 흥분.
데모대 나올 때마다 박수치고 성금내고 있다. 사태가 더욱 악화된 듯.
최지사장 송고
동원차량 금남로에 버스 15대. 도청 향해 50여m 앞에 버스 1대 군이 페퍼포그 쏘아 멈추게 하고 타고 있던 학생들 연행. 일부는 공용터미널 앞에서 트럭 앞세우고, 또 노동청 앞에는 택시 15대가 밀려와 대치. 남광주 쪽에서 등 4면에서 도청으로 차량데모.
19일 사태후 운전사들 흥분.
서기자 송고
도경과 도청 중심으로 4개의 도로 나있다. 그 방향으로 압축, 제일 심한 곳이 금남로. 버스 10대 트럭 4대 택시 1백여 대가 1천여 시민 뒤따르며 도청 앞 5백m까지 육박.
다른 3개 방면도 택시 앞세운 2백-3백여 데모군중이 도청 향해 진격하다 페퍼포그에 주춤. 대치.
● 오후 7시20분 광전교통소속 전남5아 3701 시내버스를 타고 고교생차림 2명과 운전사가 경찰관 앞으로 돌진. 도청 앞 광장까지 갔다. 차를 세우고 도망가다 경찰에 잡혀.
● 오후 7시45분 도청 앞 광장까지 집결, 군중은 태극기 흔들고 구호 외치면 도청 쪽으로.
최 지사장 송고
● 7시부터 금남로 거리에 버스 8대 대형 트럭1대 택시 50대를 앞세우고 도청 앞까지(관광호텔) 진출. 구호(계엄해제)외치다.
● 8시쯤에 차안에 최루탄 발사하며 군인들이 강제진압. 8시에 물러나 군인들과 대치 중. 상당수 연행, 진압방법이 어제와는 달리 완화. 군인들 태도 누그러진 듯. 변두리 곳곳에서 차가 몰려와.
광주주재 조기자 송고
● 오후 6시 금남로 일대 수 만. 통운 대형 트럭 1대 버스 10대, 택시 70대가 4열로 도열. 도청 앞으로 진격, 관광호텔 앞까지 나갔다 페퍼포그에 차를 버리고 물러나. 계엄군이 차 유리창을 다 부수고, 주택가로 밀려난 데모대들이 [시민들 나오라]고 유도. 9시 이후에도 계속될 것 같다.
● 오후 8시30분 데모대들 소방차 여러대 뺏어 도청 앞에 모여 계속 사이렌 울리고 있음.
송기자 송고
● 오후 7시40분부터 40분 동안 소강상태.
● 오후 8시10분에 2-3대 소방차 탈취해 사이렌 울리며 금남로 도경앞 6백m 앞까지 돌진하면서 데모가 가열됨. 오늘이 고비일 것 같다. 5천-1만여 명 몰려 있다(8시40분 현재). 어제의 계엄군 목표로 갔다 함(예방키 위해). 도청 3갈래 길이 완전히 가득차 있다. 대치망 뚫리면 도청을 방화할 가능성.
● 오후 8시50분 데모군중이 시청에 침입, 점령(시청은 도청에서 6km 동북으로 떨어져 있음).
● 오후 8시부터 광주 MBC(도청에서 1km), KBS(도청에서 2km, 광주역 앞)가 방송중단. 시민 접수한 것 같다. 전일방송, CBS는 나와.
광주주재 조기자 송고
● 9시40분에 MBC 방화, 소방차도 못오고 타고 있다. 9시에는 학동 파출소와 그 앞에 있던 사이카 2대 전소. 노동청 앞에서 택시 1대 전소. 방화가 늘 것 같다. MBC는 빌딩이라 광주시내에서 다 불길이 보여 시민이 흥분할 것 같다.
서 기자 송고
● 오후 10시부터 데모대가 폭동화. MBC방화. 순경 강정우 등 4명이 도청 앞에서 돌진 버스에 깔려 사망(3명은 서기자 눈으로 확인) 2명 중상.
이들 순경들은 도청에서 2백m 떨어진 노동청 골목에 포진해 있다가 불을 지른 버스에 깔려, 이 버스를 다른 버스가 밀어 중상 순경은 앰뷸런스가 실어 가려해도 빠져 나가지 못해.
이 일대 버스 불탄 것만 4대. 도경을 중심으로 극렬히 데모. 군대는 포진하고만 있다.
밤 10시30분 서기자 송고
* 도경, 도청 함락 직전. 데모대들 도청 뒷담을 곡괭이로 허물고 있음. 도청에 있는 간부들이 대피. 생명의 위험이 있어 교육위원회로 피신 (서기자, 광주주재 위정철 기자). 도청을 중심으로 데모군중 2만-3만명 포위. 오늘밤 광주시내 큰 일 날 듯. 대단히 긴박한 상태. 시민들도 나와 지켜보는 상태. 경찰관, 군인들 포위 당하고 있음. 시민도 귀가 않고 있어 폭발 일보직전.
밤 11시5분 서기자 송고
● 10시55분 광주역쪽에서 군인들이 수백 발 발포하고 있음. 취재접근 어려움. 중요서류, 직원들이(도청) 옮김. 총쏘고 시민 함성 소리…무법천지 공포의 도시. 유탄피해 우려. 도청에서 서기자 탈출. 사진기자 이영배시 지사 쪽에 있는 듯.
발포 피해 상황 아직 모름.
광주주재 조기자 송고
* 중심지에서 (금남로)데모주력시민들이 강제진압 (군인이 페퍼포그 쏘아)으로 흩어짐. 중심지 옥상에 사진기자 이영배씨와 같이 있음. 광주 시청 옆에서 11시에 사격개시. 1백여 발 유탄 50여발은 공중으로 날아가고 나머지는 안보여. 공포위협 사격인 듯.
<21일>
새벽 1시40분 광주 위정철 기자 송고
● 새벽 1시15분 전후해 광주세무서에 불길이 올라 세무서 곁에 2개 주유소가 있는데 여기의 휘발유와 경유를 빼 불을 질러. 노동청-국세청 사이 현장에 여자 1명 남자 1명이 죽었다는 말이 있음. 계속 함성. 발포. 도청 주변에서 계엄군이 장갑차로 밀어붙이고 있다.
새벽 2시 광주주재 조기자 송고
* 동사무소 스피커와 앰프를 떼 차에 달고 외곽지대를 돌면서 도청으로 집결하라고 방송하고 다녀. 여자 목소리.
산발적으로 곳곳에서 충돌. 총소리가 계속 나. 도청에서 2백m 떨어진 곳에서 애국가.
오전 10시30분 서기자 경비전화 연락
* 고장이란 이유로 시외전화선 절단. 데모군중 장갑차 1대, 군지프 4-5대 뺏어 도청 반경 5백m내에 군경이 사수하고 그 외의 천지는 완전히 무법지대.
* 광주시장, 데모군중 설득하려다 군중에 납치설. 변두리지역 축제분위기. 새벽에 KBS 불에 탔고, 현재 2명의 시체를 리어카에 실어 태극기 꽂고 돌아다녀. 오늘 낮과 밤이 고비될 것 같다.
시경 경유 현지 기사 접수
* 오전 10시30분 도청에 있는 주요 기밀서류를 헬기로 대피시키기 시작.
* 오전 10시48분 군 헬기에서 방송, [공수단 병력을 철수시키겠다. 시민도 협조해달라] 그러나 시민의 호응은 없음.
* 오전 10시50분 도지사·시장도 헬기에서 설득 방송. 광주시민은 질서를 지켜달라고 설득하고 있으나 효과가 전혀 없음.
* 오전 10시53분 시민들 아시아 자동차를 두 번째 습격. 가스장갑차 1대를 탈취, 시내로 진입.
* 오전 10시56분 서울에서 경찰소속 대형 헬기로 2l 들이 CS액(코와 귀를 자극하는 액체) 10통짜리 20박스 수송. 이 비행기로 민간인 시체 1구와 중상자 2명 싣고 출발. 오늘 중으로 도청, 도경 함락될 듯. 비밀문서 후송은 이에 대비한 것. 경찰과 군인의 불만이 나타나기 시작.
경찰 : 동료들이 살상당하자 [왜 이런 식으로 지휘해서 피해를 입히느냐]고 공공연히 불만 토로.
군 : 땅을 치고 통곡하는 모습 보임.
① [왜 이런 식으로 우리 동료가 다쳐야 하느냐]며 흔들림. ②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고 아우성도. 군은 부상병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나 수송을 못해 더욱 자극되는 듯.
* 현재 데모군중은 10만 정도. 금남로에 5만 정도가 몰려 있고 자동차들은 이들을 도경, 도청 쪽으로 수송 중.
* 전남대 학생회에서는 제일교회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어떤 폭력과 방화도 막아야 한다. 광주 시민의 긍지를 살리자]고 설득. 그러나 효과 없음.
* 70노인까지 거리로 나와 [왜 죄없는 사람을 다치게 하느냐]고 흥분. 전반적인 현상은 갈수록 악화. 직접 보지 않고는 못 느낄 정도로 험악. 전남일보, 전남매일, 직원들 출근 안하고 못하는 등으로 신문 발행 못함. 금남로에 있는 관광호텔 외국손님 대피, 광주시장은 피납모면.
낮 12시 서울시경 林 伯 기자 접수
* 전남지역 학생 총연맹 이름으로 오후 2시 도청 앞에서 도민궐기대회하기로(전단). 각 대학별로 집결지 만들어 행진 집결키로. 주민들은 통·반별로 플래카드 만들어 참가요청.
* 오후 1시 도청, 함락 직전. 함락될 경우 통신 완전 두절될 듯. 곳곳에서 불길. 인근 읍면에서도 몰려오는 것 같은 움직임.
군중들의 구호 : [지방색이 웬말이냐] 기자들도 군중들이 [기자들 때려 죽여라] 구호 때문에 피신, 연락이 어려운 상태.
오후 2시20분 서기자 경찰경비전화로 치안본부 기자실에 전화
* 12시45분 시민에게 발포. 1명 사망, 수명 부상. [이 이상 연락할 길 없다]며 끊었다고. 치안본부 3부장실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오후 1시3분 군중이 도청으로 몰려와 가스탄 발사했다고.
오후 3시 서기자 서울시경으로 송고
* 오후 1시 발포명령 도경 쪽에 포위돼 있던 군·경이 군중에 총을 쏘기 시작.
옥상마다 군인이 올라가 총 쏘고 있다. 사상자? 수백발 쏘았다.
주변에는 시위대가 여전히 장악. 자동차 트럭 2백여 대 몰고 다니며 경찰도 도청 사수 각오로 임하고 있다. 교도소 무기고 탈취 기도하고 있다는 소문 있어 군·경이 대비하고 있다고.
* 발포동기 : 12시40분쯤 도청에서 5백m 떨어진 금남로에서 시위대가 차 몰고 도청 향해 진격. 군경 3명 사상설. 자세한 상황 모른다. 무서워 나갈 수 없다.
오후 3시15분 입전
학생들이 나주에서 예비군 무기고 탈취, 무기 40정과 실탄 갖고 와 군·경과 시가전 벌이고 있다.
타사 정보 종합(20일 밤 및 21일 상황 상보)
* 20일 자정 광주세무서 점거, 무기고 탈취, 카빈, M16 수십 정을 중고생들이 들고 다니고 있음.
* 오전 9시 동구 광천동 아시아 자동차를 2천명이 기습, 자동차 3대 탈취, 금남로 쪽으로 밀고 들어오고.
* 9시50분 제일은행 앞에서 군중 1만여 명 중 대표 김범태(27. 조대 법과 1년) 전옥주(32. 여) 등이 도청 상공국장실에서 지사 및 광주 시장과 협상.
요구조건 : ① 도지사가 군중 앞에 나와 공개사과하라 ② 연행학생·시민 석방 ③ 입원학생 생사와 소재 알릴 것 ④ 계엄군은 낮 12시까지 철수할 것 ⑤ 계엄분소장과 협상 주선할 것.
장형태 지사 {군철수는 최대한 노력하겠다. 나머지도 책임지고 수락하겠다}면서 10시에 대표자 3명 돌려 보냄. 그러나 분위기는 계속 고조(한때 시장 납치설).
* 전옥주는 밤새운 데모 주동자로 조대 무용과 중퇴하고 마산에서 무용학원 경영. 고향에 왔다가 유혈 사태보고 데모에 가담 주장. [시민들에게 마구 총질한 것은 용납할 수 없고, 이를 지시한 책임자도 용서할 수 없다] [일단 계엄군을 철수시킨 후 데모군중의 질서를 정리하여 계엄 철폐를 위해 끝까지 평화적 시위를 벌이겠다. 내 동생도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 20일 밤 9시50분 동구 하길동 주택가에서 계엄군이 덮쳐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곤봉을 휘둘렀다. 경향신문 박옥재(41)기자가 중상을 입는 등 수십 명 부상.
* 21일 오전 데모 계속 [광주시민 단결하라] 외치고, 여고생들도 태극기 들고 앞장, 주부, 꼬마들도 각목, 갈쿠리 등을 데모대에 건네주고, 도청 도경이 고립돼 군·경은 헬기로 진압 화기 공급. 고속버스 시내에 못 들어오고 있음.
21일 오전 총리실 입전 보고
* 9시20분 아세아자동차 공장 장갑차 1대, 군용차 30대, 기타 10대 탈취. 한국은행과 가톨릭센터 사이에 5천명이 각목들고, 군지프 2대, 그레이하운드 1대를 앞세운 채 행진. 시체 2구 손수레에 싣고 마이크로 [계엄군은 시체 인도하라]고 방송.
* 인명피해 : 경찰 1백15명(사망 4, 경상 90명), 군(사망 1, 중상 5명).
* 도청 : 버스 1대와 차고 전소, KBS, MBC 전소, 광주세무서 방화, 세무서 무기고 탈취(카빈 17정).
* 오늘 새벽 군병력 1천5백 명 서울서 광주로 출발.
* 군장갑차 1대가 군중에게 탈취됐다고. 아나운서실에서 변칙적으로 뉴스모아 방송하고 있음.
오후 4시 총리실 입전 보고
* 군중들이 카빈 3백정으로 무장, 전남 의대와 경찰국쪽으로 진출중.
* 오후 4시10분 광주 지원동 석산 화약고서 다이너마이트 1상자 탈취 시내로 진출중.
* 나주경찰서 무기피탈 내용 : 카빈 7백80정, M1 2백35정, 실탄 4만6천4백발, 38구경 12정, 45구경 16정.
* 군 트럭과 버스 30대 동원, 30명씩 분승하여 영광으로 무기탈취자 출동.
* 화순경찰서 무기도 피탈.
역전파출소서 카빈 8백정 수류탄 일부 피탈. 파출소장 납치. 또 다른 파출소 카빈 2백정.
총리실 정보비서실 입전 보고
* 오후 4시15분 시위대 전남의대 12층 옥상에 LMG 2대 설치, 5백m 떨어진 도청향해 발사중. 소방차 1대에 석유를 만재, 도청 방화위해 진출중. 일신방적 무기고에서 카빈 1백50정 피탈.
* 오후 4시21분 호남집중 무기고에서 카빈 1백80정, 실탄 9백발(화순), 승주지서에서 카빈 40정 탈취. ○○사단 병력지원 차 출동.
* 오후 4시25분 한국화약에서 화약 6트럭분 수송치 못함(경찰쪽으로). 서울 시내 중·고생 내일(22일) 오전 봉기한다는 정보있어 시교위, 문교부가 총동원, 교사 비상동원, 무마작업중.
총리실 보고
* 오후 4시 시위대를 카빈 3백정으로 무장, 전남의대에서 경찰국 쪽으로 진출중.
* 오후 4시10분 광주 지원동 석산 화약고에서 다이너마이트 1상자 탈취. 시내로 진격중. 나주경찰서 무기 피탈 내용, 카빈 7백80, M1 2백35, 실탄 4만6천4백발, 38구경 12정, 45구경 16정. 군 트럭과 버스 30대를 동원, 30명씩 분승, 영광으로 무기탈취자 출동, 화순경찰서 무기피탈, 역전파출소 카빈 8백 정, 수류탄 일부, 파출소 소장납치, 또 다른 파출소, 카빈 20정.
* 오후 4시45분 전남방적서 카빈 1백89정 탈취
* 오후 4시51분 전남연초제조창 무기고 탈취(수량미상).
* 오후 5시15분 상황악화로 도경상황실 폐쇄.
목포 주재 박흥서 기자, 부산 경유 보고
* 21일 오후 2시30분 광주서 시민 학생들이 전남 5아 1059 등 광주고속버스 6대와 승용차 2대에 분승, 목포 도착.
* 6시 현재 버스 1대 [계엄해제]등 외치며 시내 돌아다녀. 연도엔 3만여 명이 나와 박수로 환영. 밤엔 심각할 것 같다. 경관은 모두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신, 전파출소가 비어 있다. 시내에 군인들은 안 보여.
아직 파괴는 없다.
목포에서 서울, 광주 시외전화 안된다. 서울에서 전화해 주기를 바란다(밤 9시에 전화해 달라).
오후 6시 여수주재 이만영 기자 연락
* 광주에서 학생 시민이 여수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 전 경찰 비상. 여수경찰서는 유치인 33명, 보호인 15명 등 48명을 순천교도소로 호송중. 여수 분위기도 바뀌고 있다.
목포 주재 박기자 통화내용
* 20일 밤 9시 이후 KBS, MBC TV 중계가 중단(광주에서 중계해주는데 중계시설이 부서진 듯).
* 21일 오후 4시 목포 MBC에 광주학생을 실은 버스 1대가 도착, 안으로 들어갔다가 부수지 않고 그냥 나왔다.
* 오후 6시 광주 학생들 철수. 목포 학생(고교, 대학) 시내버스 7대, 시외버스 1대 탈취.
* 오후 6시15분 서울행 특급열차(8시15분 출발 예정)가 2시간 전에 미리 출발.
* 오후 7시20분 군용 헬기 1대 10분간 목포역 상공을 중심으로 정찰 비행 후 사라짐.
* 오후 8시 목포 학생들 시청 유리창 심하게 부숨.
* 오후 9시30분 흰머리띠 두르고 각목 든 사람들, 전남 5아 1060호(광천여객 소곡)에 [김대중 석방하라]는 플래카드 걸고 목포 시내 누비고 다닌다.
목포 박기자와 21일 자정 통화 내용
*21일 오후 9시 학생 1백여 명 목포 경찰서에 들어가 유리창 부수고 뒤뜰에 세워 둔 트럭(호송차) 1대 등 불태워.
* 오후 9시-10시 사이 영해, 대의 , 역전, 연동 파출소 기물 파손.
* 오후 9시20분-10시 사이 3차례에 걸쳐 목포 MBC 유리창, 기재 일부 파손.
* 오후 9시30분부터 MBC 정규방송 중단.
* KBS 초소와 현관 유리 깨짐. 목포 역전 부근 도로에 깨진 유리조각 널려.
* 오후 4시-5시쯤 일부 다방에서 데모 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조달하기 위해 모금했다는 설.
* 밤 12시30분 현재 시내버스, 공단의 통근버스, 덤프 트럭, 용달차, 8t트럭 등 20여 대에 학생들이 나눠 타고 시위하고 있음(22일 아침 정각, 목포 박기자와 통화키로 했음. DDD는 안되고 106번 불러 통화 바람).
<22일>
목포 박기자와 통화내용
* 새벽 1시20분 무안동 코롬방다과점, 수퍼마케트 일원 식품가게를 부수고 들어가 빵, 음료수를 실어가.
* 새벽 2시 목포역 대합실 전부 파괴, 연동 파출소 모기관 목포지부 방화. 항동 파출소 무기고 태우고, 시내 파출소 전부 파괴. 해안경찰서, 세무서 파괴.
* 새벽 3시 남양어망 공장 부수고, 열차불통, 시외·시내 버스 불통. 중·고 학교장 재량 휴교령. 각목, 카빈 공포 쏘고 다녀. 무기 휴대한 젊은이 복면하고 1백명 정도. 다른 데모대 1천여 명. 시민호응 안해. 시내상가 모두 철시. 군대는 안보여. 학생들은 질서지켜. 마이크로 [자중하자].
오전 10시40분 서기자 광주 도경국장관사에서 경비전화로 송고
* 서기자 눈으로 확인한 학생, 시민 사망자 20명.
* 총격전(시가전)은 21일 오후 4시부터 시작.
* 21일 오후 7시-8시30분 사이에 도청, 도경에서 군철수, 조선대 쪽으로(1만여 명). 도청 도경은 시민이 접수, 일반인 접근 금지 시켜. 학생들은 [헌혈하자]고 전단 뿌려(22일 오전).
* 오전 10시50분 수만시민이 도청 앞에 모여 궐기대회. 총리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학생들 수백명이 총 휴대. 시민들이 경찰 페퍼포그차, 장갑차들을 몰고 질주하고 다녀. 경찰 헬멧 등 장비도 학생들이 쓰고 다니고, 어제 시가전은 예상 이외로 심하지 않았다. 군이 철수하면서 경찰 무장해제, 경찰 간부들 권총도 빼앗아가. 그래서 경찰 불만이 심하다. 무장해제당한 경찰, 사복으로 바꿔입고 광주를 빠져나가.
22일 오전 현재 거리는 학생과 시민뿐. 곳곳에 핏자국, 불탄 자동차 잔해 등이 널려 있고, 22일 계엄사령관의 광주사태 발표는 시민들을 자극, 흥분시켰다.
중앙지, 광주지방지 없고 이곳 방송도 안돼 전주 KBS 방송을 듣고 있다. 학생들은 강경파(군이 우리를 쏘는데 우리만 당할 수 없다), 온건파(무기휴대 반대, 난폭한 행동반대)로 나뉘어 있음.
12시에 총리가 온다는 소문. 총리가 오면 학생·시민·군·경찰·총리협상. 협상이 잘되면 풀리고. 계엄사 발표 때문에 군이 들어오면 큰 충돌이 있을 것이다.
21일 도청, 도경 시민 인수 후 공공건물 파괴 전혀 없다. 기자가 사진 찍으면 박살. 도경국장집도 가정부 혼자. 이곳도 위험하여 피신하고 싶다. 다른 기자들은 빠져나갔다. 21일 오후 3시 이후 현지에서 전화하는 기자는 자신뿐. 신변위협 느끼고 있다.
오전 11시40분 내무부 보고
* 도청서 부지사, 기획관리실장, 내무국장이 학생대표들과 협상중. 도청은 학생들이 지키고 있다.
순천 상황
열차가 이리까지 밖에 못간다. 여수-서울간은 운행. 순천-목포간은 두절. 21일 밤 승주군 송강면 지서에 10여 명이 와 무기를 내놔라. 무기가 없자 유리창을 부수고 이불을 가져갔다.
오후 2시 여수 이기자
* 현재로는 조용. 민심은 안좋아. 중·고등학교 휴교령. 목포 관공서 모두 접수된 듯. 여수에서는 전화 안돼. 어제 광주에서 여수쪽으로 온다던 시위군중은 벌교까지만 왔다가 강진으로 돌아 강진 전경대 중대본부 무기고 접수, 무기 등 싣고 광주로 되돌아 가. 화순탄광에서도 화약 등 갖고 광주로 갔다는 소식.
오후 3시50분 목포 상황
* 목포역 옥상에 [광주 시민의 피를 보답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김일성 오판말라] 플래카드 걸려 있고. 대형 소방차 1대, 해군 지프 1대, 제일영동교회 선교용 버스1대를 타고 다닌다. 법원, 검찰에도 난입, 부숴(오늘 새벽). 목포서 버스 11대가 광주로 합세하러가 (오늘 아침).
* 오후 1시 오창근 목포대학장, 시내야당인사, 종교인, 이병대 시장 등이 모처에 모여 난폭해져가는 데모를 건전하고 평화적 시위로 설득키로 결의.
* 오후 3시 목포역 광장에 나와(시장은 제외) 군중들을 설득(4천여 명). 군중들이 박수쳐. [시내 대학생부], [고등학생부] 플래카드, 1천여 명이 이들을 앞세우고 평화적 시위, 연도에서 시민들 박수. 무기 든 사람들은 별도로 다녀, 이들은 호응안해 두갈래. 은행, 관공서 철시. 23개 중·고교가 무기 휴교령. 국민학교도 학교부근 학생들만 일부 등교했다가 곧 돌아가.
7시10분 광주 서기자
* 사망자 56. 데모군중이 시체 56구를 관에 넣어 도청 앞 광장에 놓고 7시부터 추도식. 시민, 학생사이에 강·온이 맞서.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것 같다.
통신 보도 내용
* 22일 오후 4시30분쯤 광주시내 국군통합병원 부근에서 데모군중틈에 끼여 있던 30대 여간첩 용의자 1명을 시민들이 붙잡아 대치중인 군인에게 인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민에 따르면 이 여인은 지난 19일 밤 데모때 [여기저기에 불을 질러야 한다]고 외치고 다니는 것을 수상히 여긴 데모학생들이 그녀의 행동을 계속 주시하던 중 이날 붙잡아 카메라 1대와 함께 군에 신병을 인계했다는 것.
10시25분 목포 박기자 전화
* 오후 4시30분 목포역 광장에 목포대학생 2백여 명 모여 평화적 시위를 위한 궐기대회를 갖고 3만여 명의 시민들에게 집으로 들어가도록 호소했다. 학생들은 또 무기를 휴대한 젊은이들에게 목포에는 계엄군이나 경찰관이 대치하고 있지 않은데 여러분이 공포를 쏘고 다니면 시민들이 오히려 불안감을 느낀다며 카빈이나 M1탄피 등을 회수했으나 일부는 계속 공포시위를 하고 있다.
* 오후 5시40분 목포청년회의소 회원들 30여 명도 [민주시민의 대행진] [현실을 슬퍼합시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목포대학생들과 함께 무기회수 운동과 함께 평화적 도보시위를 했는데 연도의 3만여 시민들은 이들에겐 박수로 호응했으나 무기를 들고 자동차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외면했다.
* 목포→서울 기차나 버스통행이 안되자 목포해안에선 1인당 1만원씩 받고 소형 모터선으로 30명만 모이면 목포에서 군산까지 수송하고 있음(군산서 서울 가는 것은 차편이 있음).
* 오후 10시30분 자동차 시위자 등 4백여 명, 무기일부와 수류탄 회수 못했음.
밤 10시30분 서울시경에 보고된 내용
* 대학생들은 협상 받아들였으나 일부 시위군중들은 반대하는 입장(현지 도청의 모 부이사관의 말). 학생대표들, 도청에서 계엄 분소장과 이야기 중이다.
학생들은 현재 사태가 크게 벌어지자 겁도 나고 해서 뒤로 물러서는 상태. [이제 우리는 모르겠다]는 식이라는 것. 현재 총기는 약 3천5백 정 정도가 시민들 수중에 가 있는데 회수된 것은 2백-3백정뿐이고 나머지는 시위군중이 갖고 있는 듯, 지금도 시가지 곳곳에서는 간간이 총성이 들림.
* 도청광장에는 3만여 명이 모여 추도식하려 했는데 오후 10시30분쯤에는 1천여 명으로 줄어들었음. 시체는 도청 앞 광장에서 관에 넣어 늘어 놓고 있으며 과격한 말들이 나오고 있음.
* 관에는 죽은 사람의 사후사진이 붙어 있는데 연고자를 찾기 위함인 듯. 사망자 중에는 고교생들도 있는 듯, 수습대책위원회는 학생들과 협의에 진전이 없자 귀가하고 있음. 총리의 헬기가 상공으 지나쳐 가자 시민들은 [허수아비 총리하고는 상대 안한다] [오려면 책임자가 오라].
* 관 옆의 시민들과 총기를 가진 시민들은 아직도 과격. 오늘은 소강상태로 넘길 듯. 그러나 내일은 모른다.
<23일>
S 신문 취재팀 서울시경 연락내용
시위 군중들이 소지했던 무기회수 시작. 많은 학생 시가지에 나가 쓰레기 치워. 대부분의 시민 거리청소.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대해 얘기 나눠. 총격에 놀란 시민 일부 보따리 싸 시외로 나가는 모습도. 일부 과격시민·학생들은 수습대책위의 수습방안에 불만을 품고 오전 10시 현재 도청 앞 광장 등에 다시 모여들기 시작해 사태 낙관 못할 상태.
* 학생들은 21일 밤에 접수했던 도청과 도경청사를 23일 아침 도와 경찰에 내주었다. 도직원 일부도 출근했다. 과격파 시위군중들은 도청과 전신전화국을 불태우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학생들이 만류.
오전 8시30분 광주 서기장 시경중계로 서울 林 伯 기자집에 전화
* 서기자 확인한 사망자 명단
<도청 뒤뜰 43구> 이중 17명 이름 확인, 미확인 26명.
임규수 김호중 정민구 정학근 홍성기 나종기 정창용 조남진 조사천 이상자(여) 박금희(여) 김재환 박기현 임순춘 양주접 전종호
<전남대 22구> 김안복(36) 김정웅(39) 박기웅 이세호 박기형(16) 신정대 최승희(여 21) 김재수 김호중 정민규(23) 최영호
오전 10시40분 광주 서기자 일반 전화
* 현재 학생들과 시민대표, 도청 간부들 협상 중. 어제부터 수습나섰으나 뚜렷한 결론 못내려. 수습전망 흐려.
* 이 전화로는 더 이상 기사 부를 수 없다.
오전 11시 동아일보팀 치안본부 전화
* 수습대책위 15명→10명으로 줄었다. 전남대생 10명, 조선대생 10명 등 20명 추가. 30명으로 다시 구성. 여고, 남고생 등 3백여 명이 스크럼짜고 시위. 구호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다] [언론 각성하라]
부녀자들 거리에 솥 걸고 시위자에 밥. 총기는 절반가량 회수.
오전 11시 이현구 차장 통화
* 11시 현재 서기자 등 지사에 나와 있고, 건강하다, 별일 없다는 말. 23일 오전 중에 조금 회복되었고 학생들은 무기회수 시작, 강도 등 범죄까지 뒤집어쓰지 말자고. 그러나 회수된 무기를 군에 돌려보내자, 학생들에게만 나눠주자는 양론.
도청 간부 등 직원 출근해 일 보고 학생들은 거리 청소하고 있다. 시민들 도청광장에 모여 대표들이 타협하는 동안 끼리끼리 강·온 양론.
또 시민들은 미국무성 성명(미국이 진압군 차출하는 것 양해했다는 내용)의 의미가 뭐냐고 궁금해해. 시민대표들 사망자 장례절차 논의중.
* 오전 5시 학생, 시민들이 나와서 거의 청소를 하고 난장판이었던 금남로를 말끔히 치웠다. 그러나 불탄자동차의 잔해 등은 그대로 남아있다. 학생들은 장례반, 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등으로 나뉘어 수습중인데, ▲ 장례반은 시체 43구가 안치돼 있는 도청 후정에 사망자 가족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여 보내고 있고, 사망자 중 신원 미확인자를 찾기 위해 가족들이 우왕좌왕 ▲ 총기회수반은 12시 현재 8백여 정 총기를 회수 ▲ 차량 통제반은 시위군중들이 몰고 다니는 버스, 장갑차, 페퍼포그차 등에 대해 함부로 못 몰고 다니도록 단속하고 있어 무질서한 차량통행은 통제됐다.
* 오전 5시부터 도청 앞 광장에 시민들이 몰리기 시작, 12시 현재 약 7만-8만명이 운집해서 도청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들의 회의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수습대책위원회들은 오전 10시부터 도지사실에서 회의중에 있고 위원은 30명(지역 유지들 중심)으로 늘렸고 독립투사 최한영씨를 위원장으로 뽑았다.
수습위원들은 22일 계엄사와 합의한 7개항의 내용을 문안으로 작성해서 마이크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이를 공지하기로 하고, 학생들에 대해서도 설득을 계속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내무국장실 옆방에서 학생대표들은 회의를 열고 있으며, 대표들 중 온건파는 수습대책위의 의견을 따르자는데, 한편 강경파는 계엄령 철폐 등 기본적 문제가 관철될 때까지는 끝까지 투쟁하자고 주장해, 의견 일치를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어서 사태 수습은 난항.
그러나 강온을 막론하고 광주시내 질서 회복을 하자는 데는 이견이 없어 대학생 7백-8백명(여대생 50여명 포함)이 23일 12시 현재 하얀 헝겊에 [대학생]이란 완장을 두르고 질서 회복에 나서고 있다.
이들 학생들은 {질서를 회복하자는 것은 대책위의 합의를 받아들여서 사태를 수습하자는 것이 아니냐?}는 우리 기자의 질문에 대해 {그것은 오산이다. 군부대에서 연행학생 79명을 석방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무기를 회수하여 반환할 것을 대책위를 통해서 요구했지만 석방한다고 해도 다시 잡아갈 것이 분명하지 않으냐. 우리는 계속 투쟁할 것이다}고 했다.
학생들은 총기를 회수하여 이를 반납치 않고 시민들로부터 회수한 총기를 학생들만 갖고 학생들이 치안을 맡아 자체 경계를 맡겠다는 움직임이 크다.
22일 스케치
* 22일 새벽 학생들이 계엄군 소속 김○○ 상사를 광주시 지원동 다리부근에서 붙잡아 군작전을 들은 후, 다른 곳에서 붙잡은 전경대원 2명과 함께 계엄사에 넘겼다. 3층 이상 건물들은 오후 8시만 되면 모두 소등했고, 일부 불량배들에 의해 변두리에서 강력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22일 도청광장에 모였던 군중들은 오후 8시쯤, 각자 귀가했고, 4백-5백명 학생들, 청소년들이 남아 시가지를 돌면서 치안을 맡았다. 유가족들은 시체 옆에서 밤을 새웠다.
* 22일 오후 2시쯤 광주전화국에 무장청년 1명이 들어와 전화국을 폭파하려고 했으나 학생들이 잇달아 들어와 이를 저지, 학생들이 경비를 섰다. 사태가 누그러지자 학생들은 국내기자들에 대해 태도가 나아져 기자들에게 학생대표들이 [증표]를 주어 도청에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전히 도청출입은 통제중.
23일 스케치
학생들은 경찰이 버리고 간 무전기를 듣기도 하며 도청 광장에는 부서진 문짝을 세워놓고 사망자 사진을 붙여, 유가족들이 구별하도록 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박충훈 총리서리의 발언에 분개, {광주시민이 어째서 폭포냐}고 흥분하고 있으며 취재를 하는 외신기자들에게 박수를 치고 학생들이 취재 안내까지 해주고 있는가 하면 {국내신문들은 뭐 하느냐}고 국내언론에 반감을 표시하고 있다.
* 23일 12시 도청광장 뒤쪽에는 군경이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헬멧, 경찰봉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또 주민들은 쌀을 살수가 없어서 이웃집 쌀을 꾸어서 먹고 있으며, 중심 지역 시민들은 대부분이 변두리로 피난하고 있다.
* 23일 학생과 군인이 대치중인 곳은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에서 국군통합병원으로 가는 길목. 이 지점은 화정동 고개로 시민·학생들은 판문점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탱크 2대로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으며, 5백m쯤 떨어진 지점에서는 무장학생 30여 명이 대치 중에 있다. ▲ 광주시 지원동 길목 ▲ 여수, 순천 방면으로 빠지는 문화동 길목 ▲ 서울 방향 고속도로 진입로 ▲ 목표방향인 대동고교 앞
* 23일 오전 11시30분쯤 전남대 뒷산에서 교련복 차림의 학생 1명이 절반쯤 매장된 시체로 발견됨. 발견한 시민이 학생들에게 연락.
이 시체를 도청 광장에 갖다 놓고 흥분상태에 있다.
* 사망자 수는 오후 3시 현재 우리기자 확인 1백21명에다가 추후 서울서 파견된 조남준 기자가 통합병원에서 4명의 사망자를 확인해 총 1백25명이 확인됨.
23일 목포 상황
* 낮 12시30분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대학생연합회(대학 1개, 전문대 3개 중 2개 대학참여)와 목포시민민주화투쟁위원회 주최로 목포시민민주화 궐기대회를 열어 시민·학생 3만여 명이 모여 [김대중 석방], [계엄해제] 등 플래카드와 구호를 외치며, 1시간 동안 성토대회를 가진 다음 시가행진에 들어갔다가 오후 3시 다시 목포역 광장에 돌아와 성토중임.
22일 밤 목포 스케치
22일 밤10시쯤 학생과 시민이 합세하여 무장데모대가 탄 차량(버스 7대)에 올라 카빈 등 무기 2백80여 정을 회수했고, 또 광주여객 1대를 이용, 목포에 왔던 학생 30여 명에게서 카빈 17정을 회수했다. 한편 광주에서 왔던 학생들은 이병대 목포시장에게 {광주로 돌려 보내달라}고 요구해 이 시장의 안내를 받아 학생 18명은 보내졌고, 나머지 7명은 영장을 발부받고 군에 입대를 않았던 학생으로 경찰에 보호 중에 있음.
* 23일 밤9시 목포역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를 갖고 시내 남녀 중·고·대학생·시민 5만여 명 횃불시위를 벌였다.
여고생 2백여 명이 횃불을 들고 대열 중간에 서고 남녀 학생과 시민들이 좌우로 선 횃불대열은 시내 20km를 보행시위하면서 구호를 외치며 10시40분 역전광장에 다시 모였다.
이들은 광장에 앉아 계속 연좌데모 중이다.
<24일>
오전 10시50분 광주 조기자 통화
* 학생대표들이 시민대표에게 지금까지 회수한 총기 3천여 정을 인계하고 시민대표는 이를 군에 전달키로 합의했는데, 학생 대표간에 이견이 있어 아직 인계 못하고 있다.
한편 군당국은 24일 낮 12시까지 무기를 회수해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가져 오라, 그러면 과거는 불문에 부치겠다고 KBS 방송 통해 계엄분소장이 권고하고 있다(학생, 시민이 갖고 있는 무기는 4천여 정).
헬기로 전단을 뿌려(오늘 새벽). 이미 회수된 무기는 도청에 보관, 도청 지키고 있는 학생과격파들은 무기를 주면 우리가 어떻게 저항하느냐며 반발.
현재 광주시내는 2개의 대표위원회가 있어 시민들로 구성된 5·18수습광주시민대책위원회(위원장 최한영), 학생수습위원회(위원장 김창길·전남대 농경과 3년). 시민대채위원회는 30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날마다 위원이 바귀고 영향력도 크지 않는 이 위원들은 23일 오후 3시에 대표 8명을 계엄분소에 보내 7개항 합의하고 7시에 돌아왔다.
이 타협에 따라 연행된 시민·학생중 34명을 인수해왔다. 이로써 군이 그동안 연행한 학생·시민은 9백97명중 40여 명을 남기고 모두 풀어줬다고 계엄당국이 말하고 있음.
학생위원회는 강·온으로 2원화. 온건파는 무기회수반납, 강경파는 무기반납하면 반항할 수 없다고. 군과 대치하고 도청을 지키는 측이 강경파, 온건파는 거리청소, 질서회복 호소.
* 23일 밤 2번에 걸쳐 교전. 밤9시쯤 지원동 화순가는 도로에서 교전 중 학생 5-6명 사망으로 알려져. 밤10시 국군통합병원입구 대치지역에서 교전 피해 양측 상황 몰라.
학생 온건파가 학생대책위원회를 주도하고 있는데, 이들의 입장은 우선 당국에서 광주시민학생들을 폭도로 몰아 붙이고 있고, 이 같은 원인은 학생·시민들이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기를 회수·군당국에 인계, 오명을 씻고 질서를 일단 회복시키자, 그 다음에 처음에 주장했던 정치적인 이념을 관철하기 위해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자고. 이에 과격파는 듣지 않음.
학생들의 분포는 과격이 더 많다. 24일 현재 일부 고교생, 과격시민들이 회수 무기를 보관하고 있는 도청에 찾아와 총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고 이를 학생들은 간신히 제지하고 있음.
* 24일 오전 11시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궐기대회를 갖기로 했는데 의견들이 서로 엇갈려 열지 못하고 있다. 23일까지 도청 앞 대형 스피커를 통해 상황을 알려주는 방송도 24일에는 중단됐다.
학생·시민들도 거리에서 수습한 시체 45구를 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 중. 이 빈소에는 시민들이 보내온 조화도 쌓여 있고 도청 국기 게양대에는 조기가 게양돼 있다. 학생수습대책위에서는 치안유지반원들을 동원, 차를 타고 다니면서 총기소지자들에게 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반발이 심하다
시내 치안은 학생들이 맡고 있는데 어젯밤 학생들이 야간통행증을 발급, 통행증 소지자에게만 통과허용, 차량들도 3백여 대에 일련번호를 붙여 번호부착차량만 운행토록 허가, 기타는 압류해서 도청 앞에 세워두었음.
도청·시청 등 관공서에는 총을 든 학생이 경비를 서서 학생들이 발급한 [秘]자 도장이 찍힌 출입증소지만 통과시키고 있음. 학생들은 청년회의소, 라이온서 클럽, 로터리클럽, 여성단체 등 민간단체들과 예비군 요원이 나와 함께 치안유지에 나서자고 권고중이다.
* 경찰관들에게는 시민·학생들이 {경찰에 반감을 갖고 있지 않으니 소속관서에 출근해서 근무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 23일 오후 6시부터 KBS 광주 탤리비젼이 방영을 재개했음.
* 22일 밤 박순휴 피부비뇨기과 의원에 약탈범이 들어가 3백여 만원 어치의 금품을 털어 갔고, 시내 변두리에서 약탈행위가 자행되고 있음. 시내 식료품 가게와 양곡상은 문을 닫고 있음. 식료품 시내 반입되지 않아 식량부족현상을 빚고 있다.
* 23일 밤 8시30분쯤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한다는 소문이 번져 모두가 피신하는 등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 23일 오후 4시30분 지원동 무등중학교에 군이 집결, 시내로 진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도청에 나와있던 간부들이 뒷담을 넘어 피신하는 등 소동을 벌였다.
* 24일 낮 광주시내 표정은 표면상 평온한 가운데 군데군데 시민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고, 일부 상가는 문을 열고 영업 중. 거리는 23일부터 시작된 청소작업으로 많이 깨끗해졌다. 노동청 사무소 앞에는 지난 20일 밤에 불에 탄 차량 7대가 아직 뒤집힌 채 있다. 시체가 안치된 상무관에는 유족들이 찾아와 울부짖고 있고, 학생 일부가 내일(25일) 시민장으로 치르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타협이 안되고 있는 형편. 도당국은 장례 방침이 결정되면 시설 등을 지원하려고 했으나 아직 미결.
* 23일 오후 시민대표가 계엄분소장을 찾아갔을 때 사망자들에 대한 보상문제를 거론했는데, 계엄분소장은 {사망자중에는 군이 발포로 죽지 않은 사람도 있다. 군인이 사용하는 총은 경찰과 다르니까 검시과정을 거쳐 군의 총에 맞은 시체에 대해서만 보상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
* 24일 오전 11시20분쯤 시민대표인 목사, 변호사, 신부 등이 화정동에서 무기를 들고 군과 대치중인 40여 명에게 무릎을 꿇고 빌면서 총기를 버리도록 설득, 이들 모두를 도청을 데리고 왔는데 아직도 총을 버리지 않고 있다.
24일 오전 경향신문 취재팀 송고
소요사태 7일째를 맞은 광주시는 24일 3일만에 처음으로 총성이 거의 들리지 않는 조용한 하룻밤을 지내고, 격노와 흥분에 휩싸였던 열기가 크게 누그러진 가운데 시민들은 수습의 길을 찾고 있다.
이날 오전에는 소요시민의 본부격인 도청은 무장청년들이 출입자를 엄격히 통제하는 가운데 전날에 이어 수습대책위원회가 열리고 무기, 차량 등의 회수와 반납도 학생과 시민에 의해 계속됐다.
이날 오후 전남북계엄분소장은 광주 지역의 시민들은 정오까지 국군통합병원에 무기와 탄약을 자진반납하라고 KBS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도청 앞 광장에는 무장청년들이 교통 정리와 경비를 맡고 있고 시민들이 간밤의 소식을 알기 위해 도청 앞 광장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으나 군중 수는 눈에 띄게 줄고 있다.
23일 오후 9시 이후부터 24일 아침까지 시내에서는 총성이 거의 들리지 않았으며 군과 대치중에 지원동(화순과의 통로)일대에서는 산발적으로 총성이 들렸고, 부상자를 내기도 했다. 이날 오전 6시30분쯤에는 신영미양(21. 용산동 280의 1)이 집 앞 도로에서 왼쪽다리에 총상을 입고 적십자 병원에 입원했으며, 20대 청년 1명도 두부에 총상을 입고 전남대 병원에 옮겼으나 중태다.
한편 24일 오후 5시 1만여 시민들은 도청 앞 광장에 모여 성토대회를 갖고 2시간만에 모두 해산했다. 이날 시민들 사잉는 군부대가 곧 시내로 진주하는 소문이 퍼져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거리기도 했다.
광주지역에는 지난 21일부터 신문·TV·라디오 등 보도기능이 끊겨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23일 오후 6시부터 KBS TV가 복구돼 광주사태를 집중보도했으나 시민들은 보도내용이 편파적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KBS TV와 라디오를 제외한 모든 보도기능이 4일째 마비되자 정부 및 계엄당국과 당국이 비행기를 통해 살포하는 전단과, [투사회보]등 시위주동자들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유인물만이 대향으로 나돌아 유일한 보도매체 구실을 맡고 있다.
사태 이후 이곳에는 AP통신, ABC, CBS, NHK 등 각국의 보도진이 들어와 학생들의 안내를 받아가며 취재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국내 보도진에 심한 거부반응을 보여 사진기자들이 카메라를 탈취당하고 TV 녹화기를 빼앗기기도 했으며 길바닥에 끌려 다녀 부상당하기도 했다.
광주 시청은 23일부터 기능을 거의 회복, 약 4백 명 직원이 출근하여 각 동에 나가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민심순화운동을 벌이고 있으나 민원처리 업무는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도경과 광주경찰서는 24일까지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고 굳게 잠겨져 있고, 광주경찰서 정문에는 [본 광주 경찰서는 우리의 재산, 기물파괴는 세금의 과중, 스스로 보호합시다, 학생일동]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고, 서부경찰서에는 총을 든 청년 3명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한편 22일 밤 시내 변두리 지역에 강도사건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23일 밤에는 성사맨션, 동인동 아파트 단지 등에서는 자체방범대를 편성, 주민들이 시간별로 나눠 보초를 서기도 했으며, 일부 시민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 피난을 가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시내 상가들은 문을 열어 시가의 모습은 다소의 생기를 되찾았고 광주에서 가장 큰 양동시장에는 23일 낮부터 야채류, 과일류를 리어카에 싣고 온 행상들이 수십 명 나타나 시장을 메웠다. 한편 모든 방면의 외부 교통이 완전두절, 농산물 등 생활필수품의 공급이 끊여 시민생활에 큰 불편을 주고 있고, 특히 육류·생선류의 공급은 전혀 없는 상태이다.
한편 도청에 본부를 정한 주동시민들은 23일 탈취차량에 일련번호를 적어 차량통제를 시작. 시내를 횡행하는 무장차량의 숫자는 23일 오후부터 크게 줄어들었고 무장청년들은 도청 주변을 제외하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시민들은 연일 길목마다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모여 사태의 추이와 수습책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으며, 무기탈취 이후 시위의 주동이던 대학생들이 전면에서 사라지고 대신 공원, 종업원, 무직 청소년 등이 총기를 휴대하고 거리를 누비게 되자 불안한 표정은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편 목사, 신부 등 성직자와 유지급 인사들은 24일 오전 6-7명식 조를 편성, 무장시위군중과 군이 대치하고 있는 지원동 두암동 농성동 등 외곽지역으로 설득작업에 나섰다. 이같은 조치는 전남·북 계엄분소장이 이날 정오까지 무기를 자진 반납하라는 시한부 담회를 발표함에 따라 계엄당국의 수습노력에 협조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23일 오전부터 도청에서 무기를 자진반납받는 학생·시민 수습반은 무기반납장소를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정한데 대해 이는 적합치 않은 장소라고 주장. 자진반납받은 무기를 군에 인계할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마련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편 수습반은 회수된 무기와 탄약의 정확한 숫자를 외부에서 악용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다. 회수된 무기 중에는 중기관총 2정을 비롯, M16 소총, M1 소총, 카빈소총, 수류탄, TNT, 통신기재, 페퍼포그 발사기 등이 포함돼 있다.
광주와 인접한 송정읍에서 20일 이후부터 22일 사이 시민들의 시위가 일어 시위군중들이 탈취하여 몰고가던 차량이 전복 등 사고를 일으켜 2명이 숨졌다.
24일 광산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22일 오전 광산군 동곡면 하산리 동곡교에서 시위군중이 몰고 가던 군용 진압차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용수로에 전복 추락, 신원 미상의 청년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는 것이다. 또 21일 오후 11시쯤 송정읍 영광동에서 시위군중들이 바리케이드로 사용하기 위해 불을 질러 밀고 가던 대한통운 트럭이 노인 1명을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송정읍 사태는 23일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군부대가 진주 진압됐으며, 광산경찰서는 시위군중들로부터 28정의 무기를 회수했다.
전남의사협회(회장 김제권씨)는 {현재 광주시내 4개 종합 병원에서는 부상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다}고 밝히고 산소와 수술에 필요한 의약품이 부족하다고 밝히고 대한의학협회와 적십자 등에서 구호반을 편성, 광주에 내려와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24일 오전 10시 현재 연행됐던 9백27명 가운데 8백94명이 풀려 나고 현재 33명이 풀려 나지 않았다.
오후 1시 서기자와 통화
* 계엄사 무기 반납 시한을 24일 낮 12시에서 오후 6시로 연장. 시체 45구가 안치돼 있는 상무관에는 유족이 흐느끼는 속에 일반 조객이 2백여m나 줄지어 기다리며 분향. 학생들, 전남일보 빌딩과 도청에 무기 회수반 설치, 군당국이 밝힌 총기 4천3백여 정 중 3천여 정 회수(24일 오후 1시 현재). M1, 카빈 등은 많이 회수되고 있으나, 권총 40여 정과 TNT 1백 개, 폭약 4상자는 거의 회수되지 않고 있다. 시가는 평온한 속에 시민들 도청 주변에 모여 학생들이 뿌리는 전단을 읽거나 마이크에 귀기울여 한 시민 {이젠 무엇보다도 질서회복이 문제다. 빨리 총기를 회수해서 정상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느냐}.
다른 한 시민, {정부에서 이번 사태 유발했다. 원인을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떻게 수습이 되겠느냐}는 회의론도.
* 23일에 이어 24일에도 시민들은 빗자루 들고 거리 청소. 시청 청소부들도 쓰레기 더미 치우고. 파손되거나 불탄 차량은 차주나 회사측에서 끌어가 거리는 한층 깨끗해졌다. 23일부터 기능을 회복한 시청에는 대부분의 직원이 나와 근무.
* 시는 이날 시비 3천 만원으로 영세민 6천 가구에 생활보조비 5천 원씩을 지급. 시는 또 종합 상황실 설치, 사망자, 행방불명자, 부상자를 동 단위로 파악 중.
* 각 병원에는 의료품이 부족, 산소는 24일 중으로 거의 떨어졌고 페니실린, 마이신 등 항생제, 포도당, 식염수 등도 태부족 상태.
* 낮 12시가 지나면서 사태 수습은 급진전, 총을 들고 도청을 경비하던 학생들이 총기를 회수반에 내주었고 학생 시민들이 착용하고 있던 헬멧 방석복 등 군경 복장 및 장비도 [폭도로 오인 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하여 반납하고 있다.
* 오전 11시20분쯤에는 시민 대책위원인 장세균 목사 등이 화정동에서 무기를 휴대하고 군과 대치 중이던 38명과 지원동에서 13명 등을 도청으로 데리고 와 울면서 설득. 1시간만에 무장해제 시키는 데 성공. 그러나 화정동 등 시외로 빠지는 6개의 외곽도로에서는 아직도 일부가 무장, 대치하고 있다. 특히 화정동 공단 입구에서는 인근 서광제재소에서 옮겨온 대형 원목 1백여 개와 버스·트럭·지프 등으로 바리케이드 치고 20여 무장대원이 지키고 있다. 4백여 시민들이 현장에 운집해 있으며 대원들은 신분 확인 후, 시내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는 시민을 통과시키고 있다.
* 주택가에서는 시위대원들이 찾아가 {밥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며 학생들이 문을 두드려 쌀을 얻어 가는 모습도 보였다. 대책위는 도청 2층에 1천명 분을 공급할 수 있는 취사시설을 갖추고 학생등에게 식사를 제공.
* 학생 수습위는 오후 1시쯤 7개 요구사항을 초안, 민간 수습위와 협의하고 있는데 민간수습위원 대부분이 더 강경한 내용으로 하자고 제의, 난항을 겪기도.
* 7개 요구사항은, ① 이번 사태의 수습 전에는 계엄군의 투입을 금지한다 ② 이번 사태의 원인은 계엄군측의 시민 살상으로 인한 것임으로 인정하라 ③ 연행자 전원 석방 ④ 부상자, 사망자의 치료 및 보상 확약 ⑤ 차후 보복않겠다고 확약하라(사북 같은 보복이 있으면 안된다) ⑥ 복구가 가능한 시내 방송을 즉시 재개하고 사실 보도하라 ⑦ 상기사항의 보장아래 무장해제.
이에 대해 계엄분소장은 {개인적으로는 다소 과격했던 진압에 사과하나 공적으로는 잘못을 인정할 위치가 아니다}, {보복은 절대 않겠다는 것을 보장한다}고 밝히고 있다고.
국방부 출입 조남준 기자 광주서 송고
* 5·18 수습대책위원회는 24일 오후 2시, 23일 계엄분소를 방문, 협의한 결과를 보고.
<내용> 문-계엄군의 시가진입을 일체 금지하라.
답-시민측이 먼저 발포하지 않는 한 시가진입이나 사전발포를 하지 않겠다. 또한 지금 시내엔 1명의 계엄군도 없다.
문-계엄군 공수부대의 지나친 진압을 인정하라
답-현장설명을 듣고 보니 과잉진압임을 시인한다.
문-연행자를 석방하라
답-연행자 9백27명 중 79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했으며, 수습대책위의 요구에 따라 추가로 5월23일 오후 34명도 석방했다.
문-사망, 부상자의 치료와 보상은?
답-보상은 물론 대책을 세우고 있으며 철저한 치료를 하고 있다(현정부가 발표함).
문-방송재개 및 사실보도를 촉구한다.
답-지역방송이 회복되는 대로 속히 사실 보도하도록 힘쓰겠다.
문-자극적인 어휘 사용을 금지하라(예 : 폭도).
답-순수한 시민을 폭도라 함이 아니요, 사태를 악용한 자를 말한다. 상부에 부드러운 어휘를 사용하도록 건의했다.
문-시외 통행로를 열라.
답-민간인은 출입할 수 있다.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면 보호해준다. 또 자동차나 무기휴대자는 접근할 수 없다.
문-사태수습 후 처벌을 금하라.
답-사태수습 후 절대 보복하지 않겠다(군지휘관과 대책위원회의 명예를 걸고 약속함).
계엄분소 부사령관이 24일 오후 2시 대책회의에 전화를 걸어와 단독으로 시내로 들어와 시민들에게 위의 약속한 사항을 재천명할 용의가 있다고 대책위측은 밝히고 부사령관이 자신의 신변보호를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 왔다고 말했다. 수습위는 부사령관의 요청을 시민과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이들의 승낙을 받는대로 시민대표를 계엄분소에 보내 부사령관을 데려올 예정.
24일 오후 5시 광주에서 서기자가 여수주재 李기자에게 행정전화로 송고한 내용을 여수주재 李기자가 다시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