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1980년 「서울의 봄」 200일. 이수언(신동아, 1985. 5)
본문
1980년 『서울의 봄』 200일
이 수 언<저널리스트>
박대통령 [有故]로 대통령권한 대행
{비서실장님께서 빨리 실장님 방으로 오시라고 하십시다.}
최규하 국무총리는 79년 10월 26일 밤 10시 20분경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실로부터 전화연락을 받고 10시 45분 청와대에 도착했다. [부·마사태]로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 선포를 의결하고 마산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던 최총리는 김계원 비서실장의 당황하는 태도로 심상치 않은 사태가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김계원은 동석했던 수석비서관들을 옆방으로 내 보낸 후 崔총리와 구자춘 내무장관에게 [대통령의 유고]를 보고했다. 崔총리가 구체적인 내용을 묻자 김계원은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고만 대답했다. 이 때 육군본부에 있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은 김계원은 최총리에게 육군본부로 가야 사건내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밤 11시30분 경 육군본부에 도착한 崔총리는 김재규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김재규는 {지금 대통령이 유고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사태로서 전방경계도 강화해야 되겠고 국내 유혈사건도 막아야 하기 때문에 2, 3일간 보안을 단단히 유지해야 하고 빨리 각의를 열어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재규로부터 박대통령의 유고를 전해들은 崔총리는 수행했던 유혁인 정무제1수석비서관에게 총무처에 연락하여 국방부회의실에서 긴급국무회의를 소집하도록 지시했다. 국방부장관 접견실로 자리를 옮긴 최총리는 김재규에게 {비상을 선포할 때에는 국민이 납득할만한 사유를 지체없이 밝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소련은 [브레즈네프]행적을 일주일간이나 발표하지 않은 적도 있다}면서 그냥 [긴급사태]라고 명시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때 몇몇 국무위원들이 달려왔다. 밤 11시 50분경 국방부 회의실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한 최총리는 [대통령의 서거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계엄령을 선포할 수 없다]는 각료들의 주장에 따라 회의를 중단하고 김계원과 함께 27일 새벽 1시20분 경 국군서울지구병원에 도착하여 병원장의 안내로 [유고]를 확인했다. 崔총리는 새벽 2시 경 다시 국방부로 돌아와 국무회의를 열게 하고 세부적 사태수습방안을 논의한 후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기로 의결했다. 벽시계는 새벽 3시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부대변인 김성진 문공부장관은 신문사와 방송국에 연락하여 4시10분 중앙청 기자실에서 박대통령이 26일 오후 7시50분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서거했다는 소식을 간단히 전하고 [비상계엄 선포]를 발표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김장관은 기자실 흑판에 박대통령의 서거와 비상계엄선포를 알리는 짤막한 정부 성명을 썼다.
박대통령의 유고로 최규하 국무총리는 헌법 제48조에 따라 대통령권한대행에 취임했으며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대장을 임명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한 최총리는 10월27일 오전 9시40분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국가비상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 박대통령 서거에 애도의 뜻을 전하면서 {국민 여러분은 정부와 군을 신뢰하고 추호의 동요도 없이 각자의 직분을 다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담화문을 읽는 최대통령권한대행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으며 {민족중흥의 지도자이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졸지에 서거하심에 그 충격과 비통함을 가눌 길이 없다}면서 본인은 비탄을 딛고 무엇보다도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위하여 막중한 국가보위의 책임을 수행할 각오}라고 다짐했다. [국가보위]가 그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사명이었다.
[서울의 봄]은 왔는가
4년 전 형식상 제2인자의 자리에 앉았지만 줄곧 [단기]이다시피해온 최규하 총리는 박 대통령의 급서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정상의 자리에 앉게 됐다. 그러나 아무런 정치적 기반이 없던 그가 10월27일 새벽 대통령권한대행에 취임함으로써 이 나라 정계는 꼭 20년만에 또 한번의 [정치적 과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권한대행에 취임한 崔총리가 12월6일 비록 [통대]에서나마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다음날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함으로써 이나라 대다수 국민들은 [서울의 봄]에 한가닥 기대를 거는 모습들이었다.
물론 1주일도 못돼 야기됀 [12·12사건]이 있었지만 그 진상을 자세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서울의 봄]이라는 기대는 여전히 무산될 수는 없었다. {군의 기본사명은 국토방위에 있으며 정치는 군의 영역 밖이므로 군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여러 차례에 걸친 이회성계엄사령관겸 육군참모총장의 담화문도 그런 기대를 쉽게 버리지 못하도록 했던 것 같다.
어떻든 유신헌법 반대금지를 골자로한 긴급조치 9호의 해제는 한마디로 유신체제의 종언과 함께 국민적 합으에 의한 새 헌법의 채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최대통령은 12월21일 서울장충체육관에 서 있는 제 1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통해 {앞으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년 정도면 국민의 대다수가 찬성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에 수반되는 필요한 재반조치를 착실하게 취해서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공명정대한 선거를 실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밝혔다. 즉 그는 국민적 합의에 따른 새로운 헌법을 마련하는데 1년이라는 기간을 제시한 것이다. 정치의 속성과 당시 권력의 실체를 알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1년이라는 시한이 다소 길기는 하지만, 열화와 같은 국민여론에 따라 민주헌법은 마련될 것이고 필경엔 민주화가 이룩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 매스콤에 의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씨등 이른바 [3김]씨가 크게 부각되고 있었으며 국민들은 장차 채택할 직선제 헌법에 따라 구시대를 청산, [희망의] 80년대가 시작될 것으로 기대해 마지 않았다.
긴급조치 9호 해제로 구속인사 68명의 출소 및 김대중씨 자택연금해제(12월8일), 김영삼 신민총재의 긴급조치9호 위반혐의 면소판결(12월15일), 공화당 소장의원들에 의한 정풍운동 등 일련의 사건들을 국민들은 새시대를 열기 위한 값진 노력이며 필연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라의 기본법인 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신민당의 개헌공직회가 12월27일 각계 인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열림으로써 이러한 희망-[서울의 봄]은 꿈이 아닌 현실로써 인식돼가고 있었다. 이와 함께 조금 시일이 지나긴 했지만, 80년 2월말엔 윤보선 김대중씨 등 6백87명에 대한 복권조치가 이뤄졌는가 하면, 사북탄광사태가 발생, 노사분규가 고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정작 5월15일 약 7만명의 데모대가 서울역 앞 등 중심가에서 야간가두시위를 벌임으로써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5·17사태]는 바로 이러한 상황이 낳은 꽃샘추위나 다름이 없다고 봐야 할 터였다.
한편 주말을 [캠프 레이비드]산장에서 보내기 위해 여장을 꾸리고 있던 [카터]미국대통령은 10월26일 오후 2시, 한국시간으로는 27일 새벽 3시 첫 보고를 받았다. 최총리가 국방부 회의실에서 국무위원들과 함께 비상사태 선포를 논의하던 시간이었다. [카터]대통령은 직접대책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브레진스키]대통령 보좌관에게 신속한 대책 수립을 지시했다. 국방부 회의실에서 비상사태선포를 의결하던 그 시간에 백악관 상황실에서는 [브레진스키]대통령보좌관 주재로 [브라운]국방장관, [크리스토퍼]국무차관, [존스]합참의장, [칼루치]CIA차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한국의 사태]를 논의했다. 대책회의가 끝난 후 국무성은 특별성명을 통해 어떤 외부 침략도 용납지 않는다는 결의를 표명했으며, 국방성은 주한미군에 대한 경계태세 3호를 발동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조치했다.
두각 나타낸 전두환 소장
비상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기 전 최대통령권한대행은 [카터]대통령으로부터 박대통령의 서거에 애도의 뜻을 표하는 조전을 받았다. [카터]대통령은 조전에서 {각하가 대통령권한대행에 취임함에 있어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공약을 확고히 이행할 것임을 보장한다}고 밝혔다. 최대통령권한대행이 외국대통령으로부터 [각하]라는 존대어를 받은 첫 번째 전문이었다.
최대통령대행은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장작을 해임하고 10월30일 육군참모차장이희성육군총장을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임명했다.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은 후 첫 인사였다.
11월3일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고 박대통령의 영결식에 최대통령대행은 조사를 통해 {5년 전 영부인께서 불의에 돌아가신 비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직도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하실 일이 많은데 각하 자신마저 불시에 가시었으니 이 얼마나 망극한 일이냐}면서 목이 메었다. 그는 북바치는 슬픔을 억제하면서 조사를 읽어 당초 12분으로 잡았던 조사낭독이 17분이나 걸렸다.
미국정부의 조문특사로 장례식에 참석한 [밴스]국무장관은 워싱턴을 떠나기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한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새 지도자 선출을 지지한다는 것이 사실인가}라는 질문에 {이 문제는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결정할 문제이지만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여운을 남겨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 무렵 [뉴욕타임즈]지는 한국 군부대의 고 박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장성들은 유신헌법의 조기폐지에 반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의 조문특사로 한국에 온 [밴스]국민장관은 장례식이 끝난 직후 중앙청으로 최대통령대행을 예방, 집무실에서 40분동안 요담했으며 그는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미대사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 군부가 민간정부를 지지하고 있다}고 밝히고 헌법 절차에 따라 민간 당국에 의해 질서있게 진행하기로 한 한국정부의 결정은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이 11월6일 박대통령시해사건의 수사전모를 밝힌 4일 후 최대통령은 두 번째로 [시국에 관한 대통령권한대행의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11월 10일 오전 9시30분 경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젼으로 전국에 중계된 담화내용은 [헌법에 규정된 시일과 절차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정부 방침으로 확정한 것]임을 강조한 최대통령대행은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빠른 기간 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들어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이러한 최대통령대행의 견해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의 선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신체제의 철폐와 유신헌법의 개정을 위해 공화당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해온 야당과 재야세력이 주장하는 정치발전과는 상당한 견해차를 보인 특별담화내용이었다.
최대행의 정치일정에 반발
담화가 발표된 직후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즉각 최대통령대행의 담화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총재는 신민당을 포함한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의견을 사전에 듣지 않은 일방적인 정치일정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11월5일 밝힌 3개우러 이내에 헌법을 개정하고 신헌법에 따라 2개월 이내에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어 재야 단체인 [민주회복국민연합]측도 11일 성명을 통해 최대행체제는 즉시 물러나고 거국적 민주내각을 구성하여 3개월내에 민주헌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했다.
최대통령권한대행의 구상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대통령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김영삼총재와 재야인사라고만 보도해야 했던 김대중씨의 견해는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국회에서 기초한 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정하여 그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국민들이 직접 선출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 두 김씨의 주장과는 달리 새로 선출된 김종필공화당 총재는 최대통령대행의 구상을 지지하여 주목을 끌었다.
최대통령대행은 11월15일 국회에서 80년도 예산안을 제출하고 시정연설을 통해 정치일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시 확인함으로써 [안개 정국]이라는 인상을 짙게 남겼다. 그러나 최대통령대행은 자신의 정치일정 구상에 대해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11월22일 저녁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시국문제전반에 걸쳐 3시간5분동안 요담했다. 김총재의 요청과 최대행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이날 요담에서 김총재는 자신이 기자회견을 통해 제시한 [민주국민화해협의회]구성을 제의했으나 최대행은 특정한 협의체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각계 각층과 대화를 해야한다는 데는 뜻을 같이했다.
요담이 끝난 후 정부대변인 김성진문공부장관과 신민당 대변인 박권흠의원이 밝힌 4개항의 공동발표문은 정치일정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없었다. 다만 최대행과 김총재는 헌법개정 논의가 국회에서 주도적으로 해 나가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가 없음을 밝혔을 뿐이었다.
각계 대표들과 계속해서 접촉할 뜻을 밝힌 최대통령대행은 이틀 후인 11월24일 고 박대통령과 한때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김수환추기경과 면담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최대통령대행이 각계 인사들과 대화를 계속하고 있을 때 계엄사령부는 11월13일 전대통령 윤보선씨 집에서 민주청년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5개 단체에서 발표한 민주화를 위한 성명과 관련 전 [동아일보]기자 이부영씨를 포고령위반혐의로 구속하고 전연세대교수 성래운씨와 민주청년협의회 이우회장장대리를 지명 수배했다. 그리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회원 김병걸 박태순씨와 해직교수협의회의 백낙청 염무웅 김*국 서남동씨, 전 [동아방송]기자 이병주씨, 전[조선일보]기자 정태기씨, 여성신도회 회장 이혜정씨등 9명을 훈방조치했다.
박정권의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지식인들에 대한 이같은 조치는 정치권 밖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윤보선씨는 최대통령대행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김대중씨의 연금과 재야세력의 구속과 연행을 항의하면서 유신체제의 즉각 철폐를 요구했다.
한편 계엄사령부는 11월24일 오전 육군본부 회의실에서 계엄선포 후 첫 전군지휘관회의를 열어 국가안보와 법질서를 유지하여 사회기강을 바로잡는 임무를 다할 것을 다짐했다. 일단 민심을 수습한 계엄사령부는 이어 26일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마산 등 6개 도시를 제외한 전국의 통행금지를 종전대로 환원시켰다.
YWCA위장결혼사건
이 무렵 서울의 대학가에는 민주청년협의회 회원이었던 홍성엽씨의 결혼식을 알리는 청첩장이나도았다.
{홍성엽군과 윤미정양이 여러 어른과 친지를 모시고 혼례를 올리게 됨을 알려 드립니다. 즐거운 자리에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79년 11월24일 (토) 오후 5시30분 YWCA 1층 강당}
당국은 뒤늦게 이 결혼식이 위장결혼식임을 알았다. [결혼식]은 예정시간보다 15분 늦은 5시45분에 기독청년협의회장 김정택씨의 사화로 [신랑]홍성엽군을 입장시킨 후 전국회의원 박종태씨가 주례로 나와 혼인서약 낭독이 아닌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에 대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선언했다. 그리고 최대통령 권한대행이 밝힌 11월10일의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반대하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결혼식에 참석한 1천 여명은 곧바로 가두시위에 들어가려 했으나 경찰과 계엄군에 의해 저지를 당했고 그중 96명이 불법옥내집회혐의로 검거되었다.
국민연합과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등이 주최한 통대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는 ▲최규하 김종필의 유신정부는 즉각 퇴진, 거국민주 내각을 구성하고 ▲유신 대통령의 재선출은 국민에 대한 반역이며 ▲공화당 유정회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해산하고 ▲우리나라 민주화에 대한 외부세력의 개입을 일체 거부할 것을 선언했다. 10·26이후 재야세력의 첫 저항이었다.
계엄사령부는 이 날의 [국민대회]를 [YWCA결혼식 위장집회]라고 발표했으며 이 사건과 관련, 전 공화당국회원 박종태 양순직, 종교인 성석헌, 문인 김병걸씨 등 96명을 포고령위반으로 검거하여 조사 중이라고 11월26일 밝혔다. 계엄당국은 이들이 서울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서 야음을 이용하여 일제히 궐기 것을 선동하고 나아가 법질서를 문란시키고 사회혼란을 조성하기 위하여 미리 준비한 전단 등을 살포하다가 출동한 계엄군에 의해 검거되었다고 발표하면서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저해하고 북괴로 하여금 남침의 기회로 오판하게 할 소지가 있는 이러한 무책임한 선동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했다. 이 사건으로 이부영씨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포고령 위반에 대한 계엄당국의 강경한 조치는 계속되었다.
[YWCA 결혼식위장집회사건]을 발표한 계엄당국은 하루 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와 수원농대캠퍼스에서 [학원민주화를 위한 성명서]와 [조기개헌 조기총선을 실시하라]는 등의 유인물을 배포, 학원내 소요를 유발하려던 서울대생 14명을 검거 또는 수배하고 이중 주동자 4명은 포고령위반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계엄사 발표에 따르면 11월22일 낮 12시30분쯤 관악캠퍼스 구내식당에서 수학과 3년 안용운, 경제과 4년 김유선, 체육과 4년 권희도 등 3명이 학원민주화를 위한 성명서와 조기개헌 조기선거를 단행하라는 등의 유인물을 식사중인 2백 여명의 학생들에게 배포, 낭독한 후 도주했다는 것이다. 계엄당국은 이 사건을 발표하면서 {비록 극소수이기는 하나 이러한 지각없는 학생들로 인해서 학원내 질서가 어지럽혀지고 공부하려는 분위기가 흐려지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없다}고 밝혔다.
야당의 재야단체 그리고 학생들의 조기 개헌과 조기 총선 주장을 묵살한 채 계엄당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정부는 당초의 계획대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선출을 밀고 나갔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79년 12월3일 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을 대통령 보궐선거에 후보로 등록했다. 최대통령대행은 이날 오후 대통령후보 추천을 수락하면서 대의원들에게 인사장을 보냈다. 그는 이 인사장에서 {헌정의 중단됨이 없이 대한민국의 계속성을 견지하고 국가의 보위와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면서 안정과 질서 속에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본인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이라고 믿기 때문에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봉사와 헌신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수락이유를 밝혔다.
최대통령대행의 인사말 중에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아닌 [평화적 정부 이양]이라는 대목은 눈길을 끌었다. 왜냐하면 정권교체는 집권세력의 교체를 의미하지만 정부이양은 같은 체제에서 집권자만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을 [민족의 영도자]로 추앙했던 그로서는 당연한 논리였다.
통대, 최규하 대통령선출
박정희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해 구성되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6일 오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제3차회의를 열고 제10대 대통령보궐선거를 실시했다. 단독후보로 등록된 최규하후보는 재적 대의원 2천5백60명 중 11명이 불참한 2천5백49명 가운데 2천4백65표(무효 84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권한대행이 아닌 실질적인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최대통령의 임기는 고 박대통령의 잔여임기인 84년 12월26일까지 재임할 수 있으나 [11·10 특별담화]를 통해 잔여임기를 다 끝내지 않고 물러난다는 공약을 했다. 최대통령은 당선에 즈음한 인사를 통해 {전국민의 화합과 협조를 통하여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고 민생안정과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도모하면서 정치발전을 이룩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을 뿐 구체적인 정치일정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그의 측근들에게 밝혔듯이 대통령이 된 사실을 오직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대통령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최대통령이 국무총리로서 국회본회의 대정부 질문에 답변할 때처럼 구체적인 소신의 피력을 유보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외교관 출신의 스타일을 결코 흐트리지 않았다. 국무총리로서 국회 본회의의 발언대에 섰을 때에도 유신체제철폐에 대한 야당의원들의 집요한 추궁에 {민족사적 정통성에 입각해서 국정을 원만하게 운영해 나가겠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최규하대통령은 국민 다수의 여론에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최대통령은 유신헌법의 독소로 비판을 받아왔던 대통령 긴급조치9호를 12월8일 0시를 기해 해제했다. 긴급조치해제는 최대통령이 취임한 후 첫 번째 내려진 단안이었다.
최대통령은 12월7일 오후 긴급조치 해제에 대한 즈음한 담화를 발표, {합법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고 사회질서의 확립과 국가발전을 위해 제반태세가 착실히 정비돼 가고 있는 현시점을 택해서 긴급조치 해제와 구속자 석방조치를 취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문익환목사 함세웅신부 가톨릭 농민회사건의 오원춘씨 등 35명과 학생 33명이 전원석방되었다.
이날 긴급조치위반으로 복역 중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자택에서 연금당하고 있던 신민당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씨도 긴급조치 관련 구속자의 석방과 함께 연금이 풀렸다.
유신헌법의 철폐주장이 강하게 대두되었던 75년 5월13일 박대통령에 의해 선포된 긴급조치9호는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으로 당선된 최대통령이 해제하는 불가사의한 기록을 남겼다. 긴급조치9호는 유신헌법의 부정 반대 왜곡 비방 개정 및 폐기를 주장하거나 청원 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를 일체 금지하며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하는 초헌법적인 강제기능을 갖고 있었다. 최대통령의 긴급조치9호 해제 조치에 따라 서울형사지법은 8일 YH사건배후조정혐의로 구속기소 된 고은 이문영 문동환 인명진 서경석씨 등에 대해서도 보석 결정을 내려 석방했다.
박정희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은 헌정사에서 동일사건으로 가장 많은 구속자를 냈는데 긴급조치 1·4·9호 위반자는 모두 1천3백70명으로 이중 구속된 사람은 1천50명이나 되었다.
최대통령의 긴급조치 해제로 정가와 학원가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을 무렵 정승화계엄사령관의 체포는 또다른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정승화 계엄사령관 피체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12월13일 박대통령의 시해 사건과 관련, 정승화계엄사령관을 군수사기관이 체포하고 정부는 새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중앙정보부장 서리 이희성 육군대장을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노국방장관은 12월12일 저녁 7시 경 대통령시해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김재규가 숨기고 있던 새로운 사실이 발표되어 그 진부를 확인하기 위해 육군참조총장 공관으로 출동하여 연행, 조사중이라고 밝혔다. 노장관은 정총장의 연행과정에서 공관 경비병들과 충돌이 있었으나 정총장의 신변에는 이상이 없다고 발표했다.
노장관의 특별담화문에 따르면 시해사건에 관련된 일부 군장성도 구속 조사중이며 13일 새벽 2시 국방부 청사에서 증가 배치된 계엄군과 초병사이에 충돌이 있었다고 밝히고 군은 새로운 지휘체제를 확립하여 추호의 동요도 없이 임무 수행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사건과 관련 최규하 대통령은 12일 밤 삼청동 공관에서 신현확 국무총리 등 일부 각료들과 함께 심야대책회의를 갖고 시국전반에 관해 오랫동안 숙의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보도되지 않았다.
정부는 13일 오전 11시30분 중앙청 국무회의실에서 신현확국무총리 주재로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이희성준장을 대장으로 진급시켜 육군참모총장으로 발령하고 계엄사령관에 임명하는 안건만을 의결한 뒤 2분 만에 끝냈다. 헌정사상 가장 짧은 국무회의였다.
이 자리에서 신총리는 {사태는 진정되었으니 국민에게 기회 있는 대로 이해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최규하대통령은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계속 침묵을 지켰으며 이러한 대통령의 거취에 대해 서기원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은 {대통령께서 공관에서 관계 장관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사항을 보고받고 있다}고 보도진들에게 전했다.
한국의 정세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던 [카터]미대통령은 이날 [글라이스턴] 주한미대사를 통해 한국의 민주화를 방해하는 어떠한 행동도 한미관계에 중대한 역효과를 미칠 것이라는 내용의 의견을 관계당국에 전달했다.
미국무성 [토머스 레스턴]대변인은 한국시간으로 13일 낮 {우리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체포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글라이스턴] 주한미대사와 한·미연합사령관이 [위컴]장군이 한국 정부의 고위관리와 접촉, 그동안 한국에서 진행되어 온 민주적 정치과정에서 취해진 의의있는 진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가 취해지리라는 다짐과 함께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79년 12월13일자 [동아일보]는 AP통신을 인용, [글라이스턴]주한미대사가 한국내의 모든 미국인 학교에 휴교 조치를 취하고 주한 미국인들에게 여행 제한 조치와 주한미군들에게도 외출금지령이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이날 신문은 또 12일 저녁 8시20분을 기해 전육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12월15일자 [뉴욕타임즈]지는 정승화 장군 체포사건은 한국 군내의 궐기이며 이에는 육군 제 9사단, 공수부대 등 6천명이 참가하여 실권을 장악했다고 실토했다. AP통신은 정승화장군 체포 때 제9보병사단의 전방1개 대대가 미국측의 승인없이 서울시내로 이동했기 때문에 [위컴]주한미군사령관 등 주한 미군수뇌는 격노했다고 전했다.
전면 개각단행
긴급조치를 해제했던 최대통령은 6일후인 12월14일 오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이한빈 아주공대학장을 기용하는 등 새 정부의 조각 명단을 확정, 발표했다. 최대통령은 20개부처 중 박동진 외무장관과 김원기 재무장곤을 제외한 16개부처(2개 부처는 보류)의 장관을 모두 새로운 인물로 바꾸었다. 이 조각에서 전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진의종씨가 보사부 장관에 발탁되어 주목을 끌었다.
최대통령이 새 내각을 구성하여 제4공화국으로서 면모를 일단 갖추자, [카터]대통려은 12월19일 [화해와 질서를 달성하려는 귀하의 노력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보내왔다. [카터]의 친서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다소 활동이 침체되어 있던 최대통령에게는 고무적인 것이었다.
한편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인 이희성 대장은 12월18일 오전 담화문을 발표하고 {군의 기본적인 사명은 국토방위에 있으며 정치는 군의 영역 밖의 분야이기 때문에 군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확고한 원칙이며 정치는 애국심과 양식있는 정치인에 의해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 한결같은 군의 소망}이라고 밝혔다. 취임 후 처음 발표한 이 담화문은 ①북괴의 주장이나 그들이 쓰는 상투용어와 선동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배제되어져야 하고 ②국가와 민족의 긍지까지도 팔아버리는 외세의존적 사대주의는 시정되어야 하고 ③국민에게 봉사해야 할 공직자가 비위 부정에 개입함으로써 다수의 선량한 공직자까지 불신을 받게하는 사례는 마땅히 규탄되어야 하고 ④국민간에 위화감을 조성하여 단결을 저해하는 행위는 시정되어야 하고 ⑤자기의 사고와 판단만이 유일한 것으로 내세우고 타인의 사고와 판단은 무조건 배척하는 타성은 단호히 근절되어야 하며 ⑥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만을 달성하려는 사고방식은 정의사회구현을 위해 근절되어야 한다는 요지였다.
김재규와 박흥주 박선호 등 박대통령 시해사건의 주동자들이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된 다음날 12월21일 최규하대통령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제10대 대통령에 정식 취임했다. 이날 최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앞으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년 정도면 국민의 대다수가 찬동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새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가능한 빠른 기간 안에 개헌을 하고 총선을 실시하겠다}는 자신의 소신을 재천명했다. 최대통령이 제시한 정치일정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자신이 조각한 정부를 [위기관리정부]로 스스로 규정한 최대통령은 정부도 국회개헌특별위원회와는 별도로 개헌을 연구 검토할 것이라고 밝혀 정치권에서 관심이 집중되었다.
정부 주도의 개헌을 반대해 왔던 국회는 최대통령의 별도 개헌 구상에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신민당에서는 평화적 정권교체가 아닌 평화적 정부이양을 표방했던 최대통령의 논리를 상기시키면서 정부 주도의 개헌은 중지해야 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혀 개헌 주도권을 둘러싼 신경전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이양 시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1년 정도]라는 막연한 개헌 시한만을 밝혀 다시 [안개정국]이라는 인상을 짙게 던져 주었다. 특히 신민당 김영삼총재가 이미 [내년 가을 이전 정권이양]을 주장한 바 있고 공화당 김종필총재도 [81년 초 정부이양]을 제시하고 있는 시점에서 나온 [1년정도]라는 최대통령의 구상은 정치일정에 혼선을 가져 왔던 것이다. 더구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이라는 단서는 뒤집어 보면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정치일정이 변경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어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최대통령의 정치구상에 대해 공화당과 신민당의 유권해석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공화당의 최영길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내년 1년은 부득이한 시한]이라고 인정하면서 최대통령의 정치 스케줄을 환영했다. 그러나 신민당 정재원임시대변인은 [국가의 장래에 또 하나의 불안요인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유신체제로 정권을 연장시켜 왔던 공화당으로서는 당연한 입장이었다고 하겠으나 최대통령이 박정권 아래에서 유신체제를 옹호해 왔다고 보는 신민당의 반대는 [제3의 세력'을 다분히 의식하고 있는 반대였다. 박대통령이 없는 공화당은 상당히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유신체제의 뿌리는 강하다는 것이 신민당이 부담스럽게 느끼는 대목이었다.
헌법개정 공청회개최
정부 주도의 개헌 구상이 구체화할 기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국회 헌법개정 특별위원회는 1월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첫 공청회를 갖고 새 공화국의 헌법에 관한 각계의 의견을 듣는 등 개헌추진활동을 본격적으로 가동시켰다. 침묵을 지켜왔던 헌법학자들을 비롯 정치학자들은 새헌법의 골격에서부터 구체적인 조항까지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이번 헌법은 전면 개정이 아니라 제정방식에 의하여 만들어져야 한다] [대통령 중심제는 독재할 요소가 다분히 있기 때문에 의원 내각 책임제를 해야 한다] [대통령 임기는 6년 단임제가 우리의 현실에 맞는 기간이다] [노동3권과 언론자유 조항을 헌법에 구체화 시켜야 한다] [저항권 조항을 명문화해야 한다] [환경권을 신설해야 한다]는 등 이론과 현실적 배경을 둔 의견들이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핵을 이룬 공통적인 견해는 대통령 직선제였다. 유신헌법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는 가장 비민주적인 요소로 지적된 것이 특징이었다. 국회 헌법개정 심의특별위원회가 이런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았지만 국회에서 마무리한 헌법의 골격은 대통령 직선제와 6년 임기의 단임제였다.
국회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가 대전에서 공청회를 개최한 80년 1월18일 최규하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연두기자회견을 갖고 남북한 총리회담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전제로 한 남북대화와 관련한 제의는 극히 의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최대통령의 개헌구상은 정가의 관심과 여론의 핵으로 등장했다.
최대통령은 정부에서 이미 법제처에 [헌법연구반]을 구성하여 그 작업이 진전되고 있음을 처음으로 공개하고 3월 중순까지 대통령 직속하에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할 계획임을 밝혔다.
김영삼 총재 정부태도에 반발
최대통령의 헌법개정을 위한 기구 설치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신민당이었다. 신민당은 최대통령이 당초와는 달리 헌법개정 문제에 대해 보다 확실한 소신을 피력한 것은 그 자신의 견해이기보다는 외부세력의 지원에 의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민당으로서는 정부의 태도를 주시할 뿐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사태를 너무 낙관하고 있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카터]행정부가 보여준 한국의 정치발전에 대한 관심도에서 비롯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정부가 한국의 정세에 대해 보여준 관심은 6·25이후 가장 세심한 문제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고 주한미국인 관리가 말했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짙은 것이었다.
[홀부르크]미국성 동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는 1월15일 최대통령과 공화당 김종필 총재 신민당 김영삼총재를 연쇄적으로 방문하여 한국의 정치발전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에 앞서 [레스트 울프]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아태지역소위원장 일행이 내한하여 김영삼 총재와 김종필 총재를 차례로 예방하여 한국의 정치발전과 관련한 각 정당의 입장을 청취하는 등 이례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 정부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 보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의 미국 정부의 의향에 대한 관심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한 워싱턴 특파원의 보도가 있었다.
한편 신민당 김녕삼 총재는 80년 1월25일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최규하대통령이 밝힌 개헌구상과 관련한 정치일정에 정면으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김총재는 개헌안은 어디까지나 국회에서 만들어져야 하며 국회 개헌심의특별위원회가 개헌안을 만들어 정부에 넘기면 정부는 이를 그대로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가 이미 발표한 일정이라도 이에 구애 받지 말고 개헌과 선거 시기를 앞당겨 제5공화국의 대통령이 취임할 수 있게 할 것을 최대통령에게 요구했다. 과도정부는 [위기조정정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밝힌 김총재는 최규하 대통령의 과도체제가 앞으로 수립될 민주주의나 민주정부의 내용을 규정할 수는 더욱 없다고 못을 박았다.
80년대의 3대 지표를 [자유가 보장되는 정치] [분배의 균점이 실현되는 경제]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설정한 김여삼 총재는 통일의 접근 방식을 ▲남북한 전쟁포기선언을 위한 정치협상 ▲민족적 동질성과 신뢰회복을 위한 다각적인 대화와 교류 실현 ▲전민족이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통일정부 수립 등 3단계로 제시했다. 그리고 신민당이 수권태세를 갖추기 위해 재야인사는 물론 국내외의 인재와 참신한 청년신진세력을 영입해서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실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총재는 자신의 대통령 출마 여부를 묻는 질문에 {언젠가는 나의 거취를 분명히 밝히겠지만 지금은 그 대답을 유보하겠다}고 말했지만 신민당이 정권을 잡는 것을 [역사의 순리]로 단정했다.
최규하대통령이 대통령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을 [숙명]으로 인식한 반면 김총재는 공화당 정권의 붕괴를 역사의 필연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권 밖의 흐름은 [순리]가 아닌 소용돌이가 계속되고 있었다.
신당설 나돌기 시작
김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 시국에 대한 정치 구상을 밝히고 있던 바로 그 시간 수도경비사 계엄보통군법회의는 79년 11월24일 명동 YWCA에서 있었던 [통일주체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선출저지를 위한 국민대회]의 관련 피고인 17명에게 최하 징역1년에서 4년까지 실형을 선고하고 있었다. 이른바 [명동위장결혼불법집회사건]의 공판에서 재판장 박웅 대령은 판결 이유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일치단결이 요망되고 정치 경제발전을 염원하고 있는 이때 피고인들은 오직 자기만이 할 수 있다는 시대착오적인 아집으로 사회 혼란을 획책했다}고 실형 선고 이유를 밝혔다.
이날 실형 선고를 받았던 사람들은 유신체제에 항거하다 대부분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되었던 지식인들이었다. 특히 전대통령 윤보선씨(징역2년)와 함석헌옹(징역1년)은 구속은 되지 않았으나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에 야당가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윤보선 함석헌씨는 관할관의 형 확인과정에서 형집행면제처분을 받았지만 다른 피고인들은 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구속 피고인들의 명단과 형량은 다음과 같다.
전공화당국회의원 양순직 징역2년, 박종태 2년, 백범사상연구 소장 백기완 2년, 밀물출판사대표 최민화 1년, 민청회장 이우회 4년, 한국기독청년협의의장 김정택 3년, 민청부의장 최열 3년, 민청상임위부의장 양관수 3년, 민청운영위원 홍성엽 3년, 기독청년협의총무 이상익 2년, 기청감사 권진관 2년, 전동아일보기자 임체정 2년, 민청운영위원 강구철 1년, 한국기독교학생 총연맹감사 박종열 2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 김병걸 2년(불구속).
신민당의 김영삼총재와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당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지방 나들이를 하고 있을 무렵, 정가에서는 신당설이 끈질기게 나돌았다. 신당설은 공화당쪽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김종필 총재는 79년 말경 기자들과 환담하는 자리에서 {소속 의원들이 신당이 창당된다는 얘기가 있어 신당에 가겠다는 사람은 말리지 않겠다}고 밝혀 무엇인가 [감]을 잡고 있음을 시사했다. 신당의 움직임을 [당의 파괴]와 [역사파괴]라는 용어까지 구사한 그는 {나도 공화당을 창당해 보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느냐}며 낙관론을 펴기도 했다.
신당설은 79년 연말부터 통일주체대의원들의 조직을 활용하여 유정회의원들과 전직장관 등 구여권을 중심으로 태동하고 있다는 소문과 [12·12사태]이후의 실력자가 구상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었다. 갖가지 루머 속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신당설은 10·26이후 집권당이었던 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과 대결하기에는 문제가 많기 때문에 강력한 여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화당의 체질개선이 불가피하다는 데 근거를 둔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에 親김종필계에서는 反김라인에서 공화당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라고 비난했다. 특히 주목을 끌었던 것은 정계의 재편성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몇몇 재벌들이 신당에 관여하고 있다는 루머로서 신당설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었다. 루머의 집산소이며 생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증권가에서는 신다으이 발기인 이름까지 나돌 정도로 관심은 신당 쪽으로 집중되었다.
야당가에서도 신당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영삼 총재가 신민당을 자기위주로 끌어갈 경우 반대세력들이 떨어져 나오지 않겠느냐는 추측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씨가 복권이 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그렇게 구체적인 소문은 나돌지 않았다. 신민당 의원들의 대부분은 구여권에서 자구책으로 군소정당을 만들 가능성을 점치고 있을 뿐 신당태동설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는 않는 듯했다.
계엄사, 정치과열현상 우려
공화당과 신민당은 이러한 신당 태동설에도 불구하고 새 헌법을 만드는 데 박차를 가해 80년 2월9일 동시에 새 헌법의 시안을 마무리 하면서 정치일정을 앞당기기 시작했다. 공화당과 신민당이 각각 마련한 개헌안의 골간은 대통령 중심제로서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대통령 임기는 4년에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도록 했으며 국회의원의 임기도 4년으로 정했다. 공화당과 신민당의 개헌시안은 우연히도 거의 일치했다.
공화·신민 양당이 새 헌법의 시안을 확정한 그날 계엄사령부는 정치 발전이 안보태세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서는 결코 안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한상이군경회 대한전몰군경회 전몰군경미망인회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등 4개단체에서 보내온 [현시국에 관한 서면건의]에 대한 회답에서 이같이 밝힌 계엄사령부는 {어떤 개인 또는 집단에서 정치과열현상을 일으켜 현존 사회질서를 어기고 무분별하게 행동한다면 이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계엄사는 또 최근 북괴의 평화공세에 언급하면서 {남북간의 대화는 5천만 겨레가 모두 바라는 것이지만 북괴가 적화전략의 일환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국민 모두가 이를 경계하고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과열현상에 대한 계엄사령부의 [우려]와는 달리 공화당 김종필총재와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당원단합대회와 시·도지부 결성대회를 통해 집권을 위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두 정당은 도청 소재지를 순회하며 대규모집회를 가졌다. 김종필총재와 김영삼총재의 칼러사진 피켓이 등장하고 이들을 따르는 자동차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공화당 당원들은 [하늘에는 박정희 땅에는 김종필]이라고 쓴 피켓도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김영삼신민당총재는 80년 2월12일 대전 시민회관에서 열린 충남도지부 결성대회에서 {앞으로 신민당이 집권하면 나는 모든 고급공무원들의 재산공개를 법률로 정하여 국민 앞에 부끄럽지 않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그는 신민당의 집권은 과거와 같이 욕된 향락과 행복을 지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민중의 편에 서서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데 있다고 역설했다. 김총재는 공화당을 겨냥하여 {민주역사의 흐름은 20년 집권의 타성에 젖은 집단에 의해 그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최규하대통령과 신현확국무총리, 공화당 김종필 총재, 민관식 국회의장직무대리 김창근 정책심의의장, 양찬우 사무총장과 유정회 최영식의장, 한태연정책위의장 등은 80년 2월15일 저녁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정국 전반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다. 최대통령 초청으로 만찬을 겸한 이날의 회동은 유신체제를 지속시켜왔던 주역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 자리에서 최대통령은 국회와 정부의 개헌 협의에 대해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정부가 국회안을 그대로 국민투표에 회부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최대통령의 이러한 입장은 국회가 만든 개헌안을 국민투표로 확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국민투표로 확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김영삼 총재의 견해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날의 모임에 대해 신민당은 {중립을 지켜야 할 선거관리정부인 최규하 정부가 구 여당인 공화, 유정회 간부들과 만나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는 것은 과도정부 본래의 사명에 비추어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최대통령, 양 김씨 면담
이날 모임의 성격을 놓고 정가와 시중에서 또 다른 소문이 나돌자 최대통령은 이틀 후인 2월18일 저녁 김영삼 신민당 총재도 초청하여 6시15분부터 11시10분까지 무려 4시간55분 동안 시국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다.
최대통령과 김총재가 나눈 대화내용을 갖추려 보면-.
▲최대통령 :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방문해 감사합니다.
▲김총재 : 어려운 시기에 중임을 맡아 고생이 많습니다.
▲최대통령 : 어려운 때이니만큼 김총재께서 많이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김총재 : 정부가 밝힌 정치일정이 구체성이 없고 너무 길다는 생각입니다. 헌법을 개정하는 데 1년씩이나 걸리고 유럽이나 아프리카까지 가서 헌법을 연구한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과도정부의 정치일정이 길기 때문에 정치척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민심이나 공무원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습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일정을 단축하기 바랍니다.
▲최대통령 : 오는 22일 국정자문위원회의 첫 회의를 열어 원로들의 의견을 듣고 3월중으로 정부 개헌안의 골격을 마련해서 4월중에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구성해서 정부안을 내놓을 계획입니다. 국회의 개헌안도 충분히 참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총재 : 과도정부라는 것은 원래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4·19이후 과도정부도 중립을 지켜 민주당에게 정부를 이양하지 않았습니까. 최근 당정협의회 같은 회의를 정부가 주서하고 있는 것은 특정 정당에 치우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최대통령 : 현정부는 특정 정당에 치우치지 않고 불편부당하게 순리에 따라 상식적으로 모든 문제를 처리해 나갈 것입니다. 신민당도 과거처럼 공격 일변도의 자세에서 떠나 시시비비를 따져 모든 일에 임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몇 사람이 경쟁을 하든 관심이 없고 경쟁하는데 출발선을 긋는 것만이 나으 임무로 생각하여 절대 중립을 지킬 것입니다.
▲김총재 : 긴급조치 위반자들이 지금까지 복권되지 않고 있는 납득하기 어려우며 사회 불안의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대폭적으로 복권을 시키고 구속중인 양심수들은 전원 석방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최대통령 : 지금 관계 당국에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조만간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총재 : 김옥길문교부장관이 발표한 자율화조치는 미흡한 데가 많습니다. 학원은 외부세력개입이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해야 합니다.
▲최대통령 : 보완하도록 검토해 보겠습니다.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와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차례로 만난 최규하 대통령은 2월22일 소집된 국정자문위원회에서 다시 정치과열이 우려를 나타냈다.
4·19이후 과도정부 당시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던 허정씨를 비롯 전 내각수반과 전 공화당 신민당 대표 등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최대통령은 인사말을 통해 당시의 국내 상황을 격동과 혼미의 연속이라고 진단하면서 {10·26사태 후 우리 사회에서 제반 질서개편이 진전됨에 따라 일부의 정치 과열현사이 나타나고 있음으로써 자칫하면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파괴할 우려도 없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정가와 여론의 관심의 핵이었던 김대중씨의 복권문제에 언급하면서 [곧 복권될 것]임을 시사했다. 이날 김종필 공화당 총재도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씨의 조속한 복권을 요구함으로써 김대중씨를 비롯한 긴급조치 위반인사들의 복권이 임박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김대중씨의 복권 임박설이 신민당 측에 전달되자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민당내의 김씨 측근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당사자인 김대중씨는 김영삼씨와의 관계를 [라이벌관계가 아닌 협력관계]라고 역설했지만 그 동안 신민당에서 [찬밥]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김대중씨계는 당권 장악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의 얘기로는 신민당이 김대중씨에게 부채를 지고 있다는 논리였다.
3김씨 회동과 정국추이
이 무렵 80년 2월25일 밤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씨 등 이른바 [3김]씨가 회동한 것은 정가는 물론 국민적 관심의 표적이었다. 서울 계동 인촌기념관에서 베풀어진 만찬에 참석한 3김씨는 {우리나라의 참되고 민주적인 역사를 만들기 위해 다 같이 노력하자}면서 건배했다. 72년 10월 유신 이후 김대중씨와 8년만에 대면한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지나간 일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생각하자}고 사과했다. 이 날 만찬에 참석한 글라이스턴 주한미대사는 김종필총재와 김대중씨의 담소에 귀를 기울였다.
이 당시 신문은 김대중씨를 [재야인사]라고만 보도했을 뿐 김씨의 거취에 대한 보도도 철저하게 통제를 받았다. [3김]씨의 회동이 보도된 이후 최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재향군인회 임원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이미 밝힌 정치일정은 꼭 지키겠다는 뜻을 다시 밝히고 {우리는 역사의 긴 안목에서 또 국가적 차원에서 정치발전문제를 생각해야 하며 졸속에 흐르는 나머지 과오를 저질러 후회를 남기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이 자리에 참석한 신현확 국무총리는 {일부에서는 시대가 바뀌었으니 모든 것이 일거에 바뀌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모든 국민이 바라고 있는 것은 안정이지 급격한 변화는 아니다}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최규하대통령은 80년 2월29일 오전 10시를 기해 윤보선 전대통령의 김대중 전 신민당대통령 후보, 함석헌 옹, 지학순 주교를 포함한 긴급조치위반자 등 6백87명을 복권시켰다. 최대통령은 이날 오전 임시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복권조치를 단행했다. 복권대상에서 반공법 등 공안사범 대상자는 제외되었으나 백낙청 전 서울대 교수와 이영희 전 한양대교수, 임영천 전 조선대 강사 등 3명과 8명의 학생은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자이지만 형량이 가볍고 교수와 학생이라는 신분을 참작하여 특별사면과 함께 특별복권시켰다. 복권자들의 신분은 학생이 3백73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정치인 22명, 종교인 42명, 교직자 24명, 언론인 9명, 기타 2백17명이었다.
서기원 청와대 대변인은 {이번 복권조치는 사회안정의 바탕위에서 착실한 민주발전을 추진하고자하는 최대통령의 진일보한 조처}라고 복권배경을 설명했다.
최대통령의 복권조치로 다시 정치현상에 모습을 나타낸 김대중씨는 3월1일 {정국의 불필요한 혼란을 막고 민주정부의 원활한 실현을 성취하고자 하는 국민적 여망과 함께 최규하 대통령을 언제든지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히면서 회담이 이루어지면 중립적인 과도정부의 사명완수와 국민합의에 바탕을 둔 민주제도의 확립, 안보와 민생의 안정 등 국정전반에 걸쳐 진지하고 솔직한 의견교환을 제의했다. 그 후 김대중씨는 3월11일 내용증명우편을 통해 최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최대통령의 복권조치로 [3김]씨의 정치활동이 본격화하고 있을 때 한미연합 사령관 [위컴]대장은 3월7일 동부전선의 한국군 부대를 시찰하면서 수행한 기자들에게 {한국 당국으로부터 한국군은 매우 안정돼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히면서 {나 자신이 보기에도 그런 말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10·26이나 12·12사태 등을 통해서도 미국은 기본적으로 한국이 외부침략을 받을 경우 신속히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위컴]사령관이 한국군부는 정치에서 초연하며 군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위컴]대장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정가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가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한 데 대해서 의구심을 나타내는 정치인도 있었다.
신 총리회견 물의일으켜
이 무렵 신현확 국무총리의 일본[산께이신문]과의 회견 내용은 신민당과 재야세력에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신총리는 회견에서 한국 정부는 앞으로 민주화를 추진할 것이나 유신체제를 전면 부정하는 급속한 민주화는 사회혼란을 가져오므로 단계적으로 신축성있게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유신체제가 국방력을 충실히하고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고 밝힌 신총리는 {민주화는 국방력의 충실과 경제성장의 관계에 준하여 박대통령의 서거라는 충격적인 일이 있든 없든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한편 신민당은 신총리의 발언이 안보경제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민주화발전은 2차적인 문제로 보고있다고 주장하면서 임시국회 소집 등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벌인다는 방침을 확정함으로써 긴장이 감돌았다. 김영삼 총재는 신총리의 발언과 관련, {그러한 언동은 과도정부가 하는 처사에 대한 국민의 의혹을 가중시키는 불필요한 언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공화당 김종필 총재는 {정부의 책임자로서 안보를 강조한 것은 달리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상반된 견해를 표명하면서 {정부와 공화당은 시국관이 꼭 같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새 시대를 맞아 밀고 가는 기본방향이나 단계적인 방법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해 정부와 공화당의 동질성을 역설했다.
신총리의 회견으로 정국이 경색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최대통령은 3월14일 중앙청회의실에서 열린 정부 헌법개정심의위원회 개회식에서 새 공화국의 헌법은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가미한 절충형태가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시사했다. 특히 최대통령은 {70년대 초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의 부작용과 후유증이 우리 사회에서 최근까지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해 주목을 끌었다. 최대통령의 이같은 견해는 곧 대통령직선제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어 [안개정국]의 전망을 더욱 흐려놓았다.
최대통령의 헌법개정의 견해와 신총리의 민주화에 대한 소신은 곧 바로 정가로 번져 신민당은 정무위원 소속의원 지구당위원장과 중앙당 당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민주화촉진궐기대회]를 열어 [아직도 유신의 몽상 속에서 역사와 국민에 역행하는 어떠한 정치적 음모도 철저히 분쇄할 것]을 결의했다.
김영삼 총재는 이날 궐기대회에서 {안보를 위해 유신의 연장이지 국민이 바라는 정치발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정부가 자숙하고 반성하지 않을 때에는 신민당은 중대한 결단을 내리겠다}고 경고했다.
김대중씨도 {최규하정권은 강권정치를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신민당은 김총재를 중ㅇ심으로 일사불란하게 대정부투쟁을 전개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최규하대통령의 개헌구상과 신현확총리의 안보우선발언으로 공화당은 [우려]를, 신민당은 [규탄]으로 맞섰지만 이들 두 정당은 자체 내에서 일어난 잡음으로 진통을 겪어 대정부 공세에 차질을 가져왔다.
공화당은 정풍운동과 이후락씨의 김종필총재의 퇴진 요구와 관련한 이른바 [이후락발언]으로 연일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신민당은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대립이 물리적 충돌까지 번져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최대통령 심야담화의 배경
야당의 규탄에 입을 다물고 있던 최규하대통령은 3월26일 제주시에서 서기원청대와대변인을 통해 담화를 발표했다. 서대변인이 발표한 담화는 최대통령이 정치 발전을 위한 국정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일부 정치인이 이러한 정부의 노력에 협조는 못할지언정 근거없는 비난을 일삼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서대변인의 발표는 이례적으로 이날 밤 11시30분에 발표하여 정부의 입장이 강경하게 대처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되었다. 서대변인의 이같은 담화는 이날 아침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강릉에서 구체적인 정치일벙의 제시를 정부에 요구코서 {최근의 정치적 혼미는 구체제 옹호파의 집권 미련에 그 원인이 있다}고 비난한데 대한 정부측의 공식적인 반응인 것으로 전해졌지만, 정부와 신민당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킨 담화였다.
청와대 대변인의 담화가 발표되기 전 김대중씨는 이날 저녁 7시 서울 YWCA수요강좌에 참석하여 1만여명의 관중들에게 [민족혼]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정치활동 재개 후 처음으로 군중 집회에 나타난 김씨는 {나는 대통령 후보 운운하지만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과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전제하고 {나는 안보와 통일이 이룩되고 국민들이 잘살게 된다면 중앙청 사환이 되어도 한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규하대통령이 허정씨처럼 과도정부로서 임무에 충실한다면 그들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덧붙혔다.
정치권의 기류와는 달리 학원의 자율화 물결은 4월 들어 더욱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유신체제에 영합했던 교수들은 어용교수의 낙인이 찍혔고 불투명한 정국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근로자들의 움직임도 [생존권의 보장]을 요구하고 나섰다. 유신체제의 철폐를 주장하며 끈질기게 항쟁해왔던 대학생들은 10·26사태를 [민주화투쟁]의 결과로 파악했다.
학원가의 움직에 대해 최규하대통령은 4월14일 [최근의 내외정세에 관한 대통령 담화]를 발표하면서 {최근 우리 사회의 일부에서는 시국의 중대성을 깊이 생각함이 없이 국민적 단합을 저해하는 언동을 하는가 하면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한 정부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원에서 대화
이 수 언<저널리스트>
박대통령 [有故]로 대통령권한 대행
{비서실장님께서 빨리 실장님 방으로 오시라고 하십시다.}
최규하 국무총리는 79년 10월 26일 밤 10시 20분경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실로부터 전화연락을 받고 10시 45분 청와대에 도착했다. [부·마사태]로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 선포를 의결하고 마산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던 최총리는 김계원 비서실장의 당황하는 태도로 심상치 않은 사태가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김계원은 동석했던 수석비서관들을 옆방으로 내 보낸 후 崔총리와 구자춘 내무장관에게 [대통령의 유고]를 보고했다. 崔총리가 구체적인 내용을 묻자 김계원은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고만 대답했다. 이 때 육군본부에 있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은 김계원은 최총리에게 육군본부로 가야 사건내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밤 11시30분 경 육군본부에 도착한 崔총리는 김재규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김재규는 {지금 대통령이 유고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사태로서 전방경계도 강화해야 되겠고 국내 유혈사건도 막아야 하기 때문에 2, 3일간 보안을 단단히 유지해야 하고 빨리 각의를 열어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재규로부터 박대통령의 유고를 전해들은 崔총리는 수행했던 유혁인 정무제1수석비서관에게 총무처에 연락하여 국방부회의실에서 긴급국무회의를 소집하도록 지시했다. 국방부장관 접견실로 자리를 옮긴 최총리는 김재규에게 {비상을 선포할 때에는 국민이 납득할만한 사유를 지체없이 밝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소련은 [브레즈네프]행적을 일주일간이나 발표하지 않은 적도 있다}면서 그냥 [긴급사태]라고 명시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때 몇몇 국무위원들이 달려왔다. 밤 11시 50분경 국방부 회의실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한 최총리는 [대통령의 서거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계엄령을 선포할 수 없다]는 각료들의 주장에 따라 회의를 중단하고 김계원과 함께 27일 새벽 1시20분 경 국군서울지구병원에 도착하여 병원장의 안내로 [유고]를 확인했다. 崔총리는 새벽 2시 경 다시 국방부로 돌아와 국무회의를 열게 하고 세부적 사태수습방안을 논의한 후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기로 의결했다. 벽시계는 새벽 3시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부대변인 김성진 문공부장관은 신문사와 방송국에 연락하여 4시10분 중앙청 기자실에서 박대통령이 26일 오후 7시50분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서거했다는 소식을 간단히 전하고 [비상계엄 선포]를 발표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김장관은 기자실 흑판에 박대통령의 서거와 비상계엄선포를 알리는 짤막한 정부 성명을 썼다.
박대통령의 유고로 최규하 국무총리는 헌법 제48조에 따라 대통령권한대행에 취임했으며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대장을 임명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한 최총리는 10월27일 오전 9시40분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국가비상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 박대통령 서거에 애도의 뜻을 전하면서 {국민 여러분은 정부와 군을 신뢰하고 추호의 동요도 없이 각자의 직분을 다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담화문을 읽는 최대통령권한대행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으며 {민족중흥의 지도자이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졸지에 서거하심에 그 충격과 비통함을 가눌 길이 없다}면서 본인은 비탄을 딛고 무엇보다도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위하여 막중한 국가보위의 책임을 수행할 각오}라고 다짐했다. [국가보위]가 그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사명이었다.
[서울의 봄]은 왔는가
4년 전 형식상 제2인자의 자리에 앉았지만 줄곧 [단기]이다시피해온 최규하 총리는 박 대통령의 급서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정상의 자리에 앉게 됐다. 그러나 아무런 정치적 기반이 없던 그가 10월27일 새벽 대통령권한대행에 취임함으로써 이 나라 정계는 꼭 20년만에 또 한번의 [정치적 과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권한대행에 취임한 崔총리가 12월6일 비록 [통대]에서나마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다음날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함으로써 이나라 대다수 국민들은 [서울의 봄]에 한가닥 기대를 거는 모습들이었다.
물론 1주일도 못돼 야기됀 [12·12사건]이 있었지만 그 진상을 자세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서울의 봄]이라는 기대는 여전히 무산될 수는 없었다. {군의 기본사명은 국토방위에 있으며 정치는 군의 영역 밖이므로 군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여러 차례에 걸친 이회성계엄사령관겸 육군참모총장의 담화문도 그런 기대를 쉽게 버리지 못하도록 했던 것 같다.
어떻든 유신헌법 반대금지를 골자로한 긴급조치 9호의 해제는 한마디로 유신체제의 종언과 함께 국민적 합으에 의한 새 헌법의 채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최대통령은 12월21일 서울장충체육관에 서 있는 제 1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통해 {앞으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년 정도면 국민의 대다수가 찬성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에 수반되는 필요한 재반조치를 착실하게 취해서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공명정대한 선거를 실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밝혔다. 즉 그는 국민적 합의에 따른 새로운 헌법을 마련하는데 1년이라는 기간을 제시한 것이다. 정치의 속성과 당시 권력의 실체를 알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1년이라는 시한이 다소 길기는 하지만, 열화와 같은 국민여론에 따라 민주헌법은 마련될 것이고 필경엔 민주화가 이룩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 매스콤에 의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씨등 이른바 [3김]씨가 크게 부각되고 있었으며 국민들은 장차 채택할 직선제 헌법에 따라 구시대를 청산, [희망의] 80년대가 시작될 것으로 기대해 마지 않았다.
긴급조치 9호 해제로 구속인사 68명의 출소 및 김대중씨 자택연금해제(12월8일), 김영삼 신민총재의 긴급조치9호 위반혐의 면소판결(12월15일), 공화당 소장의원들에 의한 정풍운동 등 일련의 사건들을 국민들은 새시대를 열기 위한 값진 노력이며 필연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라의 기본법인 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신민당의 개헌공직회가 12월27일 각계 인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열림으로써 이러한 희망-[서울의 봄]은 꿈이 아닌 현실로써 인식돼가고 있었다. 이와 함께 조금 시일이 지나긴 했지만, 80년 2월말엔 윤보선 김대중씨 등 6백87명에 대한 복권조치가 이뤄졌는가 하면, 사북탄광사태가 발생, 노사분규가 고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정작 5월15일 약 7만명의 데모대가 서울역 앞 등 중심가에서 야간가두시위를 벌임으로써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5·17사태]는 바로 이러한 상황이 낳은 꽃샘추위나 다름이 없다고 봐야 할 터였다.
한편 주말을 [캠프 레이비드]산장에서 보내기 위해 여장을 꾸리고 있던 [카터]미국대통령은 10월26일 오후 2시, 한국시간으로는 27일 새벽 3시 첫 보고를 받았다. 최총리가 국방부 회의실에서 국무위원들과 함께 비상사태 선포를 논의하던 시간이었다. [카터]대통령은 직접대책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브레진스키]대통령 보좌관에게 신속한 대책 수립을 지시했다. 국방부 회의실에서 비상사태선포를 의결하던 그 시간에 백악관 상황실에서는 [브레진스키]대통령보좌관 주재로 [브라운]국방장관, [크리스토퍼]국무차관, [존스]합참의장, [칼루치]CIA차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한국의 사태]를 논의했다. 대책회의가 끝난 후 국무성은 특별성명을 통해 어떤 외부 침략도 용납지 않는다는 결의를 표명했으며, 국방성은 주한미군에 대한 경계태세 3호를 발동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조치했다.
두각 나타낸 전두환 소장
비상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기 전 최대통령권한대행은 [카터]대통령으로부터 박대통령의 서거에 애도의 뜻을 표하는 조전을 받았다. [카터]대통령은 조전에서 {각하가 대통령권한대행에 취임함에 있어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공약을 확고히 이행할 것임을 보장한다}고 밝혔다. 최대통령권한대행이 외국대통령으로부터 [각하]라는 존대어를 받은 첫 번째 전문이었다.
최대통령대행은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장작을 해임하고 10월30일 육군참모차장이희성육군총장을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임명했다.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은 후 첫 인사였다.
11월3일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고 박대통령의 영결식에 최대통령대행은 조사를 통해 {5년 전 영부인께서 불의에 돌아가신 비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직도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하실 일이 많은데 각하 자신마저 불시에 가시었으니 이 얼마나 망극한 일이냐}면서 목이 메었다. 그는 북바치는 슬픔을 억제하면서 조사를 읽어 당초 12분으로 잡았던 조사낭독이 17분이나 걸렸다.
미국정부의 조문특사로 장례식에 참석한 [밴스]국무장관은 워싱턴을 떠나기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한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새 지도자 선출을 지지한다는 것이 사실인가}라는 질문에 {이 문제는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결정할 문제이지만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여운을 남겨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 무렵 [뉴욕타임즈]지는 한국 군부대의 고 박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장성들은 유신헌법의 조기폐지에 반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의 조문특사로 한국에 온 [밴스]국민장관은 장례식이 끝난 직후 중앙청으로 최대통령대행을 예방, 집무실에서 40분동안 요담했으며 그는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미대사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 군부가 민간정부를 지지하고 있다}고 밝히고 헌법 절차에 따라 민간 당국에 의해 질서있게 진행하기로 한 한국정부의 결정은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이 11월6일 박대통령시해사건의 수사전모를 밝힌 4일 후 최대통령은 두 번째로 [시국에 관한 대통령권한대행의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11월 10일 오전 9시30분 경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젼으로 전국에 중계된 담화내용은 [헌법에 규정된 시일과 절차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정부 방침으로 확정한 것]임을 강조한 최대통령대행은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빠른 기간 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들어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이러한 최대통령대행의 견해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의 선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신체제의 철폐와 유신헌법의 개정을 위해 공화당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해온 야당과 재야세력이 주장하는 정치발전과는 상당한 견해차를 보인 특별담화내용이었다.
최대행의 정치일정에 반발
담화가 발표된 직후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즉각 최대통령대행의 담화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총재는 신민당을 포함한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의견을 사전에 듣지 않은 일방적인 정치일정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11월5일 밝힌 3개우러 이내에 헌법을 개정하고 신헌법에 따라 2개월 이내에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어 재야 단체인 [민주회복국민연합]측도 11일 성명을 통해 최대행체제는 즉시 물러나고 거국적 민주내각을 구성하여 3개월내에 민주헌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했다.
최대통령권한대행의 구상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대통령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김영삼총재와 재야인사라고만 보도해야 했던 김대중씨의 견해는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국회에서 기초한 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정하여 그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국민들이 직접 선출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 두 김씨의 주장과는 달리 새로 선출된 김종필공화당 총재는 최대통령대행의 구상을 지지하여 주목을 끌었다.
최대통령대행은 11월15일 국회에서 80년도 예산안을 제출하고 시정연설을 통해 정치일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시 확인함으로써 [안개 정국]이라는 인상을 짙게 남겼다. 그러나 최대통령대행은 자신의 정치일정 구상에 대해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11월22일 저녁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시국문제전반에 걸쳐 3시간5분동안 요담했다. 김총재의 요청과 최대행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이날 요담에서 김총재는 자신이 기자회견을 통해 제시한 [민주국민화해협의회]구성을 제의했으나 최대행은 특정한 협의체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각계 각층과 대화를 해야한다는 데는 뜻을 같이했다.
요담이 끝난 후 정부대변인 김성진문공부장관과 신민당 대변인 박권흠의원이 밝힌 4개항의 공동발표문은 정치일정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없었다. 다만 최대행과 김총재는 헌법개정 논의가 국회에서 주도적으로 해 나가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가 없음을 밝혔을 뿐이었다.
각계 대표들과 계속해서 접촉할 뜻을 밝힌 최대통령대행은 이틀 후인 11월24일 고 박대통령과 한때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김수환추기경과 면담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최대통령대행이 각계 인사들과 대화를 계속하고 있을 때 계엄사령부는 11월13일 전대통령 윤보선씨 집에서 민주청년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5개 단체에서 발표한 민주화를 위한 성명과 관련 전 [동아일보]기자 이부영씨를 포고령위반혐의로 구속하고 전연세대교수 성래운씨와 민주청년협의회 이우회장장대리를 지명 수배했다. 그리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회원 김병걸 박태순씨와 해직교수협의회의 백낙청 염무웅 김*국 서남동씨, 전 [동아방송]기자 이병주씨, 전[조선일보]기자 정태기씨, 여성신도회 회장 이혜정씨등 9명을 훈방조치했다.
박정권의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지식인들에 대한 이같은 조치는 정치권 밖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윤보선씨는 최대통령대행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김대중씨의 연금과 재야세력의 구속과 연행을 항의하면서 유신체제의 즉각 철폐를 요구했다.
한편 계엄사령부는 11월24일 오전 육군본부 회의실에서 계엄선포 후 첫 전군지휘관회의를 열어 국가안보와 법질서를 유지하여 사회기강을 바로잡는 임무를 다할 것을 다짐했다. 일단 민심을 수습한 계엄사령부는 이어 26일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마산 등 6개 도시를 제외한 전국의 통행금지를 종전대로 환원시켰다.
YWCA위장결혼사건
이 무렵 서울의 대학가에는 민주청년협의회 회원이었던 홍성엽씨의 결혼식을 알리는 청첩장이나도았다.
{홍성엽군과 윤미정양이 여러 어른과 친지를 모시고 혼례를 올리게 됨을 알려 드립니다. 즐거운 자리에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79년 11월24일 (토) 오후 5시30분 YWCA 1층 강당}
당국은 뒤늦게 이 결혼식이 위장결혼식임을 알았다. [결혼식]은 예정시간보다 15분 늦은 5시45분에 기독청년협의회장 김정택씨의 사화로 [신랑]홍성엽군을 입장시킨 후 전국회의원 박종태씨가 주례로 나와 혼인서약 낭독이 아닌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에 대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선언했다. 그리고 최대통령 권한대행이 밝힌 11월10일의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반대하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결혼식에 참석한 1천 여명은 곧바로 가두시위에 들어가려 했으나 경찰과 계엄군에 의해 저지를 당했고 그중 96명이 불법옥내집회혐의로 검거되었다.
국민연합과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등이 주최한 통대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는 ▲최규하 김종필의 유신정부는 즉각 퇴진, 거국민주 내각을 구성하고 ▲유신 대통령의 재선출은 국민에 대한 반역이며 ▲공화당 유정회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해산하고 ▲우리나라 민주화에 대한 외부세력의 개입을 일체 거부할 것을 선언했다. 10·26이후 재야세력의 첫 저항이었다.
계엄사령부는 이 날의 [국민대회]를 [YWCA결혼식 위장집회]라고 발표했으며 이 사건과 관련, 전 공화당국회원 박종태 양순직, 종교인 성석헌, 문인 김병걸씨 등 96명을 포고령위반으로 검거하여 조사 중이라고 11월26일 밝혔다. 계엄당국은 이들이 서울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서 야음을 이용하여 일제히 궐기 것을 선동하고 나아가 법질서를 문란시키고 사회혼란을 조성하기 위하여 미리 준비한 전단 등을 살포하다가 출동한 계엄군에 의해 검거되었다고 발표하면서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저해하고 북괴로 하여금 남침의 기회로 오판하게 할 소지가 있는 이러한 무책임한 선동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했다. 이 사건으로 이부영씨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포고령 위반에 대한 계엄당국의 강경한 조치는 계속되었다.
[YWCA 결혼식위장집회사건]을 발표한 계엄당국은 하루 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와 수원농대캠퍼스에서 [학원민주화를 위한 성명서]와 [조기개헌 조기총선을 실시하라]는 등의 유인물을 배포, 학원내 소요를 유발하려던 서울대생 14명을 검거 또는 수배하고 이중 주동자 4명은 포고령위반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계엄사 발표에 따르면 11월22일 낮 12시30분쯤 관악캠퍼스 구내식당에서 수학과 3년 안용운, 경제과 4년 김유선, 체육과 4년 권희도 등 3명이 학원민주화를 위한 성명서와 조기개헌 조기선거를 단행하라는 등의 유인물을 식사중인 2백 여명의 학생들에게 배포, 낭독한 후 도주했다는 것이다. 계엄당국은 이 사건을 발표하면서 {비록 극소수이기는 하나 이러한 지각없는 학생들로 인해서 학원내 질서가 어지럽혀지고 공부하려는 분위기가 흐려지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없다}고 밝혔다.
야당의 재야단체 그리고 학생들의 조기 개헌과 조기 총선 주장을 묵살한 채 계엄당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정부는 당초의 계획대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선출을 밀고 나갔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79년 12월3일 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을 대통령 보궐선거에 후보로 등록했다. 최대통령대행은 이날 오후 대통령후보 추천을 수락하면서 대의원들에게 인사장을 보냈다. 그는 이 인사장에서 {헌정의 중단됨이 없이 대한민국의 계속성을 견지하고 국가의 보위와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면서 안정과 질서 속에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본인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이라고 믿기 때문에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봉사와 헌신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수락이유를 밝혔다.
최대통령대행의 인사말 중에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아닌 [평화적 정부 이양]이라는 대목은 눈길을 끌었다. 왜냐하면 정권교체는 집권세력의 교체를 의미하지만 정부이양은 같은 체제에서 집권자만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을 [민족의 영도자]로 추앙했던 그로서는 당연한 논리였다.
통대, 최규하 대통령선출
박정희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해 구성되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6일 오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제3차회의를 열고 제10대 대통령보궐선거를 실시했다. 단독후보로 등록된 최규하후보는 재적 대의원 2천5백60명 중 11명이 불참한 2천5백49명 가운데 2천4백65표(무효 84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권한대행이 아닌 실질적인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최대통령의 임기는 고 박대통령의 잔여임기인 84년 12월26일까지 재임할 수 있으나 [11·10 특별담화]를 통해 잔여임기를 다 끝내지 않고 물러난다는 공약을 했다. 최대통령은 당선에 즈음한 인사를 통해 {전국민의 화합과 협조를 통하여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고 민생안정과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도모하면서 정치발전을 이룩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을 뿐 구체적인 정치일정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그의 측근들에게 밝혔듯이 대통령이 된 사실을 오직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대통령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최대통령이 국무총리로서 국회본회의 대정부 질문에 답변할 때처럼 구체적인 소신의 피력을 유보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외교관 출신의 스타일을 결코 흐트리지 않았다. 국무총리로서 국회 본회의의 발언대에 섰을 때에도 유신체제철폐에 대한 야당의원들의 집요한 추궁에 {민족사적 정통성에 입각해서 국정을 원만하게 운영해 나가겠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최규하대통령은 국민 다수의 여론에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최대통령은 유신헌법의 독소로 비판을 받아왔던 대통령 긴급조치9호를 12월8일 0시를 기해 해제했다. 긴급조치해제는 최대통령이 취임한 후 첫 번째 내려진 단안이었다.
최대통령은 12월7일 오후 긴급조치 해제에 대한 즈음한 담화를 발표, {합법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고 사회질서의 확립과 국가발전을 위해 제반태세가 착실히 정비돼 가고 있는 현시점을 택해서 긴급조치 해제와 구속자 석방조치를 취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문익환목사 함세웅신부 가톨릭 농민회사건의 오원춘씨 등 35명과 학생 33명이 전원석방되었다.
이날 긴급조치위반으로 복역 중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자택에서 연금당하고 있던 신민당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씨도 긴급조치 관련 구속자의 석방과 함께 연금이 풀렸다.
유신헌법의 철폐주장이 강하게 대두되었던 75년 5월13일 박대통령에 의해 선포된 긴급조치9호는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으로 당선된 최대통령이 해제하는 불가사의한 기록을 남겼다. 긴급조치9호는 유신헌법의 부정 반대 왜곡 비방 개정 및 폐기를 주장하거나 청원 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를 일체 금지하며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하는 초헌법적인 강제기능을 갖고 있었다. 최대통령의 긴급조치9호 해제 조치에 따라 서울형사지법은 8일 YH사건배후조정혐의로 구속기소 된 고은 이문영 문동환 인명진 서경석씨 등에 대해서도 보석 결정을 내려 석방했다.
박정희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은 헌정사에서 동일사건으로 가장 많은 구속자를 냈는데 긴급조치 1·4·9호 위반자는 모두 1천3백70명으로 이중 구속된 사람은 1천50명이나 되었다.
최대통령의 긴급조치 해제로 정가와 학원가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을 무렵 정승화계엄사령관의 체포는 또다른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정승화 계엄사령관 피체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12월13일 박대통령의 시해 사건과 관련, 정승화계엄사령관을 군수사기관이 체포하고 정부는 새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중앙정보부장 서리 이희성 육군대장을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노국방장관은 12월12일 저녁 7시 경 대통령시해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김재규가 숨기고 있던 새로운 사실이 발표되어 그 진부를 확인하기 위해 육군참조총장 공관으로 출동하여 연행, 조사중이라고 밝혔다. 노장관은 정총장의 연행과정에서 공관 경비병들과 충돌이 있었으나 정총장의 신변에는 이상이 없다고 발표했다.
노장관의 특별담화문에 따르면 시해사건에 관련된 일부 군장성도 구속 조사중이며 13일 새벽 2시 국방부 청사에서 증가 배치된 계엄군과 초병사이에 충돌이 있었다고 밝히고 군은 새로운 지휘체제를 확립하여 추호의 동요도 없이 임무 수행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사건과 관련 최규하 대통령은 12일 밤 삼청동 공관에서 신현확 국무총리 등 일부 각료들과 함께 심야대책회의를 갖고 시국전반에 관해 오랫동안 숙의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보도되지 않았다.
정부는 13일 오전 11시30분 중앙청 국무회의실에서 신현확국무총리 주재로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이희성준장을 대장으로 진급시켜 육군참모총장으로 발령하고 계엄사령관에 임명하는 안건만을 의결한 뒤 2분 만에 끝냈다. 헌정사상 가장 짧은 국무회의였다.
이 자리에서 신총리는 {사태는 진정되었으니 국민에게 기회 있는 대로 이해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최규하대통령은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계속 침묵을 지켰으며 이러한 대통령의 거취에 대해 서기원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은 {대통령께서 공관에서 관계 장관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사항을 보고받고 있다}고 보도진들에게 전했다.
한국의 정세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던 [카터]미대통령은 이날 [글라이스턴] 주한미대사를 통해 한국의 민주화를 방해하는 어떠한 행동도 한미관계에 중대한 역효과를 미칠 것이라는 내용의 의견을 관계당국에 전달했다.
미국무성 [토머스 레스턴]대변인은 한국시간으로 13일 낮 {우리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체포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글라이스턴] 주한미대사와 한·미연합사령관이 [위컴]장군이 한국 정부의 고위관리와 접촉, 그동안 한국에서 진행되어 온 민주적 정치과정에서 취해진 의의있는 진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가 취해지리라는 다짐과 함께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79년 12월13일자 [동아일보]는 AP통신을 인용, [글라이스턴]주한미대사가 한국내의 모든 미국인 학교에 휴교 조치를 취하고 주한 미국인들에게 여행 제한 조치와 주한미군들에게도 외출금지령이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이날 신문은 또 12일 저녁 8시20분을 기해 전육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12월15일자 [뉴욕타임즈]지는 정승화 장군 체포사건은 한국 군내의 궐기이며 이에는 육군 제 9사단, 공수부대 등 6천명이 참가하여 실권을 장악했다고 실토했다. AP통신은 정승화장군 체포 때 제9보병사단의 전방1개 대대가 미국측의 승인없이 서울시내로 이동했기 때문에 [위컴]주한미군사령관 등 주한 미군수뇌는 격노했다고 전했다.
전면 개각단행
긴급조치를 해제했던 최대통령은 6일후인 12월14일 오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이한빈 아주공대학장을 기용하는 등 새 정부의 조각 명단을 확정, 발표했다. 최대통령은 20개부처 중 박동진 외무장관과 김원기 재무장곤을 제외한 16개부처(2개 부처는 보류)의 장관을 모두 새로운 인물로 바꾸었다. 이 조각에서 전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진의종씨가 보사부 장관에 발탁되어 주목을 끌었다.
최대통령이 새 내각을 구성하여 제4공화국으로서 면모를 일단 갖추자, [카터]대통려은 12월19일 [화해와 질서를 달성하려는 귀하의 노력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보내왔다. [카터]의 친서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다소 활동이 침체되어 있던 최대통령에게는 고무적인 것이었다.
한편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인 이희성 대장은 12월18일 오전 담화문을 발표하고 {군의 기본적인 사명은 국토방위에 있으며 정치는 군의 영역 밖의 분야이기 때문에 군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확고한 원칙이며 정치는 애국심과 양식있는 정치인에 의해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 한결같은 군의 소망}이라고 밝혔다. 취임 후 처음 발표한 이 담화문은 ①북괴의 주장이나 그들이 쓰는 상투용어와 선동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배제되어져야 하고 ②국가와 민족의 긍지까지도 팔아버리는 외세의존적 사대주의는 시정되어야 하고 ③국민에게 봉사해야 할 공직자가 비위 부정에 개입함으로써 다수의 선량한 공직자까지 불신을 받게하는 사례는 마땅히 규탄되어야 하고 ④국민간에 위화감을 조성하여 단결을 저해하는 행위는 시정되어야 하고 ⑤자기의 사고와 판단만이 유일한 것으로 내세우고 타인의 사고와 판단은 무조건 배척하는 타성은 단호히 근절되어야 하며 ⑥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만을 달성하려는 사고방식은 정의사회구현을 위해 근절되어야 한다는 요지였다.
김재규와 박흥주 박선호 등 박대통령 시해사건의 주동자들이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된 다음날 12월21일 최규하대통령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제10대 대통령에 정식 취임했다. 이날 최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앞으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년 정도면 국민의 대다수가 찬동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새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가능한 빠른 기간 안에 개헌을 하고 총선을 실시하겠다}는 자신의 소신을 재천명했다. 최대통령이 제시한 정치일정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자신이 조각한 정부를 [위기관리정부]로 스스로 규정한 최대통령은 정부도 국회개헌특별위원회와는 별도로 개헌을 연구 검토할 것이라고 밝혀 정치권에서 관심이 집중되었다.
정부 주도의 개헌을 반대해 왔던 국회는 최대통령의 별도 개헌 구상에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신민당에서는 평화적 정권교체가 아닌 평화적 정부이양을 표방했던 최대통령의 논리를 상기시키면서 정부 주도의 개헌은 중지해야 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혀 개헌 주도권을 둘러싼 신경전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이양 시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1년 정도]라는 막연한 개헌 시한만을 밝혀 다시 [안개정국]이라는 인상을 짙게 던져 주었다. 특히 신민당 김영삼총재가 이미 [내년 가을 이전 정권이양]을 주장한 바 있고 공화당 김종필총재도 [81년 초 정부이양]을 제시하고 있는 시점에서 나온 [1년정도]라는 최대통령의 구상은 정치일정에 혼선을 가져 왔던 것이다. 더구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이라는 단서는 뒤집어 보면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정치일정이 변경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어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최대통령의 정치구상에 대해 공화당과 신민당의 유권해석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공화당의 최영길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내년 1년은 부득이한 시한]이라고 인정하면서 최대통령의 정치 스케줄을 환영했다. 그러나 신민당 정재원임시대변인은 [국가의 장래에 또 하나의 불안요인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유신체제로 정권을 연장시켜 왔던 공화당으로서는 당연한 입장이었다고 하겠으나 최대통령이 박정권 아래에서 유신체제를 옹호해 왔다고 보는 신민당의 반대는 [제3의 세력'을 다분히 의식하고 있는 반대였다. 박대통령이 없는 공화당은 상당히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유신체제의 뿌리는 강하다는 것이 신민당이 부담스럽게 느끼는 대목이었다.
헌법개정 공청회개최
정부 주도의 개헌 구상이 구체화할 기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국회 헌법개정 특별위원회는 1월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첫 공청회를 갖고 새 공화국의 헌법에 관한 각계의 의견을 듣는 등 개헌추진활동을 본격적으로 가동시켰다. 침묵을 지켜왔던 헌법학자들을 비롯 정치학자들은 새헌법의 골격에서부터 구체적인 조항까지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이번 헌법은 전면 개정이 아니라 제정방식에 의하여 만들어져야 한다] [대통령 중심제는 독재할 요소가 다분히 있기 때문에 의원 내각 책임제를 해야 한다] [대통령 임기는 6년 단임제가 우리의 현실에 맞는 기간이다] [노동3권과 언론자유 조항을 헌법에 구체화 시켜야 한다] [저항권 조항을 명문화해야 한다] [환경권을 신설해야 한다]는 등 이론과 현실적 배경을 둔 의견들이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핵을 이룬 공통적인 견해는 대통령 직선제였다. 유신헌법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는 가장 비민주적인 요소로 지적된 것이 특징이었다. 국회 헌법개정 심의특별위원회가 이런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았지만 국회에서 마무리한 헌법의 골격은 대통령 직선제와 6년 임기의 단임제였다.
국회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가 대전에서 공청회를 개최한 80년 1월18일 최규하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연두기자회견을 갖고 남북한 총리회담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전제로 한 남북대화와 관련한 제의는 극히 의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최대통령의 개헌구상은 정가의 관심과 여론의 핵으로 등장했다.
최대통령은 정부에서 이미 법제처에 [헌법연구반]을 구성하여 그 작업이 진전되고 있음을 처음으로 공개하고 3월 중순까지 대통령 직속하에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할 계획임을 밝혔다.
김영삼 총재 정부태도에 반발
최대통령의 헌법개정을 위한 기구 설치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신민당이었다. 신민당은 최대통령이 당초와는 달리 헌법개정 문제에 대해 보다 확실한 소신을 피력한 것은 그 자신의 견해이기보다는 외부세력의 지원에 의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민당으로서는 정부의 태도를 주시할 뿐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사태를 너무 낙관하고 있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카터]행정부가 보여준 한국의 정치발전에 대한 관심도에서 비롯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정부가 한국의 정세에 대해 보여준 관심은 6·25이후 가장 세심한 문제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고 주한미국인 관리가 말했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짙은 것이었다.
[홀부르크]미국성 동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는 1월15일 최대통령과 공화당 김종필 총재 신민당 김영삼총재를 연쇄적으로 방문하여 한국의 정치발전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에 앞서 [레스트 울프]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아태지역소위원장 일행이 내한하여 김영삼 총재와 김종필 총재를 차례로 예방하여 한국의 정치발전과 관련한 각 정당의 입장을 청취하는 등 이례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 정부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 보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의 미국 정부의 의향에 대한 관심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한 워싱턴 특파원의 보도가 있었다.
한편 신민당 김녕삼 총재는 80년 1월25일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최규하대통령이 밝힌 개헌구상과 관련한 정치일정에 정면으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김총재는 개헌안은 어디까지나 국회에서 만들어져야 하며 국회 개헌심의특별위원회가 개헌안을 만들어 정부에 넘기면 정부는 이를 그대로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가 이미 발표한 일정이라도 이에 구애 받지 말고 개헌과 선거 시기를 앞당겨 제5공화국의 대통령이 취임할 수 있게 할 것을 최대통령에게 요구했다. 과도정부는 [위기조정정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밝힌 김총재는 최규하 대통령의 과도체제가 앞으로 수립될 민주주의나 민주정부의 내용을 규정할 수는 더욱 없다고 못을 박았다.
80년대의 3대 지표를 [자유가 보장되는 정치] [분배의 균점이 실현되는 경제]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설정한 김여삼 총재는 통일의 접근 방식을 ▲남북한 전쟁포기선언을 위한 정치협상 ▲민족적 동질성과 신뢰회복을 위한 다각적인 대화와 교류 실현 ▲전민족이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통일정부 수립 등 3단계로 제시했다. 그리고 신민당이 수권태세를 갖추기 위해 재야인사는 물론 국내외의 인재와 참신한 청년신진세력을 영입해서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실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총재는 자신의 대통령 출마 여부를 묻는 질문에 {언젠가는 나의 거취를 분명히 밝히겠지만 지금은 그 대답을 유보하겠다}고 말했지만 신민당이 정권을 잡는 것을 [역사의 순리]로 단정했다.
최규하대통령이 대통령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을 [숙명]으로 인식한 반면 김총재는 공화당 정권의 붕괴를 역사의 필연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권 밖의 흐름은 [순리]가 아닌 소용돌이가 계속되고 있었다.
신당설 나돌기 시작
김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 시국에 대한 정치 구상을 밝히고 있던 바로 그 시간 수도경비사 계엄보통군법회의는 79년 11월24일 명동 YWCA에서 있었던 [통일주체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선출저지를 위한 국민대회]의 관련 피고인 17명에게 최하 징역1년에서 4년까지 실형을 선고하고 있었다. 이른바 [명동위장결혼불법집회사건]의 공판에서 재판장 박웅 대령은 판결 이유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일치단결이 요망되고 정치 경제발전을 염원하고 있는 이때 피고인들은 오직 자기만이 할 수 있다는 시대착오적인 아집으로 사회 혼란을 획책했다}고 실형 선고 이유를 밝혔다.
이날 실형 선고를 받았던 사람들은 유신체제에 항거하다 대부분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되었던 지식인들이었다. 특히 전대통령 윤보선씨(징역2년)와 함석헌옹(징역1년)은 구속은 되지 않았으나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에 야당가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윤보선 함석헌씨는 관할관의 형 확인과정에서 형집행면제처분을 받았지만 다른 피고인들은 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구속 피고인들의 명단과 형량은 다음과 같다.
전공화당국회의원 양순직 징역2년, 박종태 2년, 백범사상연구 소장 백기완 2년, 밀물출판사대표 최민화 1년, 민청회장 이우회 4년, 한국기독청년협의의장 김정택 3년, 민청부의장 최열 3년, 민청상임위부의장 양관수 3년, 민청운영위원 홍성엽 3년, 기독청년협의총무 이상익 2년, 기청감사 권진관 2년, 전동아일보기자 임체정 2년, 민청운영위원 강구철 1년, 한국기독교학생 총연맹감사 박종열 2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 김병걸 2년(불구속).
신민당의 김영삼총재와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당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지방 나들이를 하고 있을 무렵, 정가에서는 신당설이 끈질기게 나돌았다. 신당설은 공화당쪽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김종필 총재는 79년 말경 기자들과 환담하는 자리에서 {소속 의원들이 신당이 창당된다는 얘기가 있어 신당에 가겠다는 사람은 말리지 않겠다}고 밝혀 무엇인가 [감]을 잡고 있음을 시사했다. 신당의 움직임을 [당의 파괴]와 [역사파괴]라는 용어까지 구사한 그는 {나도 공화당을 창당해 보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느냐}며 낙관론을 펴기도 했다.
신당설은 79년 연말부터 통일주체대의원들의 조직을 활용하여 유정회의원들과 전직장관 등 구여권을 중심으로 태동하고 있다는 소문과 [12·12사태]이후의 실력자가 구상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었다. 갖가지 루머 속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신당설은 10·26이후 집권당이었던 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과 대결하기에는 문제가 많기 때문에 강력한 여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화당의 체질개선이 불가피하다는 데 근거를 둔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에 親김종필계에서는 反김라인에서 공화당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라고 비난했다. 특히 주목을 끌었던 것은 정계의 재편성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몇몇 재벌들이 신당에 관여하고 있다는 루머로서 신당설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었다. 루머의 집산소이며 생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증권가에서는 신다으이 발기인 이름까지 나돌 정도로 관심은 신당 쪽으로 집중되었다.
야당가에서도 신당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영삼 총재가 신민당을 자기위주로 끌어갈 경우 반대세력들이 떨어져 나오지 않겠느냐는 추측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씨가 복권이 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그렇게 구체적인 소문은 나돌지 않았다. 신민당 의원들의 대부분은 구여권에서 자구책으로 군소정당을 만들 가능성을 점치고 있을 뿐 신당태동설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는 않는 듯했다.
계엄사, 정치과열현상 우려
공화당과 신민당은 이러한 신당 태동설에도 불구하고 새 헌법을 만드는 데 박차를 가해 80년 2월9일 동시에 새 헌법의 시안을 마무리 하면서 정치일정을 앞당기기 시작했다. 공화당과 신민당이 각각 마련한 개헌안의 골간은 대통령 중심제로서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대통령 임기는 4년에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도록 했으며 국회의원의 임기도 4년으로 정했다. 공화당과 신민당의 개헌시안은 우연히도 거의 일치했다.
공화·신민 양당이 새 헌법의 시안을 확정한 그날 계엄사령부는 정치 발전이 안보태세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서는 결코 안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한상이군경회 대한전몰군경회 전몰군경미망인회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등 4개단체에서 보내온 [현시국에 관한 서면건의]에 대한 회답에서 이같이 밝힌 계엄사령부는 {어떤 개인 또는 집단에서 정치과열현상을 일으켜 현존 사회질서를 어기고 무분별하게 행동한다면 이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계엄사는 또 최근 북괴의 평화공세에 언급하면서 {남북간의 대화는 5천만 겨레가 모두 바라는 것이지만 북괴가 적화전략의 일환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국민 모두가 이를 경계하고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과열현상에 대한 계엄사령부의 [우려]와는 달리 공화당 김종필총재와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당원단합대회와 시·도지부 결성대회를 통해 집권을 위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두 정당은 도청 소재지를 순회하며 대규모집회를 가졌다. 김종필총재와 김영삼총재의 칼러사진 피켓이 등장하고 이들을 따르는 자동차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공화당 당원들은 [하늘에는 박정희 땅에는 김종필]이라고 쓴 피켓도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김영삼신민당총재는 80년 2월12일 대전 시민회관에서 열린 충남도지부 결성대회에서 {앞으로 신민당이 집권하면 나는 모든 고급공무원들의 재산공개를 법률로 정하여 국민 앞에 부끄럽지 않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그는 신민당의 집권은 과거와 같이 욕된 향락과 행복을 지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민중의 편에 서서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데 있다고 역설했다. 김총재는 공화당을 겨냥하여 {민주역사의 흐름은 20년 집권의 타성에 젖은 집단에 의해 그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최규하대통령과 신현확국무총리, 공화당 김종필 총재, 민관식 국회의장직무대리 김창근 정책심의의장, 양찬우 사무총장과 유정회 최영식의장, 한태연정책위의장 등은 80년 2월15일 저녁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정국 전반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다. 최대통령 초청으로 만찬을 겸한 이날의 회동은 유신체제를 지속시켜왔던 주역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 자리에서 최대통령은 국회와 정부의 개헌 협의에 대해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정부가 국회안을 그대로 국민투표에 회부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최대통령의 이러한 입장은 국회가 만든 개헌안을 국민투표로 확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국민투표로 확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김영삼 총재의 견해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날의 모임에 대해 신민당은 {중립을 지켜야 할 선거관리정부인 최규하 정부가 구 여당인 공화, 유정회 간부들과 만나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는 것은 과도정부 본래의 사명에 비추어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최대통령, 양 김씨 면담
이날 모임의 성격을 놓고 정가와 시중에서 또 다른 소문이 나돌자 최대통령은 이틀 후인 2월18일 저녁 김영삼 신민당 총재도 초청하여 6시15분부터 11시10분까지 무려 4시간55분 동안 시국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다.
최대통령과 김총재가 나눈 대화내용을 갖추려 보면-.
▲최대통령 :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방문해 감사합니다.
▲김총재 : 어려운 시기에 중임을 맡아 고생이 많습니다.
▲최대통령 : 어려운 때이니만큼 김총재께서 많이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김총재 : 정부가 밝힌 정치일정이 구체성이 없고 너무 길다는 생각입니다. 헌법을 개정하는 데 1년씩이나 걸리고 유럽이나 아프리카까지 가서 헌법을 연구한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과도정부의 정치일정이 길기 때문에 정치척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민심이나 공무원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습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일정을 단축하기 바랍니다.
▲최대통령 : 오는 22일 국정자문위원회의 첫 회의를 열어 원로들의 의견을 듣고 3월중으로 정부 개헌안의 골격을 마련해서 4월중에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구성해서 정부안을 내놓을 계획입니다. 국회의 개헌안도 충분히 참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총재 : 과도정부라는 것은 원래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4·19이후 과도정부도 중립을 지켜 민주당에게 정부를 이양하지 않았습니까. 최근 당정협의회 같은 회의를 정부가 주서하고 있는 것은 특정 정당에 치우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최대통령 : 현정부는 특정 정당에 치우치지 않고 불편부당하게 순리에 따라 상식적으로 모든 문제를 처리해 나갈 것입니다. 신민당도 과거처럼 공격 일변도의 자세에서 떠나 시시비비를 따져 모든 일에 임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몇 사람이 경쟁을 하든 관심이 없고 경쟁하는데 출발선을 긋는 것만이 나으 임무로 생각하여 절대 중립을 지킬 것입니다.
▲김총재 : 긴급조치 위반자들이 지금까지 복권되지 않고 있는 납득하기 어려우며 사회 불안의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대폭적으로 복권을 시키고 구속중인 양심수들은 전원 석방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최대통령 : 지금 관계 당국에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조만간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총재 : 김옥길문교부장관이 발표한 자율화조치는 미흡한 데가 많습니다. 학원은 외부세력개입이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해야 합니다.
▲최대통령 : 보완하도록 검토해 보겠습니다.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와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차례로 만난 최규하 대통령은 2월22일 소집된 국정자문위원회에서 다시 정치과열이 우려를 나타냈다.
4·19이후 과도정부 당시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던 허정씨를 비롯 전 내각수반과 전 공화당 신민당 대표 등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최대통령은 인사말을 통해 당시의 국내 상황을 격동과 혼미의 연속이라고 진단하면서 {10·26사태 후 우리 사회에서 제반 질서개편이 진전됨에 따라 일부의 정치 과열현사이 나타나고 있음으로써 자칫하면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파괴할 우려도 없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정가와 여론의 관심의 핵이었던 김대중씨의 복권문제에 언급하면서 [곧 복권될 것]임을 시사했다. 이날 김종필 공화당 총재도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씨의 조속한 복권을 요구함으로써 김대중씨를 비롯한 긴급조치 위반인사들의 복권이 임박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김대중씨의 복권 임박설이 신민당 측에 전달되자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민당내의 김씨 측근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당사자인 김대중씨는 김영삼씨와의 관계를 [라이벌관계가 아닌 협력관계]라고 역설했지만 그 동안 신민당에서 [찬밥]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김대중씨계는 당권 장악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의 얘기로는 신민당이 김대중씨에게 부채를 지고 있다는 논리였다.
3김씨 회동과 정국추이
이 무렵 80년 2월25일 밤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씨 등 이른바 [3김]씨가 회동한 것은 정가는 물론 국민적 관심의 표적이었다. 서울 계동 인촌기념관에서 베풀어진 만찬에 참석한 3김씨는 {우리나라의 참되고 민주적인 역사를 만들기 위해 다 같이 노력하자}면서 건배했다. 72년 10월 유신 이후 김대중씨와 8년만에 대면한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지나간 일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생각하자}고 사과했다. 이 날 만찬에 참석한 글라이스턴 주한미대사는 김종필총재와 김대중씨의 담소에 귀를 기울였다.
이 당시 신문은 김대중씨를 [재야인사]라고만 보도했을 뿐 김씨의 거취에 대한 보도도 철저하게 통제를 받았다. [3김]씨의 회동이 보도된 이후 최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재향군인회 임원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이미 밝힌 정치일정은 꼭 지키겠다는 뜻을 다시 밝히고 {우리는 역사의 긴 안목에서 또 국가적 차원에서 정치발전문제를 생각해야 하며 졸속에 흐르는 나머지 과오를 저질러 후회를 남기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이 자리에 참석한 신현확 국무총리는 {일부에서는 시대가 바뀌었으니 모든 것이 일거에 바뀌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모든 국민이 바라고 있는 것은 안정이지 급격한 변화는 아니다}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최규하대통령은 80년 2월29일 오전 10시를 기해 윤보선 전대통령의 김대중 전 신민당대통령 후보, 함석헌 옹, 지학순 주교를 포함한 긴급조치위반자 등 6백87명을 복권시켰다. 최대통령은 이날 오전 임시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복권조치를 단행했다. 복권대상에서 반공법 등 공안사범 대상자는 제외되었으나 백낙청 전 서울대 교수와 이영희 전 한양대교수, 임영천 전 조선대 강사 등 3명과 8명의 학생은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자이지만 형량이 가볍고 교수와 학생이라는 신분을 참작하여 특별사면과 함께 특별복권시켰다. 복권자들의 신분은 학생이 3백73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정치인 22명, 종교인 42명, 교직자 24명, 언론인 9명, 기타 2백17명이었다.
서기원 청와대 대변인은 {이번 복권조치는 사회안정의 바탕위에서 착실한 민주발전을 추진하고자하는 최대통령의 진일보한 조처}라고 복권배경을 설명했다.
최대통령의 복권조치로 다시 정치현상에 모습을 나타낸 김대중씨는 3월1일 {정국의 불필요한 혼란을 막고 민주정부의 원활한 실현을 성취하고자 하는 국민적 여망과 함께 최규하 대통령을 언제든지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히면서 회담이 이루어지면 중립적인 과도정부의 사명완수와 국민합의에 바탕을 둔 민주제도의 확립, 안보와 민생의 안정 등 국정전반에 걸쳐 진지하고 솔직한 의견교환을 제의했다. 그 후 김대중씨는 3월11일 내용증명우편을 통해 최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최대통령의 복권조치로 [3김]씨의 정치활동이 본격화하고 있을 때 한미연합 사령관 [위컴]대장은 3월7일 동부전선의 한국군 부대를 시찰하면서 수행한 기자들에게 {한국 당국으로부터 한국군은 매우 안정돼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히면서 {나 자신이 보기에도 그런 말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10·26이나 12·12사태 등을 통해서도 미국은 기본적으로 한국이 외부침략을 받을 경우 신속히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위컴]사령관이 한국군부는 정치에서 초연하며 군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위컴]대장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정가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가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한 데 대해서 의구심을 나타내는 정치인도 있었다.
신 총리회견 물의일으켜
이 무렵 신현확 국무총리의 일본[산께이신문]과의 회견 내용은 신민당과 재야세력에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신총리는 회견에서 한국 정부는 앞으로 민주화를 추진할 것이나 유신체제를 전면 부정하는 급속한 민주화는 사회혼란을 가져오므로 단계적으로 신축성있게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유신체제가 국방력을 충실히하고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고 밝힌 신총리는 {민주화는 국방력의 충실과 경제성장의 관계에 준하여 박대통령의 서거라는 충격적인 일이 있든 없든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한편 신민당은 신총리의 발언이 안보경제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민주화발전은 2차적인 문제로 보고있다고 주장하면서 임시국회 소집 등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벌인다는 방침을 확정함으로써 긴장이 감돌았다. 김영삼 총재는 신총리의 발언과 관련, {그러한 언동은 과도정부가 하는 처사에 대한 국민의 의혹을 가중시키는 불필요한 언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공화당 김종필 총재는 {정부의 책임자로서 안보를 강조한 것은 달리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상반된 견해를 표명하면서 {정부와 공화당은 시국관이 꼭 같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새 시대를 맞아 밀고 가는 기본방향이나 단계적인 방법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해 정부와 공화당의 동질성을 역설했다.
신총리의 회견으로 정국이 경색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최대통령은 3월14일 중앙청회의실에서 열린 정부 헌법개정심의위원회 개회식에서 새 공화국의 헌법은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가미한 절충형태가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시사했다. 특히 최대통령은 {70년대 초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의 부작용과 후유증이 우리 사회에서 최근까지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해 주목을 끌었다. 최대통령의 이같은 견해는 곧 대통령직선제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어 [안개정국]의 전망을 더욱 흐려놓았다.
최대통령의 헌법개정의 견해와 신총리의 민주화에 대한 소신은 곧 바로 정가로 번져 신민당은 정무위원 소속의원 지구당위원장과 중앙당 당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민주화촉진궐기대회]를 열어 [아직도 유신의 몽상 속에서 역사와 국민에 역행하는 어떠한 정치적 음모도 철저히 분쇄할 것]을 결의했다.
김영삼 총재는 이날 궐기대회에서 {안보를 위해 유신의 연장이지 국민이 바라는 정치발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정부가 자숙하고 반성하지 않을 때에는 신민당은 중대한 결단을 내리겠다}고 경고했다.
김대중씨도 {최규하정권은 강권정치를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신민당은 김총재를 중ㅇ심으로 일사불란하게 대정부투쟁을 전개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최규하대통령의 개헌구상과 신현확총리의 안보우선발언으로 공화당은 [우려]를, 신민당은 [규탄]으로 맞섰지만 이들 두 정당은 자체 내에서 일어난 잡음으로 진통을 겪어 대정부 공세에 차질을 가져왔다.
공화당은 정풍운동과 이후락씨의 김종필총재의 퇴진 요구와 관련한 이른바 [이후락발언]으로 연일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신민당은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대립이 물리적 충돌까지 번져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최대통령 심야담화의 배경
야당의 규탄에 입을 다물고 있던 최규하대통령은 3월26일 제주시에서 서기원청대와대변인을 통해 담화를 발표했다. 서대변인이 발표한 담화는 최대통령이 정치 발전을 위한 국정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일부 정치인이 이러한 정부의 노력에 협조는 못할지언정 근거없는 비난을 일삼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서대변인의 발표는 이례적으로 이날 밤 11시30분에 발표하여 정부의 입장이 강경하게 대처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되었다. 서대변인의 이같은 담화는 이날 아침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강릉에서 구체적인 정치일벙의 제시를 정부에 요구코서 {최근의 정치적 혼미는 구체제 옹호파의 집권 미련에 그 원인이 있다}고 비난한데 대한 정부측의 공식적인 반응인 것으로 전해졌지만, 정부와 신민당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킨 담화였다.
청와대 대변인의 담화가 발표되기 전 김대중씨는 이날 저녁 7시 서울 YWCA수요강좌에 참석하여 1만여명의 관중들에게 [민족혼]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정치활동 재개 후 처음으로 군중 집회에 나타난 김씨는 {나는 대통령 후보 운운하지만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과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전제하고 {나는 안보와 통일이 이룩되고 국민들이 잘살게 된다면 중앙청 사환이 되어도 한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규하대통령이 허정씨처럼 과도정부로서 임무에 충실한다면 그들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덧붙혔다.
정치권의 기류와는 달리 학원의 자율화 물결은 4월 들어 더욱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유신체제에 영합했던 교수들은 어용교수의 낙인이 찍혔고 불투명한 정국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근로자들의 움직임도 [생존권의 보장]을 요구하고 나섰다. 유신체제의 철폐를 주장하며 끈질기게 항쟁해왔던 대학생들은 10·26사태를 [민주화투쟁]의 결과로 파악했다.
학원가의 움직에 대해 최규하대통령은 4월14일 [최근의 내외정세에 관한 대통령 담화]를 발표하면서 {최근 우리 사회의 일부에서는 시국의 중대성을 깊이 생각함이 없이 국민적 단합을 저해하는 언동을 하는가 하면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한 정부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원에서 대화
- 이전글[월간지 관련기사] 80년대의 민중문화예술운동. 윤재걸(신동아, 1984. 10) 07.05.30
- 다음글[월간지 관련기사] 광주, 그 비극의 10일간 07.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