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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79~'80 미국과 신군부/미국, 신군부에 끌려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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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0 미국과 신군부/미국, 신군부에 끌려 다녔다

12 · 12 직후 5 ·18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신군부의 일거수 일투족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조언'에는 늘 "미국의 국익"이라는 잣대가 한계를 긋고 있었다.                         

        박성원(신동아)

  12· 12 와 5· 18 당시 신군부가 어떻게 쿠데타를 모의, 실행하고 정권을 찬탈해 나갔는가 하는 전 과정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발생 16년만에 열린 재판을 통해서다.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로 기록하기는 이르지만 판결만 남았을 뿐 대체적인 정황들은 거의 다 밝혀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설명돼 야할 핵심적 사안이면서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사각지대가 남아 있다. 그것은 79년말에서 80년 전반기에 미국이 취한 태도와 역할이다,
  이것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논의에서 비켜나 있다. 당시 미국의 역할규명이 중요한 이유는, 쿠데타를 하려면 군을 동원해야 하는데 당시 군부대의 이동이나 사용에 대해 미국이 제도적 현실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 미군사령관이 맡고 있던 군작전통제권을 미국측이 어떻게 행사했느냐 하는 문제로 압축할 수 있다.
  군작전통제권은 한국전쟁때 유엔군사령관에게 이관된 뒤 78년 한미연합사 창설 이후 연합사령관이 양국 공동으로 구성된 군사위원회(MCM)의 전략 지시와 지침에 따르는 형식으로 행사하다가 94년 말에 와서야 평시작전권에 한해-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한국군에 환원됐다.
  따라서 당시 상황과 관련, 재야와 야당 측이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의문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사실상 갖고 있던 미국이 12 · 12와 5 · 18이라는 쿠데타적 상황에 대해 묵인 또는 방조했거나 심지어 은근히 이를 지원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표방하는 미국이 안보를 대가로 반민주적인 군부편에 섬으로써 한국의 정치발전을 후퇴시켰다는 비난이다. 반면 한국정부의 공식견해나 미국정부의 기본입장은 당시 신군부의 병력사용은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해 사전에 협의하거나 직접 관여한 바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 「저널 오브 커머스」지의 팀셔록 기자가 당시 미 국무부와 주한 미대사관 사이에 오간 비밀전문들을 발굴, 보도함으로써 미국의 역할에 대한 규명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 전문들은 당시 상황과 관련,다음과 같은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전해주고 있다.
  12· 12직후 미국은 12 · 12사태를 이전 상태로 환원시킬 뜻이 없음을 전달하고 신군부에 대한 비판 대신 안보협력을 모색했다는 사실,
- 군일부에서 12 12에 반대하는 역쿠데타 움직임이 있었으나 미국은 성사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무시했다는 사실,
  신현확 당시 국무총리는 군부실력자를 내세우는 재계 관계 군부 연합의 추진을 염두에 두고 그 윤곽이 나을 때까지 정치적 난국을 방임하는 전략이었다는 사실,
  미국은 80년 5월7일 공수부대가 학생시위에 대처하기 위해 이동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미국은 80년 5월9일 전두환장군 및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과의 접촉을 앞두고 군투입계획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정했다는 사실 ,
  미국은 80년 5월27일 광주최종진압 작전을 위한 한국군 20사단의 투입 등에 대해 5월22일 백악관참모회의에서 이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정리했다는 사실 등이 그것이다.
  이같은 내용들은 미국이 89년 한국의「국회 광주특별위원회」에 보내온 국무부의 답변성명서와 적지 않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당시 성명서를 요약하면 이렇다.
『 미국은 10 · 26에서 5 · 17이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사전에 알지 못했다. 이를 알고 난 뒤 12 · 12 병력동원 및 5 17계엄확대 등에 대해 전두환장군에게 항의하고 5 · 27광주 진입때도 비군사적 방법을 시도하도록 조언했다. 따라서 미국은 책임이 없다』

비밀전문 한국측 검증 필요

  89년 성명서와 비밀전문 사이의 미묘한 모순과 차이점들은 미국이 12 · 12를 동조 · 지지하고 5 · 17 및 5 · 18 등 일련의 사태에 대해 사전에 협의,승인하거나 묵인했지 않느냐는 해석을 낳고 있다. 언론매체들이 당시 비밀전문 내용을 앞다투어 소개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관심에서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도는 이들 미국의
자료를 단순소개하는데 그치고 있어 자료의 가치나 정확성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신동아」는 이 자료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데 일차적 관심을 두고 당시 대미관계 핵심관련자들의 증언을 청취했다.
  미 국무부 비밀전문과 그 동안의 논쟁을 통해 도출된 다음과 같은 쟁점들을 주된 검증대상으로 했다.
  첫째, 10 · 26이후 20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한국군에 이양돼 있었는가.
  둘째, 12 · 12사건과 관련해 ▲미국측이 사전에 알고 있었는가 ▲9사단 병력이동을 방치한 것은 미국의 책임인가.
  셋째, 5 · 17 전국 계엄확대 조치와 관련해 ▲ 20사단 포병단과 60연대의 작전 통제권을 5월16일 한국군에 이양한 경위 ▲전국 비상계엄 확대조치의 사전 묵인 내지 협조 여부.
  넷째,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과 관련해 ▲광주지역에 공수부대와 20사단 병력이 투입되는데 있어서의.미국의 역할 ▲5 · 27최종진압작전시 미국과의 사전협의 여부,
  「신동아」는 79∼80년 미국의 역할에 관한 이같은 의문점들에 대해 비밀전문과 한국측 인사들의 증언을 묶어 검토함으로써 당시 한미관계의 진실에 대해 한걸음 더 접근해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신동아」가 이를 위해 접촉한 주요인사는 다음과 같다.
  ▲김윤호 전 합참의장:12 · 12 당시 광주보병학교장으로 있다가 신군부의 대미 창구역으로 긴급 차출돼 서울에 을라온 직후 1군단장에 오르고 합참의장을 거쳐 83년 대장으로 예편.
  ▲유병현 전 합참의장:78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거쳐 7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81년 대장으로 예편. 대미 통으로 광주사태 당시 주한 미군사령관(한미연합사령관)에 대한 한국군의 공식 접촉채널이었으며 예편 뒤에는 주미대사를 지내기도했다.
  ▲주영복 전 국방장관:79년 12 12직후부터 82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냄 .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12 · 12 직후 육참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돼 5.18등을 치른 뒤 81년 예편.
  ▲박동진 전 외무장관=75∼80년에 걸쳐 외무부 장관을 지내고 11 · 12대 의원과 85∼86년 통일원 장관, 88년 주미대사를 역임 .
  이중에서 김윤호 전 합참의장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는 1930년 서울생으로 육사10기다. 그는 자신의 신군부 가담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광주보병학교장으로 있던 12월12일 자정을 넘어 육사동기생인 황영시 1군단장을 통해 서울에 올라와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측으로부터 대미관계 창구를 개설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66년부터 69년까지 무관으로 주미공사를 지낸 이래 미국 조야에 폭넓은 친분을 맺은 경력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영어실력 등이 필요했던 거죠. 정상적인 군지휘체제가 붕괴된 시점에서 누군가 비상라인을 통해서라도 한미간 협조채널을 구축하는 것이 대북 안보의 핵심이라는 생각에서 이에 응했습니다』
  김 전 합참의장은 특히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나 위컴 주한 미군사령관과는  10 · 26훨씬 이전부터 두터운 교분을 맺어온터라 신군부의 대변인격으로 이들과 접촉,신군부측 입장을 이해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레이건 정권이 수립되고 신군부와 미국간 안보동맹관계가 순탄하게 돌아가면서 그는 도리어 신군부측의 견제를 받고 신군부의 정치개입에 대한 비판 등으로 미움을 사 합참의장을 끝으로 83년 예편한다.
  그는 예편직후 미국측으로부터 경호를 받았고 지금도 위컴이나 글라이스틴은 물론 미국의 한국통들과 스스럼없이 만나 옛얘기를 주고 받을 정도로 미국과 가깝다.
  그는 이번 「신동아」 기획의 취지를 듣고는 『한미안보 관계상 아직도 공개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역사를 올바로 정리한다는 뜻에서 도울 수 있는 한 최대한 돕겠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가장 적극적으로 증언에 응해 주었다. 반면에 일부 인사들은 구체적 언급을 회피하거나 우회적 답변에 그치는 등 소극적 패도를 보여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정승화총장 설득 주효

  먼저 12 · 12발생 직후 신군부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살펴보자 미국은 신군부가 한미연합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을 벗어나 전방부대 등을 임의로 동원한 것을 불쾌히 여겼지만,신군부에 대한 미국의 공식태도는 퍽 신중한 것이었음을 당시 전문들은 보여주고 있다.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가 13일자로 밴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은 『신군부를 너무 나쁘게 취급해 이들과 멀어져서는 안된다』고 적고 있다. 또 14일자 글라이스틴의 전문은 『12 12는 기존 정부형태가 그대로 유지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고전적 의미의 쿠데타는 아니다. 모든 사실을 명백하게 파악할 때까지 성격규정을 피하는 것이 국익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정권이 일을 그르치기 전까지 우리는 공개적 비판이나 응징행위를 피해야 한다. 우리는 큰 영향력을 갖고 일하게 될 군과 함께 일해야 한다』고 돼있다
  글라이스틴이 이같은 인식을 갖게 된 데는 김윤호 전 합참의장(당시 광주보병학교장)의 설득이 주효했다. 사태발생 다음날인 12월13일 신군부의 대미접촉 임무를 띠고 글라이스틴과 만났던 김 전의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군지휘권상에 공백이 생긴 점에 대해서는 솔직히 미국측에 사과했다. 다만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은 대통령도 결재한 국내문제이니 양해해 달라고 강조했다.또한 사태는 군내부 문제에 국한된 것이라는 점과 군개혁이 차제에 이루어질 것이며 군은 앞으로 안보에 이상이 없도록 하되 국내정치에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글라이스틴은 정총장 연행이 한국내부 문제라는 우리측 인식에 등의, 이후 이 문제에 일절 언급하지 않았으며 시급한 것은 연합지휘체제 확립과 대북 안보체제 강화라는 점을 지적했다. 다만 글라이스틴은 이날 우리가 전두환사령관과의 면담을 요구한 데 대해서는 즉시 오케이를 하지 않다가 15일에야 전사령관을 만났다. 서울로 나온 부대들이 철수를 개시하고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이날쯤에는 그가 사태파악을 마친 것으로 생각된다』

위컴사령관 사표 제출

  위컴 사령관은 글라디스틴에 비해 흥분의 강도가 높았다고 김 전 합참의장은 술회했다. 『위컴은 9사단 등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 있던 부대들이 자기 허가없이 이동된 데 대한 분노와 도의적 책임을 담아 12월14일 본국으로 건너가 마이어 육참총장 등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미 국방성과 국무성 등에서는 위컴의 직접적인 책임이 아니며 향후 한국안보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는 이유로 이틀만에 이를 반려했다』
  위컴이 지휘책임을 느껴 사표를 냈었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반려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대한정책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당시 신 군부로서 시급한 일이 미국으로부터의 신임을 획득하는 일이었다면, 글라이스틴이나 위컴으로서는 안보체계의 조속한 확립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래서 한미관계의 획기적 개선 등을 약속하는 신군부를 완전히 외면키 어려웠던 것이다.

역쿠데타 가능성 한때 고려

  이같은 입장에 서있던 미국은 신군부에 대항하는 군 일부의 역쿠데타 움직임에 대해 별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역 쿠데타에 대한 언급은 『상황이 나빠질 경우 군내 반대그룹의 역쿠데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12월13일자 글라이스틴 전문에서 나타나고 있다.
  서울에 주재했던 국방정보국(DIA) 요원들이 80년 1월9일 워싱턴에 보낸 전문에도 『해군과 공군의 일부 고위장교들은 만약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최규하 정부에 반대해 부당한 압력을 계속 행사한다면 해병대 병력을 동원해서 전사령관을 포함한 신군부 인사들을 축출하거나 체포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해군과 공군 일부 장교들이 전두환사령관은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보안사 정보에 전사령관이 격분했다』고 돼 있다.
  김정호 당시 해군 제2참모차장은 이와 관련, 『당시 일부에서는 신군부의 행위에 대해 불평하는 얘기들도 있었다고 들었다』면서 『특히 함대사령부(현 해군작전사령부)쪽에서 신군부에 찬성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이종호 함대사령관이 돌연 예편, 원호처장으로 발령 났다는 말도 돌았다』고 말했다.
  김 전차장은 『하지만 뒤에 이종호 전사령관에게 들어보니 자기는 신군부에 반대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알려져 오해를 받았다고 하더라』면서 『신군부에 의해 푸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일부 인사들의 불만과 불평표시는 있을 수 있으나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한 해 · 공군 고위층에서 전두환사령관을 물러나게 하려는 논의가 있었다는 미 국방정보국 전문내용에 대해 『수뇌부에서 그런 논의가 있었다는 것은 들은 바 없다』고 적극 부인했다.
  이종호 전 함대사령관은 『해 ·공군에서 신군부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있었고 나의 예편을 두고 이러저러한 얘기는 있었다』고 말한 뒤 『그러나 행동으로 나타날 만한 움직임은 없었고 오래 전의 얘기를 되새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김윤호 전 합참의장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에 직면한 해 ·공군과 해병대 등의 하부조직에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할 수는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뒤 그러나 이들의 수뇌부는 사태 즉시 보안사에서 브리핑을 받고, 해 공군 등에 일절 파장이 없을 것임을 믿게 됐다』고 말했다.
  이같은 증언들로 미루어 당시 역쿠데타시도가 실제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미 국방정보국 전문은 보안사 요원들이 각 군의 동향을 일거수 일투족까지 수집 , 전두환사령관에게 보고 하는 과정에서 부풀린 것을 기초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또는 인사문제 등에 불안해 하는 일부 장교들의 분위기를 단편적으로 파악한 첩보 수준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인상이다.
  미국은 신군부의 군권장악이 굳어가는 것과 함께 이같은 역쿠데타 움직임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굳혀 나간다. 주한 미대사관이 80년 3월12일 본국에 보낸 전문은 『대부분 능력있는 새로운 장교들이 주요 지휘관 직책을 차지하면서 역쿠데타의 전망이 줄어들었다. 역 쿠데타를 타진했던 장교들은 휘하에 적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 전의장은 미국이 역쿠데타 가능성에 대해 검토했다면 아마 79년 12월13일에서 12월15일에 이르는 시기에 한때 사태수습의 한 방안으로 검토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처럼 많은 경험을 겪은 나라는 군사쿠데타가 나오면 역 쿠데타가 나오기 마련이라는 점을 고려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주한 미대사관 무관이 한국군 포병장교로부터 역쿠데타 얘기를 들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미국이 가능성의 하나로 예상해보다가 가망성이 없다고 판단하지 않았나 싶다. 역쿠데타가 성공하려면 그 지휘자와 대안이 있어야 한다.
  12월13일 내가 보안사에 들러 상황을 파악해보니 장관이나 참모총장 참모차장 모두 구속되거나 지휘권이 마비된 상황이었다. 대통령조차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누가 나서서 통합된 전력을 발휘 , 역쿠데타를 이끌 수 있겠는가. 글라이스틴 대사가 13일 전문에서 12 12를 성급히 쿠데타로 규정하고 있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주영복 당시 국방부장관은 아예 『역쿠데타니 그런 얘기 자체를 들은 바 없다』고 강조했다.

4大 제재안 검토, 포기

  앞서 미국이 신군부의 지휘권 문란행위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안보체계의 확립이라는 전제아래 12  12에 따른 신군부의 군권장악을 사실상 인정하게 되는 과정을 언급했다. 미국은 이어 전두환 사령관이 4월14일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하는 등 끊임없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을 예의주시하면서도 결국은 신군부의 정치개입 움직임에 대해 공개적인 반대를 표명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김 전의장은 미국이 12 12직후 한때 신군부와 한국정부에 대해 4가지 제재안을 검토했다가 포기했다』고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첫째는 주한미군 철수. 그러나 한미안보상 한국내 혼란을 증가시키고 북한의 공격을 야기, 결국 미국의 한반도 전쟁,부담을 증가시킨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 됐다.
  둘째는 경제제재. 이것도 신군부가 언론을 장악 · 통제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내 반한감정을 고조시키고 미국의 교역량 감소만을 초래하리라는 점이 지적됐다.
  셋째는 군사원조 중단. 그러나 5 · 16직후인 62년만 해도 한해 1억4천만달러의 PL480 취소로 한국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지만 80년도에는 PL480도 없고 군사원조도 그 비중이 미미해진 상황에서 별로 효과가 없다고 판단했다.
  넷째는 한미연례안보회의 취소. 미국정부는 이 방법이야말로 『한국에서의 방위개념에 대한 미국의 대중적 이미지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한국 군부의 신경을 자극할 유용한 수단』(79년 12월28일 밴스 국무장관이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에게 보낸 전문 일부)이라고 판단,채택한다.
  이에따라 80년말 열릴 예정이던 한미연례안보회의 (SCM)는 연기된다. 이들 4가지 제재안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글라이스틴 대사의 79년 12월29일자 전문에서 잘 나타나 있다. 글라이스틴은 이 전문에 『우리는 한국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해서는 안된다. 그 조치는 어떻든 한미연합군의 방위력을 약화시킬 것이다』고 썼다.
  이에 따라 미국은 가장 경미한 제재조치를 취하는데 그쳤으며 신군부를 견제할 만한 다른 가시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전두환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함으로써 정치적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80년 4월14일쯤에 위컴 주한 미군사령관은 『군인이 정치를 하든 말든 그건 한국사람들 문제이지만 하려면 군복을 벗고 해야 한다』고 불만을 피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신군부에 대한 공개적 비판은 끝까지 자제했다고 김 전 의장은 말했다.
  미국은 한편 최규하 과도정부가 당초 기대와 달리 정치일정을 발표하지 않고 질질 끄는 것이 군부의 정치개입 욕구를 확대시키고 학생시위의 동기를 유발하고 있어 매우 불만스러워 했다고 김 전의장은 증언했다. 이와 관련한 글라이스틴 대사의 80년 3월12일자 전문은 다음과 같이 돼있다.
  『신현확 총리가 매우 솔직하게 협의를 요청해왔다. 한국정부는 해결책이 나올때까지 난국을 방임한다는 전략을 추진할 것이라고 신총리는 말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방안은 차기대통령 선거에 군장성을 초당파 후보로 내세우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신민당과 공화당이 제3당의 활동으로 분열되고 김대중씨와 여기에 맞선 재계 관계 군부 연합세력이 대립하는 양상이 되면 이 방안은 보다 수월하게 추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총리는 말했다』
  최규하 전대통령 및 신현확 전총리측은 이에 대해 일절 코멘트를 거부했다. 김 전 의장은 이와 관련, 『아마 신총리 개인의 구상 또는 일부 당파의 움직임이었는지는 몰라도 신 군부쪽에서 누가 구체적으로 신씨를 업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미국을 안보구축과 함께 유신철폐 및 민주화, 그리고 조속한 정치일정 발표를 통한 정치안정이 긴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정치일정을 과감히 발표해버렸다면 군의 정치개입이나 학생시위의 대규모화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규하 정부는 이를 질질 끌고 있고 이것이 지체되면 될수록 혼란이 올 것이라는 점에 글 라이스틴은 여러차례 우려를 표시했다』
  김 전의장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 했다. 미국은 최대통령에게서 국정관리역할 (Care Taker)을 기대했으나 최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모두 자존심만 앞세우고 국가 중요사에 대한 추진력을 상실한 외교관 출신들이었다. 12 · 12이후 미국은 가장 중요시했던 군전력 정상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데에는 만족감을 보였으나 혼미상태를 답보하고 있는 정치정세에는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최대통령쪽 사람들은 위컴이나 글라이스틴 등을 불러서 한미관계 등을 논의하는데 소극적이었다. 글라이스틴은 「정치인들이 합의해서 정치일정을 짜내기라도 했어야 하는데,그렇지 못하고서는 일이 잘못되면 미국이 제 역할을 안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필요한 조언을 하려 하면 내정간섭이라고 하는 통에 골치가 아프다」고 말했다』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불만과는 별개로 미국이 12 12이후 한국 군대의 질서확립과 전력구축에 대해 만족스런 평가를 내리는 데는 5개월 반이 걸렸다고 김 전의장은 말했다.
  『80년 2월초 최대통령과 김영삼 신민당총재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미공동으로 육군 공군 합동훈련이 열렸는데 대성황을 이루었고 군의 안보태세를 대내외에 과시하는 계기가 췄다 80년 3월말 실시된 팀스피리트 훈련때도 위컴사령관 등 미군지휘관들은 한국군대의 단결력과 사기를 높이 평가했다. 이후 5월말쯤부터는 위컴사령관 등은 한국군내 인물이 새로워졌고 활동력있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 투입 사전통보

  한국군에 대해 「군사적 신뢰」를 회복해 가던 미국은 광주시내에 대한 신군부의 공수부대 투입계획을 사전에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이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이는 본 주제의 핵심을 이루는 관심사로 제기 돼왔다
  미 국무부가 이에 관해 지난 89년 국회 광주특위에 보내온 성명서에 따르면 『미국은 특전사부대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광주이동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돼있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비밀문건 가운데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가 5월7일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는 『한국군이 주한미군 지휘관들에게 우발적인 목적으로, 또 만일의 학생데모에 대처하기 위해 공수부대 2개 여단을 서울과 김포지역으로 이동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주한미군지휘관들에게 알려 왔다』고 돼있다.
  5월8일자 국방정보국(DIA)이 국·방부합동참모본부에 보고한 비밀전문도 『모든 특전사 부대가 비상대기중이며 서울외곽에 남아 있던 부대는 7공수 여단뿐으로 이 부대는 아마도 전주와 광주지역 대학생들의 소요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적고 있다. 이들 전문들은-공수부대의 광주투입에 대해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89년 성명에도 불구하고-미국은 적어도 공수부대의 이동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광주투입 가능성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글라이스틴대사가 5월8일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는 또 『우리는 법질서 회복을 위해 필요하다면 한국정부가 군대를 투입해 경찰력을 강화하려는 비상계획을 미국정부가 반대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적혀 있다 크리스토퍼 차관이 다음날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보낸 전문은 이에 대해 『(당신 의견에)동의한다 그러나 법집행이 주의깊게 그리고 제한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위기가 고조될 수 있음을 전씨와 최씨에게 주지시키라』고 돼있다. 5월9일은 글라이스틴이 전두환씨와 만난 날이다. 이 날짜 글라이스틴의 전문은 『전장군과의 회동은 아주 잘 진행됐다. 나는 분위기를 망치거나 그와 논쟁을 하지 않으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말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같은 전문들은 미국이 신군부의 군투입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이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정하고 전씨측과 만났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 당시 미군에 대한한국군의 공식적인 의사전달 채널을 맡고 있던 유병현 전 합참의장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공수부대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밖에 있다 하더라도 연대급 이상이 움직일때는 위치를 통보해주는 것이 상례다. 한국방호계획에 의해 각 부대가 움직이게끔 조치돼 있는데 위치가 달라짐으로 말미암아 수정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래서 사전에 연대급 이동에 관해서는 알려 주었다고 말하는 게 옳다. 12 · 12때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공수부대의 광주투입 계획을 미국측이 사전 통보받았다는 사실이 한국이나 미국측 고위관계자에 의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뜻밖의 중요한 증언에 다시 확인을 요구하자 유 전합참의장은 거듭 5월 그 당시 공수부대의 움직임을 미국은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인 뒤 『알려주었다』고 보다 명확히 했다. 그 과정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자 그는 이 정도면 내가 답변할 것은 다 했다고 본다』고 잘라 말했다.
  김 전의장은 이와 관련, 『통보관계는 직책상 당시 합참의장이던 유병현장군이 당사자라고 말해 유 전의장의 증언에 무게를 실었다. 김 전의장은 다만 『공수부대 이동은 작전통제권 밖의 문제이니 미국이 관심을 갖더라도 간여는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수부대 이동을 통보해주는 것은 정상적 업무는 아니지만 한미간 신뢰와 친선의 문제다. 일방적으로, 적어도 사후통보는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동한다는 사실만 밝혔지 어디 가서 무얼 한다는 것은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공수특전단이 광주시내에 들어가서 그런 행동을 한다고 밝혔다면 미국은 이를 말렸을 것이다. 공수단은 늘 행동을 「훈련」이라고 말한다. 미국은 그야말로 폭동통제를 위한 훈련으로만 알았을 것이다』

군투입 반대 않는 의견

  공수부대의 이동을 미국이 사전에 알았느냐 여부가 애초에 관심을 끈 것은 이 문제가 묵인방조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한국측 인사들의 공통된 증언은 「비록 알았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묵인 · 방조는 아니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명확히 가려보기 위해 살펴볼 문제는 「그렇다면 미국은 이에 대해 어떤 의견을 한국측에 표명했느냐」하는 점이다. 크리스토퍼 미 국무부차관이 5월9일 전씨와 면담을 앞둔 글라이스틴 주한대사에게 보낸 8일자 전문은 『우리는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한국정부의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당신 의견에 동의한다』고 돼있다. 글라이스틴대사는 9일 전씨와 면담직후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 했다.
  『나는 법과 질서유지 필요성을 이해한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군사력을 사용하는 특수계획 마련에 미국이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온건학생들과'일반 시민들에게 과도하게 보이는 대응으로 학생지도자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아울러 강조했다』
  이같은 전문내용에 대해 유 전의장은 『실제 그런 말을 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면서 그 신빙성을 의심했다. 그는 『글라이스틴은 당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았으며 합참의장이나 위컴 주한 미군사령관이 있는데 대사가 한나라의 군사동향에 관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고 이유를 설명 했다.
  김 전의장은 이와 관련,『정보분석가들은 보통 어떤 상황에 대한 선택의 종류를 4∼5가지 세우는데 이건 아마 최악의 경우를 가상한 것 같다』고 말했다. 만약에 대한 가정일 뿐 실제 그런 말이 전달됐을 개연성은 약하다는 얘기다.
  오히려 주영복 당시 국방부장관은 적어도 5월9일 상황에서는 미국이 군투입에 찬동하는 의사를 한국측에 전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구체적 정황을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5월9일 위컴 사령관이 내방을 거쳐 합참의장실에 들렀다. 위컴은 내게 군출동을 하게 되면 사태를 악화시키니 군출동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5월9일 상황에서는 전국적으로 일부 소요가 있었지만 군을 출동시켜야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따라서 나도 위컴사령관의 의견에 찬성을 표시한 뒤 계엄사령부에서도 그런 계획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위컴이 미국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날인 5월13일 위컴과 자신이 회동한 내용에 대해서도 『13일에도 9일과 마찬가지로 군출동이 필요할 만큼 큰 상황변화가 없었고, 위컴은 이날 자기 아들의 대학졸업식에 참석하러 떠나기에 앞서 인사차 들렸을 뿐』이라고 군투입 논의 사실을 부인했다
  결국 공수부대의 광주투입과 관련해 내릴 수 있는 잠정적인 소결론은 미국이 광주 등지의 시위에 공수부대를 포함한 군투입이 계획 ·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 후유증을 우려하면서도 이에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정해 놓았다는 것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전두환사령관 등에게 군투입에 반대하지 않는 입장을 실제 전달했는지는 아직 분명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사단 투입 「승인」과 「통보」

  80년 5월27일 20사단이 광주에 투입되는 대규모진압작전(일명 충정작전)을 앞두고 군투입에 대한 미국의 사전승인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5월22일 백악관참모회의 내용이 최근 공개됨에 따라 미국이 당시 어디까지 간여한 것이냐 하는 논란이 재연될 조짐이다.
  이 문제와 관련, 유전합참의장은 미국은 한번도 승인( approve)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미국은 OK, 즉 동의를 표시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승인」과 「동의」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쉽게는 개입의 정도에서 승인은 적극적이라고 한다면 동의는 소극적인것이라고 구분해볼 수 있다.
  이날 백악관회의록에 따르면 사회를 본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장관은 미국은 자제를 촉구했으나 필요하다면 병력사용을 배제하지는 않았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이 말만 갖고는 승인인지 동의인지 분간키 어렵다.
  존 위컴 당시 주한 미군사령관은 최근 이와 관련, 『당시 한국군 20사단의 투입을 승인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한국 당국의 합법적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논평한 것으로 현지언론들이 전했다.
위컴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등 한국군 고위관계자들이 연합사를 방문, 폭동통제를 위한 훈련목적이라면서 20사단의 이동을 승인토록 요청해와 대포 등 중무기는 북한 쪽으로 그대로 놓아둔다는 조건 아래 승인했다』고 말했다.
  이같은 언급으로 인해 당시 미국이 20사단 이동을 승인했다는 얘기가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한 유 전의장의 설명은 다르다
  『우리는 주권국가다. 지금도 그렇지만,우리 통수권체계에 들어와 있는 군대를 움직이는데 일일이 남의 나라 허락을 받고 하지 않는다. 20사단은 10 26사태가 일어난 이후 계엄업무 지원을 위해 한미연합사와 합의를 거쳐 작전통제권이 우리  계엄사에 이양돼 있었다. 다만 위컴은 「이동때는 알려달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1개 연대와 양평에 있던 2개 연대의 이동(5월22일)에 대해 내가 위컴사령관에게 통보해준 것 뿐이다』
  말하자면 단지 협조와 신뢰 차원에서「통보」해줬을 뿐이지 무슨 승인을 받고 할 사안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미국이 당시 20사단 투입에 적극적 역할을 했다는 재야나 야당측의 주장을 부인하는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도 『20사단의 광주투입에 대한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있고 미국에는 통고만 해주었다』고 말했다. 이 전사령관은 『당시 군부대의 이동은 모두 우리가 주도적으로 했고 미국측에는 실무자가 협조차원에서 이리 저리 통보해주곤 했다. 미국측도 그 범위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5 .18이후 광주에서의 인명피해에 대해 미국정부가 유감을 표시하는 담화문 전단을 공중살포하고 방송해 주도록 한국군에 요청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아 의아스러워했다는 미국 관계자들의 훗날 주장에 대해서도 『살포나 방송도 우리측 권한이라고 말했다. 김 전의장은 계엄사에서 전단살포를 막았다』고 말했다. 

한국군에 대한 지원 노력

이상과 같은 증언들을 들으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10 26이후 20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한국 계엄사에 이양돼 있었다면 80년 5월에 와서 그 이동을 미국쪽에 「통고」만 해주면 그만일텐데「승인을 요청했다」는 위컴의 말은 무슨 소리인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미국 정부의 89년 성명서에 나타난 20사단 작전통제권 변천을 살펴봐야 한다. 유 전의장의 증언대로 10 · 26직후인 79년 10월27일 20사단은 포병대와 3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이 모두 한국측에 넘어왔다 이 가운데 포병대와 60연대는 각각 10월30일과 11월28일 그 임무를 끝내고 다시 연합사로 작전통제권이 환원됐다. 나머지 61 · 62연대 작전통제권의 환원기록은 없다.
  때문에 80년 5월 현재 한국측에 작전통제권이 넘어와 있던 부대는 정확히 말하자면 61 · 62연대뿐이고 이들 부대의 이동에 관한 한 한국측은 미국측에 통보만 해주고 미국은 이를 동의 (agree)할뿐 승인(approve)권을 행사할 대상은 아니다 한국측 관계자들이 주로 강조하는「통보 · 동의」는 여기에 적용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정식 이양요청을 필요로 하는 포병대와 60연대의 작전통제권이다. 이에 관해 미 국무부의 89년 「광주백서」는 『한국군당국은 5월16일 연합사 미측 관계관들에게 한국군 20사단 포병대와 제60연대를 연합사 작전통제권으로부터 철수시키겠다고 통보해 왔음. 연합사는 이 작전통제권 회수통고를 접수했음을 인정했음』
이라고 기록돼 있다. 즉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 넘겼다는 얘기다. 이들 부대 가운데 60연대는 5월16일 작전권을 넘겨 받은 목적대로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해」 일단 양평에서 서울로 이동했다가 5월22일 광주에 투입된다. 10 · 26직후부터 작전권이 한국군에 넘어와 있던 61  62연대는 이보다 하루 먼저 투입됐다.
  결국 60연대도 61 · 62연대와 마찬가지로 광주로 이동할때는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범위안에 들어와 있었으며 따라서 이들 부대의 광주투입은 미국의 승인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위컴의 최근 발언은 광주 유혈진압이 있기 전인 5월16일의 상황을 놓고 포병대와 60연대의 작전통제권 이양을 승인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20사단의 광주투입에 대해 승인하거나 거부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 해도 남는 문제는, 그렇다면 미국은 20사단 투입에 대해 아무런 의견제시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글라이스틴대사는 광주투입이 결정된 5월22일자 전문에서 『한국군이 광주에서 질서를 회복하고 소요가 다른 지역에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개하는 노력들을 지원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박동진 외무장관에게 설명해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미국이 당시 신군부의 광주진압을 지지 지원하는 입장을 전달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고 있다.
  박 전장관은 이에 대해 『글라리스틴대사가 「광주지역에서의 질서를 회복하고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상황발생을 막으려는 한국군의 노력에 대한지원」을 언급했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론적 입장을 얘기한 것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의미를 축소했다. 그는 『그같은 얘기를 듣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우리의 입장일 뿐이며 더구나 군관계는 보통 군계통끼리 직접 교신하는 게 관례』라고 말했다. 자기로서는 미국으로부터 20사단 투입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통보받은 바가 없음을 강조하려는 말처럼 들렸다.
  위컴 주한 미군사령관이 승인서를 한국측에 전달하면서 미국이 군투입에 동의했다는 (또는 승인했다는) 사살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함께 전해왔다는 일부 언론보도에 대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부정적 견해를 피력했다.
  『그런 말(승인을 비밀로 해줄 것)은 나중에 미국이 부담감을 느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당시에는 그런 얘기가 있었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국은 당시(20사단60연대와 포병대의 작전통제권을 이양해주는 5월16일 현재)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알 수 없던 때인데 무엇하러 비밀에 부쳐 달라는,부탁을 했겠느냐』
  김윤호 전합참의장은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20사단 투입에 앞서 먼저 협상을 권유했다. 글라이스틴도 협상을 통해 유혈사태 없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조언은 먹혀 들지 않았다. 대미관계에서 상호 우호적 입장일때는 한국측이 사전에 협조하고 함께 분석 논의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사안에 따라서는 외교적 · 형식적 통보에 그칠 때가 있다. 당시 특전사의 광주파견을 미국이 승인했다는 광주라디오 방송보도에 대해 미국이 항의 및 취소를 요구한 것도 한국군의 움직임에 적극 반대할 처지에 있지 못한 미국측 입장을 신군부측이 왜곡, 언론공작을 벌였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으로부터 사전에 반대가 없었다는 것이 「간여하지 않겠다. 알아서하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는 있다』
  결국 20사단의 광주투입 문제에 관한 한미 관계자들의 증언에서 도출할 순 있는 소결론은 다음과 같다.
  한국측이 20사단 투입에 대해 사전에 알려주고 미국측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광주 진압작전이 있기 전인 5월16일부터는 이미 20사단 예하 모든 부대의 작전권이 연합사에서 한국군으로 넘어와 있었다. 따라서 5월 21,22일에 있은 20사단 광주투입은 미국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다만 미국이 이와 관련해 한국군에게 전달한 구체적 메시지가 무엇인지,또 한국군에게 이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12· 12 및 5 · 18과정에서 한미간의 복잡 미묘한 관계는 80년 4월14일 전두환장군의 중정부장서리 겸임과 5월27일 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령의 국무회의 통과 이후에는 표면상의 긴장관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순탄한 관계로 접어든다. 이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한국군의 대미접촉 채널과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안사 대미관계 허위보고

  한국군의 대미접촉은 김 전의장과 함께 3공화국 이래 미국 장정들 및 펜타곤과 깊은 친분을 맺어온 유병현 전 합참의장에게 크게 의존했다. 유 전의장은 특히 유창한 영어실력에다가 빠른 판단력 ,해박한 국제감각 등을 바탕으로 공화당 계열의 인사들에게 깊은 신임을 구축해온 터였다. 신군부는 특히 합수부 구성을 계기로 민주당과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글라이스틴 대사나 김 전의장보다는 유 전의장의 역할을 중시했으며 미국내 강경보수 성향의 장성들을 직접 상대하는 경향이 짙어졌다.이병호 전 국방장관(당시 대령)도 당시 유창한 영어를 바탕으로 미국에 수시로 파견되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선거가 레이건쪽으로 기울면서 신군부는 12 · 12 때나 80년초에 심심치 않게 「불편한 충고」를 해온 글라이스틴 등을 제치고 미국 ·공화당측에 로비를 시도하는 바람에 글라이스틴이나 위컴이 푸념하는 일이 잦았다고 김 전의장은 술회했다.
  전두환사령관은 특히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하게된 80년 4월14일 이후 군의 순수성 유지를 거듭 요구하는 글라이스틴과 위컴을 비켜가기 위해 최경록장군(예비역)이나 이병태 대령 등을 비밀리에 미국에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김 전의장은 『당시 정보기관에서 전두환 사령관에게 잘보이려고, 미국장성들이 신군부 지지발언을 한 것처럼 허위로 보고 했다』고 비관했다. 이를테면 스틸웰 전 주한 미군사령관이 전두환사령관을 칭찬한 것으로 보고돼 있으나 실제 스틸웰은 군본연의 임무를 강조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것이다. 김 전의장은 『전두환씨 등이 당시 미국과 협조가 다 된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보안사나 대미관계를 다룬 밑의 사람들이 아부하기 위해 그렇게 보고 했기 때문에 갖는 착각』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의장은 그러면서도 『80년말부터 한미관계가 순탄해진 것은 전씨측의 로비효과 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에서 신군부의 질서장악이 기정사실화되고 미국도 대한정책의 관심을 안보문제로 국한시키는 조용한 외교(quiet diplomacy)로 선회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관계는 특히 80년말 레이건정권 출범후 더욱 뚜렷해지지만 대통령선거를 목전에 둔 카터행정부도 신군부의 정치개입에 대한 영향력 (비판)에 있어 이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89년 미 국무부 성명에서 나타난 광주문제에 관한 미국정부의 입장은 사실 글라이스틴대사가 81년 6월 이임하기에 앞서 81년 1월 자신과 함께 미 대사관 공관에서 정리한 「12· 12, 5· 18에서의 한미관계」를 기초로 한 것이라고 김 전의장은 술회했다.
  이날 김 전의장은 글라이스틴과 만나자 마자 『군의 정치개입은 없을 것이라던 당초 약속이 결과적으로 지켜지지 않은데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글라이스틴은 『당신 개인 책임이 아니지 않느냐.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 아니냐. 보다 중요한 것은 안보문제이고 당신만큼은 훌륭한 군인으로 계속 남아있어, 달라』고 말렸다고 김 전합참의장은 회고했다.
  글라이스틴은 이어 「광주사태」 원인과 관련, 『내가 보고 받기로는 광주에서의 비극적 사태는 공수부대의 과격한 행동에서 시위대 감정이 격화되고 이에 따라 집단 심리가 발동된 것』이라고 정리했다. 원인 제공이 한국군에 있으니 한국군이 수습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12 · 12, 5 · 18에서의 책임문제로 미국이 겪은 곤혹스러움은 이후 지상군 작전지휘권의 한국반환 문제가 검토되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80년 6월초 한미합동으로.열린 「수도권방위 전술토의」에서는「광주사태」 때의 병력이동 승인과 관련한 미국의 「개입논란」과 12·12 때 수도권 방위에 대한 미군의 지휘책임 문제가 거론돼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고 김 전의장은 밝혔다.
  이 회의를 계기로 83년에 20사단 지휘권을 한국군이 넘겨받고 한미야전사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한미간에 절반씩 나누어 가짐으로써 작전지휘권 반환문제의 길이 열리게 됐다. 그러나 평시 작전지휘권이 전반적으로 한국에 반환되기까지에는 그로부터 다시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87년 군투입 정보 대척회의

  80년의 경험은 한국에서의 민주와 안보, 좁게는 학생시위와 군부의 갈등문제에 대해 미국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낳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87년 5월22일 워싱턴에서 카네기재단 주최로 이틀 동안 열린 「한국민주화에 관한 토의」라 할 수 있다. 이날 회의는 한국에서 대규모로 번져 나가던 대통령직선제 시위에 대해 정부와 군 일부에서 군투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열린 회의였다. 회의는 공평성을 기하기 위해 김윤호 전합참의장, 김영삼 ·김대중씨쪽 계열의 한국 인사 각 1명씩, 글라이스틴 전 주한미대사, 쿠시맨 전 한미야전사령관, 카네기재단 선임연구원, 해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 ,국무성과 국방성 관계자 등이 고루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유혈사태를 부를 군투입을 막기 위해서는 주한 미군사령관이 국방장관에게 정식서한을 보내고 주한 미대사가 정식으로 외무부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미국의 공식적인 반대입장을 전달해야 한다는 의견이 채택됐다고 김 전의장은 말했다.
  80년의 비극적 경험이 87년의 비극을 막는 데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상 12 · 12와 5 · 18 시기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한국측 고위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광주 유혈진압 전인 80년5월7일 미국은 공수부대를 비롯한 한국군의 움직임을 한국측으로부터 통보받아 알고 있었다는 점 ▲12 · 12직후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사표를 내고 미국은 한때 한국(신군부)에 대해 4가지 제재안을 검토했다는 점 ▲군일부에서 역쿠데타 조짐이 있었으나 미국은 이를 미미한 존재로 판단했다는 점 ▲미국은 최규하 과도정부가 구체적인 정치일정을 내놓지 않는 데에 불만을 품었다는 점 등 몇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얻어내는 성과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미국은 광주 등에 대한 신군부의 군투입 움직임에 대해 사전에 통보받거나 파악하고 있었지만 12·12 직후와 마찬가지로 광주 유혈진압 사태를 전후해서도 신군부에 질질 끌려다녔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공수부대 이동과 군투입 계획을 파악한 미국이 신군부에 전달한 실질적인 입장과 의도.▲20사단 투입과정에서 미국측이 한국에 전달한 구체적 메시지 등 몇가지 의문점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같은 숙제를 남기면서 미 국무부 비밀전문을 처음 보도한 팀 셔록의 다음과 같은 언급(신동아 4월호)을 인용해본다.
  『80년 봄의 수수께끼는 한국기자들이 풀려고 나섰어야 마땅하다. 80년 서울의 봄에 숨겨진 부분을 파헤치는 작업은 바로 한국기자들의 몫이다 그 작업은 내가 투입한 6년이 아니라 16년, 6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