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노태우 전대통령이 5·18관련 문제발언 전문 / 전직대통령 문화 만들고 싶다(신동아, 1995. 11)
본문
노태우 전 대통령 5·18관련 문제발언 전문
"전직대통령 문화 만들고 싶다."
지난 10월5일 아침 서울 호텔신라에서는 경북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모임인 경신회 주최로 경북고 출신인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노 전대통령은 중국의 지도자 양성에 대한 발언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문화대혁명 때 수천 만명이 희생을 당하고 엄청난 피를 흘렸다. 거기에 비하면 광주사태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언급했는데 이 사실이 동아일보사가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에 보도돼 야당과 지식인 학생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샀다. 5·18특별법 제정을 둘러싸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 불을 질러놓은 격이었다. 광주사태 발언 파문이 확산되자 노 전대통령은 10월20일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이 발언이 실수였음을 인정하고 직접 사과했다. 여야가 노씨의 사과를 일단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 여파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본지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노 전대통령의 발언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오랜만입니다. 선후배 동문 여러분들과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좋은 정담을 나누게 돼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런 기회가 있다면서 말씀을 해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만 청탁하는 사람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이 좋겠느냐 물어 보니까 아무거나 해 달라는 거예요. 아무거나‥(청중 웃음소리). 부담 없는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오늘 아침 귀중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얘기한다는 것이 횡설수설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횡설수설이라도 국정을 책임진 사람이 겪은 이야기인 만큼 애교로 받아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 여기에 나올 때 보니까 쌀쌀한 날씨지만 하늘이 무척 맑습디다. 이 가을이 농촌에서는 고된 수확기입니다. 또 우리들은 가을이 되면 생각을 사색을 많이 하나 봅니다. 저 자신도 이제 60이 훨씬 넘다 보니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가을이 되니까 유난히 밤이 길어집니다.
오늘 아침에 나오면서 생각을 해 보니까 87년이지요, 그러니까 8년 전인가 봅니다. 선거 캠페인을 할 때 관훈클럽에서 기자들한테 진땀을 흘렸던 때가 생각납디다. 그때 어느 패널리스트가 느닷없이, 헤르만 헤세의 시를 아마 평소에 좋아했던 모양인데 그거 한 구절 좀 외워 보시오, 이런 질문이 있어서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가을에 대한 시를 한 구절 더듬더듬 외운 것 같은데 그 생각이 나서 다시 한번 되풀이할까 합니다. [가을이 가네] 이런 시를 지금껏 기억합니다.
「숲가에 나뭇가지 / 금빛으로 타오를 때 / 오솔길을 따라 / 나는 홀로 걷는다. / 사랑하는 이와 함께 / 수없이 거닐었던 이 길]
아까 이야기했습니다만 오늘 아침 얘기는 주제가 없습니다. 그동안의 느낌, 겪었던 일들을 엮어서 조금이나마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고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퇴임한 지 2년 반이 지났습니다. 우리나라의 독특한 역사, 또 우리 국민성, 특히 우리나라의 정치문화가 불행합니다. 이로 인해서 지난 30여 년의 업적이나 영광은 먹구름에 가져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좌절을 겪는 이런 문화가 우리나라 문화다, 또 속된 말로 동네북처럼 여기서도 맞고 저기서도 맞고 이런 경우도 많이 겪었습니다. 참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한편 마음 한가운데는 반드시 이것을 극복해야 된다, 희망을 갖자, 이런 것을 극복해서 내 자신 퇴임 대통령으로 떳떳한 하나의 문화를 창조해서 우리들 후대에 보람을 남겨야 되겠다, 이렇게 평소에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동과 단전호흡으로 건강관리
여러분들, 제 일상생활에 대해서 아마 궁금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는 이른 아침에 일어납니다. 공직생활 할 때에 가졌던 생활 기준을 가능하면 깨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6시쯤 일어나서 어떤 때는 보기도 싫지만 텔레비전 뉴스를 보기도 하고 신문도 좀 들썩거려 보다가 한 7시쯤 되면 좁은 집이지만 운동을 합니다. 적게 하면 30분, 목욕까지 합해서 1시간은 매일 합니다. 조그마한 빈터지만 이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 뛰기도 하고 손도 벌리고 허리도 굽히고, 또 조그마한 망 하나 만들어 가지고 골프도 해보고, 이렇게 해서 30, 40분 내지 1시간은 아침에 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아침을 먹습니다.
안채에서 약 15m떨어진 곳에 임시로 집을 하나 지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제 사무실입니다.
아침에 정장 또는 간소복을 입고 가방 하나 들고 뒷집에서 앞집으로 출근합니다. 출근하게 되면 한 10시부터 하루 평균 오전에 한두 분 손님, 또 오후에 한두 분 손님을 맞이합니다. 그러면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립니다. 손님이 오시는 사이사이에 책도 좀 보고 또 과거에 여러 가지 했던 일들을 정리도 하고, 이렇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집에서 하는 운동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제일 많이 부족한 것이 산소입니다. 욕심 같아서는 1주일에 골프 한번 치고 정구 한번 치고 등산 한번 가고, 이러면 운동부족이 많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나는 항상 만보계를 차고 다닙니다. 1주일에 7만보를 목표로 세웠는데 7만보를 걸었을 때가 1년에 한 대여섯 번 됩니다. 보통 한 5만보, 적을 때는 3만보, 그래도 운동은 꽤 됩니다.
여기에 아마 전문적으로 높은 경지에 올라간 사람도 있으리라고 봅니다만 단전 호흡, 이것 참 좋습디다. 밤에 잘 때 이것저것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아플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그냥 무작정 딱 엎드려 가지고 단전호흡을 합니다. 5분 못가서 그냥 잠이 들어 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전호흡을 운동의 일종으로 하는데 나는 잠자는 목적으로 단전호흡을 계속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복잡한 일을 했거나 아주 어려운 손님들을 만나고 났을 때 머리를 좀 정리해야 되겠다 싶으면 1분도 좋고 2분도 좋고 혼자 가만히 앉아서 단전호흡을 몇 번 합니다. 그것 이상해요. 머리가 개운해집니다. 아무리 복잡한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당황함이 없이 차분하게 정리가 됩니다.
기성세대는 전부 죄인인가
이렇게 한 2년 반이 지나니까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고개를 숙이고 쭈그려 앉아 있을 수만 없다, 무언가 보람있는 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번에 강의도 하고 연설도 좀 했습니다. 그 가운데 이것은 꼭 해야 되겠구나 하는 것이 북방정책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군데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이 주제로 지난 8월 하와이의 이스트 웨스트 센터에서 마련한 행사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들, 우리들의 위상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느냐, 갈기갈기 다 찢겨 있습니다. 상처투성이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만들고 있는 현대사를 보면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어 있습니다. 대통령 지낸 사람을 위시해서 오늘의 이 나라를 일군 기성세대 전체가 죄인이 되어 있습니다. 2세들이 우리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 것인가 생각하면 부끄럽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수치감과 열등감을 느낍니다. 이걸 올바르게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일궈 놓은 업적은 어디로 다 가 버리고 잘못된 것만 온 천지에 이렇게 퍼져 있느냐, 우리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자존을 철두철미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자손들에게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했노라, 떳떳이 큰소리치고 자랑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많다고 봅니다. 이걸 하나하나 정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또 하나는 어릴 때부터 청년기, 장년기, 이제는 우리나라 나이로 노년기에 들어갔습니다만 화합이라는 것을 생활철학이라할까 신념으로 삼아 왔습니다. 가족에서부터 이웃, 사회, 국가가 화합을 해야 되겠다, 화합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더욱더 불행한 일을 당하겠다는 걱정이 큽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화합을 시켜야 되겠다, 이 일에 대해서도 앞으로 이바지를 하고자 합니다.
대외적으로도 할 일이 있습니다. 아마 신문지상을 통해서 조금은 아시리라고 봅니다만 일명 OB서미트, 전직 국가수반회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13년 전에 창립돼 여러가지 면에서 이바지를 하고 있습니다. 과거 국가원수의 경험을 살려서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안문제를, 좀더 깊게, 좀더 장기적으로 보자는 겁니다.
현직 국가원수들은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합니다만 좀더 깊고 멀리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직 국가원수들이 여러 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지혜를 다 모아서 세계인류를 위해서 이바지하자는 취지에서 모범을 갖고 있습니다.
국제무대를 통한 기여
저는 작년 금년 두 번 참석했는데, 우리가 지금 20세기를 매듭짓고 새로운 21세기를 준비함에 있어서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활발한 논의를 했습니다. 여기에 제가 제안한 것이 있습니다. 20세기를 주도했던 가치관은 이제는 한계가 오지 않았느냐, 비록 냉전체제가 무너져서 전쟁의 위험이 없다 하더라도 좋게만 볼 수 있는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 더 큰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물질문명은 엄청나게 발전되어 왔지만 인간의 정신문명,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생명, 자연의 생명 나아가서는 지구의 생명이 파괴되고 있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파괴된다 함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볼 수 있지요. 도덕성문제, 또 여러 가지 경쟁문제, 마약문제 등등이 인류를 극히 불행한 곳으로 물아 가는 것을 볼 때 20세기를 주도했던 철학이 가치관으로서 과연 이 문제를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없다, 이겁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20세기를 주도했던 가치관을 우리가 다시 한번 검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세기가 서양이 주도한, 서양문화가 주도했던 세기라 할 것 같으면 21세기는 오히려 동양의 문화가 중심이 돼서 이런 어려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풀 수 있지 않는가, 이런 기대를 걸고 OB 서미트의 과제로 내가 제안을 했습니다. 지난 5월 회의는 이 과제를 주과제로 만장일치로 의결했습니다.
여기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이 좋은 아이디어와 지혜를 주길 이 자리를 빌려서 부탁드립니다.
대통령 시절에 대해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보람있었던 일이냐, 또 무엇이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웠던 일이냐. 여러분 중에도 이 점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아까 경신회 회장께서 87년도에 우리 동문회가 노태우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탄생시키기 위해서 온갖 힘을 다 바쳤노라, 감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건 잊을 수 없습니다. 87년 12월13일입니다. 수성천에서 우리 대구시민이 거의가 다 모였습니다. 거기에서 저에게 주는 그 함성, 저에게 주는 그 용기와 힘, 그것이 없었던들 대통령으로도 당선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힘으로 당선되고도 민주화라는 그 어려움 속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끝내 이 나라를 민주화시켰고 우리의 위상이 세계만방에 우뚝 솟을 수 있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수성천변에서 우리 시민들이 나에게 보낸 그 열렬한 함성은 눈을 감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보람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 자신의 자존심이요 여러분들의 자존심으로서 결코 꺼짐이 없이 앞으로도 계속 불타 오를 것입니다(청중 박수) .
젊은이와 대화, 서울올림픽이 큰 보람
또 한가지 보람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지성세대들은 2세들하고 대화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87년에 제가 학생들하고 대화를 하려니까 다 거부해요. 그뒤에 노력을 많이 해서 몇만 명의 학생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고약하기도 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으로 큰 보람이었습니다.
내 자신만 하더라도 중학교 1학년 때에 해방이 됐어요. 또 사변이 일어났지요. 우리는 자주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남에게 의존해서 생존해 왔기 때문에 좀 비굴해 보입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한테 무릎을 꿇었고, 우리말 쓰지 않고 일본말을 썼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서양문화를 비판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고 우리 것은 비하했어요. 이런 비굴한 특성이 몸에 배지 않은 기성세대는 없을 겁니다. 이런 자각을 2세들과 대화하면서 느꼈습니다.
2세들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참다운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87년 대통령선거 전에 미국을 방문해서 레이건대통령을 만나고 조지타운대학에서 연설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 한국 학생들이 엄청난 반미사상에 젖어 있다, 어떻게 될 것이냐, 걱정되는데, 노아무개.는 그걸 어떻게 보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걱정할 것 없다, 그리고 아까 제가 말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비굴했다. 우리 젊은이들은 참다운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 그 자존심의 발로다, 그들이 앞으로 성장해서 새로운 한미 관계를 맺는 주역들이 된다면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양국의 협력관계가 좋아 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걱정하지 말라, 이 런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보람이 있었던 또 하나는, 우리 국민이 진짜 하나가 된, 88 서울올림픽입니다. 그 올림픽은 정말 우리 국민들이 하나가 된, 거기에는 정치적인 분열도 없었습니다. 하나가 돼서 우리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떨쳤습니다. 위상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요 조그마한 한반도 속에 동서로 갈라져 있던 여러 가지 갈등을 녹였습니다. 화합입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민주주의를 성공시키고 또 북방외교를 해서 많은 성과를 거둔 것이 보람으로 기억됩니다.
반대로 어려웠던 것은 뭐냐? 노태우는 잘 참는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참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참 어렵습니다.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나라 수준으로 봐서 진정 민주화가 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민주화, 참 어렵습니다. 민주화와 참는다는 것은 딱 일치하는 얘기입니다. 만약 제가 참지 않았던들 민주화는 성공 못했다고 확신합니다.
또 어려운 것이 뭐냐? 제 전임자가 백담사로 가게 될 입장에 있었을 때 참 고통스러웠습니다. 솔직한 얘기지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 열 배의 고난을 내가 안고 내가 고통을 받아도 좋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제 뜻대로 되지 못하고 전임자를 백담사로 보낸 고통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어버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는 동료들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된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한가지 더 든다면, 노력을 해도 잘 안되는 게 있습디다. 지역감정을 한번 없애 보자, 이런 생각을 강하게 가졌습니다. 이것은 제가 대통령 취임하기 전에 민화위를 만들어서 거기서 주요한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광주사태를 포함해서 이 민족을 화합시켜야 되겠다. 지역감정을 없애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정성을 다했습니다만 결국은 잘 안됩디다.
나를 잇는 사람들에게 과제로 인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구사람과 서울사람
이 자리의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우리 마음속에 다짐하고 넘어가고 싶은 대목이 있습니다. 대구 사람이 뭐냐? 내 자신이 대구에서 태어났고 자랐기 때문에 가끔 내 자신에게 물을 때도 있습니다. 흔히들 외부 사람한테 물어 보게 되면, 고집이 세다고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인 이상 단점이 있겠지만 다른 지역 사람하고 상당히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크다, 가슴이 크다, 또 말을 조금 바꾼다면 관대하다, 어느 지역 사람보다도 대구 사람들이 관대하다고 봅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향학열이 높다는 걸 느꼈습니다. 부모, 선배, 스승이 요놈을 가르쳐야 되겠다, 요놈을 가르쳐서 대구사람이 이렇다 하는 것을 한번 보이기 위해서는 매질이라도 해야 되겠다는 얘기를 중학교 다닐 때 선생님한테 들었습니다. 매도 맞았습니다. 말하자면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딴 지방보다도… 지금은 오히려 좀 떨어졌어요. 일반적으로 과거를 생각했을 적에는 이런 열의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신이 어렸을 때, 대구에서 자라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군에 들어가서는 사관학교에 다녔습니다. 당시 사관학교는 진해에서 서울로 옮겨졌는데 서울에 올라와 보니까 대구 사람들은 좀 멍청한 것 같아요. 말도 잘 못하고 조리도 잘 안 맞습디다. 말하는 재주는 제 자신도 그렇고 딴 사람도 비슷합니다. 서울 사람을 보게 되면 참 부러워요. 말도 잘하고 상대방의 기분도 잘 맞춰 줍니다. 우리는 무언가 모자란 점이 더 많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화랑대를 졸업하고 軍사회에 나가서 부딪쳐 보니까 우리 대구 사람이 꾀 부릴 줄을 몰라요. 그런데 서울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내가 왜 어려운 일 다 하느냐, 피하자…. 그런데 저는 피할 줄을 몰라요. 저뿐만 아니라 대구 사람들이 대부분 머리가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부딪쳐 보자는 겁니다. 물론 실패한 사람도 있지요. 그러나 대부분 극복해 냅니다. 불평 안합니다.
어릴 때는 할머니한테 업혀서, 또 걸어다닐 때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대구의 파계사와 그 위에 있는 성전암에 자주 갔습니다. 거기에 계시던 스님이 제가 철도 들지 않았는데 저한테 한 얘기가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때는 무슨 얘기인지 몰랐어요. {네가 가진 것을 다 주라. 남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다 줘. 주면은 부처님에게 간다. 네가 가진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너한테 준다. 또 줘라, 또 주면 또 좋은 것을 네게 준다. 그러면 너는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과거에 대통령 되려고 꿈을 가졌더냐? 전혀 아닙니다. 욕심을 가졌더냐? 아닙니다. 그러면 뭘 했느냐?
내가 찰 수 있는 정성을 다했습니다 힘을 다했거든요. 이것 한번 해 주자. 도와주자, 봐 주자, 이 일념으로 내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 얼마 전까지 그 마음을 가지고 이바지했습니다. 이것은 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서 그 스님한테 들은 말씀이 나도 모르게 내 생애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목사님이나 신부님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님 못잖게 좋아하고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탄허스님과의 인연
양산 통도사에서 돌아가신 스님이 한분 계십니다. 그분이 글을 하나 써서 사람을 시켜서 저한테 전해 주라며 글을 보내 왔습니다. 처음에는 그 뜻이 뭔지 잘 몰랐습니다. 한문인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장부가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를 지니고 있으니, 부처님도 보지 말고 네 마음대로 해라]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는 거기에도 깊은 뜻이 있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그 유명한 학승 탄허스님이 있지요. 80년대에 내가 올림픽 조직위원장을 할 땐가 장관을 할 땐가 그때였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대전이었습니다. 그전에도 그분하고 만나기는 만났습니다. 그때 그 양반을 모셔다가 절을 지은 것입니다. 절을 짓게 되면 혼란이 가라앉고 안정이 된다는 생각에 나라 잘되기 위해서 절을 지었습니다.
아무튼 그분은 30분 동안 저를 말도 없이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자기 평생에 새겨 갖고 있던 것을 말씀합디다.
처음에는 허황한 얘기같이 들려요. 왜 그런고 하니 {盧장관께서는 앞으로 우리 한반도보다 10배 넓이의 나라를 생각하십시오}라고 했거든요.
우리나라의 10배. 여러분들, 어떻게 하든 북방정책을 해야 되겠다는 정신적인 지주가 바로 그 구절입니다. 이런 얘기는 오늘 여러분들한테 처음 합니다.
이제 앞으로 내 자신, 또 여러분들과 함께 무엇을 했으면 좋겠는지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 북방정책은 변할 수 없습니다. 2000년, 늦어도 2020년 내지 2030년 가면 우리의 문화권이 형성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력으로 쳐올라 가서 옛 조상들이 차지했던 만주 발해 연해주를 먹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 만주 연변에서 제일 큰 소수 민족이 조선, 우리 한국민족입니다. 우리의 문화를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연해주에는 지하자원이 무제한 있습니다. 계속 파면 석유가 나온다고 합니다. 30여 만명의 동포가 거기 살고 있었는데 스탈린 정부가 중앙아시아로 다 쫓아 버렸습니다. 이들을 다시 모으려고 고르바초프와도 상의를 했고 옐친대통령과도 상의를 했습니다. 그쪽 러시아, 즉 당시 소련의 반응은 정책적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민족분열로 인해서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민족이동은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가서 해 줘야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기업도 진출시키고 우리 사람들도 좀 이주시켜서 개발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결국은 너희 나라를 개발시켜 주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집단이주는 할 수 없지만 개별 이주는 좋다고 하더군요, 그 당시 내가 재임 때 대통령으로서 기업인들과 학자들에게 개별적으로 다 얘기해 주었습니다.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우리 동포들을 하나 둘 나오게 하고, 또 우리 기업, 우리 기술자, 우리 근로자들에 적어도 1백만 내지 2백만 명이 앞으로 몇십 년 이내에 그쪽에 가서 경제개발을 이룩해야 되겠다고 말한 겁니다.
과거 우리는 월남파병에서 시작, 그 다음에는 중동 열사에 들어가서 우리 경제를 일으켰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들어갈 만한 남쪽이 없습니다. 이제는 북쪽의 중국과 러시아에서 우리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에너지를 구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인재양성 배워야
나의 생활철학과 신념이 화합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세대간에 또 계층간에, 기업간에 갈등과 불화를 화합시켜야 되겠다는 겁니다. 또 화합을 시켰으면 그걸 어떻게 지속해 나가느냐, 여기에 우리의 지혜와 정력을 바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인재양성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지요. 제가 벌써부터 중국의 초청을 받고 있는데, 10월에 갈까 하다가 연기시켰습니다. 중국 가기 전에 대화자료를 만들기 위해서 문헌도 보고 얘기를 좀 듣다가 보니까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일본 사람들도 깜짝 놀랄 일입니다. 일본이 저렇게 발전했는데도 인재 양성이나 제도, 사람을 생각하는 지도자의 생각이나 전통은 중국을 못 따라갑니다.
중국은 지금 강택민이 주석 아닙니까? 어떻게 해서 강택민을 지도자로 뽑았느냐? 등소평의 작품이죠. 과격하고 개성이 너무 강하고 급진적인 사람은 중국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반면에 부드럽고 온화하고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사람, 사람간의 밸런스, 지역간의 밸런스를 맞출 줄 알고 회계를 알고 경제를 아는 사람이 중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원칙을 굳힌 겁니다. 그래서 혁명 1세대, 지금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등소평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문화혁명 때에 수천만 명이 희생당하고 엄청난 피를 흘렸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광주사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런 갈등, 이런 불화, 이런 피를 흘린,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자 4인방만 딱 처리하고 나머지 별의별 짓 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처벌 안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주동한 것이 아니다, 명령에 따랐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후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주었습니다. 중국의 혁명 1세대 원로들은 뒷방자리에 앉아서 감시만 합니다. 등소평을 중심으로 해서 짐을 다 졌습니다. 등소평은 이해를 시키고 공감대를 넓혀서 원로들을 대접하고 활용하는 입장입니다. 이런 원칙에서 그들은 60대 인물, 50대 인물, 40대 인물, 30대 인물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지도자로 부상된 사람이 더러 있지요. 허군도라든가 왕검이라든가 또 경제전문가 주용기라든가 외교부장을 한 전기침이라든가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전부 과격하지 않고 급진적이지 않고 개성이 너무 강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원로들이 이들을 지도자 집단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앞으로 등소평이 죽고 난 뒤에도 중국은 그대로 일어나고 안정되어 나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내 자신도 과거에 미리 알고 여기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해놓을걸 하고 후회합니다 나라의 이런 인재들을 길러야 된다는 생각을 부단히 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정말 두서없이 얘기했지만 한두 마디 더 여러분에게 당부의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큰 인물이 됩시다. 참을 것을 못 참아서는 안됩니다. 참을 수 있는 인물, 기다릴 수 있는 인물, 남의 허물을 관용할 수 있는 인물, 이런 인물이 됨으로 인해서 우리는 스스로가 성장할 수 있고 나아가서 사회 국가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건강합시다.
고맙습니다(청중 박수).
다음은 노태우 전대통령의 강연 후 청중과의 1문1답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북방정책의 목표 중의 하나가 결국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봅니다. 통일에 대한 방안을 듣고 싶습니다.
{내가 재직 때는 단계적으로 나누었습니다. 1단계 2단계 3단계. 제1단계는 북한을 중심으로 한 소위 그들과 이념을 같이하는 모든 나라들하고 수교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략적인 차원에서 포위를 한 겁니다. 당시 소련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서 제1단계는 완성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2단계가 됩니다. 그때 중국과 수교를 한 여력으로 북한을 통일하는 방법은 전쟁도 아니요 여타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개방이다, 말하자면 개방〓통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련과 중국과의 수교를 바탕으로 해서 북한을 개방시키기 시작했어요. 여러분들, 우리 현대사에서 대통령 임기기간에 총리가 8번이나 회담을 하고 남북한 간에 화해와 협력의 기본합의서가 이룩되고 또 한반도의 비핵화 중동선언문을 문서화한 때가 언제 있습니까.
이제는 제2단계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그 합의서를 하나하나 이행시키는 것이 개방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벌써 발이 들어갔는데, 참 공교롭게도 정부가 그냥 또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와 1백% 호홉을 같이 해 주고 지원을 해 주었던 미국도 정부가 바뀌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정부는 뭐 더 좋은 새로운 것이 없느냐, 찾다가 감상적으로 이념보다도 민족이 우선이다 하는 제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봐서는 좀 방황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동안에 통일원장관도 몇 번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재임시에 북방정책을 강하게 지원해 주었던 미국도 부시대통령이 재선되었으면 정책이 그대로 나가는 건데 클린턴대통령으로 바뀌었습니다. 거기도 뭐 새로운 것이 없느냐, 찾다 보니까 상승작용이 일어났습니다.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 그동안 우리 국민들이 걱정했지만 우리가 밟지 않으면 안될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잘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겠지만 나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나쁘다고 해서 역사가 잘못 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제자리에 돌아온다는 신념을 가져 야 됩니다.
조금 늦춰진 감은 있지만 내 자신이 구상한 것이 실천이 됐고 또 그 정책은 앞으로 우리 정부가 서두름이 없이 밀고 나가리라 생각합니다}
-항간에 4천억원 비자금설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그 돈이 있으면 우리 경신회 회비로 내주시지요.
{4천억원 가지고 경신회 회비나 하세요. 아까도 내가 얘기했지만 우리 스스로가 이 나라에 존경받을 수 있는 대상자를 한 사람도 만들지 않는 것은 국민성이라 할까 참 고약한 일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전직대통령 문화 만들고 싶다."
지난 10월5일 아침 서울 호텔신라에서는 경북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모임인 경신회 주최로 경북고 출신인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노 전대통령은 중국의 지도자 양성에 대한 발언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문화대혁명 때 수천 만명이 희생을 당하고 엄청난 피를 흘렸다. 거기에 비하면 광주사태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언급했는데 이 사실이 동아일보사가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에 보도돼 야당과 지식인 학생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샀다. 5·18특별법 제정을 둘러싸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 불을 질러놓은 격이었다. 광주사태 발언 파문이 확산되자 노 전대통령은 10월20일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이 발언이 실수였음을 인정하고 직접 사과했다. 여야가 노씨의 사과를 일단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 여파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본지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노 전대통령의 발언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오랜만입니다. 선후배 동문 여러분들과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좋은 정담을 나누게 돼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런 기회가 있다면서 말씀을 해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만 청탁하는 사람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이 좋겠느냐 물어 보니까 아무거나 해 달라는 거예요. 아무거나‥(청중 웃음소리). 부담 없는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오늘 아침 귀중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얘기한다는 것이 횡설수설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횡설수설이라도 국정을 책임진 사람이 겪은 이야기인 만큼 애교로 받아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 여기에 나올 때 보니까 쌀쌀한 날씨지만 하늘이 무척 맑습디다. 이 가을이 농촌에서는 고된 수확기입니다. 또 우리들은 가을이 되면 생각을 사색을 많이 하나 봅니다. 저 자신도 이제 60이 훨씬 넘다 보니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가을이 되니까 유난히 밤이 길어집니다.
오늘 아침에 나오면서 생각을 해 보니까 87년이지요, 그러니까 8년 전인가 봅니다. 선거 캠페인을 할 때 관훈클럽에서 기자들한테 진땀을 흘렸던 때가 생각납디다. 그때 어느 패널리스트가 느닷없이, 헤르만 헤세의 시를 아마 평소에 좋아했던 모양인데 그거 한 구절 좀 외워 보시오, 이런 질문이 있어서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가을에 대한 시를 한 구절 더듬더듬 외운 것 같은데 그 생각이 나서 다시 한번 되풀이할까 합니다. [가을이 가네] 이런 시를 지금껏 기억합니다.
「숲가에 나뭇가지 / 금빛으로 타오를 때 / 오솔길을 따라 / 나는 홀로 걷는다. / 사랑하는 이와 함께 / 수없이 거닐었던 이 길]
아까 이야기했습니다만 오늘 아침 얘기는 주제가 없습니다. 그동안의 느낌, 겪었던 일들을 엮어서 조금이나마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고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퇴임한 지 2년 반이 지났습니다. 우리나라의 독특한 역사, 또 우리 국민성, 특히 우리나라의 정치문화가 불행합니다. 이로 인해서 지난 30여 년의 업적이나 영광은 먹구름에 가져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좌절을 겪는 이런 문화가 우리나라 문화다, 또 속된 말로 동네북처럼 여기서도 맞고 저기서도 맞고 이런 경우도 많이 겪었습니다. 참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한편 마음 한가운데는 반드시 이것을 극복해야 된다, 희망을 갖자, 이런 것을 극복해서 내 자신 퇴임 대통령으로 떳떳한 하나의 문화를 창조해서 우리들 후대에 보람을 남겨야 되겠다, 이렇게 평소에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동과 단전호흡으로 건강관리
여러분들, 제 일상생활에 대해서 아마 궁금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는 이른 아침에 일어납니다. 공직생활 할 때에 가졌던 생활 기준을 가능하면 깨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6시쯤 일어나서 어떤 때는 보기도 싫지만 텔레비전 뉴스를 보기도 하고 신문도 좀 들썩거려 보다가 한 7시쯤 되면 좁은 집이지만 운동을 합니다. 적게 하면 30분, 목욕까지 합해서 1시간은 매일 합니다. 조그마한 빈터지만 이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 뛰기도 하고 손도 벌리고 허리도 굽히고, 또 조그마한 망 하나 만들어 가지고 골프도 해보고, 이렇게 해서 30, 40분 내지 1시간은 아침에 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아침을 먹습니다.
안채에서 약 15m떨어진 곳에 임시로 집을 하나 지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제 사무실입니다.
아침에 정장 또는 간소복을 입고 가방 하나 들고 뒷집에서 앞집으로 출근합니다. 출근하게 되면 한 10시부터 하루 평균 오전에 한두 분 손님, 또 오후에 한두 분 손님을 맞이합니다. 그러면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립니다. 손님이 오시는 사이사이에 책도 좀 보고 또 과거에 여러 가지 했던 일들을 정리도 하고, 이렇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집에서 하는 운동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제일 많이 부족한 것이 산소입니다. 욕심 같아서는 1주일에 골프 한번 치고 정구 한번 치고 등산 한번 가고, 이러면 운동부족이 많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나는 항상 만보계를 차고 다닙니다. 1주일에 7만보를 목표로 세웠는데 7만보를 걸었을 때가 1년에 한 대여섯 번 됩니다. 보통 한 5만보, 적을 때는 3만보, 그래도 운동은 꽤 됩니다.
여기에 아마 전문적으로 높은 경지에 올라간 사람도 있으리라고 봅니다만 단전 호흡, 이것 참 좋습디다. 밤에 잘 때 이것저것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아플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그냥 무작정 딱 엎드려 가지고 단전호흡을 합니다. 5분 못가서 그냥 잠이 들어 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전호흡을 운동의 일종으로 하는데 나는 잠자는 목적으로 단전호흡을 계속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복잡한 일을 했거나 아주 어려운 손님들을 만나고 났을 때 머리를 좀 정리해야 되겠다 싶으면 1분도 좋고 2분도 좋고 혼자 가만히 앉아서 단전호흡을 몇 번 합니다. 그것 이상해요. 머리가 개운해집니다. 아무리 복잡한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당황함이 없이 차분하게 정리가 됩니다.
기성세대는 전부 죄인인가
이렇게 한 2년 반이 지나니까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고개를 숙이고 쭈그려 앉아 있을 수만 없다, 무언가 보람있는 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번에 강의도 하고 연설도 좀 했습니다. 그 가운데 이것은 꼭 해야 되겠구나 하는 것이 북방정책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군데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이 주제로 지난 8월 하와이의 이스트 웨스트 센터에서 마련한 행사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들, 우리들의 위상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느냐, 갈기갈기 다 찢겨 있습니다. 상처투성이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만들고 있는 현대사를 보면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어 있습니다. 대통령 지낸 사람을 위시해서 오늘의 이 나라를 일군 기성세대 전체가 죄인이 되어 있습니다. 2세들이 우리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 것인가 생각하면 부끄럽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수치감과 열등감을 느낍니다. 이걸 올바르게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일궈 놓은 업적은 어디로 다 가 버리고 잘못된 것만 온 천지에 이렇게 퍼져 있느냐, 우리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자존을 철두철미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자손들에게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했노라, 떳떳이 큰소리치고 자랑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많다고 봅니다. 이걸 하나하나 정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또 하나는 어릴 때부터 청년기, 장년기, 이제는 우리나라 나이로 노년기에 들어갔습니다만 화합이라는 것을 생활철학이라할까 신념으로 삼아 왔습니다. 가족에서부터 이웃, 사회, 국가가 화합을 해야 되겠다, 화합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더욱더 불행한 일을 당하겠다는 걱정이 큽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화합을 시켜야 되겠다, 이 일에 대해서도 앞으로 이바지를 하고자 합니다.
대외적으로도 할 일이 있습니다. 아마 신문지상을 통해서 조금은 아시리라고 봅니다만 일명 OB서미트, 전직 국가수반회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13년 전에 창립돼 여러가지 면에서 이바지를 하고 있습니다. 과거 국가원수의 경험을 살려서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안문제를, 좀더 깊게, 좀더 장기적으로 보자는 겁니다.
현직 국가원수들은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합니다만 좀더 깊고 멀리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직 국가원수들이 여러 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지혜를 다 모아서 세계인류를 위해서 이바지하자는 취지에서 모범을 갖고 있습니다.
국제무대를 통한 기여
저는 작년 금년 두 번 참석했는데, 우리가 지금 20세기를 매듭짓고 새로운 21세기를 준비함에 있어서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활발한 논의를 했습니다. 여기에 제가 제안한 것이 있습니다. 20세기를 주도했던 가치관은 이제는 한계가 오지 않았느냐, 비록 냉전체제가 무너져서 전쟁의 위험이 없다 하더라도 좋게만 볼 수 있는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 더 큰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물질문명은 엄청나게 발전되어 왔지만 인간의 정신문명,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생명, 자연의 생명 나아가서는 지구의 생명이 파괴되고 있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파괴된다 함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볼 수 있지요. 도덕성문제, 또 여러 가지 경쟁문제, 마약문제 등등이 인류를 극히 불행한 곳으로 물아 가는 것을 볼 때 20세기를 주도했던 철학이 가치관으로서 과연 이 문제를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없다, 이겁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20세기를 주도했던 가치관을 우리가 다시 한번 검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세기가 서양이 주도한, 서양문화가 주도했던 세기라 할 것 같으면 21세기는 오히려 동양의 문화가 중심이 돼서 이런 어려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풀 수 있지 않는가, 이런 기대를 걸고 OB 서미트의 과제로 내가 제안을 했습니다. 지난 5월 회의는 이 과제를 주과제로 만장일치로 의결했습니다.
여기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이 좋은 아이디어와 지혜를 주길 이 자리를 빌려서 부탁드립니다.
대통령 시절에 대해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보람있었던 일이냐, 또 무엇이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웠던 일이냐. 여러분 중에도 이 점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아까 경신회 회장께서 87년도에 우리 동문회가 노태우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탄생시키기 위해서 온갖 힘을 다 바쳤노라, 감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건 잊을 수 없습니다. 87년 12월13일입니다. 수성천에서 우리 대구시민이 거의가 다 모였습니다. 거기에서 저에게 주는 그 함성, 저에게 주는 그 용기와 힘, 그것이 없었던들 대통령으로도 당선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힘으로 당선되고도 민주화라는 그 어려움 속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끝내 이 나라를 민주화시켰고 우리의 위상이 세계만방에 우뚝 솟을 수 있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수성천변에서 우리 시민들이 나에게 보낸 그 열렬한 함성은 눈을 감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보람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 자신의 자존심이요 여러분들의 자존심으로서 결코 꺼짐이 없이 앞으로도 계속 불타 오를 것입니다(청중 박수) .
젊은이와 대화, 서울올림픽이 큰 보람
또 한가지 보람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지성세대들은 2세들하고 대화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87년에 제가 학생들하고 대화를 하려니까 다 거부해요. 그뒤에 노력을 많이 해서 몇만 명의 학생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고약하기도 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으로 큰 보람이었습니다.
내 자신만 하더라도 중학교 1학년 때에 해방이 됐어요. 또 사변이 일어났지요. 우리는 자주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남에게 의존해서 생존해 왔기 때문에 좀 비굴해 보입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한테 무릎을 꿇었고, 우리말 쓰지 않고 일본말을 썼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서양문화를 비판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고 우리 것은 비하했어요. 이런 비굴한 특성이 몸에 배지 않은 기성세대는 없을 겁니다. 이런 자각을 2세들과 대화하면서 느꼈습니다.
2세들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참다운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87년 대통령선거 전에 미국을 방문해서 레이건대통령을 만나고 조지타운대학에서 연설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 한국 학생들이 엄청난 반미사상에 젖어 있다, 어떻게 될 것이냐, 걱정되는데, 노아무개.는 그걸 어떻게 보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걱정할 것 없다, 그리고 아까 제가 말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비굴했다. 우리 젊은이들은 참다운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 그 자존심의 발로다, 그들이 앞으로 성장해서 새로운 한미 관계를 맺는 주역들이 된다면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양국의 협력관계가 좋아 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걱정하지 말라, 이 런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보람이 있었던 또 하나는, 우리 국민이 진짜 하나가 된, 88 서울올림픽입니다. 그 올림픽은 정말 우리 국민들이 하나가 된, 거기에는 정치적인 분열도 없었습니다. 하나가 돼서 우리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떨쳤습니다. 위상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요 조그마한 한반도 속에 동서로 갈라져 있던 여러 가지 갈등을 녹였습니다. 화합입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민주주의를 성공시키고 또 북방외교를 해서 많은 성과를 거둔 것이 보람으로 기억됩니다.
반대로 어려웠던 것은 뭐냐? 노태우는 잘 참는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참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참 어렵습니다.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나라 수준으로 봐서 진정 민주화가 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민주화, 참 어렵습니다. 민주화와 참는다는 것은 딱 일치하는 얘기입니다. 만약 제가 참지 않았던들 민주화는 성공 못했다고 확신합니다.
또 어려운 것이 뭐냐? 제 전임자가 백담사로 가게 될 입장에 있었을 때 참 고통스러웠습니다. 솔직한 얘기지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 열 배의 고난을 내가 안고 내가 고통을 받아도 좋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제 뜻대로 되지 못하고 전임자를 백담사로 보낸 고통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어버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는 동료들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된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한가지 더 든다면, 노력을 해도 잘 안되는 게 있습디다. 지역감정을 한번 없애 보자, 이런 생각을 강하게 가졌습니다. 이것은 제가 대통령 취임하기 전에 민화위를 만들어서 거기서 주요한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광주사태를 포함해서 이 민족을 화합시켜야 되겠다. 지역감정을 없애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정성을 다했습니다만 결국은 잘 안됩디다.
나를 잇는 사람들에게 과제로 인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구사람과 서울사람
이 자리의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우리 마음속에 다짐하고 넘어가고 싶은 대목이 있습니다. 대구 사람이 뭐냐? 내 자신이 대구에서 태어났고 자랐기 때문에 가끔 내 자신에게 물을 때도 있습니다. 흔히들 외부 사람한테 물어 보게 되면, 고집이 세다고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인 이상 단점이 있겠지만 다른 지역 사람하고 상당히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크다, 가슴이 크다, 또 말을 조금 바꾼다면 관대하다, 어느 지역 사람보다도 대구 사람들이 관대하다고 봅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향학열이 높다는 걸 느꼈습니다. 부모, 선배, 스승이 요놈을 가르쳐야 되겠다, 요놈을 가르쳐서 대구사람이 이렇다 하는 것을 한번 보이기 위해서는 매질이라도 해야 되겠다는 얘기를 중학교 다닐 때 선생님한테 들었습니다. 매도 맞았습니다. 말하자면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딴 지방보다도… 지금은 오히려 좀 떨어졌어요. 일반적으로 과거를 생각했을 적에는 이런 열의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신이 어렸을 때, 대구에서 자라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군에 들어가서는 사관학교에 다녔습니다. 당시 사관학교는 진해에서 서울로 옮겨졌는데 서울에 올라와 보니까 대구 사람들은 좀 멍청한 것 같아요. 말도 잘 못하고 조리도 잘 안 맞습디다. 말하는 재주는 제 자신도 그렇고 딴 사람도 비슷합니다. 서울 사람을 보게 되면 참 부러워요. 말도 잘하고 상대방의 기분도 잘 맞춰 줍니다. 우리는 무언가 모자란 점이 더 많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화랑대를 졸업하고 軍사회에 나가서 부딪쳐 보니까 우리 대구 사람이 꾀 부릴 줄을 몰라요. 그런데 서울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내가 왜 어려운 일 다 하느냐, 피하자…. 그런데 저는 피할 줄을 몰라요. 저뿐만 아니라 대구 사람들이 대부분 머리가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부딪쳐 보자는 겁니다. 물론 실패한 사람도 있지요. 그러나 대부분 극복해 냅니다. 불평 안합니다.
어릴 때는 할머니한테 업혀서, 또 걸어다닐 때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대구의 파계사와 그 위에 있는 성전암에 자주 갔습니다. 거기에 계시던 스님이 제가 철도 들지 않았는데 저한테 한 얘기가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때는 무슨 얘기인지 몰랐어요. {네가 가진 것을 다 주라. 남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다 줘. 주면은 부처님에게 간다. 네가 가진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너한테 준다. 또 줘라, 또 주면 또 좋은 것을 네게 준다. 그러면 너는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과거에 대통령 되려고 꿈을 가졌더냐? 전혀 아닙니다. 욕심을 가졌더냐? 아닙니다. 그러면 뭘 했느냐?
내가 찰 수 있는 정성을 다했습니다 힘을 다했거든요. 이것 한번 해 주자. 도와주자, 봐 주자, 이 일념으로 내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 얼마 전까지 그 마음을 가지고 이바지했습니다. 이것은 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서 그 스님한테 들은 말씀이 나도 모르게 내 생애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목사님이나 신부님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님 못잖게 좋아하고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탄허스님과의 인연
양산 통도사에서 돌아가신 스님이 한분 계십니다. 그분이 글을 하나 써서 사람을 시켜서 저한테 전해 주라며 글을 보내 왔습니다. 처음에는 그 뜻이 뭔지 잘 몰랐습니다. 한문인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장부가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를 지니고 있으니, 부처님도 보지 말고 네 마음대로 해라]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는 거기에도 깊은 뜻이 있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그 유명한 학승 탄허스님이 있지요. 80년대에 내가 올림픽 조직위원장을 할 땐가 장관을 할 땐가 그때였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대전이었습니다. 그전에도 그분하고 만나기는 만났습니다. 그때 그 양반을 모셔다가 절을 지은 것입니다. 절을 짓게 되면 혼란이 가라앉고 안정이 된다는 생각에 나라 잘되기 위해서 절을 지었습니다.
아무튼 그분은 30분 동안 저를 말도 없이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자기 평생에 새겨 갖고 있던 것을 말씀합디다.
처음에는 허황한 얘기같이 들려요. 왜 그런고 하니 {盧장관께서는 앞으로 우리 한반도보다 10배 넓이의 나라를 생각하십시오}라고 했거든요.
우리나라의 10배. 여러분들, 어떻게 하든 북방정책을 해야 되겠다는 정신적인 지주가 바로 그 구절입니다. 이런 얘기는 오늘 여러분들한테 처음 합니다.
이제 앞으로 내 자신, 또 여러분들과 함께 무엇을 했으면 좋겠는지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 북방정책은 변할 수 없습니다. 2000년, 늦어도 2020년 내지 2030년 가면 우리의 문화권이 형성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력으로 쳐올라 가서 옛 조상들이 차지했던 만주 발해 연해주를 먹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 만주 연변에서 제일 큰 소수 민족이 조선, 우리 한국민족입니다. 우리의 문화를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연해주에는 지하자원이 무제한 있습니다. 계속 파면 석유가 나온다고 합니다. 30여 만명의 동포가 거기 살고 있었는데 스탈린 정부가 중앙아시아로 다 쫓아 버렸습니다. 이들을 다시 모으려고 고르바초프와도 상의를 했고 옐친대통령과도 상의를 했습니다. 그쪽 러시아, 즉 당시 소련의 반응은 정책적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민족분열로 인해서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민족이동은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가서 해 줘야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기업도 진출시키고 우리 사람들도 좀 이주시켜서 개발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결국은 너희 나라를 개발시켜 주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집단이주는 할 수 없지만 개별 이주는 좋다고 하더군요, 그 당시 내가 재임 때 대통령으로서 기업인들과 학자들에게 개별적으로 다 얘기해 주었습니다.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우리 동포들을 하나 둘 나오게 하고, 또 우리 기업, 우리 기술자, 우리 근로자들에 적어도 1백만 내지 2백만 명이 앞으로 몇십 년 이내에 그쪽에 가서 경제개발을 이룩해야 되겠다고 말한 겁니다.
과거 우리는 월남파병에서 시작, 그 다음에는 중동 열사에 들어가서 우리 경제를 일으켰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들어갈 만한 남쪽이 없습니다. 이제는 북쪽의 중국과 러시아에서 우리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에너지를 구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인재양성 배워야
나의 생활철학과 신념이 화합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세대간에 또 계층간에, 기업간에 갈등과 불화를 화합시켜야 되겠다는 겁니다. 또 화합을 시켰으면 그걸 어떻게 지속해 나가느냐, 여기에 우리의 지혜와 정력을 바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인재양성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지요. 제가 벌써부터 중국의 초청을 받고 있는데, 10월에 갈까 하다가 연기시켰습니다. 중국 가기 전에 대화자료를 만들기 위해서 문헌도 보고 얘기를 좀 듣다가 보니까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일본 사람들도 깜짝 놀랄 일입니다. 일본이 저렇게 발전했는데도 인재 양성이나 제도, 사람을 생각하는 지도자의 생각이나 전통은 중국을 못 따라갑니다.
중국은 지금 강택민이 주석 아닙니까? 어떻게 해서 강택민을 지도자로 뽑았느냐? 등소평의 작품이죠. 과격하고 개성이 너무 강하고 급진적인 사람은 중국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반면에 부드럽고 온화하고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사람, 사람간의 밸런스, 지역간의 밸런스를 맞출 줄 알고 회계를 알고 경제를 아는 사람이 중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원칙을 굳힌 겁니다. 그래서 혁명 1세대, 지금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등소평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문화혁명 때에 수천만 명이 희생당하고 엄청난 피를 흘렸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광주사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런 갈등, 이런 불화, 이런 피를 흘린,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자 4인방만 딱 처리하고 나머지 별의별 짓 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처벌 안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주동한 것이 아니다, 명령에 따랐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후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주었습니다. 중국의 혁명 1세대 원로들은 뒷방자리에 앉아서 감시만 합니다. 등소평을 중심으로 해서 짐을 다 졌습니다. 등소평은 이해를 시키고 공감대를 넓혀서 원로들을 대접하고 활용하는 입장입니다. 이런 원칙에서 그들은 60대 인물, 50대 인물, 40대 인물, 30대 인물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지도자로 부상된 사람이 더러 있지요. 허군도라든가 왕검이라든가 또 경제전문가 주용기라든가 외교부장을 한 전기침이라든가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전부 과격하지 않고 급진적이지 않고 개성이 너무 강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원로들이 이들을 지도자 집단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앞으로 등소평이 죽고 난 뒤에도 중국은 그대로 일어나고 안정되어 나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내 자신도 과거에 미리 알고 여기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해놓을걸 하고 후회합니다 나라의 이런 인재들을 길러야 된다는 생각을 부단히 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정말 두서없이 얘기했지만 한두 마디 더 여러분에게 당부의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큰 인물이 됩시다. 참을 것을 못 참아서는 안됩니다. 참을 수 있는 인물, 기다릴 수 있는 인물, 남의 허물을 관용할 수 있는 인물, 이런 인물이 됨으로 인해서 우리는 스스로가 성장할 수 있고 나아가서 사회 국가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건강합시다.
고맙습니다(청중 박수).
다음은 노태우 전대통령의 강연 후 청중과의 1문1답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북방정책의 목표 중의 하나가 결국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봅니다. 통일에 대한 방안을 듣고 싶습니다.
{내가 재직 때는 단계적으로 나누었습니다. 1단계 2단계 3단계. 제1단계는 북한을 중심으로 한 소위 그들과 이념을 같이하는 모든 나라들하고 수교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략적인 차원에서 포위를 한 겁니다. 당시 소련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서 제1단계는 완성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2단계가 됩니다. 그때 중국과 수교를 한 여력으로 북한을 통일하는 방법은 전쟁도 아니요 여타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개방이다, 말하자면 개방〓통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련과 중국과의 수교를 바탕으로 해서 북한을 개방시키기 시작했어요. 여러분들, 우리 현대사에서 대통령 임기기간에 총리가 8번이나 회담을 하고 남북한 간에 화해와 협력의 기본합의서가 이룩되고 또 한반도의 비핵화 중동선언문을 문서화한 때가 언제 있습니까.
이제는 제2단계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그 합의서를 하나하나 이행시키는 것이 개방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벌써 발이 들어갔는데, 참 공교롭게도 정부가 그냥 또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와 1백% 호홉을 같이 해 주고 지원을 해 주었던 미국도 정부가 바뀌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정부는 뭐 더 좋은 새로운 것이 없느냐, 찾다가 감상적으로 이념보다도 민족이 우선이다 하는 제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봐서는 좀 방황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동안에 통일원장관도 몇 번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재임시에 북방정책을 강하게 지원해 주었던 미국도 부시대통령이 재선되었으면 정책이 그대로 나가는 건데 클린턴대통령으로 바뀌었습니다. 거기도 뭐 새로운 것이 없느냐, 찾다 보니까 상승작용이 일어났습니다.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 그동안 우리 국민들이 걱정했지만 우리가 밟지 않으면 안될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잘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겠지만 나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나쁘다고 해서 역사가 잘못 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제자리에 돌아온다는 신념을 가져 야 됩니다.
조금 늦춰진 감은 있지만 내 자신이 구상한 것이 실천이 됐고 또 그 정책은 앞으로 우리 정부가 서두름이 없이 밀고 나가리라 생각합니다}
-항간에 4천억원 비자금설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그 돈이 있으면 우리 경신회 회비로 내주시지요.
{4천억원 가지고 경신회 회비나 하세요. 아까도 내가 얘기했지만 우리 스스로가 이 나라에 존경받을 수 있는 대상자를 한 사람도 만들지 않는 것은 국민성이라 할까 참 고약한 일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