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발제와 토론 / 광주항쟁의 민족사적 의미. 최장집, 서중석(역사비평, 1989. 여름)
본문
발제와 토론
광주항쟁의 민족사적 의미
때 : 1989년 3월 30일
곳 : 역사문제연구소 회의실
참가자 - 이종범<조선대교수·역사학>
조희연<성공회신학대학 강사·정치사회학>
김민석<민족과세계연구소 연구원>
발 제 - 서중석<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본지주간>
발제
광주학살·광주항쟁은 민족사의 분수령이었다
1. 한국사 초유의 광주학살·광주항쟁 -해방의 10일
광주학살과 광주항쟁 -해방의 10일은 한국 역사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은 없지 않았으나, 한국을 뒤흔든 광주의 10일은 그 예측을 훨씬 뛰어넘는, 문자 그대로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었다. 일군의 정치군인으로 이루어진 극우 파시스트 군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들에게는 이제 끝없는 파시스트적 권력의 욕구 아래 파멸을 향해 권력을 쌓아올리는, 역설적이지만 시지프스의 악전고추의 작업이 계속될 뿐, 결코 안이하게 권력을 누릴 수도, 새로이 쿠데타를 일으켜 간단히 권력을 잡을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인 명백해졌다. 한국 사회는 엄청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빙산의 감춰져 있는 부분에서는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이래 여러 차례 재편성된 기존의 지배질서를 혁명적으로 해체하려는 꿈틀임이 계속되어 왔는데, 그것이 부마사태·사북사태로 일단의 분출을 한 것이었다면, 활화산으로 터진 광주항쟁의 진원은 훨씬 깊숙하고 그 파장은 훨씬 심대한 것이었다.
한국은 이제 엄청난 불확실의 시대, 예측할 수 없는 사회로 진입하였다는 것을 광주는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여차하면 제 2의 광주는 언제고 또 어디에서고 그리고 전국적인 규모로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광주의 10일은 보여준 것이다. 지배동맹의 강력한 핵심체로 자처하는 파시스트 군부의 대응방법 때문에도 그렇지만, 지하 깊숙이에서 달아오른 용암처럼 터져 나올 분출구를 찾아 끓고 있는 민중의 용틀임 - 낡은 껍질을 벗겨 버리고 새 사회를 만들려는 갈구 때문에 제 2의 광주는 언제고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오랫동안 움츠리고 주눅이 들었던 민중은 광주의 함성에서 자신의 동일체감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겁이 나고 자신이 없으면서도 민중은 광주에서 자신들의 에너지가 분출된 것을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민중의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은 광주의 10일이 말해주듯 사뭇 힘들고 어려운, 그 또한 시지프스의 악전고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난 역사의 축적 위에 현재가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배동맹 블럭과 대항동맹 블럭은 혼돈과 미로 속에서 여태까지와는 분명히 차원이 다른 새로운 형태의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은 광주의 10일로 민주화와 자주화가 이뤄진 새 사회라는 것을 빼놓고는 그 지향하는 목표·세계상·체제는 불확실하지만, 새로운 역사적 차원의 시기, 새로운 역사의 단계로 진입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광주의 10일은 새로운 형태의 싸움이 벌어지고 새로운 사회가 건설되는 지렛대이고 예고로서, 한국 근현대사의 결정적 획이요 분수령이다.
이것이 1980년 5월의 광주를 목도하며 당시에 가질 수 있었던 느낌이요 예견이 아니었을까?
광주학살·광주항쟁 - 해방 9년의 시점에서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매겨본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일 수 있다. 광주청문회가 계속되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 광주의 진상은 짐작은 가지만, 일반인에게는 공표되지 않았고, 광주청문회가 계속 삐그덕거리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 광주학살의 책임자들은 여전히 강고한 위치에서 광주의 진상을 얼버무리려 하고 있어, 일반인에게는 혼란이 중첩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광주항쟁의 역사적 계승은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광주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거니와, 광주항쟁이 지향하는 세계도 민주화 - 자주화 - 통일이라는 지표 외에는 아직 분명하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에, 섣불리 광주의 10일간에 대한 민족사적 의의를 따져본다는 것은 자칫하면 일면적이고 편의적일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의 봄→5·17쿠데타→)광주항쟁으로부터 시작된 1980년대의 한국 역사는 해방 3년을 제외하고는 한국 근현대사의 어느 시기보다도 파란에 찬 것이었고, 격랑 속에서도 중요한 진전이 있었으며, 민족사의 과업이 민주화 -자주화 -통일이라는 큰 줄기로 가닥이 잡혔고, 주체세력 형성도 여전히 가변 요소는 많지만 어느 정도는 윤곽이 드러나고 있으며, 1987년의 6월 민주항쟁 - 7,8,9월 노동투쟁과 그 이후의 상황은 일정하게 질적 양적 수준의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서, 1980년대를 마감하는 금년에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한번쯤 새겨보는 것도 의미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10·26에서 5·17까지의 정세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10·26은 처음에는 일반 대중에게 얼떨떨한 상태를 갖게 하였고, 유신체제에서 안주해 온 세력들-많은 지식인, 고소득 샐러리맨, 친체제적인 중산층 포함-에게는 캄캄한 절벽,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지 전혀 가늠하기 어려운 캄캄한 절벽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부터 국민대중에게는 유신 독재에서 벗어나 대통령 직선제 등 최소한의 민의는 반영되는 정치체제가 기대되었고, 민주세력에게는 유신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화를 이룩해야 할 중차대한 기회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에게 10·26에서 5·17까지의 시기는 막연한 기대 속에 전망이 불투명한 애매모호한 시기로 느껴졌고,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이나 신현확 국무총리, 내각이 유신의 잔당이기는 하여도 이름에 상부할 권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도 권력의 소재가 어디 있는지 딱 잡아 판단하기도 쉽지 않았다. 민주화의 몸짓은 여러 형태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계엄 상태였고 언론은 일일이 계엄사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학원만은 약간 달랐다. 봄이 오면서 학원 안에서만은 자유가 만개하였다. 학원은 자유의 천지요 민주공화국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만 걸어라오면 유신체제와 별반 다름없는 사회가 버티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야당 지도자는 대권에 몸이 달아 있었고, 힘을 합쳐도 미약했을 터인데 평행선만 달렸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권력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지만, 그것은 숙지되지 않았던 것이 5·17까지의 분위기였다. 권력을 장악한 자들은 민주화에 대한 욕구가 자신이 수호해 왔고 수호하여야 할 체제를 해체하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민주화에 대한 욕구는 기존 권력-유신체제를 해체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민주화에 대한 욕구는 폭발적일 수 있었다.
12·12쿠데타세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
10·26에서 5·17까지의 상황에서 권력의 성격과 미국의 역할에 대해 민주세력 사이에는 매우 애매한 판단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한번쯤 꼭 논의해야 할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은 유신체제의 핵인 박정희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정치 민주화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서, 유신체제는 더이상 지탱할 수 없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판단 속에는 유신체제가 단지 한 개인의 권력욕에서 나왔다는 단순한 발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유신체제는 일단 박정희식 근대화 노선에 서 있는 이상 피하기 어려운, 박정희식 경제건설을 가동하기 의한 체제였고, 세계 자본주의로의 깊숙한 편입 속에 국내외 독점자본이 요구한 체제로서, 1971년에 있었던 민주화의 분위기, 사회변화의 분위기에도 겁을 내고 있었던, 그래서 노동통제를 주목적으로 하는 국가보위법치 제정에서부터 출범한 분단체제세력의 안전판이었다. 따라서 박정희가 죽었기 때문에 권력의 핵심에는 일정 기간 동요가 있었으나, 그것은 일단 12·12쿠데타로 수습되었고, 유신체제하에서 본격적으로 자본축적을 이뤄 거대기업으로 성장한 재벌·독점자본은 민주주의란 태양에 강한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중산충은 회색분자로서 어느 쪽이든 유리한 쪽으로 기울 수도 있었으나, 민주주의에는 얼마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박정희식 경제건설의 구조적 모순은 심각하게 노정되어 있었고, 게다가 불황 등 경제적 위기가 덮쳤고 노동계급은 비약적으로 성장·확대되었던 것이다. 유신체제의 물리적 장치인 관료조직, 경찰·검찰·사법조직, 정보조직은 10·26 이후에도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당시에는 특히 군의 의지와 그들이 지향하는 세계상에 대해 모호하고 막연한 생각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12·12쿠데타의 본질과, 12·12쿠데타 세력의 성격, 인적 계보를 모르고 있었다. 12·12쿠데타 이후 권력의 핵심은 쿠데타 주동자들에게 넘겨졌고, 최규하 신현확 등이 일제시기 이래 계속 권력의 주구의 역할밖에 못했다면, 12·12쿠데타세력은 박정희체제가 양성한 박정희의 분신인요 적자(嫡子)요 간성이었다. 그들은 박정희 못지 않게 권력에 대해 무한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방조에 의한 12·12쿠데타 성공 이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권력의 정상에 부상하는 시기와 그 방법에 관련된 작전뿐이었다. 그들은 파시스트적 통치만이 민주주의란 혼란에서 자신이 수호하였고 수호해야 할 체제를 지키고 유신체제하에서 있었던 경제성장을 계속 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한치만 양보하여도 그들의 권력이 와해될 수 있는 혼란이 빚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는 물리력과 통제, 정치조작밖에는 믿을 것이 없다는 신념과 함께, 본질적으로 반민족적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반민주적일 수밖에 없는 한국 극우세력의 피해심리가 강령히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의 폭력의 속성과, 한국 근현대사의 본질적 속성 때문에, 민중이 한번 일어서기 시작하면 그들은 체제와 함께 몰락하고, 세상은 뒤집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인식과 의식·무의식 속에서는 작전처럼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양자택일적 사고가 우세할 수밖에 없었고, 체제는 선택할 수도 있으며 정권은 주고받을 수도 있다는 사고는 도저히 이해되기도 용납되기도 어려웠다.
10·26에서 5·17사이의 미국의 역할
미국의 카터행정부는 12·12쿠데타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한국 정치의 개량주의적 변화와 형식적 민주주의는 환영할 것이고, 군부의 정권장악에 대해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전두환씨가 보안사, 중앙정보부 등 두 정보기관의 장이 된 것을 못마땅해 한다는 주장이 1980년 봄에는 왜 널리 퍼져 있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대소 전진기지로서, 또 경제적 정치적으로 미국의 이해를 관철시켜 줄 수 있는 안정적 정권을 원했던 것은 1980년 봄에도 마찬가지였다. 유신 말기의 정권에 대한 국민적 염증과 저항은 1960년 4월에 있었던 이승만에 대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교체를 필요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박정희의 제거는 분위기만 바꾸는, 일종의 기분전환으로, 조삼모사의 의미가 다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국민의 원성이 높은 박정희는 제거하고, 유신체제는 적당히 변형하되 그것은 안정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면, 여기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군부의 등장에 의한 체제의 안정 곧 체제의 지속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러한 추론에는 10·26, 김재규 제거, 12·12, 5·17에 미국이 전부 개입하였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국은 시사, 묵인, 양해를 포함하여 간접적으로라도 미국의 의사나 의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이 충분히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이나 장면, 박정희 못지 않게 양 김은 미국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미국은 구태여 양 김의 집권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당시에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양 김이 집권할 경우, 파시스트 군부 등 유신잔재와 크게 대립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장면 정권처럼 적극적인 제동을 걸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있을 수 있다. 미국은 제발이 저린 격이겠지만, 경우에 따가서는 양 김의 집권과 같은 약체정권 아래에서는 민주화운동이 혁명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10·26쿠데타에 의한 김재규 집권의 경우에도 가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재규가 집권하였다면, 그는 박정희의 정치 기반-그것은 김재규 자신도 공유하는 것인데-의 상당히 큰 부분을 파괴하고 그것과 대립하면서, 반유신민주세력에 대해서는 과감히 대응하기 어려운 취약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한 마디로 김재규는 집권해도 그 기반이 너무나 약한 것이었다. 따라서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의 살해→김재규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데리고 중앙정보부로 못가고 육군본부로 (끌려)감으로써 혁명정부 구성의 실패→l2·12쿠데타에 의해 남아 있는 군부내의 김재규 세력(당시 군부내의 2대 세력이었으나, 중견 장교에 영향력이 약했고 우유부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의 제거와 야심만만한 행동적·파시스트적 군부의 실권 장악→5·17쿠데타에 의한 군사권력의 표면화는 보인지 않는 손이 작용하였건 작용하지 아니 하였건 지배동맹블럭을 분열시키지 않고 무난히 계속 집권을 가능케 하는 가장 확실한 프로그램이자 스케줄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의 능력, 10·26이후 집중된 정보력, 특히 군 동태 파악 능력과, 미국의 엄연한 작전권 이상의 위치를 검토해볼 때, 12·12쿠데타는 미국이 저지하려고 의도하였다면 성공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었고, 5·17쿠데타는 전후 사정을 분석해볼 때, 미국과 무관한 것만의 아니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런데 광주학살은 분명히 12·12쿠데타-5·17쿠데타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미국은 당시에 집권하고 있었던 카터 행정부의 최대의 실책으로 비판받고 카터 행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은 제 2의 이란사태가 한국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과 한국의 지배권력과의 관계, 미국과 이란 팔레비왕 권력과의 관계는 너무나 흡사하였다. 한국의 지배정권은 민중적 기초가 지극히 취약하였고, 그것은 미군정의 연장선적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다. 미군은 1945년 9월 한국에 진주하면서, 일제통치기구를 잔존시키고, 총독부관리를 유임시키고, 친일파를 요소요소에 배치하고 토지개혁을 유야무야시키는 등, 한국 민중의 간절한 민족적 염원과 너무나도 배치된 역할을 하였고, 분단과 그 이후에 분단체제를 고착, 강화시키는 군사·정치·경제·문화 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미국은 한국의 민중에게 형식적 민주주의를 주는 것도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한국인은 어디까지나 힘에 의해서 눌러 놓지 않으면 언제고 폭발하여 터뜨리고 나올 것이라는 발상의 근거가 주어진다. 거기에서 미국은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 해방 직후의 상황을 볼 때 적반하장격이지만, 한국민족을 민주주의를 가질 수 없고 자치능력이 없는 열등민족으로 매도하여 왔다. 10·26, 12·12, 5·17 때의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의 '들쥐' 운운 발언이나 레이건 행정부 때의 워커 전주한미대사의 "버릇없는 애새끼들" 운운의 발언은 이와 같은 미국의 입장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미국의 한반도에서의 성격과 지배권력의 성격, 미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한국의 중요성의 증가, 그리고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경제구조의 성격과 노동계급의 성장 때문에, 한국의 민주화는 지배질서의 재편·교란·파괴를 의미하고, 국내외 독점자본-재벌과 종속경제를 공격하고, 더 나아가서는 지배권력의 붕괴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혁명적인 상황으로 진전되고, 그것은 곧 반미운동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판단된다면, 당시의 상황에서 미국의 선택의 폭은 한계가 분명할 것이다. 미국은 '들쥐'의 세계에서 '모험'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가장 안전한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서울의 봄' 시기에 혼란은 있었는가
5·17쿠데타는 파시스트 군부가 권력의 정면에 등장하는 D-데이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러나 12·12쿠데타 세력이 1980년 봄의 상황을 빙자한 것을 분명히 가려내는 일은 1980년대 군부정권의 행태와 광주학살-광주항쟁의 성격을 정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80년 서울의 봄에서 노동운동이 활발하기는 하였으나, 노동자가 대량 산출되고 국가보위법 발동 이래 노동운동이 금압된 것을 생각해 볼 때는 그다지 폭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북사태는 폭발적이었으나 곧 진정되었고, 서울 일원의 가장 큰 노동쟁의였던 청계피복 노동쟁의는 노사간의 합의로 당시 보수적인 언론에서 찬양까지 받았다. 노학연대투쟁도 노동운동쪽에서 거부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학생시위는 어떠하였는가. 그것 또한 차분하였다. 학생들이 대거 거리에 나선 것은 서울의 경우 5월 13일에서 15일까지의 3일간이었다. 누가 무슨 의도로 퍼뜨렸는지 대충 짐작케 하는 5월 12일 저녁 이후의 친위쿠테타설과 군부의 학원점령설, 휴전선 교전설이 허위였다는 것이 판명된 것도 13일의 시위에 영향을 미쳤는데, 서울역 밀대에 10여만 명이 집결하였던 15일의 시위에 대해서는 당시 당국이 강조해 마지 않았던 '위기'의 계엄령하인데도 거의 제지가 없었다. 이날 남대문 도뀨호텔 부근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차량이 불붙은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일 없이 학생들은 자진 해산하였고, 이날 밤 자정부터 다음날까지 있은 학생회장단의 회의에서도 가두시위를 중지하고 정상 수업을 받기로 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이미 며칠 전인지 서울의 몇 지역에 출동한 상태였다. 광주의 경우, 5월 14일부터 가두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15일에는 교수 50여 명과 같이 시위를 벌였으며-광주의 경우도 나중에 알았지만 역시 이때쯤 계엄군이 포진하고 있었다-16일에는 9개 대학생 3만여 명이 경찰의 '협조'아래 야간횃불시가행진을 가졌다. 이 시위도 밤 10시경 자진 해산하였고, 17일에는 추이를 전망할 겸 시위는 없었다. 서울이든 광주든 주체역량도 미흡하였지만, 정치군부의 동태 때문이었다. 그런데 5월 17일 23시 40분 이규현 문공장관은 24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확대한다고 발표하였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지배세력은 사소한 시위조차 큰 혼란으로 위험시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의 지배동맹블럭은 어느 경우나 지극히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4·19시기의 경우도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조금한 데모가 자주 있었을 뿐 딱히 혼란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도, 자신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큰 혼란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었고, 이것을 빙자하여 군부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10·26에서 5·17에 이르는 시기도 유신권력의 성격과 경제구조의 모순 때문에 지배 제세력의 기반은 그다지 튼튼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지는 면이 있었고, 경제사정 또한 나빴다. 그러나 5·17쿠데타가 혼란방지용 거사였다는 12·12쿠데타 주동자들의 강변은 그 근거가 너무나 뻔뻔스러운 것이었다. 5·17쿠데타는 기대된 것이고, 예견된 것이고, 계획된 것이었다.
3. 광주학살과 광주항쟁 -해방에 대한 평가
해방은 미·소군의 진주라는 특수한 성격 때문에 3년의 유예기간이 있었지만, 4·19시기에는 군부의 반동이 오는데 1년 1개월이 미쳐 안 걸렸고, 서울의 봄 시기에는 5·17쿠데타로 민주화의 열망이 압살되는 데 6개월밖에 안 걸렸다. 역사가 흐르면서 자주화·민주화가 꿈틀거렸던 기간은 계속 반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5·17쿠데타 다음날부터 진행된 광주학살극은 본격적인 민주화와 자주화를 이룩하는 분수령으로 작용하였다. 민중들의 거센 투쟁-광주항쟁-해방이 촉발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광주학살의 진행과정을 살펴보거나, 광주학살의 진상을 가려내고자 하지 않는다. 또 광주항쟁의 과정이나 해방의 실상을 규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왜 광주학살이 그토록 잔혹한 형태로 이뤄졌는가, 또 광주시민은 파시스트 군부의 상상을 초월한 광폭한 진압에 전혀 굴복하지 않고 왜 그토록 강렬하게 맞서 싸웠는가, 그 까닭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광주청문회, 5공비리청문회에서 누차에 걸쳐 언급되었듯, 광주학살은 시위에 대한 단순한 제지 또는 진압이 아니었다. 장기적인 군부독재정권을 굳건히 다지기 위한 '필승의 작전'이었다. 12·12쿠데타 주동자들은 5·16쿠데타 직후와 유신쿠데타 직후에 그랬던 것처럼, 정통성도 없고 비법적이고 더구나 국민대중의 간결한 민주화 소망을 무참히 짓밟은 더러운 권력이었기에, 자신들을 비판하고 자신들에게 저항, 도전할 수 있는 제세력을 단호하게, 적나라한 형태, 발가벗은 짐승의 형태로 압살하고자 하였다. 그들에게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인간관 그대로, 한치의 빈틈도 없이 단호하고 잔혹하게 압제하면 국민대중은 복종하기 마련이다는 사고가 그대로 작용하였던 것 같다. 그들을 자신들의 목표에 맞춰, 스케줄에 따라, 작전을 집행해 갔는데, 광주항쟁은 5·17군부쿠데타에 대한 첫번째 정면도전이었을 뿐 아니라, 대단히 규모가 큰 도전이었다. 더욱이 유신체제의 권력 구성과 독점자본 형성의 또 하나의 핵을 이루고 있는 대구·영남의 지역성을 고스란히 계승한 그들로서는 자신들에게 가장 크게 도전할 수 있는 김대중 세력과, 자신들에게 가장 크게 반발하는 호남 민중들을 단호히 무자비하게 짓밟아 다시는 조금도 저항할 수 없게 하는 것만이 권력을 반석처럼 다지는 길이라고 결의를 다지고 있었던 것 같다. 호남민중들의 저항의 철저한 분쇄는 오히려 군부독재를 위해 탄탄한 길을 닦는 것으로 인식, 예견된 것이다. 군부의 이러한 의도 또는 작전은 곧이어 일어난 삼청교육대사건, 기자·교수의 추방, 민주인사·노동·농민운동자에 대한 탄압과 민주노조의 분쇄, 노동관계법, 집시법의 개악, 언론기본법의 제정 등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은 1981년 초 대통령 선출 과정, 모모기관에 의한 여·야당창출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그러나 군부의 광주학살과 그 이후의 작전에 의한 민주세력 압살과 악법 제정 등 일련의 집권 과정은 자신들의 사고 또는 의식수준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일시적으로는 위력을 떨칠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80년대의 한국인의 의식 수준, 정치 사회 경제적 수준으로 볼 때는 한낱 만행이었고, 무척 낙후한 방법이었다. 그만큼 군부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고 경직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정치군부가 그들이 생각하는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처럼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박정희가 20년간 다진 권력의 집중 덕택으로 단시일에 권력의 정상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바로 분단체제, 이승만과 박정희가 수호하려고 했던 그 체제를 부둥켜 계속 살리기 위하여 그와 같은 무단적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1980년대의 군부정권이 단순히 분단체제- 이승만·박정희체제의 계승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고도로 특수화되어 1970년대에는 유신체제로 나타났던 것을, 1980년대에는 다시 더욱 경직된 형태로 수습하여 나갈 수박에 없게 되었다는 분단체제의 특수한 국면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강력하고 단호한 것같이 보이는 정치군부의 '작전'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중들에게 점점 깊숙이 포위당해 사실 상당히 취약해진, 그리고 강하게 궁지로 몰리고 있는, 위기의 시기에 나타나는, 때문에 당시의 표현을 빌면 유신잔당의 존립을 위한 몸부림으로서, 극약을 투입하지 않으면 체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단계라고 판단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분단체제 옹호를 위한 최후의 권력형태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거기에 가까운 형태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무자비하면 할수록, 낙후한 수법을 쓰면 쓸수록 그들의 추악한 모습은 더욱 선명히 부각되고, 그들이 장악한 국가와 그들이 수호하는 체제의 성격은 또렷해지게 된다. 이 때문에 국가의 양면적 성격 중 한쪽만이 노골적으로 경사되어 표출되게 된다. 그들은 사당(私黨)이었고 도당같았다. 그들이 하는 짓은 한 무리의 사당 또는 도당들의 발가벗은 본태(本態)로 보였다. 대통령은 이제 최소한의 의미에서도 대통령으로 간주되지 아니하였고, 사당 또는 도당의 우두머리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들로 하여금 국민대중으로부터 따돌림받게 하였고, 학생 등 민주세력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투지를 엄청 자극하였다. 그들의 강경정책은 강경한 만큼 억지요 만행임이 분명하여 그것에 대한 대응, 곧 투쟁은 훨씬 호소력이 있었다. 그들은 광주학살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고, 광주항쟁-해방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단기적으로도 패배하였고, 1980년대 중 후반기의 격렬한 민주화 자주화운동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중기적으로도 패배하였다. 이제 그들에게는 최후의 패배만이 남게 되었다. 역사의 섭리,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러하였다.
광주항쟁 - 해방의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초기 광주시민들을 분격시킨 데에는 '유신잔당'들의 지방색과 김대중씨 체포가 상당한 역할을 하였으리라는 것은 널리 지적되고 있다. 그 실체는 어떻든 김씨가 유신체제하에서 받은 핍박은 호남인들의 피해의식과 결부될 수 있었다. 또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김씨가 전국적인 인기를 모았는데도 지방색 때문에 낙선한 뒤, 고초 끝에 김씨는 1980년 봄 어떻든 재부상하여 호남인들의 기대를 모았는데, 5·17쿠데타로 그것이 물거품되고 김씨가 체포까지 됨에 따라, 호남인들의 분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유신독재는 특정지역 출신의 군과 관료, 재벌로 유지되었고 그들을 살찌웠는데, 이것은 상대적으로 전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박탈감과 소외감을 증폭시켰다. 따라서 박정희 살해=민주화 촉진은 광주의 재생, 또는 광주의 새로운 발전을 기약하는 것이었는데, 다시 대구. 경상도의 군부세력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 민주화가 좌절됨으로써 광주의 기대가 무너질 때, 이들 정치군부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분노는 어떤 지방보다도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광주시민의 민주화 욕구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연결되는 것이었고, 그것은 특정지역 출신의 특권적인 군, 관료, 재벌 의에서 펼쳐지는 독재권력-이 경우 독재권력은 지방색을 필수적인 부대물로 한다-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 때문에 1980년대에 광주는 한국 민중운동의 견인차요 추진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광주시민들은 1960, 70년대의 부의 성장에 강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광주의 소외계층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더욱 크게 박탈감과 핍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1979년 광주공단보고서를 보면, 전남지역 평균임금은 35,073원으로 전국의 평균임금 74,121원의 47.2%에 불과하였다. 또한 소비도시인 광주에서도 시내와 가까운 학동의 경우 실업자 룸펜 빈민층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고, 광천동 임동은 운수정비업체, 가구업, 방직부속공업, 하청기업, 가내소공업 등 소규모 기업체가 몰려 있고, 불완전 고용상태의 노동자가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이들 실업자 임노동자 룸펜 빈민 등 대중들은 광주항쟁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에서 5월 25일 이후 최후까지 도청사수를 결의한 200여 명은 거의가 노동자 종업원 룸펜 등 일반대중이었으며, 105명의 사망자에 한해 직업을 분석해 볼 때, 37명이 근로빈민, 11명이 무직이었다. 구속자도 357명 가운데 127명이 근로빈민이었다. 이렇게 볼 때 광주항쟁은 박정희식 경제건설에서 소외된 일반대중이 중요 역할을 한, 민중항쟁적 성격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광주시민들의 항쟁을 격화시킨 것은 5월 18일부터 있었던 공수대원들의 만행 -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정치군부의 작전이었다 -으로서, 그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5월 20일 공수부대의 만행에 도망치던 시민들의 고함이 더욱 거칠어지고 흥분이 절정에 오르면서 "시민들이여! 모두가 일어섭시다. 우리의 자식들이 다 죽어갑니다. 공구든 곡괭이든 닥치는 대로 가지고 싸웁시다"라는 절규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고, 다음날에는 도청에 있는 계엄군을 몰아내기 위해, 어머니 손목을 잡은 꼬마에서 중고생들, 그리고 70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10여 만 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도청으로 진격하였던 것이다. 광주가 해방지구가 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문제는 과거 같으면, 정치 군부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공수대원들의 가차없는 '화려한 작전'에 일반시민들이 기죽고 겁나서 숨어들어 갔을지도 모르는데, 이때는 오히려 더 용감히 시민과 학생들이 손에 손잡고 어깨를 같이하여 싸웠다는데 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박정희 군부정권 아래서 당할 대로 당하고 소외될 대로 소외된 광주지역의 시민들이 이제 박의 계승자인 12·12쿠데타 군부정권체제에서만은 더이상 당할 수 없고, 그들과 싸워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변혁의 의지가 5·18을 통해 활화산으로 터뜨려진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광주시민의 항쟁에는, 그리고 삽시간에 번진 호남인들의 항쟁에는 유신독재와 박정희식 경제건설에 대한 거부가 강력히 작동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또한 분단세력에 의해 압살되었던 민중의 해방조국에의 꿈, 5·16쿠데타로 압살당한 4·19시기의 민주주의와 통일조국에의 염원, 10·26 이후 간절히 피어오른 민주화와 직선제, 정권 교체에의 희구가 5·17쿠데타로 압살당한 것에 대한 처절한 분노가 상호 깊숙이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마디로 광주항쟁에서 보인 광주 학생·시민, 호남인들의 투 지는 분단체제를 강요하고 그것을 악용해 온 반민중적 독재정권을 이제는 더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소외된 지역, 소외된 민중들의 변혁의지의 소산이었다.
세계사나 한국의 근현대사를 볼 때 아무리 잘 싸워 이겨보려고 해도 안되는 때가 있고, 하면 당장은 큰 손실과 위해가 오고 오그라들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커지고 뭉쳐져 더욱 강력한 힘으로 성장하여 압제자와 싸워 이겨나가는 시기가 있다. 광주항쟁은 바로 이처럼 민중의 에너지가 역동적으로 집결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역사적인 분수령이었다. 어쩌면 근현대사 100여 년 동안, 어쩌면 분단 30여 년 동안, 어쩌면 5·16이후 20년 가까이 당하기만 했던 민족이 그것을 거부하고 일어난 엄청난 규모의 전환점이자 분수령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폭압으로 누르려 해도 눌려지지 않고. 누르면 용수철처럼 튀고 같이 일어나 싸우는 때, 이런 때는 정치군부로서는 최악의 시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광주항쟁은 민족세력과 반민족세력, 민주세력과 반민주세력, 민중세력과 반민중세력이 한판 승부를 크게 벌린, 한국 민주·민족 모순이 집중적으로 폭발되기 시작한 세기적 전환점이었다. 다만 국민대중과 그 전위인 학생 청년들이 그 때문에 무자비한 폭압과 테러를 당하게 되며, 파시스트적 도착과 경련에 따르는 커다란 희생을 감수하지 않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
4. 광주항쟁과 5월투쟁 - 민주화·반미 자주화운동
광주의 시인 김준태는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에서 "… 하느님도 새떼들도 / 떠나가 버린 광주여 /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 아침 저녁으로 살아 남아 /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라고 노래하였지만, 1980년 5월 광주항쟁 이후 광주는 5월만 되면 불사조로 살아나 민주화와 자주화를 바라는 조국의 모든 학생·청년의 가슴에, 국민대중의 가슴에 뜨거운 불길이 되어 가열차게 타올랐다. 광주는 민주화와 자주화, 통일의 적에 대해서 이제 영원한 사슬이 되었다. 이제 광주는 군부독재세력과 미국의 목을 감고 있는 오랏줄이 되었다.
광주항쟁 1주년을 맞아 이미 몇몇 대학에서는 광주의 핏자국을 따라갈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1981년 5월 12일 서울에서 성균관대 학생들은 '5월 광주사태를 기억하자'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벌였으며, 다음날 서울대생은 '광주 반파쇼 민주항쟁 1주년을 맞이하여'란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에 들어갔다.
광주는 4월과 5월의 투쟁 속에 되살아나고 있었다. 1970년대까지는 학생들의 투쟁은 주로 4·19기념일을 전후로 하여 전개되어 4·19만 되면 여러 차례 교문이 굳게 닫혔었다. 그러나 1980년대의 정치군부는 4월과 함께 5월의 열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5월은 4월보다도 훨씬 격렬한 것이었다(1980년대 들어 광주학생운동 기념일이기도 한 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 투쟁이 강화된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4월 진달래가 온 산에 흐드러지게 필 무렵, 학생들은 4·19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4월제 -4월투쟁을 벌였고, 물을 머금고 새싹을 내던 산천초목에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5월이 되면서, 흙과 나뭇잎, 풀벌레 울음소리도 광주의 영령과 하나가 되어 모두가 일어섰다. 어떻게 보면 4월제는 학생들 사이에 대중적 분위기를 돋구는 예행연습기간·준비기간의 성격조차 있다면, 5월에 대학가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5월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4년 5월 초순부터 불붙은 대학가는 5·17과 5·18을 맞으면서 더욱 가열되어 각 대학과 여러 지역에서 5·18광주항쟁기념식, 광주항쟁 4주기 추모제, 광주영정위령제 등이 있었고, 5월 17일 하루에 서울에서 17개 대학, 지방에서 전남대 등 9개 대학이 광주항쟁을 이슈로 시위와 농성을 벌였다.
1985년 5월부터 5월투쟁은 훨씬 본격화되었다. 5월들어 각 대학에서는 광주항쟁에 대한 광범한 문제제기와 그를 통한 대중결집이 있었고, '광주항쟁 계승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 '광주학살 원흉 처단하라'는 플래카드가 대학 곳곳에 나붙었다. 5월 6일 고려대에서 있은 전학련 2차대회에서는 '오월투쟁선언'이 발표되었고, 전학련의 삼민투위 산하에는 광주학살원흉처단위원회연합이 결성되었다. 5월 10일에는 서울대에서 광주항쟁진상규명대회가 열렸고, 5월 15일에는 전국 29개대 10,000여 학생들이, 다음날에는 39개대 2만여 학생이, 5월 18일에는 80개대 38,000여 명이 광주사태 진상규명 및 책임자처단을 외치며 시위를 벌렸다. 그리고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갈 무렵인 5월 23일에 서울미문화원 점거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5월투쟁 -반 군부독재 민주화투쟁은 적어도 대학 내에서는 2중정부, 2중의 가치체계가 공존하는 것 같았다. 대자보나 플래카드, 시위를 보면, 광주학살 원흉과 파시스트 군부에 대한 타도가 정면으로 외쳐졌고, 그것도 원색적인 표현이 많았다. 많은 경우 그렇게 극성을 부리던 학교 당국은 이때쯤은 속수무책이었다. 학생들과 일반 국민대중에게 1980년대의 군부정권은 정통성과 합법성 윤리성을 상실한 폭력정권, 심지어 범죄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2중적 상황은 혁명적인 시기 또는 기존권력이 해체 붕괴되는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터인데, 한국에서는 광주학살과 직결되면서, 그리고서는 5·17, 12·12, 유신쿠데타, 5·16으로 소급되어 연계되면서, 군부정권은 마땅히 해체시키고 붕괴시켜야 할 권력체계로 인식되었으며, 운동권 학생들은 열정적으로 혁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민주화투쟁은 바람을 타고 있었다. 여기에는 노동자 농민은 물론 여러 층의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2·12총선에서 몰아닥친 돌풍은 개헌투쟁, KBS시청료 거부운동, 4·13호헌조치 철폐운동에서 군부독재 타도운동으로 진전되었다. 민주화운동은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고, 일파만파로 공공적 단체·조직·소속 집단·조직 등 사회 곳곳에 번져갔다. 이처럼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한국의 역사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규모로 진행되어 갔다.
반미자주화운동의 지향
1999년대에 들어와 반미자주화운동이 그렇게 거셀 줄은 적어도 기성세대에서는 아무도 예측 못했을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지배세력에게 너무나 신성불가침의 존재여서, 지배체제를 비판할 수는 있어도, 미국과 한국간의 근본문제를 파고 들어가는 것은 쉽게 엄두를 낼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반공의 경우처럼, 마음속으로는 철저히 미국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겉으로는 '우방' 미국을 우호적으로 비판한다는 '인사치레'를 잊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생존의 논리로 그 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던 것이다. 아니, 1960, 70년대의 한국의 민주세력의 상당부분은,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980년 봄에도,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에 호의적이라고 주장하였고, 종교계일수록 더욱 심했지만, 심지어 미국에 기대어 반독재 투쟁을 하려는 사람조차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5·17쿠데타와 광주학살은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고, 미국을 있는 그대로 보는, 나아가서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미국이 광주학살을 방조 묵인했다는 이유 못지 않게,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는 군부정권'을 미국이 계속 강력히 지지한 것이 반미감정을 불지른 직접적인 원인일 것이다. 군부독재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유지되는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였고, 군부독재정권이 미국에 예속되었다는 관점은 크게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이제 한국인들은 미국이 광주학살을 왜 묵인 또는 방조했는지, 광주학살과 그 이후의 수많은 만행을 저지른 군부정권을 왜 그렇게 돈독히 지지하는가를 역사적으로 생각해 보았고, 결국 역대 독재정권의 기반이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미국이 한국에 분단체제를 강요하는 한 한국에서 민주화 자주화가 이뤄진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급진적 시각, 자주화를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시각에서 볼 때, 미국은 제국주의의 우두머리(영도)국가로서, 1905년 이래 한국에 대한 일제의 단일지배를 양해했고, 1945년 이후에는 일제를 대신하여 한국에 들어와 해방-민족자주국가의 건설과 민족민주혁명의 완수-을 압살하고 한국에 신식민주의를 관철했다는 인식이 도출될 수 있었다. 이들에게 한국은 20세기 전반부는 일본의 식민지였고, 20세기 후반부는 미국의 신식민지로 인식되었다.
1980년 5월 21일경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한다는 얘기가 떠돌자, 이미 "미제국주의를 추방하라", "양키들은 군대 이동 철회하라"는 구호가 나왔고, 1980년 6월에 나온 '광주시민의거의 진상'이란 유인물에서도 "이제 우리는 미국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야 한다"고 하였지만, 반미자주화의 봉화는 1982년 3월 18일의 부산미문화원 방화에서 극명히 타올랐다. 이날 나돈 '미국은 더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물러가라'는 유인물에서는 "이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고 호소하였다.
광주학살과 반미운동과의 연결은 1985년 5월 23일부터 있었던 서울미문화원점거사건을 통하여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반미투쟁이 학생운동의 주요 부분으로 등장하고 격렬성을 띤 것은 1986년 상반기부터 일 것이다. 이때 등장한 반제민중민주주의혁명론에서는 "미제와 미제의 앞잡이(예속자본가·지주·반동관료·괴뢰정권)에 의해 파쇼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는 사회"로 한국사회를 규정하고, "따라서 올바른 변혁운동은 미제와 미제의 앞잡이세력의 민중지배의 도구, 구조화된 폭력으로서의 신식민지 파시즘의 철저한 해체와 파괴를 지향하며, 이를 통해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을 과제"로 한다고 하여,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을 통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이해 봄에는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의 외침이 서울의 대학가를 휩쓸었다.
반미자주화운동과 함께 반공이데올로기 분쇄투쟁이 전개된 것은 운동의 논리상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반미자주화투쟁을 벌이면, 예외 없이 반공법이 통합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제국주의건 반미자주화운동을 금압한 독재정권이건 철저히 반공이데올로기란 여의봉을 휘둘러 민족민주운동을 탄압해왔다는 사실이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중반기에 학생들은 때로는 '인해전술'을 써서라도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지 않을 수 없게 하겠다고 나섰고, 거기에 군부정권의 정치적 의도가 결합되어 1986, 87년에는 '국가보안법 사범'이 대량으로 출현하였다. 한편 반공이데올로기 분쇄투쟁은 1988년에 전개된, 6·25 이후 처음보는 대규모의 통일운동에서 반북이데올로기 분쇄운동, 곧 북한바로알기운동으로 나타났다. 문자로는 헌법에 기록되어 왔지만 사실상 사문화되어 있었던 사상·학문·양심의 자유라는 기본권은 지금까지 살펴본 민주화·자주화 투쟁을 통하여 조금씩 그 실질적 영역을 획득해냈다.
5. 맺음말 - 광주항쟁을 계승하려면
광주항쟁을 계기로 1980년대 내내 치열하게 전개된 반군부독재 민주화·자주화 투쟁은 1987년 6월민주화항쟁에서 일단락을 맞게 되었으며, 6월항쟁으로 열려진 국면을 통하여 민주화·자주화 투쟁은 보다 철저히 진전되어 현실로서 결실을 맺을 것이 요구되고 있다.
광주항쟁은 3·1운동, 10월항쟁(46년), 4·19, 6월항쟁과 비교해 볼 때,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광주항쟁은 광기어린 정치군부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유신체제의 변태(變態)로 본격 출범하는 순간에 일어난 것이어서 다른 역사적 사건이나 투쟁에 비해서 외형상으로는 소득이 없는 패배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호남의 수부 광주는 역사상 희귀하게 민중의 힘으로 계엄군을 몰아내고 해방을 창출하였으며, 광주의 10일은 너무나 오랫동안 죽어왔던 민중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의의를 갖고 있다. 1980년대 중후반기의 5월투쟁 등 민주화·자주화 운동은 1970년까지의 민주민족운동과는 양적 질적으로 큰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 사당 또는 도당 패거리로 전락한 체제 수호자들의 발가벗은 모습과, 광주시민, 호남인들의 위대한 투쟁이 그 운동을 발전시키고 고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었다. '군화의 광기' 위에 서 있는 1980년대의 정치군부는 단순한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마치 '불공대천의 타도의 대상'처럼 간주되었다. 또 분단체제 40년의 집중적 모순에 결연히 맞선 광주항쟁은 군부독재, 분단체제가 끝장날 때까지 계속될, 분단세력에 대한 통타(痛打)요 조종이었다.
이제 광주항쟁의 계승은 6월항쟁에서 보여준 국민혁명적 운동을 어떻게 심화·확충시키고, 그것을 사회혁명적 운동으로, 그리고 통일로 접근시키냐에 있다. 여기서 4·19에서도 그랬지만, 광주항쟁과 6월항쟁에서 조직된 주도역량이 부재했던 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제기된다. 광주항쟁 때에는 김대중씨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이것이 광주항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의 행태, 그리고 이번의 중간평가 문제에서 보여준 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기회주의적이고, 당리당략적인 기성정치세력은 진실로 호남민중들의 비원을 성취시키는데 문제가 있으며, 민주화·자주화세력에 대신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민주민족세력은 자신을 국민대중 속에서 주체역량으로 키워내야 한다. 민주민족세력은 이제 이념의 실현을 위한 권력의 문제를 현실의 문제, 당면의 문제로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대중적 주체역량의 형성은 1987년 6월까지에서 보여주었던 투쟁방법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에서 이뤄지는 것은 아닐까, 현재 한국은 자본주의국가건 사회주의국가건, 세계 어떤 나라들도 경험해보지 못한 구조와 상황을 안고 있다. 한국문제의 전망은 바로 이와 같은 특수한 한국의 현실을 보편적 이론, 선진적 경험과 창조적이고 주체적으로 결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고도의 산업구조를 가진 중화학공업국가가 되었는데,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재벌들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다. 철저히 외세의존적이고 관료주의적이며, 파시스트적인, 그래서 지배와 복종에만 익숙해 있는 권력 중추는 여전히 무장·통제력과 정보력을 다 장악하고 있다. 국민들은 어느 누구도 전산화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컴퓨터 광통신 등 첨단기기는 점차 일반화되어 가는 추세다. 소작농은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모든 농업 생산은 오로지 이윤 동기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게, 세계에서 GNP의 수출입 의존도가 가장 높은 것이 단적으로 말해주듯, 기술 원료에서 시장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산업은 철저히 외부 의존적, 그중에서도 특히 대미 대일 의존적이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하는데, 그러나 쉽게 파괴되기도 개선되기도 어렵고, 상부구조를 지탱해주는 물적 토대, 바로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민주민족세력은 현재 한국이 안고 있는 이 복잡성과 중첩성 다의성을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진지하게 그리고 상당부분 전문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추상적이고 단순화된 일반이론으로서는 현실은 제대로 인식되지도 변혁되지도 않는다. 1980년 광주항쟁에서 1987년 6월항쟁-7,8,9월 노동투쟁까지 민주화·자주화 투쟁에 중요한 진전이 있은 것은 대자보나 팜플렛에 씌어 있던 각종 혁명 이론, 각종 사회구성체 이론이 옳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1980년대의 권력의 성격이 너무나 분명하였고, 때문에 그에 맞서 싸운 투쟁이 대단히 감투적이고 희생적이고 헌신적이기 때문이었다. 또 반미자주화·반공이데올로기 분쇄·북한바로알기운동, 민주헌법 민주법률 쟁취투쟁과 같은 경우, 그 의의가 큰 것은, 40여 년 동안 이 땅을 지배해 온 너무나 잘못되고 왜곡된 분단체제 분단논리를 바로잡는 운동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군부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 민주민족운동에는 어려운 이론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 함께 국민대중에게 공감을 주는 국민적 과제를 적절히 제기하기나, 국민대중을 광범히 하게 묶어세우는 유연성 있는 대응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1980년대의 역사적 과제, 분단 40여 년의 역사적 과제, 근현대 100여 년의 역사적 과제를 민중 속에서 구현해내려면, 국민대중을 정치적으로 묶어낼 수 있는 투쟁, 조직 방법, 논리 또는 비젼의 제시가 지금까지의 그것들과 병행하여,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들을 넘어서서 있어야 할 것이다. 많은 부분, 사고의 대전환, 행동의 대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까지를 대담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변화해야 하는 것은 반민족적 반민중적 파시스트 권력과, 경제 사회구조만이 아니다. 국민대중도 변하여야 하고, 무엇보다도 민주민족세력의 대응 능력도 변하여 분단세력을 구축할 수 있도록, 그리고 바라는 바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민대중을 결집시켜야 한다. 이때, 광주항쟁, 그리고 갑오농민전쟁, 3·1운동 이래의 민주화, 자주화의 과제는 통일한국에 현실화되어 민주민족사회가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발제-서중석)
토론
광주항쟁의 역사적 성격과 80년대의 반미자주화 투쟁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항쟁 발발의 조건
최장집(사회) 이 토론을 위해서 서중석 선생님이 좋은 글을 발표해 주신 데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 발제문에서 제시된 내용을 중심으로, 여기서 제기된 해석상의 이견이나 쟁점을 여러 가지 시각에서 논의 해봤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논의의 유도를 위해서 간단하게 초점을 지적해 주시죠.
서중석 제 얘기는 발표를 통해서 자세하게 말씀드렸기 때문에 여기서 구태여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요점은 어째서 광주에서 그렇게 상상하기 어려운 참혹한 탄압이 있게 됐는가, 그리고 다른 때, 다른 지역 같으면 그 정도의 탄압이면 무너지고 말텐데, 오히려 거기에 맞서면서 계엄군을 내쫓고 해방지역으로까지 만들었는가를 해명하는 데 두었습니다.
이종범 광주지역에서 그러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된 것은 바로 군부독재 집권의 권력을 향한 기본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해방'공간을 만들어내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맞물려 있겠지만, 전남 광주지역의 역사적 배경이랄까 운동경험의 문제가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의 식량 및 공업원료의 저렴한 공급원으로 되면서 호남지역이 상대적으로 농업선진지대로 위치지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 점으로 해서 일본자본의 집중적 수탈대상이 되고 그 과정에서 그에 추수야합하는 봉건매판지주세력이 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만큼 이 지역의 빈농, 소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지역대중의, 일제에 반대하고 그와 결합한 봉건매판지주자본가 및 권력에 대한 저항이 강력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해방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 기간에 걸쳐서 강력하고 집요한 무장 투쟁이 이 지역을 무대로 지속적으로 펼쳐지게 된 것 역시 이 지역대중의 자기 역사경험의 축적 그리고 토지문제를 비롯한 민족적 당면과제에 대한 비원과 같은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경험들은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하에서의 외세의존적 수출주도형개발정책은 박정권의 정권안보적 차원에서의 공작정보정치와 결합하면서 전남 광주지역의 다수 대중을 경제적 소외만이 아니라 정치적 소외의식에 젖어들게 하였던 것입니다. 박정권의 지역불균형 개발 그리고 농업포기정책, 농촌분해정책이 이 지역 대중에게는 종속형적 비산업화의 불이익을 집중적으로 당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역사와 상황은 이 지역에서 보다 강력한 정치적 욕구가 전면에 드러나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10·26 이후 이 지역 대중은 아마, 이제 더 이상의 지역편중과 차별에서 오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1970년대 후반 이래의 농촌의 피폐가 더 이상은 진행되지 않는 정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민주화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 자연스럽게 김대중이라는 대중적 상징이 존재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컨대 전남 광주지역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기본모순과 주요모순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만큼 자기역사를 변혁하려는 강렬한 욕구와 그 실천경험이 축적된 지역이었는데, 이러한 지역적 조건이 바로 군부파시스트의 계획적 공격에 대해 일체화된 적극대응이 있을 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조희연 저는 광주항쟁 발발의 일반적 조건에 초점을 맞춰보고 싶습니다. 광주항쟁까지를 포함해서 10.26부터 5.17까지의 정치적 격변의 과정이 어떻게 일어났느냐를 살펴보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 광주항쟁을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런 일반적 조건 속에서 지역적 특수성이 매개되면서 광주항쟁이 결과됐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죠.
10·26부터 12·12, 5·17에 이르는 정치적 격변은 기본적으로 1970년대 말에 지배체제의 위기, 그리고 그런 지배체제의 위기를 창출한 정치경제적 위기 및 민족민주운동의 발전, 이런 측면과 연결시켜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통 얘기하다시피 1945년부터 1950년까지는 민족국가의 성격을 둘러싼 전면적인 계급투쟁의 시기였는데, 민중세력의 패배로 친미반공분단종속체제가 형성되고 변혁운동의 역사적 전통이 일정하게 단절되게 됩니다. 크게 보면 6·25 이후의 한국사회의 변화과정은 이런 친미반공분단종속체제의 모순의 심화 그리고 균열의 과정이고 그것에 대응하는 민중운동의 변혁적 전통의 복원과정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6·25 이후 한국의 지배체제사를 보게 되면 몇 가지 유사한 위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1950년대 지배체제의 위기를 배경으로 4·19라는 민중운동의 고양기를 맞게 되고 그것에 대한 지배체제의 반동적 대응으로서 5·16군사정권이 등장하는 시기가 있겠고, 그 다음에 1960년대 지배체제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배경으로 1970년대 초반의 민중운동의 고양과 그것에 대응한 유신체체의 성립이 있습니다. 10·26 이후의 과정은 이런 맥락에서, 1970년대 지배체제의 정치경제적 위기와 민중운동의 발전을 일정하게 반영한 것인데, 이런 민중운동의 발전을 전제로 한 1970년대 지배체제의 위기에 대응한 지배체제의 재편과정으로서 10·26 이후에 12·12, 5·17까지의 과정 전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사태 역시 바로 이러한 일반적 변동과정 속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전과 다른 1970년대 말의 위기를 규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하면, 먼저 친미반공분단종속체제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추진된 1960년대 이후의 종속적 자본주의화가 창출한 계급적 모순의 심화를 들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그처럼 심화되는 계급적, 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면서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연화된 파쇼적 억압통치로부터 유래되는 정치적 모순이 있는 것이죠. 이런 모순적 통치에 대한 대중들의 광범위한 불만이라고 할까, 이런 것들이 1970년대 말에 한국사회에 기본적으로 존재했던 것이죠. 그런 구조적 위기들이 현상적으로는 1970년대 말에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이라든가, YH무역사건이라든가 총체적으로는 부마사건 등으로 표현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1970년대 말의 위기에 대응한 지배체제의 재편으로서 10·26을 전후한 일련의 과정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이 경우 지배체제의 변화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민중적 대안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세력 자체가 주도하는 지배체제의 제한적 재편입니다. 1970년대 민중운동의 발전수준으로 볼 때 전자를 관철시킬 수는 없는 수준이었고, 따라서 결국은 지배체제 개편의 주도권이 지배세력 내에 있게 되는데, 여기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면서 온건파에 의한 일종의 위기해소를 위한 예방혁명적 궁정쿠데타가 10·26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군부강경파에 의한 12·12로 역전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광주사태를 촉발시키는 직접적 요인이 되는, 강경군부세력에 의한 역쿠데타가 왜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기존 지배세력이 주도하는 온건한 방향에서의 체제재편 가능성은 애초부터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 1970년대 말 독점자본의 물적역량 곧 지배세력의 경제적 기초기, 분출하는 민중적 요구를 수용해내는 데 제한적이었다고 봅니다. 1978년 이후 한국경제는 불황국면으로 빠져들었고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성장은 실패로 인해서 한국독점자본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온건한 체제 개편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의 또 하나는 카터의 인권외교에서 표상되는 일시적인 '군부통치 온건화 전략'이 이란혁명 등의 사태에 의해 후퇴하고 미국의 대한정책에 있어서의 보수화경향들이 일정하게 대두되고 있었던 점입니다. 또 하나의 요인은 10.26온건주도세력이 굉장히 약체라는 점입니다. 체제개혁의 구상 자체도 불철저하고 군부내의 기반 자체가 취약했어요. 이런 맥락에서 불가피하게 12·12라고 하는 군부강경파에 의한 체제개편, 유신체제보다도 더욱 후퇴한 더욱 폭압적인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게 되고 여기서 광주사태의 지배체제측 조건이 예비되게 되는 것이죠.
왜 '광주'인가
사회 한국에서는 10년마다 모순이 증폭되어 나타나고, 이렇게 민중운동의 고양과 함께 지배구조가 재편되는데, 유신 후반기에는 미국 카터 대통령의 인권외교가 큰 애로를 맞으면서 이란이나 중미에서의 혁명으로 나타나고, 카터 말년에는 유
광주항쟁의 민족사적 의미
때 : 1989년 3월 30일
곳 : 역사문제연구소 회의실
참가자 - 이종범<조선대교수·역사학>
조희연<성공회신학대학 강사·정치사회학>
김민석<민족과세계연구소 연구원>
발 제 - 서중석<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본지주간>
발제
광주학살·광주항쟁은 민족사의 분수령이었다
1. 한국사 초유의 광주학살·광주항쟁 -해방의 10일
광주학살과 광주항쟁 -해방의 10일은 한국 역사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은 없지 않았으나, 한국을 뒤흔든 광주의 10일은 그 예측을 훨씬 뛰어넘는, 문자 그대로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었다. 일군의 정치군인으로 이루어진 극우 파시스트 군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들에게는 이제 끝없는 파시스트적 권력의 욕구 아래 파멸을 향해 권력을 쌓아올리는, 역설적이지만 시지프스의 악전고추의 작업이 계속될 뿐, 결코 안이하게 권력을 누릴 수도, 새로이 쿠데타를 일으켜 간단히 권력을 잡을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인 명백해졌다. 한국 사회는 엄청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빙산의 감춰져 있는 부분에서는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이래 여러 차례 재편성된 기존의 지배질서를 혁명적으로 해체하려는 꿈틀임이 계속되어 왔는데, 그것이 부마사태·사북사태로 일단의 분출을 한 것이었다면, 활화산으로 터진 광주항쟁의 진원은 훨씬 깊숙하고 그 파장은 훨씬 심대한 것이었다.
한국은 이제 엄청난 불확실의 시대, 예측할 수 없는 사회로 진입하였다는 것을 광주는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여차하면 제 2의 광주는 언제고 또 어디에서고 그리고 전국적인 규모로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광주의 10일은 보여준 것이다. 지배동맹의 강력한 핵심체로 자처하는 파시스트 군부의 대응방법 때문에도 그렇지만, 지하 깊숙이에서 달아오른 용암처럼 터져 나올 분출구를 찾아 끓고 있는 민중의 용틀임 - 낡은 껍질을 벗겨 버리고 새 사회를 만들려는 갈구 때문에 제 2의 광주는 언제고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오랫동안 움츠리고 주눅이 들었던 민중은 광주의 함성에서 자신의 동일체감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겁이 나고 자신이 없으면서도 민중은 광주에서 자신들의 에너지가 분출된 것을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민중의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은 광주의 10일이 말해주듯 사뭇 힘들고 어려운, 그 또한 시지프스의 악전고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난 역사의 축적 위에 현재가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배동맹 블럭과 대항동맹 블럭은 혼돈과 미로 속에서 여태까지와는 분명히 차원이 다른 새로운 형태의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은 광주의 10일로 민주화와 자주화가 이뤄진 새 사회라는 것을 빼놓고는 그 지향하는 목표·세계상·체제는 불확실하지만, 새로운 역사적 차원의 시기, 새로운 역사의 단계로 진입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광주의 10일은 새로운 형태의 싸움이 벌어지고 새로운 사회가 건설되는 지렛대이고 예고로서, 한국 근현대사의 결정적 획이요 분수령이다.
이것이 1980년 5월의 광주를 목도하며 당시에 가질 수 있었던 느낌이요 예견이 아니었을까?
광주학살·광주항쟁 - 해방 9년의 시점에서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매겨본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일 수 있다. 광주청문회가 계속되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 광주의 진상은 짐작은 가지만, 일반인에게는 공표되지 않았고, 광주청문회가 계속 삐그덕거리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 광주학살의 책임자들은 여전히 강고한 위치에서 광주의 진상을 얼버무리려 하고 있어, 일반인에게는 혼란이 중첩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광주항쟁의 역사적 계승은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광주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거니와, 광주항쟁이 지향하는 세계도 민주화 - 자주화 - 통일이라는 지표 외에는 아직 분명하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에, 섣불리 광주의 10일간에 대한 민족사적 의의를 따져본다는 것은 자칫하면 일면적이고 편의적일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의 봄→5·17쿠데타→)광주항쟁으로부터 시작된 1980년대의 한국 역사는 해방 3년을 제외하고는 한국 근현대사의 어느 시기보다도 파란에 찬 것이었고, 격랑 속에서도 중요한 진전이 있었으며, 민족사의 과업이 민주화 -자주화 -통일이라는 큰 줄기로 가닥이 잡혔고, 주체세력 형성도 여전히 가변 요소는 많지만 어느 정도는 윤곽이 드러나고 있으며, 1987년의 6월 민주항쟁 - 7,8,9월 노동투쟁과 그 이후의 상황은 일정하게 질적 양적 수준의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서, 1980년대를 마감하는 금년에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한번쯤 새겨보는 것도 의미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10·26에서 5·17까지의 정세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10·26은 처음에는 일반 대중에게 얼떨떨한 상태를 갖게 하였고, 유신체제에서 안주해 온 세력들-많은 지식인, 고소득 샐러리맨, 친체제적인 중산층 포함-에게는 캄캄한 절벽,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지 전혀 가늠하기 어려운 캄캄한 절벽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부터 국민대중에게는 유신 독재에서 벗어나 대통령 직선제 등 최소한의 민의는 반영되는 정치체제가 기대되었고, 민주세력에게는 유신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화를 이룩해야 할 중차대한 기회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에게 10·26에서 5·17까지의 시기는 막연한 기대 속에 전망이 불투명한 애매모호한 시기로 느껴졌고,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이나 신현확 국무총리, 내각이 유신의 잔당이기는 하여도 이름에 상부할 권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도 권력의 소재가 어디 있는지 딱 잡아 판단하기도 쉽지 않았다. 민주화의 몸짓은 여러 형태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계엄 상태였고 언론은 일일이 계엄사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학원만은 약간 달랐다. 봄이 오면서 학원 안에서만은 자유가 만개하였다. 학원은 자유의 천지요 민주공화국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만 걸어라오면 유신체제와 별반 다름없는 사회가 버티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야당 지도자는 대권에 몸이 달아 있었고, 힘을 합쳐도 미약했을 터인데 평행선만 달렸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권력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지만, 그것은 숙지되지 않았던 것이 5·17까지의 분위기였다. 권력을 장악한 자들은 민주화에 대한 욕구가 자신이 수호해 왔고 수호하여야 할 체제를 해체하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민주화에 대한 욕구는 기존 권력-유신체제를 해체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민주화에 대한 욕구는 폭발적일 수 있었다.
12·12쿠데타세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
10·26에서 5·17까지의 상황에서 권력의 성격과 미국의 역할에 대해 민주세력 사이에는 매우 애매한 판단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한번쯤 꼭 논의해야 할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은 유신체제의 핵인 박정희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정치 민주화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서, 유신체제는 더이상 지탱할 수 없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판단 속에는 유신체제가 단지 한 개인의 권력욕에서 나왔다는 단순한 발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유신체제는 일단 박정희식 근대화 노선에 서 있는 이상 피하기 어려운, 박정희식 경제건설을 가동하기 의한 체제였고, 세계 자본주의로의 깊숙한 편입 속에 국내외 독점자본이 요구한 체제로서, 1971년에 있었던 민주화의 분위기, 사회변화의 분위기에도 겁을 내고 있었던, 그래서 노동통제를 주목적으로 하는 국가보위법치 제정에서부터 출범한 분단체제세력의 안전판이었다. 따라서 박정희가 죽었기 때문에 권력의 핵심에는 일정 기간 동요가 있었으나, 그것은 일단 12·12쿠데타로 수습되었고, 유신체제하에서 본격적으로 자본축적을 이뤄 거대기업으로 성장한 재벌·독점자본은 민주주의란 태양에 강한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중산충은 회색분자로서 어느 쪽이든 유리한 쪽으로 기울 수도 있었으나, 민주주의에는 얼마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박정희식 경제건설의 구조적 모순은 심각하게 노정되어 있었고, 게다가 불황 등 경제적 위기가 덮쳤고 노동계급은 비약적으로 성장·확대되었던 것이다. 유신체제의 물리적 장치인 관료조직, 경찰·검찰·사법조직, 정보조직은 10·26 이후에도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당시에는 특히 군의 의지와 그들이 지향하는 세계상에 대해 모호하고 막연한 생각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12·12쿠데타의 본질과, 12·12쿠데타 세력의 성격, 인적 계보를 모르고 있었다. 12·12쿠데타 이후 권력의 핵심은 쿠데타 주동자들에게 넘겨졌고, 최규하 신현확 등이 일제시기 이래 계속 권력의 주구의 역할밖에 못했다면, 12·12쿠데타세력은 박정희체제가 양성한 박정희의 분신인요 적자(嫡子)요 간성이었다. 그들은 박정희 못지 않게 권력에 대해 무한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방조에 의한 12·12쿠데타 성공 이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권력의 정상에 부상하는 시기와 그 방법에 관련된 작전뿐이었다. 그들은 파시스트적 통치만이 민주주의란 혼란에서 자신이 수호하였고 수호해야 할 체제를 지키고 유신체제하에서 있었던 경제성장을 계속 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한치만 양보하여도 그들의 권력이 와해될 수 있는 혼란이 빚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는 물리력과 통제, 정치조작밖에는 믿을 것이 없다는 신념과 함께, 본질적으로 반민족적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반민주적일 수밖에 없는 한국 극우세력의 피해심리가 강령히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의 폭력의 속성과, 한국 근현대사의 본질적 속성 때문에, 민중이 한번 일어서기 시작하면 그들은 체제와 함께 몰락하고, 세상은 뒤집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인식과 의식·무의식 속에서는 작전처럼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양자택일적 사고가 우세할 수밖에 없었고, 체제는 선택할 수도 있으며 정권은 주고받을 수도 있다는 사고는 도저히 이해되기도 용납되기도 어려웠다.
10·26에서 5·17사이의 미국의 역할
미국의 카터행정부는 12·12쿠데타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한국 정치의 개량주의적 변화와 형식적 민주주의는 환영할 것이고, 군부의 정권장악에 대해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전두환씨가 보안사, 중앙정보부 등 두 정보기관의 장이 된 것을 못마땅해 한다는 주장이 1980년 봄에는 왜 널리 퍼져 있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대소 전진기지로서, 또 경제적 정치적으로 미국의 이해를 관철시켜 줄 수 있는 안정적 정권을 원했던 것은 1980년 봄에도 마찬가지였다. 유신 말기의 정권에 대한 국민적 염증과 저항은 1960년 4월에 있었던 이승만에 대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교체를 필요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박정희의 제거는 분위기만 바꾸는, 일종의 기분전환으로, 조삼모사의 의미가 다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국민의 원성이 높은 박정희는 제거하고, 유신체제는 적당히 변형하되 그것은 안정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면, 여기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군부의 등장에 의한 체제의 안정 곧 체제의 지속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러한 추론에는 10·26, 김재규 제거, 12·12, 5·17에 미국이 전부 개입하였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국은 시사, 묵인, 양해를 포함하여 간접적으로라도 미국의 의사나 의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이 충분히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이나 장면, 박정희 못지 않게 양 김은 미국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미국은 구태여 양 김의 집권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당시에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양 김이 집권할 경우, 파시스트 군부 등 유신잔재와 크게 대립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장면 정권처럼 적극적인 제동을 걸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있을 수 있다. 미국은 제발이 저린 격이겠지만, 경우에 따가서는 양 김의 집권과 같은 약체정권 아래에서는 민주화운동이 혁명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10·26쿠데타에 의한 김재규 집권의 경우에도 가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재규가 집권하였다면, 그는 박정희의 정치 기반-그것은 김재규 자신도 공유하는 것인데-의 상당히 큰 부분을 파괴하고 그것과 대립하면서, 반유신민주세력에 대해서는 과감히 대응하기 어려운 취약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한 마디로 김재규는 집권해도 그 기반이 너무나 약한 것이었다. 따라서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의 살해→김재규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데리고 중앙정보부로 못가고 육군본부로 (끌려)감으로써 혁명정부 구성의 실패→l2·12쿠데타에 의해 남아 있는 군부내의 김재규 세력(당시 군부내의 2대 세력이었으나, 중견 장교에 영향력이 약했고 우유부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의 제거와 야심만만한 행동적·파시스트적 군부의 실권 장악→5·17쿠데타에 의한 군사권력의 표면화는 보인지 않는 손이 작용하였건 작용하지 아니 하였건 지배동맹블럭을 분열시키지 않고 무난히 계속 집권을 가능케 하는 가장 확실한 프로그램이자 스케줄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의 능력, 10·26이후 집중된 정보력, 특히 군 동태 파악 능력과, 미국의 엄연한 작전권 이상의 위치를 검토해볼 때, 12·12쿠데타는 미국이 저지하려고 의도하였다면 성공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었고, 5·17쿠데타는 전후 사정을 분석해볼 때, 미국과 무관한 것만의 아니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런데 광주학살은 분명히 12·12쿠데타-5·17쿠데타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미국은 당시에 집권하고 있었던 카터 행정부의 최대의 실책으로 비판받고 카터 행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은 제 2의 이란사태가 한국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과 한국의 지배권력과의 관계, 미국과 이란 팔레비왕 권력과의 관계는 너무나 흡사하였다. 한국의 지배정권은 민중적 기초가 지극히 취약하였고, 그것은 미군정의 연장선적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다. 미군은 1945년 9월 한국에 진주하면서, 일제통치기구를 잔존시키고, 총독부관리를 유임시키고, 친일파를 요소요소에 배치하고 토지개혁을 유야무야시키는 등, 한국 민중의 간절한 민족적 염원과 너무나도 배치된 역할을 하였고, 분단과 그 이후에 분단체제를 고착, 강화시키는 군사·정치·경제·문화 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미국은 한국의 민중에게 형식적 민주주의를 주는 것도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한국인은 어디까지나 힘에 의해서 눌러 놓지 않으면 언제고 폭발하여 터뜨리고 나올 것이라는 발상의 근거가 주어진다. 거기에서 미국은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 해방 직후의 상황을 볼 때 적반하장격이지만, 한국민족을 민주주의를 가질 수 없고 자치능력이 없는 열등민족으로 매도하여 왔다. 10·26, 12·12, 5·17 때의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의 '들쥐' 운운 발언이나 레이건 행정부 때의 워커 전주한미대사의 "버릇없는 애새끼들" 운운의 발언은 이와 같은 미국의 입장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미국의 한반도에서의 성격과 지배권력의 성격, 미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한국의 중요성의 증가, 그리고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경제구조의 성격과 노동계급의 성장 때문에, 한국의 민주화는 지배질서의 재편·교란·파괴를 의미하고, 국내외 독점자본-재벌과 종속경제를 공격하고, 더 나아가서는 지배권력의 붕괴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혁명적인 상황으로 진전되고, 그것은 곧 반미운동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판단된다면, 당시의 상황에서 미국의 선택의 폭은 한계가 분명할 것이다. 미국은 '들쥐'의 세계에서 '모험'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가장 안전한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서울의 봄' 시기에 혼란은 있었는가
5·17쿠데타는 파시스트 군부가 권력의 정면에 등장하는 D-데이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러나 12·12쿠데타 세력이 1980년 봄의 상황을 빙자한 것을 분명히 가려내는 일은 1980년대 군부정권의 행태와 광주학살-광주항쟁의 성격을 정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80년 서울의 봄에서 노동운동이 활발하기는 하였으나, 노동자가 대량 산출되고 국가보위법 발동 이래 노동운동이 금압된 것을 생각해 볼 때는 그다지 폭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북사태는 폭발적이었으나 곧 진정되었고, 서울 일원의 가장 큰 노동쟁의였던 청계피복 노동쟁의는 노사간의 합의로 당시 보수적인 언론에서 찬양까지 받았다. 노학연대투쟁도 노동운동쪽에서 거부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학생시위는 어떠하였는가. 그것 또한 차분하였다. 학생들이 대거 거리에 나선 것은 서울의 경우 5월 13일에서 15일까지의 3일간이었다. 누가 무슨 의도로 퍼뜨렸는지 대충 짐작케 하는 5월 12일 저녁 이후의 친위쿠테타설과 군부의 학원점령설, 휴전선 교전설이 허위였다는 것이 판명된 것도 13일의 시위에 영향을 미쳤는데, 서울역 밀대에 10여만 명이 집결하였던 15일의 시위에 대해서는 당시 당국이 강조해 마지 않았던 '위기'의 계엄령하인데도 거의 제지가 없었다. 이날 남대문 도뀨호텔 부근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차량이 불붙은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일 없이 학생들은 자진 해산하였고, 이날 밤 자정부터 다음날까지 있은 학생회장단의 회의에서도 가두시위를 중지하고 정상 수업을 받기로 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이미 며칠 전인지 서울의 몇 지역에 출동한 상태였다. 광주의 경우, 5월 14일부터 가두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15일에는 교수 50여 명과 같이 시위를 벌였으며-광주의 경우도 나중에 알았지만 역시 이때쯤 계엄군이 포진하고 있었다-16일에는 9개 대학생 3만여 명이 경찰의 '협조'아래 야간횃불시가행진을 가졌다. 이 시위도 밤 10시경 자진 해산하였고, 17일에는 추이를 전망할 겸 시위는 없었다. 서울이든 광주든 주체역량도 미흡하였지만, 정치군부의 동태 때문이었다. 그런데 5월 17일 23시 40분 이규현 문공장관은 24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확대한다고 발표하였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지배세력은 사소한 시위조차 큰 혼란으로 위험시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의 지배동맹블럭은 어느 경우나 지극히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4·19시기의 경우도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조금한 데모가 자주 있었을 뿐 딱히 혼란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도, 자신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큰 혼란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었고, 이것을 빙자하여 군부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10·26에서 5·17에 이르는 시기도 유신권력의 성격과 경제구조의 모순 때문에 지배 제세력의 기반은 그다지 튼튼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지는 면이 있었고, 경제사정 또한 나빴다. 그러나 5·17쿠데타가 혼란방지용 거사였다는 12·12쿠데타 주동자들의 강변은 그 근거가 너무나 뻔뻔스러운 것이었다. 5·17쿠데타는 기대된 것이고, 예견된 것이고, 계획된 것이었다.
3. 광주학살과 광주항쟁 -해방에 대한 평가
해방은 미·소군의 진주라는 특수한 성격 때문에 3년의 유예기간이 있었지만, 4·19시기에는 군부의 반동이 오는데 1년 1개월이 미쳐 안 걸렸고, 서울의 봄 시기에는 5·17쿠데타로 민주화의 열망이 압살되는 데 6개월밖에 안 걸렸다. 역사가 흐르면서 자주화·민주화가 꿈틀거렸던 기간은 계속 반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5·17쿠데타 다음날부터 진행된 광주학살극은 본격적인 민주화와 자주화를 이룩하는 분수령으로 작용하였다. 민중들의 거센 투쟁-광주항쟁-해방이 촉발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광주학살의 진행과정을 살펴보거나, 광주학살의 진상을 가려내고자 하지 않는다. 또 광주항쟁의 과정이나 해방의 실상을 규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왜 광주학살이 그토록 잔혹한 형태로 이뤄졌는가, 또 광주시민은 파시스트 군부의 상상을 초월한 광폭한 진압에 전혀 굴복하지 않고 왜 그토록 강렬하게 맞서 싸웠는가, 그 까닭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광주청문회, 5공비리청문회에서 누차에 걸쳐 언급되었듯, 광주학살은 시위에 대한 단순한 제지 또는 진압이 아니었다. 장기적인 군부독재정권을 굳건히 다지기 위한 '필승의 작전'이었다. 12·12쿠데타 주동자들은 5·16쿠데타 직후와 유신쿠데타 직후에 그랬던 것처럼, 정통성도 없고 비법적이고 더구나 국민대중의 간결한 민주화 소망을 무참히 짓밟은 더러운 권력이었기에, 자신들을 비판하고 자신들에게 저항, 도전할 수 있는 제세력을 단호하게, 적나라한 형태, 발가벗은 짐승의 형태로 압살하고자 하였다. 그들에게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인간관 그대로, 한치의 빈틈도 없이 단호하고 잔혹하게 압제하면 국민대중은 복종하기 마련이다는 사고가 그대로 작용하였던 것 같다. 그들을 자신들의 목표에 맞춰, 스케줄에 따라, 작전을 집행해 갔는데, 광주항쟁은 5·17군부쿠데타에 대한 첫번째 정면도전이었을 뿐 아니라, 대단히 규모가 큰 도전이었다. 더욱이 유신체제의 권력 구성과 독점자본 형성의 또 하나의 핵을 이루고 있는 대구·영남의 지역성을 고스란히 계승한 그들로서는 자신들에게 가장 크게 도전할 수 있는 김대중 세력과, 자신들에게 가장 크게 반발하는 호남 민중들을 단호히 무자비하게 짓밟아 다시는 조금도 저항할 수 없게 하는 것만이 권력을 반석처럼 다지는 길이라고 결의를 다지고 있었던 것 같다. 호남민중들의 저항의 철저한 분쇄는 오히려 군부독재를 위해 탄탄한 길을 닦는 것으로 인식, 예견된 것이다. 군부의 이러한 의도 또는 작전은 곧이어 일어난 삼청교육대사건, 기자·교수의 추방, 민주인사·노동·농민운동자에 대한 탄압과 민주노조의 분쇄, 노동관계법, 집시법의 개악, 언론기본법의 제정 등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은 1981년 초 대통령 선출 과정, 모모기관에 의한 여·야당창출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그러나 군부의 광주학살과 그 이후의 작전에 의한 민주세력 압살과 악법 제정 등 일련의 집권 과정은 자신들의 사고 또는 의식수준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일시적으로는 위력을 떨칠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80년대의 한국인의 의식 수준, 정치 사회 경제적 수준으로 볼 때는 한낱 만행이었고, 무척 낙후한 방법이었다. 그만큼 군부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고 경직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정치군부가 그들이 생각하는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처럼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박정희가 20년간 다진 권력의 집중 덕택으로 단시일에 권력의 정상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바로 분단체제, 이승만과 박정희가 수호하려고 했던 그 체제를 부둥켜 계속 살리기 위하여 그와 같은 무단적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1980년대의 군부정권이 단순히 분단체제- 이승만·박정희체제의 계승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고도로 특수화되어 1970년대에는 유신체제로 나타났던 것을, 1980년대에는 다시 더욱 경직된 형태로 수습하여 나갈 수박에 없게 되었다는 분단체제의 특수한 국면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강력하고 단호한 것같이 보이는 정치군부의 '작전'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중들에게 점점 깊숙이 포위당해 사실 상당히 취약해진, 그리고 강하게 궁지로 몰리고 있는, 위기의 시기에 나타나는, 때문에 당시의 표현을 빌면 유신잔당의 존립을 위한 몸부림으로서, 극약을 투입하지 않으면 체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단계라고 판단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분단체제 옹호를 위한 최후의 권력형태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거기에 가까운 형태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무자비하면 할수록, 낙후한 수법을 쓰면 쓸수록 그들의 추악한 모습은 더욱 선명히 부각되고, 그들이 장악한 국가와 그들이 수호하는 체제의 성격은 또렷해지게 된다. 이 때문에 국가의 양면적 성격 중 한쪽만이 노골적으로 경사되어 표출되게 된다. 그들은 사당(私黨)이었고 도당같았다. 그들이 하는 짓은 한 무리의 사당 또는 도당들의 발가벗은 본태(本態)로 보였다. 대통령은 이제 최소한의 의미에서도 대통령으로 간주되지 아니하였고, 사당 또는 도당의 우두머리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들로 하여금 국민대중으로부터 따돌림받게 하였고, 학생 등 민주세력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투지를 엄청 자극하였다. 그들의 강경정책은 강경한 만큼 억지요 만행임이 분명하여 그것에 대한 대응, 곧 투쟁은 훨씬 호소력이 있었다. 그들은 광주학살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고, 광주항쟁-해방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단기적으로도 패배하였고, 1980년대 중 후반기의 격렬한 민주화 자주화운동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중기적으로도 패배하였다. 이제 그들에게는 최후의 패배만이 남게 되었다. 역사의 섭리,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러하였다.
광주항쟁 - 해방의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초기 광주시민들을 분격시킨 데에는 '유신잔당'들의 지방색과 김대중씨 체포가 상당한 역할을 하였으리라는 것은 널리 지적되고 있다. 그 실체는 어떻든 김씨가 유신체제하에서 받은 핍박은 호남인들의 피해의식과 결부될 수 있었다. 또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김씨가 전국적인 인기를 모았는데도 지방색 때문에 낙선한 뒤, 고초 끝에 김씨는 1980년 봄 어떻든 재부상하여 호남인들의 기대를 모았는데, 5·17쿠데타로 그것이 물거품되고 김씨가 체포까지 됨에 따라, 호남인들의 분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유신독재는 특정지역 출신의 군과 관료, 재벌로 유지되었고 그들을 살찌웠는데, 이것은 상대적으로 전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박탈감과 소외감을 증폭시켰다. 따라서 박정희 살해=민주화 촉진은 광주의 재생, 또는 광주의 새로운 발전을 기약하는 것이었는데, 다시 대구. 경상도의 군부세력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 민주화가 좌절됨으로써 광주의 기대가 무너질 때, 이들 정치군부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분노는 어떤 지방보다도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광주시민의 민주화 욕구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연결되는 것이었고, 그것은 특정지역 출신의 특권적인 군, 관료, 재벌 의에서 펼쳐지는 독재권력-이 경우 독재권력은 지방색을 필수적인 부대물로 한다-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 때문에 1980년대에 광주는 한국 민중운동의 견인차요 추진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광주시민들은 1960, 70년대의 부의 성장에 강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광주의 소외계층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더욱 크게 박탈감과 핍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1979년 광주공단보고서를 보면, 전남지역 평균임금은 35,073원으로 전국의 평균임금 74,121원의 47.2%에 불과하였다. 또한 소비도시인 광주에서도 시내와 가까운 학동의 경우 실업자 룸펜 빈민층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고, 광천동 임동은 운수정비업체, 가구업, 방직부속공업, 하청기업, 가내소공업 등 소규모 기업체가 몰려 있고, 불완전 고용상태의 노동자가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이들 실업자 임노동자 룸펜 빈민 등 대중들은 광주항쟁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에서 5월 25일 이후 최후까지 도청사수를 결의한 200여 명은 거의가 노동자 종업원 룸펜 등 일반대중이었으며, 105명의 사망자에 한해 직업을 분석해 볼 때, 37명이 근로빈민, 11명이 무직이었다. 구속자도 357명 가운데 127명이 근로빈민이었다. 이렇게 볼 때 광주항쟁은 박정희식 경제건설에서 소외된 일반대중이 중요 역할을 한, 민중항쟁적 성격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광주시민들의 항쟁을 격화시킨 것은 5월 18일부터 있었던 공수대원들의 만행 -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정치군부의 작전이었다 -으로서, 그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5월 20일 공수부대의 만행에 도망치던 시민들의 고함이 더욱 거칠어지고 흥분이 절정에 오르면서 "시민들이여! 모두가 일어섭시다. 우리의 자식들이 다 죽어갑니다. 공구든 곡괭이든 닥치는 대로 가지고 싸웁시다"라는 절규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고, 다음날에는 도청에 있는 계엄군을 몰아내기 위해, 어머니 손목을 잡은 꼬마에서 중고생들, 그리고 70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10여 만 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도청으로 진격하였던 것이다. 광주가 해방지구가 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문제는 과거 같으면, 정치 군부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공수대원들의 가차없는 '화려한 작전'에 일반시민들이 기죽고 겁나서 숨어들어 갔을지도 모르는데, 이때는 오히려 더 용감히 시민과 학생들이 손에 손잡고 어깨를 같이하여 싸웠다는데 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박정희 군부정권 아래서 당할 대로 당하고 소외될 대로 소외된 광주지역의 시민들이 이제 박의 계승자인 12·12쿠데타 군부정권체제에서만은 더이상 당할 수 없고, 그들과 싸워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변혁의 의지가 5·18을 통해 활화산으로 터뜨려진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광주시민의 항쟁에는, 그리고 삽시간에 번진 호남인들의 항쟁에는 유신독재와 박정희식 경제건설에 대한 거부가 강력히 작동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또한 분단세력에 의해 압살되었던 민중의 해방조국에의 꿈, 5·16쿠데타로 압살당한 4·19시기의 민주주의와 통일조국에의 염원, 10·26 이후 간절히 피어오른 민주화와 직선제, 정권 교체에의 희구가 5·17쿠데타로 압살당한 것에 대한 처절한 분노가 상호 깊숙이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마디로 광주항쟁에서 보인 광주 학생·시민, 호남인들의 투 지는 분단체제를 강요하고 그것을 악용해 온 반민중적 독재정권을 이제는 더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소외된 지역, 소외된 민중들의 변혁의지의 소산이었다.
세계사나 한국의 근현대사를 볼 때 아무리 잘 싸워 이겨보려고 해도 안되는 때가 있고, 하면 당장은 큰 손실과 위해가 오고 오그라들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커지고 뭉쳐져 더욱 강력한 힘으로 성장하여 압제자와 싸워 이겨나가는 시기가 있다. 광주항쟁은 바로 이처럼 민중의 에너지가 역동적으로 집결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역사적인 분수령이었다. 어쩌면 근현대사 100여 년 동안, 어쩌면 분단 30여 년 동안, 어쩌면 5·16이후 20년 가까이 당하기만 했던 민족이 그것을 거부하고 일어난 엄청난 규모의 전환점이자 분수령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폭압으로 누르려 해도 눌려지지 않고. 누르면 용수철처럼 튀고 같이 일어나 싸우는 때, 이런 때는 정치군부로서는 최악의 시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광주항쟁은 민족세력과 반민족세력, 민주세력과 반민주세력, 민중세력과 반민중세력이 한판 승부를 크게 벌린, 한국 민주·민족 모순이 집중적으로 폭발되기 시작한 세기적 전환점이었다. 다만 국민대중과 그 전위인 학생 청년들이 그 때문에 무자비한 폭압과 테러를 당하게 되며, 파시스트적 도착과 경련에 따르는 커다란 희생을 감수하지 않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
4. 광주항쟁과 5월투쟁 - 민주화·반미 자주화운동
광주의 시인 김준태는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에서 "… 하느님도 새떼들도 / 떠나가 버린 광주여 /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 아침 저녁으로 살아 남아 /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라고 노래하였지만, 1980년 5월 광주항쟁 이후 광주는 5월만 되면 불사조로 살아나 민주화와 자주화를 바라는 조국의 모든 학생·청년의 가슴에, 국민대중의 가슴에 뜨거운 불길이 되어 가열차게 타올랐다. 광주는 민주화와 자주화, 통일의 적에 대해서 이제 영원한 사슬이 되었다. 이제 광주는 군부독재세력과 미국의 목을 감고 있는 오랏줄이 되었다.
광주항쟁 1주년을 맞아 이미 몇몇 대학에서는 광주의 핏자국을 따라갈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1981년 5월 12일 서울에서 성균관대 학생들은 '5월 광주사태를 기억하자'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벌였으며, 다음날 서울대생은 '광주 반파쇼 민주항쟁 1주년을 맞이하여'란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에 들어갔다.
광주는 4월과 5월의 투쟁 속에 되살아나고 있었다. 1970년대까지는 학생들의 투쟁은 주로 4·19기념일을 전후로 하여 전개되어 4·19만 되면 여러 차례 교문이 굳게 닫혔었다. 그러나 1980년대의 정치군부는 4월과 함께 5월의 열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5월은 4월보다도 훨씬 격렬한 것이었다(1980년대 들어 광주학생운동 기념일이기도 한 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 투쟁이 강화된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4월 진달래가 온 산에 흐드러지게 필 무렵, 학생들은 4·19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4월제 -4월투쟁을 벌였고, 물을 머금고 새싹을 내던 산천초목에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5월이 되면서, 흙과 나뭇잎, 풀벌레 울음소리도 광주의 영령과 하나가 되어 모두가 일어섰다. 어떻게 보면 4월제는 학생들 사이에 대중적 분위기를 돋구는 예행연습기간·준비기간의 성격조차 있다면, 5월에 대학가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5월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4년 5월 초순부터 불붙은 대학가는 5·17과 5·18을 맞으면서 더욱 가열되어 각 대학과 여러 지역에서 5·18광주항쟁기념식, 광주항쟁 4주기 추모제, 광주영정위령제 등이 있었고, 5월 17일 하루에 서울에서 17개 대학, 지방에서 전남대 등 9개 대학이 광주항쟁을 이슈로 시위와 농성을 벌였다.
1985년 5월부터 5월투쟁은 훨씬 본격화되었다. 5월들어 각 대학에서는 광주항쟁에 대한 광범한 문제제기와 그를 통한 대중결집이 있었고, '광주항쟁 계승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 '광주학살 원흉 처단하라'는 플래카드가 대학 곳곳에 나붙었다. 5월 6일 고려대에서 있은 전학련 2차대회에서는 '오월투쟁선언'이 발표되었고, 전학련의 삼민투위 산하에는 광주학살원흉처단위원회연합이 결성되었다. 5월 10일에는 서울대에서 광주항쟁진상규명대회가 열렸고, 5월 15일에는 전국 29개대 10,000여 학생들이, 다음날에는 39개대 2만여 학생이, 5월 18일에는 80개대 38,000여 명이 광주사태 진상규명 및 책임자처단을 외치며 시위를 벌렸다. 그리고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갈 무렵인 5월 23일에 서울미문화원 점거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5월투쟁 -반 군부독재 민주화투쟁은 적어도 대학 내에서는 2중정부, 2중의 가치체계가 공존하는 것 같았다. 대자보나 플래카드, 시위를 보면, 광주학살 원흉과 파시스트 군부에 대한 타도가 정면으로 외쳐졌고, 그것도 원색적인 표현이 많았다. 많은 경우 그렇게 극성을 부리던 학교 당국은 이때쯤은 속수무책이었다. 학생들과 일반 국민대중에게 1980년대의 군부정권은 정통성과 합법성 윤리성을 상실한 폭력정권, 심지어 범죄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2중적 상황은 혁명적인 시기 또는 기존권력이 해체 붕괴되는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터인데, 한국에서는 광주학살과 직결되면서, 그리고서는 5·17, 12·12, 유신쿠데타, 5·16으로 소급되어 연계되면서, 군부정권은 마땅히 해체시키고 붕괴시켜야 할 권력체계로 인식되었으며, 운동권 학생들은 열정적으로 혁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민주화투쟁은 바람을 타고 있었다. 여기에는 노동자 농민은 물론 여러 층의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2·12총선에서 몰아닥친 돌풍은 개헌투쟁, KBS시청료 거부운동, 4·13호헌조치 철폐운동에서 군부독재 타도운동으로 진전되었다. 민주화운동은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고, 일파만파로 공공적 단체·조직·소속 집단·조직 등 사회 곳곳에 번져갔다. 이처럼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한국의 역사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규모로 진행되어 갔다.
반미자주화운동의 지향
1999년대에 들어와 반미자주화운동이 그렇게 거셀 줄은 적어도 기성세대에서는 아무도 예측 못했을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지배세력에게 너무나 신성불가침의 존재여서, 지배체제를 비판할 수는 있어도, 미국과 한국간의 근본문제를 파고 들어가는 것은 쉽게 엄두를 낼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반공의 경우처럼, 마음속으로는 철저히 미국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겉으로는 '우방' 미국을 우호적으로 비판한다는 '인사치레'를 잊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생존의 논리로 그 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던 것이다. 아니, 1960, 70년대의 한국의 민주세력의 상당부분은,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980년 봄에도,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에 호의적이라고 주장하였고, 종교계일수록 더욱 심했지만, 심지어 미국에 기대어 반독재 투쟁을 하려는 사람조차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5·17쿠데타와 광주학살은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고, 미국을 있는 그대로 보는, 나아가서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미국이 광주학살을 방조 묵인했다는 이유 못지 않게,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는 군부정권'을 미국이 계속 강력히 지지한 것이 반미감정을 불지른 직접적인 원인일 것이다. 군부독재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유지되는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였고, 군부독재정권이 미국에 예속되었다는 관점은 크게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이제 한국인들은 미국이 광주학살을 왜 묵인 또는 방조했는지, 광주학살과 그 이후의 수많은 만행을 저지른 군부정권을 왜 그렇게 돈독히 지지하는가를 역사적으로 생각해 보았고, 결국 역대 독재정권의 기반이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미국이 한국에 분단체제를 강요하는 한 한국에서 민주화 자주화가 이뤄진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급진적 시각, 자주화를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시각에서 볼 때, 미국은 제국주의의 우두머리(영도)국가로서, 1905년 이래 한국에 대한 일제의 단일지배를 양해했고, 1945년 이후에는 일제를 대신하여 한국에 들어와 해방-민족자주국가의 건설과 민족민주혁명의 완수-을 압살하고 한국에 신식민주의를 관철했다는 인식이 도출될 수 있었다. 이들에게 한국은 20세기 전반부는 일본의 식민지였고, 20세기 후반부는 미국의 신식민지로 인식되었다.
1980년 5월 21일경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한다는 얘기가 떠돌자, 이미 "미제국주의를 추방하라", "양키들은 군대 이동 철회하라"는 구호가 나왔고, 1980년 6월에 나온 '광주시민의거의 진상'이란 유인물에서도 "이제 우리는 미국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야 한다"고 하였지만, 반미자주화의 봉화는 1982년 3월 18일의 부산미문화원 방화에서 극명히 타올랐다. 이날 나돈 '미국은 더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물러가라'는 유인물에서는 "이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고 호소하였다.
광주학살과 반미운동과의 연결은 1985년 5월 23일부터 있었던 서울미문화원점거사건을 통하여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반미투쟁이 학생운동의 주요 부분으로 등장하고 격렬성을 띤 것은 1986년 상반기부터 일 것이다. 이때 등장한 반제민중민주주의혁명론에서는 "미제와 미제의 앞잡이(예속자본가·지주·반동관료·괴뢰정권)에 의해 파쇼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는 사회"로 한국사회를 규정하고, "따라서 올바른 변혁운동은 미제와 미제의 앞잡이세력의 민중지배의 도구, 구조화된 폭력으로서의 신식민지 파시즘의 철저한 해체와 파괴를 지향하며, 이를 통해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을 과제"로 한다고 하여,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을 통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이해 봄에는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의 외침이 서울의 대학가를 휩쓸었다.
반미자주화운동과 함께 반공이데올로기 분쇄투쟁이 전개된 것은 운동의 논리상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반미자주화투쟁을 벌이면, 예외 없이 반공법이 통합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제국주의건 반미자주화운동을 금압한 독재정권이건 철저히 반공이데올로기란 여의봉을 휘둘러 민족민주운동을 탄압해왔다는 사실이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중반기에 학생들은 때로는 '인해전술'을 써서라도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지 않을 수 없게 하겠다고 나섰고, 거기에 군부정권의 정치적 의도가 결합되어 1986, 87년에는 '국가보안법 사범'이 대량으로 출현하였다. 한편 반공이데올로기 분쇄투쟁은 1988년에 전개된, 6·25 이후 처음보는 대규모의 통일운동에서 반북이데올로기 분쇄운동, 곧 북한바로알기운동으로 나타났다. 문자로는 헌법에 기록되어 왔지만 사실상 사문화되어 있었던 사상·학문·양심의 자유라는 기본권은 지금까지 살펴본 민주화·자주화 투쟁을 통하여 조금씩 그 실질적 영역을 획득해냈다.
5. 맺음말 - 광주항쟁을 계승하려면
광주항쟁을 계기로 1980년대 내내 치열하게 전개된 반군부독재 민주화·자주화 투쟁은 1987년 6월민주화항쟁에서 일단락을 맞게 되었으며, 6월항쟁으로 열려진 국면을 통하여 민주화·자주화 투쟁은 보다 철저히 진전되어 현실로서 결실을 맺을 것이 요구되고 있다.
광주항쟁은 3·1운동, 10월항쟁(46년), 4·19, 6월항쟁과 비교해 볼 때,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광주항쟁은 광기어린 정치군부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유신체제의 변태(變態)로 본격 출범하는 순간에 일어난 것이어서 다른 역사적 사건이나 투쟁에 비해서 외형상으로는 소득이 없는 패배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호남의 수부 광주는 역사상 희귀하게 민중의 힘으로 계엄군을 몰아내고 해방을 창출하였으며, 광주의 10일은 너무나 오랫동안 죽어왔던 민중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의의를 갖고 있다. 1980년대 중후반기의 5월투쟁 등 민주화·자주화 운동은 1970년까지의 민주민족운동과는 양적 질적으로 큰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 사당 또는 도당 패거리로 전락한 체제 수호자들의 발가벗은 모습과, 광주시민, 호남인들의 위대한 투쟁이 그 운동을 발전시키고 고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었다. '군화의 광기' 위에 서 있는 1980년대의 정치군부는 단순한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마치 '불공대천의 타도의 대상'처럼 간주되었다. 또 분단체제 40년의 집중적 모순에 결연히 맞선 광주항쟁은 군부독재, 분단체제가 끝장날 때까지 계속될, 분단세력에 대한 통타(痛打)요 조종이었다.
이제 광주항쟁의 계승은 6월항쟁에서 보여준 국민혁명적 운동을 어떻게 심화·확충시키고, 그것을 사회혁명적 운동으로, 그리고 통일로 접근시키냐에 있다. 여기서 4·19에서도 그랬지만, 광주항쟁과 6월항쟁에서 조직된 주도역량이 부재했던 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제기된다. 광주항쟁 때에는 김대중씨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이것이 광주항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의 행태, 그리고 이번의 중간평가 문제에서 보여준 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기회주의적이고, 당리당략적인 기성정치세력은 진실로 호남민중들의 비원을 성취시키는데 문제가 있으며, 민주화·자주화세력에 대신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민주민족세력은 자신을 국민대중 속에서 주체역량으로 키워내야 한다. 민주민족세력은 이제 이념의 실현을 위한 권력의 문제를 현실의 문제, 당면의 문제로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대중적 주체역량의 형성은 1987년 6월까지에서 보여주었던 투쟁방법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에서 이뤄지는 것은 아닐까, 현재 한국은 자본주의국가건 사회주의국가건, 세계 어떤 나라들도 경험해보지 못한 구조와 상황을 안고 있다. 한국문제의 전망은 바로 이와 같은 특수한 한국의 현실을 보편적 이론, 선진적 경험과 창조적이고 주체적으로 결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고도의 산업구조를 가진 중화학공업국가가 되었는데,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재벌들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다. 철저히 외세의존적이고 관료주의적이며, 파시스트적인, 그래서 지배와 복종에만 익숙해 있는 권력 중추는 여전히 무장·통제력과 정보력을 다 장악하고 있다. 국민들은 어느 누구도 전산화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컴퓨터 광통신 등 첨단기기는 점차 일반화되어 가는 추세다. 소작농은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모든 농업 생산은 오로지 이윤 동기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게, 세계에서 GNP의 수출입 의존도가 가장 높은 것이 단적으로 말해주듯, 기술 원료에서 시장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산업은 철저히 외부 의존적, 그중에서도 특히 대미 대일 의존적이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하는데, 그러나 쉽게 파괴되기도 개선되기도 어렵고, 상부구조를 지탱해주는 물적 토대, 바로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민주민족세력은 현재 한국이 안고 있는 이 복잡성과 중첩성 다의성을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진지하게 그리고 상당부분 전문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추상적이고 단순화된 일반이론으로서는 현실은 제대로 인식되지도 변혁되지도 않는다. 1980년 광주항쟁에서 1987년 6월항쟁-7,8,9월 노동투쟁까지 민주화·자주화 투쟁에 중요한 진전이 있은 것은 대자보나 팜플렛에 씌어 있던 각종 혁명 이론, 각종 사회구성체 이론이 옳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1980년대의 권력의 성격이 너무나 분명하였고, 때문에 그에 맞서 싸운 투쟁이 대단히 감투적이고 희생적이고 헌신적이기 때문이었다. 또 반미자주화·반공이데올로기 분쇄·북한바로알기운동, 민주헌법 민주법률 쟁취투쟁과 같은 경우, 그 의의가 큰 것은, 40여 년 동안 이 땅을 지배해 온 너무나 잘못되고 왜곡된 분단체제 분단논리를 바로잡는 운동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군부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 민주민족운동에는 어려운 이론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 함께 국민대중에게 공감을 주는 국민적 과제를 적절히 제기하기나, 국민대중을 광범히 하게 묶어세우는 유연성 있는 대응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1980년대의 역사적 과제, 분단 40여 년의 역사적 과제, 근현대 100여 년의 역사적 과제를 민중 속에서 구현해내려면, 국민대중을 정치적으로 묶어낼 수 있는 투쟁, 조직 방법, 논리 또는 비젼의 제시가 지금까지의 그것들과 병행하여,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들을 넘어서서 있어야 할 것이다. 많은 부분, 사고의 대전환, 행동의 대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까지를 대담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변화해야 하는 것은 반민족적 반민중적 파시스트 권력과, 경제 사회구조만이 아니다. 국민대중도 변하여야 하고, 무엇보다도 민주민족세력의 대응 능력도 변하여 분단세력을 구축할 수 있도록, 그리고 바라는 바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민대중을 결집시켜야 한다. 이때, 광주항쟁, 그리고 갑오농민전쟁, 3·1운동 이래의 민주화, 자주화의 과제는 통일한국에 현실화되어 민주민족사회가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발제-서중석)
토론
광주항쟁의 역사적 성격과 80년대의 반미자주화 투쟁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항쟁 발발의 조건
최장집(사회) 이 토론을 위해서 서중석 선생님이 좋은 글을 발표해 주신 데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 발제문에서 제시된 내용을 중심으로, 여기서 제기된 해석상의 이견이나 쟁점을 여러 가지 시각에서 논의 해봤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논의의 유도를 위해서 간단하게 초점을 지적해 주시죠.
서중석 제 얘기는 발표를 통해서 자세하게 말씀드렸기 때문에 여기서 구태여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요점은 어째서 광주에서 그렇게 상상하기 어려운 참혹한 탄압이 있게 됐는가, 그리고 다른 때, 다른 지역 같으면 그 정도의 탄압이면 무너지고 말텐데, 오히려 거기에 맞서면서 계엄군을 내쫓고 해방지역으로까지 만들었는가를 해명하는 데 두었습니다.
이종범 광주지역에서 그러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된 것은 바로 군부독재 집권의 권력을 향한 기본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해방'공간을 만들어내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맞물려 있겠지만, 전남 광주지역의 역사적 배경이랄까 운동경험의 문제가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의 식량 및 공업원료의 저렴한 공급원으로 되면서 호남지역이 상대적으로 농업선진지대로 위치지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 점으로 해서 일본자본의 집중적 수탈대상이 되고 그 과정에서 그에 추수야합하는 봉건매판지주세력이 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만큼 이 지역의 빈농, 소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지역대중의, 일제에 반대하고 그와 결합한 봉건매판지주자본가 및 권력에 대한 저항이 강력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해방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 기간에 걸쳐서 강력하고 집요한 무장 투쟁이 이 지역을 무대로 지속적으로 펼쳐지게 된 것 역시 이 지역대중의 자기 역사경험의 축적 그리고 토지문제를 비롯한 민족적 당면과제에 대한 비원과 같은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경험들은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하에서의 외세의존적 수출주도형개발정책은 박정권의 정권안보적 차원에서의 공작정보정치와 결합하면서 전남 광주지역의 다수 대중을 경제적 소외만이 아니라 정치적 소외의식에 젖어들게 하였던 것입니다. 박정권의 지역불균형 개발 그리고 농업포기정책, 농촌분해정책이 이 지역 대중에게는 종속형적 비산업화의 불이익을 집중적으로 당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역사와 상황은 이 지역에서 보다 강력한 정치적 욕구가 전면에 드러나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10·26 이후 이 지역 대중은 아마, 이제 더 이상의 지역편중과 차별에서 오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1970년대 후반 이래의 농촌의 피폐가 더 이상은 진행되지 않는 정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민주화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 자연스럽게 김대중이라는 대중적 상징이 존재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컨대 전남 광주지역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기본모순과 주요모순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만큼 자기역사를 변혁하려는 강렬한 욕구와 그 실천경험이 축적된 지역이었는데, 이러한 지역적 조건이 바로 군부파시스트의 계획적 공격에 대해 일체화된 적극대응이 있을 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조희연 저는 광주항쟁 발발의 일반적 조건에 초점을 맞춰보고 싶습니다. 광주항쟁까지를 포함해서 10.26부터 5.17까지의 정치적 격변의 과정이 어떻게 일어났느냐를 살펴보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 광주항쟁을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런 일반적 조건 속에서 지역적 특수성이 매개되면서 광주항쟁이 결과됐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죠.
10·26부터 12·12, 5·17에 이르는 정치적 격변은 기본적으로 1970년대 말에 지배체제의 위기, 그리고 그런 지배체제의 위기를 창출한 정치경제적 위기 및 민족민주운동의 발전, 이런 측면과 연결시켜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통 얘기하다시피 1945년부터 1950년까지는 민족국가의 성격을 둘러싼 전면적인 계급투쟁의 시기였는데, 민중세력의 패배로 친미반공분단종속체제가 형성되고 변혁운동의 역사적 전통이 일정하게 단절되게 됩니다. 크게 보면 6·25 이후의 한국사회의 변화과정은 이런 친미반공분단종속체제의 모순의 심화 그리고 균열의 과정이고 그것에 대응하는 민중운동의 변혁적 전통의 복원과정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6·25 이후 한국의 지배체제사를 보게 되면 몇 가지 유사한 위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1950년대 지배체제의 위기를 배경으로 4·19라는 민중운동의 고양기를 맞게 되고 그것에 대한 지배체제의 반동적 대응으로서 5·16군사정권이 등장하는 시기가 있겠고, 그 다음에 1960년대 지배체제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배경으로 1970년대 초반의 민중운동의 고양과 그것에 대응한 유신체체의 성립이 있습니다. 10·26 이후의 과정은 이런 맥락에서, 1970년대 지배체제의 정치경제적 위기와 민중운동의 발전을 일정하게 반영한 것인데, 이런 민중운동의 발전을 전제로 한 1970년대 지배체제의 위기에 대응한 지배체제의 재편과정으로서 10·26 이후에 12·12, 5·17까지의 과정 전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사태 역시 바로 이러한 일반적 변동과정 속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전과 다른 1970년대 말의 위기를 규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하면, 먼저 친미반공분단종속체제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추진된 1960년대 이후의 종속적 자본주의화가 창출한 계급적 모순의 심화를 들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그처럼 심화되는 계급적, 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면서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연화된 파쇼적 억압통치로부터 유래되는 정치적 모순이 있는 것이죠. 이런 모순적 통치에 대한 대중들의 광범위한 불만이라고 할까, 이런 것들이 1970년대 말에 한국사회에 기본적으로 존재했던 것이죠. 그런 구조적 위기들이 현상적으로는 1970년대 말에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이라든가, YH무역사건이라든가 총체적으로는 부마사건 등으로 표현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1970년대 말의 위기에 대응한 지배체제의 재편으로서 10·26을 전후한 일련의 과정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이 경우 지배체제의 변화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민중적 대안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세력 자체가 주도하는 지배체제의 제한적 재편입니다. 1970년대 민중운동의 발전수준으로 볼 때 전자를 관철시킬 수는 없는 수준이었고, 따라서 결국은 지배체제 개편의 주도권이 지배세력 내에 있게 되는데, 여기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면서 온건파에 의한 일종의 위기해소를 위한 예방혁명적 궁정쿠데타가 10·26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군부강경파에 의한 12·12로 역전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광주사태를 촉발시키는 직접적 요인이 되는, 강경군부세력에 의한 역쿠데타가 왜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기존 지배세력이 주도하는 온건한 방향에서의 체제재편 가능성은 애초부터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 1970년대 말 독점자본의 물적역량 곧 지배세력의 경제적 기초기, 분출하는 민중적 요구를 수용해내는 데 제한적이었다고 봅니다. 1978년 이후 한국경제는 불황국면으로 빠져들었고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성장은 실패로 인해서 한국독점자본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온건한 체제 개편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의 또 하나는 카터의 인권외교에서 표상되는 일시적인 '군부통치 온건화 전략'이 이란혁명 등의 사태에 의해 후퇴하고 미국의 대한정책에 있어서의 보수화경향들이 일정하게 대두되고 있었던 점입니다. 또 하나의 요인은 10.26온건주도세력이 굉장히 약체라는 점입니다. 체제개혁의 구상 자체도 불철저하고 군부내의 기반 자체가 취약했어요. 이런 맥락에서 불가피하게 12·12라고 하는 군부강경파에 의한 체제개편, 유신체제보다도 더욱 후퇴한 더욱 폭압적인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게 되고 여기서 광주사태의 지배체제측 조건이 예비되게 되는 것이죠.
왜 '광주'인가
사회 한국에서는 10년마다 모순이 증폭되어 나타나고, 이렇게 민중운동의 고양과 함께 지배구조가 재편되는데, 유신 후반기에는 미국 카터 대통령의 인권외교가 큰 애로를 맞으면서 이란이나 중미에서의 혁명으로 나타나고, 카터 말년에는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