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시민이 말하는 광주문제 해결방안 / 광주, 수난에서 항쟁으로. 김정환 외(월간중앙, 1988.
본문
-광주시민이 말하는 광주문제 해결방안-
<현지특별좌담>
광주, 수난에서 항쟁으로
{민주화운동권에선 5월의 광주투쟁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사에 획을 그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제는 수난의 관점에서 항쟁의 관점으로 넘어갈 때가 된 듯하다. 당한 것만 진상규명의 차원에서 얘기할 것이 아니라, 그 참혹한 수난과정을 관통하면서 무엇이 이룩됐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는 얘기다.}
□사회·정리 / 김정환<시인> □때 : 1988년 4월 8일 □곳 : 광주 YWCA □사진 / 송의호
□기록 / 한기홍 □진행 / 선경식
명노근<전남대 교수평의회의장·당시 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지난 대통령선거기간 중의 광주 부각은 바람직했던 같아요. 그후 정부측에서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 운운으로 규정 했는데, 우리가 보기엔 부족하지만 그들로선 뼈아픈 양보일 겁니다.}
전계량<5·18광주의거 유족회 회장>
{각각의 희생자 유가족들의 생각은 같지 않습니다. 유가족들과 운동권의 생각사이에는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없지요.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투쟁할 기력조차 없어졌다고 하소연하시는 분들도 있구요}
남재희<천주교 광주남동성당주임신부·당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간사>
{17일 24시 이전에 군은 이미 광주 외곽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계엄이 확대실시되어야 군대이동이 가능한 것은 상식아녜요? 아무튼 예비검속이 9시부터 행해졌는데 정동년씨도…}
이양현<광주민중혁명부상자동지회 부회장·당시 시민학생 투쟁위 홍보부장>
{저희가 21일 이후 힘을 모아 싸우면서 만들었던 광주는 정말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었던가 싶어요. 핍박받는 노동자·농민·도시빈민이 자랑스럽게 대동단결했던 며칠간이었죠.}
박효선<연극연출가·당시 시민학생 투쟁위기획위원>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연극을 서울에서 공연할 때 놀랍도록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광주에서 같은 공연을 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 걱정스럽습니다. 조작·은폐·왜곡이 너무 심해…}
최완욱<전남대 총학생회장·당시 고교 1학년>
{해마다 5월이 오면 머저 진상규명이란 문제가 거론되고, 신문잡지에 개요가 되풀이되곤 하는데, 문제는 진상규명의 의미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 입니다. 그런 시각없이 앵무새 같은 행위에…}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나
金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5월이 돌아왔습니다. 끔찍한 저질러짐이자 영월한 피투성이 희망인 광주 5월뜬 그 전모나 진상이 아직 1백분의 1도 안밝혀진 채 점점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 5월을 기리고 진상을 좀더 가려보고 역사적 의미를 진지하게 확립시키는데 매진해야 할 이 때에 맞추어 현정권은 민주화합추진위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광주사태] 수습안을 제시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우선 그 수습안에 대해 피해당사자인 여러분들의 의견을 모아보고 더 나아가 좀더 근본적인 문제까지도 차제에 한번 짚고 또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우선 현정권의 수습안을 보자면 첫째, 사망자 신고를 받아 사망자가 더 있는지 확인해보겠다. 둘째, 부상·사망자에 대해 성의를 갖고 지원하겠다. 셋째, 망월동묘지를 공원화하고 위령탑 건립비용을 어린이 공원비용으로 충당하겠다. 유가족을 지원하고 부상자를 치료하겠다 등등 이었지요.
田 도대체 어이가 없는 소리예요. 우선 현정권이 제시한 해결방안은 그 주제랄까 전제가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돼있지요. 그리고 국민화합의 차원에서 서로 용서하고 양보하자는 것이 그 기조로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광주학살을 논하는데 있어 현정권이 일단 대등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어요. 즉,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 둘 다 피해자다 이거란 말에요. 이게 도대체 말이 되나요. 분명히 말하자면, 5월 과주는 [의거]예요. 즉, 피해자와 가해자가 엄연히 있단 말입니다. 그것은 끔찍한 무차별 학살만행에 항거한 광주시민의 봉기입니다.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니 [화해]니 [용서]니 하는 말은 여전히 피묻은 칼을 들고있는 사람들이 하기엔 뭔가 우스꽝스럽거나 섬뜩한 말 아니겠어요.
明 실사 그 말이 미흡하나마 성의표시는 된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에 총칼을 들이 댄 자들은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 자들은 민주화를 저지하려고 그랬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중벌에 처해야 마땅한 것 아니냐, 현 정권의 논리를 그냥 따르더라도 우선적인 문제가 한 두개가 아닌 것 같아요.
李 저희 부상자 동지회에서는 일관되게 아주 소박한 주장을 되풀이 해온 셈입니다. 즉,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왜 계엄령이 확대되고, 왜 발포를 했고, 왜 총칼로 찔렀고 몇명이나 죽였고 또 어떻게 죽였는가. 그것이 밝혀지기를 저희는 바랐습니다. 책임자와 가해자를 가리자는 것이지요. 저희 단체에 접수된 사망 신고한 해도 한 2백여 명이나 돼요. 그 중 우선 1백여 건만 조사해 보았는데 피살됐을 거라는 확신을 주는 명단이 l5,6명 된단 말입니다. 저는 그 책임자가 과연 양키였는가, 그들의 앞잡이인 일부 정치군인인가를 밝혀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용서하는 것은 진실이 밝혀지고 난 후의 문제지요. 그 숱한 부상자·유가족·해직자·정신질환자 중 보상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고 당시 [내란주요임무종사자]로 구속된 사람들은 현재 사회안정 법 대상자로 되어있어 언제라도 보안감호처분이 가능합니다. 그 사람들은 다시 재판절차를 밝게 하여 무죄증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하여간 해직자 등 간접적 피해자에 대한 언급이 이번 조치엔 전혀 없더군요.
明 사망자 및 부상자 신고를 받는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진정한 민주화가 되지 않는 한 신고자체를 받기 힘들지 않겠어요? 그 당시 무슨 해를 당할까봐 신고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현정권 하에서 선뜻 숨겨 뒀던 걸 밝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 안되지요.
田 12대 국회에서 윤성민국방장관은 사망자가 군·경·민간인 포함해서 1백91명이다, 더도 덜도 없다고 했었지요. 자신 만만하게. 사실, 5.18직후 신고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정부에선 전혀 인정을 하지 않았어요. 신고를 받겠다고 해서 다시 신고를 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포 때문에 신고를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니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는거란 말이죠.
南 사실 사망자의 수라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죠. 1백91명이면 적나요, 어디? 공권력이 한 명을 죽여도 그 책임을 면치 못하는 것인데요.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그 끔찍한 전모를 알기 위해 필요한 거 아니겠어요?
李 그 숫자가 워낙 엄청나서 학살군도 은폐에 기를 썼지요. 그 이후로도 그 노력이 집요했어요, 시체가 발견된 곳을 보면 군부대가 주둔했던 흔적이 있어요. 많이 묻혔다는 곳을 가보면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있고요. 7-8년 동안 은폐작업을 계속해 왔다는 얘깁니다.
田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자기들이 처리하려 기를 썼거든요. 5월 27일 도청에 들이닥쳐서도 은폐를 위해 자기 총은 어깨에 메고 정작 시민들의 M1이나 카빈으로 시민들을 사살했다 이겁니다. 완벽하게 은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얘기지요.
李 이창호라는 분은 분명 계엄군의 Ml6총을 맞고 죽는 걸 제가 직접 봤는데 나중에 조사받다가 보니 폭도중에도 악질폭도라 분신자살했다고 기록이 돼있더군요.
田 지금도 신고가 우리 쪽으로 들어오는데 행방불명자가 참 많아요. 또 그 당시 부상의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도 많구요. 또 고아·넝마주의 등 무연고자들은 전혀 신고될 가능성도 없고요. 신고라는 것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朴 역설적으로, 계엄학살군들은 역사의식이 참 투철했던 셈입니다. 역사의 심판을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그랬겠습니까. 행불자 처리 같은 것은 이 나라가 완전 민주화되기 전에는 어렵다고 봅니다. 학살과정에 참여한 당시 지휘관들도 모조리 조사를 받아야 해요.
광주의 진실은 민주화의 바로미터
崔 80년 이후부터 5,6공화국이 줄기차게 추구해왔던 일은 정권의 합법성과 정통성의 확보였습니다. 그것은 5월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일에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은 광주항쟁 당시부터 이미 원성이 높았습니다. 광주항쟁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두환 정권은 전혀 합법성과 정통성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정통성 시비를 해소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이 全정권으로서는 선거였던 셈입니다. 그 과제는 노태우정권으로 넘어왔지요. 민정당이 선거전부터 민화위를 설치하겠다 하고 이제 광주문제에 대한 수습책을 발표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5월문제를 우리가 올바르게 해결하려면 그런 맥락을 이해해야한다고 봐요. 노태우정권은 뭐 한치라도 다른가요? 전두환·노태우정권의 본질, 그 연속선을 폭로해내고 선전해내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광주해결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5월 주체들의 입장을 천명하려는 입장이 너무 미흡했던 것 같아요. 진상규명이니 보상이니 하는 것에 목을 매달 차원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저희들 전남대학생협의회 입장에서 보자면 민화위라는 건 4천만을 우롱하는 사기단체에 불과해요. 비유를 써서 말하자면 광주문제를 해결하면 재판이 벌어져야 하는데 ! 판사는 4천만 국민이고 검사는 5.18부상자·유가족들이고, 피고는 [광주 5적]이라고 일컬어지는 12·12 주역들과 미국이 되는 것이죠.
田 용서하라고 하는데, 물론 인간은 과오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과오를 뉘우치고 회개했을 때 용서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인데 이 정권은 과오를 깨닫거나 뉘우칠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피해자에게 용서를 명령하고 있다 그거예요. 용서의 주체가 누굽니까? 가해자가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있나요. 정말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면 광주시민이 보복의 차원에서 처단을 하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朴 현정권이 그렇게 대응한 것도 그간 운동단체들이 계속 문제제기를 한 결과겠지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바라는 진실이 밝혀질 거예요. 민주화에 대한 확신과 똑같이 그런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崔 지금 운동권은 4분5열 돼있었지요. 사소한 정치적 차이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87년의 부분적인 승리는 단결에 의해 달성됐습니다. 재야정치권은 분열됐지만 국민들은 단결했던 것이지요. 88년 상황, 분단과 통일의 갈림길에서 모든 운동단체들이 한데 뭉쳐 열렬하게 투쟁하는 것이 5월의 올바른 계승이고 또 그 완성이 광주문제의 올바른 해결이라고 봅니다.
田 정부차원의 해결모색이 아닌 국회에서 국조권을 발동하거나 특별법을 제정, 해결해보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李 저는 직접 투쟁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특히 언론의 보도태도에 심한 불만을 느끼고 있습니다. 도대체 본질문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요.
南 못하는 것은 못하는 대로 남겨 둬야지 왜곡하면 안되는 것이지요. 광주의 진실은 민주화의 바로미터입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진실 앞에 참여할 때 민주화의 길이 열립니다. 광주항쟁의 과정에서 이미 진실은 확연히 드러난 것입니다.
金 예. 참석하신 분 모두의 의견이 그렇듯이 이번 발표는 뭔가 문제의 핵심과 어긋나 있고, 그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왜곡에 언론도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모두 나서서 한몫씩 거들고 있는 듯 합니다. 본질적인 문제가 이미 참석하신 분들 말씀에서 피가 튀듯 튀고 있지만, 5월 광주를 직접 체험하지 않은 일반독자들에게는 다소 과격하기만 할 반응이다라고 여겨질 우려도 있을 성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기왕에 나온 [광주사태] 및 [광주항쟁]의 개요를 다시 한번 재정리하고 거기에 오늘 참석하신 분의 경험담 목격담 핀 항쟁참가기록을 첨가, 이 단계에서나마 가능한 수준의 진상전모를 얘기해보고 그 구체성을 기반으로 다시 본질적인 부분을 짚어 봤으면 합니다. 개요에 관해서도, 황석영씨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가장 충실한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제가 들은 얘기로는 거기에 여자들이 당한 얘기는 [광주여성의 영예를 위해]뺏고 광주참상의 총화이자 한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태아임산부 피살사건은 [확인붙능]이란 이유로 빠졌다더군요,
明 그동안 진상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밝혀진 것들이 있고 한데 종합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고 봐야겠지요. 이 자리에서 얘기를 한다 해도,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고 우리의 체험범위도 좁기 짝이 없어서, 한계가 있을겁니다. 사실 그동안 사회학자·역사학자들 중심으로 광주문제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 인 자료수집·분석 작업이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그런 시도가 전혀 없었어요. 물론 대단한 작업이 되겠습니다만, 그런 작업이 이뤄져서 종합적인 {광주 백서}같은 것이 나와야 합니다. 진상규명을 위해 국회국조권을 발동시켜야 한다고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해도 한계는 그대로 남습니다. 제5공화국 출범 자체가 광주문제를 안고 시작되었고 현재의 제6공화극( 5·1공화국이 하고도 하고 5·5공화국이라고도 하는)대통령이나, 집권 정당인 민정당 자체가 광주문제에 피비릴 정도로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정당 아닙니까. 진상규명에 한계가 있을 것은 당연하지요.
제가 크게 테두리를 잡아 개요를 정리해보지요. 5월 14일, 15, 16일은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이 정부에 민주화의 구체적인 일정을 밝힐 것을 주장하며 대규모시위를 벌였습니다. 광주에서도 도청을 중심으로 광주 시내 전문대학까지 합해, 심지어 고등학교 일부(전남·대동고)까지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이런 종합적인 시위는 처음이었을 거예요. 16일 마지막 날에는 횃불데모를 하면서도, 조선대·전남대 교수가 거의 동원되어 그야말로 큰 사고없이 평화적으로 이뤄진 집회였고, 이쯤 했으면, 이 정도로 힘을 과시했으면 정부측에서 어떤 답변이 있을 것이다 하면서 학생들은 답변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답변은 주지않고, 최규하씨가 중동에서 돌아오자마자 권총을 들이댔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많은 사람들을 검속해갔습니다. 학생들은 16일 헤어지면서, 정부측의 답변이 제대로 안나올 경우 18일 아침에 전남대에서 모이자는 얘기를 했었지요. 그 날 아침 이미 전남대와 조선대 앞에 공수특전단들이 버티어 서 있었고, 자정을 기해 완전히 점령, 학교구내 조교 및 숙직하는 사람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조사를 하는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하여간 18일 아침 학생들이 학교엘 들어가려고 하니까 착검을 한 공수부대원이 길을 가로막고 못들어 가게 해 시비가 붙었지요. 2백여 명 정도의 학생들이 무기를 지닌 공수부대원들을 당해 낼 수는 없는 터라서 그들은 시내로 나왔고 젊은 사람·학생들을 규합, 결국 시내에서 산발적인 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5·18의 발단이지요. 그때 시위는 화염병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각목도 처음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차츰 과격해졌지요. 그러자 양대 학교에 주둔해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시내에 투입되어 곳곳에서 시위를 저지하는데 이것은 저지가 아니라 완전히 살상작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어요. 이것을 목격한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를 느꼈고, 마침내 시위대열에 합세하게 된 것입니다.
사전 계획된 작전수행추적
南 이 5·18이 일어난 시점은 언제였느냐, 이 점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확대계엄을 실시한 명분이 [집권층 내부쿠데타]말고는 별로 없어요. 5월16일 서울에선 진경이 버스에 깔려죽었고 그 사건에 온 국민이 경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짓을 저지른 당사자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은 외신에서도 의문을 제기한 바 있고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민주화일정 촉구데모는 평화적이었어요. 이에 비해 확대계 엄의 내용은 무엇이었느냐. 대학폐쇄, 민주인사감금, 국회해산이었어요. 5·17이 쿠데타였던 것은 그 점만으로도 명확하며,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쿠데타라는 것을 숨길 만큼의 양심조차 내팽개친 노골적인 쿠데타였다는 점이예요. 광주학살의 잔인성은 그런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18일 0시 이전에 군은 이미 광주 외곽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확대실시가 되어야 군대이동이 가능한 것은 상식 아녜요? 하여간 그렇게 하여 예비검속이 이미 9시부터 행해졌는데, 나중에 [광주 내란의 수괴]로 지목됐던 정동년씨도 실은 그 예비검속 때 붙잡혔어요. 시위도 있기 전에 살상부터 해나간 것과 마찬가지 얘깁니다. 살상은 잔혹했지요. 너무 잔혹해서 현장 경찰책임자가 제지를 하자 그 사람까지 무차별 난타를 했으니까요. 사건이 계획적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광주를 폭동상황으로 몰고 가라는 것이었죠. 데모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 공용터미널 여행객들까지 끌어내 젊은이라면 무조건 박살을 냈거든요.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 갔다고나 할까요.
明> 맞습니다. 시민들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어났으니까요. 19일 아침 무등고시학원에 공수특전단이 들어가 공부하는 학생들을 전부 끌어내 난타를 하고 젊은 사람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YMCA다방 주방장까지 곤봉으로 머리를 부쉈으니까. 그런 상황이 광주시민 전체를 분노케 했어요. 무기가 등장한 것은 석가탄신일인 21일, 무기가 등장하므로 22일 수습위원회가 구성됐던 겁니다. 22일 남동성당에서 신부·목사·법조인·교수·YMCA·YWCA지도자를 중심으로 했지요. 수습위원회는 모든 문제를 불문에 붙이고 갇힌 사람을 내주고 죽은 사람(그때 이미 도청에 안치된 시체가 1백50여 구였는데)을 시민장 치러주는 조건으로 계엄당국과 수습에 나섰는데 나중에는 우리 수습위원 전원을 내란죄로 몰았고, 재판에서 우리 수습위원들은 전원 실형을 받았어요. 이것만 봐도 사전계획에 의한 [작전수행]이었다는 증거가 충분한 것이죠. 처음부터 무장봉기를 하여 군인들을 죽이고 민간인재산을 약탈한 것이 아닌데 악랄한 살상을 그렇게 자행한 것은 뭔가 일을 꾸미기 위해 광주라는 특정지역 을 택했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田> 아까 명선샌님 말씀을 보충하자면 5월 10일경부터 이미 공수단이 상무대에 진주해서 폭동진압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계속 군용헬기, 트럭 등을 이용, 병력들이 속속 광주로 이동했구요. 왜5·18이 광주에서 일어났느냐를 저는 김대중씨와 관련해서 생각해봅니다. 김대중씨를 묶기 위해서는 광주와 연관을 지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김 대중씨의 제거를 위해 광주 5·18을 사전계획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죠.
南> 그렇다면 그때 당시 시민들의 구호를 봐야 하겠지요. 18일 아비규환의 생지옥 속에서도 광주시민들은 김대중씨 석방하라는 얘기는 안했거든요. [계엄철폐, 민주인사 석방, 전두환 물러가라]이 정도였어요. 포인트를 잘 잡아야 하는데요. 그것은 언론에 김대중씨 체포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고난 이후입니다. 광주시민은 김대중씨 구속 때문에 일어선 것이 아니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겁니다. 당시 구호를 보면 그 점은 확연하지요.
田> 여러 책자에서 계엄군 공수단은 전남대 나 조선대에만 진주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틀린 얘깁니다. 광주교육대학에도 똑같이 공수단이 진주했던 것은 저희 집이 교대 앞이라 제가 잘 알지요. 주요 교육기관에 모두 진주했어요, 계엄군이 전 시가지를 장악한 18일 아침에는 시가지에 데모같은 것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계엄군들은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무작정 붙들어 패고 실신을 시켜 트럭에 싣고 가는 거예요. 심지어 도망가는 사람까지 쫓아가 잡아오고, 집집 골목마다 대문을 차고 들어가 안방까지 쳐들어와서는 젊은이란 젊은이는 모조리 끌고 가는 거예요. 광주의거가 과잉진압에 의한 것이기 전에, 사전계획에 의한 광주시민 학살이고, 그것에 대한 대응봉기였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明> 그 점은 공수특전단이 다른 지역엔 안갔다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지요.
李 제가 보기에도 사전계획설이 유력하다고 봐요. 김대중씨를 구속하고 광주시민들이 총을 들게된 과정까지 그들은 면밀하게 계획을 짰던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광주를 통해 집권의 명분을 얻고자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도 그렇게 된 게 사실 아닙니까?
南> 12·12쿠데타를 통핵 실권을 쥐었지만 명분이 없었던 그들이 광주를 계기로 치안공백·안보공백을 조작, 전세계에 다 한반도의 위협을 알리고 군의 권력 장악을 이해시킨 셈이죠. 국내적으로 반대세력까지 제압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고 말이죠,
朴> 거기서 짚고싶은 대목은, 그런 일련의 사전조작에 분명 미국이 관련되어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입니다. 미국이 진압에 동의했으니까 미국도 책임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란 말이죠. 나중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으로는 대부분의 광주시내 거주 외국인들이 송정리 비행장을 거쳐 몰래 밖으로 빠져 나갔다는 거예요.
南> 사전에 빠져나갔다고 까지는 할 수 없구요. 선교사·신부님들도 있고 해서 제가 직접 아는 데, 사건의 와중이라 심증만 가질 수 있는 부분이지 확실히 결론을 내릴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진압부대 사전승인은 지난 7년간의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어요. 5·18당시 한미연합사의 통제 밖이었다는 공수부대가 5공화국 이후 다시 연합사로 귀속이 되거든요. 이런 것을 보면 미국의 관여가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朴> 항쟁의 와중에서 미국사람들이 빠져나갔지만 항쟁 이전에 빠져나간 미국인의 숫자도 상당수 됩니다. 미국은 어떻게 보면 저들 군부세력과 근본적으로 결탁하여 광주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요.
田> 그것보다도, 미국의 항공모함이 동해로 왔다고 했을 때 광주시민들은 환호를 보냈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환호였지요. 항공모함 사건은 광주시민의 미국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려 주었습니다.
국민은 사냥감일 수 없다
南> 그건 그렇고, 총소리가 제일 먼저 난 것이 언제였지요? 제가 알기론 20일 저녁 신역 부근에서가 아닌가 싶은데….
朴> 제가 알기로는 20일 오후 3시 30분 계림동 파출소 앞에서 PVC장갑차가 시민들에 포위됐을 때였습니다. 일종의 자구행위로 장갑차가 탈취될 위기에 빠지자 총을 아스팔트 위로 쏜 것이죠. 그 유탄에 조대부고 2학년 학생이 왼쪽 허벅지에 유탄을 맞았습니다. 첫 총상이지요. 첫 사망자는 18일 저녁에 나왔어요. 김안부라는, 서동쪽 빈민촌에 사는 연탄장수였지요. 18일 연탄배달을 못하고 얼굴이 시커먼 채로 공원으로 올라가다가 공수부대 몽둥이에 맞아 죽었어요. 그 시체를 그대로 버려놨지요.
南> 진압이 목적이었다면 일사불란한 군인들이 비무장시민을 상대로 그렇게 잔학할 리가 없겠지요. 시내 중심부 인파들만 해산시켰으면 될 텐데도 시외곽 변두리까지 몰려가 시민들을 살상했습니다. 문걸어 잠근 사람까지 끌어내 곤봉으로 내리쳤지요. 바로 눈 앞에선 자기 자식이, 오직 젊다는 이유만으로 맞아죽는데, 분노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민들이 자구를 위해서라도 봉기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으로 계엄군은 몰고 갔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점이죠.
李 >제 경험담을 말하죠. 20일 MBC앞 육교를 한 아가씨와 걷고 있었어요. 저는 당시 나이가 서른이었고 양복정장차림이었으니까 전혀 학생으로는 안보였을 거예요. 그런데도 밑에서 두세 명 의 공수대원이 저를 향해 달려오는데 그 모습을 보니까 잡혔다가는 맞아죽을 것 같아요. 그 아가씨와는 평소 운동을 같이 하면서 같이 죽고 같이 살자고 하던 사이였는데 그때는 어찌나 당황스럽고 겁이 났는지 그 아가시 손을 놓고 2백m를 뛰었는데도 계속 쫓아오길래 바로 옆담을 넘었지요. 그 높은 담장을 제가 훌쩍 뛰어넘더라구요. 공포가 극에 달하니까 그런 힘이 나더군요. 그러고도 안심이 안되어 저는 담을 하나 더 넘었습니다. YWCA앞길에서도 그랬지요. 공수부대원이 곤봉으로 한 학생이 머리를 치는데 YWCA부녀회원이 달려가 말렸어요. 이 학생은 내가 잘 아는데, 데모할 학생이 아니다 라고 말이죠. 그랬더니 공수부대원들은 그 아주머니까지 곤봉으로 때리는 거예요. 머리에서 퍽 소리를 내며 아주머니가 스러지자 이 장면을 본 무등고시학생들이 {우}하고 야유를 했지요. 그랬더니 공수 1개분대 정도 병력이 학원으로 올라가 피바다를 만들어버렸어요.
南> 그때 당시의 진압군인들이 과연 흡혈귄지 군인인지 저는 아직도 알 수가 없어요. 입에서 한결같이 술냄새를 풍겼고, 그래서 술에다 환각제를 타먹였다는 유언비어까지 돌았지요. 국민의 군대가 환각제 안먹고 어떻게 그런 유혈극을 동족을 대상으로 벌일 수 있겠습니까?
朴> 아까 김안부씨 얘기도 나왔습니다만, 몽둥이로 사람을 팬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 말로 표현할 수가 도저히 없는 상황일 겁니다. 이번에 제가 {금희의 5월}이라는 작품을 했는데 표현력 부족을 절감했어요. 좀 구체적으로 표현을 한다고 해도 그냥 척추를 한대 치니까 척추가 절반으로 접혀지고 갈비뼈가 살 밖으로 튀어나오고 이런 식의 표현뿐이란 말입니다. 그 당시 저는 그 광경을 보고 앞에 있는 전봇대를 껴안고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피곤죽을 만들었다, 골수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말이 쉽지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는 거예요. 19일인가 20일에 저는 한일은행 앞에서 트럭에 실린 시체들을 봤습니다. 팔이 튀어나오고, 발이 빠져나오고, 머리가 터진 채로 한20명의 시체가 실려 있었어요. 김안부씨는 상징적인 존재일 뿐, 사망자는 아마도 엄청나게 많을 겁니다.
南> 그렇게 피에 굶주린 집단을 내려보낸 자가 누군가, 바로 여기서 책임소재 문제가 나와야 합니다.
明> 그 지역 군부대가 계엄부대로 되는 것이 통례인데 처음부터 공수부대를 투입했다는 것 자체가.
南> 투입된 집단이 가져왔던 방망이는 특수 제작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살상용 방망이를 만들어 보냈다는 거지요.
田> 첫날 18일은 개머리판으로 치고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리고 그랬어요. 찌른 것은 그 다음날, 20일부터 산발적으로 총성이 울렸고 21일 오후 1시를 전후해 공식 발포가 됐습니다.
南> 발포했을 때 죽은 시신들을 보세요. 완전히 정조준 되어 급소만 맞아 죽었어요. 국민을 사냥감으로 했던 겁니다.
明> 내다보다가, 즉 구경하다가 죽은 사람도 상당히 많은데 그것도 정조준이예요. 제 친구 하나는 아파트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다가 아차 싶어 고개를 밑으로 내렸는데 바로 그 위를 총알이 정확히 때리더라는 겁니다.
南> M16처럼 잔인한 쪽으로 성능이 좋은 총에다 망원렌즈까지 붙었으니 말 다했지요. 이건 비디오 테프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田 >제 아들의 경우도 노동청 앞에서 동료들과 트럭을 타고 가는데 도청 옥상에서 정조준 사격을 했는지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꿰뚫렸습니다. 그래서 맞으면서 밑으로 떨어졌지요. 제가 연락을 받은 것은 전남대 병원으로부터였고요.
南 >설령 내란 상태라고 할 지라도 민간인을 그런 식으로 사냥하는 예는 없습니다.
李 >부상자 중에는 집에서 가장주부로 밥을 짓다가 총에 맞은 사람도 있고, 모내기를 하다 변을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이없이 총에 맞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南 >얼마 전 민화위 증언에 나갔던 꼬마 가족들의 말도 기막히더군요. 검문을 다하고 돌아가라고 해놓고서는 등뒤에서 총을 쏘더라는 겁니다. 신원까지 확인하고 시내로 돌아가라고 해놓고는 말이죠.
田 >외곽지역에선 멱을 감다 죽은 중학교 1년생도 있어요.
明 >저는 19일날 가톨릭센터 앞에서 군중들 틈에 섞여 있었는데, 제일은행 앞 쪽으로 진압군이 들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경찰들과만 재치하다가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곤봉으로 머리를 패기 시작하더군요. 이 광경을 본 한 아주머니는, {아이고 내 새끼들 다 죽이네}하면서 치마로 돌을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남루한 차림이었어요.
李> 21일날 저는 피란을 갔었습니다. 유신 때 운동하던 버릇이 남아있어 온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나섰는데 차를 타려야 탈수가 없어 산길을 넘어갔지요. 그런데 시민과 군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4살난 제 큰놈이 돌멩이를 주워다가 주는 것이었어요. 얼마나 사태가 참혹했으면 어린애까지 그랬겠습니까. 역사책에서 봤던 프랑스의 파리콤뮨이 현실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朴> 타상에서 자상, 이제 총상으로 넘어가는 것 같은데, 발포시각에 대해 얘기해 보죠.
지금 헌팅 파티가!
李 >목격자 증언에 의하면 오전 11시 30분경 광주도청 앞에서 3명이 공수부대원들에게 돌진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잔악한 상황이 연 3일째 계속되다가 아시아 자동차를 탈취하러 간 후였지요. 아마, 중앙고속차를 금남로로 몰고 오다가 도청분수대를 향해 곧장 돌진했습니다. 순간 총성이 울렸어요. 분수대를 중심으로 진치고 있던 군인들이 총을 쏜 것이지요. 그러다가 멈추고 공수대는 도청 안으로 철수했습니다. 그때 지휘관은 중령이었는데 그 병력들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명령없이 발포했다고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팼다는 거예요. 그런데 다시 그 병력이 분수대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느닷없이 도청 앞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나오고, 그와 동시에 살상발포가 개시됐습니다. 기자들은 {지금 금남로에서 헌팅파티가 시작되고 있다}고 기사를 불렀다고 하더군요. 그때 사상자가 제일 많았을 텐데, 사격은 엎드려 쏴 혹은 앉아 쏴 자세로, 금남로·노동청·광주경찰서·남부은행·전남매일·충장로 이렇게 여섯방향으로 감행됐어요. 그때 시민들은 완전 비무장이었습니다.
朴> 그 당시 제가 직접 본 바로는 21일 헌팅파티가 있기 전에 노동청 부근에서 광주소방서 차를 탈취해 밀어붙이고 뛰어내린 일이 있었습니다. 전경 뒤로 공수부대들이 포진한 상황이었지요. 그때 총성이 한방 울렸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우하고 도망쳤고, 또 한방이 울리더니 국민학교 6학년이나 됐을까 하는 어린이가 쓰러졌어요. 그 소년을 몇명이 함께 리어카에 실어 김화중 병원을 갔다가 전남대 병원으로 옮긴 기억이 납니다.
李> 저도 그 장면을 봤습니다. 군중이 한 5천 됐을까, 시간은 1시 경이고. 밀고 밀리고 앞으로 치고 나갈까 말까 망설이던 차에 한 소년이 앞장을 섰어요. 그 아이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지요.
朴 그 당시 그 소년을 리어카에 싣는데 허리에 총을 맞았더군요. 총알이 몸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지나갔으므로 등 뒤는 아예 없다고 할 지경이었고, 쏟아져 나온 창자에 보리밥알이 묻어 있었습니다.
明> 시민들은 신사적이었습니다. 현대극장 쪽에서는 공수부대원 3명이 쫓기다가 둘은 양동파출소 건너편 부대로 합류하고 나머지 한명이 광주천을 건너다가 양쪽 시민들이 돌을 던져대는 통에 독안에 든 쥐가 됐었지요. 더이상 도망을 못가고 돌에 맞아 쓰러지자 인근 적십자병원의사들이 쏟아지는 돌 속을 뚫고 들어가 공수대원을 구조, 병원으로 데려갔었습니다. 당시 병원 근처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있었는데 부상당한 공수대원에 대해서는 더이상 린치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총도 빼앗지 않았구요. 19일 까지는 총을 빼앗거나 한 일이 없어요. 위대한 시민이었지요.
金> 이제 수난의 관점에서 항쟁의 관점으로 넘어갈 때가 된 듯 합니다. 민주화운동권에서는 광주 5월이 우리 나라 민주화운동에 획을 그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당한 것만, 진상규명의 차원에서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그 참혹수난의 과정을 관통하면서 무엇이 이룩됐는가에 초점을 맞추어보자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광주는 끔찍하고 찬란한 민중수난과 투쟁의 빛이었습니다. 아주 치명적인. 그래서 보다 광범위한 민중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70년대 운동이 갖는 한계에 대한 확고한 반성의 계기로 되었고,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문제가 참으로 둘이 아니고 하나다, 미 제국주의에 대해 뚜렷이 인식하는 계기로 됐다, 이런 평가들을 운동권에서 내리고 있는 것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고 그것이 더욱 중요한 본질적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아까 광주문제를 도저히 진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볼 수 없다는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는데요. 그 문제를 근본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당시 계엄군도 그것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쓴 군대작전용어만 봐도 이건 완전히 전쟁상태 아닙니까?
그들이 시간대별로 짰던 작전계획용어만 봐도 그 사고방식은 분명 전쟁수행의 그것입니다. 전쟁치고도 일방적인, 그리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었던 셈이지요. 제네바 협정조차 위반한. 그래서 민주화 운동권 사람들이 광주를 얘기할 때 이것은 광주사태의 끝이 아니다, 희망의 시작이다, 애써 이렇게 평가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작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광주가 선거쟁점화된 것은 좋은데, 여론의 끈질긴 본질회피, 그리고 운동권의 단순폭로위주의 대응, 그리고 없다고는 할 수 없을 지역성 문제와 혼연일체가 되면서, 공히 광주항쟁의 의미를 상당히 약화시켰던 것 같아요. 바로 그것이야말로 지배 집단이 선거를 치르면서 남겨먹은, 장사로 치자면 상당히 많이 남겨먹은 장사라는 생각이 들고 광주사람들로서는 뭐뺏기고 뭐뺏기고 모조리 뺏긴, 상당히 손해를 많이 봤다는 생각도 들구요.
崔> 해마다 5월이 오면 먼저 진상규명이란 문제가 거론되고, 신문잡지에 개요가 반복 되풀이되곤 하는데, 문제는 진상규명의 의미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입니다. 그런 시각이 없이, 무의미하게 되풀이 되는 그 앵무새같은 행위에 우리마저 빠져들면 안될 것이예요. 한반도 남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미국과 군사독재정권이 사전의 치밀한 계획하에 수행되고 있음입니다. 한반도 상황 자체가 미국의 식민지체제이면서 동시에 군부독재 체제하에 놓여 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시각이 중요하단 말입니다. 88년 5월은 노태우체제가 88년 올림픽을 풀어가는 고리인 미국과 군부독재와의 관계를 파탄시키는데 필수적인 중요한 고리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어요. 올림픽을 통해 미국은 노태우정권의 실질적 인정화와 분단고착을 통한 식민지 지배 질서의 영구화를 노리고 있고 당연히 현정권도 그에 편승하고 있기 때문에 제 생각으로는 금년이 반미자주화투쟁의 하나의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통일의 당위성도 대중적으로 그 의미가 확산되어야할텐데, 5월의 의미도 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한반도 지배질서의 본질적인 부분이 민중항쟁을 통해 폭로된 것은 광주 5월항쟁이 처음 아닙니까. 그래서 그 이후 반미투쟁이 가속화되기 시작했지요.
5월을 말할 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역사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민중들의 창조성일 것이고, 이 부분을 가장 올바르게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주체적 역량을 발휘하는 정도 및 미국·군부독재의 음모 이 두 가지를 올바로 평가해나가는 것이 5월의 가장 바람직한 평가고, 5월정신의 계승이며, 우리 투쟁의 정확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보탬이 되는 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너무 피해부분만 부각됨으로해서 소극적 의미만 전달되었다는 점이 지적돼야겠죠. 5월의 의미들은 5월의 진정한 주체가 광주시민이었기 때문에 광주시민에게 환원되고 4천만 국민 모두에게 환원되어야 전체 국민들이 5월을 기점으로 출발하는 운동의 모범으로 창출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5월의 문제가 광주에 국한되지 않고 4천만의 문제로 확산되어 반외세·반독재 투쟁에 하나의 단초로 재확립되기를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생존권과 직결되는 문제
南 그간 여러 사람들 때문에 광주문제가 설득력을 계속 잃어 왔는데, 그 이유중 하나는 귀납적으로 드러난 사실들을 바탕으로 충분히 끌어 낼 수 있는 결론들을 지나치게 도식화하고 연역화해서 대중들의 광주에 대한 인식을 방해했다는 점을 들 수 있어요. 당시의 모든 상황들이 운동권 논리를 증명해주기 위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쉽게 얘기될 것을 어렵게 얘기하고, 대다수 시민들로 하여금 운동권 논리에 놀아났다는 인식을 부지불식간에 심어주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우리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렇게 풀어 나가자는 거예요.
明>구체성에서 출발을 하자는 말씀이군요. 견강부회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을 초래할 수 있다는 거지요.
金> 재작년엔가 서울대 국민대토론엘 갔었는데 그때 학생들이 광주문제를 놓고 세미나를 하더군요, 그런데 한 학생인 지금 바로 명선생님께서 걱정하신 그런 선언적 논리로 발제를 마치니까 방청학생 한명이 일어나 {자료를 읽어보니까 미국항공모함이 온다해서 환호성을 올렸다가 곧바로 미국에 대한 실망·좌절·분노·증오감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설명되어 있는데 초장부터 반미 자주화를 주장한 것으로 규정하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이의를 제기, 곧바로 활발한 토론으로 들어갔는데 그 과정 이 저는 꽤 감동깊었었습니다. 구체성에서 시작하자는 주장과 운동이론에서 출발하자는 주장이 거의 완벽한 민주토론을 거치면서 서로를 보충해주는 거였어요. 저로서는 그것이 학생들은 분명 변증법적 종합능력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 상징적인 사태였던 셈이지요. 구체성으로만 치달을 때는 뼈대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고 초장부터 뼈대만 각목심듯 팍팍 심으려 들면 필경 무리를 초래하지요. 학생운동권의 논리가 그렇게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 자리에서도 그렇지요. 학자, 직접체험자, 운동이론 실천가들이 서로를 채우면서 바람직한 해석들을 이 단계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최선의 길 아니겠어요?
崔> 제 말도 단순히 추상성 위주로 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역사적 진실이 있으면 소수 몇 사람의 진실로 놔두지 말고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진실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그리고 목적 의식으로 어떻게 올바른 투쟁을 실천해 나갈 것인가의 관점에서 보자 이겁니다. 해방이후 식민지 지배질서의 재편의 연속선상에서 지배집단이 안정화되는 과정, 군부독재집단이 변화해 가는 과정, 이런 과정들이 극명하게 표출되는 사건이 80년 5월이었기 때문에, 5월을 통해 45년에서 80년까지의 과정은 어떠했으며, 그 이후는 또 어떻게 변해왔느냐를 추적해봐야 합니다. 또하나 세워야할 관점은 5월의 주체인 광주시민들을 5월논의의 주인으로 해야한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 5월의 논의들이 단체대표성, 명망적 대표성, 그런것들에 의해 대행논의 됐다는 생각이 들구요. 광주시민들의 이야기를 타지방 시민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도를 찾고, 그렇게 전달받은 타지방 주민들이 다시 5월의 주체로 변화될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해요.
南 현상에 의해 결론이 내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의미가 살아있는 것으로 되지요. 5월은 국민의 자제로 구성됐다는 軍이 몇몇 개인의 사리야욕에 의해 사병으로 전락한 전례를 남긴 사건이라는 점, [안보]이데올로기가 상당부분 허구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가르쳐준 사건이었습니다. 또 5월은 언론과 여론의 편파·왜곡·조작이 횡행할 때 사태의 심각성, 지배집단의 지역감정 유발을 통한 분할통치방식을 깨닫게 해주었고, 남북을 나눈 자가 또한 동서를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문제와도 긴밀한 연관을 갖게 합니다. 현상에서 출발하더라도 문제의 본질은 똑같은 것이예요.
金 박선생님이 연출하신 연극 {금희의 5월}을 저도 봤습니다. 광주항쟁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공개공연을 한 최초의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 극을 만들면서도 바로 이런 문제가 연출가를 괴롭혔을 것 같아요. 즉, 가장 참혹한 수난의 현장을 사실 그대로 취합, 예술적으로 빚어져, 오히려 가장 찬란한 미래의 전망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많은 생각을 하셨을 텐데….
朴> 광주사람하고 그 외의 사람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서울공연에서 절감했어요. 서울에선 놀랍도록 반응이 좋았는데, 광주에서 같은 공연을 했을때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인가는 상당히 걱정스럽습니다. 조작·은폐·왜곡이 너무 심해 의식들이 많이 희석화되어 있거든요. 지난번 민화위도 크게 보면 현정권의 전략에 말려 들어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총을 들고 나오고 할머니가 백주에 몽둥이로 맞아 죽고 최루탄이 터지고 하는 연극이 서울에서 공연됐어요. 그런데 안기부사람이 공연을 보고는 {이 정도는 괜찮겠다}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별수단을 다써서 제지를 했기 때문에 최소한 사태가 희석화될 우려는 없었는데 이제는 내버려두고 김을 뺀단 말예요. 감각을 무디게 만들겠다는 것이죠. 작품공연도 예술적인 투쟁으로 본다면 이건 보통문제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싸워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들의 공작과 술수를 능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들이 과학적으로 대응하는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5월의 의미를 찾아서 과학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崔> 피해부분 선전이 되어야겠지만 한반도 민중투쟁사의 한 모범으로서 광범하게 선전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대학생이나 시민들이 광주를 찾아왔을 때 교훈을 얻어갈 수 있지, 그렇지 않다면 신비감과 환상만을 심어줄 뿐이거든요.
金 그런 극한 고난 속에서도, 아니 그런 극한 고난이 있었기에 이러이러한 찬란한 것들이 이룩됐다,말하자면 미래비전의 제시랄까하는 부분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崔 대규모적인 투쟁 속에서도 질서정연했던 모습, 광주 시민 스스로 세운 도덕적 한계를 넘지 않고 인간적인 포용성을 발휘했던 부분, 이런 것들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올바른 투사로서의 전형이 아닐까 합니다. 그 모습이 광범위하게 확산돼야 한다는 것이구요, 타지방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얼마나 맞았는가 질문합니다. 우리는 그 끔찍한 상황에서 시민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 대답해주어야 합니다. 찢어진 가슴, 깨진 머리, 이런 부분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꿋꿋하고 열렬한 투쟁과정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죠. 인간적인 분노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 분노의 방향을 역사발전방향에 맞게 잡아줘야 하는 것이지요.
그날의 광주는 사랑의 공동체
李 저희가 21일 이후 힘을 모아 싸우면서 만들었던 광주는 정말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었던가 싶어요, 많은 시민들이 김밥을 지어오고, 가게에서 음료수를 제공하고, 광주관공서는 시민재산이니까 부수면 안된다 하고.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정말 하나가 되어 민주주의를 해내겠다는 일념에 가득차 있었거든요. 특히 이 시기 핍박받는 민중인 노동자·농민·도시빈민들이 자신의 문제를 풀어가고 대동단결로 하나가 될 때 우리나라는 바람직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확인했습니다.
南 도망하는 경찰들에게 시민들이 전부 민간복장을 입혀 보내주었습니다.
明 평소에 미웠던 경찰들이 시내에 버젓이 살고 있는데도 행패하나 안부리고요. 5일간 시내를 장악했는데 경찰에 대한 보복은 단 1건도 없었지요.
南 소위 폭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밤에 야경을 돌았습니다. 좀도둑을 잡아다가, 네가 이런 상황에서 도둑질하다니 말이 되느냐, 타이르기도 했습니다.
明 도청공무원이 책상서랍에 넣어둔 월급봉투가 고스란히 그 자리에 있더라는 얘기도 있지요.
南 사람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광주항쟁기간은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明 국군 40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 5월 광주였습니다. 더럽혀진 국군의 명예도 민주화가 되면 되찾아지겠지요. 이런 일이 있었지요. 총기회수 문제로 부사령관과 협상을 벌일 참인데, 서울에서 준장 한명이 내려왔습니다. 부사령관은 소장이었는데 강경파인 듯한 그 준장과 말싸움이 붙는가 싶더니 준장이 소장한테 냅다 권총을 들이대는 거예요. 저는 이 사건의 과정에 군부내 강온파간의 대립이 크게 작용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그래서 떨칠 수가 없어요. 강경파가 득세하여 광주의 무력 진압이 개시된 것 같다는….
金 田선생님께서 유가족들의 현재 심정을 대표해서 말씀해주시죠.
田 끝까지 원칙론만 주장하다보면, 결국 독재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의미가 없게 됩니다. 독재가 존재하는 이 시점에서 어느 선까지 유가족들이 견뎌주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는 정말 협의하기가 힘듭니다. 멋모르게 희생된 사람, 구경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참여한 사람, 처음부터 직접 참여한 사람, 이런 여러가지 나눔이 실제로 가능하거든요. 각각의 희생자 유가족들의 생각은 같지 않습니다. 유가족들과 운동권의 생각사이에는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없지요. 육신도 정신도 지칠대로 지쳤고 멍들대로 멍들었다, 더이상 투쟁할 수 있는 기력조차 없어졌다고 하소연하시는 분들도 있구요. 시민들이나 국민들이 과거처럼 5.18에 대해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관심을 갖는 것도 아니구요. 제자신도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지요.
南 4.19는 의거 직후 정권이 바뀌어 문제가 다릅니다만 5.18 희생자들에겐 더이상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金 이제 시간도 상당히 됐고 하니까 결론삼아 작년 대통령 선거와 광주항쟁을 연관시켜보고자 합니다. 제 생각을 우선 말해보지요. 숫자 문제를 갖고 갑론을박만 하다가는 근본적인 문제를 놓친다는 것은 앞서 말씀해주신 바와 같구요, 또 하나는 이번 대통령 선거전에 나왔던 이슈로 한 폭로전의 와중에서, 이상하게도 광주문제의 본질이 조금씩 조금씩 희석화됐다는 점입니다. 대통령 선거 전의 광주항쟁과 선거후인 지금의 광주항쟁은 확실히 그 의미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어요, 광주항쟁을 다룰 때, {민중투쟁에 의한 역사발전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민중들이 치렀던 면면한 희생이 있고 광주도 그 연장인, 가장 끔찍한 동시에 가장 찬란한 위업이었다}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정치인이 한 분도 없더라 이 말이죠. 그것이, 결코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지역 감정의 잔재, 그리고 언론매체를 통한 그것의 조작 및 극대화를 통해 묘하게 광주항쟁을 지역적인 문제로 몰아 붙였는데, 우리는 그런 총체적 전술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단 말입니다. 오죽하면 제주도 출신인 한 친구가, {니미X팔, 그럼 제주도 4·3항쟁은 누가 해결해주냐, 난 제주도 공화국 만들란다} 그러겠어요? 그것이 특정 정치인만의 책임은 아니고, 운동권 전체의 의식수준의 한 반영이 아니었던가 싶어요.
긍정적인 부분이 좀더 널리 전파됐어야 한다는 학생들의 주장도 그것과 연관이 있을 성 싶네요. 4·19와 5·18의 차이, 이젠 폭로·비판적 증거뿐만 아니라, 창조·민중·물리적 힘이 있어야만 현 정권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점이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 5월 광주잖습니까? 여기 참석하신 분들은 대통령 선거와 광주항쟁의 모든 것을 가슴에 안고 또 신문 등을 통한 지역성 확대·조직이 낳은 모든 오해를 안고 대통령 선거기간을 관통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때 느꼈던 심정들을 결론 삼아 말씀해주시지요.
李 저희들은 대통령 선거기간을 광주항쟁 선전기간으로 설정하고 대중집회가 있을 때마다 사진전을 열고 자료집을 팔았어요. 일반국민들이 아직 광주를 거의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경상도도 포함, 전국을 순회했는데, 경상도 쪽은 테러를 우려, 경호원을 데려가곤 했지만 전 기간 중에 테러는 한건도 없었습니다. 호응도 아주 좋았구요.
南 광주의거 사진첩에는 가능한 한 설명을 달지 않았습니다. 사진 자체가 말했으니까요, 광주의 진상을 알릴 만큼은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통령 선거 후에 경향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지만 제도권 언론은 광주에만 초점을 맞추었죠. 호남 지역 특정정치인이 당선되지 않은 것에 대한 지역감정의 포갈이다, 광주항쟁이란 것도 그런 것 아니겠냐, 이미 이런 왜곡된 의식을 집요하게 심어 주려한 것 같습니다. 우리 운동단체들은 또다시 제2의 광주학살이 자행될 것 같아서 시위군중에게 자제를 촉구했어요.
5·18정신 더욱 확산시켜야
明 대통령 선거기간 중의 광주부각은 바람직했던 것 같아요. 정부에서도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 운운으로 규정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들로서는 정말 배아픈 양보일 거예요. 그것이 미미한대로나마 우리들의 전리품인 셈이죠. 이것을 바탕으로 국회에서 국조권이라도 발동되면 그것은 대단한 민중의 승리일 것입니다. 희석화시키려는 정부의 기도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야지요.
田 대통령선거 기간 중에도 희석화시키려고 애를 썼고 언론이 앞장서서 작용을 했는데, 그걸 지역감정으로 몰아 광주문제는 광주에 국한된 것이다, 이렇게 축소시켰지요. 그걸 파괴하자고 우리는 대구에도 갔고 부산에도 갔었습니다. 국민운동본부·대학생협의회가 주최한 [영호남 지역감정해소를 위한 집회]에 참석, 부산시민들에게 광주얘기를 하니까 그렇게 반응이 좋더라구요. 아무리 이 정권이 5·18을 희석화시키려해도 언젠가는 풀지 않고 못배길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어요.
金 물론 진상규명노력은 절대 필요하지요. 저는 더 나아가서 全정권이 됐건 盧정권이 됐건 군사독재정권은 아마도 광주문제로 망하지 않을까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지 진상규명 차원이 아닌 역사창조의 차원에서 광주문제를 거론한 정치인이 있었더라면, 좀더 튼튼한 초석이 마련됐을 거라는 생각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또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광주를 얘기할 때 근본적인 시각에서, 즉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진정한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해 광주를 어떻게 볼 것이냐가 쟁점이 돼야 한다는 것이고요.
南 자초지종을 모르는 사람한테 광주의 역사적 의의를 얘기해 봐야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진상이 규명될 때, 책임소재가 밝혀질 때가 바로 민주화가 되는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明 정부에서 이 정도했으면 좀 양보해야 되는 것 아니냐, 좀 심한 것 같다는 여론이 일 법한 일이거든요, 그런 왜곡된 여론을 격파해 주는 것은 진상규명 밖에 없어요. 물론 난제는 난제지만.
南 대중운동을 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진실을 바탕으로 얘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히려 지역감정으로 몰리게될 위험도 있는 것이구요.
金 판화하는 홍성담씨 있죠. 그 사람은 참혹하게 진상을 보여주면서도 그림 자체가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낙관적인 빛으로 넘쳐있지요. 그 친구가 말이죠, 이렇게 참혹하게 당했다 얘기를 하면서도, {그 극한 고난을 꿰뚫고 이룩한 광주해방 10일간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세월이었다}라고 덧붙이기를 잊지 않더군요. 진상규명의 차원과 미래전망을 찾는 부분이 딱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崔 대통령선거는 소위 민주화운동의 명암을 그대로 표출시킨 사건이었지요. 단결, 단결, 외쳤지만 실제로 가장 단결을 강조했던 지식인 명망활동가들은 4분5열했고, 정작 단결은 별로 내노라하지 않던 국민들이 했단 말입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남대협]은 두가지를 중심축으로 선거국면에 대처했습니다. 하나는 5·18관련자인 노태우 후보의 실체폭로와, 또하나는 공정선거감시. 그런데 그것이 공정선거 감시쪽에 너무 매몰되어 대단히 미흡한 결과를 맺고 말았죠. 5월 문제도 주체적으로 풀지 못했고요. 아까 말씀하셨듯이 사진과 생생한 자료를 갖고 감시단원들이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차원에서의 선동에 그쳤지 5월의 문제를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으로 부각시켜 민주정부의 중요성과 방향성을 쟁취해내려고 한 적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치명적이었던 것은, 5월 문제를 풀어 가는 주체가 형성되지 못했고, 그것을 풀어가는 내용·방법·관점이 전무했다는 점입니다. 승자와 패자의 관점이 올바르게 결합되어,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 나가야 했습니다. 책자·자료·강연 차원에 머물렀기 때문에 전북에 있던 사람들조차 자기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방편들을 하나도 찾지 못했고, 더군다나 영남-서울지역쯤 되면 듣기만 했지, 일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거였거든요. 우리가 5월을 겪었지만 주체는 우리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일꾼으로서의 자세와 관점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들을 이제 비판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朴 작년에 선거를 치르면서 가슴 아팠던 것은 5월의 주체 세력들이 4분5열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정적으로 대단히 불안하더군요. 함께 운동하던 사람들이 단결하지 못하고 짝짝 갈라져 나가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80년 초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우리들의 운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민중 속에서, 민중과 더불어 싸우고 일해 나가려는 자세가 대단히 진지하고 성숙되어있습니다. 5월정신을 전민족적으로 확산시킬 때 진정으로 승리가 옵니다. 적들의 실체를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는 이제 청산되고 극복되어야 하겠지요. 컴퓨터와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보다 성능 좋은 컴퓨터가 되어야 합니다.
金 귀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광주항쟁의 정신이 민주화항쟁으로 대폭 확산되어 진정한 민주화의 날을 앞당기는 기폭제로 될 것임을 확신하는 것으로 이 좌담의 결론을 삼으면서 좌담을 마치겠습니다. 오랜 시간 정말 감사합니다. *
<현지특별좌담>
광주, 수난에서 항쟁으로
{민주화운동권에선 5월의 광주투쟁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사에 획을 그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제는 수난의 관점에서 항쟁의 관점으로 넘어갈 때가 된 듯하다. 당한 것만 진상규명의 차원에서 얘기할 것이 아니라, 그 참혹한 수난과정을 관통하면서 무엇이 이룩됐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는 얘기다.}
□사회·정리 / 김정환<시인> □때 : 1988년 4월 8일 □곳 : 광주 YWCA □사진 / 송의호
□기록 / 한기홍 □진행 / 선경식
명노근<전남대 교수평의회의장·당시 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지난 대통령선거기간 중의 광주 부각은 바람직했던 같아요. 그후 정부측에서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 운운으로 규정 했는데, 우리가 보기엔 부족하지만 그들로선 뼈아픈 양보일 겁니다.}
전계량<5·18광주의거 유족회 회장>
{각각의 희생자 유가족들의 생각은 같지 않습니다. 유가족들과 운동권의 생각사이에는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없지요.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투쟁할 기력조차 없어졌다고 하소연하시는 분들도 있구요}
남재희<천주교 광주남동성당주임신부·당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간사>
{17일 24시 이전에 군은 이미 광주 외곽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계엄이 확대실시되어야 군대이동이 가능한 것은 상식아녜요? 아무튼 예비검속이 9시부터 행해졌는데 정동년씨도…}
이양현<광주민중혁명부상자동지회 부회장·당시 시민학생 투쟁위 홍보부장>
{저희가 21일 이후 힘을 모아 싸우면서 만들었던 광주는 정말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었던가 싶어요. 핍박받는 노동자·농민·도시빈민이 자랑스럽게 대동단결했던 며칠간이었죠.}
박효선<연극연출가·당시 시민학생 투쟁위기획위원>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연극을 서울에서 공연할 때 놀랍도록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광주에서 같은 공연을 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 걱정스럽습니다. 조작·은폐·왜곡이 너무 심해…}
최완욱<전남대 총학생회장·당시 고교 1학년>
{해마다 5월이 오면 머저 진상규명이란 문제가 거론되고, 신문잡지에 개요가 되풀이되곤 하는데, 문제는 진상규명의 의미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 입니다. 그런 시각없이 앵무새 같은 행위에…}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나
金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5월이 돌아왔습니다. 끔찍한 저질러짐이자 영월한 피투성이 희망인 광주 5월뜬 그 전모나 진상이 아직 1백분의 1도 안밝혀진 채 점점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 5월을 기리고 진상을 좀더 가려보고 역사적 의미를 진지하게 확립시키는데 매진해야 할 이 때에 맞추어 현정권은 민주화합추진위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광주사태] 수습안을 제시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우선 그 수습안에 대해 피해당사자인 여러분들의 의견을 모아보고 더 나아가 좀더 근본적인 문제까지도 차제에 한번 짚고 또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우선 현정권의 수습안을 보자면 첫째, 사망자 신고를 받아 사망자가 더 있는지 확인해보겠다. 둘째, 부상·사망자에 대해 성의를 갖고 지원하겠다. 셋째, 망월동묘지를 공원화하고 위령탑 건립비용을 어린이 공원비용으로 충당하겠다. 유가족을 지원하고 부상자를 치료하겠다 등등 이었지요.
田 도대체 어이가 없는 소리예요. 우선 현정권이 제시한 해결방안은 그 주제랄까 전제가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돼있지요. 그리고 국민화합의 차원에서 서로 용서하고 양보하자는 것이 그 기조로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광주학살을 논하는데 있어 현정권이 일단 대등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어요. 즉,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 둘 다 피해자다 이거란 말에요. 이게 도대체 말이 되나요. 분명히 말하자면, 5월 과주는 [의거]예요. 즉, 피해자와 가해자가 엄연히 있단 말입니다. 그것은 끔찍한 무차별 학살만행에 항거한 광주시민의 봉기입니다.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니 [화해]니 [용서]니 하는 말은 여전히 피묻은 칼을 들고있는 사람들이 하기엔 뭔가 우스꽝스럽거나 섬뜩한 말 아니겠어요.
明 실사 그 말이 미흡하나마 성의표시는 된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에 총칼을 들이 댄 자들은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 자들은 민주화를 저지하려고 그랬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중벌에 처해야 마땅한 것 아니냐, 현 정권의 논리를 그냥 따르더라도 우선적인 문제가 한 두개가 아닌 것 같아요.
李 저희 부상자 동지회에서는 일관되게 아주 소박한 주장을 되풀이 해온 셈입니다. 즉,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왜 계엄령이 확대되고, 왜 발포를 했고, 왜 총칼로 찔렀고 몇명이나 죽였고 또 어떻게 죽였는가. 그것이 밝혀지기를 저희는 바랐습니다. 책임자와 가해자를 가리자는 것이지요. 저희 단체에 접수된 사망 신고한 해도 한 2백여 명이나 돼요. 그 중 우선 1백여 건만 조사해 보았는데 피살됐을 거라는 확신을 주는 명단이 l5,6명 된단 말입니다. 저는 그 책임자가 과연 양키였는가, 그들의 앞잡이인 일부 정치군인인가를 밝혀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용서하는 것은 진실이 밝혀지고 난 후의 문제지요. 그 숱한 부상자·유가족·해직자·정신질환자 중 보상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고 당시 [내란주요임무종사자]로 구속된 사람들은 현재 사회안정 법 대상자로 되어있어 언제라도 보안감호처분이 가능합니다. 그 사람들은 다시 재판절차를 밝게 하여 무죄증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하여간 해직자 등 간접적 피해자에 대한 언급이 이번 조치엔 전혀 없더군요.
明 사망자 및 부상자 신고를 받는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진정한 민주화가 되지 않는 한 신고자체를 받기 힘들지 않겠어요? 그 당시 무슨 해를 당할까봐 신고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현정권 하에서 선뜻 숨겨 뒀던 걸 밝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 안되지요.
田 12대 국회에서 윤성민국방장관은 사망자가 군·경·민간인 포함해서 1백91명이다, 더도 덜도 없다고 했었지요. 자신 만만하게. 사실, 5.18직후 신고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정부에선 전혀 인정을 하지 않았어요. 신고를 받겠다고 해서 다시 신고를 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포 때문에 신고를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니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는거란 말이죠.
南 사실 사망자의 수라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죠. 1백91명이면 적나요, 어디? 공권력이 한 명을 죽여도 그 책임을 면치 못하는 것인데요.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그 끔찍한 전모를 알기 위해 필요한 거 아니겠어요?
李 그 숫자가 워낙 엄청나서 학살군도 은폐에 기를 썼지요. 그 이후로도 그 노력이 집요했어요, 시체가 발견된 곳을 보면 군부대가 주둔했던 흔적이 있어요. 많이 묻혔다는 곳을 가보면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있고요. 7-8년 동안 은폐작업을 계속해 왔다는 얘깁니다.
田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자기들이 처리하려 기를 썼거든요. 5월 27일 도청에 들이닥쳐서도 은폐를 위해 자기 총은 어깨에 메고 정작 시민들의 M1이나 카빈으로 시민들을 사살했다 이겁니다. 완벽하게 은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얘기지요.
李 이창호라는 분은 분명 계엄군의 Ml6총을 맞고 죽는 걸 제가 직접 봤는데 나중에 조사받다가 보니 폭도중에도 악질폭도라 분신자살했다고 기록이 돼있더군요.
田 지금도 신고가 우리 쪽으로 들어오는데 행방불명자가 참 많아요. 또 그 당시 부상의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도 많구요. 또 고아·넝마주의 등 무연고자들은 전혀 신고될 가능성도 없고요. 신고라는 것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朴 역설적으로, 계엄학살군들은 역사의식이 참 투철했던 셈입니다. 역사의 심판을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그랬겠습니까. 행불자 처리 같은 것은 이 나라가 완전 민주화되기 전에는 어렵다고 봅니다. 학살과정에 참여한 당시 지휘관들도 모조리 조사를 받아야 해요.
광주의 진실은 민주화의 바로미터
崔 80년 이후부터 5,6공화국이 줄기차게 추구해왔던 일은 정권의 합법성과 정통성의 확보였습니다. 그것은 5월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일에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은 광주항쟁 당시부터 이미 원성이 높았습니다. 광주항쟁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두환 정권은 전혀 합법성과 정통성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정통성 시비를 해소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이 全정권으로서는 선거였던 셈입니다. 그 과제는 노태우정권으로 넘어왔지요. 민정당이 선거전부터 민화위를 설치하겠다 하고 이제 광주문제에 대한 수습책을 발표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5월문제를 우리가 올바르게 해결하려면 그런 맥락을 이해해야한다고 봐요. 노태우정권은 뭐 한치라도 다른가요? 전두환·노태우정권의 본질, 그 연속선을 폭로해내고 선전해내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광주해결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5월 주체들의 입장을 천명하려는 입장이 너무 미흡했던 것 같아요. 진상규명이니 보상이니 하는 것에 목을 매달 차원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저희들 전남대학생협의회 입장에서 보자면 민화위라는 건 4천만을 우롱하는 사기단체에 불과해요. 비유를 써서 말하자면 광주문제를 해결하면 재판이 벌어져야 하는데 ! 판사는 4천만 국민이고 검사는 5.18부상자·유가족들이고, 피고는 [광주 5적]이라고 일컬어지는 12·12 주역들과 미국이 되는 것이죠.
田 용서하라고 하는데, 물론 인간은 과오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과오를 뉘우치고 회개했을 때 용서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인데 이 정권은 과오를 깨닫거나 뉘우칠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피해자에게 용서를 명령하고 있다 그거예요. 용서의 주체가 누굽니까? 가해자가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있나요. 정말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면 광주시민이 보복의 차원에서 처단을 하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朴 현정권이 그렇게 대응한 것도 그간 운동단체들이 계속 문제제기를 한 결과겠지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바라는 진실이 밝혀질 거예요. 민주화에 대한 확신과 똑같이 그런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崔 지금 운동권은 4분5열 돼있었지요. 사소한 정치적 차이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87년의 부분적인 승리는 단결에 의해 달성됐습니다. 재야정치권은 분열됐지만 국민들은 단결했던 것이지요. 88년 상황, 분단과 통일의 갈림길에서 모든 운동단체들이 한데 뭉쳐 열렬하게 투쟁하는 것이 5월의 올바른 계승이고 또 그 완성이 광주문제의 올바른 해결이라고 봅니다.
田 정부차원의 해결모색이 아닌 국회에서 국조권을 발동하거나 특별법을 제정, 해결해보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李 저는 직접 투쟁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특히 언론의 보도태도에 심한 불만을 느끼고 있습니다. 도대체 본질문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요.
南 못하는 것은 못하는 대로 남겨 둬야지 왜곡하면 안되는 것이지요. 광주의 진실은 민주화의 바로미터입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진실 앞에 참여할 때 민주화의 길이 열립니다. 광주항쟁의 과정에서 이미 진실은 확연히 드러난 것입니다.
金 예. 참석하신 분 모두의 의견이 그렇듯이 이번 발표는 뭔가 문제의 핵심과 어긋나 있고, 그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왜곡에 언론도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모두 나서서 한몫씩 거들고 있는 듯 합니다. 본질적인 문제가 이미 참석하신 분들 말씀에서 피가 튀듯 튀고 있지만, 5월 광주를 직접 체험하지 않은 일반독자들에게는 다소 과격하기만 할 반응이다라고 여겨질 우려도 있을 성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기왕에 나온 [광주사태] 및 [광주항쟁]의 개요를 다시 한번 재정리하고 거기에 오늘 참석하신 분의 경험담 목격담 핀 항쟁참가기록을 첨가, 이 단계에서나마 가능한 수준의 진상전모를 얘기해보고 그 구체성을 기반으로 다시 본질적인 부분을 짚어 봤으면 합니다. 개요에 관해서도, 황석영씨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가장 충실한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제가 들은 얘기로는 거기에 여자들이 당한 얘기는 [광주여성의 영예를 위해]뺏고 광주참상의 총화이자 한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태아임산부 피살사건은 [확인붙능]이란 이유로 빠졌다더군요,
明 그동안 진상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밝혀진 것들이 있고 한데 종합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고 봐야겠지요. 이 자리에서 얘기를 한다 해도,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고 우리의 체험범위도 좁기 짝이 없어서, 한계가 있을겁니다. 사실 그동안 사회학자·역사학자들 중심으로 광주문제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 인 자료수집·분석 작업이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그런 시도가 전혀 없었어요. 물론 대단한 작업이 되겠습니다만, 그런 작업이 이뤄져서 종합적인 {광주 백서}같은 것이 나와야 합니다. 진상규명을 위해 국회국조권을 발동시켜야 한다고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해도 한계는 그대로 남습니다. 제5공화국 출범 자체가 광주문제를 안고 시작되었고 현재의 제6공화극( 5·1공화국이 하고도 하고 5·5공화국이라고도 하는)대통령이나, 집권 정당인 민정당 자체가 광주문제에 피비릴 정도로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정당 아닙니까. 진상규명에 한계가 있을 것은 당연하지요.
제가 크게 테두리를 잡아 개요를 정리해보지요. 5월 14일, 15, 16일은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이 정부에 민주화의 구체적인 일정을 밝힐 것을 주장하며 대규모시위를 벌였습니다. 광주에서도 도청을 중심으로 광주 시내 전문대학까지 합해, 심지어 고등학교 일부(전남·대동고)까지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이런 종합적인 시위는 처음이었을 거예요. 16일 마지막 날에는 횃불데모를 하면서도, 조선대·전남대 교수가 거의 동원되어 그야말로 큰 사고없이 평화적으로 이뤄진 집회였고, 이쯤 했으면, 이 정도로 힘을 과시했으면 정부측에서 어떤 답변이 있을 것이다 하면서 학생들은 답변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답변은 주지않고, 최규하씨가 중동에서 돌아오자마자 권총을 들이댔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많은 사람들을 검속해갔습니다. 학생들은 16일 헤어지면서, 정부측의 답변이 제대로 안나올 경우 18일 아침에 전남대에서 모이자는 얘기를 했었지요. 그 날 아침 이미 전남대와 조선대 앞에 공수특전단들이 버티어 서 있었고, 자정을 기해 완전히 점령, 학교구내 조교 및 숙직하는 사람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조사를 하는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하여간 18일 아침 학생들이 학교엘 들어가려고 하니까 착검을 한 공수부대원이 길을 가로막고 못들어 가게 해 시비가 붙었지요. 2백여 명 정도의 학생들이 무기를 지닌 공수부대원들을 당해 낼 수는 없는 터라서 그들은 시내로 나왔고 젊은 사람·학생들을 규합, 결국 시내에서 산발적인 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5·18의 발단이지요. 그때 시위는 화염병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각목도 처음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차츰 과격해졌지요. 그러자 양대 학교에 주둔해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시내에 투입되어 곳곳에서 시위를 저지하는데 이것은 저지가 아니라 완전히 살상작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어요. 이것을 목격한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를 느꼈고, 마침내 시위대열에 합세하게 된 것입니다.
사전 계획된 작전수행추적
南 이 5·18이 일어난 시점은 언제였느냐, 이 점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확대계엄을 실시한 명분이 [집권층 내부쿠데타]말고는 별로 없어요. 5월16일 서울에선 진경이 버스에 깔려죽었고 그 사건에 온 국민이 경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짓을 저지른 당사자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은 외신에서도 의문을 제기한 바 있고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민주화일정 촉구데모는 평화적이었어요. 이에 비해 확대계 엄의 내용은 무엇이었느냐. 대학폐쇄, 민주인사감금, 국회해산이었어요. 5·17이 쿠데타였던 것은 그 점만으로도 명확하며,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쿠데타라는 것을 숨길 만큼의 양심조차 내팽개친 노골적인 쿠데타였다는 점이예요. 광주학살의 잔인성은 그런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18일 0시 이전에 군은 이미 광주 외곽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확대실시가 되어야 군대이동이 가능한 것은 상식 아녜요? 하여간 그렇게 하여 예비검속이 이미 9시부터 행해졌는데, 나중에 [광주 내란의 수괴]로 지목됐던 정동년씨도 실은 그 예비검속 때 붙잡혔어요. 시위도 있기 전에 살상부터 해나간 것과 마찬가지 얘깁니다. 살상은 잔혹했지요. 너무 잔혹해서 현장 경찰책임자가 제지를 하자 그 사람까지 무차별 난타를 했으니까요. 사건이 계획적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광주를 폭동상황으로 몰고 가라는 것이었죠. 데모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 공용터미널 여행객들까지 끌어내 젊은이라면 무조건 박살을 냈거든요.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 갔다고나 할까요.
明> 맞습니다. 시민들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어났으니까요. 19일 아침 무등고시학원에 공수특전단이 들어가 공부하는 학생들을 전부 끌어내 난타를 하고 젊은 사람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YMCA다방 주방장까지 곤봉으로 머리를 부쉈으니까. 그런 상황이 광주시민 전체를 분노케 했어요. 무기가 등장한 것은 석가탄신일인 21일, 무기가 등장하므로 22일 수습위원회가 구성됐던 겁니다. 22일 남동성당에서 신부·목사·법조인·교수·YMCA·YWCA지도자를 중심으로 했지요. 수습위원회는 모든 문제를 불문에 붙이고 갇힌 사람을 내주고 죽은 사람(그때 이미 도청에 안치된 시체가 1백50여 구였는데)을 시민장 치러주는 조건으로 계엄당국과 수습에 나섰는데 나중에는 우리 수습위원 전원을 내란죄로 몰았고, 재판에서 우리 수습위원들은 전원 실형을 받았어요. 이것만 봐도 사전계획에 의한 [작전수행]이었다는 증거가 충분한 것이죠. 처음부터 무장봉기를 하여 군인들을 죽이고 민간인재산을 약탈한 것이 아닌데 악랄한 살상을 그렇게 자행한 것은 뭔가 일을 꾸미기 위해 광주라는 특정지역 을 택했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田> 아까 명선샌님 말씀을 보충하자면 5월 10일경부터 이미 공수단이 상무대에 진주해서 폭동진압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계속 군용헬기, 트럭 등을 이용, 병력들이 속속 광주로 이동했구요. 왜5·18이 광주에서 일어났느냐를 저는 김대중씨와 관련해서 생각해봅니다. 김대중씨를 묶기 위해서는 광주와 연관을 지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김 대중씨의 제거를 위해 광주 5·18을 사전계획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죠.
南> 그렇다면 그때 당시 시민들의 구호를 봐야 하겠지요. 18일 아비규환의 생지옥 속에서도 광주시민들은 김대중씨 석방하라는 얘기는 안했거든요. [계엄철폐, 민주인사 석방, 전두환 물러가라]이 정도였어요. 포인트를 잘 잡아야 하는데요. 그것은 언론에 김대중씨 체포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고난 이후입니다. 광주시민은 김대중씨 구속 때문에 일어선 것이 아니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겁니다. 당시 구호를 보면 그 점은 확연하지요.
田> 여러 책자에서 계엄군 공수단은 전남대 나 조선대에만 진주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틀린 얘깁니다. 광주교육대학에도 똑같이 공수단이 진주했던 것은 저희 집이 교대 앞이라 제가 잘 알지요. 주요 교육기관에 모두 진주했어요, 계엄군이 전 시가지를 장악한 18일 아침에는 시가지에 데모같은 것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계엄군들은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무작정 붙들어 패고 실신을 시켜 트럭에 싣고 가는 거예요. 심지어 도망가는 사람까지 쫓아가 잡아오고, 집집 골목마다 대문을 차고 들어가 안방까지 쳐들어와서는 젊은이란 젊은이는 모조리 끌고 가는 거예요. 광주의거가 과잉진압에 의한 것이기 전에, 사전계획에 의한 광주시민 학살이고, 그것에 대한 대응봉기였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明> 그 점은 공수특전단이 다른 지역엔 안갔다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지요.
李 제가 보기에도 사전계획설이 유력하다고 봐요. 김대중씨를 구속하고 광주시민들이 총을 들게된 과정까지 그들은 면밀하게 계획을 짰던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광주를 통해 집권의 명분을 얻고자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도 그렇게 된 게 사실 아닙니까?
南> 12·12쿠데타를 통핵 실권을 쥐었지만 명분이 없었던 그들이 광주를 계기로 치안공백·안보공백을 조작, 전세계에 다 한반도의 위협을 알리고 군의 권력 장악을 이해시킨 셈이죠. 국내적으로 반대세력까지 제압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고 말이죠,
朴> 거기서 짚고싶은 대목은, 그런 일련의 사전조작에 분명 미국이 관련되어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입니다. 미국이 진압에 동의했으니까 미국도 책임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란 말이죠. 나중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으로는 대부분의 광주시내 거주 외국인들이 송정리 비행장을 거쳐 몰래 밖으로 빠져 나갔다는 거예요.
南> 사전에 빠져나갔다고 까지는 할 수 없구요. 선교사·신부님들도 있고 해서 제가 직접 아는 데, 사건의 와중이라 심증만 가질 수 있는 부분이지 확실히 결론을 내릴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진압부대 사전승인은 지난 7년간의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어요. 5·18당시 한미연합사의 통제 밖이었다는 공수부대가 5공화국 이후 다시 연합사로 귀속이 되거든요. 이런 것을 보면 미국의 관여가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朴> 항쟁의 와중에서 미국사람들이 빠져나갔지만 항쟁 이전에 빠져나간 미국인의 숫자도 상당수 됩니다. 미국은 어떻게 보면 저들 군부세력과 근본적으로 결탁하여 광주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요.
田> 그것보다도, 미국의 항공모함이 동해로 왔다고 했을 때 광주시민들은 환호를 보냈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환호였지요. 항공모함 사건은 광주시민의 미국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려 주었습니다.
국민은 사냥감일 수 없다
南> 그건 그렇고, 총소리가 제일 먼저 난 것이 언제였지요? 제가 알기론 20일 저녁 신역 부근에서가 아닌가 싶은데….
朴> 제가 알기로는 20일 오후 3시 30분 계림동 파출소 앞에서 PVC장갑차가 시민들에 포위됐을 때였습니다. 일종의 자구행위로 장갑차가 탈취될 위기에 빠지자 총을 아스팔트 위로 쏜 것이죠. 그 유탄에 조대부고 2학년 학생이 왼쪽 허벅지에 유탄을 맞았습니다. 첫 총상이지요. 첫 사망자는 18일 저녁에 나왔어요. 김안부라는, 서동쪽 빈민촌에 사는 연탄장수였지요. 18일 연탄배달을 못하고 얼굴이 시커먼 채로 공원으로 올라가다가 공수부대 몽둥이에 맞아 죽었어요. 그 시체를 그대로 버려놨지요.
南> 진압이 목적이었다면 일사불란한 군인들이 비무장시민을 상대로 그렇게 잔학할 리가 없겠지요. 시내 중심부 인파들만 해산시켰으면 될 텐데도 시외곽 변두리까지 몰려가 시민들을 살상했습니다. 문걸어 잠근 사람까지 끌어내 곤봉으로 내리쳤지요. 바로 눈 앞에선 자기 자식이, 오직 젊다는 이유만으로 맞아죽는데, 분노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민들이 자구를 위해서라도 봉기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으로 계엄군은 몰고 갔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점이죠.
李 >제 경험담을 말하죠. 20일 MBC앞 육교를 한 아가씨와 걷고 있었어요. 저는 당시 나이가 서른이었고 양복정장차림이었으니까 전혀 학생으로는 안보였을 거예요. 그런데도 밑에서 두세 명 의 공수대원이 저를 향해 달려오는데 그 모습을 보니까 잡혔다가는 맞아죽을 것 같아요. 그 아가씨와는 평소 운동을 같이 하면서 같이 죽고 같이 살자고 하던 사이였는데 그때는 어찌나 당황스럽고 겁이 났는지 그 아가시 손을 놓고 2백m를 뛰었는데도 계속 쫓아오길래 바로 옆담을 넘었지요. 그 높은 담장을 제가 훌쩍 뛰어넘더라구요. 공포가 극에 달하니까 그런 힘이 나더군요. 그러고도 안심이 안되어 저는 담을 하나 더 넘었습니다. YWCA앞길에서도 그랬지요. 공수부대원이 곤봉으로 한 학생이 머리를 치는데 YWCA부녀회원이 달려가 말렸어요. 이 학생은 내가 잘 아는데, 데모할 학생이 아니다 라고 말이죠. 그랬더니 공수부대원들은 그 아주머니까지 곤봉으로 때리는 거예요. 머리에서 퍽 소리를 내며 아주머니가 스러지자 이 장면을 본 무등고시학생들이 {우}하고 야유를 했지요. 그랬더니 공수 1개분대 정도 병력이 학원으로 올라가 피바다를 만들어버렸어요.
南> 그때 당시의 진압군인들이 과연 흡혈귄지 군인인지 저는 아직도 알 수가 없어요. 입에서 한결같이 술냄새를 풍겼고, 그래서 술에다 환각제를 타먹였다는 유언비어까지 돌았지요. 국민의 군대가 환각제 안먹고 어떻게 그런 유혈극을 동족을 대상으로 벌일 수 있겠습니까?
朴> 아까 김안부씨 얘기도 나왔습니다만, 몽둥이로 사람을 팬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 말로 표현할 수가 도저히 없는 상황일 겁니다. 이번에 제가 {금희의 5월}이라는 작품을 했는데 표현력 부족을 절감했어요. 좀 구체적으로 표현을 한다고 해도 그냥 척추를 한대 치니까 척추가 절반으로 접혀지고 갈비뼈가 살 밖으로 튀어나오고 이런 식의 표현뿐이란 말입니다. 그 당시 저는 그 광경을 보고 앞에 있는 전봇대를 껴안고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피곤죽을 만들었다, 골수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말이 쉽지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는 거예요. 19일인가 20일에 저는 한일은행 앞에서 트럭에 실린 시체들을 봤습니다. 팔이 튀어나오고, 발이 빠져나오고, 머리가 터진 채로 한20명의 시체가 실려 있었어요. 김안부씨는 상징적인 존재일 뿐, 사망자는 아마도 엄청나게 많을 겁니다.
南> 그렇게 피에 굶주린 집단을 내려보낸 자가 누군가, 바로 여기서 책임소재 문제가 나와야 합니다.
明> 그 지역 군부대가 계엄부대로 되는 것이 통례인데 처음부터 공수부대를 투입했다는 것 자체가.
南> 투입된 집단이 가져왔던 방망이는 특수 제작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살상용 방망이를 만들어 보냈다는 거지요.
田> 첫날 18일은 개머리판으로 치고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리고 그랬어요. 찌른 것은 그 다음날, 20일부터 산발적으로 총성이 울렸고 21일 오후 1시를 전후해 공식 발포가 됐습니다.
南> 발포했을 때 죽은 시신들을 보세요. 완전히 정조준 되어 급소만 맞아 죽었어요. 국민을 사냥감으로 했던 겁니다.
明> 내다보다가, 즉 구경하다가 죽은 사람도 상당히 많은데 그것도 정조준이예요. 제 친구 하나는 아파트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다가 아차 싶어 고개를 밑으로 내렸는데 바로 그 위를 총알이 정확히 때리더라는 겁니다.
南> M16처럼 잔인한 쪽으로 성능이 좋은 총에다 망원렌즈까지 붙었으니 말 다했지요. 이건 비디오 테프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田 >제 아들의 경우도 노동청 앞에서 동료들과 트럭을 타고 가는데 도청 옥상에서 정조준 사격을 했는지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꿰뚫렸습니다. 그래서 맞으면서 밑으로 떨어졌지요. 제가 연락을 받은 것은 전남대 병원으로부터였고요.
南 >설령 내란 상태라고 할 지라도 민간인을 그런 식으로 사냥하는 예는 없습니다.
李 >부상자 중에는 집에서 가장주부로 밥을 짓다가 총에 맞은 사람도 있고, 모내기를 하다 변을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이없이 총에 맞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南 >얼마 전 민화위 증언에 나갔던 꼬마 가족들의 말도 기막히더군요. 검문을 다하고 돌아가라고 해놓고서는 등뒤에서 총을 쏘더라는 겁니다. 신원까지 확인하고 시내로 돌아가라고 해놓고는 말이죠.
田 >외곽지역에선 멱을 감다 죽은 중학교 1년생도 있어요.
明 >저는 19일날 가톨릭센터 앞에서 군중들 틈에 섞여 있었는데, 제일은행 앞 쪽으로 진압군이 들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경찰들과만 재치하다가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곤봉으로 머리를 패기 시작하더군요. 이 광경을 본 한 아주머니는, {아이고 내 새끼들 다 죽이네}하면서 치마로 돌을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남루한 차림이었어요.
李> 21일날 저는 피란을 갔었습니다. 유신 때 운동하던 버릇이 남아있어 온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나섰는데 차를 타려야 탈수가 없어 산길을 넘어갔지요. 그런데 시민과 군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4살난 제 큰놈이 돌멩이를 주워다가 주는 것이었어요. 얼마나 사태가 참혹했으면 어린애까지 그랬겠습니까. 역사책에서 봤던 프랑스의 파리콤뮨이 현실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朴> 타상에서 자상, 이제 총상으로 넘어가는 것 같은데, 발포시각에 대해 얘기해 보죠.
지금 헌팅 파티가!
李 >목격자 증언에 의하면 오전 11시 30분경 광주도청 앞에서 3명이 공수부대원들에게 돌진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잔악한 상황이 연 3일째 계속되다가 아시아 자동차를 탈취하러 간 후였지요. 아마, 중앙고속차를 금남로로 몰고 오다가 도청분수대를 향해 곧장 돌진했습니다. 순간 총성이 울렸어요. 분수대를 중심으로 진치고 있던 군인들이 총을 쏜 것이지요. 그러다가 멈추고 공수대는 도청 안으로 철수했습니다. 그때 지휘관은 중령이었는데 그 병력들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명령없이 발포했다고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팼다는 거예요. 그런데 다시 그 병력이 분수대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느닷없이 도청 앞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나오고, 그와 동시에 살상발포가 개시됐습니다. 기자들은 {지금 금남로에서 헌팅파티가 시작되고 있다}고 기사를 불렀다고 하더군요. 그때 사상자가 제일 많았을 텐데, 사격은 엎드려 쏴 혹은 앉아 쏴 자세로, 금남로·노동청·광주경찰서·남부은행·전남매일·충장로 이렇게 여섯방향으로 감행됐어요. 그때 시민들은 완전 비무장이었습니다.
朴> 그 당시 제가 직접 본 바로는 21일 헌팅파티가 있기 전에 노동청 부근에서 광주소방서 차를 탈취해 밀어붙이고 뛰어내린 일이 있었습니다. 전경 뒤로 공수부대들이 포진한 상황이었지요. 그때 총성이 한방 울렸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우하고 도망쳤고, 또 한방이 울리더니 국민학교 6학년이나 됐을까 하는 어린이가 쓰러졌어요. 그 소년을 몇명이 함께 리어카에 실어 김화중 병원을 갔다가 전남대 병원으로 옮긴 기억이 납니다.
李> 저도 그 장면을 봤습니다. 군중이 한 5천 됐을까, 시간은 1시 경이고. 밀고 밀리고 앞으로 치고 나갈까 말까 망설이던 차에 한 소년이 앞장을 섰어요. 그 아이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지요.
朴 그 당시 그 소년을 리어카에 싣는데 허리에 총을 맞았더군요. 총알이 몸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지나갔으므로 등 뒤는 아예 없다고 할 지경이었고, 쏟아져 나온 창자에 보리밥알이 묻어 있었습니다.
明> 시민들은 신사적이었습니다. 현대극장 쪽에서는 공수부대원 3명이 쫓기다가 둘은 양동파출소 건너편 부대로 합류하고 나머지 한명이 광주천을 건너다가 양쪽 시민들이 돌을 던져대는 통에 독안에 든 쥐가 됐었지요. 더이상 도망을 못가고 돌에 맞아 쓰러지자 인근 적십자병원의사들이 쏟아지는 돌 속을 뚫고 들어가 공수대원을 구조, 병원으로 데려갔었습니다. 당시 병원 근처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있었는데 부상당한 공수대원에 대해서는 더이상 린치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총도 빼앗지 않았구요. 19일 까지는 총을 빼앗거나 한 일이 없어요. 위대한 시민이었지요.
金> 이제 수난의 관점에서 항쟁의 관점으로 넘어갈 때가 된 듯 합니다. 민주화운동권에서는 광주 5월이 우리 나라 민주화운동에 획을 그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당한 것만, 진상규명의 차원에서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그 참혹수난의 과정을 관통하면서 무엇이 이룩됐는가에 초점을 맞추어보자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광주는 끔찍하고 찬란한 민중수난과 투쟁의 빛이었습니다. 아주 치명적인. 그래서 보다 광범위한 민중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70년대 운동이 갖는 한계에 대한 확고한 반성의 계기로 되었고,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문제가 참으로 둘이 아니고 하나다, 미 제국주의에 대해 뚜렷이 인식하는 계기로 됐다, 이런 평가들을 운동권에서 내리고 있는 것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고 그것이 더욱 중요한 본질적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아까 광주문제를 도저히 진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볼 수 없다는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는데요. 그 문제를 근본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당시 계엄군도 그것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쓴 군대작전용어만 봐도 이건 완전히 전쟁상태 아닙니까?
그들이 시간대별로 짰던 작전계획용어만 봐도 그 사고방식은 분명 전쟁수행의 그것입니다. 전쟁치고도 일방적인, 그리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었던 셈이지요. 제네바 협정조차 위반한. 그래서 민주화 운동권 사람들이 광주를 얘기할 때 이것은 광주사태의 끝이 아니다, 희망의 시작이다, 애써 이렇게 평가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작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광주가 선거쟁점화된 것은 좋은데, 여론의 끈질긴 본질회피, 그리고 운동권의 단순폭로위주의 대응, 그리고 없다고는 할 수 없을 지역성 문제와 혼연일체가 되면서, 공히 광주항쟁의 의미를 상당히 약화시켰던 것 같아요. 바로 그것이야말로 지배 집단이 선거를 치르면서 남겨먹은, 장사로 치자면 상당히 많이 남겨먹은 장사라는 생각이 들고 광주사람들로서는 뭐뺏기고 뭐뺏기고 모조리 뺏긴, 상당히 손해를 많이 봤다는 생각도 들구요.
崔> 해마다 5월이 오면 먼저 진상규명이란 문제가 거론되고, 신문잡지에 개요가 반복 되풀이되곤 하는데, 문제는 진상규명의 의미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입니다. 그런 시각이 없이, 무의미하게 되풀이 되는 그 앵무새같은 행위에 우리마저 빠져들면 안될 것이예요. 한반도 남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미국과 군사독재정권이 사전의 치밀한 계획하에 수행되고 있음입니다. 한반도 상황 자체가 미국의 식민지체제이면서 동시에 군부독재 체제하에 놓여 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시각이 중요하단 말입니다. 88년 5월은 노태우체제가 88년 올림픽을 풀어가는 고리인 미국과 군부독재와의 관계를 파탄시키는데 필수적인 중요한 고리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어요. 올림픽을 통해 미국은 노태우정권의 실질적 인정화와 분단고착을 통한 식민지 지배 질서의 영구화를 노리고 있고 당연히 현정권도 그에 편승하고 있기 때문에 제 생각으로는 금년이 반미자주화투쟁의 하나의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통일의 당위성도 대중적으로 그 의미가 확산되어야할텐데, 5월의 의미도 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한반도 지배질서의 본질적인 부분이 민중항쟁을 통해 폭로된 것은 광주 5월항쟁이 처음 아닙니까. 그래서 그 이후 반미투쟁이 가속화되기 시작했지요.
5월을 말할 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역사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민중들의 창조성일 것이고, 이 부분을 가장 올바르게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주체적 역량을 발휘하는 정도 및 미국·군부독재의 음모 이 두 가지를 올바로 평가해나가는 것이 5월의 가장 바람직한 평가고, 5월정신의 계승이며, 우리 투쟁의 정확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보탬이 되는 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너무 피해부분만 부각됨으로해서 소극적 의미만 전달되었다는 점이 지적돼야겠죠. 5월의 의미들은 5월의 진정한 주체가 광주시민이었기 때문에 광주시민에게 환원되고 4천만 국민 모두에게 환원되어야 전체 국민들이 5월을 기점으로 출발하는 운동의 모범으로 창출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5월의 문제가 광주에 국한되지 않고 4천만의 문제로 확산되어 반외세·반독재 투쟁에 하나의 단초로 재확립되기를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생존권과 직결되는 문제
南 그간 여러 사람들 때문에 광주문제가 설득력을 계속 잃어 왔는데, 그 이유중 하나는 귀납적으로 드러난 사실들을 바탕으로 충분히 끌어 낼 수 있는 결론들을 지나치게 도식화하고 연역화해서 대중들의 광주에 대한 인식을 방해했다는 점을 들 수 있어요. 당시의 모든 상황들이 운동권 논리를 증명해주기 위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쉽게 얘기될 것을 어렵게 얘기하고, 대다수 시민들로 하여금 운동권 논리에 놀아났다는 인식을 부지불식간에 심어주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우리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렇게 풀어 나가자는 거예요.
明>구체성에서 출발을 하자는 말씀이군요. 견강부회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을 초래할 수 있다는 거지요.
金> 재작년엔가 서울대 국민대토론엘 갔었는데 그때 학생들이 광주문제를 놓고 세미나를 하더군요, 그런데 한 학생인 지금 바로 명선생님께서 걱정하신 그런 선언적 논리로 발제를 마치니까 방청학생 한명이 일어나 {자료를 읽어보니까 미국항공모함이 온다해서 환호성을 올렸다가 곧바로 미국에 대한 실망·좌절·분노·증오감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설명되어 있는데 초장부터 반미 자주화를 주장한 것으로 규정하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이의를 제기, 곧바로 활발한 토론으로 들어갔는데 그 과정 이 저는 꽤 감동깊었었습니다. 구체성에서 시작하자는 주장과 운동이론에서 출발하자는 주장이 거의 완벽한 민주토론을 거치면서 서로를 보충해주는 거였어요. 저로서는 그것이 학생들은 분명 변증법적 종합능력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 상징적인 사태였던 셈이지요. 구체성으로만 치달을 때는 뼈대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고 초장부터 뼈대만 각목심듯 팍팍 심으려 들면 필경 무리를 초래하지요. 학생운동권의 논리가 그렇게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 자리에서도 그렇지요. 학자, 직접체험자, 운동이론 실천가들이 서로를 채우면서 바람직한 해석들을 이 단계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최선의 길 아니겠어요?
崔> 제 말도 단순히 추상성 위주로 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역사적 진실이 있으면 소수 몇 사람의 진실로 놔두지 말고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진실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그리고 목적 의식으로 어떻게 올바른 투쟁을 실천해 나갈 것인가의 관점에서 보자 이겁니다. 해방이후 식민지 지배질서의 재편의 연속선상에서 지배집단이 안정화되는 과정, 군부독재집단이 변화해 가는 과정, 이런 과정들이 극명하게 표출되는 사건이 80년 5월이었기 때문에, 5월을 통해 45년에서 80년까지의 과정은 어떠했으며, 그 이후는 또 어떻게 변해왔느냐를 추적해봐야 합니다. 또하나 세워야할 관점은 5월의 주체인 광주시민들을 5월논의의 주인으로 해야한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 5월의 논의들이 단체대표성, 명망적 대표성, 그런것들에 의해 대행논의 됐다는 생각이 들구요. 광주시민들의 이야기를 타지방 시민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도를 찾고, 그렇게 전달받은 타지방 주민들이 다시 5월의 주체로 변화될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해요.
南 현상에 의해 결론이 내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의미가 살아있는 것으로 되지요. 5월은 국민의 자제로 구성됐다는 軍이 몇몇 개인의 사리야욕에 의해 사병으로 전락한 전례를 남긴 사건이라는 점, [안보]이데올로기가 상당부분 허구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가르쳐준 사건이었습니다. 또 5월은 언론과 여론의 편파·왜곡·조작이 횡행할 때 사태의 심각성, 지배집단의 지역감정 유발을 통한 분할통치방식을 깨닫게 해주었고, 남북을 나눈 자가 또한 동서를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문제와도 긴밀한 연관을 갖게 합니다. 현상에서 출발하더라도 문제의 본질은 똑같은 것이예요.
金 박선생님이 연출하신 연극 {금희의 5월}을 저도 봤습니다. 광주항쟁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공개공연을 한 최초의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 극을 만들면서도 바로 이런 문제가 연출가를 괴롭혔을 것 같아요. 즉, 가장 참혹한 수난의 현장을 사실 그대로 취합, 예술적으로 빚어져, 오히려 가장 찬란한 미래의 전망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많은 생각을 하셨을 텐데….
朴> 광주사람하고 그 외의 사람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서울공연에서 절감했어요. 서울에선 놀랍도록 반응이 좋았는데, 광주에서 같은 공연을 했을때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인가는 상당히 걱정스럽습니다. 조작·은폐·왜곡이 너무 심해 의식들이 많이 희석화되어 있거든요. 지난번 민화위도 크게 보면 현정권의 전략에 말려 들어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총을 들고 나오고 할머니가 백주에 몽둥이로 맞아 죽고 최루탄이 터지고 하는 연극이 서울에서 공연됐어요. 그런데 안기부사람이 공연을 보고는 {이 정도는 괜찮겠다}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별수단을 다써서 제지를 했기 때문에 최소한 사태가 희석화될 우려는 없었는데 이제는 내버려두고 김을 뺀단 말예요. 감각을 무디게 만들겠다는 것이죠. 작품공연도 예술적인 투쟁으로 본다면 이건 보통문제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싸워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들의 공작과 술수를 능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들이 과학적으로 대응하는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5월의 의미를 찾아서 과학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崔> 피해부분 선전이 되어야겠지만 한반도 민중투쟁사의 한 모범으로서 광범하게 선전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대학생이나 시민들이 광주를 찾아왔을 때 교훈을 얻어갈 수 있지, 그렇지 않다면 신비감과 환상만을 심어줄 뿐이거든요.
金 그런 극한 고난 속에서도, 아니 그런 극한 고난이 있었기에 이러이러한 찬란한 것들이 이룩됐다,말하자면 미래비전의 제시랄까하는 부분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崔 대규모적인 투쟁 속에서도 질서정연했던 모습, 광주 시민 스스로 세운 도덕적 한계를 넘지 않고 인간적인 포용성을 발휘했던 부분, 이런 것들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올바른 투사로서의 전형이 아닐까 합니다. 그 모습이 광범위하게 확산돼야 한다는 것이구요, 타지방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얼마나 맞았는가 질문합니다. 우리는 그 끔찍한 상황에서 시민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 대답해주어야 합니다. 찢어진 가슴, 깨진 머리, 이런 부분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꿋꿋하고 열렬한 투쟁과정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죠. 인간적인 분노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 분노의 방향을 역사발전방향에 맞게 잡아줘야 하는 것이지요.
그날의 광주는 사랑의 공동체
李 저희가 21일 이후 힘을 모아 싸우면서 만들었던 광주는 정말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었던가 싶어요, 많은 시민들이 김밥을 지어오고, 가게에서 음료수를 제공하고, 광주관공서는 시민재산이니까 부수면 안된다 하고.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정말 하나가 되어 민주주의를 해내겠다는 일념에 가득차 있었거든요. 특히 이 시기 핍박받는 민중인 노동자·농민·도시빈민들이 자신의 문제를 풀어가고 대동단결로 하나가 될 때 우리나라는 바람직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확인했습니다.
南 도망하는 경찰들에게 시민들이 전부 민간복장을 입혀 보내주었습니다.
明 평소에 미웠던 경찰들이 시내에 버젓이 살고 있는데도 행패하나 안부리고요. 5일간 시내를 장악했는데 경찰에 대한 보복은 단 1건도 없었지요.
南 소위 폭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밤에 야경을 돌았습니다. 좀도둑을 잡아다가, 네가 이런 상황에서 도둑질하다니 말이 되느냐, 타이르기도 했습니다.
明 도청공무원이 책상서랍에 넣어둔 월급봉투가 고스란히 그 자리에 있더라는 얘기도 있지요.
南 사람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광주항쟁기간은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明 국군 40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 5월 광주였습니다. 더럽혀진 국군의 명예도 민주화가 되면 되찾아지겠지요. 이런 일이 있었지요. 총기회수 문제로 부사령관과 협상을 벌일 참인데, 서울에서 준장 한명이 내려왔습니다. 부사령관은 소장이었는데 강경파인 듯한 그 준장과 말싸움이 붙는가 싶더니 준장이 소장한테 냅다 권총을 들이대는 거예요. 저는 이 사건의 과정에 군부내 강온파간의 대립이 크게 작용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그래서 떨칠 수가 없어요. 강경파가 득세하여 광주의 무력 진압이 개시된 것 같다는….
金 田선생님께서 유가족들의 현재 심정을 대표해서 말씀해주시죠.
田 끝까지 원칙론만 주장하다보면, 결국 독재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의미가 없게 됩니다. 독재가 존재하는 이 시점에서 어느 선까지 유가족들이 견뎌주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는 정말 협의하기가 힘듭니다. 멋모르게 희생된 사람, 구경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참여한 사람, 처음부터 직접 참여한 사람, 이런 여러가지 나눔이 실제로 가능하거든요. 각각의 희생자 유가족들의 생각은 같지 않습니다. 유가족들과 운동권의 생각사이에는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없지요. 육신도 정신도 지칠대로 지쳤고 멍들대로 멍들었다, 더이상 투쟁할 수 있는 기력조차 없어졌다고 하소연하시는 분들도 있구요. 시민들이나 국민들이 과거처럼 5.18에 대해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관심을 갖는 것도 아니구요. 제자신도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지요.
南 4.19는 의거 직후 정권이 바뀌어 문제가 다릅니다만 5.18 희생자들에겐 더이상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金 이제 시간도 상당히 됐고 하니까 결론삼아 작년 대통령 선거와 광주항쟁을 연관시켜보고자 합니다. 제 생각을 우선 말해보지요. 숫자 문제를 갖고 갑론을박만 하다가는 근본적인 문제를 놓친다는 것은 앞서 말씀해주신 바와 같구요, 또 하나는 이번 대통령 선거전에 나왔던 이슈로 한 폭로전의 와중에서, 이상하게도 광주문제의 본질이 조금씩 조금씩 희석화됐다는 점입니다. 대통령 선거 전의 광주항쟁과 선거후인 지금의 광주항쟁은 확실히 그 의미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어요, 광주항쟁을 다룰 때, {민중투쟁에 의한 역사발전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민중들이 치렀던 면면한 희생이 있고 광주도 그 연장인, 가장 끔찍한 동시에 가장 찬란한 위업이었다}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정치인이 한 분도 없더라 이 말이죠. 그것이, 결코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지역 감정의 잔재, 그리고 언론매체를 통한 그것의 조작 및 극대화를 통해 묘하게 광주항쟁을 지역적인 문제로 몰아 붙였는데, 우리는 그런 총체적 전술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단 말입니다. 오죽하면 제주도 출신인 한 친구가, {니미X팔, 그럼 제주도 4·3항쟁은 누가 해결해주냐, 난 제주도 공화국 만들란다} 그러겠어요? 그것이 특정 정치인만의 책임은 아니고, 운동권 전체의 의식수준의 한 반영이 아니었던가 싶어요.
긍정적인 부분이 좀더 널리 전파됐어야 한다는 학생들의 주장도 그것과 연관이 있을 성 싶네요. 4·19와 5·18의 차이, 이젠 폭로·비판적 증거뿐만 아니라, 창조·민중·물리적 힘이 있어야만 현 정권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점이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 5월 광주잖습니까? 여기 참석하신 분들은 대통령 선거와 광주항쟁의 모든 것을 가슴에 안고 또 신문 등을 통한 지역성 확대·조직이 낳은 모든 오해를 안고 대통령 선거기간을 관통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때 느꼈던 심정들을 결론 삼아 말씀해주시지요.
李 저희들은 대통령 선거기간을 광주항쟁 선전기간으로 설정하고 대중집회가 있을 때마다 사진전을 열고 자료집을 팔았어요. 일반국민들이 아직 광주를 거의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경상도도 포함, 전국을 순회했는데, 경상도 쪽은 테러를 우려, 경호원을 데려가곤 했지만 전 기간 중에 테러는 한건도 없었습니다. 호응도 아주 좋았구요.
南 광주의거 사진첩에는 가능한 한 설명을 달지 않았습니다. 사진 자체가 말했으니까요, 광주의 진상을 알릴 만큼은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통령 선거 후에 경향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지만 제도권 언론은 광주에만 초점을 맞추었죠. 호남 지역 특정정치인이 당선되지 않은 것에 대한 지역감정의 포갈이다, 광주항쟁이란 것도 그런 것 아니겠냐, 이미 이런 왜곡된 의식을 집요하게 심어 주려한 것 같습니다. 우리 운동단체들은 또다시 제2의 광주학살이 자행될 것 같아서 시위군중에게 자제를 촉구했어요.
5·18정신 더욱 확산시켜야
明 대통령 선거기간 중의 광주부각은 바람직했던 것 같아요. 정부에서도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 운운으로 규정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들로서는 정말 배아픈 양보일 거예요. 그것이 미미한대로나마 우리들의 전리품인 셈이죠. 이것을 바탕으로 국회에서 국조권이라도 발동되면 그것은 대단한 민중의 승리일 것입니다. 희석화시키려는 정부의 기도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야지요.
田 대통령선거 기간 중에도 희석화시키려고 애를 썼고 언론이 앞장서서 작용을 했는데, 그걸 지역감정으로 몰아 광주문제는 광주에 국한된 것이다, 이렇게 축소시켰지요. 그걸 파괴하자고 우리는 대구에도 갔고 부산에도 갔었습니다. 국민운동본부·대학생협의회가 주최한 [영호남 지역감정해소를 위한 집회]에 참석, 부산시민들에게 광주얘기를 하니까 그렇게 반응이 좋더라구요. 아무리 이 정권이 5·18을 희석화시키려해도 언젠가는 풀지 않고 못배길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어요.
金 물론 진상규명노력은 절대 필요하지요. 저는 더 나아가서 全정권이 됐건 盧정권이 됐건 군사독재정권은 아마도 광주문제로 망하지 않을까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지 진상규명 차원이 아닌 역사창조의 차원에서 광주문제를 거론한 정치인이 있었더라면, 좀더 튼튼한 초석이 마련됐을 거라는 생각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또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광주를 얘기할 때 근본적인 시각에서, 즉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진정한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해 광주를 어떻게 볼 것이냐가 쟁점이 돼야 한다는 것이고요.
南 자초지종을 모르는 사람한테 광주의 역사적 의의를 얘기해 봐야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진상이 규명될 때, 책임소재가 밝혀질 때가 바로 민주화가 되는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明 정부에서 이 정도했으면 좀 양보해야 되는 것 아니냐, 좀 심한 것 같다는 여론이 일 법한 일이거든요, 그런 왜곡된 여론을 격파해 주는 것은 진상규명 밖에 없어요. 물론 난제는 난제지만.
南 대중운동을 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진실을 바탕으로 얘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히려 지역감정으로 몰리게될 위험도 있는 것이구요.
金 판화하는 홍성담씨 있죠. 그 사람은 참혹하게 진상을 보여주면서도 그림 자체가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낙관적인 빛으로 넘쳐있지요. 그 친구가 말이죠, 이렇게 참혹하게 당했다 얘기를 하면서도, {그 극한 고난을 꿰뚫고 이룩한 광주해방 10일간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세월이었다}라고 덧붙이기를 잊지 않더군요. 진상규명의 차원과 미래전망을 찾는 부분이 딱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崔 대통령선거는 소위 민주화운동의 명암을 그대로 표출시킨 사건이었지요. 단결, 단결, 외쳤지만 실제로 가장 단결을 강조했던 지식인 명망활동가들은 4분5열했고, 정작 단결은 별로 내노라하지 않던 국민들이 했단 말입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남대협]은 두가지를 중심축으로 선거국면에 대처했습니다. 하나는 5·18관련자인 노태우 후보의 실체폭로와, 또하나는 공정선거감시. 그런데 그것이 공정선거 감시쪽에 너무 매몰되어 대단히 미흡한 결과를 맺고 말았죠. 5월 문제도 주체적으로 풀지 못했고요. 아까 말씀하셨듯이 사진과 생생한 자료를 갖고 감시단원들이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차원에서의 선동에 그쳤지 5월의 문제를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으로 부각시켜 민주정부의 중요성과 방향성을 쟁취해내려고 한 적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치명적이었던 것은, 5월 문제를 풀어 가는 주체가 형성되지 못했고, 그것을 풀어가는 내용·방법·관점이 전무했다는 점입니다. 승자와 패자의 관점이 올바르게 결합되어,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 나가야 했습니다. 책자·자료·강연 차원에 머물렀기 때문에 전북에 있던 사람들조차 자기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방편들을 하나도 찾지 못했고, 더군다나 영남-서울지역쯤 되면 듣기만 했지, 일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거였거든요. 우리가 5월을 겪었지만 주체는 우리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일꾼으로서의 자세와 관점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들을 이제 비판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朴 작년에 선거를 치르면서 가슴 아팠던 것은 5월의 주체 세력들이 4분5열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정적으로 대단히 불안하더군요. 함께 운동하던 사람들이 단결하지 못하고 짝짝 갈라져 나가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80년 초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우리들의 운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민중 속에서, 민중과 더불어 싸우고 일해 나가려는 자세가 대단히 진지하고 성숙되어있습니다. 5월정신을 전민족적으로 확산시킬 때 진정으로 승리가 옵니다. 적들의 실체를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는 이제 청산되고 극복되어야 하겠지요. 컴퓨터와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보다 성능 좋은 컴퓨터가 되어야 합니다.
金 귀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광주항쟁의 정신이 민주화항쟁으로 대폭 확산되어 진정한 민주화의 날을 앞당기는 기폭제로 될 것임을 확신하는 것으로 이 좌담의 결론을 삼으면서 좌담을 마치겠습니다. 오랜 시간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