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민중항쟁과 문예운동. 김형수(대중을 위한 문학교실, 풀빛, 1990. 11)
본문
광주민중항쟁과 문예운동
이정표에 대한 확신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현재성'이라는 제목 아래 첫째, 광주민중항쟁이 민족문학사에 미친 영향, 둘째, 그로 인한 1980년대 문학운동의 양상, 셋째, 1990년대의 과제와 광주민중항쟁을 살펴보려 한다.
사회발전의 어느 측면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먼저 평가해야 할 문제가 있다. 현실을 변화시켜 간 실세가 뉘 손에 있었는가를 따지는 일이다.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힘은 정치인이나 진보적 지식인 혹은 선진적 사회운동가 등 소수에게 있지 않다. 역사는 민중의 것이다. 우리 앞에 셀 수도 없을 만큼 자주 확인되었듯이 한 부류의 사회집단이나 활동가들이 스스로를 옳다고 자부한다고 해서 역사가 그들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명제는 그러나 여러 자리에서 쉽게 공염불이 되는 수모를 겪어왔다. 오늘 이 자리에서조차 그러한 잘못이 허락된다면 우리는 험난한 걸을 헤치더라도 끝내 목적지에 닿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는 광주민중항쟁이 문학운동에 미친 영향을 민족문학논쟁이나 몇몇 작품의 소재 속에서만 찾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문학논쟁은 광주민중항쟁이 없었더라도 가능했겠지만 우리 민족의 1980 년 대적 문학현실은 광주민중항쟁의 핏자국 위에 들어선 것이었다. 최근에 1970년대의 민족문학론으로부터 소시민적 민족문학론과 민중적 민족문학론·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을 구별해내는 제1차 논쟁과, 그로부터 노동해방문학론과 민족해방문학론이 특화되는 제2차 논쟁이 있었다. 만일 이 논쟁의 내용을 앎으로써 1980년대 문예 현실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5·18 이후의 문학운동을 알기 위해 주요 평론가 한두 사람만 이해하면 될 것이다. 범위를 조금 넓힌다 해도 민족문학작가회의나 몇몇 문학동인의 실상을 알면 될 것이다.
그러나 우스꽝스럽게도 1980년대라고 하는 10년의 공간 속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영향이나 그 이후 문학운동의 성취 정도가 기성 문인들만큼 초라한 계급·계층은 흔치 않다. 자신의 실현욕구를 선동렬이나 김성한에게 내맡긴 프로야구의 관중처럼 오늘의 문예대중이 고은, 김지하에게 의존해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일 것이다. 지금은 이미 대중적 문예조직 안에서 창작단과 조직창작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문예 운동가들이 민중을 구성하는 전 계급·계층에 걸쳐 성장하고 있는 단계이다. 그에 반해 문단 사와 비평사에 뿌려진 5·18의 피의 흔적은 그리 선명하지 못하다. 어차피 문학이 사회적 의식의 일종인 이상 그것은 문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조건과 정치적 생명의 성장 정도에 비례 할 수밖에 없잖겠는가.
이제 우리는 보다 새로운 문제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첫째, 우리의 문학운동이 진보적 작가들이 주도하던 문인운동에서 광범한 민중이 이끄는 문예운동으로 변했다는 사실, 둘째, 그 모든 배후에 광주민중항쟁의 피에 발목을 적신 대중이 있었다는 사실. 이것이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확인해두고자 하는 이정표이다.
1980년대 문학운동의 흐름
이러한 이정표에 불만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현재성을 가능케 한 낱낱의 죽음을 예로 들며 그들의 피가 어떻게 문학운동을 성장시켰는지 의아해 하는 이가 없을 리 없다. 그들은 문학운동을 이야기하면서까지 광주민중항쟁에 지나친 의미부여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내가 노동계급의 무장봉기를 곡해시켰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들은 1980년 대적 결실인 김남주로부터 민족해방운동사적 관점을 거세시키는 것이 더 의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 사회의 모든 흐름을 질적으로 바꾸는 역사적인 사변은 반드시 있다. 그러한 사변은 누구의 어떠한 음모로도 지워지지 않고 두고두고 뒷세상의 나침반이 된다. 우리의 지난 10년은 광주민중 항쟁 기에 제기된 문제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제기하며 흘러왔다. 미문화원이 불타고, 사회운동의 계급·계층적 분화가 이루어지고 변혁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과학적으로 모색되고, 대중진출이 이루어지고 또 조국통일투쟁이 개막되고‥‥‥
우리의 변혁세력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주·민주 통일을 내세우는 민족민주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은 민족해방운동사의 전통을 이어낼 수 있었다.
광주민중항쟁이 문학운동에 미친 영향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였다 고 볼 수 있다.
첫째 '과학적 사회운동에 대한 인식'이 미친 영향 : 한 사회의 변혁 운동에는 그것을 지도하는 세력과 주도하는 세력이 필히 있게 마련이 다.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을 지도하고 주도할 세력이 노동계급임을 실질적으로 깨닫게 했다. 사회경제적 처지·조건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반 독재투쟁의 대오로 항쟁을 치러내면서 민중의 의식화와 조직화에 대한 과학적인 방도를 깨닫게 한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사회운동의 계급·계층적 분화에 작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노동운동의 목적 의식적 강화를 낳는다. 이로 인해 직접 파생된 것이 민중문 학이었다. 민중문학은 진보적 문인의 각성으로부터 모색이 시작되던 1970년대까지의 문학운동을 민중의 각성으로부터 새로운 모색이 개진되는 1980년대 고유의 문학운동으로 내용과 질을 달리 하면서 발전되었다. 참여문학론, 민족문학론, 쉬운 시 쓰기 운동 등에 대비한 공동 창작론, 장르 확산론, 민족문학 주체논쟁, 보고문학론 등이 그를 입증한 다.
둘째 '미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미친 영향' : 한 사회의 변혁운동에는 그것을 지도하는 세력과 주도하는 세력이 있는 한편 주류 운동이 있다. 각 계급·계층의 자주성 쟁취를 위한 다양한 내용의 운동들은 주류운동의 광범한 영향에 힘입어 성장한다. 광주민중 항쟁은 반미자주화를 부르짖는 민족해방세력을 한국사화의 주류운동의 자리로 올려놓게 된다. 그로부터 한 사회의 상부구조에 속하는 사상예술적 재부들이 민족해방운동사 안에 자리잡기 시작하는 것이다. 조정래 『태백산맥』 정도상 「친구는 멀리 갔어도」, 김하기 「살아 있는 무덤i과 노동작가들의 소설, 고은 「백두산」, 이산하 『한라산』.김남주 「조국은 하나다」, 오봉옥 『붉은 산 검은 피』와 노동시인들의 시, 그리고 백진기등의 통일 민족문학사를 향한 비평작업 등이 그 실례이다.
이러한 영향 아래 성장 발전하는 문학운동의 형태들은 1980년대를 통틀어 두 단계의 시기적 특성을 내보이며 정착한다. 대중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인천 5·3항쟁 때까지의 상반기와 6월 투쟁에 이은 7, 8월 노동자 대 투쟁을 통해 대중이 계급·계층운동의 실세로 등장한 이후의 하반기가 그것이다-
상반기의 문학운동은 세 갈래의 흐름을 타고 발전한다. 첫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민족 문학 작가 회의'로 간판을 바꾸는 문인들의 기구운동, 둘째 '5월시' '삶의 문학' 등을 위시한 동인운동과 무크지 출판운동, 셋째 지역문화운동과 현장 문예소모임 운동 등.
그러나 상반기의 이러한 흐름들은 광주민중항쟁이 남긴 두 가지의 고귀한 선물을 과학적으로 담보하지 못한다. 기구운동은 문인들의 선진적 활동을 통해 대중적 문예운동을 지도하려는 잘못을, 동인운동과 무크지 출판운동은 애초부터 매체확장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조직형태상의 한계를, 지역문화운동과 현장 문예소모임 운동은 문예의 사회적 의식으로서의 특성을 소중히 여겨 계급·계층운동과 결합하지 못하게 되는 잘못을 안고 출발한 탓이었다. 이 상반기는 대중적 문예운동의 모색기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반기의 문학운동은 상반기에 발생된 형태들을 뒤흔들며 세 가지의 새로운 경향을 형성시킨다.
우선 카프로부터 해방 후 문학가동맹에 이르는 흐름을 연상시키는 진보조직의 선전선동 부서의 성격을 가지려는 형태가 있었다. '노동해방문학'에 의해 제안된 '노동통신원제도' '보고 문학 창작단' 등의 편린이 그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1980년대 들어 활성화된 민중문화운동을 강화하면서 문화예술운동의 전위를 형성하려는 운동형태가 있었다.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각 지역 민중문화운동협의체들의 활동이 그것이다. 그리고 또한 각 계급·계층운동의 부분사업으로서 문예대중의 지향과 요구를 모아내려는 자주적 문예운동이 있었다. '서울지역대학생문학연합'을 비롯한 청년학생 문예운동, 전교조의'교육 문예 창작회', 각 지역 노동자문학회와 공장문예반 등 노동 대중의 문예운동이 그것이다.
평가와 전망
누구의 눈에도 1970년대 문학과 1980년대 문학의 차이는 놀라울 것이다. 10년 전에 비해 양적으로 질적으로 크게 변화한 한국 민족 문학, 그 밑바닥에는 앞에서 살펴본 광주민중항쟁이 낳은 문학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그 새로운 문학운동들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정치 사상적 입장의 차이를 이유로 그것 자체가 방기되어 있기도 하다. 그릇된 문예 운동관을 사상의 차이로 추상화시킨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고리 끼는 문예일꾼을 나라와 계급의 귀이자 눈이요 감각기관이라고 했다. 문예일꾼이 나라와 계급의 감각기관일 수 있는 까닭은 역시 문예의 본성에 있다. 문학을 인식의 도구요 사회적 작용의 무기가 되는 사회의식의 한 형태라고 정의한다. 인식의 도구라면 우선 만인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인식의 도구를 쥐어간다는 것, 여기에 문학운동의 일차적 사명이 있다. 다음으로 사회적 작용의 무가라면 그것은 응당 선전선동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이 역시 문학운동의 한 몫이다. 끝으로 사회적 의식의 한 형태라면 그것의 힘은 전적으로 계급·계층의 사회경제적 처지·조건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계급·계층운동과 구체적으로 결합되지 못한 문예일꾼들은 두고두고 '운동인가, 문학인가?' 하는 그릇된 문제를 늘고 고뇌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앞에 광주민중항쟁은 앞서 제기한 문제들을 두고두고 되풀이하여 제기할 것이다. 광주 금남로는 바로 이것을 가르쳤다.*
(『전남일보』, 1990. 5. 16)
이정표에 대한 확신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현재성'이라는 제목 아래 첫째, 광주민중항쟁이 민족문학사에 미친 영향, 둘째, 그로 인한 1980년대 문학운동의 양상, 셋째, 1990년대의 과제와 광주민중항쟁을 살펴보려 한다.
사회발전의 어느 측면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먼저 평가해야 할 문제가 있다. 현실을 변화시켜 간 실세가 뉘 손에 있었는가를 따지는 일이다.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힘은 정치인이나 진보적 지식인 혹은 선진적 사회운동가 등 소수에게 있지 않다. 역사는 민중의 것이다. 우리 앞에 셀 수도 없을 만큼 자주 확인되었듯이 한 부류의 사회집단이나 활동가들이 스스로를 옳다고 자부한다고 해서 역사가 그들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명제는 그러나 여러 자리에서 쉽게 공염불이 되는 수모를 겪어왔다. 오늘 이 자리에서조차 그러한 잘못이 허락된다면 우리는 험난한 걸을 헤치더라도 끝내 목적지에 닿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는 광주민중항쟁이 문학운동에 미친 영향을 민족문학논쟁이나 몇몇 작품의 소재 속에서만 찾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문학논쟁은 광주민중항쟁이 없었더라도 가능했겠지만 우리 민족의 1980 년 대적 문학현실은 광주민중항쟁의 핏자국 위에 들어선 것이었다. 최근에 1970년대의 민족문학론으로부터 소시민적 민족문학론과 민중적 민족문학론·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을 구별해내는 제1차 논쟁과, 그로부터 노동해방문학론과 민족해방문학론이 특화되는 제2차 논쟁이 있었다. 만일 이 논쟁의 내용을 앎으로써 1980년대 문예 현실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5·18 이후의 문학운동을 알기 위해 주요 평론가 한두 사람만 이해하면 될 것이다. 범위를 조금 넓힌다 해도 민족문학작가회의나 몇몇 문학동인의 실상을 알면 될 것이다.
그러나 우스꽝스럽게도 1980년대라고 하는 10년의 공간 속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영향이나 그 이후 문학운동의 성취 정도가 기성 문인들만큼 초라한 계급·계층은 흔치 않다. 자신의 실현욕구를 선동렬이나 김성한에게 내맡긴 프로야구의 관중처럼 오늘의 문예대중이 고은, 김지하에게 의존해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일 것이다. 지금은 이미 대중적 문예조직 안에서 창작단과 조직창작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문예 운동가들이 민중을 구성하는 전 계급·계층에 걸쳐 성장하고 있는 단계이다. 그에 반해 문단 사와 비평사에 뿌려진 5·18의 피의 흔적은 그리 선명하지 못하다. 어차피 문학이 사회적 의식의 일종인 이상 그것은 문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조건과 정치적 생명의 성장 정도에 비례 할 수밖에 없잖겠는가.
이제 우리는 보다 새로운 문제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첫째, 우리의 문학운동이 진보적 작가들이 주도하던 문인운동에서 광범한 민중이 이끄는 문예운동으로 변했다는 사실, 둘째, 그 모든 배후에 광주민중항쟁의 피에 발목을 적신 대중이 있었다는 사실. 이것이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확인해두고자 하는 이정표이다.
1980년대 문학운동의 흐름
이러한 이정표에 불만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현재성을 가능케 한 낱낱의 죽음을 예로 들며 그들의 피가 어떻게 문학운동을 성장시켰는지 의아해 하는 이가 없을 리 없다. 그들은 문학운동을 이야기하면서까지 광주민중항쟁에 지나친 의미부여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내가 노동계급의 무장봉기를 곡해시켰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들은 1980년 대적 결실인 김남주로부터 민족해방운동사적 관점을 거세시키는 것이 더 의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 사회의 모든 흐름을 질적으로 바꾸는 역사적인 사변은 반드시 있다. 그러한 사변은 누구의 어떠한 음모로도 지워지지 않고 두고두고 뒷세상의 나침반이 된다. 우리의 지난 10년은 광주민중 항쟁 기에 제기된 문제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제기하며 흘러왔다. 미문화원이 불타고, 사회운동의 계급·계층적 분화가 이루어지고 변혁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과학적으로 모색되고, 대중진출이 이루어지고 또 조국통일투쟁이 개막되고‥‥‥
우리의 변혁세력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주·민주 통일을 내세우는 민족민주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은 민족해방운동사의 전통을 이어낼 수 있었다.
광주민중항쟁이 문학운동에 미친 영향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였다 고 볼 수 있다.
첫째 '과학적 사회운동에 대한 인식'이 미친 영향 : 한 사회의 변혁 운동에는 그것을 지도하는 세력과 주도하는 세력이 필히 있게 마련이 다.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을 지도하고 주도할 세력이 노동계급임을 실질적으로 깨닫게 했다. 사회경제적 처지·조건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반 독재투쟁의 대오로 항쟁을 치러내면서 민중의 의식화와 조직화에 대한 과학적인 방도를 깨닫게 한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사회운동의 계급·계층적 분화에 작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노동운동의 목적 의식적 강화를 낳는다. 이로 인해 직접 파생된 것이 민중문 학이었다. 민중문학은 진보적 문인의 각성으로부터 모색이 시작되던 1970년대까지의 문학운동을 민중의 각성으로부터 새로운 모색이 개진되는 1980년대 고유의 문학운동으로 내용과 질을 달리 하면서 발전되었다. 참여문학론, 민족문학론, 쉬운 시 쓰기 운동 등에 대비한 공동 창작론, 장르 확산론, 민족문학 주체논쟁, 보고문학론 등이 그를 입증한 다.
둘째 '미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미친 영향' : 한 사회의 변혁운동에는 그것을 지도하는 세력과 주도하는 세력이 있는 한편 주류 운동이 있다. 각 계급·계층의 자주성 쟁취를 위한 다양한 내용의 운동들은 주류운동의 광범한 영향에 힘입어 성장한다. 광주민중 항쟁은 반미자주화를 부르짖는 민족해방세력을 한국사화의 주류운동의 자리로 올려놓게 된다. 그로부터 한 사회의 상부구조에 속하는 사상예술적 재부들이 민족해방운동사 안에 자리잡기 시작하는 것이다. 조정래 『태백산맥』 정도상 「친구는 멀리 갔어도」, 김하기 「살아 있는 무덤i과 노동작가들의 소설, 고은 「백두산」, 이산하 『한라산』.김남주 「조국은 하나다」, 오봉옥 『붉은 산 검은 피』와 노동시인들의 시, 그리고 백진기등의 통일 민족문학사를 향한 비평작업 등이 그 실례이다.
이러한 영향 아래 성장 발전하는 문학운동의 형태들은 1980년대를 통틀어 두 단계의 시기적 특성을 내보이며 정착한다. 대중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인천 5·3항쟁 때까지의 상반기와 6월 투쟁에 이은 7, 8월 노동자 대 투쟁을 통해 대중이 계급·계층운동의 실세로 등장한 이후의 하반기가 그것이다-
상반기의 문학운동은 세 갈래의 흐름을 타고 발전한다. 첫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민족 문학 작가 회의'로 간판을 바꾸는 문인들의 기구운동, 둘째 '5월시' '삶의 문학' 등을 위시한 동인운동과 무크지 출판운동, 셋째 지역문화운동과 현장 문예소모임 운동 등.
그러나 상반기의 이러한 흐름들은 광주민중항쟁이 남긴 두 가지의 고귀한 선물을 과학적으로 담보하지 못한다. 기구운동은 문인들의 선진적 활동을 통해 대중적 문예운동을 지도하려는 잘못을, 동인운동과 무크지 출판운동은 애초부터 매체확장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조직형태상의 한계를, 지역문화운동과 현장 문예소모임 운동은 문예의 사회적 의식으로서의 특성을 소중히 여겨 계급·계층운동과 결합하지 못하게 되는 잘못을 안고 출발한 탓이었다. 이 상반기는 대중적 문예운동의 모색기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반기의 문학운동은 상반기에 발생된 형태들을 뒤흔들며 세 가지의 새로운 경향을 형성시킨다.
우선 카프로부터 해방 후 문학가동맹에 이르는 흐름을 연상시키는 진보조직의 선전선동 부서의 성격을 가지려는 형태가 있었다. '노동해방문학'에 의해 제안된 '노동통신원제도' '보고 문학 창작단' 등의 편린이 그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1980년대 들어 활성화된 민중문화운동을 강화하면서 문화예술운동의 전위를 형성하려는 운동형태가 있었다.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각 지역 민중문화운동협의체들의 활동이 그것이다. 그리고 또한 각 계급·계층운동의 부분사업으로서 문예대중의 지향과 요구를 모아내려는 자주적 문예운동이 있었다. '서울지역대학생문학연합'을 비롯한 청년학생 문예운동, 전교조의'교육 문예 창작회', 각 지역 노동자문학회와 공장문예반 등 노동 대중의 문예운동이 그것이다.
평가와 전망
누구의 눈에도 1970년대 문학과 1980년대 문학의 차이는 놀라울 것이다. 10년 전에 비해 양적으로 질적으로 크게 변화한 한국 민족 문학, 그 밑바닥에는 앞에서 살펴본 광주민중항쟁이 낳은 문학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그 새로운 문학운동들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정치 사상적 입장의 차이를 이유로 그것 자체가 방기되어 있기도 하다. 그릇된 문예 운동관을 사상의 차이로 추상화시킨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고리 끼는 문예일꾼을 나라와 계급의 귀이자 눈이요 감각기관이라고 했다. 문예일꾼이 나라와 계급의 감각기관일 수 있는 까닭은 역시 문예의 본성에 있다. 문학을 인식의 도구요 사회적 작용의 무기가 되는 사회의식의 한 형태라고 정의한다. 인식의 도구라면 우선 만인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인식의 도구를 쥐어간다는 것, 여기에 문학운동의 일차적 사명이 있다. 다음으로 사회적 작용의 무가라면 그것은 응당 선전선동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이 역시 문학운동의 한 몫이다. 끝으로 사회적 의식의 한 형태라면 그것의 힘은 전적으로 계급·계층의 사회경제적 처지·조건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계급·계층운동과 구체적으로 결합되지 못한 문예일꾼들은 두고두고 '운동인가, 문학인가?' 하는 그릇된 문제를 늘고 고뇌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앞에 광주민중항쟁은 앞서 제기한 문제들을 두고두고 되풀이하여 제기할 것이다. 광주 금남로는 바로 이것을 가르쳤다.*
(『전남일보』, 1990.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