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있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세요.

DRAG
CLICK
VIEW

아카이브

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민중항쟁 주제 단편시리즈<4>/정도상의 '저기 아름다운 꽃 한송이'(월간예향, 1989. 6…

본문

정도상 의  '저기 아름다운 꽃 한송이'



  금남로에 쏟아지는 오월의 햇살은 가시처럼 따가웠다.
  목민 스님은 전일빌딩에서 금남로 2가의 황금다방을 향해 걸었다. 닷새후면 초파일이기 때문에 이것 저것 볼일을 보러 광주에 나온 김에 사촌동생을 만나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광주에 나와서 사촌동생을 안 만나고 암자로 돌아가기란 새벽 예불을 빼먹고 맞이하는 아침처럼 개운치가 않았다. 사촌동생은 승복을 입은 지난 세월동안 끝내 잘라지지 않고, 질기고 끈끈하게 이어져온 사바세계의 유일한 인연이었다.
  오늘따라 금남로에는 팽팽한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목민은 사바세계의 이 더러운 난장판따위엔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비상계엄 확대조치라는 엉뚱한 전국발전을 보며 목민은 이미 세상의 꼴을 알아버린 터였다
 
  -계 · 엄 · 해 · 제.

  갑자기 가톨릭 센터 골목에서 청년들이 구호를 외치며 떼지어 금남로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주변의 골목에 서성이던 청년들이 밀물처럼 도로로 밀려나와 순식간에 대열을 만들었다. 여기저기에서 박수가 터졌다. 목민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답답함이 툭 트이는 기분이었다. 자신도 역시 젊은 청춘의 시절엔 저 거리에서 뜨거운 핏덩이들을 토해낸 적이 있었기에 모른 척 지나가기에는 뛰는 가슴이 용납하지 않았다.
  "나무관세음보살."
  목민은 젊은 저들이 이기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전쟁이 끝나고 중이 된 이후에 가끔씩 사바세계에서 맞닥뜨리는 선을 위한 중생들의 지난한 투쟁에 선뜻 동참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항상 안타까웠다.
-타다다다다
거대한 잠자리 헬기 한 대가 금남로  상공에 나타나 군중들의 함성소리를 먹어치웠다. 목민은 얼굴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헬기에 새겨진 하얀색의 별이 가슴속 에워졌었다. 헬기는 금남로 위를 낮게 몇 번 돌더니 무등산 쪽으로 사라졌다. 헬기의 살기 섞인 소리가 멀어지자 옛날 많은 양민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암자 뒤의 대숲이 서로 몸을 비비며 슬피 우는 듯한 환청이 귓가에 머물렀다.
  "나무관세음보살."
  목민은 이마 위의 땀을 장삼자락으로 훔쳤다.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오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등짝이 끈적 하게 젖어 들었다.
  "시민여러분.! 전두환 일당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우리 모두 동참하여 전두환 군부일당을 몰아냅시다. "
  계엄철폐 민주쟁취, 주먹을 각단지게 내뻗으며 시위대는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시위에 참가하지 않는 시민들도 같이 구호를 외치며 열렬한 지지를 보냈단. 목민도 같이 하고 싶었지만 사촌동생의 신신당부가 떠올라 자제했다.
  "자네는 사람들 많이 모인 곳에서는 나서지 마소."  이승만 부정선거를 규탄할 때였다. 그때 목민은 온몸이 근질거려 참지를 못하고 암자에서 내려와 광주로 왔었다.
  "왠가?"
  "몰라서 묻소. 학생들 데모허는디 있다 잽히면 당장에 공산분자가 조종했다고 난리를 칠 판인디. 그렁께 자낸 그저 절에서 중노릇이나 하소. 산에서 안 잽힌걸 천행으로 알구."
  사촌동생의 말이 옳았다. 목민은 가톨릭 센터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 개새끼들 모두 죽여 .」
  갑자기 우체국으로 통하는 건너편 골목에서 공수부대 원들이 나타났다. 잘 훈련된 그들은 허수아비의 가슴에 총검을 꽂듯이 우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위대를 향하여 아무 거리낌없이 총검술을 하였다.
  -아악 악. 퍽. 따악.
  공수부대 원들은 시위대를 좇아가 무조건 곤봉으로 양어깨를 내려치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후려쳤다. 곤봉으로 맞은 머리에선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곤봉은 시위대의 머리 위에서 춤을 췄고 사람들은 도끼에 맞은 장작개비처럼 픽픽 나가 쓰러 졌다. 뿐만 아니라 공수부대 원들은 쓰러져 뒹구는 사람들의 배와 가슴을 향하여 정확한 발길질을 했다. 그것은 축구선수가 공을 찰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목민은 걸음을 멈추고 서서 이 광경을 보다가 눈을 감아버렸다.
  시위대는 오래지 않아 무너지기 시작했다. 맨 손으로 싸울 재간이 없는 탓에 그들은 골목으로  골목으로 울며 불며 도망쳤다. 검은 아스팔트 위의 검붉은 선혈과 쓰러져 뒹굴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입술로 짧은 숨을 헉헉 몰아 쉬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나무관세음보살, 금남로는 졸지에 아수라의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한 놈도 남겨두지 마 .!
  얼룩 무늬 복장의 그들은 골목 안까지 악착같이 쫓아가 아무나 잡고 개 패듯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자지러지는 비명과 흐느낌 그리고 살기 어린 욕설과 무자비한 살상행위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공수부대 원들은 서너 명씩 짝을 지어 미친 것처럼 날뛰며 청년들을 잡았다.  얼굴 가득 실개천처럼 피를 철철 흘리며 끌려온 청년들은 곧바로 포승에 묶여 트럭에 실렸다.  그들은 전쟁포로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  트럭은 짧은 시간 내에 가득 찼으며 어디론가로 떠났다.
  '비켜 개새끼. "
  왼쪽 어깨의 뼈가 부서지는 듯 했다.  눈알 가득 붉은 핏기가 번들거리는 공수부대 원이 목민의 양어깨를 곤봉으로 내려친 다음 정수리를 향해 곤봉을 쳐들었다.  목민은 순간적으로 몸을 피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허둥지둥 몸을 피해봤지만 곧 이어 휘두르는 곤봉에 따악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맞고 말았다.  목민은 카톨릭센터 정문 앞에 쓰러졌다.
  "야 이 새끼도 잡아가 .! '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졸병들이 와서 목민의 명치를 시커먼 군화발로 내질렀다. 헉, 일시에 호흡이 토막토막 잘려나갔다. 목민은 상체를 뒤틀며 땅바닥을 기었다.
  "일어나 개새끼야! "
  그들은 다시 뒷 굽으로 등짝을 내려찍었다.  목민은 새우등처럼 등을 구부려 몸을 보호해 보았지만 계속되는 발길질에 꼼짝없이 당할 뿐이었다.
  "여 여보시오..... 나 난 그냥 길가는 중일 뿌 뿐이요.........."
  목민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주둥아리 닥쳐 새꺄!"
  시커멓게 색칠한 곤봉이 피에 범벅이 된 목민의 머리를 내려치자 눈에선 불이 불었다. 그들은 목민의 팔을 뒤로 꺾어서 동구 청 뒤 공터로 끌고 갔다. 공터에는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잔인하게도 너울너울 춤추는 곤봉 아래서 어머니 잃은 병아리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개새끼, 중놈이면 산에 처박혀있지 좌빤다고 기어나와 ,! "
  뒤에서 공수부대 원이 엉덩이를 발로 차버렸다. 목민은 시멘트 바닥에 얼굴을 짓찧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야 너 이 새끼. 잘 지켜. 한 놈이라도 놓치던 너도 뼉다구 못 추릴 줄 알아. 알겠나?"
  목민을 끌고 온 공수부대 병사가 공터를 지키던 경찰에게 험악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예. 알겠습니다. "
  무궁화 잎사귀 하나만을 달랄 어깨에 얹어놓은 경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개새끼 목소리 봐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공수부대 원이 경찰의 뺨을 후려쳤다. 경찰은 뺨을 맞고는 고개를 숙였다. 경찰의 뺨 위엔 도장처럼 붉은 손자국이 곧 부풀어 올랐다
  "잘 해, 개새끼 .! '
  공수부대 원은 그 말을 남기고 또 다시 인간사냥을 위해 뛰어 갔다. 으으으‥‥‥ 끄윽.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잡혀온 사람들의 안색은 무청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대검에 찔렸는지 웃옷의 등판이 너덜너덜 찢긴 채로 붉은 피에 절여 있는 곁의 청년을 쳐다봤다. 뺨을 감싸쥔 청년의 손가락 틈새로 몽글몽글 피가 솟아 나왔다. 목민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참으며 이 자리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였다. 끌려가서 조사를 받는다던 큰 일이었다. 신원조회를 하면 전력이 드러날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얼씨구나 하며 이 사건과 연관을 지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항상 그래 왔다. 조금만 몰리면 이미 엮어 놓은 각본대로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으니. 사촌동생은 여전히 주거제한에다 보호관찰대상 이니까 목민 자신도 무사할 리 없었다. 저 지독한 놈들은 알면서도 기회만 노리고 있다고 사촌동생은 낮게 소곤거리곤 했다. 시민들과 같이 싸우고 싶지만 손해를 끼칠까봐 참는다는 동생이었다. 목민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도망갈 곳을 찾았다. 골목 마다 엔 이미 공수부대 원들이 있고 뛰어들 곳은 동구청 건물뿐이었다.
  "이이보씨요. 우우린 워치케 되된가?"
  누군가 울먹이며 경찰에게 물었다.
  "잘 모르겠구만이라.  알아서들 하시오. 나가 뭘 알것소이 "
  목민은 순간적으로 도망을 친다해도 뒤쫓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려. 이 자리에서 달아나야 해. 나 혼자 당하는 거야 겁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못 견뎌,"
  경찰이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목민은 벌떡 일어나 동구청으로 뛰어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래층은 상가였다. 한 눈에 피할 곳이 없어 보였다.  목민은 허겁지겁 이층 구청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사무실 안이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수숨겨주씨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애원 조로 직원을 향하여 부탁했다. 쉬잇, 젊은 직원인 손가락으로 입술을 막더니 말없이 벽 쪽의 철제 캐비닛을 열었다. 그가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목민은 생각할 겨를도 얼이 캐비닛 안으로 들어갔다. 철커덕 밖에서 자물쇠로 캐비넛을 잠가버렸다. 목민은 호홉을 가다듬었다.
  캐비닛 문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틈새에 눈을 갖다 붙이자 사무실 안이 한눈에 들어왔다 직원들은 모두 책상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 마디도 서로 건네지 않고 불상처럼 앉아 침묵 속에 빠져든 모습이었다. 갑자기 침묵을 깨뜨리는 어지러운 군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도망친 것을 눈치채고 바쁘게 찾아 나선 모양이었다.
  "야. 여기 땡중놈 안 왔어?"
  공수부대 원의 고함 소리가 쩌렁 울렸다.
  "아무도 안 왔습니다 . ! "
  목민을 숨겨준 직원의 옆에 사람이 일어나 대답을 했다.
  "정말이지? 만일 찾아서 나오면 여기 있는 니들도 싸그리 조지겠어."
  그들은 난폭하게 사무실 안을 뒤졌다. 쥐새끼 같은 땡중 새끼 어디 갔어, 라는 욕설도 들렸다.  와장창 사무실 집기가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야.! 나가자 없는 모양이다. 씨벌놈의 새끼."
  군화소리가 따그락 몰려나가자 사무실 안은 마치 다보암처럼 깊은 정적에 빠져들었다. 목민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오쇼. 공수부대 에기 들이 찾아 쌍께 옷을 갈아입고 가야 안잽히것소이. 요걸로 바꿔 입으쇼."
  아까의 젊은 직원이 민방위 훈련복을 한 벌 가져왔다 목민은 승복을 벗고 옷들 바꿔 입고는 삭발을 갖추려 민방위 모자까지 얻어 썼다.
  다시 거리에 나서니 가로등에 걸린 연등이 목민을 맞이했다.
  "나무관세음보살."
  사악한 욕망에 눈이 뒤집혀 살생을 서슴치 않는 이예토에 부처님은 오실 것인가. 부처님이 오신다면 아수라의 지옥같은 여기 예토도 잔잔한 호수처럼 평안할 것인지.  목민은 거리에 부셔져 뒹구는 연 등을 밟으며 공용터미널로 갔다.  아아 선이란 무엇인가? 다보암은 한낱 중일 뿐인 자신에게 과연 서방정토인가? 온갖 잡념에 시달리면서도 목민은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찔리는 사람들을 피해 버스를 타고 나주 다보암으로 향했다.  선과 악을 구분하기 이전에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는 본능이 앞선 구차함에 스스로가 미웠지만 어쩔수 없었다.
  부처 앞에 놓인 촛불은 끝없이 흔들렸다 장을 청해봤지만 온 몸을 옥죄어오는 아픔 때문에 정신은 날카롭게 살아 움직이면서 낮에 광주에서 겪었던 온갖 참상을 선연히 천장에 그려냈다.
  "나무관세음보살."
  잊어야 한다고 계속 되뇌었지만 헛수고였다. 목민은 나직히 다른 염불을 계속했다.
  나모라단나나라야야나말알야바로기제세바라야므디사다바야마하싱카야메다리 야‥‥‥‥
  전에 없이  탁한 음성이었다. 사바세계의 때가 묻은 탓이리라.  목민은 손을 합장하고 육신과 영혼의 아픔을 모두 이기게 해달라고 기구했다.  작은 티끌보다도 못한 속세의 더러움에서 벗어나 오직 나와 우주가 합일되는 열락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영생불멸의 참 생명을 가진 채 조용히 열반에 들게 하소서.  목민은 나한처럼 얼굴을 찌푸린 채 염불을 이어 나갔다.
  정신없는 염불 덕택에 미미하나마 마음이 울부짖으며 솟아오르던 격랑의 파도를 이기고 달빛 은은한 고요한 수명 상태로 빠져들었다.  목민은 이때다 싶어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도 오지 않고 오히려 광주의 금남로가 생생하게 펼쳐졌다.  곤봉에 머리가 터져 울부짖는 청년, 발가벗긴 채 끌려가는 사람들, 대검에 난자 당한 젊은 여자의 아우성 소리...  아아 어쩌자고 이러는 것인가?  목민은 벌떡 일어나 가부좌를 틀었다.  편안한 잠이 없을 바에야 차라리 화두를 무로 잡고 참선에 들 자정이었다.
  두 손을 단전에 모으고 주를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서도 안되었다.  그저 무상이면 좋으리 아무 것도 븐 것이 없고,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는 어느새 오소리 만한 독거미로 변해 거미줄을 쳐놓고 목민을 노려봤다.  갑자기 영규라는 속세의 이름이 떠올랐다.  영규라는 이름과 함께 지리산, 백아산에서 조국해방을 위해 아낌없이 청춘을 바쳤던 자랑스러운 동무들의 빛나는 눈동자들이 되살아났다.
  열 명 안팎으로 줄어든 대원들은 묵묵히 백아 산 골짜기를 걷고 있었다.  한 고개 한 고개를 넘어가는 기러기 떼처럼 한 발 한 발을 날쌔게 옮겨 놓았다.  백아산에는 어느새 가을이 오고 있었다.  입산하여 빨치산된지 벌써 4년이 지났고, 이제는 가을이 주는 공포도 알만큼 알아버렸다.  지독한 산중의 추위를 예고하는 가을, 낙엽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쌓이면 산은 벌거벗은 나체가 되어 가을의 고독에 온 몸을 떨었다.  대원들도 하나씩 둘씩 단풍처럼 졌다.
  가을의 백아 산골짜기는 바짝 말라 있었다.  불을 머금은 듯 타는 갈증을 달랠 물 한 모금 없는 계곡의 바위틈을 타고 가다가 머루줄기라도 발견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였다.  선도 떨어져 없고 비트도 보이지 않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영규동무! 물, 물이 먹고 싶어."
  들 것에 실린 대대장동무가 애타게 물을 찾았다.  총상에는 물이 극약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대대장동무가 야윈 손을 내뻗어 물을 찾다니,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숱한 투쟁을 용맹스럽게 치르며 오직 인민의 아들임이 자랑스럽다던 대대장, 영규는 그의 비장한 말들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었다.
  "조선의 진정한 애국자인 영용한 인민의 빨치산이여! 왜놈 대신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광부하고 있는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 민족 반역자들을 깡그리 쳐부숩시다  이것이 인민이 우리에게 내린 지상명령입니다."
  물을 달라고 조른지 얼마 되지 않아 대대장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주독립국가의 건설과 조국해방을 위해 열렬히 싸운 중년의 사내, 이름도 없는 무명전사가 미제와 싸우다 갔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같이 싸웠던 전사들도, 새도, 나무도, 그름도, 하늘도 울지 않았다.  온 가족을 몽땅 조국에 바친 그이기에 편안히 잠들었으리라.  이제 죽은 시신까지도 한 그루 나무 밑에 묻혀 애국의 꽃을 피우리라.  영규는 대검으로 나무 등검 밑의 땅을 팠다.
  "인민들은 언제나 옳았고, 우리는 인민들의 염원을 모아 싸운다. "
  대대장이 남겼던 말이 대검으로 땅을 찍을 때마다 불꽃으로 퉁겨 올랐다. 영규는 미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땅을 파 나갔다.
  간신히 한 사람을 묻을 수 있을 만큼의 땅을 파고 대대장동무의 시체를 쳐다봤다. 헝클어진 머리가 싸라기눈을 맞은 듯 새하얗다. 그러나 그것은 눈이 아니라 이 떼였다. 생명이 떠나간 몸이 싸늘히 식자 이 떼들이 몰려나와 머리에 달라붙어 끊임없이 구물구물 거렷다. 영규는 대대장의 다리를 잡아 끌었다. 울컥, 구토가 났지만 넘어오는 것은 없었다. 상체의 총알구멍에서 누리끼리한 진물이 심한 악취를 풍기며 흘러내렸다. 그냥 이대로 묻을 수가 없었다. 영규는 대대장동무의 옷을 찢어 총알구멍에다 쑤셔 박았다. 오랜 상처에는 구더기가 우글거렸고, 허물어진 살갗 때문에 간단한 염마저도 꽤 어려웠다.
  염을 끝내고 구덩이에 시신을 가지런히 눕히고 정성스레 흙을 덮었다.
  "잘 자시오. 인민의 아들 애국의 전사여 .! "
  영규는 마음속에 또 하나의 비목을 세웠다. 왜놈 대신 미군이 들어온 뒤부터 세우기 시작한 비목이었다.  화순에서 탄을 캐던 아버지가 어이없게도 해방1주년 기념식 날 미군의 무자비한 총질에 온 몸이 벌집되어 죽자 시작한 투쟁의 길에서 세운 비목은 끝이 없었다. 미군의 대학살 뒤에는 친일파의 웃음이 있었고 지주 놈들의 배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랬다. 미제놈들은 항상 조선인으로 하여금 조선인을 학살하도록 조종하곤 했다.
  영규는 대대장을 묻고 백아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끝내 총을 묻고 중이 되었다.
  목민은 화순의 학살을 떠올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 광주에서 지금 대학살이 진행된다면? 안돼.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애당초 미제와 그 주구들은 인간의 생명을 파리목숨 대하듯 해왔다. 식민지 지배를 위해서 라면 세균도 뿌릴 수 있는 그들이 아니던가.
  목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화두는 이미 사라져 없고 온갖 잡념만 가득했다. 목민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문을 활짝 열어 제꼈다.
  암자 밖에는 새벽이 내리고 있었다. 체불을 드리고 오늘 아침엔 산꼭대기에 올라 마음의 때를 걷고 싶었다. 목민은 부처를 향해 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제발 광주에 아무 일 없게 해 주십사하고 빌고 빌었다. 총을 묻고 목탁을 잡은 이후 처음 올리는 간절한 기구였다. 배를 끝내고 염원을 했다. 목탁소리는 새벽을 가로질러 멀리 멀리 퍼져갔다.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
아약향아귀 아귀자포만
아약향화탕 화탕자소멸
아약향수라 악심 자조복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올리는 염불은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를 이상스러울 만치 계속 반복했다.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 내가 만약 축생을 향한다면 스스로 지혜를 얻으리니.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 향축생, 향축생, 향축생‥‥ 목민은 땀을 뻘뻘 흘리며 향축생을 외쳤다.

탕탕탕탕탕
탕탕탕탕탕

  목탁을 잡은 손이 갑자기 빨라졌다 백아산을 포위하고 올라오는 토벌대를 향하여 정신없이 총을 쏘았다.  작은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쏘는 총 한 방 굻 방은 오직 인민을 위해서였다. 목민은 목탁이 총으로 느껴졌다. 향축생, 탕탕. 향축생, 탕탕. 목민은 목탁을 부처에게 던져버렸다. 향축생을 하는데 목탁이 무슨 소용이며 염불이 무슨 소용인가 사바세계와 멀고 먼 이 암자에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이 텅 빈 가슴에 남는 것은 무언가. 모두가 부질없는 짓. 목민은 옷을 갈아입고 허위허위 산을 내려 왔다.
  나주에서 버스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광주에서 나오는 차량들은 일제히 불을 켜고 위험함을 알렸다.
  "어찌끄나이? 우리 애기들이 광주에 모다 있는디."
중년의 시골아낙이 좌석에 앉아서 안절부절을 못했다.
  "어제 공용터미널에서 시체가 발견됐다등마 "
  젊은이 둘이 차창 밖에 시선들 던진 채 소곤거렸다.
  "큰 일은 큰 일인 모양인디. 글도 어째 광주엘 가야제."
  "시상이 수상허다 수상허다 싶등마 이게 뭔 일이당가?"
  아들이 광주에서 고등학교나 대학을 다님직한 아낙이 새파랗게 질린 채 끊임없이 괌주에서 나오는 차량들 살펴보았다. 혹시라도 자식이 타고 나오지 않은가 싶어 확인을 하겠다는 태도였지만 곧 이어 한숨을 깊게 내쉬곤 했다. 효천이 가까워지자 지렁이가 땅을 기어가든 버스의 속력이 뚝 떨어졌다. 손으로 턱을 괴고 무심히 창 밖을 내다보는 통로 옆자리의 젊은이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아무도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았고, 터질 듯한 침묵을 깨며 새어나오는 한숨만이 썩어 문드러지는 가슴을 달래주었다.
  효천에서 버스가 멈췄다
  "모다들 내려야것소이. 여그에서 더 갈 수가 없구만이라. 계엄군들이 백 운동에서 질를 막아부렀소."
  운전사는 간이정류장에 버스를 세워둔 채 담배를 뻐끔뻐끔 피웠다.
  "여기서 서불면 워치케 간다요? 글도 가는디 까장은 갑시다이 '
  새파랗게 질렸던 아낙이 허둥지둥 운전석으로가 더나가자고 애원을 했다.
  "아줌씨. 말을 고로를 못 알아묵소. 나가 질이 막혔다 안허요 시방."
  "뭣담시 질을 다 막는당가? 참 벨라기도 혀라."
  영규는 버스에서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효천에서 대촌면과 서창 면을 지나며 송정리에서 광주 가는 길과 만나는 지름길이 있었다. 영규는 그 길로 해서 가기로 작정했다. 효천 정류장 부근엔 벌써 광주소식이 검은 구름 몰려오듯 몰려와 퍼지고 있는 중이었다.  어서 광주로 가고 싶었다. 영규는 담배를 피우고 서있는 두 청년에게 다가갔다.
  "자네들은 광주에 안간가?"
  "가야지라."
  스물 둘 정도나 됐을 청년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얼굴에 점이 많고 가무잡잡하기도 해서 꽤 단단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곁에선 청년도 귓 부리가 보이게 머리를 단정히 깎았고 첫눈에 사내다워 보였다.  짙은 눈썹과 곧게 벋은 코, 약간 두툼해 보이는 입술이 영규를 편하게 해줬다. 도시에서 흔히 만나는 영악한 눈빛이 아니어서 더욱 좋았다.
  '워디 딴 질이 있다요?"
  "저기 경운기가 가는 질이 보이제. 저 질이 옛날 걸어 건 댕기던 질이여. 송정리쪽에서 광주로 가는 질과 만나제 어쩌?"
  "대영이 자네는 어쩔란가 ? "
  점이 많은 청년이 대영이란 이름의 청년에게 같이 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가세"
  영규와 두 청년은 효천에서 괌주로 향하는 지름길이자 사잇길로 들어섰다. 영규는 감회가 남달랐다. 옛날 유격대시절에 가끔씩 이용하던 길인 아니던가. 물론 중이 되어서도 옛 전투길들 많이 걸어봤지만 그것은 한때의 추억에 불과했고 지금 걷는 이 길은 추억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전사의 길이었다. 비록 맨주먹뿐이었지만 가슴속에서는 항쟁을 알리는 봉화를 쳐다볼 때의 뜨거움이 쿵쾅쿵쾅 솟구쳤다. 이제는 삼십 여 년 전은 젊은 전사가 아니고 늙은 전사였지만 온 몸을 도는 피는 여전히 젊고 젊었다.
  세 사람은 곧 밋밋한 야산 사이로 뱀처럼 뻗어나간 산길로 접어들었다. 멀리 논에서는 모내기에 여념이 없는 농민들의 구부린 등이 보였고 길에는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했다.
  "나이가 몇인가!"
  " 예.  돼지띠이구만이라."
  "둘 다?"
  "예."
  스물 둘쯤 됐으리라는 예상인 빗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대학생임에 틀림없었다. 차림새로 보나 외모로 보나 대학 2.3학년생일 터였다.
"어디 핵굔가?"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두 청년은 대답하기가 곤란한 듯 서로 눈치를 봤다.
  "공장에 다니는구만요. 이 친군 아세아 자동차에 댕기고. 나는 광천동에 있는 조그만 공장에 댕기지라."
  영규는 실수를 해버린 자신을 속으로 나무랐다.  젊은 친구들의 아픈 곳을 찔러버렸으니, 정작 자신도 인텔리 출신이기보다는 소위 기본계급인 소작출신이 아니던가.
  "미안허이, 고향은 워딘가?"
  "영암이구만이."
  "아하 월출산. 월출산 좋제. 자네들은 행복허것소. 좋은 고향이 있어서."
  영규는 죄책감도 있고 해서 조금은 과장스럽게 월출산 칭찬을 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묵묵히 결언가는 청년들이 희미한 웃음을 보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미 마음을 다쳐버린 청년들을 얼마나 다독거려 줄지는 알 수 없었다.
  "뭣 땀시 질이 막혔다는디도 광주엘 간가?"
  '출근도 혀야허고, 고향친구들 걱정도 되고 항께 가지라."
  영규는 마음이 든든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공장과 친구들을 보겠다는 청년들의 마음씨는 달콤한 향기를 길에 뿌려주는 아카시아꽃 같았다,
  광주는 생사의 기로에서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다.  농성동을 지나자 시내로 몰려가는 사람들이 부적 많아 졌다.
  "시상에 공수부대가 우리 애기들 씨를 말릴 작정인가벼."
  "아 애기들이 뭔 죄가 있어.  죄가 있다면 전두환 신현확 그 두 놈이제."
  대영이라는 청년이 어디엔가로 전화를 하고 돌아왔다.  영규는 광주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걱정스러웠다.
  "공장문을 닫았다는디, 데모가 거창하다는디 어쩌까이?"
  "글쎄."
  점이 많은 청년이 말끝을 흐렸다. 영규는 여전히 일을 찾지 못해 답답한 눈길로 텅 비어 가는 도로를 쳐다보며 시내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 때 영규의 눈에 작은 타이탄 트럭이 포착됐다.  타이탄 트럭의 범퍼엔 계엄철폐라는 구호가 적힌 광목이 펄럭거렸다.  구호는 대충 휘갈겨 쓴 탓에 간신히 알아 볼 정도였다. 그것을 보자 영규의 머리에 언뜻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붓글씨.  오랜 수도생활동안 배운 솜씨를 발휘하여 보기 좋은 플래카드를 많이 만들어 차량에 부착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이봐 자네들 나 허고 같이 일을 안할란가?"
  "예. 무슨일요?"
  영규는 눈앞에 보이는 건물에서 펄럭거리는 유치원 원아 모집 플래카드를 가리키며 일을 설명했다.
  "계엄 철폐같은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를 맹그는거여. 자네들은 나가 시키는 대로 허소."
  "경수 니는 어찔래?"
  "대영이 자네는 할란가?"
  "하지 뭐. 꼭 몰려서 같이 외쳐야 대몬가. 뒤에서 돕는 일도 해야제. 자네도 같이 허게."
  대영이란 친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규는 좋은 젊은이들과 같이 일을 한다는 게 몹시 기뻤다. 깊고 깊은 산에서 문득 동지를 만날 때의 기분과 너무도 똑 같았다
  영규네는 양동 시장으로 들어 갔다.  시장안은 파시무렵의 썰렁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으며 가게의 주인들은 끼리끼리 몇몇이 모여 시내의 소문을 주고받았다. 평소  같으면 근교에서 몰려온 시골 아낙들이 풋풋한 보따리가 거추장스러웠을 시장이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영규는 우선 포목점으로 갔다. 가게 안을 흘깃 쳐다보니 주인이 안보였다. 다른 포목점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데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달러왔다.
  "어서 오씨요. 뭘 보러 왔다요?'
  옅은 살색의 옷감에 장미를 큼직큼직하게 그려진 한복을 입고, 허리춤을 질끈 동여맨 주인여자를 보자 준비했던 말이 쑥 들어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저, 저....."
  "참 이상한 아저씨네. 그려 "
  '아줌마 광목 좀 얻으러 왔구만이라."
  경수 녀석이 영규 대신 대답했다. 얻으러 왔다는 말에 주인여자의 눈이 토끼 눈처럼 휘둥그래 커졌다.
  "비싼 광목을 얻어요이? 나가 당신들 언제 봤다고 그런다요."
  "그게 아니고요. 지금 시내에서 공수부대하고 시민이 싸우는디. 거 뭐냐 광목에다 글씨를 써서 들고 다니기도 허고, 차에다 붙이기도 허고 그럴라고 그러는디, 쪼께만 주세요."
  "그려라이. 글타면‥‥ 지달리씨요. 글씨 쓰는디는 광목 보담은 다우다가 좋은께. 나가 나가서 고놈들허고 쌈은 못허지만 좋든 일 한다는디 다우다 하나 못줄까."
  주인여자가 즉석에서 다우다 한 필을 건네줬다. 세 사람은 다우다를 들고 페인트 가게로 가서 붓과 페인트 그리고 신나 등을 얻어 양동 시장 앞 복개상가 공터로 갔다.
  두 사람이 다우다의 양끝을 잡아주면 영규는 능숙한 솜씨로 구호를 썼다. 그리고 페인트가 어느 정도 마르면 시위대들이 몰고 다니는 차에 부착했다. 영규는 허리가 버근하도록 기역자로 몸을 구부려 글씨를 썼다.  지나가는 시위대들의 의견을 들어 계엄철폐,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나라 등등의 내용으로 플래카드를 만들었고, 어떤 때는 버스의 옆면에 직접 구호를 적어 놓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시위가 격화하는지 양동 시장 부근도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분노하고 있었다. 공수부대 원의 잔인한 살육에 광주 시민전체가 치를 떨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일개 소대 정도의 공수부근 원들이 무작정 젊은 사람들을 추격했다.  앞에는 청년 4명이 죽자 살자 노점상들의 과일광주리를 뛰어 넘으며 시장 안으로 도망쳤다.
  "아악!"
  노점상을 하던 여인이 공수부대 원의 군화 발에 아랫배를 채여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곧이어 공수부대 원들은 과일 광주리를 사정없이 차버렸다.  광주리는 박살 났고 철 이른 참외가 군화 발에 짓이겨졌다.  주위에서 구경을 하던 노인들이 다가가 아주머니를 일으키려 했다.
  "이 개년놈 때문에 다 잡은 폭도를 놓쳤어! 저리가 늙은 꼰대야."
  '으윽. 헉."
  공수부대 원들은 고함을 지르며 곤봉으로 노인을 후려갈겼다. 노인은 썩은 짚단 쓰러지듯 피를 쏟으며 고꾸라졌다.
  "야 개새끼야. 아예 다 죽여라."
  도망을 치던 청년들이 돌아섰다. 그들의 눈에서는 파르스름한 살기가 내뿜어졌다.
  "아나 죽여라, 죽여 .! 새끼들아."
  청년들이 공수부대 원들을 향해 뛰어왔다. 공수부대 원들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달아나기 시작했다.
  "잡아라. 잡아."
  시장에 몰려 섰던 군중들이 공수부대 원을 둘러쌌다. 그들은 대검을 마구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대검에 찔리면서도 시민들은 포기하진 않았다. 결국 쫓기던 청년들이 공수부대 원 한 명을 잡아 양동 다리 아래에 무지하게 처박아버렸다. 더 이상 앉아서 죽임을 당할 수 없다는 시민들의 자위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처단이었다. 영규는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시내 전체에서 붙어오는 피바람의 역한 기운을 느렸다.
  아니나 다를까 시민들이 엄청나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하늘은 점점 검붉은 구름으로 뒤덮여 갔다.  영규와 경수 그리고 대영은 얻어왔던 다우다가 다 떨어지자 작업을 멈추고 지나가는 시위대 차량을 세워 플래카드를 계속해서 붙였다.  오후 여섯시 쯤 되니 플래카드도 바닥이 나고 없었다.  세 사람은 잠시 쉬고 난 뒤 상의 끝에 금남로 시위대에 합류하기로 했다.
  검은 구름이 무겁고 낮게 광주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땅거미가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거리 곳곳에 드리울 때 쯤 가랑비가 내렸다.  하루 종일 살육과 생명을 건 투쟁의 잔해가 나뒹구는 금남로에도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부서진 공중전화 박스, 산산 조각난 유리조각, 화염병의 파편들, 깨어진 보도블록, 자욱한 안개처럼 거리를 떠나지 않는 최루가스, 죽어버린 가로등 위에 비는 추적추적 내렸다.  영규는 비 내리는 어둠 속에 서서 악마가 점령한 금남로를 바라보았다.  근처의 주민들 역시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어둠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도청 앞을 아무 말 없이 응시했다.  비는 광주가 흘리는 눈물이 되어 모든 시민들의 가슴에 밤새도록 내렸다.
  다음날 세 사람은 헌혈운동과 환자수송을 하기로 하고 적십자병원에서 짚차를 한 대 배정 받았다.  흰 가운을 걸치고 팔에는 적십자 완장을 찼다.  짚차에도 적십자 깃발을 달아 중립임을 아렸다.  어제, 그러니까 19일부터 시내의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 중환자가 계속 실려왔다.  계엄군의 트럭에 실렸으면 오래지 않아 죽을 사람들이 간신히 병원까지 왔지만 피가 모자랐다.  그들은 수술도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응급실에서 죽어 갔다.
  영규는 짚차의 앞좌석에 앉아 확성기로 헌혈을 호소했다. 어제 내린 비는 아침까지 계속 내렸다.  시민들은 비를 맞으며 시내 중심가로 몰려들었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비장한 항쟁의 대열을 보며 영규의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영규는 되도록 시위의 중심지역인 금남로 외곽지역에서 헌혈운동을 했다.  그 덕분인지 병원마다 에는 헌혈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기다렸다.  영규는 하루종일 정신없이 쏘다니며 일을 했다.
  초파일이었다.  거리의 연등도,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하는 대형아치도 처절하게 짓밟힌 초파일이었다.  광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여전히 목민이었을 영규는 새로운 감회로 이 날을 맞이했다. 어젯밤 온갖 추악한 어둠을 몰아내는 거대한 불길을 본 후부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인민이라는 말을 되찾은 영규였다. 아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시민이면 어떻고 인민이면 어떠랴. 문화방송국을 태워 밤하늘을 밝게 뒤흔들며 찬란한 항쟁을 띠 끌어가는 시민들의 힘에 다만 한 마디의 찬사를 더 보낼 수 있을 뿐이었다. 끝없는 죽음을 딛고 일어서 마침내 처 정의의 세상을 열어 가는 무명의 시민들에게 영광을.! 영규는 부처가 왔다면, 부처는 다름 아닌 저 싸우는 사람들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말장난에 불과했다.
  계엄군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새끼의 발악처럼 층을 쏘기 시작했다. 영규는 적의 총으로 무장하는 시민을 보면서 승리를 예감했다. 그 승리는 이미 예정된 법칙일 뿐이었다.
  짚차를 물고 다니며 영규와 두 명의 청년은 환자를 수송하기에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하루종일 전대법원, 적십자병원. 기독교병원을 드나들며 수송을 했지만 환자들은 끝이 없었다.
  영규는 오후 늦게 전대병원을 출발해 구 시청을 좌회전하여 서서히 짚차를 몰았다.
  "여보시오. 사람 살려요."
  한 아주머니가 울부짖으며 차 앞에 뛰어들었다. 영규는 차를 세웠다.
  "저고 골목 안에 우리 애기들이 총에 맞아 죽어가는디 싸게싸게 살려주시오."
  영규는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두어 발자국 간격으로 세 명의 청년이 쓰러져  있었다.  몸을 꿈틀거리며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는 청년도 있었고 이미 숨이 끊어진 듯 움직이지 않는 청년도 있었다.
  "쩌 안에 계엄군이 있단가?"
  "저 잔인 무도헌 놈들이 숨어서 우리 애기들 다 죽이고 일소. 뭔 철천지 원수라고 집에 오는 애기들헌티 총질이여 총질이. 아이구 아저씨 싸게 손 좀 쓰시오. 지발."
  아주머니가 폴짝폴짝 뛰었다.
  "아저씨 ! 그냥 갑시다. 공수부대 원이 철거를 한 뒤에나 워치게 손을 쓰든지 해야 쓰것 구만이라"
  "안돼.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어. 설마 지들이 적십자 봉사요원을 쏠라디여. 안심 놓고 환자를 수송하자."
  영규는 경수를 안심시켰다. 대영이도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삐쭉이 내밀었다. 영규는 대영의 어깨를 툭 치며 힘을 북돋아줬다. 그리고는 골목어귀로 들어 가 손 나팔을 만들어 고함을 질렀다.
  "계엄군 여러분 ! 우리는 비무장 적십자요원입니다.  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환자가 생겼으니 잠시만 협조해 주십시오."
  짚차를 거꾸로 돌려 골목으로 서서히 진입시켰다. 적십자를 표시하는 붉은 십자가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영규는 골목에서 제일 가까이에서 번들거리고 있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대영이와 경수는 청년의 다리를 잡고 영규는 머리 쪽을 잡아들고 짚차로 옮겼다. 서너 발자국 환자를 옮겼을 때 천지를 진동하는 총소리가 들리더니 대영과 경수가 픽픽 쓰러졌다. 그러자 갑자기 놀란 운전사가 전속력으로 짚차를 몰았다. 타다다다 연속 사격 음이 들리고 영규도 쓰러졌다. 두 발의 총알이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간 듯 피가 콸콸콸 뿜어졌다. 마음이 편했다. 참선 중에 스르르 잠이 드는 것처럼 자꾸만 눈이 감겼다.
  '인민들은 언제나 옳았고 우리는 인민들의 염원을 모아 싸운다.'
  귀에 쟁쟁하게 울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참선에 열중하던 찾아오는 열락의 새소리처럼 맑고 고운 목소리가 울린다.
  영규는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꺾었다. 광주가 해방되던 날 사월초파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