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항쟁 이후의 문학. 황석영(창작과 비평, 1988. 겨울)
본문
항쟁 이후의 문학
황 석 영
(1988년 10월말의 어느 날, 나는 아들 세대가 될 만한 어느 젊은이와 마주 앉았다. 이 글은 그 밤의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정리해본 글이다. )
문 작가는 일차적으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의 여러 가지 국면들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눈'에 오늘이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 한번 점검해보시죠.
답 요새 연대별 구분을 좋아들하니까 나도 팔십 년대라는 용어를 써보기로 할까요? 사실 십 년 단위의 구분법은 전후에 저널리즘, 주로 신문과 대중잡지에 글을 쓰던 수필류의 비평가들이 만들어냈고 실은 일본식이죠. 예전부터 동양에서는 한 세대를 삼십 년씩 묶어서 얘기하기도 하지만 나는 대강 동시대를 백년쯤으로 잡고 있어요. 언젠가 말했듯이 3,4대가 찬 집안에 사는 일이 종종 있더군요. 실제로 호남에 살 적에는 의병투쟁을 겪은 증조부와 유신치하의 대학생 증손자가 함께 살고 있는 가정도 봤지요. 외국잡지에서 베트남 반전 포스터를 본 적이 있는데 어느 농촌 가정의 4대에 걸친 투쟁과 죽음과 이별의 역사를 나타내는 가족사진이 도표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걸 봤습니다. 하여튼 우리 시대는 크게는 반제자주화 투쟁의 백여 년에 걸친 근대사 속의 한 과정이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분단시대'입니다. 아마 뒤에 문학사가들은 우리들의 작품을 분단시대의 문학이라고 분류할 테지요. 분단의 기점을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오던 '해방'의 날로부터 잡고 있는 학생들의 생각은 올바른 것입니다. 이미 그때부터 또 다른 민족해방을 위한 전쟁 상황에 들어갔다고 보는 견해이지요. 실로 미군정에서 6·25 직전까지 수십만의 무고한 민중이 죽고 다쳤으니 까요. 대개 이 분단시대를 시기별로 나누어 본다면 해방에서 남한 단정수립까지 제 1기, 남북정권 수립에서 전쟁까지 제2기, 전후에서 4·19, 5·16까지가 제 3기, 유신시대에서 광주항쟁까지를 제4기로 나누어 볼 수가 있겠고, 지금은 광주항쟁을 분수령으로 하여 항쟁이후 시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 1기가 미국의 교묘한 점령정책에 야합한 친일극우세력이 남북분단의 실질적인 토대가 되는 반민족적 정권을 세운 시기라면, 제 2기는 미국이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했던 '한국전쟁'(그 두 번째는 베트남전쟁이었음)의 결과로 2차 대전 뒤의 세계적 패권을 유럽 대신 행사하게 되었던 냉전의 시발점이며, 태평양 방어의 군사기지로 남한을 사용할 사실상의 기득권자로 행세하기 시작한 시기일 것입니다. 제 3기는 미국이 남아프리카와 베트남과 필리핀에서 언제나 저질러오던 그대로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군사파쇼 정권을 세워서 신 식민지적 질서를 정착시키던 시기이며, 제4기는 이것의 심화된 기초 위에서 분단고착화 내지는 예속화 정책을 추진하던 미국과 그 추종세력인 매판독재세력에 대한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인 민중의 항쟁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무엇보다도 광주항쟁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한반도의 분단은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 사이의 대립이나 남북 동포들간의 이념적 갈등에서가 아니라, 바로 미국의 동북아전략에 따른 간섭과 지배 때문이라는 뼈아픈 깨달음이었습니다. 군사파쇼 정권은 바로 외세가 창출한 것이었습니다. 광주에서 봉기했던 항쟁지도부는 이 점을 눈치채고 이란에서의 방식대로 미국인을 인질로 카터 행정부와 밀고 당기면서 군사정권의 퇴진과 계엄군의 철수와 식량수송을 요구하면서 투쟁을 지속시킬 계획도 세웠지만, 역시 당시로서는 대중들의 정치의식에 한계가 있다고 여겨서 결행하지 못했습니다. 광주에 살던 미국인들을 일단 미 공군기지 안으로 대피시킨 미대사관의 조치는 그쪽에서 먼저 이러한 점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도둑이 제 발이 저리다는 경우지요. 항쟁 이후 시기인 지금은 놀랄 만큼 성장한 민중적 역량에 몰린 외세와 추종세력이 개량국면으로 시간을 끌면서 남북교차승인이니 유엔 동시가입이니 하는 식으로 남북의 영구분단을 세계적으로 합법화시키려 하곤 있습니다. 한 ·미 ·일 안보조약에 의거하여 동북아에서 핵전쟁에 대비한 대대적인 군사훈련으로 북을 위협하면서 모든 전쟁장치들을 제거하지 않은 채 남북의 분열 고정화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88민족문학선언' (88서울 민족 문학 제, 1988.9.1,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외세를 몰아 내는 일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선언이며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부와 삶의 조건은 점점 변혁을 까다롭게 하고 있습니다. 가축을 기를 제 함부로 잡아먹지 않고 적당히 성장시키고 살을 찌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예속 독점자본도 나름대로의 광범한 재생산구조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현재의 개량적인 민주정부 형태의 준 민간 ·준 군사 파쇼정권입니다. 마치 야누스의 얼굴이지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지금과 같은 폭발적인 민중의 요구를 달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통치 기술자들도 그 동안에 미국을 통하여 풍부한 경험과 숙련을 쌓았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임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에 둑이 샐 때는 점진적이지만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균열이 퍼져 나가고 걷잡을 수 없는 붕괴가 여기저기서 시작되면서 드디어 일시에 무너져버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 변혁의 단초를 촉진시키고 널리 대중화시켜서 모든 동포들로 하여금 분단의 벽을 허물어뜨리도록 급진화시켜야 합니다. 어느 우국 노인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 동안 온갖 장애와 시련으로 꾸물거렸으니 급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급히'라는 말에는 여울물이 그러하듯이 물의 양과 힘이 거 세차야만 가능하다는 의미도 들어 있음을 잊을 수가 없겠지요. 지금 항쟁이후 시기의 문학은 매우 중요한 전기를 맞고 있습니다. 변혁을 위해서는 사회변혁의 주체와 동조세력과 적을 알아야 하고 척결대상과 목표를 정해야 하며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방한사회의 성격을 파악해야 합니다. 통일된 뒤에 분단을 극복하려 몸부림쳤던 시대의 기념비로서 굳건히 설 수 있는 위대한 산문으로서의 장편소설을 요구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당도해 있습니다.
문 분단시대의 문학과 요새 평론가들이 말하는 '분단문학'은 같은 의미인가요? 다르다면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답 전자는 조국이 분단된 현재 한반도 남쪽 살이의 모든 삶의 모습을 그리는 이 시대의 문학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규정의 말하고, 후자는 예를 들면 6.25를 그린다거나 이산가족 문제나 실향민을 노린다거나 미군 문제를 다룬다거나 하는 식의 분단의 직접적 소재를 들어서 일컫는 말인 듯합니다만, 말의 의미상으로도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통일을 위한 문학이라면 몰라도 하필이면 분단문학이라니 그게 뭡니까. 시쳇말로 노동자문학이다 반미문학이다 반전 반핵 문학이다 분단문학이다 하는 데서 더 나아가 끝에다 문제를 불이기도 합니다. 무슨 소설이야? 하면 응 민주노조 문제야, 라거나 어떤 소설인데 ? 하면 강제징집 문제, 반미 문제, 선거투쟁 문제하는 대답이 비일비재합니다.
문 그런 말씀은 따로 소설 얘기를 할 때에 자세히 해주시죠. 우선 지난 몇 년 동안에 산문의 침체에 비하여 장시를 비롯한 시가 대량생산되었으며 독자층도 많이 늘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자만할 일만은 아니겠고 부정적인 측면도 있겠지요.
답 글쎄요, 많이 인지를 못해서 일일이 열거하며 말할 수는 없지만 한데 싸잡아서 얘기한다면 몇 가지의 새로운 성과와 지적할 점은 있겠습니다. 시를 쓰지는 않지만 관심은 많습니다. 시의 순발력과 함축성은 부러운 특성입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광주항쟁의 비극을 읊은 여러 시들이 있었고, 김지하의 사상적 편린을 설파한 시적 산문집이 있었고, 신경림의 『새재』와 특히 그가 몇 년 동안 발로 쫓아다니며 실천하고 체득한 민요 시들이(「목계 장터」같은 유의) 기억납니다. 또한 고은의 『만인보』와 일련의 왕성한 시작들이 계속되었고, 박노해의 시집과 김용택의 시집이 나왔지요. 무엇보다도 기억할만한 것은 김낭주의 옥중시집이 두 권이나 나온 일이며 최근에 나온『조국은 하나다』라는 시집은 항쟁이후 문학의 당당한 진전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엔 별로 기억이 안 납니다. 비슷한 시들을 너무 많아 읽었다고나 할까요? 참, 베스트셀러 시집이 두 권 있었군요. 『접시꽃 당신』하고 『홀로 서기』였지요. 지난 몇 해 동안 너도나도 시를 썼고, 새로 인사하는 젊은이에게 뭘 하냐고 물어보면 영락없이 시를 쓴다고 대답들 하더군요,(그것이 요즈음은 소설 쪽으로 바뀌었지만) 어쨌든 생산이 많아진 것은 좋은 일인데‥‥‥ 광주 직후에 쏟아져 나왔던 비탄과 분노의 시들은 당연하기는 했지만 어느 젊은 평론가의 표현처럼 그를 극복하고 항쟁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하려는 게 아닌 '비극의 상투화' 같은 점도 엿보입니다. (무등산을 이놈 저놈 한 삽씩 떠가는 바람에 이러다가는 광주에서 무등산이 없어져버리겠다는 문병란의 농담, 무등산은 다 알고 있다 더만 하는 송기숙의 농담)비탄과 속죄의 넋두리는 그야말로 변혁운동의 불꽃에서 비켜선 소시민적인 자의식입니다. 이 비극의 넋두리와 일상적 실천이 빠져버린 느닷없는 전투적 구호의 결합이 팔십 년대 중반의 민중시들을 상투화했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행사시의 효용성과 미덕은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동어반복, 어디서 본 듯한 시구의 계속적인 나열, 표어 같은 낱말들, 번역투의 구절 따위는 없어지고 그야말로 현장감 있고 감동적이며 보편적인 정서를 일으키면서도 신선 한 시라야 하겠지요. 전쟁 뒤에 초토화된 후방에서 널리 불렸던 '엘레나로 변한 순이' 같은 유행가에서 우리는 행사시가 어디에 출정을 맞추어야 하는 가 하는 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시를 두기로 삼건 설전의 도구로 활용하 던간에 일차적 목표는 어떻게 하면 대중의 가슴에 스며들듯이 정서를 전달해서 변화시킬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역사적인 주제를 곧잘 다루게 되는 장시의 경우에 우지 시의 전통적 율격과 분위기를 통하여 구성을 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겠지요. 그러나 소설과는 달라서 장시의 경우에는 당대 사람들의 자상한 생활의 구체적 묘사나 시대상에 제대로 나오기란 어려운 노릇이 지요. 모르기는 하여도 장시가 공연물로 변했을 때에(시극, 오페레타, 노래 극, 창극. 판소리) 서사적 구실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연작시를 장편 서사시로 볼 수는 없겠지요. 솔직히 그 동안 유행적으로 쏟아져 나온 장시들을 읽기가 괴로웠던 게 사실입니다. 어떤 것들은 자료를 짤막짤막하게 나열한 것으로 그친 작품들도 있었지요. 또한 시가 생산의 풍요로움을 구가하고 있을 적에도 아류가 시인 스스로에 의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느 동양화가의 가짜 그림이 남발되고 이어서 모사 한 범인이 잡힌 일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정말 화가의 낙관이 찍힌 그림이 진짜인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진짜를 살지 안고 진짜를 노래하지 않은 시는 아무·리 전투적이고 민중적이라 해도 남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박노해의 「손무덤」 이나 김용택의 『섬진강』, 김남주의 옥중 시에는 그들의 삶이 핏빛으로 직조되어 있습니다. 민중시의 상투화와 아류의 대량생산이 오히려 반작용을 해서 『접시꽃』과 『홀로』가 수십만 부나 팔렸습니다. 그 시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한방 먹은 것입니다. 항쟁이후 시기의 시운동에서 대단히 중요한 업적은 '노래운동'입니다. 실로 수백 곡에 달하는 가요가 대학과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초반의 노래들도 상투적 투쟁가류의 곡이 많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두박자의 숨가쁜 박수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일색이었고 만주 독립군의 유장한 노래도 대번에 빠른 행진곡으로 바뀌어버리고는 했습니다. 지난 얘기 하나 해볼까요? 83년 봄이었군요, 광주 운암동의 내 집 이층에서 나는 '문화패 광대'의 잔여 활동가들과 '자유광주'라는 방송국을 차렸습니다. 방송국이란 다른 게 아니라 한 달에 한 개씩의 카세트 테이프를 제작해서 배포하는 일이었죠. 그때 세 번째 만든 물건이 항쟁에서 죽은 남녀를 주제로 한 '넋풀이'라는 거였는데 그 주제곡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그 외에 '에루아 에루얼싸' 같은 곡도 있었는데 내가 일인 십역을 할 때라 가사도 전부 내가 썼지요. 지금은 다른 사람 작사로 알려져 있더군요. 처음엔 국악이나 유행가 비슷한 단조의 느린 곡이었는데 김종률이란 후배가 만든 곡이에요. 이게 나중에 보니까 대단히 빠른 곡으로 변해 있더군요.
문 시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본업이신 소설 얘기를 좀 해보시지요. 그 동안의 소설의 부진에 대해서는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음 직한 문제니까요.
답 남의 욕은 잘하면서도 막상 자기 얘기를 하라면 말문이 막히는군요. 우리가 쉽게 남의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지면이 계간지나 잡지들인데, 장편은 연재중일 때엔 잘 읽지 않습니다. 더구나 신문 지면은 거의 읽는 경우가 드물고 책이 나온 뒤에야 읽게 되지요, 팔십 년대 전반기의 얼어붙은 것 같던 반동의 시기에 소설이 당대의 상황을 즉각적으로 받아내지 못한 점은 미처 당대를 소화할 수 없었던 작가들의 역량의 한계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어느 사실이 소설로서 재구성되는 데는 일정한 거리와 시제의 차이가 불가피하다는 점도 있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당시에 소설 쓰기가 위축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군요. 그보다는 차라리 그때에 문단에서 문학적 쟁점의 정리 역할을 하던 몇몇 잡지들이 폐간되면서 찾아든 공동화 현상도 있었을 테고, 하여튼 단편밖에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가 지금 알고 있는 여러 장편소설들이 그 무렵에 잡지나 신문에서 연재중이었죠. 당시 ·사정으로는 여러 사회운동결의 기관지나 팜플렛에 나온 파쇼정권의 폭로기사며 르포가 당대를 감당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이를테면 민언협의 『말』이라든가 활동가들의 현장수기 등입니다. 이들 르포, 수기, 선언문, 폭로기사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매우 유용한과도적 문학의 역할을 해냈습니다. 내 경우에도 칠십 년대부터 작품을 쓰는 한편으로 현장 문화운동에 참가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종류의 글이며 현장 집체창작물들을 수없이 쓴 셈입니다만, 84년 겨울에 광주 '전사협'의 위촉으로 기록한 광주항쟁보고서는 당시의 상황을 대중적으로 격앙시키는 촉매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글들은 일종의 유인물처럼 빠른 시일 안에 널리 전파시켜야 하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도 강렬한 사건, '문제점의 즉각적 해석, 전형적인 틀 따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도적 단계에서 신인들의 소설작업이 슬슬 가동되기 시작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당시에 진행되어왔던 활동가들의 폭로 물이 지녔던 유용성과 한계를 그대로 지닌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소설이 문제점의 추적만은 아니거든요. 역시 이즈음의 작품으로는 윤정모의 「님」이 기억나고 문장의 힘과 밀도가 있는 신인 정도상이 생각납니다. 선배 작가들의 작업도 왕성하지는 않지만 계속되고 있지요? 박태순과 현기영의 중단 편은 여전히 제 몫을 하고 있으며 이호철의 인물연구 연작은 매우 인상적인 소재였는데 이어지지 않고 있지요. 김원일이 장편을 내놓았고, 박범신의 연재도 재미있었지요.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찬반 논란이 각각이지만 그만큼 무게가 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관점에 차이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은 신인들의 창작역량이 성장하고 있지 않은 점이에요. 여간해서 눈에 확 들어오는 새로운 소설가가 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소설은 가슴에서 퍼내는 것이지 뇌 세포에서 분석해내는 것이 아니하거나, 소설은 동시대 사람들이 들어가 사는 집이라거나 하는 말들은, 소설이 일차적으로는 작가 자신을 포함한 여러 인생들의 그럴듯한 이야기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뒤에 사회과학의 연구대상이든 활동가의 운동 소재든 찾아볼 사람은 찾아 내보라는 거예요.
문 노동자나 농민들 자신의 소설이나, 또는 전문작가와 그들과의 공동창작에 관해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는데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답 글쎄요, 좀 오래되었지만 유동우, 송효순, 석정남, 장남수 등의 수기가 생각납니다. 그 외에도 내가 호남에서 연구소를 운영할 때 각 노동 ·농민 운동권의 단체에 협조요청을 해서 일종의 민중자서전을 모아 팜플렛으로 내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글은 소설과는 다르게 감동을 줍니다. 그런 글은 바로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책으로 열 권'이라는 말처럼 일반 민중들의 어려운 삶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감동이죠. 부르주아 작가들의 경우 실감이 없는 인생을 사는 경우가 더욱 많기 때문에 아무리 기술이 훌륭해도 거짓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고 또 사실 재미도 없거든요. 외국에서는 도시인류학 쪽에서 이런 수기들을 여러 가지 기록해서 내놓았고 우리에게도 몇 가지 소개가 됐지요. 그러나 민중수기는 엄밀히 말해서 소설의 원자재는 되어도 그 자체가 소설은 아닙니다. 노동자·농민 작가라 할 때에 언뜻 이택주나 윤기현이 떠오르지만 소설에서 작자의 출생이나 계급성분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어떤 소설을 썼느냐 하는 계 중요하겠지요. 또는 젊은이들 말로 학출 노동자 중에 소설을 쓰겠다는 사람도 맞겠지요.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소설창작이 원자물리학도 아니니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과, 더 욕심을 내본다면 인생관에 변화를 줄 수 있는 힘을 지닌 소설을 쓸 수 있다면 말이지요. 공동창작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 논의가 창작을 해본 자랑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기보다는 주로 비평을 공부한 사람들이거나 활동가 지향이 강한 쪽에서 나왔지요. 공동창작에 맞는 일감들이 있고 맞지 않는 일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칠 십 년대 말부터 현장 사람들과 갖가지 촌극과 마당극의 대본들을 짰는데 언제 시간이 나면 그때의 자료들을 가지고 공동 창작론을 써 볼까도 합니다. 연화의 경우에 제일 먼저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대하여 토론을 합니다. 그 현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점들을 뽑아내어 전체 이야기 줄거리를 대강 엮어봅니다. 이야기를 몇몇 장면으로 나누고 사건과 인물을 정합니다. 각 장면들을 연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그룹별로 맡기고 보완시킵니다. 어느 부분은 전혀 달라지기도 하고 예상 밖의 훌륭한 새 줄거리가 첨가되기도 합니다. 하여튼 장시라든가 연희대본 등은 공동창작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설은 매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소재와 주제를 정하고 구성을 하는 데까지는 여럿이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대목을 토막으로 나누어 분담하는 데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선 사람마다 문체와 문장의 맛이 틀립니다. 연희에서는 각 등장인물이 자기에 맞게 대사를 말하고 몸짓을 하게 되지만 소설에서는 이 모든 것을 쓰는 사람이 묘사해내야 하기 때문이죠. 또한 중요한 절은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내면은 복합적이지만 사건에 대응하는 성격의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이런 치밀한 것들을 여럿이 일치시키기는 불가능합니다. 전장에서는 어떤 사물에 관심을 보였다가도 필자가 바뀜에 따라 다른 쪽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사실 문체라든가 문장이라든가 하는 말은 한 단어 어느 글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첫 줄에서 마지막 구두점이 찍힐 때까지의 소설 전체가 갖는 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만 필자는 하나고, 주제를 정하는 데서부터 마지막 추고과정까지 토론에 참가할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창작을 할 수는 있겠지요. 북한의 몇몇 젊은 집체창작단이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에 한해서만은 나는 공동창작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테마가 주어진다면 아무래도 그 틀에만 맞는 인물과 사건이 정해 질 테니까요.
문 요즈음 해외동포 지식인들이나 작가들의 작품이 여러 가지 출간되고 있습니다. 사실 세계 각지에 흩어진 동포들이 어림잡아 사오 백만이 되는 것 같은데요, 그 중에 미국 · 일본 ·중국 ·소련에 제일 많이 집중되어 있다지요. 이들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이고 역사적으로 서로의 이해관계가 우리와 얽혀 있는 나라들입니다. 당신은 역마살이 아주 센 걸로 아는데 밖에 나가 서 여러 분들을 만나셨지요? 동포들 근황이나 전해주시죠.
답 요새 나온 글이나 책을 쓰신 분들과는 몇 년 전에 만나서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된 사람들도 있어서 내심 반가워하고 있었습니다. 85년이었지요, 그때 베를린에서 제 3세계 문화재가 열려서 가까스로 빠져나갔다가 일년이 넘도록 유럽, 미주, 일본을 거쳐서-중국 쪽에는 연변과 북경대학에 연줄이 닿아 입국을 기다리다가 - 돌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국 ·일본·중국· 소련에 동포 이민들이 몰려 있지요. 저들의 이민 사는 그대로 우리 나라 현대사의 일부입니다. 또한 어떻게 보면 저들이야말로 앞으로 한반도의 통일운동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해외 전윈 세력이지요. 사연도 갖가지, 계층도 각각, 정치성향도 다르지만 그분들은 모두가 남북의 통일을 절절히 소망하며 통일된 내 나라에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기판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더욱 애간장이 타는 거나 마찬가지죠. 더구나 조국의 통일문제는 밖에 나가면 더욱 절실하고 모순 점들이 아주 훤히 보입니다. 해외동포들의 민주화 통일운동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촉진시키고 조직화 시켰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대사관으로부터 용공분자, 반 국가분자, 기피인물 등의 온갖 협박과 수모를 받아가며, 은밀하게 국내의 정치범 뒷바라지를 하기도 하고 직접 밖에서 여론을 형성할 신문 ·출판물을 제작하거나 동포들을 조직해서 현지에서 항의하고 정치 쟁점을 만드는 등의 애타 는 노력들을 많이 해왔지요. 독일에서는 윤이상 선생을 비롯한 민협 식구들과 만났는데 모두 공산주의자 취급을 받고 있어서 만나기가 곤란할 때였습니다. 그들의 고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지난 봄에도 윤 선 생이 판문점에서의 평화음악제를 제안한다면서 남한 시인들의 가사로 작곡한 교성곡과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광주여 영원히」라는 교향곡의 테이프를 주면서 여론을 환기시켜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문익환, 백기완, 고은, 문병란, 김남주 같은 분들의 시를 한 흐름으로 연결한 가사였습니다. 테이프를 여러 개 복사해서 각계에 나누었습니다만, 음악제가 꼭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작정입니다. 얘기가 옆으로 샜는데요, 미국에서는 광주에서 나와 함께 현대문화연구소를 운영하던 윤한봉이 미주 한청련 조직을 끌고 나가고 있지요. 그는 지금 제3세계 활동가들과 연대하여 반핵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80년 광주항쟁 때에 서울로 도피해 있었는데‥‥‥ 참, 이런 자리에서 숨은 얘기 하나 합시다. 서울에서 소설가 윤정모가 고생 많이 했어요. 그때는 모두 잡히면 죽는 판이라고 잠수함을 타도 아예 밑으로만 기는 때였어요. 나도 무려 여덟 명의 생존자를 서울의 지식인들에게 배급하느라고 정신없었어요. 윤한봉을 종씨 윤정모가 근 일년 쯤 숨겨주었고 그 뒤에도 번갈아 한 십여 명을 교대로 데리고 있었어요. 그때 사람들의 면목도 좀 보이더군요. 어쨌든 그는 뒤에 우리의 도움으로 마산에서 화물선 레오파드호를 타고 미국으로 탈출했지요. 미국에 가서 눈물의 상봉을 했지만, 그가 미국12개 도시에 조직한 한청련을 통해서 여러 분들을 만났습니다. 『분단을 넘어서』라는 책도 그때 보았고 북한을 방문한 목사, 교수, 지식인 필자들도 만났지요. 좌우간 전두환 파쇼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그때에 나는 강연을 다니면서 대사관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우리의 통일운동이 대단원에 이르렀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미국에서는 또 참지 못하고 판을 벌여 문화 패 '비나리'를 조직하고 순회공연을 했지요. 뉴욕 한청련회관에서 한참 연습 중이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는 거였어요. 그는 소련과 한반도 문제의 세계적인 학자인 동경대학 사회과학연구소장 와다 하루끼 교수였습니다. 워싱턴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가 내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지요. 그는 칠십 년대부터 온몸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밖에서 지원해오던 일한연대위원회의 공동대표였어요. 와다 교수를 통해서 일본의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우리 동포 작가 · 지식인들을 거의 모두 알게 되었던 겁니다. 제비 한 마리가 봄소식을 전한다더니 남한에서 온 지식인들이 거의 만나지 못하고 비켜가던 그분들을 그야말로 '분단을 넘어서' 내가 찾았던 겁니다. 그것은 단순성을 표방하는 내 성질 탓도 있겠고 까지 공개적으로 만나는데 설마 나를 간첩으로 만들랴하는 생각도 있었지요. 북쪽국적을 갖고 있는 작가 (이하 경칭 생략) 이회성이나 김석범이나 시인 김시종이나 또는 전 한민통 기관지의 주필을 지낸 정경모나 그밖에 여러 계층의 동포들을 종횡무진으로 만났습니다. 작가의 유리한 입장을 십분 살린 거죠. 하여튼 길이 생긴 겁니다. 동경에서 재일 동포 3,4세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문화패 '한우리'를 구성하고 우리문화연구소를 개설했습니다. 이회성, 정경모 선생들이 뒤에서 밀어주었고 일본 지식인들이 도와주었죠. 북한 국적의 작가인 이회성과 남한의 나는 함께 재일 동포 젊은이들과 '통일 굿'을 벌이기로 해서 그가 실행위원장을 맡고 내가 총 연출을 맡았지요. 나중에 돌아와 당국으로부터 추궁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지요. -남과 북의 작가가 통 일을 염원하는 굿을 했는데 무엇이 잘못입니까?
문 밤새 얘기해도 안 끝나겠는데요, 우선 해외동포 작가들의 책에 대 해서 얘기를 해보지요.
답 해외동포 작가들의 문학은 중국 연변을 제외하고는 일본과 소련 모 두 그 나라 언어로 씌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이민의 연유나 계층 성격이 일본과 소련에 비해서는 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백만 가까이 되는 미국 이민의 팽창은 칠십 년대에 급작스럽게 늘어난 것이며 고국을 떠난 동기도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미국이 한반도의 분단에 관한 일차적인 책임 당사국이므로 그 나라 안에서의 동포들의 통일운동은 이제부터 중대한 국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라는 말이지 일본에서의 동포들의 피눈물나는 민족운동과 비교하기는 미안한 노릇입니다. 많은 분들을 알고 있고 책도 여러 권 나왔지만 그 중에서도 읽어본 것만을 얘기할 수밖에 없군요. 일본 쪽에서는 이회성의 『금단의땅』, 정석범의 『화산도』, 작고한 김사량의 전기와 소설도 부분적으로 소개되었고 이은직의 『탁류』, 몇 가지 활동가들의 수기물도 있는 듯하고 소설은 아니지만 정경모의 수상집『일본의 본질을 묻는다』 등이 나왔지요. 중국 연변 쪽의 김학철의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그리고 김철을 비롯한 시인들의 엮은 시집이 나왔습니다. 미리 말했듯이 다 읽지는 못했어요. 월북 문인들의 작품이 해금되고 (흥명희, 이기영,한설야 등의 소설은 뚜렷한 이유 없이 아직도 묶여 있지만) 남한과는 스스로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해외동포 문인들의 작품이 소개되어 이제 분단 이후 절름발이였던 반쪽의 한국 국문학사는 다시 써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작품이 당당하게 민족문학의 유산으로서 편입되는 것과 동시에 우리 교과서와 국문학사에 올라 있는 식민지시대의 친일문사들과 군사독재체제의 부역문인들의 작품을 어떻게 척결해야 하는가 하는 점도 뚜렷이 비교하게 해줍니다. 내가 이회성을 만나게 된 것은 앞서 말했는데, 그가 아꾸다가와상을 받고 한국일보사의 초청으로 남한에 왔을 때부터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된 선배작가 이호철에게서 그의 조국에 대한 뜨거운 그리움에 관해서도 들었습니다. 이회성을 만난 나의 느낌은 때묻지 않은 소년 같은 천진함과 불의라든가 부정직따위에는 대번에 노여움을 드러내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남도 북도 내 조국이다'라는 말로 서울에서의 짧은 체재기간을 표현했지만, 한때 동포 지식인들로부터는 그의 서울 방문이 총련계 지식인들을 동요시키려는 정치적 술수에 말려든 것이 아닌가 비난도 많이 받았습니다. '재일'하는-이것이 그들 교포들의 자기존재에 대한 표현입니다만-비판적 지식인의 남한 방문은 실로 그들에게는 중대한 문젯거리였습니다. 이들은 그러한 몇 가지의 우리가 보기에는 별 것도 아닌 듯한 도덕적 원칙을 지켜내려고 서로를 비판하고 고치고 하는 것 같았어요. 이런 상호 견제야말로 일본에서 올바른 민족정기를 지니고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재일 교포들이 일본사람들을 닮아서 너무 소심하고 겉으로 표현을 않는다고 수상해 하기도 하지요, 이것은 일본과 같은 차별 많은 국수적 분위기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려는 동포들의 체질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 외 초기 작품들은 어릴 때의 조선인 마을 주변이며 부모들 이야기나 사할린이 배경으로 된 서정적이며 자 폐 적인 청춘의 암울함을 그려낸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선인 특유의 삶에의 강인함이 나 한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번에 『금단의 땅』으로 나온 작품의 원래 제목은 『못다 이룬 꿈』이었죠. 『군오조』지에 3년 동안 연재하고 나서 고오단샤에서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 독자들의 반응은 별로 크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냉담했겠지요. 그는 뿌리 잃은 젊음의 자의식과 문화적 방황으로부터 스스로 혁명적인 사상으로 전이하여 조국에 대한 강한 정열을 일본말로 표현했습니다.(그의 한국말은 그리 능숙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자의식을 떨쳐버리고 드디어 남북분단이라는 조국의 운명에 시선을 돌린 것은 아마도 그의 칠 십 년대 초반의 짧은 방한 경험이 강한 인상을 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그와의 대화 중에 재일 동포 문학이란 일본 속의 제 3세계문학이며 아메리카의 흑인문학처럼 포로된 자의 문학이라는 의미의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처음에는 그의 과도한 듯한 국내 정치현실에 대한 관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왜 좀더 교포 자신의 문제를 소설의 소재로 삼으려 하지 않는 가고 생각했습니다. 이 의문에 대해서 평론가 마쯔사끼 하루오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어요. -남도북도 내 조국이다 하는 조국관의 근저에 있는 것은 분단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결코 그것을 고정화시키지 않고 어디까지나 통일에의 지향을 의식의 구석구석에까지 끌고 나가는 정신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국가와 조국, 정권과 민중을 구별해 두고 항상 후자를 축으로 하여 사물을 고찰해 가는 자세나, 현존하는 남북 두 정권 중에 어느 쪽을 지지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쪽도 통일국가 이전의 과도적인 체제라고 간주하는 시접이 거기에서 생기게 되지만,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것이 조국통일에 대한 재일 조선인의 능동적인 관련이라고 하는 실천적인 명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외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았으며 외국어에 의해서 밖에 작품을 쓸 수 없는 자신들의 일의 운명적 성격에 고인하고 있던 이회성이 방한 체험 속에서 조선문학 전체 속에서 점하는 재일 조선인문학의 위치와 역할을 확인할_수 있었던 것이다. 본국의 작가들과의 사이에 어느 것도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 변증법적인 연대관계를 맺으면서 각각의 일을 통해 조국통일의 대사업에 공헌해 가는 과제가 부과되어 있으며, 조국의 사람들도 그것을 갈망하고 있음을 그는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 그의 소설 『금단의 땅』에는 70년대 남한의 민주화운동과 사회변혁운동의 여러 가지 유형들이 연대별로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밖에서 사건일지와 자료에만 의존한 그의 묘사가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주로 개량 적 민주화 운동이나 인권운동으로 일관했던 기독교 지식인 등등 중간층 중심의 명망가운동에서 칠십 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기층민중이 사회변혁의 주체로 서서히 떠오릅니다. 개량 적인 민주화운동은 반공주의의 벽에 부딪친 한계내의 운동논리임을 깨달은 많은 활동가들은 노동자 ·농민들의 속으로 뛰어들거나 사상적으로 급진 화하게 됩니다. 이미 유신 말기가 되면 누가 지도하거나 가르쳐주지 않고도 민중은·생산현장에서 스스로의 생존권운동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던 것이 사실적인 70년대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설에서 4·19세대이며 재벌의 막내딸과 결혼한 중간층 지식인 박채호와 교포유학생 조남식을 '자생적 사회주의자'로 등장시킵니다. 또한 다른 부류는 통혁당을 재건하고 북을 혁명기지로 인정한 나도경, 나경리 남매인데 이들과 박채호와의 논쟁을 통하여 어째서 남한의 토착적 세력이 남한 혁명에서의 독자성과 주도권을 지녀야 하는가를 역설합니다. 그리고 남한의 사회변혁운동의 목표는 민족해방운동보다는 민주화에 먼저 역점을 두어야 하며 이를 당시의 중간층 지식인 운동권의 논리였던 선민주 후통일 논에다 맞추고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에 부상하고 있었던 생산하는 노동대중과는 분리된 채로 이유 없이 쫓기고 논쟁하고 음모하는 관념적인 인텔러겐차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이미 사회변혁의 주체로서의 주도권을 민중에게 내어주고 있었으며 곧 뒤를 이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물론 작가가 불가피하게 일본에서 공판자료나 조서 또 는 기사를 토대로 당시의 변혁운동의 흐름을 파악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국의 발표가 많은 부분 조작 과장되었거나, 아니면 정치범들은 스스로를 흔히 왜곡시키게 마련입니다. 아닌 말로 김지하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무차별한 반공법으로부터 자신의 운동논리와 사상을 보호받기 위하여 쉬운 방편으로 교회의 처마 밑에 은신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당시의 실상은 많은 지식인들이 한계가 딴은 대로나마 민중의 의식화 과정에 기여하려고 노력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깊은 밤에 작은 방에서 노동자나 농민들과 코앞에 닥친 문제들을 놓고 불꽃튀는 논쟁을 하면서 이심전심으로 상대방의 생각의 깊이를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내색하지 않는 것이 당시의 예의였습니다. 이러한 운동권 내부의 이념의 차이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운동과정 속에서 곧 판가름이 나고는 했지요. 이 소설에 나오는 지식인들의 장면은 오히려 요즈음을 생각나게 하는 데가 있으면서도 기층민중의 모습을 일제시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회성의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이 구구절절이 전해오는 것은 그가 서승, 서준식 형제를 빗대어 등장시킨 것 같은 조남식의 모습 가운데 '반쪽발이'의 안타까운 희한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적의 언어를 어쩔 수 없이 사용하여 민족의 피 어린 역사 속으로 들어오려는 이회성의 당당한 작품은 상처투성이지만 그러므로 더욱 민족 문학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후배로서 진심의 충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일본 속에서 일본의 부정적인 모습과 조선인의 삶을 그려내는 일이야말로 또한 통일운동과 민족문학운동에 큰 보탬이 되리라는 생각입니다. .앞에도 말한 것처럼 일본 속에 포로된 자의 인간적인 존엄성의 깃발을 세우는 것, 그래서 이른바 해방 구를 넓혀 나갈 일 입니다. 다음으로는 정석범의 『화산도』를 읽었으니 한번 살펴보기로 할까요? 소설 얘기를 하기 전에 나와 제주도와의 인연에 대해서 몇 가지 추억담을 들어보시지요. 나는 어린 시절에 영등포에 살았는데 집 근처에 경찰서 사찰 계 분실이 있었습니다. 본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데 거기 왜 그런 건물이 있었는지 사찰계가 뭘 하는 데인지 당시에는 어려서 잘 몰랐지요. 커서 그때의 기억을 반추하는 사이에 저절로 알아낸 것이지요. 그 건물에서는 종종 귀신이 나온다고 어린이들이 날만 저물면 근처로 지나가는 일도 꺼려했습니다.
하여간에 사찰계란 지금의 정보과 같은 곳이고 부근이 공장의 노동자 밀집지역이라 파견대 비슷한 곳이었을 겁니다. 그 일본식 벽돌건물 뒤에는 살림집이 붙어 있었는데 나는 그 집의 아이와 동년배로 같이 먼길을 걸어서 학교엘 다녔습니다. 우리는 짝패였지요. 내 기억을 간추려본다면 제일 먼저 나는 그 아이네 오시이레(일본식 벽장) 안에서 근사한 진짜 일본도를 봤습니다. 아이의 말로는 아버지는 이북에 살 적에 순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사찰계 주임이었지요. 그 애네 집에 가면 맛난 것이 많아서 부러웠던 생각이 납니다. 한번은 과자를 먹으면서 안방에서 노는데 그 애가 자랑스럽게 앨범을 꺼내어 보여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용감하고 또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죠. 사진에는 군복ol나 순경모자 차림의 사람들이 많았는데 . 그 애의 아버지가 총을 들고 산에서 찍은 사진,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 많이 있었습니다.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습니다. 짐승처럼 머리가 자라고 수염이 새카만 사람들을 길게 한 줄로 묶어서 꿇어앉혀 놓고 그 애 아버지가 총을 치켜들고 찍은 사진, 죽은 사람들 앞에서 사냥꾼들처럼 담배를 물고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들. 나의 조심스런 물음에 아이는 자랑스럽게 그것이 자기 아버지가 제주도에 가서 공비토벌을 할 때에 찍은 사진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군요. 그 애의 엄마가 장에 갔다 들어오다가 앨범을 들치고 있던 우리를 보더니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그것을 빼앗아 아이의 머리를 때렸지요. 애가 울고 나는 겁에 질려 달아나고,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애의 엄마는 골수 기독교인인 모양이었고 늘 기도를 하고 새벽예배에 하루도 빠짐이 없는 분이었어요. 상냥하고 얌전한 부인이었는데 일찍 죽었지요. 나중에서야 나는 서북청년단이니 제주도니 하는 것을 알았지만 그 당시에도 앨범을 보면서 무엇인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가해자의 내부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도 눈치챘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4·19 직후였는데요, 고교 2학년 여름방학 때에 친구들과 셋이서 무전여행을 갔었습니다. 제주도까지 연락선을 타고 갔는데 새벽 바다 위로 떠오르던 삿갓 모양의 한라산이 구름을 얹고 떠있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우리는 백록담에 오른다고 관음사까지 걸었는데 당시만 해도 무인지경이었어요. 내가 도중에 더위 먹고 배탈까지 겹쳐서 인근 중산간 부락을 찾아가 신세를 졌습니다. 그날 저녁의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햇볕에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고 군용배낭에 작업복에 모자만 학생모를 쓰고 있었습니다. 하루만 광에서라도 쉬어가게 해줍시다 하는 얘기였는데 갑자기 웬 할머니가 뛰어나오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로 재빨리 말하면서 나를 끌어안고 놓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툇마루에 앉히고 삶은 감자도 먹이고 머리도 쓰다듬곤, 집안 사람들은 할머니를 내게서 떼어놓았을 데 자꾸만 달려들었습니다. 죽은 아들 때문에 그런 다는 사람들의 설명이 없었어도 나는 그 할머니가 나를 가까운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생각해보면 우리를 산에서 내려온 사람으로 여겼던 게 분명합니다. 그로부터 십 여 년 전 제주 농 중학생들이 많이 입산했었으니까요. 이것도 제 가슴을 쳤던 계주도 기억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는 칠십 년대 중반에 강연을 갔다가 젊은이들과 알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들은 나와 더불어 문화운동 쪽의 연 관을 맺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 엉터리같이 우스갯짓을 잘하지만 생각은 제법 깊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등산을 갔다가 한라산의 그 수많은 자연동굴 중에서 새로운 굴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내가 「골짜기」라는 단편에 조금 묘사를 해 놓았습니다만, 그 안에는 녹슨 솥과 모닥불 터와 인간의 잔해가 있었습니다. 마치 분필가루같이 고스란히 풍화한 뼈의 무더기들이 여기저기 동굴을 따라서 뿌려져 있었지요. 신고해서 면 직원들과 의사들이 달려왔어요. 의사들이 줄자로 잔해를 재기도하고 남녀와 연령을 분간해내기도 하면 아랫동네에서 올라온 노파들 사이에서 누구라는 등 이름을 부르며 울음이 터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게릴라가 아닌 양민이었고 자연사로 판명되었습니다. 소설에서는 그들을 시간과 역사로부터 스스로 자 폐시켰던 절망의 정체를 묻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제주도에서 창립했던 문화 패 '수눌음'의 회원이 어느 날 눈을 빛내면서 청년시절에 가족의 곁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는 외삼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김석범이 참고자료로 들고 있는 『제주도 피의 역사-4·3무장투쟁의 기록』에 저자인 김봉현입니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들은 외삼촌의 도피행각이며 밤새껏 태우던 그이의 책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나는 필사본으로 돌아다니던 자료들을 뒤늦게 접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또 나는 어느 여인에게서 아버지의 말년과 죽음에 관한 처절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예전에 제주도에서 악독한 공비들이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아버지도 그때 고생을 많이 겪었다고 알았지만 설마 좋은 편이었겠지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해인가 도청에서 모범가족 상을 주었는데 자녀들은 영문 모르고 좋아들 했건만 아버지는 그날 따라 술 이 만취되어 울면서 상장을 찢었습니다. 언제는 우리끼리 잘 살아 보렸더니 박살을 내놓고 이게 무어냐는 통곡이었죠. 그녀의 아버지가, 나는 한라산 빨치산이었다고 했을 제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이는 중학생 때에 어 린 나이로 항쟁에 가담했습니다. 최후까지 버티다가 마지막 여덟 사람과 함께 생포되었고 나이 어린 본보기로 목숨을 건져 대구형무소에서 무기형을 받고 십 오 년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곧 뒤이어 전쟁이 일어나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좌익수들이 굶어 죽어갔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살아 남았습니다. 그러고는 고향에 돌아와 맘씨 착한 나이 어린 각시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건만 소주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간 경화로 운명하기 직전까지 그녀는 정상적 생활인이 아니었던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사회안전법 대상자였던 그는 술이 취하면 언제나 나직하게 산사람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른 곡조의 '울 밑에 선 봉선화' 말입니다. 나중에 딸이 간호를 할 때에, 죽기 며칠 전에 "미안하다"라고 한마디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는 그 어느 것이나 소설보다 더 가슴을 뜨겁게 만듭니다. 김석범의 『화산도』를 읽고 나면 4·3항쟁을 소재로 하고 있지 만 배경을 빌린 일본식 사소설이라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다섯 권의 소설은 犯년 2월말에서 5·10총선 전야까지 두어 달 남짓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지난 봄에 동경에서 실천문학자 송기원의-그의 모국 방문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물어달라는-부탁을 받고 동경에서 만난 것은 세 번째의 만남이 이었습니다. 그는 환갑이 넘은 초로의 나이인데도 술도 잘하고 건강도 좋습니다. 토는 제주도 억양이 섞인 일본식 사투리를 쓰고 남 과 섞이는 번거로운 일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문학예술에 관한 자부심과 그 것을 올바로 지켜내야겠다는 뜻은 단호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슬며시 거부감이 들다가도 그는 정직하고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그가 나를 우에로의 제주도 음식을 하는 집으로 데려갔지요. 새끼 회를 시켰습니다. 새끼 회는 태반에 들어 있는 새끼돼지를 짓 이겨서 양념에 버무린 것으로 제주도 사람들 외에는 비위가 상해서 잘 먹지 못하는 음식입니다. 나는 물론 팔도 잡식성이라 좋아하지만 요. 내가 현기영이나 김명식에게 곧잘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농담을 하지만 제주도 사람들은 원성 적으로 처음 보는 타향사람들을 경계하는 그런 냄새가 나지요. 김석범은 새끼 회를 숟가락으로 푹 떠서 입안에 넣더니 행복한 표정이 되면서 곧 풀어졌습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한 느낌 이였습니다. 그가 고향을 보고 싶어 경비행기로 멀리 한라산 상공을 둘러보고 아사히신문에 방문기를 쓴 얘기는 다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그가 제주도 얘기를 할 때에 내가 잘 아는 곳의 새끼 횟집이라든가 봄의 자리 회나 콩잎에 싸먹는 멸치 또는 전복 내장으로 담근 새우젓 얘기를 하면 그는 어서 가서 나토 먹어봐야지 하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렇지요, 『화산도』에는 그가 살로 그리워하는 상상 속의 제주도 풍경과 바람, 바다, 돌멩이, 파도가 메주냄새, 비바리의 살 냄새, 토방냄새 같은 것들과 어우러져서 항쟁을 다루려는 사실적인 산문의 힘을 자꾸만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민중봉기는 멀고 먼 소문일 뿐입니다. 마치 음울한 구름이 아득한 하늘가로 지나가며 가느다란 천둥이 불안하게 울려오는 것처럼. 소설을 끌고 나가는 것은 주로 이방근과 그의 주변을 통해서 입니다. 그런데 이방근은 제주도 토로의 도련님으로 양심적이나 결단성이 없고 토론을 잘하지만 관념적인 부르주아 청년인데, 퇴폐적이지만 또한 정직한 그런 인물입니다. 일부 혁명적 인텔리들이 그의 주변을 통해서 묘사가 되고 있지만 마치 목탄으로 몇 번씩 덧칠해버린 크로키의 인물처럼 애매 모호합니다 그들이 잠깐 명확하게 빛을 발하는 것은 남승지와 강음구가 봉기 자금을 모금하러 일본에 가서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친지들과 가족을 만날 때입니다. 도대체가 그 숨막힐 것 같은 혁명의 전야에 이방근과 같은 부유한 특수층주 인공의 일상적 권태를 어쩌면 그리도 자세하고 길게 묘사하는지, 어째서 항쟁의 주체인 중산간 부락의 농민들과 무장한 게릴라 청년들의 삶과 고통이 보이질 않는지, 할에서는 봉화가 오르고 뒤이어 8만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소설의 주제 앞에서 이유원의 피아노 타령은 무엇이며 그 오빠 이방근과 촌에 서 온 하녀 부엌이의 정욕은 무엇 때문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주도 민중항쟁의 주체가 누구이며 그들의 소망이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현재 조국의 통일운동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하는 실감나는 서술이 빠져 있다면 이 소설의 의도는 다를 데 있음이 분명합니다. 물론 김석범의 소설이 고향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소설이며, 일본과 같은 제약이 많은 땅에서의 삶의 어려움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태도가 소설의 시선을 결정한다는 상식적인 명제입니다. 김석범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치열하게 조국의 운명을 선택하여 뚜렷하게 조국통일운동에 이바지하겠다는 확실성이 엿보이지 않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이 길고 긴 소설이 현기영의 고뇌에 가득한 실감나는 소설들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입니다. 우 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투철한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이 아름다운 나라의 죽음과 환희를 우리 시대 속에 아로새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 그러면 이제 우리는 김학철을 만날 차례입니다. 내가 그의 단편집과 장편소설들을 처음 대한 것은 연변대학에 교환교수로 가 있었던 와세다 대학의 오오무라 도시오 교수를 통해서였습니다. 나는 삼 년 전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을 때에 연변의 조선족 문학과 연희예술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당시 동경 대에 연구하러 와 있던 중국 중앙당 간부인 국제문제연구소의 이창환 부소장과 만난 적이 있으며 그때에 북경대 조선어학부의 김선한이란 분이 『장백산』이란 잡지에 나의 『장길산』을 연재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김철 시인이라든가 연변대의 정판룡 교수나 김학철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학철의 소설집들은 대중보급용이라 지질도 형편없었고 장정도 아무렇게나 되어 있었어요. 그러나 점점 읽어가면서 나는 마치 오래 전에 잃어버린 얘기책을 다락에서 주운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렸던 우리의 조선문학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지니면서 안에는 알심이 은근하게 딱 버티고 들어앉아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김학철의 삶은 그야말로 '다 峯면 소설 열 권'입니다. 참고 삼아서 오오무라 교수의 김학철에 대한 소개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김학철 선생은 작가라기보다는 군인이요 혁명가였다. 따라서 이름도 열 개나 넘게 가지고 있었다. 김학철이라는 이름도 본명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경력은 본인에게 듣기는 했어도 불분명한 구석이 있기는 한데 현재 주변의 자료를 통해 선생의 경력을 더듬으면 대략 다음과 같다. 그는 1916년 원산 시에서 출생했다. 그곳의 보통학교를 나와 서울에 와서 중학시절을 보내는 중에 광주학생사견을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는 상급생의 행동에 편승하여 시위에 가담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이후 그는 학비가 들지 않는 학교를 찾아 상해로 건너간다. (이것이 1934년 아니면 1937년이다. ) 거 기서 그는 의열 단계의 민족혁명 조직에 들어가 활동을 하다가 테러활동에 한 계를 느끼고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황포 군관학교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중국국민당군의 핵심적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당시는 항일전쟁이라는 공 통 목적 아래 국공합작이 어렵게 성립되어가던 시기였다. 그런데 국민당군 이 선명한 항일전쟁을 전개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느낀 청년 김학철은 평생 의 친구이자 동료인 문정일과 함께 신 사군으로 탈출하여 이윽고 팔로군에 합류한다. 팔로군 가운데 조선의용군이 조직되었는데(1938년 10월) 그 수는 초창기에는 2백 명 정도였으나 나중에는 3천 명으로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선생은 이 조선의용군에 소속되어 항일 전에 복무하던 중 하북 ·산서성 지경에 있는 태항산에서의 일본군과의 전투(1943년 호가장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의식불명 중에 일본군에 붙잡혀 나가사끼로 압송되었다. 3곳에서 그 는 부상당한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는 한편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43년 6월에 징역 십 년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45년 광복과 함께 풀려나게 된다. 외다리의 항일영웅은 서울에 들어오자 정치활동 과 함께 문학활동을 전개한다. 여운형, 이태준, 이원조, 한효, 임화, 지하련 등과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미 군정 하에서 좌익운동이 탄압을 받자 1946년 11월 남몰래 월북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안내 겸 호위병아 지금의 부인이 되었다. 북에서는 로동신문, 인민군신문 등에서 근무하지만 별 다른 일이 없어 문학활동에 전념한다. 이 시기에 서울에서 발표된 단편 「담뱃국」이 평양의 문화전선에 전재되기도 하고 김사량과 친교를 맺기도 한다. 얼마 후 .6·25가 발발하고 유엔군이 밀고 올라오자 1951년 북경으로 들어가 정령의 문하에서 문학수업을 쌓는다. 그리고 1952년부터는 조선족 자치주 수도인 연길시에서 거주하게 된다. 여러 편의 장편, 중력들을 발표하는데 1957년의 반 우파투쟁에서 비판받고 이후 실로 24년간에 걸쳐서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문화혁명 기간에는 반혁명 스파이로 몰려 십 년간(1967∼1977)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0년에 와서야 비로소 사회활동에의 복귀를 허락 받아 마음을 가다듬고 참작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1985년에 중국 국적을 취득한 이래 정식으로 중국작자협회 연변분회에 가입하여, 보통사람 같으면 이미 은퇴할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연변분회의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
그의 『격정시대』는 근년에 내가 읽은 국내외 소설 중에서 가장 좋게 읽은 작품입니다. 위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것이었고 거의 반평생이나 붓을 꺾었던 노인이 어떻게 문학에의 정열을 고스란히 지켜왔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우리 '작가회의'의 대 선배 김정한 회장도 근 이십여 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수라도」 같은 중요한 작품들을 발로했는데, 그와 비교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두 분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이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다움과 낙천적인 생명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김학철은 거기에다 솜씨 좋은 이야기꾼으로서 생활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기억하고 묘사해내는 입심과 유머가 있습니다. 나는 종종 돌아간 모친의 이야기 솜씨에 감탄을 하고는 했는데, 북선 지방의 음식인 노티를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그것을 저장하는 이야기에다 형제들끼리 더 먹으려는 갈등의 심리적인 묘사라든가, 어떤 동무나 친척의 습성, 의복, 말씨, 태도에 관한 적절하고도 끝없는 비유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옛날의 노인들은 대개가 고렇게 이야기 솜씨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옛날얘기는 등잔불 밑에서 할머니가 해주거나 사랑방의 화롯가에서 할아버지가 해주는 걸로 으레 정해져 있었지요. 왜 그런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들은 우선 경험이 많고 가족이나 공동체의 역사에 대한 일정한 도덕적 판단과 규범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학철의 항일투쟁기로 일관된 그의 반 자전적 소설들은 바로 예전에는 광야를 달리던 노전사가 마치 은퇴한 추장처럼 나직하고 구수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 같습니다. 『격정시대』는 우리가 어릴 적에 동네에서 흔히 만났음직한 선장이나 시동이 같은 인물들의 성장을 통하여 한국 현대사에서 빠져 있던 항일무장투쟁사의 한 부분을 되살려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선주들에게 착취당하기 일쑤이므로 배를 갖기가 소원인 그의 아버지가 선장이라고 이름을 짓는 것도 매우 타당하고 의미가 있지요. 사실 풀떼죽도 못 먹는 소작인 아이의 이름에 만석이니 만두니, 얼마나 그런 이름이 많아요? 선장이가 원산총파업의 과정에서 씨동이와 함께 민족의식에 눈을 떠가는 과정도 그리 비장하거나 심각하지 않게 일상생활과의 엇갈림 속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일본인의 노리개인 쌍년이와 부두노동자 써동이의 사랑은 상대적으로 순결하게 그려져 있지요. 쌍년이네 집에 선장이가 누이와 함께 가서 얻어먹는 음식의 묘사가 얼마나 그럴듯한지 나는 칙을 보다가 밤에 부엌에 나가 냉장고를 뒤지기도 했습니다. 모금하려고 강도 하는 장면의 어설플 행동들이나 배반자의 숙청마저도 '인간적'입니다. 내가 아는 이들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주말에 이 책을 들었는데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단숨에 읽었다지요. 그리고 이런 책에서는 공해의 찌꺼기가 남지를 않는 것입니다. 나도 시종 웃으면서 책을 봤는데 김학철의 입심이 이런 식입니다. 군관향교 전우 한 사람의 성격을 묘사하는 장면인데, 중국의 기차 안에서는 우리네가 찐 계란을 팔듯이 부패시킨 오리알을 파는데 승객들이 점심이나 간식으로 골잘 사먹는 모양이지요. 중국 사람들은 체면을 중시해서 남 앞에서 음식을 먹으려면 예의 상 칭하고 타서 먹습니다. 나도 대만에서 그런 일을 종종 겪었지요. 선장이의 전우가 어찌나 짓궂고 유들유들 한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중국인이 오리알을 딱 한 알 사서 정성스런 게 껍질을 벗겨 제 입에 넣으려다가 예의로 칭 !하고 보여주자마자 쎄 쎄 하고는 날름 빼앗아 먹어버렸다는 거죠. 그 뒤로 중국 밀은 쓸개를 씹은 얼굴이고, 웃음을 참으며 여행을 계속하는 기차 안의 풍경이 나옵니다. 이러할 작은 산화에서도 그가 얼마나 인간에 대한 깊은 관찰자인가 하는 점이 엿보입니다. 『격정시 대』가 최근인 85년에 나온 김학철의 자전적 소설임에 비해서 『해란강아 말하라』는 중국이 혁명을 끝내고 식민지적 봉건사회에서 근대적인 사회주의 국가로의 내분 건설과 개혁에 나섰던 54년 무렵에 쓴 소설로서, 일제시대에 간도지방의 우려 농민들이 또 다른 항일혁명의 담당자였음을 말
황 석 영
(1988년 10월말의 어느 날, 나는 아들 세대가 될 만한 어느 젊은이와 마주 앉았다. 이 글은 그 밤의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정리해본 글이다. )
문 작가는 일차적으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의 여러 가지 국면들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눈'에 오늘이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 한번 점검해보시죠.
답 요새 연대별 구분을 좋아들하니까 나도 팔십 년대라는 용어를 써보기로 할까요? 사실 십 년 단위의 구분법은 전후에 저널리즘, 주로 신문과 대중잡지에 글을 쓰던 수필류의 비평가들이 만들어냈고 실은 일본식이죠. 예전부터 동양에서는 한 세대를 삼십 년씩 묶어서 얘기하기도 하지만 나는 대강 동시대를 백년쯤으로 잡고 있어요. 언젠가 말했듯이 3,4대가 찬 집안에 사는 일이 종종 있더군요. 실제로 호남에 살 적에는 의병투쟁을 겪은 증조부와 유신치하의 대학생 증손자가 함께 살고 있는 가정도 봤지요. 외국잡지에서 베트남 반전 포스터를 본 적이 있는데 어느 농촌 가정의 4대에 걸친 투쟁과 죽음과 이별의 역사를 나타내는 가족사진이 도표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걸 봤습니다. 하여튼 우리 시대는 크게는 반제자주화 투쟁의 백여 년에 걸친 근대사 속의 한 과정이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분단시대'입니다. 아마 뒤에 문학사가들은 우리들의 작품을 분단시대의 문학이라고 분류할 테지요. 분단의 기점을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오던 '해방'의 날로부터 잡고 있는 학생들의 생각은 올바른 것입니다. 이미 그때부터 또 다른 민족해방을 위한 전쟁 상황에 들어갔다고 보는 견해이지요. 실로 미군정에서 6·25 직전까지 수십만의 무고한 민중이 죽고 다쳤으니 까요. 대개 이 분단시대를 시기별로 나누어 본다면 해방에서 남한 단정수립까지 제 1기, 남북정권 수립에서 전쟁까지 제2기, 전후에서 4·19, 5·16까지가 제 3기, 유신시대에서 광주항쟁까지를 제4기로 나누어 볼 수가 있겠고, 지금은 광주항쟁을 분수령으로 하여 항쟁이후 시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 1기가 미국의 교묘한 점령정책에 야합한 친일극우세력이 남북분단의 실질적인 토대가 되는 반민족적 정권을 세운 시기라면, 제 2기는 미국이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했던 '한국전쟁'(그 두 번째는 베트남전쟁이었음)의 결과로 2차 대전 뒤의 세계적 패권을 유럽 대신 행사하게 되었던 냉전의 시발점이며, 태평양 방어의 군사기지로 남한을 사용할 사실상의 기득권자로 행세하기 시작한 시기일 것입니다. 제 3기는 미국이 남아프리카와 베트남과 필리핀에서 언제나 저질러오던 그대로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군사파쇼 정권을 세워서 신 식민지적 질서를 정착시키던 시기이며, 제4기는 이것의 심화된 기초 위에서 분단고착화 내지는 예속화 정책을 추진하던 미국과 그 추종세력인 매판독재세력에 대한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인 민중의 항쟁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무엇보다도 광주항쟁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한반도의 분단은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 사이의 대립이나 남북 동포들간의 이념적 갈등에서가 아니라, 바로 미국의 동북아전략에 따른 간섭과 지배 때문이라는 뼈아픈 깨달음이었습니다. 군사파쇼 정권은 바로 외세가 창출한 것이었습니다. 광주에서 봉기했던 항쟁지도부는 이 점을 눈치채고 이란에서의 방식대로 미국인을 인질로 카터 행정부와 밀고 당기면서 군사정권의 퇴진과 계엄군의 철수와 식량수송을 요구하면서 투쟁을 지속시킬 계획도 세웠지만, 역시 당시로서는 대중들의 정치의식에 한계가 있다고 여겨서 결행하지 못했습니다. 광주에 살던 미국인들을 일단 미 공군기지 안으로 대피시킨 미대사관의 조치는 그쪽에서 먼저 이러한 점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도둑이 제 발이 저리다는 경우지요. 항쟁 이후 시기인 지금은 놀랄 만큼 성장한 민중적 역량에 몰린 외세와 추종세력이 개량국면으로 시간을 끌면서 남북교차승인이니 유엔 동시가입이니 하는 식으로 남북의 영구분단을 세계적으로 합법화시키려 하곤 있습니다. 한 ·미 ·일 안보조약에 의거하여 동북아에서 핵전쟁에 대비한 대대적인 군사훈련으로 북을 위협하면서 모든 전쟁장치들을 제거하지 않은 채 남북의 분열 고정화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88민족문학선언' (88서울 민족 문학 제, 1988.9.1,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외세를 몰아 내는 일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선언이며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부와 삶의 조건은 점점 변혁을 까다롭게 하고 있습니다. 가축을 기를 제 함부로 잡아먹지 않고 적당히 성장시키고 살을 찌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예속 독점자본도 나름대로의 광범한 재생산구조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현재의 개량적인 민주정부 형태의 준 민간 ·준 군사 파쇼정권입니다. 마치 야누스의 얼굴이지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지금과 같은 폭발적인 민중의 요구를 달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통치 기술자들도 그 동안에 미국을 통하여 풍부한 경험과 숙련을 쌓았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임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에 둑이 샐 때는 점진적이지만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균열이 퍼져 나가고 걷잡을 수 없는 붕괴가 여기저기서 시작되면서 드디어 일시에 무너져버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 변혁의 단초를 촉진시키고 널리 대중화시켜서 모든 동포들로 하여금 분단의 벽을 허물어뜨리도록 급진화시켜야 합니다. 어느 우국 노인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 동안 온갖 장애와 시련으로 꾸물거렸으니 급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급히'라는 말에는 여울물이 그러하듯이 물의 양과 힘이 거 세차야만 가능하다는 의미도 들어 있음을 잊을 수가 없겠지요. 지금 항쟁이후 시기의 문학은 매우 중요한 전기를 맞고 있습니다. 변혁을 위해서는 사회변혁의 주체와 동조세력과 적을 알아야 하고 척결대상과 목표를 정해야 하며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방한사회의 성격을 파악해야 합니다. 통일된 뒤에 분단을 극복하려 몸부림쳤던 시대의 기념비로서 굳건히 설 수 있는 위대한 산문으로서의 장편소설을 요구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당도해 있습니다.
문 분단시대의 문학과 요새 평론가들이 말하는 '분단문학'은 같은 의미인가요? 다르다면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답 전자는 조국이 분단된 현재 한반도 남쪽 살이의 모든 삶의 모습을 그리는 이 시대의 문학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규정의 말하고, 후자는 예를 들면 6.25를 그린다거나 이산가족 문제나 실향민을 노린다거나 미군 문제를 다룬다거나 하는 식의 분단의 직접적 소재를 들어서 일컫는 말인 듯합니다만, 말의 의미상으로도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통일을 위한 문학이라면 몰라도 하필이면 분단문학이라니 그게 뭡니까. 시쳇말로 노동자문학이다 반미문학이다 반전 반핵 문학이다 분단문학이다 하는 데서 더 나아가 끝에다 문제를 불이기도 합니다. 무슨 소설이야? 하면 응 민주노조 문제야, 라거나 어떤 소설인데 ? 하면 강제징집 문제, 반미 문제, 선거투쟁 문제하는 대답이 비일비재합니다.
문 그런 말씀은 따로 소설 얘기를 할 때에 자세히 해주시죠. 우선 지난 몇 년 동안에 산문의 침체에 비하여 장시를 비롯한 시가 대량생산되었으며 독자층도 많이 늘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자만할 일만은 아니겠고 부정적인 측면도 있겠지요.
답 글쎄요, 많이 인지를 못해서 일일이 열거하며 말할 수는 없지만 한데 싸잡아서 얘기한다면 몇 가지의 새로운 성과와 지적할 점은 있겠습니다. 시를 쓰지는 않지만 관심은 많습니다. 시의 순발력과 함축성은 부러운 특성입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광주항쟁의 비극을 읊은 여러 시들이 있었고, 김지하의 사상적 편린을 설파한 시적 산문집이 있었고, 신경림의 『새재』와 특히 그가 몇 년 동안 발로 쫓아다니며 실천하고 체득한 민요 시들이(「목계 장터」같은 유의) 기억납니다. 또한 고은의 『만인보』와 일련의 왕성한 시작들이 계속되었고, 박노해의 시집과 김용택의 시집이 나왔지요. 무엇보다도 기억할만한 것은 김낭주의 옥중시집이 두 권이나 나온 일이며 최근에 나온『조국은 하나다』라는 시집은 항쟁이후 문학의 당당한 진전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엔 별로 기억이 안 납니다. 비슷한 시들을 너무 많아 읽었다고나 할까요? 참, 베스트셀러 시집이 두 권 있었군요. 『접시꽃 당신』하고 『홀로 서기』였지요. 지난 몇 해 동안 너도나도 시를 썼고, 새로 인사하는 젊은이에게 뭘 하냐고 물어보면 영락없이 시를 쓴다고 대답들 하더군요,(그것이 요즈음은 소설 쪽으로 바뀌었지만) 어쨌든 생산이 많아진 것은 좋은 일인데‥‥‥ 광주 직후에 쏟아져 나왔던 비탄과 분노의 시들은 당연하기는 했지만 어느 젊은 평론가의 표현처럼 그를 극복하고 항쟁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하려는 게 아닌 '비극의 상투화' 같은 점도 엿보입니다. (무등산을 이놈 저놈 한 삽씩 떠가는 바람에 이러다가는 광주에서 무등산이 없어져버리겠다는 문병란의 농담, 무등산은 다 알고 있다 더만 하는 송기숙의 농담)비탄과 속죄의 넋두리는 그야말로 변혁운동의 불꽃에서 비켜선 소시민적인 자의식입니다. 이 비극의 넋두리와 일상적 실천이 빠져버린 느닷없는 전투적 구호의 결합이 팔십 년대 중반의 민중시들을 상투화했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행사시의 효용성과 미덕은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동어반복, 어디서 본 듯한 시구의 계속적인 나열, 표어 같은 낱말들, 번역투의 구절 따위는 없어지고 그야말로 현장감 있고 감동적이며 보편적인 정서를 일으키면서도 신선 한 시라야 하겠지요. 전쟁 뒤에 초토화된 후방에서 널리 불렸던 '엘레나로 변한 순이' 같은 유행가에서 우리는 행사시가 어디에 출정을 맞추어야 하는 가 하는 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시를 두기로 삼건 설전의 도구로 활용하 던간에 일차적 목표는 어떻게 하면 대중의 가슴에 스며들듯이 정서를 전달해서 변화시킬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역사적인 주제를 곧잘 다루게 되는 장시의 경우에 우지 시의 전통적 율격과 분위기를 통하여 구성을 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겠지요. 그러나 소설과는 달라서 장시의 경우에는 당대 사람들의 자상한 생활의 구체적 묘사나 시대상에 제대로 나오기란 어려운 노릇이 지요. 모르기는 하여도 장시가 공연물로 변했을 때에(시극, 오페레타, 노래 극, 창극. 판소리) 서사적 구실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연작시를 장편 서사시로 볼 수는 없겠지요. 솔직히 그 동안 유행적으로 쏟아져 나온 장시들을 읽기가 괴로웠던 게 사실입니다. 어떤 것들은 자료를 짤막짤막하게 나열한 것으로 그친 작품들도 있었지요. 또한 시가 생산의 풍요로움을 구가하고 있을 적에도 아류가 시인 스스로에 의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느 동양화가의 가짜 그림이 남발되고 이어서 모사 한 범인이 잡힌 일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정말 화가의 낙관이 찍힌 그림이 진짜인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진짜를 살지 안고 진짜를 노래하지 않은 시는 아무·리 전투적이고 민중적이라 해도 남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박노해의 「손무덤」 이나 김용택의 『섬진강』, 김남주의 옥중 시에는 그들의 삶이 핏빛으로 직조되어 있습니다. 민중시의 상투화와 아류의 대량생산이 오히려 반작용을 해서 『접시꽃』과 『홀로』가 수십만 부나 팔렸습니다. 그 시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한방 먹은 것입니다. 항쟁이후 시기의 시운동에서 대단히 중요한 업적은 '노래운동'입니다. 실로 수백 곡에 달하는 가요가 대학과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초반의 노래들도 상투적 투쟁가류의 곡이 많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두박자의 숨가쁜 박수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일색이었고 만주 독립군의 유장한 노래도 대번에 빠른 행진곡으로 바뀌어버리고는 했습니다. 지난 얘기 하나 해볼까요? 83년 봄이었군요, 광주 운암동의 내 집 이층에서 나는 '문화패 광대'의 잔여 활동가들과 '자유광주'라는 방송국을 차렸습니다. 방송국이란 다른 게 아니라 한 달에 한 개씩의 카세트 테이프를 제작해서 배포하는 일이었죠. 그때 세 번째 만든 물건이 항쟁에서 죽은 남녀를 주제로 한 '넋풀이'라는 거였는데 그 주제곡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그 외에 '에루아 에루얼싸' 같은 곡도 있었는데 내가 일인 십역을 할 때라 가사도 전부 내가 썼지요. 지금은 다른 사람 작사로 알려져 있더군요. 처음엔 국악이나 유행가 비슷한 단조의 느린 곡이었는데 김종률이란 후배가 만든 곡이에요. 이게 나중에 보니까 대단히 빠른 곡으로 변해 있더군요.
문 시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본업이신 소설 얘기를 좀 해보시지요. 그 동안의 소설의 부진에 대해서는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음 직한 문제니까요.
답 남의 욕은 잘하면서도 막상 자기 얘기를 하라면 말문이 막히는군요. 우리가 쉽게 남의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지면이 계간지나 잡지들인데, 장편은 연재중일 때엔 잘 읽지 않습니다. 더구나 신문 지면은 거의 읽는 경우가 드물고 책이 나온 뒤에야 읽게 되지요, 팔십 년대 전반기의 얼어붙은 것 같던 반동의 시기에 소설이 당대의 상황을 즉각적으로 받아내지 못한 점은 미처 당대를 소화할 수 없었던 작가들의 역량의 한계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어느 사실이 소설로서 재구성되는 데는 일정한 거리와 시제의 차이가 불가피하다는 점도 있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당시에 소설 쓰기가 위축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군요. 그보다는 차라리 그때에 문단에서 문학적 쟁점의 정리 역할을 하던 몇몇 잡지들이 폐간되면서 찾아든 공동화 현상도 있었을 테고, 하여튼 단편밖에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가 지금 알고 있는 여러 장편소설들이 그 무렵에 잡지나 신문에서 연재중이었죠. 당시 ·사정으로는 여러 사회운동결의 기관지나 팜플렛에 나온 파쇼정권의 폭로기사며 르포가 당대를 감당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이를테면 민언협의 『말』이라든가 활동가들의 현장수기 등입니다. 이들 르포, 수기, 선언문, 폭로기사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매우 유용한과도적 문학의 역할을 해냈습니다. 내 경우에도 칠십 년대부터 작품을 쓰는 한편으로 현장 문화운동에 참가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종류의 글이며 현장 집체창작물들을 수없이 쓴 셈입니다만, 84년 겨울에 광주 '전사협'의 위촉으로 기록한 광주항쟁보고서는 당시의 상황을 대중적으로 격앙시키는 촉매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글들은 일종의 유인물처럼 빠른 시일 안에 널리 전파시켜야 하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도 강렬한 사건, '문제점의 즉각적 해석, 전형적인 틀 따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도적 단계에서 신인들의 소설작업이 슬슬 가동되기 시작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당시에 진행되어왔던 활동가들의 폭로 물이 지녔던 유용성과 한계를 그대로 지닌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소설이 문제점의 추적만은 아니거든요. 역시 이즈음의 작품으로는 윤정모의 「님」이 기억나고 문장의 힘과 밀도가 있는 신인 정도상이 생각납니다. 선배 작가들의 작업도 왕성하지는 않지만 계속되고 있지요? 박태순과 현기영의 중단 편은 여전히 제 몫을 하고 있으며 이호철의 인물연구 연작은 매우 인상적인 소재였는데 이어지지 않고 있지요. 김원일이 장편을 내놓았고, 박범신의 연재도 재미있었지요.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찬반 논란이 각각이지만 그만큼 무게가 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관점에 차이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은 신인들의 창작역량이 성장하고 있지 않은 점이에요. 여간해서 눈에 확 들어오는 새로운 소설가가 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소설은 가슴에서 퍼내는 것이지 뇌 세포에서 분석해내는 것이 아니하거나, 소설은 동시대 사람들이 들어가 사는 집이라거나 하는 말들은, 소설이 일차적으로는 작가 자신을 포함한 여러 인생들의 그럴듯한 이야기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뒤에 사회과학의 연구대상이든 활동가의 운동 소재든 찾아볼 사람은 찾아 내보라는 거예요.
문 노동자나 농민들 자신의 소설이나, 또는 전문작가와 그들과의 공동창작에 관해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는데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답 글쎄요, 좀 오래되었지만 유동우, 송효순, 석정남, 장남수 등의 수기가 생각납니다. 그 외에도 내가 호남에서 연구소를 운영할 때 각 노동 ·농민 운동권의 단체에 협조요청을 해서 일종의 민중자서전을 모아 팜플렛으로 내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글은 소설과는 다르게 감동을 줍니다. 그런 글은 바로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책으로 열 권'이라는 말처럼 일반 민중들의 어려운 삶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감동이죠. 부르주아 작가들의 경우 실감이 없는 인생을 사는 경우가 더욱 많기 때문에 아무리 기술이 훌륭해도 거짓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고 또 사실 재미도 없거든요. 외국에서는 도시인류학 쪽에서 이런 수기들을 여러 가지 기록해서 내놓았고 우리에게도 몇 가지 소개가 됐지요. 그러나 민중수기는 엄밀히 말해서 소설의 원자재는 되어도 그 자체가 소설은 아닙니다. 노동자·농민 작가라 할 때에 언뜻 이택주나 윤기현이 떠오르지만 소설에서 작자의 출생이나 계급성분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어떤 소설을 썼느냐 하는 계 중요하겠지요. 또는 젊은이들 말로 학출 노동자 중에 소설을 쓰겠다는 사람도 맞겠지요.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소설창작이 원자물리학도 아니니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과, 더 욕심을 내본다면 인생관에 변화를 줄 수 있는 힘을 지닌 소설을 쓸 수 있다면 말이지요. 공동창작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 논의가 창작을 해본 자랑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기보다는 주로 비평을 공부한 사람들이거나 활동가 지향이 강한 쪽에서 나왔지요. 공동창작에 맞는 일감들이 있고 맞지 않는 일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칠 십 년대 말부터 현장 사람들과 갖가지 촌극과 마당극의 대본들을 짰는데 언제 시간이 나면 그때의 자료들을 가지고 공동 창작론을 써 볼까도 합니다. 연화의 경우에 제일 먼저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대하여 토론을 합니다. 그 현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점들을 뽑아내어 전체 이야기 줄거리를 대강 엮어봅니다. 이야기를 몇몇 장면으로 나누고 사건과 인물을 정합니다. 각 장면들을 연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그룹별로 맡기고 보완시킵니다. 어느 부분은 전혀 달라지기도 하고 예상 밖의 훌륭한 새 줄거리가 첨가되기도 합니다. 하여튼 장시라든가 연희대본 등은 공동창작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설은 매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소재와 주제를 정하고 구성을 하는 데까지는 여럿이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대목을 토막으로 나누어 분담하는 데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선 사람마다 문체와 문장의 맛이 틀립니다. 연희에서는 각 등장인물이 자기에 맞게 대사를 말하고 몸짓을 하게 되지만 소설에서는 이 모든 것을 쓰는 사람이 묘사해내야 하기 때문이죠. 또한 중요한 절은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내면은 복합적이지만 사건에 대응하는 성격의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이런 치밀한 것들을 여럿이 일치시키기는 불가능합니다. 전장에서는 어떤 사물에 관심을 보였다가도 필자가 바뀜에 따라 다른 쪽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사실 문체라든가 문장이라든가 하는 말은 한 단어 어느 글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첫 줄에서 마지막 구두점이 찍힐 때까지의 소설 전체가 갖는 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만 필자는 하나고, 주제를 정하는 데서부터 마지막 추고과정까지 토론에 참가할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창작을 할 수는 있겠지요. 북한의 몇몇 젊은 집체창작단이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에 한해서만은 나는 공동창작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테마가 주어진다면 아무래도 그 틀에만 맞는 인물과 사건이 정해 질 테니까요.
문 요즈음 해외동포 지식인들이나 작가들의 작품이 여러 가지 출간되고 있습니다. 사실 세계 각지에 흩어진 동포들이 어림잡아 사오 백만이 되는 것 같은데요, 그 중에 미국 · 일본 ·중국 ·소련에 제일 많이 집중되어 있다지요. 이들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이고 역사적으로 서로의 이해관계가 우리와 얽혀 있는 나라들입니다. 당신은 역마살이 아주 센 걸로 아는데 밖에 나가 서 여러 분들을 만나셨지요? 동포들 근황이나 전해주시죠.
답 요새 나온 글이나 책을 쓰신 분들과는 몇 년 전에 만나서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된 사람들도 있어서 내심 반가워하고 있었습니다. 85년이었지요, 그때 베를린에서 제 3세계 문화재가 열려서 가까스로 빠져나갔다가 일년이 넘도록 유럽, 미주, 일본을 거쳐서-중국 쪽에는 연변과 북경대학에 연줄이 닿아 입국을 기다리다가 - 돌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국 ·일본·중국· 소련에 동포 이민들이 몰려 있지요. 저들의 이민 사는 그대로 우리 나라 현대사의 일부입니다. 또한 어떻게 보면 저들이야말로 앞으로 한반도의 통일운동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해외 전윈 세력이지요. 사연도 갖가지, 계층도 각각, 정치성향도 다르지만 그분들은 모두가 남북의 통일을 절절히 소망하며 통일된 내 나라에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기판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더욱 애간장이 타는 거나 마찬가지죠. 더구나 조국의 통일문제는 밖에 나가면 더욱 절실하고 모순 점들이 아주 훤히 보입니다. 해외동포들의 민주화 통일운동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촉진시키고 조직화 시켰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대사관으로부터 용공분자, 반 국가분자, 기피인물 등의 온갖 협박과 수모를 받아가며, 은밀하게 국내의 정치범 뒷바라지를 하기도 하고 직접 밖에서 여론을 형성할 신문 ·출판물을 제작하거나 동포들을 조직해서 현지에서 항의하고 정치 쟁점을 만드는 등의 애타 는 노력들을 많이 해왔지요. 독일에서는 윤이상 선생을 비롯한 민협 식구들과 만났는데 모두 공산주의자 취급을 받고 있어서 만나기가 곤란할 때였습니다. 그들의 고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지난 봄에도 윤 선 생이 판문점에서의 평화음악제를 제안한다면서 남한 시인들의 가사로 작곡한 교성곡과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광주여 영원히」라는 교향곡의 테이프를 주면서 여론을 환기시켜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문익환, 백기완, 고은, 문병란, 김남주 같은 분들의 시를 한 흐름으로 연결한 가사였습니다. 테이프를 여러 개 복사해서 각계에 나누었습니다만, 음악제가 꼭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작정입니다. 얘기가 옆으로 샜는데요, 미국에서는 광주에서 나와 함께 현대문화연구소를 운영하던 윤한봉이 미주 한청련 조직을 끌고 나가고 있지요. 그는 지금 제3세계 활동가들과 연대하여 반핵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80년 광주항쟁 때에 서울로 도피해 있었는데‥‥‥ 참, 이런 자리에서 숨은 얘기 하나 합시다. 서울에서 소설가 윤정모가 고생 많이 했어요. 그때는 모두 잡히면 죽는 판이라고 잠수함을 타도 아예 밑으로만 기는 때였어요. 나도 무려 여덟 명의 생존자를 서울의 지식인들에게 배급하느라고 정신없었어요. 윤한봉을 종씨 윤정모가 근 일년 쯤 숨겨주었고 그 뒤에도 번갈아 한 십여 명을 교대로 데리고 있었어요. 그때 사람들의 면목도 좀 보이더군요. 어쨌든 그는 뒤에 우리의 도움으로 마산에서 화물선 레오파드호를 타고 미국으로 탈출했지요. 미국에 가서 눈물의 상봉을 했지만, 그가 미국12개 도시에 조직한 한청련을 통해서 여러 분들을 만났습니다. 『분단을 넘어서』라는 책도 그때 보았고 북한을 방문한 목사, 교수, 지식인 필자들도 만났지요. 좌우간 전두환 파쇼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그때에 나는 강연을 다니면서 대사관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우리의 통일운동이 대단원에 이르렀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미국에서는 또 참지 못하고 판을 벌여 문화 패 '비나리'를 조직하고 순회공연을 했지요. 뉴욕 한청련회관에서 한참 연습 중이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는 거였어요. 그는 소련과 한반도 문제의 세계적인 학자인 동경대학 사회과학연구소장 와다 하루끼 교수였습니다. 워싱턴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가 내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지요. 그는 칠십 년대부터 온몸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밖에서 지원해오던 일한연대위원회의 공동대표였어요. 와다 교수를 통해서 일본의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우리 동포 작가 · 지식인들을 거의 모두 알게 되었던 겁니다. 제비 한 마리가 봄소식을 전한다더니 남한에서 온 지식인들이 거의 만나지 못하고 비켜가던 그분들을 그야말로 '분단을 넘어서' 내가 찾았던 겁니다. 그것은 단순성을 표방하는 내 성질 탓도 있겠고 까지 공개적으로 만나는데 설마 나를 간첩으로 만들랴하는 생각도 있었지요. 북쪽국적을 갖고 있는 작가 (이하 경칭 생략) 이회성이나 김석범이나 시인 김시종이나 또는 전 한민통 기관지의 주필을 지낸 정경모나 그밖에 여러 계층의 동포들을 종횡무진으로 만났습니다. 작가의 유리한 입장을 십분 살린 거죠. 하여튼 길이 생긴 겁니다. 동경에서 재일 동포 3,4세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문화패 '한우리'를 구성하고 우리문화연구소를 개설했습니다. 이회성, 정경모 선생들이 뒤에서 밀어주었고 일본 지식인들이 도와주었죠. 북한 국적의 작가인 이회성과 남한의 나는 함께 재일 동포 젊은이들과 '통일 굿'을 벌이기로 해서 그가 실행위원장을 맡고 내가 총 연출을 맡았지요. 나중에 돌아와 당국으로부터 추궁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지요. -남과 북의 작가가 통 일을 염원하는 굿을 했는데 무엇이 잘못입니까?
문 밤새 얘기해도 안 끝나겠는데요, 우선 해외동포 작가들의 책에 대 해서 얘기를 해보지요.
답 해외동포 작가들의 문학은 중국 연변을 제외하고는 일본과 소련 모 두 그 나라 언어로 씌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이민의 연유나 계층 성격이 일본과 소련에 비해서는 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백만 가까이 되는 미국 이민의 팽창은 칠십 년대에 급작스럽게 늘어난 것이며 고국을 떠난 동기도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미국이 한반도의 분단에 관한 일차적인 책임 당사국이므로 그 나라 안에서의 동포들의 통일운동은 이제부터 중대한 국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라는 말이지 일본에서의 동포들의 피눈물나는 민족운동과 비교하기는 미안한 노릇입니다. 많은 분들을 알고 있고 책도 여러 권 나왔지만 그 중에서도 읽어본 것만을 얘기할 수밖에 없군요. 일본 쪽에서는 이회성의 『금단의땅』, 정석범의 『화산도』, 작고한 김사량의 전기와 소설도 부분적으로 소개되었고 이은직의 『탁류』, 몇 가지 활동가들의 수기물도 있는 듯하고 소설은 아니지만 정경모의 수상집『일본의 본질을 묻는다』 등이 나왔지요. 중국 연변 쪽의 김학철의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그리고 김철을 비롯한 시인들의 엮은 시집이 나왔습니다. 미리 말했듯이 다 읽지는 못했어요. 월북 문인들의 작품이 해금되고 (흥명희, 이기영,한설야 등의 소설은 뚜렷한 이유 없이 아직도 묶여 있지만) 남한과는 스스로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해외동포 문인들의 작품이 소개되어 이제 분단 이후 절름발이였던 반쪽의 한국 국문학사는 다시 써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작품이 당당하게 민족문학의 유산으로서 편입되는 것과 동시에 우리 교과서와 국문학사에 올라 있는 식민지시대의 친일문사들과 군사독재체제의 부역문인들의 작품을 어떻게 척결해야 하는가 하는 점도 뚜렷이 비교하게 해줍니다. 내가 이회성을 만나게 된 것은 앞서 말했는데, 그가 아꾸다가와상을 받고 한국일보사의 초청으로 남한에 왔을 때부터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된 선배작가 이호철에게서 그의 조국에 대한 뜨거운 그리움에 관해서도 들었습니다. 이회성을 만난 나의 느낌은 때묻지 않은 소년 같은 천진함과 불의라든가 부정직따위에는 대번에 노여움을 드러내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남도 북도 내 조국이다'라는 말로 서울에서의 짧은 체재기간을 표현했지만, 한때 동포 지식인들로부터는 그의 서울 방문이 총련계 지식인들을 동요시키려는 정치적 술수에 말려든 것이 아닌가 비난도 많이 받았습니다. '재일'하는-이것이 그들 교포들의 자기존재에 대한 표현입니다만-비판적 지식인의 남한 방문은 실로 그들에게는 중대한 문젯거리였습니다. 이들은 그러한 몇 가지의 우리가 보기에는 별 것도 아닌 듯한 도덕적 원칙을 지켜내려고 서로를 비판하고 고치고 하는 것 같았어요. 이런 상호 견제야말로 일본에서 올바른 민족정기를 지니고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재일 교포들이 일본사람들을 닮아서 너무 소심하고 겉으로 표현을 않는다고 수상해 하기도 하지요, 이것은 일본과 같은 차별 많은 국수적 분위기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려는 동포들의 체질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 외 초기 작품들은 어릴 때의 조선인 마을 주변이며 부모들 이야기나 사할린이 배경으로 된 서정적이며 자 폐 적인 청춘의 암울함을 그려낸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선인 특유의 삶에의 강인함이 나 한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번에 『금단의 땅』으로 나온 작품의 원래 제목은 『못다 이룬 꿈』이었죠. 『군오조』지에 3년 동안 연재하고 나서 고오단샤에서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 독자들의 반응은 별로 크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냉담했겠지요. 그는 뿌리 잃은 젊음의 자의식과 문화적 방황으로부터 스스로 혁명적인 사상으로 전이하여 조국에 대한 강한 정열을 일본말로 표현했습니다.(그의 한국말은 그리 능숙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자의식을 떨쳐버리고 드디어 남북분단이라는 조국의 운명에 시선을 돌린 것은 아마도 그의 칠 십 년대 초반의 짧은 방한 경험이 강한 인상을 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그와의 대화 중에 재일 동포 문학이란 일본 속의 제 3세계문학이며 아메리카의 흑인문학처럼 포로된 자의 문학이라는 의미의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처음에는 그의 과도한 듯한 국내 정치현실에 대한 관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왜 좀더 교포 자신의 문제를 소설의 소재로 삼으려 하지 않는 가고 생각했습니다. 이 의문에 대해서 평론가 마쯔사끼 하루오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어요. -남도북도 내 조국이다 하는 조국관의 근저에 있는 것은 분단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결코 그것을 고정화시키지 않고 어디까지나 통일에의 지향을 의식의 구석구석에까지 끌고 나가는 정신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국가와 조국, 정권과 민중을 구별해 두고 항상 후자를 축으로 하여 사물을 고찰해 가는 자세나, 현존하는 남북 두 정권 중에 어느 쪽을 지지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쪽도 통일국가 이전의 과도적인 체제라고 간주하는 시접이 거기에서 생기게 되지만,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것이 조국통일에 대한 재일 조선인의 능동적인 관련이라고 하는 실천적인 명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외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았으며 외국어에 의해서 밖에 작품을 쓸 수 없는 자신들의 일의 운명적 성격에 고인하고 있던 이회성이 방한 체험 속에서 조선문학 전체 속에서 점하는 재일 조선인문학의 위치와 역할을 확인할_수 있었던 것이다. 본국의 작가들과의 사이에 어느 것도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 변증법적인 연대관계를 맺으면서 각각의 일을 통해 조국통일의 대사업에 공헌해 가는 과제가 부과되어 있으며, 조국의 사람들도 그것을 갈망하고 있음을 그는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 그의 소설 『금단의 땅』에는 70년대 남한의 민주화운동과 사회변혁운동의 여러 가지 유형들이 연대별로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밖에서 사건일지와 자료에만 의존한 그의 묘사가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주로 개량 적 민주화 운동이나 인권운동으로 일관했던 기독교 지식인 등등 중간층 중심의 명망가운동에서 칠십 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기층민중이 사회변혁의 주체로 서서히 떠오릅니다. 개량 적인 민주화운동은 반공주의의 벽에 부딪친 한계내의 운동논리임을 깨달은 많은 활동가들은 노동자 ·농민들의 속으로 뛰어들거나 사상적으로 급진 화하게 됩니다. 이미 유신 말기가 되면 누가 지도하거나 가르쳐주지 않고도 민중은·생산현장에서 스스로의 생존권운동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던 것이 사실적인 70년대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설에서 4·19세대이며 재벌의 막내딸과 결혼한 중간층 지식인 박채호와 교포유학생 조남식을 '자생적 사회주의자'로 등장시킵니다. 또한 다른 부류는 통혁당을 재건하고 북을 혁명기지로 인정한 나도경, 나경리 남매인데 이들과 박채호와의 논쟁을 통하여 어째서 남한의 토착적 세력이 남한 혁명에서의 독자성과 주도권을 지녀야 하는가를 역설합니다. 그리고 남한의 사회변혁운동의 목표는 민족해방운동보다는 민주화에 먼저 역점을 두어야 하며 이를 당시의 중간층 지식인 운동권의 논리였던 선민주 후통일 논에다 맞추고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에 부상하고 있었던 생산하는 노동대중과는 분리된 채로 이유 없이 쫓기고 논쟁하고 음모하는 관념적인 인텔러겐차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이미 사회변혁의 주체로서의 주도권을 민중에게 내어주고 있었으며 곧 뒤를 이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물론 작가가 불가피하게 일본에서 공판자료나 조서 또 는 기사를 토대로 당시의 변혁운동의 흐름을 파악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국의 발표가 많은 부분 조작 과장되었거나, 아니면 정치범들은 스스로를 흔히 왜곡시키게 마련입니다. 아닌 말로 김지하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무차별한 반공법으로부터 자신의 운동논리와 사상을 보호받기 위하여 쉬운 방편으로 교회의 처마 밑에 은신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당시의 실상은 많은 지식인들이 한계가 딴은 대로나마 민중의 의식화 과정에 기여하려고 노력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깊은 밤에 작은 방에서 노동자나 농민들과 코앞에 닥친 문제들을 놓고 불꽃튀는 논쟁을 하면서 이심전심으로 상대방의 생각의 깊이를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내색하지 않는 것이 당시의 예의였습니다. 이러한 운동권 내부의 이념의 차이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운동과정 속에서 곧 판가름이 나고는 했지요. 이 소설에 나오는 지식인들의 장면은 오히려 요즈음을 생각나게 하는 데가 있으면서도 기층민중의 모습을 일제시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회성의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이 구구절절이 전해오는 것은 그가 서승, 서준식 형제를 빗대어 등장시킨 것 같은 조남식의 모습 가운데 '반쪽발이'의 안타까운 희한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적의 언어를 어쩔 수 없이 사용하여 민족의 피 어린 역사 속으로 들어오려는 이회성의 당당한 작품은 상처투성이지만 그러므로 더욱 민족 문학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후배로서 진심의 충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일본 속에서 일본의 부정적인 모습과 조선인의 삶을 그려내는 일이야말로 또한 통일운동과 민족문학운동에 큰 보탬이 되리라는 생각입니다. .앞에도 말한 것처럼 일본 속에 포로된 자의 인간적인 존엄성의 깃발을 세우는 것, 그래서 이른바 해방 구를 넓혀 나갈 일 입니다. 다음으로는 정석범의 『화산도』를 읽었으니 한번 살펴보기로 할까요? 소설 얘기를 하기 전에 나와 제주도와의 인연에 대해서 몇 가지 추억담을 들어보시지요. 나는 어린 시절에 영등포에 살았는데 집 근처에 경찰서 사찰 계 분실이 있었습니다. 본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데 거기 왜 그런 건물이 있었는지 사찰계가 뭘 하는 데인지 당시에는 어려서 잘 몰랐지요. 커서 그때의 기억을 반추하는 사이에 저절로 알아낸 것이지요. 그 건물에서는 종종 귀신이 나온다고 어린이들이 날만 저물면 근처로 지나가는 일도 꺼려했습니다.
하여간에 사찰계란 지금의 정보과 같은 곳이고 부근이 공장의 노동자 밀집지역이라 파견대 비슷한 곳이었을 겁니다. 그 일본식 벽돌건물 뒤에는 살림집이 붙어 있었는데 나는 그 집의 아이와 동년배로 같이 먼길을 걸어서 학교엘 다녔습니다. 우리는 짝패였지요. 내 기억을 간추려본다면 제일 먼저 나는 그 아이네 오시이레(일본식 벽장) 안에서 근사한 진짜 일본도를 봤습니다. 아이의 말로는 아버지는 이북에 살 적에 순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사찰계 주임이었지요. 그 애네 집에 가면 맛난 것이 많아서 부러웠던 생각이 납니다. 한번은 과자를 먹으면서 안방에서 노는데 그 애가 자랑스럽게 앨범을 꺼내어 보여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용감하고 또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죠. 사진에는 군복ol나 순경모자 차림의 사람들이 많았는데 . 그 애의 아버지가 총을 들고 산에서 찍은 사진,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 많이 있었습니다.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습니다. 짐승처럼 머리가 자라고 수염이 새카만 사람들을 길게 한 줄로 묶어서 꿇어앉혀 놓고 그 애 아버지가 총을 치켜들고 찍은 사진, 죽은 사람들 앞에서 사냥꾼들처럼 담배를 물고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들. 나의 조심스런 물음에 아이는 자랑스럽게 그것이 자기 아버지가 제주도에 가서 공비토벌을 할 때에 찍은 사진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군요. 그 애의 엄마가 장에 갔다 들어오다가 앨범을 들치고 있던 우리를 보더니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그것을 빼앗아 아이의 머리를 때렸지요. 애가 울고 나는 겁에 질려 달아나고,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애의 엄마는 골수 기독교인인 모양이었고 늘 기도를 하고 새벽예배에 하루도 빠짐이 없는 분이었어요. 상냥하고 얌전한 부인이었는데 일찍 죽었지요. 나중에서야 나는 서북청년단이니 제주도니 하는 것을 알았지만 그 당시에도 앨범을 보면서 무엇인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가해자의 내부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도 눈치챘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4·19 직후였는데요, 고교 2학년 여름방학 때에 친구들과 셋이서 무전여행을 갔었습니다. 제주도까지 연락선을 타고 갔는데 새벽 바다 위로 떠오르던 삿갓 모양의 한라산이 구름을 얹고 떠있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우리는 백록담에 오른다고 관음사까지 걸었는데 당시만 해도 무인지경이었어요. 내가 도중에 더위 먹고 배탈까지 겹쳐서 인근 중산간 부락을 찾아가 신세를 졌습니다. 그날 저녁의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햇볕에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고 군용배낭에 작업복에 모자만 학생모를 쓰고 있었습니다. 하루만 광에서라도 쉬어가게 해줍시다 하는 얘기였는데 갑자기 웬 할머니가 뛰어나오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로 재빨리 말하면서 나를 끌어안고 놓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툇마루에 앉히고 삶은 감자도 먹이고 머리도 쓰다듬곤, 집안 사람들은 할머니를 내게서 떼어놓았을 데 자꾸만 달려들었습니다. 죽은 아들 때문에 그런 다는 사람들의 설명이 없었어도 나는 그 할머니가 나를 가까운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생각해보면 우리를 산에서 내려온 사람으로 여겼던 게 분명합니다. 그로부터 십 여 년 전 제주 농 중학생들이 많이 입산했었으니까요. 이것도 제 가슴을 쳤던 계주도 기억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는 칠십 년대 중반에 강연을 갔다가 젊은이들과 알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들은 나와 더불어 문화운동 쪽의 연 관을 맺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 엉터리같이 우스갯짓을 잘하지만 생각은 제법 깊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등산을 갔다가 한라산의 그 수많은 자연동굴 중에서 새로운 굴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내가 「골짜기」라는 단편에 조금 묘사를 해 놓았습니다만, 그 안에는 녹슨 솥과 모닥불 터와 인간의 잔해가 있었습니다. 마치 분필가루같이 고스란히 풍화한 뼈의 무더기들이 여기저기 동굴을 따라서 뿌려져 있었지요. 신고해서 면 직원들과 의사들이 달려왔어요. 의사들이 줄자로 잔해를 재기도하고 남녀와 연령을 분간해내기도 하면 아랫동네에서 올라온 노파들 사이에서 누구라는 등 이름을 부르며 울음이 터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게릴라가 아닌 양민이었고 자연사로 판명되었습니다. 소설에서는 그들을 시간과 역사로부터 스스로 자 폐시켰던 절망의 정체를 묻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제주도에서 창립했던 문화 패 '수눌음'의 회원이 어느 날 눈을 빛내면서 청년시절에 가족의 곁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는 외삼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김석범이 참고자료로 들고 있는 『제주도 피의 역사-4·3무장투쟁의 기록』에 저자인 김봉현입니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들은 외삼촌의 도피행각이며 밤새껏 태우던 그이의 책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나는 필사본으로 돌아다니던 자료들을 뒤늦게 접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또 나는 어느 여인에게서 아버지의 말년과 죽음에 관한 처절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예전에 제주도에서 악독한 공비들이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아버지도 그때 고생을 많이 겪었다고 알았지만 설마 좋은 편이었겠지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해인가 도청에서 모범가족 상을 주었는데 자녀들은 영문 모르고 좋아들 했건만 아버지는 그날 따라 술 이 만취되어 울면서 상장을 찢었습니다. 언제는 우리끼리 잘 살아 보렸더니 박살을 내놓고 이게 무어냐는 통곡이었죠. 그녀의 아버지가, 나는 한라산 빨치산이었다고 했을 제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이는 중학생 때에 어 린 나이로 항쟁에 가담했습니다. 최후까지 버티다가 마지막 여덟 사람과 함께 생포되었고 나이 어린 본보기로 목숨을 건져 대구형무소에서 무기형을 받고 십 오 년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곧 뒤이어 전쟁이 일어나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좌익수들이 굶어 죽어갔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살아 남았습니다. 그러고는 고향에 돌아와 맘씨 착한 나이 어린 각시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건만 소주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간 경화로 운명하기 직전까지 그녀는 정상적 생활인이 아니었던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사회안전법 대상자였던 그는 술이 취하면 언제나 나직하게 산사람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른 곡조의 '울 밑에 선 봉선화' 말입니다. 나중에 딸이 간호를 할 때에, 죽기 며칠 전에 "미안하다"라고 한마디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는 그 어느 것이나 소설보다 더 가슴을 뜨겁게 만듭니다. 김석범의 『화산도』를 읽고 나면 4·3항쟁을 소재로 하고 있지 만 배경을 빌린 일본식 사소설이라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다섯 권의 소설은 犯년 2월말에서 5·10총선 전야까지 두어 달 남짓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지난 봄에 동경에서 실천문학자 송기원의-그의 모국 방문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물어달라는-부탁을 받고 동경에서 만난 것은 세 번째의 만남이 이었습니다. 그는 환갑이 넘은 초로의 나이인데도 술도 잘하고 건강도 좋습니다. 토는 제주도 억양이 섞인 일본식 사투리를 쓰고 남 과 섞이는 번거로운 일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문학예술에 관한 자부심과 그 것을 올바로 지켜내야겠다는 뜻은 단호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슬며시 거부감이 들다가도 그는 정직하고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그가 나를 우에로의 제주도 음식을 하는 집으로 데려갔지요. 새끼 회를 시켰습니다. 새끼 회는 태반에 들어 있는 새끼돼지를 짓 이겨서 양념에 버무린 것으로 제주도 사람들 외에는 비위가 상해서 잘 먹지 못하는 음식입니다. 나는 물론 팔도 잡식성이라 좋아하지만 요. 내가 현기영이나 김명식에게 곧잘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농담을 하지만 제주도 사람들은 원성 적으로 처음 보는 타향사람들을 경계하는 그런 냄새가 나지요. 김석범은 새끼 회를 숟가락으로 푹 떠서 입안에 넣더니 행복한 표정이 되면서 곧 풀어졌습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한 느낌 이였습니다. 그가 고향을 보고 싶어 경비행기로 멀리 한라산 상공을 둘러보고 아사히신문에 방문기를 쓴 얘기는 다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그가 제주도 얘기를 할 때에 내가 잘 아는 곳의 새끼 횟집이라든가 봄의 자리 회나 콩잎에 싸먹는 멸치 또는 전복 내장으로 담근 새우젓 얘기를 하면 그는 어서 가서 나토 먹어봐야지 하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렇지요, 『화산도』에는 그가 살로 그리워하는 상상 속의 제주도 풍경과 바람, 바다, 돌멩이, 파도가 메주냄새, 비바리의 살 냄새, 토방냄새 같은 것들과 어우러져서 항쟁을 다루려는 사실적인 산문의 힘을 자꾸만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민중봉기는 멀고 먼 소문일 뿐입니다. 마치 음울한 구름이 아득한 하늘가로 지나가며 가느다란 천둥이 불안하게 울려오는 것처럼. 소설을 끌고 나가는 것은 주로 이방근과 그의 주변을 통해서 입니다. 그런데 이방근은 제주도 토로의 도련님으로 양심적이나 결단성이 없고 토론을 잘하지만 관념적인 부르주아 청년인데, 퇴폐적이지만 또한 정직한 그런 인물입니다. 일부 혁명적 인텔리들이 그의 주변을 통해서 묘사가 되고 있지만 마치 목탄으로 몇 번씩 덧칠해버린 크로키의 인물처럼 애매 모호합니다 그들이 잠깐 명확하게 빛을 발하는 것은 남승지와 강음구가 봉기 자금을 모금하러 일본에 가서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친지들과 가족을 만날 때입니다. 도대체가 그 숨막힐 것 같은 혁명의 전야에 이방근과 같은 부유한 특수층주 인공의 일상적 권태를 어쩌면 그리도 자세하고 길게 묘사하는지, 어째서 항쟁의 주체인 중산간 부락의 농민들과 무장한 게릴라 청년들의 삶과 고통이 보이질 않는지, 할에서는 봉화가 오르고 뒤이어 8만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소설의 주제 앞에서 이유원의 피아노 타령은 무엇이며 그 오빠 이방근과 촌에 서 온 하녀 부엌이의 정욕은 무엇 때문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주도 민중항쟁의 주체가 누구이며 그들의 소망이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현재 조국의 통일운동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하는 실감나는 서술이 빠져 있다면 이 소설의 의도는 다를 데 있음이 분명합니다. 물론 김석범의 소설이 고향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소설이며, 일본과 같은 제약이 많은 땅에서의 삶의 어려움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태도가 소설의 시선을 결정한다는 상식적인 명제입니다. 김석범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치열하게 조국의 운명을 선택하여 뚜렷하게 조국통일운동에 이바지하겠다는 확실성이 엿보이지 않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이 길고 긴 소설이 현기영의 고뇌에 가득한 실감나는 소설들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입니다. 우 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투철한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이 아름다운 나라의 죽음과 환희를 우리 시대 속에 아로새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 그러면 이제 우리는 김학철을 만날 차례입니다. 내가 그의 단편집과 장편소설들을 처음 대한 것은 연변대학에 교환교수로 가 있었던 와세다 대학의 오오무라 도시오 교수를 통해서였습니다. 나는 삼 년 전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을 때에 연변의 조선족 문학과 연희예술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당시 동경 대에 연구하러 와 있던 중국 중앙당 간부인 국제문제연구소의 이창환 부소장과 만난 적이 있으며 그때에 북경대 조선어학부의 김선한이란 분이 『장백산』이란 잡지에 나의 『장길산』을 연재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김철 시인이라든가 연변대의 정판룡 교수나 김학철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학철의 소설집들은 대중보급용이라 지질도 형편없었고 장정도 아무렇게나 되어 있었어요. 그러나 점점 읽어가면서 나는 마치 오래 전에 잃어버린 얘기책을 다락에서 주운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렸던 우리의 조선문학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지니면서 안에는 알심이 은근하게 딱 버티고 들어앉아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김학철의 삶은 그야말로 '다 峯면 소설 열 권'입니다. 참고 삼아서 오오무라 교수의 김학철에 대한 소개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김학철 선생은 작가라기보다는 군인이요 혁명가였다. 따라서 이름도 열 개나 넘게 가지고 있었다. 김학철이라는 이름도 본명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경력은 본인에게 듣기는 했어도 불분명한 구석이 있기는 한데 현재 주변의 자료를 통해 선생의 경력을 더듬으면 대략 다음과 같다. 그는 1916년 원산 시에서 출생했다. 그곳의 보통학교를 나와 서울에 와서 중학시절을 보내는 중에 광주학생사견을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는 상급생의 행동에 편승하여 시위에 가담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이후 그는 학비가 들지 않는 학교를 찾아 상해로 건너간다. (이것이 1934년 아니면 1937년이다. ) 거 기서 그는 의열 단계의 민족혁명 조직에 들어가 활동을 하다가 테러활동에 한 계를 느끼고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황포 군관학교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중국국민당군의 핵심적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당시는 항일전쟁이라는 공 통 목적 아래 국공합작이 어렵게 성립되어가던 시기였다. 그런데 국민당군 이 선명한 항일전쟁을 전개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느낀 청년 김학철은 평생 의 친구이자 동료인 문정일과 함께 신 사군으로 탈출하여 이윽고 팔로군에 합류한다. 팔로군 가운데 조선의용군이 조직되었는데(1938년 10월) 그 수는 초창기에는 2백 명 정도였으나 나중에는 3천 명으로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선생은 이 조선의용군에 소속되어 항일 전에 복무하던 중 하북 ·산서성 지경에 있는 태항산에서의 일본군과의 전투(1943년 호가장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의식불명 중에 일본군에 붙잡혀 나가사끼로 압송되었다. 3곳에서 그 는 부상당한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는 한편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43년 6월에 징역 십 년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45년 광복과 함께 풀려나게 된다. 외다리의 항일영웅은 서울에 들어오자 정치활동 과 함께 문학활동을 전개한다. 여운형, 이태준, 이원조, 한효, 임화, 지하련 등과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미 군정 하에서 좌익운동이 탄압을 받자 1946년 11월 남몰래 월북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안내 겸 호위병아 지금의 부인이 되었다. 북에서는 로동신문, 인민군신문 등에서 근무하지만 별 다른 일이 없어 문학활동에 전념한다. 이 시기에 서울에서 발표된 단편 「담뱃국」이 평양의 문화전선에 전재되기도 하고 김사량과 친교를 맺기도 한다. 얼마 후 .6·25가 발발하고 유엔군이 밀고 올라오자 1951년 북경으로 들어가 정령의 문하에서 문학수업을 쌓는다. 그리고 1952년부터는 조선족 자치주 수도인 연길시에서 거주하게 된다. 여러 편의 장편, 중력들을 발표하는데 1957년의 반 우파투쟁에서 비판받고 이후 실로 24년간에 걸쳐서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문화혁명 기간에는 반혁명 스파이로 몰려 십 년간(1967∼1977)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0년에 와서야 비로소 사회활동에의 복귀를 허락 받아 마음을 가다듬고 참작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1985년에 중국 국적을 취득한 이래 정식으로 중국작자협회 연변분회에 가입하여, 보통사람 같으면 이미 은퇴할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연변분회의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
그의 『격정시대』는 근년에 내가 읽은 국내외 소설 중에서 가장 좋게 읽은 작품입니다. 위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것이었고 거의 반평생이나 붓을 꺾었던 노인이 어떻게 문학에의 정열을 고스란히 지켜왔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우리 '작가회의'의 대 선배 김정한 회장도 근 이십여 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수라도」 같은 중요한 작품들을 발로했는데, 그와 비교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두 분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이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다움과 낙천적인 생명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김학철은 거기에다 솜씨 좋은 이야기꾼으로서 생활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기억하고 묘사해내는 입심과 유머가 있습니다. 나는 종종 돌아간 모친의 이야기 솜씨에 감탄을 하고는 했는데, 북선 지방의 음식인 노티를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그것을 저장하는 이야기에다 형제들끼리 더 먹으려는 갈등의 심리적인 묘사라든가, 어떤 동무나 친척의 습성, 의복, 말씨, 태도에 관한 적절하고도 끝없는 비유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옛날의 노인들은 대개가 고렇게 이야기 솜씨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옛날얘기는 등잔불 밑에서 할머니가 해주거나 사랑방의 화롯가에서 할아버지가 해주는 걸로 으레 정해져 있었지요. 왜 그런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들은 우선 경험이 많고 가족이나 공동체의 역사에 대한 일정한 도덕적 판단과 규범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학철의 항일투쟁기로 일관된 그의 반 자전적 소설들은 바로 예전에는 광야를 달리던 노전사가 마치 은퇴한 추장처럼 나직하고 구수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 같습니다. 『격정시대』는 우리가 어릴 적에 동네에서 흔히 만났음직한 선장이나 시동이 같은 인물들의 성장을 통하여 한국 현대사에서 빠져 있던 항일무장투쟁사의 한 부분을 되살려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선주들에게 착취당하기 일쑤이므로 배를 갖기가 소원인 그의 아버지가 선장이라고 이름을 짓는 것도 매우 타당하고 의미가 있지요. 사실 풀떼죽도 못 먹는 소작인 아이의 이름에 만석이니 만두니, 얼마나 그런 이름이 많아요? 선장이가 원산총파업의 과정에서 씨동이와 함께 민족의식에 눈을 떠가는 과정도 그리 비장하거나 심각하지 않게 일상생활과의 엇갈림 속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일본인의 노리개인 쌍년이와 부두노동자 써동이의 사랑은 상대적으로 순결하게 그려져 있지요. 쌍년이네 집에 선장이가 누이와 함께 가서 얻어먹는 음식의 묘사가 얼마나 그럴듯한지 나는 칙을 보다가 밤에 부엌에 나가 냉장고를 뒤지기도 했습니다. 모금하려고 강도 하는 장면의 어설플 행동들이나 배반자의 숙청마저도 '인간적'입니다. 내가 아는 이들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주말에 이 책을 들었는데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단숨에 읽었다지요. 그리고 이런 책에서는 공해의 찌꺼기가 남지를 않는 것입니다. 나도 시종 웃으면서 책을 봤는데 김학철의 입심이 이런 식입니다. 군관향교 전우 한 사람의 성격을 묘사하는 장면인데, 중국의 기차 안에서는 우리네가 찐 계란을 팔듯이 부패시킨 오리알을 파는데 승객들이 점심이나 간식으로 골잘 사먹는 모양이지요. 중국 사람들은 체면을 중시해서 남 앞에서 음식을 먹으려면 예의 상 칭하고 타서 먹습니다. 나도 대만에서 그런 일을 종종 겪었지요. 선장이의 전우가 어찌나 짓궂고 유들유들 한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중국인이 오리알을 딱 한 알 사서 정성스런 게 껍질을 벗겨 제 입에 넣으려다가 예의로 칭 !하고 보여주자마자 쎄 쎄 하고는 날름 빼앗아 먹어버렸다는 거죠. 그 뒤로 중국 밀은 쓸개를 씹은 얼굴이고, 웃음을 참으며 여행을 계속하는 기차 안의 풍경이 나옵니다. 이러할 작은 산화에서도 그가 얼마나 인간에 대한 깊은 관찰자인가 하는 점이 엿보입니다. 『격정시 대』가 최근인 85년에 나온 김학철의 자전적 소설임에 비해서 『해란강아 말하라』는 중국이 혁명을 끝내고 식민지적 봉건사회에서 근대적인 사회주의 국가로의 내분 건설과 개혁에 나섰던 54년 무렵에 쓴 소설로서, 일제시대에 간도지방의 우려 농민들이 또 다른 항일혁명의 담당자였음을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