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光州에서 보내는 편지. 김준태(5월과 문학, 남풍, 1988. 8)
본문
光州에서 보내는 편지
K형. 그 동안 몸 건강히 계셨습니까. 학교에선 아이들을 잘 가르치시고, 詩도 부지런히 쓰고 있는지요. 지난 여름방학에 대구의 반월담에서 헤어진 후, 참 오랜만에 저는 형에게 소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마침 '신동아'에서 원고청탁이 왔는지라, 저는 이 자리를 통하여 오늘형과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요즈음 그곳 대구의 날씨는 어땠는지, 문학하는 친구들은 자주 만나 여전히 민족문학과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위하여 분주하게 뛰고 있는지, 그리고 특히 대통령 선거 기간을 맞이하여 어떠 어떠한 관심과 의견들을 나누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K형. 지금 저는 금남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어느 출판사의 사무실 한쪽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80년대 벽두의 치열한 싸움터였던 금남로, 그리고 우리 시대의 노래와 함성과 의미가 끊임없이 뒤엉키어 물결치는 금남로를 바라보며, 지리산 너머 저쪽 대구의 K형께, 오늘 제가 보고 겪은 김영삼민주당총재의 광주대회 얘기를 들려줄까 합니다.
11월 14일. 오늘은 "토요일인지라 학교에서 근무를 빨리 마치고, 저는 광주행 버스를 탔습니다. 형도 알다시피, 저는 남도의 명산인 월출산 근처 영암군 신북 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는데, 이 학교는 광주시에서 남쪽으로 40km떨어진 곳이지요. 차를 타고 오면서 보았는데(아마 전국의 어느 지역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국도 변의 주택이나 상가들의 담벼락엔, 대통령선거 주자들의 얼굴들이 셀 수없이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어느 것은 찢어지고, 어느 것은 비에 젖어 볼상 사납게 얼룩져 있더군요. 차창을 통하여 보니 목포 쪽에선가 올라가는 듯한 경찰버스가, 제가 타고 있는 완행버스 옆을 휭휭 스쳐가고 있었습니다. 경찰버스 안엔 아마 사복전경들이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광주에 도착하여 집안 일을 마치고 '신동아'의 부탁도 있고 하여 저는 재빨리 광주 역으로 달려갔습니다.
공설운동장 주변엔 경상도나 타지에서 동원된 듯한 김영삼총재의 지지자들이 전세버스나 관광버스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며, 시민들도 하나 둘씩 광주 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광주 역 광장엔 '김영삼'이라고 쓴 대형 아치가 3개 나란히 세워져 있었으며, 그 밑엔 역시 3층 대형연단이 우뚝 올라와 있었습니다. 연단 좌우엔 국내기자들과 외신기자들이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으며, 수 십 개의 초대형 고성능 스피커에 선 김영삼 총재를 주제로 한 로고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으며, 사이사이 "김영삼" "김영삼"을 외치었습니다. 그러니까 11월 14일 토요일 오후 2시 40분 경. 광주 역 광장엔 제가 보기론 5만 여의 군중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군중은 거의 흥분되어, "양보""양보" 외치거나 "김대중" " 김대중"하는 쪽과 "김영삼" "김영삼"하는 쪽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뿌려진 각종 홍보 유인물, '통일민주당보', 그리고 칼라시대를 자랑하는 듯한 피켓, 피켓의 물결, 군중들의 갖가지함성 ·야유에다 두 귀를 찢어져 나갈 정도로 내뿜는 스피커의 굉음 속에서, 일군의 성직자들은 "김영삼씨는 성직자 명의 도용을 해명하라"라는 대형 프랑 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방 곳곳에서, 특히 연단 앞 쪽에선 각종 유인물과 당보와 피켓을 모아 놓고 젊은 사람들이 불을 지르며 예의 갖가지 구호를 외쳐 댔습니다. 연기와 불길이 치솟고, 달걀과 돌멩이가 종종 연단 쪽으로 날아갔습니다. 연달 좌우엔, 그리고 앞뒤론 수많은 사복경찰들과 젊은 민주당원들이 어깨와 어깨를 끼고 연단 가까이로 밀려드는 군중들을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오후 3시 정각. 김영삼 민주당총재가 당원들과 연단에 올라섰습니다. 김재광 선거대책본부장이 김 후보를 짤막하게 소개하고 이어서 김후보의 유세연설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각종 유인물과 피켓을 태우는 불길과 연기가 그치질 않았고, 거기에서 타다 남은 예의 피켓 조각들이 연단으로 날아갔습니다. 함성, 함성, 야유, 야유, 구호, 구호 외침 등으로 하여 어느새 스피커의 소리도 귀에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김영삼 민주당 총재의 광주대회는 13분만에 끝나고, 그 일행은 도망치듯이 광주 역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때 제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꼭 3시 13분이었습니다. 하늘에선 가느다란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고, 그러나 군중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고 갖가지 구호를 합창했습니다. '오월의 노래'를 비롯하여,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여러 가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도 난전을 벌여놓고,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라는 화보철자나,'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5·18광주 항쟁 증언집' 등의 책자를 파는 서점주인들이 있었습니다. 운동권의 노래를 담은 테이프, 누구 누구의 연설을 담은 테이프, 민주화와 통일을 갈망하는 문구와 그림이 찍혀진 기념타월이나 보자기들도 1,000원 정도의 가격으로 팔려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정말 좀처럼 사람들은 광주 역 광장을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4시 15분 경이었습니다. 최루탄이 터지고 전경들과 군중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그 독한 최루탄 냄새를 마시며 어떤 두 아버지가, 핸드마이크를 들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이를 찾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여기서 잃어버린000라는 7세 아이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숫제 그 두 아버지는 일시에 미아가 돼버린 자신들의 아이를 찾기 위하여, 광주역 광장주변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헤매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K형. 저는 국내기자들을 만나 오늘의 불발된 이 행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 위해, 연단 위 기자석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국내기자들은 한결같이 완장을 안찼는지라 만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외신기자들과 인터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서투른 영어로 "오늘의 이 행사를 어떻게 생각하며, 당신들은 군중들의 행위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라고 물었습니다. 'S·F·E·C'라고 쓰인 노오란 바탕의 완장을 긴 외신기자들은, "아, 모를 일이군요"라고 대답할 뿐, 자기들의 관점을 함부로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외신기자는 자신도 상당히 흥분되어 "광주는 굉장한 곳이군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말하는 '굉장한'이라는 형용사가 어떠한 뜻으로 쓰였는지, 깊이 간파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광주 역 광장 주변을 돌아다니며 여기 저기 길게 붙어져 있는 대자보를 보았습니다. 그중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명의로 되어있는 대자보가 우선 그것이었습니다. "영 ·호남 대동 단결하여 민주화를 앞당기자"가 그것이었는데, 거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유심히 읽어 내리고 있었습니다. 4시 30분 경, 하늘에는 여전히 민주당의 대형 애드벌룬이 떠 있었고, 그러나 조금 전까지 몇 번이나 광주 역 상공을 맴돌던 경찰비행기는 보이진 않았습니다. 행사기간 중도의 끝났는지라, 미처 배포되지 않은 엄청난 유인물더미와 통일민주당보의 더미가 어딘 가로 실려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K형.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통일민주당보' 거기에 제 詩가 두 편 실려져 있지 않겠습니까. 문예지도 아니고 문인들의 기관지도 아닌, 선거용 홍보 물에 제 시가 큼직하게 그것도 두 편이나 실려져 있어, 그만 저는 '멍!' 해졌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저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것을 이겨내느라고 담배를 입에 물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광주일보'(11월 14일자신문)에 제 시가 민주당의 광고 속에 인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여러 통의 곤혹스러운 전화를 받은 바 있습니다. "김준태 시인이 응해주었기 때문에, 그런 정치 판 선거용 홍보광고에 시가 나온 것이 아닙니까?" 따위의 전화를 받으며, 저는 땀을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어떤 시인이 자신의 순수한 작품을, 특수정당의 신문광고나 당보에 쾌히 응해줄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K형. 저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친구의 출판사에 와서도 그일 때문에, 거기 찾아온 여러 친구들로부터 예의 인용된 시들에 대하여 핀잔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다수 많은 사람들, 그리고 문우들의 오해를 하루 속히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성명서를 내야한다고 각오했습니다. 성명서 내용은 저의 시 '광주로 가는 길'파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를 본 지은이에 게 사전에 승낙도 없이 선거용 홍보 물에 제멋대로 도용한 것은 한 인간에 대한명예훼손일 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문학정신을 더럽히는 무식한 처사이며 명백한 저작권 침해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며, 한 시인의 작품을 아전인수격으로 정치적 이용물로 상품화시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문학이란, 그것도 시는 어느 일 개인의 선거놀음판 희생이 되어 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K형, 제 이야기는 그렇고, 오늘밤 저는 출판사 밑 S 다방에서 TV'를 보았습니다. 9시 뉴스였습니다. 김영삼 총재의 광주대회가 중단 · 좌절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지역감정 운운하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아아, K형! 이 문명사회에,그것도 전국이 1일 권에 들어 선지가 오래된 이 판국에도 왜 우리는 '지역감정'으로 하여 계속 시달림을 받아야 합니까. 지역감정이 민주화의 최대의 장해요인으로 등장해버린 이 시점에서, i형과 저는 이 자리를 통하여 깨기를 깊이 그리고 따습고 넉넉하게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담을 곁들인다면, K형이 알다시피 저는 처가가 경상남도 진주가 아닙니까. 저는 일년에 적어도 두어 차례,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지리산 줄기를 넘어 섬진강 휴게소를 지나 진주에 간답니다. 장모님과 장인께서 거기 살고 계실 뿐만이 아니라, 처남, 처제, 동서들이 보고 싶어 가는 것입니다. 꼭 무슨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저는 혼자서 아니면 처와 두 아이를 데리고 처가가 있는 진주로 여행을 가는 것입니다. 처가 사람들은 그 쪽 집안의 조상들이 그래 왔듯이, 완연한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 두 아들 녀석은 지금 광주 농성 초등 학교에 다니는데, 간혹 처남 처제가 광주에 오면 "삼촌! 삼촌!" "이모! 이모!"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답니다.
K형, 저는 그러나, 해마다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을 오가면서 소위 그'지역감정'을 여러모로 염려 해왔습니다. 왜 이 작은 땅 덩어리에서, 무엇 때문에 우리는 '지역감정'이란 어휘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되묻곤 했습니다.
양식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모두가 다 걱정하고 있는 터이듯이, 지역감정은 우리 민족의 오늘은 물론 내일을 위하여 그야말로 반민족적인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역감정'은 민족이 대동 단결하는 데 있어서 반민주적이요·반역사적이요·반민중적이요·반민족적이요,그리고 남북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데 있어서 반통일적 처사에서 우러나온 감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올해만 하더라도 지역감정을 걱정하는,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많은 잡지들과 신문들이 예의 문제들을 기획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다 TV토론 같은 것도 몇 차례 있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나 제가 보기엔 수박 겉핥기 식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부산산업 대 조경근 교수의 '정치사회화의 환각에서 본영 · 호간의 지역감정 실재와 악화 및 그 해소'라는 사례연구논문과, 전남대학교 김광수 교수의 연구발표논문은 상당한 설득력과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조경근 교수의 논문은 '광주 및 대구지역의 대학생들에 대한설문조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조교수는 이 땅의 지역감정의 형성요인으로, 첫째가 자연환경이나 문화 ·관습에 기인한 데서 흑은 삼국 시대적 나제동맹의 결렬사태 등에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의한 지역감정의 조장 ·악화정책, 세 번째로는 엘리트충 원 및 경제개발정책상의 혜택편중, 네번째로는 정치인들에 의한 연고지관계의 지나친 강조나 지역감정의 악용이 바로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킨 큰 요인들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역시 전남대학 김광수 교수도 부산의 조경근 교수와 같은 논리를 펼치며, 비이성적이요 비민주적이요 반민족적인 지역감정의 정체를 찾아내어 지역간의 대동단결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K형. 선거국면의 얘기 속에 들어와서 말한다면, 지난 11월 1일 저녁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의 숙소였던 부산 국제호텔 앞에서의 신원을 알 수 없는 청년 300여명의 폭력난동이나, 그리고 이번 광주 역 광장에서의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광주대회 중단사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반성을 촉구하기도 합니다. 71년 이후 실시된 직선제대통령선거에서 우리 영 ·호남 그리고 경기 ·강원 ·충청지방 사람들은 실로 냉정한 안목으로 투표에 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민족사의 기로에 서서,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우리 민족이 가야할 길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K형. 바람이 붑니다. 옷을 입을 때 혹시 단추를 잘못 끼우고, 옷을 입지 않았는지, 서로서로 생각하면서 살아갑시다. K형, 다가오는 겨울방학엔, 서로 기분 좋은 얼굴로 만나 웃어 봅시다. 따뜻한 설렁탕을 앞에 놓고 소주를 권하면서‥‥‥‥오늘은 이만 쓸까요. K형.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신동아,1987. 11)
K형. 그 동안 몸 건강히 계셨습니까. 학교에선 아이들을 잘 가르치시고, 詩도 부지런히 쓰고 있는지요. 지난 여름방학에 대구의 반월담에서 헤어진 후, 참 오랜만에 저는 형에게 소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마침 '신동아'에서 원고청탁이 왔는지라, 저는 이 자리를 통하여 오늘형과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요즈음 그곳 대구의 날씨는 어땠는지, 문학하는 친구들은 자주 만나 여전히 민족문학과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위하여 분주하게 뛰고 있는지, 그리고 특히 대통령 선거 기간을 맞이하여 어떠 어떠한 관심과 의견들을 나누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K형. 지금 저는 금남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어느 출판사의 사무실 한쪽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80년대 벽두의 치열한 싸움터였던 금남로, 그리고 우리 시대의 노래와 함성과 의미가 끊임없이 뒤엉키어 물결치는 금남로를 바라보며, 지리산 너머 저쪽 대구의 K형께, 오늘 제가 보고 겪은 김영삼민주당총재의 광주대회 얘기를 들려줄까 합니다.
11월 14일. 오늘은 "토요일인지라 학교에서 근무를 빨리 마치고, 저는 광주행 버스를 탔습니다. 형도 알다시피, 저는 남도의 명산인 월출산 근처 영암군 신북 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는데, 이 학교는 광주시에서 남쪽으로 40km떨어진 곳이지요. 차를 타고 오면서 보았는데(아마 전국의 어느 지역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국도 변의 주택이나 상가들의 담벼락엔, 대통령선거 주자들의 얼굴들이 셀 수없이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어느 것은 찢어지고, 어느 것은 비에 젖어 볼상 사납게 얼룩져 있더군요. 차창을 통하여 보니 목포 쪽에선가 올라가는 듯한 경찰버스가, 제가 타고 있는 완행버스 옆을 휭휭 스쳐가고 있었습니다. 경찰버스 안엔 아마 사복전경들이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광주에 도착하여 집안 일을 마치고 '신동아'의 부탁도 있고 하여 저는 재빨리 광주 역으로 달려갔습니다.
공설운동장 주변엔 경상도나 타지에서 동원된 듯한 김영삼총재의 지지자들이 전세버스나 관광버스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며, 시민들도 하나 둘씩 광주 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광주 역 광장엔 '김영삼'이라고 쓴 대형 아치가 3개 나란히 세워져 있었으며, 그 밑엔 역시 3층 대형연단이 우뚝 올라와 있었습니다. 연단 좌우엔 국내기자들과 외신기자들이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으며, 수 십 개의 초대형 고성능 스피커에 선 김영삼 총재를 주제로 한 로고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으며, 사이사이 "김영삼" "김영삼"을 외치었습니다. 그러니까 11월 14일 토요일 오후 2시 40분 경. 광주 역 광장엔 제가 보기론 5만 여의 군중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군중은 거의 흥분되어, "양보""양보" 외치거나 "김대중" " 김대중"하는 쪽과 "김영삼" "김영삼"하는 쪽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뿌려진 각종 홍보 유인물, '통일민주당보', 그리고 칼라시대를 자랑하는 듯한 피켓, 피켓의 물결, 군중들의 갖가지함성 ·야유에다 두 귀를 찢어져 나갈 정도로 내뿜는 스피커의 굉음 속에서, 일군의 성직자들은 "김영삼씨는 성직자 명의 도용을 해명하라"라는 대형 프랑 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방 곳곳에서, 특히 연단 앞 쪽에선 각종 유인물과 당보와 피켓을 모아 놓고 젊은 사람들이 불을 지르며 예의 갖가지 구호를 외쳐 댔습니다. 연기와 불길이 치솟고, 달걀과 돌멩이가 종종 연단 쪽으로 날아갔습니다. 연달 좌우엔, 그리고 앞뒤론 수많은 사복경찰들과 젊은 민주당원들이 어깨와 어깨를 끼고 연단 가까이로 밀려드는 군중들을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오후 3시 정각. 김영삼 민주당총재가 당원들과 연단에 올라섰습니다. 김재광 선거대책본부장이 김 후보를 짤막하게 소개하고 이어서 김후보의 유세연설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각종 유인물과 피켓을 태우는 불길과 연기가 그치질 않았고, 거기에서 타다 남은 예의 피켓 조각들이 연단으로 날아갔습니다. 함성, 함성, 야유, 야유, 구호, 구호 외침 등으로 하여 어느새 스피커의 소리도 귀에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김영삼 민주당 총재의 광주대회는 13분만에 끝나고, 그 일행은 도망치듯이 광주 역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때 제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꼭 3시 13분이었습니다. 하늘에선 가느다란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고, 그러나 군중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고 갖가지 구호를 합창했습니다. '오월의 노래'를 비롯하여,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여러 가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도 난전을 벌여놓고,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라는 화보철자나,'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5·18광주 항쟁 증언집' 등의 책자를 파는 서점주인들이 있었습니다. 운동권의 노래를 담은 테이프, 누구 누구의 연설을 담은 테이프, 민주화와 통일을 갈망하는 문구와 그림이 찍혀진 기념타월이나 보자기들도 1,000원 정도의 가격으로 팔려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정말 좀처럼 사람들은 광주 역 광장을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4시 15분 경이었습니다. 최루탄이 터지고 전경들과 군중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그 독한 최루탄 냄새를 마시며 어떤 두 아버지가, 핸드마이크를 들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이를 찾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여기서 잃어버린000라는 7세 아이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숫제 그 두 아버지는 일시에 미아가 돼버린 자신들의 아이를 찾기 위하여, 광주역 광장주변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헤매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K형. 저는 국내기자들을 만나 오늘의 불발된 이 행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 위해, 연단 위 기자석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국내기자들은 한결같이 완장을 안찼는지라 만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외신기자들과 인터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서투른 영어로 "오늘의 이 행사를 어떻게 생각하며, 당신들은 군중들의 행위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라고 물었습니다. 'S·F·E·C'라고 쓰인 노오란 바탕의 완장을 긴 외신기자들은, "아, 모를 일이군요"라고 대답할 뿐, 자기들의 관점을 함부로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외신기자는 자신도 상당히 흥분되어 "광주는 굉장한 곳이군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말하는 '굉장한'이라는 형용사가 어떠한 뜻으로 쓰였는지, 깊이 간파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광주 역 광장 주변을 돌아다니며 여기 저기 길게 붙어져 있는 대자보를 보았습니다. 그중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명의로 되어있는 대자보가 우선 그것이었습니다. "영 ·호남 대동 단결하여 민주화를 앞당기자"가 그것이었는데, 거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유심히 읽어 내리고 있었습니다. 4시 30분 경, 하늘에는 여전히 민주당의 대형 애드벌룬이 떠 있었고, 그러나 조금 전까지 몇 번이나 광주 역 상공을 맴돌던 경찰비행기는 보이진 않았습니다. 행사기간 중도의 끝났는지라, 미처 배포되지 않은 엄청난 유인물더미와 통일민주당보의 더미가 어딘 가로 실려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K형.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통일민주당보' 거기에 제 詩가 두 편 실려져 있지 않겠습니까. 문예지도 아니고 문인들의 기관지도 아닌, 선거용 홍보 물에 제 시가 큼직하게 그것도 두 편이나 실려져 있어, 그만 저는 '멍!' 해졌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저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것을 이겨내느라고 담배를 입에 물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광주일보'(11월 14일자신문)에 제 시가 민주당의 광고 속에 인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여러 통의 곤혹스러운 전화를 받은 바 있습니다. "김준태 시인이 응해주었기 때문에, 그런 정치 판 선거용 홍보광고에 시가 나온 것이 아닙니까?" 따위의 전화를 받으며, 저는 땀을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어떤 시인이 자신의 순수한 작품을, 특수정당의 신문광고나 당보에 쾌히 응해줄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K형. 저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친구의 출판사에 와서도 그일 때문에, 거기 찾아온 여러 친구들로부터 예의 인용된 시들에 대하여 핀잔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다수 많은 사람들, 그리고 문우들의 오해를 하루 속히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성명서를 내야한다고 각오했습니다. 성명서 내용은 저의 시 '광주로 가는 길'파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를 본 지은이에 게 사전에 승낙도 없이 선거용 홍보 물에 제멋대로 도용한 것은 한 인간에 대한명예훼손일 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문학정신을 더럽히는 무식한 처사이며 명백한 저작권 침해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며, 한 시인의 작품을 아전인수격으로 정치적 이용물로 상품화시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문학이란, 그것도 시는 어느 일 개인의 선거놀음판 희생이 되어 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K형, 제 이야기는 그렇고, 오늘밤 저는 출판사 밑 S 다방에서 TV'를 보았습니다. 9시 뉴스였습니다. 김영삼 총재의 광주대회가 중단 · 좌절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지역감정 운운하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아아, K형! 이 문명사회에,그것도 전국이 1일 권에 들어 선지가 오래된 이 판국에도 왜 우리는 '지역감정'으로 하여 계속 시달림을 받아야 합니까. 지역감정이 민주화의 최대의 장해요인으로 등장해버린 이 시점에서, i형과 저는 이 자리를 통하여 깨기를 깊이 그리고 따습고 넉넉하게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담을 곁들인다면, K형이 알다시피 저는 처가가 경상남도 진주가 아닙니까. 저는 일년에 적어도 두어 차례,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지리산 줄기를 넘어 섬진강 휴게소를 지나 진주에 간답니다. 장모님과 장인께서 거기 살고 계실 뿐만이 아니라, 처남, 처제, 동서들이 보고 싶어 가는 것입니다. 꼭 무슨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저는 혼자서 아니면 처와 두 아이를 데리고 처가가 있는 진주로 여행을 가는 것입니다. 처가 사람들은 그 쪽 집안의 조상들이 그래 왔듯이, 완연한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 두 아들 녀석은 지금 광주 농성 초등 학교에 다니는데, 간혹 처남 처제가 광주에 오면 "삼촌! 삼촌!" "이모! 이모!"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답니다.
K형, 저는 그러나, 해마다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을 오가면서 소위 그'지역감정'을 여러모로 염려 해왔습니다. 왜 이 작은 땅 덩어리에서, 무엇 때문에 우리는 '지역감정'이란 어휘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되묻곤 했습니다.
양식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모두가 다 걱정하고 있는 터이듯이, 지역감정은 우리 민족의 오늘은 물론 내일을 위하여 그야말로 반민족적인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역감정'은 민족이 대동 단결하는 데 있어서 반민주적이요·반역사적이요·반민중적이요·반민족적이요,그리고 남북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데 있어서 반통일적 처사에서 우러나온 감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올해만 하더라도 지역감정을 걱정하는,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많은 잡지들과 신문들이 예의 문제들을 기획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다 TV토론 같은 것도 몇 차례 있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나 제가 보기엔 수박 겉핥기 식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부산산업 대 조경근 교수의 '정치사회화의 환각에서 본영 · 호간의 지역감정 실재와 악화 및 그 해소'라는 사례연구논문과, 전남대학교 김광수 교수의 연구발표논문은 상당한 설득력과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조경근 교수의 논문은 '광주 및 대구지역의 대학생들에 대한설문조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조교수는 이 땅의 지역감정의 형성요인으로, 첫째가 자연환경이나 문화 ·관습에 기인한 데서 흑은 삼국 시대적 나제동맹의 결렬사태 등에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의한 지역감정의 조장 ·악화정책, 세 번째로는 엘리트충 원 및 경제개발정책상의 혜택편중, 네번째로는 정치인들에 의한 연고지관계의 지나친 강조나 지역감정의 악용이 바로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킨 큰 요인들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역시 전남대학 김광수 교수도 부산의 조경근 교수와 같은 논리를 펼치며, 비이성적이요 비민주적이요 반민족적인 지역감정의 정체를 찾아내어 지역간의 대동단결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K형. 선거국면의 얘기 속에 들어와서 말한다면, 지난 11월 1일 저녁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의 숙소였던 부산 국제호텔 앞에서의 신원을 알 수 없는 청년 300여명의 폭력난동이나, 그리고 이번 광주 역 광장에서의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광주대회 중단사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반성을 촉구하기도 합니다. 71년 이후 실시된 직선제대통령선거에서 우리 영 ·호남 그리고 경기 ·강원 ·충청지방 사람들은 실로 냉정한 안목으로 투표에 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민족사의 기로에 서서,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우리 민족이 가야할 길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K형. 바람이 붑니다. 옷을 입을 때 혹시 단추를 잘못 끼우고, 옷을 입지 않았는지, 서로서로 생각하면서 살아갑시다. K형, 다가오는 겨울방학엔, 서로 기분 좋은 얼굴로 만나 웃어 봅시다. 따뜻한 설렁탕을 앞에 놓고 소주를 권하면서‥‥‥‥오늘은 이만 쓸까요. K형.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신동아,198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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