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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월과 문학 / 절망과 좌절의 극복, 그리고 희망의 현실화를 위하여. 김준태(5월과 문학, 남풍, 198…

본문

5월과 문학

절망과 좌절의 극복, 그리고 희망의 현실화를 위하여



  어느 때부터 인지, 아니 정확히 말해서, 우리에겐 5월이 주는 이미지가 80년 그날부터 변해 버렸습니다. 신록이 우거지고 산천의 곳곳에 싱그러운 꽃이 피어나는 그 5월이 이미 우리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도회지를 벗어나면 맑은 바람결이 넘실대던 5월 멀리서 종달새가 보일 듯이 안 보일 듯이 나래치며 삐죵삐죵 노래하던 5월, 보리밭 가장자리에서 어머니나 할머니가 우리를 부르던 5월, 대학가의 마로니에 파르랗게 나풀대던 잎새들의 5월, 그5월은 이미 우리 곁을 멀리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뿐입니까. 심지어는 우리가 애송해 마지 않던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따위의 시마저, 오늘에 읽어보면 무섭게 그리고 전혀 다른 기분으로 5월은 우리를 몰아 갑니다 어디한번 읽어볼까요. 물론 읽는 이의 목소리, 혹은 억양의 높낮이에 따라 달리 느껴지겠지만 말입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에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에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자연적이고 향토적인 리리시즘, 즉 영랑의 천부적인 서정주의 시가, 그리고 그 시에 나타난 5월이 왜 이렇듯 오늘날 우리에게 처참하게 들려오는지, 울려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l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j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l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하는 대목에선 그 어떤 섬찟함, 무서움 증, 잔인함, 처절함의 극치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위 영랑 시에서의 '모란이 피는 5월'이 급기야는 아니 당연하게 '잔인한 5월'로 대치됨을 보고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언어의 변이·변용시대, 혹은 정서의 탈바꿈 시대에 기막히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의 본질이, 정서의 본질이 사람을 떠나버린 시대, 1980년 5월은 그래서 특히 우리에게 그 아픔을 남겨 줘 버렸습니다. '아름다운 5월'의 이미지를 '잔인한 5월'의 이미지로 변질 ·변이 ·변용 시켜버린 1980년 5월!
  그 5월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고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아픔과 교훈과 그 무엇을 길고 어려운 숙제처럼, 그러나 꼭 풀어야 할 숙제처럼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80년 5월은 왜 있었는가, 80년 광주의 5월은 역사에서 어떻게 천착 ·조명 · 가치창조, 그리고 생산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받아 들여져야 하는가, 그리고 또한 80년 그날의 5월은 무엇으로 풀어져야 하고 우리의 바람직한 역사에 어떻게 기여해야 할 것인가, 이와 같은 생각에 있어선 여기 연단에 서있는 저 뿐만이 아니라 여기 모이신 여러분,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풀어가야 할 숙제일 것 같습니다.
  80년 5월, 저는 광주에 있었습니다. 광주의 '전남고등학교'란 곳에서 독일어인가 뭐인가를 가르치던 한 나약한 훈장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처 불기둥처럼 솟아오르던 '5월'을 보았습니다. 아, 불기둥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불기둥 보다 더 높이 솟아오르던 눈물 기둥들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그러니까 5월 19일 '전남고등학교'에서 마지막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생각나시겠지요. 저는 '알퐁스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불어선생님처럼, 멀리서 그러나 너무 가까이 들려오는 프로이센 병사들의 북소리와 총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아, 어쩌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독일어 시간! 저는 1937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터져 올랐던 게르니카의 학살, 그리고 '스페인내란'을 머리에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때 어딘가 에서 총살되어 버렸던 스페인어계통의 최고의 민요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를 마음속으로 불러대고 있었습니다. "로르카! 로르카!"그렇게 불러대면서 나는,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르시아 로르카의 '달이 떠오를 때 La Luna Asoma The Moon ristng'라는 시를, 영어와 스페인어와 우리말로 옮겨 칠판에 써주고 교실을 나와 버렸습니다.

달이 떠오를 때
정들은 죽은 듯이 매달려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비로소 나타나 보이는구나.

달이 떠오를 때
바다는 뭍으로 둘러싸이고
가슴은 망망대해의 섬처럼
울먹거리는 구나.
떠오르는 둥근 달 밑에선
어떠한 사람들도 오렌지를 먹지 않는구나.
그러나 그 누군가는
차갑도록 퍼어런 열매를
먹기 마련인가 보구나,
달이 떠오를 때
일 백의 똑같은 얼굴을 가진 달,
은빛 동전 부스러기들도
주머니 속에서만 흐느끼는 구나.

  '안녕 :Despedida:Farewell'이란 시에서도 "내가 만약 죽으면 l 발코니의 문을 열어 다오"라고 노래했던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구를 떠올리며 교실 문을 나섰을 때, 역시 멀리서 가까이서 함성소리 아우성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광주의 1980년 5월은 사실상 5월 16일부터 5월 27일까지가 가장 치열한 순간이었습니다. 국내 매스컴들은 지금도 그때를 '광주사태'라고 부르지만, 당시 서방 계의 외신들을 봉기, 즉 Uprising'이라고 했으며 지금도 그러하리라고 봅니다. 물론 광주사람들은 80년 5월 기간을 이름하여, '광주5월 항쟁 ''5월 광주민중항쟁' '광주L항쟁의거' '광주민중봉기'라고 이름하고 있으며, 이제 국내의 다른 지방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히 '5월 광주항쟁' 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실로 1980년 광주의 5월은 광주시민은 물론 전남권,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을 강타한 아픔과 투쟁과 의미부여로 번졌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듯이, 광주미문화원사건, 부산미문화원사건, 대구미문화원사건, 서울미문화원사건으로 번져가면서 수많은 학생들의 분신자살, 수많은 학생 ·시민들의 싸움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광주의 5월은 6 · 26까지 이어져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닌 틀림없는 그 무슨 에너지였습니다.
  그럼 과연 광주의 5월은 우리의 역사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했을까요? 광주시민들과 이 땅의 전체 국민의 측면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80년 광주의 5월은 첫째, 광주시민들의 자체방위정신, 치열한 생존방어투쟁, 목숨투쟁의 방어정신이 소위 '자유의 광주 : Free Kwangju : Frei Kwangju'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보고 체험하였던 5월 광주는 이러하였습니다. 제가 80년 그 당시 썼던 아주 긴 시중에서 그 일부분을 소개하면,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느낌이 갈 것 같습니다. 한말로 광주의 80년 5월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전 시민이 일체감으로 삶을, 목숨을 찾으려 했던 생존권확보의 참혹한 투쟁이었으니까요. 시 제목은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 '이었습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홀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서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랑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 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 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인간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만을 뒤집어쓸망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 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 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
……………………………………
아아 살아 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 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서웁구나
무서워서 어쩌지도 못하는 구나
……………………………………
……………………………………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옥중시인 김남주는 옥중에서 역시 80년 5월의 광주를 이렇게 울어 주었옵니다. 시 제목은 '학살·2'이었습니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5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대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낱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 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고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 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밤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않았으리

  이상 두 편의 싯귀절들 에서도 볼 수 있듯이, 80년 5월의 광주는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사람이라면 사람됨으로서 다 할 수 있었던, 피비린내 나는 생존투쟁의 몸부림이었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김정환 시인의 '5월'에서처럼, 광주시민들은 "끝까지 우리의 인간성을 배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녕 80년 5월의 광주는 그 피투성이 울부짖음 속에서도, 한편으로 서로 나눠 먹고, 서로 나눠 울던 아름다움의 극치였습니다. 도시의 전역은 외부와 완전 차단되고 심지어는 며칠간 시외 전화마저 불통되었던 절해고도와 같은 지경에 놓여있었으나, 인심이 천심이요 천심이 인심이었습니다.  외부로 흘러나간 유언비어와는 달리, 시장물가도(일부 열렸던 가게들에서 보면) 평상시와 같았고 시민끼리는 살인사건 ·강도사건 한 건 없었습니다.  더욱이나 일반 시중 은행에 쳐들어간 강도사건이 없었다니, 이것이야말로 인간성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찬란한 눈물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시민투쟁을 통하여, 혹은 평화적인 수습방법을 모색하던 광주 지도층들의 노력도 우리는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인간성 신뢰에 대한 참다운 표본이었습니다. 요컨대 그런 분위기 속에서 광주시민 흑은 전남도민의 공동운명대처 정신은 실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담한 아름다움 그것이었습니다. 이익사회 Gesellschaft와 익명사회, 산업사회의 극단을 달리는 오늘날 같은 각박한 세상에 그처럼 온몸으로 공동체정신 Gesellschaft을 발휘하던 때는 저는 아직껏 보지 못했고, 어쩌면 먼 훗날도 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집단적 휴머니즘, 집단적 공동체정신, 집단적 생명정신의 옹호, 그것은 바로 80년 5월의 광주가 배운 소중한 첫째 교훈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땅의 많은 시인들은 바로 그 대목을 더 많이 노래해 주었습니다. 80년 광주가 가져다 준 동인지 바람, 부정기간행물인 무크지 바람, 무수히 출현한 젊은 시인들의 얼굴과 가슴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가령 무크쪽으론 '실천문학', '우리세대 문학', '창비'사의 일련의 무크 기획들, '민의', '시인', 그리고 부산지방의 '지평', 광주지방의 '민족과 문학', 그 리고 문학장르의 확대론 논쟁까지 불러 온 일련의 르포 무크지들(이를테면 '르포시대', '르포문학'), 그리고 '공동체문화', '민중시', '한국사회연구', '제3 세계연구', '현장', '현실과 전망', '우리들','s월시', '자유시', '열린 시', '목요 시', '분단시대', '해방시', '시와 경제', '삶의 문학', '시운동', '반시', '자유실천 문인협회기관지'들, '남민시', '일과 놀이', '토박이', '마산문화' 등등 셀 수 없는 무크지들과 시동인지에 80년 5월은 부활한 듯 펄럭였습니다.
  둘째로, 그리하던 중에 80년 5월과 광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광주와 5월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라! 그4 습니다. 광주는 그리하여 누군가에 의해 널리 날아다니던 지역감정이니, 지역주의니, 분파적 섹티즘Semitism, 즉 분파주의의 장벽을 뚫은 것입니다. 그것을 하종오 같은 시인은 "우리야 우리끼리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라고 노래하는 데까지 도달케 합니다. 그의 '호남평야와 김해평야의 덕담'같은 시에서 그러함을 여실히 보여 줍니 다. 불필요하고 반민족적인 분파주의, 우리 경우로 들라치면 남북심리와 동서심리의 각각의 갈등,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들을 바보스럽게 하는 갖가지 섹티즘은 적어도 문학부분에선 상당히 걸러졌으리라 장담해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섹티즘을  일찌기 우리 역사에 이끌어 들였던 자들을, 우리는 민족적 차원에서 용서를 해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80년 5월의 광주가 준 둘째로의 교훈으론 분파주의 섹티즘을 허무는데 피로써 공헌했다면, 셋째로는 분단의 의미에 대한 처절하고도 통철한 각성을 심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저 유장하게 흘러 내려온 역사의 거대한 산맥들, 즉 동학혁명, 3·1운동, 4·19학생혁명, 부마항쟁과 더불어 80년 광주항쟁이 소위 역사의 큰 에너지와 깨우침을 동시에 비전처럼 제시 주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분단이 안되었다면 광주의 아픔이 그렇게 엄청나게 밀어닥칠 수 있었겠는지, 두고 두고 생각해 볼일입니다. 그렇다면 분단의 정체는 무엇인가? 모든 정치악 ·경제악 ·사회악 ·문화악 ·기타 잡동사니의 악인 분단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마도 이런 물음을 해방이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 주었던 민중항쟁 중의 하나가 80년 광주가 아니었던가 합니다. 그리하여 80년 광주는 우리의 처지가 분명히 제 3세계임을 자각케 한 일대 각성제이기도 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제 1 세계 제 2세계 특히 미국의 위치를 더듬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사회 지식층의 각 분야에서는 미국에 대한 재조명이 있어 왔고, 그로 인하여 갖가지 말썽도 빚어졌음은 사실이고, 이와 더불어 민족 · 민중 · 민주의식이 노도처럼 부풀어 올랐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속일 수 없는 사실 이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구체(사회 구성체) 논쟁도 그런 방면에서 이해를 더해 주거나 반성 같은 것을 엿보여 주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만, 분단은 우리 내부와 주변부의 모들 악의 근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그래서 80년5월은 비록 피투성이 아픔이었고 죽음이었지만 한편으론 소중한 생명적 교훈을 주었지 않나 여겨집니다.
  1980년 광주가 주었던, 그리고 주고 있는 네 번째 교훈은 예술장르의 종합화, 흑은 민중예술의 타 장르의 포용 화를 가져다 주었던 역할기능으로써 바로 그 촉;1:제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요즈음 어디에서나 종종 볼 수 있는 마당 굿에서, 우리는 '시'와 '노래'와 '말'과 '춤'과 '몸짓'파 '그림'이 온통 한꺼번에 휘감기는 것을 알게 되고 즐기게 되는데, 그것이 말하여 예술의 종합성의 가치를 드러냄을 증명 해줍니다. 시는 시대로, 노래는 노래대로, 춤은 춤대로, 몸짓은 몸짓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따로 따로 놀아대는 이 숨막히는 산업사회 속에서, 더군다나 분단위기 속의 사회에서, 마당굿 같은 것이 보여주는 종합예술성은 때론 저 농경하회◎ 공동체적 신명을 맛보게 함이나 다름 아닐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분위기 속에서, 60년대 70년대 그리고 80년 광주항쟁 정신이 안겨 준 공동체질 신명이 다름 아닌 민족정서를 환기시켜 주었음은 어느 누구도'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듯 1980년5월의 광주는 민중문예의 확보에 큰 일익을 담당했던 터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그 수많은 상처와 죽음 속에서도 절망과 좌절로 주저앉아버리지 않았다는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회의 각 부문 운동이 증명해주고 있는데, 저의 분야인 문학운동 부분에서도 운동으로서의 삶의 문학, 문학으로서의 삶의 운동이 그것이 아닐까합니다. 세계 양차 대전 중에 전 가족을 잃은 독일의 시인 '고트프리드 벤 Gotfried Benn'과는 달리 이 땅의 시인들은 절망과 좌절로써 '역사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은 역사를 삶의 역사로 이끌어 올리려고 노력했으며, 죽은 자를 등에 업고 산 자들과 같이 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그러함을 맹목적인 희망에로의 맹신이라고 투덜대겠지 만, 그러나 이 땅의 시인들은 절망과 좌절의 극복을 통하여 희망의 현실화를 죄 하려고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그것이 잘못하면 신비주의에로 빠져나갈 가능성 혹은, 희망의 즉물화 혹은 희망의 허수아비화로 둔갑시킬 위험성이 있어 보였지만 용케 잘 피하고 있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생명중시 ·생명존중 · 종교성을 떤 시작품들 속에서도 문학운동을 개인구원의 차원을 넘어선 집단구원으로까지 이끌어 간 점은 적이나 돋보였습니다. 어쨌든 절망에 대한 희망의 즉물화는 피해야 할 것이나, 그 현실적 ·통일적 노력은 뒤따라야 하리라 믿습니다.
  앞서 말한 것들을 다시 상기해보면, 80년 5월 광주항쟁은 집단생명투쟁정신, 희망의 현실화를 위한 노력, 적어도 문화면에 있어선 분파적 섹티즘의 파괴와 더불어 바람직한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가져다주었고, 또한 분단의 의미와 우리의 엄연한 위치 그리고 민주 ·민중 ·민족의식을 잠깨어 주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더 많은 시인들의 시와(사실 제 정신을 가진 이 땅의 시인이라면 1980년 광주의 5월을 읊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소설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시간 관계상 이 강연의 종지부를 찍는 몇 마디 말과 시 한 편으로 저의 얘기를 끝낼까 합니다.
  1980년 5월 광주: 광주는 아직 계속되고 있으며 아마도 진정으로 그 계속됨이 끝나려면, 통일의 그날이 아닐까 하고 덧붙입니다. 동학혁명, 3·1운동, 4 · 19혁명의 그 의미와 넋 흐름이 계속되듯이 80년 광주는 이 역사의 앞날을 위하여 분명히 좋은 밑거름이 될 것 같습니다. 광주의 5월은 통일문제와 같은 함수에서 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5월시'동인 중의 한 젊은 시인인 나해철의 '강강수월래'를 읽고 천리 길, 이 머나 먼 대구의 밤을 내릴까 합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가 추는 춤
복된 춤은 네가 추리라 강강수월래
손에 손을 맞잡고 가슴에 가슴을 이어
동쪽의 너도 서쪽의 너도
남과 북의 너도 하나가 되어
얼싸안고 뛰리라 강강수월래
어둠에 눕거나 칼바람에 때이거나
기다림에 눈 먼 너와 나도
빛이 터지는 자유의 하늘, 신 새벽이 오면
오랜 열망의 날들이 오면
이 땅의 어디나 피는 봄꽃처럼 상기되어
우리가 추리라 강강수월래.

오랜 시간 감사했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 대구 카톨릭 회관강연, 1987. 8.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