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첫 방영때 교민들 울음바다(월간예향, 1988. 6)
본문
첫 방영때 교민들 울음바다
5· 18현장비디오 「오, 광주 ! 」 제작한 민승연씨
80년 5월 해외에서 「5.18」을 전해 듣고 그 역사적 현장필름들을 여기저기서 모아 편집,「오, 광주!」라는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 교포 사회에 배포한 재미교포 민승연 (52)씨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민씨는 미국 동부쪽 교포사회에서는 잘 알려진 이름이나 국내에는 아직 생소한 편이다.
민씨가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금년 1 월 말께.
그 동안 들추어 내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었던 금단의「광주」가 민화위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되면서 부터이다.
5·18에 대한토론에 앞서 민화위가 구입한 당시의 현장테이프 7종 (국내 제작 3 종, 해외 제작 3 종, 출처미상 1종) 가운데 5개가 공개시청되었다.
민지가 제작한 "오 , 광주! " 테이프는 81년에 만들어졌으나 해외교포 사회에서만 돌아다녔을 뿐 그 동안 국내 반입은 되지 못한 상태였다. 또 국내에서 제작된 것으로는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평위가 만든 테이프 ' 5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 87년 5월에 제작되어 그후 광주 카톨릭센터와 그 외 몇 군데에서 방영되었을 뿐이다.
"저희들이 미국에서 제작한 비디오 테이프는 그동안 4천매 가량 배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입국할때는 심지어 술병바닥가지 검색을 하는 바람에 직접적인 국내 반입은 하나도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다른 루트로 반입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민씨는 지난번 민화위에서 입수한 테이프 중에 자신이 만든 것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고 필름을 구하기 위한 당국의 교섭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교포들에 4천매 배포
어떻게 해서 '오 광주!'를 제작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10.26이 터진 뒤 바로 미국 동부권의 한인들 사이에 조국의 민주화에 보탬이 되기 위한 자생적인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민주구락부'라는 모임이었지요. 정식단체가 이듬해 3월 발족했는데 곧바로 5.18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김대중씨 등이 연행되었다는 뉴스에 이어 속보가 연일 이어지는데 교포사회가 술렁이고 풍전등화같은 조국의 현실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단다.
"마음은 곧바로 고향의 역사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주체를 할 길이 없습디다. 왜 이번에도 우리 고향만 무참히 짓밟혀야 하는가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5월 19일 민주구락부 회원들은 유엔본부 앞에서 고국의 군부독재에 항의하는·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5·18은 미국과 TV와 신문에 단편적으로나마 계속 보도가 되었어요, 그 뒤 국내 인사들이 미국에 왔기에 물으니 국내에서는 현장의 모습이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고 그래요. 그래서 미국에서라도 그 현장자료들을 모으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 역사적 상황은 온 국민이 알아야 하고 그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민씨는 ABC-TV에 근무하는 재미교포 강석희씨에게 연락을 했다. 강씨는 국내 AFKN에 10여년 근무하다 ABC방송으로 직장을 옳긴 사람으로 민씨와는 잘아는 사이였다. 강씨를 통해 ABC가 편집해 방영한 5.18 현장 필름을 구할 수 있었다. 또 CBS쪽에서도 자료를 어렵사리 구해냈다. 그러나 두 방송국의 테이프를 모두 합해도 겨우 20여분 분량에 불과했다.
마침 NCC (기독교교회 협의회)에 있던 박모 목사의 주선으로 수소문 끝에 15분짜리 테이프를 구할 수 있었다. 여기에다 민씨 등 교인들이 5.18직후 유엔본부 앞에서 시위했던 장면을 ABC에서 다시 구해 40분짜리 필름을 편집해 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오 , 광주!」이다.
ABC, CBS등에서 자료 모은 40분짜리
-테이프를 제작하면서 어려웠던 일은 ?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부터 철저한 보안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분위기는 살얼음판 같았습니다 마치 음모를 꾸미듯 은밀히 진행 됐습니다. 몇몇 교민이 돈을 모아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1백여개를 만들었는데 1만여불이 먹혔어요. 상업적 스튜디오를 비밀스레 이용했기 때문이죠. "
'오, 광주!'가 첫선을 보인 것은 1981년 5월18일. 뉴욕의 「퍼블릭 스쿨 20」강당에서 열린 '광주의거 1주년 추모대회'에서 였다.
4백 80석의 좌석에 7백여명의 교민이 모인 이 날 행사에서 '오 광주!'는 3회나 연속방영되었다. 교민들이 방영을 계속 요구했기 때문.
"방영이 끝나자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참석한 교민들만이 아니라 직접 테이프를 만든 주최측 사람들도 엉엉 울었으니까요. 행사가 끝나고도 침통한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어요. 그 비극의 참상도 참상이었지만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화 열기에 정부측이 왜 평화적인 타협을 하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더욱 서글펐습니다. "
추모행사를 마치자마자 1백개치 비디오테이프는 동이 나버렸다. 가격은 1개에 50불이었다.
이때 테이프를 구입하지 못한 교민들의 부탁으로 테이프 복제는 계속해야 했다. 가격은 25불로, 다시10불로 내려가면서 계속 팔렸다. 물론 수익금은 민주화운동의 헌금으로 쓰여 졌다. 테이프가 계속 나가자 간접적인 협박 또한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매년 광주의거 추모대회에 참석하는 교민 수는 항상 1천여명에 이르고 테이프 제작은 그들을 위해 계속했다. 테이프가 대량 보급되던 83년에는 당시 한국민주협회의 초대회장과 독립신문 편집장을 맡고 있던 이돈만씨의 활약에 힘입은 바 컸다고 민씨는 털어 놨다.
"'Oh, 광주!' 에는 쇼킹한 장면은 그리 없습니다. 이를테면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냈다'거나 '임산부한테서 태아를 꺼냈다'는 식의 장면은 전혀 없어요. 하지만 계엄군이 시체인지 부상자인지 분간하기 힘든 시민들을 끌어가고 차에 던져 싣는 장면은 끔찍하더군요. 오히려 화면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학생들이 횃불을 들고 합창하며 돌거나 (계엄령이 확대되기 전의 필름인 듯), 시민군들에게 총을 번호까지 확인하며 배부했다가 저녁때 질서있게 회수하는 장면들이었어요 자제의 모습들이 역력했으니까요."
그런 상황이 총격전으로 전환되고 그토록 많은 사상자들을 낸 것이 너무 안타깝고 한스럽다고 했다.
민씨는 영암군 신북면 갈곡리에서 났다. 목포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민씨는 한때 교편을 잡다 69년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하고 72년 도미했다.
뉴욕에서 의류상을 하면서 재미의류협회 '회장, 뉴욕 한인회 회장도 지냈으며 지금은 주류도매상을 하면서 뉴욕지구 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과 북미주 민주구락부 연합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79년 민주구락부 창설에 관여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줄곧 몸담아 온셈.
요즘 세목을 끌었던 전경환씨가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을 때는 만찬이 벌어지던 식당으로 들이닥쳐 전씨 내외에게 달걀세례를 퍼부었던 민주반정부인사의 대표격이기도 하다.
지난해 대통령선거때 고국을 방문한 뒤로 다시 귀국한 것은 지난 3월 하순 민씨와 차량속인터뷰를 하며 망월동 5.18묘역을 향하는 취재차량 뒤를 짙은 갈색승용차 한대가 계속 따라 붙었다.
"오늘 새벽 김포공항에서부터 따라 붙더니 지금도 미행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빨갱이입니까,아니면 흉악범입니까?"
여유있게 웃음까지 보이며 5·18묘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촉촉하게 봄비에 젖은 비석들을 붙들고 한동안 오열 했다.
"이제는 3년전의 「광주J가 온천하에 들추어져 야 합니다. 여기 누운 한 맺힌 원혼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Oh, 광주!'도 마땅히 공개되어야겠지요. 그 필름은 역사의 현장을 아쉬우나마 그런대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글 / 최 시 영 기자
5· 18현장비디오 「오, 광주 ! 」 제작한 민승연씨
80년 5월 해외에서 「5.18」을 전해 듣고 그 역사적 현장필름들을 여기저기서 모아 편집,「오, 광주!」라는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 교포 사회에 배포한 재미교포 민승연 (52)씨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민씨는 미국 동부쪽 교포사회에서는 잘 알려진 이름이나 국내에는 아직 생소한 편이다.
민씨가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금년 1 월 말께.
그 동안 들추어 내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었던 금단의「광주」가 민화위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되면서 부터이다.
5·18에 대한토론에 앞서 민화위가 구입한 당시의 현장테이프 7종 (국내 제작 3 종, 해외 제작 3 종, 출처미상 1종) 가운데 5개가 공개시청되었다.
민지가 제작한 "오 , 광주! " 테이프는 81년에 만들어졌으나 해외교포 사회에서만 돌아다녔을 뿐 그 동안 국내 반입은 되지 못한 상태였다. 또 국내에서 제작된 것으로는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평위가 만든 테이프 ' 5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 87년 5월에 제작되어 그후 광주 카톨릭센터와 그 외 몇 군데에서 방영되었을 뿐이다.
"저희들이 미국에서 제작한 비디오 테이프는 그동안 4천매 가량 배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입국할때는 심지어 술병바닥가지 검색을 하는 바람에 직접적인 국내 반입은 하나도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다른 루트로 반입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민씨는 지난번 민화위에서 입수한 테이프 중에 자신이 만든 것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고 필름을 구하기 위한 당국의 교섭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교포들에 4천매 배포
어떻게 해서 '오 광주!'를 제작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10.26이 터진 뒤 바로 미국 동부권의 한인들 사이에 조국의 민주화에 보탬이 되기 위한 자생적인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민주구락부'라는 모임이었지요. 정식단체가 이듬해 3월 발족했는데 곧바로 5.18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김대중씨 등이 연행되었다는 뉴스에 이어 속보가 연일 이어지는데 교포사회가 술렁이고 풍전등화같은 조국의 현실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단다.
"마음은 곧바로 고향의 역사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주체를 할 길이 없습디다. 왜 이번에도 우리 고향만 무참히 짓밟혀야 하는가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5월 19일 민주구락부 회원들은 유엔본부 앞에서 고국의 군부독재에 항의하는·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5·18은 미국과 TV와 신문에 단편적으로나마 계속 보도가 되었어요, 그 뒤 국내 인사들이 미국에 왔기에 물으니 국내에서는 현장의 모습이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고 그래요. 그래서 미국에서라도 그 현장자료들을 모으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 역사적 상황은 온 국민이 알아야 하고 그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민씨는 ABC-TV에 근무하는 재미교포 강석희씨에게 연락을 했다. 강씨는 국내 AFKN에 10여년 근무하다 ABC방송으로 직장을 옳긴 사람으로 민씨와는 잘아는 사이였다. 강씨를 통해 ABC가 편집해 방영한 5.18 현장 필름을 구할 수 있었다. 또 CBS쪽에서도 자료를 어렵사리 구해냈다. 그러나 두 방송국의 테이프를 모두 합해도 겨우 20여분 분량에 불과했다.
마침 NCC (기독교교회 협의회)에 있던 박모 목사의 주선으로 수소문 끝에 15분짜리 테이프를 구할 수 있었다. 여기에다 민씨 등 교인들이 5.18직후 유엔본부 앞에서 시위했던 장면을 ABC에서 다시 구해 40분짜리 필름을 편집해 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오 , 광주!」이다.
ABC, CBS등에서 자료 모은 40분짜리
-테이프를 제작하면서 어려웠던 일은 ?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부터 철저한 보안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분위기는 살얼음판 같았습니다 마치 음모를 꾸미듯 은밀히 진행 됐습니다. 몇몇 교민이 돈을 모아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1백여개를 만들었는데 1만여불이 먹혔어요. 상업적 스튜디오를 비밀스레 이용했기 때문이죠. "
'오, 광주!'가 첫선을 보인 것은 1981년 5월18일. 뉴욕의 「퍼블릭 스쿨 20」강당에서 열린 '광주의거 1주년 추모대회'에서 였다.
4백 80석의 좌석에 7백여명의 교민이 모인 이 날 행사에서 '오 광주!'는 3회나 연속방영되었다. 교민들이 방영을 계속 요구했기 때문.
"방영이 끝나자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참석한 교민들만이 아니라 직접 테이프를 만든 주최측 사람들도 엉엉 울었으니까요. 행사가 끝나고도 침통한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어요. 그 비극의 참상도 참상이었지만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화 열기에 정부측이 왜 평화적인 타협을 하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더욱 서글펐습니다. "
추모행사를 마치자마자 1백개치 비디오테이프는 동이 나버렸다. 가격은 1개에 50불이었다.
이때 테이프를 구입하지 못한 교민들의 부탁으로 테이프 복제는 계속해야 했다. 가격은 25불로, 다시10불로 내려가면서 계속 팔렸다. 물론 수익금은 민주화운동의 헌금으로 쓰여 졌다. 테이프가 계속 나가자 간접적인 협박 또한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매년 광주의거 추모대회에 참석하는 교민 수는 항상 1천여명에 이르고 테이프 제작은 그들을 위해 계속했다. 테이프가 대량 보급되던 83년에는 당시 한국민주협회의 초대회장과 독립신문 편집장을 맡고 있던 이돈만씨의 활약에 힘입은 바 컸다고 민씨는 털어 놨다.
"'Oh, 광주!' 에는 쇼킹한 장면은 그리 없습니다. 이를테면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냈다'거나 '임산부한테서 태아를 꺼냈다'는 식의 장면은 전혀 없어요. 하지만 계엄군이 시체인지 부상자인지 분간하기 힘든 시민들을 끌어가고 차에 던져 싣는 장면은 끔찍하더군요. 오히려 화면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학생들이 횃불을 들고 합창하며 돌거나 (계엄령이 확대되기 전의 필름인 듯), 시민군들에게 총을 번호까지 확인하며 배부했다가 저녁때 질서있게 회수하는 장면들이었어요 자제의 모습들이 역력했으니까요."
그런 상황이 총격전으로 전환되고 그토록 많은 사상자들을 낸 것이 너무 안타깝고 한스럽다고 했다.
민씨는 영암군 신북면 갈곡리에서 났다. 목포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민씨는 한때 교편을 잡다 69년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하고 72년 도미했다.
뉴욕에서 의류상을 하면서 재미의류협회 '회장, 뉴욕 한인회 회장도 지냈으며 지금은 주류도매상을 하면서 뉴욕지구 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과 북미주 민주구락부 연합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79년 민주구락부 창설에 관여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줄곧 몸담아 온셈.
요즘 세목을 끌었던 전경환씨가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을 때는 만찬이 벌어지던 식당으로 들이닥쳐 전씨 내외에게 달걀세례를 퍼부었던 민주반정부인사의 대표격이기도 하다.
지난해 대통령선거때 고국을 방문한 뒤로 다시 귀국한 것은 지난 3월 하순 민씨와 차량속인터뷰를 하며 망월동 5.18묘역을 향하는 취재차량 뒤를 짙은 갈색승용차 한대가 계속 따라 붙었다.
"오늘 새벽 김포공항에서부터 따라 붙더니 지금도 미행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빨갱이입니까,아니면 흉악범입니까?"
여유있게 웃음까지 보이며 5·18묘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촉촉하게 봄비에 젖은 비석들을 붙들고 한동안 오열 했다.
"이제는 3년전의 「광주J가 온천하에 들추어져 야 합니다. 여기 누운 한 맺힌 원혼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Oh, 광주!'도 마땅히 공개되어야겠지요. 그 필름은 역사의 현장을 아쉬우나마 그런대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글 / 최 시 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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