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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 계속되고 있는가? / 망각서 각성…건강한 미술로 / '민중미술'흐름과 과제. 김경주(월간예향, 1…

본문

망각서 각성...건강한 미술로


「민중미술」 흐름과 과제



  우리의 현대사는 불행하게도 5·16,  5·17,  5·18이라는 나란한 숫자의 배열을 깊이 각인시켜 놓았다.
  그러한 나란한 습자가 주는 함축적인 의미 가 결국은 한가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소중한 생명들이 꽃이 파리처럼 떨어졌고, ,그러한 까닭으로 해 마다 5 월이면 지천으로 널려있는 들꽃이라도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시인의 감수성으로만 얘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계속되고 있는 5월의 의미 속에서 살고 있고 그것은 아직 감상적이거나 회고적 차원의 얘기로 정리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80년 5월은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5·16군사정 권의 출발과 그 붕괴로 얘 기되는 10·26을 거쳐 12·12에서 5·18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내의 누적된 모순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폭발이었다.
  7년이 지난 지금 그 엄연하게 살아있는 역사 앞에서 곪은 상처를 표피 봉합식으로 치유(?)하려는 일련의 모습들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아름답게 들리는 '화해'라는 말도 화해당사자 간의 대등한 관계가 담보되지 못할 때는 결국 허구일 뿐이다.
  이미 80년 5월의 광주는 이 시대의 보통 명사가 되어 있지만 그 진실의 규명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마당에 5월과 관계된 미술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자칫 성급한 일이고 또 필자가 그러한 일들을 감당할만한 적임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5월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일이며 함께 풀어야 할 피할 수 없는 공동의 과제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미술인들도 심각한 자기 반성

  80년 5월은 짧지만 거대한 역사이다.
  18일부터 27일까지의 항쟁기간 동안 보여준 시민들의 자율적 질서의식과 아름답게 되살아난 공동체적 삶, 역사를 끌고 나갈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던 점등에서 그러하며 외세가 한반도에 어떠한 역할관계로 작용하고 있는가, 분단상황이 어떠한 실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지역간 계층간의 갈등은 어느 정도 깊은 것이며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를 절감케 한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체험들은 미술인들에게도 예외 없이 심각한 자기 반성을 불러 일으켰다.
  작업실의 고독한 천재를 꿈꾸던 낭만적 예술가상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소중한 생명들이 무참하게 쓰러지는 상황에서 기존의 정태적, 관념적 미술이 갖는 유희는 그야말로 사치스러운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5월은 미술에 있어서도 어떻게 우리시대의 구체적 삶들을 드러내는 힘의 예술로 변환될 수 있을 것인가를 묻게 한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5월과의 직접적인 관련이 없이 한 시대의 리얼리티를 담아내려는 노력들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나 80년 5월은 미술에 있어서 충격적 개안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미술은 5월을 분기점으로 하여 자기망각, 자기 몽혼의 미술로부터 자기각성, 자기변혁의 미술로 탈바꿈한 것 이국 그러한 의미에서 5월은 앞으로 우리의 민족미술이 지향해야 할 방향과 당위를 깨우쳐준 하나의 선 체험이었던 것이다.

  우리 미감회복‥‥건강한 미술로

  그러나 지금껏 80년대의 새로운 미술운동의 열풍에도 불구하고 5 월의 연계선상에서 드러난 작업 적 성 과들은 사실상 그다지 많지 않다.
  그 까닭은 모든 문화현상이 어떠한 역사적 사실에 즉각적이고 단속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며 예컨대 80년대의 문학이 70년대를 거친 꾸준한 성과들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아뭏든 여기에서 미술이 5월을 어떻게 수용해가고 있는가를 살피려 할 때 단순히 당시의 현장을 현상적이고 기록적 인 표현으로 드러낸 작품들에 주목할 것이냐 아니면 5월이 내포한 본질적 의미의 연계선상에서 드러난 표현양상들을 포괄할 것이냐 하는 관점의 문제가 대두된다.
  전자의 경우를 들어 굳이 5월이 만들어낸 미술이라고 한다던 후자의 경우 5월의 의미를 찾아가는 미술로 부를 수도 있겠는데 한편으로 현실의 참된 인식에 도달하려는 모든 미술에 관통되는 역사의식의 실마리를 유념한다면 글이 그리 한 구분이 가당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 까닭은 앞서 언급했듯 80년 5월이 결국 외세, 분단, 계층 및 지역간의 갈등 등의 요인으로부터 파생된 모순의 폭발이었음에 비추어 보아 반외세, 분단극복, 계층 및 지역간의 갈등 극복이라는 길고도, 지난한 공통된 과제를 부여받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내용의 형상화 작업은 피차 민족적 리얼리즘이라는 토대 위에서 긴 시간을 두고 생성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80년대의 새로운 미술운동에 참여했던 화가들 중 80년 5월을 직접 목격한 미술인들의 경우 전자적 표현이 두드러진데 반하여 그렇지 않은 경우의 작가들 대부분은 후자적  표현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되 5월 현장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느냐 간접적으로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 정작 중요한 점이 아니며 오히려 문제는 앞으로 화가 개개인이 부딪히고 있는 자기현장의 표현들을 얼마나 심도있게 드러내느냐에 있다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점은 5월을 증언, 고발하는 사진전이 많은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 가장 큰 이유는 기록성이라는 사진 고유의 특성 때문이었던 바, 그것을 곧바로 회화적 언어가 형성하는 공감과 평면적으로 대비시킬 없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5월 현장을 목격 한 화가는 화가대로 그렇지 않은 화가는 화가대로 자기의 몫이 주어 지는 것이며 이러한 다각적인 시도들이 서로 어우러져 진행될 때 5월로 상징되는 이 시대의 질곡을 뚫고 우리의 건강한 민족미술은 떠오를 것이다.
실제로 5월을 분수령으로 하여 태동되었던 80년대  새로운 미술이 서로간의 문맥은 다소 다를지라도 모두우리 삶의 저변에 깔려있는 모순과 갈등을 첨예하게 드러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표현형식의 문제 또한 기존의 유미적 이고 관조적이던 태도를 일축하거나, 비판없이 수용되어지던 서구적 표현형식을 거부하고 우리 미감의 회복이라는 각도로 차츰 모아지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이다.

판화 활동이 가장 뚜렷

  이러한 역사적 증언, 모순의 극복을 위할 미술을 지향하며 80년대를 통틀어 가장 활발한 매체로 등장한 것은 판화였다.  메시지의 전달에 용이한 흑백의 뚜렷한 대비. 집약된 표현력을 지니는 압축된 공간, 손쉽게 완성도에 이를 수 있는 평이한 제작방식 , 수많은 전통 목판화의 유산에 힘입은 친근감 등과, 무엇보다도 복수제작이 가능한 탓으로 기존 일품성 회화의 전시구조가 따르지 못하는 전파력 등에 착안하여 시작된 이 목판화작업은 여러 차례에 걸친 학생, 시민 대상의 강습회로 이어지고시와 판화 등 다른 장르와의 만남, 각종 집회현장에서의 전시, 책 표지등과 각종 인쇄물등으로 확산되어 그 사용빈도나 작품의 제작량, 제작인원에 있어서 명실공히 80년대 미술운동의 상쇠역할을 해냈다.
  이러한 판화매체는 목판화가 가지고 있는 간명한 표현력이 급박하고 짧은 호흡에 잘 맞아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 충격적이고도 눈 시린 흑백의 대비 등을 생각해 볼 때 5월의 현장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였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80년대에 쏟아져 나온 대부분의 목판화는 격정적이고도 비극적인 표현이 두드러지고, 다소 단편적이다는 약점이 따르기는 하지만 80년대 미술의 길트기 역할을 충분히 해 냈다는 점은 인정 할만 하다. 
  뿐만 아니라 이 목판화운동의 활성화는 그 동안 묻혀져 있던 전통목판화의 맥이 소생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고무적이며, 또 미술이 특정한 계층이나, 특정 한 장소를 떠나 우리들이 겪고 있는 삶의 현장에 파고드는 힘을 지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장 잘 확인시 켜준 점에서도 그 중요성은 인정된다.
  더욱이 광주의 「시민미술학교」와 서울의 「두렁」등 연이은 판화강습회로 비전문인들의 표현역량이 개발되어 80년대는 그야말로 판화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할만큼 풍성한 판화작품들을 대할 수 있게 되었고, 아깝게도 이를 나이에 작고했지만 '오윤'과 같은 탁월한 목판화가가 우리 미술사에 드러났다는 점도 기억할만한 사실이다.

80년 들어부터 「참여미술」활발

  비교적 활성화된 매체였다는 이유로 판화를 먼저 거론했으나 여타의 회화나 조각등의 분야에서도 80년대 미술의 전개양상은 70년대와뚜렷이 구분되는 모습을 보였다.
  80년 11월 동산방화랑에서 개최되었던 「현실과 발언」전은 고 창립선언에 해당하는 1회전 서문에서  「‥‥돌아보건대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층의 속물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밖으로부터의 예술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질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 왔고, 심지어는 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조차 제 대로발견하지 못해 왔읍니다‥‥‥우리들 자신도 대부분이 이제까지 각자 외롭게 고민하는 것만이 최선의 자세인 듯 생각해 왔으며 동료들과의 만남에서  조차 다만 편의적이고 습관적인데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공동적인 문제해결과 발전의 가능성을 포기해 버리려 하지 않았나 합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라고 밝히고 있고 그후 연이은 83년의 「행복의 모습전」84년의 「6.25테마전」등을 통해 드러난 그들의 조형이념은 한마디로 삶의 구체적 모습과 의식을 형상화하는 것이며 그것을 알기 쉬운 조형 언어로 풀어 간다는 점을 골자로 하고 있다.
  물론 「현실과 발언전」이 80년 5월과 직접적 관련하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지만 5월을 분수령으로 하여 한반도 내의 우리 삶에 대한 자각에 값한다고 할 수 있는 80년대 미술의 한 효시가 되었다고 보는데는 인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회원 중의 한 사람인 이 지역 출신 화가 신경호는 암시적 표현이긴 하지만 '넋이라도 있고 없고' '신시일기'등의 작품을 통해 5월을 얘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현실과 발언전」 이후 연속적으로 전시되었던 노원희전, 이철수전, 새구상화11인전, 조각의 심정수전, 제9회 십이월전, 임옥상전 등등의 개인전 및 그룹전들도 모두 그 즈음의 사회적 상황에 접근하려는 시도들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그후 82년의 「임술년전」83년의「시대정신전」「두렁동인전」등의 전시회가 잇따랐고 급기야 84년 6월에는 화가 105명이 공동 참여한 대규모의 「삶의 미술전」이 개최되었다.
  이 「삶의 미술전」은
  1 . 개인의 자유로운 삶과 공동체의 삶의 조화를 꾀하는 총체적 삶의 맥락에서 미술을 정립한다.
  2 우리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올바로 현실을 인식하고 여기에서 얻어진 삶의 감동을 나타낸다.
  3. 창작과 수용의 문제에 현실적으로 접근하면서 생활 속에 용해되어 살아있는 미술을 만들기 위하여 서로 소통하기 쉬운 언어-우리와 언어로 표현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아람문화회관, 관훈 미술관 제 3 미술관등 세 곳에서 전시되었는데, 많은 참여인원들이 스스로 기회하고 참여한 그 전시회는 80년대 미술의 출발과 그 향방은 어디인가 하는 공통분모를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깊은 것이었다.
  이「삶의 미술전」을 통해 서로 확인된 신념을 바탕으로 했음 인지 그후 우리 화단에는 가히 80년대 미술의 열풍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폭발적인 전시회, 토론회 등이 열렸고 나름의 예술적 이념을 드러내는 이론 작업열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단순히 미술 내부적 측면. 즉 기존 미술언어들에 대한 반발이나 양식의 변화만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고 다분히 80년대의 정치·사회적 층에 대한문화적 대응논리의 측면이 강하게 작용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민중미술」시위 ·집회현장으로

  실제로 80년대 미술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민중미술」이라는 어휘가 보여주듯 5월이라는 역사체험을 바탕으로 '민중주체의 문화'라는 점이 강조되었고, 그러한 닻에 80년대에 출발한 사실상 서로 다른 문맥의 조형 언어들마저 상당부분 혼란에 빠진 감이 없지 않지만, 어찌 되었건 모두가 미술운동적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었던 점이 지적된다.
  그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매체의 개발과 그 효율적 활용이 모색되어진 점도 살펴질 수 있는데 이를테면 회화에 있어서 일정하게 갇혀진 전시장 구조의 액자그림을 벗어나 열려진 집회현장이나 옥외전시를 가능케 하는 걸개그림과 깃발그림 등이 그것이며 , 만화매체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진 것도 그 좋은 예이다.
  걸개그림의 경우예전 불사에 쓰이던 큰 괘불의 경우처럼 집회현장에 운집한 많은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통일시켜 낼 수 있는 힘을 지니며, 깃발그림 또한 만장이나 농기처럼 움직이는 그림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으로, 벽화 운동 등의 조건이 열악한 우리의 경우에 비추어 효율적인 매체로 등장했다.
  만화 또한 그 소통의 폭과 표현영역의 차원에서 영화를 오히려 앞지르는 강점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 새로운 만화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지론이며, 실제로 그러한 작업은 상당히 진전되어 있다.

'미술이냐' '포스터냐' 논쟁

  80년 이후 사회상황에 관한 인식과 기존의 제도권 미술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한 80년대의 미술이 8년이라는 햇수를 지나왔지만 그 과정은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다.
  85년 7뭘 당시 문공부장관의 '경주발언' 직후 아랍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던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이 최초로 공개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는데, 몇 점의 그림이 압수당하고 주최측이 연행되는 사태를 빚었다.
  이유인즉은 "미술이 이념의 도구화"경향을 띠었다는 것이고 곧이어 "미술이냐 포스터냐"하는 시비가 벌어졌고, "포스터는 미술이 아닌가 ? "하는 반론으로 이어지는 등 우리 미술이 안고 있는 인식의 수준이 드러났다고 할만큼 웃지 못할 사태로 비화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미술은 이념적이다. 어느 사회 어느 체제이건 체제 순응적 문화와 부정적 문화는 있게 마련이고, 오히려 그러한 문화의 자율성이 폐쇄적으로 억압될 때 그 사회는 위험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힘전」의 경우 공개적인 탄압이었지만 전국의 각 전시장에서 작품이 철거당하거나 전시회 자체를 취소하도록 일방적인 대관취소의 형태로 탄압을 받은 예는 많다.
  또 이 지역에서는 86년 YWCA에 설치한 5·18영령들을 위한 분향소에서 「광주항쟁 백인 신장도」가 걸려진 지 하루만에 압수당했고, 87년 9월「해방·통일 큰 그림 잔치」에 출품되었던 이상호, 전정호의 공동작 「백두의 산자락 아래‥‥」가 제주도 순회 전에서 말썽이 되어 국가 보안법으로 구속되는 유례없는 사태를 빚었다.
  그 외에도 민족미술협의회의 최민화씨 연행, 분단문제를 주제로 다루기 위해 가지고 있던 자료사진문제로 화가 손기환씨 등이 연행된 사태가 있었고 한 화가의 개인주택에 그려졌던 벽화 철거사건 등이 일정한 단속의 준거도 없이 행해 졌다.

「양자택일」아닌 「일깨움에 동참」

  이러한 당국의 탄압과 기존 미술인들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80년 5월 이후의 미술들이 나름의 자기변환을 위해 쏟아온 노력들은 가히 눈물겨운 것이었단.
  오랫동안 우리의 미술이 현실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을 형상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한다는 리얼리즘 정신을 도외시해 왔다는 반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작가와 사회의 함수관계를 거론하는 것은 불온한 것이라는 고정관념과의 싸움, 「힘전」사태이후 일반인이나 대부분의 기존 미술인들이 가지고 있는 막연한 개념의 민중미술에 대한 규정 등으로 지향해야 할 폭넓은 표현세계와는 관계없이 양자택일로 받아들여지는 달갑잖은 시각 등을 헤치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난제와 마찬가지로 우리 미술이 안고 있는 문제 또한 엄청난 것이어서 그 진로가 수월치 않을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 동안 진행되어온 80년대의 미술을 되돌아볼 때 자기 창조의 논리보다 타자부정의 논리 가 앞섰던 점이나, 문학이 70년대로부터 이룩해 온 구체적인 작품성과에 근거하면서 부단히 자기논리를 갱신해왔던 점을 잊고 50년대 문학의 첨예한 논리만을 끌어다 붙이는 식의 이론의 횡포, 또 잘못 이해된 문화 운동론의 영향으로 운동에만 충실하면 미술은 아무래도 관계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도구론 등등에 대 한 반성은 한번쯤 되씹어 볼만하다는 생각이다.
  어떻든 80년 5일을 거치면서 자아와 현실과 역사에 대한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고 진정한 의미의 주체성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우리 가 처 해 있는 현실은 분단상황이라는 사실과 그 분단의 극복이 우리모두의 인간성 회복에 대한 선결과제임도 깨닫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시대의 문화는 통일지향의 문화이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 통일의 주체는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 즉 역사주체로서 민중이어야 한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문화전반에 나타난 일깨움에 동참하는 모든 미술인들은 인식 자체에 아무런 이론이 없다.
  단지 남은 과제는 시각의 혁명에 따른 손의 혁명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