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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민중항쟁을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송기숙 외(사회와 사상, 1989. 5)

본문

광주민중항쟁 9주년 기념기획

광주민중항쟁을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민족운동의 흐름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민중의 도덕성과 순결성·책임성을 보여주는 가장 전형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강만길
<고려대교수·한국사·본지편집위원>
송기숙
<전남대교수·소설가>
대담한 날짜 : 1989년 4월 1일 / 대담한 곳 : 본사회의실



독재정권 속에서 성장해온 민중적 역량이 결집된 형태

  강 5월은 우리 역사상에서 중요한 사건이 많이 일어났던 달입니다. 『사회와 사상』 5월호를 내는 오늘의 시점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현 상황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의미가 얼마나 살아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손상되고 있는가 하는 점들은 이런 대담의 기회를 통해서 반드시 다루어져야 할 과제라고 봅니다.
  광주민중항쟁을 얘기하려면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1980년 5월 17일의 군부에 의한 계엄의 전국적 확대과정, 또한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배경으로서의 1979년의 12·12사태, 그리고 박대통령이 암살당했던 10·26사건까지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박대통령의 암살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유신체제와 5·16군부쿠데타, 5·16 이전의 4·19혁명까지를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4·19혁명은 8·15이후, 특히 이승만정권 성립 이후 잘못된 민족사가 제자리를 찾는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해방 이후 민주주의와 민족주의가 땅에 떨어지다시피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8·15 이후의 역사는 식민지시대를 극복하는 민족적·시대적 요구가 참으로 강력했지만, 식민지적 유산을 극복하기는커녕 오히려 봉건적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반공이라는 극우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은 당연히 반민족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4월혁명은 바로 이같은 구조를 혁파한 민주주의운동·민족주의운동입니다. 그러나 불과 1 여 년만에 군부의 5·16쿠데타로 인해 우리의 민족운동·민주운동은 좌초됩니다. 결국 5·16쿠데타세력에 의해 우리 사회는 20여 년 통치되어오다 10·26정변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박정희 군부통치시대는 군부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중적 역량을 배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권은 직접적인 민중항쟁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고 권력 내부의 암투에 의해서 무너진 것이 아쉽습니다만, 이는 민중세력의 역량이 당시까지는 다소 미약했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10·26이후의 민주화운동은 상당히 급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바로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12·12사태가 일어났고, 그것은 5·17계엄확대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신독재 이후에 성장했던 민중적인 역량이 광주민중항쟁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광주민중항쟁은 결국 박정권 이후에 성장해온 우리의 민중적 역량이 하나의 결집된 형태로써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송 4·19혁명에서부터 민주화운동의 기점을 잡고 또 반제국주의운동의 출발로잡을 때,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은 학생이 전위적으로 주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18광주민중항쟁의 경우도 학생들이 유발시켰고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학생운동이 한국의 변혁운동과정에서 중요내용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일관되게 민족주의인 요소라고 할 것입니다. 민주화운동에서도 민족주의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 민족주의적 사상과 실천운동이 오늘 통일운동으로 이어지는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4·19혁명의 초기 전개과정에서는 민족주의적 요소보다 민주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운동의 진전에 따라 민족주의적 요소가 강조되었습니다.


  강 저는 8·15해방 이후 우리의 민족운동사를 볼 때 두 가지 요소가 공존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민주주의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통일운동입니다. 4·19혁명은 방금 말씀하신 대로 당초에는 민주주의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장면정권이 성립되고 난 다음에는 민족통일문제에 대한 안목이나 의욕이 심화되는 분위기가 성립되지요. 5·16이후의 박정희 정권이 그것을 압살했던 것처럼, 박정권이 무너진 후에 성장한 민중적 역량에 의한 민족문제 해결의 분위기를 또 한번 압살하는 사건이 바로 전두환정권 성립과정에서의 5·17계엄 전면확대입니다. 이것에 저항했던 광주민중들의 항쟁은 권력측의 억압에 비례해서 저항의식도 강해진다는 좋은 교훈을 보여준 것이기도 합니다.

민족·민주·통일 운동의 불씨가 된 항쟁

  송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을 때 학생층을 비롯한 운동세력이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운동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오늘 민족통일에 대한 열망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민족통일은 민족적 과제로서 역사적으로 당위적인 것이려니와 민족적 감각으로서도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현재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에 대해 권력집단과 보수정객들 사이에서 그것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매카시즘적인 매도를 원색적으로 가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의 큰 맥은 역시 민족운동, 더 구체적으로 민족통일운동의 실천적인 사건이라고 하겠지요.


강 저는 광주민중항쟁이 광주라는 한 지역에서 발단되어 일어났지만 그것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조건은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고 봅니다. 마치 식민지시대 광주학생운동이 광주라는 곳에서 일어났지만, 그것이 곧 전 민족적인 운동으로 확산된 것처럼 말입니다. 대단히 가혹한 탄압이 자행됨으로써 결국 광주 일원의 항쟁으로 일단 진압이 되긴 했습니다만, 결국 광주민중항쟁은 광주 일원의 항쟁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민족 전체의 민주화운동·민족통일운동으로 승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은 전두환 정권의 7년간의 억압을 뚫고 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폭발된 사실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6월항쟁의 한 근거도 역시 광주민중항쟁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측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을 지역감정의 발로로써 취급하려는 책략을 쓰고 있지요.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지역감정이 아닌 민주운동·민족운동이라는 전체맥락 속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준 것이 또한 6월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이 가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정치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두환 정권이 퇴진한 다음에 전두환은 국민에 대한 사과성명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한 시대의 통치자가 자기 통치시대 전체의 역사성과 정당성을 스스로 부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된 중요한 원인은 바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가혹한 탄압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광주민중항쟁은 그야말로 광주 일원에 국한되는 항쟁이 아니고 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연결되는 민족운동 전체의 불씨가 되는 항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이 광주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것은 민족사적인 맥락에서 설명되어져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왔다든지, 박정권 시대에 개발이 뒤늦게 이루어진 지역이라든지 하는 이야기를 흔히 합니다만, 저는 반드시 그런 맥락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민족운동의 발원지는 어디라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불씨가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지역에서 일어난 불씨가 얼마나 크게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부당한 권력, 포악한 권력에 민중들은 언제나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다만 어디에서 먼저 발단되고 나중에 발단되는가 하는 점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광주민중항쟁을 지역적 차원에서 보는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 지역은 갑오농민전쟁으로부터 식민지시대의 광주학생운동으로 연결되면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열기가 특별히 높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너무 지역적 문제로 한정을 짓게 되면 전두환 정권이 광주민중항쟁을 지역감정으로 처리하려는 책략에 말려 들어갈 위험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송 저도 광주민중항쟁을 지역적 감정의 소산이나 지역적 문제로 처리하려는 전두환 정권의 기본적 정책과 그 연장선상에서 현 정권도 실제적으로는 같은 전작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전라도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항쟁이 강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했습니다. 우리가 현 단계에서 그 이유를 좀더 깊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지역은 우리 역사상 계급적 모순관계가 가장 잘 표현되고 있는 지역이라고 보입니다. 다시 말해 정치·경제·사회의 모순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는 지역이 전라도였기 때문에, 전라도는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오늘의 민중적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본다면 갑오농민전쟁을 전후해서 봉건적 착취와 수탈이 가장 심했고, 그 이후의 일본 점령기에서도 식민지지배하의 기생지주들이 전라도 지방에 가장 많았기 때문에 봉건적 수취의 여러 모순이 집약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광주학생운동도 그러한 모순관계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이 광주학생운동을 촉발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이어져온 저항의식은 그 지방 민중들의 정신사에 축적되었고 사회모순이 이어져 내려오면서 광주민중항쟁이 생겨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군이 군부독재를 견제해주리라는 소박한 기대

  강 그건 정확한 지적입니다. 구한말의 경우를 보면 전국적으로 봉건적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곳이 전라도지역이었고, 식민지시대 농촌 빈민이 가장 많은 곳도 전라도 지방이었습니다. 식민지 지배가 낳은 모순도 그 지방에서 제일 첨예하게 드러났고 8·l5이후에 좌·우투쟁의 시기에서도 그 지역은 역사적 의식이 높았습니다. 박정권의 개발정책이 가장 취약하게 이루어진 곳도 그 지역이었고, 전두환 정권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저항의식이 가장 폭발적으로 나타난 지역도 전라도지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지역이 우리 민족 전체의 운동을 선도했던 지역으로 볼 수는 있지만 광주민중항쟁이 민족사에 확고히 자리잡을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드시 어느 한 지역만의 사회·경제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파악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운동이 전국에서 일시적으로 한꺼번에 폭발하는 예는 드뭅니다. 사회·경제적 모순이 가장 심화된 지역에서 먼저 폭발하게 되는 것이지요. 민족운동이 역사적인 정당성을 가지려면 어느 지역에서나 보편성을 가지는 모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전국적인 운동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민족운동이 되고 운동의 역사성과 정당성이 주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송 그런 역사성 속에서 볼 때 광주지역은 정치적·경제적 모순이 심화된 지역이면서 그 모순에 저항하는 세력을 대표하는 지역이었다 할 수 있지요.


  강 광주민중항쟁은 근·현대사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과거의 민중항쟁보다 더 성숙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갑오농민전쟁은 비조직적인 움직임에서 출발했다가 나중에는 무장항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것은 그 이후의 의병항쟁으로 연결이 되지요. 식민지시대에 들어와서의 3·1운동은 그 발단의 과정에서 약간의 조직적 측면이 보이긴 합니다만 이른바 비폭력운동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4·19운동도 그 발단은 상당히 비조직적 운동으로 발단이 되고 마지막까지 비폭력운동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은 비조직적 운동으로 발단이 되었음에도 10여 일의 기간동안 기존의 행정기능을 마비시킬 정도가 되었고 항쟁 중에 자위수단을 가지는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근대 이후 우리의 민중항쟁 사에서 볼 때 크게 진일보한 항쟁이었다는 데 또한 그 의미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한 가지 문제가 지적됩니다. 한 지역의 행정을 일정기간 동안 마비시키고 시민군이 무장을 하게 되면 대체로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 내부에서 일정한 자치권력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실제적 상황은 현장에 계셨던 송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시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자치권력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광주항쟁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제약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물론 그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 이후의 우리의 정치사에서 지방권을 확대해 가려는 움직임이 상당히 있었음에도 식민지시대, 8·15이후의 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을 거치면서 지방분권적인 의미의 권력분산에는 거의 진전이 없었습니다. 지방자치제가 발전하고 권력의 분산이 이루어질 때 민주주의가 발전한다고 본다면 우리의 정치사는 그렇지 못했지요. 그렇다면 10여 일간 행정기능을 마비시키는 항쟁과정에서 자치권력이 성립될 수 있는 가능성이 과연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는 역사를 하는 저에게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큽니다.


  송 저는 그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수습대책위원으로 있었습니다만 시민군이 일시적으로 광주지역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광주외곽을 포위하고 있는 '육십만 군대'의 힘에 기가 질렸지 때문에 어떻게 하면 살상자와 희생자가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지 다른 견해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 정도의 성취를 바탕으로 정부쪽에 어떤 태도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기대만 있었지 군부의 본질은 전혀 파악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민주화였기 때문에 군부독재를 뒤에서 지원해주고 있는 미국의 본질에 대한 인식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미국이 독재권력을 견제해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참으로 소박한 인식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이상의 싸움은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정치적 반응이 아니라 감정적 반응으로 보아야 합니다. 운동사적인 평가에서 위의 두 가지가 한계로 지적됩니다만 아무튼 정부쪽에서 5월 22일 봉쇄·고립화 전략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의 본질을 깨달은 최초의 반미운동

  강 이런 점은 광주민중항쟁의 성격과도 연결될 것입니다. 광주의 거의 모든 계층이 참여한 광주민중항쟁이 항쟁군의 세력내에서 미국이 독재권력을 막아주기를 기대했다는 사실은 광주민중항쟁이 계급성을 띤 항쟁은 아니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광주민중항쟁이야말로 순수한 민중항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송 제가 조금 부연설명을 하자면, 수습대책위원회에서 정부에 요구하는 수습방안으로 나온 안건들은 일선에서 직접 총을 들고 싸웠던 시민들의 의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소시민적 입장의 요구였습니다. 그 당시 상황으로서는 더 이상 싸우면 무모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고, 또 이 정도면 정부에서 들어주지 않겠느냐 하는 소박한 기대에서 그런 안이 나왔습니다. 결국 5월 22일 구체적으로 정부의 강경한 태도가 윤곽을 드러내자 시민군들은 25일, 본격적으로 싸울 자세를 갖추고 기존의 시민군들에 도시빈민층들이 합세한 세력으로서 새롭게 대열이 정비되는 상황이 됩니다. 광주민중항쟁의 진행과정에서는 이처럼 처음에 소박한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의 의식단계와 다시 끝까지 무장투쟁으로 맞섰던 사람들의 의식단계를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 8·15이후의 우리 역사를 보면 이승만 정권이 성립되던 과정에서도 미국의 입김이 상당히 크게 작용했고, 이승만의 독재권력이 심화되었을 때에는 자기들의 극동전략상 불리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4·19혁명이 일어났을 때 어느 정도 방관의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박정권이 성립되고 난 후에도 한때는 미국과 마찰이 있긴 했습니다만 역시 미국의 극동정책 전반을 놓고 보면 박정권의 수립이 바람직했기 때문에 그 정권을 뒷받침해주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철저한 반공교육이 실시되는 상황이었지요.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광주민중항쟁의 와중에서도 항쟁군들이 미국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고 하는 점은 8·15이후의 역사적 환경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이 8·15이후의 우리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민족사적 고비가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해서 미국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반미운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인 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송선생님의 말씀은 항쟁군내에서도 미국이 독재권력을 견제해주리라는 기대를 했다가 그 기대가 현실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미국에 대한 반감이 강화되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광주항쟁 이후의 반미운동은 이른바 용공적인 것에서 출발했다기보다는 독재를 막아주리라고 바랐던 소박한 바람 그것이 올바른 바람이든, 잘못된 바람이었든 간에 그것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반미운동이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미운동은 순수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한 반미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송 제가 나중에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의 특별보좌관을 만났었는데 가장 관심있게 물어보는 것이 미국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저도 당시, 미국에 대한 태도가 정리되지 않았던 상황이긴 했습니다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한미단합사령관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전반적인 사태가 정리되면서 광주에서의 한미의식은 엄청나게 성장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잃으면서 까지 기대를 걸었던 미국의 배반 때문에 그 경험은 훨씬 처절했고 광주시민들의 반미감정은 그 심도가 깊을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전라도 사람들은 흔히 '반골기질'이 있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단순히 감정적 차원의 평가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반미의식은 민족의 당위적인 요구에서 조금도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운동의 과학적 분석과 인식이 보다 중요하게 선행됨으로써 운동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혼란된 상황에서 강도 한 건 없었던 80년의 광주

  강 그것이 절대적인 당위성을 가진 이상에는 지역감정으로 이야기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려는 것은 역대정권이 이용했던 책략에 말려드는 결과밖에 안되는 것이지요. 지방적 특색을 가지고 그 지방의 문화와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큰 밑거름이 되지만, 정치적으로 악용하여 지방색과 지역감정을 동일시하는 분리통치 정책과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광주민중항쟁이 광주 일원에서 일어난 항쟁이면서도 그 이후의 우리의 역사와 민족운동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광주민중항쟁은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성립된 노태우 정권은 현재, 전두환 정권의 탯줄 속에서 나왔으면서도 자기가 나온 탯줄을 스스로 끊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권이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태우 정권의 존립이유가 바로 5공비리를 척결해야만 한다는 것에 있다는 것은 광주민중항쟁의 주범인 5공과의 단절이 노태우 정권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행해지고 있는지는 다시 평가할 문제입니다.
  8·15이후의 상황도 그랬습니다만 80년대 이후의 민족운동사는 처음에는 전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에 집중되었다가 80년대 중반에는 노태우 정권이 6·29선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현재에는 민족통일운동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역사의 정직성이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과거에 4·19가 민주화운동으로 발단이 되었다가 장면정권이 성립되고 난 후에 바로 통일운동으로 연결된 것처럼 말입니다. 1987년의 6월 민중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민족통일운동으로 연결되어 보다 발전된 운동이 진행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광주민중항쟁은 우리의 운동사에 핵심적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이유는 광주민중항쟁은 민주화운동을 성사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민족통일운동에까지 연결되게끔 불씨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민족운동사의 흐름 한가운데 우뚝 선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송 역사의 발전과 진행과정에서 볼 때 다소 우연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민족적 요구와 역사가 나가야 할 필연적 방향으로 위치지워진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저는 광주항쟁이 가지고 있는 민중의 내재적 힘을 기존의 관점과는 달리 도덕적 입장의 시각에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아까 말했던 역사의 필연성과도 연결됩니다. 광주항쟁의 해방 기간, 그러니까 모든 행정기능이 마비된 그 기간 동안 저희 스스로도 놀라웠던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혼란상황에서도 강도 한 건 없었고, 은행도 털린 적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광주사료연구회의 조사에 의하면 어느 쌀가게에서, 자기 친척들을 주려고 몰래 숨겨 놓았던 쌀 한 가마니를 광주시민들을 위해 모두 팔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5월 25일 새벽에 수습대책위원회의 모임에 가려고 집을 나서다 만난 한 시민의 행동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엔 담배보급이 일체 차단된 상태였기 때문에 담배가 귀했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때 만난 시민은 어디서 구했는지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도 반가워서 한 대만 얻을 수 없겠냐고 했더니 자신도 대여섯 대 밖에 가지지 않았으면서도 내게 두 대나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광주시민들 사이엔 마지막 담배 한 대까지 나누어 피울 수 있는 도덕성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도덕성이 발현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민중들이 통치의 객체로 떨어졌을 때의 질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발적 질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발적 질서를 법제화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저는 민중세력의 낙관적 근거를 이런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역사의 필연성은 민중들이 바로 이런 도덕성이나 정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중이 스스로 만든 권력과 질서는 민주주의 발전의 핵

  강 민중들이 스스로 만든 권력일 때 그 권력에 대한 애착심이 아니라 깨끗한 권력으로 만들려는 도덕성도 나오게 되는 것이고 주의가 발전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민족사적으로 광주민중항쟁을 정당화시키고 의의를 높이는 데에 이러한 도덕성과 정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즈음 논의가 되고 있는 지방분권적 지방자치제에도 그러한 정신이 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지방민들 스스로 만든 권력과 질서가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는 사실은 광주민중항쟁의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확인하게 됩니다.


  송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반성적 입장에서 몇 가지로 정리해보면, 우선 당시 광주지역 사람들의 현실적 정치모순에 대한 인식이 막연한 상태였다는 점입니다. 독재자들의 압제·고문·살인 등이 계기가 되어서 유발된 민중적 봉기나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결국 감정의 수준에서 유발된 행동은 나중에 민중들이 지치고 나면 지배자들이 던진 미끼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민족해방운동가인 프란츠 파농의 말을 바탕으로 했을 때 이러한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지금껏 현정권은 광주민중항쟁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광주항쟁을 '사태'라고 부르면서 근본적인 정신이나 진정한 의미를 지역적 사건으로 희석화시키려고 하다가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니까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면서도 광주항쟁에 많은 희생자를 낳게 한 책임자 처벌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노태우가 광주민중항쟁을 '민주화운동'이라고 규정할 때 '사태의 진전과는 별도로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다고 한 말은 그 상황을 낳게 한 원인과 진행과정상의 문제들은 그대로 덮어둔 채 명칭만 그렇게 부른다는 의미와 다를 게 없습니다. 여기에 현정권의 위기가 있습니다. 이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때 광주항쟁의 연장선상에서 투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 단계의 한국 민중들은 미국에 대해서 단순히 '반미'라는 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상부구조로서 존재하고 있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미국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모순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이 운동 지도부만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의 계층에게까지도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현정권이 계속적으로 해결을 미루고 있을 때 그 위기는 높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광주민중항쟁 이후의 민주화운동은 민중적 의지가 머지 않아 실현되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 전망을 갖게 합니다.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 운동사에 정확히 자리매김

  강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노태우 정권이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명칭을 바꾸었다는 것은 그 운동 자체의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했다는 말인데 민주화운동으로 명칭을 바꾼 것에 맞는 정책이 분명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결방안이 있습니다. 하나는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시켜주는 방안으로서, 애국지사로서의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탄압세력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역사적 응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송 그런 정책을 취하고 있지 않으면서 말로만 정당성을 인정한다는 정부의 태도는 양시론(兩是論)의 입장인데, 말 그대로 양시론은 양편 모두 목적이 정당하고 그에 대한 실천이 정당하면 양편 다 옳다는 뜻입니다. 권력측의 양시론은 스스로의 본색을 은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광주시민들은 광주에서의 군인들의 행위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해 5월 21일 계엄군들이 시민군에 의해 퇴각당해 4일 동안 산에 숨어 있다가 마을로 내려오면서 물가에 있던 국민학교 4학년 학생과 중학교 1학년 학생에게 집단사격을 가해 목숨을 잃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무자비한 행위가 어떻게 양시론으로 호도될 수 있습니까.
  군대의 규율은 상사계급에게 절대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행위를 한 군인을 샅샅이 찾아내어 그 사람에게만 벌을 주겠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최고책임자에게 응당 벌이 가해져야 하고, 그렇게 되면 그 책임은 전두환·노태우 정권이 스스로 지고 두 정권이 대오 각성하지 않으면 결국 민중들의 힘에 의해 무너지고 마는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강 한 가지를 더 지적하자면,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역사에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역사에서 두 번 다시 군부독재정권이 성립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좋은 교훈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송 광주민중항쟁은 80년 이후 정치·사회·경제적 상황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신사적인 학문세계에 변화를 주는 데도 상당히 큰 역할을 했습니다. 80년 이후 젊은 세대에게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은 보수적 의식의 벽을 깨고 민족문제에 대한 관심의 폭을 넓혔습니다. 미국에 대한 시각을 결정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학문적 움직임 내지 학술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또한 민족과 민중의 현실을 과학적이고, 실천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현재에는 반제·반독점 이론의 정립과 실천이 거대한 운동으로 진전되고 있습니다.


  강 오늘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 대해 그 역사적 의의를 말하는 것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우리 나름의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후세에 광주민중항쟁이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 만큼 광주민중항쟁의 자료들을 면밀히 조사하고 수집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후세의 사가들이 광주민중항쟁을 평가할 때는 우리가 평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발전된 단계의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겠지요. 이 자리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의미를 두서없이 얘기했습니다만, 앞으로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 우리의 운동사에 정확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서 많은 연구와 더불어 민족운동의 양적 질적 성장을 다시 한번 다짐하고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