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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18 / 기독교, 가톨릭, 불교 각각의 입장(국민신문, 1988. 5)

본문

국민신문 1988년 5월 6일 발행

토론주제 : 5·18



기독교

光州여 ! 우리가 너를 잊는다면

  <에비>는 실체는 없으면서 그 이름만으로 아이들을 겁주는 가공의 무엇이다. 에비 온다. 에비가 물어간다. 울음 뚝! - 에비는 실로 만병통치약이었다.
  그 명칭도 확실히 하지 못한 채 8년이 된 <광주사태>-지난 양대선거를 통해 분명해졌듯이 광주사태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에비>였다. 만병통치, 무소불능, 노름판에서의 <비광>이나 조우커, 심지어는 월급 몇백만원짜리 국회의원마저도 부지기수로 만들어내는 도깨비 방망이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되므로서 광주사태는 먼 옛날 삼국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처럼 들리게 되었고, 남의 나라 해외토픽처럼 들리게 되었다는데 있다. 실체-사건의 진상과 역사적 계승과 교훈-는 잊혀진 채 이름만 공중에 떠다니는 <에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또 광주사태는 심심풀이 땅콩이 되어 버렸다. <기나 고동이나>, 술집에서부터 국회 의사당에 이르기까지 아무나 씹을 수 있는 껌이 되어버린 것이다. - 원래 맛은 잊혀지고 고무덩어리만 남은 껌!
  소위 광주인사로서 광주 아닌 곳에 살면서 광주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광주를 어쩔 수 없는 그러면서 대단한 부담이 되고 나아가 질시까지 받는, 내심으로는 거북한 내통이 <광주사태>가 되어버렸다. 정치인들에게 <광주사태>는 여야를 막론하고 시한폭탄-하나밖에 없으며, 그것을 사용하면 너나없이 함께 죽는-이어서 그 끄트머리만 슬쩍보이고 감추는 비장의 카드였다. 먹자니 목에 걸리고 버리자니 아까운 계륵이었다. 그리하여 원혼은 땅에 내려오지도 못하고 정토에 가지도 못한 채 구만리 장천을 날아다니는 기구한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 시절에, 그들은 남의 땅, 남의 잔치에 노래나 부르는 기막힌 광대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때 그들이 남긴 노래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찌 원수의 땅에서 시몬의 노래를 부르랴 ! 에루살렘아, 우리가 너를 잊는다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 팔이 굽어져 버릴 것이다 !]
  광주여, 우리가 너를 잊는다면-네가 끝까지 이 역사에 (에비)로만 남는다면 !!
최연석(강진 병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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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5·18과 화해의 원칙

  배냇병신도 아니고 자동차에 치어서 병신된 것도 아니고 80년 5·18 당시 시민군으로 끝까지 저항하다가 관통상을 입어 절름발이가 된 내 친구 하나가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있다. "나 비록 병신이 되어 일자리도 잃고 장가도 못가는 신세가 되었네만, 그 때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것이 부끄럽고 한이 되네. 허나 어쩔 것인가. 고맙게 생명이라도 부지한 우리가 가신 님들의 한풀이를 해드리는 도리 밖에 없을 것 같네"라고. 당시 심란해서 화병으로 술이 취해 돌아다니다 나날을 보내 버린 나는 그 친구 앞에 서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난 4·26총선 때 우리 광주시민은 정웅씨를 전국 최고득표율로 국회의원에 당선시켰다. 이 또한 5·18영령들의 원혼들을 기필코 평안히 고이 쉬도록 해주겠다는 위대한 광주시민의 결연한 의지표명의 일이 아닐 수 없다. 광주사건의 진상은 정확히 그리고 신속히 전체국민과 온 세계 사람들에게 여실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그리고 레이건을 위시한 광주 대학살의 주범들은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사형은 모면시켜줄지라도 한 천년쯤 징역선고를 내려 감옥에 가둬두고 개정의 정이 보이면 매년 1년 내지 10년씩 감형시켜주면 될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도 인간다운 인간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외국으로 도망시켜 도둑질한 엄청난 국민의 돈으로 경호원들을 부리며 호사스런 방탕생활을 하도록 방치하면 그 범인들은 끝까지 회개하고 구원받을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 살인범들이 도둑질 한 돈을 모조리 환수하여 빼앗긴 농민들의 빚을 갚아주어야 하고 까마득한 외채를 갚아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적인 용서와 화해의 길은 그 길밖에 없다.
  그리스도교는 남의 것을 도둑질한 범인이나 다른 사람을 이유없이 두들겨 패서 상처를 입히거나 죽인 범인을 처벌하고 감옥에 가두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리스도교는 대량학살의 주범들이 자기에 과오를 한사코 시인하지 않고 강제로 권력의 자리에 눌러앉아 있으면서 계속 국민을 무시하고 짓누르고 빼앗고 최루탄을 쏘아대고 감옥에 보내고 있는 동안, 그들을 그런 상태로 방치해둔 채 그들을 용서한다고 하면서 악수와 화해의 손을 내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을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고 기도하셨다. 용서야말로 가장 위대한 무상성(無償性)의 사랑이고, 인간을 인간되게 하고 사회를 사람사는 사회되게 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용서를 빌고 계시는 예수께서는 일생동안 정통성이 없는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에 대적하여 사투를 벌이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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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5· 18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갈갈이 찢어버린 그 날이 또 온다. 살아있는 자의 피눈물, 가슴을 치는 분노가 아직 뜨거운데 독재자들은 지나간 역사의 한 페이지로 어물쩡 넘기려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가해자들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진상은 은폐한 채 화합, 보상 운운하며 희석화시키고 있다. 5·18의 오적들은 처단되기는 커녕, 여전히 권력의 바톤을 이어받고 있다.
  우리 역사는 이렇게 곤두박질하고 말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5·18은 결코 어둠과 죽음의 역사인 것만은 아니다. 사선(死線)을 넘으면서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너가 아닌 우리가 되었다. 네것 내것이 아닌 우리 것이 되었다. 열사들이 쏟은 핏물로 하여 역사의 한 귀퉁이에 새살이 돋고 있는 것이다. 분단 이데올로기. 미 제국주의의 본질이 폭로되고, 민중의 뿌리깊은 분노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아직 가파른 고갯길이다. 우리의 역량이 발전한 것 이상으로 독재와 미 제국주의의 음모는 고도화되고 있다. 단순한 폭력 통치가 아닌, 공작통치(저강도전쟁)가 우리사회에 속속들이 파고들고 있다.  5·18은 비단 한 시기, 광주에 국한된 사건이 아닌, 우리사회 모순에 대한 민중적 분노의 폭발이며 아직도 그 도정상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의 선거과정예서 보아온 것과 같이, 광주·전남을 고립화시키고  투쟁력을 잠재우려는 다각도의 술책이 시도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한 분할 통치의 장벽을 또다시 깨부수고 나아가는 것만이 열사들이 못 다 이룬 꿈, 민주와 민족자주통일, 민중생존의 그날을 앞당기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