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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18 뒤안길에 묻힌 사연 / 5월문예운동 산실 등나무 집. 한송주(월간예향, 1996. 2)

본문

특집/5·18 뒤안길에 묻힌 사연

  '광주 알리기' 눈물과 땀 아롱진 창작실

      -5월 문예운동 산실 '등나무집'



한송주



  이제 등나무집은 새시대를 맞아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올 4월의 '등꽃제'는 어느 때보다 즐겁고 환한 잔치판이 될 것 같다.

  사람들은 이곳을 '등나무집' 이라 부른다. 광주광역시 서구 사동 16의 2번지, 대지 2백평에 목조 3층 건물. 자잘한 방이 여남은 개가 있는 일제 때 적산(敵産)가옥. 허름한 외양과는 달리 온 집을 감싸고 있는 등나무꽃이 유난히 아름답다.
  사직공원으로 올라가는 광주천변 불로동 다리(부동교) 옆에 위치해 '불로동 화실'이라고도 하는 이 집은 '광주5월'을 예술로 형상화 해온 문예운동의 산실이다. 광주의 젊은 예술인들은 80년대 말부터 이곳에 모여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며 5·18의 진실을 널리 알리는 데 열정을 불살랐다.
  민중미술계열의 거대한 모임체인 광주·전남미술인 공동체(光美共)가 이곳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광주 청년문학회가 이곳에서 출판운동을 했으며 20여명의 화가·문인들이 또한 개인 작업을 했다. 7년여에 걸친 씩씩한 활동으로 '등나무집'은  이 지역 문예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서울이나 타 지방의 예술인들도 광주에 오면 꼭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등나무집에 맨 처음 입주한 예술인은 화가 김경주씨(40·동신대 교수) . 88년 겨울, 3층에 화구를 풀었다. 그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 집은 학생들과 독학자들이 공부를 하는 사설 독서실로 운영되고 있었다. 30년 역사를 가진 사설 독서실은 많은 고시 합격생을 낸 유명한 곳이었으나 80년대 이후 사양길에 접어들어 마침내 문을 닫았다.

  화가 김경주씨가 첫 입주자

  화가 김씨는 넓고 싼 맛에 폐가처럼 어수선한 집에 들어와 벌벌 떨면서 한겨울을 났다. 곱은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열심히 판화를 찍고 수묵을 쳤다. 어둡고 긴 겨울에 지친 마음으로 이듬해 봄을 맞았는데 4월 중순 어느날 30n가 넘는 담장 위에 하얀 등꽃이 휘황하게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단번에 마음이 환해졌다. 등꽃은 그 빛깔과 향기로 밤을 온통 밝혔다.
  혼자보기 아까워 지인들을 불러들여 함께 즐겼다. 이때부터 해마다 4월이면 등나무집에는 광주의 풍류객들이 모여 앉아 술잔 더불어 시가를 읊는다.
  "우리는 그것을 '등꽃제'라고 부릅니다. 연전에는 더욱 성황을 이뤄 30여명의 장정들이 옥상에 몰려 왁자히 즐기는 통에 비실비실한 집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 뭡니까. 특히 황지우 시인같은 덩치가 왔다갔다 할 때는 천장에서 뿌지직 소리가 나 정말 불안했지요. "
  등나무집 소문이 나면서 89년 겨울, 화가 이준석·장경철씨가 3층에 입주했다. 그리고 90년에는 화가 정희승·임홍수씨가 들어왔다. 이어서 김정환·조정태·천찬욱씨 등 광미공 회원들이 합세했다. 88년 YWCA에서 결성된 이래 사무실도 갖추지 못하고 있던 광미공은 이 등나무집이 모임터가 되었다.
  광미공 뿐 아니라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문인들도 여기에서 여러 차례'모임을 갖고 시국에 대처한 문예운동의 방향을 논의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 김호균·윤정현·정채천·이철송씨 등 광주청년문학회 회원들이 이곳에 '광주출판사' 를 차려 본격적인 출판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등나무집은 화가 10여명, 문인 10여명이 동거하는 명실공한 문예운동 본부가 되었다. 또한 이들 거주자들뿐 아니라 임영진·곽재구 등 '5월시 동인,황지우·김유택·박호재씨 등 문인들, 강연균·이태호씨등 화가와 평론가들이 자주 드나들어 늘 성시를 이뤗다.거기에다 대학 운동권 학생들까지 이따금 들락거렸다.
  대학을 갓 졸업한 광미공 젊은 화가들은 이 지역 학생운동에 예술적으로 큰 지원을 했다.
  운동 모임에 없어서는 안되는 대형 걸개그림의 태반은 이 등나무집에서 기초되었다. 대형 걸개그림은 보통 생각하기보다 정교한 기능을 요구하기 때문에 선배화가들이 지도해 줄 수밖에 없었다.
  91년 말에는 시인 곽재구씨가 '손님'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던지 짐을 싸들고 3층으로 들어와 한 식구가 되었다. 그는 3평짜리 단칸방에서 용맹정진, 지금까지 4년사이 시집 3권, 산문집 2권, 장편동화 1권을 내는 대수확을 거두었다. 화가 감경주씨도 두 번의 개인전을 호평속에 여는 결실을 맺었다.
  7년 사이 여러 사람이 들고난 끝에 현재는 화가 이준석·장경철씨, 시인 곽재구씨, 화가 홍명숙씨 등 4명이 함께 살고 있다. 이춘석씨는 최근 광주미술상을 수상한 광미공 6대 회장으로 장경철씨와 함께 7년제 등나무집을 지키고 있으며 곽재구씨는 5년째, 홍명숙씨는 1년 남짓되었다. 이 집 1층에는 문예운동과는 좀 성격이 다르지만 조선대 학생들의 모임체인 '디자인 뱅크' 사무실이 있다.
  등나무집을 텃밭으로 무럭무럭 자란 광미공은 현재 1백10명을 회원으로 가진 이 지역 최대의 미술인 단체로 성장했다. 규모 못지 않게 활동도 활발해 해마다 5월에 광주 금남로에서 펼치는 '5월거리미술제' '합동회원전' 등이 늘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광주비인날레 행사에 맞춰 망월동 묘역에서 대대적인 통일미술제를 가져 역량을 과시했다.
  엄혹했던 시절, 5·18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이처럼 열렬하고 꾸준하게 펼쳐온 단체는 달리 찾기 어렵다. 광미공은 88년 흥성담·조진호씨를 공동대표로 발족해 박상호·이사범·김경주·박철우·이준석씨 등이 회장을 맡으며 나날이 발전해왔다.

  문인들도 출판운동 펴

  광미공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는 화가 강연균씨도 등나무집에 무척 애착을 갖고 있다. 그는 추운 겨울이면 느닷없이 찾아와 난로도 피우지 않고 밤새워 그림을 그린다.
  "아마 옛날 춥고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작가 정신을 단련하시려는 것 같아요. 강 선생님의 그런 투철한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지요. "
  이준석씨의 말이다. 등나무집은 젊은 작가들의 좋은 훈련장일 뿐더러 중견·원로 작가들에게 옛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마음의 고향'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 박호재씨도 등나무집에 대해 남다른 추억을 갖고 있다. 그는 지난해 발표한 자전적 증편 (야간주행)에서 등나무집의 피끓던 문예운동 시절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더러 치기와 서두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밤새워 집단 창작을 하고 걸개 밑그림을 그리던 젊은 예술가들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 이었다"고 회고했다.
  등나무집에는 5·18 광주민중항쟁을 기점으로 해서 80년대 내내 이어지던 시국사건들의 그 뜨겁고 처절했던 사연들이 생생히 아롱져 있기도 하다. 특히6·10이나 대학생들의 분신정국에서 독재 정권에 항거하던 광주의 젊은이들이 최루탄 연기에 소주를 섞어 마시며 슬퍼하고 분노했던 눈물과 땀이 배 있다.
  이제 등나무집은 새시대를 맞아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올4월의 '등꽃제'는 어느 때보다 즐겁고 환한 잔치판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