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95 광주 통일 미술제 / 망월의 언덕을 넘어 통일로 가는 길(사회문화, 1995. 10)
본문
'95 광주통일미술제
망월의 언덕을 넘어 통일로 가는 길
묘역전시장을 찾아 온 오월유족들이 제 손을 잡고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그분들의 눈물지음을 보며 역사와 예술이 만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깨달았습니다.
'95 광주통일미술제가 제1회 광주 비엔날레와 함께 막을 올렸다. '95 광주통일미술제는 광주비엔날레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정면 대응하고 있는가 하면, 앞으로 있을 제2회 광주비엔날레의 성격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잇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성격의 광주통일미술제를 주관한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는 그 동안 광주시민의 합의없이 관주도로 진행되는 것에 제동을 걸어 왔다. 문민정부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듯 세계화의 이슈를 내걸고 광주 비엔날레를 추진한 전 강운태 관선시장의 정치성을 의심한 때문이다. 실제로 작년 11월부터 추진한 광주 비엔날레는 "실패할 것임이 불을 보듯 뻔"했다. 이젠 2백억이 훨씬 넘는 강제성이 강한 과다한 예산의 추출에서부터 비엔날레 행사시기에 이르기까지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관주도로 밀어부친 당국도 어쩌면 충분히 예견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밀어 붙이기식 행사를 왜 강행한 것일까. 무엇보다도 5·18문제의 의석화에 그 초점이 있는 것 같다. 5.18은 어떤 식으로든 희석화하지 않으면 문민정부의 발목을 잡게 돼 있다.
우연인 듯 보이지만 수순에 따르면 필연인 '5·18책임자 공소권 없음이 결정된 것만 보아도 단순한 행사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95 광주통일미술제를 주관한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는 그걸 우려 했었다.행사주최 측은 따라서 아직도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갈망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행사"였음을 자부하고 있다. 그들은 광주의 역사성을 세계만방에 공유하는 것이 세계화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해 왔다. 민족염원인 통일을 위해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북한작가를 초대해와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내용에 있어서도 광주가 겪어왔던 역사성의 문제를 기초로 삶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비엔날레는 지금 오리무중이다 해프닝의 몇 가지 예는 정말 상징적이다. 설치미술을 한 브라질 작가의 작품을 환경미화요원이 쓰레기인 줄 알고 치워버렸다. 그는 과연 세계화의 이념에 역행한 미화요원인가. 그런 헤프닝을 접어두고서라도 설치미술을 하려고 온 작가가 설치에 협조해 주지 앉는 비엔날레 주최측에 설명서를 발표 항의하며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간 사태는 어느 비엔날레에서도 볼 수 없는 존속이 아닌가.
'95 광주통일미술제는 우선 관주도를 극복하고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진 행사이다. 미술인들의 정성을 한 푼 두 푼 모으고 거기다가 뜻있는 사람의 정성까지 합해진 행사이다. 행사를 홍보하는 도록에 의하면 광주비엔날레에 비해 1백분의 1도 채 안도는 예산으로 치뤄진 행사이다.
비엔날레는 내용에 있어서도 "광주를 세계화하는 상품전시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광주는 이미 세계의 민주성지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제1회 광주비엔날레 대상을 차지한 쿠바 작가 카초의 말은 광주 사람의 가슴을 허망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광주의 5·18 문제가 이미 해결된 줄 알았어요. 그런 걸 알았더라면 작품을 내지 않았을텐데."
그는 그런대로 양심적인 작가인 모양이다. 그는 통일미술제가 열리는 광주 망월동에 와 한국식으로 엎드려 절하고 오월 영령을 위로하였다 한다.
'95 통일미술제가 열리는 곳에 이르러서는 참여하는 작가들과 "연대감을 느꼈다"고 하니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95 광주통일미술제는 중진화가 강연균의 설치미술 「95 하늘과 땅사이」로부터 길을 열기 시작한다 망월동 진입로 입구에서부터 묘지까지 장장 10리의 길에는 만장이 무려 1천2백 개다. 그러고 보면 내용과 형식에 있어 광주비엔날레의 어느 설치미술과는 견줄 것이 없는 지도 모른다, 민족적 양식의 '비나리'인 만장을 형식으로 갖췄기 때문이다. 그 만장 하나 하나에는 역사가 녹아있고, 오월의 아픔이 휘날리고 있으며. 망월의 언덕을 넘을 통일로 향하고 있으니 내용 또한 그러하다. 전국에서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 또한 갑오농민전쟁에서부터 90년대의 시기를 관통한 우리의 역사교과서나 다름없다.그리고 정치고발. 현실세태의 풍자 조국 산하의 아름다움. 환경보호. 통일조국의 꿈. 제국주의의 고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사실상 광주는 그 속에 있지는 않을까 광주비엔날레가 그 속에 있었더라면 더욱 더 빛을 발하고 역사의 아름다운 교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단된 두 개의 비엔날레. 곧 광주의 상징이며 분단된 조국의 상징처럼 광주는 나누어져 있는 실정이다
진정 우리는 오월의 빛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제1회 광주 비엔날레보다 왜소하지만 의미있는 통일미술제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가 없다.
광주비엔날레가 더 멀리 세계화로 치닫기 위한 역사적 몸부림이 더욱이 정당해야 하므로… ■
망월의 언덕을 넘어 통일로 가는 길
묘역전시장을 찾아 온 오월유족들이 제 손을 잡고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그분들의 눈물지음을 보며 역사와 예술이 만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깨달았습니다.
'95 광주통일미술제가 제1회 광주 비엔날레와 함께 막을 올렸다. '95 광주통일미술제는 광주비엔날레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정면 대응하고 있는가 하면, 앞으로 있을 제2회 광주비엔날레의 성격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잇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성격의 광주통일미술제를 주관한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는 그 동안 광주시민의 합의없이 관주도로 진행되는 것에 제동을 걸어 왔다. 문민정부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듯 세계화의 이슈를 내걸고 광주 비엔날레를 추진한 전 강운태 관선시장의 정치성을 의심한 때문이다. 실제로 작년 11월부터 추진한 광주 비엔날레는 "실패할 것임이 불을 보듯 뻔"했다. 이젠 2백억이 훨씬 넘는 강제성이 강한 과다한 예산의 추출에서부터 비엔날레 행사시기에 이르기까지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관주도로 밀어부친 당국도 어쩌면 충분히 예견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밀어 붙이기식 행사를 왜 강행한 것일까. 무엇보다도 5·18문제의 의석화에 그 초점이 있는 것 같다. 5.18은 어떤 식으로든 희석화하지 않으면 문민정부의 발목을 잡게 돼 있다.
우연인 듯 보이지만 수순에 따르면 필연인 '5·18책임자 공소권 없음이 결정된 것만 보아도 단순한 행사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95 광주통일미술제를 주관한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는 그걸 우려 했었다.행사주최 측은 따라서 아직도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갈망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행사"였음을 자부하고 있다. 그들은 광주의 역사성을 세계만방에 공유하는 것이 세계화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해 왔다. 민족염원인 통일을 위해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북한작가를 초대해와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내용에 있어서도 광주가 겪어왔던 역사성의 문제를 기초로 삶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비엔날레는 지금 오리무중이다 해프닝의 몇 가지 예는 정말 상징적이다. 설치미술을 한 브라질 작가의 작품을 환경미화요원이 쓰레기인 줄 알고 치워버렸다. 그는 과연 세계화의 이념에 역행한 미화요원인가. 그런 헤프닝을 접어두고서라도 설치미술을 하려고 온 작가가 설치에 협조해 주지 앉는 비엔날레 주최측에 설명서를 발표 항의하며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간 사태는 어느 비엔날레에서도 볼 수 없는 존속이 아닌가.
'95 광주통일미술제는 우선 관주도를 극복하고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진 행사이다. 미술인들의 정성을 한 푼 두 푼 모으고 거기다가 뜻있는 사람의 정성까지 합해진 행사이다. 행사를 홍보하는 도록에 의하면 광주비엔날레에 비해 1백분의 1도 채 안도는 예산으로 치뤄진 행사이다.
비엔날레는 내용에 있어서도 "광주를 세계화하는 상품전시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광주는 이미 세계의 민주성지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제1회 광주비엔날레 대상을 차지한 쿠바 작가 카초의 말은 광주 사람의 가슴을 허망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광주의 5·18 문제가 이미 해결된 줄 알았어요. 그런 걸 알았더라면 작품을 내지 않았을텐데."
그는 그런대로 양심적인 작가인 모양이다. 그는 통일미술제가 열리는 광주 망월동에 와 한국식으로 엎드려 절하고 오월 영령을 위로하였다 한다.
'95 통일미술제가 열리는 곳에 이르러서는 참여하는 작가들과 "연대감을 느꼈다"고 하니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95 광주통일미술제는 중진화가 강연균의 설치미술 「95 하늘과 땅사이」로부터 길을 열기 시작한다 망월동 진입로 입구에서부터 묘지까지 장장 10리의 길에는 만장이 무려 1천2백 개다. 그러고 보면 내용과 형식에 있어 광주비엔날레의 어느 설치미술과는 견줄 것이 없는 지도 모른다, 민족적 양식의 '비나리'인 만장을 형식으로 갖췄기 때문이다. 그 만장 하나 하나에는 역사가 녹아있고, 오월의 아픔이 휘날리고 있으며. 망월의 언덕을 넘을 통일로 향하고 있으니 내용 또한 그러하다. 전국에서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 또한 갑오농민전쟁에서부터 90년대의 시기를 관통한 우리의 역사교과서나 다름없다.그리고 정치고발. 현실세태의 풍자 조국 산하의 아름다움. 환경보호. 통일조국의 꿈. 제국주의의 고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사실상 광주는 그 속에 있지는 않을까 광주비엔날레가 그 속에 있었더라면 더욱 더 빛을 발하고 역사의 아름다운 교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단된 두 개의 비엔날레. 곧 광주의 상징이며 분단된 조국의 상징처럼 광주는 나누어져 있는 실정이다
진정 우리는 오월의 빛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제1회 광주 비엔날레보다 왜소하지만 의미있는 통일미술제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가 없다.
광주비엔날레가 더 멀리 세계화로 치닫기 위한 역사적 몸부림이 더욱이 정당해야 하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