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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월의 대표적 민중화가 홍성담씨를 찾아 / 광주공동체 정신 담은…5월세계 그려낼 터. 이종태(월간예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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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 5월의 대표적 민중화가 홍성담씨를 찾아

  광주 공동체 정신 담은 '대동세상' 유명
  밝고 예술성 높은 5월 세계 그려낼 터



이종태



  광주 5월의 인물, 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민중 미술가 홍성담(40·洪性潭). 그와의 인터뷰는 시도 자체부터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기자가 두어번 화실로 전화를 걸어 자동응전번화를 통해 용건을 밝혀 놓자, 그쪽에서 전화를 걸어오는 식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사람과의 통화도 매양 그런 방법으로 통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광주 북구 운암동 주공아파트 3단지 근처에 있는 그의 화실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분명 약속을 하고 제시간에 화시에 도착했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쿵쿵 두어차례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인기척조차 없는 게 아닌가. 그래서 하릴없이 발길을 돌리려는 참인데 덜컹 문이 열리는 것이었다. 화실에 들어서자 이런 궁금증부터 풀어야 했다.
  "많은 방문객들이 있는 줄로 아는데 으레 화실문을 열어 놔야 하는 것 아닙니까?"
  "…"
  대답이 없어 '오랜 수감생할 때문입니까?'라고 재차 물엇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감방문은 늘 밖에서만 열게 돼 있는 것 아닙니까? 그네들(간수들)이 필요할 때면 마음대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읽거나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제 자신의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일상에 하도 시달리다보니까 심지어는 저만의 비밀까지 송두리째 빼앗기는 것 같은 착란에 빠지기도 했어요."
  꼭 3년 4개월의 수감생활이었다. 출감하자마자 홍씨는 이곳 저곳의 문을 닫아버렸다. 전화, 화실은 물론 집에 돌아가면 자신의 방문마저 걸어 잠그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그게 너무 편했고, 그러고 나면 '내 것'가운데 도망 가는 것은 하나도 없는 듯 했다. 그뿐 아니엇다. 장기간의 수감생활은 신체장애까지 가져와 홍씨는 출감 직후부터 수개월간 밥만 삼키면 구토를 하는 등 지독한 위장병에 시달렸다. 또 불면증은 매일 밤 찾아와 괴롭혔다.
  이제 5월이면 자유를 만끽한지 세 달 모자란 2년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아프다. 건조하거나 눅눅한 날이면 쑤셔대는 무릎과 관절 신경통도 그렇지만, '남북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대동세상의 열망'에 대한 일시적인 좌절이 가슴에 인두질을 해대는 통에 견디기가 힘들다.

  대동세상 표현한 동학그림 그려

  그렇다고 해서 붓을 마냥 놓을 수만 없는 노릇 아닌가. '환쟁이'라면 응당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겠는가. 구태여 자의 적인 창작 작업이 아니 더라도 쇄도하는 외부의 청탁 때문에 쉴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지난 3월말 서울 예술의 전당에 걸린 10nx20m짜리 대형 걸개 그림 제작도 동학 1백주년 기념사업회의 채근에 의해서였다.
  "제작기간은 불과 두 달이었지만, 어떤 의미를 전할까 무척 고심했지요. 가능한 기존에 나왔던 이미지들을 불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평범한 민중 가족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남접, 왼쪽에 북접을 배치하였는데 북은 최제우 선생에서부터 시인 김지하까지, 남은 전봉준 선생에서부터 현시 대의 농민운동가들까지 그려 넣어 걸판진 대동세상(大同世上)을 구현코자 했죠. "
  홍씨는 이에 덧붙여 'UR협상 타결 후의 농촌상황을 조명, 동학의 정신이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했다'고한다. 이 대형 걸개그림을 포함하여 무려 1백30여명의 화가들이 참가한 동학전시회는 서울을 비롯, 광주·전주·대구·부산 등 5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성황리에 막을 내린 바 있다.
  5월로 접어들면 그야말로 눈코뜰새 없이 바쁠 터이다. 선후배, 동료들과 어울려 걸개그림과 깃발그림 제작에 돌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기획위원으로 있는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마련할 거리굿도 준비해야 하고, 내년 봄에 있을 두번째 개인전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5월 18일은 광주항쟁이 일어난지 14주년째다. 여느 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올 광주의 5월을 맞는 홍씨의 마음은 더욱 비장하다. 광주 사람들이라면 누군들 각별치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바로 '그날' 플랭카드 등을 제작하며 선전대라는 이름으로 선봉에 섰고 그후에도 판화와 걸개그림 등을 통해 민중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온 탓만은 아니리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망자(亡者)들의 정신이 점차 사라지는 것 같아 안달이 날 지경입니다. 작금 광주의 5월은 객(客)이 떠난 초상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죽으면 남은 자들은 무척이나 슬퍼합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슬픔은 곧 잊어버리고, 유산에만 눈독을 들여 싸우게 마련이 지요. "
  80년 광주의 5월은 '하늘도 울고 땅도 울' 만큼 슬펐다. 5공 정권의 감시 때문에 마음대로 울 수조차 없어 그 슬픔은 더욱 컸다는 것이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광주는 한반도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그날 이후 매년 광주 5월의 '싸움'은 전국적인 '싸움'의 강약(强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 것이다.

'망자들의 정신, 진정으로 계승해야'

'다른 지역의 지식인들은 '민족의 성지(聖堆)'로까지 추켜세우며 광주항쟁에 참가하지 못한 '죄의식'을 떨쳐버리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상승효과에 대한 '부담'은 모조리 광주 사람들의 몫이었다. 때문에 광주 사람들은 망자에 대한 슬픔을 토로할 수 없었고, 나아가 자신들의 처지를 냉철히 돌아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90년을 전후로 국제 정세는 물론 국내 정세가 급변하자, 모든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광주가 점차 멀어지고 묘 이장이니 기념사업이니 집안싸움만 남게 된 겁니다. 사업 자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산자들은 망자들을 먼저 추모하고 자신들이 살아온 과정들을 반성해야 합니다. "
  '그래야만 광주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이뤄 질 것'이라는 홍씨는 '명당을 구하고 치장을 하는 일은 결국 산자를 위하는 것이다. 5월 망자들에 대한 각종 사업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망자들에 대한 사업은 그들의 정신을 바로 알고 계승하는 운들을 전개하는 것 뿐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고 덧붙인다.
  이런 운동 전개에 대한 홍씨의 견해는 이렇다. 우선 나눠져 있는 5월 관련단체와 시민연대모임이 하나로 뭉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뭉치는 과정에 있어서도 시인연대모임이 주도하고 5월 관련단체는 감시·지원·감독하는 2선 단체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추후 5월 기념사업은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나가, 5월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 그 현장과 정신을 거짓없이 보여줘야 한다는 게 홍씨의 얘기다.

  평양축전에 보낸 걸개그림으로 구속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순례의 길'. 5월 행사를 금남로나 도청에서만 열게 아니라 금남로에서 망월동에 이르는 길을 '순례의 길'로 삼아, 이곳에 모든 문화역량을 투입하여 장엄한 행사를 열자는 것이다. 또 하나는 5월 현장극·노래극 등 문화행사를 시공(時空)에 맞추자는 재조명 작업이다.
  "80년의 항쟁을 5월이라는 시간과 광주라는 공간으로 묶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덜어내는 작업이지요. 80년대 내내 투쟁하는 사람들이 부르짖었던 '광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라는 명제를 90년대 넘어 '그날'이 올 때까지 또 광주를 넘어 한반도 전역에까지 체화(體化)시키자는 것입니다. "
  올 5월을 기점으로 하여 다시 바쁜 걸음을 준비 중인 홍씨는 지난 92년 8월 7일부터 1년 반 가량이 대학 졸업 이후 가장 한가로운 생활을 했던 기간이라고 한다. 비로소 가정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아들을 만나 한 가정의 가장생활도 맛보았고, 카메라를 들쳐 메고 한가로이 시골 언덕을 거닐기도 했다.
  구속 전부터 몸 담았던 민중미술인연합회(약칭 민미련)가 작년 1월 발전적 해체된 것도 홍씨를 홀가분하게 만든 요인이다. 지난88년 70여명의 민중미술인들이 중심이 돼 결성된 민미련은 90년대를 맞으면서 이 중 20여명이 단계적으로 구속되는 등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홍씨 역시 89년 평양축전에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슬라이드를 보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 선고를 받았고, 중추멤버인 박영균, 차일환, 최열, 백은일씨 등도 줄줄이 구속됐음은 물론이다.
  중추멤버가 구속되고 남아있는 사람들조차 하나들 석방투쟁에 점차 지쳐갈 무렵 조직을 뿌리째 흔들만한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련 및 동유럽의 민주화 투쟁과 국내 정세의 변화였다. 이런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민미련 조직은 너무 강경하게만 굳어있어 미처 그 변화를 체득지 못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힘을 잃고만 것이다.
  출소 직후 홍씨는 민미련 회원들에게 '당분간 개인으로서 변화를 느껴보자'며 조직해체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그의 주장대로 결론이 났다. 작년 1월의 일이다. 그리하여 작년 가을 작업실을 마련, 창작생활에 들어가 일본 도쿄에서 코리아 통일전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전남 하의도 출신인 흥씨는 목포고를 졸업하고 조선대 미대 서양화과에 입학, 동아리 활동을 통해 '의식화 과정'을 걷는 한편 반추상적 유화로 국전과 도전에 입상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가 돋보이는 투쟁성을 지닌 '운동권'인 된 계기는 윤한봉씨와의 만남이다.

  '80년대 미술은 인간의 고뇌 표현'

  홍씨는 대학을 졸업한 77년 결핵에 걸러 무안에 있는 요양소이 들어갔을 때였다. 각종 시국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던 윤한봉·김남주씨가 그곳으로 쫓겨 들어옴에 따라 윤씨에게 집중적으로 '의식화 교육'을 받고, '변혁운동에 복무하는 문화운동가'로 변신, 요양원을 나오자마자 홍씨는 백은일·최열, 박광수씨 등과 함께 '광주자유미술인협회'를 결성한다. 재정권에 대한 반발로부터 출발한 전국 최초의 민중예술단체였다. 이 조직은 대학내 운동권 세력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유인물 제작·배포 등을 맡았고, 광주항쟁 때는 '문화선전대' 로 앞장서게 된다.
  광주자자유미술인협회'는 '일과 놀이'를 거쳐 '시민미술학교'로 자리잡는다. '시민미술학교'는 각종 야학·노동자·농민교육 집회 때 비공개로 판화·만화 강좌를 마련하는 등 이른바 '민중미술'을 가르치게 되는데, 83년 8월 '정의평화위원회'가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하면서 전국으로 번진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판화에 대한 매력을 느꼈지요. 신속한게 복수제작할 수 있어 대중성과 잘 부합되겠다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
  유화를 전공했던 홍씨가 오윤·이철수씨 등과 더불어 80년대의 대표적인 목판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게 된 계기다. 그는 투옥직전까지 무려 3백50여점의  판화를 제작했는데 그중 5월 관련 작품은 50여점에 이른다. '전투적 신명'이 살아있다고 평가되는 5월 연작 가운데 시민군에게 김밥을 나눠주는 아주머니, 아이를 들어올리는 청년 등이 낙천적으로 형상화돼 있는 '대동세상 1'은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작품이다.
  그 외에 부감법의 지도식 풍경표현에 전투상황을 담은 '효천전투', 계엄군의 살인적 폭력을 생생히 고발한 '임산부의 죽음' , 무등산을 배경으로 총을 든 시민군을 그린 '총, 나의 생명', 체포되어 두 손이 오랏줄에 묶인 사람을 형상화한 '친구' 그리고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 전집에 삽입된 판화 등도 그의 대표작들이다.
  이런 일련의 작품들은 흥씨가 구속되자 그의 후원회 결성 및 판화전 개최, 판화집 '오월에서 통일로' 출판기념회 등이 잇따라 열리면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90년10월 영국 글래스고우시에서 홍성담 판화전시회가 열렸는데, 이때 국제사면위원회로부터 올해의 양심수 3명 가운데 1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제 판화 뿐 아니라 80년대에 활동한 민중미술인들의 작품을 보고 전투적이니 과격하니 혹평이 없는 건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이죠. 인간의 고뇌와 갈등을 해결하려는 진지한 작업이었을 뿐입니다. 다만 전시방법에 있어서 일반 대중이 많이 모이는 시위현장을 이용했기 때문에 자연히 목적성을 띨 수밖에 없었죠. "

건강한 세상 만드는데 일익

  80년대 즉 광주민주화운동부터,통일운동에 이르는 이 질곡의 기간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치열하게 살아온 홍성담씨. 그는 90년대 중반까지를 민중미술운동의 '도색기'라고 규정한다. 조선조의 민중미술 전통이 반공이라는 간판 아재서 말살되었다가 80년 광주에서 자생적으로 계승되었는데, 90년을 전후한국내외의 격변 속에 다시금 위기를 맞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진정한 자기모색을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치밀한 현실인식이다. 이에는 대중 특히 소외 받는 계층과의 공동체 삶을 공유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게 홍씨의 주장이다.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을 현장답사와 연계하여 새로운 민족민중예술의 형식과 내용을 창조해야 한다는 얘 기다.
  "판화는 당분간 접어두고 민중을 그리는 유화로 복귀할 생각입니다. 앞으로 제 그림이 피곤하고 지친, 소외받은 민중들이 진실한 삶의 문제를 제 기하고해답을 구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
  홍씨는 '세상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고플 뿐'이라며, '최근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북한 관련 미술 등이 들어오면서 80년대의활발한 운동이 70년대 후반으로 돌아가버린 느낌을 받아 안타깝다'고 덧붙인다.
  홍씨는 85년 이혼하여 어머니, 외아들과 살고 있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 재혼은 아직 생각지 않고 있단다. 올해로 중학교 2학년인 승완(15)이는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잘 이해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투사' 동료다. 5월 행사가 열릴 때면 거리굿마다 쫓아다니며 '아빠석방'을 외쳤고, 민가협 회원들이 양심수 석방을 외칠 때도 늘 앞장 서서 운동가요를 불렀다.
  이런 아들에게 홍씨 역시 옥중엽서에서 '아빠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좋아하는' 동백꽃처럼 살라며 무한한 애정을 표했었다. '동백꽃은 추하게 시든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냥 아름다운 모습인 채 뚝 떨어져 간다' 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