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비상과 얼쩡거림의 사이-황지우의 <<화엄광주>>에 대하여. 강형철(시인의 길 사람의 …
본문
비상과 얼쩡거림의 사이
-황지우의 <<화엄광주>>에 대하여
강형철
소란스럽다. 한동안 소위 지배계급을 형성했던 사람들이 감옥에도 갇히고 한동안 세상땅의 평등과 자유를 얘기하던 사람들은 조용하다. 조용하다기보다는 갈팡질팡한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무엇이 변하고 있는가, 한쪽에서는 세상이 변했다고 떠들고 한쪽에서는 그까짓 거 무슨 변화가 있느냐고, 호들갑 떨지 말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것도 실감 없는 얘기.
한 시절 우리의 시장 부근에서 지글지글 타던 광주는 어디에 있는가. 8월 2일자 어느 신문에 '5·18피해자 추가접수에 장관·의원 등 저명인사도 50명 포함'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이어지고 있다. 교육부 장관, 국회의원, 재야인사의 구체적인 피해상황이 적혀지고 죽은 자의 이름도 활자로 복원되고 있다. 그러고 얼마간 실사를 거쳐 10월, 11월께 보상금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얼마 전에는 12·l2사태 관련 수많은 '별'들이 수많은 '별'들을 고소·고발한 기사도 보였다. 어릴 때 우리는 딱지치기를 하면서 별을 세었다. 고발자와 피고발자들의 이마(우리는 이를 마빡이라 부른다) 에 빛나던 별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일과 딱지장에 그려진 별들의 무게 중 어느 것이 더 실감에 가까울까.
이른바 문민정부. 재산공개를 하면서 정부의 주택정책에 일조했다고 주장, 자신이 지은 70여 채의 집에서 생긴 셋돈을 신중하게 계산하던 모습을 그 어마어마한 직위와는 상관없이 정당하다고 떠들다가 쫓겨난 사람이나, 돈벌이로 대학을 운영하다가 쫓겨난 사람들이나… 그만 쓰자. 갑자기 속이 뒤집힌다.
동물이니까 인간은 잘먹고 잘살아야 한다. 복숭아를 먹다가 퉤하고 뱉은 씨에는 개미들이 득시글거렸지. 힘이 있다면 밟아주고 싶다. 개미의 생존권을 짓밟는 일이라고? 그것은 개미가 아니라 구더기라고? 점잖아지자. 모양만 얘기하는 것이다.
시가 무엇인가. 도대체 지금 시를 들먹거려 뭐하자는 건가. 실감있는 말들은, 쉬지 않고 배포되는 신문이 특호활자 곁들여 빽빽하게 적혀 대신하고, 라디오·TV·유선방송에서는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우리가 봐야 할 것, 느껴야 할 것을 전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럴수록 먼 산을 봐야 한다고? 하늘의 구름이 언제 세상에 개입했냐고?
그러나 우리는 얘기한다. 오늘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는, 그 현실 너머의 길을 볼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고.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이제 그 말 대신 확실한 형상을 보아야 한다. 창조해야 한다.
황지우의 <길>이 심각하게 읽히는 것은 바로 그런 지점이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內航船비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길>
사람 앞에 길은 늘 황무지였고 잡초더미였다. 누군가 돌을 걷어내고 잡초를 걷어차면서 나아갈 때 길이 되었다. 그러나 그 길은 다시 잡초 밭이다. 거품이었으며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길이었다가 절벽이고 절벽이었다가 문득 실핏줄 같은 길이었지 않은가. 그러나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몸차림은 어떤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적 모습은 어떠한가. 굴욕. 끊임없이 부글대는 초라함. 그리하여 그 굴욕을 뚫고 걸어가노라면 다시 만나는 군대의 초소. 군인들의 나라.
이 시가 거느리고 있는 4연의 풍경은 애써 찾아낸 길과 그 길의 가차없는 허물어짐으로 거듭 계속된다. 1연에서의 안간힘이 2연의 군인공화국 앞에서 주저앉고 3연에서 '배때기'로 기면서 겨우 찾아낸 길이 4연에서는 거품이 되고 마는 현실.
황지우는 그의 첫번째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도 그러한 심상구조를 드러냈었다.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앉는다', '주저앉는다'에서 보이는 한없는 절망은 그때 5월 광주의 핏자국이 문득문득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의자 위에서도 스폰지에서 물 빠지듯, 아아 스폰지에 물 배듯 질퍽거리던 시절 우리들의 초상화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문제는 상기도 심각하다. 그때의 막막함, 그때의 절망이 하나도 치유되지 않고 황지우의 표현처럼 '변기의 모더니티'로 오늘 그냥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이 긴 동어반복, 이 지리멸렬의 동어반복은 어디서 끝날 것인가. 황지우는 <길>에서 '닻'과 '덫'을 숨가쁘게 병치시키면서 동시에 덫을 닻으로 삼아 오늘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지만 그가 제대로 오늘의 다음 동작을 그려내는 말그림은 그린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한 시대의 노여움을 한 몸, 아니 한 마음속에 감추려고 눈물겹게 애쓰는 시"라고 진형준이 명명한 황지우의 <화엄광주>는 아직 거품으로 있다. 여기서 거품이라는 말은 그가 아직도 더욱 이 세상을 '배때기'로 기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강조하기 위해 해보는 말이다.
글의 서두에서 스쳐 지나온 오늘의 어수선함 혹은 쓸쓸함을 생각하면 황지우의 화엄광주는 지극히 허망한 정물화일 따름인 것이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황지우의 <화엄광주>를 논급하면서 그에게서 보이지 않던 직설법의 광주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과 대비시켜 읽을 때 그의 시가 주는 외로움 혹은 허망함은 거꾸로 증폭되어 아프다.
물론 황지우리는 개인에게 오늘 우리의 총체적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내일을 환히 밝혀줄 시를 주문하는 것은 너무 과중한 요구이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상찬한 시인이므로 또한 그에게서 꽤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감동을 받고 또 뭔가 해낼 것 같은 시인이라는 예감을 갖게 한 시인이므로 이런 말을 해보는 것이다.
필자는 그의 시에서 두 가지의 힘을 느꼈다. 하나는 세상의 헝클어진 사물들을 요약해 내는 직관의 힘이 그 하나요 그 직관을 계속 물고 늘어지는 끈질긴 장인인식이 그 둘이다. 이것은 그의 시 속에서 정확한 명제와 그 명제의 구석구석 훑어내 실감있게 묘파하는 말의 연금술로 표출된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혼수 상태의 세월", "여기는 초토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야유회 갔습니다", "내 귀에 말뚝을 막고 돌아왔다"등등의 표현이 제기하는 그 시절의 절묘한 해부학적 표현과 그 시를 떠받치고 있는 "디럽게 붙었네 잡것들이", "저노무 영감텡이 빨리 디져 부러쓰믄", "세상을 저질러 버렸어", "갸꾸로 물린 것"등등의 표현이 드러내는 삶의 실감은 절묘하게 밀고 땡기면서 자신의 시적 사유공간을 구축하고 있으며, <<겨울-나무로부터 봉-나무에로>>에서 "워커 大使가 뭐, 총독인가요", "등화관제를 하는 통금 해제의 시대" 등등의 말과 "이제 좀 살 만해서 그런지요, 신앙은 하나쯤 필요할 것 같드라구요", "노란 가래침을 뱉는 개나리꽃", "이 징헌 놈아, 살자, 살아 이놈아"등등의 말이 빚어내는 묘한 감동은 황지우 시의 두 축, 즉 긴장과 얼쩡거림을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나는 너다>>나 <<게 눈 속의 연꽃>>에서도 그대로 변주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着地>를 황지우 시의 한 전형으로 읽는다.
아무리 아무리 놉히,
놉히
날어도 새는
따 우로
다시
나려 앙근다
새가 나려앙거 自己 발자국을 ↑↑[KUK, KUK] 찍는 지상,
자기의 火印 거튼 지상,
우로 나려와 새는
밥먹고 잠자고 새끼낳고, 죽는다.
자기는 흔적도 없이 없어지고, 그런디 자기 形質을 물려바든 새새끼 새끼들이
다시,
아무리 아무리 놉히,
놉히
날어도 새들은
따 우로
나려와 앙근다.
떠날 수 업쑤나
-<착지>
'새'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부여할 수 있지만 그러한 의미를 떠나 그저 단순한 새로 읽어도 새가 땅 위로 돌아와 앉는 모습을 이렇게 선명한 그림으로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의 시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저 초월에의 세계 혹은 이상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그 그리움을 낚아채는 현실과의 이 어김없는 갈등을 가장 솔직한 육성으로 드러내는 이러한 표현법은 그가 참으로 재능있는 시인임을 웅변한다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일은 그 솔직한 육성을 방언이나 고어로 혹은 틀린 철자법으로 떠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놉히', '따 우로', '나려앙근다', '떠날 수 업쑤나' 등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이 표현들, 즉 고어·속어·비어·방언 등을 통해 형상의 실감을 움켜쥐고 한자, 영어, 불어, 희랍어 등등을 교묘히 배치시켜 지성적 표현의 무게를 더하는 말법 속에 세상의 진실의 끝을 물고 늘어지는 완강한 황지우 시정신이 있다. 나는 이를 완강한 얼쩡거림의 시정신이라 부르고 싶다. 이런 완강한 얼쩡거림은 제2시집에서 특히 과감하게 시도된다.
나는 그러한 시도의 한 모습으로 그의 3시집을, 특히 숫자로 대신하는 시제목을 읽었고 4시집의 <山徑>이나 <서울이여 안녕>, <12월>등등을 읽었다. 그런데 <<화엄광주>>는 너무 빨리 도달한 목적지이고 너무 갑자기 맥풀린 모습으로 읽혀졌다. 이를 부연한다면 그의 발이 아직 땅에 있어야 할 것인데 너무 쉽게 종교의 세계와 악수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확실하다. 그가 너무 빨리 겉늙어 버렸다는 점.
그가 그렇게 빨리 산으로 올라가고 말 때 그가 애써 지켜온 저 완강한 얼쩡거림의 배면에 숨어 있던 감동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제 화엄광주를 읽어보자.
이 시는 왜 긴 시인데 중간에 광주민주화운동 기간에 총맞아 죽은 두 사람의 사진을 찔러 넣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광주 5월의 의미를 당시 항쟁기간의 모습을 복원시키면서 묻고 또 그러한 참혹한 투쟁의 뒤편에 이어지는 오늘의 현실을 대비시켜 광주의 의미를 규정한 뒤 마침내 광주를 이 세상의 진리와 진실이 연꽃처럼 화안하게 현현되는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다음은 그러한 풍경의 집약된 형상이다.
화엄도 말짱 구라고
부처도 베어 버리자고
옳도다. 화엄도 구라였고
부처도 이미 베어져 있었네
잔뜩 바람먹은 떡갈나무숲 위로 펄럭이던
天幕 갑자기 暗電되던 날
사람 대가리 뽀개진 수박 덩이처럼 뒹굴고
사람이 없어졌으므로
부처도 없어졌네
사람이 없어졌으므로 부처도
터져나온 내장은 저렇게 순대로
몸뚱어리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다만
대가리만 남아 푸욱 삶아져
저렇게 눈감고 소쿠리에 臥禪하고 있는 거이네
-<화엄광주>에서
죽은 사람의 사진이 나오기 직전 부분으로 솜으로 콧구멍을 틀어막은 흉칙한 모습을 대비시켜 도대체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 혹은 죽는다는 것의 절대절명의 자리를 엄혹하게 물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진리가 하찮은 것이며 허망한 헛소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참혹한 형상은 시의 뒷부분에 이르러,
저 도청 분수대에서
유리 줄기 나무 높이 올라오르리라
그 투명 가지가지마다
지금까지 참았던 눈물 힘껏 빨아올려
유리나무 상공에 물방을 뿌린 듯
수많은 麾尼 보배 꽃, 빛 되리라
그때에 온 사찰과 교회와 성당과 무당에서
다 함께 종 울리고
집집마다 들고 나온 연등에서도 빛의
긴 범종 소리 따라 울리리라.
(…)
땅에서는 환호성, 하늘에서는
비밀리 불꽃 핀 천둥 음악
마침내 망월로 가는 길목 山水에는
기쁜 눈으로 세상 보는 보리수 꽃들
푸르른 억만 송이, 작은 귓속말 속삭이고
오시는 때 맞춰 황금 깃털 수탉이 숲 위로
구름 憧旗 일으키며 힘차게 우는 鷄沐
그때에 도둑, 깡패, 마약범, 가정파괴범
국가보안법 관련자, 장기수공산주의자들이
폭소를 터뜨리며 교도소 문을 나오고
에서 보듯 진리의 넘쳐흐름 혹은 충일한 화엄의 바다로 변전되면서 이 시는 종결된다.
광주에 대한 피범벅의 시만 보다가 드디어 활발한 시 한편 챙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이 시는 경쾌하고 또 무겁다. 그런데 왜 나는 자꾸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는가?
첫번째 불만은 이 시에 황지우 시 특유의 긴장이 풀려 있다는 점이다. 어수선한 생활도, 세상의 혼잡스러움도 그가 말로 요약해 낼 때, 때로는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때로는 과감한 지적 모험의 쾌미를 그의 시는 주었다. 그것은 주로 그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어를 폭넓게 구사하면서 시적 대상 혹은 시적 주제를 강력하게 압박, 거기서 생긴 긴장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에는 그런 긴장이 없다. 전공일 수 없는 '하늘세계', '화엄의 세계'를 넘보면서 헛손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불만은 첫번째의 불만과 짝을 이루는데, 그의 시 <화엄광주>는 광주라는 의미와 화엄이라는 큰 세계를 마치 유행처럼 결합시킴으로써 그의 시적 자장의 근원을 스스로 해체했다는 점이다.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또 그가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고 부르는 한 일테면 세상의 저 끝부분(이를 이상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을 좀더 천천히 천착해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한 시인의 시세계를 견디게 하는 저 마그마같은 정신의 원형질을 헤프게 써버리게 되면 뒤에는 반드시 헤맴만 남으리라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는 그의 화엄광주가 현실에서 볼 때 광주정신의 거짓화해 와 짝을 이루기 쉽다는 점이다.
필자는 다른 지면에서 광주란 이미 돈에 팔렸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지만 광주보상법에 의해 돈이 지불되면 형식적으로는, 아니 자본주의식으로 얘기하면 거래관계가 끝나는 셈이다. 광주의 의미를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었던 사람들마저 돈에 고개 숙인 사람들이 되어,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게 될 때 광주를 들먹거리면 괜한 트집 이상될 수 없게 되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그 점에서도 광주를 화엄세계라 부르기는 이르다. 또한 지금의 시점에서 광주를 화엄이라 부를 때 떼였다고 여겼던 돈을 받아낸 사람의 만세 소리라는 비아냥을 받을까 무섭다.
오히려 황지우는 지금이야말로 그가 초기시에서 드러내주는 삶의 세계를 향해 멱살 잡고 몸부림치던 정신의 건강성을 바투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나는 황지우의 화엄광주 마지막 부분을 다음과 같이 고쳐 읽으면서 그의 새로운 각성을 빌고 싶다.
그날 밤. 연꽃 달 환히 띠우고
여어러 세상흘러운 굽이굽이 千江이
산기슭에 닿아 있는 月山, 처음으로
물 속 연꽃 달 보았던 개 한마리
늑대 울음 울며 산에서 기어내려오고 [1993]
-황지우의 <<화엄광주>>에 대하여
강형철
소란스럽다. 한동안 소위 지배계급을 형성했던 사람들이 감옥에도 갇히고 한동안 세상땅의 평등과 자유를 얘기하던 사람들은 조용하다. 조용하다기보다는 갈팡질팡한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무엇이 변하고 있는가, 한쪽에서는 세상이 변했다고 떠들고 한쪽에서는 그까짓 거 무슨 변화가 있느냐고, 호들갑 떨지 말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것도 실감 없는 얘기.
한 시절 우리의 시장 부근에서 지글지글 타던 광주는 어디에 있는가. 8월 2일자 어느 신문에 '5·18피해자 추가접수에 장관·의원 등 저명인사도 50명 포함'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이어지고 있다. 교육부 장관, 국회의원, 재야인사의 구체적인 피해상황이 적혀지고 죽은 자의 이름도 활자로 복원되고 있다. 그러고 얼마간 실사를 거쳐 10월, 11월께 보상금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얼마 전에는 12·l2사태 관련 수많은 '별'들이 수많은 '별'들을 고소·고발한 기사도 보였다. 어릴 때 우리는 딱지치기를 하면서 별을 세었다. 고발자와 피고발자들의 이마(우리는 이를 마빡이라 부른다) 에 빛나던 별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일과 딱지장에 그려진 별들의 무게 중 어느 것이 더 실감에 가까울까.
이른바 문민정부. 재산공개를 하면서 정부의 주택정책에 일조했다고 주장, 자신이 지은 70여 채의 집에서 생긴 셋돈을 신중하게 계산하던 모습을 그 어마어마한 직위와는 상관없이 정당하다고 떠들다가 쫓겨난 사람이나, 돈벌이로 대학을 운영하다가 쫓겨난 사람들이나… 그만 쓰자. 갑자기 속이 뒤집힌다.
동물이니까 인간은 잘먹고 잘살아야 한다. 복숭아를 먹다가 퉤하고 뱉은 씨에는 개미들이 득시글거렸지. 힘이 있다면 밟아주고 싶다. 개미의 생존권을 짓밟는 일이라고? 그것은 개미가 아니라 구더기라고? 점잖아지자. 모양만 얘기하는 것이다.
시가 무엇인가. 도대체 지금 시를 들먹거려 뭐하자는 건가. 실감있는 말들은, 쉬지 않고 배포되는 신문이 특호활자 곁들여 빽빽하게 적혀 대신하고, 라디오·TV·유선방송에서는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우리가 봐야 할 것, 느껴야 할 것을 전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럴수록 먼 산을 봐야 한다고? 하늘의 구름이 언제 세상에 개입했냐고?
그러나 우리는 얘기한다. 오늘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는, 그 현실 너머의 길을 볼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고.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이제 그 말 대신 확실한 형상을 보아야 한다. 창조해야 한다.
황지우의 <길>이 심각하게 읽히는 것은 바로 그런 지점이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內航船비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길>
사람 앞에 길은 늘 황무지였고 잡초더미였다. 누군가 돌을 걷어내고 잡초를 걷어차면서 나아갈 때 길이 되었다. 그러나 그 길은 다시 잡초 밭이다. 거품이었으며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길이었다가 절벽이고 절벽이었다가 문득 실핏줄 같은 길이었지 않은가. 그러나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몸차림은 어떤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적 모습은 어떠한가. 굴욕. 끊임없이 부글대는 초라함. 그리하여 그 굴욕을 뚫고 걸어가노라면 다시 만나는 군대의 초소. 군인들의 나라.
이 시가 거느리고 있는 4연의 풍경은 애써 찾아낸 길과 그 길의 가차없는 허물어짐으로 거듭 계속된다. 1연에서의 안간힘이 2연의 군인공화국 앞에서 주저앉고 3연에서 '배때기'로 기면서 겨우 찾아낸 길이 4연에서는 거품이 되고 마는 현실.
황지우는 그의 첫번째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도 그러한 심상구조를 드러냈었다.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앉는다', '주저앉는다'에서 보이는 한없는 절망은 그때 5월 광주의 핏자국이 문득문득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의자 위에서도 스폰지에서 물 빠지듯, 아아 스폰지에 물 배듯 질퍽거리던 시절 우리들의 초상화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문제는 상기도 심각하다. 그때의 막막함, 그때의 절망이 하나도 치유되지 않고 황지우의 표현처럼 '변기의 모더니티'로 오늘 그냥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이 긴 동어반복, 이 지리멸렬의 동어반복은 어디서 끝날 것인가. 황지우는 <길>에서 '닻'과 '덫'을 숨가쁘게 병치시키면서 동시에 덫을 닻으로 삼아 오늘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지만 그가 제대로 오늘의 다음 동작을 그려내는 말그림은 그린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한 시대의 노여움을 한 몸, 아니 한 마음속에 감추려고 눈물겹게 애쓰는 시"라고 진형준이 명명한 황지우의 <화엄광주>는 아직 거품으로 있다. 여기서 거품이라는 말은 그가 아직도 더욱 이 세상을 '배때기'로 기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강조하기 위해 해보는 말이다.
글의 서두에서 스쳐 지나온 오늘의 어수선함 혹은 쓸쓸함을 생각하면 황지우의 화엄광주는 지극히 허망한 정물화일 따름인 것이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황지우의 <화엄광주>를 논급하면서 그에게서 보이지 않던 직설법의 광주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과 대비시켜 읽을 때 그의 시가 주는 외로움 혹은 허망함은 거꾸로 증폭되어 아프다.
물론 황지우리는 개인에게 오늘 우리의 총체적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내일을 환히 밝혀줄 시를 주문하는 것은 너무 과중한 요구이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상찬한 시인이므로 또한 그에게서 꽤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감동을 받고 또 뭔가 해낼 것 같은 시인이라는 예감을 갖게 한 시인이므로 이런 말을 해보는 것이다.
필자는 그의 시에서 두 가지의 힘을 느꼈다. 하나는 세상의 헝클어진 사물들을 요약해 내는 직관의 힘이 그 하나요 그 직관을 계속 물고 늘어지는 끈질긴 장인인식이 그 둘이다. 이것은 그의 시 속에서 정확한 명제와 그 명제의 구석구석 훑어내 실감있게 묘파하는 말의 연금술로 표출된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혼수 상태의 세월", "여기는 초토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야유회 갔습니다", "내 귀에 말뚝을 막고 돌아왔다"등등의 표현이 제기하는 그 시절의 절묘한 해부학적 표현과 그 시를 떠받치고 있는 "디럽게 붙었네 잡것들이", "저노무 영감텡이 빨리 디져 부러쓰믄", "세상을 저질러 버렸어", "갸꾸로 물린 것"등등의 표현이 드러내는 삶의 실감은 절묘하게 밀고 땡기면서 자신의 시적 사유공간을 구축하고 있으며, <<겨울-나무로부터 봉-나무에로>>에서 "워커 大使가 뭐, 총독인가요", "등화관제를 하는 통금 해제의 시대" 등등의 말과 "이제 좀 살 만해서 그런지요, 신앙은 하나쯤 필요할 것 같드라구요", "노란 가래침을 뱉는 개나리꽃", "이 징헌 놈아, 살자, 살아 이놈아"등등의 말이 빚어내는 묘한 감동은 황지우 시의 두 축, 즉 긴장과 얼쩡거림을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나는 너다>>나 <<게 눈 속의 연꽃>>에서도 그대로 변주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着地>를 황지우 시의 한 전형으로 읽는다.
아무리 아무리 놉히,
놉히
날어도 새는
따 우로
다시
나려 앙근다
새가 나려앙거 自己 발자국을 ↑↑[KUK, KUK] 찍는 지상,
자기의 火印 거튼 지상,
우로 나려와 새는
밥먹고 잠자고 새끼낳고, 죽는다.
자기는 흔적도 없이 없어지고, 그런디 자기 形質을 물려바든 새새끼 새끼들이
다시,
아무리 아무리 놉히,
놉히
날어도 새들은
따 우로
나려와 앙근다.
떠날 수 업쑤나
-<착지>
'새'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부여할 수 있지만 그러한 의미를 떠나 그저 단순한 새로 읽어도 새가 땅 위로 돌아와 앉는 모습을 이렇게 선명한 그림으로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의 시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저 초월에의 세계 혹은 이상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그 그리움을 낚아채는 현실과의 이 어김없는 갈등을 가장 솔직한 육성으로 드러내는 이러한 표현법은 그가 참으로 재능있는 시인임을 웅변한다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일은 그 솔직한 육성을 방언이나 고어로 혹은 틀린 철자법으로 떠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놉히', '따 우로', '나려앙근다', '떠날 수 업쑤나' 등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이 표현들, 즉 고어·속어·비어·방언 등을 통해 형상의 실감을 움켜쥐고 한자, 영어, 불어, 희랍어 등등을 교묘히 배치시켜 지성적 표현의 무게를 더하는 말법 속에 세상의 진실의 끝을 물고 늘어지는 완강한 황지우 시정신이 있다. 나는 이를 완강한 얼쩡거림의 시정신이라 부르고 싶다. 이런 완강한 얼쩡거림은 제2시집에서 특히 과감하게 시도된다.
나는 그러한 시도의 한 모습으로 그의 3시집을, 특히 숫자로 대신하는 시제목을 읽었고 4시집의 <山徑>이나 <서울이여 안녕>, <12월>등등을 읽었다. 그런데 <<화엄광주>>는 너무 빨리 도달한 목적지이고 너무 갑자기 맥풀린 모습으로 읽혀졌다. 이를 부연한다면 그의 발이 아직 땅에 있어야 할 것인데 너무 쉽게 종교의 세계와 악수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확실하다. 그가 너무 빨리 겉늙어 버렸다는 점.
그가 그렇게 빨리 산으로 올라가고 말 때 그가 애써 지켜온 저 완강한 얼쩡거림의 배면에 숨어 있던 감동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제 화엄광주를 읽어보자.
이 시는 왜 긴 시인데 중간에 광주민주화운동 기간에 총맞아 죽은 두 사람의 사진을 찔러 넣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광주 5월의 의미를 당시 항쟁기간의 모습을 복원시키면서 묻고 또 그러한 참혹한 투쟁의 뒤편에 이어지는 오늘의 현실을 대비시켜 광주의 의미를 규정한 뒤 마침내 광주를 이 세상의 진리와 진실이 연꽃처럼 화안하게 현현되는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다음은 그러한 풍경의 집약된 형상이다.
화엄도 말짱 구라고
부처도 베어 버리자고
옳도다. 화엄도 구라였고
부처도 이미 베어져 있었네
잔뜩 바람먹은 떡갈나무숲 위로 펄럭이던
天幕 갑자기 暗電되던 날
사람 대가리 뽀개진 수박 덩이처럼 뒹굴고
사람이 없어졌으므로
부처도 없어졌네
사람이 없어졌으므로 부처도
터져나온 내장은 저렇게 순대로
몸뚱어리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다만
대가리만 남아 푸욱 삶아져
저렇게 눈감고 소쿠리에 臥禪하고 있는 거이네
-<화엄광주>에서
죽은 사람의 사진이 나오기 직전 부분으로 솜으로 콧구멍을 틀어막은 흉칙한 모습을 대비시켜 도대체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 혹은 죽는다는 것의 절대절명의 자리를 엄혹하게 물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진리가 하찮은 것이며 허망한 헛소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참혹한 형상은 시의 뒷부분에 이르러,
저 도청 분수대에서
유리 줄기 나무 높이 올라오르리라
그 투명 가지가지마다
지금까지 참았던 눈물 힘껏 빨아올려
유리나무 상공에 물방을 뿌린 듯
수많은 麾尼 보배 꽃, 빛 되리라
그때에 온 사찰과 교회와 성당과 무당에서
다 함께 종 울리고
집집마다 들고 나온 연등에서도 빛의
긴 범종 소리 따라 울리리라.
(…)
땅에서는 환호성, 하늘에서는
비밀리 불꽃 핀 천둥 음악
마침내 망월로 가는 길목 山水에는
기쁜 눈으로 세상 보는 보리수 꽃들
푸르른 억만 송이, 작은 귓속말 속삭이고
오시는 때 맞춰 황금 깃털 수탉이 숲 위로
구름 憧旗 일으키며 힘차게 우는 鷄沐
그때에 도둑, 깡패, 마약범, 가정파괴범
국가보안법 관련자, 장기수공산주의자들이
폭소를 터뜨리며 교도소 문을 나오고
에서 보듯 진리의 넘쳐흐름 혹은 충일한 화엄의 바다로 변전되면서 이 시는 종결된다.
광주에 대한 피범벅의 시만 보다가 드디어 활발한 시 한편 챙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이 시는 경쾌하고 또 무겁다. 그런데 왜 나는 자꾸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는가?
첫번째 불만은 이 시에 황지우 시 특유의 긴장이 풀려 있다는 점이다. 어수선한 생활도, 세상의 혼잡스러움도 그가 말로 요약해 낼 때, 때로는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때로는 과감한 지적 모험의 쾌미를 그의 시는 주었다. 그것은 주로 그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어를 폭넓게 구사하면서 시적 대상 혹은 시적 주제를 강력하게 압박, 거기서 생긴 긴장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에는 그런 긴장이 없다. 전공일 수 없는 '하늘세계', '화엄의 세계'를 넘보면서 헛손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불만은 첫번째의 불만과 짝을 이루는데, 그의 시 <화엄광주>는 광주라는 의미와 화엄이라는 큰 세계를 마치 유행처럼 결합시킴으로써 그의 시적 자장의 근원을 스스로 해체했다는 점이다.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또 그가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고 부르는 한 일테면 세상의 저 끝부분(이를 이상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을 좀더 천천히 천착해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한 시인의 시세계를 견디게 하는 저 마그마같은 정신의 원형질을 헤프게 써버리게 되면 뒤에는 반드시 헤맴만 남으리라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는 그의 화엄광주가 현실에서 볼 때 광주정신의 거짓화해 와 짝을 이루기 쉽다는 점이다.
필자는 다른 지면에서 광주란 이미 돈에 팔렸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지만 광주보상법에 의해 돈이 지불되면 형식적으로는, 아니 자본주의식으로 얘기하면 거래관계가 끝나는 셈이다. 광주의 의미를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었던 사람들마저 돈에 고개 숙인 사람들이 되어,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게 될 때 광주를 들먹거리면 괜한 트집 이상될 수 없게 되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그 점에서도 광주를 화엄세계라 부르기는 이르다. 또한 지금의 시점에서 광주를 화엄이라 부를 때 떼였다고 여겼던 돈을 받아낸 사람의 만세 소리라는 비아냥을 받을까 무섭다.
오히려 황지우는 지금이야말로 그가 초기시에서 드러내주는 삶의 세계를 향해 멱살 잡고 몸부림치던 정신의 건강성을 바투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나는 황지우의 화엄광주 마지막 부분을 다음과 같이 고쳐 읽으면서 그의 새로운 각성을 빌고 싶다.
그날 밤. 연꽃 달 환히 띠우고
여어러 세상흘러운 굽이굽이 千江이
산기슭에 닿아 있는 月山, 처음으로
물 속 연꽃 달 보았던 개 한마리
늑대 울음 울며 산에서 기어내려오고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