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민중항쟁과 문학. 김태현(그리움의 비평, 민음사, 1991. 8)
본문
광주민중항쟁과 문학
5월 민중 항쟁은 1980년 5월 18일에 광주 일대에서 늦봄의 따스한 햇살을 받아 활짝 피었다가 5월 27일에 정치군부의 총칼에 의해 무참하게 잘린 한국민중운동의 꽃이다.
휴전협정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의 민중운동이 비축한 역량을, 특히 4 월 혁명의 유산을, 총체적으로 계승하되 그런 운동의 수준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한 그 고귀한 항쟁의 꽃은 상대적 빈곤과 지역적 소외와 반민주로 불결해진 세상의 변혁을 열망하며 피었건만 도륙도 서슴지 않는 패륜의 무리들에 의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중도에 꺾였다. 그 개화에서 낙화까지의 열흘 동안 광주민중들은 고립 무원의 낙도에 갇힌 양 다른 지역과 철저히 차단된 가운데도 불굴의 투지로써 반민주적 세력과 싸웠으며 고도의 도덕성으로써 이웃을 사랑했다. 그러나 세계사에서도 돋보이는 그 순결한 꽃은 끝내 광주 일대에 붉은 핏물을 흥건히 뿌리며 절단되었다. 그 후 그 피를 먹고 탄생한 5공은 그 출생성분에 어울리게 폭력으로 민중을 탄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집요하고도 철저하게 그 꽃을 말하는 것조차 막았다. 6월 항쟁의 부분적 승리 이후로 그 항쟁에 관한 논의가 예전보다 활기를 띠었다고는 하나 또 그 동안 선각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제는 그 항쟁의 전모와 진의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는 하나 그 항쟁의 전모와 진의를 대중적 매체를 통해 알리는 일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공공연히 봉쇄되고 있다. 6공이 광주항쟁의 부정에 기초한 5공의 적자인 한 그런 봉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그 항쟁에서 빛나는 활약을 하다가 산화한 열사들의 영령들이 아직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더구나 그 영혼이 민중운동의 고결한 순교자로 추앙되기는커녕 혼란을 틈타 경거망동한 폭도 또는 지역감정에 사로잡힌 불평불만자라는 더러운 누명까지 시원하게 벗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 울분과 비탄을 삼키며 외롭게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 영혼뿐만 아니라 무자비한 살육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도 그 항쟁 매 입은 육체적, 정신적 상처 때문에 여태 건강과 원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일부는 시름시름 앓다가 미쳐 버리고 또 그들의 일부는 사는 것이 부끄러워 끝내 죽은 자의 곁으로 날아갔다. 그 외에도 숱한 젊은이들이 광주항쟁 이후에 본연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낸 폭군들의 횡포와 광주항쟁의 은폐와 왜곡을 항거하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였다. 바야흐로 산 자들이 죽은 자를 거침없이 따라가는 처절한 상황이 그 항쟁 후에도 내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령을 내린 후안무치한 자들은, 광주 민중을 참혹하게 살상한 극악무도한 장본인들은 그 동안 권력과 재물을 독점하더니 그것으로 허전했던지 지금도, 혹은 풍치 좋은 절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혹은 외국여행으로 한가하게 소일하거나 혹은 뻔뻔스럽게 권좌에 앉아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들은 한때 그 항쟁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조작하는 데 열중하더니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이제는 그 항쟁이 빨리 몇 푼의 돈으로 청산되어 아무도 들추어 내지 않는 과거지사가 되기를 음험하게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본말이 완전무결하게 전도된 이런 뒤집힌 세상이 마냥 유지될 수는 없다. 다 피지도 못하고 도중에 꺾였던 그 항쟁의 꽃이 다시 그 본래의 열망대로 탐스럽고 화려하게 필 날이, 그리하여 주객이 바뀐 세상이 바로잡힐 날이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현 단계 변혁운동의 열기와 실적을 아는 이라면 이런 낙관이 허무맹랑하거나 천박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 항쟁 이후로 여러 부문에서 이 땅의 구조적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변혁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바로 이런 사실들이 그 항쟁의 부활을 보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그 항쟁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우리 사회의 성격이나 미국을 정확하게 투시할 수 없었을 것이며 1980년대의 노동운동을 포함한 민중운동이 그토록 놀라 우리만치 빨리 양적으로 팽창하고 질적으로 비약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1980년대 변혁운동은 한결같이 그 항쟁을 근거로 출범하였고 아울러 그 미완의 항쟁을 완성시킬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앞으로의 운동 또한 그럴 것이다. 즉 광주항쟁은 현 단계 변혁운동의 출발점이자 목적지인 것이다. 이처럼 그 항쟁은 언제나 변혁운동의 중심에 자리잡고 앉아서 그 운동의 진로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운동의 성숙과 고양을 위해 지속적으로 그 운동에 영양을 공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항쟁의 꽃은 조만간 다시 피어 이 세상에서 대단히 아름답고 소중한 민중의 꽃이 될 것이다.
1980년대에 거세게 일어난 문학운동도 그런 광주항쟁으로부터 갖가지 힘과 슬기를 제공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러나 창작의 그 항쟁에 대한 대응은 대체로 신속하지도 충분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 항쟁을 깊은 눈으로 해석하고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불후의 명품이라고 자타가 두루 인정할 수 있는 작품을 우리는 아직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 사정은 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그 항쟁에 관한 언급이 금압되었고, 또한 그 항쟁을 목격하거나 체험한 문학인들은 그 충격을 벗어나지 못해 미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여유를 얻지 못했으며 그 항쟁을 뒤늦게 알게 된 문학인들은 부끄러워서 차마 그 항쟁과 관련된 작품을 제대로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작가들이 그 항쟁의 위대성에 압도되어서건 언어의 무력을 절감해서건 간에, 그 항쟁을 표현한 뛰어난 문학을 넉넉하게 생산하지 못했다는 것이 자랑거리일 수는 없다. 특히 그 항쟁의 위대성을 문학에서 살리는 일이 이 시대 문학인의 엄숙한 과제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땅의 문학인들은 제 소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항쟁은 1980년 이후 줄곧 문학인의 주요 관심사였으며 그리하여 그 항쟁을 작품으로 옳긴 사람들이 적지는 않다. 이 글에서 필자는 지난 10년간 그들이 산출한, 광주항쟁을 소재로 찬 작품을 주마간산격 이나마 훑어보려고 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그 항쟁을 빼어나게 그린 작품이 앞으로 더욱 많이 쏟아져 나오기를 갈망하는 마음의 소산이라는 것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장 먼저 광주항쟁을 문학적으로 수용한 작품은 그 당시에 幸군가에의해 낭송된 「민주의 나라」와 같은 시다. 그러나 잠시 해방되었던 광주를 예찬하고 있는 그 시는 잘 다듬어지지는 않았다. 그 뒤에 나온 광주항쟁을 문학적으로 수용한 작품 중에서, 항쟁 직후 <전남매일신문P에 실린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 」라는 장시를 우리는 잊을 수 없다. 당시에는 이 시의 많은 부분이 계엄당국에 의해 가위질 당한 채로 그 신문에 실렸음에도 불구하고 문순태의 증언에 의하면 그 시에 대한독자의 반응이 대단했으며, 또 삭제되지 않은 그 시의 원문은 독자의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 시의 일부를 잠시 읽어보자.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아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 」에서
시인은 이 시에서 무등산의 넓고 포근한 품에 안겨 있는 광주가 목숨이 아까워 불의와 타협하거나 불의를 묵인하는 비겁한 사람이 사는 도시가 아니라 죽음을 불사하며 정의를 추구하는 담대한 사람이 사는 도시며, (백의의 옷자락) 으로 검은 무리들을 몰아내고 그리하여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 백의민족의 숭고한 얼을 계속 보존할 자격을 갖춘 사랑이 사는 도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광주는 崙어 기동조차 못하는 쇠약한 노인의 도시가 아니라 끝끝내 노쇠를 거부하는, 영원히 새파랗게 살아 꿈틀거리는 청춘남녀의 도시라는 것이다. 그러한 광주가 비록 군부의 더러운 군홧발에 짓밟히고 광주민중들이 군부의 무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어도 광주와 광주민중은 결코 죽지 않는 (불사조)며, 부활의 날을 고대하며 고난을 감수하는 (하느님 아들)이라는 것을 이 시는 의치고 있다. 광주와 광주민중의 실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채 광주와 광주민중에 관한 유언비어와 지역적 편견만이 무성하던 그 무렵에 이 시는 일면 광 주 시민들이 겪은 크나큰 아픔을 울부짖듯이 토로하고 있지만 종국에는 광주가 (폭도)의 도시가 아니라 민주의 성지며 광주민중은 그 성지의 당당한 주인공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자랑하고 홍보하고 있다. 그렇다. 1980년 )월 이후 잘못된 제도의 타파와 탐욕스런 도배의 타도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 사람 치고 광주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맑은 마음을 갖고 깨끗한 세계를 갈구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몸으로써 건 마음으로써 건 광주에 와서 자신의 그런 갈구에 조응하는 논리와 행동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시의 예측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항쟁의 도시 광주는 일부 지역 안의 터전으로서의 고유명사에서 이 나라 민중의 정신적 고향으로서의 보통명사로 바뀌었고, 평범하고 초라한 도시에서 특별하고 거룩한 성지로 부상하였다. 그러므로 그런 성스러운 공간의 주인인 광주 민중은 마땅히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광주민중이 다른 지역의 민중을 맹목적으로 배척하는, 나쁜 의미의 지역감정에 물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죄 많다. 일부의 악한들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지역의 민중의 다수도 그런 악한의 왜곡된 선전에 세뇌되어서 그런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는 정말 개탄스럽다. 최근에 제출된 많은 보고서들이 가르쳐주고 있듯이 호남인 들이 정치 · 경제 ·군사 분야의 요직에서 배제되고 특히 호남지역의 경제가 다른 지역의 경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이런 지역모순을 예기하게 간파하고 그 극복을 꾸준히 추구하는 것은 다른 지역의 민중에 대한 배타적 감정의 소산이 결코 아니라 뛰어난 현실인식과 역사인식의 소산인 것이다. 지역모순에 대한 이러한 높은 식견과 민주화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합쳐져서 광주항쟁을 낳은 것이지 그 어느 하나의 힘으로 광주항쟁이 폭발한 것은 아니다. 이런 시각을 갖지 않고서는 다른 지역의 민중들이 1980년 5월에 묵묵부답 방관한 것과 달리 광주민중들이 외롭게, 그러나 가열 차게 투쟁한 것을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광주항쟁을 나쁜 의미의 지역감정에 의해 촉 발된 행동으로 보는 것은 그 항쟁을 폄훼하고 광주민중을 모독하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광주항쟁의 한 촉매가 되기도 했던 지 역 모순에 대한 광주민중의 뛰어난 인식이 높이 평가되어야 정당한 것이다. 이와 함께 광주항쟁을 단순히 특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즉자적 반응이라고 보는 견해도 수정되어야 한다. 그런 견해는 정치군부의 악마 성을 고발하자는 뜻을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광주민중의 자발적 의사에 따른 싸움을 평가절하하기도 하기 때문에 함부로 남용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요컨대 이런 생각들을 두루 종합하여 광주와 광주민중을 칭송한 김준태의 위의 시는, 그 처연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분명 광주와 광주민중에 대한 모든 세속적 편견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함께 광주와 광주민중의 아픔과 위대함을 거듭 알리려는 뜻을 강렬하게 ·담고 있는, 매우 감동적인 시다.
1980년대 초엽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광주항쟁을 공개적으로 들먹일 수 없었다. 서슬이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공포정치를 시작한 군부정권은 그 항쟁에 관한 일체의 발언을 금지했고 권력의 기반을 다질 요량으로 오로지 광주항쟁을 매도하고 비난하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광주항쟁의 정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깨어 있는 자의 가슴속에서 되살아나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1981년에 나온 두 권의 동인지 <5월시>와 <시와 경제)는 그 깨어 있는 자들이 만든 것이다. 그 동인지의 수명은 각각 달랐지만 그 구성원들은 깨어 있는 자들답게 다같이 단단한 역사의식으로써 시를 샜으며 1980년대 문학운동의 첨 병으로서도 많은 활동을 펼쳤다. 이처럼 단단한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그들이 광주항쟁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그들의 활동 초기에 내색은 안 했지만 분명 광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해 발전시키려는 의도까지 품고 있었다. 그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들의 )월의 노래는 예상했던 것보다는 적다. 그러나 적은 수의 노래라고는 해도 그들의 5월의 노래는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塡불이었다. 그들의 )월의 시는 군부정권의 총칼에 굴복하지 않는 펜의 총기를 대변하는 것이자 그 정권의 부당한 명령을 뿌리치고 양심을 지키려는 이의 언술이었다. 그 시들은 또한 살인정권의 조기몰락을 예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시적으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민주의 세계가 기필코 다시 오리라는 희망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그런 뜻에서 이런 시들이야말로 좌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당시의 독자들을 부추겨 민주의 세계를 쟁취할 것을 촉구한,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전령으로 기능한 시라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의 그런 시중에서 가령, 아래와 같은 시를 보자.
목숨의 횡경막을 표시하는 황색 선이 중앙으로 나 있다.
바로 그 황색선 옆 백색 ↑표 위에
백색 X표가 그어져 있고
횡단 보도에는 신호등이 산산 조각되어 흩어져 있다.
그 신호등에서 그 백색 X표까지, 혹은
그 백색 X표 위까지, 혹은
캔버스 밖 백색 벽 위에까지, 화급하게
지나간 듯한 정글 화 자국들이
수십, 수백, 수천의 무인들처럼
찍혀, 있다 마치, 그 길은
끝끝내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길이었다는 듯이
-황지우의 「흔적Ⅲ 1980(5.18x5.27cm) 이영호 작」에서
이 시는 광주민중의 생사가 타의에 의해 결정되던 급박한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그 상황을 말로다 전할 수 없다는 듯이 시각적 효과를 자아내는 기호로 표현하기도 하면서, 살인부대의 야만적인 인간 사 냥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이 시는 그리하여 동족에 대한 애정은 제쳐놓고서라도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조그만 경외심도 없는, 철저하게 인간의 생명을 천대하는 집단의 육식 동물적인 광포함을 섬뜩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삼, 그 집단이 무기를 앞세워 살길과 죽을 길을 제멋대로 정한 뒤, 죽을 길을 선택한, 아니 때로는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민중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잔혹하게 살해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 시를 읽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집단이 자신들의 (정글 화 자국)에 묻힌 피가 그들의 종말을 재촉하는 주문이라는 것도 모르고, (돌이킬 수 없는)범죄를 저질렀다는 것도 모른 채, 가히 야수답게 살상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눈과 귀를 가진 사람에게는 분노 이전에 경악 그 자체였다. 이 시가 굳이 분노를 절제한 것도 그 기막힌 상황에 대한 경악을 그대로 표하고자 한 것이리라.
그러면, 야수의 만행으로 졸지에 생명을 탈취 당한 민중들을 보는 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새 한 마리 오래 뒤따라 날아오는 걸 보았다. 그때이후 노양의 잠은 종다리를 꿈꾼다. 배동이 서는 보리밭에 누워 있곤 한다. 종다리는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며 노래하다가 그녀의 품속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진다. 그런 꿈을 꾼 날은 정신없이 눈물 흘리며 금남로를 헤맨다.
-최두석의 「서호빈」에서
이 시는 광주항쟁에서 애통하게 분사한 서호빈을 잊지 못하는 그의 애인이었던, 노양의 심정을 잘 그리고 있다. 노양은 총살당한 서호빈의 시신을 도청 뒤뜰에서 찾아 매장했지만 그의 넋은 매장되지 않았다. 그의 넋은 그녀가 파괴된 그의 육신을 매장하고 돌아오던 날 그녀의 뒤를 따라온 새와 함께 그녀 곁으로 왔다. 그래서 그녀가 밤에 꿈을 꿀 때면 어김없이 그의 넋은 종다리가 되어 나타난다. 그 꿈속에서 노양은 봄날( 배동이 서는 보리밭에 누워 있)고 종다리 또한 그녀의 곁에 있다. 그러나 그 종다리는 그녀 곁을 떠나 수직으로 (하늘 끝까지 날아 오르며 노래)한다. 서호빈이 항쟁에 참가하여 민주를 위해 온몸으로 싸웠듯이 그렇게 종다리는 하늘 높은 곳에서 자유를 위해 온몸으로 노래한다. 그러나 서호빈이 항쟁에서 장렬하게 산화했듯이 종다리도 (곤두박질쳐 떨어진다. )이처럼 노양은 종다리의 타상과 추락을 꿈속에서 보고서는 자기 애인의 싸움과 죽음을 되새긴다. 서호빈은 죽었지만 그의 넋은 그의 애인의 꿈속에 이처럼 자주 나타나 그녀를 울린다. 그의 넋이 (그녀의 가슴에 집을)지을수록 더욱 그녀는 원통하여 살맛을 잃는다. 바로 그녀의 이런 비통한 심정 속에 광주항쟁에서 비참하게 희생된 사람을 기억하는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의 심정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두 시인의 시처럼 광주항쟁을 다룬 시는 우선 죽인 자와 죽은 자를 그리는 일에 치중하였다. 죽인 자와 죽은 자가 수다했다는 것이 그 항쟁의 가장 뚜렷한 진실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시인들의 이런 반응은 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5월시>와 <시와 경제)동인들 이외에도 민족 · 민중현실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많은 시인들 역시 그러했다. 다음 시편을 보기로 하자.
낮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이민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민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낮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낮 12시였던가
-김남주의 「학살 · 2」에 서
증오할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을 증오하는 것은 큰 죄악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탈은 썼어도 다른 인간의 생명을 마구 앗아가는 짐승과다를 바 없는 인간이 있다면 그런 악한을 증오하지 않는 것이 명백한 유죄일 뿐 그런 악한을 증오하는 것은 확실하게 무죄다. 오히려 그런 증오야말로 그런 악독한 인간의 구축을 위해 불가결하다. 그렇더라도 감정적 인 증오만으로 그들을 선량한 인간의 땅에서 쫓아낼 수는 없다. 상대방을 모르고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는 상식을 생각하더라도 그들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다시 말하면 광주항쟁에서 죽인 자들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한, 그들을 이 땅에서 추방하기 위'한 첫 작업이기도 하다. 정남주의 「학살 · 2」도 이런 작업을 찬 시의 하나다. 제목부터 선명한 이 시는 백주 대낮에 (노골적)으로 또 무시무시하게 광주민중을 죽인 (일단의 군인들)의 만행을 가차없이 폭로하고 있다. 학살 자들은 그들과 같은 동포요 이웃이었던 광주민중을 이국의 철천지원수로 여긴 듯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구 그들을 죽였던 바, 그런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이 시의 화자 (나)는 어안이 벙벙해 그 현장의 참
상을 차마 다 말하지 못하고 단말마의 외침과 다름없는 (나는 보았다)를 반복하며 그 참상을 전하고 있다. 그처럼 이 시가 몇 가지 중요한 사실만을 건조하게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을 통해 우리는 학살자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그리고 그들의 본질이 어떤가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이 땅을 떠나며 울던 넋들이 모여서
오늘은 대낮에 저리 천둥이 치는구나.
진달래로는 피맺힌 한을 보여줄 수 없어
서리서리 소낙비를 쏟아놓는다면,
이 하루 나는 무릎 꿇고 벼락도 맞아야 하리.
-하종오의 「오월에 5」에서
그러나 이런 시를 보면 이제 시인은 항쟁 때 (이 땅을 떠나며 울던 넋들)을 회상하고 슬퍼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둠이 내린 곳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심하게 질책한다. 즉 이 시는 살아있다는 것이 큰 죄라는, 1980년대 초엽에 많은 이들의 가슴에, 무겁게 자리잡고 있던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 생각은 급기야 광주항쟁에서 인재로 죽은 자처럼 시인도 천벌인 (벼락)을 맞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시인이 이런 극단적인 죄책감에만 빠져 있는 한 죽은 자의 유언을 성실히 이행할 수 없다. 시인도 그런 점을 곧 깨닫고「유복녀에게」 같은 시에서는 (행여 누가 이 아비를 찾더라도 떳떳하거라 계집애야 내 죽음은 널 낳았다)라고 진술한다. 그것은 아버지의 딸에 대한 당부를 통해 산 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준엄하게 추궁하는 것이다. 산 자들은 당연히 그 추궁을 회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산 자들이 죽은 자가 남긴 정신을 되살릴 때만 진정으로 죽은
자를 위로할 수 있고 자신의 눈물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라도 산 자들은 슬픔과 부끄러움의 음지의 골목에서 벗어나 죽은 자의 정신을 계승하여 발전시킬 수 있는 양지의 대로를 스스로 찾아 나서야 마땅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광주항쟁에서 학살을 감행한 자들의 정체를 규명하려고 노력한 시, 그 싸움에서 산화한·사람을 잊지 못하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죽은 자의 뜻을 따를 것을 결의하는 사람의 모습을 조형한 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보다시피 모두 짤막한 시다. 그러나 광주항쟁을 다룬 1980년대 전반기의 문학을 검토하면서 필자가 여태 시만을 소개한 것은 필자의 시 장르에 대한 특별한 애정 때문이 아니다. 소설이 광주항쟁을 다루기 시작한 때는 좀 과감하게 말하면(이런 표현은 약간의 예외가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1985년 이후부터였다.
그 1985년의 5월에는 광주항쟁과 관련된 두 사건이 있었다. 책의 압수와 출판인의 구속을 야기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의 출간과, 광주항쟁의 본격적 거론을 촉발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미국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공개적으로 질문하게 만든 서울의 미국문화원 점거사건이 그것이다. 그 두 사건은 광주항쟁의 진실을 계속 숨기거나 왜곡한 5공에 일격을 가한 중대한 사건으로서: 그때를 전후해 우리의 소설도 광주항쟁을 서서히 다루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필자는 소설을 거론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우리는 소설을 검토하기로 하겠다.
물론 1985년 이후에도 많은 시인들이, 특히 새로 등단한 재능과 기백이 남다른 젊은 시인들이 광주항쟁을 노래했던 만큼 계속 그들의 시를 두루 검토해 보는 것이 이 글의 소임이긴 하지만, 이 짧은 지면이 그런 임무를 다 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고 또 1980년대 후반기에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에 대한 통찰력이 증대함에 따라 그 시들도 그런 통찰력에 의존해 광주항쟁을 새롭게 해석한 공적을 남겼지만 그 같은 점 이외에서는 그 시들의 세계가 크게 보아 지금까지 살펴본 시 세계와 비슷하다고 판단되어 부득이 앞으로는 그것에 대한 검토를 생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검토하기 전에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박몽구의 연작시인「십자가의 꿈」과 전남대 비나리패의 장시 「들불야학」이 그것이다.
앞에서 우리가 검토했던 시들을 포함한, 1980년대 전반기에 생산된 대부분의 시들은 광주항쟁의 공개적 거론이 거의 불가능했던 상황에서도 제각기 짧은 시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광주항쟁의 전과정에 대한 총체적 조명과 그것의 역사적 의미에 관한 깊은 성찰을 결여한 것도 사실이다. 다름 아닌 후자의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런 조명과 성찰을 구비한 작품의 탄생을 고대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충족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의 머리에서도 단언했듯이, 그 고대에 어울리는 광주항쟁문학의 출현은 여전히 우리의 희망사항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시의 형식을 통해 그런 콧대에 부응하려고 애쓴 『십자가의 꿈』과 「들불야학」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박몽구의 시집 『십자가의 꿈』은 1984년부터 약 2년간에 걸쳐 완성된 시를 수록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여기서 구태여 부기하는 이유는, 이 시집이 나올 무렵까지 뜻 있는 시인 치고 5월을 노래하지 않은 사람도 없지만 동시에 그것을 다양한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노래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는 건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물론 극소수의 시인이 5월을 자주 노래했지만 그 노래의 가사와 가락은 이상하리만치 유사했고 그 때문에 우리는 여러 노래를 들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하나의 노래를 여러 번 들었다고 착각하곤 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지속되던 때 5월과 연관 있는 제반사항을 조명한 『십자가의 꿈』이 나왔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이 시집의 독창성과 선진성은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 시집이 지닌 그런 표면적인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그 시집의 구체적 내용이다. 이 시집의 시는 5월의 도시가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내력, 항쟁기간 동안 학살 자들이 보여준 야만성과 대비되는 민중들의 ·전투성과 도덕성, 그 항쟁의 민족사적 의미, 항쟁 이후의 슬픔과 부끄러움과 그리고 희망 등속을 고르게 탐색하고 있다. 5월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거의 모든 문제가 이 시집 안에서 시로 용해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5월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정리하려는 이에게 입문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꿈』속의 시들은 포괄적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느낌을 더러 자아내고 있다. 즉 시집 속의 시 하나 하나가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한 채 어색하게 동석하고 있는 모습을 이따금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시집 속의 시편들이 일관된 이야기나 생각을 공유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 가운데도 항쟁의 주역들을 조형한 「십자가의 꿈 · 53」 「십자가의 꿈 · 55」 「십자가의 꿈 ·56 ) 「십자가의 꿈 · 57」「십자가의 꿈 · 59」는 우리의 눈길을 끈다.
『오월시』 제 5집에 실린 「들불야학」은 전남대생들이 공동으로 창작한 장시다. 그런데 다 알다시피 (들불야학)은 1978년에 창설된 노동야학이다. 민주화와 민중해방을 갈망하던 광주지역의 대학생과 노동자들은 그 야학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뭉쳐 고통의 시대와 나날을 이기는 법을 서로 가르쳐주며 동반 성숙하였다. 그리하여 그 야학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성공적인 결합을 증거했을 뿐 아니라 1980년 이후 거세게 일어난 대학생의 노동현장으로의 투신에 모범적인 길을 열어 놓았다. 그런 야학이었기에 그 구성원들이 5월의 거리에서 배운 대로 실천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수 없다. 바로 그런 (들불야학)의 역사를 비교적 선명하게 압축하고 있는 시가 「들불야학」이다. 특히 5월의 절정과 파국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들불야학이 배출한 투사들의 자취는 여기서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이 극적 묘사에서 그 투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민중해방의 신념을 지키려 했다는 것을 거듭 엄숙하게 읽는다. 그건 실로 장엄한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라서 거기서 보이는 투박하고 소담한 언어를 탓할 짬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들불야학」은 광주항쟁의 핵심을 투시함으로써 5월의 총체적 형상화를 위한 통로를 하나 만들었다.
5월이 시의 공간 속에서 수용되고 있는 양상을 더 보고 싶은 독자는1987년에 나온 5월 광주 항쟁 시선집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를 꼭 들여다보길 바라면서, 이제부터는 이미 예고했던 바대로 우리의 소설이 5월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광주항쟁의 소설화를 검토할 때 우리는 임철우의 소설을 빠뜨릴 수 없다. 그는 지금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불의 얼굴』을 <문학과 사회)에 연재하고 있고, 이전에도 「사산하는 여름」처럼 5월의 상황과 직접 연결된 소설에서부터 「동행」「직선과 독가스」「불임기」「동전 몇 닢」「알 수 없는 일 ·3」「봄날」 등등에서처럼 5월에서 발원하거나 5월을 연상시키는 소설에 이르기까지 5월과 관련 있는 여러 유형의 작품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련의 소설을 여기서 다 검토할 겨를이 없으므로 그중 「봄날」을 통해 임철우가 서사적 공간 속에서 5월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 단편소설의 작중 인물 (명부)는 5월 항쟁 때 무장한 군인에게 학살되었다. 그 후 그의 친구 (상주)는 자기가 (더러운 살덩이)를 위해 친구의 다급한 구원조차 묵살했기 때문에 (명부)가 살해되었다는 죄의식에 빠진다. 그리하여 그의 과도한 죄의식은 마침내 그를 미치광이로 만든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봄날」은 5월의 싸움에서 살아 남은 자의 죄의식의 일단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죄의식이란 곧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부채 감 일 것이며, 살기 등등한 정치군부의 위세에 굴복한 것에 대한 살아 남은 자의 자책일 것이다. 그러나 5월의 엄청난 폭력을 경험하지 못한 독자가을 부끄러움과 동일하게 생각하다 끝내 미쳐 버리는 (상주)의 그 깊고 깊은 고뇌를 잘 모를 것이며, 아울러 그 고뇌의 밑바탕에 인간의 인간다움을 박탈하는 무리들에 대한 항의가 깔려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쨌건 「봄날」은 (명부)에 대한 (상주)의 죄의식처럼 산 자의 죽은 자에 대한 죄의식만 부각시키고 있질 않다. 이 작품은 또한5월로 마음이 부서지고 찢겨진 (상주)의 정신적 방황과 파탄을 통해 5월을 잊어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싶은 사람들을 집요하게 심문한다. 5월의 악몽을 잊지 못하는 네 이웃이 많은데도 그대는 정녕 5월을 쉽게 잊을 수 있느냐고. 5월이 지향했던 세계가 요원한 마당에도 어두운 과거를 망각하고 일상의 질서에 안주하는 것이 온당할 수 있느냐고. 5월의 진실이 철저히 밝혀지고 그 숭고한 의미가 공인될 때까지는 분명 그런 심문이 유효할 것이다.
5월이 지금 이곳의 사람들의 의식과 일상적인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임철우가 여러 단편을 통해 면밀하게 탐구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런 점을 류양선은 장편소설 『이 사람은 누구인가』를 통해 탐구하고 있다.
이 소설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얼마 전에야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지만 본래 1983년 봄에 씌어지기 시작해서 19%년 가을에 완결되었으며 류양선이 편집동인으로 참아하고 있던 부정기간행물 」문학의 시대) 창간호에서부터 종 간호까지 계속 연재되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문학의 시대)의 정신과 행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내력을 지닌 이 소설은 또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도록 유려한 문체로 직조되어 있으며, 이야기를 독특할 방법으로 전달하고 있어 이래저래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하다. 게다가 이 소설은 방대한 규모로 광주항쟁을 다룬 최초의 장편소설이라서 문학사적 차원예서도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작품이다.
이 소설은 광주항쟁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특히 지식인 · 예술인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에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집중적으로 탐문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이 소설은 5월 항쟁 발발 이후 어느 날 갑자기 조각가 한빈이 잠적하는 사건을 제시한다. 이어서 이 소설은 그 꼭 친구 영성이 그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며 겪은 일을 상세히 수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잠적한 한빈을 추적하는 이야기로써 그 잠적이 갖는 의미를 밝히고자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소설이 이청준의 소설처럼 한번의 잠적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사건을 상당히 끈질기게 투시하고 있는 점을 우리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런 집요한 투시는 긴말할 것 없이 광주항쟁이 깨어 있는 정신의 소유자들에게 얼마나 큰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유발하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식적 노력의 소산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소설에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뻔뻔스런 작태와 언어로 미화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맞아,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럽고 싸우지 못하는 것이 괴로운 사람들의 심리와 정신을 아프게 읽을 수 있다. 스스로 불구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한빈의 정신적 질병이야말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앓았던 병이 아니겠는가. 이 소설의 행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비장한 분위기도 그런 부끄러움과 무력감에서 비롯된 질병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를 거듭 환기시킨다.
윤정모의 「밤길」은 어떠한가. 이 짤막한 소설에서는 두 인물이 움직이고 있다. 광주항쟁 때 수습위원으로 활동했던 김신부와 시민 군으로 싸움에 나섰던 요섭이 그들이다. 이들은 그 항쟁의 거점이었던 도청이 진압군의 수중에 들어가기 직전에 그곳을 빠져 나온다. 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곳에서 도망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도청에 잔류하던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항쟁의 주체들이 (불순분자도 폭도도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주기 위해 그곳을 빠져 나온 것이다. 그 후 이들의 몸은 항쟁의 주역들 곁을 떠났지만 이들의 마음은 그들 곁을 떠나지 못한다. 김신부는 항쟁의 현장에 대한 회상에 빠지고 요섭은 자신의 탈출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를 괴롭게 질문한다. 즉 김신부는 시체안치소의 처참한 풍경, 외신기자의 행동, 택시기사들의 차량돌진, 그리고 수습위원으로서 동분서주하던 일 따위를 회상하고, (무기 반납을 강요받을 때, 다시금 진압군이 좁혀 올 때 劣은 추장처럼) (피가 모자란다면, 지금까지 흘린 그 피로도 충분치 않다면, 그렇다면 이젠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열심히 싸웠던 요섭은 동지들을 두고 도망친 자신이 비경자라는 생각에 빠진다. 그러나 김신부는 요섭의 그런 번 민을 읽고 요섭을 이렇게 위무 한다.
요섭아, 우리도 지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있는 게 아니란다. 거기에도 장벽은 있다. 그 장벽을 깨뜨려 달라는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거야. 우린 그걸 해내야 돼, 비록 이 밤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해도 이젠 서둘러야 한다.
이처럼 이 소설은 5월의 주요장면을 군데군데 배치하면서 5월의 완성을 위해 우리 모두가 정진해야 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따라서 최원식이 「광주항쟁의 소설화」(<창작과 비평) 1988 ·여름)라는 글에서 이 소설에 대해 몇 가지 유감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단편소설의 좁은 공간에서 이만한 이야기가 농축되기는 실상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 소설에 대한 여러 사람의 호평은 여전히 정당하다.
윤정모의 「밤길」 이후 1987년 가을에 광주항쟁소설집 『일어서는 땅』이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5월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룬 11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모두 신작은 아니다. 개중에는 이미 발표되었던 작품도 들어 있다. 아무튼 그 11편의 작품 중에서, 백낙청의 「오늘의 민족문학과 민족운동」(』창작과 비평P 1988 ·봄)이나 최원식의 앞의 글이 다같이 그랬듯이, 여기서도 두 신인의 작품, 즉 박호재의 「다시 그 거리에서면」과 정도상의 「십오방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박호재의 「다시 그 거리에 서면」의 시간적 배경은 광주민중의 무장투 쟁의 승리로 광주가 해방된 날에서부터 계엄군의 광주장악 직후가지의 약 1주일간이다. 그 1주일 동안 광주의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 이 소설의주요 관심거리이다. 그 가정의 구성원은 어머니, 지숙, 형석, 형수인데, 그 중 이 소설을 이끌고 있는 지속은, 홀어머니와 사는 집의 맏딸답게(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려는 욕구에 젖어 있다. 그런 그녀에게 매사를 숙연히 받아들이곤 하는 그녀의 막내 동생 형수는 믿음의 대상이지만, 집안일 에는 냉담한 채 학생운동의 깊은 곳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동생 형석은 늘 불안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녀는 형석이 제 인생을 추스릴 줄 아는 평범한 젊은이가 되길 원하지만 그때마다 형석은 (지금의 사회가 안고 있는 그 모순에 대한 참된 반성과 회의가 행동으로 연계되지 않으면 닥쳐올 재난의 모습은 우리들 모두의 존재를 짐승의 목숨처럼 파멸케 해버리는 역사적인 위기가 도래할 수도 있어요)란 말로 오히려 그녀를 설득한다. 그런 형석은 항쟁의 주역으로 뛰어들고, 형수는 항쟁을 진압하는 군대를 보좌하는 방위 병으로 항쟁에 관여한다. 이러한 기막힌 상황에서 축은 이루 다 형언키 어려운 불안과 두려움으로 그들의 소식을 기다리지만, 그들은 한동안 아무 연락도 없다가 항쟁의 불길이 계엄군에 의해 꺼진 뒤에서야 소식을 보낸다. 형석은 기사회생해 겨우 애인의 집으로 탈주했고 형수는 급박한 상황의 전개과정에서 광주의 외곽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숙은 두 동생의 생존에 일단 안도하지만, 곧이어 광주민중을 (화려하게) 살육한 계엄군과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무리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적개심)을 갖는다. 요컨대 「다시 그 거리에서면」은 흠잡을 데 없이 정교하게 짜여진 데다가 5월의 현장에서 한 가족이 겪은 비극적인 사건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특히 지숙의 의식의 변모를 통해 5월에 대한 시각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도상의 「십오방이야기」는 5월의 후일담으로서 백낙청의 지적처럼 5 월 항쟁 때 공수부대의 일원이던 김만복 같은 (말단의 가해자 역시 궁극적인 피해자)라는 날카로운 시각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시각이 그다지 잘 삼투한 작품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단편소설은 운동권대학생 김원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옥중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 인물이 옥중에서 만나 연대하는 결말도 작가의 관념 이상의 것이 되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 정도로 어색하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잠재력을 타진하기 위해 이 소설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무방하나 이 소설의 성취도를 확인하기 위해 이 소설의 문을 두드릴 필요가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5월을 그린 소설 중에서 홍희담의 중편 「깃발」만큼 화제의 중심을 차지했던 작품은 없다. 이곳에서 그 작품에 관한 몇 마디 발언을 더 보태도 그것이 새로운 소리가 못 될 정도로 뭇 사람의 이목이 그 작품에 집중했었다. 가령, 이 중편이 수록된 (창작과 비평)(1988·봄)의 편집인은 그것이 (광주의 )월을 민중의 시각으로 보는 데로 크게 진일보한 뜻깊은 수확)이라고 했고, 최원식은 앞의 글에서 (노동자의 눈으로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침통하게 추적하고 있는 이 작품은 여러모로 획기적)이라고 말했다. 윤지관은 「광주항쟁의 도덕적 의미」(『민족현실파 문학비평」)에서 (일정 규모를 갖춘 의미 있는 작품으로는 광주항쟁의 민중적 성격을 차분하게 성찰한 홍희담의 중편 「깃발」 정도가 아닐까 싶다)고 했으며, 김사인은 재 수록 잡지인 <오늘의 소설)(1988 상반기)에서 (광주항쟁의 형상화는 즉자적 체험의 서술이나 그 참담함의 묘사차원을 넘어 탐구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문학적 작업에 의해 전면적 진실에 육박해 가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깃발」은 그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분명한 선을 그어 보여주는 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평가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깃발」은 5월 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음이 틀림없다. 이 소설이 개척한 그 독보적인 영역을 정리하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 작품은 광주항쟁을 거기에 몸소 참여했던 사람의 눈으로 관찰 기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깃발」에서는 그 항쟁을 먼발치서 본 사람의 추상적인 괴로움, 자책감, 울분, 경악 등이 배제된다. 그 대신에 그 싸움을 이끌고 가던 당사자들의 싱싱한 언행이 풍성하게 담겨져 있다. 중국 집 배달원이나 여자 노동자들의 활기와 전의가 이를 잘 반증하고 있다. 그리고 「깃발」은 항쟁의 중심에 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항쟁의 핵심적 경과를 세밀하게, 그리고 실감나게 조형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막연한 상상에 의한 5월의 묘사가 지닌 허황함을 이 소설은 피할 수 있었다. 둘째, 이 소설은 노동자의 눈으로 5 월을 해석하고 있다. 그런 해석은 신선하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는 것은 5월에 대한 그 같은 해석이 5훨의 한 부분을 잘 읽었다는 의미뿐 아니라 참모습을 왜곡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노동 자 ·도시빈민이 항쟁의 후반부에서 郊렬하게 싸웠다는 사실과 그 결과 그들이 산화한 열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깃발」의 그런 시각은 도출된 것이리라. 그러나 그런 시각이 노동자 ·도시빈민의 혁명 성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윤강일에 대한 경멸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에 크게 활약했던 대학생이나 지식인을 매도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에 입각한 관점으로서는 훌륭할지 몰라도 5월의 총체적 모습과 의미를 밝히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당시에 광주민중의 절대다수가 노동자 ·도시빈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들의 활약이 다른 계급의 활약에 비해 월등하다고 단정할 수 없고 또 그들이 항쟁초기에 미온적인 활동을 펼쳤다는 것을 「깃발」도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노동자 ·도시빈민의 자랑이 될 수야 없지 않은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특히, 실패한 항쟁의 책임을 그 싸움에 참여한 어느 누구에게 더 많이 지우는 것은 광주민중의 명예를 훼손하면 훼손했지 강화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5월 항쟁은 노동자계급만의 항쟁이 아닌 광주민중 전체의 항쟁이라는 것이다.
그밖에, 5월의 생생한 움직임을 다루지는 않더라도 5월이 이 시대의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다룬 소설들은 왜 많다. 그것들에 대한 검토는 숙제로 남긴다. (<실천문학> 1990 ·여름)
5월 민중 항쟁은 1980년 5월 18일에 광주 일대에서 늦봄의 따스한 햇살을 받아 활짝 피었다가 5월 27일에 정치군부의 총칼에 의해 무참하게 잘린 한국민중운동의 꽃이다.
휴전협정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의 민중운동이 비축한 역량을, 특히 4 월 혁명의 유산을, 총체적으로 계승하되 그런 운동의 수준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한 그 고귀한 항쟁의 꽃은 상대적 빈곤과 지역적 소외와 반민주로 불결해진 세상의 변혁을 열망하며 피었건만 도륙도 서슴지 않는 패륜의 무리들에 의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중도에 꺾였다. 그 개화에서 낙화까지의 열흘 동안 광주민중들은 고립 무원의 낙도에 갇힌 양 다른 지역과 철저히 차단된 가운데도 불굴의 투지로써 반민주적 세력과 싸웠으며 고도의 도덕성으로써 이웃을 사랑했다. 그러나 세계사에서도 돋보이는 그 순결한 꽃은 끝내 광주 일대에 붉은 핏물을 흥건히 뿌리며 절단되었다. 그 후 그 피를 먹고 탄생한 5공은 그 출생성분에 어울리게 폭력으로 민중을 탄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집요하고도 철저하게 그 꽃을 말하는 것조차 막았다. 6월 항쟁의 부분적 승리 이후로 그 항쟁에 관한 논의가 예전보다 활기를 띠었다고는 하나 또 그 동안 선각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제는 그 항쟁의 전모와 진의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는 하나 그 항쟁의 전모와 진의를 대중적 매체를 통해 알리는 일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공공연히 봉쇄되고 있다. 6공이 광주항쟁의 부정에 기초한 5공의 적자인 한 그런 봉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그 항쟁에서 빛나는 활약을 하다가 산화한 열사들의 영령들이 아직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더구나 그 영혼이 민중운동의 고결한 순교자로 추앙되기는커녕 혼란을 틈타 경거망동한 폭도 또는 지역감정에 사로잡힌 불평불만자라는 더러운 누명까지 시원하게 벗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 울분과 비탄을 삼키며 외롭게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 영혼뿐만 아니라 무자비한 살육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도 그 항쟁 매 입은 육체적, 정신적 상처 때문에 여태 건강과 원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일부는 시름시름 앓다가 미쳐 버리고 또 그들의 일부는 사는 것이 부끄러워 끝내 죽은 자의 곁으로 날아갔다. 그 외에도 숱한 젊은이들이 광주항쟁 이후에 본연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낸 폭군들의 횡포와 광주항쟁의 은폐와 왜곡을 항거하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였다. 바야흐로 산 자들이 죽은 자를 거침없이 따라가는 처절한 상황이 그 항쟁 후에도 내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령을 내린 후안무치한 자들은, 광주 민중을 참혹하게 살상한 극악무도한 장본인들은 그 동안 권력과 재물을 독점하더니 그것으로 허전했던지 지금도, 혹은 풍치 좋은 절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혹은 외국여행으로 한가하게 소일하거나 혹은 뻔뻔스럽게 권좌에 앉아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들은 한때 그 항쟁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조작하는 데 열중하더니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이제는 그 항쟁이 빨리 몇 푼의 돈으로 청산되어 아무도 들추어 내지 않는 과거지사가 되기를 음험하게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본말이 완전무결하게 전도된 이런 뒤집힌 세상이 마냥 유지될 수는 없다. 다 피지도 못하고 도중에 꺾였던 그 항쟁의 꽃이 다시 그 본래의 열망대로 탐스럽고 화려하게 필 날이, 그리하여 주객이 바뀐 세상이 바로잡힐 날이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현 단계 변혁운동의 열기와 실적을 아는 이라면 이런 낙관이 허무맹랑하거나 천박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 항쟁 이후로 여러 부문에서 이 땅의 구조적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변혁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바로 이런 사실들이 그 항쟁의 부활을 보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그 항쟁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우리 사회의 성격이나 미국을 정확하게 투시할 수 없었을 것이며 1980년대의 노동운동을 포함한 민중운동이 그토록 놀라 우리만치 빨리 양적으로 팽창하고 질적으로 비약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1980년대 변혁운동은 한결같이 그 항쟁을 근거로 출범하였고 아울러 그 미완의 항쟁을 완성시킬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앞으로의 운동 또한 그럴 것이다. 즉 광주항쟁은 현 단계 변혁운동의 출발점이자 목적지인 것이다. 이처럼 그 항쟁은 언제나 변혁운동의 중심에 자리잡고 앉아서 그 운동의 진로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운동의 성숙과 고양을 위해 지속적으로 그 운동에 영양을 공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항쟁의 꽃은 조만간 다시 피어 이 세상에서 대단히 아름답고 소중한 민중의 꽃이 될 것이다.
1980년대에 거세게 일어난 문학운동도 그런 광주항쟁으로부터 갖가지 힘과 슬기를 제공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러나 창작의 그 항쟁에 대한 대응은 대체로 신속하지도 충분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 항쟁을 깊은 눈으로 해석하고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불후의 명품이라고 자타가 두루 인정할 수 있는 작품을 우리는 아직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 사정은 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그 항쟁에 관한 언급이 금압되었고, 또한 그 항쟁을 목격하거나 체험한 문학인들은 그 충격을 벗어나지 못해 미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여유를 얻지 못했으며 그 항쟁을 뒤늦게 알게 된 문학인들은 부끄러워서 차마 그 항쟁과 관련된 작품을 제대로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작가들이 그 항쟁의 위대성에 압도되어서건 언어의 무력을 절감해서건 간에, 그 항쟁을 표현한 뛰어난 문학을 넉넉하게 생산하지 못했다는 것이 자랑거리일 수는 없다. 특히 그 항쟁의 위대성을 문학에서 살리는 일이 이 시대 문학인의 엄숙한 과제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땅의 문학인들은 제 소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항쟁은 1980년 이후 줄곧 문학인의 주요 관심사였으며 그리하여 그 항쟁을 작품으로 옳긴 사람들이 적지는 않다. 이 글에서 필자는 지난 10년간 그들이 산출한, 광주항쟁을 소재로 찬 작품을 주마간산격 이나마 훑어보려고 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그 항쟁을 빼어나게 그린 작품이 앞으로 더욱 많이 쏟아져 나오기를 갈망하는 마음의 소산이라는 것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장 먼저 광주항쟁을 문학적으로 수용한 작품은 그 당시에 幸군가에의해 낭송된 「민주의 나라」와 같은 시다. 그러나 잠시 해방되었던 광주를 예찬하고 있는 그 시는 잘 다듬어지지는 않았다. 그 뒤에 나온 광주항쟁을 문학적으로 수용한 작품 중에서, 항쟁 직후 <전남매일신문P에 실린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 」라는 장시를 우리는 잊을 수 없다. 당시에는 이 시의 많은 부분이 계엄당국에 의해 가위질 당한 채로 그 신문에 실렸음에도 불구하고 문순태의 증언에 의하면 그 시에 대한독자의 반응이 대단했으며, 또 삭제되지 않은 그 시의 원문은 독자의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 시의 일부를 잠시 읽어보자.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아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 」에서
시인은 이 시에서 무등산의 넓고 포근한 품에 안겨 있는 광주가 목숨이 아까워 불의와 타협하거나 불의를 묵인하는 비겁한 사람이 사는 도시가 아니라 죽음을 불사하며 정의를 추구하는 담대한 사람이 사는 도시며, (백의의 옷자락) 으로 검은 무리들을 몰아내고 그리하여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 백의민족의 숭고한 얼을 계속 보존할 자격을 갖춘 사랑이 사는 도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광주는 崙어 기동조차 못하는 쇠약한 노인의 도시가 아니라 끝끝내 노쇠를 거부하는, 영원히 새파랗게 살아 꿈틀거리는 청춘남녀의 도시라는 것이다. 그러한 광주가 비록 군부의 더러운 군홧발에 짓밟히고 광주민중들이 군부의 무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어도 광주와 광주민중은 결코 죽지 않는 (불사조)며, 부활의 날을 고대하며 고난을 감수하는 (하느님 아들)이라는 것을 이 시는 의치고 있다. 광주와 광주민중의 실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채 광주와 광주민중에 관한 유언비어와 지역적 편견만이 무성하던 그 무렵에 이 시는 일면 광 주 시민들이 겪은 크나큰 아픔을 울부짖듯이 토로하고 있지만 종국에는 광주가 (폭도)의 도시가 아니라 민주의 성지며 광주민중은 그 성지의 당당한 주인공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자랑하고 홍보하고 있다. 그렇다. 1980년 )월 이후 잘못된 제도의 타파와 탐욕스런 도배의 타도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 사람 치고 광주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맑은 마음을 갖고 깨끗한 세계를 갈구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몸으로써 건 마음으로써 건 광주에 와서 자신의 그런 갈구에 조응하는 논리와 행동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시의 예측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항쟁의 도시 광주는 일부 지역 안의 터전으로서의 고유명사에서 이 나라 민중의 정신적 고향으로서의 보통명사로 바뀌었고, 평범하고 초라한 도시에서 특별하고 거룩한 성지로 부상하였다. 그러므로 그런 성스러운 공간의 주인인 광주 민중은 마땅히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광주민중이 다른 지역의 민중을 맹목적으로 배척하는, 나쁜 의미의 지역감정에 물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죄 많다. 일부의 악한들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지역의 민중의 다수도 그런 악한의 왜곡된 선전에 세뇌되어서 그런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는 정말 개탄스럽다. 최근에 제출된 많은 보고서들이 가르쳐주고 있듯이 호남인 들이 정치 · 경제 ·군사 분야의 요직에서 배제되고 특히 호남지역의 경제가 다른 지역의 경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이런 지역모순을 예기하게 간파하고 그 극복을 꾸준히 추구하는 것은 다른 지역의 민중에 대한 배타적 감정의 소산이 결코 아니라 뛰어난 현실인식과 역사인식의 소산인 것이다. 지역모순에 대한 이러한 높은 식견과 민주화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합쳐져서 광주항쟁을 낳은 것이지 그 어느 하나의 힘으로 광주항쟁이 폭발한 것은 아니다. 이런 시각을 갖지 않고서는 다른 지역의 민중들이 1980년 5월에 묵묵부답 방관한 것과 달리 광주민중들이 외롭게, 그러나 가열 차게 투쟁한 것을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광주항쟁을 나쁜 의미의 지역감정에 의해 촉 발된 행동으로 보는 것은 그 항쟁을 폄훼하고 광주민중을 모독하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광주항쟁의 한 촉매가 되기도 했던 지 역 모순에 대한 광주민중의 뛰어난 인식이 높이 평가되어야 정당한 것이다. 이와 함께 광주항쟁을 단순히 특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즉자적 반응이라고 보는 견해도 수정되어야 한다. 그런 견해는 정치군부의 악마 성을 고발하자는 뜻을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광주민중의 자발적 의사에 따른 싸움을 평가절하하기도 하기 때문에 함부로 남용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요컨대 이런 생각들을 두루 종합하여 광주와 광주민중을 칭송한 김준태의 위의 시는, 그 처연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분명 광주와 광주민중에 대한 모든 세속적 편견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함께 광주와 광주민중의 아픔과 위대함을 거듭 알리려는 뜻을 강렬하게 ·담고 있는, 매우 감동적인 시다.
1980년대 초엽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광주항쟁을 공개적으로 들먹일 수 없었다. 서슬이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공포정치를 시작한 군부정권은 그 항쟁에 관한 일체의 발언을 금지했고 권력의 기반을 다질 요량으로 오로지 광주항쟁을 매도하고 비난하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광주항쟁의 정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깨어 있는 자의 가슴속에서 되살아나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1981년에 나온 두 권의 동인지 <5월시>와 <시와 경제)는 그 깨어 있는 자들이 만든 것이다. 그 동인지의 수명은 각각 달랐지만 그 구성원들은 깨어 있는 자들답게 다같이 단단한 역사의식으로써 시를 샜으며 1980년대 문학운동의 첨 병으로서도 많은 활동을 펼쳤다. 이처럼 단단한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그들이 광주항쟁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그들의 활동 초기에 내색은 안 했지만 분명 광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해 발전시키려는 의도까지 품고 있었다. 그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들의 )월의 노래는 예상했던 것보다는 적다. 그러나 적은 수의 노래라고는 해도 그들의 5월의 노래는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塡불이었다. 그들의 )월의 시는 군부정권의 총칼에 굴복하지 않는 펜의 총기를 대변하는 것이자 그 정권의 부당한 명령을 뿌리치고 양심을 지키려는 이의 언술이었다. 그 시들은 또한 살인정권의 조기몰락을 예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시적으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민주의 세계가 기필코 다시 오리라는 희망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그런 뜻에서 이런 시들이야말로 좌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당시의 독자들을 부추겨 민주의 세계를 쟁취할 것을 촉구한,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전령으로 기능한 시라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의 그런 시중에서 가령, 아래와 같은 시를 보자.
목숨의 횡경막을 표시하는 황색 선이 중앙으로 나 있다.
바로 그 황색선 옆 백색 ↑표 위에
백색 X표가 그어져 있고
횡단 보도에는 신호등이 산산 조각되어 흩어져 있다.
그 신호등에서 그 백색 X표까지, 혹은
그 백색 X표 위까지, 혹은
캔버스 밖 백색 벽 위에까지, 화급하게
지나간 듯한 정글 화 자국들이
수십, 수백, 수천의 무인들처럼
찍혀, 있다 마치, 그 길은
끝끝내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길이었다는 듯이
-황지우의 「흔적Ⅲ 1980(5.18x5.27cm) 이영호 작」에서
이 시는 광주민중의 생사가 타의에 의해 결정되던 급박한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그 상황을 말로다 전할 수 없다는 듯이 시각적 효과를 자아내는 기호로 표현하기도 하면서, 살인부대의 야만적인 인간 사 냥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이 시는 그리하여 동족에 대한 애정은 제쳐놓고서라도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조그만 경외심도 없는, 철저하게 인간의 생명을 천대하는 집단의 육식 동물적인 광포함을 섬뜩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삼, 그 집단이 무기를 앞세워 살길과 죽을 길을 제멋대로 정한 뒤, 죽을 길을 선택한, 아니 때로는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민중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잔혹하게 살해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 시를 읽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집단이 자신들의 (정글 화 자국)에 묻힌 피가 그들의 종말을 재촉하는 주문이라는 것도 모르고, (돌이킬 수 없는)범죄를 저질렀다는 것도 모른 채, 가히 야수답게 살상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눈과 귀를 가진 사람에게는 분노 이전에 경악 그 자체였다. 이 시가 굳이 분노를 절제한 것도 그 기막힌 상황에 대한 경악을 그대로 표하고자 한 것이리라.
그러면, 야수의 만행으로 졸지에 생명을 탈취 당한 민중들을 보는 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새 한 마리 오래 뒤따라 날아오는 걸 보았다. 그때이후 노양의 잠은 종다리를 꿈꾼다. 배동이 서는 보리밭에 누워 있곤 한다. 종다리는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며 노래하다가 그녀의 품속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진다. 그런 꿈을 꾼 날은 정신없이 눈물 흘리며 금남로를 헤맨다.
-최두석의 「서호빈」에서
이 시는 광주항쟁에서 애통하게 분사한 서호빈을 잊지 못하는 그의 애인이었던, 노양의 심정을 잘 그리고 있다. 노양은 총살당한 서호빈의 시신을 도청 뒤뜰에서 찾아 매장했지만 그의 넋은 매장되지 않았다. 그의 넋은 그녀가 파괴된 그의 육신을 매장하고 돌아오던 날 그녀의 뒤를 따라온 새와 함께 그녀 곁으로 왔다. 그래서 그녀가 밤에 꿈을 꿀 때면 어김없이 그의 넋은 종다리가 되어 나타난다. 그 꿈속에서 노양은 봄날( 배동이 서는 보리밭에 누워 있)고 종다리 또한 그녀의 곁에 있다. 그러나 그 종다리는 그녀 곁을 떠나 수직으로 (하늘 끝까지 날아 오르며 노래)한다. 서호빈이 항쟁에 참가하여 민주를 위해 온몸으로 싸웠듯이 그렇게 종다리는 하늘 높은 곳에서 자유를 위해 온몸으로 노래한다. 그러나 서호빈이 항쟁에서 장렬하게 산화했듯이 종다리도 (곤두박질쳐 떨어진다. )이처럼 노양은 종다리의 타상과 추락을 꿈속에서 보고서는 자기 애인의 싸움과 죽음을 되새긴다. 서호빈은 죽었지만 그의 넋은 그의 애인의 꿈속에 이처럼 자주 나타나 그녀를 울린다. 그의 넋이 (그녀의 가슴에 집을)지을수록 더욱 그녀는 원통하여 살맛을 잃는다. 바로 그녀의 이런 비통한 심정 속에 광주항쟁에서 비참하게 희생된 사람을 기억하는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의 심정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두 시인의 시처럼 광주항쟁을 다룬 시는 우선 죽인 자와 죽은 자를 그리는 일에 치중하였다. 죽인 자와 죽은 자가 수다했다는 것이 그 항쟁의 가장 뚜렷한 진실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시인들의 이런 반응은 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5월시>와 <시와 경제)동인들 이외에도 민족 · 민중현실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많은 시인들 역시 그러했다. 다음 시편을 보기로 하자.
낮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이민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민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낮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낮 12시였던가
-김남주의 「학살 · 2」에 서
증오할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을 증오하는 것은 큰 죄악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탈은 썼어도 다른 인간의 생명을 마구 앗아가는 짐승과다를 바 없는 인간이 있다면 그런 악한을 증오하지 않는 것이 명백한 유죄일 뿐 그런 악한을 증오하는 것은 확실하게 무죄다. 오히려 그런 증오야말로 그런 악독한 인간의 구축을 위해 불가결하다. 그렇더라도 감정적 인 증오만으로 그들을 선량한 인간의 땅에서 쫓아낼 수는 없다. 상대방을 모르고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는 상식을 생각하더라도 그들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다시 말하면 광주항쟁에서 죽인 자들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한, 그들을 이 땅에서 추방하기 위'한 첫 작업이기도 하다. 정남주의 「학살 · 2」도 이런 작업을 찬 시의 하나다. 제목부터 선명한 이 시는 백주 대낮에 (노골적)으로 또 무시무시하게 광주민중을 죽인 (일단의 군인들)의 만행을 가차없이 폭로하고 있다. 학살 자들은 그들과 같은 동포요 이웃이었던 광주민중을 이국의 철천지원수로 여긴 듯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구 그들을 죽였던 바, 그런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이 시의 화자 (나)는 어안이 벙벙해 그 현장의 참
상을 차마 다 말하지 못하고 단말마의 외침과 다름없는 (나는 보았다)를 반복하며 그 참상을 전하고 있다. 그처럼 이 시가 몇 가지 중요한 사실만을 건조하게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을 통해 우리는 학살자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그리고 그들의 본질이 어떤가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이 땅을 떠나며 울던 넋들이 모여서
오늘은 대낮에 저리 천둥이 치는구나.
진달래로는 피맺힌 한을 보여줄 수 없어
서리서리 소낙비를 쏟아놓는다면,
이 하루 나는 무릎 꿇고 벼락도 맞아야 하리.
-하종오의 「오월에 5」에서
그러나 이런 시를 보면 이제 시인은 항쟁 때 (이 땅을 떠나며 울던 넋들)을 회상하고 슬퍼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둠이 내린 곳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심하게 질책한다. 즉 이 시는 살아있다는 것이 큰 죄라는, 1980년대 초엽에 많은 이들의 가슴에, 무겁게 자리잡고 있던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 생각은 급기야 광주항쟁에서 인재로 죽은 자처럼 시인도 천벌인 (벼락)을 맞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시인이 이런 극단적인 죄책감에만 빠져 있는 한 죽은 자의 유언을 성실히 이행할 수 없다. 시인도 그런 점을 곧 깨닫고「유복녀에게」 같은 시에서는 (행여 누가 이 아비를 찾더라도 떳떳하거라 계집애야 내 죽음은 널 낳았다)라고 진술한다. 그것은 아버지의 딸에 대한 당부를 통해 산 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준엄하게 추궁하는 것이다. 산 자들은 당연히 그 추궁을 회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산 자들이 죽은 자가 남긴 정신을 되살릴 때만 진정으로 죽은
자를 위로할 수 있고 자신의 눈물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라도 산 자들은 슬픔과 부끄러움의 음지의 골목에서 벗어나 죽은 자의 정신을 계승하여 발전시킬 수 있는 양지의 대로를 스스로 찾아 나서야 마땅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광주항쟁에서 학살을 감행한 자들의 정체를 규명하려고 노력한 시, 그 싸움에서 산화한·사람을 잊지 못하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죽은 자의 뜻을 따를 것을 결의하는 사람의 모습을 조형한 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보다시피 모두 짤막한 시다. 그러나 광주항쟁을 다룬 1980년대 전반기의 문학을 검토하면서 필자가 여태 시만을 소개한 것은 필자의 시 장르에 대한 특별한 애정 때문이 아니다. 소설이 광주항쟁을 다루기 시작한 때는 좀 과감하게 말하면(이런 표현은 약간의 예외가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1985년 이후부터였다.
그 1985년의 5월에는 광주항쟁과 관련된 두 사건이 있었다. 책의 압수와 출판인의 구속을 야기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의 출간과, 광주항쟁의 본격적 거론을 촉발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미국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공개적으로 질문하게 만든 서울의 미국문화원 점거사건이 그것이다. 그 두 사건은 광주항쟁의 진실을 계속 숨기거나 왜곡한 5공에 일격을 가한 중대한 사건으로서: 그때를 전후해 우리의 소설도 광주항쟁을 서서히 다루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필자는 소설을 거론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우리는 소설을 검토하기로 하겠다.
물론 1985년 이후에도 많은 시인들이, 특히 새로 등단한 재능과 기백이 남다른 젊은 시인들이 광주항쟁을 노래했던 만큼 계속 그들의 시를 두루 검토해 보는 것이 이 글의 소임이긴 하지만, 이 짧은 지면이 그런 임무를 다 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고 또 1980년대 후반기에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에 대한 통찰력이 증대함에 따라 그 시들도 그런 통찰력에 의존해 광주항쟁을 새롭게 해석한 공적을 남겼지만 그 같은 점 이외에서는 그 시들의 세계가 크게 보아 지금까지 살펴본 시 세계와 비슷하다고 판단되어 부득이 앞으로는 그것에 대한 검토를 생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검토하기 전에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박몽구의 연작시인「십자가의 꿈」과 전남대 비나리패의 장시 「들불야학」이 그것이다.
앞에서 우리가 검토했던 시들을 포함한, 1980년대 전반기에 생산된 대부분의 시들은 광주항쟁의 공개적 거론이 거의 불가능했던 상황에서도 제각기 짧은 시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광주항쟁의 전과정에 대한 총체적 조명과 그것의 역사적 의미에 관한 깊은 성찰을 결여한 것도 사실이다. 다름 아닌 후자의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런 조명과 성찰을 구비한 작품의 탄생을 고대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충족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의 머리에서도 단언했듯이, 그 고대에 어울리는 광주항쟁문학의 출현은 여전히 우리의 희망사항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시의 형식을 통해 그런 콧대에 부응하려고 애쓴 『십자가의 꿈』과 「들불야학」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박몽구의 시집 『십자가의 꿈』은 1984년부터 약 2년간에 걸쳐 완성된 시를 수록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여기서 구태여 부기하는 이유는, 이 시집이 나올 무렵까지 뜻 있는 시인 치고 5월을 노래하지 않은 사람도 없지만 동시에 그것을 다양한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노래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는 건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물론 극소수의 시인이 5월을 자주 노래했지만 그 노래의 가사와 가락은 이상하리만치 유사했고 그 때문에 우리는 여러 노래를 들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하나의 노래를 여러 번 들었다고 착각하곤 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지속되던 때 5월과 연관 있는 제반사항을 조명한 『십자가의 꿈』이 나왔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이 시집의 독창성과 선진성은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 시집이 지닌 그런 표면적인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그 시집의 구체적 내용이다. 이 시집의 시는 5월의 도시가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내력, 항쟁기간 동안 학살 자들이 보여준 야만성과 대비되는 민중들의 ·전투성과 도덕성, 그 항쟁의 민족사적 의미, 항쟁 이후의 슬픔과 부끄러움과 그리고 희망 등속을 고르게 탐색하고 있다. 5월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거의 모든 문제가 이 시집 안에서 시로 용해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5월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정리하려는 이에게 입문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꿈』속의 시들은 포괄적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느낌을 더러 자아내고 있다. 즉 시집 속의 시 하나 하나가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한 채 어색하게 동석하고 있는 모습을 이따금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시집 속의 시편들이 일관된 이야기나 생각을 공유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 가운데도 항쟁의 주역들을 조형한 「십자가의 꿈 · 53」 「십자가의 꿈 · 55」 「십자가의 꿈 ·56 ) 「십자가의 꿈 · 57」「십자가의 꿈 · 59」는 우리의 눈길을 끈다.
『오월시』 제 5집에 실린 「들불야학」은 전남대생들이 공동으로 창작한 장시다. 그런데 다 알다시피 (들불야학)은 1978년에 창설된 노동야학이다. 민주화와 민중해방을 갈망하던 광주지역의 대학생과 노동자들은 그 야학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뭉쳐 고통의 시대와 나날을 이기는 법을 서로 가르쳐주며 동반 성숙하였다. 그리하여 그 야학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성공적인 결합을 증거했을 뿐 아니라 1980년 이후 거세게 일어난 대학생의 노동현장으로의 투신에 모범적인 길을 열어 놓았다. 그런 야학이었기에 그 구성원들이 5월의 거리에서 배운 대로 실천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수 없다. 바로 그런 (들불야학)의 역사를 비교적 선명하게 압축하고 있는 시가 「들불야학」이다. 특히 5월의 절정과 파국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들불야학이 배출한 투사들의 자취는 여기서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이 극적 묘사에서 그 투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민중해방의 신념을 지키려 했다는 것을 거듭 엄숙하게 읽는다. 그건 실로 장엄한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라서 거기서 보이는 투박하고 소담한 언어를 탓할 짬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들불야학」은 광주항쟁의 핵심을 투시함으로써 5월의 총체적 형상화를 위한 통로를 하나 만들었다.
5월이 시의 공간 속에서 수용되고 있는 양상을 더 보고 싶은 독자는1987년에 나온 5월 광주 항쟁 시선집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를 꼭 들여다보길 바라면서, 이제부터는 이미 예고했던 바대로 우리의 소설이 5월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광주항쟁의 소설화를 검토할 때 우리는 임철우의 소설을 빠뜨릴 수 없다. 그는 지금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불의 얼굴』을 <문학과 사회)에 연재하고 있고, 이전에도 「사산하는 여름」처럼 5월의 상황과 직접 연결된 소설에서부터 「동행」「직선과 독가스」「불임기」「동전 몇 닢」「알 수 없는 일 ·3」「봄날」 등등에서처럼 5월에서 발원하거나 5월을 연상시키는 소설에 이르기까지 5월과 관련 있는 여러 유형의 작품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련의 소설을 여기서 다 검토할 겨를이 없으므로 그중 「봄날」을 통해 임철우가 서사적 공간 속에서 5월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 단편소설의 작중 인물 (명부)는 5월 항쟁 때 무장한 군인에게 학살되었다. 그 후 그의 친구 (상주)는 자기가 (더러운 살덩이)를 위해 친구의 다급한 구원조차 묵살했기 때문에 (명부)가 살해되었다는 죄의식에 빠진다. 그리하여 그의 과도한 죄의식은 마침내 그를 미치광이로 만든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봄날」은 5월의 싸움에서 살아 남은 자의 죄의식의 일단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죄의식이란 곧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부채 감 일 것이며, 살기 등등한 정치군부의 위세에 굴복한 것에 대한 살아 남은 자의 자책일 것이다. 그러나 5월의 엄청난 폭력을 경험하지 못한 독자가을 부끄러움과 동일하게 생각하다 끝내 미쳐 버리는 (상주)의 그 깊고 깊은 고뇌를 잘 모를 것이며, 아울러 그 고뇌의 밑바탕에 인간의 인간다움을 박탈하는 무리들에 대한 항의가 깔려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쨌건 「봄날」은 (명부)에 대한 (상주)의 죄의식처럼 산 자의 죽은 자에 대한 죄의식만 부각시키고 있질 않다. 이 작품은 또한5월로 마음이 부서지고 찢겨진 (상주)의 정신적 방황과 파탄을 통해 5월을 잊어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싶은 사람들을 집요하게 심문한다. 5월의 악몽을 잊지 못하는 네 이웃이 많은데도 그대는 정녕 5월을 쉽게 잊을 수 있느냐고. 5월이 지향했던 세계가 요원한 마당에도 어두운 과거를 망각하고 일상의 질서에 안주하는 것이 온당할 수 있느냐고. 5월의 진실이 철저히 밝혀지고 그 숭고한 의미가 공인될 때까지는 분명 그런 심문이 유효할 것이다.
5월이 지금 이곳의 사람들의 의식과 일상적인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임철우가 여러 단편을 통해 면밀하게 탐구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런 점을 류양선은 장편소설 『이 사람은 누구인가』를 통해 탐구하고 있다.
이 소설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얼마 전에야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지만 본래 1983년 봄에 씌어지기 시작해서 19%년 가을에 완결되었으며 류양선이 편집동인으로 참아하고 있던 부정기간행물 」문학의 시대) 창간호에서부터 종 간호까지 계속 연재되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문학의 시대)의 정신과 행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내력을 지닌 이 소설은 또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도록 유려한 문체로 직조되어 있으며, 이야기를 독특할 방법으로 전달하고 있어 이래저래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하다. 게다가 이 소설은 방대한 규모로 광주항쟁을 다룬 최초의 장편소설이라서 문학사적 차원예서도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작품이다.
이 소설은 광주항쟁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특히 지식인 · 예술인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에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집중적으로 탐문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이 소설은 5월 항쟁 발발 이후 어느 날 갑자기 조각가 한빈이 잠적하는 사건을 제시한다. 이어서 이 소설은 그 꼭 친구 영성이 그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며 겪은 일을 상세히 수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잠적한 한빈을 추적하는 이야기로써 그 잠적이 갖는 의미를 밝히고자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소설이 이청준의 소설처럼 한번의 잠적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사건을 상당히 끈질기게 투시하고 있는 점을 우리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런 집요한 투시는 긴말할 것 없이 광주항쟁이 깨어 있는 정신의 소유자들에게 얼마나 큰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유발하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식적 노력의 소산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소설에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뻔뻔스런 작태와 언어로 미화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맞아,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럽고 싸우지 못하는 것이 괴로운 사람들의 심리와 정신을 아프게 읽을 수 있다. 스스로 불구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한빈의 정신적 질병이야말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앓았던 병이 아니겠는가. 이 소설의 행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비장한 분위기도 그런 부끄러움과 무력감에서 비롯된 질병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를 거듭 환기시킨다.
윤정모의 「밤길」은 어떠한가. 이 짤막한 소설에서는 두 인물이 움직이고 있다. 광주항쟁 때 수습위원으로 활동했던 김신부와 시민 군으로 싸움에 나섰던 요섭이 그들이다. 이들은 그 항쟁의 거점이었던 도청이 진압군의 수중에 들어가기 직전에 그곳을 빠져 나온다. 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곳에서 도망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도청에 잔류하던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항쟁의 주체들이 (불순분자도 폭도도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주기 위해 그곳을 빠져 나온 것이다. 그 후 이들의 몸은 항쟁의 주역들 곁을 떠났지만 이들의 마음은 그들 곁을 떠나지 못한다. 김신부는 항쟁의 현장에 대한 회상에 빠지고 요섭은 자신의 탈출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를 괴롭게 질문한다. 즉 김신부는 시체안치소의 처참한 풍경, 외신기자의 행동, 택시기사들의 차량돌진, 그리고 수습위원으로서 동분서주하던 일 따위를 회상하고, (무기 반납을 강요받을 때, 다시금 진압군이 좁혀 올 때 劣은 추장처럼) (피가 모자란다면, 지금까지 흘린 그 피로도 충분치 않다면, 그렇다면 이젠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열심히 싸웠던 요섭은 동지들을 두고 도망친 자신이 비경자라는 생각에 빠진다. 그러나 김신부는 요섭의 그런 번 민을 읽고 요섭을 이렇게 위무 한다.
요섭아, 우리도 지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있는 게 아니란다. 거기에도 장벽은 있다. 그 장벽을 깨뜨려 달라는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거야. 우린 그걸 해내야 돼, 비록 이 밤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해도 이젠 서둘러야 한다.
이처럼 이 소설은 5월의 주요장면을 군데군데 배치하면서 5월의 완성을 위해 우리 모두가 정진해야 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따라서 최원식이 「광주항쟁의 소설화」(<창작과 비평) 1988 ·여름)라는 글에서 이 소설에 대해 몇 가지 유감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단편소설의 좁은 공간에서 이만한 이야기가 농축되기는 실상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 소설에 대한 여러 사람의 호평은 여전히 정당하다.
윤정모의 「밤길」 이후 1987년 가을에 광주항쟁소설집 『일어서는 땅』이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5월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룬 11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모두 신작은 아니다. 개중에는 이미 발표되었던 작품도 들어 있다. 아무튼 그 11편의 작품 중에서, 백낙청의 「오늘의 민족문학과 민족운동」(』창작과 비평P 1988 ·봄)이나 최원식의 앞의 글이 다같이 그랬듯이, 여기서도 두 신인의 작품, 즉 박호재의 「다시 그 거리에서면」과 정도상의 「십오방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박호재의 「다시 그 거리에 서면」의 시간적 배경은 광주민중의 무장투 쟁의 승리로 광주가 해방된 날에서부터 계엄군의 광주장악 직후가지의 약 1주일간이다. 그 1주일 동안 광주의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 이 소설의주요 관심거리이다. 그 가정의 구성원은 어머니, 지숙, 형석, 형수인데, 그 중 이 소설을 이끌고 있는 지속은, 홀어머니와 사는 집의 맏딸답게(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려는 욕구에 젖어 있다. 그런 그녀에게 매사를 숙연히 받아들이곤 하는 그녀의 막내 동생 형수는 믿음의 대상이지만, 집안일 에는 냉담한 채 학생운동의 깊은 곳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동생 형석은 늘 불안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녀는 형석이 제 인생을 추스릴 줄 아는 평범한 젊은이가 되길 원하지만 그때마다 형석은 (지금의 사회가 안고 있는 그 모순에 대한 참된 반성과 회의가 행동으로 연계되지 않으면 닥쳐올 재난의 모습은 우리들 모두의 존재를 짐승의 목숨처럼 파멸케 해버리는 역사적인 위기가 도래할 수도 있어요)란 말로 오히려 그녀를 설득한다. 그런 형석은 항쟁의 주역으로 뛰어들고, 형수는 항쟁을 진압하는 군대를 보좌하는 방위 병으로 항쟁에 관여한다. 이러한 기막힌 상황에서 축은 이루 다 형언키 어려운 불안과 두려움으로 그들의 소식을 기다리지만, 그들은 한동안 아무 연락도 없다가 항쟁의 불길이 계엄군에 의해 꺼진 뒤에서야 소식을 보낸다. 형석은 기사회생해 겨우 애인의 집으로 탈주했고 형수는 급박한 상황의 전개과정에서 광주의 외곽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숙은 두 동생의 생존에 일단 안도하지만, 곧이어 광주민중을 (화려하게) 살육한 계엄군과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무리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적개심)을 갖는다. 요컨대 「다시 그 거리에서면」은 흠잡을 데 없이 정교하게 짜여진 데다가 5월의 현장에서 한 가족이 겪은 비극적인 사건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특히 지숙의 의식의 변모를 통해 5월에 대한 시각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도상의 「십오방이야기」는 5월의 후일담으로서 백낙청의 지적처럼 5 월 항쟁 때 공수부대의 일원이던 김만복 같은 (말단의 가해자 역시 궁극적인 피해자)라는 날카로운 시각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시각이 그다지 잘 삼투한 작품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단편소설은 운동권대학생 김원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옥중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 인물이 옥중에서 만나 연대하는 결말도 작가의 관념 이상의 것이 되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 정도로 어색하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잠재력을 타진하기 위해 이 소설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무방하나 이 소설의 성취도를 확인하기 위해 이 소설의 문을 두드릴 필요가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5월을 그린 소설 중에서 홍희담의 중편 「깃발」만큼 화제의 중심을 차지했던 작품은 없다. 이곳에서 그 작품에 관한 몇 마디 발언을 더 보태도 그것이 새로운 소리가 못 될 정도로 뭇 사람의 이목이 그 작품에 집중했었다. 가령, 이 중편이 수록된 (창작과 비평)(1988·봄)의 편집인은 그것이 (광주의 )월을 민중의 시각으로 보는 데로 크게 진일보한 뜻깊은 수확)이라고 했고, 최원식은 앞의 글에서 (노동자의 눈으로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침통하게 추적하고 있는 이 작품은 여러모로 획기적)이라고 말했다. 윤지관은 「광주항쟁의 도덕적 의미」(『민족현실파 문학비평」)에서 (일정 규모를 갖춘 의미 있는 작품으로는 광주항쟁의 민중적 성격을 차분하게 성찰한 홍희담의 중편 「깃발」 정도가 아닐까 싶다)고 했으며, 김사인은 재 수록 잡지인 <오늘의 소설)(1988 상반기)에서 (광주항쟁의 형상화는 즉자적 체험의 서술이나 그 참담함의 묘사차원을 넘어 탐구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문학적 작업에 의해 전면적 진실에 육박해 가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깃발」은 그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분명한 선을 그어 보여주는 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평가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깃발」은 5월 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음이 틀림없다. 이 소설이 개척한 그 독보적인 영역을 정리하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 작품은 광주항쟁을 거기에 몸소 참여했던 사람의 눈으로 관찰 기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깃발」에서는 그 항쟁을 먼발치서 본 사람의 추상적인 괴로움, 자책감, 울분, 경악 등이 배제된다. 그 대신에 그 싸움을 이끌고 가던 당사자들의 싱싱한 언행이 풍성하게 담겨져 있다. 중국 집 배달원이나 여자 노동자들의 활기와 전의가 이를 잘 반증하고 있다. 그리고 「깃발」은 항쟁의 중심에 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항쟁의 핵심적 경과를 세밀하게, 그리고 실감나게 조형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막연한 상상에 의한 5월의 묘사가 지닌 허황함을 이 소설은 피할 수 있었다. 둘째, 이 소설은 노동자의 눈으로 5 월을 해석하고 있다. 그런 해석은 신선하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는 것은 5월에 대한 그 같은 해석이 5훨의 한 부분을 잘 읽었다는 의미뿐 아니라 참모습을 왜곡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노동 자 ·도시빈민이 항쟁의 후반부에서 郊렬하게 싸웠다는 사실과 그 결과 그들이 산화한 열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깃발」의 그런 시각은 도출된 것이리라. 그러나 그런 시각이 노동자 ·도시빈민의 혁명 성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윤강일에 대한 경멸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에 크게 활약했던 대학생이나 지식인을 매도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에 입각한 관점으로서는 훌륭할지 몰라도 5월의 총체적 모습과 의미를 밝히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당시에 광주민중의 절대다수가 노동자 ·도시빈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들의 활약이 다른 계급의 활약에 비해 월등하다고 단정할 수 없고 또 그들이 항쟁초기에 미온적인 활동을 펼쳤다는 것을 「깃발」도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노동자 ·도시빈민의 자랑이 될 수야 없지 않은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특히, 실패한 항쟁의 책임을 그 싸움에 참여한 어느 누구에게 더 많이 지우는 것은 광주민중의 명예를 훼손하면 훼손했지 강화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5월 항쟁은 노동자계급만의 항쟁이 아닌 광주민중 전체의 항쟁이라는 것이다.
그밖에, 5월의 생생한 움직임을 다루지는 않더라도 5월이 이 시대의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다룬 소설들은 왜 많다. 그것들에 대한 검토는 숙제로 남긴다. (<실천문학> 1990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