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그때 광주여자들. 김준태(5월과 문학, 남풍, 1988. 8)
본문
그때 광주 여자들
일체의 무상(無常)한 것은
한낱 비유(比喩)일 뿐,
미칠 수 없는 것이
여기서는 실현되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여기서는 실현되었네
영원한 여성 (女性)은
우리들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린다.
- 괴테의『파우스트』에서
80년 5월의 광주는 비극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슬픔의 순간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어제의 커다란 아픔 위에서 딛고 일어서야 할 단계에 이르렀을 때, 항상 느끼는 그런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아픔과 슬플 속에서 그래도 아름답게 살려 했던 사람들의 발자국이다. 그 발자국은 때로는 비탈길을 향해 찍혀 있기도 하고, 때로는 이름 모를 꽃향기가 물씬 풍겨 오는 그런 호젓한 산길에 나 있기도 한다. 뿐이랴, 또 어떤 사람들의 발자국은 때로는 먼 바닷가로나 아니면 하늘로 향해 물들어 나 있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발자국들의 소리와 흔적을 더듬어 가다보면 꼭 빠뜨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숱한 남자들 말고도 또 누구일까, 아마 그들은 먼 옛날부터 우리 인간들에게 줄기차게 젖꼭지를 물려주었던 여자들 그리고 어머니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칭 광주사태가 있은 지 5년만에, 그날의 광주로 내려가 봤다. 그리고 물결치는 차량들 속에서, 혹은 집들과 사람들 속에서 자신들의 아이·를 곱게 예쁘게 키우며 살아가는 여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정말 우리가 만난 여자들은 공교롭게도 모두가 어머니가 된 여자들이었다. 당시를 살았던 그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가면서 우리는 몇 잔의 보리차로 목을 축이기 시작했다.
10일간의 어머니들
80년 5월, 어머니들에게 있어서 광주는 안타까움 그것이었다. 집안에 아이들이 있는 어머니들은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작은 꼬마들이 있는 집은 집대로, 중학생을 둔 집들은 집대로 모두가 걱정이었다. 그것은 시위가 광주 시내 전역에 걸쳐서 있었고 게다가 공포의총격전 등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꼬마 애들을 두었던 집에서는 아이들이 길거리나, 공터, 또는 골목길에서조차 놀지 못한 게 했다. 왜냐하면 간헐적으로 날아다니는 유탄에 행여 자기 집 애들이 상처를 입지나 않을까 하는 그런 염려에서였다.
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 사이의 광주는 숫제 무덥고 지루한, 가슴 조임의 나날이었다. 더욱이 아이들에게 있어서 밤은 길었다.
해가 송정리 쪽 서산으로 떨어지기도 무섭게, 어머니들은 골목에 옹기종기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들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5월 21일 이후부터는 특히나 그랬다. 그리고 아홉시가 되기도 전에 전등불을 빨리 꺼버리고 아이들을 빨리빨리 잠재우려고 어머니들은 안간힘을 다 썼다 어린이들이 잠든 다음 어떤 어머니들은 시집을 때 해온 두꺼운 겨울 이불을 장롱에서 꺼내어 창문을 가리는 것이 일이었다. 운이 없으면 어디서 날아올지도 모르는 유탄에 피해를 입을지 어떨지 몰라 그러는 것이었으리라.
답답하고 가슴이 깊이깊이 타 들어가는 조마조마함 속에서, 광주의 여름밤은 '한 여름밤의 그 어떤 꿈'도 없었다. 특히 전남대학교 근처나 조선대학교 근처, 그리고 금남로나 충장로 일대에 살던 어머니들은 그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시위가 끊임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보호하느라고 애간장이 다 탔다고 한다.
하기야 광주 외곽지대에도 총격전이 간혹 있어서, 당시 광주의 어머니들은 연일 "하느님, 하느님, 보살펴 주소서!"라고 마음속으로 또는 큰 소리로 기도를 올렸다고 회상한다.
B 어머니의 경우
B라는 어머니의 경우는 이렇다. 그녀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친정 집이 있는 순천으로 피난을 갔다.
5월 19일이었다. 그날만 하더라도 겨우 순천으로 가는 버스 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에는 아무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집안에 남은 것은 그녀가 시집 온 이후 틈틈이 사들였던 정든 살림 도구들, 그리고 남편의 수 백 권의 책들‥‥‥ 그녀는 오직 자식들만을 데리고 순천으로 내려가면서 복 바쳐 오르는 슬픔을 눈물로 밖에 달랠 수 없었다.
그녀는 광주 사태가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지 이틀 후엔가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녀가 염려한 것과 달리 집안 살림은 그대로 고스란히 기다리고 있었다.
화단에는 남편이 좋아해서 사다 들여놓은 두어 종류의 팬지꽃이 소리 없이 피어 있었다. 팬지꽃! 그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어딘가에서 피신을 하고 있는 남편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그 팬지꽃을 들여다보았다.
비로소 그녀는 이웃집에서 설거지하는 딸가닥 소리 같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연고지를 찾아서 시골로 고향으로 피난을 갔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광주 YWCA 주변 혹은 도청 안 여자들
5월 19일 이후부터 광주 YWCA주변엔 많은 여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물론 평상시에도 이곳은 Y관계 회원들이 자주 찾는 곳일 뿐만 아니라,가령 무슨 무슨 돕기 바자회 등이 자주 열리던 곳이어서 주로 여자들의 만남의 장소로서도 유명한 곳이다.
광주 YWCA는 도청에서 1백m거리 안팎에 위치한 곳이라, 당시 시위가 급박하게 돌아간 때는 더욱 그랬다.
5월 17일 이른바 계엄 확대 조치 이후, 남편들의 행방에 관한 소식이 너 무도 궁금하고 가슴 타서 여인네들은 자연 Y부근에 모이거나 서성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들 여인네들은 놀라운 참상 등을 더러 목격한 이후 어느새 '무언가 도울 일'을 찾으려는 자세가 생겼다.
5월·21일 이후부터 여성들의 활동이 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 여인네들은 역시 남자들과는 대조적으로 '하는 일'들이 '가정적 분위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하는 일을 빨리 찾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이때 K부인 등이 아무래도 대졸 여인답게 일감을 선별해 주기도 했다.
Y부근으로 달려온 여인네들의 계층을 보면 여고생들, 근로자 어머니들, 여대생들, 가정주부들, 술집 호스티스 들이었다. Y에는 하루 평균 40∼50명 정도의 여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부지런히 일을 했다. 그녀들이 하는 일은 그러니까 '헌혈 반', '취사반', '흥보 반', '리본 반', '방송 반', '헌금 반'이었다.
헌혈 반은 중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수혈을 하도록 시민들에게 권장하는 것이 주임무였으며, 취사반은 사태 기간 중 식사를 놓친 남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자 손수 가마솥 따위를 설치해 놓고 밥을 짓는 팀이었다. 그리고 홍보 반 은 당시 상황으로서 라디오나 TV, 또는 신문들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온갖 초조함과 궁금증에 시달리고 있는 시민들에게 그때그때 터져 나오는 '새 소식'을 대자보 등을 통하여 전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리본 반은 당시 죽어 간 혼들을 달래기 위해 검은 리본을 만들어서 시민들의 가슴에 달도록 주선하는 일이었다. 방송 반은 시위가 있을 때 남자들과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 예컨대 가두 방송따위를 통해 상황을 전하는 일을 담당했다.
헌금 반은 취사반이나 홍보 반이나 리본반 등에서 필요한 금액을 마련해내기 위해 주로 가두에서 즉석 헌금을 시도하였다. 그러면서 사태 기간 중 남자들의 뒷바라지를 했는데, Y부근의 여자들이 더욱 적극적이었고 열성적이었다 한다.
계엄군이 도청을 비운 5월 21일 5시 이후부터는 꼭 Y부근의 여인네들뿐만 아니라 서로 인적 사항을 잘 모르는 여성들이 도청 안에 칩거하면서 취사를 하기도 했다.
5월 25일 다른 부류의 여성팀말고도 여고생 신분으로 밥을 짓는 일에 참여한 학생들이 30여명 있었는데, 이들은 21일 저녁부터 26일 밤까지 계속 밥짓는 일에 참여했다 한다.
그리고 당시 시위대들이 도청 안으로 들어간 다음부터는 소위 '출입증'이 배포되기도 했는데 이를 발급하는 업무를 했던 C여대생의 활동도 눈에 띄었다.
도청 앞 상무관에서도 시위 도중 쑴을 거둔 사람들의 시신이 안치되어있었다. 이 시신들과 함께 밤을 새운 술집 호스티스의 감동 어린 얘기는 휴머니티를 불러일으킨다.
이들 두어 명의 호스티스들은 여름철 무더위에 녹아 내리는 연고 미확인의 시신들에게 더러는 염의 를 해주고 더러는 피묻은 얼굴을 닦아주면서 밤을 새운 여인들이다. 두어 명의 호스티스는 차라리 아들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와 같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 우리들이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많이 불러 보았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그 어휘, 어떠니! 우주만상의 의미가 어쩌면 한 곳에 집약되어 있는 어머니! 그날만은 술집 호스티스도 어머니가 되어 있었을까‥‥‥‥
광천동 '들불 야학 팀'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대학생 신분인데 그 중 여대생이 다수를 이룬다. 그녀들은 가정 형편상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에 다니는 나이 어린 근로자들을 상대로 야간에 중등학교 이수 과정을 가르치는 팀이었다.
이들 여대생들은 사태가 비극으로 치닫자 YWCA나 도청 안을 드나들면서 역시 앞서 말한 예의 취사, 홍보, 리본 제작을 도왔다. 이 무렵 '광대 팀'의 여성 부 활동도 눈에 띄었다. 이들 여자들은 C대 출신의 」선생, L양, L엄마, 」양 등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하는 일이 역시 여성들로서 할 수 있는 일로 생각된 취사, 헌금, 조의를 표시하는 리본 제작 따위였다.
광대팀은 80년 5월 사태 전에 광주 지방에서 마당극운동을 벌이던, 이름하여 문화 운동팀의 회원들이다. 이들은 판소리나 남도 민요를 틈틈이 익히면서 요즘에 항용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민중 문학의 생활화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던 젊은 패들이다.
그 회원들은 남녀 각각 반반씩 정도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태가 발생하고 남자 회원들이 예비검거 내지는 피신 중일 때, 이들 여성 광대멤버들이 앞서 말한 취사, 홍보활동따위에 뛰어든 것이다.
YWCA측 여자들, 광대 팀 여자들, 들불 야학 팀 여자들 이외에 광주에서 일부 알려진 모임이 있다. 그것은 '송백회'다. 송백회는 78년 12월 결성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론 이 모'임은 여성 회원들이 1백퍼센트였다.
이 송백회는 유신체제 기간 중에 숱하게 고생한 옥중의 남편들을 위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결성된 모임이었다. 남편들이 옥살이를 하자, 우연히 알게 된 사람들끼리 맺어진 이 모임은,처음 만난 장소가 대부분 교도소 면회 장소가 아니면 법정 안의 방청석 등이었다 한다.
이들 여인네들은 결국 옥바라지를 하다 보니까, 자연 서로를 위로하게 되었고 더러는 형제애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송백회는 옥바라지를 하는 일이 주 활동이었고, 그러던 중에 감옥 안에 영치금이나 옷 등등을 넣기 위해 나중에는 바자회 활동을 한고 서로간에 감옥 소식을 교환했다.
나의 남편이 언제나 풀릴까 하는 소식 등을 듣기 위해 모임 같은 것을 가졌는데, 초대 회장으론 강신석 목사(광주무진교회)의 부인이었다. 회원은 보통 30명에서 40여명의 구속 자 부인들이었다. 송백회의 회원으로 주부가 대종을 이루었고 나머지는 여교사와 미혼 여성들이었다.
이들 송백회 여성 회원들이 말하자면 광주사태 기간 중 여성 활동 부에 참여를 시도한 것이다. 예컨대 송백회 회원 중엔 남편들이 5·17이후 또 예비검거되었거나 잠시 집을 비운 자가 더러 있었는지라 서로 소식 정보를 얻기 위해 만나다가 예의 취사반 등에 들어간 것이다.
이 밖에 광주 지방 카톨릭 노동 청년회의 '사치문제 연구회'소속의 여성 팀도 몇몇은 사태 중에 적극 참여, 취사와 홍보 활동에 열성을 띠었다. 그리고 속칭 '무등산 타잔'사건으로 유명했다가 나중에 사형 선고를 받은 박흥숙의 어머니 같은 여인네가 밥을 해서 머리에 이고 도청까지 왔던 얘기는 오늘까지도 얘기되고 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여인들이 밥을 해서 나르던 광경은 5월 20일, 5월 21일 경우 시내 곳곳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J 선생의 경우
J 선생은 여선생이다. 그녀는 예비 검거된 남편의 소식을 알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녀는 YWCA와, 5월 22일 이후는 도청 안을 자주 드나들면서 남편한테 좋은 일이 있기를 빌었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사태 기간 중 도청 안에서 식기를 닦는 일도 했고 어느 때는 공포와 무서움 속에서 방을 지새기도 했다. 그리고 검은 리본 제작도 했다.
언젠가 대인동 시장을 가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조의를 표시하는 다량의 검은 리본을 만들기 위해 대인동 포목상회를 들어갔더니 그 가게 아주머니가"그냥 돈 안 주어도 좋아요"하면서 리본을 같이 만들어 주기까지 했을 때, 눈물이 쏟아져 나와 어쩔 줄 몰랐다. 그 장면을 어떻게 보았는지 미국의ABC 방송 기자가 사진을 찍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가냘픈 여성으로서 당시 시체가 안치되었던 도청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취사도 하고, 리본도 만들고‥‥‥‥그러다가 더러는 총기 오발 사고를 터뜨리는 어린 학생들 곁에서 온몸이 질겁할 때도 경험하였다.
그녀는 5월 27일 이후 5유치장을 거쳐 나중에 법원으로 넘겨졌다. 풀려 나와 지금은 복직을 했다. 그녀가 가장 슬펐던 칠은 시위 군중들이 흩어지면서 남겨 놓은 신발더미들이 찻길에 2∼3m 간격으로 쌓여 있음을 보았던 때라 한다.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장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광주의 인권 운동측에선 조아라 장로를 이름하여 '광주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자상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기독교인일뿐만 아니라 게으르지 가 않다. 그래서 그녀의 주변엔 어른들뿐 아니라 젊은 대학생들이 항상 따른다.
그녀는 젊은애들한테는 영락없이 어머니였다. 나이로 봐서는 '광주의 할머니'라는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그러나 웬일인지 그 표현은 오히려 어색하다. 아직껏 광주의 인권 문제에 관계하고 있는 어른들이나 젊은이들이 그녀를 '할머니'라고 불러 본 일은 한 번도 없으리라 어쨌든 그녀는 '광주의 어머니'라는 호칭이 더없이 알맞다고 주변의 사람들은 말한다.
조아라 장로는 올해 74세. 광주 양링동에 8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기독교계 학교인 수피아 여고 12회 출신이다.
1931년에 수피아 여고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YWCA일에 관계한지 40여 년이 된다. 그녀는 1945년부터 현재 1985년까지 오로지 기독교인으로서 일생을 몸바쳐 왔다. 그녀의 일생은 광주 YWCA의 '산 역사'일 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광주 양심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녀는 광주 엠네스티 '국제 사면 위원회'의 고문이기도 하였으며, 오늘날도 실질적으로 광주 기독교계에 있어서 정신적 흑은 상징적 거목이다.
그녀는 1973년부터 YWCA 회장직을 맡아 오다가 지금은 후임으로 이애 신 총무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5월 19일, 아침 조아라 장로(당시 회장)는 이애신 총무와 함께 서울행 고속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녀 일행은 에스터 박(기독교 연맹 총무)이 미국에 돌아가게 되어 환송하기 위해서였다. 광주는 사태가 긴박했고 특히 도청과 가까운 Y주변은 더욱 긴장감이 감돌고 있을 때였지만 그녀는 그 동안 한국 기독교에 헌신을 해온 에스터 박을 위해, 환송 인사차 상경한 것이었다.
그러나 광주의 상황이 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 들어오자 서울에 올라간 조아라 장로 일행은 끝내 강남 터미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울의 교우들은 백 번 만류를 했다. 지금 광주로 들어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때 이성학 장로도 만났다. 물론 그 일행은 서울에서 만난 교우들과 더불어 광주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서울에서 놔주지 않으려 하는 교우들의 간곡한 손을 뿌리치고 5월 20일 임시 정류장인 공설운동장에 내린 시간이 11시 30달, 그리고 다음 날인 5월21일. 그 때 조아라 장로는 YWCA 앞에서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아, 평화운동을 한다는 우리 Y 안에‥‥‥: 조아라 장로는 숨돌릴 틈이 없이 돌아가고 있음을 보았다.
그후 서로 연락이 되어 5월 22일 남 동 성당에서 신 ·구교 지도자들은 모임을 가졌다. 사태 수습을 어떻게 할까, 그것이 주제였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무슨 강구책이 나오지 않았다. 당시 전남 도지사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도지사는 마침 어머니 상을 입어 부재중이었다. 그래 부지사실로 연락을 하여 이윽고 정시채 부지사(현 민정당원 )를 찾아가 만났다. 사태가 빨리 호전되고 광주에 평화를 찾는 방법을 모색 해 봤다. 별다른 결과가 없었다.
도청 안이나 밖은 그럴 만한 분위기가 이루어져 있지 않았었다. 그전에 그러니까, 서울에서 내려온 당일인 5월 20일 밤 조아라 장로는 이애신 총무와 함께 여러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평화 강구책을 논의했다. 그러면서 하늘을 보고 기도하며 "헌혈합시다! "를 외치기도 했다 한다.
조아라 장로는 남동 성당에 또 들러 신 ·구 종교인들에게 소위 '종교인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자고 토론을 거듭했다. 당시 도청 주변엔 제 1차, 제 2차, 제 3차, 수습대책 위원회의 회의가 있었는데 의견이 분분하기만 했었다. 그런 와중에도 조아라 장로는 수습 대책 위원회가 원만한 타협을 빨리 보아서 하루 빨리 광주 시민이 안심하도록 방송을 해주고 공중 삐라를 통해 시민 안정을 기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때 수습 대책 위원들은 그 나름대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젊은 층들의 무장 해제를 시키려고 했다. 이 설득을 받아들인 측들 중엔 갱생원 젊은이들도 끼어 있었다.
조아라 장로는 정말 거의 매일 사태의 수습을 위해 교우들과 고통을 함께 했다. 당시로서는 시내 버스도 운행이 정지되었고 택시도 없었는지라 오직 먼길을 걸어서 다녔다. 69세의 노구를, 그것도 여자인 몸으로서 하루에 8km 이상을 걸어 다녔다.
광주 YWCA에서 장로 집까지는 거리가 4km, 그리고 YWCA에서 남동 성당까지는 1.5km 이상이다. 그리고 양림동 Y회관까지도 3~인데 그런 곳을 쉴 틈이 없이 걸었다. 머리에 백발을 허옇게 인 조아라 장로, 그녀는 어느새 하느님의 자식이요 딸이었을까‥‥‥‥
수습 대책 위원끼리 격한 언쟁이 있었을 때는 "비극 속의 비극을 본 것 같다. 왜 너희들이 서로 싸우느냐? 서로 돕고 협조하는 심정으로 얘기하자"라고 울먹였다.
조 장로는 5월 25일 한빛 교회에서 있었던 쌀 모금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했다. 이날 기도회에는 신교 목사들이 앞장을 서서 1백 30여 만 원이 모금되었다. 5월 25일 밤, 빵 음료수 등을 사서 도청 안에 있었던 0부인에게 전해 주었다. 뭔가 수습을 위해 모여들었던 도청 안의 목사들도 하나 둘 보이지 않았다. 아마 가정으로 돌아갔으리라.
밤하늘엔 예광탄이 날으는 것이 보였다. 핑, 피-잉! 5월 26일 새벽, 도청을 출발하여 것 등을 넘어 저 '역사의 행진'이 있었다. 그것은 주로 종교인들이나 세칭 민주 인사로 말해지는 어른들의 수습을 위한 행진이 있었다. 거리는 도청에서 상무대 쪽 공단 입구 너머까지 3k내지는 4k지점까지, 홍남순 변호사, 이기흥 변호사, 이영생 (YWCA측), 김천배 목사, 이성학 장로, 조비오 신부, 김성룡 신부, 윤영규 선생, 위인백 변호사 사무장, 조봉환씨, 장사문씨, 장00목사 등 18명이 그들이었고 그들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아라 장로는 26일 오전 '장례 위원회' 결성에 참가하였다. 그날 역시 그 노구로 4km 이상을 걸어나와 참가한 것이다. 사태 중에 죽어간 사람들을 시민 장으로 할 것이냐 도민 장으로 할 것이냐를 논의했고, 그때 조아라 장로는 당시의 광주시장이었던 구용상씨와 시신 처리문제 등에 관해서 논의했다.
그때 나온 얘기가 많았지만 그 중에서 29일에 장례를 치르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여름철인지라 시신 처리가 급박했었다. 도청 밖에서는 '봉선화''아리랑' 등의 노래가 구슬프게 들려 오고 있었다.
조아라 장로는 26일 밤 뒤늦게 도청을 빠져 나와 학 운동 집으로 향했다. 도청 앞거리는 쥐 발자국 소리도 들려 올만큼 무시무시하게 적막했다. 또 먼 곳에서 예광탄이 날고, 총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조아라 장로는80년 5월 26일 밤 도청에서 학 운동 먼 집까지 걸으면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빨리 오기를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랐다.
5월 28일 아침. 그 날도 걸어서 YWCA로 갔다. 조아라 장로는 YWCA의문을 들어서는 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리고 잠시 정신을 차린 후에 Y청소부 아줌마에게 청소를 시켰다. 5월 29일 아침. 조아라 장로는 칫솔, 치약이 담긴 핸드백을 간단히 챙긴 다음 어떤 건강한 젊은이의 보호를 받으며 집 대문을 나왔다. 여름인데도 바라다 보이는 먼 산들이 그때는 가을 아침의 그 풍경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이후 조아라 장로와 이애신 총무(현재는 회장)는 다시 풀려 나와 지금은 광주고속 터미널 앞으로 옮겨진, 신안동 소재 YWCA 회관에 드나들고 있다. 올해 74세인데 어디에서 그런 건강이 치 솟아나는지 거의 매일 출근을 한다. 그러나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두 눈은 어느덧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주름살을 힘겹게 밀어내는 듯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뛰어다니는 어머니들
광주사태에 관련된 사람들에 대하여 1심(80년 9월 말), 2심(80년 11월말), 3심(81년 3월 31일)이 있었다. 1심과 2심은 상무대 안에 임시 설치되었던 계엄사에서 있었다. 1 심이 있었을 무렵에는 집에 남은 가족들이 저마다 개인별로 면회를 다녔다. 그런 던 중 '구속자 가족회'가 결성을 보았다.
회장에 윤이정씨(홍남순 변호사 부인)였다. 1심 결과 5명이 커다란 중형을 받았다. 사형으로 발표된 자가 5명이었던 것이다. 2심의 결과는 3명이 사형으로 형이 내려졌다. 그러자 사태 관련 구속자 가족들은 각계를 향해 애절한 호소와 협조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당시 구속자 가족 회에 자주 참가하던 여성들이 있다. 윤이정(흥남순 변호사 부인), 이기홍 변호사 부인, 안성례(명노근 교수 부인), 이명자(정동년씨 부인 ), 정현애 (김상윤 부인), 이귀님 (윤영규 교사 부인 ), 노영숙(노준현 학생누나), 나정희 (자개공 윤석루 모), 김경애 (운전기사 박남선 모), 이복실(철공업자 윤재근 모), 장삼남(재수생 박철 모), 김순자(Y신협 참사김영철 부인 ), 선점숙(회사원 이양현 부인 ), 양충실 (운전기사 배용주 부인 ),이영자(윤강옥 부인), 강정엽(인쇄업자 박노정 부인), 김정부(학생 김종배형 ), 선 0 숙(학생, 한상석 모),송용자(학생 송선태 누나),외 여인네들이 남편이나 흑은 동생들의 빠른 석방을 위하여 분주히 뛰었다.
2 심이 끝난 후 구속자 가족들은, 그러니까 특히 남편을 둔 여인네들은 문자 그대로 백방으로 손을 폈다. 그리고 구원의 호소를 올렸다. 이명자, 윤이정, 안성례 여인 등은 윤보선 전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를 만나 "제발, 중형을 면케 하는 데 어른들이 힘써 주 십 사"하고 간청을 올리기도 했다.
그녀들은 신 ·구교의 협조를 빌며 발 벗고 나선 것이다. 특히 이 무렵 광주 카톨릭 '정의 평화위원회'의 협조가 컸다.
구속 자 가족들은 연이어 지학순 원주 주교, 윤공희 광주 주교 등을 찾았다.
그리고 광주 정평의 정바오로 신부와 김어거스틴 간사의 도움 속에서, 전국 일대를 멀다 않고 매일 뛰었다. 전주 대교구, 대전 · 청주 · 수원 · 인천 ·서울 ·대구 왜관 ·부산 ·마산 등 대교구청이 있는 곳은 모두 방문하여 남편들의 조속한 석방을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해달라고 호소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 구속 자 아내들은 보따리마다 가득 석방 운동에 쓰일 서명 유인물을 들고 다녔는데, 로마 교황대사관, 국회 각 인권단체 인사들이 일을 보는 곳이었다. 각 기관에도 그녀들의 쉴 틈 없는 호소문이 날아갔다. 내용은 거의가"남편을 가정으로 보내 주세요"가 몇 줄씩 담겨 있었다 한다.
81년 3월 31일은 대법원 판결이 내리는 날이었다. 사태관련 구속 자 가족들, 그러니까 17명의 부친 네 들은 서울의 명동성당에 모였다. 오후 ·7시 미사가 끝날 무렵이었다. 광주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온 힘으로 올라간 그 여인네들이 마이크를 잡고 "교우 여러분, 잠깐만 앉아 주십시오. 저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다. 여인네들은 명동성당 안의 지하 식당에서 하룻밤, 추기경집무실에서 하룻밤(추기경 집무실은 카톨릭에서 성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지금도 당시를 회상하는 여인네들은 정말 큰 죄를 저질렀다고 술회한다), 3층 휴게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던 것이다.
4월 2일 밤 2시종 깅 추기경이 내려와 기도를 해주었다 찬다. 17명의 부인들이 의자에 앉기를 권했으나 김 추기경은 이들 여인네들과 함께 마룻바닥 위에 앉아 '정말 간절한 기도'를 여인네들의 머리 위에 내려주었다 한다. 여인네들은 객지인 서울에 올라와 난생 처음으로 가까이 듣는 김 추기경의 기도에 너무도 감동되어 숫제 많이 울었다.
"김 추기경 님은 이날 밤 성경 로마서 4장을 읽으면서 기도를 정말, 정말 간절히 해주었다"고 안성례씨 (명노근 교수의 부인)는 당시를 감격적으로 회상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역사 하신다"는 것을 믿었다고 덧붙인다.
성서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공로가 있는 사람이 받는 보수는 자기가 마땅히 받을 품삯을 받는 것이지 결코 선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중략)‥‥‥예수 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로마서 4장 중에서 )
81년 4월 3일. 시간은 오후 5시였다. TV자막에 "정동년, 배용준, 박노정 시정에서 무기로‥‥‥‥가 나타났다. 17명의 부인들은 때마침 곁에 와 계신 김수환 추기경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어 버렸다. 아이를 등에 업은 어떤 구속 자 가족의 부인은 아이가 등에서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울어대는 것이었다. 감격, 감격! 광주에서 천리 길, 머나 먼 서울까지 올라간 구속 자 가족들인 여인네들은 어쩌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두 손을 꽉 잡고 있는 듯한 환희에 젖었다. 이들 여인들은 그날 기차와 버스 편으로 광주로 내려갔다',광주 동쪽에 솟은 무등산이 송정리 쪽을 들어설 때 벌써 다정한 손짓을 하는 듯이 보였다.
82년 12월 24일. 광주사태 관련 구속 자들 모두가 풀려 나왔고 당시 운명을 같이했던 여인들은 지금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 터이다. 제발 그런 아픔과 슬픔이 다시없기를 바라면서‥‥‥ 당시를 회상하는 한 구속 자 가족은 끝으로 이렇게 말해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와 평화가 계속 되어야겠습니다. "
(가정조선, 1985. 7)
일체의 무상(無常)한 것은
한낱 비유(比喩)일 뿐,
미칠 수 없는 것이
여기서는 실현되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여기서는 실현되었네
영원한 여성 (女性)은
우리들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린다.
- 괴테의『파우스트』에서
80년 5월의 광주는 비극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슬픔의 순간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어제의 커다란 아픔 위에서 딛고 일어서야 할 단계에 이르렀을 때, 항상 느끼는 그런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아픔과 슬플 속에서 그래도 아름답게 살려 했던 사람들의 발자국이다. 그 발자국은 때로는 비탈길을 향해 찍혀 있기도 하고, 때로는 이름 모를 꽃향기가 물씬 풍겨 오는 그런 호젓한 산길에 나 있기도 한다. 뿐이랴, 또 어떤 사람들의 발자국은 때로는 먼 바닷가로나 아니면 하늘로 향해 물들어 나 있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발자국들의 소리와 흔적을 더듬어 가다보면 꼭 빠뜨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숱한 남자들 말고도 또 누구일까, 아마 그들은 먼 옛날부터 우리 인간들에게 줄기차게 젖꼭지를 물려주었던 여자들 그리고 어머니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칭 광주사태가 있은 지 5년만에, 그날의 광주로 내려가 봤다. 그리고 물결치는 차량들 속에서, 혹은 집들과 사람들 속에서 자신들의 아이·를 곱게 예쁘게 키우며 살아가는 여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정말 우리가 만난 여자들은 공교롭게도 모두가 어머니가 된 여자들이었다. 당시를 살았던 그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가면서 우리는 몇 잔의 보리차로 목을 축이기 시작했다.
10일간의 어머니들
80년 5월, 어머니들에게 있어서 광주는 안타까움 그것이었다. 집안에 아이들이 있는 어머니들은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작은 꼬마들이 있는 집은 집대로, 중학생을 둔 집들은 집대로 모두가 걱정이었다. 그것은 시위가 광주 시내 전역에 걸쳐서 있었고 게다가 공포의총격전 등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꼬마 애들을 두었던 집에서는 아이들이 길거리나, 공터, 또는 골목길에서조차 놀지 못한 게 했다. 왜냐하면 간헐적으로 날아다니는 유탄에 행여 자기 집 애들이 상처를 입지나 않을까 하는 그런 염려에서였다.
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 사이의 광주는 숫제 무덥고 지루한, 가슴 조임의 나날이었다. 더욱이 아이들에게 있어서 밤은 길었다.
해가 송정리 쪽 서산으로 떨어지기도 무섭게, 어머니들은 골목에 옹기종기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들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5월 21일 이후부터는 특히나 그랬다. 그리고 아홉시가 되기도 전에 전등불을 빨리 꺼버리고 아이들을 빨리빨리 잠재우려고 어머니들은 안간힘을 다 썼다 어린이들이 잠든 다음 어떤 어머니들은 시집을 때 해온 두꺼운 겨울 이불을 장롱에서 꺼내어 창문을 가리는 것이 일이었다. 운이 없으면 어디서 날아올지도 모르는 유탄에 피해를 입을지 어떨지 몰라 그러는 것이었으리라.
답답하고 가슴이 깊이깊이 타 들어가는 조마조마함 속에서, 광주의 여름밤은 '한 여름밤의 그 어떤 꿈'도 없었다. 특히 전남대학교 근처나 조선대학교 근처, 그리고 금남로나 충장로 일대에 살던 어머니들은 그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시위가 끊임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보호하느라고 애간장이 다 탔다고 한다.
하기야 광주 외곽지대에도 총격전이 간혹 있어서, 당시 광주의 어머니들은 연일 "하느님, 하느님, 보살펴 주소서!"라고 마음속으로 또는 큰 소리로 기도를 올렸다고 회상한다.
B 어머니의 경우
B라는 어머니의 경우는 이렇다. 그녀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친정 집이 있는 순천으로 피난을 갔다.
5월 19일이었다. 그날만 하더라도 겨우 순천으로 가는 버스 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에는 아무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집안에 남은 것은 그녀가 시집 온 이후 틈틈이 사들였던 정든 살림 도구들, 그리고 남편의 수 백 권의 책들‥‥‥ 그녀는 오직 자식들만을 데리고 순천으로 내려가면서 복 바쳐 오르는 슬픔을 눈물로 밖에 달랠 수 없었다.
그녀는 광주 사태가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지 이틀 후엔가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녀가 염려한 것과 달리 집안 살림은 그대로 고스란히 기다리고 있었다.
화단에는 남편이 좋아해서 사다 들여놓은 두어 종류의 팬지꽃이 소리 없이 피어 있었다. 팬지꽃! 그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어딘가에서 피신을 하고 있는 남편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그 팬지꽃을 들여다보았다.
비로소 그녀는 이웃집에서 설거지하는 딸가닥 소리 같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연고지를 찾아서 시골로 고향으로 피난을 갔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광주 YWCA 주변 혹은 도청 안 여자들
5월 19일 이후부터 광주 YWCA주변엔 많은 여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물론 평상시에도 이곳은 Y관계 회원들이 자주 찾는 곳일 뿐만 아니라,가령 무슨 무슨 돕기 바자회 등이 자주 열리던 곳이어서 주로 여자들의 만남의 장소로서도 유명한 곳이다.
광주 YWCA는 도청에서 1백m거리 안팎에 위치한 곳이라, 당시 시위가 급박하게 돌아간 때는 더욱 그랬다.
5월 17일 이른바 계엄 확대 조치 이후, 남편들의 행방에 관한 소식이 너 무도 궁금하고 가슴 타서 여인네들은 자연 Y부근에 모이거나 서성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들 여인네들은 놀라운 참상 등을 더러 목격한 이후 어느새 '무언가 도울 일'을 찾으려는 자세가 생겼다.
5월·21일 이후부터 여성들의 활동이 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 여인네들은 역시 남자들과는 대조적으로 '하는 일'들이 '가정적 분위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하는 일을 빨리 찾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이때 K부인 등이 아무래도 대졸 여인답게 일감을 선별해 주기도 했다.
Y부근으로 달려온 여인네들의 계층을 보면 여고생들, 근로자 어머니들, 여대생들, 가정주부들, 술집 호스티스 들이었다. Y에는 하루 평균 40∼50명 정도의 여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부지런히 일을 했다. 그녀들이 하는 일은 그러니까 '헌혈 반', '취사반', '흥보 반', '리본 반', '방송 반', '헌금 반'이었다.
헌혈 반은 중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수혈을 하도록 시민들에게 권장하는 것이 주임무였으며, 취사반은 사태 기간 중 식사를 놓친 남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자 손수 가마솥 따위를 설치해 놓고 밥을 짓는 팀이었다. 그리고 홍보 반 은 당시 상황으로서 라디오나 TV, 또는 신문들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온갖 초조함과 궁금증에 시달리고 있는 시민들에게 그때그때 터져 나오는 '새 소식'을 대자보 등을 통하여 전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리본 반은 당시 죽어 간 혼들을 달래기 위해 검은 리본을 만들어서 시민들의 가슴에 달도록 주선하는 일이었다. 방송 반은 시위가 있을 때 남자들과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 예컨대 가두 방송따위를 통해 상황을 전하는 일을 담당했다.
헌금 반은 취사반이나 홍보 반이나 리본반 등에서 필요한 금액을 마련해내기 위해 주로 가두에서 즉석 헌금을 시도하였다. 그러면서 사태 기간 중 남자들의 뒷바라지를 했는데, Y부근의 여자들이 더욱 적극적이었고 열성적이었다 한다.
계엄군이 도청을 비운 5월 21일 5시 이후부터는 꼭 Y부근의 여인네들뿐만 아니라 서로 인적 사항을 잘 모르는 여성들이 도청 안에 칩거하면서 취사를 하기도 했다.
5월 25일 다른 부류의 여성팀말고도 여고생 신분으로 밥을 짓는 일에 참여한 학생들이 30여명 있었는데, 이들은 21일 저녁부터 26일 밤까지 계속 밥짓는 일에 참여했다 한다.
그리고 당시 시위대들이 도청 안으로 들어간 다음부터는 소위 '출입증'이 배포되기도 했는데 이를 발급하는 업무를 했던 C여대생의 활동도 눈에 띄었다.
도청 앞 상무관에서도 시위 도중 쑴을 거둔 사람들의 시신이 안치되어있었다. 이 시신들과 함께 밤을 새운 술집 호스티스의 감동 어린 얘기는 휴머니티를 불러일으킨다.
이들 두어 명의 호스티스들은 여름철 무더위에 녹아 내리는 연고 미확인의 시신들에게 더러는 염의 를 해주고 더러는 피묻은 얼굴을 닦아주면서 밤을 새운 여인들이다. 두어 명의 호스티스는 차라리 아들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와 같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 우리들이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많이 불러 보았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그 어휘, 어떠니! 우주만상의 의미가 어쩌면 한 곳에 집약되어 있는 어머니! 그날만은 술집 호스티스도 어머니가 되어 있었을까‥‥‥‥
광천동 '들불 야학 팀'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대학생 신분인데 그 중 여대생이 다수를 이룬다. 그녀들은 가정 형편상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에 다니는 나이 어린 근로자들을 상대로 야간에 중등학교 이수 과정을 가르치는 팀이었다.
이들 여대생들은 사태가 비극으로 치닫자 YWCA나 도청 안을 드나들면서 역시 앞서 말한 예의 취사, 홍보, 리본 제작을 도왔다. 이 무렵 '광대 팀'의 여성 부 활동도 눈에 띄었다. 이들 여자들은 C대 출신의 」선생, L양, L엄마, 」양 등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하는 일이 역시 여성들로서 할 수 있는 일로 생각된 취사, 헌금, 조의를 표시하는 리본 제작 따위였다.
광대팀은 80년 5월 사태 전에 광주 지방에서 마당극운동을 벌이던, 이름하여 문화 운동팀의 회원들이다. 이들은 판소리나 남도 민요를 틈틈이 익히면서 요즘에 항용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민중 문학의 생활화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던 젊은 패들이다.
그 회원들은 남녀 각각 반반씩 정도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태가 발생하고 남자 회원들이 예비검거 내지는 피신 중일 때, 이들 여성 광대멤버들이 앞서 말한 취사, 홍보활동따위에 뛰어든 것이다.
YWCA측 여자들, 광대 팀 여자들, 들불 야학 팀 여자들 이외에 광주에서 일부 알려진 모임이 있다. 그것은 '송백회'다. 송백회는 78년 12월 결성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론 이 모'임은 여성 회원들이 1백퍼센트였다.
이 송백회는 유신체제 기간 중에 숱하게 고생한 옥중의 남편들을 위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결성된 모임이었다. 남편들이 옥살이를 하자, 우연히 알게 된 사람들끼리 맺어진 이 모임은,처음 만난 장소가 대부분 교도소 면회 장소가 아니면 법정 안의 방청석 등이었다 한다.
이들 여인네들은 결국 옥바라지를 하다 보니까, 자연 서로를 위로하게 되었고 더러는 형제애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송백회는 옥바라지를 하는 일이 주 활동이었고, 그러던 중에 감옥 안에 영치금이나 옷 등등을 넣기 위해 나중에는 바자회 활동을 한고 서로간에 감옥 소식을 교환했다.
나의 남편이 언제나 풀릴까 하는 소식 등을 듣기 위해 모임 같은 것을 가졌는데, 초대 회장으론 강신석 목사(광주무진교회)의 부인이었다. 회원은 보통 30명에서 40여명의 구속 자 부인들이었다. 송백회의 회원으로 주부가 대종을 이루었고 나머지는 여교사와 미혼 여성들이었다.
이들 송백회 여성 회원들이 말하자면 광주사태 기간 중 여성 활동 부에 참여를 시도한 것이다. 예컨대 송백회 회원 중엔 남편들이 5·17이후 또 예비검거되었거나 잠시 집을 비운 자가 더러 있었는지라 서로 소식 정보를 얻기 위해 만나다가 예의 취사반 등에 들어간 것이다.
이 밖에 광주 지방 카톨릭 노동 청년회의 '사치문제 연구회'소속의 여성 팀도 몇몇은 사태 중에 적극 참여, 취사와 홍보 활동에 열성을 띠었다. 그리고 속칭 '무등산 타잔'사건으로 유명했다가 나중에 사형 선고를 받은 박흥숙의 어머니 같은 여인네가 밥을 해서 머리에 이고 도청까지 왔던 얘기는 오늘까지도 얘기되고 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여인들이 밥을 해서 나르던 광경은 5월 20일, 5월 21일 경우 시내 곳곳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J 선생의 경우
J 선생은 여선생이다. 그녀는 예비 검거된 남편의 소식을 알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녀는 YWCA와, 5월 22일 이후는 도청 안을 자주 드나들면서 남편한테 좋은 일이 있기를 빌었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사태 기간 중 도청 안에서 식기를 닦는 일도 했고 어느 때는 공포와 무서움 속에서 방을 지새기도 했다. 그리고 검은 리본 제작도 했다.
언젠가 대인동 시장을 가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조의를 표시하는 다량의 검은 리본을 만들기 위해 대인동 포목상회를 들어갔더니 그 가게 아주머니가"그냥 돈 안 주어도 좋아요"하면서 리본을 같이 만들어 주기까지 했을 때, 눈물이 쏟아져 나와 어쩔 줄 몰랐다. 그 장면을 어떻게 보았는지 미국의ABC 방송 기자가 사진을 찍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가냘픈 여성으로서 당시 시체가 안치되었던 도청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취사도 하고, 리본도 만들고‥‥‥‥그러다가 더러는 총기 오발 사고를 터뜨리는 어린 학생들 곁에서 온몸이 질겁할 때도 경험하였다.
그녀는 5월 27일 이후 5유치장을 거쳐 나중에 법원으로 넘겨졌다. 풀려 나와 지금은 복직을 했다. 그녀가 가장 슬펐던 칠은 시위 군중들이 흩어지면서 남겨 놓은 신발더미들이 찻길에 2∼3m 간격으로 쌓여 있음을 보았던 때라 한다.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장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광주의 인권 운동측에선 조아라 장로를 이름하여 '광주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자상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기독교인일뿐만 아니라 게으르지 가 않다. 그래서 그녀의 주변엔 어른들뿐 아니라 젊은 대학생들이 항상 따른다.
그녀는 젊은애들한테는 영락없이 어머니였다. 나이로 봐서는 '광주의 할머니'라는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그러나 웬일인지 그 표현은 오히려 어색하다. 아직껏 광주의 인권 문제에 관계하고 있는 어른들이나 젊은이들이 그녀를 '할머니'라고 불러 본 일은 한 번도 없으리라 어쨌든 그녀는 '광주의 어머니'라는 호칭이 더없이 알맞다고 주변의 사람들은 말한다.
조아라 장로는 올해 74세. 광주 양링동에 8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기독교계 학교인 수피아 여고 12회 출신이다.
1931년에 수피아 여고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YWCA일에 관계한지 40여 년이 된다. 그녀는 1945년부터 현재 1985년까지 오로지 기독교인으로서 일생을 몸바쳐 왔다. 그녀의 일생은 광주 YWCA의 '산 역사'일 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광주 양심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녀는 광주 엠네스티 '국제 사면 위원회'의 고문이기도 하였으며, 오늘날도 실질적으로 광주 기독교계에 있어서 정신적 흑은 상징적 거목이다.
그녀는 1973년부터 YWCA 회장직을 맡아 오다가 지금은 후임으로 이애 신 총무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5월 19일, 아침 조아라 장로(당시 회장)는 이애신 총무와 함께 서울행 고속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녀 일행은 에스터 박(기독교 연맹 총무)이 미국에 돌아가게 되어 환송하기 위해서였다. 광주는 사태가 긴박했고 특히 도청과 가까운 Y주변은 더욱 긴장감이 감돌고 있을 때였지만 그녀는 그 동안 한국 기독교에 헌신을 해온 에스터 박을 위해, 환송 인사차 상경한 것이었다.
그러나 광주의 상황이 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 들어오자 서울에 올라간 조아라 장로 일행은 끝내 강남 터미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울의 교우들은 백 번 만류를 했다. 지금 광주로 들어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때 이성학 장로도 만났다. 물론 그 일행은 서울에서 만난 교우들과 더불어 광주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서울에서 놔주지 않으려 하는 교우들의 간곡한 손을 뿌리치고 5월 20일 임시 정류장인 공설운동장에 내린 시간이 11시 30달, 그리고 다음 날인 5월21일. 그 때 조아라 장로는 YWCA 앞에서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아, 평화운동을 한다는 우리 Y 안에‥‥‥: 조아라 장로는 숨돌릴 틈이 없이 돌아가고 있음을 보았다.
그후 서로 연락이 되어 5월 22일 남 동 성당에서 신 ·구교 지도자들은 모임을 가졌다. 사태 수습을 어떻게 할까, 그것이 주제였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무슨 강구책이 나오지 않았다. 당시 전남 도지사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도지사는 마침 어머니 상을 입어 부재중이었다. 그래 부지사실로 연락을 하여 이윽고 정시채 부지사(현 민정당원 )를 찾아가 만났다. 사태가 빨리 호전되고 광주에 평화를 찾는 방법을 모색 해 봤다. 별다른 결과가 없었다.
도청 안이나 밖은 그럴 만한 분위기가 이루어져 있지 않았었다. 그전에 그러니까, 서울에서 내려온 당일인 5월 20일 밤 조아라 장로는 이애신 총무와 함께 여러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평화 강구책을 논의했다. 그러면서 하늘을 보고 기도하며 "헌혈합시다! "를 외치기도 했다 한다.
조아라 장로는 남동 성당에 또 들러 신 ·구 종교인들에게 소위 '종교인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자고 토론을 거듭했다. 당시 도청 주변엔 제 1차, 제 2차, 제 3차, 수습대책 위원회의 회의가 있었는데 의견이 분분하기만 했었다. 그런 와중에도 조아라 장로는 수습 대책 위원회가 원만한 타협을 빨리 보아서 하루 빨리 광주 시민이 안심하도록 방송을 해주고 공중 삐라를 통해 시민 안정을 기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때 수습 대책 위원들은 그 나름대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젊은 층들의 무장 해제를 시키려고 했다. 이 설득을 받아들인 측들 중엔 갱생원 젊은이들도 끼어 있었다.
조아라 장로는 정말 거의 매일 사태의 수습을 위해 교우들과 고통을 함께 했다. 당시로서는 시내 버스도 운행이 정지되었고 택시도 없었는지라 오직 먼길을 걸어서 다녔다. 69세의 노구를, 그것도 여자인 몸으로서 하루에 8km 이상을 걸어 다녔다.
광주 YWCA에서 장로 집까지는 거리가 4km, 그리고 YWCA에서 남동 성당까지는 1.5km 이상이다. 그리고 양림동 Y회관까지도 3~인데 그런 곳을 쉴 틈이 없이 걸었다. 머리에 백발을 허옇게 인 조아라 장로, 그녀는 어느새 하느님의 자식이요 딸이었을까‥‥‥‥
수습 대책 위원끼리 격한 언쟁이 있었을 때는 "비극 속의 비극을 본 것 같다. 왜 너희들이 서로 싸우느냐? 서로 돕고 협조하는 심정으로 얘기하자"라고 울먹였다.
조 장로는 5월 25일 한빛 교회에서 있었던 쌀 모금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했다. 이날 기도회에는 신교 목사들이 앞장을 서서 1백 30여 만 원이 모금되었다. 5월 25일 밤, 빵 음료수 등을 사서 도청 안에 있었던 0부인에게 전해 주었다. 뭔가 수습을 위해 모여들었던 도청 안의 목사들도 하나 둘 보이지 않았다. 아마 가정으로 돌아갔으리라.
밤하늘엔 예광탄이 날으는 것이 보였다. 핑, 피-잉! 5월 26일 새벽, 도청을 출발하여 것 등을 넘어 저 '역사의 행진'이 있었다. 그것은 주로 종교인들이나 세칭 민주 인사로 말해지는 어른들의 수습을 위한 행진이 있었다. 거리는 도청에서 상무대 쪽 공단 입구 너머까지 3k내지는 4k지점까지, 홍남순 변호사, 이기흥 변호사, 이영생 (YWCA측), 김천배 목사, 이성학 장로, 조비오 신부, 김성룡 신부, 윤영규 선생, 위인백 변호사 사무장, 조봉환씨, 장사문씨, 장00목사 등 18명이 그들이었고 그들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아라 장로는 26일 오전 '장례 위원회' 결성에 참가하였다. 그날 역시 그 노구로 4km 이상을 걸어나와 참가한 것이다. 사태 중에 죽어간 사람들을 시민 장으로 할 것이냐 도민 장으로 할 것이냐를 논의했고, 그때 조아라 장로는 당시의 광주시장이었던 구용상씨와 시신 처리문제 등에 관해서 논의했다.
그때 나온 얘기가 많았지만 그 중에서 29일에 장례를 치르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여름철인지라 시신 처리가 급박했었다. 도청 밖에서는 '봉선화''아리랑' 등의 노래가 구슬프게 들려 오고 있었다.
조아라 장로는 26일 밤 뒤늦게 도청을 빠져 나와 학 운동 집으로 향했다. 도청 앞거리는 쥐 발자국 소리도 들려 올만큼 무시무시하게 적막했다. 또 먼 곳에서 예광탄이 날고, 총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조아라 장로는80년 5월 26일 밤 도청에서 학 운동 먼 집까지 걸으면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빨리 오기를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랐다.
5월 28일 아침. 그 날도 걸어서 YWCA로 갔다. 조아라 장로는 YWCA의문을 들어서는 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리고 잠시 정신을 차린 후에 Y청소부 아줌마에게 청소를 시켰다. 5월 29일 아침. 조아라 장로는 칫솔, 치약이 담긴 핸드백을 간단히 챙긴 다음 어떤 건강한 젊은이의 보호를 받으며 집 대문을 나왔다. 여름인데도 바라다 보이는 먼 산들이 그때는 가을 아침의 그 풍경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이후 조아라 장로와 이애신 총무(현재는 회장)는 다시 풀려 나와 지금은 광주고속 터미널 앞으로 옮겨진, 신안동 소재 YWCA 회관에 드나들고 있다. 올해 74세인데 어디에서 그런 건강이 치 솟아나는지 거의 매일 출근을 한다. 그러나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두 눈은 어느덧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주름살을 힘겹게 밀어내는 듯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뛰어다니는 어머니들
광주사태에 관련된 사람들에 대하여 1심(80년 9월 말), 2심(80년 11월말), 3심(81년 3월 31일)이 있었다. 1심과 2심은 상무대 안에 임시 설치되었던 계엄사에서 있었다. 1 심이 있었을 무렵에는 집에 남은 가족들이 저마다 개인별로 면회를 다녔다. 그런 던 중 '구속자 가족회'가 결성을 보았다.
회장에 윤이정씨(홍남순 변호사 부인)였다. 1심 결과 5명이 커다란 중형을 받았다. 사형으로 발표된 자가 5명이었던 것이다. 2심의 결과는 3명이 사형으로 형이 내려졌다. 그러자 사태 관련 구속자 가족들은 각계를 향해 애절한 호소와 협조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당시 구속자 가족 회에 자주 참가하던 여성들이 있다. 윤이정(흥남순 변호사 부인), 이기홍 변호사 부인, 안성례(명노근 교수 부인), 이명자(정동년씨 부인 ), 정현애 (김상윤 부인), 이귀님 (윤영규 교사 부인 ), 노영숙(노준현 학생누나), 나정희 (자개공 윤석루 모), 김경애 (운전기사 박남선 모), 이복실(철공업자 윤재근 모), 장삼남(재수생 박철 모), 김순자(Y신협 참사김영철 부인 ), 선점숙(회사원 이양현 부인 ), 양충실 (운전기사 배용주 부인 ),이영자(윤강옥 부인), 강정엽(인쇄업자 박노정 부인), 김정부(학생 김종배형 ), 선 0 숙(학생, 한상석 모),송용자(학생 송선태 누나),외 여인네들이 남편이나 흑은 동생들의 빠른 석방을 위하여 분주히 뛰었다.
2 심이 끝난 후 구속자 가족들은, 그러니까 특히 남편을 둔 여인네들은 문자 그대로 백방으로 손을 폈다. 그리고 구원의 호소를 올렸다. 이명자, 윤이정, 안성례 여인 등은 윤보선 전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를 만나 "제발, 중형을 면케 하는 데 어른들이 힘써 주 십 사"하고 간청을 올리기도 했다.
그녀들은 신 ·구교의 협조를 빌며 발 벗고 나선 것이다. 특히 이 무렵 광주 카톨릭 '정의 평화위원회'의 협조가 컸다.
구속 자 가족들은 연이어 지학순 원주 주교, 윤공희 광주 주교 등을 찾았다.
그리고 광주 정평의 정바오로 신부와 김어거스틴 간사의 도움 속에서, 전국 일대를 멀다 않고 매일 뛰었다. 전주 대교구, 대전 · 청주 · 수원 · 인천 ·서울 ·대구 왜관 ·부산 ·마산 등 대교구청이 있는 곳은 모두 방문하여 남편들의 조속한 석방을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해달라고 호소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 구속 자 아내들은 보따리마다 가득 석방 운동에 쓰일 서명 유인물을 들고 다녔는데, 로마 교황대사관, 국회 각 인권단체 인사들이 일을 보는 곳이었다. 각 기관에도 그녀들의 쉴 틈 없는 호소문이 날아갔다. 내용은 거의가"남편을 가정으로 보내 주세요"가 몇 줄씩 담겨 있었다 한다.
81년 3월 31일은 대법원 판결이 내리는 날이었다. 사태관련 구속 자 가족들, 그러니까 17명의 부친 네 들은 서울의 명동성당에 모였다. 오후 ·7시 미사가 끝날 무렵이었다. 광주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온 힘으로 올라간 그 여인네들이 마이크를 잡고 "교우 여러분, 잠깐만 앉아 주십시오. 저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다. 여인네들은 명동성당 안의 지하 식당에서 하룻밤, 추기경집무실에서 하룻밤(추기경 집무실은 카톨릭에서 성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지금도 당시를 회상하는 여인네들은 정말 큰 죄를 저질렀다고 술회한다), 3층 휴게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던 것이다.
4월 2일 밤 2시종 깅 추기경이 내려와 기도를 해주었다 찬다. 17명의 부인들이 의자에 앉기를 권했으나 김 추기경은 이들 여인네들과 함께 마룻바닥 위에 앉아 '정말 간절한 기도'를 여인네들의 머리 위에 내려주었다 한다. 여인네들은 객지인 서울에 올라와 난생 처음으로 가까이 듣는 김 추기경의 기도에 너무도 감동되어 숫제 많이 울었다.
"김 추기경 님은 이날 밤 성경 로마서 4장을 읽으면서 기도를 정말, 정말 간절히 해주었다"고 안성례씨 (명노근 교수의 부인)는 당시를 감격적으로 회상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역사 하신다"는 것을 믿었다고 덧붙인다.
성서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공로가 있는 사람이 받는 보수는 자기가 마땅히 받을 품삯을 받는 것이지 결코 선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중략)‥‥‥예수 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로마서 4장 중에서 )
81년 4월 3일. 시간은 오후 5시였다. TV자막에 "정동년, 배용준, 박노정 시정에서 무기로‥‥‥‥가 나타났다. 17명의 부인들은 때마침 곁에 와 계신 김수환 추기경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어 버렸다. 아이를 등에 업은 어떤 구속 자 가족의 부인은 아이가 등에서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울어대는 것이었다. 감격, 감격! 광주에서 천리 길, 머나 먼 서울까지 올라간 구속 자 가족들인 여인네들은 어쩌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두 손을 꽉 잡고 있는 듯한 환희에 젖었다. 이들 여인들은 그날 기차와 버스 편으로 광주로 내려갔다',광주 동쪽에 솟은 무등산이 송정리 쪽을 들어설 때 벌써 다정한 손짓을 하는 듯이 보였다.
82년 12월 24일. 광주사태 관련 구속 자들 모두가 풀려 나왔고 당시 운명을 같이했던 여인들은 지금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 터이다. 제발 그런 아픔과 슬픔이 다시없기를 바라면서‥‥‥ 당시를 회상하는 한 구속 자 가족은 끝으로 이렇게 말해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와 평화가 계속 되어야겠습니다. "
(가정조선, 198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