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박준병 민정당 사무총장/내가 아는 광주사태는 이것이 전부요.김대곤(신동아, 1988. 7)
본문
「내가 아는 「光州사태」는 이것이 전부요』
처음에는 「光州사태」 잘 몰라
朴俊炳민정당사무총장은 경력으로 보아 왜나 「근엄한」 군출신인사로 인식된다. 소위 「경복궁팀」의 한사람으로 [12·12]에 참여했고, 光州사태 때는 20사단장으로 진압을 지휘한데다, 보통사람들에 차 괜히 겁을 먹게 하는 국군보안사령관을 지낸 4성 장군출신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군출신 인사들 중에서도 「무서운」 경력이 많은 그이기에 만나기 전에는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6월12일 일요일 저녁, 약속장소에서 처음 보니 일단 보통사람의 얼굴이었다. 크지 않은 키에 둥그스름한 얼굴, 입가의 미소와 안경너머의 눈동자는 특히 음모와 공작을 연상시키는 보안사령관출신에다 여당의 실질적 총지휘자인 사무총장이라는 「자리」에 대한 선입견을 흔드는 것이었다. 「제 사정 때문에 일요일을 버리게 해서 죄송합니다」라는 첫인사는 항용 있을 수 있는 인사치레로 넘겨버린다 해도 아직 정치에 물이 덜 들었는지 할말 못할말 안가리고 얘기하니 잘 좀 써달라]는말은 꼭 인사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新東亞」측은 지난 85년 2·12총선으로 박총장이 첫 등원한 이후부터 광주사태와 관련해서 그와의 인터뷰를 거듭 요청했었다. 3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몇차례의 인터뷰요청을 거부했지만, 이제 미안하기도 한 데다 더이상 입을 닫고 있을 수도 없고, 또 여당의 사문총장이란 중책을 맡고 토니 뭔가 정리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 어렵게 응했다고 한다.간단한 저녁식사후 본격적인 질문과 답변이 시작됐다. 화제의 초점은 자연히 광주문제로 시작됐다. 일부에서는 그를 「광주사태의 다섯 원흥」중의 한사람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뭐라고 대답할까. 그러고 보니 「광주」에 관계됐던 군인사중 그가 최초의 공식발언자(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한다는 의미에서)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80년 5·17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저희 사단은 79년 10월26일 밤 서울로 출동했었는데, 80년 2월에는 다시 원 주둔지로 복귀해 있었어요. 그러다가 5 월15일 아침에 재출동 지시를 받고 서울에 다시 왔어요. 잠실에 사단사령부를 두었는데, 5월17일 계엄확대 조치와 함께 명령에 따라 사령부를 동국대학으로 옳기고, 서울시 10여개 대학에 부대를 진주시켰읍니다. 나는 20일까지 동국대 에 있었어요』
-「광주사태」는 언제 알았읍터까?
『사태 초기에는 잘 몰랐어요. 그런데 5 월20일 저녁 친구와 부대 밖에서 만나 식사를 하고 있는데, 부관이 부대로 빨리 돌아와 육본으로 전화하라는 연락이 왔다고 합디다. 8시40분경 부대에서 참모차장께 전화를 했더니 즉시 1개 연대를 광주로 보내 CAC(전투교육사령부) 尹興禎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받으라고 하더군요.통화가 끝난 뒤 곧바로 당시 용산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주둔하던 61연대에 10시 반에 용산역에서 광주로 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읍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육본으로븐터 사단사령부와 1개 연대를 추가로 보내라는 연락이 왔어요. 밤 10시경 용산역에 가니 기차가준비돼 있고, 병력도 도착해 있었어요.나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몰랐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光淵로 출발
-그때 이미 신문 호외가 나오고 있었을텐데요‥‥
『당신 계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다는 말이지요. 나는 사단 사령부와 추가로 보내는 1개 연대와 함께 21일 새벽에 서울을 출발해 오전 8시경 송정리에 도착하고 나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읍니다. 서울에서 출발할때 병력은 기차를 태워 보내고 내 찝차를 포함해 10여대의 차량은 고속도로로 내려가도록 했어요. 그런데 내가 광주에 도착해보니 우리 부대 차량들이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안왔다는 거예요.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듭디다.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CAC에서였어요. 윤흥정사령관에게 도착신고를 한 뒤 잠시 머물고 있는데 인사참모가 우리 부대 정차를 다 빼앗기고 병력도 없어졌다고 보고를 해요. 나중에 알고보니 광주 톨게이트에 들어서려고 하는데, 그곳을 막고 있던 수백명의 민간인들이 「저놈들 잡아라」고 외치면서 달려 드니까 부대 원들이 자동차를 팽개치고 다 도망가 버렸다는 겁니다. 그날 오후 2시경까지, 2,3명을 제외하고는 다 부대를 찾아왔는데 모두 몸만 왔어요. 우리 부대 차량들은 광주시민들이 사용했고, 특히 내 차는 별판을 열어제낀 채 시내로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요』
-병력이동은 합법적인 절차를 밟았습니까?
『합법적이냐 비합법적 이냐는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군 지휘계통상 병력이동권을 갖고 있는 육본의 지휘를 받아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광주에 도착했을 때 어떤 느낑을 받았는지요 ?
『부대를 정비하고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으니까 상황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고 몹시 긴장이 되더군요. 특히 내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광주에 도착했던 61연대가 CAC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광주교육대학으로 가려다가 쇠파이프 곡괭이 등을 든 시민들의 완강한 저지를 받아 명령을 이행치 못하고 도로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고는 심각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그날 밤 나는 한숨도 못잤어요. 나라가 굉장히 걱정되더군요.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할 거냐도 생각되고‥‥ 당장 수많은 유언비어가 돌았는데, 광준출신 부하들은 어떻게 할 거냐 이겁니다. 광주고교출신 대대장을 비롯해서 광주출신 부하들이 많았어요. 아마 우리 사단도장교 사병 합쳐서 전라도 출신이 25% 는 했을 겁니다.지금도 당시 기억이 생생해요. 그럴 때 지휘관이라는 게 중요하고 어려워지는 거지요.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주번 총사령한테 내일 아침 7시에 중사 이상 전 장교 하사관을 집합시키라고 지시를 했어요. 우선 내 부하들부터 통솔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였어요.CAC사령부 연병장에서 부하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조국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달렸다. 이 상황은 6·25이후 최대의 위기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이곳에 내려왔다. 그 책임의 막중함을 우리는 깊이 인실을 해야 한다. 나는 사단장으로서 가장 훌륭하고 슬기롭게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서「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이에따라 행동시 할 것을 약속한다. 하나는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민의 군대로서 신뢰를 얻는데 역점을 둔다는 점이다. 나를 믿어달라』 이런 연설을 20분간 했어요.그런데 정말로 부하들은 나를 믿어줬어요. 아무런 큰 사고가 없어 지금도 부하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예요. 우군끼리 사격한 것도 있었지만, 2건의 큰 사고 가 있었는데, 우리 사단에는 흔한 자동 차사고도 없었어요』
헬기로 병력 투입계획 중단
20사단은 광주에 도착한 뒤 어떤 임무를 받았읍니가?
「21일 오후 CAC사령관으로부터 우리 사단이 도청에 있는 공수부대와 교대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당시 광주시민 대표들은 CAC부사령관과 계속 대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시민들은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나갈 것을 요구했대요. 그런데 CAC 에서는 병력이라고는 공수부대 밖에 없는데 그걸 빼낸다는 것은 안된다고 하다가 우리 부대가 도착하자 20사단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제의, 시민대표들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고 하더군요.CAC에서는 저에게 헬기 21대를 동원해 1개 대대를 투입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희 부대 연대장과 대대장 등이 우선 시내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헬기를 타고 도청으로 갔는데, 곧 돌아왔어요.연대장에게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사람이 꽉 차 있어서 헬기로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그래요. 그리고 자기들은 잘 몰랐는데 조종사 말이 헬기가 밑에 쏜 총에 5발이나 맞았다는 거예요. 당시 광주시내는 그렇게 혼란 했습니다. 윤사령관에게 그런 상황을 보고했더니 「그럼 그만두라」고 해 임무교대를 못했어요.21일 밤에는 도청에 있던 공수부대가 철수했고 그날부터 우리 사단은 장성 화순 등 광주시 외곽도로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날부터 광주시내에서는 경찰과 군인이 다 빠져버린 거지요」「광주사태」를 둘러싸고 빛어지는 중요한 쟁점 하나가 진압작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과정을 설명 해주시죠.『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입은 우리 사단을 포함해서 31사단의 일부 병력, CAC의 보병학교 포병학교 병력, 그리고 공수단 등도 함께 나누어 맡았읍니다. 그중 우리가 가장 넓고 중요한 부분을 맡았다고 생각합니다.당시의 작전명령은 지금 그 원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뭏든 5월2i일 오전 CAC사령부에서 26일이 D데이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그 명령을 근거로 이후 사단에 명려을 내렸습니다.그날 오후 내게 작전명령서를 가져왔을 때 나는 작전개념속에 앞에서 내가 이야기한 두 가지 사항을 써 넣었어요. 광주 시민의 명예를 회복시켜준다는 것과 국민의 군대로서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런 명령은 없었지만 나는 역사적인 문제라 생각해 그걸 써넣은 겁니다. 나는 그 원본이 언젠가는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바둑판」 작전계획 수립
-진압작전을 할 때 20사단은 어떤 역할을 했읍니까 ?
『당시 광주시내의 도청 YMCA 사직공원에는 상당히 조직화된 시민군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지역은 일단 공수단이 제압한 후 우리에게 인계해주기로 했어요.나는 우리 사단의 책임구역을.바둑판처럼 구분, 주요지역, 우리가 장악해야 할 지역마다 번호를 붙이고, 각 단위부대별로 책임져야 할 지역을 분담시켰읍니다. 중대별로 경찰을 향도로 앞세우고, 그뒤에 지리를 아는 광주출신병사를 두명씩 붙이고 종대로 진입하라고 지시했읍니다.그리고 책임구역으로 가기 위한 지역 통과는 가능하면 접전이 없도록 지시했어요. 무장한 사람과 조우하면 피하고,상대방이 사격하면 돌아가라고 지시했읍니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응사해야 될 경우에는 무릎 이하를 쏘라는 등 서로 피해가 최소화하도록 지시했읍니다.모두 27일 새벽 4시반까지 책임지역에 도착하라고 명령했읍니다. 새벽 1시경에는 모두 주둔지를 떠났읍니다.4시반이 되어 점검을 해보니 2개 중대가 아직 목표지역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민간인과 우리 부하 각 1명씩 사망 했다는 보고예요. 우리 사단이 광주를 진입하면서 교전한 곳은 딱 한군데였읍니다. 나는 상황이 끝난 것으로 판단했읍니다. 그래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2개 중대를 기다리지 않고 작전종료를 선언했읍니다. 즉각 CAC사령부에서 방송을 하더군요. 「광주사태는 끝났다」 「군인이 진주했다」 「누구도 움직이지 말라」 「나오지 말라」 「대항하지 말라」는 얘기를 했어요. 22일 CAC사령관으로 부임한 소준열장군이 했어요』
-공수부대가 진압을 하기로 했다는 3개 지역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졌읍니까?
『공원에 서 는 별 사항이 없 었고, YMCA와 도청에서는 약간의 교전이 있었대요. 인계를 받았을 뿐이니까 자세한 사항은 잘 모르겠웁니다. 작전은 오전 6시반쯤에 거의 끝났어요』
이틀동안 광주교도소 경비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1명과 군인 1명만이 죽었다고 하셨는데, 20사단이 철수할 때까지의 희생자는 그것이 전부입니까?
『큰 상황은 아니었지만, 외곽에서 도중에 세번 정도의 상황이 벌어졌었지요.목포 가는 길 입구와 통합병원 입구,그리고 교도소에서 발생했읍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교도소까지 맡으셨읍니까?
『23, 24일 양일간을 우리가 맡았어요.공수단이 23일까지 있다가 시내에 들어가는 관계로 그날 우리가 인계 받았거든요』
-외곽경계중에 사상자가 있었나요.
『우리는 군인이 한명, 민간인이 수명 죽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교소도 쪽은 민간인 사상자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내 부하중에 서는 진입과정에서 한명 죽고 그전에 병원 앞에서 한명 죽었어요』
-두 사람 다 총을 맞고 죽은 겁니까 ?
『음, 둘 다 총을 맞고 즉사했어요. 그리고 우리 사단에 의해 숨진 분이 몇분 있다는 거지요. 우리 부대가 어디 있었다는 것을 알테니까, 나는 이 문제를 공개할 생각이에요. 나도 우리 사단에 의해서 죽은 사람이 누구냐, 왜 죽었느냐를 알고 싶어요.내가 교수들이나 학생들한테 얘기할 때 두 가지를 얘기해요.나보고 원흉 또는 살인마라고 하는데, 그것은 내가 직접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아닐 겁니다. 내 밑에 있는 어떤 부하가 그랬을 것 아니냐는 생각들이겠지요.그러나 내 부하가 1만명 정도나 되었는데, 이들의 3분의 2는 고졸 이상이고 대부분이 중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다는 것에 유의해보라고 말했읍니다.그런 사람들에게 만일 소대장이나 중대장 또는 대대장이, 아니할 말로 너는 오늘 저녁에 가서 잔학행위를 하고 암매장을 하고 돌아오라고 지시할 때 그 명령을 따를 부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런 부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시킬 지휘관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나는 대학교수들 보고 당신 제자가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고 벗으면 민간인 아니냐고 얘기합니다. 당신 제자들이 그런 일을 할 순 있겠느냐는 거지요.둘째 만일 어떤 이유로든지 그런 일이 있었다치면 비밀이 보장 안되는 이 나라에서 내가 그것을 숨길 수 있겠읍니까? 그럴러면 그런 사람한테 아니할 말로 일생 먹을 돈을 주든지 직장을 보장해주든지, 아니면 지금도 특별히 모셔야 될 입장일텐데, 나는 그런 일을 한 적도 없고 내 부하 가운데도 그런 일은 한 사람이 없어요. 그럴 능력도 없지만‥‥』
光州진입후 무슨 일을 했나
-그런 경우는 총장께서 장악하고 있던 예하부대 얘기지요. 광주사태의 발생일인 5월17일 부터의 초기 상황때는 다르지 않습니까 ?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몰라요. 내가 가기 전의 얘기니까‥‥ 최근 당시 이희성 계엄사랑관이 일부 군인이 초기 진압때 과격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느냐에 대해서는 내가 알 수가 없어 요』
-진압작전이 끝난 후에는 어떤 조치를취했습니까 ?
『28일 우리 사단사령부가 광주 CAC에 있을 때인데, 참모들에게 광주가 고향인 사람을 파악해 보라고 하니까 3,4백 명쯤 될 것이라고 해요. 나는 이들을 오늘 오후 5시부터 내일 5시까지 외박을 보내라고 지시했어요. 그랬더니 참모들이 「지금 외박이 무슨 말입니까, 큰일납니다」 이래요. 그래서 내가 「왜 큰일이 나겠는가. 자기 부모 찾아간다는 데 문제될 게 뭐 있나. 총은 소지하지 말고 철모에다 탄띠만 차고 가도록 하라」고 했어요.내가 지금까지도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병사들이 그 다음날 17시에 전원 다 귀대한 겁니다. 그중에는 과일도 파오고 집에서 떡을 해온 군인도 있었어요. 내가 몇 사람을 사단장실로 불렀어요. 가족 안부를 물었더니 부모들이 처음에는 반신반의하고 있다가 병사들을 보고서야 20사단이 왔다는 것을 믿어 주었다는 겁니다. 상당수가 우리를 공수부대라고 얘기하던 때였으니까요. 장병 3백 여명이 가족들한테 갔다온 것이 광주의 분위기를 개선하는 데에 기여했다고 느껴져요」
-계속 광주시내에 계셨습니까 ?
『27일날 아침부터 상무관의 많은 시체와 부상자들을 모두 병원에 보내주고 불에 탄 KBS MBC, 그리고 거리를 청소했어요. 총을 메고서요.우리는 광주에서 한달 가까이 있다가 철수하게 되었어요. 철수할 때 송정리에 1천여명이 나와 환송식을 해주어 감격스러웠읍니다. 상당히 열렬한 환송을 받았어요. 그렇게 많은 분들이 환송해주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우리 사단이 여기 와서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 또 이런 상황이 다시 일어나면 안되겠다,희생자 부 상자들에 대해서 정부가 좀 잘 처리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그리고 지금 내가 이런 얘기를 해서 좋을지 모르겠는데‥‥ 나를 광주사태와 연결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나하고 별 관런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로지 CAC사령관의 명령에 따라서 들어가고 나가고 이리 가고 저리 가는 등의 일밖에 하지 않았어요』
사태의 진실 밝혀져야
-광주사태의 현장을 본 느낌은 어땠읍니까?
『비극적인 사태에 대해서 굉장히 걱정을 했지요. 지금 와서는 왜 27일날 들어갔느냐, 더 기다릴 수 없었느냐 하는 얘기도 나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나하고 관련된 부분이 아니에요. 그것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나니까요. 하옇든 여러가지 아쉬운 게 있었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수습을 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그렇게 해주도록 도와준 분들한테 고맙다고 생각했읍니다.그리고,나는 육사 생도시절은 물론 각종교육을 광주에서 받는 등 기본적으로 광주와 인연이 깊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데, 광주가 정치문제화되면서, 5賊도 되었다가 원흉도 되었는데,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해요』
-혹시 광주사태 후에 나온 소설가 黃晳暎씨의 『시대의 어둠을 넘어 죽음을 넘어」같은 책들을 읽어 보셨나요?
『그런 책을 자세히는 못 읽고 대충 보았는데, 관심있게 읽은 부분은 우리 사 단과 관련된 부분이 있느냐 없느냐 여부였어요. 지금가지 내가 본 책중에서는 우리 사단과 직접 관련된 부분을 몇 봤어요』
-지금까지는 당시 사단장으로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셨는데, 국회의원에 집권당 사무총장으로서 말씀해보시지요.
『민화위 입장이 여당과 정부의 기본입장입니다. 여러가지 정치상황으로 미루어 조사를 인한 특위가 구성되고, 또 그 조사특위를 통해 초기진압관계의 여러가지 상황들이 조사되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가급적이면 최대한으로 진실에 가깝게 한번 재조사를 해보자는 입장입니다.그리고 정부측은 비극적인 사태였기에 가급적이면 덮어들려고 해온 데 반해 광주시민이나 국민들은 자꾸 더 조사해야 된다고 하다보니까 한쪽 얘기만 굉장히 커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번에 광주사태의 과정을 재조사할 경우 양쪽 얘기가 같이 드러나 진실이 어디에 있던 양쪽은 왜 이런 상황으로 갔느냐 하는 것을 진실의 바탕 위에서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봅니다』
-거기에서 만약 처벌문제가 나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읍니까 ?
『처벌문제가 나오면 결국 양쪽이 다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양쪽이 다 문제가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민화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교도소를 습격하러 왔다든가, 또는 총격전에서 양쪽이 다 쏜거지 한쪽만 쏜 것은 아니 거든요.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정부가 사과의 뜻을 표명했고 민화위에서 7가지 결론을 냈듯이, 물론 그 7가지라는 것이 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하 여튼 상처를 치유하고 보상하는 쪽으로 일단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증언대에 설 용의는?
-民和委결론보다 총장 말씀이 한발짝 더 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는 조사할 필요없다, 새삼스럽게 다시 꺼내느냐는 얘기 아니었읍니까?
『조사를 안하고는 어려운 상황인 것 같아요. 사실은 그런 상황에서 군인이 어떻게 대처해야 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또 그리고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광주사태가 있었기 때문에 그후 계엄령이나 위수령이 발동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 이유가 뭐냐, 군대를 데모에 투입하니까 위험이 많았다는 측면에서 그런 결과가 비롯되었다고 생각해요. 국내상황 때문에 군대가 시위진압에 투입 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한국적 상황에서는 극내의 소요나 데모에 전방에 있는 군인이 간다든지 또는 특전사가 간다든지 하는 일은 없어야겠어요. 만약 가더라도 데모진압을 위해 적절하게 훈련된 병력을 투입해야겠지요』
-최근 「盧在鳳교수」 파동이란 게 있음니다만, 사실 전에도 그런 견해가 있었거든요. 광주사태의 원인에 대해서 인데, 먼저 당시 계엄사 발표에 반영되었듯이 김대중씨가 돈까지 대며 시켰다는 것이 하나이고, 두번째 입장은 평화적인 데모를 하는데 과잉진압을 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사태가 확대되었다는 것이었읍니다. 최근에는 권력에 의해 사전에 예비되고 음모 된 것이라는 의견도 강하게 나오고 있는데요. 다시 말해 도발을 유발하기 위해서 과잉진압을 했다는 거지요.
「사전에 준비되었다는 것은 틀린다고 생각해요. 우선 우리 사단이 갑자기 명령을 받고 아무런 사전 지식, 준비가 없이 내려갔다는 사실에서 손쉽게 찾아 볼 수 있읍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광주에 공수단을 보낸 사실을 들어 사전조작되었다고 하는 것 같은데, 내가알기로는 전라북도 금마에 있는 공수여단중 2개 대개가 광주에, 나머지는 전북대학교에 갔어요. 그리고 서을 근처에 있는 공수단은 서울의 중요한 학교를 점령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5·17계엄확대조치를 취하면서 가까이 있는 부대를 가까운 지역으로 투입한 거지, 특별히 광주만을 의식해서 새로운 부대를 보낸 것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 문제는 조사과정에서 드러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盧교수 얘기 등은 내가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일단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더 규명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조사가 진행되면 증언대에 서시겠읍니까 ?
「글쎄, 이럴 경우11는 어떻게 답변해야하나. 나는 잘못이 없다고 혼자서 주장 할 수도 없고‥‥(웃음). 조사의 진행과정이 어떻게 될 지 아직 예측할 수가 없으니까 지금은 이렇다 저렇다 매기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내가 자연인같으면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는데 이제는 국회의원이고 한 정당의 사무총장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조사하는 과정을 보고 결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은데‥‥
-나중에 여러가지로 애기도 틀으셨을 텐데 광주사태의 원인을 무엇으로 생각하십니까 ?
「광주사태가 끝난 뒤 참모총장한테 보고하면서 광주사태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읍니다. 첫째 인사에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육군은 10∼15년 내에 전라도출신 육군참모총장을 내도록 하자고 건의드린 바가 있어요. 인사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소외의식이 있는 것을 내가 피부로 느끼고 왔기 때문이지요. 둘째는 유언비어를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하며, 마지막으로는 CAC 31사단 공수단 등 데모진압 경험이 없는부대가 과격한 데모 진압의 적시성과 적절성을 놓친 것 같다고 보고드렸어요』박총장은 거의 천부적 이라 할 만큼 얘기를 잘했다. 그러나 정치인들에게서 쉽게 볼 수있는 계산된 발언이나, 책임 있는 자리의 인사들이 취하는 「공식적」인 대답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계」를 벗어나지는 않는느낌이었다.광주사태에 대처해 나가는 당시 군의자세, 잔학행위의 실상을 그는 전혀 언급치 않았다. 오직 자신과 자신이 지휘했던 부대의 진압작전, 그것도 「최선을 다 했다』는 면만을 부각시켰다. 이른바 팡주사태의 다섯 원홍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칭되고 있는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현재로서는「또하나의 일면적인 진실」예 불과하다고할 수 있지 않을까. 광주사태의 장막은 아직 덜 걷혀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그도 강력히 주장했지만, 철저한 조사는 양측 모두 원하는 바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고 생각된다.
군의 민간교육이수 평가
우리가 군정종식이라 군사문화의 단절을 얘기하는 것은 명령과 복종, 돌파와 기습의 전술로는 이 나라 앞에 있는 산적한 많은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이다. 5·16이후 그런 군사적인 자세로 경제와 산업을 건설하고 해외시장에 뛰어들어 성과를 올린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군사문화적 문제 해결방식 때문에 광주의 비극이 저질러지고, 지금 한창 폭로되고 있는 全斗煥전대통령 일가의 非理가 저런 식으로 행해질 수 있었지 않을까.군사문화의 청산은 군은 본연의 임무에 전념하라는 요구이다. 특히 군 출신인사들의 정치불간여 요청이 전제되어 있다.이제 정치와 경제 등은 민간전문가 직업 정치인이나 관료, 경제계인사에 맡기고 군은 오직 국방에만 열중해달라는 것이다.그러나 역사의 진전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 시대의 단절이라고들 말하지만 역시 그것조차도 그앞 시대의 경험이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아르헨티나의 군 역사를 읽에 보았는데요. 군인들이 의도적으로 문민적 교육을 많이 받는데, 어느 단계에 오니까 군인들이 이른바 문민관료들을 약간 무시하는 태도가 나타나요. 공부 해보니까 나도 너 정도 안다는 그 의식이 생긴 거지요. 결국 아르헨티나군부의 정치개입이 시작 되는데요 박총장께서는 육사를 졸업하시고 서울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으신 분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우리 사관학교의 경우 위탁교육을 받는 등 민간교육이수자들은 선배 기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육사교수로 남았어요. 위탁교육을 받고 야전으로 나가서 성공한 사람은 손을 꼽을 만큼 적어요.여기서 한가지 생각나는게 있읍니다. 60년대부터 미국은 장교들에 대한 교육을 크게 강화했읍니다. 소련이 장교들에 대한 교육투자를 엄청나게 하는 것을 보고 반성한 거죠. 그래서 60년대 중반부터 미국도 장교들자 대한 대학교육을 거의 의무화하다시피 했어요. 예를 들면 미국 장군들은 대개 하나 또는 두가지 석사학위를 가지고 있읍니다. 그'영향으로 60년대 후반부터 우리 군도 위탁교육을 시키게 됩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교수요원 보다는 야전쪽에 많죠.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런 교육과정을 통해서 민군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기 보다는 장교들의 공부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바깥 분위기도 많이 알게 된다는 점에서 크게 기여했다고 봅니다』
-우리들이 보기에 군인 아니면 어떻게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었겠는가라고 생각하지만, 본인들은 「나처럼 불행한 군인이 다시 없기를 바란다』고 표현을 하던데요.
『나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요. 나는 스스로 옷 벗고 나왔읍니다.우리 동기생 사이에 「3박」이란 말이 생긴 것은 장군진급 무렵인데요. 대령은 같이 줬는데 나하고 朴世直 올림픽조직위원장이 먼저 별을 달았고 그 다음해에 朴熙道 전 참모총장이 장군이 줬어요. 그런데 81년에 박세직씨가 옷을 벗고 나가고, 나하고 박희도장군하고 같이 쓰리스타가 됐어요. 그런데 내가 보안사령관을 좀 오래 했어요. 내 생각에 보안사령관이라는 특수한 직위에 오래 있은 사람이 야전군에 복귀하는 것이 안 좋겠다 싶어 박희도장군이 군사령관난갈 무렵 옷벗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어요』
朴 ·全 ·廬대통령에 대한 평가
-박총장께서는 선거를 거쳐 정치에 입문하셨으니 민간정치인일 수도 있겠읍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읍니다. 이 말은 앞으로 육사출신이 다시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는 뜻 아니겠읍니까 ?
『노대통령이 지난번 대통령선거때 우리 나라 민주화를 위하는 도정에서 스스로가 중간적인 위치에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말이 아주 좋은 대답아 된다고 생각합니다. 노대통령도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나도 다른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2번이나 국민의 선출에 의해 국회의원이 됐는데, 아직도 군인정치인으로 보신다면, 글쎄요, 수긍하기 어려운데요』
-호주신문에서 한때 유력한 대통령후보로 소개된 적이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내가 85년 7월 호주에 갔더니 훈계자라고 보도가 나왔었는데, 전혀 엉터리 얘깁니다. 그런 얘기가 나오는 원인은 우리나라 사람한테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가운데서 소개하는 사람이 괜히 과장되게 얘기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그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라고 일축하고 대통령자격도 없을 뿐더러 그런 야심도 없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세 대통령의 인물평을 한다면 어떻습니까.
『나는 朴대통령은 잘 몰라요. 전대통령은 강력한 리더쉽으로 아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돌봐주는 분으로, 어떤 위기도 강력히 뚫고 나가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늘 가졌어요.노대통령께서는 많이 듣고 맡기고 무리를 별로 안하는 그런 분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6·29선언」 나을메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평상시와 다른 상당히 결단력이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읍니다.특히 최근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보니까 나라의 민주발전에 대해서는 아주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분이 늘 하시는 말씀 가운데 「나는 정권유지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체제수호에 사명이 있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를 상당히 강조하시고 분명한 입장을 늘 표명하십니다. 더군다나 노대통령의 경우 지난 3년동안 대표위원직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우리 국가 지도자중에서 처음으로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을 직접 체험, 극복하고 그리고 결과를 얻었는데,그 경험이 앞으로 대통령 하시는데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나회」는 어떤 모임인가
「하나회」는 육사출신 인맥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전두환, 노태우대통령이 모두 하나회 출신이고 「하나회」회원이 되는 길이 출세를 보장한다는 세평도있다.
-박총장께서도 하나회 회원이라고 하던데, 도대체 하나회의 장체가 무엇입니까.
『지금 하나회 하나회 그러는데 나는 하나회라고 하는 것을 수경 사에서 근무할 때 알았어요. 회원이 됐지요. 내가 제일 늦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회는 윤필용장군이 그만 두면서 없어졌어요』
-항간에는 현재도 대위급까지 조직돼 있다고 하던데요.
『내가 보안사령관 할 때 그런 말이 있어서 확인했더니 그메 없어겼다 그래요」
-하나회는 가입조건이 까다롭다면서요?
『그건 잘 몰라요」
-가입할 때 무슨 의식같은 것은 없읍니까?
『그런 것도 없었어요」
一박대통령이 군도 혹은 지휘봉을 주었다는 설도 있는데‥‥
『에이, 그런 것 없었어요」박총장은 고향이 충북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라는 한촌출신이다. 그는 闖谷이라는 고향이름을 한문 뜻까지 풀이하면서 한적한 동네임을 강조한다. 그는 한학을하는 조부밑에서 장손으로 자랐다. 국민학교를 고향에서 나온 뒤 대전으로 진출,대전중학교에 들어간 뒤 5학년 때 6.25를맞는다.18세 되던 그해 경남 밀양까지 피난을 갔던 소년 박준병은 다리 밑에서 피난생활을 하다 50년 9월16일 이등병으로 입대, 코 밑까지 닿는 Ml 소총을 메고 그가 인터뷰과정에서 자꾸 「운명」이라고 되뇌는 「군인」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2년여 사병생활을 하던 그는 정규 육군사관학교 생도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 청운의 꿈을 가꾸는 무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육사를 졸업했던 그는 서울대학에 편입, 역사학도가 된다.
-서울대 사학과에 학사편입하셨는데,왜 사학과를 택하셨융니까 ?
『사관학교 다닐 때부터 역사공부를 잘 했어요. 당시 육사에 좋은 교수분들이 많았고, 개인적으로 취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직업군인으로서도 역사공부가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어요.졸업하고 전방에 가서 소대장 하다가 사관학교에서 위탁교육생으로 선발됐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중위때인 57년 12월에 명령이 났는데, 당시 李翰林교장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이장군은 「군인이 무식하다」는 말을 안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제도를 만들었다고 취지를 설명하고 20년 30년후 나라의 지도자가 줬을 때에 대비, 유능한 친구를 많이 만들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읍니다. 그리고 사관학교 교수 질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는데,감명이 깊었읍니다. 그래서 서울대에 58년 4월부터 2년동안 다녔는데, 그 뒤 저는 동숭동캠퍼스를 영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도 지나 가다가 보면 그때 생각이 나요』
陸士졸업후 서울대에서 공부
서울대를 졸업한 박중위는 다시 육사교관으로 돌아와 육사 20기생을 1년동안 가르치며 교단에 섰다. 그러던중 당시 1군사령관 이한림장군의 요청으로 부관이 되어 군부대로 돌아갔다. 여기서 대위였던 그는 또 「5.16」이라는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이장군과 함께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영어의 몸이 되기도 한다. 부관이니까 연행되는 사령관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 따라오지 말라는 이한림장군과 함께 연행 투옥을 같이 당한 것이다.
-이한림장군 연행시 車智激 대위가 폭행하는 것을 보셨읍니까 ?
『폭행하는 것은 못보았고, 권총은 뺏겼어요. 권총을 찾아보라고 그러셨는데 결국 못찾았읍니다』
-이한림장군이 권총 뺏기기 전에 「나 쏴라」하고 저항했다는데‥‥‥‥
『잘 모르는 이야기인데요. 어쪘건 마포교도소에서 한달쯤 있다 나왔는데, 이 장군은 3개월 가량 있었지요. 그뒤 저는 당시 혁명검찰부장 朴蒼宕씨 주선으로 일선 중대장이 되어 다시 야전군이 뙜어요. 이어 연대 작전주임, 고등군사반 교육, 사단교육과장 등을 지내다가소령때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 있던중 미국에 갔다 왔어요」
-무슨 일로 가셨읍니까 ?
『스페셜 워페어 센터라고 하는 곳인데 특수전 센터죠. 흔히 케네디쌘터라고 하는데 공수훈련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입니다. Cl(coIBlterinsurgency), 즉 對民心理戰 과정이었읍니다」
-월남전에서 심리전으로 유명하셨다던데‥‥‥‥ 어렵지는 않았나요.
『1년8개월 있었는데, 심리전 많이 했지요. 우리가 미군보다 기습을 덜 받은 것은 심리전 효과의 한 예입니다. 남의 나라라 그런지 민족성 이해에도 시간이 걸리고 어려웠읍니다. 독특한 풍토와 함께 민족심리가 다르니까 그것 파악하는데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베트공 비 라를 모아 분석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분석해서 보고하는 바람에 당시 驗越사령관 蒙命新장군한테 칭찬받기도 했죠」월남에서 돌아온 그는 휴전선부근의 동해를 근처에서 중령으로 일선 대대장을 맡는다. 이후 계속 12기 선두주자로 승진을 거듭했다.
-진급이 동기들에 비해서 제일 빠르신, 세상에 알려진 선두주자 요건이 있지않습니까? 고향이 경상도라든가, 하나회 멤버여야 된다든가, 그런 요건은 별로 안 갖추신 것 같은데‥‥
『간첩을 많이 잡은 덕분인 것 같아요. 강원도 고성군 건봉산 앞에 있는 최전방을 지키는 일선 대대장으로 1년6개월 있었는데, 3개월을 제외하고는 철책선 근무를 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도 간첩 잡은 수는 내 기록을 못깬대요』그는 간첩을 잡고 공비를 소탕했던 얘기를 옛날 얘기하듯이 들려준다.그는 대망의 별(장군)을 75년에 달게된다. 승진과정이 궁금해서 물었더니 또 운명론을 꺼냈다.『처음엔 좀 불리하다는 생각이었어요. 12기의 선두그룹 세사람 중에 둘이 된다는 거예요. 박세직 박희도대령과 나 세사람인데, 그중에서 내가 제일 쳐져요. 연대장도 늦게 나갔고 진급심사 당시(74년 11월) 백령도에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장군으로 승진됐다는 특명이 내려왔어요』중위때부터 알고 지내고 연대장으로 모셨던 k장군이 우연히 장군 심사위원장으로 들어간 것이 그의 장군승진에 결정적이었다고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역시 승진운이 남다르게 좋은 군인이었다고 할까.
「운명」의 '20사단장 취임
그뒤 그는 소장이 되어 수도근교의 20사단 사단장으로 나간다. 당시 공교롭게도 3사단과 20사단장 자리가 비었는데,순환보직 원칙에 따라 박세직장군이 3사단장, 박장군은 79년 8월3일 20사단장으로 부임했다. 20사단은 유사시 서울의 계엄업무를 담당하는 부대, 그는 20사단장으로서 자신의 운명이 된 「12.121, 그리고 『5.17J 등 운명을 바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10.26J때 상황이 어떠 했읍니까
『관사에 찾아온 친지와 저녁을 먹고 있는데 밤 8시경 군사령관께서 이유도 설명않고 사단을 가장 빠른 시간안에 서울 태능으로 이동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출동했어요. 갑자기 비상을 걸고 사단을 움직이려니 굉장히 힘들었어요. 10월27일 아침 4시인가 4시반인가, 그 무렵에 우리가 태능에 도착했어요. 아주 빨리 옳긴 거죠. 그때서야 박대통령이 돌아가신 것을 알았어요』
-10월26일 밤 8시, 그렇게 빨리 사단병력을 태능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좀 이상한데요.
『鄭昇和참모총장이 육본벙커에서 비상을 건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제가 야전군 지휘관중에 제일 먼저 연락을 받았을 거에요』「10.26i을 계기로,출동한 박장군은 서울에 주둔중 운명의 「12.12J를 맞았고,다음해 7월 1년만에 20사단장직을 마친다.
-「12.12J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하십니까? 「쿠데타」설과 「수사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두 가지 절이 있는데‥‥
『당연히 후자지요.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상황이 그런 형태로·전개되리라고는 생각을 안했던 것이 사실이예요. 그것은 그러니까 그날‥‥‥‥ 나중에 얘기하지요. 이 다음에 기회가 또 있겠지요 뭐』
-일부에서는 「12.12J주도세력에 「무임승차」했다는 평가도 있는데‥‥
『그것도 역사에 맡깁시다. 나는 사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얘기 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 해석도 있고 저런 해석도 있고 하니까‥‥ 집요한 질문에도 그는 손을 내저으며 말문을 막는다. 그래도 내친김에 한마디 더 물었다.
-「12.12J에는 어떻게 참여하십니까.
『서울에 주둔해 있던 한 부대의 지휘관 으로 개인적으로 참여한 거지요. 우리 부대는 참여 안했어요』
「막강」한 保安司令官 역임
-박대통령의 운명소식을 듣고는 소감이 어떠셨읍니까 ?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우리는 그 내 용은 잘 몰랐지만 솔직히 얘기하면 정치하면서 유신의 문제점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국론분열의 시작, 다시말해 체제논쟁은 유신과 관련이 깊다는 생각이 들어요』「10.26J과 「12.12J를 거친 그는 80년대 초 새로운 제5공화국 시대가 막을 열 때 그대로 군문에 남는다. 그는 군인사를 맡는 인사참모부장으로 있다가 산천초목도 떤다(?)는 막강한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대통령이 가장 심사숙고하는 군인사가 보안사령관이라고 생각되는덴, 그 자리를 맡으신 이유가 「따로 있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지 ?
『참모총장이 보안사령관으로 추천한다 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감니까」했더니 「그렇게 결정이 됐다」고 해서 81년 7월 발령을 받았어요.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고요』
-보안사령관을 오래 하셨는데, 최근 안기부 보안사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된다는 여론이 많은데 전임자로서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
『민정당 지구당위원장을 맡던 날 기자들을 초청했는데, 기자들이 「당신 정치 하다 왔느냐」하는 얘기를 해요. 모두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러나 나는 재임중 「군인은 정치에 간여하지 못한다」 『정치하고-싶으면 옷 벗고 나 가라」 「군인하고 정치인하고는 가급적 만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주문해왔어요』
-법률상으로는 내란죄나 보안에 관계 되는 대민수사는 보안사에서도 가능한.것으로 되어 있는데, 앞으로도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
『지금 논의되는 것을 보면 앞으로는 그런 일을 안하는 쪽 아니에요? 박총장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스스로는 운명적으로 군인이라고 생각하고 군인으로서 인생을 마감하려 했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10.26」을 만나고「12.12」에 참가했고, 결국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정치 입문」의 변을 들어 보자.『보안Al령관으로 있던 중 정년이 앞당겨지고 해서 옷을 벗기로 결심했어요. 당시 權翊鉉씨 권유로 지역구를 맡게 되었지요. 그래서 84년 9월13일 지구당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았어요』고향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라는 할아버지 말씀이 늘 생각되었다는 그는 고향인 충남옥천에서 민정당 공천으로 출마, 거뜬히 금메달을 따고 12대 때 의정 단상에 오른다.초선의원이었지만 그는 민정당국책조청위원장, 중집위원 그리고 국회 보사위원장 등을 역임, 그가 여권내에서 만만치 않은 실력자임을 과시했다. 재선인 그는 이제 집권여당인 민정당 사무총장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올랐다.
權翊鉉씨의 권유로 政界入門
-정국이 「與小野大」 아닙니까. 미국의 경우 이런 일이 자주 있고, 또 정국에 별영향을 안 받는데, 같은 대통령중심 제라도 프랑스에서는 야당이 우세하면 야당에 組閣權을 주지 않아요? 「미테랑」대통령이 「시락」수상에게 한 것처럼‥‥우리 헌법은 물론 여소야대현상을 전제하지 않은 측면이 있지만, 전체적인 틀은 프랑스틀이에요. 그렇다면 야당이 이겼으면, 이른바 프랑스식의 구상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조금 넓혀서 이야기 하면 「보수연합이론」과 통하는 얘기인데‥‥
『프랑스에서 「시락」이 수상이 된 것은「시락」의 정당이 「미테랑」의 정당보다 의석수가 많으니까 그런거지요. 우리나라의 경우도 여당보다 많은 의석수를 가진 야당이 나오면 생각할 수 있는 문제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제1당 이니까 아직 그런 상황은 생각할 수가 없죠. 앞으로 야권 3당이 하나로 통합이 된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현재 당을 포함한 여권의 속성으로 보아 사회의 변화에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에 의문을 표시하는 의견이 많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의 체질개선과 관련해서
『그 얘기도 부담이 되지만 대통령의 말씀도 부담이 돼요. 대통령께서는 「앞으로 나한테 이럴까요 저럴까요 묻지 말고 소신껏 하라」고 하시거든요. 요즘 가끔 뵈면 「당신들이 좋다고 하면 따라 갈테니까 좀 잘하라」고 하셔요. 이렇게 양쪽의 압력을 다 받는데, 전환기적 사명을 부여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총선이 끝난 뒤 민정당의 비대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의견도 있었는데요.
『당에도 변화가 올 것입니다. 요약을 하면 당원을 100만명 규모 정도로 정예화하고, 복합적인 조직의 系線을 단축시켜 직능분야 조직을 보완할 계획입니다. 특히 청년문제는 지난번 대통령선거 때의 경험을 수용해 청년조직을 강화할 계획인데, 일달 7월 말까지 정리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어요」
-제13대 국회가 풀어나갈 문제가 「광주문제」하고 「5공화국 비리」, 그중에서도「全斗煥대통령문제」인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상당히 많은 국민들이 걱정을 하고 또 어떤 점에서는 노여워하는 측면도 없지 않은데‥‥ 어쪘건 노대통령께서 성역이 없다는 말을 하셨는데, 그말은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조사를 못 하지는 않는다는 개념 아닙니까? 全전 대통령이 무슨 권력이 있어서 조사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그 분이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했고 대통령 재임중 국제외교의 황금시대를 열어 국위선양을 했고 올림픽 유치, 물가안정 등 그분의 공을 평가해야 된다 이겁니다. 또 평화로운 정권의 교체를 이룩해야 되고 또 통치권하고 관련된 부분도 있으니까 이런 점에서 전직 대통령을 조사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비리에 관련된 부분은 조사를 안 할 경우에 제6공화국의 부담이 상당히 크지 않겠읍니까?
「하여간 앞으로 신중히 생각해서 해야겠지요. 그리고 유언비어성 공격도 흑백이 가려져야 할 거예요. 그분이 만약 비리와 관련 있다면, 정확한 근거를 제시해야지요. 그냥 세간의 뜬소문을 가지고 전직 대통령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소망스럽지 않다고 봐요』
-요즘 현안문제가 된 통일논의에 대해 한 말씀 않고 넘어가실 수 없겠지요.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해요. 「6·10」은 그냥 넘어갔는데 우리 당이 우선 그런 학생들 하고 별로 인연이 없어요. 그들의 얘기를 당이 듣고 수용할 부분은 수용하고 함께 고민도 하고, 여권에서 부족했을 점이 있으면 보완해 나가면서 이 문제를 국민과 함께 처리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학생들 주장에도 상당한 논리의 비약이 있고, 비현실적인 면이 있으니까 국민과 함께 설득해 가면서 검토해 나가야겠지요」인터뷰를 시작한지 벌써 세시간이 넘어 자정이 가까와겼다. 그런데도 그는 자세 한번 흐트리지 않고 꼿꼿찼게 앉아서 정치인다운 수사적 표현도 별로 없이 명쾌하게 답변했다. 특히 주요한 일이 있었던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그의 기억력에 새삼 놀랐다. 그의 사생활도 궁금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호화주택에 사신다고 말들이 많던데
「집이 좀 크고 좋지요. 그런데 그 집엔 사연이 있어요. 원래 그 집은 목사였던 장인께서 장남(박총장의 처남)과 함께 살려고 크게 지은 집인데, 처가집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가는 바람에 들어가 사는 겁니다』62년 12월15.일 박세직씨 부인의 소개로 연애결혼한 박총장은 슬하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연년생일 1남 1녀를 두고 있다. 부인은 이화여대 사대 교육학과를 나와 박총장이 71년 대령을 달 때까지 서을 한양여중에서 교편을 잡았다.
一부인 고생 안 시키셨읍니까.
『고생요? 말도 못할 정도지요. 대대장 시절에 우리집 사람이 겨울방학을 맞아 강원도 고성까지 왔어요. 나는 전방에 나가 있고 우리집 사람은 거진 앞바다의 초도리라고 하는 한촌에 있었는데, 나는 1주일에 한번 겨우 내려왔어요. 눈이 많이 오거나 상황이 있으면 그것도안되고‥‥ 생과부생활 많이 시켰지요. 20여년전 이야깁니다』원래 대담이란 형식은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는 것인데도 대답에 막힘이 없다. 가끔 『이렇게 막 얘기해도 정말괜찰은 건지』하면서도 별 주저 없이 자신을 털어놓는다. 자신에 관한 한 감추거나 덮어둘게 뭐가 있느냐는 느낌을 주는 태도였다.어쨌건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른 것 같다. 그의 군인생활중 논란의 대상이 되는 광주문제는 검증의 단계를 거쳐야 된다. 또 여당 사무총장으로서의 역할도 취임 1개월을 겨우 넘긴 지금 단계에선 왈가왈부할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다.4시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물어볼 것도 많고, 듣고 싶은 것도 많다. 더 캐어물어야 될 것이 없지도 않다. 우리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광주에 관계된 군인사중 최초의 공식 발언자 박총장
결코 평탄하지만든 .않을 여소야대의 정치 구도에서 삼면초가(三面票默) 민전당의 실질적총지휘탑인 사두총장을 맡고 있는 박준의원(54)은 그의 경력으로만 본다면 꽤 '무서운' 사람으로르 생각하기 쉽다. 광주항쟁 당시 20사단장으로서 진압을 지휘한 이유로 일부에서는 그를 '광주항쟁의 다섯 원흉중 한사람으로 부르고 있는데가 소우 '경복궁팀'의 일원으로 '12·12'에 참여했고 보안사령관이라는 직함을 거첬기 때문 더욱 그렇다 따라서 정가 밖에서는 박층장을 강성 이미지의 인물로 분류하기도 하나 자연인 박준병을 평편할 때 맨 먼저 들먹여지는 덕목은 바로 '온화'라는 것이다. 장장 34년이라는 세월을 철두철미한 무장(武將)으로서만 있었으니까 차갑고 거칠 것이란 추측이 지배적이지만 그를 실제 로 접해 보면 쉽게 그가 소탈하면서도 온화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무장출신인 그에게 문인으로서의 소양과 자질이 있다는 것 또한 여러 의미를 던져준다. 치밀하고 뛰어난 기억력, 예리한 판단력도평가자료로 삼아야 될 것같다.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그가 지난 85년 민정당 국책조정위원장으로 그 실세를 드러내고, 지난 총선에서 민정당이 얻은 선거결과에 따라 심명보 전 사무총장의 후임으로 등장한 사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도 한다. 85년 국책조정위에 등장할 당시 정계 안팎에서 '마친내 수면에 떠오른 핵잠수함'으로 그를 지칭했드시 민정당의 '빅 카드'로서 그는 거대야당과의 등반자적 관계로 향후 정국을 이끝어 나갈 위치에 선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사두총장직을 맡아 '말도 많았던 '청와대 4자회담을 성사시키면서 당정간의 핵심역할을 맡게된 그가 더욱 관심을 끄는 이유는 아무래도 80년 광주의 진압군을 지휘한 사단장으로서 '광주민주화 운등'의 정확한 진상을 밝혀내자는 목소리가 점점 드높아지고 있는 당면과제와 밀착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벌써 5년이라 세월이 홀러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광주에 관계된 군인사증에서 자신의 입으로 직접 80년 광주를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염두해 둔다면 '최초의 공식 발언자'로서 박총장의 '광주 문제' 증언이 그만큼 중요성을 지니는 동시에 '운동'이냐 '투쟁'이냐는 명칭만으로도 난항을 거듭한 '조사특위 '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광주 문제'에 대한 군의 입장 및 배경들을 파악할 수 지렛대도 된다.아울러 현시국에 대한 군부의 동향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80년 5월17일. 박준병사단장은 그날 떨어진 계엄확대 조치와 함께 명령에 따라 사령부를 동국대학으로 옮기고 서울시 10여개 대학에 부대를 진주시켰다.20사단은 유사시 서울의 계엄업무를 담당하는 부대.그에게 1개 연대를 광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5월 20일.그때까지 그는 광주에서 무슨 일문제가 있는지 몰랐다고 한다.그러나 21일 서울을 떠나 아침에 송정리에 도착하고서야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그는 집차를 포함한 10엳의 차량이 광주 톨게이트에서 민간인에게 빼앗겼다는 보고를 받고난 후였다.특히 그의 차는 별판이 열어 젖힌 채 광주 시내를 돌아다녀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그의 부대가 괌주 진입을 한 것은 5월 27일 밤에 도청에 있던 공수부대가 철수를 하고 광주시내에서는 경찰과 군인이 다 빠져버린 후였다.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입은 20사단 31사단의 일부 병력 CAC(전투교육사령부)의 보병학교 병력,공수단이 함께 나누어 맡았는데 박총장의 말에 의하면 20사단이 가장 넓고 중요한 부분을 맡았으나 도청과 YMCA,사직공원에는 상당히 조직화된 시민군이 있다는 전제하에 일단 공수단이 제압한 후 20사단에게 인계해 주기로 했다고 한다.
20사단 병력중에는 전라도출신이 25%쯤 됐다.
27일 새벽 주둔지를 떠나 책임지 역에 도착해 작전종료된 시간이 4시 30분,그의 표현대로하면 '약간의 교전이 있었던' YMCA와 도청에서는 오전 6시 반쯤에 '진압'이 거의 끝났다그의 말로는 그의 사단이 맡은 진압과정에서 죽은 사람은 민간인 1명,군인이 1명이고 시내의외각 경계중에 민간인이 수명,군인 1명이라고 했다.20사단이 광주로 진입하면서 교전한 곳은 딱 한군데 였다는 것이다.27일 진압작전이 진행되기 직전 박준병소장은 CAC 사령부 연병장에서 부하들에게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이에따라 행동할 것을 약속한다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그 하나는 광주 시민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고,또 하나는 국민의 군대로서 신뢰를 얻는데 역점을 둔다는 내용의 연설이었다.그는 이 말을 작전명령서의 작전개념속에도 써넣었는데 언젠가는 그 원본이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당시 20사단에는 전라도 출신이 장교 사병 합쳐서 25%는 됐는데 공주출신 부하들을 어떻게 할 거냐는 생각으로 고민을 하다가 우선 부하들부터 통솔해야한다는 마음으로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는 요지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20사단은 27일 이후 광주에서 한달 가까이 있다가 철수했다. 최근 모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간 밝힌 '광주사태의 현장을 본 느낌은 다음과 같다."비극절인 사태에 대해서 굉장히 걱정을 했지요. 지금와서는 왜 27일날 들어갔느냐,더 기다릴 수 없느냐 하는 얘기도 나을 수 있겠지만,그것은 나하고 관련된 부분이 아니에요. 그것은 네가 결정한 것이 아니니까요. 하여튼 여러가지 아쉬운 게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 이렇게 수습을 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 그렇게 해주도족 도와준 분들에게 고맙다고 생각했음읍니다.그리고 나는 육사 생도시절은 물론 각종 교육을 광주에서 받는 등 기본적으로 광주와 인연이 깊어 종은 인상을 갖고 있는데, 광주가 정치문제화되면서,5적도 되었다가 원흉도 되었는데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해요"
진실의 바장 위에 철저히.조사할 터
그는 광주문 조사에 대해서도 이렇게 서명한다."민화위 입장이 여당과 정부의 기본 입장입니다. 여려가지 정치상황으로 미루어 조사를 위한 특위가 구성되고, 또 그 조사특위를 통해 초기진압 관계의 여러 가지 상황들이 조사되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가급적이면 최대한으로 진실에 가깝게 한번 재조사를 해보자는 입장입니다.그리고 정부측은 비극적인 사태였기에 가급적이면 덮어둘려고 해온데 반해 광주시민이나 국민들은 자꾸 더 조사해야된다고 하다보니까 한쪽 얘기만 굉장히 커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번 광주사태의 과정을 재조사 할 경우 양쪽 얘기가 같이 드려나 진실이 어디에 있던 양쪽은 왜 이런 상황으로 갔느냐 하는 것으 진실의 바탕 위에서 조사해야 한다고 봅니다"그는 광주사태가 끝난 뒤 참모총장에게 보고하면서 광주사태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로 인사(人事)에 원인이 있는것 같다. 앞으로 육군은 10-l5년 내에 전라도출신 육군참도총장을 내도록 하자. 인사를 증심으로 하는 강력한 소외의식이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왔다.
둘째르 유언비어를 중요한 원인으로 생 각한다.마지막으로 CAC,31사단 ,공수단 등 데도진압 경험이 없는 부대가 과격한 데모진압에 투입됨으로써 데모진압의 적시성과 적절성을 농친 것 같다.뚤론 ,90년 광주에 대한 이같은 그의 논평은 아직 공식적인 것도 아니고 조사특위가 곁성되기 직전에 나온 그의 입장표명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올바른 판단은 현재 양측 모두가 철저한 조사를 원하고 있으니 그 후에나 내릴 문제이다.아직 검증의 단계가 남아 있기도 하다.광주문제는 5공화국 출범과도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의 판단 여부에 따라서 군부가 위기 의식을 느낄 수도 있다. 군의 정치개입과 관련, 그의 생각을 들어보면."군부의 정치개입은 기본적으로 그 나라적 정치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경우 정치문화가 군부의 정치개입을 수용하는 수준보다 높기 때문에 군의 정치개입은 어느 경우도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단지 북한이 내부의 혼란 교란 분열을 도발의 구실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이 오판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그의 말대로 우리나라의 군부가 어느 경우에든 정치개입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에 같이 한다면 그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 못지않게 명령과 복종에 철저히 길들여진 군이 개입된 정치로는 이 나라 앞에 산적해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 또한 현 단계에서 절실한 것이 아닐
처음에는 「光州사태」 잘 몰라
朴俊炳민정당사무총장은 경력으로 보아 왜나 「근엄한」 군출신인사로 인식된다. 소위 「경복궁팀」의 한사람으로 [12·12]에 참여했고, 光州사태 때는 20사단장으로 진압을 지휘한데다, 보통사람들에 차 괜히 겁을 먹게 하는 국군보안사령관을 지낸 4성 장군출신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군출신 인사들 중에서도 「무서운」 경력이 많은 그이기에 만나기 전에는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6월12일 일요일 저녁, 약속장소에서 처음 보니 일단 보통사람의 얼굴이었다. 크지 않은 키에 둥그스름한 얼굴, 입가의 미소와 안경너머의 눈동자는 특히 음모와 공작을 연상시키는 보안사령관출신에다 여당의 실질적 총지휘자인 사무총장이라는 「자리」에 대한 선입견을 흔드는 것이었다. 「제 사정 때문에 일요일을 버리게 해서 죄송합니다」라는 첫인사는 항용 있을 수 있는 인사치레로 넘겨버린다 해도 아직 정치에 물이 덜 들었는지 할말 못할말 안가리고 얘기하니 잘 좀 써달라]는말은 꼭 인사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新東亞」측은 지난 85년 2·12총선으로 박총장이 첫 등원한 이후부터 광주사태와 관련해서 그와의 인터뷰를 거듭 요청했었다. 3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몇차례의 인터뷰요청을 거부했지만, 이제 미안하기도 한 데다 더이상 입을 닫고 있을 수도 없고, 또 여당의 사문총장이란 중책을 맡고 토니 뭔가 정리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 어렵게 응했다고 한다.간단한 저녁식사후 본격적인 질문과 답변이 시작됐다. 화제의 초점은 자연히 광주문제로 시작됐다. 일부에서는 그를 「광주사태의 다섯 원흥」중의 한사람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뭐라고 대답할까. 그러고 보니 「광주」에 관계됐던 군인사중 그가 최초의 공식발언자(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한다는 의미에서)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80년 5·17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저희 사단은 79년 10월26일 밤 서울로 출동했었는데, 80년 2월에는 다시 원 주둔지로 복귀해 있었어요. 그러다가 5 월15일 아침에 재출동 지시를 받고 서울에 다시 왔어요. 잠실에 사단사령부를 두었는데, 5월17일 계엄확대 조치와 함께 명령에 따라 사령부를 동국대학으로 옳기고, 서울시 10여개 대학에 부대를 진주시켰읍니다. 나는 20일까지 동국대 에 있었어요』
-「광주사태」는 언제 알았읍터까?
『사태 초기에는 잘 몰랐어요. 그런데 5 월20일 저녁 친구와 부대 밖에서 만나 식사를 하고 있는데, 부관이 부대로 빨리 돌아와 육본으로 전화하라는 연락이 왔다고 합디다. 8시40분경 부대에서 참모차장께 전화를 했더니 즉시 1개 연대를 광주로 보내 CAC(전투교육사령부) 尹興禎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받으라고 하더군요.통화가 끝난 뒤 곧바로 당시 용산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주둔하던 61연대에 10시 반에 용산역에서 광주로 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읍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육본으로븐터 사단사령부와 1개 연대를 추가로 보내라는 연락이 왔어요. 밤 10시경 용산역에 가니 기차가준비돼 있고, 병력도 도착해 있었어요.나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몰랐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光淵로 출발
-그때 이미 신문 호외가 나오고 있었을텐데요‥‥
『당신 계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다는 말이지요. 나는 사단 사령부와 추가로 보내는 1개 연대와 함께 21일 새벽에 서울을 출발해 오전 8시경 송정리에 도착하고 나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읍니다. 서울에서 출발할때 병력은 기차를 태워 보내고 내 찝차를 포함해 10여대의 차량은 고속도로로 내려가도록 했어요. 그런데 내가 광주에 도착해보니 우리 부대 차량들이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안왔다는 거예요.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듭디다.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CAC에서였어요. 윤흥정사령관에게 도착신고를 한 뒤 잠시 머물고 있는데 인사참모가 우리 부대 정차를 다 빼앗기고 병력도 없어졌다고 보고를 해요. 나중에 알고보니 광주 톨게이트에 들어서려고 하는데, 그곳을 막고 있던 수백명의 민간인들이 「저놈들 잡아라」고 외치면서 달려 드니까 부대 원들이 자동차를 팽개치고 다 도망가 버렸다는 겁니다. 그날 오후 2시경까지, 2,3명을 제외하고는 다 부대를 찾아왔는데 모두 몸만 왔어요. 우리 부대 차량들은 광주시민들이 사용했고, 특히 내 차는 별판을 열어제낀 채 시내로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요』
-병력이동은 합법적인 절차를 밟았습니까?
『합법적이냐 비합법적 이냐는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군 지휘계통상 병력이동권을 갖고 있는 육본의 지휘를 받아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광주에 도착했을 때 어떤 느낑을 받았는지요 ?
『부대를 정비하고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으니까 상황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고 몹시 긴장이 되더군요. 특히 내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광주에 도착했던 61연대가 CAC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광주교육대학으로 가려다가 쇠파이프 곡괭이 등을 든 시민들의 완강한 저지를 받아 명령을 이행치 못하고 도로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고는 심각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그날 밤 나는 한숨도 못잤어요. 나라가 굉장히 걱정되더군요.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할 거냐도 생각되고‥‥ 당장 수많은 유언비어가 돌았는데, 광준출신 부하들은 어떻게 할 거냐 이겁니다. 광주고교출신 대대장을 비롯해서 광주출신 부하들이 많았어요. 아마 우리 사단도장교 사병 합쳐서 전라도 출신이 25% 는 했을 겁니다.지금도 당시 기억이 생생해요. 그럴 때 지휘관이라는 게 중요하고 어려워지는 거지요.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주번 총사령한테 내일 아침 7시에 중사 이상 전 장교 하사관을 집합시키라고 지시를 했어요. 우선 내 부하들부터 통솔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였어요.CAC사령부 연병장에서 부하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조국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달렸다. 이 상황은 6·25이후 최대의 위기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이곳에 내려왔다. 그 책임의 막중함을 우리는 깊이 인실을 해야 한다. 나는 사단장으로서 가장 훌륭하고 슬기롭게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서「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이에따라 행동시 할 것을 약속한다. 하나는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민의 군대로서 신뢰를 얻는데 역점을 둔다는 점이다. 나를 믿어달라』 이런 연설을 20분간 했어요.그런데 정말로 부하들은 나를 믿어줬어요. 아무런 큰 사고가 없어 지금도 부하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예요. 우군끼리 사격한 것도 있었지만, 2건의 큰 사고 가 있었는데, 우리 사단에는 흔한 자동 차사고도 없었어요』
헬기로 병력 투입계획 중단
20사단은 광주에 도착한 뒤 어떤 임무를 받았읍니가?
「21일 오후 CAC사령관으로부터 우리 사단이 도청에 있는 공수부대와 교대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당시 광주시민 대표들은 CAC부사령관과 계속 대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시민들은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나갈 것을 요구했대요. 그런데 CAC 에서는 병력이라고는 공수부대 밖에 없는데 그걸 빼낸다는 것은 안된다고 하다가 우리 부대가 도착하자 20사단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제의, 시민대표들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고 하더군요.CAC에서는 저에게 헬기 21대를 동원해 1개 대대를 투입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희 부대 연대장과 대대장 등이 우선 시내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헬기를 타고 도청으로 갔는데, 곧 돌아왔어요.연대장에게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사람이 꽉 차 있어서 헬기로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그래요. 그리고 자기들은 잘 몰랐는데 조종사 말이 헬기가 밑에 쏜 총에 5발이나 맞았다는 거예요. 당시 광주시내는 그렇게 혼란 했습니다. 윤사령관에게 그런 상황을 보고했더니 「그럼 그만두라」고 해 임무교대를 못했어요.21일 밤에는 도청에 있던 공수부대가 철수했고 그날부터 우리 사단은 장성 화순 등 광주시 외곽도로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날부터 광주시내에서는 경찰과 군인이 다 빠져버린 거지요」「광주사태」를 둘러싸고 빛어지는 중요한 쟁점 하나가 진압작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과정을 설명 해주시죠.『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입은 우리 사단을 포함해서 31사단의 일부 병력, CAC의 보병학교 포병학교 병력, 그리고 공수단 등도 함께 나누어 맡았읍니다. 그중 우리가 가장 넓고 중요한 부분을 맡았다고 생각합니다.당시의 작전명령은 지금 그 원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뭏든 5월2i일 오전 CAC사령부에서 26일이 D데이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그 명령을 근거로 이후 사단에 명려을 내렸습니다.그날 오후 내게 작전명령서를 가져왔을 때 나는 작전개념속에 앞에서 내가 이야기한 두 가지 사항을 써 넣었어요. 광주 시민의 명예를 회복시켜준다는 것과 국민의 군대로서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런 명령은 없었지만 나는 역사적인 문제라 생각해 그걸 써넣은 겁니다. 나는 그 원본이 언젠가는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바둑판」 작전계획 수립
-진압작전을 할 때 20사단은 어떤 역할을 했읍니까 ?
『당시 광주시내의 도청 YMCA 사직공원에는 상당히 조직화된 시민군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지역은 일단 공수단이 제압한 후 우리에게 인계해주기로 했어요.나는 우리 사단의 책임구역을.바둑판처럼 구분, 주요지역, 우리가 장악해야 할 지역마다 번호를 붙이고, 각 단위부대별로 책임져야 할 지역을 분담시켰읍니다. 중대별로 경찰을 향도로 앞세우고, 그뒤에 지리를 아는 광주출신병사를 두명씩 붙이고 종대로 진입하라고 지시했읍니다.그리고 책임구역으로 가기 위한 지역 통과는 가능하면 접전이 없도록 지시했어요. 무장한 사람과 조우하면 피하고,상대방이 사격하면 돌아가라고 지시했읍니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응사해야 될 경우에는 무릎 이하를 쏘라는 등 서로 피해가 최소화하도록 지시했읍니다.모두 27일 새벽 4시반까지 책임지역에 도착하라고 명령했읍니다. 새벽 1시경에는 모두 주둔지를 떠났읍니다.4시반이 되어 점검을 해보니 2개 중대가 아직 목표지역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민간인과 우리 부하 각 1명씩 사망 했다는 보고예요. 우리 사단이 광주를 진입하면서 교전한 곳은 딱 한군데였읍니다. 나는 상황이 끝난 것으로 판단했읍니다. 그래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2개 중대를 기다리지 않고 작전종료를 선언했읍니다. 즉각 CAC사령부에서 방송을 하더군요. 「광주사태는 끝났다」 「군인이 진주했다」 「누구도 움직이지 말라」 「나오지 말라」 「대항하지 말라」는 얘기를 했어요. 22일 CAC사령관으로 부임한 소준열장군이 했어요』
-공수부대가 진압을 하기로 했다는 3개 지역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졌읍니까?
『공원에 서 는 별 사항이 없 었고, YMCA와 도청에서는 약간의 교전이 있었대요. 인계를 받았을 뿐이니까 자세한 사항은 잘 모르겠웁니다. 작전은 오전 6시반쯤에 거의 끝났어요』
이틀동안 광주교도소 경비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1명과 군인 1명만이 죽었다고 하셨는데, 20사단이 철수할 때까지의 희생자는 그것이 전부입니까?
『큰 상황은 아니었지만, 외곽에서 도중에 세번 정도의 상황이 벌어졌었지요.목포 가는 길 입구와 통합병원 입구,그리고 교도소에서 발생했읍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교도소까지 맡으셨읍니까?
『23, 24일 양일간을 우리가 맡았어요.공수단이 23일까지 있다가 시내에 들어가는 관계로 그날 우리가 인계 받았거든요』
-외곽경계중에 사상자가 있었나요.
『우리는 군인이 한명, 민간인이 수명 죽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교소도 쪽은 민간인 사상자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내 부하중에 서는 진입과정에서 한명 죽고 그전에 병원 앞에서 한명 죽었어요』
-두 사람 다 총을 맞고 죽은 겁니까 ?
『음, 둘 다 총을 맞고 즉사했어요. 그리고 우리 사단에 의해 숨진 분이 몇분 있다는 거지요. 우리 부대가 어디 있었다는 것을 알테니까, 나는 이 문제를 공개할 생각이에요. 나도 우리 사단에 의해서 죽은 사람이 누구냐, 왜 죽었느냐를 알고 싶어요.내가 교수들이나 학생들한테 얘기할 때 두 가지를 얘기해요.나보고 원흉 또는 살인마라고 하는데, 그것은 내가 직접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아닐 겁니다. 내 밑에 있는 어떤 부하가 그랬을 것 아니냐는 생각들이겠지요.그러나 내 부하가 1만명 정도나 되었는데, 이들의 3분의 2는 고졸 이상이고 대부분이 중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다는 것에 유의해보라고 말했읍니다.그런 사람들에게 만일 소대장이나 중대장 또는 대대장이, 아니할 말로 너는 오늘 저녁에 가서 잔학행위를 하고 암매장을 하고 돌아오라고 지시할 때 그 명령을 따를 부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런 부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시킬 지휘관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나는 대학교수들 보고 당신 제자가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고 벗으면 민간인 아니냐고 얘기합니다. 당신 제자들이 그런 일을 할 순 있겠느냐는 거지요.둘째 만일 어떤 이유로든지 그런 일이 있었다치면 비밀이 보장 안되는 이 나라에서 내가 그것을 숨길 수 있겠읍니까? 그럴러면 그런 사람한테 아니할 말로 일생 먹을 돈을 주든지 직장을 보장해주든지, 아니면 지금도 특별히 모셔야 될 입장일텐데, 나는 그런 일을 한 적도 없고 내 부하 가운데도 그런 일은 한 사람이 없어요. 그럴 능력도 없지만‥‥』
光州진입후 무슨 일을 했나
-그런 경우는 총장께서 장악하고 있던 예하부대 얘기지요. 광주사태의 발생일인 5월17일 부터의 초기 상황때는 다르지 않습니까 ?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몰라요. 내가 가기 전의 얘기니까‥‥ 최근 당시 이희성 계엄사랑관이 일부 군인이 초기 진압때 과격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느냐에 대해서는 내가 알 수가 없어 요』
-진압작전이 끝난 후에는 어떤 조치를취했습니까 ?
『28일 우리 사단사령부가 광주 CAC에 있을 때인데, 참모들에게 광주가 고향인 사람을 파악해 보라고 하니까 3,4백 명쯤 될 것이라고 해요. 나는 이들을 오늘 오후 5시부터 내일 5시까지 외박을 보내라고 지시했어요. 그랬더니 참모들이 「지금 외박이 무슨 말입니까, 큰일납니다」 이래요. 그래서 내가 「왜 큰일이 나겠는가. 자기 부모 찾아간다는 데 문제될 게 뭐 있나. 총은 소지하지 말고 철모에다 탄띠만 차고 가도록 하라」고 했어요.내가 지금까지도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병사들이 그 다음날 17시에 전원 다 귀대한 겁니다. 그중에는 과일도 파오고 집에서 떡을 해온 군인도 있었어요. 내가 몇 사람을 사단장실로 불렀어요. 가족 안부를 물었더니 부모들이 처음에는 반신반의하고 있다가 병사들을 보고서야 20사단이 왔다는 것을 믿어 주었다는 겁니다. 상당수가 우리를 공수부대라고 얘기하던 때였으니까요. 장병 3백 여명이 가족들한테 갔다온 것이 광주의 분위기를 개선하는 데에 기여했다고 느껴져요」
-계속 광주시내에 계셨습니까 ?
『27일날 아침부터 상무관의 많은 시체와 부상자들을 모두 병원에 보내주고 불에 탄 KBS MBC, 그리고 거리를 청소했어요. 총을 메고서요.우리는 광주에서 한달 가까이 있다가 철수하게 되었어요. 철수할 때 송정리에 1천여명이 나와 환송식을 해주어 감격스러웠읍니다. 상당히 열렬한 환송을 받았어요. 그렇게 많은 분들이 환송해주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우리 사단이 여기 와서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 또 이런 상황이 다시 일어나면 안되겠다,희생자 부 상자들에 대해서 정부가 좀 잘 처리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그리고 지금 내가 이런 얘기를 해서 좋을지 모르겠는데‥‥ 나를 광주사태와 연결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나하고 별 관런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로지 CAC사령관의 명령에 따라서 들어가고 나가고 이리 가고 저리 가는 등의 일밖에 하지 않았어요』
사태의 진실 밝혀져야
-광주사태의 현장을 본 느낌은 어땠읍니까?
『비극적인 사태에 대해서 굉장히 걱정을 했지요. 지금 와서는 왜 27일날 들어갔느냐, 더 기다릴 수 없었느냐 하는 얘기도 나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나하고 관련된 부분이 아니에요. 그것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나니까요. 하옇든 여러가지 아쉬운 게 있었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수습을 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그렇게 해주도록 도와준 분들한테 고맙다고 생각했읍니다.그리고,나는 육사 생도시절은 물론 각종교육을 광주에서 받는 등 기본적으로 광주와 인연이 깊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데, 광주가 정치문제화되면서, 5賊도 되었다가 원흉도 되었는데,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해요』
-혹시 광주사태 후에 나온 소설가 黃晳暎씨의 『시대의 어둠을 넘어 죽음을 넘어」같은 책들을 읽어 보셨나요?
『그런 책을 자세히는 못 읽고 대충 보았는데, 관심있게 읽은 부분은 우리 사 단과 관련된 부분이 있느냐 없느냐 여부였어요. 지금가지 내가 본 책중에서는 우리 사단과 직접 관련된 부분을 몇 봤어요』
-지금까지는 당시 사단장으로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셨는데, 국회의원에 집권당 사무총장으로서 말씀해보시지요.
『민화위 입장이 여당과 정부의 기본입장입니다. 여러가지 정치상황으로 미루어 조사를 인한 특위가 구성되고, 또 그 조사특위를 통해 초기진압관계의 여러가지 상황들이 조사되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가급적이면 최대한으로 진실에 가깝게 한번 재조사를 해보자는 입장입니다.그리고 정부측은 비극적인 사태였기에 가급적이면 덮어들려고 해온 데 반해 광주시민이나 국민들은 자꾸 더 조사해야 된다고 하다보니까 한쪽 얘기만 굉장히 커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번에 광주사태의 과정을 재조사할 경우 양쪽 얘기가 같이 드러나 진실이 어디에 있던 양쪽은 왜 이런 상황으로 갔느냐 하는 것을 진실의 바탕 위에서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봅니다』
-거기에서 만약 처벌문제가 나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읍니까 ?
『처벌문제가 나오면 결국 양쪽이 다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양쪽이 다 문제가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민화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교도소를 습격하러 왔다든가, 또는 총격전에서 양쪽이 다 쏜거지 한쪽만 쏜 것은 아니 거든요.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정부가 사과의 뜻을 표명했고 민화위에서 7가지 결론을 냈듯이, 물론 그 7가지라는 것이 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하 여튼 상처를 치유하고 보상하는 쪽으로 일단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증언대에 설 용의는?
-民和委결론보다 총장 말씀이 한발짝 더 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는 조사할 필요없다, 새삼스럽게 다시 꺼내느냐는 얘기 아니었읍니까?
『조사를 안하고는 어려운 상황인 것 같아요. 사실은 그런 상황에서 군인이 어떻게 대처해야 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또 그리고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광주사태가 있었기 때문에 그후 계엄령이나 위수령이 발동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 이유가 뭐냐, 군대를 데모에 투입하니까 위험이 많았다는 측면에서 그런 결과가 비롯되었다고 생각해요. 국내상황 때문에 군대가 시위진압에 투입 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한국적 상황에서는 극내의 소요나 데모에 전방에 있는 군인이 간다든지 또는 특전사가 간다든지 하는 일은 없어야겠어요. 만약 가더라도 데모진압을 위해 적절하게 훈련된 병력을 투입해야겠지요』
-최근 「盧在鳳교수」 파동이란 게 있음니다만, 사실 전에도 그런 견해가 있었거든요. 광주사태의 원인에 대해서 인데, 먼저 당시 계엄사 발표에 반영되었듯이 김대중씨가 돈까지 대며 시켰다는 것이 하나이고, 두번째 입장은 평화적인 데모를 하는데 과잉진압을 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사태가 확대되었다는 것이었읍니다. 최근에는 권력에 의해 사전에 예비되고 음모 된 것이라는 의견도 강하게 나오고 있는데요. 다시 말해 도발을 유발하기 위해서 과잉진압을 했다는 거지요.
「사전에 준비되었다는 것은 틀린다고 생각해요. 우선 우리 사단이 갑자기 명령을 받고 아무런 사전 지식, 준비가 없이 내려갔다는 사실에서 손쉽게 찾아 볼 수 있읍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광주에 공수단을 보낸 사실을 들어 사전조작되었다고 하는 것 같은데, 내가알기로는 전라북도 금마에 있는 공수여단중 2개 대개가 광주에, 나머지는 전북대학교에 갔어요. 그리고 서을 근처에 있는 공수단은 서울의 중요한 학교를 점령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5·17계엄확대조치를 취하면서 가까이 있는 부대를 가까운 지역으로 투입한 거지, 특별히 광주만을 의식해서 새로운 부대를 보낸 것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 문제는 조사과정에서 드러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盧교수 얘기 등은 내가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일단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더 규명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조사가 진행되면 증언대에 서시겠읍니까 ?
「글쎄, 이럴 경우11는 어떻게 답변해야하나. 나는 잘못이 없다고 혼자서 주장 할 수도 없고‥‥(웃음). 조사의 진행과정이 어떻게 될 지 아직 예측할 수가 없으니까 지금은 이렇다 저렇다 매기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내가 자연인같으면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는데 이제는 국회의원이고 한 정당의 사무총장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조사하는 과정을 보고 결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은데‥‥
-나중에 여러가지로 애기도 틀으셨을 텐데 광주사태의 원인을 무엇으로 생각하십니까 ?
「광주사태가 끝난 뒤 참모총장한테 보고하면서 광주사태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읍니다. 첫째 인사에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육군은 10∼15년 내에 전라도출신 육군참모총장을 내도록 하자고 건의드린 바가 있어요. 인사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소외의식이 있는 것을 내가 피부로 느끼고 왔기 때문이지요. 둘째는 유언비어를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하며, 마지막으로는 CAC 31사단 공수단 등 데모진압 경험이 없는부대가 과격한 데모 진압의 적시성과 적절성을 놓친 것 같다고 보고드렸어요』박총장은 거의 천부적 이라 할 만큼 얘기를 잘했다. 그러나 정치인들에게서 쉽게 볼 수있는 계산된 발언이나, 책임 있는 자리의 인사들이 취하는 「공식적」인 대답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계」를 벗어나지는 않는느낌이었다.광주사태에 대처해 나가는 당시 군의자세, 잔학행위의 실상을 그는 전혀 언급치 않았다. 오직 자신과 자신이 지휘했던 부대의 진압작전, 그것도 「최선을 다 했다』는 면만을 부각시켰다. 이른바 팡주사태의 다섯 원홍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칭되고 있는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현재로서는「또하나의 일면적인 진실」예 불과하다고할 수 있지 않을까. 광주사태의 장막은 아직 덜 걷혀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그도 강력히 주장했지만, 철저한 조사는 양측 모두 원하는 바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고 생각된다.
군의 민간교육이수 평가
우리가 군정종식이라 군사문화의 단절을 얘기하는 것은 명령과 복종, 돌파와 기습의 전술로는 이 나라 앞에 있는 산적한 많은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이다. 5·16이후 그런 군사적인 자세로 경제와 산업을 건설하고 해외시장에 뛰어들어 성과를 올린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군사문화적 문제 해결방식 때문에 광주의 비극이 저질러지고, 지금 한창 폭로되고 있는 全斗煥전대통령 일가의 非理가 저런 식으로 행해질 수 있었지 않을까.군사문화의 청산은 군은 본연의 임무에 전념하라는 요구이다. 특히 군 출신인사들의 정치불간여 요청이 전제되어 있다.이제 정치와 경제 등은 민간전문가 직업 정치인이나 관료, 경제계인사에 맡기고 군은 오직 국방에만 열중해달라는 것이다.그러나 역사의 진전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 시대의 단절이라고들 말하지만 역시 그것조차도 그앞 시대의 경험이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아르헨티나의 군 역사를 읽에 보았는데요. 군인들이 의도적으로 문민적 교육을 많이 받는데, 어느 단계에 오니까 군인들이 이른바 문민관료들을 약간 무시하는 태도가 나타나요. 공부 해보니까 나도 너 정도 안다는 그 의식이 생긴 거지요. 결국 아르헨티나군부의 정치개입이 시작 되는데요 박총장께서는 육사를 졸업하시고 서울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으신 분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우리 사관학교의 경우 위탁교육을 받는 등 민간교육이수자들은 선배 기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육사교수로 남았어요. 위탁교육을 받고 야전으로 나가서 성공한 사람은 손을 꼽을 만큼 적어요.여기서 한가지 생각나는게 있읍니다. 60년대부터 미국은 장교들에 대한 교육을 크게 강화했읍니다. 소련이 장교들에 대한 교육투자를 엄청나게 하는 것을 보고 반성한 거죠. 그래서 60년대 중반부터 미국도 장교들자 대한 대학교육을 거의 의무화하다시피 했어요. 예를 들면 미국 장군들은 대개 하나 또는 두가지 석사학위를 가지고 있읍니다. 그'영향으로 60년대 후반부터 우리 군도 위탁교육을 시키게 됩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교수요원 보다는 야전쪽에 많죠.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런 교육과정을 통해서 민군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기 보다는 장교들의 공부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바깥 분위기도 많이 알게 된다는 점에서 크게 기여했다고 봅니다』
-우리들이 보기에 군인 아니면 어떻게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었겠는가라고 생각하지만, 본인들은 「나처럼 불행한 군인이 다시 없기를 바란다』고 표현을 하던데요.
『나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요. 나는 스스로 옷 벗고 나왔읍니다.우리 동기생 사이에 「3박」이란 말이 생긴 것은 장군진급 무렵인데요. 대령은 같이 줬는데 나하고 朴世直 올림픽조직위원장이 먼저 별을 달았고 그 다음해에 朴熙道 전 참모총장이 장군이 줬어요. 그런데 81년에 박세직씨가 옷을 벗고 나가고, 나하고 박희도장군하고 같이 쓰리스타가 됐어요. 그런데 내가 보안사령관을 좀 오래 했어요. 내 생각에 보안사령관이라는 특수한 직위에 오래 있은 사람이 야전군에 복귀하는 것이 안 좋겠다 싶어 박희도장군이 군사령관난갈 무렵 옷벗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어요』
朴 ·全 ·廬대통령에 대한 평가
-박총장께서는 선거를 거쳐 정치에 입문하셨으니 민간정치인일 수도 있겠읍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읍니다. 이 말은 앞으로 육사출신이 다시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는 뜻 아니겠읍니까 ?
『노대통령이 지난번 대통령선거때 우리 나라 민주화를 위하는 도정에서 스스로가 중간적인 위치에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말이 아주 좋은 대답아 된다고 생각합니다. 노대통령도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나도 다른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2번이나 국민의 선출에 의해 국회의원이 됐는데, 아직도 군인정치인으로 보신다면, 글쎄요, 수긍하기 어려운데요』
-호주신문에서 한때 유력한 대통령후보로 소개된 적이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내가 85년 7월 호주에 갔더니 훈계자라고 보도가 나왔었는데, 전혀 엉터리 얘깁니다. 그런 얘기가 나오는 원인은 우리나라 사람한테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가운데서 소개하는 사람이 괜히 과장되게 얘기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그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라고 일축하고 대통령자격도 없을 뿐더러 그런 야심도 없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세 대통령의 인물평을 한다면 어떻습니까.
『나는 朴대통령은 잘 몰라요. 전대통령은 강력한 리더쉽으로 아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돌봐주는 분으로, 어떤 위기도 강력히 뚫고 나가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늘 가졌어요.노대통령께서는 많이 듣고 맡기고 무리를 별로 안하는 그런 분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6·29선언」 나을메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평상시와 다른 상당히 결단력이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읍니다.특히 최근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보니까 나라의 민주발전에 대해서는 아주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분이 늘 하시는 말씀 가운데 「나는 정권유지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체제수호에 사명이 있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를 상당히 강조하시고 분명한 입장을 늘 표명하십니다. 더군다나 노대통령의 경우 지난 3년동안 대표위원직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우리 국가 지도자중에서 처음으로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을 직접 체험, 극복하고 그리고 결과를 얻었는데,그 경험이 앞으로 대통령 하시는데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나회」는 어떤 모임인가
「하나회」는 육사출신 인맥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전두환, 노태우대통령이 모두 하나회 출신이고 「하나회」회원이 되는 길이 출세를 보장한다는 세평도있다.
-박총장께서도 하나회 회원이라고 하던데, 도대체 하나회의 장체가 무엇입니까.
『지금 하나회 하나회 그러는데 나는 하나회라고 하는 것을 수경 사에서 근무할 때 알았어요. 회원이 됐지요. 내가 제일 늦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회는 윤필용장군이 그만 두면서 없어졌어요』
-항간에는 현재도 대위급까지 조직돼 있다고 하던데요.
『내가 보안사령관 할 때 그런 말이 있어서 확인했더니 그메 없어겼다 그래요」
-하나회는 가입조건이 까다롭다면서요?
『그건 잘 몰라요」
-가입할 때 무슨 의식같은 것은 없읍니까?
『그런 것도 없었어요」
一박대통령이 군도 혹은 지휘봉을 주었다는 설도 있는데‥‥
『에이, 그런 것 없었어요」박총장은 고향이 충북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라는 한촌출신이다. 그는 闖谷이라는 고향이름을 한문 뜻까지 풀이하면서 한적한 동네임을 강조한다. 그는 한학을하는 조부밑에서 장손으로 자랐다. 국민학교를 고향에서 나온 뒤 대전으로 진출,대전중학교에 들어간 뒤 5학년 때 6.25를맞는다.18세 되던 그해 경남 밀양까지 피난을 갔던 소년 박준병은 다리 밑에서 피난생활을 하다 50년 9월16일 이등병으로 입대, 코 밑까지 닿는 Ml 소총을 메고 그가 인터뷰과정에서 자꾸 「운명」이라고 되뇌는 「군인」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2년여 사병생활을 하던 그는 정규 육군사관학교 생도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 청운의 꿈을 가꾸는 무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육사를 졸업했던 그는 서울대학에 편입, 역사학도가 된다.
-서울대 사학과에 학사편입하셨는데,왜 사학과를 택하셨융니까 ?
『사관학교 다닐 때부터 역사공부를 잘 했어요. 당시 육사에 좋은 교수분들이 많았고, 개인적으로 취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직업군인으로서도 역사공부가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어요.졸업하고 전방에 가서 소대장 하다가 사관학교에서 위탁교육생으로 선발됐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중위때인 57년 12월에 명령이 났는데, 당시 李翰林교장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이장군은 「군인이 무식하다」는 말을 안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제도를 만들었다고 취지를 설명하고 20년 30년후 나라의 지도자가 줬을 때에 대비, 유능한 친구를 많이 만들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읍니다. 그리고 사관학교 교수 질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는데,감명이 깊었읍니다. 그래서 서울대에 58년 4월부터 2년동안 다녔는데, 그 뒤 저는 동숭동캠퍼스를 영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도 지나 가다가 보면 그때 생각이 나요』
陸士졸업후 서울대에서 공부
서울대를 졸업한 박중위는 다시 육사교관으로 돌아와 육사 20기생을 1년동안 가르치며 교단에 섰다. 그러던중 당시 1군사령관 이한림장군의 요청으로 부관이 되어 군부대로 돌아갔다. 여기서 대위였던 그는 또 「5.16」이라는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이장군과 함께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영어의 몸이 되기도 한다. 부관이니까 연행되는 사령관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 따라오지 말라는 이한림장군과 함께 연행 투옥을 같이 당한 것이다.
-이한림장군 연행시 車智激 대위가 폭행하는 것을 보셨읍니까 ?
『폭행하는 것은 못보았고, 권총은 뺏겼어요. 권총을 찾아보라고 그러셨는데 결국 못찾았읍니다』
-이한림장군이 권총 뺏기기 전에 「나 쏴라」하고 저항했다는데‥‥‥‥
『잘 모르는 이야기인데요. 어쪘건 마포교도소에서 한달쯤 있다 나왔는데, 이 장군은 3개월 가량 있었지요. 그뒤 저는 당시 혁명검찰부장 朴蒼宕씨 주선으로 일선 중대장이 되어 다시 야전군이 뙜어요. 이어 연대 작전주임, 고등군사반 교육, 사단교육과장 등을 지내다가소령때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 있던중 미국에 갔다 왔어요」
-무슨 일로 가셨읍니까 ?
『스페셜 워페어 센터라고 하는 곳인데 특수전 센터죠. 흔히 케네디쌘터라고 하는데 공수훈련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입니다. Cl(coIBlterinsurgency), 즉 對民心理戰 과정이었읍니다」
-월남전에서 심리전으로 유명하셨다던데‥‥‥‥ 어렵지는 않았나요.
『1년8개월 있었는데, 심리전 많이 했지요. 우리가 미군보다 기습을 덜 받은 것은 심리전 효과의 한 예입니다. 남의 나라라 그런지 민족성 이해에도 시간이 걸리고 어려웠읍니다. 독특한 풍토와 함께 민족심리가 다르니까 그것 파악하는데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베트공 비 라를 모아 분석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분석해서 보고하는 바람에 당시 驗越사령관 蒙命新장군한테 칭찬받기도 했죠」월남에서 돌아온 그는 휴전선부근의 동해를 근처에서 중령으로 일선 대대장을 맡는다. 이후 계속 12기 선두주자로 승진을 거듭했다.
-진급이 동기들에 비해서 제일 빠르신, 세상에 알려진 선두주자 요건이 있지않습니까? 고향이 경상도라든가, 하나회 멤버여야 된다든가, 그런 요건은 별로 안 갖추신 것 같은데‥‥
『간첩을 많이 잡은 덕분인 것 같아요. 강원도 고성군 건봉산 앞에 있는 최전방을 지키는 일선 대대장으로 1년6개월 있었는데, 3개월을 제외하고는 철책선 근무를 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도 간첩 잡은 수는 내 기록을 못깬대요』그는 간첩을 잡고 공비를 소탕했던 얘기를 옛날 얘기하듯이 들려준다.그는 대망의 별(장군)을 75년에 달게된다. 승진과정이 궁금해서 물었더니 또 운명론을 꺼냈다.『처음엔 좀 불리하다는 생각이었어요. 12기의 선두그룹 세사람 중에 둘이 된다는 거예요. 박세직 박희도대령과 나 세사람인데, 그중에서 내가 제일 쳐져요. 연대장도 늦게 나갔고 진급심사 당시(74년 11월) 백령도에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장군으로 승진됐다는 특명이 내려왔어요』중위때부터 알고 지내고 연대장으로 모셨던 k장군이 우연히 장군 심사위원장으로 들어간 것이 그의 장군승진에 결정적이었다고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역시 승진운이 남다르게 좋은 군인이었다고 할까.
「운명」의 '20사단장 취임
그뒤 그는 소장이 되어 수도근교의 20사단 사단장으로 나간다. 당시 공교롭게도 3사단과 20사단장 자리가 비었는데,순환보직 원칙에 따라 박세직장군이 3사단장, 박장군은 79년 8월3일 20사단장으로 부임했다. 20사단은 유사시 서울의 계엄업무를 담당하는 부대, 그는 20사단장으로서 자신의 운명이 된 「12.121, 그리고 『5.17J 등 운명을 바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10.26J때 상황이 어떠 했읍니까
『관사에 찾아온 친지와 저녁을 먹고 있는데 밤 8시경 군사령관께서 이유도 설명않고 사단을 가장 빠른 시간안에 서울 태능으로 이동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출동했어요. 갑자기 비상을 걸고 사단을 움직이려니 굉장히 힘들었어요. 10월27일 아침 4시인가 4시반인가, 그 무렵에 우리가 태능에 도착했어요. 아주 빨리 옳긴 거죠. 그때서야 박대통령이 돌아가신 것을 알았어요』
-10월26일 밤 8시, 그렇게 빨리 사단병력을 태능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좀 이상한데요.
『鄭昇和참모총장이 육본벙커에서 비상을 건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제가 야전군 지휘관중에 제일 먼저 연락을 받았을 거에요』「10.26i을 계기로,출동한 박장군은 서울에 주둔중 운명의 「12.12J를 맞았고,다음해 7월 1년만에 20사단장직을 마친다.
-「12.12J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하십니까? 「쿠데타」설과 「수사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두 가지 절이 있는데‥‥
『당연히 후자지요.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상황이 그런 형태로·전개되리라고는 생각을 안했던 것이 사실이예요. 그것은 그러니까 그날‥‥‥‥ 나중에 얘기하지요. 이 다음에 기회가 또 있겠지요 뭐』
-일부에서는 「12.12J주도세력에 「무임승차」했다는 평가도 있는데‥‥
『그것도 역사에 맡깁시다. 나는 사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얘기 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 해석도 있고 저런 해석도 있고 하니까‥‥ 집요한 질문에도 그는 손을 내저으며 말문을 막는다. 그래도 내친김에 한마디 더 물었다.
-「12.12J에는 어떻게 참여하십니까.
『서울에 주둔해 있던 한 부대의 지휘관 으로 개인적으로 참여한 거지요. 우리 부대는 참여 안했어요』
「막강」한 保安司令官 역임
-박대통령의 운명소식을 듣고는 소감이 어떠셨읍니까 ?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우리는 그 내 용은 잘 몰랐지만 솔직히 얘기하면 정치하면서 유신의 문제점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국론분열의 시작, 다시말해 체제논쟁은 유신과 관련이 깊다는 생각이 들어요』「10.26J과 「12.12J를 거친 그는 80년대 초 새로운 제5공화국 시대가 막을 열 때 그대로 군문에 남는다. 그는 군인사를 맡는 인사참모부장으로 있다가 산천초목도 떤다(?)는 막강한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대통령이 가장 심사숙고하는 군인사가 보안사령관이라고 생각되는덴, 그 자리를 맡으신 이유가 「따로 있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지 ?
『참모총장이 보안사령관으로 추천한다 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감니까」했더니 「그렇게 결정이 됐다」고 해서 81년 7월 발령을 받았어요.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고요』
-보안사령관을 오래 하셨는데, 최근 안기부 보안사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된다는 여론이 많은데 전임자로서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
『민정당 지구당위원장을 맡던 날 기자들을 초청했는데, 기자들이 「당신 정치 하다 왔느냐」하는 얘기를 해요. 모두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러나 나는 재임중 「군인은 정치에 간여하지 못한다」 『정치하고-싶으면 옷 벗고 나 가라」 「군인하고 정치인하고는 가급적 만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주문해왔어요』
-법률상으로는 내란죄나 보안에 관계 되는 대민수사는 보안사에서도 가능한.것으로 되어 있는데, 앞으로도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
『지금 논의되는 것을 보면 앞으로는 그런 일을 안하는 쪽 아니에요? 박총장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스스로는 운명적으로 군인이라고 생각하고 군인으로서 인생을 마감하려 했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10.26」을 만나고「12.12」에 참가했고, 결국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정치 입문」의 변을 들어 보자.『보안Al령관으로 있던 중 정년이 앞당겨지고 해서 옷을 벗기로 결심했어요. 당시 權翊鉉씨 권유로 지역구를 맡게 되었지요. 그래서 84년 9월13일 지구당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았어요』고향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라는 할아버지 말씀이 늘 생각되었다는 그는 고향인 충남옥천에서 민정당 공천으로 출마, 거뜬히 금메달을 따고 12대 때 의정 단상에 오른다.초선의원이었지만 그는 민정당국책조청위원장, 중집위원 그리고 국회 보사위원장 등을 역임, 그가 여권내에서 만만치 않은 실력자임을 과시했다. 재선인 그는 이제 집권여당인 민정당 사무총장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올랐다.
權翊鉉씨의 권유로 政界入門
-정국이 「與小野大」 아닙니까. 미국의 경우 이런 일이 자주 있고, 또 정국에 별영향을 안 받는데, 같은 대통령중심 제라도 프랑스에서는 야당이 우세하면 야당에 組閣權을 주지 않아요? 「미테랑」대통령이 「시락」수상에게 한 것처럼‥‥우리 헌법은 물론 여소야대현상을 전제하지 않은 측면이 있지만, 전체적인 틀은 프랑스틀이에요. 그렇다면 야당이 이겼으면, 이른바 프랑스식의 구상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조금 넓혀서 이야기 하면 「보수연합이론」과 통하는 얘기인데‥‥
『프랑스에서 「시락」이 수상이 된 것은「시락」의 정당이 「미테랑」의 정당보다 의석수가 많으니까 그런거지요. 우리나라의 경우도 여당보다 많은 의석수를 가진 야당이 나오면 생각할 수 있는 문제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제1당 이니까 아직 그런 상황은 생각할 수가 없죠. 앞으로 야권 3당이 하나로 통합이 된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현재 당을 포함한 여권의 속성으로 보아 사회의 변화에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에 의문을 표시하는 의견이 많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의 체질개선과 관련해서
『그 얘기도 부담이 되지만 대통령의 말씀도 부담이 돼요. 대통령께서는 「앞으로 나한테 이럴까요 저럴까요 묻지 말고 소신껏 하라」고 하시거든요. 요즘 가끔 뵈면 「당신들이 좋다고 하면 따라 갈테니까 좀 잘하라」고 하셔요. 이렇게 양쪽의 압력을 다 받는데, 전환기적 사명을 부여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총선이 끝난 뒤 민정당의 비대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의견도 있었는데요.
『당에도 변화가 올 것입니다. 요약을 하면 당원을 100만명 규모 정도로 정예화하고, 복합적인 조직의 系線을 단축시켜 직능분야 조직을 보완할 계획입니다. 특히 청년문제는 지난번 대통령선거 때의 경험을 수용해 청년조직을 강화할 계획인데, 일달 7월 말까지 정리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어요」
-제13대 국회가 풀어나갈 문제가 「광주문제」하고 「5공화국 비리」, 그중에서도「全斗煥대통령문제」인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상당히 많은 국민들이 걱정을 하고 또 어떤 점에서는 노여워하는 측면도 없지 않은데‥‥ 어쪘건 노대통령께서 성역이 없다는 말을 하셨는데, 그말은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조사를 못 하지는 않는다는 개념 아닙니까? 全전 대통령이 무슨 권력이 있어서 조사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그 분이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했고 대통령 재임중 국제외교의 황금시대를 열어 국위선양을 했고 올림픽 유치, 물가안정 등 그분의 공을 평가해야 된다 이겁니다. 또 평화로운 정권의 교체를 이룩해야 되고 또 통치권하고 관련된 부분도 있으니까 이런 점에서 전직 대통령을 조사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비리에 관련된 부분은 조사를 안 할 경우에 제6공화국의 부담이 상당히 크지 않겠읍니까?
「하여간 앞으로 신중히 생각해서 해야겠지요. 그리고 유언비어성 공격도 흑백이 가려져야 할 거예요. 그분이 만약 비리와 관련 있다면, 정확한 근거를 제시해야지요. 그냥 세간의 뜬소문을 가지고 전직 대통령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소망스럽지 않다고 봐요』
-요즘 현안문제가 된 통일논의에 대해 한 말씀 않고 넘어가실 수 없겠지요.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해요. 「6·10」은 그냥 넘어갔는데 우리 당이 우선 그런 학생들 하고 별로 인연이 없어요. 그들의 얘기를 당이 듣고 수용할 부분은 수용하고 함께 고민도 하고, 여권에서 부족했을 점이 있으면 보완해 나가면서 이 문제를 국민과 함께 처리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학생들 주장에도 상당한 논리의 비약이 있고, 비현실적인 면이 있으니까 국민과 함께 설득해 가면서 검토해 나가야겠지요」인터뷰를 시작한지 벌써 세시간이 넘어 자정이 가까와겼다. 그런데도 그는 자세 한번 흐트리지 않고 꼿꼿찼게 앉아서 정치인다운 수사적 표현도 별로 없이 명쾌하게 답변했다. 특히 주요한 일이 있었던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그의 기억력에 새삼 놀랐다. 그의 사생활도 궁금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호화주택에 사신다고 말들이 많던데
「집이 좀 크고 좋지요. 그런데 그 집엔 사연이 있어요. 원래 그 집은 목사였던 장인께서 장남(박총장의 처남)과 함께 살려고 크게 지은 집인데, 처가집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가는 바람에 들어가 사는 겁니다』62년 12월15.일 박세직씨 부인의 소개로 연애결혼한 박총장은 슬하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연년생일 1남 1녀를 두고 있다. 부인은 이화여대 사대 교육학과를 나와 박총장이 71년 대령을 달 때까지 서을 한양여중에서 교편을 잡았다.
一부인 고생 안 시키셨읍니까.
『고생요? 말도 못할 정도지요. 대대장 시절에 우리집 사람이 겨울방학을 맞아 강원도 고성까지 왔어요. 나는 전방에 나가 있고 우리집 사람은 거진 앞바다의 초도리라고 하는 한촌에 있었는데, 나는 1주일에 한번 겨우 내려왔어요. 눈이 많이 오거나 상황이 있으면 그것도안되고‥‥ 생과부생활 많이 시켰지요. 20여년전 이야깁니다』원래 대담이란 형식은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는 것인데도 대답에 막힘이 없다. 가끔 『이렇게 막 얘기해도 정말괜찰은 건지』하면서도 별 주저 없이 자신을 털어놓는다. 자신에 관한 한 감추거나 덮어둘게 뭐가 있느냐는 느낌을 주는 태도였다.어쨌건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른 것 같다. 그의 군인생활중 논란의 대상이 되는 광주문제는 검증의 단계를 거쳐야 된다. 또 여당 사무총장으로서의 역할도 취임 1개월을 겨우 넘긴 지금 단계에선 왈가왈부할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다.4시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물어볼 것도 많고, 듣고 싶은 것도 많다. 더 캐어물어야 될 것이 없지도 않다. 우리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광주에 관계된 군인사중 최초의 공식 발언자 박총장
결코 평탄하지만든 .않을 여소야대의 정치 구도에서 삼면초가(三面票默) 민전당의 실질적총지휘탑인 사두총장을 맡고 있는 박준의원(54)은 그의 경력으로만 본다면 꽤 '무서운' 사람으로르 생각하기 쉽다. 광주항쟁 당시 20사단장으로서 진압을 지휘한 이유로 일부에서는 그를 '광주항쟁의 다섯 원흉중 한사람으로 부르고 있는데가 소우 '경복궁팀'의 일원으로 '12·12'에 참여했고 보안사령관이라는 직함을 거첬기 때문 더욱 그렇다 따라서 정가 밖에서는 박층장을 강성 이미지의 인물로 분류하기도 하나 자연인 박준병을 평편할 때 맨 먼저 들먹여지는 덕목은 바로 '온화'라는 것이다. 장장 34년이라는 세월을 철두철미한 무장(武將)으로서만 있었으니까 차갑고 거칠 것이란 추측이 지배적이지만 그를 실제 로 접해 보면 쉽게 그가 소탈하면서도 온화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무장출신인 그에게 문인으로서의 소양과 자질이 있다는 것 또한 여러 의미를 던져준다. 치밀하고 뛰어난 기억력, 예리한 판단력도평가자료로 삼아야 될 것같다.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그가 지난 85년 민정당 국책조정위원장으로 그 실세를 드러내고, 지난 총선에서 민정당이 얻은 선거결과에 따라 심명보 전 사무총장의 후임으로 등장한 사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도 한다. 85년 국책조정위에 등장할 당시 정계 안팎에서 '마친내 수면에 떠오른 핵잠수함'으로 그를 지칭했드시 민정당의 '빅 카드'로서 그는 거대야당과의 등반자적 관계로 향후 정국을 이끝어 나갈 위치에 선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사두총장직을 맡아 '말도 많았던 '청와대 4자회담을 성사시키면서 당정간의 핵심역할을 맡게된 그가 더욱 관심을 끄는 이유는 아무래도 80년 광주의 진압군을 지휘한 사단장으로서 '광주민주화 운등'의 정확한 진상을 밝혀내자는 목소리가 점점 드높아지고 있는 당면과제와 밀착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벌써 5년이라 세월이 홀러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광주에 관계된 군인사증에서 자신의 입으로 직접 80년 광주를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염두해 둔다면 '최초의 공식 발언자'로서 박총장의 '광주 문제' 증언이 그만큼 중요성을 지니는 동시에 '운동'이냐 '투쟁'이냐는 명칭만으로도 난항을 거듭한 '조사특위 '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광주 문제'에 대한 군의 입장 및 배경들을 파악할 수 지렛대도 된다.아울러 현시국에 대한 군부의 동향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80년 5월17일. 박준병사단장은 그날 떨어진 계엄확대 조치와 함께 명령에 따라 사령부를 동국대학으로 옮기고 서울시 10여개 대학에 부대를 진주시켰다.20사단은 유사시 서울의 계엄업무를 담당하는 부대.그에게 1개 연대를 광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5월 20일.그때까지 그는 광주에서 무슨 일문제가 있는지 몰랐다고 한다.그러나 21일 서울을 떠나 아침에 송정리에 도착하고서야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그는 집차를 포함한 10엳의 차량이 광주 톨게이트에서 민간인에게 빼앗겼다는 보고를 받고난 후였다.특히 그의 차는 별판이 열어 젖힌 채 광주 시내를 돌아다녀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그의 부대가 괌주 진입을 한 것은 5월 27일 밤에 도청에 있던 공수부대가 철수를 하고 광주시내에서는 경찰과 군인이 다 빠져버린 후였다.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입은 20사단 31사단의 일부 병력 CAC(전투교육사령부)의 보병학교 병력,공수단이 함께 나누어 맡았는데 박총장의 말에 의하면 20사단이 가장 넓고 중요한 부분을 맡았으나 도청과 YMCA,사직공원에는 상당히 조직화된 시민군이 있다는 전제하에 일단 공수단이 제압한 후 20사단에게 인계해 주기로 했다고 한다.
20사단 병력중에는 전라도출신이 25%쯤 됐다.
27일 새벽 주둔지를 떠나 책임지 역에 도착해 작전종료된 시간이 4시 30분,그의 표현대로하면 '약간의 교전이 있었던' YMCA와 도청에서는 오전 6시 반쯤에 '진압'이 거의 끝났다그의 말로는 그의 사단이 맡은 진압과정에서 죽은 사람은 민간인 1명,군인이 1명이고 시내의외각 경계중에 민간인이 수명,군인 1명이라고 했다.20사단이 광주로 진입하면서 교전한 곳은 딱 한군데 였다는 것이다.27일 진압작전이 진행되기 직전 박준병소장은 CAC 사령부 연병장에서 부하들에게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이에따라 행동할 것을 약속한다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그 하나는 광주 시민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고,또 하나는 국민의 군대로서 신뢰를 얻는데 역점을 둔다는 내용의 연설이었다.그는 이 말을 작전명령서의 작전개념속에도 써넣었는데 언젠가는 그 원본이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당시 20사단에는 전라도 출신이 장교 사병 합쳐서 25%는 됐는데 공주출신 부하들을 어떻게 할 거냐는 생각으로 고민을 하다가 우선 부하들부터 통솔해야한다는 마음으로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는 요지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20사단은 27일 이후 광주에서 한달 가까이 있다가 철수했다. 최근 모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간 밝힌 '광주사태의 현장을 본 느낌은 다음과 같다."비극절인 사태에 대해서 굉장히 걱정을 했지요. 지금와서는 왜 27일날 들어갔느냐,더 기다릴 수 없느냐 하는 얘기도 나을 수 있겠지만,그것은 나하고 관련된 부분이 아니에요. 그것은 네가 결정한 것이 아니니까요. 하여튼 여러가지 아쉬운 게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 이렇게 수습을 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 그렇게 해주도족 도와준 분들에게 고맙다고 생각했음읍니다.그리고 나는 육사 생도시절은 물론 각종 교육을 광주에서 받는 등 기본적으로 광주와 인연이 깊어 종은 인상을 갖고 있는데, 광주가 정치문제화되면서,5적도 되었다가 원흉도 되었는데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해요"
진실의 바장 위에 철저히.조사할 터
그는 광주문 조사에 대해서도 이렇게 서명한다."민화위 입장이 여당과 정부의 기본 입장입니다. 여려가지 정치상황으로 미루어 조사를 위한 특위가 구성되고, 또 그 조사특위를 통해 초기진압 관계의 여러 가지 상황들이 조사되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가급적이면 최대한으로 진실에 가깝게 한번 재조사를 해보자는 입장입니다.그리고 정부측은 비극적인 사태였기에 가급적이면 덮어둘려고 해온데 반해 광주시민이나 국민들은 자꾸 더 조사해야된다고 하다보니까 한쪽 얘기만 굉장히 커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번 광주사태의 과정을 재조사 할 경우 양쪽 얘기가 같이 드려나 진실이 어디에 있던 양쪽은 왜 이런 상황으로 갔느냐 하는 것으 진실의 바탕 위에서 조사해야 한다고 봅니다"그는 광주사태가 끝난 뒤 참모총장에게 보고하면서 광주사태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로 인사(人事)에 원인이 있는것 같다. 앞으로 육군은 10-l5년 내에 전라도출신 육군참도총장을 내도록 하자. 인사를 증심으로 하는 강력한 소외의식이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왔다.
둘째르 유언비어를 중요한 원인으로 생 각한다.마지막으로 CAC,31사단 ,공수단 등 데도진압 경험이 없는 부대가 과격한 데모진압에 투입됨으로써 데모진압의 적시성과 적절성을 농친 것 같다.뚤론 ,90년 광주에 대한 이같은 그의 논평은 아직 공식적인 것도 아니고 조사특위가 곁성되기 직전에 나온 그의 입장표명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올바른 판단은 현재 양측 모두가 철저한 조사를 원하고 있으니 그 후에나 내릴 문제이다.아직 검증의 단계가 남아 있기도 하다.광주문제는 5공화국 출범과도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의 판단 여부에 따라서 군부가 위기 의식을 느낄 수도 있다. 군의 정치개입과 관련, 그의 생각을 들어보면."군부의 정치개입은 기본적으로 그 나라적 정치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경우 정치문화가 군부의 정치개입을 수용하는 수준보다 높기 때문에 군의 정치개입은 어느 경우도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단지 북한이 내부의 혼란 교란 분열을 도발의 구실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이 오판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그의 말대로 우리나라의 군부가 어느 경우에든 정치개입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에 같이 한다면 그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 못지않게 명령과 복종에 철저히 길들여진 군이 개입된 정치로는 이 나라 앞에 산적해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 또한 현 단계에서 절실한 것이 아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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