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정호용, 광주사태 책임자 밝히다.이태원(월간경향, 1988. 5)
본문
鄭鎬溶 광주사태 책임자 밝히다
第6共和政의 견인차
제 13대 국회의원의 총선 열기가 지난해의 대통령선거에 이어 다시 고조되고 있다. 기자 大邱 西區 甲에 민정당 공천으로 출마, 민의에 수렴을 외치며 민의에 호소하고 있는 정호용씨를 만나 그와의 두 번째의 공식적인 면담을 가지게 되었다.두번의 만남은 각각 처해진 상황과 입장이 대조적이었다. 첫 번째의 만남은 그가 최고통치권자의 임명에 의해 내무장관직에 재직하고 있던 지난해 5월 초순 때였다. 당시는 4·13호헌조치 직후로 정국이 경색일변로로 치닫는 등 극히 어수선한 시기였다. 따라서 제한된 입장표명의 선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처음 모처에서 (풀어놓고) 방담 형식으로 하자던 약속이 딱딱한 집무실에서 의례적인 면담을 하는 것으로 갑자기 변경되는 곡절을 겪기도 했던 것이다. 기자는 그때의 기사를 주로 인간적인 측면을 다루는 것으로 대신하였다.이번 두 번째의 만남은 임시로 정한 대구의 한 아파트의 거실에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해가며 이뤄졌다. 정치상황은 물론 시대상황이 반민주적인 어떤 제약도 용납치 않게 돼가고 있고, 시기가 그간의 공과에 대한 민의의 심판을 목전에 두고 있어 비교적 허심탄회한 심경을 토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적합한 정치적인 문제, 이를테면 제 5공화국 탄생 전후한 시기부터 제 6공화국의 탄생 때까지의 중요 사건과 사태를 주화제로 삼았다.그간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알려졌던 대로 그는 제5공화국에 이은 제 6공화국의 탄생에 중요역할을 담당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12·12사태 직후 특전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5·17광주사태의 와중에 휘말리는 수난을 겪었고, 국보위 · 입법회의 시절에는 군 3역의 한사람으로 참여, 5공화국탄생에 기여한 인물로 부상되었고, 그 뒤 육참총장, 내무장관, 국방장관직을 역임 하면서는 6 공화국 탄생에 유형 ·무형의 영향력을 행사, 그 견인차역할을 해 왔다.
그가 현직에 있었던 7, 8년여간 발생했던 여러 정치적 · 사회적인 사건들은 지난번 선거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중요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쟁점이된 여러 사건과 그와의 관계는 세상에 알려진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고 이번 면담에서 주장했다. 여러 부분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곤 하여 사실과 진실이 왜곡되었거나 굴절되었다고 개탄하는 것 이었다.그의 이러한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중대한 발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진실이 왜곡됐다’는 말의 근저에는 왜곡되지 않은 문자 그대로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가 개재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의 이런 말은 선거를 의식한 ‘면피성’발언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기자는 그에게서 어떤 ‘비밀스런 얘기’가 나올 것을 기대하면서 질문에 들어 갔다.
-지나간 여러 정치적인 사건 중에서 우선적으로 다뤄 져야하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을 듣다면 4·13호헌조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항간에 民正黨의 ‘ 着 이란 말까지 나오게’한 그 ‘섣부른’ 정치적 행위의 배경이 미상불 궁금해집니다. 그때의 직책은 무엇이었으며 입장은 어떠했습니까. 전후사정도 아울러 부연해 주었으면 합니다.
‘4·13 당시 후계자는 未定이었다’
"역설적인 표현이 될지 결과론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뒤에 있은 6·29선언, 다시 말해 민주화시대를 선언케한 기폭제 가 4· 13이 라고 표현해도 무방하지 않나 싶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4· 13조치는 불합리한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우선 시기적으로 부적절했고,역사의 정체 내지는 후퇴의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것이8·9월경에 나왔더라면 국정을 책임진 정부로서는 불가피한 조처라고 동정도 받았을 겁니다. 합리성도 부여받고 설득력도 있었을 것이고요. 정치 일정에 별로 차질을 가져오지 않고 대화 상대인 야당도 분열돼 있지 않았는데, 대화 중단 · 정치 발전 중단 ·정국 경화를 자초할 건 없지 않습니까? 물론 당시의 대화 상대인 야당이 이민우 파동 등으로 분당되는 어수선한 사태로 있었습니다만, 1년을 타헙 해서 안 됐다해서 갑자기 그런 조처를 내리는 건 아무래도 졸작 인듯 싶습니다.
-그렇다면 사전에 전연 몰랐다는뜻 아닙니까, 그같은 중요한 정책이라면 오랜 시간을 두고 중지를 모아 충분히 검토한 나머지 내려지는 게 상례일 것 같은데요."당시 난 내무장관직에 있었는데 전연 몰랐어요. 당시 신문지상에 자주 거명 되곤 하던 측근의 한사람이었던 盧信永씨조차도 발표 하루 전인 일요일(4월12일)오후에야 통보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통치권자를 에워싼 주변의 몇 몇 아첨 배들이 급조 해낸 합작품인 셈입니다. 정부 여당의 중론이 모아지지 않는 졸작이었지요,사실 前대통령은 단임 실현의 의지만큼은 분명히 갖고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집권연장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다만 누구를 후임자로 하는가를 정하지 못한 채 심사숙고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주변의 몇몇 아부파가 私的 지원세력을 규합해서 권력연장을 획책하려 했던 나머지 내려진 조치였습니다. 아부 파들에 의해 자주 이름이 떠올려 지근하던 노신영씨조차 몰랐다면 그 숫자가 얼마인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안기부에서는 물론 모를 턱이 없잖겠냐는 짐작도 들테지만‥‥‥
-그렇다면 그 얼마 뒤인 5월 26일에 있었던 개각 조치, 즉 박종철군의 고문 치사 사건 축소 조작이 터지면서 단행된 개각조치가 4·13과 어떤 상관관계에 있었던 것인지가 궁금해지는군요. 내무장관 취임 뒤 당시의 노 대표는 중요시기에 큰 일을 할 인물 이라 했고, 사실 그때 정 위원장이 굳이 책임지고 사퇴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말썽의 소지를 지녔던 각료와 함께 물러났습니다. 박군사건으로 부임한 내무장관이 박군사건으로 물러 난 저간의 사정 속에는 당시 주무장관으로서 말못할 부분도 없지 않았을 것 같은데"내무장관은 처음부터 원치 않던 자리가 되어 여러번 고사했어요. 일이 너무 많아 내 능력으로는 감당키 어렵게 여겨졌고, 또 군복을 벗은 민간인으로의 첫출발인데다 시기적으로 어렵게도 여겨져서‥‥‥
그런데 박군사건을 보니 분통이 터집디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고문을 해서 죽일 수 있느냐, 군생활 35년여를 통해 부하들에게 손찌검 한번을 안 해봐서 인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분개 해 했습니다. 天災가 나도 물러나야 하는데 人災가 났는데도 물러가지 않다니 그 책임자는 물론 무관했던 각료도 도의상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내각 일각에서는 박군사건을 정치적으로 너무 확대시킨다며 신중론을 펴자고 합디다만 책임져야한 사람이 물러나지 않고 존신하려 하니 총사퇴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물러나게 할 밖에 더 있습니까. 또 그들이 현직에 있는한 책임정치는 허울좋은 이름뿐일 터이고, 정국은 정국대로 난기류속에 계속 휘말릴 터이고
-5·26개각 바로 뒤의 청와대 연회에서 全 전대통령은 정부 ·여당의 중요인사 앞에 노대표를 차기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천했고, 6월10일 전당대회에서 정식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습니다. 일설로는 5·26개각이 노대표를 후보자로 지명하는 길을 열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무렵 후계자로는 노대표가 적임자일 것으로 믿어져 그 길을 열어 놓기 위해 그 반대자들을 현직에서 함께 물러나도록끔 한 것이라는 관측도 있던데‥‥"그건 내가 할 말이 아닐 뿐더러 판단할 일은 더군다나 아니지요. 다만 내지론은 책임정치란 반드시 그렇게 해야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요. 여론이 물끓듯 한다면 그 여론을 수렴해야 옳지 한 갖 미봉책으로 어물적 넘어가려는 것은 전시대적인 발상밖엔 안되지요. 후계자 문제를 굳이 거론하자면 당시도 그랬고 지금도 잘 된 걸로 여겨지는데 민정당 내에서의 후계자감은 노대표밖에 없었다고 봐요. 7년여 동안 후계자를 특별히 키운 적이 없었고, 노대표라고 특별히 지원받은 것도 없었지만 능력대로, 그의 말대로 순리대로 적임자가 돼 있었던 것이지요. 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그런 저런 추측이 나도는가 싶군요"그가 특히 힘주어 '책임정치' 운운하는 데는 사실 상반된 해석이 가능하다. 그가 용퇴한 데 대해 그야말로 책임을 분명히 지는 행위라는 긍정적인 해석이 있는 반면, 당시 개각조치가 여론무마용이었다는 비난도 동시에 있었던 것이다.박군사건의 축소조작은 본질적으로 제5공화국의 '검은 부분'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각료들의 사임만은 분명히 여론의 세찬 공격을 완화시키려는 의도가 더 큰 의도였음을 부정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이 박군사건에 대해 전면적인 공개수사를 지시할 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 당시 그런저런 분위기 속에서 ‘그 정도’라도 할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는 현실적인 면을 감안해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軍출동 일보 직전에서 中止
-6월10일이란 날은 집권 민정당과 야당 ·재야권에게는 서로 반대되는 의미와 성격을 지닌 행사를 한 날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여권에서는 노대표가 차기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그 축하연이 힐튼호텔에서 있었고, 재야 · 야당에서는 이한열군의 추도식을 최루탄가스 속에서 대대적으로 열고 있었습니다. 이 두대회의 어느쪽이 참다운 여론인지 물을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당시 집권당의 ‘속사정’은 어땠는지 말씀해 주시지요."그날 나도 축하연회장으로 가며 오며 최루탄 가스를 좀 마셨고, 추모행사 뒤의 데모,현장에 밀행을 하면서는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그날 추도식과 데모의 특징은 장소가 시내 여러곳이었다는 것 외에 재야와 야당인사 · 학생뿐이 아닌 그 이상의 많은 시민이 참여했 다는 것들로 들 수 있습니다. 또 피크타임을 이루던 시각이 밤 9시에서 10시 사이의 한밤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밤중시위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봤어요. 의외의 변수로 작용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그 시위를 통해 여론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어요. 4· 13조치에 대한 시민들의 반대의사표시인데, 고걸 막말로 하면 대통령을 왜 나눠먹기식으로 하느냐, 이것이었어요. 체육관에서의 선거, 그건 民意와는 무관한 王朝적인 수권행사에 불과하다는 거지요. 여태까지는 그런 의견이 재야와 야당, 즉 일부 국민에 의해서만 주장되었던 슬로건 정도로만 여겨져왔는데 사실은 그게 民意였다는걸 깨닫았지요. 우수한 지휘관은 사실의 확인 이상으로 그 감을 잘 잡아야 전쟁에 이길 수 있어요. 명동 · 을지로 ·시청앞 등지의 데모가 곧 가라앉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여론의 집요한 표출과 그 흐름은 그 날밤 이후 끊이지 않고 계속 나오지 않았습니까? "
-그렇지만 정부 · 여당 일각에서는 그 반대로 봤던 거 아닙니까. 그러길래 집권당내 ‘강경친위세력 ’들이 결정적인 ‘失着’만 거듭하지 않았습니까. 鄭위원장께서 사태를 올바로 판단했다면 뭔가 사태의 反轉을 위해 ‘역할’을 해야만 했으리라고 보는데‥‥"내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아잡으려고 고심하고 있었지요, 여론의 수렴 없이는 앞날의 정국이 밝지 않을 걸로 확신 비슷이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17일 밤이던가 군의 후배들 찾아와 절정에 달한 데모를 진정시키기 위해 군의 출동이 곧 있을 거라고 알려왔어요. 모두 무척 걱정하는 눈치더군요. 나 역시 그랬고요. 그래서 이튿날 아침 張世東 전 안기부장을 단나 군출동은 절대로 안된다며 출동중지를 건의해달차 얘기 했어요. 그 사람은 그랬으면 좋겠는데 자기의 능력밖의 일이라며 난색을 표명하더군요. "
'직선제 수용, 나도 訓手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 軍의 출동까지는 안가지 않았습니까?"글쌔‥‥ 노 대표에게 전화를 넣었지요. 그래서 당 대표위원실에서 만났는데 거기서 군출동은 계엄령과 직결되고, 그런 물리적 힘으로는 소요사태를 해결 해낼 수 없으니 군출동을 중지시켜 달라고 했어요. 당사에서 노 대표를 만난 사실을 신문에서 짧막하게 보도되기도 했는데 짧은 시간에 무척 깊은 사실을 건의했어요. 5공화국이 안고 있는 최대의 취약점이 물리적 방법을 동반한 통치 형태인데 이제는 그런 방법으로는 해결이 벽에 부딪쳤다, 오직 하나의 방법은 정치적인 해결 방법, 즉 정치적 결단을 내려 국민의 주장인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다, 시간이 촉박하니 우선 대통령을 찾아가 군출동을 중지시키도록 해달라 이렇게 건의했어요. 노 대표의 안색이 달라지고 놀라더군요. "
-직선제 수용이 비로소 대두되어 본격적인 거론이 있었던 게 그날이었다면 결국 6·29선언 그것은 鄭위원장과의 합작품 이랄 수 있겠군요, 그건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 같은데‥‥"꼭 그렇게 의미를 부여 할 수는 없겠지요. 노 대표도 내심 정국타개책에 누구 못잖은 고심을 했을테고, 그 방법의 하나로 직선제를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 그러길래 그 길로 청와대를 방문, 기차타기 일보직전의 군출동을 중지시켜 달라는 건의를 한 게 아닙니까. 그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의 해결책으로 보았기 때문에 건의하고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 해야지요. 직선제발상의 공헌을 이야기하는데, 군출동중지의 대안일뿐 다른 헌책은 아닙니다. 원래 장기와 바둑판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한 두 수를 더 본다지 않습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방관자의 훈수일 뿐이지 당사자의 결단과 용기는 아니잖아요, 중요한 것은 책임있게 훈수를 받아들여 실천에 옳기는 당사자의 용기와 영단, 그것 이라고 봐요. "
-항간에는 6·29선언은 노대표의 ‘작전상후퇴’ 일 뿐이라는 해석도 없지 않습니다. 사실 그 이후의 정국전개는 與圈이 파국을 맞지 않고 재집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걸었다는 결과론적 해석이 전혀 틀리다고만은 할 수 없는 상황 아니 었습니까? 慮대통령과 지근거리에 있었던 鄭위원장의 ‘해명’이 궁금해지는군요."그건 험담가들의 공연한 트집입니다. 생각해봐요. 중대한 정책을 결정하는데는 많은 사전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자료 ·인원 ·시간이 엄청나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國基를 뒤바꿀 정책을 결정하자면 그 이상 필요할 것은 자명하지 않아요. 당시 나는 야인으로 어떤 공 ·사의 조직도 갖지 못하고 있었어요. 고작 몇몇 주변의 지인들에게 의견을 묻곤하는 정도였어요. 그 점은 노대표도 마찬가지였지요. 물론 노대표야 그런 공사의 조직을 동원할 수 있는 자리에는 있었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했어요. 또 시간이 없지 않았습니까. 직선제에서 이긴다 진다는 계산은 전연 없이 그저 난국타개 그것만을 생각했지요. 진다 해도 할 수 없지요. 국민이 심판할 것이니까 승복해야지요. 여당에서 주장해오던 내각제와는 정 반대인 야당의 주장인 직선제 하의 승부가 되어 열 가지로 분석해도 불리하다는 결과밖에 안나오지요. 6·29선언은 그런 맥락에서 찾아야 옳은 역사기록을 남길수 있지 않겠어요?"
-6·29선언 8개항과 鄭위원장과의 관계 는 어떻습니까 ?"8개항과는 전연 무관합니다. 그건 노대표께서 몇몇 측근과 숙의한 결과 만들어진 것입니다. 군출동이 해제되었다는 전화통보를 받은 사흘 뒤엔가 연회동에서 만났는데 그때 직선제에 관해 또 얘기를 나눴어요. 나와 단 둘이만 만난 자리에서 노 대표는 탈당과 후보직 반납을 각오하고 모종의 조치를취해야겠다고 자신의 의지를 다시 밝혔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의논은 없었고 추상적인 의논을 조금 했었지요. 노 대표는 청와대방문 직후부터 6·29선언8개항을 구상하기 시작했었던것 같아요. 난 그날 이후 6·29까지 노대표를 만나지 않았어요 의논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어느 신문지상에 내가 직접 全대통령을 찾아가 군출동중지 등을 건의하지 않은데에 대해 이상한 시각으로 기사화한 것이 보도되었는데, 사이가 소원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때의 사안이 사안인만치 노 대표가 나서는 것이 좋겠다 싶어 일부러 안나선거지요. 웬만큼한 문제라면 평소 바른소리 잘하고 고분고분 말을 잘 듣지 않아 다소 서운해하던 그 점쯤은 개의치 않고 바로 찾아갔겠지요. "
對시민 발포는 자위권 발동(?)
-중요한 정책결정 같은 것에 노대표와 함께 소외된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알려지기로는 두 사람이 중요 사안마다 깊은 자문의 요청을 받았으며 또 결정에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인데, 6월 중순의 군동원 같은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니 이해가 쉬 안 가는군요."노대표 일은 내가 알 바가 없는 일이고‥‥ 내 경우는 현직을 물러나 야인으로 머물고 있어 참여고 소외고를 말할 계제가 아니 지요"
- 지 난 4월 초하루 정부에서 는 5 · 17 광주사태해결을 위한 공식적인 견해 표명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해결될 전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부조치가 미흡하다는 거지요. 그 이유는 광주사태의 책임자의 문책과 발포책임자의 처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鄭위원장께선 국방장관 퇴임직전 기자간담회에서 그 문제를 천명한 걸로 돼 있습니다. 그 당시 중요 지위에 있었던 입장에서 그 점을 재론한다면 역시 같은 대답이겠습니까?"계엄령 하의 군작전에 문책이나 처벌이니를 들고 나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5월17일 0시를 기해 전국계엄이 선포되면서 그 넓은 광주지역에 2개대대 약 5백명의 특전사 소속 계엄군이 내려갔습니다. 사건은 全南大에서 터졌는데 학생들과 계엄군의 충돌이 사태의 첫 발단이었습니다. 데모방지에는 반드시 충돌을 수반합니다. 학생들이 가방 속에 돌멩이를 준비, 투석을 하니까 계엄군이 초동진압에 본때를 뵌다는 심정이 있었던 모양으로 거칠게 진압했었는데 그게 도화선이 된 거지요. 17일 오후무렵께 악성루머가 광주시에 돌아 시민들까지 합세, 데모양상이 돌변했습니다. 사태가 악화되자 발포 여부를 묻는 급전이 날라와 나는지휘계통 안에 서 있지 않았지만 절대 발포 불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데모와 진압이 전투를 방불케 되자 軍의 자위권이 어느 겨를엔가, 누구에겐가에 의해 발동된 것입니다. 데모진압 계엄군에게 시인들이 어떻게 총기로 대항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명백이 국법위반입니다. 총검으로 국법질서를 위반하는 것은 반란에 해당됩니다. 더구나 많은 사상자를 낸 도청탈취와 교도소 습격은 강력한 방어를 수반할 수 밖에 없었어요. 도청에는 당시 상당량 의 TNT가 보관돼 있어 방어가 불가피했고, 교도소는 자위권이 절로 발동되는 곳입니다. 더군다나 계엄하의 군의 자위권을 나무라서는 안됩니다. 앞으로 더 큰 사태가 발생했을 때 군은 어떻게 대처하라는 겁니까."상당히 격앙된 어조로 鄭위원장은 ‘항변’을 하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당시 특전사령관에 있던 사람으로서 예하부대원이 현지에서 도화선을 당겼음을 시인하는 입장에서 그의 책임이 없다고만은 할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가 ‘지휘계통 안에 있지 않았다’는 발언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예하부대원이 출동한 상황에서 비록 계엄하이긴 하지만 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이 지휘계통 안에 있지 않았다면 누가 과연 지휘계통 안에 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한 일이다. 더구나 ‘군의 자위권’ 운운도 글쎄, 논리적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군이 원천적으로 국민을 위해 있다는점을 감안한다면, 그 설득력이 상당히 약화된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鄭위원장의 말은 계속된다."그렇지만 우리는 왜 그런 사태가 벌어졌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거기에는 정체불명 ·출처불명의 군 · 민을 이간질하고 싸움을 붙이는 악성루머가 횡행했다는 것입니다. 총선 전에도 악성루머가 판을 쳤듯이 광주가 바로 그랬다는군요. 당시 총상자가 90여명이 됐는데, 계엄군이 사용한 M16에 희생된 시민은 45명이었다 해요. 계엄군이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시민들을 향해 난사했다는데 계엄군이 사용한 총기는 M16 한가지뿐이었읍니다. 모두가 악성루머에 놀아난 나머지 빚어진 불상사였어요. 아무러나 광주사태는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적군을 막아야 할 군이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고, 국토방위와 국민보호를 하고 있는 군에게 시민들이 총부리를 들이댄 것이 바로 불행 그것이지요. 쌍방 모두가 반성해야 할 불행인 셈이지요. "
-그러나 결과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5공화국 탄생 이후 광주의 시민들은 폭도로 불렸습니다. 6공화국이 새롭게 시작되는 마당에 이와같은 광주의 갈등은 반드시 해소해야 될 시급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부에서 유감이라는 성명이 나왔습니다만 당시의 책임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광주사태는 그 직후에 정확한 조사를 해서 진상을 규명해야 옳았습니다. 그걸 안한 것이 오늘날가지 문제로 살아남은 것이지요. 당시의 책임을 굳이 거론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法統과 力學이라는 두 가지 측면입니다. 법통으로 본다면 전국계엄하의 명령권자가 되겠는데 그건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학적으로 본다면 당시의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겠지요. 모든 시선이 법통 즉 당시 최규하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인 이희성씨 쪽을 버리고 역학 쪽인 당시 실력자 全斗煥 보안사령관에게 초점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鄭위원장이 요약하고 있는 책임소재는 제5공화국 아래에서 그 누구나 심정적으로는 알면서도 ‘말 못했던’ 것 그대로다. 그러한 말이 그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는 데 기자는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그렇지만 그건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겠지요. 군의 자위권 발동의 소산으로 이해된다면 그 책임은 운위될 수가 없지 않겠지요. 법통으로 따진다 해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에 행한 사항에는 형사적인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문제삼을 수가 없지요. 또 역학 쪽으로 따진다 해도 실질적인 실력자는 법적권한과 책임이 없습니다. "
-그렇다고는 하지만 지금 초점이 되고 있는 쪽은 실질적인 실력자인 全斗煥 당시 보안사령관 아닙니까? 국보위를 만들어 정권을 '탈취 '하려는 음모의 일환으로 광주사태를 일으켰다는 것인데…."국보위를 만들어 광주사태를 일으켰다고들 하는데 그건 속단이 아닌가 싶어요. 그 무렵 노장군과 나는 수경사와 특전사일로 정신이 없어 다른 데는 눈돌릴 겨를이 없다시피 해서 중요 정책 결정에 참석한 적이 거의 없었고, 참석해 달라고도 안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군의 정치일선 등장을 바람직하지 않게 보았기 때문에 굳이 참여 할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흐름은 알 수 있었어요. 국호위를 들먹거리곤 하는데, 그건 전장군 측근의 몇몇이 사적으로 3김씨가 안팎으로 어지럽힌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결단력이 부족한 대통령을 보좌할 자문기구 같은 걸 만들면 어떨까 하는 정도의 한두마디 얘기에 불과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어치피 鄭위원장으로서 할 말에는 한계가 분명한 것 같았다. 어떻든 그가 제6공화국에서 (민정당)의 공천을 받은 이상, 또한 제5공화정의 탄생에 어느 정도나마 역할을 한 것이 틀림없는 이상 이 정도의 발언에 만족하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는 듯했다. 화제를 돌려 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새마을 문제에 관해 물었다,
아첨꾼이 빛은 새마을 사건
-새 마을운동본부의 비리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여론을 크게 자극, 全敬煥씨를 구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그같은 엄청난 권력형 비리가 어떻게 묵인 돼 왔는가, 책임의 일단을 내무부 측에도 돌리고 있습니다. 한때 내무부를 맡았던 장관 중의 한사람으로 그점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내무부로 가기 전부터 빨리 갈아치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여론도 빗발치고 권력층 주변에서도 말이 많았어요. 그래서 내무부를 맡자 말자 회장을 갈기로 하고 후임자를 물색해 봤는데 적임자가 영 마땅치 않아요. 고심 끝에 서울헙의회회장을 후임자로 정했는데, 사람이 너무 대가 약하고 겸손해요. 전경환씨를 명예회장으로 추대 하곤 그를 앞장세우는 거 아닙니까. 명예회장은 내무부의 승인이 필요없는 말 그대로 명예직이라 뭐라고 간섭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마을본부의 조직은 박대통령시절부터 좀 이상했습니다. 예산은 정부지원에 의존하는데 조직은 민간자율로 돼 있습니다. 내무부가 관장하고 있지만 완전 독립된 민간기구란 말입니다. 이게 모호한 것입니다. 재임 기간 동안 회장을 바꿔치우는 걸로 그친것은 현직 대통령의 동생을 구속할 수 는 없으니까 나머지는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걸로 믿었어요. 또 현직 재임기간이 넉달 남짓해서 시끄러운 정국과 복잡한 내무행정을 돌아보기 에 도 힘에 벅차서 ‥‥‥
-그렇다면 내무부 이상의 선에서 조치를 취하지 못한 데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인데, 왜 안을 내리지 못하고 방관해 왔을까요 ?"全 전대통령이 동생의 비리에 공정한 수사를 정부측에 의뢰했는데 그게 아마 본인의 숨김없는 심정일 겁니다. 비리를 그렇듯 심각하게 만든 것은 정보 책임자의 직무태만이 빛은 결과입니다. 정보 보고가 안올라갈 턱이 없었는데 아첨 배들이 중간에서 차단해 버려 미처 정확한 정보와 정황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겁니다. 주변의 인사들이 문제가 많다는 조언을 측면으로 몇 차례 했던 것도 알고 있는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 동생을 몇번 불러 진위 여부를 추궁했다 합디다. 그때마다 조언과는 사실이 다르다는 해명을 했었어요. 대통령은 정확한 정보가 없어 단안을 내리지 못했던 거지요. 한마디로 측근과 정보책임자의 직무 유기가 빛은 결과입니다. 아무러나 진작 정리해야 할 사건이었는데, 늦게나마 국민이 원하는 대 로 다 수사할 걸로 믿어집니다. "
제5공화국과 斷絶해야
-새 마을운동본부의 사건이 터지면서 5공화국의 각종 권력형 비리가 연일계속 보도되고 있습니다. 야당도 비리수사와 척결을 주장하고 있으며 여론도 들끓고 있습니다. 정통성이 부여된 6공화국이 5공화국과는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5.5공화국론도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6공화국 탄생에 견인차 역할을 했고, 정계에 입문한 입장에서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6공화국은 어떤 의미로도 정통성이 부여된 정부입니다. 5공화국이 문제가 많았다 해서 그 다음 공화국이 반드시 결별해야 한다는 시각은 옳지 않습니다만 국민이 결별을 원한다면 집권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되는것 아닙니까? 단절할 이유가 있다면 단절해야 하는 것이 6공화국의 과제라고 봅니다. 전시대의 나쁜점은 과감히 버리고 또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계승해서 역사가 이뤄지고 이어지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5공화국이니 6공화국이니 굳이 구분지어 규정할 게 뭐 있을까도 싶군요. 모두가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정부의 정권입니다. 그동안 정부 · 정권이 6번이나 바뀌었는데, 그때마다 역사단절을 한다면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무색해지지 않을까요. 권력형 비리가 있다면 척결해야지요. 그러나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승계해야 옳다고 봅니다. 정부나 정권단위로 볼 게 아니라 국가와 민족단위도 역사를 규정해야 하지않을까 싶습니다. 군정종식 이니 문민 정치니 하는 주장은 아직도 강력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민주시대를 맞는 軍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나조 그런말을 적잖게 들었고 충고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에 대해 나는 尙式정신을 대안으로 제시하여 주장하고 싶습니다. 문민정치도 좋지만 자칫 허약한 국가 나약한 민족을 만들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어요. 멀리 다른 민족 다른 국가를 볼 것 없이 가까운 조선조 5백년을 보면 쉽게 이해될 겁닏. 文과무가 합쳐졌을 때 강성한 국가가 죄고 민족의 우월성도 돋아납니다, 軍政이란 말도 군의 힘을 빌어 권력을 장악했을 때나 해당의 지, 민간인이 되어 민의의 선택을 받아 설립된 정부를 그렇게 매도할 수 없습니다. "
‘軍의 정치 不개입은 나의 신념’
-鄭위원장은 5공화국의 주역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만 더러 비주류 쪽이랄까 권력의 핵심에서 떨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주역인가 싶으면 조역이고 그런가 하면 주역이었단 말입니다. 특히 국방장관 임명 때 그런게 나타난 것 같은데."6·29선언의 후속조치로 단행된 개각때 국방장관으로 입각했지요. 그때 노총재께서 나를 국방장관으로 천거했던 모양입니다. 평소 주의 ·주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소신이 마음에 들었고, 군의 장악도 필요했던가 봐요. 북괴에 대처하는 전술 · 전략과 원만한 대미관계, 그리고 불투명한 군의 위상 정립이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봤던 것 같습니다. 全대통령이 동의를 안했는데 자신도 현직 총재와 대통령후보을 사퇴하겠다고 하며 강력한 천거를 했었지요. 나 때문에 개각이 늦게까지 진통을 겪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국방장관 재직시에도 앞에 말한 것과 비슷한 경우에 처해진 줄로 알려져 있습니다. 노사분규가 한참 격렬해질 무렵군등원이 검토될 때 관계기관대책회의에빠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사실들이 鄭위원장의 '소외설'을 뒷받침하지 않는가 싶습니다만, 이제 지나갈 일이니 허심탄회하게 밝혀도 무방하지 않나 싶습니다."평소에도 그랬고 국방재직시에도 정치성을 띤 군동원은 절대금물이라고 신념으로 걸고 있었어요. 국방장관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재임 중에는 군동원이 없을 거라고 단언까지 했었어요. 그게 그들에게 거북하게 여겨졌던 가봐요. 현대조선 분규로 울산시청이 불타던 날 청와대에서 긴급대책회의가 열렸었는데 내게는 어떤 결정이 난 뒤에 통고를 했어요. 울산 일원에 위수령을 내려야겠다는 통보였습니다. 그 지역 행정책임자들도 군동원을 여러번 요청했던 데에 따른 결정이었지만 나는 우선 시간을 좀 달라고 요청했어요. 6 · 29선언 이후 도처에서 일어난 숱한 노사분규에 경찰력을 동원시키지 않고도 다 해결해왔는데 군동원을 바로 하는 것은 정황판단이 성급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어요. 노총재도 펄쩍 뛰며 반대하더군요. 정국을 도로아미타불로 만든다는 거였지요. 군의 힘을 빌지 않고도 해결되는 길을 찾기로 두 사람의 의기가 투합, 군동원이란 불행한 사태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어요."
기왕 정치를 하려면
-또 앞에서와 갈은 맥락의 질문입니다만, 국보위시절 전후에도 鄭위원장은 상당부분 비난의 표적에 오른 적이 많았었는데, 이 기회에 한번 시원하게 해명해 주시지요."특전사령관직은 12 · 12사태 전에 鄭昇和씨에 의해 거명되었어요. 전임자의 임기가 정월 초순경이어서 나와 노장군이 적임자로 점찍혀 있었어요. 12일 새벽 서울정황을 알려고 올라왔다가 나는 그 자리 에 노장군은 수경 사령관 자리에 전임되었지요. 두 사람은 현직에 매달려 있느라고 다른 일은 돌아 보지 못했고, 광주사태 때도 명령권 밖에 있었어요. 전장군은 보안사와 안기부를 총괄하고 있어 사정이 달랐지만. 국보위 때도 우리는 이름만 걸어놓았지 실제고 한 역할이 없었어요. 가끔 한번 들러보는 정도라고나 할까. 중요 정책결정에는 거의 간여를 안했었고, 그래서 사후에 통고를 받거나 의논을 하는 선에 그쳤어요."
-그런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치 중요 역할을 했다거나 비중과 영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는지…… 이제 민간인의 모습으로 정치마당에 뛰어들었으니 그에 부합하는 면을 보여줘야 할 것으로 믿어 집니다만‥‥"정치적인 야심같은 건 없어요. 아직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야심이 있었다면 국보위 시절에 옷을 벗었을 것아닙니까. 그저 여러 일을 소신껏 하다보니 공교롭게 일이 척 맞아떨어져 결과가 그렇게 나왔을 뿐이지요. 훈수를 제대로 한 것에 불과했다 할까. 이번에도 좀 쉴까 했었어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달아야 하기 때문에 새 정부의 연임권유를 뿌리 쳤고, 대사 자리를 하나 주면 외국으로 나가 공부도 좀 하며 쉬려고 했는데 혼자만 편하러 한다는 말들이 있을 것 같아‥‥ 기반을 닦아놓은 지역구가 없어 전국구 한자리가 적합하다 싶었는데 당에서 기어이 지역구를 맡아라 하더군요. 그래서 기왕 지역출마를 할 바에야 고향쪽이 좋겠다고 대구 서구를 선택했어요. 기왕 맡은 자리. 능력껏 그리고 소신껏 해낼 수 밖에없지 않아요? 그만 일어납시다. "鄭위원장의 성격이 직선적이고 솔직 활달하다는 인상을 줄곧 받아 왔다.
한창 제5공화국의 非理가 총선의 도마 위에 올라 있고, 자신 또한 지역구에서 출마하는 입장인데도 기자와의 인터뷰를 혼쾌히 허락해 준 데서도 그러한 성격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겠다.하지만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끝가지 말을 절제하는 정치인다운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듯했다. 결정적인 발언은 끝까지 유보조항을 달았던 것이다. 軍의 정치 불개입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고 있고, 어려운 시기에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아마도 역사의 평가를 따로 받지 않을까 하는 인상을 받으면서, 동시에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자신도 모르게 비치는 듯한 느낌을 기자가 받았다면 그것은 착각인 것일까 ?그가 판단하는 ‘그 어느 때’가 올 때 보다 솔직한 발언을 하기를 기대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第6共和政의 견인차
제 13대 국회의원의 총선 열기가 지난해의 대통령선거에 이어 다시 고조되고 있다. 기자 大邱 西區 甲에 민정당 공천으로 출마, 민의에 수렴을 외치며 민의에 호소하고 있는 정호용씨를 만나 그와의 두 번째의 공식적인 면담을 가지게 되었다.두번의 만남은 각각 처해진 상황과 입장이 대조적이었다. 첫 번째의 만남은 그가 최고통치권자의 임명에 의해 내무장관직에 재직하고 있던 지난해 5월 초순 때였다. 당시는 4·13호헌조치 직후로 정국이 경색일변로로 치닫는 등 극히 어수선한 시기였다. 따라서 제한된 입장표명의 선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처음 모처에서 (풀어놓고) 방담 형식으로 하자던 약속이 딱딱한 집무실에서 의례적인 면담을 하는 것으로 갑자기 변경되는 곡절을 겪기도 했던 것이다. 기자는 그때의 기사를 주로 인간적인 측면을 다루는 것으로 대신하였다.이번 두 번째의 만남은 임시로 정한 대구의 한 아파트의 거실에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해가며 이뤄졌다. 정치상황은 물론 시대상황이 반민주적인 어떤 제약도 용납치 않게 돼가고 있고, 시기가 그간의 공과에 대한 민의의 심판을 목전에 두고 있어 비교적 허심탄회한 심경을 토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적합한 정치적인 문제, 이를테면 제 5공화국 탄생 전후한 시기부터 제 6공화국의 탄생 때까지의 중요 사건과 사태를 주화제로 삼았다.그간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알려졌던 대로 그는 제5공화국에 이은 제 6공화국의 탄생에 중요역할을 담당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12·12사태 직후 특전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5·17광주사태의 와중에 휘말리는 수난을 겪었고, 국보위 · 입법회의 시절에는 군 3역의 한사람으로 참여, 5공화국탄생에 기여한 인물로 부상되었고, 그 뒤 육참총장, 내무장관, 국방장관직을 역임 하면서는 6 공화국 탄생에 유형 ·무형의 영향력을 행사, 그 견인차역할을 해 왔다.
그가 현직에 있었던 7, 8년여간 발생했던 여러 정치적 · 사회적인 사건들은 지난번 선거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중요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쟁점이된 여러 사건과 그와의 관계는 세상에 알려진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고 이번 면담에서 주장했다. 여러 부분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곤 하여 사실과 진실이 왜곡되었거나 굴절되었다고 개탄하는 것 이었다.그의 이러한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중대한 발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진실이 왜곡됐다’는 말의 근저에는 왜곡되지 않은 문자 그대로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가 개재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의 이런 말은 선거를 의식한 ‘면피성’발언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기자는 그에게서 어떤 ‘비밀스런 얘기’가 나올 것을 기대하면서 질문에 들어 갔다.
-지나간 여러 정치적인 사건 중에서 우선적으로 다뤄 져야하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을 듣다면 4·13호헌조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항간에 民正黨의 ‘ 着 이란 말까지 나오게’한 그 ‘섣부른’ 정치적 행위의 배경이 미상불 궁금해집니다. 그때의 직책은 무엇이었으며 입장은 어떠했습니까. 전후사정도 아울러 부연해 주었으면 합니다.
‘4·13 당시 후계자는 未定이었다’
"역설적인 표현이 될지 결과론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뒤에 있은 6·29선언, 다시 말해 민주화시대를 선언케한 기폭제 가 4· 13이 라고 표현해도 무방하지 않나 싶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4· 13조치는 불합리한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우선 시기적으로 부적절했고,역사의 정체 내지는 후퇴의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것이8·9월경에 나왔더라면 국정을 책임진 정부로서는 불가피한 조처라고 동정도 받았을 겁니다. 합리성도 부여받고 설득력도 있었을 것이고요. 정치 일정에 별로 차질을 가져오지 않고 대화 상대인 야당도 분열돼 있지 않았는데, 대화 중단 · 정치 발전 중단 ·정국 경화를 자초할 건 없지 않습니까? 물론 당시의 대화 상대인 야당이 이민우 파동 등으로 분당되는 어수선한 사태로 있었습니다만, 1년을 타헙 해서 안 됐다해서 갑자기 그런 조처를 내리는 건 아무래도 졸작 인듯 싶습니다.
-그렇다면 사전에 전연 몰랐다는뜻 아닙니까, 그같은 중요한 정책이라면 오랜 시간을 두고 중지를 모아 충분히 검토한 나머지 내려지는 게 상례일 것 같은데요."당시 난 내무장관직에 있었는데 전연 몰랐어요. 당시 신문지상에 자주 거명 되곤 하던 측근의 한사람이었던 盧信永씨조차도 발표 하루 전인 일요일(4월12일)오후에야 통보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통치권자를 에워싼 주변의 몇 몇 아첨 배들이 급조 해낸 합작품인 셈입니다. 정부 여당의 중론이 모아지지 않는 졸작이었지요,사실 前대통령은 단임 실현의 의지만큼은 분명히 갖고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집권연장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다만 누구를 후임자로 하는가를 정하지 못한 채 심사숙고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주변의 몇몇 아부파가 私的 지원세력을 규합해서 권력연장을 획책하려 했던 나머지 내려진 조치였습니다. 아부 파들에 의해 자주 이름이 떠올려 지근하던 노신영씨조차 몰랐다면 그 숫자가 얼마인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안기부에서는 물론 모를 턱이 없잖겠냐는 짐작도 들테지만‥‥‥
-그렇다면 그 얼마 뒤인 5월 26일에 있었던 개각 조치, 즉 박종철군의 고문 치사 사건 축소 조작이 터지면서 단행된 개각조치가 4·13과 어떤 상관관계에 있었던 것인지가 궁금해지는군요. 내무장관 취임 뒤 당시의 노 대표는 중요시기에 큰 일을 할 인물 이라 했고, 사실 그때 정 위원장이 굳이 책임지고 사퇴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말썽의 소지를 지녔던 각료와 함께 물러났습니다. 박군사건으로 부임한 내무장관이 박군사건으로 물러 난 저간의 사정 속에는 당시 주무장관으로서 말못할 부분도 없지 않았을 것 같은데"내무장관은 처음부터 원치 않던 자리가 되어 여러번 고사했어요. 일이 너무 많아 내 능력으로는 감당키 어렵게 여겨졌고, 또 군복을 벗은 민간인으로의 첫출발인데다 시기적으로 어렵게도 여겨져서‥‥‥
그런데 박군사건을 보니 분통이 터집디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고문을 해서 죽일 수 있느냐, 군생활 35년여를 통해 부하들에게 손찌검 한번을 안 해봐서 인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분개 해 했습니다. 天災가 나도 물러나야 하는데 人災가 났는데도 물러가지 않다니 그 책임자는 물론 무관했던 각료도 도의상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내각 일각에서는 박군사건을 정치적으로 너무 확대시킨다며 신중론을 펴자고 합디다만 책임져야한 사람이 물러나지 않고 존신하려 하니 총사퇴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물러나게 할 밖에 더 있습니까. 또 그들이 현직에 있는한 책임정치는 허울좋은 이름뿐일 터이고, 정국은 정국대로 난기류속에 계속 휘말릴 터이고
-5·26개각 바로 뒤의 청와대 연회에서 全 전대통령은 정부 ·여당의 중요인사 앞에 노대표를 차기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천했고, 6월10일 전당대회에서 정식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습니다. 일설로는 5·26개각이 노대표를 후보자로 지명하는 길을 열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무렵 후계자로는 노대표가 적임자일 것으로 믿어져 그 길을 열어 놓기 위해 그 반대자들을 현직에서 함께 물러나도록끔 한 것이라는 관측도 있던데‥‥"그건 내가 할 말이 아닐 뿐더러 판단할 일은 더군다나 아니지요. 다만 내지론은 책임정치란 반드시 그렇게 해야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요. 여론이 물끓듯 한다면 그 여론을 수렴해야 옳지 한 갖 미봉책으로 어물적 넘어가려는 것은 전시대적인 발상밖엔 안되지요. 후계자 문제를 굳이 거론하자면 당시도 그랬고 지금도 잘 된 걸로 여겨지는데 민정당 내에서의 후계자감은 노대표밖에 없었다고 봐요. 7년여 동안 후계자를 특별히 키운 적이 없었고, 노대표라고 특별히 지원받은 것도 없었지만 능력대로, 그의 말대로 순리대로 적임자가 돼 있었던 것이지요. 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그런 저런 추측이 나도는가 싶군요"그가 특히 힘주어 '책임정치' 운운하는 데는 사실 상반된 해석이 가능하다. 그가 용퇴한 데 대해 그야말로 책임을 분명히 지는 행위라는 긍정적인 해석이 있는 반면, 당시 개각조치가 여론무마용이었다는 비난도 동시에 있었던 것이다.박군사건의 축소조작은 본질적으로 제5공화국의 '검은 부분'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각료들의 사임만은 분명히 여론의 세찬 공격을 완화시키려는 의도가 더 큰 의도였음을 부정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이 박군사건에 대해 전면적인 공개수사를 지시할 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 당시 그런저런 분위기 속에서 ‘그 정도’라도 할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는 현실적인 면을 감안해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軍출동 일보 직전에서 中止
-6월10일이란 날은 집권 민정당과 야당 ·재야권에게는 서로 반대되는 의미와 성격을 지닌 행사를 한 날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여권에서는 노대표가 차기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그 축하연이 힐튼호텔에서 있었고, 재야 · 야당에서는 이한열군의 추도식을 최루탄가스 속에서 대대적으로 열고 있었습니다. 이 두대회의 어느쪽이 참다운 여론인지 물을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당시 집권당의 ‘속사정’은 어땠는지 말씀해 주시지요."그날 나도 축하연회장으로 가며 오며 최루탄 가스를 좀 마셨고, 추모행사 뒤의 데모,현장에 밀행을 하면서는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그날 추도식과 데모의 특징은 장소가 시내 여러곳이었다는 것 외에 재야와 야당인사 · 학생뿐이 아닌 그 이상의 많은 시민이 참여했 다는 것들로 들 수 있습니다. 또 피크타임을 이루던 시각이 밤 9시에서 10시 사이의 한밤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밤중시위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봤어요. 의외의 변수로 작용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그 시위를 통해 여론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어요. 4· 13조치에 대한 시민들의 반대의사표시인데, 고걸 막말로 하면 대통령을 왜 나눠먹기식으로 하느냐, 이것이었어요. 체육관에서의 선거, 그건 民意와는 무관한 王朝적인 수권행사에 불과하다는 거지요. 여태까지는 그런 의견이 재야와 야당, 즉 일부 국민에 의해서만 주장되었던 슬로건 정도로만 여겨져왔는데 사실은 그게 民意였다는걸 깨닫았지요. 우수한 지휘관은 사실의 확인 이상으로 그 감을 잘 잡아야 전쟁에 이길 수 있어요. 명동 · 을지로 ·시청앞 등지의 데모가 곧 가라앉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여론의 집요한 표출과 그 흐름은 그 날밤 이후 끊이지 않고 계속 나오지 않았습니까? "
-그렇지만 정부 · 여당 일각에서는 그 반대로 봤던 거 아닙니까. 그러길래 집권당내 ‘강경친위세력 ’들이 결정적인 ‘失着’만 거듭하지 않았습니까. 鄭위원장께서 사태를 올바로 판단했다면 뭔가 사태의 反轉을 위해 ‘역할’을 해야만 했으리라고 보는데‥‥"내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아잡으려고 고심하고 있었지요, 여론의 수렴 없이는 앞날의 정국이 밝지 않을 걸로 확신 비슷이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17일 밤이던가 군의 후배들 찾아와 절정에 달한 데모를 진정시키기 위해 군의 출동이 곧 있을 거라고 알려왔어요. 모두 무척 걱정하는 눈치더군요. 나 역시 그랬고요. 그래서 이튿날 아침 張世東 전 안기부장을 단나 군출동은 절대로 안된다며 출동중지를 건의해달차 얘기 했어요. 그 사람은 그랬으면 좋겠는데 자기의 능력밖의 일이라며 난색을 표명하더군요. "
'직선제 수용, 나도 訓手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 軍의 출동까지는 안가지 않았습니까?"글쌔‥‥ 노 대표에게 전화를 넣었지요. 그래서 당 대표위원실에서 만났는데 거기서 군출동은 계엄령과 직결되고, 그런 물리적 힘으로는 소요사태를 해결 해낼 수 없으니 군출동을 중지시켜 달라고 했어요. 당사에서 노 대표를 만난 사실을 신문에서 짧막하게 보도되기도 했는데 짧은 시간에 무척 깊은 사실을 건의했어요. 5공화국이 안고 있는 최대의 취약점이 물리적 방법을 동반한 통치 형태인데 이제는 그런 방법으로는 해결이 벽에 부딪쳤다, 오직 하나의 방법은 정치적인 해결 방법, 즉 정치적 결단을 내려 국민의 주장인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다, 시간이 촉박하니 우선 대통령을 찾아가 군출동을 중지시키도록 해달라 이렇게 건의했어요. 노 대표의 안색이 달라지고 놀라더군요. "
-직선제 수용이 비로소 대두되어 본격적인 거론이 있었던 게 그날이었다면 결국 6·29선언 그것은 鄭위원장과의 합작품 이랄 수 있겠군요, 그건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 같은데‥‥"꼭 그렇게 의미를 부여 할 수는 없겠지요. 노 대표도 내심 정국타개책에 누구 못잖은 고심을 했을테고, 그 방법의 하나로 직선제를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 그러길래 그 길로 청와대를 방문, 기차타기 일보직전의 군출동을 중지시켜 달라는 건의를 한 게 아닙니까. 그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의 해결책으로 보았기 때문에 건의하고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 해야지요. 직선제발상의 공헌을 이야기하는데, 군출동중지의 대안일뿐 다른 헌책은 아닙니다. 원래 장기와 바둑판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한 두 수를 더 본다지 않습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방관자의 훈수일 뿐이지 당사자의 결단과 용기는 아니잖아요, 중요한 것은 책임있게 훈수를 받아들여 실천에 옳기는 당사자의 용기와 영단, 그것 이라고 봐요. "
-항간에는 6·29선언은 노대표의 ‘작전상후퇴’ 일 뿐이라는 해석도 없지 않습니다. 사실 그 이후의 정국전개는 與圈이 파국을 맞지 않고 재집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걸었다는 결과론적 해석이 전혀 틀리다고만은 할 수 없는 상황 아니 었습니까? 慮대통령과 지근거리에 있었던 鄭위원장의 ‘해명’이 궁금해지는군요."그건 험담가들의 공연한 트집입니다. 생각해봐요. 중대한 정책을 결정하는데는 많은 사전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자료 ·인원 ·시간이 엄청나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國基를 뒤바꿀 정책을 결정하자면 그 이상 필요할 것은 자명하지 않아요. 당시 나는 야인으로 어떤 공 ·사의 조직도 갖지 못하고 있었어요. 고작 몇몇 주변의 지인들에게 의견을 묻곤하는 정도였어요. 그 점은 노대표도 마찬가지였지요. 물론 노대표야 그런 공사의 조직을 동원할 수 있는 자리에는 있었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했어요. 또 시간이 없지 않았습니까. 직선제에서 이긴다 진다는 계산은 전연 없이 그저 난국타개 그것만을 생각했지요. 진다 해도 할 수 없지요. 국민이 심판할 것이니까 승복해야지요. 여당에서 주장해오던 내각제와는 정 반대인 야당의 주장인 직선제 하의 승부가 되어 열 가지로 분석해도 불리하다는 결과밖에 안나오지요. 6·29선언은 그런 맥락에서 찾아야 옳은 역사기록을 남길수 있지 않겠어요?"
-6·29선언 8개항과 鄭위원장과의 관계 는 어떻습니까 ?"8개항과는 전연 무관합니다. 그건 노대표께서 몇몇 측근과 숙의한 결과 만들어진 것입니다. 군출동이 해제되었다는 전화통보를 받은 사흘 뒤엔가 연회동에서 만났는데 그때 직선제에 관해 또 얘기를 나눴어요. 나와 단 둘이만 만난 자리에서 노 대표는 탈당과 후보직 반납을 각오하고 모종의 조치를취해야겠다고 자신의 의지를 다시 밝혔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의논은 없었고 추상적인 의논을 조금 했었지요. 노 대표는 청와대방문 직후부터 6·29선언8개항을 구상하기 시작했었던것 같아요. 난 그날 이후 6·29까지 노대표를 만나지 않았어요 의논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어느 신문지상에 내가 직접 全대통령을 찾아가 군출동중지 등을 건의하지 않은데에 대해 이상한 시각으로 기사화한 것이 보도되었는데, 사이가 소원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때의 사안이 사안인만치 노 대표가 나서는 것이 좋겠다 싶어 일부러 안나선거지요. 웬만큼한 문제라면 평소 바른소리 잘하고 고분고분 말을 잘 듣지 않아 다소 서운해하던 그 점쯤은 개의치 않고 바로 찾아갔겠지요. "
對시민 발포는 자위권 발동(?)
-중요한 정책결정 같은 것에 노대표와 함께 소외된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알려지기로는 두 사람이 중요 사안마다 깊은 자문의 요청을 받았으며 또 결정에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인데, 6월 중순의 군동원 같은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니 이해가 쉬 안 가는군요."노대표 일은 내가 알 바가 없는 일이고‥‥ 내 경우는 현직을 물러나 야인으로 머물고 있어 참여고 소외고를 말할 계제가 아니 지요"
- 지 난 4월 초하루 정부에서 는 5 · 17 광주사태해결을 위한 공식적인 견해 표명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해결될 전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부조치가 미흡하다는 거지요. 그 이유는 광주사태의 책임자의 문책과 발포책임자의 처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鄭위원장께선 국방장관 퇴임직전 기자간담회에서 그 문제를 천명한 걸로 돼 있습니다. 그 당시 중요 지위에 있었던 입장에서 그 점을 재론한다면 역시 같은 대답이겠습니까?"계엄령 하의 군작전에 문책이나 처벌이니를 들고 나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5월17일 0시를 기해 전국계엄이 선포되면서 그 넓은 광주지역에 2개대대 약 5백명의 특전사 소속 계엄군이 내려갔습니다. 사건은 全南大에서 터졌는데 학생들과 계엄군의 충돌이 사태의 첫 발단이었습니다. 데모방지에는 반드시 충돌을 수반합니다. 학생들이 가방 속에 돌멩이를 준비, 투석을 하니까 계엄군이 초동진압에 본때를 뵌다는 심정이 있었던 모양으로 거칠게 진압했었는데 그게 도화선이 된 거지요. 17일 오후무렵께 악성루머가 광주시에 돌아 시민들까지 합세, 데모양상이 돌변했습니다. 사태가 악화되자 발포 여부를 묻는 급전이 날라와 나는지휘계통 안에 서 있지 않았지만 절대 발포 불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데모와 진압이 전투를 방불케 되자 軍의 자위권이 어느 겨를엔가, 누구에겐가에 의해 발동된 것입니다. 데모진압 계엄군에게 시인들이 어떻게 총기로 대항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명백이 국법위반입니다. 총검으로 국법질서를 위반하는 것은 반란에 해당됩니다. 더구나 많은 사상자를 낸 도청탈취와 교도소 습격은 강력한 방어를 수반할 수 밖에 없었어요. 도청에는 당시 상당량 의 TNT가 보관돼 있어 방어가 불가피했고, 교도소는 자위권이 절로 발동되는 곳입니다. 더군다나 계엄하의 군의 자위권을 나무라서는 안됩니다. 앞으로 더 큰 사태가 발생했을 때 군은 어떻게 대처하라는 겁니까."상당히 격앙된 어조로 鄭위원장은 ‘항변’을 하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당시 특전사령관에 있던 사람으로서 예하부대원이 현지에서 도화선을 당겼음을 시인하는 입장에서 그의 책임이 없다고만은 할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가 ‘지휘계통 안에 있지 않았다’는 발언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예하부대원이 출동한 상황에서 비록 계엄하이긴 하지만 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이 지휘계통 안에 있지 않았다면 누가 과연 지휘계통 안에 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한 일이다. 더구나 ‘군의 자위권’ 운운도 글쎄, 논리적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군이 원천적으로 국민을 위해 있다는점을 감안한다면, 그 설득력이 상당히 약화된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鄭위원장의 말은 계속된다."그렇지만 우리는 왜 그런 사태가 벌어졌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거기에는 정체불명 ·출처불명의 군 · 민을 이간질하고 싸움을 붙이는 악성루머가 횡행했다는 것입니다. 총선 전에도 악성루머가 판을 쳤듯이 광주가 바로 그랬다는군요. 당시 총상자가 90여명이 됐는데, 계엄군이 사용한 M16에 희생된 시민은 45명이었다 해요. 계엄군이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시민들을 향해 난사했다는데 계엄군이 사용한 총기는 M16 한가지뿐이었읍니다. 모두가 악성루머에 놀아난 나머지 빚어진 불상사였어요. 아무러나 광주사태는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적군을 막아야 할 군이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고, 국토방위와 국민보호를 하고 있는 군에게 시민들이 총부리를 들이댄 것이 바로 불행 그것이지요. 쌍방 모두가 반성해야 할 불행인 셈이지요. "
-그러나 결과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5공화국 탄생 이후 광주의 시민들은 폭도로 불렸습니다. 6공화국이 새롭게 시작되는 마당에 이와같은 광주의 갈등은 반드시 해소해야 될 시급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부에서 유감이라는 성명이 나왔습니다만 당시의 책임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광주사태는 그 직후에 정확한 조사를 해서 진상을 규명해야 옳았습니다. 그걸 안한 것이 오늘날가지 문제로 살아남은 것이지요. 당시의 책임을 굳이 거론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法統과 力學이라는 두 가지 측면입니다. 법통으로 본다면 전국계엄하의 명령권자가 되겠는데 그건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학적으로 본다면 당시의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겠지요. 모든 시선이 법통 즉 당시 최규하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인 이희성씨 쪽을 버리고 역학 쪽인 당시 실력자 全斗煥 보안사령관에게 초점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鄭위원장이 요약하고 있는 책임소재는 제5공화국 아래에서 그 누구나 심정적으로는 알면서도 ‘말 못했던’ 것 그대로다. 그러한 말이 그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는 데 기자는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그렇지만 그건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겠지요. 군의 자위권 발동의 소산으로 이해된다면 그 책임은 운위될 수가 없지 않겠지요. 법통으로 따진다 해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에 행한 사항에는 형사적인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문제삼을 수가 없지요. 또 역학 쪽으로 따진다 해도 실질적인 실력자는 법적권한과 책임이 없습니다. "
-그렇다고는 하지만 지금 초점이 되고 있는 쪽은 실질적인 실력자인 全斗煥 당시 보안사령관 아닙니까? 국보위를 만들어 정권을 '탈취 '하려는 음모의 일환으로 광주사태를 일으켰다는 것인데…."국보위를 만들어 광주사태를 일으켰다고들 하는데 그건 속단이 아닌가 싶어요. 그 무렵 노장군과 나는 수경사와 특전사일로 정신이 없어 다른 데는 눈돌릴 겨를이 없다시피 해서 중요 정책 결정에 참석한 적이 거의 없었고, 참석해 달라고도 안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군의 정치일선 등장을 바람직하지 않게 보았기 때문에 굳이 참여 할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흐름은 알 수 있었어요. 국호위를 들먹거리곤 하는데, 그건 전장군 측근의 몇몇이 사적으로 3김씨가 안팎으로 어지럽힌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결단력이 부족한 대통령을 보좌할 자문기구 같은 걸 만들면 어떨까 하는 정도의 한두마디 얘기에 불과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어치피 鄭위원장으로서 할 말에는 한계가 분명한 것 같았다. 어떻든 그가 제6공화국에서 (민정당)의 공천을 받은 이상, 또한 제5공화정의 탄생에 어느 정도나마 역할을 한 것이 틀림없는 이상 이 정도의 발언에 만족하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는 듯했다. 화제를 돌려 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새마을 문제에 관해 물었다,
아첨꾼이 빛은 새마을 사건
-새 마을운동본부의 비리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여론을 크게 자극, 全敬煥씨를 구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그같은 엄청난 권력형 비리가 어떻게 묵인 돼 왔는가, 책임의 일단을 내무부 측에도 돌리고 있습니다. 한때 내무부를 맡았던 장관 중의 한사람으로 그점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내무부로 가기 전부터 빨리 갈아치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여론도 빗발치고 권력층 주변에서도 말이 많았어요. 그래서 내무부를 맡자 말자 회장을 갈기로 하고 후임자를 물색해 봤는데 적임자가 영 마땅치 않아요. 고심 끝에 서울헙의회회장을 후임자로 정했는데, 사람이 너무 대가 약하고 겸손해요. 전경환씨를 명예회장으로 추대 하곤 그를 앞장세우는 거 아닙니까. 명예회장은 내무부의 승인이 필요없는 말 그대로 명예직이라 뭐라고 간섭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마을본부의 조직은 박대통령시절부터 좀 이상했습니다. 예산은 정부지원에 의존하는데 조직은 민간자율로 돼 있습니다. 내무부가 관장하고 있지만 완전 독립된 민간기구란 말입니다. 이게 모호한 것입니다. 재임 기간 동안 회장을 바꿔치우는 걸로 그친것은 현직 대통령의 동생을 구속할 수 는 없으니까 나머지는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걸로 믿었어요. 또 현직 재임기간이 넉달 남짓해서 시끄러운 정국과 복잡한 내무행정을 돌아보기 에 도 힘에 벅차서 ‥‥‥
-그렇다면 내무부 이상의 선에서 조치를 취하지 못한 데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인데, 왜 안을 내리지 못하고 방관해 왔을까요 ?"全 전대통령이 동생의 비리에 공정한 수사를 정부측에 의뢰했는데 그게 아마 본인의 숨김없는 심정일 겁니다. 비리를 그렇듯 심각하게 만든 것은 정보 책임자의 직무태만이 빛은 결과입니다. 정보 보고가 안올라갈 턱이 없었는데 아첨 배들이 중간에서 차단해 버려 미처 정확한 정보와 정황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겁니다. 주변의 인사들이 문제가 많다는 조언을 측면으로 몇 차례 했던 것도 알고 있는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 동생을 몇번 불러 진위 여부를 추궁했다 합디다. 그때마다 조언과는 사실이 다르다는 해명을 했었어요. 대통령은 정확한 정보가 없어 단안을 내리지 못했던 거지요. 한마디로 측근과 정보책임자의 직무 유기가 빛은 결과입니다. 아무러나 진작 정리해야 할 사건이었는데, 늦게나마 국민이 원하는 대 로 다 수사할 걸로 믿어집니다. "
제5공화국과 斷絶해야
-새 마을운동본부의 사건이 터지면서 5공화국의 각종 권력형 비리가 연일계속 보도되고 있습니다. 야당도 비리수사와 척결을 주장하고 있으며 여론도 들끓고 있습니다. 정통성이 부여된 6공화국이 5공화국과는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5.5공화국론도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6공화국 탄생에 견인차 역할을 했고, 정계에 입문한 입장에서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6공화국은 어떤 의미로도 정통성이 부여된 정부입니다. 5공화국이 문제가 많았다 해서 그 다음 공화국이 반드시 결별해야 한다는 시각은 옳지 않습니다만 국민이 결별을 원한다면 집권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되는것 아닙니까? 단절할 이유가 있다면 단절해야 하는 것이 6공화국의 과제라고 봅니다. 전시대의 나쁜점은 과감히 버리고 또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계승해서 역사가 이뤄지고 이어지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5공화국이니 6공화국이니 굳이 구분지어 규정할 게 뭐 있을까도 싶군요. 모두가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정부의 정권입니다. 그동안 정부 · 정권이 6번이나 바뀌었는데, 그때마다 역사단절을 한다면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무색해지지 않을까요. 권력형 비리가 있다면 척결해야지요. 그러나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승계해야 옳다고 봅니다. 정부나 정권단위로 볼 게 아니라 국가와 민족단위도 역사를 규정해야 하지않을까 싶습니다. 군정종식 이니 문민 정치니 하는 주장은 아직도 강력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민주시대를 맞는 軍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나조 그런말을 적잖게 들었고 충고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에 대해 나는 尙式정신을 대안으로 제시하여 주장하고 싶습니다. 문민정치도 좋지만 자칫 허약한 국가 나약한 민족을 만들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어요. 멀리 다른 민족 다른 국가를 볼 것 없이 가까운 조선조 5백년을 보면 쉽게 이해될 겁닏. 文과무가 합쳐졌을 때 강성한 국가가 죄고 민족의 우월성도 돋아납니다, 軍政이란 말도 군의 힘을 빌어 권력을 장악했을 때나 해당의 지, 민간인이 되어 민의의 선택을 받아 설립된 정부를 그렇게 매도할 수 없습니다. "
‘軍의 정치 不개입은 나의 신념’
-鄭위원장은 5공화국의 주역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만 더러 비주류 쪽이랄까 권력의 핵심에서 떨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주역인가 싶으면 조역이고 그런가 하면 주역이었단 말입니다. 특히 국방장관 임명 때 그런게 나타난 것 같은데."6·29선언의 후속조치로 단행된 개각때 국방장관으로 입각했지요. 그때 노총재께서 나를 국방장관으로 천거했던 모양입니다. 평소 주의 ·주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소신이 마음에 들었고, 군의 장악도 필요했던가 봐요. 북괴에 대처하는 전술 · 전략과 원만한 대미관계, 그리고 불투명한 군의 위상 정립이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봤던 것 같습니다. 全대통령이 동의를 안했는데 자신도 현직 총재와 대통령후보을 사퇴하겠다고 하며 강력한 천거를 했었지요. 나 때문에 개각이 늦게까지 진통을 겪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국방장관 재직시에도 앞에 말한 것과 비슷한 경우에 처해진 줄로 알려져 있습니다. 노사분규가 한참 격렬해질 무렵군등원이 검토될 때 관계기관대책회의에빠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사실들이 鄭위원장의 '소외설'을 뒷받침하지 않는가 싶습니다만, 이제 지나갈 일이니 허심탄회하게 밝혀도 무방하지 않나 싶습니다."평소에도 그랬고 국방재직시에도 정치성을 띤 군동원은 절대금물이라고 신념으로 걸고 있었어요. 국방장관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재임 중에는 군동원이 없을 거라고 단언까지 했었어요. 그게 그들에게 거북하게 여겨졌던 가봐요. 현대조선 분규로 울산시청이 불타던 날 청와대에서 긴급대책회의가 열렸었는데 내게는 어떤 결정이 난 뒤에 통고를 했어요. 울산 일원에 위수령을 내려야겠다는 통보였습니다. 그 지역 행정책임자들도 군동원을 여러번 요청했던 데에 따른 결정이었지만 나는 우선 시간을 좀 달라고 요청했어요. 6 · 29선언 이후 도처에서 일어난 숱한 노사분규에 경찰력을 동원시키지 않고도 다 해결해왔는데 군동원을 바로 하는 것은 정황판단이 성급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어요. 노총재도 펄쩍 뛰며 반대하더군요. 정국을 도로아미타불로 만든다는 거였지요. 군의 힘을 빌지 않고도 해결되는 길을 찾기로 두 사람의 의기가 투합, 군동원이란 불행한 사태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어요."
기왕 정치를 하려면
-또 앞에서와 갈은 맥락의 질문입니다만, 국보위시절 전후에도 鄭위원장은 상당부분 비난의 표적에 오른 적이 많았었는데, 이 기회에 한번 시원하게 해명해 주시지요."특전사령관직은 12 · 12사태 전에 鄭昇和씨에 의해 거명되었어요. 전임자의 임기가 정월 초순경이어서 나와 노장군이 적임자로 점찍혀 있었어요. 12일 새벽 서울정황을 알려고 올라왔다가 나는 그 자리 에 노장군은 수경 사령관 자리에 전임되었지요. 두 사람은 현직에 매달려 있느라고 다른 일은 돌아 보지 못했고, 광주사태 때도 명령권 밖에 있었어요. 전장군은 보안사와 안기부를 총괄하고 있어 사정이 달랐지만. 국보위 때도 우리는 이름만 걸어놓았지 실제고 한 역할이 없었어요. 가끔 한번 들러보는 정도라고나 할까. 중요 정책결정에는 거의 간여를 안했었고, 그래서 사후에 통고를 받거나 의논을 하는 선에 그쳤어요."
-그런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치 중요 역할을 했다거나 비중과 영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는지…… 이제 민간인의 모습으로 정치마당에 뛰어들었으니 그에 부합하는 면을 보여줘야 할 것으로 믿어 집니다만‥‥"정치적인 야심같은 건 없어요. 아직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야심이 있었다면 국보위 시절에 옷을 벗었을 것아닙니까. 그저 여러 일을 소신껏 하다보니 공교롭게 일이 척 맞아떨어져 결과가 그렇게 나왔을 뿐이지요. 훈수를 제대로 한 것에 불과했다 할까. 이번에도 좀 쉴까 했었어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달아야 하기 때문에 새 정부의 연임권유를 뿌리 쳤고, 대사 자리를 하나 주면 외국으로 나가 공부도 좀 하며 쉬려고 했는데 혼자만 편하러 한다는 말들이 있을 것 같아‥‥ 기반을 닦아놓은 지역구가 없어 전국구 한자리가 적합하다 싶었는데 당에서 기어이 지역구를 맡아라 하더군요. 그래서 기왕 지역출마를 할 바에야 고향쪽이 좋겠다고 대구 서구를 선택했어요. 기왕 맡은 자리. 능력껏 그리고 소신껏 해낼 수 밖에없지 않아요? 그만 일어납시다. "鄭위원장의 성격이 직선적이고 솔직 활달하다는 인상을 줄곧 받아 왔다.
한창 제5공화국의 非理가 총선의 도마 위에 올라 있고, 자신 또한 지역구에서 출마하는 입장인데도 기자와의 인터뷰를 혼쾌히 허락해 준 데서도 그러한 성격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겠다.하지만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끝가지 말을 절제하는 정치인다운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듯했다. 결정적인 발언은 끝까지 유보조항을 달았던 것이다. 軍의 정치 불개입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고 있고, 어려운 시기에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아마도 역사의 평가를 따로 받지 않을까 하는 인상을 받으면서, 동시에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자신도 모르게 비치는 듯한 느낌을 기자가 받았다면 그것은 착각인 것일까 ?그가 판단하는 ‘그 어느 때’가 올 때 보다 솔직한 발언을 하기를 기대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