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외국인이 증언하는 80년 5월 광주/광주사망자 3백명은 넘는다.필립 퐁스(신동아, 1989. 5)
본문
특별기획 80년 5월 光州 외국인이 證言하는
「光州」사망자, 3백명은 넘는다
필립 퐁스(프랑스 「르 몽드」記者)
「학살」몇 시간 후 光州도착
1980년 5월 21일 아침, 우리가 광주에 막 도착해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당시 받은 첫인상이 떠오른다. 폭력이 거의 없는 민중봉기와 거리를 돌아다녀도 전혀 위험하지 않은 정도의 투쟁을 전날 밤에 겪은 도시의 모습일 뿐이었다. 당시 「뉴욕 타임즈」지의 특파원이었던 동료기자 심재훈과 자동차로 새벽에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전날 우리는 단지 광주에서 매우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고, 다음날 광주에 내려가기로 결정했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학살이 일어난 몇시간후 최초로 광주에 도착한 기자들 가운데 끼일 수 있었다. 심씨의 도움과 우정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어떠한 기사도 쓸 수 없었을 것이다.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광주가 얼마 남지 않은 고속도로 상에서였다. 우리는 태극기를 휘날리며 쇠파이프로 무장한 시민들이 탄 몇 대의 트럭과 마주쳤던 것이다. 이런 광경과 함께 또 다른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는 시민이 장악하고 있는 전쟁중의 도시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당시의 메모와 기사가 실린 취재수첩을 다시 읽으면 그동안 보존해 두었던 광주의 모습들을 알 수 있다.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불타버린 자동차의 잔해와 돌들이 길 위에 널려 있었다.
독한 가스냄새가 질식시킬 듯한 고무타는 냄새와 뒤섞여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몰려나와 있었고 시위대들은 곳곳에서 도시 중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은 태극기가 꽂힌 군용차와 군인들로부터 탈취한 전차를 타고 있었다. 트럭과 유리창이 깨진 버스를 타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군중들은 『전(두환)을 죽여라』『계엄령을 해제하라』『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치고 있었다.대부분의 군중들은 최루가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돌 각목 화염병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자동소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다.도시는 외부와 차단돼 있었다. 전화선은 끊어졌고, 도시로 들어오는 길목은 시위대에 의해 트럭으로 막혀 있었다. 헬기는 시민들에게 전투를 중지하라는 전단을 뿌리면서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분노아 고통, 두려움으로 뒤범벅이 된 긴장감을 시민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뉴욕 타임즈」깃발을 단 우리의 취재차는 시위군중 두 명이 우리와 함께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번이나 탈취와 방화위기를 맞았다. 그때마다 순전히 심씨의 수완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널린 시체들
그들을 제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곧 알아차렸다. 언론이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한 시민들은 언론에 대해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시위대 중 몇 명은 계속해서 군중에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 파편과 돌, 불타버린 자동차의 잔해가 뒤덮인 도청 옆 광장에서 군중들을 젊은 시위대가 탄 트럭이 지나가자 환호를 보내기로 했다. 총탄 자국이 선명히 드러난 벽도 있었다.공수부대가 진을 치고 있던 대학에 우리가 차를 타고 들어가려 했을 때 우리는 차 바로 몇 미터 앞에서 자동소총의 일제사격을 받았다. 다른 도시, 특히 서울에서 일어난 것과는 달리 군대의 과잉진압과 그 잔혹성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세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한 상인은 분노한 목소리로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의 공산당보다 더 잔인하다』고 한밤중에 잠입한 공수부대에 대해서 말했다.
우리는 이제까지 일어난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끔직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젊은 시위대의 말에 의하면 군인들이 공원에 남녀학생 시체들의 발을 묶어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군인들이 시위대를 총검으로 찌르고, 여자들의 유방을 자르는 등 엄청난 폭력이 자행됐다고 했다.우리가 학살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안 것은 전남대병원에서 였다. 입구 여기저기에 시체가 널려져 있어 전쟁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흥건히 고인 피 때문에 미끄러지곤 했다. 몇몇 사람들은 대부분 심한 총상을 입고 있었다. 거리에서 교전이 발생해 병원에 갇혀 있는 두 시간 동안 우리는 약 60명의 부상자를 보았다.두개골에 심한 부상을 입은 20대의 한 남학생이 우리의 눈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친구들에 의하면, 그는 군인들에 의해 죽도록 두들겨맞았다는 것이다. 약 15구의 시체가 맨바닥에 일렬로 늘어져 있는 시체실로 두 구의 다른 시체가 들려오기도 했다. 상처부위가 심하게 벌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모두 총에 맞거나, 대검에 찔려 희생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응급실이 가득차 있어서 새로 도착한 부상자들은 들것 위나」맨바닥에 놓여졌다. 그들 대부분은 의식이 없거나 수혈을 받아야 하는 상태였다. 임시응급실에서는 당황한 듯 보이는 10여명의 의사와 간호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갑자가 군의 습격을 받고난 뒤의 베트남 마을을 연상케 했다.여자들이 헌혈하러 왔다. 수많은 부상자 앞에서 의사들은 더 이상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와진 한 젊은 의사는 『군대가 학살을 자행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많은 희생자들이 계속 들어왔다. 우리는 시위대와 인터뷰를 통해 적어도 5월 21일 낮 동안에만 약 1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프랑스와의 시차 때문에) 같은 날 「르 몽드」지에 발표되었다.우리는 전화로 기사를 송고하기 위해 오후 무렵 다른 도시와 차단된 광주를 떠나야 했다. 화순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젊은이를 싣고 광주로 가는 트럭과 마주쳤다.
시민들, 평화적 해결 원해
이틀 후 우리는 광주로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군대가 다시 도시를 차단하고 있었다. 시 외곽을 차단하고 있던 35㎞에 달하는 바리케이드를 통과하기 위해 심재훈씨의 수완이 또 한번 필요했다. 우리는 샛길을 통해 시가지에 들어갔던 것이다.시위대가 장악한 시내 중심부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군대가 시내에서 철수했음을 알 수 있었다. 도시는 더 고요한 것 같았고, 말끔히 치워지기 시작했다.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많은 여자와 어린이들이 벽보를 읽고 있었다. 반면시민들에 의해 장악된 도청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시위대는 총기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그들 중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부상자로 꽉찬 병원에서는 항생제와 지혈제가 부족했다. 도청 맞은 편의 체육관에는 약 50구의 시체가 안치돼 있었다. 그 부근에는 시체썩는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다.도청을 점령한 학생들은 그때까지의 사망자가 1백61명이라고 주장했다.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학생들의 행위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평화적인 해결을 원했다. 계엄당국과 협상을 벌였던 시민수습위원회는 崔圭夏대통령에게 군의 잔혹행위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학생들은 全斗煥장군의 공직추방과 재판회부, 그리고 계엄해제를 주장했다.「뉴욕 타임즈」의 「헨리 스코트 스토크스」기자는 5월 26일 밤부터 27일까지의 진압을 직접 취재했다. 그는 우리에게 진압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27일 아침 광주는 죽음의 도시 같았다. 황폐한 거리, 장갑차에 의해 차단된 주요도로, 드문드문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손에 무기를 든 채 집을 수색하는 군순찰대 등은 외국군에 의해 방금 점령당한 도시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주요 네거리마다 기관총이 배치돼 있었다. 시내 골목길 입구에는 군인들이 대검을 꽂은 채로 근처 건물의 지붕을 주시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도청 건물 옆의 길을 가로질러서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었다. 정오경에 또다시 산발적인 총소리가 들려왔다. 라디오에서는 주민들에게 외출을 삼가하라고 방송했다.
3백여명이상의 사망자 발생
발자국 소리, 딱 하고 부딪치는 총소리, 무기가 덜컹거리는 소리, 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들이 거리의 정적을 깨뜨렸다. 도청에서 멀지 않은, 우리가 묵고 있던 호텔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군인들이 물러갈 날을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젊은이들이 위험하다』고 잔날 호텔로 피신해 온 한 시위대원은 말했다.아침 6시경 군인들에게 등을 얻어맞은 5명의 학생들이 도청 건물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 목격자가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가 수집한 증언에 의하면, 그때 이미 3백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 확실해 보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숫자는 상당히 증가했다.「뉴욕 타임즈」의 취재차를 타고 그날 광주를 떠날 때, 우리는 그곳을 탈출하려고 하는 한 시민군을 차에 태웠다. 우리의 보도완장을 두르고 사진기를 들고 기자도 변장한 그는 군인들의 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당시의 당국자들은 내가 광주사건에 관해서 「르 몽드」에 발표한 내용과 증언들을 『객관성이 부족하다』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3년이 지난 후에도, 내가 「르 몽드」에 그러한 내용의 글을 썼던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르 몽드」의 로마특파원으로 바티칸의 신임을 얻은 나는 교황을 수행해 여러 곳을 취재하곤 했었는데, 교황의 한국 방문시 비티칸 주재 한국대사관은 내가 한국에 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내가 교황청에서 신임받는 기자라는 것을 고려한 바티칸 신문국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교황의 첫 번째 한국방문을 수행한 나는 교황의 광주방문 기사에서 1980년 5월에 내가 광주에서 목격했던 것들을 회상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 「필립 퐁스」씨는 46세이며 1975년부터 「르 몽드」기자로 근무하고 있다. 1976년부터 1981년까지 도꾜지국에서, 그 다음에는 로마에서, 다시 1985년부터 도꾜에서 일하고 있다.1970년대초부터 한국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주시해왔다. 이전에는 「누벨오프저바퇴르」와 「르 몽드」외신부에서 근무했는데, 특히 베트남에 정통한 기자로 일했다.
「光州」사망자, 3백명은 넘는다
필립 퐁스(프랑스 「르 몽드」記者)
「학살」몇 시간 후 光州도착
1980년 5월 21일 아침, 우리가 광주에 막 도착해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당시 받은 첫인상이 떠오른다. 폭력이 거의 없는 민중봉기와 거리를 돌아다녀도 전혀 위험하지 않은 정도의 투쟁을 전날 밤에 겪은 도시의 모습일 뿐이었다. 당시 「뉴욕 타임즈」지의 특파원이었던 동료기자 심재훈과 자동차로 새벽에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전날 우리는 단지 광주에서 매우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고, 다음날 광주에 내려가기로 결정했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학살이 일어난 몇시간후 최초로 광주에 도착한 기자들 가운데 끼일 수 있었다. 심씨의 도움과 우정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어떠한 기사도 쓸 수 없었을 것이다.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광주가 얼마 남지 않은 고속도로 상에서였다. 우리는 태극기를 휘날리며 쇠파이프로 무장한 시민들이 탄 몇 대의 트럭과 마주쳤던 것이다. 이런 광경과 함께 또 다른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는 시민이 장악하고 있는 전쟁중의 도시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당시의 메모와 기사가 실린 취재수첩을 다시 읽으면 그동안 보존해 두었던 광주의 모습들을 알 수 있다.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불타버린 자동차의 잔해와 돌들이 길 위에 널려 있었다.
독한 가스냄새가 질식시킬 듯한 고무타는 냄새와 뒤섞여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몰려나와 있었고 시위대들은 곳곳에서 도시 중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은 태극기가 꽂힌 군용차와 군인들로부터 탈취한 전차를 타고 있었다. 트럭과 유리창이 깨진 버스를 타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군중들은 『전(두환)을 죽여라』『계엄령을 해제하라』『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치고 있었다.대부분의 군중들은 최루가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돌 각목 화염병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자동소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다.도시는 외부와 차단돼 있었다. 전화선은 끊어졌고, 도시로 들어오는 길목은 시위대에 의해 트럭으로 막혀 있었다. 헬기는 시민들에게 전투를 중지하라는 전단을 뿌리면서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분노아 고통, 두려움으로 뒤범벅이 된 긴장감을 시민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뉴욕 타임즈」깃발을 단 우리의 취재차는 시위군중 두 명이 우리와 함께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번이나 탈취와 방화위기를 맞았다. 그때마다 순전히 심씨의 수완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널린 시체들
그들을 제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곧 알아차렸다. 언론이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한 시민들은 언론에 대해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시위대 중 몇 명은 계속해서 군중에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 파편과 돌, 불타버린 자동차의 잔해가 뒤덮인 도청 옆 광장에서 군중들을 젊은 시위대가 탄 트럭이 지나가자 환호를 보내기로 했다. 총탄 자국이 선명히 드러난 벽도 있었다.공수부대가 진을 치고 있던 대학에 우리가 차를 타고 들어가려 했을 때 우리는 차 바로 몇 미터 앞에서 자동소총의 일제사격을 받았다. 다른 도시, 특히 서울에서 일어난 것과는 달리 군대의 과잉진압과 그 잔혹성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세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한 상인은 분노한 목소리로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의 공산당보다 더 잔인하다』고 한밤중에 잠입한 공수부대에 대해서 말했다.
우리는 이제까지 일어난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끔직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젊은 시위대의 말에 의하면 군인들이 공원에 남녀학생 시체들의 발을 묶어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군인들이 시위대를 총검으로 찌르고, 여자들의 유방을 자르는 등 엄청난 폭력이 자행됐다고 했다.우리가 학살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안 것은 전남대병원에서 였다. 입구 여기저기에 시체가 널려져 있어 전쟁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흥건히 고인 피 때문에 미끄러지곤 했다. 몇몇 사람들은 대부분 심한 총상을 입고 있었다. 거리에서 교전이 발생해 병원에 갇혀 있는 두 시간 동안 우리는 약 60명의 부상자를 보았다.두개골에 심한 부상을 입은 20대의 한 남학생이 우리의 눈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친구들에 의하면, 그는 군인들에 의해 죽도록 두들겨맞았다는 것이다. 약 15구의 시체가 맨바닥에 일렬로 늘어져 있는 시체실로 두 구의 다른 시체가 들려오기도 했다. 상처부위가 심하게 벌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모두 총에 맞거나, 대검에 찔려 희생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응급실이 가득차 있어서 새로 도착한 부상자들은 들것 위나」맨바닥에 놓여졌다. 그들 대부분은 의식이 없거나 수혈을 받아야 하는 상태였다. 임시응급실에서는 당황한 듯 보이는 10여명의 의사와 간호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갑자가 군의 습격을 받고난 뒤의 베트남 마을을 연상케 했다.여자들이 헌혈하러 왔다. 수많은 부상자 앞에서 의사들은 더 이상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와진 한 젊은 의사는 『군대가 학살을 자행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많은 희생자들이 계속 들어왔다. 우리는 시위대와 인터뷰를 통해 적어도 5월 21일 낮 동안에만 약 1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프랑스와의 시차 때문에) 같은 날 「르 몽드」지에 발표되었다.우리는 전화로 기사를 송고하기 위해 오후 무렵 다른 도시와 차단된 광주를 떠나야 했다. 화순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젊은이를 싣고 광주로 가는 트럭과 마주쳤다.
시민들, 평화적 해결 원해
이틀 후 우리는 광주로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군대가 다시 도시를 차단하고 있었다. 시 외곽을 차단하고 있던 35㎞에 달하는 바리케이드를 통과하기 위해 심재훈씨의 수완이 또 한번 필요했다. 우리는 샛길을 통해 시가지에 들어갔던 것이다.시위대가 장악한 시내 중심부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군대가 시내에서 철수했음을 알 수 있었다. 도시는 더 고요한 것 같았고, 말끔히 치워지기 시작했다.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많은 여자와 어린이들이 벽보를 읽고 있었다. 반면시민들에 의해 장악된 도청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시위대는 총기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그들 중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부상자로 꽉찬 병원에서는 항생제와 지혈제가 부족했다. 도청 맞은 편의 체육관에는 약 50구의 시체가 안치돼 있었다. 그 부근에는 시체썩는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다.도청을 점령한 학생들은 그때까지의 사망자가 1백61명이라고 주장했다.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학생들의 행위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평화적인 해결을 원했다. 계엄당국과 협상을 벌였던 시민수습위원회는 崔圭夏대통령에게 군의 잔혹행위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학생들은 全斗煥장군의 공직추방과 재판회부, 그리고 계엄해제를 주장했다.「뉴욕 타임즈」의 「헨리 스코트 스토크스」기자는 5월 26일 밤부터 27일까지의 진압을 직접 취재했다. 그는 우리에게 진압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27일 아침 광주는 죽음의 도시 같았다. 황폐한 거리, 장갑차에 의해 차단된 주요도로, 드문드문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손에 무기를 든 채 집을 수색하는 군순찰대 등은 외국군에 의해 방금 점령당한 도시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주요 네거리마다 기관총이 배치돼 있었다. 시내 골목길 입구에는 군인들이 대검을 꽂은 채로 근처 건물의 지붕을 주시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도청 건물 옆의 길을 가로질러서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었다. 정오경에 또다시 산발적인 총소리가 들려왔다. 라디오에서는 주민들에게 외출을 삼가하라고 방송했다.
3백여명이상의 사망자 발생
발자국 소리, 딱 하고 부딪치는 총소리, 무기가 덜컹거리는 소리, 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들이 거리의 정적을 깨뜨렸다. 도청에서 멀지 않은, 우리가 묵고 있던 호텔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군인들이 물러갈 날을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젊은이들이 위험하다』고 잔날 호텔로 피신해 온 한 시위대원은 말했다.아침 6시경 군인들에게 등을 얻어맞은 5명의 학생들이 도청 건물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 목격자가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가 수집한 증언에 의하면, 그때 이미 3백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 확실해 보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숫자는 상당히 증가했다.「뉴욕 타임즈」의 취재차를 타고 그날 광주를 떠날 때, 우리는 그곳을 탈출하려고 하는 한 시민군을 차에 태웠다. 우리의 보도완장을 두르고 사진기를 들고 기자도 변장한 그는 군인들의 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당시의 당국자들은 내가 광주사건에 관해서 「르 몽드」에 발표한 내용과 증언들을 『객관성이 부족하다』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3년이 지난 후에도, 내가 「르 몽드」에 그러한 내용의 글을 썼던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르 몽드」의 로마특파원으로 바티칸의 신임을 얻은 나는 교황을 수행해 여러 곳을 취재하곤 했었는데, 교황의 한국 방문시 비티칸 주재 한국대사관은 내가 한국에 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내가 교황청에서 신임받는 기자라는 것을 고려한 바티칸 신문국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교황의 첫 번째 한국방문을 수행한 나는 교황의 광주방문 기사에서 1980년 5월에 내가 광주에서 목격했던 것들을 회상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 「필립 퐁스」씨는 46세이며 1975년부터 「르 몽드」기자로 근무하고 있다. 1976년부터 1981년까지 도꾜지국에서, 그 다음에는 로마에서, 다시 1985년부터 도꾜에서 일하고 있다.1970년대초부터 한국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주시해왔다. 이전에는 「누벨오프저바퇴르」와 「르 몽드」외신부에서 근무했는데, 특히 베트남에 정통한 기자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