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조철현신부의 검찰 수사결과 반박 인터뷰/「우리는 용서할 상대가 없다」.김용삼(월간조선, 1995. 9)
본문
曺喆鉉 신부의 검찰 수사결과 반박 인터뷰
『우리는 용서할 상대가 없다』
曺喆鉉(세례명·備吾)신부는 5·18관련 검찰수사에 대해 일면 수긍하면서도 『학살 관련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결론』이라며 불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사망자 2천명 설, 헬기 기총소사도 사실이며, 검찰이 밝힌 사례외에도 숱한 양민학살이 저질러졌다는 것이다. 曺신부는 金永三정부는 광주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며 차기 정권에 그 처리문제를 기대하고 있었다. 누가 집권하든 광주문제의 부담은 계속 이어지게 된 셈이다.金容三 月刊朝鮮 기자
金永三 정부에 기대 않는다
광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김포공항을 이륙한 지 50분. 뭉게구름 사이로 속살을 내비친 광주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활주로에서 전투기들이 떼를 지어 발진하는 폭음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曺喆鉉(세례명·備吾)신부가 주임신부로 있는 봉선동 성당으로 가기 위해 택시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검찰수사에 항의하는 시위가 끊이질 않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그 땐 나도 공수부대원에게 개머리판으로 턱을 두 번이나 얻어맞었지라. 얼굴이 호박처럼 땐땐하니 부어 올라 혼났응게』그는 얻어맞았다는 부위를 손으로 어루만졌다.『나는 지지리도 복도 없어라. 그때 병원에 가서 치료받고 진찰 기록 남긴 사람들은 보상금을 받았는디, 나는 무서워서 병원에도 안가부렀다요』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시는 그에게 검찰수사와 그에 따른 항의시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검사들이라고 무슨 뽀족수가 있다요? 데모도 이잔 신물났소. 다 잊고 살라요. 국민들이 항의한다고 金永三씨가 全斗煥 盧泰愚 징역 살릴 것도 아니고…』8월 3일 오후 광주 봉선동 성당. 曺喆鉉 신부(59)는 구리빛 얼굴에 함박만한 웃음을 달고 나타났다. 건강한 모습이었다.『우리는 광주문제 해결에 있어 金永三 정부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아요. 이 정권은 태생이 5, 6共과 뿌리가 같은데 자기들 기득권과 엉겨 있는 광주학살자를 단죄할 수 있겠소』『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질문을 꺼내려는 찰나 曺신부는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린 검찰을 격렬하게 비난했다.『학살 主犯들을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니…. 검사들이 수사에 앞서서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고 갔다면 그런 결정을 못내렸을 거요. 검찰은 법과 양심을 속이고 정의와 역사를 왜곡했소. 「공소권 없음」은 검찰의 직무유기입니다』
『검찰은 정권의 娼女요, 창녀!』
분이 덜 풀린 모양이다.『그들에겐 「정권의 侍女」란 말도 아까워. 검찰은 「정권의 娼女」요, 창녀!』그는 언론쪽으로 화살을 돌리더니 비난의 목소리를 퍼붓었다. 우리 언론이 다분히 권력지향적인 입장에서 정의와 양심의 파수꾼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광주문제를 兩是論이나 兩非論으로 풀려가려는 언론의 태도가 못마땅합니다. 언론은 권력의 편이 아니라 진실의 편에 서야 합니다』曺신부는 검찰 수사결과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은 철회되어야 하며 학살 관련자는 처벌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외국에서는 양민학살과 같은 반인륜행위,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국가반란은 공소시효와 관계없이 특별법을 제정해 단죄하고 있는데…』반드시 학살 관련자를 기소해야 진실이 규명될뿐더러, 그들을 범법자로 역사에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후 金永三 대통령이 대화합의 차원에서 특별사면할 수도 있는 문제라는 것이 曺신부를 비롯한 광주시민들의 입장이었다.曺신부는 전국적으로 「학살자 기소 투쟁」이 벌어지는 건 민주화 항쟁의 주역인 광주시민에 대한 역사에서의 명예회복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울러 이번 기소투쟁은 차기 정권에게 부담을 지우려는 정치적 의도도 내포되어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權不十年이란 말이 있지요. 이제 2년 반이 지나면 金대통령도 정권을 내놔야 합니다. 다음엔 참으로 민주적인 정권을 창출해서 광주문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문제를 매듭지어야죠』
다음 말이 의미심장했다.『우리는 광주문제로 金永三 정권이 지지기반을 상실하도록 코너에 모는 국민운동을 벌이고 있는 셈입니다. 독단적이고 無知하고 5·6共 군사정부와 다름없는 문민독재 정권을 영원히 도태시키고, 국민의 상처를 감싸는 민주정권을 창출해야죠』말을 아끼긴 했지만 曺신부의 상상속에는 『광주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金大中 선생이 집권해야』라는 인식이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음이 확실했다.
「폭도의 부두목」으로 몰린 신부
長白衣(신부가 미사 때 입는 길고 흰 웃옷)로 상징되는 사제가 5·18광주의 한복판으로 떠밀려 나간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그는 광주가 현대사의 쟁점으로 떠올랐던 1980년 전남도청에서 불과 8백여m 떨어진 계림동 본당 주임신부로 봉직하고 있었다.『창밖에서 대한민국 국군이 자행하는 폭력과 광기의 현장을 숱하게 목격했어요.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 운영되는 공수부대가 그토록 무자비하게 시민을 몽둥이로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갈기다니요…. 상상이나 됩니까』曺신부는 상당히 흥분했다.『비록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였지만 총이 있다면 학살만행을 저지르는 공수부대원을 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광주의 5월은 성당이라고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계엄군은 허락도 없이 성당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폭도를 수색한다며 대검으로 천정을 푹푹 쑤셨다.5월 27일 새벽에 몰려온 계엄군 하사관은 신부 앞에서 『도주자는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러나 曺신부는 천성이 폭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총칼과 대포는 비폭력과 무저항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평화적 해결」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공수부대가 市 외곽으로 철수한 수 曺신부는 윤공의 대주교의 명령으로 시민 수습위원이 된다. 그는 무장 시위대에게 무릎 꿇고 애원하고, 총으로 위협당하면서도 눈물로 무기반납을 호소했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그를 「폭도의 부두목」으로 낙인찍었다. 그의 체포를 위해 50만원의 현상금도 걸었다(계엄사가 밝힌 폭도 두목은 洪南淳 변호사였다). 「내란 중요임무 종사와 방조죄」로 군법회의에서 3년형을 받고 6개월간 감옥도 살아야 했다.曺신부를 비롯한 광주 민주화운동 당사자들의 인식 속에 존재하는 진실과, 이 사건 수사를 담당한 검찰이 밝혀낸 진실 사이에는 넘지 못할 산맥이 자리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15년 전 광주에서 발생했던 비극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 광주 시민들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개인적인 입장이라면 광주시민과 국민 여러분께 「용서합시다, 남을 심판하지 맙시다, 단죄하지 맙시다」라고 애원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전제조건으로 학살 관련자들이 국민과 역사앞에 자신들의 과오를 시인하고 관대한 용서를 바래야 합니다. 용서를 받을 대상자가 나타나야 국민이 용서할 것 아니오. 학살 관련자들은 「책임없다, 자위권 발동이었다」는 식으로 변명을 일삼으니…』국민이 용서할 대상이 없으니 용서를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金대통령은 모든 부담을 검찰에게 넘겼어요. 자신은 5·18문제로 손에 때를 묻히기 싫었던 셈이지. 내가 살려면 나부터 죽어야 하는 법인데, 金대통령은 자신만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문제 해결을 그르치게 된 거요』
-검찰은 『국내외 판례를 뒤져봤지만 지금까지 내란 미수나 내란 예비, 음모죄가 처벌된 적은 있어도 내란죄 기수(旣遂), 즉 성공한 쿠데타가 처벌된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검찰이 기소할 수 없다는 입장인데요.『그 문제는 검찰보다 金永三 정권에 일차적 책임이 있습니다. 정치역학적 관점에서 볼 때 金정권은 태생이 5, 6共과 한 뿌리이기 때문에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 의지가 없어요. 그러니 정권의 시녀인 검찰이 어떻게 하겠습니까』-5·18 고소·고발인들 주장에 의하면 광주 유혈극은 광주시민이 피해자, 군사정권 관련자가 가해자로 나뉘게 됩니다. 두 집단 사이에는 입장 차가 됩니다. 두 집단 사이에는 입장 차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폭도들의 난동」이나 「광주사태」가「광주민주화운동」으로 용어가 바뀌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요. 현장에 계셨던 신부님 입장에서 광주 비극의 발단과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광주 문제는 광주와 전남에 국한된 사안이 아닙니다. 광주의 투쟁정신은 전국민적이고,국가적 차원으로 확대해석해야 됩니다. 국민들은 80년을 민주회복의 호기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군부세력이 12·12와 계엄령 전국 확대로 민주물결을 차단했어요. 국민이 원하는 통치자를 뽑을 수 있는 기회를 무력으로 박탈한 겁니다』
농아학교 학생, 진압봉으로 머리 맞아 현장에서 즉사
-공수부대가 투입된 수 다른 지역은 시위가 그쳤습니다만 유독 광주에서는 5월 18일 아침부터 전남대 정문에서 군과 학생이 충돌했습니다.『그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曺신부는 정색을 하고 앉았다.『그것은 전날 발표된 정치활동 금지, 金大中씨 구속 등 민주화 일정의 정지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다른 지역에도 공수부대의 무차별 매타작에 맞아 죽으니까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은 무서워서 숨든가, 아니면 들고 일어나든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5월 18일 오후에 11공수여단이 추가 투입되었고, 이날 하루에 2백73명의 시위대가 체포되었습니다. 게다가 시민 김경철씨가 공수부대원에게 맞아죽었고 수십 명이 곤봉세례, 대검 등에 부상당했습니다. 첫날부터 공수부대 진압이 가혹했었다는 뜻인데요.『농아학교 학생이 시내에 나왔다가 진압봉으로 머리 한복판을 얻어맞아 즉사했습니다. 첫날부터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패고, 대검으로 찌르는 등 광란의 행동을 벌였어요』그 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曺신부는 차분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시민의 머리를 박살내자 피가 분수처럼 튀어올랐소. 異民族 군인들이 피정복민을 분탕질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어요』-검찰측 수사결과에 의하면 7공수여단 병사들은 방석모나 방패 등 부상 방지나 충격을 완충시키는 시위 진압 장비 없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맨 몸에 진압봉 한 자루와 착검한 M16을 들고 나온 겁니다. 검찰은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공수부대원이 부상하자 흥분해서 진압봉을 휘두르고 대검을 사용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아무리 그렇다 해도 대검으로 찌르고, 야구방망이와 같은 진압봉으로 머리를 박살낼 수 있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공수부대가 과잉진압하기 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曺신부는 일사천리로 말을 이었다.『과잉진압이 없었다면 광주학살도 없었을 거고, 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3金씨 중 한 사람이 집권했을 거요. 이건 명백히 新軍部가 집권하기 위해 과격시위를 촉발시킨 겁니다』
흥분한 군중 제어할 방법 없었다
-광주에서 軍警 27명이 전사했습니다. 5월 20일 저녁에 노동청 앞에서 경찰 네 명이 시위대 차량공격에 깔려죽었고, 밤 10시경에는 공수부대원이 또 시위대 차량에 깔려 목숨을 잃었는데요.『가만히 있는 공수부대를 시민들이 공격했다는 말입니까. 그런 발언 때문에 광주시민이 더 분노하는 겁니다』-당시 광주시민들은 상당한 자제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전남대의대 병원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도청과 헬기를 사격한다든지, 軍警방어선에 차량을 돌진시키는 행동은 너무 과격했던 게 아닐까요.『시위대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군중이었기 때문에 지휘 통솔이 불가능했습니다. 피해를 당한 시민들, 분노가 극에 달한 시민들은 독발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충분했어요. 인간은 분위기에 상당히 좌우됩니다. 군중들이 흥분하니까 제어할 수 없는 행동이 나온 것으로 봅니다』-5월 21일 도청 앞에서의 집단발포도 하나의 쟁점이 될 것 같습니다. 검찰은 계획에 의한 의도적 발포가 아니라 시위대에 포위당한 공수부대가 시민들의 차량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자위권 차원에서의 발포였다고 밝혔습니다.『지휘관이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이 무고한 시민을 살상했다면 지휘관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기들 책임 아래 있던 부하가 저지른 살상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휘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져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검찰이 밝힌 사망자 수 믿을 수 없다』
사망자 수에 관해서도 검찰 조사와 광주 시민들의 심성에 자리잡은 수치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검찰이 밝힌 사망자는 민간인 1백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1백93명이다.또 광주 시위과 관련해서 행방불명자로 인정되어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은 47명이다. 사망자 수에 관해 曺신부는 단호한 목소리로 『검찰 발표에 승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우리가 검찰이나 경찰도 아니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조사해서 반론을 제기하고 실증적인 뒷받침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만…』-사망자가 검찰 발표보다 많다면 그에 따른 증거가 있어야 할 텐데요.『제가 수습위원으로 도청에 있을 때 윤영규 선생이 시내에서 시민군을 통해 제보받아 사망자를 집계했습니다. 이 분이 기억하고 있는 사망자가 1천5백60명이었어요. 광주시의 5·18 당시 사망보고서에 2천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광주시 사망자가 월평균 몇백 명이었는데, 왜 그 달만 2천 명이냐 이겁니다』-그것은 통계상의 착오이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지 않았습니까.『언론에 광주시 사망통계가 보도되자 정부에서는 통계가 잘못되었다고 불을 끈 겁니다. 구두닦이 소년이나 넝마주이 등 몇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사라졌습니다』검찰은 이번 수사 결과 광주 사망자 중 공수부대의 총격이나 살상진압에 의한 사망 사례 외에 칼빈이나 M1 총상으로 인한 사망자도 다수 있는 것으로 밝혀냈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20사단, 31사단 병력은 모두 M16으로 무장하고 있었다.칼빈과 M1에 의한 총상으로 사망했다면 무장한 시위대의 오인사격이나 오발사격이 잦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曺신부는 의견이 달랐다. 시민들이 소지한 무기에 대한 통제는 불가능했지만 시민군 사이에 오인사격도 없었고, 총기 오발사고도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광주시민의 증언에 의하면 칼빈 오발사고, 국민학생이 M1 소총을 끌고 다니다가 오발하여 부상당한 사례가 나오는데요.『혼란 속에서 너도나도 무기를 들었는데, 솔직히 무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무장한 경우도 많았어요. 실탄도 흔했고. 중고등학생까지 총을 들었으니 오발사고도 있을 수 있었겠죠. 그렇지만 오발사고로 시민이 죽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그동안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에게 술을 먹이거나, 흥분제를 먹였다』『경상도 군인들을 대거 광주로 보냈다』『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냈다』『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칼로 유방을 도려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曺신부는 이런 소문들 중 상당수가 사실로 밝혀졌다는 주장했다.『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에게서 술냄새를 맡았다고 증언했어요. 또 戰敎司 부사령관이 시민측 수습위원들에게 「여자 유방을 도려낸 것은 사실이고, 나도 목격했다」고 말한 것을 여러 사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검은 끝이 무디기 때문에 도려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상처를 보니 예리한 면도날로 범행했더라」이겁니다. 유방을 도려낸 건 사실이지만 계엄군의 소행이 아니라 시민이 범행하고 군에게 뒤집어씌웠다는 주장이었어요』그러나 「공수부대원에게 흥분제를 먹였다」거나,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소문은 유언비어였다고 설명했다.曺신부는 광주 문제를 다룬 MBC다큐멘터리 프로 「어머니의 노래」와 국회 청문회에서 헬기 기총사격을 증언했다.그가 목격한 기총사격 장면은 5월 21일, 공수부대의 집단발포가 시작되기 두 시간쯤 전이었다. 도청 앞 분위기를 살피려고 사제관을 나와 성당앞 철문에 이르렀을 때다. 헬기 한 대가 광주공원으로 날아가면서 광주천 불로동 다리 상공에서 불빛이 50㎝∼1m 정도로 쭉 뻗으며 「드드득 드드득 드드득」세 번이나 갈기는 기총사격을 소리를 들었다.『기총사격 증언은 사제로서 제 눈으로 목격한 진실을 말한 겁니다. 헬기 기총소사는 명백한 사실이오. 많은 시민이 제보를 해주었지만 기총소사로 인한 부상자나 사망자를 아직 발견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지휘권 이원화」문제의 진상은?
曺신부는 검찰이 이번 수사결과 밝힌 사실들 가운데 명백히 사실과 다른 부분, 예를 들어 헬기 기총소사 문제나 화염방사기 사용여부, 양민학살 사례 등을 수집해 기자회견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기록 全文을 구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마련하지는 못했다고 한다.-이번 검찰 수사결과 鄭雄 31사단장은 실제 지휘계통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鄭雄 사단장이나 광주시민들 주장처럼 「지휘권 이원화」문제는 사실이 아니라는 뜻인데요.『전교사령관이었다가 초기에 적극 진압을 안했다 해서 체신부장관으로 간 尹興禎 장군은 검찰의 공소권 없음 발표에 분노하더군요. 공수부대는 계엄분소를 통한 정식 지휘계통이 아니라 위에서 따로 지시를 받아 마음대로 행동한 겁니다』-그런 말을 尹興禎 장군에게 직접 들었습니까.『직접 들은 건 아닙니다. 검찰의 공소권 없음에 승복할 수 없다는 내용의 코멘트를 기자들에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양민학살에 대해 검찰은 비교적 소상한 내용을 밝혔다. 그러나 曺신부는 검찰이 밝힌 양민학살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며 숱한 양민학살 사례가 제보되었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曺신부가 목격한 사례다.『주남마을 가기 전에 화성 가는 다리 부근에 시민군 1개소대 병력의 무기를 회수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이곳에 부상자 운반용 시민군 지프차가 있었는데요, 환자 후송팀은 적십자 완장을 차고 부상자를 실으러 가다가 계엄군의 집중사격을 받아 시민 네 명이 즉사했어요』검찰이 양민학살 명령자에 대해 공소시효를 들어 책임을 묻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다. 인륜을 파괴한 범죄행위는 공소시효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그들은 나치 戰犯보다 더 죄질이 나쁜 인간들입니다. 戰時도 아닌 상황에서 비무장 민간인을 아무 죄도 없이 화풀이식으로 사살한 건 인간사냥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검찰은 반드시 양민학살 명령자를 찾아내 기소해야 합니다. 공소시효는 지기 합리화일 뿐이오』
망월동 묘역 국립묘지로 승격하라
-광주가 평온해진 다음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는데요.『무력진압 후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계엄사는 수습위원들까지 잡아다 실형을 선고했으니까요. 그런데 재판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보시오. 모든 사람이 제2의 4·19를 일으켜 현 정치질서를 파괴하고 金大中씨를 통치자로 모시기 위해 정권찬탈 대열에 나섰다고 적혀 있더군요』아무리 이의제기를 해도 소용없었다는 것이다. 조사관의 말을 안들으면 몸만 괴로우니까 모두들 조작된 진술서에 손도장을 찍었다고 한다.『이처럼 조작된 수사를 통해 시나리오 엮어가지고 민주 인사를 감옥에 보낸 다음 全斗煥씨가 대통령 자리에 앉았어요. 신군부는 집권을 위해 광주에서 반민족적 학살행위를 저지른 겁니다』따라서 5共 정권은 정통성을 인정 받을 수 없는 비합법적 정부다, 검찰의 성공한 쿠데타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5·6공 핵심세력으로 등장했던 광주학살 원흉들은 반드시 기소되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曺신부의 논리는 단순 명쾌했다.曺신부는 광주 희생자와 부상자, 공수부대의 만행에 맞서 싸운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바친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이들에게 국가 보훈 차원에서 정당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이 나라 민주제단에 바쳐진 숭고한 희생 영령들이 잠들고 있는 망월동 묘역은 빠른 시일 안에 4·19 묘지처럼 국립묘지로 승격돼야 합니다. 그러나 국립묘지는커녕 진상규명 조차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워요』
『우리는 용서할 상대가 없다』
曺喆鉉(세례명·備吾)신부는 5·18관련 검찰수사에 대해 일면 수긍하면서도 『학살 관련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결론』이라며 불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사망자 2천명 설, 헬기 기총소사도 사실이며, 검찰이 밝힌 사례외에도 숱한 양민학살이 저질러졌다는 것이다. 曺신부는 金永三정부는 광주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며 차기 정권에 그 처리문제를 기대하고 있었다. 누가 집권하든 광주문제의 부담은 계속 이어지게 된 셈이다.金容三 月刊朝鮮 기자
金永三 정부에 기대 않는다
광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김포공항을 이륙한 지 50분. 뭉게구름 사이로 속살을 내비친 광주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활주로에서 전투기들이 떼를 지어 발진하는 폭음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曺喆鉉(세례명·備吾)신부가 주임신부로 있는 봉선동 성당으로 가기 위해 택시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검찰수사에 항의하는 시위가 끊이질 않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그 땐 나도 공수부대원에게 개머리판으로 턱을 두 번이나 얻어맞었지라. 얼굴이 호박처럼 땐땐하니 부어 올라 혼났응게』그는 얻어맞았다는 부위를 손으로 어루만졌다.『나는 지지리도 복도 없어라. 그때 병원에 가서 치료받고 진찰 기록 남긴 사람들은 보상금을 받았는디, 나는 무서워서 병원에도 안가부렀다요』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시는 그에게 검찰수사와 그에 따른 항의시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검사들이라고 무슨 뽀족수가 있다요? 데모도 이잔 신물났소. 다 잊고 살라요. 국민들이 항의한다고 金永三씨가 全斗煥 盧泰愚 징역 살릴 것도 아니고…』8월 3일 오후 광주 봉선동 성당. 曺喆鉉 신부(59)는 구리빛 얼굴에 함박만한 웃음을 달고 나타났다. 건강한 모습이었다.『우리는 광주문제 해결에 있어 金永三 정부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아요. 이 정권은 태생이 5, 6共과 뿌리가 같은데 자기들 기득권과 엉겨 있는 광주학살자를 단죄할 수 있겠소』『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질문을 꺼내려는 찰나 曺신부는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린 검찰을 격렬하게 비난했다.『학살 主犯들을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니…. 검사들이 수사에 앞서서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고 갔다면 그런 결정을 못내렸을 거요. 검찰은 법과 양심을 속이고 정의와 역사를 왜곡했소. 「공소권 없음」은 검찰의 직무유기입니다』
『검찰은 정권의 娼女요, 창녀!』
분이 덜 풀린 모양이다.『그들에겐 「정권의 侍女」란 말도 아까워. 검찰은 「정권의 娼女」요, 창녀!』그는 언론쪽으로 화살을 돌리더니 비난의 목소리를 퍼붓었다. 우리 언론이 다분히 권력지향적인 입장에서 정의와 양심의 파수꾼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광주문제를 兩是論이나 兩非論으로 풀려가려는 언론의 태도가 못마땅합니다. 언론은 권력의 편이 아니라 진실의 편에 서야 합니다』曺신부는 검찰 수사결과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은 철회되어야 하며 학살 관련자는 처벌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외국에서는 양민학살과 같은 반인륜행위,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국가반란은 공소시효와 관계없이 특별법을 제정해 단죄하고 있는데…』반드시 학살 관련자를 기소해야 진실이 규명될뿐더러, 그들을 범법자로 역사에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후 金永三 대통령이 대화합의 차원에서 특별사면할 수도 있는 문제라는 것이 曺신부를 비롯한 광주시민들의 입장이었다.曺신부는 전국적으로 「학살자 기소 투쟁」이 벌어지는 건 민주화 항쟁의 주역인 광주시민에 대한 역사에서의 명예회복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울러 이번 기소투쟁은 차기 정권에게 부담을 지우려는 정치적 의도도 내포되어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權不十年이란 말이 있지요. 이제 2년 반이 지나면 金대통령도 정권을 내놔야 합니다. 다음엔 참으로 민주적인 정권을 창출해서 광주문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문제를 매듭지어야죠』
다음 말이 의미심장했다.『우리는 광주문제로 金永三 정권이 지지기반을 상실하도록 코너에 모는 국민운동을 벌이고 있는 셈입니다. 독단적이고 無知하고 5·6共 군사정부와 다름없는 문민독재 정권을 영원히 도태시키고, 국민의 상처를 감싸는 민주정권을 창출해야죠』말을 아끼긴 했지만 曺신부의 상상속에는 『광주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金大中 선생이 집권해야』라는 인식이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음이 확실했다.
「폭도의 부두목」으로 몰린 신부
長白衣(신부가 미사 때 입는 길고 흰 웃옷)로 상징되는 사제가 5·18광주의 한복판으로 떠밀려 나간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그는 광주가 현대사의 쟁점으로 떠올랐던 1980년 전남도청에서 불과 8백여m 떨어진 계림동 본당 주임신부로 봉직하고 있었다.『창밖에서 대한민국 국군이 자행하는 폭력과 광기의 현장을 숱하게 목격했어요.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 운영되는 공수부대가 그토록 무자비하게 시민을 몽둥이로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갈기다니요…. 상상이나 됩니까』曺신부는 상당히 흥분했다.『비록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였지만 총이 있다면 학살만행을 저지르는 공수부대원을 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광주의 5월은 성당이라고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계엄군은 허락도 없이 성당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폭도를 수색한다며 대검으로 천정을 푹푹 쑤셨다.5월 27일 새벽에 몰려온 계엄군 하사관은 신부 앞에서 『도주자는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러나 曺신부는 천성이 폭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총칼과 대포는 비폭력과 무저항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평화적 해결」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공수부대가 市 외곽으로 철수한 수 曺신부는 윤공의 대주교의 명령으로 시민 수습위원이 된다. 그는 무장 시위대에게 무릎 꿇고 애원하고, 총으로 위협당하면서도 눈물로 무기반납을 호소했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그를 「폭도의 부두목」으로 낙인찍었다. 그의 체포를 위해 50만원의 현상금도 걸었다(계엄사가 밝힌 폭도 두목은 洪南淳 변호사였다). 「내란 중요임무 종사와 방조죄」로 군법회의에서 3년형을 받고 6개월간 감옥도 살아야 했다.曺신부를 비롯한 광주 민주화운동 당사자들의 인식 속에 존재하는 진실과, 이 사건 수사를 담당한 검찰이 밝혀낸 진실 사이에는 넘지 못할 산맥이 자리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15년 전 광주에서 발생했던 비극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 광주 시민들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개인적인 입장이라면 광주시민과 국민 여러분께 「용서합시다, 남을 심판하지 맙시다, 단죄하지 맙시다」라고 애원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전제조건으로 학살 관련자들이 국민과 역사앞에 자신들의 과오를 시인하고 관대한 용서를 바래야 합니다. 용서를 받을 대상자가 나타나야 국민이 용서할 것 아니오. 학살 관련자들은 「책임없다, 자위권 발동이었다」는 식으로 변명을 일삼으니…』국민이 용서할 대상이 없으니 용서를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金대통령은 모든 부담을 검찰에게 넘겼어요. 자신은 5·18문제로 손에 때를 묻히기 싫었던 셈이지. 내가 살려면 나부터 죽어야 하는 법인데, 金대통령은 자신만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문제 해결을 그르치게 된 거요』
-검찰은 『국내외 판례를 뒤져봤지만 지금까지 내란 미수나 내란 예비, 음모죄가 처벌된 적은 있어도 내란죄 기수(旣遂), 즉 성공한 쿠데타가 처벌된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검찰이 기소할 수 없다는 입장인데요.『그 문제는 검찰보다 金永三 정권에 일차적 책임이 있습니다. 정치역학적 관점에서 볼 때 金정권은 태생이 5, 6共과 한 뿌리이기 때문에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 의지가 없어요. 그러니 정권의 시녀인 검찰이 어떻게 하겠습니까』-5·18 고소·고발인들 주장에 의하면 광주 유혈극은 광주시민이 피해자, 군사정권 관련자가 가해자로 나뉘게 됩니다. 두 집단 사이에는 입장 차가 됩니다. 두 집단 사이에는 입장 차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폭도들의 난동」이나 「광주사태」가「광주민주화운동」으로 용어가 바뀌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요. 현장에 계셨던 신부님 입장에서 광주 비극의 발단과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광주 문제는 광주와 전남에 국한된 사안이 아닙니다. 광주의 투쟁정신은 전국민적이고,국가적 차원으로 확대해석해야 됩니다. 국민들은 80년을 민주회복의 호기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군부세력이 12·12와 계엄령 전국 확대로 민주물결을 차단했어요. 국민이 원하는 통치자를 뽑을 수 있는 기회를 무력으로 박탈한 겁니다』
농아학교 학생, 진압봉으로 머리 맞아 현장에서 즉사
-공수부대가 투입된 수 다른 지역은 시위가 그쳤습니다만 유독 광주에서는 5월 18일 아침부터 전남대 정문에서 군과 학생이 충돌했습니다.『그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曺신부는 정색을 하고 앉았다.『그것은 전날 발표된 정치활동 금지, 金大中씨 구속 등 민주화 일정의 정지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다른 지역에도 공수부대의 무차별 매타작에 맞아 죽으니까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은 무서워서 숨든가, 아니면 들고 일어나든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5월 18일 오후에 11공수여단이 추가 투입되었고, 이날 하루에 2백73명의 시위대가 체포되었습니다. 게다가 시민 김경철씨가 공수부대원에게 맞아죽었고 수십 명이 곤봉세례, 대검 등에 부상당했습니다. 첫날부터 공수부대 진압이 가혹했었다는 뜻인데요.『농아학교 학생이 시내에 나왔다가 진압봉으로 머리 한복판을 얻어맞아 즉사했습니다. 첫날부터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패고, 대검으로 찌르는 등 광란의 행동을 벌였어요』그 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曺신부는 차분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시민의 머리를 박살내자 피가 분수처럼 튀어올랐소. 異民族 군인들이 피정복민을 분탕질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어요』-검찰측 수사결과에 의하면 7공수여단 병사들은 방석모나 방패 등 부상 방지나 충격을 완충시키는 시위 진압 장비 없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맨 몸에 진압봉 한 자루와 착검한 M16을 들고 나온 겁니다. 검찰은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공수부대원이 부상하자 흥분해서 진압봉을 휘두르고 대검을 사용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아무리 그렇다 해도 대검으로 찌르고, 야구방망이와 같은 진압봉으로 머리를 박살낼 수 있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공수부대가 과잉진압하기 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曺신부는 일사천리로 말을 이었다.『과잉진압이 없었다면 광주학살도 없었을 거고, 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3金씨 중 한 사람이 집권했을 거요. 이건 명백히 新軍部가 집권하기 위해 과격시위를 촉발시킨 겁니다』
흥분한 군중 제어할 방법 없었다
-광주에서 軍警 27명이 전사했습니다. 5월 20일 저녁에 노동청 앞에서 경찰 네 명이 시위대 차량공격에 깔려죽었고, 밤 10시경에는 공수부대원이 또 시위대 차량에 깔려 목숨을 잃었는데요.『가만히 있는 공수부대를 시민들이 공격했다는 말입니까. 그런 발언 때문에 광주시민이 더 분노하는 겁니다』-당시 광주시민들은 상당한 자제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전남대의대 병원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도청과 헬기를 사격한다든지, 軍警방어선에 차량을 돌진시키는 행동은 너무 과격했던 게 아닐까요.『시위대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군중이었기 때문에 지휘 통솔이 불가능했습니다. 피해를 당한 시민들, 분노가 극에 달한 시민들은 독발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충분했어요. 인간은 분위기에 상당히 좌우됩니다. 군중들이 흥분하니까 제어할 수 없는 행동이 나온 것으로 봅니다』-5월 21일 도청 앞에서의 집단발포도 하나의 쟁점이 될 것 같습니다. 검찰은 계획에 의한 의도적 발포가 아니라 시위대에 포위당한 공수부대가 시민들의 차량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자위권 차원에서의 발포였다고 밝혔습니다.『지휘관이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이 무고한 시민을 살상했다면 지휘관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기들 책임 아래 있던 부하가 저지른 살상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휘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져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검찰이 밝힌 사망자 수 믿을 수 없다』
사망자 수에 관해서도 검찰 조사와 광주 시민들의 심성에 자리잡은 수치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검찰이 밝힌 사망자는 민간인 1백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1백93명이다.또 광주 시위과 관련해서 행방불명자로 인정되어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은 47명이다. 사망자 수에 관해 曺신부는 단호한 목소리로 『검찰 발표에 승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우리가 검찰이나 경찰도 아니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조사해서 반론을 제기하고 실증적인 뒷받침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만…』-사망자가 검찰 발표보다 많다면 그에 따른 증거가 있어야 할 텐데요.『제가 수습위원으로 도청에 있을 때 윤영규 선생이 시내에서 시민군을 통해 제보받아 사망자를 집계했습니다. 이 분이 기억하고 있는 사망자가 1천5백60명이었어요. 광주시의 5·18 당시 사망보고서에 2천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광주시 사망자가 월평균 몇백 명이었는데, 왜 그 달만 2천 명이냐 이겁니다』-그것은 통계상의 착오이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지 않았습니까.『언론에 광주시 사망통계가 보도되자 정부에서는 통계가 잘못되었다고 불을 끈 겁니다. 구두닦이 소년이나 넝마주이 등 몇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사라졌습니다』검찰은 이번 수사 결과 광주 사망자 중 공수부대의 총격이나 살상진압에 의한 사망 사례 외에 칼빈이나 M1 총상으로 인한 사망자도 다수 있는 것으로 밝혀냈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20사단, 31사단 병력은 모두 M16으로 무장하고 있었다.칼빈과 M1에 의한 총상으로 사망했다면 무장한 시위대의 오인사격이나 오발사격이 잦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曺신부는 의견이 달랐다. 시민들이 소지한 무기에 대한 통제는 불가능했지만 시민군 사이에 오인사격도 없었고, 총기 오발사고도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광주시민의 증언에 의하면 칼빈 오발사고, 국민학생이 M1 소총을 끌고 다니다가 오발하여 부상당한 사례가 나오는데요.『혼란 속에서 너도나도 무기를 들었는데, 솔직히 무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무장한 경우도 많았어요. 실탄도 흔했고. 중고등학생까지 총을 들었으니 오발사고도 있을 수 있었겠죠. 그렇지만 오발사고로 시민이 죽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그동안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에게 술을 먹이거나, 흥분제를 먹였다』『경상도 군인들을 대거 광주로 보냈다』『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냈다』『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칼로 유방을 도려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曺신부는 이런 소문들 중 상당수가 사실로 밝혀졌다는 주장했다.『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에게서 술냄새를 맡았다고 증언했어요. 또 戰敎司 부사령관이 시민측 수습위원들에게 「여자 유방을 도려낸 것은 사실이고, 나도 목격했다」고 말한 것을 여러 사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검은 끝이 무디기 때문에 도려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상처를 보니 예리한 면도날로 범행했더라」이겁니다. 유방을 도려낸 건 사실이지만 계엄군의 소행이 아니라 시민이 범행하고 군에게 뒤집어씌웠다는 주장이었어요』그러나 「공수부대원에게 흥분제를 먹였다」거나,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소문은 유언비어였다고 설명했다.曺신부는 광주 문제를 다룬 MBC다큐멘터리 프로 「어머니의 노래」와 국회 청문회에서 헬기 기총사격을 증언했다.그가 목격한 기총사격 장면은 5월 21일, 공수부대의 집단발포가 시작되기 두 시간쯤 전이었다. 도청 앞 분위기를 살피려고 사제관을 나와 성당앞 철문에 이르렀을 때다. 헬기 한 대가 광주공원으로 날아가면서 광주천 불로동 다리 상공에서 불빛이 50㎝∼1m 정도로 쭉 뻗으며 「드드득 드드득 드드득」세 번이나 갈기는 기총사격을 소리를 들었다.『기총사격 증언은 사제로서 제 눈으로 목격한 진실을 말한 겁니다. 헬기 기총소사는 명백한 사실이오. 많은 시민이 제보를 해주었지만 기총소사로 인한 부상자나 사망자를 아직 발견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지휘권 이원화」문제의 진상은?
曺신부는 검찰이 이번 수사결과 밝힌 사실들 가운데 명백히 사실과 다른 부분, 예를 들어 헬기 기총소사 문제나 화염방사기 사용여부, 양민학살 사례 등을 수집해 기자회견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기록 全文을 구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마련하지는 못했다고 한다.-이번 검찰 수사결과 鄭雄 31사단장은 실제 지휘계통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鄭雄 사단장이나 광주시민들 주장처럼 「지휘권 이원화」문제는 사실이 아니라는 뜻인데요.『전교사령관이었다가 초기에 적극 진압을 안했다 해서 체신부장관으로 간 尹興禎 장군은 검찰의 공소권 없음 발표에 분노하더군요. 공수부대는 계엄분소를 통한 정식 지휘계통이 아니라 위에서 따로 지시를 받아 마음대로 행동한 겁니다』-그런 말을 尹興禎 장군에게 직접 들었습니까.『직접 들은 건 아닙니다. 검찰의 공소권 없음에 승복할 수 없다는 내용의 코멘트를 기자들에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양민학살에 대해 검찰은 비교적 소상한 내용을 밝혔다. 그러나 曺신부는 검찰이 밝힌 양민학살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며 숱한 양민학살 사례가 제보되었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曺신부가 목격한 사례다.『주남마을 가기 전에 화성 가는 다리 부근에 시민군 1개소대 병력의 무기를 회수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이곳에 부상자 운반용 시민군 지프차가 있었는데요, 환자 후송팀은 적십자 완장을 차고 부상자를 실으러 가다가 계엄군의 집중사격을 받아 시민 네 명이 즉사했어요』검찰이 양민학살 명령자에 대해 공소시효를 들어 책임을 묻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다. 인륜을 파괴한 범죄행위는 공소시효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그들은 나치 戰犯보다 더 죄질이 나쁜 인간들입니다. 戰時도 아닌 상황에서 비무장 민간인을 아무 죄도 없이 화풀이식으로 사살한 건 인간사냥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검찰은 반드시 양민학살 명령자를 찾아내 기소해야 합니다. 공소시효는 지기 합리화일 뿐이오』
망월동 묘역 국립묘지로 승격하라
-광주가 평온해진 다음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는데요.『무력진압 후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계엄사는 수습위원들까지 잡아다 실형을 선고했으니까요. 그런데 재판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보시오. 모든 사람이 제2의 4·19를 일으켜 현 정치질서를 파괴하고 金大中씨를 통치자로 모시기 위해 정권찬탈 대열에 나섰다고 적혀 있더군요』아무리 이의제기를 해도 소용없었다는 것이다. 조사관의 말을 안들으면 몸만 괴로우니까 모두들 조작된 진술서에 손도장을 찍었다고 한다.『이처럼 조작된 수사를 통해 시나리오 엮어가지고 민주 인사를 감옥에 보낸 다음 全斗煥씨가 대통령 자리에 앉았어요. 신군부는 집권을 위해 광주에서 반민족적 학살행위를 저지른 겁니다』따라서 5共 정권은 정통성을 인정 받을 수 없는 비합법적 정부다, 검찰의 성공한 쿠데타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5·6공 핵심세력으로 등장했던 광주학살 원흉들은 반드시 기소되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曺신부의 논리는 단순 명쾌했다.曺신부는 광주 희생자와 부상자, 공수부대의 만행에 맞서 싸운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바친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이들에게 국가 보훈 차원에서 정당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이 나라 민주제단에 바쳐진 숭고한 희생 영령들이 잠들고 있는 망월동 묘역은 빠른 시일 안에 4·19 묘지처럼 국립묘지로 승격돼야 합니다. 그러나 국립묘지는커녕 진상규명 조차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