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죽은자가 산 자에게 말한다/5월 27일, 그 마지막 새벽까지 총을 들고 싸웠던 항쟁 참가자의 증언 위성삼(…
본문
5·18증언-우리는이렇게 싸웠다-5월 27일,
그 마지막 새벽까지 총을 들고 싸웠던 항쟁참가자의 증언!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말한다
정적을 가르는 총성이 울렸다
새벽 3시 30분! 도청 주변 사방에서 정적을 가르는 총성이 울렸다. 가두방송을 듣고 뛰쳐 나온 젊은이들이 계엄군의 포위망에 걸렸다. 어둠속에서 도청주위를 맴돌다 수백명이 체포, 사살되었다.도청 상황실에서는 자폭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한 청년이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며 말했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여기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 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 산 사람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장래는 숙연해졌고 수류탄을 움켜쥐고 있던 고등학생들은 흐느껴 울었다.
계엄군의 진격은 시작되었고 끝까지 투혼을 불사르며 사그러지는 시민군들의 비명은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는 아침햇살로 빨려들어 갔다.80년 5월 27일, 최후까지 도청을 사수했던 시민군들, 그중 생존자인 위성삼씨! 80년 5월 도청내 총경비 책임을 맡았던 그는 2년 6월의 형을 받고 6개월의 형고를 치룬 뒤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현재 민주쟁취 국민운동 전남본부 사무처 부처장으로 일하고 있는 위성삼씨는 80년 5월이 자신의 생애 있어 획기적인 이정표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군제대후 조대 전자공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그는 평소 ‘의리의 사나이’라고 친구들 사이에서 평판이 자자했다.순수한 열정과 정의를 사랑했던 위성삼씨는 80년 5월을 상기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산 자는 죽은 자에게 할 말이 없음을 덧붙이면서….”5월 15일 도청앞 집회에서 광주시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불타는 염원이 지극함을 보며 《정의》를 실천하는 자만이 올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때의 광주시민들의 드높은 시민정신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해도 부족함이 있다며 계속 그는 말을 이었다.그 후 18일 오전 10시경, 17일부터 계엄령 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졌고 시내 곳곳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이로써 그들의 작전명처럼 화려한 휴가는 이미 시작되었다.19일 오전 지난 밤 친구집에서 잤기 때문에 5번 버스를 타고 가는데 금남로쪽에서 시위 군중의 소리가 들렸다. 노동청앞에서 내려 MBC쪽으로 가는데 중앙국민학교 골목에서 시위대열이 공수부대에 밀려왔다. 그들은 끝끝내 《계엄군은 물려가라》《계엄철폐》의 구호를 외치며 후퇴했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계엄군들의 곤봉세례를 받으며 피곤죽이 되어 쓰러져갔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조차 힘들었다. 어찌 저것들이 인간이란 말인가. 시위군중과 함께 행동하게 된 나는 전여고 담을 넘어 광고앞에 전자제품 대리점을 하는 사촌누나 집으로 가려는데 동원예식장앞에 장갑차가 시민들에 둘러 싸인채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양 옆에 달린 감시경이 파손되어 그 자리에 정지해 있었다. 한 시민이 어디서 구했는지 볏짚단을 가져와 불을 붙여 바퀴부분에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 다시 볏짚단을 장갑차 뚜껑에 올려놓자 느닷없이 뚜껑이 열리면서 M16총구가 위로 올라오더니 공중을 향해 총을 쏘고 이제는 주춤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정조준하여 앞에 보이는 사람들은 흩어져 골목에 살짝 붙었다. 그들은 총을 겨눈채 지나갔고 쓰러진 학생은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와 몇사람이 그 학생을 일으켜 계림파출소 부근까지 운반하고 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계했다. 내가 조대부고를 나왔기 때문에 명찰을 보니 조대부고 야간생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산 자는 죽은 자에게 말이 없다
공용의 군용헬기에서는 “모든 시민은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거리에 나오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계엄군은 시내 질서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들은 안심하십시오.”라고 방송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런 방송에 귀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후 7시쯤, 땅거미가 덮이는 시작한 거리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내내 벌어졌던 살육과 혈전이 남아 있는 금남로에 시민들의 고통과 슬픔을 달래주듯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 뒤 21일에는 광주고속차를 몰고 양동, 산수오거리등을 돌아 다녔는데 많은 시민들이 김밥, 음료수, 빵을 차에 실어줬다. 계엄해제, 김대중석방, 연행 학생 석방 등을 외치며 차는 전남방직으로 향했고 여성노동자들을 태우고 나주로 향했다. 삶과 죽음에 기로 선 광주시민들은 살기 위해서 생명을 보호할 무기를 찾았다.전날 도청을 점령하기 위해 많은 차량과 무수한 광주시민들이 운집했지만 저들의 신예장비에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총을 든 것은 ‘탈취’가 아니라 민주 시민의 자위권
나주경찰서 무기를 회수한 우리들은 광주공원에 집결했다. 그 뒤 화순, 장성, 영광 곳곳에서 무기를 회수해 왔다. 바로 그날 무장한 시민군이 등장하게 되었고 접수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무수한 넋들이 사라져 가야만 했다.나는 옷을 갈아 입으러 집에 들어 갔다가 붙잡혀 며칠동안 집에 있었다. 25일 시민궐기대회가 열린다는 소리를 듣고 도청으로 왔다. 대회가 끝난 뒤 대학생들은 사태수습을 위해 YWCA로 모여달라고 했다. 그래, 학생증을 제시하고 YWCA로 가보니 거기에는 3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곱슬머리의 한 청년이 도청으로 들어가자고 제의했고 나를 포함한 대표 5명이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 2층에서는 수습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하게 된 나는 도청 총경비책임을 맡기로 했다. 회의가 끝난후 옆사무실에서는 YWCA에 함께 있었던 80여명의 학생들이 윤상원 열사로부터 총쏘는 법을 교육받고 있었다. 무척이나 당당하게 보였던 그때의 윤열사의 모습을 잊을수가 없다. 언젠가부터 위성삼씨의 눈가에는 얼핏 연한 물기가 베어 있었다. 계속되는 그의 목소리는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26일 계엄군과 협상이 격렬되자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는 도청을 빠져나갔다.갑자기 엄습해오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조사실에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어렴풋이 “무기를 회수하겠다”는 방송이 들렸다. 깜짝 놀라 아래층을 내려다 보니 무기를 회수하고있었다. 급하게 상황실장 박남선씨에게로 뛰어가 이게 어떻게 된거냐, 무기는 왜 회수하느냐, 이제 계엄군이 몰려올텐데.
그러자 박남선씨도 놀라 뛰어 내려 갔다. “무기를 회수하는 자들은 엄벌에 처하겠다. 살고 싶으면 차라리 지금 나가라”하면서 무기 회수를 멈추게 했다. 폭풍전야의 고요가 무섭게 휘감은 도청에는 결코 도청을 다시 계엄군에게 내놓을 수 없음을 서로서로의 눈빛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27일 새벽 살풋이 잠이 들었는데 새벽 4시경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다는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우리들은 재빨리 움직여 탄약을 배급받고 도청 뜰앞, 옆, 뒤에 방어선을 쳤다. 엄폐물을 중심으로 각 2인 1조씩 배치를 시키고 있을 무렵 갑자기 2층 난간에서 M16이 난사되었다.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상대를 분간하기 힘들었다. 무조건 “우리편이니 쏘지 마라”고 외쳤다. 그랬더니 이내 총구는 다른 곳을 향했다.번뜩 상황실에 남아 있던 여고생과 박용숙씨를 떠올리고 얼른 대피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1층 상황실로 뛰어 오르는 순간 상황실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낮은 포복으로 상황실에 접근한 나는 상황실로 뛰어 들어갔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지우려고 하면서….
들어가 보니 총기 오발사고로 시민군 한명이 쓰러져 있었다. 평소 부상을 대비해 배에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다니던 나는 배에서 붕대를 풀어 그 사람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순간 문이 떨어져 나가며 M16이 난사되었고 벽을 맞고 튀어나온 총탄에 어깨 부상을 입었다.삶과 죽음을 넘나 들며 동지들의 피맺힌 절규가 아른 거렸다. 잠시후 우리는 투항해야 했다. 동지들의 시신을 넘으며….위성삼! 그는 살아있음을 부끄러워 했다. 동지들의 피맺힌 절규를 그는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는 시민군 생존자들과 함께 묶인채 트럭에 실려 가면서도 어둠속에서 쓰러져 가던 동지들의 최후를 머리에 떠올렸으리라!이 날의 치욕과 한 맺힘을 복수하기 위해….
그 마지막 새벽까지 총을 들고 싸웠던 항쟁참가자의 증언!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말한다
정적을 가르는 총성이 울렸다
새벽 3시 30분! 도청 주변 사방에서 정적을 가르는 총성이 울렸다. 가두방송을 듣고 뛰쳐 나온 젊은이들이 계엄군의 포위망에 걸렸다. 어둠속에서 도청주위를 맴돌다 수백명이 체포, 사살되었다.도청 상황실에서는 자폭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한 청년이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며 말했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여기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 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 산 사람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장래는 숙연해졌고 수류탄을 움켜쥐고 있던 고등학생들은 흐느껴 울었다.
계엄군의 진격은 시작되었고 끝까지 투혼을 불사르며 사그러지는 시민군들의 비명은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는 아침햇살로 빨려들어 갔다.80년 5월 27일, 최후까지 도청을 사수했던 시민군들, 그중 생존자인 위성삼씨! 80년 5월 도청내 총경비 책임을 맡았던 그는 2년 6월의 형을 받고 6개월의 형고를 치룬 뒤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현재 민주쟁취 국민운동 전남본부 사무처 부처장으로 일하고 있는 위성삼씨는 80년 5월이 자신의 생애 있어 획기적인 이정표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군제대후 조대 전자공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그는 평소 ‘의리의 사나이’라고 친구들 사이에서 평판이 자자했다.순수한 열정과 정의를 사랑했던 위성삼씨는 80년 5월을 상기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산 자는 죽은 자에게 할 말이 없음을 덧붙이면서….”5월 15일 도청앞 집회에서 광주시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불타는 염원이 지극함을 보며 《정의》를 실천하는 자만이 올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때의 광주시민들의 드높은 시민정신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해도 부족함이 있다며 계속 그는 말을 이었다.그 후 18일 오전 10시경, 17일부터 계엄령 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졌고 시내 곳곳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이로써 그들의 작전명처럼 화려한 휴가는 이미 시작되었다.19일 오전 지난 밤 친구집에서 잤기 때문에 5번 버스를 타고 가는데 금남로쪽에서 시위 군중의 소리가 들렸다. 노동청앞에서 내려 MBC쪽으로 가는데 중앙국민학교 골목에서 시위대열이 공수부대에 밀려왔다. 그들은 끝끝내 《계엄군은 물려가라》《계엄철폐》의 구호를 외치며 후퇴했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계엄군들의 곤봉세례를 받으며 피곤죽이 되어 쓰러져갔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조차 힘들었다. 어찌 저것들이 인간이란 말인가. 시위군중과 함께 행동하게 된 나는 전여고 담을 넘어 광고앞에 전자제품 대리점을 하는 사촌누나 집으로 가려는데 동원예식장앞에 장갑차가 시민들에 둘러 싸인채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양 옆에 달린 감시경이 파손되어 그 자리에 정지해 있었다. 한 시민이 어디서 구했는지 볏짚단을 가져와 불을 붙여 바퀴부분에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 다시 볏짚단을 장갑차 뚜껑에 올려놓자 느닷없이 뚜껑이 열리면서 M16총구가 위로 올라오더니 공중을 향해 총을 쏘고 이제는 주춤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정조준하여 앞에 보이는 사람들은 흩어져 골목에 살짝 붙었다. 그들은 총을 겨눈채 지나갔고 쓰러진 학생은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와 몇사람이 그 학생을 일으켜 계림파출소 부근까지 운반하고 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계했다. 내가 조대부고를 나왔기 때문에 명찰을 보니 조대부고 야간생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산 자는 죽은 자에게 말이 없다
공용의 군용헬기에서는 “모든 시민은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거리에 나오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계엄군은 시내 질서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들은 안심하십시오.”라고 방송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런 방송에 귀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후 7시쯤, 땅거미가 덮이는 시작한 거리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내내 벌어졌던 살육과 혈전이 남아 있는 금남로에 시민들의 고통과 슬픔을 달래주듯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 뒤 21일에는 광주고속차를 몰고 양동, 산수오거리등을 돌아 다녔는데 많은 시민들이 김밥, 음료수, 빵을 차에 실어줬다. 계엄해제, 김대중석방, 연행 학생 석방 등을 외치며 차는 전남방직으로 향했고 여성노동자들을 태우고 나주로 향했다. 삶과 죽음에 기로 선 광주시민들은 살기 위해서 생명을 보호할 무기를 찾았다.전날 도청을 점령하기 위해 많은 차량과 무수한 광주시민들이 운집했지만 저들의 신예장비에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총을 든 것은 ‘탈취’가 아니라 민주 시민의 자위권
나주경찰서 무기를 회수한 우리들은 광주공원에 집결했다. 그 뒤 화순, 장성, 영광 곳곳에서 무기를 회수해 왔다. 바로 그날 무장한 시민군이 등장하게 되었고 접수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무수한 넋들이 사라져 가야만 했다.나는 옷을 갈아 입으러 집에 들어 갔다가 붙잡혀 며칠동안 집에 있었다. 25일 시민궐기대회가 열린다는 소리를 듣고 도청으로 왔다. 대회가 끝난 뒤 대학생들은 사태수습을 위해 YWCA로 모여달라고 했다. 그래, 학생증을 제시하고 YWCA로 가보니 거기에는 3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곱슬머리의 한 청년이 도청으로 들어가자고 제의했고 나를 포함한 대표 5명이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 2층에서는 수습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하게 된 나는 도청 총경비책임을 맡기로 했다. 회의가 끝난후 옆사무실에서는 YWCA에 함께 있었던 80여명의 학생들이 윤상원 열사로부터 총쏘는 법을 교육받고 있었다. 무척이나 당당하게 보였던 그때의 윤열사의 모습을 잊을수가 없다. 언젠가부터 위성삼씨의 눈가에는 얼핏 연한 물기가 베어 있었다. 계속되는 그의 목소리는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26일 계엄군과 협상이 격렬되자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는 도청을 빠져나갔다.갑자기 엄습해오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조사실에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어렴풋이 “무기를 회수하겠다”는 방송이 들렸다. 깜짝 놀라 아래층을 내려다 보니 무기를 회수하고있었다. 급하게 상황실장 박남선씨에게로 뛰어가 이게 어떻게 된거냐, 무기는 왜 회수하느냐, 이제 계엄군이 몰려올텐데.
그러자 박남선씨도 놀라 뛰어 내려 갔다. “무기를 회수하는 자들은 엄벌에 처하겠다. 살고 싶으면 차라리 지금 나가라”하면서 무기 회수를 멈추게 했다. 폭풍전야의 고요가 무섭게 휘감은 도청에는 결코 도청을 다시 계엄군에게 내놓을 수 없음을 서로서로의 눈빛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27일 새벽 살풋이 잠이 들었는데 새벽 4시경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다는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우리들은 재빨리 움직여 탄약을 배급받고 도청 뜰앞, 옆, 뒤에 방어선을 쳤다. 엄폐물을 중심으로 각 2인 1조씩 배치를 시키고 있을 무렵 갑자기 2층 난간에서 M16이 난사되었다.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상대를 분간하기 힘들었다. 무조건 “우리편이니 쏘지 마라”고 외쳤다. 그랬더니 이내 총구는 다른 곳을 향했다.번뜩 상황실에 남아 있던 여고생과 박용숙씨를 떠올리고 얼른 대피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1층 상황실로 뛰어 오르는 순간 상황실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낮은 포복으로 상황실에 접근한 나는 상황실로 뛰어 들어갔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지우려고 하면서….
들어가 보니 총기 오발사고로 시민군 한명이 쓰러져 있었다. 평소 부상을 대비해 배에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다니던 나는 배에서 붕대를 풀어 그 사람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순간 문이 떨어져 나가며 M16이 난사되었고 벽을 맞고 튀어나온 총탄에 어깨 부상을 입었다.삶과 죽음을 넘나 들며 동지들의 피맺힌 절규가 아른 거렸다. 잠시후 우리는 투항해야 했다. 동지들의 시신을 넘으며….위성삼! 그는 살아있음을 부끄러워 했다. 동지들의 피맺힌 절규를 그는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는 시민군 생존자들과 함께 묶인채 트럭에 실려 가면서도 어둠속에서 쓰러져 가던 동지들의 최후를 머리에 떠올렸으리라!이 날의 치욕과 한 맺힘을 복수하기 위해….
- 이전글[월간지 관련기사] 민화위의 「광주청문회」.한동윤(월간조선, 1988. 3) 07.05.30
- 다음글[월간지 관련기사] 5월의 꿈 5월의 분노.송기숙(월간예향, 1990. 5) 07.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