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이땅, 모조리 망월동 아니냐. 조태일(시인은 밤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 나남출판, 1996. 11)
본문
이 땅, 모조리 망월동 아니냐
조태일
광주를 온몸에 흠뻑 적셔
터벅터벅 그 친구는 서울엘 와서
늘 외롭고 힘없는 내 손을 쥐고
눈과 손으로 광주를 건네주지만
내 허전한 마음까지 건네면 쓰나
내 찌든 몸까지 건네면 쓰나
찬 바람 속에서 광주는 큰 애를 뱄다더라.
찬 눈에 덮여서도 무등산은
그렇게도 우람한 만삭이라더라.
광주를 온몸에 적셔서
서울의 내 곁에 사알짝 놓아두고
터벅터벅
서울을
떠나버리는 친구 !
-<겨울소식> 전문
이 시는 필자가 1976년에 쓴 시인데 기이하게도 5·18 광주민중항쟁을 예언한 시가 되고 말았다. 흔히 시인을 예언자라고 한다. 이런 예언은 그냥 어떤 공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체험과 현실적 체험에서 끌어낸 역사적 전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결과가 현재요, 현재의 결과가 미래라는 말들을 한다. 현재를 통해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전망, 예측하는 일은 웬만한 역사의식을 가지고도 가능하다.
"찬바람 속에서 광주는 큰애를 뱄다더라", "찬 눈에 덮여서도 무등산은 그렇게도 우람한 만삭이라더라"라는 표현이 4년 후에 5·18광주민중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분출되었다. 아이를 잉태하면 몸을 풀기 마련이다. 이것이 출산이다. 광주와 우람한 무등산이 합궁해서 출산해 낸 옥동자가 바로 5·18광주민중항쟁이다. '5·18'을 거꾸로 읽으면 '8·15'가 된다. 그러므로 '5·18'은 제 2의 민족해방에 다름아니다. '8·15'를 맞아 외세의 간섭없이 자주적으로 나라를 세웠다면 남북분단이 됐을 리 없고, 6·25가 터질 리가 없었다. 외세와 독재가 없었다면 4·19가 터질 리 없었고, 일제잔재만 어느 정도 청산됐더라면 5·16이, 6·3이 있을 리가 없고, 5·18항쟁이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저 80년 5월의 광주, 과거와 현재와 닥쳐올 미래의 모순까지도 온몸으로 끌어안고 금남로에서, 충장로에서, 중앙로에서, 계림동에서 광주천변에서 땅을 올려 하늘을 진동케 했던 그때의 한 맺히고 피 맺혔던 절규는 지금도 우리들의 머리 바로 위 하늘에 떠돌고 있다.
천년만년 늘 너그럽고 부드러운 침묵으로만 누워 있던 무등산이 육중한 몸을 뒤척이면서 일어나 몸을 푼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광주 바닥에 뿌려지던 남녀노소의 그 붉은 피는 이 역사의 벽에 무슨 말을 새기기 위해서 였는가. 그것은 바로 '반외세 민족자주' '반독재 민주평화' '반분단 민족통일'이라는 우리 민족의 꿈을 아로새기기 위해서였다. 이것 말고 우리 민족이 바라는 것이 또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 반세기 동안 한결같이 갈망하고 싸워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월의 노래'는, '오월의 한'은, '오월의 외침'은 우리들의 삶의 터전인 전 국토를 울음으로 흐르고 있다. 이제 이 울음들이 위로 솟구쳐서 전 국토에 쏟아 내리려 하고 있다.
70년대와 80년대는 이승과 저승의 삶을, 아니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을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바로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투신하고 분신하며 죽어가던 시대였다. 바로 어제까지 한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 근로자들도 투신하고 분신하여 죽어가던 시대였다.
이름하여 열사의 시대였고 어디론가 끌려가 시체로 드러나던 의문사의 시대였으나 5월 항쟁을 원동력으로 하여 87년의 대규모적인 6월항쟁을 낳기도 했었다.
90년대는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좁쌀만큼의 희망을 걸고 맞이했던 시대였다. 여소야대를 만들어 준 국민들은 한가닥의 희망을 걸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제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 날벼락이라더냐? 하루아침에 밀실에서 부정한 야합으로 '민자의 치맛자락'을 국민들의 코앞에 펄럭이게 하였다. 그 치맛자락 안의 속곳에서 풍기는 악취는 국민의 코를 들쑤셔대 마비시켜 놓았다.
5월 그날, 맨 가슴으로 총검의 숲을 헤치며 파도치듯 절규했던 자주와 민주와 통일의 염원은 공안통치라는 해괴한 적막강산에 묻혀버렸고, 무참히 쓰러져간 항쟁의 영령들이 지금 이 나라의 구천을 떠돌고 있는 가운데 오늘도 많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90년대도 이승과 저승의 삶이 도무지 분간이 안되는 시대로 진행되고 있는가. 혹시 반민족, 반민주, 반통일 세력들은 광주를 혐오와 좌절의 도시로 오염시켜 역사의 뒤안길로 내팽개치려 해도 민족의 위업에 기꺼이 신명을 다해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민족구성원에게 호소했던 그때 영령들의 고결한 뜻이 이 땅을 지켜보고 있는 한, 우리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무릎꿇고 사느니보다 차라리 서서 죽는' 결의로써 그 위대한 뜻을 꽃피워 열매를 맺고야 말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은 각계각층이 신분의 고하, 빈부의 차등없이 광범위하게 참여한 대규모적인 항쟁이었고, 항쟁기간중에는 민중의 자치가 훌륭하게 실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항쟁을 분수령으로 하여 반미운동이 보다 적극적이고도 심도있게 벌어졌다는 점에서도 한국민중운동사에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항쟁을 통해서 한국민중의 막연한 숭미의식이 구체적인 반미의식으로 전환되었다. 이 민중운동이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절대절명의 궤도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80년 5월항쟁의 경험은 문화운동에서도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문화운동에서 광주체험은 정치적 의식의 고양으로 정치적 훈련을 쌓는 좋은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리해서 오랫동안 오염되었던 서구 상업문화와 허구적 외세의 지배문화에 대한 대항문화로서의 민중문화 건설이라는 전망을 제시해 주었다. 최승운은 <문화예술운동의 현단계>라는 글에서, 80년대의 커다란 경험은 운동의 전반적 발전에서는 물론이요, 특히 문화운동에서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전제한 릴, 운동이 대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은 그 이전까지는 다만 막연한 상식에 불과했으나 80년의 경험은 대중의 참여 여하가 그리고 대중이 얼마나 조직되어 있는가의 여부가 운동의 성패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란 사실을 우리들에게 충격적인 방식으로 가르쳐 주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 문화운동으로서의 문학운동은 어떠했는가. 80년대의 문학은 '광주 5월'이라는 정신적 모태로부터 출발했다. 70년대의 퇴폐적이고 말초적이고 향락주의적인 상업주의 문학에 이미 식상하였던 터라 역사의 봇물을 총칼로 거슬러 놓은 군부독재에 항거하기 위한 무기를 필요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시라는 무기'였다.
즉, 광주 5월의 비극적 상황 이후 이 땅의 민중들은 역사의 진실에 목말라 있었고, 그들의 골 깊은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순발력 있는 짧은 형식의 시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상황 속에서 적절히 활용될 수 있었기에 80년대를 우리는 '시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이런 점에서 첫번째로 떠오르게 되는 것은 5월 항쟁의 정신을 수용·계승한 '5월문학'의 확립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5월시'라는 동인 활동이다. (5월시)는 1980년 광주를 근거로 한 젊은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는데 '광주 5월'이 그들 시의 텃밭이었다. 즉, 80년대 광주의 비극적 현실을 역사의 큰 분수령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상황이 돌출하게 된 민족의 여러 모순을 사회과학적 인식으로 걸러내어 투사하겠다는 문학적 의지를 보여준 동인활동이었다. 그것은 곧 분단의 아픔이며 외세의 강정이며 국가 독점자본의 횡포임이 분명하며, 반공 이데올로기의 소산임을 철저하게 체득한 후의 출발이었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었다.
두 번째로 80년대의 문학운동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기층민중이 문학의 창작주체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는 70년대부터 고양되어 확산된 노동운동의 사회·경제사적인 배경을 굳건히 딛고 출발한 노동자·농민 시인들의 괄목할 만한 활동이다.
특히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란 시집은 우리 시문학사에 큰 획을 긋는 획기적인 성과물 중의 하나다. 문학성과 혁명성을 조립하여 노동자를 각성케 하고 노동해방의 참의미를 형상화한 그의 시는 기층민중이 문예창작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노동문학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세 번째로는 1979년 이른바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1988년 광주의 진상규명과 함께 10여 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김남주의 활동을 들 수 있다.
김남주는 광주가 낳은 제 3세계권의 전형적인 민중시인으로 감옥에서 썼던 2백여 편이라는 시를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라는 세 권의 시집으로 묶어내기도 했다. 반제민족해방과 조국통일에의 열망을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운 혁명시인이다. 이 밖에 많은 시인들의 시와 소설가들의 업적이 광주 5월을 모태로 창작되어 한국문학의 수준을 높인 작품들이 많다. 끝으로 필자의 졸시 <모조리 망월동>이란 시 중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난잡한 글을 끝내려 한다.
전국토에 달이 동동 뜨니
이땅 모조리 망월동 아니냐
전세계에 달이 동동 뜨니
이세상 모조리 망월동 아니냐
달은 그리움과 부활과 재생의 상징물이며 슬픔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1993)
조태일
광주를 온몸에 흠뻑 적셔
터벅터벅 그 친구는 서울엘 와서
늘 외롭고 힘없는 내 손을 쥐고
눈과 손으로 광주를 건네주지만
내 허전한 마음까지 건네면 쓰나
내 찌든 몸까지 건네면 쓰나
찬 바람 속에서 광주는 큰 애를 뱄다더라.
찬 눈에 덮여서도 무등산은
그렇게도 우람한 만삭이라더라.
광주를 온몸에 적셔서
서울의 내 곁에 사알짝 놓아두고
터벅터벅
서울을
떠나버리는 친구 !
-<겨울소식> 전문
이 시는 필자가 1976년에 쓴 시인데 기이하게도 5·18 광주민중항쟁을 예언한 시가 되고 말았다. 흔히 시인을 예언자라고 한다. 이런 예언은 그냥 어떤 공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체험과 현실적 체험에서 끌어낸 역사적 전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결과가 현재요, 현재의 결과가 미래라는 말들을 한다. 현재를 통해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전망, 예측하는 일은 웬만한 역사의식을 가지고도 가능하다.
"찬바람 속에서 광주는 큰애를 뱄다더라", "찬 눈에 덮여서도 무등산은 그렇게도 우람한 만삭이라더라"라는 표현이 4년 후에 5·18광주민중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분출되었다. 아이를 잉태하면 몸을 풀기 마련이다. 이것이 출산이다. 광주와 우람한 무등산이 합궁해서 출산해 낸 옥동자가 바로 5·18광주민중항쟁이다. '5·18'을 거꾸로 읽으면 '8·15'가 된다. 그러므로 '5·18'은 제 2의 민족해방에 다름아니다. '8·15'를 맞아 외세의 간섭없이 자주적으로 나라를 세웠다면 남북분단이 됐을 리 없고, 6·25가 터질 리가 없었다. 외세와 독재가 없었다면 4·19가 터질 리 없었고, 일제잔재만 어느 정도 청산됐더라면 5·16이, 6·3이 있을 리가 없고, 5·18항쟁이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저 80년 5월의 광주, 과거와 현재와 닥쳐올 미래의 모순까지도 온몸으로 끌어안고 금남로에서, 충장로에서, 중앙로에서, 계림동에서 광주천변에서 땅을 올려 하늘을 진동케 했던 그때의 한 맺히고 피 맺혔던 절규는 지금도 우리들의 머리 바로 위 하늘에 떠돌고 있다.
천년만년 늘 너그럽고 부드러운 침묵으로만 누워 있던 무등산이 육중한 몸을 뒤척이면서 일어나 몸을 푼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광주 바닥에 뿌려지던 남녀노소의 그 붉은 피는 이 역사의 벽에 무슨 말을 새기기 위해서 였는가. 그것은 바로 '반외세 민족자주' '반독재 민주평화' '반분단 민족통일'이라는 우리 민족의 꿈을 아로새기기 위해서였다. 이것 말고 우리 민족이 바라는 것이 또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 반세기 동안 한결같이 갈망하고 싸워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월의 노래'는, '오월의 한'은, '오월의 외침'은 우리들의 삶의 터전인 전 국토를 울음으로 흐르고 있다. 이제 이 울음들이 위로 솟구쳐서 전 국토에 쏟아 내리려 하고 있다.
70년대와 80년대는 이승과 저승의 삶을, 아니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을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바로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투신하고 분신하며 죽어가던 시대였다. 바로 어제까지 한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 근로자들도 투신하고 분신하여 죽어가던 시대였다.
이름하여 열사의 시대였고 어디론가 끌려가 시체로 드러나던 의문사의 시대였으나 5월 항쟁을 원동력으로 하여 87년의 대규모적인 6월항쟁을 낳기도 했었다.
90년대는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좁쌀만큼의 희망을 걸고 맞이했던 시대였다. 여소야대를 만들어 준 국민들은 한가닥의 희망을 걸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제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 날벼락이라더냐? 하루아침에 밀실에서 부정한 야합으로 '민자의 치맛자락'을 국민들의 코앞에 펄럭이게 하였다. 그 치맛자락 안의 속곳에서 풍기는 악취는 국민의 코를 들쑤셔대 마비시켜 놓았다.
5월 그날, 맨 가슴으로 총검의 숲을 헤치며 파도치듯 절규했던 자주와 민주와 통일의 염원은 공안통치라는 해괴한 적막강산에 묻혀버렸고, 무참히 쓰러져간 항쟁의 영령들이 지금 이 나라의 구천을 떠돌고 있는 가운데 오늘도 많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90년대도 이승과 저승의 삶이 도무지 분간이 안되는 시대로 진행되고 있는가. 혹시 반민족, 반민주, 반통일 세력들은 광주를 혐오와 좌절의 도시로 오염시켜 역사의 뒤안길로 내팽개치려 해도 민족의 위업에 기꺼이 신명을 다해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민족구성원에게 호소했던 그때 영령들의 고결한 뜻이 이 땅을 지켜보고 있는 한, 우리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무릎꿇고 사느니보다 차라리 서서 죽는' 결의로써 그 위대한 뜻을 꽃피워 열매를 맺고야 말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은 각계각층이 신분의 고하, 빈부의 차등없이 광범위하게 참여한 대규모적인 항쟁이었고, 항쟁기간중에는 민중의 자치가 훌륭하게 실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항쟁을 분수령으로 하여 반미운동이 보다 적극적이고도 심도있게 벌어졌다는 점에서도 한국민중운동사에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항쟁을 통해서 한국민중의 막연한 숭미의식이 구체적인 반미의식으로 전환되었다. 이 민중운동이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절대절명의 궤도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80년 5월항쟁의 경험은 문화운동에서도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문화운동에서 광주체험은 정치적 의식의 고양으로 정치적 훈련을 쌓는 좋은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리해서 오랫동안 오염되었던 서구 상업문화와 허구적 외세의 지배문화에 대한 대항문화로서의 민중문화 건설이라는 전망을 제시해 주었다. 최승운은 <문화예술운동의 현단계>라는 글에서, 80년대의 커다란 경험은 운동의 전반적 발전에서는 물론이요, 특히 문화운동에서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전제한 릴, 운동이 대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은 그 이전까지는 다만 막연한 상식에 불과했으나 80년의 경험은 대중의 참여 여하가 그리고 대중이 얼마나 조직되어 있는가의 여부가 운동의 성패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란 사실을 우리들에게 충격적인 방식으로 가르쳐 주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 문화운동으로서의 문학운동은 어떠했는가. 80년대의 문학은 '광주 5월'이라는 정신적 모태로부터 출발했다. 70년대의 퇴폐적이고 말초적이고 향락주의적인 상업주의 문학에 이미 식상하였던 터라 역사의 봇물을 총칼로 거슬러 놓은 군부독재에 항거하기 위한 무기를 필요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시라는 무기'였다.
즉, 광주 5월의 비극적 상황 이후 이 땅의 민중들은 역사의 진실에 목말라 있었고, 그들의 골 깊은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순발력 있는 짧은 형식의 시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상황 속에서 적절히 활용될 수 있었기에 80년대를 우리는 '시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이런 점에서 첫번째로 떠오르게 되는 것은 5월 항쟁의 정신을 수용·계승한 '5월문학'의 확립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5월시'라는 동인 활동이다. (5월시)는 1980년 광주를 근거로 한 젊은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는데 '광주 5월'이 그들 시의 텃밭이었다. 즉, 80년대 광주의 비극적 현실을 역사의 큰 분수령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상황이 돌출하게 된 민족의 여러 모순을 사회과학적 인식으로 걸러내어 투사하겠다는 문학적 의지를 보여준 동인활동이었다. 그것은 곧 분단의 아픔이며 외세의 강정이며 국가 독점자본의 횡포임이 분명하며, 반공 이데올로기의 소산임을 철저하게 체득한 후의 출발이었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었다.
두 번째로 80년대의 문학운동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기층민중이 문학의 창작주체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는 70년대부터 고양되어 확산된 노동운동의 사회·경제사적인 배경을 굳건히 딛고 출발한 노동자·농민 시인들의 괄목할 만한 활동이다.
특히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란 시집은 우리 시문학사에 큰 획을 긋는 획기적인 성과물 중의 하나다. 문학성과 혁명성을 조립하여 노동자를 각성케 하고 노동해방의 참의미를 형상화한 그의 시는 기층민중이 문예창작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노동문학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세 번째로는 1979년 이른바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1988년 광주의 진상규명과 함께 10여 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김남주의 활동을 들 수 있다.
김남주는 광주가 낳은 제 3세계권의 전형적인 민중시인으로 감옥에서 썼던 2백여 편이라는 시를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라는 세 권의 시집으로 묶어내기도 했다. 반제민족해방과 조국통일에의 열망을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운 혁명시인이다. 이 밖에 많은 시인들의 시와 소설가들의 업적이 광주 5월을 모태로 창작되어 한국문학의 수준을 높인 작품들이 많다. 끝으로 필자의 졸시 <모조리 망월동>이란 시 중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난잡한 글을 끝내려 한다.
전국토에 달이 동동 뜨니
이땅 모조리 망월동 아니냐
전세계에 달이 동동 뜨니
이세상 모조리 망월동 아니냐
달은 그리움과 부활과 재생의 상징물이며 슬픔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