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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 특집 / 5월 민중항쟁의 형상화 - 5.18 시의 문학사적 위상, 이황직(언어세계, 1996. 봄)

본문

■ 특집 / 5월 민중항쟁의 형상화

5.18 시의 문학사적 위상



이황직



  아름다운 시인들

  진정한 문학은 역사를 넘어서서 존재할 수 없다. 다만 굳어버린 역사를 넘어서기 위해서 몸부림칠 뿐이다. 그래서 문학 중에서도 가장 최전선, 즉 아방가르드의 위치를 잃어본 적이 없는 시마저도 역사의 뒤편에 선다.
  20세기가 종착에 이르면서 그 희망과 절망, 환희와 고뇌의 시대를 조명하는 시도가 여러 분야에서 기획되고 있다. 비록 서구적 관점이기는 하지만, 18세기를 계몽주의와 혁명의 시대로, 19세기를 제국주의와 자본의 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가 살아온 20세기는 전체주의의 출현과 그 종언으로 마무리되는 중이다. 그리고 체제의 광폭한 탄압과 학살이 있는 곳 그 어디에서도 시인들의 처절한 목소리가 있었다.
  6.25 동란 이후 가장 큰 비극이 16년전 우리에게 있었다. 한때는 발설조차 금기의 영역이었으나, 이제는 학살의 주도자 몇몇이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사법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광주민중항쟁'이 그것이다. 해방 이후 계속된 권위주의 정권과 그 대항의 전선이 만나는 소용돌이에서 투쟁과 학살이 있었다. 시인들은 처절한 학살의 현장인 금남호에서, 그리고 시민군이 묻힌 망월동에서. 때론 무등산을 원경으로 잡고, 때론 새벽의 초청을 클포즈업 해가면서, 한 꺼풀 한 꺼풀 항쟁의 껍데기를 벗겨 나가며 진실을 찾아 나갔다.
  신문과 방송이 침묵하고 있을 때, 소설가들이 원고를 서랍에 넣어두고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시인들은 가장 먼저 광주의 참상을 알려나갔다. '단군이래' 이처럼 아름다운 시인들이 어디 있었으랴. 이 시인들이 한 행 한 행 시를 적어 나갈 때마다 무등을 떠돌던 넋들이 하나하나 누울 곳을 찾았고, 한 편 한 편 그 시들을 읽어갈 때마다 독자들은 그 슬픔이 어떻게 승화되어야만 하는가를 되새김질하였다.
  항쟁 17년을 맞아 그 아름다운 시편들을 우리는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0년전과 같이 쫓기는 기분으로 읽을 필요는 없어졌지만, 편한 마음으로 읽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러기에 더욱 그 시편들에 대해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평가를 내리기가 어렵다. 우리는 아직 항쟁의 진상을 알지 못하며, 진상에 접근하기에는 아직 충분히 멀어지지 못했다. 여전히 살아 남은 시인들은 망월동에 가서 시 한 편을 바치면서도 떳떳하지 못하다.
  하지만 이제 5월을 노래한 시들을 집중적으로 검토해야만 한다. 역사의 가장 아픈 상처에서 빛나는 이 시들의 의미를, 그리고 그 전개 과정과 한계를, 냉철하게 살펴야 한다. 미디어의 놀라운 위력 앞에서 우리는 '무등산'이란 고유명사가 점차 아우라(aura)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을 본다. 5월의 아름다운 시 역시 이제 그 고유한 신성함을 잃을 지도 모른다. 누가 장담할 수 있으리, 항쟁의 의미를 왜곡해가면서까지 5월을 그리는 작품이 나오지 않으리라고.
  매듭을 짓는 것이 그 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는 항쟁의 의미를 통찰하여 새로운 희망의 빛을 보여줄 작품을 계속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 다만 여기서 매듭을 짓는 것은 그 기다림의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는 어리광 같은 일이라는 것을 필자는 알고 있다.

1. 5월시에서 주체의 문제

  학살과 예레미아의 시대

  20세기가 야만적 폭력의 시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때론 이념간의 대립을 빌미로, 때론 제국주의적 팽창과 그에 따른 식민지 민중의 대항으로, 하루도 총소리가 멎지 않았을 이 20세기에는 수많은 예레미아가 있었다.
  최초의 울부짖음은 전쟁터 한복판에서 시작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포연 한 가운데에서 영국의 시인 오웬(Wilfred Owen)은 모골 송연한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 아무리 숭고한 이념을 위한 전쟁일지라도 두개골이 깨지면서 피를 토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최초의 리얼리즘적 종군 시인인 오웬 역시 전사하고 나서야 총성이 멎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자 여러 식민지 국가에서 잠깐이나마 해방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학살이 그 기운을 짓밟아버렸다. 아일랜드에서는 예이츠가 아일랜드인과 영국인과의 무서운 쌍방간의 학살을 묵시록적인 시 <1919년>을 쓴다. 그리고 또 한번의 내란을 겪고 나서 아일랜드는 자신의 국기를 휘날릴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시인과 학살간의 전쟁은 스페인 내란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루었다. 선거를 통하여 합법적으로 집권한 스페인 인민전선을 무너뜨리려 한 프랑코 총통의 파시스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전 세계의 문인들이 스페인으로 모여들었다. 바이런의 후예들인 영국 시인들도 모여들었다. 훗날 '오든 그룹'으로 불리는 오든(W.H.Auden), 스펜더(S.Spender), 이션우드(C.Isherlood) 등의 시인들은 전쟁터의 포연 속에서 시를 쓰고 그것을 전세계에 알려 나갔다.

내일은 젊은 시인들 앞에 폭탄처럼 열려 있고,
호숫가를 따라 산책, 완전한 사귐의 나날
    내일은 여를 저녁 교외로 달리는
자전거 경주. 그러나 오-늘은 투쟁.

(중략)

별빛이 사라져 간다. 산 것들은 앞을 보지 못하리라
우리는 시대와 함께 고절하게 남아 있다. 그 시간은 짧고,
    패배자에게 애도할지도 모르지만
역사는 도울 수도 용서할 수도 없으리라.

  위 시구는 오든의 대표작인 <스페인 1937>에서 따온 것인데, 마치 80년대 우리의 창작단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격정에 찬 호흡과 비장한 결의가 느껴진다.
  그러나 이 시를 비롯한 오든 그룹의 시 가운데에서 우리는 절박감과 애절함을 찾을 수 없다. 이들은 스페인 내란을 커다란 화첩에 담아 나갔지만, 결코 그들 자신의 상처로 체화되지는 못했다. 또한 오든 그룹의 시인들이 체질적으로 교회와 같은 전통적 권위에 쉽게 굴복하고 말았다. 모더니즘의 옷을 입은 보수적 로맨티시즘의 효과는 오든을 비롯한 이들이 쉽게 스페인의 전선에서 물러나면서 입증되었다 학살극에 대한 이들의 저항은 곧 초월자에 대한 귀의로 끝을 맺고 만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자마자 시가지를 거닐면서 로든 교회가 폐쇄되어 있고 신부들은 보이지 않음을 발견했다. (중략) 16년간 의식적으로 교회를 무시하고 배척 해왔지만, 교회의 존재와 교회 안에서의 여러 일들은 항상 내게 중요한 것이었음을 안정하지 않을 수 없다"

  스페인에서의 경험은 오히려 그들에게 교회를 되찾지 해주었다. 오든은 아주 단호하게 그의 정치적 과거를 부정해버린다. 그리고 오든은 자신의 시를 버린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는다. 오든 자신이 버려버린 한 편의 시가 1937년 당시에는 그의 시를 읽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면 오든은 그 시를 지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오든이 지은 것이 아니라면 누가 지은 것인가? 결국 그 시는 스페인 내란에 참여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전세계의 지식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오든이 자신의 내밀한 서정을 그린 것이 아닌 이상, <스페인 1937>은 스페인 민중과 전세계 지식인 모두가 지은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5월시의 주체는 누구인가?

  여기서 우리는 시 창작에서 '주체'의 문제를 다시 검토해보지 않을 수 없다. 리얼리즘 논쟁에서 우리는 창작의 주체가 계급인가 개인인가를 토론했었다. 시 창작의 경우는 소설 창작의 경우보다도 복잡하다. 아직까지도 '아폴로가 머리를 내리쳤을 때' 시가 나온다는 로맨틱한 생각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 광주의 시인들은 '계엄군이 시민을 개머리판으로 내리쳤을 때' 시를 씀으로써 반(半)신화적인 시 창작관을 물리쳤다. 더 이상 시는 초월적인 세계로부터 영감을 얻지는 못한다. 다만 현실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시인이 맺는 관계에 따라 시의 성격이 규제될 뿐이다.
  우선 흔히 시창작의 주체로 인정받고 있는 시인의 경우를 보자. 시인은 자신의 시작(誇作)과 실제의 삶의 과정들이 연관된 정도가 다른 장르의 작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하지만 결코 그것이 통합되는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실천과 경험을 통해 정치적으로 성숙해질 가능성을 가진다. 다만 그러한 시인의 인식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대화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획득된다. 결론적으로, 시인은 분열된 세계를 통합시키기 위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시작(시작)이라는 실천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시인 역시 역사적 존재이다.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현실의 조건들 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오늘은
증오와 핍박과 죽음이 스쳐간 스산한 거리
많은 사람들 쓰러져 죽었고
갇힌 사람과 쫓겨난 사찰들이
낭자한 오열이 흐르는
이 시대의 비극의 대명사
동지를 잃은 우리들은
모두 다 하나의 죄인이 되었구나
                                        - 문병란, "송가"에서

  "너를 민주의 聖地(성지)라 부르기엔 / 아직은 이르다"로 시작되는 문병란의 <송가(頌歌)>는 시인이 더 이상 시인일 수 없는 상황, 즉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자기인식을 그려낸다. 광주항쟁이 없었더라면 그가 '죄인'이라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계엄군의 총칼에 광주의 민중이 맞서 "낭자한 오열이" 흐르지 않았더라면 시민이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 결국 <송가>를 쓴 이는 문병란 시인이 아니라 광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이다

  초개인적 주체로서의 광주의 시인들

  문학에서 '주체'의 문제는 사실상 위 결론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지난 30년간 서구 문학이론의 중심적인 논쟁이었다. 1960년대에 이르면서 계급주체와 개인주체의 대립은 이미 종언을 고한 것처럼 보였다. 그 배경에는 일찍이 레닌이 1905년에 쓴 「당조직과 당문학」에서 한 말, 즉 문학은 당의 톱니바퀴와 나사가 되어야만 한다는 원칙이 전체주의적임이 밝혀진 까닭이 있다. 그 결과 사회과학의 성립과 함께 100여년간 지켜온 계급주체의 원리간 무너지고 '주체'라는 것은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주체의 빈 자지를 '텍스트'가 차지해버렸다. 알튀세르의 제자들, 푸코를 중심으로 찬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더 이상 주치는 이념이 아로새겨진 숭고한 주인공이 아니었다.
  이러한 생각이 문학창작의 주체인 '저자'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푸코는 "누가 말하는가는 상관없다"는 베케트의 말을 빌어 논의를 시작한다. 저자에 대한 기능분석을 통해 푸코는 근대 이후 '저자'의 기능이 확대된 것이 담론의 실체를 배제시키는 허구였다는 사실을 논증하려 했다.
  그러나 푸코 식의 생각이 지금 한국 문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데 반해, 여전히 실제 비평에서는 그리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 중요한 까닭은 프랑스의 지적인 삶과 한국의 문화적 삶이 서로 다른 데에 있다. 여전히 한국의 문화는 공동체에 깊게 뿌리 박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도 사실은 자본주의에 뿌리뽑혀 가는 공동체적 삶을 민주적 지도자가 지켜줄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인들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대한 통찰을 통해 자본간 계급이 약속하는 장미빛 미래는 결국 개인의 전인적 삶을 희생시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광주의 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자신이 직접 총을 들지는 못했지만 그 의미는 알고 있었다. 총 대신에 그들이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광주항쟁은 1980년 '5월27일에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펴 볼 시들은 광주 민중의 피와 절규로써 얻어진 것이므로 저자는 따로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온 광주의 민중들이 저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광주 민중이 피로써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와 정의를 시인들이 '대표'로서 적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광주의 시인들은 골드만이 표명했던 '초개인적 주체'이다. 이를 골드만(LucienGoldmann)의 문학사회학을 빌어 이론적으로 살펴보자.  주체는 세계의 일부로 실천을 통해 세계의 의미를 구성하지만, 객체인 세계도 주체의 인식틀을 규제하고 구성한다. 주체와 객체의 통일성이 갖는 의미는 인식 상에서 어느 한의 일방적 강조를 거부한다. 골드만은 '삐아제(J. Piaget)를 통해 얻은 주객동일성에 대한 확신을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에서 '부분적'인 것으로 국한시킬 경우 유리함을 알았다. 만약 전체적으로 주객관계가 동일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본주의라는 토대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적 각성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골드만이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한 예를 인용해 보자. 책상을 옳길 때 A와 B라는 두 주체가 따로 드는 것이 아니라 AB라는 집합적 주체가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AB라는 집합적 주체는 '책상을 옮긴다'는 객체에 대한 의식을 공유한 순간에만 부분적으로 동일성을 가지는 주체인 것이다. 창작을 포함한 집합적 행위에서 개인주체 혹은 집단주체라는 2분법을 골드만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이를 극복하려는 그의 노력이 문화적 창조의 주체는 '초개인적 주체'라는 귀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선 한 개인은 어떠한 일관된 의식의 담지자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러한 많은 개인들의 의식을 모은다고 해서 '집단 의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독특하게 일관화된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우리는 바로 그러한 의식이 성립되는 기반(제도,집단,계급 등)들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집단 의식'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이 감지되는 것은 바로 주객동일성을 넘어서는, 즉 골드만이 예외적 개인치라고 부르는, '초개인적 주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작가나 철학자는 한 집단의 사상, 감정, 열망의 총체를 가능한 최대치의 의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나는 광주의 시인들이 바로 광주 민중의 집단 의식을 시로써 표현하고자 했다고 쓴다. 물론 모든 시편들이 그런 수준에 이른 것은 아니다 또한 시인 자신의 이데을로기 과잉이 광주 민중의 집단 의식을 도외시한 채, 특정 이념만을 대변하기도 했다. 마치 광주민증항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전개 과정과 성격에 대해 정파마다 다른 이해를 보인 것처럼, 일부 시인들도 이론으로만 무장한 사회과학자들의 전철을 되밟았다.
  내가 여기서 논의하는 '아름다운 시인'들은 먼저 광주 민중의 아픔을 제 아픔으로 느낀 사람들이다. 그 다음에 비로소 그들의 체험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안아, 오랜 숙성 끝에 예술적 표현의 정수인 시로써 토해낸 사람들이다. 정치적 조건의 굴레에서 고뇌하면서도 그 굴레를 넘어서려는 자세야말로 광주를 '혁명의 수도'를 넘어 '문학의 수도'로 재정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ll. 5월시의 문학사적 전개

  항쟁 정신의 아들들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문학작품 가운데에서 지금까지도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은 단연 항쟁을 다른 최초의 작품인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이다. 항쟁 직후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이 작품은 비록 검열에 의해 삭제된 형태로 발표되었지만 그 반향은 상당했다고 전한다.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만 뒤집어쓸망정
아아 광주적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시인의 감정이 억제되지 못해 감탄사를 남발하는 것이 학살을 다룬 작품들의 공통적인 약점으로 지목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에는 초기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처절한 낭만적 환기(invocation)인 "아아 광주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수사가 광주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청자에게 호소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더욱 큰 미덕은 광주의 참상이 승화되어 예수의 죽음/부활의 이미지와 합쳐지는 데에 있다. 광주와 무등산은 더 이상 패배의 장소가 아니라 이 땅의 정의가 다시 살아올 성스러운 부활이 약속된 공간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김준태의 이 시는 이후에 창작될 시의 길잡이의 역할도 충실히 했다. 첫 작품의 수준이 이 정도인 까닭에 다음의 작품들은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981년 들어 <5월시> 동인이 결성되어 그 첫 작품집을 간행했다. 김진경, 곽재구, 박몽구, 이영진 등이 주축이 된 젊은 시인들은 지금까지 문단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 결성된 동인 <시와 경제>는 황지우, 김정환, 김사인 등에 의해 결성되어 보다 목적의식적인 시풍을 시단에 도입했다. 박노해가 첫 작품을 내놓은 지면도 이곳이었다. 이들 동인들은 모두 1980년대의 젊은 시인들로서, 고은은 이들에게 '항쟁정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 동인의 활약을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문학적 형상화라는 면에서만 다룬다면 그것은 지극히 단견적인 평자의 청포이다. 대강 말하자면, 이 광주의 아들들은 '광주'를 부채로만 떠안은 중견 시인들보다 훨씬 자유로운 위치에 있었던 까닭에, 항쟁의 정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화할 수 있었다. 때로는 정치적 실천까지 불사한 그들에게 '광주'는 엄청난 자양분이 되었던 것이다.

너의 푸르른 깃폭은 피묻어
찢어져 거리의 모퉁이로 짓밟혀가고
너를 껴안던 젊은 가슴은
포승에 묶여 끌려갔다
그러나 잊지 못하리라
우리의 마지막 피 한줌까지 빼앗기는 날이 올지라도
한번 본 너의 얼굴은
한번 본 너의 얼굴은
우리 가슴속의 하늘
몇 십 년을 기다리고
꿈꾸고 싸우게 한다
이름할 수 없는 우리의 여인이여
                                - 김진경, "한 번 본 너의 얼굴은"에서

  그러나 이들이 맞이한 80년대는 또한 광주의 상처만큼이나 모진 이념의 상처가 컸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자신이 소속했거나 정서적으로 친밀감을 느끼는 정파들의 걸러지지 않은 '광주'에 대한 사회과학적 해석을 곧바로 문학적 진리로 받아들였다.
  박노해와 백무산의 시는 항쟁의 '계급성'과 '폭력적 양상'에 주목하였다. '전노협'이 출범한 해이기도 한 1989년은 우리 민중의 운동 역량이 계급의식을 공인한 상징적인 시기이다. 당시 노동자계급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월간 <노동해방문학>은 광주민중항쟁의 시차(誇忙)에도 커다란 의의가 있는 작업, 즉 지난 9년간 운동세력 내부에서도 조심스럽게 논의했던 광주민중항쟁의 '계급투쟁'적 성격을 시에 도입하였다 시가 곧 정치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광주항쟁을 계급투쟁으로 그렸다는 것은 이후의 투쟁 역시 광주항쟁을 계승하는 것이라는 유리한 정치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시가 적극적으로 역할을 자임한 경우이다. 다만 박노해와 백무산의 시는 시의 정치적 성격을 '직접적'으로 이해한 결과 시와 산문의 결절점에서 분리를 끌어내지 못했으며, 또한 항쟁의 의미를 계급혁명적 요소와 확연히 분리는 좌는 항쟁의 특질들을 소외시켰다 물론 항쟁을 다룬 장시나 소설 등에서 잘 그려진 것처럼, 항쟁을 마무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위의 흔하고 흔한 서민들이었다. 그러나 그 양상을 빠리 꼬뮌과 비교할 경우에는 여러가지 분석적 난점이 생긴다. 광주의 민중들의 목표는 첫 단계가 신 군부의 퇴진이었고, 다음 항쟁 초기 단계에서는 공수부대 만행을 규탄하고 알려 나가고자 했으며, 마지막 단계가 항쟁의 평화적 해결이었다. 광주의 민중 누구도 패배는 원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동족간에 피를 흘리는 것을 원했던 사람은 없었다. 광주 민중의 무장은 상징적인 것일 뿐이다. 물론 무장은 광주민중항쟁을 항쟁답게 한 가장 큰 요소이다. 하지만 무장에만 의미를 둔다면, 무장하지 않은 다수의 시민들이 성원들을 포함한 광주의 정신은 어디로 가는가? 이 점을 박노해와 백무산은 간과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민족문학을 지향한 대부분의 시인들이 광주민중항쟁을 반미의 기치를 든 반외세 투쟁으로 보거나. 아니면 광주의 학살극의 책임을 미국에 떠넘겨버렸다.
  5월 시의 미덕이기도 하지만 단정이 될 수도 있는 서사성의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서사적 장시에 등장하는 선악의 대립 구도가 지나치게 일원적이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시민들은 한결 같이 의협심에 불타는 정의로운 인물로 그려지는 데 반해, 익명의 계엄군들은 단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도 정형수의 장시 "배고픈 다리"는 광주 곳곳을 상징화하여 항쟁의 사회적 기원을 밝혀 가는 시적 자아의 여정을 빼어난 형상화와 시적 절제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무등산을 연결하는 배고픈다리
그녀는 의젓한 빈민촌의 엄마였지 (2부)

오, 그날
20년만에 찾아온 춘궁의 고비에서
들쥐치 첨, 집뱀처럼, 난리를 예견하는
수염털만 뻣세인 도둑고양이처럼
제 목숨에 민감했던 한 마리의 집짐승이
아귀굴을 떠나와 숨통을 터놓은 날
포근했던 하늘은 칼날처럼 파르랗고
땅바닥은 굳어 자갈밭이 돼 있었다 (4부)

  기념시집의 출간 

  광주민중항쟁을 직간접으로 다룬 작풍들의 절반 가량인 3권의 시집으로 묶여 나왔다. 최초의 성과이자 가장 중요한 경과인 시선집「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인동, 1987)는 1987년 6월항쟁의 승리 직후 묶여졌다. 문병란과 이영진이 엮은 이 책에는 최초의 광주시인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비롯한 200여편의 시가 총 5부로 나뉘어, 각각 '5월의 정치사적 의미', '항쟁 참상의 묘사','5월 영령 추모시','5월 정신을 계승한 넋들을 추모한 시','5월이후의 젊은 시인들의 인식' 등 주제별로 수록하였다. 다만 시인별 색인이 들어있지 않아 연구자에게는 조금 불편하다. 이 책의 편집 방향은 이후 편집되는 두 권의 편집 방침에도 영향을 미쳤다.
  광주민중항쟁 10주년을 맞아 출간된 두 권의 시집은 항쟁 당시의 상황에 근접하기 위해 항쟁 기간 증에 불리던 노래와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시까지를 포함시켰다 김남주와 김준태가 엮은 「마침내 오고야 말 우리들의 세상」(한마당, 1990)에는 노래로 더 잘 알려진 백기완의 "임을 위한 행진곡", 공동창작된 "광주 출전가", 그리고 항쟁 때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된 "늙은 투사의 노래" 등이 따로 편집되어 실려있어, 당시의 상황을 더욱 가깝게 보여준다. 또한 이 시집에는 5월 시 가운데에도 대표적으로 예술적 성취가 뛰어난 작품들이 정성껏 모아졌다. 또 한 권의 선시집인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황토, 1990)는 어느 시 못지 않은 감동을 주는 망월동의 묘비명을 함께 실어 살아있는 감동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상의 시집들은 비록 연대기를 고려하지 않고, 시인 개개인의 특성을 최대한 낮추고 대신 광주 민중의 투쟁과 비극을 보이는 데 집중하는 약점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시집의 목록만으로도 연구자들은 무척 버거운 느낌을 갖게 된다. 편집자들의 노력으로 주제별로 접근하는 데에는 용이하다는 점에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 수백편의 시가 어쩌면 편집자들이 나눈 그물에 걸리고 말 정도로 허술하게 읽힐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 밖에도 어느 누구보다 광주민중항쟁의 문학적 형상화에 힘써온 김준태 시인은 자신의 5월 시만으로 한 권의 시집을 엮었다.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실천문학사, 1988)는 최초의 5월 시로 알려진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비롯한 그의 대표작 40여편과 5월문학에 관한 유명한 연설인 "5월과 문학"을 담고 있다.
  연작보다는 하나의 장시로 읽히는 박몽구의 "십자가의 꿈"(「십자가의 꿈」(풀빛, 1986)) 역시 끈질기게 광주의 문제에만 집착한 시인의 명예로운 산물이다. 다만 지나치게 산문적인 것이 흠으로 지적된다.
  항쟁 10주년을 맞이하여 몇몇 시인이 5·18 관련 시만을 모아 따로 개인 시집을 낼 기회를 가졌다. 이 선집들은 해당 시인들의 문학적 공과를 살피는 데 유용할 뿐만 아니라 광주민중항쟁 10주년을 맞이하여 기존의 창작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기준점의 역할을 하였다. 그 동안 마당굿의 형태로 4·19와 5·18을 승화시켜온 고 고정희는 타계 직전 50여편의 5월시를 모아 「광주의 눈물비」(동아, 1990)를 펴냈다 옥중시만으로도 두툼한 두 권의 시집을 펴내 광주의 비극이 어떻게 형상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해왔던 고(故) 김남주 시인 역시 40여편의 작풍을 모은 5·18 기념시집 「학살」(한마당, 1990)을 펴냈다.

  90년대의 문학적 대응

  1990년대에 들어서도 비록 그 양은 줄었지만 여전히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다. 주로 「실천문학」(약 10편),「창작과 비평」(약 10편)에 많이 보이고, 「사상문예운동」과 「문학과 사회」등에도 여러 작풍이 발표되었다. 이들 작품은 크게 몇 부류로 나뉠 수 있다.
  먼저 "핏빛 단풍 - 그 어디에 / 자취라도 있었으랴"며 이미 단절된 과거로 멀어져 가는 항쟁의 추억을 그리는 김영우의 "젊은 날 시인의 초상화"(「창작과 비평」, 1994 봄) 같은 회고조의 시가 다수 있다. 그 반대로 1993년 들어선 김영삼 정부가 광주민중항쟁을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며 꾀를 부릴 때, 당당히 "역사는 내일에 맡길 수 없는 것"(김준태, 「창작과 비평」, 1993 가을)이라고 외친 시인도 있었다. 이 부류의 시는 1985년의 광주항쟁 청문회 이후부터 많이 등장하였다 허수경의 '여의도 엘레지 3 - 어머니의 노래"(「문학과 사회」, 1989 가을) 같은 경우가 MBC 노조가 만들어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킨 <어머니의 노래>에 얽힌 MBC 고위층의 압력과 PD의 좌절을 그려서, 항쟁의 사후 처리에서 빚어지는 계속되는 학살을 고발한다.
  그런가 하면 임동확의 "눈밭을 걸어가는 오이디푸스왕"(「실천문학, 1990 봄) 같은 작품은 예전에 황지우가 시도했던 모더니즘적 양식으로 항쟁을 담는 기술에 항쟁과 항쟁 이후의 문화와 사회 전체에 대한 검토를 주장하고 있다. 함성호의 "게르니카"(「문학과 사회」, 1991 봄)와 김진경의 "프라하의 봄"(「사상문예운동」, 1990 봉) 같은 작품은 학살극의 현장을 확장시켰다.
  다양한 실험이 거쳐가고 나서 그 공백을 메꾸기라도 하듯, 5월 시의 원조격인 동인 <5월시>에서 신작시집 「그리움이 끝나면 다시 길 떠날 수 있을까」(푸른나무, 1994)를 냈다. 제목에서 이미 두려워하는 것처럼, 이제 항쟁의 기억을 더듬어내는 행위마저 단순한 넋두리에 지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정세도 문화도 변해버린 상황에서 이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이영진, 김진경, 박몽구, 나종영 등이 5월에 관한 새로운 시 5편을 선보이는 이 작품집에서는 회고(박몽구, "동숭동의 봄 1")와 추모(나종영, "다시 오월에")의 작품이 한 편씩으로 감소했고, 대신 광주와 무등산이 원경으로 물러서서 시인 자신이 처한 현실 그 자체를 직시하게 하는 시가 늘어났다. 특히 이영진의 "무덤 곁에는 훈장만 빛나고는 김영삼 정부 들어 광주의 민중에게 부여된 면죄부와 얄팍한 수준의 진상 규명의 움직임 속에서 신인 자신도 휩쓸릴 수 있음을 깨닫고, 과거의 완전한 청산만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90년대 들어 분명 상황은 변했다 '광주' 자체가 정치권의 치졸한 형태로 말미암아 변질되고 있고, 또한 제도권으로 편입되고 있다. 시인들은 초조하다. '광주'라는 이름이 제도권 신문들에 인쇄되면서 그 아우라는 상실되어가고 친다. 이런 시점에서 5월 시편의 지향점은 달라져야 한다. 우리에게 위대한 전통이 있다면 '광주'는 이제 그 전통의 힘과 맞물려서 승화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위대한 전통이 있다면 무엇일까? 이념의 형태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힘을 주는 대동의 사상 아닐까.

  111. 부정과 사랑 사이 - 5월 시에 관한 잠정적 결론

  엄밀히 말하자면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시들은 '항쟁시'가 아니라 '항쟁 이후의 시'이다. 시의 가장 큰 장점인 현장성을 부득이 놓쳤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묘사와 재구성이 용이한 산문 작품들보다 중요성이 감소되고 있다. 그러나 5월 시들의 미덕은 따로 있다. 우리에게 문학이 그 기반인 사회와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점을 그 시들이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작을 통해 광주민중항쟁의 모순을 접해 나간 시인들이 광주항쟁을 실천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들을 하는 데에 앞장을 섰다는 점에서 5월 시는 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다.
  회고해 보면 어떤 문필가 군보다 시인들이 80년대 민중 운동의 선두에서 불의를 고발하고 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장섰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일이다. 서툰 구분이지만, <5월시> 동인들이 민족문학의 재구성과 반외세민족해방 운동에, 그리고 <시와 경제> 동인들이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민중해방운동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런 점에서 '5월 시편들은 우리에게 '문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실증적 자료가 되기도 한다. 문학사회학의 중심적 주제이기도 한 '주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5월시의 주체는 바로 광주 민중이고, 또 그들의 슬픔과 의지를 대변해 낸 시인들이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런 결론이 내려지는 것일 뿐, 구체적인 작품 하나 하나의 경우를 본다면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
  5월시들 가운데 상당한 수준에 오른 작품 가운데에는 시인 개인의 화법이 이미 전통적 시의 수사를 뛰어넘었거나 아예 무시한 경우도 종종 보인다. 황지우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키치에서 몽타쥬, 그리고 초현실주의적 의식 흐름을 통해 황지우는 광주에 대한 섣부른 우상화를 거부한다. 물론 시마다 편차는 다양하여, 초기 "무등"과 같이 고발의 의도가 보인 채 은폐된 시부터, "에서·묘지·안개꽃5월·시외버스·하얀"처럼 자학적 의식이 과잉 노출된 시, 그리고 최근의 시인의 변모를 담은 "華嚴光州(화엄광주)"처럼 시와 사물 세계의 대립이 사라진 시까지 모여 있다.
  황지우의 5월 시를 예외로 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광주'를 소재로 한 시를 쓴 백여 명의 시인들이 하나의 잘 짜여진 '세계관'을 대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불교, 사회주의에서 자유주의, 광주 지역과 그 외의 전국 방방곡곡 등, 시인들의 종교와 이념과 지역 가운데 어느 하나 통일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단서가 없다.
  이 문제를 4·19를 노래한 시편들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쉽게 드러난다. 4·19를 노래한 많은 시 가운데 지금까지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은 신동엽과 김수영의 작품이다. 4·19는 대체로 미국에 치우친 원조 경제의 한계가 그 발전 과정상 새로운 경제 체제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자연발생적인 민중운동이었다. 당시 신동엽은 '농민'의 세계관을 대표하여 자연적인 농민공동체의 해체를 막아줄 민주주의적 정부를 탄생시키는 것으로 4·19를 이해하였다. 김수영은 '도시민'의 세계관을 대표하여 한국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한 근대적(서구적, 합리적) 이념의 지지자로 민주주의적 정부의 탄생을 기대하였다. 이처럼 4·19를 노래한 시들은 격정적 구호 이면에 이후의 사회 질서에 대한 일관된 두 가지의 '집단의식' 아래 묶인다.
  그러나 '광주'를 노래한 시인들의 경우에는 계급/계층 분석, 세계관 분석 등의 방법으로는 일관된 '집단의식'을 모으기 어렵다 심지어 사회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지역 정서초도 그 '집단의식'의 단초를 발견해내기 어렵다. 한 마디로 민주주의를 갈망한 우리나라 전 지역의 전 계층은 시인들이 자신의 종교에 관계없이 '광주'에 관한 시를 쓴 것이자. '광주'는 인주주의의 설지요, 민족문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다만 조심스럽게 내비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광주'를 다룬'시 가운데 일부에서 드러나는 '솔직하다 못해 무책임한' 부정적 낭만주의를 과장하거나 확대하는 경향에 대한 이의제기이다. 사실 몇몇 시들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한 표현들이 있다. 다음의 시를 보자.

여러분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최후까지 싸우게 했습니까 (중략)
그들에게는 선생이나 학생들처럼 뒤돌아봐야
은행에 부어넣고 온 적금 따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목사나 신부들처럼 뒤돌아봐야
그림 같은 집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김남주,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에서

  고(故) 김남주 시인의 의도는 당연히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찾고자 하는 의식에 이르기 위해 용감히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위의 시처럼 그러한 의도가 불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위 시에서 시인의 인식은 전형적인 도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의 인식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서인은 자신의 의도를 넘어설 의무가 있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를 누군가 대변한다면 그 첫 임무는 시인이 맡는 것이 아름답다. 막말로 그들이 "막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투쟁의 선두에 섰다고 치자.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계엄군과 관제 언론의 발표문과 차이점이 사라지고 만다. 여기서 고(故) 김남주 시인은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을 발휘한다. 이미 항쟁 직후 '반미'의 기치를 든 옥중시 반출로 5월시의 폭발에 기폭제 역할을 했던 불굴의 시인답게 김남주는 이번에는 버림받은 '룸펜'을 대변한 것이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의 경우는 시가 쓰여진 현장이 '교도소'였다는 점 역시 반드시 참고해 두어야 한다.

여러분 일어나 주십시오
광주교도소 삼사 하에 계신 여러분
일어나 잠시 철창가에 서 주십시오
오늘은 그날입니다 3년전
1980년 5월 그날입니다
그날이 오면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는 날입니다
우리 주먹에 증오의 힘 모아지는 날입니다

  김남주에게 교도소는 또 하나의 혁명의 공간이었다. 항쟁 3주년을 맞은 날 광주의 감방 안에서 낭송된 것으로 보이는 이 시의 청중은 누구였을까? 재소자 가운데는 지식인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흔한 말로 '잡범' 아니었을까? 그들에게 이제 그들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 그는 이 시를 쓴 것이다. 서구의 감옥을 분석했던 푸코 식의 논리가 또 한 번 좌절하는 순간이기도 한, 감시의 대상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주체'를 선언한 김남주와 그와 함께 한 교도소 식구들이 벌린 한판 집회야말로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공정을 기할 필요는 있다. 광주 영령들 가운데 젊은 무직자도 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은 어엿한 기능 노동자, 학생, 직장인들이었다. 이 점을 소홀히 하다 보면 광주는 '부정적 낭만주의'에 침윤당할 수도 있다. 김현의 선구적 분석에 의하면, 1970년대 후반부터 198O년대 초반의 우리나라 소설에 드러나는 대표적 의식은 '병든 낭만주의'이다. 권력의 폭력 앞에 무력하기만 했던 사람들은 <바보선언> 류의 태도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서구의 '신비주의'나 '비극적 세계관'이 종교적 충일이나 절대적 현세 부정으로 세계와 거리를 두는 데 반해, '병든 낭만주의'의 경우에는 "이 세계에 영합하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가려 해도 그것마저 확실치 못한 사람들의 방황·좌절·고뇌·고통"의 점철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말할 때, '광주'의 시인들의 일부는 이런 경향을 조금씩 수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다만 도시 빈민은 말할 것도 없이 그들 피폐한 의식을 가진 산란들도 똑같이 민중이고, 똑같이 자본주의의 '수단적 인간 이해'에 기초한 우리 사회의 피해자라는 점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이나 계급사회에서 최하층의 사람이나 우리는 똑같이 그들의 곤궁함에는 지배하는 사람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故) 김남주 시인은 특히 그런 사람들의 건곤일척의 태도에 애착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만약 '광주'를 계급항쟁으로 보았다면, 어떻게 쁘띠부르조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지를 냉철하게 그려내었어야 한다. 이런 서술은 시보다 소설에 유리하지만, 시의 경우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김준태의 "금남로 사랑"은 비록 휴머니즘에 기초해 있지만 인간의 유대가 계급 연대의 기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절절히 호소하고 또 깨닫게 한다.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알아낸 거리
금남로는 연초록 강 언덕이었다
달맞이꽃을 흔들며 날으는 물새들
금남로의 사람들은 모두 입술이 젖어 있었다
금남로의 사람들은 모두 발바닥에 흙이 묻어 있었다
금남로의 사람들은 모두 보리피리를 불고 있었다
어린애와 나란히 출렁이는 금남로
어머니와 나란히 밭으로 가는 금남로
아버지와 나란히 쟁기질하는 금남로
할머니와 나란히 손자들을 등에 업는 금남로
할아버지와 나란히 밤나무를 심는 금남로
누이와 나란히 감꽃을 줍는 금남로
금남로는 민들레와 나비떼들의 고향이었다
그리움의 억세디 억센 끈질김이었다
그래, 좋다! 금남로는 멀리
청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래, 좋다!
금남로는 가까이 마을로 찾아가는 길
금남로는 어머니의 젖가슴이었다
우리가 한때 고개를 파묻고 울던
어머니의 하이얀 가슴이었다.
                      - 김준태, "금남로 사랑"에서

  "민들레와 나비떼"는 두 계급(또는 그룹)을 나타낸다 민들레가 고난받는 민중의 대유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나비는 예술가와 자유로운 인간을 대유한다. 김준태 시인에게 '금남로'는 그 이질적인 집단들이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걸을 수 있는, 화합과 사랑의 공간이었다. 이념도 지식도 인간이 한 뿌리를 되찾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아는 이 시인은 금남로의 체험이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 처음으로 처음으로" 깨닫게 해주었다고 고백한다. "흙"에서 "보리피리"로, "출렁이는" "밭"으로, "쟁기질"로 시인의 상상력은 거침없이 우리 하나되는 공동체를 술렁이게 하는 하나의 뿌리 "어머니"로 금남로를 끌고 간다.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나 오든의 "석회암 송"에 비견될 만한 이 짧은 시는 김준태의 치우치지 않는 정직함과 소박한 정서가 사랑으로, 승화되는 걸작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1980년대에 거의 평가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되짚는 것이 우리가 '광주'를 노래한 시가 한때 처했던 운명을 되짚는 단초가 되리라. 화해보다는 투쟁이, 사항보다는 이념이, 필요했던 시기에 광주를 정말 '광주' 답게 그린 시는 배척받았다. 또 한편에서는 단지 그 시가 '광주'를 그려 냈다는 이유로 백안시되기도 하였다. 이제 광주의 상처만큼이나 깊었던 이념의 골이 메워 지면서 '광주'의 시는 새로운 양식을 요구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광주를 노래한 훌륭한 시 한 편을 재음미해 본 것은 커다란 기쁨이다.

<일러 두기>

  본고에 참고한 시인과 시편의 목록은 다음과 같은 기준에 의해 작성되었다. 순서는 가나다순에 따랐고 여러 시집에 실린 시의 경우에는 아래 3권의 5·18 기념 시선집을 우선 했다. 김준태, 고정희, 길남준, 박몽구 들 5·18을 주제로 한 시단으로 따로 시집이 1권 이상 분량인 경우는 시집 앞에 "5·18 기념시집"이라는 표시만 하였다.
  약어 포기는 다음과 같다.
「누가 그대 큰 이름」:「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 문병란·이영진 엮음(전주 : 인동, 1987)
「마침내 오고야말‥」:「마침내 오고야말 우리들의 세상」, 김남주·김준태 엮음(서울 : 한마당, 1990)
「하늘이여 땅이여‥」 :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 황토 편집부(서울 : 황토, 1990)

강태형

오월넋 (「누가 그대 큰 이름」)

강형철     

순례 (「누가 그대 큰 이름」)
목숨의 잔 (「누가 그대 큰 이름」)
성명서를 쓰면서 (「노동해방문학」 1989. 6-7월 합본호)

고규태

나는 첫아이 였어요 (「누가 그대 큰 이름」) (「마침내 오고야말‥ 」)
지명수배 벽보 앞에서 (「누가 그대 큰 이름」)
총소리 (「누가 그대 큰 이름」)
화정동 노을 (「누가 그대 큰 이름」)
直說(직설)이 아니면 他殺(타살)이다 (「누가 그대 큰 이름」)
나팔꽃의 노래 (「누가 그대 큰 이름」)
무명전사의 넋 (「녹두꽃」 1988. 9.)
전진하는 오월 (「마침내 오고야말‥」)

고광헌   

불에게 (「누가 그대 큰 이름」)
안개마을의 자장가·3 (「누가 그대 큰 이름」)
안개마을의 자장가·13 (「누가 그대 큰 이름」)

고정희   

프리하의 봄·8 (「누가 그대 큰 이름」)
눈물의 주먹밥 ([하늘이여 땅이여‥」)
광주의 눈물비 (「실천문학」 1990 여름)
망월동 원혼들이 쓰는 절명시 (「실천문학」 1990 여름)
오공이 기른 독사의 무리들이 「실천문학」 1990 여름)
넋이여, 망월동에 잠든 넋이여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의 넷째거리 진혼마당)
누가 그날을 모른다 말하리 (「마침내 오고야말..」)
이 시대의 아벨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 지성사, 1983)
망월리 비명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 지성사, 1983)
망월리 풍경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 지성사, 1983)
마당굿 시 「초혼제」(창작과 비평사, 1983)
5.18 기념시집 「광주의 눈물비」(동아, 1990)


고  은   

40년 (「누가 그대 큰 이름」)
5월이 가면(「누가 그대 큰 이름」)(「마침내 오고야말‥」)
금남로(「그날의 대행진」, 전예원, 1988)
광주여 빛고을이여 (「하늘이여 땅이여‥」)
그대 숯덩어리 썩지 않나니 (시여 날아가라, 실천문학사, 1986)
그대의 이름은 노래입니다 (「시여 날아가라」, 실천문학사, 1986)

고형렬 

장대 같은 비가 (「누가 그대 큰 이름」)
年表(연표)(「누가 그대 큰 이름」)
5월비 들으면 (「해청」창작과 비평사, 1987)

곽재구   

내 마음의 五月(오월)(「누가 그대 큰 이름」) (「마침내 오고야말‥ 」 )
그리운 남쪽 (「누가 그대 큰 이름」)
하야시 카즈오씨의 오월행 (「실천문학」 1989 여름)「하늘이여 땅이여... 」)

김경윤   

분단시대의 국사시간(봄 금남로 가로수, 살림터, 1992)
일어서는 교실 3 - 참교육의 길(「봄 금남로 가로수」살림터, 1992)
     

김남주 

학살·1  (「누가 그대 큰 이름」) (「하늘이여 땅이여‥ )
학살·2  (「누가 그대 큰 이름」) (「하늘이여 땅이여‥ )
학살·3  (「누가 그대 큰 이름」) (「하늘이여 땅이여‥ )
학살·4  (「누가 그대 큰 이름」)
벗에게  (「누가 그대 큰 이름」)
옥좌 (「하늘이여 땅이 여‥ )
망월동에 와서 (「하늘이여 땅이 여‥ )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하늘이여 땅이여‥ 」)
학살·5  (「창작과 비평」1989 봄)
언제 다시 아 (「창작과 비평」1989 봄)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하늘이여 땅이여...」 )
나이롱 박수(「하늘이여 땅이여...」 )
역시(「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창작과 비평사, 1995)
5·18기념시집「학살」(한마당, 1990)

김명식   

五月(오월)의 심문 (「누가 그대 큰 이름」)
혁명이었다 (「마침내 오고야말‥」)

김명수 

心 飜(심번) (「누가 그대 큰 이름」)
點 景 (점경) (「누가 그대 큰 이름」)
그 청년을 누가 죽였읍니까?( 마침내 오고야말‥)

김사인

오월로 가는길 (「누가 그대 큰 이름」)

김영무

젊은 날 시인의 초상화 (「창작과 비평」 1994 봄)

김영산

영산강 3 (「창작과 비평」 1991 가을)
제망매가 (「창작과 비평」1990 겨울)

김영현

망월동 나오는 길 (「사상문예운동」 1990 여름)
오월 (「하늘이여 땅이여‥」)

김용락

망월동 (「누가 그대 큰 이름」)
누님 (「누가 그대 큰 이름」) (「하늘이여 땅이여...」)
그날이 오면 (「누가 그대 큰 이름」)
사월에 오시는 님 (「실천문학」 1991 여름)

김용택

우리 사랑 光州 누가 그대 큰 이름」)
오 월 (「누가 그대 큰 이름」)
그대들이 열어주고 우리가 열어가야 할 훤한 세상(「누가 그대 큰 이름」) (「마침내 오고야맡‥」)
당신 가고 봄이 와서 (「하늘이여 땅이여‥」)

김윤배

눈물 마를 거리에서 (「실천문학」 1991 여름)

김재진

빈 상여 나가며 (「누가 그대 큰 이름」)
봉화(「누가 그대 큰 이름」)
오 월 (「누가 그대 큰 이름」)

김정환

몸통에서 분리된 모가지의 노래 (「누가 그대 큰 이름」)
편지 (「누가 그대 큰 이름」)
철쭉꽃, 5월에 (「누가 그대 큰 이름」)
오월기(「누가 그대 큰 이름」)(「마침내 오고야말‥」),(「하늘이여 땅이여 ‥」)

김종주

봄, 금남로 가로수 (「봄 금남로 가로수」, 살림터, 1992)

김준태

광주로 가는 길 (「누가 그대 큰 이름」)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1 (「누가 그저 큰 이름」)
(「마침내 오고야말‥」),(「하늘이여 땅이여‥‥)
여자의 사랑은 총알보다도 더 멀리 날아간다 (「누가 그대 큰 이름」 )
밤거리 샹송 (「누가 그대 큰 이름」)
앞 니 (「누가 그대 큰 이름」)
광주여, 목숨통일하라 (「누가 그대 큰 이름」)
금남로 사랑 (「누가 그대 큰 이름」)
불 갑 사 (「누가 그대 큰 이름」)
역사는 내일에 맡길 수 없는 것 (「창작과 비평」 1993 가을)
1989년 12월, 망월동에 가서 (「창작과 비평」 1989 가을)
(「하늘이여 땅이여 ‥‥ )
공영석 (「실천문학」 1988 가을)
광 주 (「하늘이여 땅이여‥‥)
광주땅 5월 생목숨들 상사디여! (「하늘이여 땅이여‥‥)
천비 (「하늘이여 땅이여」)
합장시 (「하늘이여 땅이여‥」)
광주에 바치는 노래 (「마침내 오고야말‥」)
「국밥과 희망」(풀빛, 1984)
「불이냐 꽃이냐」(청사, 1986)
「칼과 흙」(문학과 지성사, 1989)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한마당, 1981)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창작과 비평사, 1994)
5·18 기념시집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실천문학사, 1988)
5·18 기념시집 「오월에서 통일로」(빛고을, 1989)

김진경

부 활  (「누가 그대 큰 이름」)
5월 21일 도청앞 광장제서(「누가 그대 큰 이름」)
로마 교황에게 (「5월시 동인지 제5집 : 5월」, 청사, 1985)
광 주(「 누가 그대 큰 이름」) (「마침내 오고야말‥」)
우리들을 위한 묘비병(「누가 그대 큰 이름」)
망월동에서 돌아오는 길, 눈오는 담양 들판에 내려앉던(「누가 그대 큰 이름」)
까마귀떼를 생각하며(「5월시 신작시집」, 푸른나무, 1994)프라하의 볼 (「사상문예운동」 1990 봄)
1985년 5월 23일 (「하늘이여 땅이여‥」)
광주 해방을 노래함 (「우리 시대의 예수」, 실천문학사, 1987)
너를 떠나보내는 이 거리에 (「우리 시대의 예수」, 실천문학), 1987)
산 (「우리 시대의 예수」, 실천문학사, 1987)
사람들은 너를 (「우리 시대의 예수」, 실천문학사, 1987)
길 (「광화문을 지나며」, 풀빛, 1986)
봉숭아 손톱 (「광화문을 지나며」, 풀빛, 1986)
킬링휠드 (「광화문을 지나며」, 풀빛, 1986)

김창규

구두 닦아요 (「누가 그대 큰 이름」)
무등산 (「누가 그대 큰 이름」)

김창완

무등산에게 (「누가 그대 큰 이름」)
즐거운 반란 (「누가 그대 큰 이름」)

김하늬

아, 바람 (「아, 그날의 꽃잎처럼」, 사사연, 1986)
오월이 오면 (아, 그날의 꽃잎처럼」, 사사연, 1986)
어느 참혹한 날의 기억 (「누가 그대 큰 이름」)
망월동으로 가는 길 (「누가 그대 큰 이름」)

김해윤

총과 아내(「실천문학」1991 여름)

김해화

누이의 헌혈가 (「누가 그대 큰 이름」) (「마침내 오고야 말‥」)
1984년 5월 17일일 (「누가 그대 큰 이름」)
5월묘 가는길 (「누가 그대 큰 이름」)

김형근

다시 오월에 (「누가 그대 큰 이름」)

김형수

배고픈 다리 (「누가 그대 큰 이름」)
오리발과 빨간 나비넥타이 (「누가 그대 큰 이름」)
낡은 수첩(「누가 그대 큰 이름」)
낡은 수첩(「누가 그대 큰 이름
내일이면 (「하늘이여 땅이여‥」)

김호균

노을 (「녹두꽃」1988. 9.)


김희수

落 花(낙화) (「누가 그대 큰 이름」)
아아, 무등의 아들 홍기일! (「누가 그대 큰 이름」)
오늘은 꽃잎으로 누울진자도(장시) (「하늘이여 땅이여‥」)
녹두꽃 사내 (「마침내 오고야말‥」)
광주천7 (「마침내 오고야말‥」)


김희식

오월 아이야 (「누가 그대 큰 이름」)

나종영

무등산 (「누가 그대 큰 이름」)
갈래꽃 (「누가 그대 큰 이름」)
화해에 대하여2 (「누가 그대 큰 이름」)
등꽃 (「누가 그대 큰 이름」)
아 5월! 광주는 끝나지 알았다 (「하늘이여 땅이여‥‥) ,(「마침내 오고야말‥‥ )
다시 오월에 (「5월시 신작시집」, 푸른나무, 1994)
저녁놀 (「오월시 판화집」)


나해철

광주 (「누가 그대 큰 이름」)
무등마을 (「누가 그대 큰 이름」)
광주천·3 (「누가 그대 큰 이름」)
무등산 (「문학과 사회」 1989 겨울)
우리사랑 광주여 (「하늘이여 땅이여‥」)

문병란

송 가(「누가 그대 큰 이름」)
망령의 노래 (「누가 그대 큰 이름」)
부활의 노래 (「누가 그대 큰 이름」)
타오르는 불꽃 (「누가 그대 큰 이름」)
5월의 아침 (「아직은 우리 맨살로 부대낄지라도」, 눈, 1990)
다시 오월은 와야 한다 (「사상문예운동」 1991 여름)
우리들은 당신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늘이여 땅이여‥」)
광주의 5월 (「하늘이며 땅이여‥」)
다시 금남로에서 (「마침내 오고야말‥」)·
돈으로 사버린 광주 (「견우와 직녀」, 한길사, 1991)
무등산의 말 1·4·5·6 (무등산」, 청사, 1986)
광주여 5월이여 그날의 일체감이여(「불멸의 연대」, 일월서각, 1994)
다시 타오르는 5월 (「불멸의 연대」, 일월서각, 1994)
금남로 1989년 (「불멸의 연대」, 일월서각, !994)
망월동 연가(「불멸의 연대」, 일월서각, 1994)
오월을 위한 발라드 (「불멸의 연대」, 일월서각, 1994)
무등 앞에 서는 마음 (「불멸의 연대」, 일월서각, 1934)
다시 불러보는 그날의 노래 (「불결의 연대」, 일월서각,1994)
구두닦이의 죽음 불멸의 연대」, 일월선각, 1994)
망월동 행진(「불멸의 연대」, 일월서각, 1994)

문익환

오월인 오면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실천문학사, 1984)


홍남순

선생님 (「누가 그대 큰 이름」)
오월의 양심 (「창작과 비평」 1989 봄)
그날에 오면 (「마침내 오고야말‥」)

민병일

국립묘지에서 (「하늘이여 땅이여‥」)
우리들 밥처럼 다수운 사랑과 희망의 땅에서 (「누가 그대 큰 이름」)(「하늘이여 땅이여‥」)
(「새벽강에 뜨는 별들의 눈으로」,눈, 1990)
보름달 1 (「실천문학」 1990 여름)
특전부대 선임하사의 흘러간 청춘(「하늘이여 땅이여‥」)
어머니께 (「마침내 오고야말‥」)

박남준

그후, 무등산에 봄이 오면 (「누가 그대 큰 이름」)
우 화 (「누가 그대 큰 이름」)
오월산불 (「누가 그대 큰 이름」)
어여쁜 내 님은 죽어 (「누가 그대 큰 이름」)
물이되어 물굽이 틀며 (「하늘이여 땅이여」)

박남철

경희대학교 박사과정 연구생의 노래 (「창작과 비평」 1993 봄)
망월 (「창작과 비평」 1993 봄)

박노해

삼청교육대·1 (「누가 그대 큰 이름」)
살았다 무기다! (「하늘이여 땅이여‥」)
총 한방에 (「하늘이여 땅이여‥」)
최후의 만찬 (「하늘이여 땅이여‥」),(「마침내 오고야말‥」)

박몽구

박관현, 영원한 무등의 아들이여 (「하늘이여 땅이여‥」)
일정표 속의 모르모트들 (「누가 그대 큰 이름」)
금남로 탈환의 대낮 (「누가 그대 큰 이름」)
도둑없는 거리 (「누가 그대 큰 이름」)
무덤만 파 가면(「누가 그대 큰 이름」)
핏줄들의 살풍경 (「누가 그대 큰 이름)
해방의 길목을 여는 횃불 (「하늘이여 땅이여‥」)
우리들의 사라짐 위에 (「마침내 오고야말‥」),(「하늘이여 땅이여‥」)
광주의 불씨를 사방으로 (「하늘이여 땅이여‥」)
동숭동의 봄 (「5월시 신작시집」, 푸른나무, 1994)
우리들을 살린 뜻 (「하늘이여 땅이여‥」)
광주의 꿈을 삼천리로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아카시아 노래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1990)
잠행 VII - Xl (「우리가 우리에게 묻는다」, 나남, 1982)
무등 혹은 우리들 마음의 기둥 (「우리가 우리에게 묻는다」.나남, 1982)
장시 - 남은 사람들 (「끝내 물러서지 않고」, 전예원, 1988)
연작 - 십자가의 꿈 (「십자가의 꿈」, 풀빛, 1986)

박봉우

민중의 소리 (「하늘이여 땅이여‥」)
광 주 (「창작과 비평」 1990 여름)

박선욱

누이야 (「누가 그대 큰 이름」)
오월의 새 (「누가 그대 큰 이름」)
오월 초하루 신하루 새벽에 (「누가 그대 큰 이름」)
광주 3 (「실천문학」 1989 가을)
광주 4 (「누가 그대 은 이름」) (「하늘이여 땅이여‥」)
광주 5 (「하늘이여 땅이여‥」)
광주 6 - 진혼가 (「노동해방문학」 1989 8월)
광주 1 (「마침내 오고야말‥」)

박승옥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가 그대 큰 이름」)
무명용사비(「누가 그대 큰 이름」)
오월의 겨울 (「누가 그대 큰 이름」)

박정온

「광주의 깃발」

박정열

거짓말 (「누가 그대 큰 이름」)
피의 초파일(「누가 그대 큰 이름」)
5월 25일 도청 안에서 (「누가 그대 큰 이름」)

박종권

아! 천안문 (「민중시 5」, 청사, 1989)
우수에 (「하늘이여 땅이여‥」)

박주관

나팔꽃씨 하나가 (「누가 그대 큰 이름」)
봄밤에 비는 내치고 (「오월시 판화집」)
죽음이며 부활이다 (「누가 그대 큰 이름」)
몇 사람이 없어도 (「누가 그대 큰 이름」)
그리운 날을 위하여 (「누가 그대 큰 이름」)
하얀 고무신 (「오월시 판화집」)
거리에 서서 (「하늘이며 땅이여‥」)

박진관

5월의 산천 (「누가 그대 큰 이름」)
오월 바람 (「누가 그대 큰 이름」)

백기완

지기는 누가 졌단 말인가 (「누가 그대 큰 이름」)
민중과 하나되는 그날까지 (「누가 그대 큰 이름」)

백무산

오월은 어디에 있는가 (「노동해방문학」 1989. 5월) (「하늘이여 땅이여‥」),
(「마침내 오고야말‥」)

배창환

봄날 (「누가 그대 큰 이름)
무등산 깃발로 (「누가 그대 큰 이름」)

선명한

광주의 예수·1 (「누가 그대 큰 이름」)
광주의 예수·2 (「누가 그대 큰 이름」)
광주의 예수·3 (「누가 그대 큰 이름」)
누가 네 喪服(상복)을 입어주랴 (「누가 그대 큰 이름」)

송기원

솔바람 (「누가 그대 큰 이름」)
한 파 (「누가 그대 큰 이름」)
꽃밭을 지나며 (「누가 그대 큰 이름」)
다시 꽃밭을 지나며 (「누가 그대 큰 이름」)
꽃피는 봄날 3 (「하늘이여 땅이여‥)
누이야 너는 죽지 않았다 (「마침내 오고야말‥」)

송수권

망월동 가늘길·2(「누가 그대 큰 이름」)

신경림

씻김굿 (「누가 그대 큰 이름」) (「마침내 오고야말‥」)
어깨로 밀고 나가리라, 아우성으로 밀고 나가리라  (「누가 그대 큰 이름」)
(남도노실)(「실천문학」 1995 봄)

심종철

너희들을 눈감게 하기 위하여 (「누가 그대 큰 이름」)

심호택

황금동의 뱀 (「노둣돌」 1992 가을)

안도섭

「어느 화형일」 (청사, 1987)

양성추

하늘에 들리도록 (「누가 그대 큰 이름」)
길 (「누가 그대 큰 이름」)
봄이 오느냐 손벽치며 (「누가 그대 큰 이름」)
이제 다 알아요 (「누가 그대 큰 이름」)
해방인가 (「누가 그대 큰 이름」)


박관현

(「누가 그대 큰 이름」)
그대가 드디어 세상을 이겼으니 (「하늘이여 땅이여‥」)
우리 살았다 하지 말자 (「하늘이여 땅이여‥」)
하늘에 들리도록 (「마침내 오고야말‥」)


오봉욱

아이들의 조국은·9 (「아, 그날의 꽃잎처럼」, 사사연, 1986)
내 울타리 안에서 (「누가 그대 큰 이름」)
5월 (「누가 그대 큰 이름」)
비와 오월 투쟁 (「창작과 비평」 1990 겨울)

오하룡

아, 그날 (「새벽강에 뜨는 별들의 눈으로」. 눈. 1990)

유하종

오복녀에게 (「누가 그대 큰 이름」)
유복자 (「누가 그대 큰 이름」)

윤재걸

오월·1 (「누가 그대 큰 이름」)
五月  (「누가 그대 큰 이름」)

윤재철

오월에 (「누가 그대 큰 이름」)

이도윤

오월의 꽃·1 (「누가 그대 큰 이름」)
오월의 꽃·2 (「누가 그대 큰 이름」)
오월의 꽃·4 (「누가 그대 큰 이름」)
오월의 꽃·5 (「누가 그대 큰 이름」)
오월이 살아 (「하늘이여 땅이여‥」)
백담사를 바라보며 (「민중시 5」, 청사, 1989)

이성부

共同山(공동산)(「누가 그대 큰 이름」)
바위타기 (「창작과 비평」 1992 겨울)

이승철

오월노래 (「누가 그대 큰 이름」) (「마침내 오고야말..」)
용봉동의 살 (「누가 그대 큰 이름」)
망월동에서 (「누가 그대 큰 이름」)
당신은 한줌 재로 불타고, 우린 이렇게 살아 남아 (「누가 그대 큰 이름」)
오월,광주 (「누가 그대 큰 이름」)
그해 목포 앞바다 누가 그대 큰 이름」)
오월비 (「누가 그대 큰 이름」)
그 사내 (「하늘이여 땅이여‥」)
피 깃발의 너와 나 (「하늘이여 땅이여‥」)

이시영

너 (「누가 그대 큰 이름」)
무명용사의 무덤 곁에서(「누가 그대 큰 이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