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 ■ 학술제 / 광주민중항쟁과 문학 - 희망 뿌리 내리기 , 고려대 문예모임(언어세계. 1996. 봄)
본문
■ 학술제 / 광주민중항쟁과 문학
희망 뿌리 내리기
고려대 교육문예모임
1.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들의 두려움이었다
2. 피흘리지 않고서야 세계를 획득할 수 있겠는가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배경과 성격
3. 우리가 읽은 소설은요
4. 다시 그 거리에 서면
--소설 속에 나타난 광주민중항쟁의 상황과 전개
5. 져도 지는 것이 아닐 수 있어,
그래도 이런 엄청난 피의 대가로 알게 되는 것이 슬퍼
--광주사람들의 삶의 태도와 인식내
6.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 이 원고는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육문예모임이 지난 1995년 12월 4일 '광주민중항쟁과 문학'을 주제로 개최한 학술제에서 발표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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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들의 두려움이었다>
어째서 과거를 들추어내는가?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가 아닌 고통스러운 역사를 들추어내서 분석하고 논쟁하는 것은, 현재라는 것이 단절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의 삶을 규정하고자 하는 까닭도 있겠지만,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역사라면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한국현대사 최대 비극을 '80년 5월 광주'로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세계사나 한국의 근현대사를 볼 때, 하면 당장은 큰 손실과 위해가 오고 오그라들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커지고 뭉쳐져 강력한 힘으로 성장하여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단순히 패배로만 그치지 않을 역사적인 분수령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인 것이다. 우리는 5월을 창출한 군부세력의 폭력성과 만행에 대해 분개할 수 있지만, 그전에 어째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지 이성적인 눈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과거의 암울한 비극이 오늘이라는 자리에서 힘을 발하는 빛이 된다. 흔히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이성적인 읽어냄으로 현실을 다시 사고하고 미래를 아름다운 것으로 꿈꾸게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을 통해서 역사를 읽어낸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회과학은 명료하고 간결하다. 처참한 개인의 역사도 사회과학의 도표에서는 그저 네모 반듯하게 정확하지만, 딱딱하게 드러날 뿐이다. 문학도 때로는 사회과학을 흉내낸다. 하지만 그것이 통념을 깨고 그러한 형식을 취하게 된 까닭을 따지고 들어가 살펴보면, 이제는 그 근거가 정서를 남기고 가슴을 울리게 되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한계를 극복하여 추상적인 정서로부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정서를 전해주는 일을 바로 문학이 한다. 문학은 인간역사의 많고 많은 사건 중에 한가진 사건만을 다루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 중에 어느 한 인물에 국한하여 쓰여지기도 한다. 방대한 객관적 상황에서,생략과 과장이라는 예술적 덧칠을 하는 것이다. 삶의 진실을 감추기 위한 생략과 과장이 아니라, 진실에 가깝게 다가서기 위하여 풍부하고 구체적인 한 단면으로 생의 모습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문학에서는 단면들이 모여 현실을 총체적으로 드러낸다.
문학은 고통스러워한다. 인간이 억압받는 상황에 대해서, 그것을 모르고 무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읽는 자로 하여금 반성을 강요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것과 싸울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이런 수모와 아픔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해준다. 인간은 이래야 하고 그럴 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느끼게 한다. 문학이 사회의 여러 분야에 공급될 때 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이론과 정서의 확대는 때때로 정치적 최고형태에 이르는 것으로, 문학은 이미 정치고 정치이상이다. 항쟁직후의 그 살벌한 파쇼의 공포분위기가 표면상 유화국면으로 되지 않을 수 없는 80년대 상반기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사회현실의 전면에 나선 것이 여러 운동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문예선전이었다.
아직, 광주문제를 다룬 소설작품 가운데서 이렇다 할만한 것은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소설은, 아프다고 소리만 질러도 어느 정도는 이루어지는 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에 가서야 비로소 항쟁을 다룬 소설이 등장하는데, 이는 소설생산의 조건자체가 일정한 인식과 서술기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작가가 항쟁에 재빨리 부흥할 수 없는 실제 사정도 작용했기 때문이지만 소설작가들이 항쟁에 대해 사명을 철저하게 짊어지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항쟁문학의 범위를 가르고 선정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자체 소재를 가진 작품에만 국한하기에는 항쟁에 대한 세계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였다. 정도상의 표현처럼, 광주는 서울이고 부산이 될 수 있다. 전제와 폭압을 격파하고 새 질서를 창조하려는 민중의 뜨거운 피가 흐른다면 어느 곳이고 광주가 될 수 있고, 이것을 표현했다면 소재야 어떻든 간에 항쟁문학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룰 수 있는 분량의 한계로 인해서「광주민중항쟁과 문학」은 소재로 가르는 조심스러운 선정을 해야만 했다.
사회과학이나 문학 그 어느 것도 독립하여 홀로 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겨레 신문과 그 신문에서 박재동 만화가 갖는 위치를 생각해본다. 무슨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 사회에 어떤 파급력을 지니는지 객관적이고도 세부적인 상황을 알지 못하고 만화를 보면 어리둥절하게 된다. 일단 상황을 정확히 꿰뚫은 후에야 만화는 진정한 그 생명력을 발휘한다.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상황의 인식없이 그저 그 소재를 다룬 문학작품 읽기는 다소 위험하다. 작품 속에 부분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한 인물 한가지 사건에 국한해 사고하지 않고 그 인물이 발딛고 서있는 사회상황, 그리고 그 사건을 연유케 한 역사적 배경까지 총체적으로 그리고 다각적으로 읽기 위해선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문학을 다루기 이전에 사건의 발발배경과 성격을 정확히 제시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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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흘리지 않고서야 세계를 획득할 수 있겠는가>
-광주민중항쟁의 발발 배경과 성격
파시스트 권력과 분단체제의 성격을 인식하는데 광주 학살은 아주 훌륭한 교사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광주이후 국민대중은 현재의 권력을 낳게 한 국내외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2.12부터 5.17까지 정치적 공간은 군부와 유신온존세력, 학생·재야기층민중으로 구성된 민주화운동세력의 두 가지 입장에서 다르게 해석된다. 전자에서는 군부세력내의 일정한 실세가 제도권 내로 전화되어가는 과정 즉, 부마항쟁으로 표출된 민주화의 급격한 진출을 저지, 무마함과 동시에 지배집단 내부의 분열과 경쟁을 조정, 통제함으로써 가능한 한 신속하게 새로운 유신대체권력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후자에서는 지배체제의 과도기에서 나오는 불안정성을 이용해 민주화 활동을 유도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된다. 그러나 민주세력에게 상당히 부정적이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유신체제라는 것이 한 개인의 권력욕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의 죽음 이후에는 조금은 당연하게 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환상이 있었다. 12.12쿠테타 상황이나 그 주동자의 성격, 미국의 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단면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다. 민주화 운동세력 중 정치정세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평화적 방법인 선거를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군부를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세판단을 했다. 재야 운동세력은 제도권 정당들보다 원칙적이고 강경한 자세였으나 자체투쟁역량의 부족 때문에 지속적으로 그들의 주장을 펼치진 못하였다. 그나마 실제적인 운동역량을 갖고 있던 학생들도 학생자치조직의 건설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학원자주화투쟁에 매진함으로써 유신온존세력을 대하여 적극적인 대응을 못하였다. 이와 같이 재야운동세력, 제도권정당. 그리고 학생운동세력들의 인식차이는 각각 운동방향에 대해서 분열양상으로 나타나 유신세력을 일소할 수 있는 연합전선을 구축하지 못하였다.
1980년 5월에 좌절한 것은 고립분산적 악전고투와 엄청난 희생을 치룬 광주민중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세의 지원이 없이는 하루도 존속할 수 없는 군부독재와 매판 독점 측이 더욱 극심한 좌절을 겪었을 것입니다.
12.12쿠데타 세력은 박정희 체제가 양성한 박정희의 분신이었다. 박정희는 쿠데타의 정당성확보를 위해 외세와 손잡고 종속적인 경제발전을 추진하면서 민중을 배제한 국가성장을 이룩했다. 숫자상으로는 고도성장을 이룩했지만 우리 민중들이 흘린 땀의 댓가는 미·일 독점 자본이 엄청나게 챙겨가고 국내 매판자본들이 먹어버려 민중들은 여전히 빈곤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경제 압박에 따라 각계 각층의 민중운동은 필연적으로 고양되었는데, 권력유지를 위해서는 다시 정치적인 압박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유신 그리고 이후의 긴급조치 1호 발동은, 반민족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반민주적일 수밖에 없는 한국 극우세력의 단면이었다. 그 계보를 신군부세력이 잇는다. 그들은 새로운 억압체계의 확립을 위한 계기로써 광주를 '선별적 희생 양'으로 삼았다
광주항쟁을 통해 우리 민족민주운동은 민주화운동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조직화된 세계적 지배구조라는 총체적 시각을 획득하였고 이것은 반민주 자주화 운동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배구조는 친미반공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것은 한국전쟁에서 확립됐고 이후의 정권의 교체가 있어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제는 분단체제하에 있는 한국에서 인주화 문제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민족문제나 계급문제와 연결될 때 지배질서의 본질적 모순에 부딪치게 되면서도 냉전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조직화된 적의 실체를 인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1970년대까지 미국을, 독재정권을 견제하는 자유민주주의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실상 미국의 대외정책 전략적 기조는 우파정권의 지원을 통한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인 이익을 보호하고 세계적 차원의 미국 중심적 지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우파독재정권을 위협하는 민주운동의 성자, 좌익세력을 포함한 민주운동의 발전을 저해하는데 있다. 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외피로 우파독재정권을 감싸주고 정당화하면서 친미우파정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특정시기에는 친미우파독재정권을 견제한다거나 온건화시키는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카터 미행정부는 박정권에게 민주화와 인권의 회복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탄압상은 더욱 강해지기만 해서 이를 이유로 주한 미군철수를 계획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그것도 민중운동의 발전으로 지배체제가 극도로 위태롭게 되는 시기가 아니고는 본래의 기조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12.12부터 5.17, 그리고 광주학살까지 미국은 간접적으로 의사나 의지를 전달했다. 사실 12.12쿠데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정치적으로 미국의 이해를 관철시킬 수 있는 안정적 정권이 필요했고, 국민의 원성이 높은 박정희를 제거하는 대신 유신체제를 적당히 변형하고자 할 때 쉽게 떠오른 것은 군부등장으로 인한 체제의 지속이었을 것이다. 양김이 집권할 경우 그들이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것은 반가운 것이지만, 민주화운동에 적극적 제동이 불가능하리란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는 광주학살을 방조, 묵인했다는 이유 함께 그토록 '증오해마지 않던'군부정권을 미국이 계속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것에서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깼다. 미국의 실체에 대한 이런 인식이 처참한 광주학살이후에야 가능했던 것이다.
왜 광주였는가?
이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 그중 하나는 가해자인 군부에서 원인을 찾는 것으로 군부의 광주에서의 과잉진압, 나아가 광주 진압을 목표로 한 '사정계획'이 5.19을 야기하였다는 것이다. 5.17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김종필과 김대중이 구속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야당 지도자 중 김영삼 신민당 당수는 제외되고 호남인 김대중만 구속되었다는 것이다. 신군부는 민주화 진영을 분열시켜 그 힘을 약화시켜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재야 민중세력과 좀더 직접적인 연계를 유지해왔고 박정희 정권의 오랜 공작에 따라 국민들 사이에 급진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김대중이 더 효과적이었다는 것이다. 김대중 구속이 광주 호남인들의 소요 유도를 위한 계획적 전략이라고 보기 어렵더라도 18일 오후에 '계엄령 철폐', '김대중 석방'의 구호를 내건 산발적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에 들어가게 되었고 민중항쟁을 촉발하게 된다. 광주의 상황을 보고받은 그 단계에서 의도적인 목표로 광주가 지목된 것이다. 18일 최소한 서울지역의 경우 영등포 일대 등지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광주식의 잔혹한 대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광주지역의 민중적 역량 등 주체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간의 소외와 오랜 민중운동에서 축적된 전통이 광주 민중항쟁을 야기시켰다는 말이다. 광주시민의 민주화욕구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회, 경제적 처지와 연결이 된다 과거부터 비옥한 곡창지대인 호남은 '풍요 속의 빈곤', '상대적 빈곤'을 경험하였고 봉건적 모순의 응집은 한국근현대사에서 호남을 한국민중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게다가 5.16쿠데타 이후 TK정권에 의해 수출주도형 산업화가 시작되자 호남은 다시 '한국의 제3세계'로 낙후하게 된다. 전라도의 농업지대로의 특화, 농업과 공업의 불균등발전에서 오는 피해 등이 이 지역 주민에게 많은 부분 전가되면서 농민만이 아니라 전지역 주민에게 불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산업화과정에서 농업의 위축에 의해 이농을 강요당하고 지역 내의 산업화부진으로 다른 지역에서 노동자로 취업하여 도시의 저 소득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런 경제적 정치적 소외의식 속에서 이 지역 대중은 10.26이후 지역편중과 차별에서 오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민주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스럽게 김대중이라는 상징이 존재했는데, '구속'이라는 상황이 벌어지자 격렬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쟁이 발발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김대중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인정하더라도 광주시민의 김대중에 대한 환상은 짚고 넘어가야 할 듯 싶다. 기회주의적이고 당리당략적인 기성정치세력은 진실로 호남민중들의 비원을 성취시키는데 한계가 있다.
결론적으로 군부의 민중세력이 정면충돌한 5.18민중항쟁은 군부의 전략적 선택, 김대중 변수, 광주의 민중성이 결합하여 일어난 것이다.
80년 5월 광주 '남파된 북괴간첩과 불순분자들'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의 소요로부터 한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된 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인 복권을 이루었다. 광주항쟁은 3.1운동 이후 한국사에서 전개된 다른 항쟁과 비교했을 패 독특한 위치를 가진다. 유신체제 아래서 박정희가 양성한 분신들의 권력장악에 맞서 격렬히 일어났지만 결국 관료적 권위주의 내지는 종속적 파시즘체제로의 복권이 이루어졌음을 상기해볼 때 외형상 소득없는 패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패배의 한 원인조차 분단상황에 연유한 국가에 억압적 통치구조에 의해서 기층민중운동이 발달하지 못한데서 찾을 수 있다면 분단체재 40년의 시점에서 그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의 단절과 한국전쟁 이후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던 진보적 민중운동의 복원을 가져다 주었다. 민족사의 과업이 민주화, 자주화, 통일이라는 큰 줄기로 가닥 잡혔고 주체세력 형성도 윤곽을 드러냈다. 1987년 6월 항쟁-7,8,9월 노동투쟁과 그 이후의 상황은 이의 질적, 양적 수준의 변화를 보여준다.
광주항쟁의 전개과정이나 성격(민중중심의 항쟁)은 소설작품과 함께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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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은 소설은요>
살아 있는 자들은 정치적이다. 아무리 혼자 무력감에 빠져 있어도 계기가 주어지면 정치성의 면모가 드러난다. 정치적 입장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올바른 정치적 입장은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결정 짓는다. 광주는 지금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싸움의 격력함치고는 건물은 그리 많이 파괴되지 않았다. 꼭 없애야 될 곳만 불태워 없앴다. MBC, 세무서, 노동청, 어용 노조 민중의 기본권이 박탈된 곳만이 정확하게 파괴되었다. 이 사실은 이 항쟁이 절대로 무정부주의자들이나 폭도들의 싸움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 준다. 도청을 불태워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청은 건재하다. 그것은 우리들이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이다. 진정한 민주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표현이다. 정치의 현실성을 획득하겠다는 행동이다. 홍희담,「깃발」
문순태, 「일어서는 땅」
이 작품은 아들(토마스)을 잃어버린 아내의 아픔과 그 상처의 치유를 다루고 있는데, 여순항쟁과 광주민중항쟁을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아들은 광주항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아내는 그 때문에 실신을 했다 아내는 이상하게도 해마다 아카시아가 피는 5월이 되면 기운을 차리고 아들을 찾으러 광주로 떠나기를 몇 년 째. 올해도 아카시아가 피고 나는 아내와 죽은 아들을 찾으러 갔는데 우람한 무등산이 토마스처럼 느껴졌다. 무등산 가까이에 살면 아내는 기운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음은 광주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토마스가 지은 시이다.
어머니 나는 지금
십자가를 닦고 있어요.
아버지가 아침마다
숫돌에 낫을 갈고
밤마다 어머니가 우물가에서
맑은 샘물을 퍼올려
누더기 헌 옷들을
깨끗하게 빨아 말리듯
별처럼 빛나는 우리들의
꿈을 닦고 있어요
나의 꿈은
더러운 구두창이 아니고
서슬이 퍼런 아버지의 낫이며
낡은 누더기일지라도
부끄러움을 가리는
어머니의 휜 빨래이고 싶어요.
이 작품의 결말 -즉 무등산을 죽은 아들이라고 여기는 것-이 진정한 문제해결의 방법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이 한계점이다. 감상적 극복은 독자가 인정하기 힘들다.
박호재, 「다시 그 거리에 서면」
큰 동생(형석)을 시민군으로 막내 동생(형수)을 방위군으로 내보낸 누이의 심리, 형석에 대한 육친적 관심으로부터 광주항쟁의 정당성을 이해하게 되는 지숙의 의식의 발전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장은 광주의 해방 기간을, 2장은 계엄군의 재진입으로 항쟁이 절정 속에 붕괴되는 것을 그리고 있다. 항쟁 당시에 광주 외곽을 지켰던 가해자(형수)가 등장하여 5월 27일의 상황을 전해준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작품은 광주항쟁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의 시각에서 서술되었기 때문에 광주항쟁의 모습을 잘 알 수가 없다.
홍희담, 「깃발」
5월 20일 택시운전사들의 차량시위를 전후해서 지식인 및 학생 주도의 항쟁과 노동자계급 중심의 투쟁이 실지로 분기점을 이루는 시기로 형상화하였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항쟁을 바라보았으며 항쟁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다루는 내재적 접근을 통해서 시간의 경과에 따른 항쟁의 모습과 사람들의 태도를 잘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항쟁의 중심을 다룬 소설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지식인은 나약하고 노동자들은 의식이 투철하며, 지도부가 온건파와 강경파로 이분되는 등 당시의 상황을 너무 단수화시켜서 진실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가를 ...그것은 곧 너희들의 힘이 될거야."
"그래, 끝까지 책임지는 것만이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어.
윤정모, 「밤길」
이 작품은 광주항쟁에 대한 지식인의 부채의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지도부의 부재 상태에서, 몇몇 동지들의 항쟁의 진실을 밝혀 달라는 권유에 의해 부여된 탈출 임무에 대해 신부와 요섭은 끝내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중반의 것인데도 항쟁의 주변 인물을 통한 고민과 당위의 한계를 더이상 뚫지 못하였다
그는 울고 있는가. 요섭아. 그렇다면 요섭아, 남아 있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였단다. 그것으로 끝이기만 하다면, 우리가 남아 있어서 끝나기만 한다면 우리의 탈출은 부끄러움이어야 할 것이다... 요섭아, 우리도 지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있는게 아니란다. 거기에도 장벽은 있다. 그 장벽을 깨뜨려 달라는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거야. 우린 그걸 해내야 돼, 비록 이 밤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해도 이젠 서둘러야 한다.
정도상, 「십오방 이야기」
이 소설은 광주항쟁에 진압군으로 활동했던 사람의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점이 특이하다. 만복이는 광주항쟁당시 공수부대로 투입되었다가 동생의 죽음을 목격하였다. 그는 동생을 죽인 사람과 닳은 사람을 보고 살인을 해서 교도소에 들어오게 된다. 광주항쟁을 오직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교육받아서 동생의 죽음을 데모하는 학생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만복이는 처음에는 학생운동을 하여 교도소에 들어간 원태에게 적의를 품지만 결국 원태의 속옷을 빨아주게 된다. 작품 마지막의 원태와 만복이의 화해가 작위적이며, 운동권 대학생 원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옥중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말단의 가해자인 만복이 역시 궁극적인 피해자임을 잘 그쳐내지 못하고 있다.
임철우 소설
임철우는 광주항쟁의 소설화에 애써왔다. 그는 광주학살에 초점을 둔 피해자의 문학을 쓴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정권의 폭력성과 죄의식이 드러난다. 그는 독백형식을 통해 개인이 광주항쟁으로부터 받은 피해를 잘 그려내고 있으며, 추상화, 은유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강렬한 인상으로 전해준다. 그러나 임철우의 소설은 광주항쟁의 핵심보다는 광주 7년뒤의 입장을 그냥 스케치하듯 그리고 있고, 막연한 상살으초 인해 5월의 묘사가 허황함을 지니고 있다. 독백형식도 상황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단점이 있다.
「사산하는 여름」
몇 년 전에 광주항쟁을 치룬 광주시내에 떠도는 이상한 분위기와, 사람들의 불안정한 심리가 표출된 소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확실하지는 않아도 사람들은 달라붙은 남녀의 이야기를 자꾸 만들어 낸다.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타인들의 운명에 관해 그처럼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또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내심 놀라와 진다. 그는 그런 그들의 얼굴에서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분명한 그늘의 흔적을 찾아낸 느낌이다. 그것은 어쩌면 오래 굶주린 자의 맹렬한 허기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하고 K는 생각한다. 그들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깊은 분노와 증오의 흔적이 그들의 눈빛과 상기된 뺨, 그리고 들뜬 듯한 음성에도 눅진하게 묻어 있음을 K는 보았다.
「동행」
이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광주를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수배 중인 친구를 만나고 나서 나를 돌아본다.
나는 네가 억지로 떠맡겨놓고 간 그 허약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싸구려 비닐우산으로 간신히 몸을 가리운 채, 네가 비워두고 사라져버린 그 막막한 어둠의 공간을 지켜보며 혼자서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쩌면 이제 그 빈자리는 남아 있는 내가 채워야 할 몫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직선과 독가스」
나는 만화를 통해서 이 사회에 나름대로의 저항을 하고 싶지만 그것마저 통제당한 나는 남들이 맡지 못하는 독가스 냄새를 맡게 된다. 독가스 냄새가 나서 살 수가 없다 더이상 날카롭게 세상을 둘로 나누는 직선을 그릴 수 없어 만화도 손을 댈 수가 없다.
나는 다시 만화를 그릴 수가 있을까요? 자를 대지 않고서도 그 빌어먹을 놈의 직선을 예전처럼 쓱쓱 그려낼 수 있겠느냐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독가스, 지긋지긋하고 끔찍스러운 이 독가스 냄새는 대관절 어디서 어떻게 꽃가루같이 풀풀풀 날아오는 것일까요, 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째서 하필 나 혼자만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정말이지 난 모르겠다니까요. 선생님
「불임기」
광주의 모습을 상징을 통해서 나타냈다. 어느날 저녁 아이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가을에는 더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 어느 날 나타난 두 아이는 혀가 잘려져 있었다. 이는 아이들이 사라지던 낱 어른들이 아이의 외침을 모른 척 했기 때문에 아이에게 그리고 어른들에게도 주어지는 형벌이었다.
「봄날」
죄책감으로 파괴되어 가는 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상주는 명부가 광주항쟁 당시 진압군에 의해 죽기 전 자신의 집 앞에서 도움을 청했다는 이유로 죄의식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기억하라. 너는 이제 벙어리 아들을 낳으리라, 아벨을 묻은 피에 젖은 네 두 손의 업보로서, 그 배신의 증거로서, 내 손수 네 아들의 혀를 자르리라, 그리하여, 몽툭하니 잘려 나간 네 아들의 입 속을 들여다보며 그 날의 네 죄악을 기억하게 하여 주리라. 심중의 진실을 전할 수가 없어서, 심장을 터뜨릴 듯 부릅 뜬 눈을 터뜨릴 듯 먹먹하게 다만 바라보며 제 가슴 팎만 맨주먹으로 두들기기만 하는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네 가증한 배신의 흔적을 확인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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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거리에 서면>
-- 소설 속에 나타난 광주민중항쟁의 상황과 전개
그해 5월이 지났을 때,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몇은 성직자나 그와 엇비슷한 구도자가 되기를 불현듯 작정하고, 더러는 자신들이 그때껏 지켜오던 가치관의 그릇을 비워 색다른 신념을 모색하기도 했으며... 또 몇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자잘한 소용돌이 갈은 것이었지만 변화는 내게도 있었다. 당시 나에겐 신이 없었다 우직하게 지켜왔던 신념도 없었다. 까닭이였던지 내가 택했던 변화에의 모색은, 감히 작가라는 것을 꿈꾸지는 못했지만, 글을 쓰고 싶다. 아니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따위의 생각을 어렴풋이 지폈던 것이다. 그즈막에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설이라는 것을 써보았었다. 그리고... 지금껏 쓴다는 것은 언제나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떠오를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자꾸 흘러 세월을 더할수록, 그해 5월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속에 암울한 장식을 거듭해주고 있는 속병 같은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부터, 난 그즈막의 내 자그마한 변화‥‥그러니까 그 문학의 당위성이라는 문제에 관해서 내 스스로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여 보곤 하는 것이다. --박호재 「다시 그 거리에 서면」
80년대의 작가들은 광주항쟁에 대한 원죄의식을 가지고 글을 썼다. 그러나 그 항쟁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창작은 대체로 신속하지도 충분하지도 못했다. 그 이유는 80년대 초, 그 항쟁에 관한 언급이 금지되었고, 그 항쟁을 목격하거나 체험한 문학인들은 그 출격을 벗어나지 못해 미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여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항쟁을 다룬 소설이라고 해도 그 항쟁 내부에서, 항쟁의 주체의 입장에서 쓴 것은 별로 많지 않다. 항쟁의 주변에서 맴도는 사람, 그 항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소설의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상황과 전개를 살펴본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미약하지만 이 자리를 통해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이해를 정확히 하는 한 편, 문학 작품 속에 광주가 어떻게 정상화되었는지, 그리고 한계는 무엇인지 짚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16일이었다. 어머니는 딸기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그 주택가로 갔다. 정원이 넓어 안쪽까지 들리려면 목청을 높여야 했다. 부자 동네에서는 딸기도 리어카에 끌고 다니는 것은 안먹는지 내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뛰어 노는 아이들도 없었다.
갑자기 이곳 저곳에서 대문이 열렸다. 고급 승용차들이 달려나왔다. 어머니는 벽돌담 밑으로 리어카를 밀어붙이면서 숨을 몰아 쉬었다.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열 몇 대가 지나쳤다. 차장 너머로 무엇에 쫓기는 듯한 얼굴들이 보였다. 모두가 미국인들이었다. 그들은 들쥐떼처럼 도시를 빠져나갔다.「깃발」
미국은 항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알고 있었나 보다.
항쟁은 18일에서 20일까지의 비무장 민중항쟁 시기와 21일에서 27일까지의 무장투쟁으로서 민중항쟁 시기로 나뉘어진다.
1) 5월 18일 : 민중항쟁의 발단이 된 학생시위
5월 17일 24시를 기해 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16일, 17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던 학생들은 당시의 정치상황을 먼저 파악하고 선도적으로 투쟁에 나섰다. 5월 18일 아침 학생들은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계엄군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살상용 특수곤봉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공수특전단에 투석으로 맞서던 학생들은 시민들과 연대하기 위해서 광주역에서 재집결, 불어난 시위대는 금남로로 진출하였다. 오후 4시 40분경 공수특전단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학생들과 시민은 많은 부상자를 내고 흩어졌다. 공수특전단은 흩어지는 시위대를 쫓아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난자하여 학살하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얼룩무의의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날뛰고 있었다(나중에 그들이 공수특전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공수 특전단들은 무조건 곤봉을 휘둘렀다. 머리고 가슴이고 닥치는 대로 내질렀다. 그들과 맞닿아 있던 군중들이 순식간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손을 뻗치는 사람에게 가차없이 대검으로 배를 쑤셨다. 누군가가 순분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골목길로 내달리다가 앞 사람을 좇아 건물 속으로 숨어 들었다. 서너 명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창 밖으로 군용 트럭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트럭이 멈추어 서자 이미 포승으로 묵은 사람들을 차에다 던져 올렸다. 올라온 즉시 옷을 찢어 대더니 등뒤를 개머리판으로 계속 난타했다. 어떤 공수 특전단원은 대검으로 청년의 등을 쑤시고는 다리를 잡아 질질 끌어서 트럭 위에 던졌다. 노인 하나가 끌려가는 청년을 뒤따르며 손을 저었다. 공수특전단은 한 손에 청년의 발을 잡은 채로 대검으로 노인을 내리쳤다. 노인은 피를 뒤집어쓰며 고꾸라졌다. 거리에는 일시에 살기가 맴돌았다. 시뻘건 칼날이 햇빛에 번들거렸다. 트럭 안은 던져진 시체들로 가득 들어 찼다. 트럭이 움직였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깃발」
영순이가 막 숨고 난 직후 담 위로 청년 둘이 뛰어 올라왔다. 한 청년이 미처 다리를 들어올리지 못했을 때 군화발 소리가 울렸다. 허리 반쯤만 보이던 청년이 으윽 소리를 내더니 담 밖으로 떨어졌다. 한 쳥년은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공수대원이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왔다. 붉은 얼굴에 눈은 살기를 번득이며 청년의 뒤꼭지를 향해 곤봉을 내리쳤다. 청년은 피를 토하며 나동그라졌다. 공수대원은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문 앞에서 공수대원이 소리쳤다.
"데모하는 년놈들은 모두 죽여 버린다."「깃발」
2) 5월 19일 : 민중항쟁의 발전
전날 있었던 공수특전단의 만행을 전해들은 시민들은 분노 속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오전 10시 금남로에는 3,000-4,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각목과 철근, 쇠파이프, 화염병도 등장하였다. 오후부터는 대중의 투쟁이 질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18일부터 19일 오전까지 수동적인 저항으로 공수부대에게 피해만 당하던 수세적 국면을 공세로 전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딴전만 부리고 있던 언론들이 시민의 공격을 받는다
그날 도시인은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 잠을 잃은 시민들은 자꾸만 도청으로 모여들었고 건물을 점거한 진압군들은 신호탄과 최루탄을 번갈아 쏘아댔다.
"최루탄을 쏘지 마세요 우린 맨주먹입니다."
한 여성이 확성기로 말했다. 저지선에 막혀 주위를 빙빙 돌던 사람들은 마치 후렴을 달듯 쿠울쿠울 기침을 했다. 다시금 예광탄이 밤하늘로 치솟았다. 별안간 시민들은 저지선을 넘어 도청 건물 쪽으로 나아갔다. 흡사 바람에 밀리는 물결 같았다. 우박 소리가 허공을 때렸다. 총소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바닥에 몸을 뉘지도 못하고 바리케이드에 걸려 있던 그 주검‥‥ 진압군들이 달려나와 시신들을 끌어갔다‥‥‥‥그 거리에 새벽이 기웃거렸다. 어미들은, 아낙들은 시름시름 노래를 부르고 남정들은 매운 눈물을 흘리며 화염병을 만들었다 . 「밤길 」
3) 5월 20일 : 전면적 민중항쟁으로의 발전
오후 3시 경부터 시작된 '금남로 전투'는 투쟁의 질적 비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후 7시 경 대형트럭 4대, 시내버스 11대, 택시 200여 대를 몰고 나온 운전기사들이 선두에 서서 무서운 속도로 군경 저지선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운전기사들의 '차량시위'로 운동은 결정적인 비약을 하였고, 잠시 후 전면적 공세기를 선회하게 되었다.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시위대와 계엄군의 혈전은 계속되었다. 농민, 노인, 국민학생까지도 시위에 참여하였다. 밤9시 이후 시위대는 관공서를 불태우고 신역, 도청의 계엄군을 집요하게 공격하였으며, 이들은 차량이나 휘발유 드럼통에 불을 붙여 저지선 돌파를 시도하였다. 계엄군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시위대의 필사적인 공격에 결국 새벽 4시 경 신역에서 계엄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며,도청을 제외한 광주 전역을 시위대가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속된 항전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부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신부님, 시민들이 차를 몰고 와요. 저것 좀 보세요."
함께 거리에서 밤을 새운 한 소녀가 말했다. 어디서 어떻게 획득했는가. 장갑차와 군용 트럭, 고속버스가 시민들을 태우고 천천히 굴러왔고 도청에서는 군헬기 몇 대가 이착륙하고 있었다. "해산하라! 요구 조건을 들어주겠다. 어서 돌아가라" 저공을 날던 경찰 헬기에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방송을 했고 그 즈음 이미 시민의 차는 저지선을 돌입하고 있었다. 아아, 햇덩이를 조각내던 LMG 소리 ‥‥ 그 소리에 떨어진 수많은 이삭들‥‥‥ 「밤길」
4) 5월 21일 : 자발적 무장투쟁시기
시위대는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여 전남도지사와 협상을 벌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최후의 결전은 피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결전은 백주에 M16 자동소총을 난사한 계엄군의 발포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백주의 발포는 시민군의 무장을 재촉하였고, 오후에 시민들은 최초로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각 지의 파출소. 탄광 예비군 무기고 등에서 획득한 무기를 실은 차량들은 오후 3시를 전후하여 광주시내로 진입했다. 이 무기는 즉각 시민들에게 분배되었다. 중학생에서부터 장년층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이 공수부대를 광주에서 몰아내기 위해 총을 들었다. 이러한 시민군의 조직화와 총공세는 마침내 계엄군을 패퇴시키고 말았다. 오후 5시 30분경 계엄군은 총퇴각을 결정하고 도청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한 것이다. 5월 21일 저녁 8시, 드디어 시민군은 광주시 전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하였다. 더욱 고무적인 일은 무기 획득을 위해 광주를 빠져 나온 차량 시위대들의 호소로, 시민군에 의한 도청 탈환이 있었던 그 시간부터 전남 각지로 항쟁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는 것이다.
"드디어 놈들이 발포를 시작했어."
모두들 경악했다. 백주의 공식적인 총기발포는 이제 최후의 결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기 알려주는 사실이었다.
"평화적 해결은 끝났군."
하면서 윤강일은 초조한 기색을 내보였다. 그들은 도청으로 갔다. 지금까지의 낭만적이고 들떠있던 분위기가 일시에 사리진 듯했다. 도청 방어선과 시민들 사이에 총을 맞은 시체가 서 너 구 쓰려져 있었다. 아직도 죽지 않고 아스팔트 위에서 끔틀거리고 있는 사람을 구원해내려고 뛰어가는 시민들이 있었다. 적의 조준사격은 그들 역시 사살해버렸다. 그리고는 연발로 요란하게 위협사격을 가했다. 계엄군쪽에서 시체의 다리를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깃발」
신부는 수습대책 위원회의 한 사람으로서 도청 서무과로 향했다. 막 지방에서 돌아온 트럭이 광장에 세워졌고 거기서 태극기와 카빈을 둘러멘 요셉이 내렸다. 땀과 먼지로 코 언저리가 새까매진 요셉이 싱얼싱얼 웃으며 뛰어왔다.
"신부님, 정말이군요. 화순에서 도청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거든요."
"그래, 그들은 어제 저녁에 철수했단다."
"우린 티엔티를 가져왔어요. 실탄도 무기도 아주 많아요." 「밤길」
"헌데 갑자기 무엇인가 내 종아리를 이물스럽게 스치며 풀썩 가라앉았어요. 언뜻 내려다보니... 흙때가 묻은 어느 청년의 종아리였어요. 걷어붙인 바짓가랑이 사이로 피가 흐르기 시작했어요. 누군가가 소리쳤어요. 유탄이다!... 머리에 띠를 두른 그애는 고등학생이었을거예요. 탈취한 장갑차에 그냥 우뚝이 선 채, 계엄군의 진지를 향해 돌진해 버렸어요. 시민들이 환호하고 아우성을 쳤어요. 하지만 그애는 얼마 후 태극기에 뒤덮여 되돌아왔어요. 태극기가 붉은 비단처럼 온통 선홍색의 핏물로 물들어 있었어요."「다시 그 거리에 서면 」
5) 5월 22일 - 5월 25일 : 수습대책위원회의 지도 시기
죽음을 무릅쓴 그간의 항쟁, 그리고 항쟁의 결과로서 광주시 전역의 장악은 광주 시민에게 '시민공동체'라는 의식을 심어주었으며, 새로운 광주의 건설을 위한 의욕에 가득차게 하였다. 그러나, 일반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수습위원회는 투항파적 경향을 강하게 띠면서 무기 반납에 의한 사후 보장만을 사태 해결책으로 주장하였다. 결국 이들은 시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여 시민들의 비난을 받았고, 결국 5월 26일 새로운 항쟁 지도부가 이들을 대체하게 된다.
도청 안마당 한구석에 시체들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시체는 이미 그 형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총상을 입거나 곤봉을 맞은 시체는 머리와 얼굴이 짓뭉개져 있었고, 대검으로 난자된 시체는 붓거나 부패해 냄새가 진동했다. 눈알이 튀어나온 시체, 팔이 떨어져 나간 시체, 목이 잘려서 몸과 분리된 시체, 유방이 잘렸는지 가슴께가 너덜너덜한 여학생도 있었다... 총을 어깨에 맨 남자가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리도 도청을 지키려고 왔어요. 어떤 일이 좋을까요?"
"글쎄요. 지금 무기 반납 문제로 싸우고들 있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댁들이 알아서 필요한 부서를 찾아보도록 하시지요."「깃발」
"아무도 도시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도시로 통하는 모든 길은 차단되었어요. 도시는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고갯마루 산에 진압군들이 쫙 깔려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막 고개를 넘어가려고 하는데 총알이 쏟아져서 허겁지겁 뛰 내려오는 길입니다.「일어서는 땅」
6) 5월 26일 - 5월 27일 : 항쟁 지도부의 지도 시기
항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해 온 투쟁파와 청년운동가들은 항쟁을 지도하긴 위한 임시 지도부를 조직하고, 대학생을 조직화하여 결국 수습대책위원회의 투항파를 몰아내고 새로운 항쟁 지도부를 5월 25일 발 10시에 결성하였다. 그러나 항쟁 지도부는 자신이 계획한 것들을 실행에 옮겨 보지도 못한 채 5월 27일 새벽 3시경 계엄군의 진입에 의해 그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계엄군은 한국전력 앞에서 진을 치고 더 이상 진격해 들어오지 않았다. 재야 인사들로 이루어진 수습위원들이 계엄군 탱크 앞 도로 위에 들어 누웠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시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항쟁 지도부는 계엄군의 일시 진입으로 뒤숭숭한 분위기였지만 어느 정도 체계를 정비하고 있엇다.「깃발」
계엄군 진입의 소문 때문인지 시민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언니, 저 벽보 봐"
순분이가 가리킨 곳에 큰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미국 항공모함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
우리의 우방인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는 나라입니다. 광주의 민주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지금 부산에 미국 항공모함이 정박 중에 있습니다. 더 이상 광주는 피를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민들은 동요하지 마시고 도청에 집결합시다.
시민들은 그 대자보를 보고 안심하는 눈치였다. 자유의 여신상을 상표로 하는 나라를 떠올리며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계엄군은 항복 권유의 최후통첩을 방송했다.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현재 포위되었다. 열 셀때까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하나.
김두칠은 총을 서치라이트 쪽으로 조준했다.
두울.
숨막히는 순간. 총을 잡고 있는 순에 힘을 주었다.
세엣.
네엣.
그때 도청 본관 창문에서 한 시민군의 목소리가 잠시의 정적을 찢었다.
"개자식들아."
동시에 총소리가 계엄군의 써치라이트를 박살내었다. 주위는 다시 캄캄해졌다. 동지들과 더불어 김두칠은 방아쇠를 당겼다.「깃발」
작전개시일 하루 전에 만복은 사복차림으로 미리 광주 시내에 투입되었다 도청 주위에 잠입해 있다기 도청 지하실에 있는 폭발물의 뇌관을 제거하고 도청 광장 건너편 빌딩의 옥상에 설치된 LMG기관총을 파괴하라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사복 특공조는 되도록 전남·북 출신들로 구성되어서 폭도들과 대화를 하더라도 표가 나지 않도록 준비했다.…만복 일행 네 명은 도청 앞 광장에서 집회 중인 폭도들 틈에 섞였다. 폭도들은 총을 멘 젊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폭도랄 것도 없었다. 말이 폭도지 어린 여자에서 늚은 할머니까지 온갖 사람이 다 모여 있었다. 만복은 그들을 보며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계엄령하에서 아무 소득도 없는 데모를 끈질기게 하는 무식한 사람들이 이들 말고 또 있을까 싶었다. 그것도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을 탈취하고 군인들을 죽여가면서까지 데모를 하다니, 도대체가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건지 어머니나 동생 만수가 끼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영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만복은 불안하게 집회를 바라보았다. 젊은 여자가 단 위에서 선동을 하고 있었다. 최후의 일인까지 싸워서 기필코 민주화를 쟁취하고, 우리들의 광주를 사수하자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쉬지 않고 지꺼려 대고 있었다. 만복은 그 여자가 가소로웠다.「십오방 이야기」
황폐할 대로 황폐한 거리와 공공건물 사이사이에는 폭도들이 총을 메고 배회하고 있었다. 만복은 아까 지나온 금남로를 생각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몸서리 쳐지는 파리떼가 지금도 눈에 아른거렸다. 금남로를 지나올 때 박살이 난 공중전화 박스가 뒹굴고 있는 아스팔트 위에 핏자국이 여전히 흥건하게 남아 비릿한 피냄새를 맡고 모여든 쉬파리떼가 그 위에 군청색 등짝을 빛내며 달라붙어 피를 빨고 있었으며 바로 그 한뼘 위에서는 더 많은 파리떼가 끊임없이 윙윙거리며 앉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자정이 넘자 도청 안에 「폭도들은 하나 둘 씩 아무렇게나 엎어져 골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곧 새벽 한시를 기해 진압 작전이 개시될 예정이었다. 반항하면 무조건 죽여라. 이것이 작전명령의 전부였다. 만복은 지하실로 무사히 잠입해서 폭발물의 뇌관을 제거했다… 본격적인 진압작전이 개시되었는지 시 외각 지대에서 간간이 드르륵 드르륵 하는 식스틴의 자동 사격음이 들려왔다. 전일빌딩도 도청처럼 폭도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십오방 이야기」
누구의 시계에선가 5시를 알리는 발신음이 삐삐 울렸다... "장갑차가 오고 있습니다. 최후의 순간이 오면 차라리 티엔티를 폭발시켜 전원 자폭합시다!"... 결국 무장한 청년들은 남고 17명의 수습위원들은 전원 입구로 나갔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앞으로 앞으로 걷기만 했다. 해가 떠올랐다. 시민들이 뒤를 따랐다. 처음에는 한둘에서 수십, 수백 명... 마치 자석에 끌린 쇳조각 모양 그들은 겹겹이 고리를 물었다... 2층 창가에서, 옥상에서, 인도에서 기관총은 숨을 죽이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는 묵묵히 나아갔다. 포문을 뻗치고 있는 장갑차를 향해, 바리케이트를 향해...「밤길」
"그럼 시간을 주시오, 시간이 필요하오."
"오늘밤 열두 시까지 수습하시오. 이게 최후 통첩이오."
... 장군이 지프를 내 주었다. 지프가 공단 입구 쪽으로 갔다. 파헤쳐졌던 길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시외도로도 개통되오 있었다.
"시민들이 야채를 구입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도로를 보수했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운전병이 말했다. 신부는 공단 입구에서 내렸다. 시민들은 주의 깊게 왕래했고 가끔씩 택시도 지나 다녔다. 군의 작전을 위해 도로를 복구했구나. 그렇다면 그 최후 통첩은 밀 예정된 시간? 「밤길」
"줄초상도 그런 줄초상이 없지. 산 사람은 다 잡아가구 관에 담긴 시체들이 무슨 사과궤짝처럼 늘어져 있더라구"
"그러고도 시가지 쪽 주택가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젊은 놈들은 다 잡아 간다지 않소"「다시 그 거리에 서면」
"누나 이번 진압 작전에 붙여진 이름이 뭔지 알아?"
"……"
" '화려한 파티'래... 그게 그날 새벽의 작전명이야."「다시 그 거리에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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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도 지는 것이 아닐 수 있어. 그래도 이런 엄청난 피의 대가로 알게 되는 것이 슬퍼>
--광주 사람들의 삶의 태도와 인식내용
소설이 본래 사건의 추이에 따른 작중 인물의 행동이나 의식의 변화를 보여주지만 광주항쟁을 소재로 하는 대부분의 소설은 광주항쟁을 전후로 의식이 성장하는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다. 특히 그러한 변화는 항쟁주체 세력이었던 민중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가 다룬 열 편의 소설 가운데 「다시 그 거리에 서면 」「깃발」, 「십오방 이야기」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홍희담의 「깃발」에서 순분은 항쟁의 초기에는 그다지 각성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5월 18일, 항쟁이 시작되었는데도, 예전과 변함없이 '피의 일요일'에 친구들과 함께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노닥거린다. 이러한 순분의 태도는 당시 항쟁의 초기에는 학생과 지식인이 주도가 되었지 노동자들은 소극적이고 항쟁세력의 주변부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날은 18일, 피의 일요일이었다. 순분이가 다니는 야학은 일요일엔 예배를 보았다. 예배를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좀 노닥거리다가 버스를 탔다. 네 시쯤이나 되었을까. 버스가 공용 터미널 부근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나 항쟁을 거치면서 그녀의 태도는 조금씩 변화한다. 모든 문제가 자기 자신이 개인에서 혹은 가정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벗고 집단, 노동자 집단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아가 자신의 그런 위치에 대해서 자랑스러움까지 느낀다.
순분 : 언니, 난 그래, 이 며칠 동안의 해방의 기쁨만으로도 일생 동안 어떤 험담한 일을 당하더라도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애.
영순 : 선생님. 우린 그렇지 않아요,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철순 : 난 노동자라는 게 자랑스러워.
그러나 순분의 노동자로서의 각성은 지식인에 대한 반감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지식인들을 포용할 줄 안다. 그래서 깃발의 3장 부분은 의미가 깊다. 윤강일이 수배자로서 미숙이의 자취방으로 숨어들어갈 때 순분을 비롯한 노동자들은 따뜻하면서도 세심하게 보호를 해준다.
선생님 돈도 없을꺼야. 잠수함 타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니? 너희들 돈들 다 털어 봐.
박호재의 「다시 그 거리에 서면」에서 지숙은 소시민의 안정을 꿈꾼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대대로 이어져 오는 가난과 그것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자신의 그런 처지에서 비롯된 생각이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은 모두 제 이익만 챙기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사코 자신이 좋아하는 달력을 그곳에 걸어야 되겠다고 형석과 지숙은 괜한 각축전을 벌였던 적이 있었다. 지숙 자신이 결국 우겨내고 말았지만, 물론 지금의 달력이 꼭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갈라터진 가뭄의 들판 위에서 지치고 절망적인 표정을 한 어떤 사내의 모습이 짙은 먹빛으로 양각이 되었던 그 판화달력이 그녀에겐 몹시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여러가지 께름칙한 몽상들을 자가증상처럼 일깨우곤 했기 때문이었다. 들일을 끝내고서 저물어 가는 사립을 마른 검불처럼 들어서곤 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인 듯도 싶고, 먹장구름이 내려앉던 날이면 오밤중에 무작정 대문을 밀치고 들어와 산손님이니 지서 순사니 따위의 헛소리로 어둠 속에서 시퍼렇게 늘어놓다가 아내 정신이 든듯 허청허청 산마루를 내려가시곤 하던 당숙의 모습인 듯도 싶었다.
그렇게 매사를 밀쳐 버리고 새롭게 피어나는 생각이래야… 나날의 삶 속에서 갈구해 마지 않던 안도에 찬 소망… 고작 그것이었을 뿐이니까.
그러한 지숙의 삶에 광주민중항쟁이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다시 말하면 좋아하던 남자와 연락이 끊기고 형석은 시민군으로 항쟁에 참가하고 형수는 방위병으로 진압측에 동원되자, 자신의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눈을 뜨면서 지숙은 비로소 광주항쟁의 정당성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지숙은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신도 모래와 같은, 아니 모래보다 더 잘게 흐트러지거나 밀려다녔을 뿐인 구경꾼이었다는 것을, 또한 한번도 고개를 들어 그 파도의 깊은 어둠의 속을 노려보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단지, 형식으로 인하여 분노하고 슬퍼할 뿐이었음을 절감했다.
화려한 파티‥‥ 화려한 파티‥ 지숙은 그것을 반복해서, 오래도록, 입 속에서 되굴려 보았다. 가슴속 저 밑바닥에선 그날 새벽에 도시 전체를 짓이겨대던 수천만 발의 총소리가 두두두두두∼∼ 되살아났다. 시민들의 비명소리 아우성소치가 군화발에 뒤섞여 생생하게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녀의 온몸이 갑자기 부르르 떨려 왔다. 문득 견딜 수 없는 적개심이 살 속 뼛속 마디마디에 솟구쳤다. 그것은‥ 그야말로 천추에 길이 새겨질 살육의 파티였다
정도상의 「십오방이야기」는 말단의 가해자도 또한 피해자임을 보여주면서, 공수부대였던 만복이의 의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처음 감옥에 들어왔을 때 만복은 운동권의 구호를 들으면서 실현불가능하고 어리석은 구호라며 비웃기도 하고,광주현장에서는 계엄령하에서 데모를 끈질기게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아무 소득도 없는 짓을 겁도 없이 한다며 저렇게 무식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를 생각한다. 하지만 감옥 안에서 자기와 같은 잡범들이 광주에 대해 내리는 평가와 노래를 들으면서 차츰 그의 의식에 변화가 오고, 만수를 죽인 것은 바로 데모하는 놈들이라는 생각을 깨고 운동권인 원태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광주현장에 참가함으로써 의식의 변화가 온 것은 아니지만, 동생의 죽음으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광주의 실상을 파악하게 됨으로써, 주위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는 공통점을 두고 눈여겨볼 만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변화가 급격히 이루어지고 변화의 계기 또한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주위의 여론에 따른 것이기에 설득력이 조금 떨어진다는 점이다.
2
광주항쟁을 이야기할 때 항쟁의 주도 세력이 누구였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는 중요하다.
대략 71%가 무산자 계급이었다. 지식인계급에 속하는 대부분의 숫자는 예비 검속으로 붙잡혀 간 사람들이었다. 붙잡혀 가지 않았다면 모두 투쟁에 가담했을까. 대답은 미지수이지만 운좋게 검거를 모면한 사람들의 행동으로 기준해본다면 가정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투쟁에서 이탈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산자계급의 퍼센트는 더 높아질 것이다. 80퍼센트, 90퍼센트.
이와 같이 「깃발」에서는 항쟁의 주체세력이 민중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전두환 일당과 미국의 작전권 행사에 의한 공수부대 투입으로 해서 광주 일원의 남녀노소를 차별하지 않는 학살과 체포의 만행이 저질러질 때 광주민중항쟁은 학생들로부터 전개되었으나 끝내는 거의 뿌리뽑힌 부랑노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항쟁 초기의 주역이었던 학생들은 싸움의 중심부에서 썰물처럼 이탈해 버린다.
"낭중에 광주사람들 야그 드러봉께 살벌했다등만. 첨엔 학생들이 시작했는디, 뒤에 갸들은 내빼고 때밀이, 식당 종업원, 구두닦이, 운전수, 공돌이, 구멍가게 주인 같은 야들이 총을 잡고 광주를 지킨다고 싸웠다등만, 워 니기미 뒤져뿌린 놈만 불쌍하지 누가 알아주나"
"때밀이 겉은 야들이 왜 죽기 살기루다 싸운지 아냐, 학생들은 배운게 있어농께 그거 안해도 지 목구녕은 채울 수 있응께 발라 버린 것이고, 갸들은 못 가진 한도 있고 데모 하나 안 하나 때밀이고 공돌이는 공돌일께 싸우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갸들이 의리 하나는 끝내중께"
이렇게, 항쟁이 '과격화'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부각되고 또 끝까지 투쟁한 것은 노동자 등 기층 민중이었다. 특히 5월 22일 이후 수습대책위원회에서 투항파적 경향을 강하게 띠면서 무기를 반납하고 뒤의 사후 보장을 요구하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자, 수습대책위의 지도층과 항쟁의 궁극적인 실체였던 민중 사이에 대립이 생긴다.
무기 반납 문제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열띠게 논쟁하고 있었다. 강경파들은 대개 룸펜 계층이나 노동자들이었다.
"무기 반납하자는 놈들은 배신자와 같은 거요 "
한 노동자가 총대를 책상 모서리에 탁탁 부딪히여 말했다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학생수습대책위원회'들른 온건파였다. 그들 증의 한 명이 말을 받았다.
"당신들은 또 피를 흘리기를 원하는 거오?"
"누가 피를 흘리자고 했소? 피 흘린 것을 헛되이 하지 말자는 말이죠.
강경파.
"무기를 갖고 있는 한 피는 흘리게 마련이오."
온건파.
"무기를 내놓는다고 적들이 우릴 그냥 놔둘 것 갈아요? 우린 적을 안 믿어요. 적은 적입니다."
강경파.
"이런 식으로 대치하는 한 수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온건파.
"수습 수습, 자꾸 그러는데 그 말이 뭔 말이오. 도청을 내놓자는 말 아니오? 어떻게 찾은 도청인데‥."
강경파.
"무기를 반납하면서 우리에게 유리한 고지를 따내면 되지 않습니까?"
온건파.
「깃발」은 야학 선생 윤강일이 탈락하고 대신 여성노동자 형자가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는 이야기를 통해 항쟁주체로서의 노동자를 강조하고 형상화했다. 하지만 그들 주변에 있는 다른 계급의 의지와 양심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실제와 다르게 일용노동자나 때밀이 등 룸펜 프로를 비롯해서 지식인의 역할을 아예 축소시켜 놓고 있다. 비록 지식인들은 일련의 투옥사태와 해직·감시의 수난을 제외하면 많은 사람들이 항쟁의 현장에서 멀리 도피하고 말았지만 사실 광주민중항쟁에서 민중적 지식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항쟁 초기에만 지식인들이 활동했다 하더라도, 당시 항쟁의 도화선의 역할을 한 그들의 활동은 묻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광주항쟁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건드리기에 참 미묘하다. 청년학생, 지식인들이 무장투쟁기에 대거 이탈하였기에 지식인들을 개량주의나 투항주의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 운동의 현실적 요구를 심각히 고려하진 않은 탁상공론일 때, 이것은 자칫 감상으로 떨어지기 쉽다.
3
5.17쿠데타와 광주학살은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고, 미국을 있는 대로 보는, 나아가서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영원한 '우방'으로 감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던 미국이지만, 군부세력이 광주에서 저지른 수많은 만행과 무참한 학살을 묵인방조한 사실과 광주학살을 발판으로 세워진 신군부독
희망 뿌리 내리기
고려대 교육문예모임
1.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들의 두려움이었다
2. 피흘리지 않고서야 세계를 획득할 수 있겠는가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배경과 성격
3. 우리가 읽은 소설은요
4. 다시 그 거리에 서면
--소설 속에 나타난 광주민중항쟁의 상황과 전개
5. 져도 지는 것이 아닐 수 있어,
그래도 이런 엄청난 피의 대가로 알게 되는 것이 슬퍼
--광주사람들의 삶의 태도와 인식내
6.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 이 원고는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육문예모임이 지난 1995년 12월 4일 '광주민중항쟁과 문학'을 주제로 개최한 학술제에서 발표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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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들의 두려움이었다>
어째서 과거를 들추어내는가?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가 아닌 고통스러운 역사를 들추어내서 분석하고 논쟁하는 것은, 현재라는 것이 단절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의 삶을 규정하고자 하는 까닭도 있겠지만,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역사라면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한국현대사 최대 비극을 '80년 5월 광주'로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세계사나 한국의 근현대사를 볼 때, 하면 당장은 큰 손실과 위해가 오고 오그라들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커지고 뭉쳐져 강력한 힘으로 성장하여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단순히 패배로만 그치지 않을 역사적인 분수령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인 것이다. 우리는 5월을 창출한 군부세력의 폭력성과 만행에 대해 분개할 수 있지만, 그전에 어째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지 이성적인 눈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과거의 암울한 비극이 오늘이라는 자리에서 힘을 발하는 빛이 된다. 흔히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이성적인 읽어냄으로 현실을 다시 사고하고 미래를 아름다운 것으로 꿈꾸게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을 통해서 역사를 읽어낸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회과학은 명료하고 간결하다. 처참한 개인의 역사도 사회과학의 도표에서는 그저 네모 반듯하게 정확하지만, 딱딱하게 드러날 뿐이다. 문학도 때로는 사회과학을 흉내낸다. 하지만 그것이 통념을 깨고 그러한 형식을 취하게 된 까닭을 따지고 들어가 살펴보면, 이제는 그 근거가 정서를 남기고 가슴을 울리게 되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한계를 극복하여 추상적인 정서로부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정서를 전해주는 일을 바로 문학이 한다. 문학은 인간역사의 많고 많은 사건 중에 한가진 사건만을 다루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 중에 어느 한 인물에 국한하여 쓰여지기도 한다. 방대한 객관적 상황에서,생략과 과장이라는 예술적 덧칠을 하는 것이다. 삶의 진실을 감추기 위한 생략과 과장이 아니라, 진실에 가깝게 다가서기 위하여 풍부하고 구체적인 한 단면으로 생의 모습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문학에서는 단면들이 모여 현실을 총체적으로 드러낸다.
문학은 고통스러워한다. 인간이 억압받는 상황에 대해서, 그것을 모르고 무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읽는 자로 하여금 반성을 강요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것과 싸울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이런 수모와 아픔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해준다. 인간은 이래야 하고 그럴 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느끼게 한다. 문학이 사회의 여러 분야에 공급될 때 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이론과 정서의 확대는 때때로 정치적 최고형태에 이르는 것으로, 문학은 이미 정치고 정치이상이다. 항쟁직후의 그 살벌한 파쇼의 공포분위기가 표면상 유화국면으로 되지 않을 수 없는 80년대 상반기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사회현실의 전면에 나선 것이 여러 운동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문예선전이었다.
아직, 광주문제를 다룬 소설작품 가운데서 이렇다 할만한 것은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소설은, 아프다고 소리만 질러도 어느 정도는 이루어지는 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에 가서야 비로소 항쟁을 다룬 소설이 등장하는데, 이는 소설생산의 조건자체가 일정한 인식과 서술기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작가가 항쟁에 재빨리 부흥할 수 없는 실제 사정도 작용했기 때문이지만 소설작가들이 항쟁에 대해 사명을 철저하게 짊어지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항쟁문학의 범위를 가르고 선정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자체 소재를 가진 작품에만 국한하기에는 항쟁에 대한 세계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였다. 정도상의 표현처럼, 광주는 서울이고 부산이 될 수 있다. 전제와 폭압을 격파하고 새 질서를 창조하려는 민중의 뜨거운 피가 흐른다면 어느 곳이고 광주가 될 수 있고, 이것을 표현했다면 소재야 어떻든 간에 항쟁문학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룰 수 있는 분량의 한계로 인해서「광주민중항쟁과 문학」은 소재로 가르는 조심스러운 선정을 해야만 했다.
사회과학이나 문학 그 어느 것도 독립하여 홀로 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겨레 신문과 그 신문에서 박재동 만화가 갖는 위치를 생각해본다. 무슨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 사회에 어떤 파급력을 지니는지 객관적이고도 세부적인 상황을 알지 못하고 만화를 보면 어리둥절하게 된다. 일단 상황을 정확히 꿰뚫은 후에야 만화는 진정한 그 생명력을 발휘한다.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상황의 인식없이 그저 그 소재를 다룬 문학작품 읽기는 다소 위험하다. 작품 속에 부분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한 인물 한가지 사건에 국한해 사고하지 않고 그 인물이 발딛고 서있는 사회상황, 그리고 그 사건을 연유케 한 역사적 배경까지 총체적으로 그리고 다각적으로 읽기 위해선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문학을 다루기 이전에 사건의 발발배경과 성격을 정확히 제시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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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흘리지 않고서야 세계를 획득할 수 있겠는가>
-광주민중항쟁의 발발 배경과 성격
파시스트 권력과 분단체제의 성격을 인식하는데 광주 학살은 아주 훌륭한 교사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광주이후 국민대중은 현재의 권력을 낳게 한 국내외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2.12부터 5.17까지 정치적 공간은 군부와 유신온존세력, 학생·재야기층민중으로 구성된 민주화운동세력의 두 가지 입장에서 다르게 해석된다. 전자에서는 군부세력내의 일정한 실세가 제도권 내로 전화되어가는 과정 즉, 부마항쟁으로 표출된 민주화의 급격한 진출을 저지, 무마함과 동시에 지배집단 내부의 분열과 경쟁을 조정, 통제함으로써 가능한 한 신속하게 새로운 유신대체권력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후자에서는 지배체제의 과도기에서 나오는 불안정성을 이용해 민주화 활동을 유도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된다. 그러나 민주세력에게 상당히 부정적이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유신체제라는 것이 한 개인의 권력욕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의 죽음 이후에는 조금은 당연하게 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환상이 있었다. 12.12쿠테타 상황이나 그 주동자의 성격, 미국의 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단면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다. 민주화 운동세력 중 정치정세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평화적 방법인 선거를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군부를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세판단을 했다. 재야 운동세력은 제도권 정당들보다 원칙적이고 강경한 자세였으나 자체투쟁역량의 부족 때문에 지속적으로 그들의 주장을 펼치진 못하였다. 그나마 실제적인 운동역량을 갖고 있던 학생들도 학생자치조직의 건설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학원자주화투쟁에 매진함으로써 유신온존세력을 대하여 적극적인 대응을 못하였다. 이와 같이 재야운동세력, 제도권정당. 그리고 학생운동세력들의 인식차이는 각각 운동방향에 대해서 분열양상으로 나타나 유신세력을 일소할 수 있는 연합전선을 구축하지 못하였다.
1980년 5월에 좌절한 것은 고립분산적 악전고투와 엄청난 희생을 치룬 광주민중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세의 지원이 없이는 하루도 존속할 수 없는 군부독재와 매판 독점 측이 더욱 극심한 좌절을 겪었을 것입니다.
12.12쿠데타 세력은 박정희 체제가 양성한 박정희의 분신이었다. 박정희는 쿠데타의 정당성확보를 위해 외세와 손잡고 종속적인 경제발전을 추진하면서 민중을 배제한 국가성장을 이룩했다. 숫자상으로는 고도성장을 이룩했지만 우리 민중들이 흘린 땀의 댓가는 미·일 독점 자본이 엄청나게 챙겨가고 국내 매판자본들이 먹어버려 민중들은 여전히 빈곤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경제 압박에 따라 각계 각층의 민중운동은 필연적으로 고양되었는데, 권력유지를 위해서는 다시 정치적인 압박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유신 그리고 이후의 긴급조치 1호 발동은, 반민족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반민주적일 수밖에 없는 한국 극우세력의 단면이었다. 그 계보를 신군부세력이 잇는다. 그들은 새로운 억압체계의 확립을 위한 계기로써 광주를 '선별적 희생 양'으로 삼았다
광주항쟁을 통해 우리 민족민주운동은 민주화운동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조직화된 세계적 지배구조라는 총체적 시각을 획득하였고 이것은 반민주 자주화 운동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배구조는 친미반공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것은 한국전쟁에서 확립됐고 이후의 정권의 교체가 있어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제는 분단체제하에 있는 한국에서 인주화 문제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민족문제나 계급문제와 연결될 때 지배질서의 본질적 모순에 부딪치게 되면서도 냉전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조직화된 적의 실체를 인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1970년대까지 미국을, 독재정권을 견제하는 자유민주주의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실상 미국의 대외정책 전략적 기조는 우파정권의 지원을 통한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인 이익을 보호하고 세계적 차원의 미국 중심적 지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우파독재정권을 위협하는 민주운동의 성자, 좌익세력을 포함한 민주운동의 발전을 저해하는데 있다. 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외피로 우파독재정권을 감싸주고 정당화하면서 친미우파정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특정시기에는 친미우파독재정권을 견제한다거나 온건화시키는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카터 미행정부는 박정권에게 민주화와 인권의 회복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탄압상은 더욱 강해지기만 해서 이를 이유로 주한 미군철수를 계획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그것도 민중운동의 발전으로 지배체제가 극도로 위태롭게 되는 시기가 아니고는 본래의 기조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12.12부터 5.17, 그리고 광주학살까지 미국은 간접적으로 의사나 의지를 전달했다. 사실 12.12쿠데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정치적으로 미국의 이해를 관철시킬 수 있는 안정적 정권이 필요했고, 국민의 원성이 높은 박정희를 제거하는 대신 유신체제를 적당히 변형하고자 할 때 쉽게 떠오른 것은 군부등장으로 인한 체제의 지속이었을 것이다. 양김이 집권할 경우 그들이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것은 반가운 것이지만, 민주화운동에 적극적 제동이 불가능하리란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는 광주학살을 방조, 묵인했다는 이유 함께 그토록 '증오해마지 않던'군부정권을 미국이 계속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것에서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깼다. 미국의 실체에 대한 이런 인식이 처참한 광주학살이후에야 가능했던 것이다.
왜 광주였는가?
이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 그중 하나는 가해자인 군부에서 원인을 찾는 것으로 군부의 광주에서의 과잉진압, 나아가 광주 진압을 목표로 한 '사정계획'이 5.19을 야기하였다는 것이다. 5.17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김종필과 김대중이 구속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야당 지도자 중 김영삼 신민당 당수는 제외되고 호남인 김대중만 구속되었다는 것이다. 신군부는 민주화 진영을 분열시켜 그 힘을 약화시켜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재야 민중세력과 좀더 직접적인 연계를 유지해왔고 박정희 정권의 오랜 공작에 따라 국민들 사이에 급진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김대중이 더 효과적이었다는 것이다. 김대중 구속이 광주 호남인들의 소요 유도를 위한 계획적 전략이라고 보기 어렵더라도 18일 오후에 '계엄령 철폐', '김대중 석방'의 구호를 내건 산발적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에 들어가게 되었고 민중항쟁을 촉발하게 된다. 광주의 상황을 보고받은 그 단계에서 의도적인 목표로 광주가 지목된 것이다. 18일 최소한 서울지역의 경우 영등포 일대 등지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광주식의 잔혹한 대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광주지역의 민중적 역량 등 주체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간의 소외와 오랜 민중운동에서 축적된 전통이 광주 민중항쟁을 야기시켰다는 말이다. 광주시민의 민주화욕구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회, 경제적 처지와 연결이 된다 과거부터 비옥한 곡창지대인 호남은 '풍요 속의 빈곤', '상대적 빈곤'을 경험하였고 봉건적 모순의 응집은 한국근현대사에서 호남을 한국민중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게다가 5.16쿠데타 이후 TK정권에 의해 수출주도형 산업화가 시작되자 호남은 다시 '한국의 제3세계'로 낙후하게 된다. 전라도의 농업지대로의 특화, 농업과 공업의 불균등발전에서 오는 피해 등이 이 지역 주민에게 많은 부분 전가되면서 농민만이 아니라 전지역 주민에게 불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산업화과정에서 농업의 위축에 의해 이농을 강요당하고 지역 내의 산업화부진으로 다른 지역에서 노동자로 취업하여 도시의 저 소득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런 경제적 정치적 소외의식 속에서 이 지역 대중은 10.26이후 지역편중과 차별에서 오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민주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스럽게 김대중이라는 상징이 존재했는데, '구속'이라는 상황이 벌어지자 격렬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쟁이 발발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김대중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인정하더라도 광주시민의 김대중에 대한 환상은 짚고 넘어가야 할 듯 싶다. 기회주의적이고 당리당략적인 기성정치세력은 진실로 호남민중들의 비원을 성취시키는데 한계가 있다.
결론적으로 군부의 민중세력이 정면충돌한 5.18민중항쟁은 군부의 전략적 선택, 김대중 변수, 광주의 민중성이 결합하여 일어난 것이다.
80년 5월 광주 '남파된 북괴간첩과 불순분자들'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의 소요로부터 한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된 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인 복권을 이루었다. 광주항쟁은 3.1운동 이후 한국사에서 전개된 다른 항쟁과 비교했을 패 독특한 위치를 가진다. 유신체제 아래서 박정희가 양성한 분신들의 권력장악에 맞서 격렬히 일어났지만 결국 관료적 권위주의 내지는 종속적 파시즘체제로의 복권이 이루어졌음을 상기해볼 때 외형상 소득없는 패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패배의 한 원인조차 분단상황에 연유한 국가에 억압적 통치구조에 의해서 기층민중운동이 발달하지 못한데서 찾을 수 있다면 분단체재 40년의 시점에서 그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의 단절과 한국전쟁 이후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던 진보적 민중운동의 복원을 가져다 주었다. 민족사의 과업이 민주화, 자주화, 통일이라는 큰 줄기로 가닥 잡혔고 주체세력 형성도 윤곽을 드러냈다. 1987년 6월 항쟁-7,8,9월 노동투쟁과 그 이후의 상황은 이의 질적, 양적 수준의 변화를 보여준다.
광주항쟁의 전개과정이나 성격(민중중심의 항쟁)은 소설작품과 함께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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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은 소설은요>
살아 있는 자들은 정치적이다. 아무리 혼자 무력감에 빠져 있어도 계기가 주어지면 정치성의 면모가 드러난다. 정치적 입장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올바른 정치적 입장은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결정 짓는다. 광주는 지금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싸움의 격력함치고는 건물은 그리 많이 파괴되지 않았다. 꼭 없애야 될 곳만 불태워 없앴다. MBC, 세무서, 노동청, 어용 노조 민중의 기본권이 박탈된 곳만이 정확하게 파괴되었다. 이 사실은 이 항쟁이 절대로 무정부주의자들이나 폭도들의 싸움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 준다. 도청을 불태워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청은 건재하다. 그것은 우리들이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이다. 진정한 민주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표현이다. 정치의 현실성을 획득하겠다는 행동이다. 홍희담,「깃발」
문순태, 「일어서는 땅」
이 작품은 아들(토마스)을 잃어버린 아내의 아픔과 그 상처의 치유를 다루고 있는데, 여순항쟁과 광주민중항쟁을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아들은 광주항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아내는 그 때문에 실신을 했다 아내는 이상하게도 해마다 아카시아가 피는 5월이 되면 기운을 차리고 아들을 찾으러 광주로 떠나기를 몇 년 째. 올해도 아카시아가 피고 나는 아내와 죽은 아들을 찾으러 갔는데 우람한 무등산이 토마스처럼 느껴졌다. 무등산 가까이에 살면 아내는 기운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음은 광주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토마스가 지은 시이다.
어머니 나는 지금
십자가를 닦고 있어요.
아버지가 아침마다
숫돌에 낫을 갈고
밤마다 어머니가 우물가에서
맑은 샘물을 퍼올려
누더기 헌 옷들을
깨끗하게 빨아 말리듯
별처럼 빛나는 우리들의
꿈을 닦고 있어요
나의 꿈은
더러운 구두창이 아니고
서슬이 퍼런 아버지의 낫이며
낡은 누더기일지라도
부끄러움을 가리는
어머니의 휜 빨래이고 싶어요.
이 작품의 결말 -즉 무등산을 죽은 아들이라고 여기는 것-이 진정한 문제해결의 방법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이 한계점이다. 감상적 극복은 독자가 인정하기 힘들다.
박호재, 「다시 그 거리에 서면」
큰 동생(형석)을 시민군으로 막내 동생(형수)을 방위군으로 내보낸 누이의 심리, 형석에 대한 육친적 관심으로부터 광주항쟁의 정당성을 이해하게 되는 지숙의 의식의 발전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장은 광주의 해방 기간을, 2장은 계엄군의 재진입으로 항쟁이 절정 속에 붕괴되는 것을 그리고 있다. 항쟁 당시에 광주 외곽을 지켰던 가해자(형수)가 등장하여 5월 27일의 상황을 전해준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작품은 광주항쟁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의 시각에서 서술되었기 때문에 광주항쟁의 모습을 잘 알 수가 없다.
홍희담, 「깃발」
5월 20일 택시운전사들의 차량시위를 전후해서 지식인 및 학생 주도의 항쟁과 노동자계급 중심의 투쟁이 실지로 분기점을 이루는 시기로 형상화하였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항쟁을 바라보았으며 항쟁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다루는 내재적 접근을 통해서 시간의 경과에 따른 항쟁의 모습과 사람들의 태도를 잘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항쟁의 중심을 다룬 소설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지식인은 나약하고 노동자들은 의식이 투철하며, 지도부가 온건파와 강경파로 이분되는 등 당시의 상황을 너무 단수화시켜서 진실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가를 ...그것은 곧 너희들의 힘이 될거야."
"그래, 끝까지 책임지는 것만이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어.
윤정모, 「밤길」
이 작품은 광주항쟁에 대한 지식인의 부채의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지도부의 부재 상태에서, 몇몇 동지들의 항쟁의 진실을 밝혀 달라는 권유에 의해 부여된 탈출 임무에 대해 신부와 요섭은 끝내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중반의 것인데도 항쟁의 주변 인물을 통한 고민과 당위의 한계를 더이상 뚫지 못하였다
그는 울고 있는가. 요섭아. 그렇다면 요섭아, 남아 있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였단다. 그것으로 끝이기만 하다면, 우리가 남아 있어서 끝나기만 한다면 우리의 탈출은 부끄러움이어야 할 것이다... 요섭아, 우리도 지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있는게 아니란다. 거기에도 장벽은 있다. 그 장벽을 깨뜨려 달라는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거야. 우린 그걸 해내야 돼, 비록 이 밤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해도 이젠 서둘러야 한다.
정도상, 「십오방 이야기」
이 소설은 광주항쟁에 진압군으로 활동했던 사람의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점이 특이하다. 만복이는 광주항쟁당시 공수부대로 투입되었다가 동생의 죽음을 목격하였다. 그는 동생을 죽인 사람과 닳은 사람을 보고 살인을 해서 교도소에 들어오게 된다. 광주항쟁을 오직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교육받아서 동생의 죽음을 데모하는 학생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만복이는 처음에는 학생운동을 하여 교도소에 들어간 원태에게 적의를 품지만 결국 원태의 속옷을 빨아주게 된다. 작품 마지막의 원태와 만복이의 화해가 작위적이며, 운동권 대학생 원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옥중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말단의 가해자인 만복이 역시 궁극적인 피해자임을 잘 그쳐내지 못하고 있다.
임철우 소설
임철우는 광주항쟁의 소설화에 애써왔다. 그는 광주학살에 초점을 둔 피해자의 문학을 쓴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정권의 폭력성과 죄의식이 드러난다. 그는 독백형식을 통해 개인이 광주항쟁으로부터 받은 피해를 잘 그려내고 있으며, 추상화, 은유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강렬한 인상으로 전해준다. 그러나 임철우의 소설은 광주항쟁의 핵심보다는 광주 7년뒤의 입장을 그냥 스케치하듯 그리고 있고, 막연한 상살으초 인해 5월의 묘사가 허황함을 지니고 있다. 독백형식도 상황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단점이 있다.
「사산하는 여름」
몇 년 전에 광주항쟁을 치룬 광주시내에 떠도는 이상한 분위기와, 사람들의 불안정한 심리가 표출된 소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확실하지는 않아도 사람들은 달라붙은 남녀의 이야기를 자꾸 만들어 낸다.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타인들의 운명에 관해 그처럼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또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내심 놀라와 진다. 그는 그런 그들의 얼굴에서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분명한 그늘의 흔적을 찾아낸 느낌이다. 그것은 어쩌면 오래 굶주린 자의 맹렬한 허기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하고 K는 생각한다. 그들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깊은 분노와 증오의 흔적이 그들의 눈빛과 상기된 뺨, 그리고 들뜬 듯한 음성에도 눅진하게 묻어 있음을 K는 보았다.
「동행」
이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광주를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수배 중인 친구를 만나고 나서 나를 돌아본다.
나는 네가 억지로 떠맡겨놓고 간 그 허약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싸구려 비닐우산으로 간신히 몸을 가리운 채, 네가 비워두고 사라져버린 그 막막한 어둠의 공간을 지켜보며 혼자서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쩌면 이제 그 빈자리는 남아 있는 내가 채워야 할 몫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직선과 독가스」
나는 만화를 통해서 이 사회에 나름대로의 저항을 하고 싶지만 그것마저 통제당한 나는 남들이 맡지 못하는 독가스 냄새를 맡게 된다. 독가스 냄새가 나서 살 수가 없다 더이상 날카롭게 세상을 둘로 나누는 직선을 그릴 수 없어 만화도 손을 댈 수가 없다.
나는 다시 만화를 그릴 수가 있을까요? 자를 대지 않고서도 그 빌어먹을 놈의 직선을 예전처럼 쓱쓱 그려낼 수 있겠느냐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독가스, 지긋지긋하고 끔찍스러운 이 독가스 냄새는 대관절 어디서 어떻게 꽃가루같이 풀풀풀 날아오는 것일까요, 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째서 하필 나 혼자만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정말이지 난 모르겠다니까요. 선생님
「불임기」
광주의 모습을 상징을 통해서 나타냈다. 어느날 저녁 아이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가을에는 더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 어느 날 나타난 두 아이는 혀가 잘려져 있었다. 이는 아이들이 사라지던 낱 어른들이 아이의 외침을 모른 척 했기 때문에 아이에게 그리고 어른들에게도 주어지는 형벌이었다.
「봄날」
죄책감으로 파괴되어 가는 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상주는 명부가 광주항쟁 당시 진압군에 의해 죽기 전 자신의 집 앞에서 도움을 청했다는 이유로 죄의식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기억하라. 너는 이제 벙어리 아들을 낳으리라, 아벨을 묻은 피에 젖은 네 두 손의 업보로서, 그 배신의 증거로서, 내 손수 네 아들의 혀를 자르리라, 그리하여, 몽툭하니 잘려 나간 네 아들의 입 속을 들여다보며 그 날의 네 죄악을 기억하게 하여 주리라. 심중의 진실을 전할 수가 없어서, 심장을 터뜨릴 듯 부릅 뜬 눈을 터뜨릴 듯 먹먹하게 다만 바라보며 제 가슴 팎만 맨주먹으로 두들기기만 하는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네 가증한 배신의 흔적을 확인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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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거리에 서면>
-- 소설 속에 나타난 광주민중항쟁의 상황과 전개
그해 5월이 지났을 때,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몇은 성직자나 그와 엇비슷한 구도자가 되기를 불현듯 작정하고, 더러는 자신들이 그때껏 지켜오던 가치관의 그릇을 비워 색다른 신념을 모색하기도 했으며... 또 몇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자잘한 소용돌이 갈은 것이었지만 변화는 내게도 있었다. 당시 나에겐 신이 없었다 우직하게 지켜왔던 신념도 없었다. 까닭이였던지 내가 택했던 변화에의 모색은, 감히 작가라는 것을 꿈꾸지는 못했지만, 글을 쓰고 싶다. 아니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따위의 생각을 어렴풋이 지폈던 것이다. 그즈막에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설이라는 것을 써보았었다. 그리고... 지금껏 쓴다는 것은 언제나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떠오를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자꾸 흘러 세월을 더할수록, 그해 5월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속에 암울한 장식을 거듭해주고 있는 속병 같은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부터, 난 그즈막의 내 자그마한 변화‥‥그러니까 그 문학의 당위성이라는 문제에 관해서 내 스스로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여 보곤 하는 것이다. --박호재 「다시 그 거리에 서면」
80년대의 작가들은 광주항쟁에 대한 원죄의식을 가지고 글을 썼다. 그러나 그 항쟁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창작은 대체로 신속하지도 충분하지도 못했다. 그 이유는 80년대 초, 그 항쟁에 관한 언급이 금지되었고, 그 항쟁을 목격하거나 체험한 문학인들은 그 출격을 벗어나지 못해 미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여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항쟁을 다룬 소설이라고 해도 그 항쟁 내부에서, 항쟁의 주체의 입장에서 쓴 것은 별로 많지 않다. 항쟁의 주변에서 맴도는 사람, 그 항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소설의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상황과 전개를 살펴본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미약하지만 이 자리를 통해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이해를 정확히 하는 한 편, 문학 작품 속에 광주가 어떻게 정상화되었는지, 그리고 한계는 무엇인지 짚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16일이었다. 어머니는 딸기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그 주택가로 갔다. 정원이 넓어 안쪽까지 들리려면 목청을 높여야 했다. 부자 동네에서는 딸기도 리어카에 끌고 다니는 것은 안먹는지 내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뛰어 노는 아이들도 없었다.
갑자기 이곳 저곳에서 대문이 열렸다. 고급 승용차들이 달려나왔다. 어머니는 벽돌담 밑으로 리어카를 밀어붙이면서 숨을 몰아 쉬었다.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열 몇 대가 지나쳤다. 차장 너머로 무엇에 쫓기는 듯한 얼굴들이 보였다. 모두가 미국인들이었다. 그들은 들쥐떼처럼 도시를 빠져나갔다.「깃발」
미국은 항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알고 있었나 보다.
항쟁은 18일에서 20일까지의 비무장 민중항쟁 시기와 21일에서 27일까지의 무장투쟁으로서 민중항쟁 시기로 나뉘어진다.
1) 5월 18일 : 민중항쟁의 발단이 된 학생시위
5월 17일 24시를 기해 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16일, 17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던 학생들은 당시의 정치상황을 먼저 파악하고 선도적으로 투쟁에 나섰다. 5월 18일 아침 학생들은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계엄군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살상용 특수곤봉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공수특전단에 투석으로 맞서던 학생들은 시민들과 연대하기 위해서 광주역에서 재집결, 불어난 시위대는 금남로로 진출하였다. 오후 4시 40분경 공수특전단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학생들과 시민은 많은 부상자를 내고 흩어졌다. 공수특전단은 흩어지는 시위대를 쫓아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난자하여 학살하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얼룩무의의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날뛰고 있었다(나중에 그들이 공수특전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공수 특전단들은 무조건 곤봉을 휘둘렀다. 머리고 가슴이고 닥치는 대로 내질렀다. 그들과 맞닿아 있던 군중들이 순식간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손을 뻗치는 사람에게 가차없이 대검으로 배를 쑤셨다. 누군가가 순분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골목길로 내달리다가 앞 사람을 좇아 건물 속으로 숨어 들었다. 서너 명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창 밖으로 군용 트럭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트럭이 멈추어 서자 이미 포승으로 묵은 사람들을 차에다 던져 올렸다. 올라온 즉시 옷을 찢어 대더니 등뒤를 개머리판으로 계속 난타했다. 어떤 공수 특전단원은 대검으로 청년의 등을 쑤시고는 다리를 잡아 질질 끌어서 트럭 위에 던졌다. 노인 하나가 끌려가는 청년을 뒤따르며 손을 저었다. 공수특전단은 한 손에 청년의 발을 잡은 채로 대검으로 노인을 내리쳤다. 노인은 피를 뒤집어쓰며 고꾸라졌다. 거리에는 일시에 살기가 맴돌았다. 시뻘건 칼날이 햇빛에 번들거렸다. 트럭 안은 던져진 시체들로 가득 들어 찼다. 트럭이 움직였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깃발」
영순이가 막 숨고 난 직후 담 위로 청년 둘이 뛰어 올라왔다. 한 청년이 미처 다리를 들어올리지 못했을 때 군화발 소리가 울렸다. 허리 반쯤만 보이던 청년이 으윽 소리를 내더니 담 밖으로 떨어졌다. 한 쳥년은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공수대원이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왔다. 붉은 얼굴에 눈은 살기를 번득이며 청년의 뒤꼭지를 향해 곤봉을 내리쳤다. 청년은 피를 토하며 나동그라졌다. 공수대원은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문 앞에서 공수대원이 소리쳤다.
"데모하는 년놈들은 모두 죽여 버린다."「깃발」
2) 5월 19일 : 민중항쟁의 발전
전날 있었던 공수특전단의 만행을 전해들은 시민들은 분노 속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오전 10시 금남로에는 3,000-4,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각목과 철근, 쇠파이프, 화염병도 등장하였다. 오후부터는 대중의 투쟁이 질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18일부터 19일 오전까지 수동적인 저항으로 공수부대에게 피해만 당하던 수세적 국면을 공세로 전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딴전만 부리고 있던 언론들이 시민의 공격을 받는다
그날 도시인은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 잠을 잃은 시민들은 자꾸만 도청으로 모여들었고 건물을 점거한 진압군들은 신호탄과 최루탄을 번갈아 쏘아댔다.
"최루탄을 쏘지 마세요 우린 맨주먹입니다."
한 여성이 확성기로 말했다. 저지선에 막혀 주위를 빙빙 돌던 사람들은 마치 후렴을 달듯 쿠울쿠울 기침을 했다. 다시금 예광탄이 밤하늘로 치솟았다. 별안간 시민들은 저지선을 넘어 도청 건물 쪽으로 나아갔다. 흡사 바람에 밀리는 물결 같았다. 우박 소리가 허공을 때렸다. 총소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바닥에 몸을 뉘지도 못하고 바리케이드에 걸려 있던 그 주검‥‥ 진압군들이 달려나와 시신들을 끌어갔다‥‥‥‥그 거리에 새벽이 기웃거렸다. 어미들은, 아낙들은 시름시름 노래를 부르고 남정들은 매운 눈물을 흘리며 화염병을 만들었다 . 「밤길 」
3) 5월 20일 : 전면적 민중항쟁으로의 발전
오후 3시 경부터 시작된 '금남로 전투'는 투쟁의 질적 비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후 7시 경 대형트럭 4대, 시내버스 11대, 택시 200여 대를 몰고 나온 운전기사들이 선두에 서서 무서운 속도로 군경 저지선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운전기사들의 '차량시위'로 운동은 결정적인 비약을 하였고, 잠시 후 전면적 공세기를 선회하게 되었다.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시위대와 계엄군의 혈전은 계속되었다. 농민, 노인, 국민학생까지도 시위에 참여하였다. 밤9시 이후 시위대는 관공서를 불태우고 신역, 도청의 계엄군을 집요하게 공격하였으며, 이들은 차량이나 휘발유 드럼통에 불을 붙여 저지선 돌파를 시도하였다. 계엄군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시위대의 필사적인 공격에 결국 새벽 4시 경 신역에서 계엄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며,도청을 제외한 광주 전역을 시위대가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속된 항전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부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신부님, 시민들이 차를 몰고 와요. 저것 좀 보세요."
함께 거리에서 밤을 새운 한 소녀가 말했다. 어디서 어떻게 획득했는가. 장갑차와 군용 트럭, 고속버스가 시민들을 태우고 천천히 굴러왔고 도청에서는 군헬기 몇 대가 이착륙하고 있었다. "해산하라! 요구 조건을 들어주겠다. 어서 돌아가라" 저공을 날던 경찰 헬기에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방송을 했고 그 즈음 이미 시민의 차는 저지선을 돌입하고 있었다. 아아, 햇덩이를 조각내던 LMG 소리 ‥‥ 그 소리에 떨어진 수많은 이삭들‥‥‥ 「밤길」
4) 5월 21일 : 자발적 무장투쟁시기
시위대는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여 전남도지사와 협상을 벌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최후의 결전은 피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결전은 백주에 M16 자동소총을 난사한 계엄군의 발포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백주의 발포는 시민군의 무장을 재촉하였고, 오후에 시민들은 최초로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각 지의 파출소. 탄광 예비군 무기고 등에서 획득한 무기를 실은 차량들은 오후 3시를 전후하여 광주시내로 진입했다. 이 무기는 즉각 시민들에게 분배되었다. 중학생에서부터 장년층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이 공수부대를 광주에서 몰아내기 위해 총을 들었다. 이러한 시민군의 조직화와 총공세는 마침내 계엄군을 패퇴시키고 말았다. 오후 5시 30분경 계엄군은 총퇴각을 결정하고 도청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한 것이다. 5월 21일 저녁 8시, 드디어 시민군은 광주시 전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하였다. 더욱 고무적인 일은 무기 획득을 위해 광주를 빠져 나온 차량 시위대들의 호소로, 시민군에 의한 도청 탈환이 있었던 그 시간부터 전남 각지로 항쟁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는 것이다.
"드디어 놈들이 발포를 시작했어."
모두들 경악했다. 백주의 공식적인 총기발포는 이제 최후의 결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기 알려주는 사실이었다.
"평화적 해결은 끝났군."
하면서 윤강일은 초조한 기색을 내보였다. 그들은 도청으로 갔다. 지금까지의 낭만적이고 들떠있던 분위기가 일시에 사리진 듯했다. 도청 방어선과 시민들 사이에 총을 맞은 시체가 서 너 구 쓰려져 있었다. 아직도 죽지 않고 아스팔트 위에서 끔틀거리고 있는 사람을 구원해내려고 뛰어가는 시민들이 있었다. 적의 조준사격은 그들 역시 사살해버렸다. 그리고는 연발로 요란하게 위협사격을 가했다. 계엄군쪽에서 시체의 다리를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깃발」
신부는 수습대책 위원회의 한 사람으로서 도청 서무과로 향했다. 막 지방에서 돌아온 트럭이 광장에 세워졌고 거기서 태극기와 카빈을 둘러멘 요셉이 내렸다. 땀과 먼지로 코 언저리가 새까매진 요셉이 싱얼싱얼 웃으며 뛰어왔다.
"신부님, 정말이군요. 화순에서 도청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거든요."
"그래, 그들은 어제 저녁에 철수했단다."
"우린 티엔티를 가져왔어요. 실탄도 무기도 아주 많아요." 「밤길」
"헌데 갑자기 무엇인가 내 종아리를 이물스럽게 스치며 풀썩 가라앉았어요. 언뜻 내려다보니... 흙때가 묻은 어느 청년의 종아리였어요. 걷어붙인 바짓가랑이 사이로 피가 흐르기 시작했어요. 누군가가 소리쳤어요. 유탄이다!... 머리에 띠를 두른 그애는 고등학생이었을거예요. 탈취한 장갑차에 그냥 우뚝이 선 채, 계엄군의 진지를 향해 돌진해 버렸어요. 시민들이 환호하고 아우성을 쳤어요. 하지만 그애는 얼마 후 태극기에 뒤덮여 되돌아왔어요. 태극기가 붉은 비단처럼 온통 선홍색의 핏물로 물들어 있었어요."「다시 그 거리에 서면 」
5) 5월 22일 - 5월 25일 : 수습대책위원회의 지도 시기
죽음을 무릅쓴 그간의 항쟁, 그리고 항쟁의 결과로서 광주시 전역의 장악은 광주 시민에게 '시민공동체'라는 의식을 심어주었으며, 새로운 광주의 건설을 위한 의욕에 가득차게 하였다. 그러나, 일반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수습위원회는 투항파적 경향을 강하게 띠면서 무기 반납에 의한 사후 보장만을 사태 해결책으로 주장하였다. 결국 이들은 시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여 시민들의 비난을 받았고, 결국 5월 26일 새로운 항쟁 지도부가 이들을 대체하게 된다.
도청 안마당 한구석에 시체들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시체는 이미 그 형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총상을 입거나 곤봉을 맞은 시체는 머리와 얼굴이 짓뭉개져 있었고, 대검으로 난자된 시체는 붓거나 부패해 냄새가 진동했다. 눈알이 튀어나온 시체, 팔이 떨어져 나간 시체, 목이 잘려서 몸과 분리된 시체, 유방이 잘렸는지 가슴께가 너덜너덜한 여학생도 있었다... 총을 어깨에 맨 남자가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리도 도청을 지키려고 왔어요. 어떤 일이 좋을까요?"
"글쎄요. 지금 무기 반납 문제로 싸우고들 있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댁들이 알아서 필요한 부서를 찾아보도록 하시지요."「깃발」
"아무도 도시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도시로 통하는 모든 길은 차단되었어요. 도시는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고갯마루 산에 진압군들이 쫙 깔려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막 고개를 넘어가려고 하는데 총알이 쏟아져서 허겁지겁 뛰 내려오는 길입니다.「일어서는 땅」
6) 5월 26일 - 5월 27일 : 항쟁 지도부의 지도 시기
항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해 온 투쟁파와 청년운동가들은 항쟁을 지도하긴 위한 임시 지도부를 조직하고, 대학생을 조직화하여 결국 수습대책위원회의 투항파를 몰아내고 새로운 항쟁 지도부를 5월 25일 발 10시에 결성하였다. 그러나 항쟁 지도부는 자신이 계획한 것들을 실행에 옮겨 보지도 못한 채 5월 27일 새벽 3시경 계엄군의 진입에 의해 그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계엄군은 한국전력 앞에서 진을 치고 더 이상 진격해 들어오지 않았다. 재야 인사들로 이루어진 수습위원들이 계엄군 탱크 앞 도로 위에 들어 누웠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시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항쟁 지도부는 계엄군의 일시 진입으로 뒤숭숭한 분위기였지만 어느 정도 체계를 정비하고 있엇다.「깃발」
계엄군 진입의 소문 때문인지 시민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언니, 저 벽보 봐"
순분이가 가리킨 곳에 큰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미국 항공모함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
우리의 우방인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는 나라입니다. 광주의 민주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지금 부산에 미국 항공모함이 정박 중에 있습니다. 더 이상 광주는 피를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민들은 동요하지 마시고 도청에 집결합시다.
시민들은 그 대자보를 보고 안심하는 눈치였다. 자유의 여신상을 상표로 하는 나라를 떠올리며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계엄군은 항복 권유의 최후통첩을 방송했다.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현재 포위되었다. 열 셀때까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하나.
김두칠은 총을 서치라이트 쪽으로 조준했다.
두울.
숨막히는 순간. 총을 잡고 있는 순에 힘을 주었다.
세엣.
네엣.
그때 도청 본관 창문에서 한 시민군의 목소리가 잠시의 정적을 찢었다.
"개자식들아."
동시에 총소리가 계엄군의 써치라이트를 박살내었다. 주위는 다시 캄캄해졌다. 동지들과 더불어 김두칠은 방아쇠를 당겼다.「깃발」
작전개시일 하루 전에 만복은 사복차림으로 미리 광주 시내에 투입되었다 도청 주위에 잠입해 있다기 도청 지하실에 있는 폭발물의 뇌관을 제거하고 도청 광장 건너편 빌딩의 옥상에 설치된 LMG기관총을 파괴하라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사복 특공조는 되도록 전남·북 출신들로 구성되어서 폭도들과 대화를 하더라도 표가 나지 않도록 준비했다.…만복 일행 네 명은 도청 앞 광장에서 집회 중인 폭도들 틈에 섞였다. 폭도들은 총을 멘 젊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폭도랄 것도 없었다. 말이 폭도지 어린 여자에서 늚은 할머니까지 온갖 사람이 다 모여 있었다. 만복은 그들을 보며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계엄령하에서 아무 소득도 없는 데모를 끈질기게 하는 무식한 사람들이 이들 말고 또 있을까 싶었다. 그것도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을 탈취하고 군인들을 죽여가면서까지 데모를 하다니, 도대체가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건지 어머니나 동생 만수가 끼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영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만복은 불안하게 집회를 바라보았다. 젊은 여자가 단 위에서 선동을 하고 있었다. 최후의 일인까지 싸워서 기필코 민주화를 쟁취하고, 우리들의 광주를 사수하자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쉬지 않고 지꺼려 대고 있었다. 만복은 그 여자가 가소로웠다.「십오방 이야기」
황폐할 대로 황폐한 거리와 공공건물 사이사이에는 폭도들이 총을 메고 배회하고 있었다. 만복은 아까 지나온 금남로를 생각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몸서리 쳐지는 파리떼가 지금도 눈에 아른거렸다. 금남로를 지나올 때 박살이 난 공중전화 박스가 뒹굴고 있는 아스팔트 위에 핏자국이 여전히 흥건하게 남아 비릿한 피냄새를 맡고 모여든 쉬파리떼가 그 위에 군청색 등짝을 빛내며 달라붙어 피를 빨고 있었으며 바로 그 한뼘 위에서는 더 많은 파리떼가 끊임없이 윙윙거리며 앉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자정이 넘자 도청 안에 「폭도들은 하나 둘 씩 아무렇게나 엎어져 골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곧 새벽 한시를 기해 진압 작전이 개시될 예정이었다. 반항하면 무조건 죽여라. 이것이 작전명령의 전부였다. 만복은 지하실로 무사히 잠입해서 폭발물의 뇌관을 제거했다… 본격적인 진압작전이 개시되었는지 시 외각 지대에서 간간이 드르륵 드르륵 하는 식스틴의 자동 사격음이 들려왔다. 전일빌딩도 도청처럼 폭도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십오방 이야기」
누구의 시계에선가 5시를 알리는 발신음이 삐삐 울렸다... "장갑차가 오고 있습니다. 최후의 순간이 오면 차라리 티엔티를 폭발시켜 전원 자폭합시다!"... 결국 무장한 청년들은 남고 17명의 수습위원들은 전원 입구로 나갔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앞으로 앞으로 걷기만 했다. 해가 떠올랐다. 시민들이 뒤를 따랐다. 처음에는 한둘에서 수십, 수백 명... 마치 자석에 끌린 쇳조각 모양 그들은 겹겹이 고리를 물었다... 2층 창가에서, 옥상에서, 인도에서 기관총은 숨을 죽이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는 묵묵히 나아갔다. 포문을 뻗치고 있는 장갑차를 향해, 바리케이트를 향해...「밤길」
"그럼 시간을 주시오, 시간이 필요하오."
"오늘밤 열두 시까지 수습하시오. 이게 최후 통첩이오."
... 장군이 지프를 내 주었다. 지프가 공단 입구 쪽으로 갔다. 파헤쳐졌던 길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시외도로도 개통되오 있었다.
"시민들이 야채를 구입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도로를 보수했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운전병이 말했다. 신부는 공단 입구에서 내렸다. 시민들은 주의 깊게 왕래했고 가끔씩 택시도 지나 다녔다. 군의 작전을 위해 도로를 복구했구나. 그렇다면 그 최후 통첩은 밀 예정된 시간? 「밤길」
"줄초상도 그런 줄초상이 없지. 산 사람은 다 잡아가구 관에 담긴 시체들이 무슨 사과궤짝처럼 늘어져 있더라구"
"그러고도 시가지 쪽 주택가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젊은 놈들은 다 잡아 간다지 않소"「다시 그 거리에 서면」
"누나 이번 진압 작전에 붙여진 이름이 뭔지 알아?"
"……"
" '화려한 파티'래... 그게 그날 새벽의 작전명이야."「다시 그 거리에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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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도 지는 것이 아닐 수 있어. 그래도 이런 엄청난 피의 대가로 알게 되는 것이 슬퍼>
--광주 사람들의 삶의 태도와 인식내용
소설이 본래 사건의 추이에 따른 작중 인물의 행동이나 의식의 변화를 보여주지만 광주항쟁을 소재로 하는 대부분의 소설은 광주항쟁을 전후로 의식이 성장하는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다. 특히 그러한 변화는 항쟁주체 세력이었던 민중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가 다룬 열 편의 소설 가운데 「다시 그 거리에 서면 」「깃발」, 「십오방 이야기」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홍희담의 「깃발」에서 순분은 항쟁의 초기에는 그다지 각성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5월 18일, 항쟁이 시작되었는데도, 예전과 변함없이 '피의 일요일'에 친구들과 함께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노닥거린다. 이러한 순분의 태도는 당시 항쟁의 초기에는 학생과 지식인이 주도가 되었지 노동자들은 소극적이고 항쟁세력의 주변부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날은 18일, 피의 일요일이었다. 순분이가 다니는 야학은 일요일엔 예배를 보았다. 예배를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좀 노닥거리다가 버스를 탔다. 네 시쯤이나 되었을까. 버스가 공용 터미널 부근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나 항쟁을 거치면서 그녀의 태도는 조금씩 변화한다. 모든 문제가 자기 자신이 개인에서 혹은 가정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벗고 집단, 노동자 집단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아가 자신의 그런 위치에 대해서 자랑스러움까지 느낀다.
순분 : 언니, 난 그래, 이 며칠 동안의 해방의 기쁨만으로도 일생 동안 어떤 험담한 일을 당하더라도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애.
영순 : 선생님. 우린 그렇지 않아요,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철순 : 난 노동자라는 게 자랑스러워.
그러나 순분의 노동자로서의 각성은 지식인에 대한 반감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지식인들을 포용할 줄 안다. 그래서 깃발의 3장 부분은 의미가 깊다. 윤강일이 수배자로서 미숙이의 자취방으로 숨어들어갈 때 순분을 비롯한 노동자들은 따뜻하면서도 세심하게 보호를 해준다.
선생님 돈도 없을꺼야. 잠수함 타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니? 너희들 돈들 다 털어 봐.
박호재의 「다시 그 거리에 서면」에서 지숙은 소시민의 안정을 꿈꾼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대대로 이어져 오는 가난과 그것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자신의 그런 처지에서 비롯된 생각이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은 모두 제 이익만 챙기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사코 자신이 좋아하는 달력을 그곳에 걸어야 되겠다고 형석과 지숙은 괜한 각축전을 벌였던 적이 있었다. 지숙 자신이 결국 우겨내고 말았지만, 물론 지금의 달력이 꼭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갈라터진 가뭄의 들판 위에서 지치고 절망적인 표정을 한 어떤 사내의 모습이 짙은 먹빛으로 양각이 되었던 그 판화달력이 그녀에겐 몹시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여러가지 께름칙한 몽상들을 자가증상처럼 일깨우곤 했기 때문이었다. 들일을 끝내고서 저물어 가는 사립을 마른 검불처럼 들어서곤 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인 듯도 싶고, 먹장구름이 내려앉던 날이면 오밤중에 무작정 대문을 밀치고 들어와 산손님이니 지서 순사니 따위의 헛소리로 어둠 속에서 시퍼렇게 늘어놓다가 아내 정신이 든듯 허청허청 산마루를 내려가시곤 하던 당숙의 모습인 듯도 싶었다.
그렇게 매사를 밀쳐 버리고 새롭게 피어나는 생각이래야… 나날의 삶 속에서 갈구해 마지 않던 안도에 찬 소망… 고작 그것이었을 뿐이니까.
그러한 지숙의 삶에 광주민중항쟁이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다시 말하면 좋아하던 남자와 연락이 끊기고 형석은 시민군으로 항쟁에 참가하고 형수는 방위병으로 진압측에 동원되자, 자신의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눈을 뜨면서 지숙은 비로소 광주항쟁의 정당성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지숙은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신도 모래와 같은, 아니 모래보다 더 잘게 흐트러지거나 밀려다녔을 뿐인 구경꾼이었다는 것을, 또한 한번도 고개를 들어 그 파도의 깊은 어둠의 속을 노려보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단지, 형식으로 인하여 분노하고 슬퍼할 뿐이었음을 절감했다.
화려한 파티‥‥ 화려한 파티‥ 지숙은 그것을 반복해서, 오래도록, 입 속에서 되굴려 보았다. 가슴속 저 밑바닥에선 그날 새벽에 도시 전체를 짓이겨대던 수천만 발의 총소리가 두두두두두∼∼ 되살아났다. 시민들의 비명소리 아우성소치가 군화발에 뒤섞여 생생하게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녀의 온몸이 갑자기 부르르 떨려 왔다. 문득 견딜 수 없는 적개심이 살 속 뼛속 마디마디에 솟구쳤다. 그것은‥ 그야말로 천추에 길이 새겨질 살육의 파티였다
정도상의 「십오방이야기」는 말단의 가해자도 또한 피해자임을 보여주면서, 공수부대였던 만복이의 의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처음 감옥에 들어왔을 때 만복은 운동권의 구호를 들으면서 실현불가능하고 어리석은 구호라며 비웃기도 하고,광주현장에서는 계엄령하에서 데모를 끈질기게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아무 소득도 없는 짓을 겁도 없이 한다며 저렇게 무식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를 생각한다. 하지만 감옥 안에서 자기와 같은 잡범들이 광주에 대해 내리는 평가와 노래를 들으면서 차츰 그의 의식에 변화가 오고, 만수를 죽인 것은 바로 데모하는 놈들이라는 생각을 깨고 운동권인 원태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광주현장에 참가함으로써 의식의 변화가 온 것은 아니지만, 동생의 죽음으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광주의 실상을 파악하게 됨으로써, 주위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는 공통점을 두고 눈여겨볼 만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변화가 급격히 이루어지고 변화의 계기 또한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주위의 여론에 따른 것이기에 설득력이 조금 떨어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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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을 이야기할 때 항쟁의 주도 세력이 누구였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는 중요하다.
대략 71%가 무산자 계급이었다. 지식인계급에 속하는 대부분의 숫자는 예비 검속으로 붙잡혀 간 사람들이었다. 붙잡혀 가지 않았다면 모두 투쟁에 가담했을까. 대답은 미지수이지만 운좋게 검거를 모면한 사람들의 행동으로 기준해본다면 가정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투쟁에서 이탈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산자계급의 퍼센트는 더 높아질 것이다. 80퍼센트, 90퍼센트.
이와 같이 「깃발」에서는 항쟁의 주체세력이 민중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전두환 일당과 미국의 작전권 행사에 의한 공수부대 투입으로 해서 광주 일원의 남녀노소를 차별하지 않는 학살과 체포의 만행이 저질러질 때 광주민중항쟁은 학생들로부터 전개되었으나 끝내는 거의 뿌리뽑힌 부랑노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항쟁 초기의 주역이었던 학생들은 싸움의 중심부에서 썰물처럼 이탈해 버린다.
"낭중에 광주사람들 야그 드러봉께 살벌했다등만. 첨엔 학생들이 시작했는디, 뒤에 갸들은 내빼고 때밀이, 식당 종업원, 구두닦이, 운전수, 공돌이, 구멍가게 주인 같은 야들이 총을 잡고 광주를 지킨다고 싸웠다등만, 워 니기미 뒤져뿌린 놈만 불쌍하지 누가 알아주나"
"때밀이 겉은 야들이 왜 죽기 살기루다 싸운지 아냐, 학생들은 배운게 있어농께 그거 안해도 지 목구녕은 채울 수 있응께 발라 버린 것이고, 갸들은 못 가진 한도 있고 데모 하나 안 하나 때밀이고 공돌이는 공돌일께 싸우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갸들이 의리 하나는 끝내중께"
이렇게, 항쟁이 '과격화'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부각되고 또 끝까지 투쟁한 것은 노동자 등 기층 민중이었다. 특히 5월 22일 이후 수습대책위원회에서 투항파적 경향을 강하게 띠면서 무기를 반납하고 뒤의 사후 보장을 요구하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자, 수습대책위의 지도층과 항쟁의 궁극적인 실체였던 민중 사이에 대립이 생긴다.
무기 반납 문제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열띠게 논쟁하고 있었다. 강경파들은 대개 룸펜 계층이나 노동자들이었다.
"무기 반납하자는 놈들은 배신자와 같은 거요 "
한 노동자가 총대를 책상 모서리에 탁탁 부딪히여 말했다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학생수습대책위원회'들른 온건파였다. 그들 증의 한 명이 말을 받았다.
"당신들은 또 피를 흘리기를 원하는 거오?"
"누가 피를 흘리자고 했소? 피 흘린 것을 헛되이 하지 말자는 말이죠.
강경파.
"무기를 갖고 있는 한 피는 흘리게 마련이오."
온건파.
"무기를 내놓는다고 적들이 우릴 그냥 놔둘 것 갈아요? 우린 적을 안 믿어요. 적은 적입니다."
강경파.
"이런 식으로 대치하는 한 수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온건파.
"수습 수습, 자꾸 그러는데 그 말이 뭔 말이오. 도청을 내놓자는 말 아니오? 어떻게 찾은 도청인데‥."
강경파.
"무기를 반납하면서 우리에게 유리한 고지를 따내면 되지 않습니까?"
온건파.
「깃발」은 야학 선생 윤강일이 탈락하고 대신 여성노동자 형자가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는 이야기를 통해 항쟁주체로서의 노동자를 강조하고 형상화했다. 하지만 그들 주변에 있는 다른 계급의 의지와 양심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실제와 다르게 일용노동자나 때밀이 등 룸펜 프로를 비롯해서 지식인의 역할을 아예 축소시켜 놓고 있다. 비록 지식인들은 일련의 투옥사태와 해직·감시의 수난을 제외하면 많은 사람들이 항쟁의 현장에서 멀리 도피하고 말았지만 사실 광주민중항쟁에서 민중적 지식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항쟁 초기에만 지식인들이 활동했다 하더라도, 당시 항쟁의 도화선의 역할을 한 그들의 활동은 묻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광주항쟁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건드리기에 참 미묘하다. 청년학생, 지식인들이 무장투쟁기에 대거 이탈하였기에 지식인들을 개량주의나 투항주의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 운동의 현실적 요구를 심각히 고려하진 않은 탁상공론일 때, 이것은 자칫 감상으로 떨어지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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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쿠데타와 광주학살은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고, 미국을 있는 대로 보는, 나아가서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영원한 '우방'으로 감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던 미국이지만, 군부세력이 광주에서 저지른 수많은 만행과 무참한 학살을 묵인방조한 사실과 광주학살을 발판으로 세워진 신군부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