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보이는 심연과 안보이는 역사전망. 김현(전체에 대한 통찰, 나남, 1990. 11)
본문
산 세상과 죽은 세상 <2>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전망
그후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곳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은 어느 곳에도 없다(95)
1980년대는 광주와 죽음-죽음의 연대이다. 그 연대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는, 40년대 후반의 아우슈비츠와 유태인 학살을 상기시키는, 아니 그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던, 불행한 연대이다. 처음에는 분노와 비탄과 절망, 그리고 침묵으로 점철되었던 광주는, 그 뒤에는 일종의 원죄 의식으로 변화하여, 그것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물론 육체적으로는 살 수 있겠으나, 정신적으로는 살기 힘든, 그런 장소가 된다. 그곳은 더구나 오랫동안 소외 되어온 곳이어서 역사적 숙명론의 흔적-흔적? 차라리 실체가 아닐까?-까지 보여준다. 시인들도 그 원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80년대에 시작 활동을 한 거의 모든 시인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그 원죄 의식을 드러낸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과시로, 어떤 경우에는 자기 변호로, 어떤 경우에는 겉 멋으로 그런 시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인들은, 성실하고 고통스럽게 광주와 마주친다. 광주 체험은 그러나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그것을 시화시키는데, 시인들은 큰 고통을 겪는다. 광주를 노래하는 순간, 그 노래는 체험의 절실함을 잃고, 자꾸만 수사가 되려 한다. 성실한 시인들의 고뇌는 거기에서 나온다. 광주에 대해 눈을 감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 시를 시라고 발표할 수도 없다. 그 고뇌를 예술적으로 현명하게 헤치고 나온 시인들은 불행하게도 많지 않다. 나는 그 고뇌를 성실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자기 나름의 시적 공간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두 시인의 시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시는 외침이 아니라 외침이 터져 나오는 자리라는 것이 그 결과 밝혀지기를 희망한다.
내가 다루려 하는 두 시인은 최하림과 임동확이다. 그 두 시인은 그들의 시적 성과에 합당한 평가를 아직 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이 도시의 보이지 않는
눈이 나를 보고 있다
이 도시의 집들이
나무들이
창들이
굴뚝들이
새벽마다 쓸려가는
이 도시의
쓰레기와 병들과
계급과 꽃
데모와
바람과
바랑의 외침들이
것이지 않는 내 손짓
보이지 않는 내 몸짓
보이지 않는 내 소리짓
을 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내 맘 속의 맘까지도
저 배반과 음모까지도 보고 있다
이 도시의 눈들이 내 모든 것을 보고 있다
오오 나를 감시하는 눈들이 보는 저 꽃
하늘의 상석에 올려진 아직도
피비린내 나는
눈부시고 눈부신 꽃
살가죽이 터지고
창자가 기어나오고
신음 소리도 죽은
자정과도 같은,
침묵의 검은 줄기가
가슴을 횝쓸면서
발끝에서 정수리로
오오 정수리로‥‥‥
의미심장하게도 80년대 마지막에 발표된 이 시(<문학과 사회>, 89년 겨울호)는, 내 생각으로는 80년대에 썩어진 광주시 중에서도 백미일 뿐 아니라, 최하림의 시중에서도 뛰어난 시이다. 연의 구별이 없지만, 이 시는 실제로는 두 개의 연으로 이뤄져 있다. 중간 부분의 "을 보고 있다"까지가 한 연이고 그 뒤가 또 한 연이다. 광주임에 틀림없는 한 도시에서의 시인의 심적 갈등을 그리고 있는 이 시의 전반부는 두 개의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 : 이 도시의 보이지 않는 눈이 나를 보고 있다. 이 도시는 보이지 않는 내(손/몸/소리)짓을 보고 있다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우선 문장 상으로 보자면, 보고 있다라는 진행형이 눈에 두드러진다. 그것은 과거의 일도 아니고, 미래의 일도 아니다. 그것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그 다음 의미론상으로 보자면, 보이지 않는 눈/보는-눈, 보이지 않는- 내-짓/보이는-내-짓의 대립이 눈에 띈다. 도회의 보이지 않는 눈이 보이지 않는 내 짓을 보고 있다. 바로 그것이 시인의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독자들은 이 대목까지만 읽고서는, 왜 도시의 눈이 보이지 않는지, 왜 내짓이 보이지 않는지, 그런데도 도시는 무엇을 보고 있으며, 시인은 왜 갈등을 느끼는지 알 수가 없다. 그 갈등은 시의 리듬에 의해 더욱 고조된다. 첫 행의 '보이지 않는'과 2행의 '눈'은 분리되기 힘든 단어들인데, 시인은 과감하게 그것들을 분철한다. 그 결과 '보이지 않는'과 '눈'이 다 같이 강조된다. 그것은 또한 두 박자, 세 박자의 리듬을 보여줌으로써 시적 혼란을 예감케 한다.
이 도시의/보이지 않는
눈이/나를/보고 있다
그 다음은 한 박자를 이루는 말들이, 혹은 두 박자와 한 박자의 뒤섞음 ol 15행정도 진행되어, 혼란은 극심해진다. 그리고 마지막의
을/보고 있다
라는 흥미 있는 리듬이 나타나, 보임1안 보임의 대립을 극적으로 부조한다.
보이지 않는 내 짓이 무엇인가가 밝혀지는 것은 후반에 이르러서이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이, 내 맘속의 맘, 배반과 음모라는 것을 밝힌다. 이 도시에서 일어난 일을 둘러싼 어떤 음모와 배반이 보이지 않는 그의 짓이다. 그 배반과 음모를 이 도시의 눈들이 보고 있다. 전반부의 단수형 눈은 후반에서는 복수의 눈이 되어 육체 성을 드러낸다. 도시가 본다기보다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보고 있다. 그 눈들은 시인을 감시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 이 시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지만, 놀랍게도 시인은 꽃 때문이라고 말한다. 눈들은 한 쪽으로는 시인을 감시하면서, 한쪽으로는 꽃을 감시하고 있다. 그 꽃은 싱싱한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하늘의 상석에 올려진 꽃이다. 거기에서 주목할 것은 아직 도라는 말이다. 의미론적으로 보자면, 그 아직도는 피비린내 나는에 걸린다. 그러나 시인은 아직도 와 피비린내를 분철시켜 -전문적인 용어로는 척치시켜, 아직도와 상석을 은연중에 결부시킨다. 꽃은 아직도 피비린내 나며, 아직도 하늘의 상석에 올려져 있다. 그 꽃에 대해 시인은
1. 아직도 하늘의 상석에 올려져 있다;
2. 아직도 피비린내 난다;
3. 눈부시고 눈부시다
라고 말한다. 그 묘사에는 광주 사태의 모든 것이 간결하게 함축되어있다. 그 다음에 후반부에서 흥미 있는 것은, 자정과도 같은 뒤에 찍힌 쉼표이다. 그 쉼표 때문에
살가죽이 터지고
창자가 기어나오고
신음 소리도 죽은
자정과도 같은,
은 앞의 꽃에도 걸리고, 뒤의 침묵의 검은 줄기에도 걸리게 되어 있다. 꽃에 걸리면, 그 꽃은 아직도 살가죽이 터지고, 창자가 기어 나오나, 신음소리도 못 내는 검은 꽃이며, 검은 줄기에 걸리면, 그 줄기는 살가죽이 터지고, 창자가 기어 나와도 신음 소리 하나 못 내는, 그래서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시인을 꼼짝 못하게 하는 침묵의 줄기이다. 검은 꽃과 시인을 침묵시키는 줄기는 같은 것이다. 그 겹침이 시인을 전율케 하고 불편하게 하여, 시인은
침묵의 검은 줄기가
가슴을 휩쓸면서
발끝에서 정수리로
오오 정수리로‥‥‥
라는 탄식을 토해내며 침묵의 소리로 크게 외친다 : 죽은 자들이여 너희는 어디 있는가. 그 외침은 시인의 내적 외침이면서, 시의 제목이기도 해 서, 시의 행간마다에 깊숙이 보이지 않게 숨어있다. 그러나 귀 있는 자들에게는 그 외침이 그 어느 외침보다 더 크게 울린다.
이 시는 아름답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으나, 아름다운 것 이상인 충격 적인 이미지로 팍 차 있다. 그 이미지들이 이 시의 울림을 크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지만-또 다른 요소는 리듬이다-그것은 침묵의 외침으로 더욱 풍요해진다. 우선 나를 보고 있는 이 도시의 보이지 않는 눈이라는 이미지. 이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눈이라, 눈만으로 이뤄진 릴케의 천사와 다르게 이 도시의 눈은 침묵하는 심연의 눈이다. 도시도 눈이며
이 도시의 집들이
나무들이
창들이
굴뚝들이
새벽마다 쓸려가는
이 도시의
쓰레기와 병들과
계급과 꽃
데모와
바람과
바람의 외침들이
다 눈이며,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다 눈이다. 그 눈들은 이방인들을 , 낯선 것들을 보고 있다, 주시하고 있다. 그 눈을 피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다 눈인 곳에서는 보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부릅뜨고 낯선 것들을 주시하고 있는 침묵의 도시, 그 도시에서 전율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 다음, 눈부시나 아직 피비린내 나며, 아직 하늘의 상석 위에 놓여 있는 꽃. 꽃은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것의 은유이다. 그런데 시인의 끝에서는 피비린내가 난다. 그러면서도 눈부시고 눈부시다. 끔찍한 꽃이다. 그 꽃은 더구나 살가죽이 터지고, 창자가 기어 나온 꽃이다. 아름다운 것이 견딜 푸 없을 정도로 훼손된 것이 시인의 꽃이다. 그 꽃은 또한 자신이기도 하다. 이 끔찍함이 이 시의 기본 동력 중의 하나이다. 그런 꽃을 보고 난 뒤에는
사랑하였던 바다가 사라지고
검은 바다에 철침 같은 비가 꽂힌다.
바다도 검은 바다가 된 것이다. 그 검은 꽃과 검은 바다는 깊이가 없는 심연이다. 그의 심연의 특징은 그 심연의 속이 비친다는 점이다. 꽃은 지고 남아 있는 것은 투명한 심연뿐이다. 왜 속이 보일까? 거기에도 시인의 비밀 중의 하나가 숨어 있다. 다 보이는 심연인데도 우리는 속이 안 보이는 심연이라고 믿고 있는 척 할뿐이다.
속이 비치는 심연 속으로
가고 있었네 심연은
시간이었고 고통이었네
자락마다 진홍빛 꽃들이
피어나고 바다 언덕에서
종소리 울렸네 아직도
살아 있는 날들이여 더불어
사랑하고 더불어 괴로워했던 이별들이여
나무들은 그리고 저주받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깊은 소리들은
공중으로 퍼져나가고 기억이
어룽진 검은 너의 기슭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나는 가고 있었네
가고 있었네 만곡을 지나는
고대 목선처럼 꽃들이 져내리고
종소리 울리면서 사물을 울리는
푸른 소리 속으로 속이 비치는
심연 속으로 심연은
시간이었고 아픔이었네
이 시는 앞의 시보다 훨씬 평이하게 꽃과 심연과 건은 내면을 노래한다. 문장과 리듬이 그러하며, 이미지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평이하다는 뜻은 흔히 쓰이듯 평범하다는 뜻이 아니라, 시를 이루는 요소들의 관계가 이해하기 비교적 쉽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의 눈[/들]이 보는 보이지 않는 내 짓은, 속이 비치는 심연으로 바뀌며(보이지 않으니까 심연이며, 보이니까 속이 비친다), 눈부신, 피비린내 나는 꽃은, 심연(바다) 언덕에서 피어났다. 만곡을 지나는 고대 목선처럼 져 내리는 진흥 빛 꽃으로 바뀐다. 비교적 낯선 이미지인 저주받은 내면, 검은 바다 기슭은 그러니까 속이 비치는 심연의 변형이다. 그 저주받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깊은 소리는 침묵의 소리의 다른 말이다. 앞의 시를 평이하게 되풀이하고 있는 이 시는
심연은
시간이었고 고통이었네
라고 말하기도 하고,
심연은
시간이었고 아픔이었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연이 시간인 것은 그 심연을 낳은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고통이며, 아픔인 것은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치유되기 힘든 상처이기 때문이다. 관념적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으로 존재하며, 아직도 우리의 의식을 짓누르는 깊은 상처를 우리는 어떻게 치유해야 할 것인가? 시인은
이제 나는 가야 한다 가서
나의 떨린 어깨를 두 팔로 감싸며
아무 말도 말아야 한다
라고 (우리들이 걸었던 길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에서 말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상처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그 질문은 고통스럽다.
최하림은 심연치 밖에서 심연 안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는 없으나, 40대의 나이에 일어난 광주 사건을 그는 광주의 밖에서 겪는다. 그는 일상적인 사회인으로서 그것을 추 체험한다. 그러나 임동확은 사회학자들이 주변인이라고 부르는 인간으로서 그 사건을 직접 겪는다. 그는 일상인이 아니기 때문아 일상적인 삶의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으로서 그가 믿는 가치 체계에 의해 그것을 보고 느끼고 판단한다. 그는 아직 사회에 편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주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주변인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체험할 때, 가장 숭고한 반응은 그것에 뛰어들어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웅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산되지 아니한, 순진한, 아니 순수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행위는 아니다. 임동확 역시 그렇지 못했다(그러지 못한 것이 그뿐이겠는가. 나 역시 그러했다 60년 봄에 나는 경무대 앞까지 갔으나, 총소리가 났을 때, 내 몸은 한 가게 목판 밑에 있었다. 나는 내가 비겁한 놈이라는 자학을 하면서, 경무대 앞에서 장충단까지를 터덜터덜 걸어갔다. 햇빛은 밝게 빛나고, 날씨는 알맞게 쌀쌀했다). 그도 자신을 비겁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실 끝까지 남아 있지 않았다
눈과 귀를 막은 채 불타오르는 전쟁터
동료의 죽음과 울부짖음을 외면했다
나는 솔직히 비겁자였다 부어오른 편도선과
발목의 부상을 핑계삼아 전선을 벗어났었다
무기력한 흰손의 가난한 서정을 좇는 시인 지망생에 불과했다(91-92)
그는 부어오른 편도선과 발목의 부상을 핑계삼아 죽음의 자리를 벗어난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었지,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일생 내내 그를 불편하게 만들리라는 것을 그는 그때 모르고 있었다. 그는 영웅도 아니었고, 시인도 아니었고, 단지 비겁자였을 뿐이다. 시인으로서 그가 꿈꾼 시는 상징의 시이다.
(어두운 시대의 시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상징이다. 소수인의 독점물일지라도 일정한 긴장과 자기 통제 아래 이뤄지는 상상력의 문학은 암울한 시대 상황과 싸우는 유일한 부드러움이다. 무기이다. )(37)
그는 그 상징의 시를 쓸 시인이다. 그런데도 그는 편하지 않다. 비겁자로서 그 잔인한 거리를 견디어 내기는 쉽지 않다. 그는 방황한다. 정상적인 일 상인으로서 사회에 편입되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예외자로서 사회에서 격리되는 것도 싫다. 그렇다면 그 중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중간의 길이 방황이다. 보라,
아, 이제는 피비린내 가득한 거리를 더 이상 견디어낼 수 없어
그후 나는 석삼년 동안을 군대 생활로 메웠습니다
그럭저럭 복학해 뒷전에 물러나 일년을 보내다가
그것마저 포기하고 해남 대흥사 암자에 은거하다가
어느덧 9년만에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쥐었습니다(99)
비겁자는 방황하면서 자기는 평화주의자라고 강변한다. 그는 그러니까 비겁한 평화주의자이다(78). 평화와 화해를 주장할 수 없는 시대에 그는 시인으로서 평화와 화평을 주장하고 싶어한다. 그의 상징의 시는 부드러움이 무기인 시이다. 그러나
헤매본 자만이 아는 짐승의 시간들(55)
을 잊을 수가 없다. 짐승의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다. 남아 있는 것은 살기 어린 조소와 회의뿐이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무의미한
역사의 진보를 무조건 신뢰할 수 없었다
모두들 함부로 영혼을 위탁하지 않았고
부활도 화려한 장례식도 믿지 않았다
남은 것은 살기 어린 조소와 회의뿐이었다(41)
그 공포의 도시(40), 저주받은 도시(50)에서 일어났던 일은 인간은 할 수 없는, 짐승의 짓이다. 짐승의 짓을 체험한 사람은 순진하게 역사의 진보를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역사는 때로 우회한다라는 변명도, 압도적인 짐승의 시간을 체험한 사람에겐 췌사이다. 밖에서, 뒤에서, 그것을 체험한 사람은 역사의 우회적 진보에 대해 믿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가 없다. 함부로 영혼을 위탁하는 종교도, 부활을 논의하는 종교도, 화려한 장례식과 같은 세속적 위안도, 그는 믿을 수가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짐승들의 짓에 대한 조소와, 인간에 대한 회의뿐이다. 그것을 우리는 아우슈비츠에서 이미 본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민족에 의한 유태인 박해였지, 같은 민족의 같은 민족에 대한 박해는 아니었다. 회의와 조소는 그래서 더욱 가중된다. 시인으로서 임동확이 그때 생각한 것은
역사에 대하여
꿈꾸는 것과 침묵하는 일만이 남아(57)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진보를 찬미할 수 없다. 그렇다고 부인할 수도 없다. 그러니 침묵하거나, 역사의 진보를 상상력 속에서 꿈꾸는 수밖에 없다. 그는 비겁한 평화주의자이다. 그 평화주의자는 방황하면서-방황하지 않고 열심히 주장하고 선동할 수 있는 자는 행복 할진저 ! -꿈꾼다. 그는 자기의 비겁을 조소하면서 가난한 시인의 삶을 꿈꾼다. 꿈꾸는 방황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여러 곁의 동물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그때 너는 검문소를 피해 논두렁을 밟으며
어디로 가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무정한 세월이 복류하고 있는 동안
그대들이여
나는 보았다. 나의 안락함 뒤의 엄청난 부정을,
너의 너그러운 미소 뒤에 감추어진 적의를,
그리고 나의 평화의 구호 속의 지독지 위선을,
너의 화려한 성장 속의 그늘을,
다시 너와 나의 일치 속에 숨어 있는 분열을,
나와 너의 약속 속에 번진 무서운 배반을,
천사 속의 악마, 악마 속의 천사를‥‥‥
나는 그때 모든 것을 알았다(93)
인간은 천사 속의 악마이며, 악마 속의 천사이다. 그의 이 주장을 그가 역사-사회적 지평을 개인적인 지평으로 축소시켜 역사를 배반하고 있다고 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수사적 장식이고, 실재로 그 엄청난 일을 당한 사람은 그런 수사에 신경을 쓸 수가 없다. 그는 압도적인 체험 앞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다. 그때 그들은
모두가 생각해낸 최후 진술은, 살고 싶다로 시작해서, 끝내는 저 들꽃처럼 지고 싶다는 것이었다(23)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역사의 진보를 믿는 일일 까? 죽음은 전신 감각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들 중의 몇은 죽었고, 그는 살았다. 역사의 진보? 그것은 꿈속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젊은이답게 절망의 심연에 빠지지 않는다. 그를 절망의 심연에 빠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저주받은 도시에 대한 회상·기억과 풀꽃처럼 져간 동료들에 대한 추모의 정이다. 그는 그것 때문에 차라리 산 다. 그의 시적 승리는, 공포의 도시에서, 좌절하여, 가난한 시인 지망생으로 만족하지 않고, 들풀처럼 져간 동료들의 뒤를 흔들림 없이 뒤따르려는 결의를 보여준 데 있다. 그는 그것이 역사의 진보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고뇌하는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뒤를 이어나가기로 결심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체험적 동지애이지, 사변적 논리가 아니다. 체험적 동지애를 그에게 계속 환기시켜 주는 것은 과거 전회상·기억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전신 장작 적인 것이다. 그의 첫 시집인 <매장시편>을 가득 채우고 있는 회상한다, 기억한다, 생각한다, 듣고 있다, 보고 있다라는 동사들은 고가 체험적 동지애에 얼마나 끈질기게 매달려있는가를 절실하게 보여준다. 과거의 사건, 과거의 인간들은 그의 의식속에서 늘 아직도 현재적이다. 그는 그 과거의 사건을 부단히 되살려내고, 죽은 사람들의 넋을 진혼하여, 그들의 뒤를 따르려 한다.
가장 낮은 땅에 낮은 키를 가진 들꽃을 묶어, 그대의 꽃병에 담아두고 싶습니다. 봄날, 이 땅에 지천으로 피어오르는 자운영, 토끼풀, 엉겅퀴, 달래, 냉이, 씀바귀, 민들래꽃과 같이 다년생 풀뿌리를 가진 그대들을 가리며, 흐리고 음습한 날이면, 맑은 오월의 바람으로 그대들의 슬픈 얼굴을 耉겠습니다. 순수한 모국어의 오랑캐꽃, 달맞이꽃, 개나리, 진달래, 개철쭉, 삐비꽃, 독새기, 패랭이의 횐 꽃, 노란 꽃, 붉은 꽃을 따다가, 그대들이 힘들게 넘던 험한 바위고개마다 뿌리겠습니다. 밀냄새, 보리꽃, 호밀밭을 지나, 감꽃, 살구꽃, 배꽃, 황매화꽃, 복사꽃, 어우러진 과실나무 봄 산천을 지키며 그대들이 살다간 날들을 더듬겠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태어나 가장 애틋하게 져버린 그대들 생애 같은 수많은 이 땅의 꽃잎들을 기억하며, 창포를, 초롱꽃, 수선화, 봉숭아, 콩꽃, 돌미나리, 마늘 꽃으로 푸르러 오는 장엄한 대지에 입 맞추겠습니다.
기뻐하소서, 이제 그대들이 가던 길에 피어나던 개꽃, 자주 달개비, 메밀꽃, 붓꽃, 백합들, 싸리들, 등꽃의 향기를 모아 천국으로 향한 그대의 앞길에 퍼뜨리겠습니다. 서른 세 송이의 튼튼한 꽃 사다리를 만들고 묵주처럼 이어, 칠월 칠석 가문 은하수 길에 놓아드리겠습니다. 평범하고 정성된 꽃다발의 묵주기도를 서른세 배도 더 넘게 보속으로 올리겠습니다. 아직도 얼굴과 이름을 갖지 못한 많은 꽃들처럼 그대들은 지금도 좁은 목관 속에 가까스로 발 뻗고 있지만.(117∼118)
죽은 자들을 시인은 가장 낮은 땅에 가장 낮은 키를 가진 들꽃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그러나 다년생 풀뿌리를 갖고 있다.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태어나 가장 애틋하게 져버린 꽃들이며, 그는 그들이 천국에 가 있을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가 최상급의 부사를 붙여 애도하고 있는 그 들풀들의 꽃은, 이름을 갖지 못한 많은 꽃들처럼 아직 신원되지 않는 채 좁은 목관 속에서 가까스로 발뻗고 있다(서른 세 송이의 꽃이라 그가 한정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의 의식밖에 있어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가 뒤따르려는 것은 그 좁은 목관 속에 간신히 발뻗고 있는 들꽃이다.
흔들리지 않으리
스쳐 지나는 바람에도
터져 꽃망울이 맺힐 것 같은
한때의 푸른 상처 속에서
아프게 일어서서 밀려을 것 같은
그리움 잦은 수척한 가슴께
때아닌 봄비가 마른 나뭇가지를 적시고
멋대로 웃자란 슬픔의 줄기와 합세하는데
흔들리지 않으리
오늘도 우리 일용할 양식을
이 땅에서 거두고 나눠먹었으므로
셀 수 없는 기다림의 나날 속에서도
우린 아직 사랑하고 있으므로
천근 만근 억누르는 그 산 그 하늘 아래
팔 만 사 천의 고해 속에서도
흙 뿌리를 박고 사는 쑥 같은 이웃들
끝내 솟아오르고만 싶은 목숨을 위로
생명의 봄비가 내리는데
흔들리지 않으리
늘 그렇게 꽃이 되고
향기가 된 것 같은 우리들
간절한 소망 위에
수세미 같은 희망 위에
푸르게 싹터오는 사랑이여(79∼80)
그는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다짐한다. 그들이 들꽃이듯 그도 또한 들꽃이다. 그는 그들이 되고 싶다. 그의 미래 전망은 그런 의미에서 활짝 열려 있다.
최하림의 꽃은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고통의 꽃이다. 그것에 반하여 임동확의 꽃은 미래를 향해 활짝 열린 바람의 꽃이다. 어느 꽃이 더 아름다울까?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바라보고, 웃는 대신 운다. 50의 나이에 울음은 가슴 아프다.
부기 : 최하림의 시는, (<문학과 사회> 89년 겨울호, pp.1408-1411)에 실려 있으며, 임동확의 시는, 임동확, (<매장시편> 민음사, 1987)에 실려 있다. 최하림의 시는 면수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괄호 속의 숫자는 임동확의 것이다.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전망
그후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곳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은 어느 곳에도 없다(95)
1980년대는 광주와 죽음-죽음의 연대이다. 그 연대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는, 40년대 후반의 아우슈비츠와 유태인 학살을 상기시키는, 아니 그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던, 불행한 연대이다. 처음에는 분노와 비탄과 절망, 그리고 침묵으로 점철되었던 광주는, 그 뒤에는 일종의 원죄 의식으로 변화하여, 그것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물론 육체적으로는 살 수 있겠으나, 정신적으로는 살기 힘든, 그런 장소가 된다. 그곳은 더구나 오랫동안 소외 되어온 곳이어서 역사적 숙명론의 흔적-흔적? 차라리 실체가 아닐까?-까지 보여준다. 시인들도 그 원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80년대에 시작 활동을 한 거의 모든 시인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그 원죄 의식을 드러낸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과시로, 어떤 경우에는 자기 변호로, 어떤 경우에는 겉 멋으로 그런 시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인들은, 성실하고 고통스럽게 광주와 마주친다. 광주 체험은 그러나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그것을 시화시키는데, 시인들은 큰 고통을 겪는다. 광주를 노래하는 순간, 그 노래는 체험의 절실함을 잃고, 자꾸만 수사가 되려 한다. 성실한 시인들의 고뇌는 거기에서 나온다. 광주에 대해 눈을 감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 시를 시라고 발표할 수도 없다. 그 고뇌를 예술적으로 현명하게 헤치고 나온 시인들은 불행하게도 많지 않다. 나는 그 고뇌를 성실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자기 나름의 시적 공간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두 시인의 시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시는 외침이 아니라 외침이 터져 나오는 자리라는 것이 그 결과 밝혀지기를 희망한다.
내가 다루려 하는 두 시인은 최하림과 임동확이다. 그 두 시인은 그들의 시적 성과에 합당한 평가를 아직 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이 도시의 보이지 않는
눈이 나를 보고 있다
이 도시의 집들이
나무들이
창들이
굴뚝들이
새벽마다 쓸려가는
이 도시의
쓰레기와 병들과
계급과 꽃
데모와
바람과
바랑의 외침들이
것이지 않는 내 손짓
보이지 않는 내 몸짓
보이지 않는 내 소리짓
을 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내 맘 속의 맘까지도
저 배반과 음모까지도 보고 있다
이 도시의 눈들이 내 모든 것을 보고 있다
오오 나를 감시하는 눈들이 보는 저 꽃
하늘의 상석에 올려진 아직도
피비린내 나는
눈부시고 눈부신 꽃
살가죽이 터지고
창자가 기어나오고
신음 소리도 죽은
자정과도 같은,
침묵의 검은 줄기가
가슴을 횝쓸면서
발끝에서 정수리로
오오 정수리로‥‥‥
의미심장하게도 80년대 마지막에 발표된 이 시(<문학과 사회>, 89년 겨울호)는, 내 생각으로는 80년대에 썩어진 광주시 중에서도 백미일 뿐 아니라, 최하림의 시중에서도 뛰어난 시이다. 연의 구별이 없지만, 이 시는 실제로는 두 개의 연으로 이뤄져 있다. 중간 부분의 "을 보고 있다"까지가 한 연이고 그 뒤가 또 한 연이다. 광주임에 틀림없는 한 도시에서의 시인의 심적 갈등을 그리고 있는 이 시의 전반부는 두 개의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 : 이 도시의 보이지 않는 눈이 나를 보고 있다. 이 도시는 보이지 않는 내(손/몸/소리)짓을 보고 있다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우선 문장 상으로 보자면, 보고 있다라는 진행형이 눈에 두드러진다. 그것은 과거의 일도 아니고, 미래의 일도 아니다. 그것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그 다음 의미론상으로 보자면, 보이지 않는 눈/보는-눈, 보이지 않는- 내-짓/보이는-내-짓의 대립이 눈에 띈다. 도회의 보이지 않는 눈이 보이지 않는 내 짓을 보고 있다. 바로 그것이 시인의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독자들은 이 대목까지만 읽고서는, 왜 도시의 눈이 보이지 않는지, 왜 내짓이 보이지 않는지, 그런데도 도시는 무엇을 보고 있으며, 시인은 왜 갈등을 느끼는지 알 수가 없다. 그 갈등은 시의 리듬에 의해 더욱 고조된다. 첫 행의 '보이지 않는'과 2행의 '눈'은 분리되기 힘든 단어들인데, 시인은 과감하게 그것들을 분철한다. 그 결과 '보이지 않는'과 '눈'이 다 같이 강조된다. 그것은 또한 두 박자, 세 박자의 리듬을 보여줌으로써 시적 혼란을 예감케 한다.
이 도시의/보이지 않는
눈이/나를/보고 있다
그 다음은 한 박자를 이루는 말들이, 혹은 두 박자와 한 박자의 뒤섞음 ol 15행정도 진행되어, 혼란은 극심해진다. 그리고 마지막의
을/보고 있다
라는 흥미 있는 리듬이 나타나, 보임1안 보임의 대립을 극적으로 부조한다.
보이지 않는 내 짓이 무엇인가가 밝혀지는 것은 후반에 이르러서이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이, 내 맘속의 맘, 배반과 음모라는 것을 밝힌다. 이 도시에서 일어난 일을 둘러싼 어떤 음모와 배반이 보이지 않는 그의 짓이다. 그 배반과 음모를 이 도시의 눈들이 보고 있다. 전반부의 단수형 눈은 후반에서는 복수의 눈이 되어 육체 성을 드러낸다. 도시가 본다기보다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보고 있다. 그 눈들은 시인을 감시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 이 시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지만, 놀랍게도 시인은 꽃 때문이라고 말한다. 눈들은 한 쪽으로는 시인을 감시하면서, 한쪽으로는 꽃을 감시하고 있다. 그 꽃은 싱싱한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하늘의 상석에 올려진 꽃이다. 거기에서 주목할 것은 아직 도라는 말이다. 의미론적으로 보자면, 그 아직도는 피비린내 나는에 걸린다. 그러나 시인은 아직도 와 피비린내를 분철시켜 -전문적인 용어로는 척치시켜, 아직도와 상석을 은연중에 결부시킨다. 꽃은 아직도 피비린내 나며, 아직도 하늘의 상석에 올려져 있다. 그 꽃에 대해 시인은
1. 아직도 하늘의 상석에 올려져 있다;
2. 아직도 피비린내 난다;
3. 눈부시고 눈부시다
라고 말한다. 그 묘사에는 광주 사태의 모든 것이 간결하게 함축되어있다. 그 다음에 후반부에서 흥미 있는 것은, 자정과도 같은 뒤에 찍힌 쉼표이다. 그 쉼표 때문에
살가죽이 터지고
창자가 기어나오고
신음 소리도 죽은
자정과도 같은,
은 앞의 꽃에도 걸리고, 뒤의 침묵의 검은 줄기에도 걸리게 되어 있다. 꽃에 걸리면, 그 꽃은 아직도 살가죽이 터지고, 창자가 기어 나오나, 신음소리도 못 내는 검은 꽃이며, 검은 줄기에 걸리면, 그 줄기는 살가죽이 터지고, 창자가 기어 나와도 신음 소리 하나 못 내는, 그래서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시인을 꼼짝 못하게 하는 침묵의 줄기이다. 검은 꽃과 시인을 침묵시키는 줄기는 같은 것이다. 그 겹침이 시인을 전율케 하고 불편하게 하여, 시인은
침묵의 검은 줄기가
가슴을 휩쓸면서
발끝에서 정수리로
오오 정수리로‥‥‥
라는 탄식을 토해내며 침묵의 소리로 크게 외친다 : 죽은 자들이여 너희는 어디 있는가. 그 외침은 시인의 내적 외침이면서, 시의 제목이기도 해 서, 시의 행간마다에 깊숙이 보이지 않게 숨어있다. 그러나 귀 있는 자들에게는 그 외침이 그 어느 외침보다 더 크게 울린다.
이 시는 아름답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으나, 아름다운 것 이상인 충격 적인 이미지로 팍 차 있다. 그 이미지들이 이 시의 울림을 크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지만-또 다른 요소는 리듬이다-그것은 침묵의 외침으로 더욱 풍요해진다. 우선 나를 보고 있는 이 도시의 보이지 않는 눈이라는 이미지. 이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눈이라, 눈만으로 이뤄진 릴케의 천사와 다르게 이 도시의 눈은 침묵하는 심연의 눈이다. 도시도 눈이며
이 도시의 집들이
나무들이
창들이
굴뚝들이
새벽마다 쓸려가는
이 도시의
쓰레기와 병들과
계급과 꽃
데모와
바람과
바람의 외침들이
다 눈이며,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다 눈이다. 그 눈들은 이방인들을 , 낯선 것들을 보고 있다, 주시하고 있다. 그 눈을 피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다 눈인 곳에서는 보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부릅뜨고 낯선 것들을 주시하고 있는 침묵의 도시, 그 도시에서 전율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 다음, 눈부시나 아직 피비린내 나며, 아직 하늘의 상석 위에 놓여 있는 꽃. 꽃은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것의 은유이다. 그런데 시인의 끝에서는 피비린내가 난다. 그러면서도 눈부시고 눈부시다. 끔찍한 꽃이다. 그 꽃은 더구나 살가죽이 터지고, 창자가 기어 나온 꽃이다. 아름다운 것이 견딜 푸 없을 정도로 훼손된 것이 시인의 꽃이다. 그 꽃은 또한 자신이기도 하다. 이 끔찍함이 이 시의 기본 동력 중의 하나이다. 그런 꽃을 보고 난 뒤에는
사랑하였던 바다가 사라지고
검은 바다에 철침 같은 비가 꽂힌다.
바다도 검은 바다가 된 것이다. 그 검은 꽃과 검은 바다는 깊이가 없는 심연이다. 그의 심연의 특징은 그 심연의 속이 비친다는 점이다. 꽃은 지고 남아 있는 것은 투명한 심연뿐이다. 왜 속이 보일까? 거기에도 시인의 비밀 중의 하나가 숨어 있다. 다 보이는 심연인데도 우리는 속이 안 보이는 심연이라고 믿고 있는 척 할뿐이다.
속이 비치는 심연 속으로
가고 있었네 심연은
시간이었고 고통이었네
자락마다 진홍빛 꽃들이
피어나고 바다 언덕에서
종소리 울렸네 아직도
살아 있는 날들이여 더불어
사랑하고 더불어 괴로워했던 이별들이여
나무들은 그리고 저주받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깊은 소리들은
공중으로 퍼져나가고 기억이
어룽진 검은 너의 기슭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나는 가고 있었네
가고 있었네 만곡을 지나는
고대 목선처럼 꽃들이 져내리고
종소리 울리면서 사물을 울리는
푸른 소리 속으로 속이 비치는
심연 속으로 심연은
시간이었고 아픔이었네
이 시는 앞의 시보다 훨씬 평이하게 꽃과 심연과 건은 내면을 노래한다. 문장과 리듬이 그러하며, 이미지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평이하다는 뜻은 흔히 쓰이듯 평범하다는 뜻이 아니라, 시를 이루는 요소들의 관계가 이해하기 비교적 쉽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의 눈[/들]이 보는 보이지 않는 내 짓은, 속이 비치는 심연으로 바뀌며(보이지 않으니까 심연이며, 보이니까 속이 비친다), 눈부신, 피비린내 나는 꽃은, 심연(바다) 언덕에서 피어났다. 만곡을 지나는 고대 목선처럼 져 내리는 진흥 빛 꽃으로 바뀐다. 비교적 낯선 이미지인 저주받은 내면, 검은 바다 기슭은 그러니까 속이 비치는 심연의 변형이다. 그 저주받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깊은 소리는 침묵의 소리의 다른 말이다. 앞의 시를 평이하게 되풀이하고 있는 이 시는
심연은
시간이었고 고통이었네
라고 말하기도 하고,
심연은
시간이었고 아픔이었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연이 시간인 것은 그 심연을 낳은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고통이며, 아픔인 것은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치유되기 힘든 상처이기 때문이다. 관념적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으로 존재하며, 아직도 우리의 의식을 짓누르는 깊은 상처를 우리는 어떻게 치유해야 할 것인가? 시인은
이제 나는 가야 한다 가서
나의 떨린 어깨를 두 팔로 감싸며
아무 말도 말아야 한다
라고 (우리들이 걸었던 길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에서 말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상처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그 질문은 고통스럽다.
최하림은 심연치 밖에서 심연 안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는 없으나, 40대의 나이에 일어난 광주 사건을 그는 광주의 밖에서 겪는다. 그는 일상적인 사회인으로서 그것을 추 체험한다. 그러나 임동확은 사회학자들이 주변인이라고 부르는 인간으로서 그 사건을 직접 겪는다. 그는 일상인이 아니기 때문아 일상적인 삶의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으로서 그가 믿는 가치 체계에 의해 그것을 보고 느끼고 판단한다. 그는 아직 사회에 편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주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주변인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체험할 때, 가장 숭고한 반응은 그것에 뛰어들어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웅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산되지 아니한, 순진한, 아니 순수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행위는 아니다. 임동확 역시 그렇지 못했다(그러지 못한 것이 그뿐이겠는가. 나 역시 그러했다 60년 봄에 나는 경무대 앞까지 갔으나, 총소리가 났을 때, 내 몸은 한 가게 목판 밑에 있었다. 나는 내가 비겁한 놈이라는 자학을 하면서, 경무대 앞에서 장충단까지를 터덜터덜 걸어갔다. 햇빛은 밝게 빛나고, 날씨는 알맞게 쌀쌀했다). 그도 자신을 비겁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실 끝까지 남아 있지 않았다
눈과 귀를 막은 채 불타오르는 전쟁터
동료의 죽음과 울부짖음을 외면했다
나는 솔직히 비겁자였다 부어오른 편도선과
발목의 부상을 핑계삼아 전선을 벗어났었다
무기력한 흰손의 가난한 서정을 좇는 시인 지망생에 불과했다(91-92)
그는 부어오른 편도선과 발목의 부상을 핑계삼아 죽음의 자리를 벗어난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었지,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일생 내내 그를 불편하게 만들리라는 것을 그는 그때 모르고 있었다. 그는 영웅도 아니었고, 시인도 아니었고, 단지 비겁자였을 뿐이다. 시인으로서 그가 꿈꾼 시는 상징의 시이다.
(어두운 시대의 시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상징이다. 소수인의 독점물일지라도 일정한 긴장과 자기 통제 아래 이뤄지는 상상력의 문학은 암울한 시대 상황과 싸우는 유일한 부드러움이다. 무기이다. )(37)
그는 그 상징의 시를 쓸 시인이다. 그런데도 그는 편하지 않다. 비겁자로서 그 잔인한 거리를 견디어 내기는 쉽지 않다. 그는 방황한다. 정상적인 일 상인으로서 사회에 편입되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예외자로서 사회에서 격리되는 것도 싫다. 그렇다면 그 중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중간의 길이 방황이다. 보라,
아, 이제는 피비린내 가득한 거리를 더 이상 견디어낼 수 없어
그후 나는 석삼년 동안을 군대 생활로 메웠습니다
그럭저럭 복학해 뒷전에 물러나 일년을 보내다가
그것마저 포기하고 해남 대흥사 암자에 은거하다가
어느덧 9년만에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쥐었습니다(99)
비겁자는 방황하면서 자기는 평화주의자라고 강변한다. 그는 그러니까 비겁한 평화주의자이다(78). 평화와 화해를 주장할 수 없는 시대에 그는 시인으로서 평화와 화평을 주장하고 싶어한다. 그의 상징의 시는 부드러움이 무기인 시이다. 그러나
헤매본 자만이 아는 짐승의 시간들(55)
을 잊을 수가 없다. 짐승의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다. 남아 있는 것은 살기 어린 조소와 회의뿐이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무의미한
역사의 진보를 무조건 신뢰할 수 없었다
모두들 함부로 영혼을 위탁하지 않았고
부활도 화려한 장례식도 믿지 않았다
남은 것은 살기 어린 조소와 회의뿐이었다(41)
그 공포의 도시(40), 저주받은 도시(50)에서 일어났던 일은 인간은 할 수 없는, 짐승의 짓이다. 짐승의 짓을 체험한 사람은 순진하게 역사의 진보를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역사는 때로 우회한다라는 변명도, 압도적인 짐승의 시간을 체험한 사람에겐 췌사이다. 밖에서, 뒤에서, 그것을 체험한 사람은 역사의 우회적 진보에 대해 믿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가 없다. 함부로 영혼을 위탁하는 종교도, 부활을 논의하는 종교도, 화려한 장례식과 같은 세속적 위안도, 그는 믿을 수가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짐승들의 짓에 대한 조소와, 인간에 대한 회의뿐이다. 그것을 우리는 아우슈비츠에서 이미 본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민족에 의한 유태인 박해였지, 같은 민족의 같은 민족에 대한 박해는 아니었다. 회의와 조소는 그래서 더욱 가중된다. 시인으로서 임동확이 그때 생각한 것은
역사에 대하여
꿈꾸는 것과 침묵하는 일만이 남아(57)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진보를 찬미할 수 없다. 그렇다고 부인할 수도 없다. 그러니 침묵하거나, 역사의 진보를 상상력 속에서 꿈꾸는 수밖에 없다. 그는 비겁한 평화주의자이다. 그 평화주의자는 방황하면서-방황하지 않고 열심히 주장하고 선동할 수 있는 자는 행복 할진저 ! -꿈꾼다. 그는 자기의 비겁을 조소하면서 가난한 시인의 삶을 꿈꾼다. 꿈꾸는 방황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여러 곁의 동물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그때 너는 검문소를 피해 논두렁을 밟으며
어디로 가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무정한 세월이 복류하고 있는 동안
그대들이여
나는 보았다. 나의 안락함 뒤의 엄청난 부정을,
너의 너그러운 미소 뒤에 감추어진 적의를,
그리고 나의 평화의 구호 속의 지독지 위선을,
너의 화려한 성장 속의 그늘을,
다시 너와 나의 일치 속에 숨어 있는 분열을,
나와 너의 약속 속에 번진 무서운 배반을,
천사 속의 악마, 악마 속의 천사를‥‥‥
나는 그때 모든 것을 알았다(93)
인간은 천사 속의 악마이며, 악마 속의 천사이다. 그의 이 주장을 그가 역사-사회적 지평을 개인적인 지평으로 축소시켜 역사를 배반하고 있다고 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수사적 장식이고, 실재로 그 엄청난 일을 당한 사람은 그런 수사에 신경을 쓸 수가 없다. 그는 압도적인 체험 앞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다. 그때 그들은
모두가 생각해낸 최후 진술은, 살고 싶다로 시작해서, 끝내는 저 들꽃처럼 지고 싶다는 것이었다(23)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역사의 진보를 믿는 일일 까? 죽음은 전신 감각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들 중의 몇은 죽었고, 그는 살았다. 역사의 진보? 그것은 꿈속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젊은이답게 절망의 심연에 빠지지 않는다. 그를 절망의 심연에 빠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저주받은 도시에 대한 회상·기억과 풀꽃처럼 져간 동료들에 대한 추모의 정이다. 그는 그것 때문에 차라리 산 다. 그의 시적 승리는, 공포의 도시에서, 좌절하여, 가난한 시인 지망생으로 만족하지 않고, 들풀처럼 져간 동료들의 뒤를 흔들림 없이 뒤따르려는 결의를 보여준 데 있다. 그는 그것이 역사의 진보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고뇌하는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뒤를 이어나가기로 결심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체험적 동지애이지, 사변적 논리가 아니다. 체험적 동지애를 그에게 계속 환기시켜 주는 것은 과거 전회상·기억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전신 장작 적인 것이다. 그의 첫 시집인 <매장시편>을 가득 채우고 있는 회상한다, 기억한다, 생각한다, 듣고 있다, 보고 있다라는 동사들은 고가 체험적 동지애에 얼마나 끈질기게 매달려있는가를 절실하게 보여준다. 과거의 사건, 과거의 인간들은 그의 의식속에서 늘 아직도 현재적이다. 그는 그 과거의 사건을 부단히 되살려내고, 죽은 사람들의 넋을 진혼하여, 그들의 뒤를 따르려 한다.
가장 낮은 땅에 낮은 키를 가진 들꽃을 묶어, 그대의 꽃병에 담아두고 싶습니다. 봄날, 이 땅에 지천으로 피어오르는 자운영, 토끼풀, 엉겅퀴, 달래, 냉이, 씀바귀, 민들래꽃과 같이 다년생 풀뿌리를 가진 그대들을 가리며, 흐리고 음습한 날이면, 맑은 오월의 바람으로 그대들의 슬픈 얼굴을 耉겠습니다. 순수한 모국어의 오랑캐꽃, 달맞이꽃, 개나리, 진달래, 개철쭉, 삐비꽃, 독새기, 패랭이의 횐 꽃, 노란 꽃, 붉은 꽃을 따다가, 그대들이 힘들게 넘던 험한 바위고개마다 뿌리겠습니다. 밀냄새, 보리꽃, 호밀밭을 지나, 감꽃, 살구꽃, 배꽃, 황매화꽃, 복사꽃, 어우러진 과실나무 봄 산천을 지키며 그대들이 살다간 날들을 더듬겠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태어나 가장 애틋하게 져버린 그대들 생애 같은 수많은 이 땅의 꽃잎들을 기억하며, 창포를, 초롱꽃, 수선화, 봉숭아, 콩꽃, 돌미나리, 마늘 꽃으로 푸르러 오는 장엄한 대지에 입 맞추겠습니다.
기뻐하소서, 이제 그대들이 가던 길에 피어나던 개꽃, 자주 달개비, 메밀꽃, 붓꽃, 백합들, 싸리들, 등꽃의 향기를 모아 천국으로 향한 그대의 앞길에 퍼뜨리겠습니다. 서른 세 송이의 튼튼한 꽃 사다리를 만들고 묵주처럼 이어, 칠월 칠석 가문 은하수 길에 놓아드리겠습니다. 평범하고 정성된 꽃다발의 묵주기도를 서른세 배도 더 넘게 보속으로 올리겠습니다. 아직도 얼굴과 이름을 갖지 못한 많은 꽃들처럼 그대들은 지금도 좁은 목관 속에 가까스로 발 뻗고 있지만.(117∼118)
죽은 자들을 시인은 가장 낮은 땅에 가장 낮은 키를 가진 들꽃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그러나 다년생 풀뿌리를 갖고 있다.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태어나 가장 애틋하게 져버린 꽃들이며, 그는 그들이 천국에 가 있을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가 최상급의 부사를 붙여 애도하고 있는 그 들풀들의 꽃은, 이름을 갖지 못한 많은 꽃들처럼 아직 신원되지 않는 채 좁은 목관 속에서 가까스로 발뻗고 있다(서른 세 송이의 꽃이라 그가 한정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의 의식밖에 있어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가 뒤따르려는 것은 그 좁은 목관 속에 간신히 발뻗고 있는 들꽃이다.
흔들리지 않으리
스쳐 지나는 바람에도
터져 꽃망울이 맺힐 것 같은
한때의 푸른 상처 속에서
아프게 일어서서 밀려을 것 같은
그리움 잦은 수척한 가슴께
때아닌 봄비가 마른 나뭇가지를 적시고
멋대로 웃자란 슬픔의 줄기와 합세하는데
흔들리지 않으리
오늘도 우리 일용할 양식을
이 땅에서 거두고 나눠먹었으므로
셀 수 없는 기다림의 나날 속에서도
우린 아직 사랑하고 있으므로
천근 만근 억누르는 그 산 그 하늘 아래
팔 만 사 천의 고해 속에서도
흙 뿌리를 박고 사는 쑥 같은 이웃들
끝내 솟아오르고만 싶은 목숨을 위로
생명의 봄비가 내리는데
흔들리지 않으리
늘 그렇게 꽃이 되고
향기가 된 것 같은 우리들
간절한 소망 위에
수세미 같은 희망 위에
푸르게 싹터오는 사랑이여(79∼80)
그는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다짐한다. 그들이 들꽃이듯 그도 또한 들꽃이다. 그는 그들이 되고 싶다. 그의 미래 전망은 그런 의미에서 활짝 열려 있다.
최하림의 꽃은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고통의 꽃이다. 그것에 반하여 임동확의 꽃은 미래를 향해 활짝 열린 바람의 꽃이다. 어느 꽃이 더 아름다울까?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바라보고, 웃는 대신 운다. 50의 나이에 울음은 가슴 아프다.
부기 : 최하림의 시는, (<문학과 사회> 89년 겨울호, pp.1408-1411)에 실려 있으며, 임동확의 시는, 임동확, (<매장시편> 민음사, 1987)에 실려 있다. 최하림의 시는 면수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괄호 속의 숫자는 임동확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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