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아빠는 영원히 우리 아빠”/5ㆍ18부상자 김요한씨 그 이후.임미희(월간예향, 1988. 5)
본문
특집/「光.州」계속되고 있는가
“아빠는 영원히 우리아빠”
5ㆍ18부상자 김요한씨 그 이후
‘나 어느날 괴로워서 눈물로서 아뢰올때/주님께서 나의 맘 아시고 위로하여 주셨네/너 슬퍼마라 언제나 함께 하고 무거운 짐 대신지리/너괴로워 마라…’
<늘노래 선교단 曲「평화의 노래」중>
휠체어를 탄 남편은 기타를 치고, 아내는 전자오르겐을 치며 노래 부른다. 김요한(金要漢ㆍ30) 정미선(鄭美善ㆍ28)부부.「새울림 중창단」의 멤버다. 신자의 대부분이 장애자인 광주 새울림교회의 성가대다. 부인 정씨가 중창단의 리드싱어인 이들 일 가족은 일주일에 두세번은 어김없이 교회에 나간다. 다섯 살박이 딸(珍英)을 남편의 무릎에 앉힌채, 남편의 휠체어를 밀고 교회로 향한다. 김요한씨가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것은 80년 5ㆍ18이 극에 달하던 그해 5월 21일, 총상을 입고서였다. 척추신경마비―총알이 목과 등을 관통하면서 척추신경마비가 왔고 가슴밑으로는 거의 움직일수 없는 상태다. 신경이 죽어 뜨겁고 찬 것은 물론 살이 썪어가도 가벼운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다. 아홉시간에 걸친 대수술이 수차례, 거의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8년의 세월을 보냈다.
스물두살. 입대를 한달남짓 남겨둔 때였다. 5월 15일부터 대인동에 있는 조그마한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한달동안 집에 있기가 따분해서였다. 78년 조대부고를 졸업했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은 꿈도 꿀수 없었다. 그무렵 광주시내에는 연일 시위가 계속됐다. 21일에는 상황이 극에 달했다.“이대로 있다가는 안되겠다 싶어 송정리 집에 가려고 나섰습니다. 회사에서 숙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회사에 있었죠. 그런데 교통이 두절됐습니다. 시내상황을 알아보러 가톨릭센터 앞으로 갔다가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4 구의 시체를 봤죠. 도청주변에는 많은 사상자들이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가 군중들사이에서 들리더군요. 다시 도청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한발의 총성에 고꾸라져
그러나 정문으로 가면 위험할 것 같아 현 광주은행 본점 뒷골목으로 우회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광주경찰서앞 4거리까지 나아갔죠. 거기서서 두리번 거렸으나 사상자는 없고 상무관 옥상에 무장한 군인들이 보이더군요. 더 이상 나아가면 위험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겨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디선가 귀를 찢는 듯한 한발의 총성이 들리더니 이내 몸이 고꾸라졌습니다”도망을 가야겠는데 몸을 전혀 가눌수가 없었다. 고개만 겨우 움직일수 있을 뿐 손끝 발끝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총알이 목밑과 등을 관통하면서 척추를 건드린 것이다.“꼼짝도 못하고 그렇게 누워 있는데 순경 한명이 다가와서‘어떻게 됐냐’고 묻더군요.‘총을 맞은 것 같은데 나를 병원으로 옮겨 달라’고 했죠. 그때 경찰서 안쪽에서 순경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곧장 순경이 경찰서 마당으로 달려가고 호되게 뺨을 때리는 소리, 너 죽을라고 환장했냐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때가 오후 4시쯤 됐을 겁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한참후에 젊은 청년이 김씨를 깨워 살았음을 확인한후 낮은 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일행처럼 보이는 청년 3∼4명이 들 것을 들고 나타났고 그들은 곧 김씨를 부근의 K외과로 옮겼다.“의사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면 상처부위를 꿰매더군요. 또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그날 저녁 8시께 어머니(58)가 병원에 오셨습니다. 송정리에서 걸어온 것이죠. 그런데 그 다음날 오후에 갑자기 숨이 차오고 호흡이 가빠지더군요. 앰뷸런스를 타고 전대병원으로 갔습니다. 도청쪽으로 바로 못가고 우회해서 병원에 도착했는데 가는 순간에도 총성이 시끄럽게 들리더군요. 병원 응급실은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습니다. 복도까지 발디딜 틈도 없이 피투성이 환자들로 가득 찼더군요. 의사가 저를 보더니 가망이 없다고 했었죠. 저는 제쳐두고 회복 가능한 환자부터 치료 하더군요. 그대로 응급실에서 사흘을 보냈습니다.”
‘가망없다’응급실에서 3일
사흘만에 6층 신경외과 입원실로 옮겨졌다. 비로소생(生)의 확신을 얻었으나 그때부터는 고통스런 병상 생활이 시작됐다. 81년 3월 28일 퇴원때까지 무려 10개월동안 몸의 3분의 2이상이 무감각한 상태에서 세 번의 대수술, 다시 퇴원후 두 번의 욕창수술로 온몸은 만신창이가 됐다.“입원 두달만에 겨우 양팔을 움직일수 있게 됐죠. 8월말부터는 휠체어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휠체어를 타고 병원 6층에서 비상계단으로 나와 1년만에 처음으로 광주시가지를 내려다 보았어요. 전경이 어찌나 아름답고 도시가 선명하게 와 닿는지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서 깨어나 다시 세상을 바라보는 기쁨이랄까…. 비록 세상이 오염되고 추한면도 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이렇게 아름다울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입원 일주일만에 첫 수술을 했다. 수술실에서가 아니라 병실에서 였다. 마취도 하지 않았다. 이미 신경이 죽어 아픔을 모르기 때문에 마취할 필요가 없었다.“회진을 도는 의사가 등의 상처부위를 누르니까 피고름이 나왔습니다. 총알이 관통해 구멍이 뚫린 상처부위를 K외과에서 꿰맸는데 수술이 잘못됐나 봐요. 안에서 살이 썩어 피고름이 나온 것입니다. 수술실로 가지도 않고 드레싱카를 갖고 병실에서 바로 수술을 받았죠. 상처부위를 다시 째고 불순물을 갉아 낸것이예요. 그래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김씨는 아파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픔조차 못느끼는 고통이 더욱 크다. 자기 몸이 썩는지, 곪는지, 덴지조차 모른다. 이러한 무감각은 김씨의 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가만히 누워만 있기 때문에 등 엉덩이 허벅지 등에 욕창이 끊이질 않았다. 신경이 죽은 상태에서도 피부가 호흡을 하므로 몸을 부분적으로 움직여 줘야 하나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욕창으로 9시간의 대수술
“등수술 3일만에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살을 도려냈죠. 또 그해 8월께에는 계속 열이 높았습니다. 열이 심할때는 체온계의 한계를 넘어버렸으니까요. 병원에서 열병으로 진단을 내리더군요. 계속 열병 치료약만 먹었죠. 그러던 어느날 간호원이 엉덩이에 주사바늘을 꼽는 순간 주사기에 피고름이 나왔습니다. 왼쪽 허벅지살이 썩었던 거예요. 왼쪽으로만 누워 있었더니 그랬던거죠. 그래서 열이 났던 것인데…. 85년 5월∼7월, 86년 7월∼8월에도 두차례에 걸쳐 엉덩이 욕창수술을 받았습니다. 9시간이나 걸리는 대수술이었죠.”그뿐만이 아니다. 겨울에는 방에서도 살을 데기 일쑤다. 방바닥이 별로 뜨겁지도 않은데도 한곳에 오래 앉아있어 곧잘 화상을 입는다. 배변도 힘들다. 내장 기관이 원활치 못해 소화도 잘안되지만, 변의를 거의 못 느끼기 때문에 배변의 고통은 더욱 크다. 위장약, 변비약 등 약물치료를 하지만 먹는 것이 두려울 정도다. 소변은 규칙적으로 보면 되지만 그나마 일주일에 한번씩 대변을 보는 날은 사투(死鬪)하지 않을 수 없다.
“대변을 본 날은 ‘내 생명이 앞으로도 일주일 더 연장됐구나’하는 안도감에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보통 7∼10일에 한번씩 보는데 변의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손으로 파내야 하죠. 장갑을 끼고 손가락을 항문에 넣어 파내는 것입니다. 치질은 말할것도 없고, 변비가 심해요. 대부분 피가 섞여 나요죠. 대변을 보는 날은 어찌나 힘을 쓰는지 신열이 나고 하루종일 끙끙 앓아요.”김씨의 삶은 절망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준 사람이 있다. 정미선씨. 그의 부인이다. 84년 그녀와 결혼하면서 그의 삶은 활기를 찾고 몸은 불편했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수 있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83년 4월 5일. 광산구 대촌면「실로암 재활원」개원식에서였다. 정씨는 광주신학교에 다니면서 장애자 봉사활동을 펴고 있던 때였다. 그로부터 한달만에 약혼을 하고 1년후인 3월 17일 결혼식을 올렸다. 친정식구는 참석하지 않은채 새울림교회에서였다.“아빠를 처음 본 순간 저 사람은 내 사람이다하는 생각이 와 닿더군요. 장애자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생각을 갖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개원식이 끝나자마자 집을 물어서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친정부모님(아버지는 순천노회 소속 교회목사)이 완강히 반대했어요. 약혼후에도 여러차레 붙들려가고…….”그들은 가난했지만 정직하고 진실되게 살려고 노력했다. 네손을 모아 부지런히 일했다. 부인이 한겨울에 튀김집에서 일을 거들어주며 일당 3천 3백원을 벌었는가 하면 피아노교습도 했다. 파출부로 다닐때면 김씨는 애를 보았으며, 만화가게도 차렸었다.“무진교회 강신석목사와 광주 YWCA 명예회장 조아라씨가 많이 도와줍니다. 부상당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주었어요. 그분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용기있게 살아올수 있었죠. 정부에서는 병치료에 관계되는 것 외에는 일체 도움받은 것이 없습니다. 생보카드로 월 1회씩 전대병원에서 위장약 비약등을 타오죠. 매년 정기검진도 받아야겠지만 워낙 비싸고…….”그들은 물질적인 것은 가시적ㆍ상대적인 것이며 사랑과 믿음만이 진실임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진 것은 없었지만 진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으며, 행복은 물질의 풍요속에 있지 않음을 확신하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겨낼 수 있었다.“처음과 마찬가지로 아빠는 영원히 우리 아빠예요.”이번 구정때 결혼후 처음으로 진영이를 데리고 친정에 갔다는 부인의 말 끝에 김씨는 이렇게 덧붙었다. “앞으로는 「새울림중창단」을 통해 선교활동을 하며 살아갈 작정입니다. 선물로 주신 진영이와 함께 우리 세식구는 소외된 곳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열심히 살 겁니다.”방문을 나서려는데 김씨가 가훈이라며 불청객(?)에게 성경 한 구절을 읽어주었다.‘일이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부이니라.’(전도서 12장13절)인간이 아무리 자기의 의식과 지식과 물질로 세상을 맘대로 살아 보려 했으나 결국은 슬픔 고통 뿐이었으니 오히려 근본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뜻이란다. 세 번 거절당하고 네 번째 어렵게 이뤄진 취재였다. 방문밖에 놓인 휠체어가 봄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글/임 미 희 기자
“아빠는 영원히 우리아빠”
5ㆍ18부상자 김요한씨 그 이후
‘나 어느날 괴로워서 눈물로서 아뢰올때/주님께서 나의 맘 아시고 위로하여 주셨네/너 슬퍼마라 언제나 함께 하고 무거운 짐 대신지리/너괴로워 마라…’
<늘노래 선교단 曲「평화의 노래」중>
휠체어를 탄 남편은 기타를 치고, 아내는 전자오르겐을 치며 노래 부른다. 김요한(金要漢ㆍ30) 정미선(鄭美善ㆍ28)부부.「새울림 중창단」의 멤버다. 신자의 대부분이 장애자인 광주 새울림교회의 성가대다. 부인 정씨가 중창단의 리드싱어인 이들 일 가족은 일주일에 두세번은 어김없이 교회에 나간다. 다섯 살박이 딸(珍英)을 남편의 무릎에 앉힌채, 남편의 휠체어를 밀고 교회로 향한다. 김요한씨가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것은 80년 5ㆍ18이 극에 달하던 그해 5월 21일, 총상을 입고서였다. 척추신경마비―총알이 목과 등을 관통하면서 척추신경마비가 왔고 가슴밑으로는 거의 움직일수 없는 상태다. 신경이 죽어 뜨겁고 찬 것은 물론 살이 썪어가도 가벼운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다. 아홉시간에 걸친 대수술이 수차례, 거의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8년의 세월을 보냈다.
스물두살. 입대를 한달남짓 남겨둔 때였다. 5월 15일부터 대인동에 있는 조그마한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한달동안 집에 있기가 따분해서였다. 78년 조대부고를 졸업했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은 꿈도 꿀수 없었다. 그무렵 광주시내에는 연일 시위가 계속됐다. 21일에는 상황이 극에 달했다.“이대로 있다가는 안되겠다 싶어 송정리 집에 가려고 나섰습니다. 회사에서 숙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회사에 있었죠. 그런데 교통이 두절됐습니다. 시내상황을 알아보러 가톨릭센터 앞으로 갔다가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4 구의 시체를 봤죠. 도청주변에는 많은 사상자들이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가 군중들사이에서 들리더군요. 다시 도청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한발의 총성에 고꾸라져
그러나 정문으로 가면 위험할 것 같아 현 광주은행 본점 뒷골목으로 우회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광주경찰서앞 4거리까지 나아갔죠. 거기서서 두리번 거렸으나 사상자는 없고 상무관 옥상에 무장한 군인들이 보이더군요. 더 이상 나아가면 위험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겨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디선가 귀를 찢는 듯한 한발의 총성이 들리더니 이내 몸이 고꾸라졌습니다”도망을 가야겠는데 몸을 전혀 가눌수가 없었다. 고개만 겨우 움직일수 있을 뿐 손끝 발끝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총알이 목밑과 등을 관통하면서 척추를 건드린 것이다.“꼼짝도 못하고 그렇게 누워 있는데 순경 한명이 다가와서‘어떻게 됐냐’고 묻더군요.‘총을 맞은 것 같은데 나를 병원으로 옮겨 달라’고 했죠. 그때 경찰서 안쪽에서 순경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곧장 순경이 경찰서 마당으로 달려가고 호되게 뺨을 때리는 소리, 너 죽을라고 환장했냐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때가 오후 4시쯤 됐을 겁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한참후에 젊은 청년이 김씨를 깨워 살았음을 확인한후 낮은 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일행처럼 보이는 청년 3∼4명이 들 것을 들고 나타났고 그들은 곧 김씨를 부근의 K외과로 옮겼다.“의사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면 상처부위를 꿰매더군요. 또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그날 저녁 8시께 어머니(58)가 병원에 오셨습니다. 송정리에서 걸어온 것이죠. 그런데 그 다음날 오후에 갑자기 숨이 차오고 호흡이 가빠지더군요. 앰뷸런스를 타고 전대병원으로 갔습니다. 도청쪽으로 바로 못가고 우회해서 병원에 도착했는데 가는 순간에도 총성이 시끄럽게 들리더군요. 병원 응급실은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습니다. 복도까지 발디딜 틈도 없이 피투성이 환자들로 가득 찼더군요. 의사가 저를 보더니 가망이 없다고 했었죠. 저는 제쳐두고 회복 가능한 환자부터 치료 하더군요. 그대로 응급실에서 사흘을 보냈습니다.”
‘가망없다’응급실에서 3일
사흘만에 6층 신경외과 입원실로 옮겨졌다. 비로소생(生)의 확신을 얻었으나 그때부터는 고통스런 병상 생활이 시작됐다. 81년 3월 28일 퇴원때까지 무려 10개월동안 몸의 3분의 2이상이 무감각한 상태에서 세 번의 대수술, 다시 퇴원후 두 번의 욕창수술로 온몸은 만신창이가 됐다.“입원 두달만에 겨우 양팔을 움직일수 있게 됐죠. 8월말부터는 휠체어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휠체어를 타고 병원 6층에서 비상계단으로 나와 1년만에 처음으로 광주시가지를 내려다 보았어요. 전경이 어찌나 아름답고 도시가 선명하게 와 닿는지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서 깨어나 다시 세상을 바라보는 기쁨이랄까…. 비록 세상이 오염되고 추한면도 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이렇게 아름다울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입원 일주일만에 첫 수술을 했다. 수술실에서가 아니라 병실에서 였다. 마취도 하지 않았다. 이미 신경이 죽어 아픔을 모르기 때문에 마취할 필요가 없었다.“회진을 도는 의사가 등의 상처부위를 누르니까 피고름이 나왔습니다. 총알이 관통해 구멍이 뚫린 상처부위를 K외과에서 꿰맸는데 수술이 잘못됐나 봐요. 안에서 살이 썩어 피고름이 나온 것입니다. 수술실로 가지도 않고 드레싱카를 갖고 병실에서 바로 수술을 받았죠. 상처부위를 다시 째고 불순물을 갉아 낸것이예요. 그래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김씨는 아파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픔조차 못느끼는 고통이 더욱 크다. 자기 몸이 썩는지, 곪는지, 덴지조차 모른다. 이러한 무감각은 김씨의 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가만히 누워만 있기 때문에 등 엉덩이 허벅지 등에 욕창이 끊이질 않았다. 신경이 죽은 상태에서도 피부가 호흡을 하므로 몸을 부분적으로 움직여 줘야 하나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욕창으로 9시간의 대수술
“등수술 3일만에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살을 도려냈죠. 또 그해 8월께에는 계속 열이 높았습니다. 열이 심할때는 체온계의 한계를 넘어버렸으니까요. 병원에서 열병으로 진단을 내리더군요. 계속 열병 치료약만 먹었죠. 그러던 어느날 간호원이 엉덩이에 주사바늘을 꼽는 순간 주사기에 피고름이 나왔습니다. 왼쪽 허벅지살이 썩었던 거예요. 왼쪽으로만 누워 있었더니 그랬던거죠. 그래서 열이 났던 것인데…. 85년 5월∼7월, 86년 7월∼8월에도 두차례에 걸쳐 엉덩이 욕창수술을 받았습니다. 9시간이나 걸리는 대수술이었죠.”그뿐만이 아니다. 겨울에는 방에서도 살을 데기 일쑤다. 방바닥이 별로 뜨겁지도 않은데도 한곳에 오래 앉아있어 곧잘 화상을 입는다. 배변도 힘들다. 내장 기관이 원활치 못해 소화도 잘안되지만, 변의를 거의 못 느끼기 때문에 배변의 고통은 더욱 크다. 위장약, 변비약 등 약물치료를 하지만 먹는 것이 두려울 정도다. 소변은 규칙적으로 보면 되지만 그나마 일주일에 한번씩 대변을 보는 날은 사투(死鬪)하지 않을 수 없다.
“대변을 본 날은 ‘내 생명이 앞으로도 일주일 더 연장됐구나’하는 안도감에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보통 7∼10일에 한번씩 보는데 변의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손으로 파내야 하죠. 장갑을 끼고 손가락을 항문에 넣어 파내는 것입니다. 치질은 말할것도 없고, 변비가 심해요. 대부분 피가 섞여 나요죠. 대변을 보는 날은 어찌나 힘을 쓰는지 신열이 나고 하루종일 끙끙 앓아요.”김씨의 삶은 절망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준 사람이 있다. 정미선씨. 그의 부인이다. 84년 그녀와 결혼하면서 그의 삶은 활기를 찾고 몸은 불편했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수 있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83년 4월 5일. 광산구 대촌면「실로암 재활원」개원식에서였다. 정씨는 광주신학교에 다니면서 장애자 봉사활동을 펴고 있던 때였다. 그로부터 한달만에 약혼을 하고 1년후인 3월 17일 결혼식을 올렸다. 친정식구는 참석하지 않은채 새울림교회에서였다.“아빠를 처음 본 순간 저 사람은 내 사람이다하는 생각이 와 닿더군요. 장애자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생각을 갖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개원식이 끝나자마자 집을 물어서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친정부모님(아버지는 순천노회 소속 교회목사)이 완강히 반대했어요. 약혼후에도 여러차레 붙들려가고…….”그들은 가난했지만 정직하고 진실되게 살려고 노력했다. 네손을 모아 부지런히 일했다. 부인이 한겨울에 튀김집에서 일을 거들어주며 일당 3천 3백원을 벌었는가 하면 피아노교습도 했다. 파출부로 다닐때면 김씨는 애를 보았으며, 만화가게도 차렸었다.“무진교회 강신석목사와 광주 YWCA 명예회장 조아라씨가 많이 도와줍니다. 부상당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주었어요. 그분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용기있게 살아올수 있었죠. 정부에서는 병치료에 관계되는 것 외에는 일체 도움받은 것이 없습니다. 생보카드로 월 1회씩 전대병원에서 위장약 비약등을 타오죠. 매년 정기검진도 받아야겠지만 워낙 비싸고…….”그들은 물질적인 것은 가시적ㆍ상대적인 것이며 사랑과 믿음만이 진실임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진 것은 없었지만 진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으며, 행복은 물질의 풍요속에 있지 않음을 확신하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겨낼 수 있었다.“처음과 마찬가지로 아빠는 영원히 우리 아빠예요.”이번 구정때 결혼후 처음으로 진영이를 데리고 친정에 갔다는 부인의 말 끝에 김씨는 이렇게 덧붙었다. “앞으로는 「새울림중창단」을 통해 선교활동을 하며 살아갈 작정입니다. 선물로 주신 진영이와 함께 우리 세식구는 소외된 곳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열심히 살 겁니다.”방문을 나서려는데 김씨가 가훈이라며 불청객(?)에게 성경 한 구절을 읽어주었다.‘일이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부이니라.’(전도서 12장13절)인간이 아무리 자기의 의식과 지식과 물질로 세상을 맘대로 살아 보려 했으나 결국은 슬픔 고통 뿐이었으니 오히려 근본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뜻이란다. 세 번 거절당하고 네 번째 어렵게 이뤄진 취재였다. 방문밖에 놓인 휠체어가 봄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글/임 미 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