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시민은 왜 총을 들었나.박남선(신동아, 1988. 5)
본문
光州市民은 왜 銃을 들었나
朴南宣(35·당시「市民軍」상황실장.現 5월구속자동지회 회장)
編輯者의 말
이 글은 「5·18광주민중항쟁」당시 무장시민군은 실질적 리더였던 朴南宣상황실장이 본지에 보내온 手記이다. 일명 「무장시민군대장」으로 불리기도 했던 朴南宣씨는 5·18사태 3일 후인 5월 21일부터 무장시민의 전위로 나서 활약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글은 공수부대원들의 과잉진압이 특히 두드러졌던 5월 18일, 19일, 20일 3일간의 현장이 생략된 채로 이뤄졌는데, 차후 이 부분은 또 다른 피해자의 수기로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광주시 전역에서 광역적으로 전개된 「5·18민중항쟁」은 한 개인의 시야에 담기엔 너무나도 큰 사건이었다. 따라서 朴씨의 수기 역시 그때의 상황을 다 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당시 박씨가 사태의 최선봉에 섰던 무장시민군의 실질적 리더였다는 점에서 朴씨의 이 수기는 수기 이상의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어진다.
5월 21일
「發砲」에 맞선 「武裝」
날이 밝았다. 중생을 구도하여 삼천대천세계로 데려간다는 부처님의 탄생일(5월 21일). 음력 사월 초파일의 날이 밝아 온 것이다. 1980년 5월에 맞이한 석가탄일은 기쁨일 수 없었다.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해 들어와 만행을 저지르고 발포를 한 후 광주 시내에 있는 병원이란 병원은 모두가 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으깨지고 총상을 입은 환자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계엄군은 여전히 도청에 버티고 있었다. 나는 관광호텔 앞으로 나아갔다. 도청앞을 제외한 금남로에는 어머니의 손을 잡은 꼬마에서부터 중·고등학생들과 70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십여만의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어젯밤의 여세를 몰아 공수부대들을 시내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하여 모든 시민들이 들고 나온 것이었다.
첫 타게트, 아세아자동차공장
공수부대가 최후의 방어선을 치고 있는 도청에서는 연이어 헬기가 오르내리고 있었다. 시민 모두는 맨손으로 싸우다 희생이 많이 났던 지난밤을 생각하고 무장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가톨릭센터 앞에 있던 몇 사람의 청년들이 시민들을 향하여 외쳤다. 『아세아자동차공장에 가서 차를 끌고 나옵시다! 우리도 무장이 필요하고 무장을 위해서는 우선 차량이 필요합니다. 같이 갈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시오!』2∼3십명의 청년들이 일시에 소리친 청년들 앞에 모여 섰다. 앞으로 나선 나는 모인 사람들과 함께 차창이 모두 깨진 시내버스를 타고 곡괭이자루와 몽둥이를 창밖으로 내 차체를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광천동에 있는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달려갔다. 버스에 탄 우리들이 공장 정문 앞에 도착하여 밀고 들어가려 하자 공장 관계직원 몇 사람이 앞을 가로막은 채 못들어가게 하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죄없는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저까짓 차 몇대가 무슨 문제란 말인가!』우리들은 거칠게 항의하면서 차량이 늘어선 곳으로 몰려갔다. 군납 방위산업체인 광주아세아자동차공장에는 대형·소형의 버스와 장갑차를 비롯한 군용트럭 등 여러 종류의 차량들이 완전히 조립이 끝난 채 수백대 늘어서 있었다.
공장안은 연이은 시위로 가동이 중단된 때문인지 출근한 근로자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함께 간 우리들 중에는 운전기술을 익힌 사람이 7명밖에 되지 않아 우선 버스 7대를 몰고 금남로로 되돌아왔다.거리는 함성으로 가득 차 있었고 금남로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심장이었다. 몰고온 버스를 대기시켜놓고 있는데 고속버스 1대가 군경 저지선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때였다.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던 시민 몇 사람이 「드르륵」소리와 함께 앞으로 픽 쓰러졌다. 순신간에 네사람이 피를 뿌리면서 숨져갔다. 바로 앞에서 굳게 쥔 주먹을 공수대들을 향해 뻗으면서 구호를 외치던 사람도 피를 뿜으면서 쓰려졌다. 나는 갑작스런 총성에 주춤하다가 앞으로 엎드렸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옆에서 앞에서 사람들이 쓰러지자 비명을 지르며 썰물처럼 금남로를 빠져나가 인근 충장로와 전남일보 뒤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거리는 또다시 꼬마들과 여인네들의 울음소리 비명소리 등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앞으로 엎드렸던 나는 옆사람들에게 밟히면서 엉금엉금 기어 우체국 쪽으로 빠져나가 죽어라 달려나가 황금동 콜박스 옆에 발동이 걸려진 채로 서 있던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조금 후 천변을 따라 내려가다가 월산동으로 방향을 꺽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羅州에 가면 광산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오자고 하였다. 버스는 미친 듯이 나주를 향하였다. 버스에 타고 있는 모두는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南平을 거쳐 나주 시내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열렬히 환영하며 빵과 음료수들을 실어주었다. 청년 두사람이 버스에 올라타더니 나주경찰서에 무기가 있다고 하면서 경찰서로 안내하였다. 두사람도 광주의 소식을 듣고 우리들이 무기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나주경찰서는 榮山浦쪽으로 가는 도중의 나주소방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버스에 탄 우리들은 나주경찰서로 들어갔다. 경찰서 안에는 경찰관들이 한사람도 보이지 않고 우리들보다 먼저 도착한 시위대들이 무기고를 부스고 무기를 꺼낸 다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우리들은 M1소총 AR소총 카빈소총 실탄 등을 주는 대로 싣고 광주로 달려갔다. 광주로 가는 도로에는 수많은 차량들이 시민들을 가득 실은 채 광주로 광주로 달려가고 있었다.
무기조작법설명 뒤 「市民軍」결성
한두재를 넘어 시내로 진입한 우리는 양동시장을 거쳐 유동3거리로 나아갔다. 유동3거리에는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가져온 트럭과 APC장갑차 2대 그리고 각지에서 무기와 시민을 싣고온 차량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차에서 뛰어내려 시민들에게 무기와 실탄을 나누어주었다. 무기의 분배를 끝내고 난 나는 장갑차위로 뛰어올라가 시민들에게 무지조작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뒤 오늘밤 전면전이 벌어질 것 같으니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갈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계엄군이 우리들의 배후에서 치고 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아세아극장 옥상과 극장 아래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바리케이트를 칠 것을 몇 사람에게 부탁하고 장갑차에 올라앉아 무장시민들을 선도, 수창국민한교 앞을 거쳐 도청 쪽으로 금남로를 따라 올라갔다.
연도에 모여 선 시민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도청 쪽으로 올라가던 나는 한일은행 4거리에서 잠시 멈춘 뒤 시민들을 전남여고 방면과 광주대교 방면으로 갈라 노동청과 충장로 입구에서 공격을 하자고 제안했다. 공수부대들이 점령하고 있는 도청은 금남로와 일직선상에 있어 공수부대의 총격에 당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우회하여 측면공격을 시도하자는 제의였다. 무장시민을 양쪽으로 나눈 나는 장갑차를 서서히 몰도록 부탁한 다음 도청정문을 주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지 기관총 사격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장갑차 위에서 내려와 해치를 닫은 다음 장갑차를 정지토록 하였으나 어디에서 총소리가 나는지 정확히 몰라 일단 장갑차를 후진시켜 현대극장 쪽으로 가자고 하였다.장갑차 조종수가 조종방법을 정확히 모르고 밖의 동정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혹시 고립되어 공수부대에게 고스란히 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어 급히 후진한 다음 달리는 장갑차 안에서 연도의 수많은 시민들은 모습을 보고 안심하였다. 장갑차를 현대극장 앞에 정지시키고 장갑차 위로 광주공원 쪽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광주공원에서 무장시민들과 합류한 다음 광주천을 따라 적십자병원 쪽으로 올라가다가 계엄군으로부터 노획한 무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발견, 이를 달라고 한 후 시민들 중에서 무전기를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느냐고 소리쳤다. 무전기는 등에 지고 다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주파수를 2채널로 맞추게 되어 있었다. 그러자 시민들 속에서 무전병 출신이라면서 세사람이 달려나왔다.
무장시민군의 지휘자가 되다.
나는 어는새 무장시민들의 지휘자가 되어 있었다. 먼저 본부를 정하고 밤에 총 공격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지휘본부로 할 곳을 망설이다가 안전을 위해 광주천변에 있는 적십자병원으로 정했다. 모든 환자들은 응급실 문을 이용케 하고 병원정문을 닫아 잠그곤 서무과 앞 휴게실터를 본부로 하였다. 병원 밖은 계엄군에게 부상당한 시민들과 헌혈을 하러온 시민들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본부를 정한 다음 무전기를 갖고 있는 시민에게 계엄군의 주파수를 잡아 계엄군의 이동상황을 체크해보도록 하였다. 거리는 어느새 어둠이 기어들고 있었다. 빵 한조각으로 저녁을 대신한 나는 몇 사람과 어떻게 도청을 공략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20대 청년 한사람이 무장시민을 네 곳으로 분산하여 도청 오른쪽에 있는 도심다방 쪽과 그 반대편의 노동청 쪽 그리고 남도예술회관과 진내과 쪽에서 공격하자고 했다. 30대 시민은 전병력을 한곳으로 모아서 정면 총공격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의견을 개진히기도 했다.
그때 몇 사람이 뛰어들어오면서 지금 도청의 공수부대들이 퇴각하고 있으니 빨리 도청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혹시 계엄군이 도청을 빠져나가는 듯하다가 광주천을 따라 들어와 시민들의 등 뒤에서 공격을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주저하였다. 그래서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만일 공수대원들이 진짜 퇴각을 한다면 물러가버린 뒤에 도청으로 가봐야 할 일도 없을 테고 무장시민들이 다른 곳에도 있으니 만일을 위해서 광주천에 매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그들은 광주천 봉쇄를 위한 무장시민의 배치에 동의해주었다. 나는 리더급 무장시민에게 양림다리에서 현대극장밑 다리까지 무장시민을 매복시킨 다음 기관총을 배치하도록 하고, 만일 진입해 들어오는 공수대들을 발견하더라도 신호없이 개별사격은 절대 하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공수대와 무장시민의 구분을 위하여 「담배연기」라는 암구호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무장시민의 배치를 부탁하고 밖으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불로동 다리(불로교)위에서 AR소총을 거치하고 M1소총과 AR소총에 탄알을 장진, 시험사격을 하고 나서 매복에 들어갔다. 약 6백여명의 무장시민들이 공수대들의 광주천 진입을 봉쇄하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칠혹과 같은 어두운 밤을 하얗게 지새고 있었다. 비로소 무장을 하고 싸우게 되었다는 든든함 때문인지 무장시민의 사기는 드높아가고 있었다.
5월 22일
「解放區」로 변한 光州
밤새워 광주천변에 매복, 계엄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항쟁 5일째(5월 22일)의 날이 밝아왔다. 가로수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계엄군이 도청을 빠져 도망갔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것은 해방이었다. 이제는 피로써 연결된 이웃과 이웃의 사랑만이 가득 차 있는 시민들, 우리들의 도시 광주는 이제 「해방지구」가 되었다. 날이 밝아오자 무장시민들을 불러모아 도청으로 향했다. 시내 곳곳에서 무장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오고 그뒤로 수많은 시민들이 도청으로 도청으로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승리」를 쟁취했다는 소식이 온 시내에 퍼져나간 모양이었다. 무장시민들이 탑승한 각종 차량들은 「계엄철폐」「전두환처단」등의 구호를 빨간 페인트로 쓴 프랑카드를 부착했고, 총구를 밖으로 한 복명을 한 시민들이 시가지를 누비고 있었다.무장시민들은 개선한 병사들처럼 의기양양했고 시민들은 환호 또한 열광적이었다. 아낙네들은 무장시위차량을 불러 세우고 주먹밥과 김밥을 부지런히 올려주고 있었으며, 이제까지 철시했던 상가는 모두 문을 열고 차량이 다가오면 빵 음료수 담배 등을 차에 올려주었다. 모두가 열광적이었으며 아무도 이들을 「폭도」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시내를 한바퀴 돌아 광주공원에 들어섰다. 거리를 지나 다니는 군용트럭과 찝차 그리고 버스에 번호를 부여한 후 차량의 전후에 번호를 써주고 있었다. 공원의 상황을 살피고 서부경찰서를 지나 화정동 공단입구로 갔다. 공단4거리는 대규모의 병력이 주둔해 있는 상무대와 공군전투비행단이 있는 송정리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공단입구를 지키는 무장시민들은 인근 목재소에서 지게차로 운반해온 커다란 통나무와 고장난 고속버스로 상무대 쪽을 차단하고 2정의 LMG기관총을 설치한 다음, 3백여명의 시민들이 지키고 있었다. 무장시민 외에도 일반시민들이 나와 이들은 도우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밤을 긴장으로 지새운 나는 피로가 엄습하여 근처 약국에서 약을 먹은 후 도청으로 향했다. 도청으로 들어서면서 정문을 지키는 동지들에게 계엄군의 첩자나 보안대 요원이 들어올지도 모르니 머리가 짧은 사람들의 출입은 일체 차단해달라고 부탁하고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밤세워 고생하던 청년들이 1층 서무과를 임시본부로 정하고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무실 한쪽 의자에 앉아 나는 낯이 익은 사람들을 불러 도청내에 있는 모든 무전기와 워키토키를 찾아 가져오도록 하였다. 임시본부에는 시민들이 가져온 빵과 음료수 담배 김밥 등이 엄청나게 쌓였다.
밖으로 나갔더니 저명한 목사 신부 교수 변호사 등 15명이 「5·18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습방안을 마련하고 계엄분소를 찾아가서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수습에 앞서 우선 무장시민들의 질서를 잡아나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시민군」의 지휘계통을 확립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그 다음 협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 분들도 고개를 끄떡이며 응해주었다.
다시 「상황실」로 된 임시본부로 들어가 몇 사람과 협의하여 차량통행증과 시내주유소의 유류를 확보하기 위한 유류보급증, 상황실출입증 등을 만들어 노트에 신분을 확인한 뒤 발부해주었다. 이때 담양으로 나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부근에서 공수부대와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있던 무장시민에게 모두 출동하자고 한 후 선두찝차를 타고 교도소 방향으로 경적을 울리면서 미치 듯이 질주해 갔다. 뒤에는 무장시민들이 4대의 트럭과 2대의 버스에 분승하여 따라오고 있었다. 트럭은 운전석 위를 철판으로 막고 틈을 내서 총을 거치하고 화물칸 옆에는 헌 타이어를 달아놓았다.
교도소인근, 외곽도로 무차별 난사
동신고등학교를 지나 문화동 검문소 부근에 이르자 도로변 인도와 차도 사이에 심어진 나무에 몇 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교도소와 교도소 우측의 야산, 주유소 뒤에서 공수대들의 사격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다. 나는 그곳 사람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자신들이 버스와 트럭에 탑승하고 담양방면으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로 진입하려고 들어가는데 갑자기 기관총사격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아무런 경고나 주의도 없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는 겻이다. 우리는 담양과 곡성, 순천으로 나가는길을 트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화력과 전술이 월등한 공수부대원들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무장시위가 타지방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단 몇미터의 길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가고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사상자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복받쳐오르는 분노속에서도 희생자를 줄여야 하기 때문에 후퇴하자고 소리쳤다.
대부분의 사망자와 부상자는 데리고 왔으나 길 가운데 쓰러진 부상자와 사망한 시민들은 공수대원의 치열한 총격 때문에 내버려 둔 채 눈물을 머금고 돌아와야만 했다. 도청으로 돌아와 상황실로 들어가니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무신경하게 들어넘기고 그동안 전투를 같이했던 사람들과 상황실을 장악하고 「시민군」으로서의 지휘체계를 잡아나갔다.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직되었다는 「학생수습위」나「시민수습위」에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나 친구는 한 사람도 없었고 아직은 그들에게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총기와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하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지난 18일 시위때부터 선봉에서 같이 싸워온 동지들이나 평소 알고 지내온 사람들뿐이었다. 예비군 소대장을 한 적이 있는 나는 우선 무장시민을 「시민군」으로 재편성하여 일반시민과 구분하고 광주를 지키자고 하였다. 그래서 급조된 조직이었지만 같이 총을 들고 싸웠던 20대후반의 梁時榮에게 상황부실장을, 경비반장을 맡아달라고 한후 각자 역할분담을 하였다.
도청 앞 광장에서는 시민궐기대회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적십자병원에서 무전기를 다루었던 정향규 장계범 등 6사람에게 정보반을 구성하여 계엄군의 상황을 체크하여 알려달라고 무전기 2대를 건네주고 도청 3층의 사무실 한 칸을 누구도 출입할 수 없게 만들어주었다.정보반 운영은 절대 비밀로 하기로 하였다.시변두리지역에서는 아직도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기에 계엄군의 동태파악이 최급선무였다. 오후가 되면서 무기를 도청에 반납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수습위」에서 무기반납을 권유하는 방송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수습방식에 불만이 쌓여만 갔다. 아무런 대책없이 무기를 회수하면 우린 개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市民軍」의 체계 점차 확립
그러나 지금 「수습위」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시민군」을 재편성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문입구 수위실 곁에는 기관총 등 여러 종류의 무기와 도청의 구내식당으로 이용하고 있던 민원실 지하에 보관토록 지시했다. 도청 정문 앞에는 궐기대회에 참석한 시민들과 도청으로 운반된 시민의 시체를 확인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무장시민 등으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경비반장 책임을 맡고 정문을 지키고 있던 오동일을 찾아 시체와 무기를 싣고 온 차량 외에는 모든 차량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시체를 확인하려는 시민들은 주민등록증을 확인하여 기록한 후 도청에 들여보낼 것을 강한 어조로 지시하였다. 시민의 시체가 너무 많아서 시내 종합병원의 영안실은 포화상태가 되어버렸다. 도청으로 옮겨져와 신원이 확인된 시체는 우선 입관한 후 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되고 있었다.
모든 조직이 자생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계엄군의 만행 이후 모든 시민이 계엄군에 대한 울분과 「함께 해야만 살 수 있다」는 마음으로 똘똘 뭉쳐 공감대를 형성하며 서로 돕고 있었다. 상황실에서 모든 요원들을 모아놓고 지금까지 들어온 상황을 체크한 뒤 처음으로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전 무장시민군은 한 두사람이 무기를 들고 배회하는 것을 발견하면 즉시 무기를 회수하여 도청으로 가져오고 만일 불응하여 도주하거나 대항하면 사살한다고 각 조직에 알리고 시민들에게도 알리시오』내가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은 첫째,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무기를 들고 다닐 경우 범죄의 유혹에 빠질 염려가 높았다. 둘째, 서로 떨어져 있는 무장시민들을 한 곳으로 결집시켜 뭉치도록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혹시 시민생활을 침해하는 일이 벌어지거나 외곽 지역에서 교전이 벌어질 경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힘으로 대항해나갈 수 있는 강력한 「시민군」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상황실의 전화번호를 기입한 벽보를 만들어 시내 곳곳에 붙이도록 지시하였다. 지시를 마치고 들어오자 일신방직 회색빛 제복을 입은 20세가량의 여자와 25세가량의 남자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상황실로 뛰어들어왔다. 두사람의 얼굴과 옷에는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고 여자는 손과 얼굴이 긁혀져 피가 뭉쳐 있었다. 두사람은 통곡하면서 빨리 南平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여자는 버스를 타고 목포로 갔다가 나주를 거쳐 광주로 오는 도중 한두재에서 매복해 있던 계엄군으로부터 무차별 총격을 받고 트럭과 버스에 타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고 부상당했으니 구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두사람은 산길을 타고 도망쳐 나왔다고 하였다.이 소식을 듣고 얼마 안있어 화순으로 갔던 앰블런스가 공수부대의 습격을 받아 여학생 한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몰살당했다는 소식과 교도소 근처의 교전, 비아쪽의 전투소식이 속속 들어왔다. 시내를 제외한 외곽으로 통하는 전지역이 봉쇄되어 버린 것 같았다.
하루동안에 시민전사 수백명
나는 벽에 걸린 시가지도를 내려서 붉은 색연필로 막혀버린 지역에 X자를 치면서 노트에 현상황을 기록하였다. ▲광주교도소 교전 ; 시민전사 확인 6구, 부상 18명(미확인 다수)▲화순너릿재 교전 ; 시민전사 20명, 부상자 미확인 ▲남평 한두재 교전 ; 시민전사 1백50여명, 시민부상 미확인▲미입관시체 74구 등. 이러한 상황도 모른 채 「수습위」에서는 무조건 무기회수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고, 시민 다수의 요구조건이 무시된 채 몇가지 조건만을 가지고 계엄사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무장병력의 힘을 모아 「시민군」을 결성한 다음 단결된 힘과 조직으로 뭉쳐서 계엄군이 다시 쳐들어온다면 싸울 태세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런 「시민군」조직을 갖춘 다음에 계엄당국과 협상을 해도 충분한 것인데 지금 「수습위」에서는 시민들의 무장을 해제하면서 무기회수와 반납에 힘을 쏟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일을 처리해나갈 것인가, 깊은 고심에 빠져있을 때 梁時榮부실장이 다가와 보고했다.『실장님! 지원동에서 공수대원으로 보이는 두놈을 잡아왔는데요』부실장의 말에 고대를 드니 총을 든 시민군 몇 사람이 머리가 짧고 얼룩무늬 바지에 런닝샤쓰만을 입고 있는 두사람을 데리고 서 있었다. 그들은 맨발이었고 낙오된 공수부대원으로 보였다.
나는 예비군 훈련때 자주 만나던 학동의 예비군소대장에게 물었다.『소대장님! 이놈들을 어디서 잡았소?』『예, 무등산 증심사에서 잡았습니다』시민군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한 뒤 두 공수대원에게 수갑을 채워 무릎을 끊게 한 다음 자리에 앉히려는데, 이들을 잡아왔다는 소식이 퍼졌는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상황실 안팎이 소란스러워졌다. 『트럭 뒤에 매달고 다니면서 돌로 쳐 죽여야 해!』『분수대 앞으로 끌어내 공개적으로 총살시킵시다!』무릎이 꿇려진 공수대원들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행한 일을 익히 알고 있으므로 만일 죽게 된다면 더없이 처참하게 살해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떨고 있는 그들이 갑자기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상황실의 분위기를 가라앉혀야했다. 그래서 허리춤에 차고 있는 45구경 권총을 빼내 왼손으로 노리쇠를 후퇴시킨 후 총구를 천정으로 향해 들고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상황실이 조용해졌다. 즉석에서 그들을 처형할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서로가 교전중에 상대방을 죽일 수 있으나 포로로 잡힌 사람은 즉흥적으로 죽일 수는 없오. 만일 우리가 차오르는 분노로 이들을 절차도 없이 죽인다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되는 것이오. 그러니 이들의 처리는 나에게 맡겨두고 모두 제자지로 돌아가주시오』라고 결연히 말했다. 내가 들고 있는 총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내 말에 복종했는지 처형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포로로 잡힌 공수대원 살려줘
나는 상황병에게 경찰우의와 통일화를 가져와 공수병들에게 입히라고 한 다음, 부실장에게 수갑을 풀어주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상황실 안에는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나에게 총부리를 겨눌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시 불안해졌다. 부실장에게 공수부대원을 적십자병원에 환자로 가장시켜 입원시키고 상황이 끝날 때까지 감시하라고 부탁하였다. 그들을 그냥 내보낼 경우 흥분한 시민들에게 다시 잡히거나 눈에 띄면 맞아죽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부실장이 상황실요원 2명과 함께 공수부대원을 데리고 나갔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무렵, 방림동의 예비군 중대장 3사람이 상황실을 찾아왔다. 중대장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예비군들을 소집하여 동네의 자체 치안유지와 계엄군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조직을 갖추어달라고 하면서 무기와 차량을 지원해주겠다고 하였다. 중대장이 쾌히 승낙하자, 나는 상황요원들에게 군용트럭 1대와 무기를 내주라고 지시하였다.그들이 나간 후 나는 지도에 방림동과 인근 지역에 X자 표시를 하고 우선은 한곳의 방어망이라도 생긴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5월 23일
5월 23일 새벽무렵 찦차를 타고 시내를 돌았다. 일찍부터 고등학생들이 돌멩이와 총대신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생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도청 앞 광장에는 많은 시민들이 수십명 수백명씩 무리를 지어 모여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신안동·학동·금동이라고 적힌 피켓과 각종 구호가 쓰여진 프랑카드가 들려 있었다. 도청에는 미처 입관되지 못한 시체가 늘어갔다. 시내 장의사에 관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무기를 놓고 돌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학생수습위」와 「시민수습위」의 「홍보」덕분인 것 같았다. 상황실과 정문은 어제의 출입증발급과 통제지시로 질서를 잡아가고 있었다.
오전 11시가 되자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도청 앞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전일빌딩 샤터에는 출처가 다양한 대자보가 즐비하게 붙여져 있었다. 한편에는 관을 구입하기 위한 모금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상황실에서 도청안에 있던 모든 무전기와 워키토키를 정문의 보초와 경비병 그리고 순찰대에 배분하고 상황실소속 모든 차량에도 무전기를 설치하여 상황실의 지시와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즉시 체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황실에는 앨범크기의 탁상용 무전기를 설치하고 모든 무전기의 주파수를 상황실 주파수와 맞추었다. 나의 찦차에도 고성능 차량무전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곳곳에 도사린 저격위험
외각의 상황이 궁금해진 나는 도청을 나와 궐기대회가 진행되는 군중사이를 뚫고 노동청을 돌아 학동으로 갔다. 연도에는 궐기대회에 참석하려는 시민들과 순찰반의 순찰차량 그리고 홍보차량들로 車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학동은 학운동예비군들이 무등산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곳을 차단하고 있었고, 화순으로 빠지는 지원동과의 경계인 숭의고등학교 옆 원지교를 중심으로 광주천변을 따라 5백여명의 무장시민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경계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원지교에서 학동 시민아파트 쪽을 따라서 내려갔다. 차는 시속 5킬로 정도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시민아파트 철다리 못 미쳐서 내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무장 경호원이 차 밖으로 튕겨져 아스팔트 위로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놀랠 시간도 없이 차를 세우고 뛰어내렸다. 떨어진 경호원의 머리 한쪽에 구멍이 크게 나 피를 콸콸 쏟고 있었다. M16에 맞은 것이었다.
하천 건너편 산속에서 공수저격병이 지휘관차인 줄 알고 아마도 나를 겨냥했던 모양이었다. 나 대신 그가 저격당한 것이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저격당한 경호병을 싣고 옷을 찢어 머리를 감싼 채 전남대의대부속병원으로 달렸다. 그는 죽지 않고 꿈틀댔지만, 전대병원 응급실에 도착해보니 꿈틀거림은 이미 정지되어 있었다. 시체를 전대병원 의사에게 인도한 후 도청으로 돌아와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도청내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밖에 나갈 때는 항상 조심하라고 당부한 뒤, 부실장에게 「수습위」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물었다. 일부 수습위원들이 회수된 무기 2백정을 가지고 계엄사에 구속되어 있는 시민·학생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교섭차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수습위원간에도 의견이 반으로 갈라져 있다고 덧붙였다.
시간이 갈수록 「수습위」에 대한 나의 불만은 더해가고 있었다. 구속된 몇 사람을 빼와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자기들이 했단 말인가? 지금까지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은 왜 신경을 써 주지 않고 엉뚱한 일만 하는가? 왜 총을 회수해 가 계엄당국에 바치는가? 왜? 지금도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에 죽어가고 있는데 무기회수가 웬 말인가?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이런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무기를 절대 넘겨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 권총을 빼들고 가서 무기고를 지키고 있는 시민군에게 『만일 내 허락이 없이 무기를 내주었다간 죽여버리겠다!』고 강경하게 「무기반출 금지명령」을 내렸다. 도청 앞 분수대 쪽에서 갑자기 천지가 진동할 것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무슨 일인가 나가보았다.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계엄당국에 구속되었다 풀려난 30여명의 시민·학생들이 분수대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풀려난 사람들 앞에 몇 명의 수습위원들이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양손을 흔들면서 들어왔다. 몇 사람의 수습원이 상무대에 갔다온 경과보고를 했다. 궐기대회는 각계계층의 연사들이 나와 연설을 하고 시낭독, 구호제창 및 노래, 놀이패의 마당놀이 등 다양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궐기대회가 끝나자 대부분의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갔으나 나는 시내 요소요소와 외각지역의 방어상태를 점거해나갔다. 밤이 깊어가면서 학생과 일반시민으로 구성된 수습위원들이 들어와 상황실 옆 회의실에서 회의를 한다면서 상황실대표로 참석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김창길·황금선·김종배·허규정·양원식·정해민·구성주 등이었다. 그동안 김종배는 장례담당, 허규정은 무기담당, 구성주는 보급담당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도청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그동안 각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과 상견례를 하였다. 나는 원칙적인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결론들이 내려진다면 함께 동참할 것이라고 말한 뒤 이만 돌아가겠다고 내려왔다. 회의 시작 40여분만에 상황실로 돌아와 의자에서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5월 24일
상황발생 1주일째를 맞는 24일이 밝았다. 상황실과 경비반·순찰대의 체제는 이제 많이 잡혀가고 있었다, 도청민원실 2층을 식당으로 이용하고 있었는데 식당에는 여학생들과 젊은 아주머니들이 집에서 밥을 날라오고 도청내의 시민군의 식사시중을 들어주고 있었다. 반찬은 고추장과 멸치 단무지 된장국뿐이었으나 밥을 두공기나 맛있게 먹었다.
「수습위」의 무기회수에 반발
식사도중 부실장이 약간 불안한 얼굴로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 것 같으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해방감에 젖어있던 대부분의 무장시민들은 수습위의 무기를 반환하자는 입장표명에 당황하고 있었다. 무장시민들로부터 무기가 회수되어가고 있었고 시민군 병력이 현저히 감소되고 있었기 때문에 부실장 역시 불안한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상황실요원들도 동요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그러면서도 상황실만은 지휘체계와 질서가 잡혀 시내외의 상황을 체크하면서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순찰대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윤석루가 20대초반의 청년 한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羅州지역에서 꼭 할 얘기가 있어 찾아왔다는 것이다. 청년은 나를 보더니 이곳의 책임자냐고 묻고 전남대학교 학생이라고 신분을 밝히면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어디에서 또 공수대에게 당해서 그러려니하고 내버려두었다. 상황실에 찾아와서 계엄군과의 접전으로 사람들이 죽고 부상을 당했는데 부상자가 아직 살아 있으니 같이 가서 시체와 부상자를 옮겨오자고하여 현장에 가보면 부상시민과 시체는 계엄군이 가져버리고 계엄군의 포위망에 걸려 몇명씩의 사상자를 내고 겨우 빠져나오는 일들을 많이 경험하던 터였다. 병력을 보호하고 광주를 사수해야겠다는 나의 입장에서 보면 결단을 내리기 힘든 문제였다.
또한 솔직한 심정으로 시민들의 그러한 제보 하나하나에 부족한 병력으로 희생을 감내하면 전부 출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청년은 한참 후에 울음을 그치더니 자신은 주월동에서 살고 있는데 갑자기 계엄군과 공수부대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쌍방간 교전이 계속되는 와중에 근처에 있던 동네사람들이 많이 죽고 부상을 당했으니 빨리 가서 부상당한 사람을 병원으로 이송해달라는 것이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계엄군끼리의 교전은 아마 실전경험이 없는 군인들이 서로 이동하다가 상대방을 시민군으로 오인하고 사격을 시작한 것이 서로간의 전투로 변한 것 같았다. 일부시민군들은 나처럼 군복에 철모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오인하곤 하였을 것이다. 그에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정문으로 나가보니 궐기대회가 진행중이었고「수습위」측에서 계엄당국과 협상 후 약속받은 8개항을 전단으로 인쇄해 뿌리고 있었다.
記者들 취재, 가까스로 개방
정문이 소란스러웠다. 도청으로 들어오려는 국내 신문기자와 경비반장인 오동일사이에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당시 광주의 만행이 시작된 초기에는 전혀 보도를 않다가 한창 치열해지자 우리를 「폭도」라고 매도하고 공수대들의 잔학상을「유언비어」라고 단한마디로 잘라버리던 언론기관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일체의 기자들은 절대 출입시키지 말라고 경비반장에게 명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앞으로 나가자 한 기자가 프레스카드를 보이면서「전남매일」기자라고 하였다. 「전남매일」에서는 국내 처음으로 기자들이 양심선언을 하였고, 모든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여 역사적인 기록으로 삼아야하니 원활한 취재를 할 수 있도록 협조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난 나는 보도에는 문제가 있으나 역사의 기록자라는 임무는 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겠다는 생각에 그를 들여보내도록 하고 정문보초와 경비반장에게 프레스카드를 소지한 모든 국내외기자들에게 도청출입을 개방하라고 지시하였다.
오후가 되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외곽을 경계방어중인 시민군들의 상황이 궁금하여 경찰우의를 입고 경호병력을 대동하여 외곽순찰겸 아까 청년이 말한 곳을 가자고 하였다. 학동 방림동 화정동 서부경찰서 광주역 서방3거리 산수5거리 조대입구 등을 돌아 백운동 주월동에 도착했다. 주월동의 목포로 나가는 지점인 옥천여상 부근은 인적이 한산하였고 비가 쏟아져 평화롭게 보였다. 부근 가게에서 물으니 아까 총소리가 광장했다고 하면서 그 지점을 가리켜주었다. 가서 보니 시체나 부상자는 보이지 않았고 부서진 자동차와 군화짝 등이 널려 있었다. 분명히 시민군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니 궐기대회는 끝나 있었다.
상황실에 들어가 의자에 앉자마자 상황병이 사람이 찾아왔다고 하였다. 30대초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간략하게 밝히면서「수습위」측에서 제시한 수습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까지의 불만을 노골적으로 토로하였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있더니 해결되도록 적극적으로 함께 노력하자고 하였다. 그는 尹相元이라는 사람이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8시부터 상황실에서「수습위」와 도청간부들과 연석회의가 열린다고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회의에 나갔더니「학생수습위」측에서는 김창길 정해민 양우식 허규정 김종배,「시민군」측에서는 황금선 김화성 강경섭 자칭 치안본부장인 김양오 등이 참석하여 있었다. 김창길 양원식 정해민 등은 계엄사가 대부분의 연행자를 석방하고 부상자 치료와 장례식등을 허락하였으니 이제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고 무조건 무기반납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허규정 김종배를 제외한 대부분이 김창길의 의견에 동조를 표하였다. 나는「수습위」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타올랐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의자를 집어던지면서 이런 식으로 끝까지 무기를 반납하자고 주장한다면 차라리 도청을 폭파해버리겠다고 고함을 버럭 질러 버렸다.
그러자 몇명이 겁먹은 표정으로 소리없이 회의장을 빠져나갔고 몇명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안절부절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만 남았고 우리들은 자체회의를 갖고 지금까지 발생한 광주의 모든 문제와 앞으로의 방향설정을 같이 하자는 데 의견을 함께하고 조직을 새로이 편성하였다. 시민군 작전상황실에 모인 사람들로 조직이 새로이 구성되었다. 위원장 : 김창길 부위원장겸 총무 : 황금선 부위원장겸 장례담당 : 김종배 상황실장 : 박남선 경비반장 : 김화성 기획담당 : 김종철 무기담당 : 강경섭 홍보담당 : 허규정 위원장단만이 계엄사와 협상하고 나머지 사람은 현재 하고 있는 임무를 그대로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회의는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 앉아 있는데 시내 황금동에서 계엄군의 첩자로 보이는 무리들과 시내를 순찰중인 순찰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상황발생보고가 들어왔다. 즉시 도청에 있는 예비병력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순찰중인 순찰대를 황금동으로 집결토록 무전명령을 내렸다. 무전기가 개방되면서 상황실에서 내리는 지시와 순찰대간의 교신으로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았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황금동 콜박수 쪽에서 산발적인 총소리가 들려왔다. 충동 및 작전상황을 체크하던 나는 출동병력으로부터 용의자 한명 체포로 작전이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5월 25일
정보기관의 공작―「독침사건」
늦게까지 계속된 회의와 황금동사건으로 피로에 젖어 깜빡 잠이 든 나는 부실장의 다급한 깨움에 눈을 떴다.『웬일이오?』 『정보반에 있던 사람이 독침에 맞아 쓰러졌습니다.』『아니! 뭐라고!』『방금 정보반에 있던 사람이 독침에 맞았다고 하면서 치안본부에 쓰러져 있답니다』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2층 계단사이에 있는 치안본부로 뛰어들어갔다. 치안본부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정보반원 장계범과 독침 맞은 부위를 빨던 정향규도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치안본부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굳어 있었다.나는 허리에서 권총을 빼내 천정을 향해「탕―」하고 공포를 쏘았다. 그리고는 움직이면 모두 사살하겠다고 고함쳤다. 그때 치안본주장이던 김양오가 정향규의 턱을 군화발로 걷어 찼다. 의아하게 생각하였으나, 오열들이 쓰는 독이란 혈관에 들어갔을 때는 몇초 이내에 즉사한다는데 독침을 맞았다는 장계범은 20여분이 지나도록 신음만하고 있고 그것을 빨던 정향규도 쓰러져 있었기에 이것은 필시 계엄군의 내부혼란을 노린 책동이라 보고 차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무전기를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던 중 나를 따라온 사람들이었기에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려고 우선 치안본부장에게 두사람을 전대병원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두사람을 내보낸 뒤 상황실로 돌아와 절대 동요하지 말 것을 부탁하고 전대병원으로 갔다. 병원으로 옮겨진 장계범은 응급처치를 받고 있었고 그곁에 정향규도 누워 있었다. 나는 의사들에게 독침을 맞은 것이 확실하냐고 물었으나 자신들은 독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어 확실히 모르고 정밀검사를 위해 병원장을 불렀다고 하였다. 병원침대에 누운 장계범은 나의 손을 붙잡고 끝까지 투쟁하라면서 횡성수설하였다. 나는 아무래도 이상하여 데리고 간 병력 5명을 남겨두고 도청으로 돌아 왔다.
도청안은 조금 전 벌어진 독침사건으로 인한 불안감과 서로간의 불신으로 동요의 빛이 역력하였고 일부가 도청에서 이탈해나가고 있었다. 계엄군당국이 도청을 비우게 하려는 공작의 일환으로 단정한 나는 도청구내 방송국의 마이크를 잡고『지금부터 독침사건에 대하여 거론하거나 누가 수상하다든가 하는 망언을 하는 사람은 우리를 분열시키기 위한 계엄군의 첩자로 간주하여 무조건 사살하겠다』2회를 반복하여 방송하였다. 나의 단호한 방송때문이었는지 도청안의 분위기는 점차 진정되어 갔으며 장계범과 정향규가 병원에서 도주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나는 순찰대에 있던 윤석루 이재호 이재춘 등에게 장계범의 신원을 파악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오후가 되자 모여든 시민들은 여러 종의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궐기대회를 어제와 마찬가지로 열고 있었다.
나는「무장시민군」의 입장을 밝히는 글을 작성한 뒤 궐기대회에서 발표해주도록 윤상원에게 부탁하였다. 잠시 후 윤상원은 우리「시민군」의 입장을 표명하는『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해 왔다. 나는 그것을 읽어 본 뒤「OK」라고 대답했다. 그후 상황실에서 업무를 보고받고 있는데 윤상원이 뛰어들어와『2층 부지사실에서 시민ㆍ수습위원들이 무조건 무기반환을 결의한 뒤 시내 일원에서 무기회수에 들어갔다』면서 막아야 한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장병력 20여명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 2층 복도와 부지사실 문앞에 M16으로 무장한 병력을 배치시키고 내 지시가 있으면 무조건 전부 사살해버리라고 명령한 뒤 부지사실 문을 군화발로 차고 들어갔다.부지사실에는 독립투사인 최한영수습위원장과 부지사 정시채, 장휴동 등 광주의 저명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어들고 하늘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가 천천히 내려 그들을 겨눈 채『어느 놈이 마음대로 무기반납을 결의했느냐?』고 악을 버럭 쓴 뒤『앞으로 이제까지의 죽어간 사람들의 피를 배반하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수습위 일행중 노수남이 일어나면서『지금 무슨 짓거린가? 이제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말고 이대로 끝내버리세. 그렇지 않으면 어찌하자는 것인가?』고 말했다. 나는 그를 향해 쏘아버리겠다는 듯이 권총을 겨누었다가 차마 쏘지 못하고 권총의 손잡이로 노수남의 등을 찍어내렸다. 그는 픽 쓰러졌다. 맞아 떨어진 노수남, 노기와 살기가 등등한 나의 행동으로 부지사실은 완전히 얼어붙어버렸다.『시민의 전체의사를 무시하고 계엄당국과 내통하여 무조건 무기를 반환하자거나 하는 놈이 있으면 모두 죽여버릴테니 모두 도청을 떠나시오! 알았소?』
카메라 챙겨 도망간「치안본부장」
상황실은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 있었다. 자칭 치안본부장 金良五가 무조건 무기반납의 소식을 듣고 치안본부실에 있던 비디오카메라와 일반카메라, 그리고 연행된 사람에게서 압수해 둔 시계와 현금등을 챙겨가지고 도주해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방송과 신문에 얼굴이 드러날까 두려웠던 무장시민들이 기자들에게서 빼앗아 압수해 둔 물건들이었다.나는 치안본부로 달려갔다. 치안본부장과 수사반원이라고 자칭하던 사람들이 거의 떠나가고 2명의 사요원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수사반으로 활약을 하고 있던 김준봉과 위성삼에게 조사반을 재구성하고 반장과 부반장을 맡도록 한 뒤 조사반을 상황실 안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조사반 재편성을 지시하고 돌아오자 수습위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金宗培가 와서 자신은 무기반환을 요구하는 김창길, 황금선과는 도저히 같이 일을 해나갈 수 없으니 차라리 집에 가서 잠을 자는 편이 낫겠다고 하면서 수고하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쫓아나가 나도 당신과 뜻이 같으니 당신을 적극 지지할테니 같이 있자고 하였다. 김종배도 어쩔 수 없이 알았다고 대답한 후 나를 따라 발걸음을 돌렸다.수습위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무장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내가 따르지 않으면 무위로 끝나버리게 되어 있었다. 나는 윤상원 김종배 등과 함께 투항파들을 거세해버리고 다시 조직을 강화하자고 결의하고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자는 굳센 약속하에 밤 9시 도청내 국장실에서 새로 참여한 운동권학생들과 같이 조직을 재구성하였다.
그날작성한 요구조건은,첫째, 금번 광주사태에 대하여 일부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둘째, 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5ㆍ18사태로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 보상을 전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는 것이었고, 이어서 조직을 재구성했다.
운동권 참여한「확대수습위」구성
▲위원장 : 김종배(1954년생 25세, 전 학생수습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대 무역학과 3년)―총괄적인 업무 관할▲내무담당 부위원장 : 허규정(1953년생 26세, 조선대 2년)―도청 내부문제, 대민, 장례문제 관할▲외무담당 부위원장 : 정상용(1950년생 30세, 보성기업 영업부장, 전남대 법대 졸)―일반 수습위원들과 함께 대 계엄사 협상 관할▲대변인 : 윤상원(1951년생 29세, 전남대 정외과 졸, 신협직원, 들불야학 대표)―기자회견 및 집행부의 모든 대외 공식적인 발표▲상황실장 : 박남선(1954년생 26세, 운수업)―시민군 군사업무 담당 ▲기획실장 : 김영철(1948년생 32세, YWCA신협이사, 광천동 빈민운동)―지도부의 제반 업무 기획▲기획위원 : 이양현(1950년생 30세, 노동운동, 전남대 사학과 졸)―기획업무▲기획위원 : 윤강옥(1951년생 28세, 전남대 사학과 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기획업무▲홍보부장 : 박효선(교사, 전남대 국문과 졸, 문화패「광대」회장)―궐기대회 및 제반 홍보업무 담당▲민원실장 : 정해직(1951년생 29세, 교사, 홍사단아카데미 학생회장 역임)―제반 대민업무, 장례 담당▲조사부장 : 김준봉(1959년생 21세, 고려시멘트 회사원, 시민군으로 봉기초에서부터 참가)치안질서 위배자 조사▲보급부장 : 구성주(25세)―식량조달, 식사공급조직이 재구성된 뒤 온건ㆍ투항파로부터 김종배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장경호원 2명을 배치하였다. 회의에서 경비병력을 대학생으로 교체시키자는 약속대로 YWCA에서 대학생 70여명이 들어와 도청안의 학생 30여명과 함께 경비업무에 들어가기 위해 상황실로 왔다. 나는 경비반장에게 지시하여 대학생들에게 카빈소총 1정씩과 15발들이 실탄 1크립씩을 지급케 하여 각 부서로 배치하였다. 도청의 경비가 한층 강화된 것이다.
5월 26일
새벽 상황실을 따갑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뒤척이면서도 애써 무시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무전기가「쐐―액」거리기 시작하였다. 같이 졸고 있었던 부실장 梁時榮(29)이 등을 흔들었다. 나는 웬일이냐는 듯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계엄군이 진입하기 시작했답니다』그는 당황하면서 말했다.『예, 확실합니다. 시민의 전화제보와 무전보고로는 현재 탱크를 앞세우고 공단입구글 통과하고 있답니다』『뭐야?』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상을 걸고 전병력을 출동준비시키라고 한 뒤, 계엄사령부 상무대분소에 전화를 걸어 부사령관인 蘇俊烈을 바꿔달라고 하였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소준열사령관이 부재중이라고 말한 후 자신은 그 분의 참모이니 자신에게 말하라고 하였다.그래서 만일 진입해오고 있는 계엄군병력을 원위치로 후퇴시키지 않으면 회수된 무기를 전 시민에게 나누어주고 재무장시킨 뒤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고, 그래도 불응하면 보관중인 다이너마이트와 TNT를 전부 폭파시켜 자폭하겠으니 빨리 나의 뜻을 부사령관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그는 알았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병력출동준비가 끝난 시민군을 이끌고 찦차를 몰아 농성동 공단입구 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내 차에는 이영생장로와 수습위원 한 사람이 같이 탑승하고 있었다. 나는 차안에서 계엄사에 통보한 전화내용을 말하여주었다. 수습위원의 얼굴은 침통해져갔다.계엄군의 탱크는 시민군의 바리케이트를 깔아뭉개고 한국전력 앞에 서 있었다. 계엄군은 한전 앞에서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고 우리는 서부경찰서 앞에서 정차하였다. 수습대책위원과 나는 계엄군장교에게 다가갔다. 계엄군 장교는 우리에게 『어떻게든 불순분자나 선동자들을 제거하고 총기를 전부 회수하여 반납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다』고 강경하게 위협조로 말하였다. 그래서 우리들은『지금 이 자리에서 원위치로 돌아가시오. 지금 당신들이 이런 일을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더욱 더 우리는 강해지고 당신들과는 피보는 일만 있을 것이요』라고 대답해주었다.
나는 계엄군이 서울과 연결되는 외곽도로를 확보하여 병력과 보급품 수송로를 확보하고 시민군이 차량과 기름을 얻고 있는 아세아자동차공장을 차단, 시민군의 기동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우리도 양보할 수 없는 생명선이었기에 강경하게 물러가라고 재차 요구하고 돌아왔다. 결국 그들은 물러갔다. 그리고 그들은 시민들의 반응을 측정해 보고 시민군의 병력을 확인해보려는 이중적인 작전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한편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찍부터 서민들이 도청앞으로 몰려왔다. 수만명의 시민들이 모여 오전 10시경 궐기대회를 열고 있었다. 격노한 시민들이 분수대 위에 올라가 열변을 토하면서 계엄군과 정부당국을 규탄하는 소리가 도청앞에 가득찼다.
궐기대회를 마치고 시민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금남로―유동3거리쪽으로 시가행진을 하고 있었다.「우리는 결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무기반납 결사반대」「살인마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긴 행렬은 끝이 없어 보였다. 상황실에 들어가자 아침 계엄군의 진입 때문이었는지 뒤숭숭한 가운데 일손을 제대로 못잡고 있었다. 나는 먼저 도청의 엄격한 출입제한을 시키고 시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계속 독려하고 다녔다. 무기와 보급품을 철저히 관리토록 하고 만일의 일에 대비하여「시민군」을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가장 말썽이 많았던 조사부와 치안본부에 도청안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운동권학생을 재배치하고 수상한 사람이나 기존의 조사부원들을 거의 나가도록 조치하였다.
충격적인 상황을 접하고 나서 도청안은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부서는 통제와 지시가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으며 무기고의 무기를 재배치하고 시민군조직을 확고하게 만드는 등 새로운 결의로 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점점 약화되어가고 있는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광주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자 기자회견도 가졌다. 프랑스기자, 미국의 NBC, CBS, UPI통신 등 코가큰 기자들과 일본의 NHK 등이 참석하여 홍보부장 尹相元이 설명하는 우리의 목적, 요구, 현재의 상황을 열심히 취재하고 비데오로 여기저기를 촬영했는데 나는 경비반장에게 협조해주라고 지시하였다.나는 시내의 지도가 붙여진 상황판에 병력 배치도를 작성하여 외곽지 계엄군과 대치중인 지역을 점검하고 도청을 중심으로 투항파들의 끈질긴 교란작전을 제거하고 그들을 철저하게 시민군과 접촉지 못하게 하는 일을 시행해 나갔다. 또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시민군 총지휘관으로서의 임무가 주어졌다.
생포한 계엄군,「죽이라」아우성
기동타격대의 조직과 병력배치도 작성을 끝낸 나는 광주공원에 대기중인 기동순찰대의 병력운용을 위해 경호병을 대동하고는 공원으로 갔다. 찦차가 태평극장을 돌아 광주천을 타고 공원쪽으로 가는데 무전기에서 기동타격대 4조가 광천동 동화석유 부근에서 계엄군과 교전중이라는 보고가 들어 왔다. 무전으로 상황부실장을 불러 도청의 예비병력을 출동시키라고 한 후 공원으로 가 상황이 발생되었으니 모든 기동타격대는 광천동으로 출동하라고 하고 나도 경적울 울리면서 광천동으로 달려갔다. 쏜살같이 달리는 찦차가 광천동 다리에 이르자 무전기가 다시「쇄―액」거리면서『계엄군 1명 생포』,『작전완료』를 연달아 알리고 있었다. 나는 무전기의 마이크를 잡았다.『여기는 상황실장! 상황실 나와라!』무전기에 부실장이 나왔다.『여기는 부실장! 말하라 오버』『나 상황실장인데 작전완료가 확실한가?』『확실합니다. 5분 전 작전이 끝나고 계엄군 1명 생포하여 귀대중입니다』『우리 타격대의 피해는?』『타격대원 1명이 어깨에 총상을 입었으나 큰 부상은 아니라고 합니다』『알았다! 곧 돌아갈테니 생포한 계엄군을 조사반에 넘기도록!』교신을 끝낸 나는 도청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공원에서 출동한 기동타격대원들도 자동차의 해드라이트를 켠 채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도청에 도착, 바로 부실장에게 물었다.『총알이 관통하지 않고 어깨에 스치기만 하여 병원으로 후송치 않고 간단한 치료 후 원대복귀했습니다』『다행이군. 계엄군 포로는 어디 있고?』『지시대로 조사반에 있습니다』부실장의 보고를 받고 나는 바로 상황실을 반으로 나누어 캐비넷으로 막아진 조사반으로 갔다. 조사반은 거동이 수상하다는 시민들의 제보에 의해 기동타격대에 체포되어 연행된 사람들과 조사원들의 소리로 소란스러웠다.『어서 오세요, 실장님!』조사반장 김춘봉이 인사를 하였다.『잡아온 계엄군은 어디 있소?』『저기 있습니다』조사반장이 손을 들어 사무실 한쪽을 가리켰다. 구석에는 양손에 수갑을 차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얼룩무늬 군복차림의 공수대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는 듯 입술까지 창백하게 변한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순간 증오심이 타올랐다.『어이! 조사반장, 저 자를 이리 데려오시오. 수갑도 풀어주고』손목이 자유로워지자 약간 긴장이 풀리는가 싶더니 다시 굳어지기 시작했다.『소속부대는?』『상무대 급양대 소속입니다』『이름은?』『병장 김기범입니다』『언제 어쩌다 잡혔나?』『조금 전 외곽병력에 보급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잡혔습니다』꼬박꼬박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다리는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그때 상황병이 들어와『실장님! 계엄분소에서 전화왔읍니다』하기에 잠시 심문을 중단하고 조사반을 나화 전화기를 들었다.『내가 상황실장입니다만 누구시죠?』『저는 계엄분소 김중령입니다. 조금 전 잡혀간 사병문제로 전화했습니다』『무엇이 잘못되었소?』『그건 아닙니다만 실장님! 죄송하지만 그 사병을 돌려주시지 않겠습니다?』『뭐라고요? 돌려달라고요? 그렇다면 현재까지 계엄분소로 붙잡혀간 시민과 학생들을 즉시 보내주시오』『그건 좀 곤란한 일이라서…… 아니 실은 제 소관의 일이 아니라서……』『뭐라고요?』『끌려간 시민과 학생들을 당신 마음대로 돌려보낼 수 없듯이 나 역시 혼자 결정지어 처리할 수 없소이다. 포로를 인수받고 싶으면 시민과 학생들을 돌려보내시오. 그들이 돌아오면 돌려보내겠소. 알았소?』수화기를 던지다시피 놓은 통에 여운이 오래 남았다. 부하를 걱정하는 김중령의 생각, 평소라면 높이 치하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광주시민이 받은 고통은 그것을 용서할 수도, 이해할 수도, 더구나 덮어둘 수는 절대 없는 일이었다.
되돌려보낸 계엄군 포로
공수대원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이 새끼들아! 이 악마새끼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없어져야 돼』하면서 몇가지 질문을 더 한 다음 상황병에게 경찰우의를 가져와 입히라고 지시하였으나 뜻밖에도 지시에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아니, 실장님! 어쩌시려고요?』『계엄군들이 무자비하게 학살했다고 해서 똑같은 보복을 한다면 우리는 무엇이 되는 것이요? 그래서는 안될 것이요. 그러니 포로문제는 나의 지시대로 해 주었으면 좋겠소』상황실요원과 조사반원들의 적개심을 무시해버린 채 김병장을 데리고 나왔다.『김병장! 식사했나?』『……』『임마! 입이 갑자기 붙어버렸나? 밥에 독약 넣어 죽일까봐! 나도 배가 고프니 같이 밥이라도 먹자』죽음의 공포
朴南宣(35·당시「市民軍」상황실장.現 5월구속자동지회 회장)
編輯者의 말
이 글은 「5·18광주민중항쟁」당시 무장시민군은 실질적 리더였던 朴南宣상황실장이 본지에 보내온 手記이다. 일명 「무장시민군대장」으로 불리기도 했던 朴南宣씨는 5·18사태 3일 후인 5월 21일부터 무장시민의 전위로 나서 활약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글은 공수부대원들의 과잉진압이 특히 두드러졌던 5월 18일, 19일, 20일 3일간의 현장이 생략된 채로 이뤄졌는데, 차후 이 부분은 또 다른 피해자의 수기로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광주시 전역에서 광역적으로 전개된 「5·18민중항쟁」은 한 개인의 시야에 담기엔 너무나도 큰 사건이었다. 따라서 朴씨의 수기 역시 그때의 상황을 다 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당시 박씨가 사태의 최선봉에 섰던 무장시민군의 실질적 리더였다는 점에서 朴씨의 이 수기는 수기 이상의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어진다.
5월 21일
「發砲」에 맞선 「武裝」
날이 밝았다. 중생을 구도하여 삼천대천세계로 데려간다는 부처님의 탄생일(5월 21일). 음력 사월 초파일의 날이 밝아 온 것이다. 1980년 5월에 맞이한 석가탄일은 기쁨일 수 없었다.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해 들어와 만행을 저지르고 발포를 한 후 광주 시내에 있는 병원이란 병원은 모두가 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으깨지고 총상을 입은 환자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계엄군은 여전히 도청에 버티고 있었다. 나는 관광호텔 앞으로 나아갔다. 도청앞을 제외한 금남로에는 어머니의 손을 잡은 꼬마에서부터 중·고등학생들과 70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십여만의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어젯밤의 여세를 몰아 공수부대들을 시내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하여 모든 시민들이 들고 나온 것이었다.
첫 타게트, 아세아자동차공장
공수부대가 최후의 방어선을 치고 있는 도청에서는 연이어 헬기가 오르내리고 있었다. 시민 모두는 맨손으로 싸우다 희생이 많이 났던 지난밤을 생각하고 무장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가톨릭센터 앞에 있던 몇 사람의 청년들이 시민들을 향하여 외쳤다. 『아세아자동차공장에 가서 차를 끌고 나옵시다! 우리도 무장이 필요하고 무장을 위해서는 우선 차량이 필요합니다. 같이 갈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시오!』2∼3십명의 청년들이 일시에 소리친 청년들 앞에 모여 섰다. 앞으로 나선 나는 모인 사람들과 함께 차창이 모두 깨진 시내버스를 타고 곡괭이자루와 몽둥이를 창밖으로 내 차체를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광천동에 있는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달려갔다. 버스에 탄 우리들이 공장 정문 앞에 도착하여 밀고 들어가려 하자 공장 관계직원 몇 사람이 앞을 가로막은 채 못들어가게 하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죄없는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저까짓 차 몇대가 무슨 문제란 말인가!』우리들은 거칠게 항의하면서 차량이 늘어선 곳으로 몰려갔다. 군납 방위산업체인 광주아세아자동차공장에는 대형·소형의 버스와 장갑차를 비롯한 군용트럭 등 여러 종류의 차량들이 완전히 조립이 끝난 채 수백대 늘어서 있었다.
공장안은 연이은 시위로 가동이 중단된 때문인지 출근한 근로자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함께 간 우리들 중에는 운전기술을 익힌 사람이 7명밖에 되지 않아 우선 버스 7대를 몰고 금남로로 되돌아왔다.거리는 함성으로 가득 차 있었고 금남로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심장이었다. 몰고온 버스를 대기시켜놓고 있는데 고속버스 1대가 군경 저지선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때였다.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던 시민 몇 사람이 「드르륵」소리와 함께 앞으로 픽 쓰러졌다. 순신간에 네사람이 피를 뿌리면서 숨져갔다. 바로 앞에서 굳게 쥔 주먹을 공수대들을 향해 뻗으면서 구호를 외치던 사람도 피를 뿜으면서 쓰려졌다. 나는 갑작스런 총성에 주춤하다가 앞으로 엎드렸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옆에서 앞에서 사람들이 쓰러지자 비명을 지르며 썰물처럼 금남로를 빠져나가 인근 충장로와 전남일보 뒤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거리는 또다시 꼬마들과 여인네들의 울음소리 비명소리 등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앞으로 엎드렸던 나는 옆사람들에게 밟히면서 엉금엉금 기어 우체국 쪽으로 빠져나가 죽어라 달려나가 황금동 콜박스 옆에 발동이 걸려진 채로 서 있던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조금 후 천변을 따라 내려가다가 월산동으로 방향을 꺽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羅州에 가면 광산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오자고 하였다. 버스는 미친 듯이 나주를 향하였다. 버스에 타고 있는 모두는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南平을 거쳐 나주 시내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열렬히 환영하며 빵과 음료수들을 실어주었다. 청년 두사람이 버스에 올라타더니 나주경찰서에 무기가 있다고 하면서 경찰서로 안내하였다. 두사람도 광주의 소식을 듣고 우리들이 무기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나주경찰서는 榮山浦쪽으로 가는 도중의 나주소방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버스에 탄 우리들은 나주경찰서로 들어갔다. 경찰서 안에는 경찰관들이 한사람도 보이지 않고 우리들보다 먼저 도착한 시위대들이 무기고를 부스고 무기를 꺼낸 다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우리들은 M1소총 AR소총 카빈소총 실탄 등을 주는 대로 싣고 광주로 달려갔다. 광주로 가는 도로에는 수많은 차량들이 시민들을 가득 실은 채 광주로 광주로 달려가고 있었다.
무기조작법설명 뒤 「市民軍」결성
한두재를 넘어 시내로 진입한 우리는 양동시장을 거쳐 유동3거리로 나아갔다. 유동3거리에는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가져온 트럭과 APC장갑차 2대 그리고 각지에서 무기와 시민을 싣고온 차량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차에서 뛰어내려 시민들에게 무기와 실탄을 나누어주었다. 무기의 분배를 끝내고 난 나는 장갑차위로 뛰어올라가 시민들에게 무지조작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뒤 오늘밤 전면전이 벌어질 것 같으니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갈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계엄군이 우리들의 배후에서 치고 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아세아극장 옥상과 극장 아래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바리케이트를 칠 것을 몇 사람에게 부탁하고 장갑차에 올라앉아 무장시민들을 선도, 수창국민한교 앞을 거쳐 도청 쪽으로 금남로를 따라 올라갔다.
연도에 모여 선 시민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도청 쪽으로 올라가던 나는 한일은행 4거리에서 잠시 멈춘 뒤 시민들을 전남여고 방면과 광주대교 방면으로 갈라 노동청과 충장로 입구에서 공격을 하자고 제안했다. 공수부대들이 점령하고 있는 도청은 금남로와 일직선상에 있어 공수부대의 총격에 당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우회하여 측면공격을 시도하자는 제의였다. 무장시민을 양쪽으로 나눈 나는 장갑차를 서서히 몰도록 부탁한 다음 도청정문을 주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지 기관총 사격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장갑차 위에서 내려와 해치를 닫은 다음 장갑차를 정지토록 하였으나 어디에서 총소리가 나는지 정확히 몰라 일단 장갑차를 후진시켜 현대극장 쪽으로 가자고 하였다.장갑차 조종수가 조종방법을 정확히 모르고 밖의 동정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혹시 고립되어 공수부대에게 고스란히 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어 급히 후진한 다음 달리는 장갑차 안에서 연도의 수많은 시민들은 모습을 보고 안심하였다. 장갑차를 현대극장 앞에 정지시키고 장갑차 위로 광주공원 쪽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광주공원에서 무장시민들과 합류한 다음 광주천을 따라 적십자병원 쪽으로 올라가다가 계엄군으로부터 노획한 무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발견, 이를 달라고 한 후 시민들 중에서 무전기를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느냐고 소리쳤다. 무전기는 등에 지고 다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주파수를 2채널로 맞추게 되어 있었다. 그러자 시민들 속에서 무전병 출신이라면서 세사람이 달려나왔다.
무장시민군의 지휘자가 되다.
나는 어는새 무장시민들의 지휘자가 되어 있었다. 먼저 본부를 정하고 밤에 총 공격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지휘본부로 할 곳을 망설이다가 안전을 위해 광주천변에 있는 적십자병원으로 정했다. 모든 환자들은 응급실 문을 이용케 하고 병원정문을 닫아 잠그곤 서무과 앞 휴게실터를 본부로 하였다. 병원 밖은 계엄군에게 부상당한 시민들과 헌혈을 하러온 시민들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본부를 정한 다음 무전기를 갖고 있는 시민에게 계엄군의 주파수를 잡아 계엄군의 이동상황을 체크해보도록 하였다. 거리는 어느새 어둠이 기어들고 있었다. 빵 한조각으로 저녁을 대신한 나는 몇 사람과 어떻게 도청을 공략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20대 청년 한사람이 무장시민을 네 곳으로 분산하여 도청 오른쪽에 있는 도심다방 쪽과 그 반대편의 노동청 쪽 그리고 남도예술회관과 진내과 쪽에서 공격하자고 했다. 30대 시민은 전병력을 한곳으로 모아서 정면 총공격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의견을 개진히기도 했다.
그때 몇 사람이 뛰어들어오면서 지금 도청의 공수부대들이 퇴각하고 있으니 빨리 도청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혹시 계엄군이 도청을 빠져나가는 듯하다가 광주천을 따라 들어와 시민들의 등 뒤에서 공격을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주저하였다. 그래서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만일 공수대원들이 진짜 퇴각을 한다면 물러가버린 뒤에 도청으로 가봐야 할 일도 없을 테고 무장시민들이 다른 곳에도 있으니 만일을 위해서 광주천에 매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그들은 광주천 봉쇄를 위한 무장시민의 배치에 동의해주었다. 나는 리더급 무장시민에게 양림다리에서 현대극장밑 다리까지 무장시민을 매복시킨 다음 기관총을 배치하도록 하고, 만일 진입해 들어오는 공수대들을 발견하더라도 신호없이 개별사격은 절대 하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공수대와 무장시민의 구분을 위하여 「담배연기」라는 암구호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무장시민의 배치를 부탁하고 밖으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불로동 다리(불로교)위에서 AR소총을 거치하고 M1소총과 AR소총에 탄알을 장진, 시험사격을 하고 나서 매복에 들어갔다. 약 6백여명의 무장시민들이 공수대들의 광주천 진입을 봉쇄하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칠혹과 같은 어두운 밤을 하얗게 지새고 있었다. 비로소 무장을 하고 싸우게 되었다는 든든함 때문인지 무장시민의 사기는 드높아가고 있었다.
5월 22일
「解放區」로 변한 光州
밤새워 광주천변에 매복, 계엄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항쟁 5일째(5월 22일)의 날이 밝아왔다. 가로수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계엄군이 도청을 빠져 도망갔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것은 해방이었다. 이제는 피로써 연결된 이웃과 이웃의 사랑만이 가득 차 있는 시민들, 우리들의 도시 광주는 이제 「해방지구」가 되었다. 날이 밝아오자 무장시민들을 불러모아 도청으로 향했다. 시내 곳곳에서 무장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오고 그뒤로 수많은 시민들이 도청으로 도청으로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승리」를 쟁취했다는 소식이 온 시내에 퍼져나간 모양이었다. 무장시민들이 탑승한 각종 차량들은 「계엄철폐」「전두환처단」등의 구호를 빨간 페인트로 쓴 프랑카드를 부착했고, 총구를 밖으로 한 복명을 한 시민들이 시가지를 누비고 있었다.무장시민들은 개선한 병사들처럼 의기양양했고 시민들은 환호 또한 열광적이었다. 아낙네들은 무장시위차량을 불러 세우고 주먹밥과 김밥을 부지런히 올려주고 있었으며, 이제까지 철시했던 상가는 모두 문을 열고 차량이 다가오면 빵 음료수 담배 등을 차에 올려주었다. 모두가 열광적이었으며 아무도 이들을 「폭도」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시내를 한바퀴 돌아 광주공원에 들어섰다. 거리를 지나 다니는 군용트럭과 찝차 그리고 버스에 번호를 부여한 후 차량의 전후에 번호를 써주고 있었다. 공원의 상황을 살피고 서부경찰서를 지나 화정동 공단입구로 갔다. 공단4거리는 대규모의 병력이 주둔해 있는 상무대와 공군전투비행단이 있는 송정리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공단입구를 지키는 무장시민들은 인근 목재소에서 지게차로 운반해온 커다란 통나무와 고장난 고속버스로 상무대 쪽을 차단하고 2정의 LMG기관총을 설치한 다음, 3백여명의 시민들이 지키고 있었다. 무장시민 외에도 일반시민들이 나와 이들은 도우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밤을 긴장으로 지새운 나는 피로가 엄습하여 근처 약국에서 약을 먹은 후 도청으로 향했다. 도청으로 들어서면서 정문을 지키는 동지들에게 계엄군의 첩자나 보안대 요원이 들어올지도 모르니 머리가 짧은 사람들의 출입은 일체 차단해달라고 부탁하고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밤세워 고생하던 청년들이 1층 서무과를 임시본부로 정하고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무실 한쪽 의자에 앉아 나는 낯이 익은 사람들을 불러 도청내에 있는 모든 무전기와 워키토키를 찾아 가져오도록 하였다. 임시본부에는 시민들이 가져온 빵과 음료수 담배 김밥 등이 엄청나게 쌓였다.
밖으로 나갔더니 저명한 목사 신부 교수 변호사 등 15명이 「5·18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습방안을 마련하고 계엄분소를 찾아가서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수습에 앞서 우선 무장시민들의 질서를 잡아나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시민군」의 지휘계통을 확립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그 다음 협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 분들도 고개를 끄떡이며 응해주었다.
다시 「상황실」로 된 임시본부로 들어가 몇 사람과 협의하여 차량통행증과 시내주유소의 유류를 확보하기 위한 유류보급증, 상황실출입증 등을 만들어 노트에 신분을 확인한 뒤 발부해주었다. 이때 담양으로 나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부근에서 공수부대와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있던 무장시민에게 모두 출동하자고 한 후 선두찝차를 타고 교도소 방향으로 경적을 울리면서 미치 듯이 질주해 갔다. 뒤에는 무장시민들이 4대의 트럭과 2대의 버스에 분승하여 따라오고 있었다. 트럭은 운전석 위를 철판으로 막고 틈을 내서 총을 거치하고 화물칸 옆에는 헌 타이어를 달아놓았다.
교도소인근, 외곽도로 무차별 난사
동신고등학교를 지나 문화동 검문소 부근에 이르자 도로변 인도와 차도 사이에 심어진 나무에 몇 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교도소와 교도소 우측의 야산, 주유소 뒤에서 공수대들의 사격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다. 나는 그곳 사람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자신들이 버스와 트럭에 탑승하고 담양방면으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로 진입하려고 들어가는데 갑자기 기관총사격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아무런 경고나 주의도 없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는 겻이다. 우리는 담양과 곡성, 순천으로 나가는길을 트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화력과 전술이 월등한 공수부대원들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무장시위가 타지방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단 몇미터의 길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가고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사상자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복받쳐오르는 분노속에서도 희생자를 줄여야 하기 때문에 후퇴하자고 소리쳤다.
대부분의 사망자와 부상자는 데리고 왔으나 길 가운데 쓰러진 부상자와 사망한 시민들은 공수대원의 치열한 총격 때문에 내버려 둔 채 눈물을 머금고 돌아와야만 했다. 도청으로 돌아와 상황실로 들어가니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무신경하게 들어넘기고 그동안 전투를 같이했던 사람들과 상황실을 장악하고 「시민군」으로서의 지휘체계를 잡아나갔다.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직되었다는 「학생수습위」나「시민수습위」에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나 친구는 한 사람도 없었고 아직은 그들에게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총기와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하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지난 18일 시위때부터 선봉에서 같이 싸워온 동지들이나 평소 알고 지내온 사람들뿐이었다. 예비군 소대장을 한 적이 있는 나는 우선 무장시민을 「시민군」으로 재편성하여 일반시민과 구분하고 광주를 지키자고 하였다. 그래서 급조된 조직이었지만 같이 총을 들고 싸웠던 20대후반의 梁時榮에게 상황부실장을, 경비반장을 맡아달라고 한후 각자 역할분담을 하였다.
도청 앞 광장에서는 시민궐기대회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적십자병원에서 무전기를 다루었던 정향규 장계범 등 6사람에게 정보반을 구성하여 계엄군의 상황을 체크하여 알려달라고 무전기 2대를 건네주고 도청 3층의 사무실 한 칸을 누구도 출입할 수 없게 만들어주었다.정보반 운영은 절대 비밀로 하기로 하였다.시변두리지역에서는 아직도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기에 계엄군의 동태파악이 최급선무였다. 오후가 되면서 무기를 도청에 반납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수습위」에서 무기반납을 권유하는 방송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수습방식에 불만이 쌓여만 갔다. 아무런 대책없이 무기를 회수하면 우린 개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市民軍」의 체계 점차 확립
그러나 지금 「수습위」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시민군」을 재편성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문입구 수위실 곁에는 기관총 등 여러 종류의 무기와 도청의 구내식당으로 이용하고 있던 민원실 지하에 보관토록 지시했다. 도청 정문 앞에는 궐기대회에 참석한 시민들과 도청으로 운반된 시민의 시체를 확인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무장시민 등으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경비반장 책임을 맡고 정문을 지키고 있던 오동일을 찾아 시체와 무기를 싣고 온 차량 외에는 모든 차량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시체를 확인하려는 시민들은 주민등록증을 확인하여 기록한 후 도청에 들여보낼 것을 강한 어조로 지시하였다. 시민의 시체가 너무 많아서 시내 종합병원의 영안실은 포화상태가 되어버렸다. 도청으로 옮겨져와 신원이 확인된 시체는 우선 입관한 후 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되고 있었다.
모든 조직이 자생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계엄군의 만행 이후 모든 시민이 계엄군에 대한 울분과 「함께 해야만 살 수 있다」는 마음으로 똘똘 뭉쳐 공감대를 형성하며 서로 돕고 있었다. 상황실에서 모든 요원들을 모아놓고 지금까지 들어온 상황을 체크한 뒤 처음으로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전 무장시민군은 한 두사람이 무기를 들고 배회하는 것을 발견하면 즉시 무기를 회수하여 도청으로 가져오고 만일 불응하여 도주하거나 대항하면 사살한다고 각 조직에 알리고 시민들에게도 알리시오』내가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은 첫째,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무기를 들고 다닐 경우 범죄의 유혹에 빠질 염려가 높았다. 둘째, 서로 떨어져 있는 무장시민들을 한 곳으로 결집시켜 뭉치도록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혹시 시민생활을 침해하는 일이 벌어지거나 외곽 지역에서 교전이 벌어질 경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힘으로 대항해나갈 수 있는 강력한 「시민군」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상황실의 전화번호를 기입한 벽보를 만들어 시내 곳곳에 붙이도록 지시하였다. 지시를 마치고 들어오자 일신방직 회색빛 제복을 입은 20세가량의 여자와 25세가량의 남자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상황실로 뛰어들어왔다. 두사람의 얼굴과 옷에는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고 여자는 손과 얼굴이 긁혀져 피가 뭉쳐 있었다. 두사람은 통곡하면서 빨리 南平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여자는 버스를 타고 목포로 갔다가 나주를 거쳐 광주로 오는 도중 한두재에서 매복해 있던 계엄군으로부터 무차별 총격을 받고 트럭과 버스에 타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고 부상당했으니 구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두사람은 산길을 타고 도망쳐 나왔다고 하였다.이 소식을 듣고 얼마 안있어 화순으로 갔던 앰블런스가 공수부대의 습격을 받아 여학생 한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몰살당했다는 소식과 교도소 근처의 교전, 비아쪽의 전투소식이 속속 들어왔다. 시내를 제외한 외곽으로 통하는 전지역이 봉쇄되어 버린 것 같았다.
하루동안에 시민전사 수백명
나는 벽에 걸린 시가지도를 내려서 붉은 색연필로 막혀버린 지역에 X자를 치면서 노트에 현상황을 기록하였다. ▲광주교도소 교전 ; 시민전사 확인 6구, 부상 18명(미확인 다수)▲화순너릿재 교전 ; 시민전사 20명, 부상자 미확인 ▲남평 한두재 교전 ; 시민전사 1백50여명, 시민부상 미확인▲미입관시체 74구 등. 이러한 상황도 모른 채 「수습위」에서는 무조건 무기회수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고, 시민 다수의 요구조건이 무시된 채 몇가지 조건만을 가지고 계엄사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무장병력의 힘을 모아 「시민군」을 결성한 다음 단결된 힘과 조직으로 뭉쳐서 계엄군이 다시 쳐들어온다면 싸울 태세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런 「시민군」조직을 갖춘 다음에 계엄당국과 협상을 해도 충분한 것인데 지금 「수습위」에서는 시민들의 무장을 해제하면서 무기회수와 반납에 힘을 쏟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일을 처리해나갈 것인가, 깊은 고심에 빠져있을 때 梁時榮부실장이 다가와 보고했다.『실장님! 지원동에서 공수대원으로 보이는 두놈을 잡아왔는데요』부실장의 말에 고대를 드니 총을 든 시민군 몇 사람이 머리가 짧고 얼룩무늬 바지에 런닝샤쓰만을 입고 있는 두사람을 데리고 서 있었다. 그들은 맨발이었고 낙오된 공수부대원으로 보였다.
나는 예비군 훈련때 자주 만나던 학동의 예비군소대장에게 물었다.『소대장님! 이놈들을 어디서 잡았소?』『예, 무등산 증심사에서 잡았습니다』시민군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한 뒤 두 공수대원에게 수갑을 채워 무릎을 끊게 한 다음 자리에 앉히려는데, 이들을 잡아왔다는 소식이 퍼졌는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상황실 안팎이 소란스러워졌다. 『트럭 뒤에 매달고 다니면서 돌로 쳐 죽여야 해!』『분수대 앞으로 끌어내 공개적으로 총살시킵시다!』무릎이 꿇려진 공수대원들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행한 일을 익히 알고 있으므로 만일 죽게 된다면 더없이 처참하게 살해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떨고 있는 그들이 갑자기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상황실의 분위기를 가라앉혀야했다. 그래서 허리춤에 차고 있는 45구경 권총을 빼내 왼손으로 노리쇠를 후퇴시킨 후 총구를 천정으로 향해 들고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상황실이 조용해졌다. 즉석에서 그들을 처형할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서로가 교전중에 상대방을 죽일 수 있으나 포로로 잡힌 사람은 즉흥적으로 죽일 수는 없오. 만일 우리가 차오르는 분노로 이들을 절차도 없이 죽인다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되는 것이오. 그러니 이들의 처리는 나에게 맡겨두고 모두 제자지로 돌아가주시오』라고 결연히 말했다. 내가 들고 있는 총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내 말에 복종했는지 처형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포로로 잡힌 공수대원 살려줘
나는 상황병에게 경찰우의와 통일화를 가져와 공수병들에게 입히라고 한 다음, 부실장에게 수갑을 풀어주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상황실 안에는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나에게 총부리를 겨눌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시 불안해졌다. 부실장에게 공수부대원을 적십자병원에 환자로 가장시켜 입원시키고 상황이 끝날 때까지 감시하라고 부탁하였다. 그들을 그냥 내보낼 경우 흥분한 시민들에게 다시 잡히거나 눈에 띄면 맞아죽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부실장이 상황실요원 2명과 함께 공수부대원을 데리고 나갔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무렵, 방림동의 예비군 중대장 3사람이 상황실을 찾아왔다. 중대장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예비군들을 소집하여 동네의 자체 치안유지와 계엄군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조직을 갖추어달라고 하면서 무기와 차량을 지원해주겠다고 하였다. 중대장이 쾌히 승낙하자, 나는 상황요원들에게 군용트럭 1대와 무기를 내주라고 지시하였다.그들이 나간 후 나는 지도에 방림동과 인근 지역에 X자 표시를 하고 우선은 한곳의 방어망이라도 생긴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5월 23일
5월 23일 새벽무렵 찦차를 타고 시내를 돌았다. 일찍부터 고등학생들이 돌멩이와 총대신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생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도청 앞 광장에는 많은 시민들이 수십명 수백명씩 무리를 지어 모여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신안동·학동·금동이라고 적힌 피켓과 각종 구호가 쓰여진 프랑카드가 들려 있었다. 도청에는 미처 입관되지 못한 시체가 늘어갔다. 시내 장의사에 관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무기를 놓고 돌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학생수습위」와 「시민수습위」의 「홍보」덕분인 것 같았다. 상황실과 정문은 어제의 출입증발급과 통제지시로 질서를 잡아가고 있었다.
오전 11시가 되자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도청 앞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전일빌딩 샤터에는 출처가 다양한 대자보가 즐비하게 붙여져 있었다. 한편에는 관을 구입하기 위한 모금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상황실에서 도청안에 있던 모든 무전기와 워키토키를 정문의 보초와 경비병 그리고 순찰대에 배분하고 상황실소속 모든 차량에도 무전기를 설치하여 상황실의 지시와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즉시 체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황실에는 앨범크기의 탁상용 무전기를 설치하고 모든 무전기의 주파수를 상황실 주파수와 맞추었다. 나의 찦차에도 고성능 차량무전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곳곳에 도사린 저격위험
외각의 상황이 궁금해진 나는 도청을 나와 궐기대회가 진행되는 군중사이를 뚫고 노동청을 돌아 학동으로 갔다. 연도에는 궐기대회에 참석하려는 시민들과 순찰반의 순찰차량 그리고 홍보차량들로 車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학동은 학운동예비군들이 무등산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곳을 차단하고 있었고, 화순으로 빠지는 지원동과의 경계인 숭의고등학교 옆 원지교를 중심으로 광주천변을 따라 5백여명의 무장시민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경계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원지교에서 학동 시민아파트 쪽을 따라서 내려갔다. 차는 시속 5킬로 정도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시민아파트 철다리 못 미쳐서 내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무장 경호원이 차 밖으로 튕겨져 아스팔트 위로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놀랠 시간도 없이 차를 세우고 뛰어내렸다. 떨어진 경호원의 머리 한쪽에 구멍이 크게 나 피를 콸콸 쏟고 있었다. M16에 맞은 것이었다.
하천 건너편 산속에서 공수저격병이 지휘관차인 줄 알고 아마도 나를 겨냥했던 모양이었다. 나 대신 그가 저격당한 것이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저격당한 경호병을 싣고 옷을 찢어 머리를 감싼 채 전남대의대부속병원으로 달렸다. 그는 죽지 않고 꿈틀댔지만, 전대병원 응급실에 도착해보니 꿈틀거림은 이미 정지되어 있었다. 시체를 전대병원 의사에게 인도한 후 도청으로 돌아와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도청내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밖에 나갈 때는 항상 조심하라고 당부한 뒤, 부실장에게 「수습위」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물었다. 일부 수습위원들이 회수된 무기 2백정을 가지고 계엄사에 구속되어 있는 시민·학생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교섭차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수습위원간에도 의견이 반으로 갈라져 있다고 덧붙였다.
시간이 갈수록 「수습위」에 대한 나의 불만은 더해가고 있었다. 구속된 몇 사람을 빼와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자기들이 했단 말인가? 지금까지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은 왜 신경을 써 주지 않고 엉뚱한 일만 하는가? 왜 총을 회수해 가 계엄당국에 바치는가? 왜? 지금도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에 죽어가고 있는데 무기회수가 웬 말인가?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이런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무기를 절대 넘겨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 권총을 빼들고 가서 무기고를 지키고 있는 시민군에게 『만일 내 허락이 없이 무기를 내주었다간 죽여버리겠다!』고 강경하게 「무기반출 금지명령」을 내렸다. 도청 앞 분수대 쪽에서 갑자기 천지가 진동할 것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무슨 일인가 나가보았다.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계엄당국에 구속되었다 풀려난 30여명의 시민·학생들이 분수대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풀려난 사람들 앞에 몇 명의 수습위원들이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양손을 흔들면서 들어왔다. 몇 사람의 수습원이 상무대에 갔다온 경과보고를 했다. 궐기대회는 각계계층의 연사들이 나와 연설을 하고 시낭독, 구호제창 및 노래, 놀이패의 마당놀이 등 다양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궐기대회가 끝나자 대부분의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갔으나 나는 시내 요소요소와 외각지역의 방어상태를 점거해나갔다. 밤이 깊어가면서 학생과 일반시민으로 구성된 수습위원들이 들어와 상황실 옆 회의실에서 회의를 한다면서 상황실대표로 참석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김창길·황금선·김종배·허규정·양원식·정해민·구성주 등이었다. 그동안 김종배는 장례담당, 허규정은 무기담당, 구성주는 보급담당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도청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그동안 각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과 상견례를 하였다. 나는 원칙적인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결론들이 내려진다면 함께 동참할 것이라고 말한 뒤 이만 돌아가겠다고 내려왔다. 회의 시작 40여분만에 상황실로 돌아와 의자에서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5월 24일
상황발생 1주일째를 맞는 24일이 밝았다. 상황실과 경비반·순찰대의 체제는 이제 많이 잡혀가고 있었다, 도청민원실 2층을 식당으로 이용하고 있었는데 식당에는 여학생들과 젊은 아주머니들이 집에서 밥을 날라오고 도청내의 시민군의 식사시중을 들어주고 있었다. 반찬은 고추장과 멸치 단무지 된장국뿐이었으나 밥을 두공기나 맛있게 먹었다.
「수습위」의 무기회수에 반발
식사도중 부실장이 약간 불안한 얼굴로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 것 같으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해방감에 젖어있던 대부분의 무장시민들은 수습위의 무기를 반환하자는 입장표명에 당황하고 있었다. 무장시민들로부터 무기가 회수되어가고 있었고 시민군 병력이 현저히 감소되고 있었기 때문에 부실장 역시 불안한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상황실요원들도 동요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그러면서도 상황실만은 지휘체계와 질서가 잡혀 시내외의 상황을 체크하면서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순찰대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윤석루가 20대초반의 청년 한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羅州지역에서 꼭 할 얘기가 있어 찾아왔다는 것이다. 청년은 나를 보더니 이곳의 책임자냐고 묻고 전남대학교 학생이라고 신분을 밝히면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어디에서 또 공수대에게 당해서 그러려니하고 내버려두었다. 상황실에 찾아와서 계엄군과의 접전으로 사람들이 죽고 부상을 당했는데 부상자가 아직 살아 있으니 같이 가서 시체와 부상자를 옮겨오자고하여 현장에 가보면 부상시민과 시체는 계엄군이 가져버리고 계엄군의 포위망에 걸려 몇명씩의 사상자를 내고 겨우 빠져나오는 일들을 많이 경험하던 터였다. 병력을 보호하고 광주를 사수해야겠다는 나의 입장에서 보면 결단을 내리기 힘든 문제였다.
또한 솔직한 심정으로 시민들의 그러한 제보 하나하나에 부족한 병력으로 희생을 감내하면 전부 출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청년은 한참 후에 울음을 그치더니 자신은 주월동에서 살고 있는데 갑자기 계엄군과 공수부대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쌍방간 교전이 계속되는 와중에 근처에 있던 동네사람들이 많이 죽고 부상을 당했으니 빨리 가서 부상당한 사람을 병원으로 이송해달라는 것이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계엄군끼리의 교전은 아마 실전경험이 없는 군인들이 서로 이동하다가 상대방을 시민군으로 오인하고 사격을 시작한 것이 서로간의 전투로 변한 것 같았다. 일부시민군들은 나처럼 군복에 철모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오인하곤 하였을 것이다. 그에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정문으로 나가보니 궐기대회가 진행중이었고「수습위」측에서 계엄당국과 협상 후 약속받은 8개항을 전단으로 인쇄해 뿌리고 있었다.
記者들 취재, 가까스로 개방
정문이 소란스러웠다. 도청으로 들어오려는 국내 신문기자와 경비반장인 오동일사이에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당시 광주의 만행이 시작된 초기에는 전혀 보도를 않다가 한창 치열해지자 우리를 「폭도」라고 매도하고 공수대들의 잔학상을「유언비어」라고 단한마디로 잘라버리던 언론기관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일체의 기자들은 절대 출입시키지 말라고 경비반장에게 명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앞으로 나가자 한 기자가 프레스카드를 보이면서「전남매일」기자라고 하였다. 「전남매일」에서는 국내 처음으로 기자들이 양심선언을 하였고, 모든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여 역사적인 기록으로 삼아야하니 원활한 취재를 할 수 있도록 협조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난 나는 보도에는 문제가 있으나 역사의 기록자라는 임무는 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겠다는 생각에 그를 들여보내도록 하고 정문보초와 경비반장에게 프레스카드를 소지한 모든 국내외기자들에게 도청출입을 개방하라고 지시하였다.
오후가 되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외곽을 경계방어중인 시민군들의 상황이 궁금하여 경찰우의를 입고 경호병력을 대동하여 외곽순찰겸 아까 청년이 말한 곳을 가자고 하였다. 학동 방림동 화정동 서부경찰서 광주역 서방3거리 산수5거리 조대입구 등을 돌아 백운동 주월동에 도착했다. 주월동의 목포로 나가는 지점인 옥천여상 부근은 인적이 한산하였고 비가 쏟아져 평화롭게 보였다. 부근 가게에서 물으니 아까 총소리가 광장했다고 하면서 그 지점을 가리켜주었다. 가서 보니 시체나 부상자는 보이지 않았고 부서진 자동차와 군화짝 등이 널려 있었다. 분명히 시민군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니 궐기대회는 끝나 있었다.
상황실에 들어가 의자에 앉자마자 상황병이 사람이 찾아왔다고 하였다. 30대초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간략하게 밝히면서「수습위」측에서 제시한 수습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까지의 불만을 노골적으로 토로하였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있더니 해결되도록 적극적으로 함께 노력하자고 하였다. 그는 尹相元이라는 사람이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8시부터 상황실에서「수습위」와 도청간부들과 연석회의가 열린다고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회의에 나갔더니「학생수습위」측에서는 김창길 정해민 양우식 허규정 김종배,「시민군」측에서는 황금선 김화성 강경섭 자칭 치안본부장인 김양오 등이 참석하여 있었다. 김창길 양원식 정해민 등은 계엄사가 대부분의 연행자를 석방하고 부상자 치료와 장례식등을 허락하였으니 이제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고 무조건 무기반납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허규정 김종배를 제외한 대부분이 김창길의 의견에 동조를 표하였다. 나는「수습위」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타올랐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의자를 집어던지면서 이런 식으로 끝까지 무기를 반납하자고 주장한다면 차라리 도청을 폭파해버리겠다고 고함을 버럭 질러 버렸다.
그러자 몇명이 겁먹은 표정으로 소리없이 회의장을 빠져나갔고 몇명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안절부절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만 남았고 우리들은 자체회의를 갖고 지금까지 발생한 광주의 모든 문제와 앞으로의 방향설정을 같이 하자는 데 의견을 함께하고 조직을 새로이 편성하였다. 시민군 작전상황실에 모인 사람들로 조직이 새로이 구성되었다. 위원장 : 김창길 부위원장겸 총무 : 황금선 부위원장겸 장례담당 : 김종배 상황실장 : 박남선 경비반장 : 김화성 기획담당 : 김종철 무기담당 : 강경섭 홍보담당 : 허규정 위원장단만이 계엄사와 협상하고 나머지 사람은 현재 하고 있는 임무를 그대로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회의는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 앉아 있는데 시내 황금동에서 계엄군의 첩자로 보이는 무리들과 시내를 순찰중인 순찰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상황발생보고가 들어왔다. 즉시 도청에 있는 예비병력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순찰중인 순찰대를 황금동으로 집결토록 무전명령을 내렸다. 무전기가 개방되면서 상황실에서 내리는 지시와 순찰대간의 교신으로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았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황금동 콜박수 쪽에서 산발적인 총소리가 들려왔다. 충동 및 작전상황을 체크하던 나는 출동병력으로부터 용의자 한명 체포로 작전이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5월 25일
정보기관의 공작―「독침사건」
늦게까지 계속된 회의와 황금동사건으로 피로에 젖어 깜빡 잠이 든 나는 부실장의 다급한 깨움에 눈을 떴다.『웬일이오?』 『정보반에 있던 사람이 독침에 맞아 쓰러졌습니다.』『아니! 뭐라고!』『방금 정보반에 있던 사람이 독침에 맞았다고 하면서 치안본부에 쓰러져 있답니다』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2층 계단사이에 있는 치안본부로 뛰어들어갔다. 치안본부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정보반원 장계범과 독침 맞은 부위를 빨던 정향규도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치안본부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굳어 있었다.나는 허리에서 권총을 빼내 천정을 향해「탕―」하고 공포를 쏘았다. 그리고는 움직이면 모두 사살하겠다고 고함쳤다. 그때 치안본주장이던 김양오가 정향규의 턱을 군화발로 걷어 찼다. 의아하게 생각하였으나, 오열들이 쓰는 독이란 혈관에 들어갔을 때는 몇초 이내에 즉사한다는데 독침을 맞았다는 장계범은 20여분이 지나도록 신음만하고 있고 그것을 빨던 정향규도 쓰러져 있었기에 이것은 필시 계엄군의 내부혼란을 노린 책동이라 보고 차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무전기를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던 중 나를 따라온 사람들이었기에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려고 우선 치안본부장에게 두사람을 전대병원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두사람을 내보낸 뒤 상황실로 돌아와 절대 동요하지 말 것을 부탁하고 전대병원으로 갔다. 병원으로 옮겨진 장계범은 응급처치를 받고 있었고 그곁에 정향규도 누워 있었다. 나는 의사들에게 독침을 맞은 것이 확실하냐고 물었으나 자신들은 독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어 확실히 모르고 정밀검사를 위해 병원장을 불렀다고 하였다. 병원침대에 누운 장계범은 나의 손을 붙잡고 끝까지 투쟁하라면서 횡성수설하였다. 나는 아무래도 이상하여 데리고 간 병력 5명을 남겨두고 도청으로 돌아 왔다.
도청안은 조금 전 벌어진 독침사건으로 인한 불안감과 서로간의 불신으로 동요의 빛이 역력하였고 일부가 도청에서 이탈해나가고 있었다. 계엄군당국이 도청을 비우게 하려는 공작의 일환으로 단정한 나는 도청구내 방송국의 마이크를 잡고『지금부터 독침사건에 대하여 거론하거나 누가 수상하다든가 하는 망언을 하는 사람은 우리를 분열시키기 위한 계엄군의 첩자로 간주하여 무조건 사살하겠다』2회를 반복하여 방송하였다. 나의 단호한 방송때문이었는지 도청안의 분위기는 점차 진정되어 갔으며 장계범과 정향규가 병원에서 도주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나는 순찰대에 있던 윤석루 이재호 이재춘 등에게 장계범의 신원을 파악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오후가 되자 모여든 시민들은 여러 종의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궐기대회를 어제와 마찬가지로 열고 있었다.
나는「무장시민군」의 입장을 밝히는 글을 작성한 뒤 궐기대회에서 발표해주도록 윤상원에게 부탁하였다. 잠시 후 윤상원은 우리「시민군」의 입장을 표명하는『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해 왔다. 나는 그것을 읽어 본 뒤「OK」라고 대답했다. 그후 상황실에서 업무를 보고받고 있는데 윤상원이 뛰어들어와『2층 부지사실에서 시민ㆍ수습위원들이 무조건 무기반환을 결의한 뒤 시내 일원에서 무기회수에 들어갔다』면서 막아야 한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장병력 20여명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 2층 복도와 부지사실 문앞에 M16으로 무장한 병력을 배치시키고 내 지시가 있으면 무조건 전부 사살해버리라고 명령한 뒤 부지사실 문을 군화발로 차고 들어갔다.부지사실에는 독립투사인 최한영수습위원장과 부지사 정시채, 장휴동 등 광주의 저명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어들고 하늘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가 천천히 내려 그들을 겨눈 채『어느 놈이 마음대로 무기반납을 결의했느냐?』고 악을 버럭 쓴 뒤『앞으로 이제까지의 죽어간 사람들의 피를 배반하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수습위 일행중 노수남이 일어나면서『지금 무슨 짓거린가? 이제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말고 이대로 끝내버리세. 그렇지 않으면 어찌하자는 것인가?』고 말했다. 나는 그를 향해 쏘아버리겠다는 듯이 권총을 겨누었다가 차마 쏘지 못하고 권총의 손잡이로 노수남의 등을 찍어내렸다. 그는 픽 쓰러졌다. 맞아 떨어진 노수남, 노기와 살기가 등등한 나의 행동으로 부지사실은 완전히 얼어붙어버렸다.『시민의 전체의사를 무시하고 계엄당국과 내통하여 무조건 무기를 반환하자거나 하는 놈이 있으면 모두 죽여버릴테니 모두 도청을 떠나시오! 알았소?』
카메라 챙겨 도망간「치안본부장」
상황실은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 있었다. 자칭 치안본부장 金良五가 무조건 무기반납의 소식을 듣고 치안본부실에 있던 비디오카메라와 일반카메라, 그리고 연행된 사람에게서 압수해 둔 시계와 현금등을 챙겨가지고 도주해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방송과 신문에 얼굴이 드러날까 두려웠던 무장시민들이 기자들에게서 빼앗아 압수해 둔 물건들이었다.나는 치안본부로 달려갔다. 치안본부장과 수사반원이라고 자칭하던 사람들이 거의 떠나가고 2명의 사요원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수사반으로 활약을 하고 있던 김준봉과 위성삼에게 조사반을 재구성하고 반장과 부반장을 맡도록 한 뒤 조사반을 상황실 안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조사반 재편성을 지시하고 돌아오자 수습위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金宗培가 와서 자신은 무기반환을 요구하는 김창길, 황금선과는 도저히 같이 일을 해나갈 수 없으니 차라리 집에 가서 잠을 자는 편이 낫겠다고 하면서 수고하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쫓아나가 나도 당신과 뜻이 같으니 당신을 적극 지지할테니 같이 있자고 하였다. 김종배도 어쩔 수 없이 알았다고 대답한 후 나를 따라 발걸음을 돌렸다.수습위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무장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내가 따르지 않으면 무위로 끝나버리게 되어 있었다. 나는 윤상원 김종배 등과 함께 투항파들을 거세해버리고 다시 조직을 강화하자고 결의하고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자는 굳센 약속하에 밤 9시 도청내 국장실에서 새로 참여한 운동권학생들과 같이 조직을 재구성하였다.
그날작성한 요구조건은,첫째, 금번 광주사태에 대하여 일부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둘째, 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5ㆍ18사태로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 보상을 전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는 것이었고, 이어서 조직을 재구성했다.
운동권 참여한「확대수습위」구성
▲위원장 : 김종배(1954년생 25세, 전 학생수습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대 무역학과 3년)―총괄적인 업무 관할▲내무담당 부위원장 : 허규정(1953년생 26세, 조선대 2년)―도청 내부문제, 대민, 장례문제 관할▲외무담당 부위원장 : 정상용(1950년생 30세, 보성기업 영업부장, 전남대 법대 졸)―일반 수습위원들과 함께 대 계엄사 협상 관할▲대변인 : 윤상원(1951년생 29세, 전남대 정외과 졸, 신협직원, 들불야학 대표)―기자회견 및 집행부의 모든 대외 공식적인 발표▲상황실장 : 박남선(1954년생 26세, 운수업)―시민군 군사업무 담당 ▲기획실장 : 김영철(1948년생 32세, YWCA신협이사, 광천동 빈민운동)―지도부의 제반 업무 기획▲기획위원 : 이양현(1950년생 30세, 노동운동, 전남대 사학과 졸)―기획업무▲기획위원 : 윤강옥(1951년생 28세, 전남대 사학과 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기획업무▲홍보부장 : 박효선(교사, 전남대 국문과 졸, 문화패「광대」회장)―궐기대회 및 제반 홍보업무 담당▲민원실장 : 정해직(1951년생 29세, 교사, 홍사단아카데미 학생회장 역임)―제반 대민업무, 장례 담당▲조사부장 : 김준봉(1959년생 21세, 고려시멘트 회사원, 시민군으로 봉기초에서부터 참가)치안질서 위배자 조사▲보급부장 : 구성주(25세)―식량조달, 식사공급조직이 재구성된 뒤 온건ㆍ투항파로부터 김종배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장경호원 2명을 배치하였다. 회의에서 경비병력을 대학생으로 교체시키자는 약속대로 YWCA에서 대학생 70여명이 들어와 도청안의 학생 30여명과 함께 경비업무에 들어가기 위해 상황실로 왔다. 나는 경비반장에게 지시하여 대학생들에게 카빈소총 1정씩과 15발들이 실탄 1크립씩을 지급케 하여 각 부서로 배치하였다. 도청의 경비가 한층 강화된 것이다.
5월 26일
새벽 상황실을 따갑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뒤척이면서도 애써 무시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무전기가「쐐―액」거리기 시작하였다. 같이 졸고 있었던 부실장 梁時榮(29)이 등을 흔들었다. 나는 웬일이냐는 듯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계엄군이 진입하기 시작했답니다』그는 당황하면서 말했다.『예, 확실합니다. 시민의 전화제보와 무전보고로는 현재 탱크를 앞세우고 공단입구글 통과하고 있답니다』『뭐야?』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상을 걸고 전병력을 출동준비시키라고 한 뒤, 계엄사령부 상무대분소에 전화를 걸어 부사령관인 蘇俊烈을 바꿔달라고 하였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소준열사령관이 부재중이라고 말한 후 자신은 그 분의 참모이니 자신에게 말하라고 하였다.그래서 만일 진입해오고 있는 계엄군병력을 원위치로 후퇴시키지 않으면 회수된 무기를 전 시민에게 나누어주고 재무장시킨 뒤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고, 그래도 불응하면 보관중인 다이너마이트와 TNT를 전부 폭파시켜 자폭하겠으니 빨리 나의 뜻을 부사령관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그는 알았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병력출동준비가 끝난 시민군을 이끌고 찦차를 몰아 농성동 공단입구 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내 차에는 이영생장로와 수습위원 한 사람이 같이 탑승하고 있었다. 나는 차안에서 계엄사에 통보한 전화내용을 말하여주었다. 수습위원의 얼굴은 침통해져갔다.계엄군의 탱크는 시민군의 바리케이트를 깔아뭉개고 한국전력 앞에 서 있었다. 계엄군은 한전 앞에서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고 우리는 서부경찰서 앞에서 정차하였다. 수습대책위원과 나는 계엄군장교에게 다가갔다. 계엄군 장교는 우리에게 『어떻게든 불순분자나 선동자들을 제거하고 총기를 전부 회수하여 반납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다』고 강경하게 위협조로 말하였다. 그래서 우리들은『지금 이 자리에서 원위치로 돌아가시오. 지금 당신들이 이런 일을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더욱 더 우리는 강해지고 당신들과는 피보는 일만 있을 것이요』라고 대답해주었다.
나는 계엄군이 서울과 연결되는 외곽도로를 확보하여 병력과 보급품 수송로를 확보하고 시민군이 차량과 기름을 얻고 있는 아세아자동차공장을 차단, 시민군의 기동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우리도 양보할 수 없는 생명선이었기에 강경하게 물러가라고 재차 요구하고 돌아왔다. 결국 그들은 물러갔다. 그리고 그들은 시민들의 반응을 측정해 보고 시민군의 병력을 확인해보려는 이중적인 작전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한편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찍부터 서민들이 도청앞으로 몰려왔다. 수만명의 시민들이 모여 오전 10시경 궐기대회를 열고 있었다. 격노한 시민들이 분수대 위에 올라가 열변을 토하면서 계엄군과 정부당국을 규탄하는 소리가 도청앞에 가득찼다.
궐기대회를 마치고 시민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금남로―유동3거리쪽으로 시가행진을 하고 있었다.「우리는 결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무기반납 결사반대」「살인마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긴 행렬은 끝이 없어 보였다. 상황실에 들어가자 아침 계엄군의 진입 때문이었는지 뒤숭숭한 가운데 일손을 제대로 못잡고 있었다. 나는 먼저 도청의 엄격한 출입제한을 시키고 시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계속 독려하고 다녔다. 무기와 보급품을 철저히 관리토록 하고 만일의 일에 대비하여「시민군」을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가장 말썽이 많았던 조사부와 치안본부에 도청안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운동권학생을 재배치하고 수상한 사람이나 기존의 조사부원들을 거의 나가도록 조치하였다.
충격적인 상황을 접하고 나서 도청안은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부서는 통제와 지시가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으며 무기고의 무기를 재배치하고 시민군조직을 확고하게 만드는 등 새로운 결의로 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점점 약화되어가고 있는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광주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자 기자회견도 가졌다. 프랑스기자, 미국의 NBC, CBS, UPI통신 등 코가큰 기자들과 일본의 NHK 등이 참석하여 홍보부장 尹相元이 설명하는 우리의 목적, 요구, 현재의 상황을 열심히 취재하고 비데오로 여기저기를 촬영했는데 나는 경비반장에게 협조해주라고 지시하였다.나는 시내의 지도가 붙여진 상황판에 병력 배치도를 작성하여 외곽지 계엄군과 대치중인 지역을 점검하고 도청을 중심으로 투항파들의 끈질긴 교란작전을 제거하고 그들을 철저하게 시민군과 접촉지 못하게 하는 일을 시행해 나갔다. 또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시민군 총지휘관으로서의 임무가 주어졌다.
생포한 계엄군,「죽이라」아우성
기동타격대의 조직과 병력배치도 작성을 끝낸 나는 광주공원에 대기중인 기동순찰대의 병력운용을 위해 경호병을 대동하고는 공원으로 갔다. 찦차가 태평극장을 돌아 광주천을 타고 공원쪽으로 가는데 무전기에서 기동타격대 4조가 광천동 동화석유 부근에서 계엄군과 교전중이라는 보고가 들어 왔다. 무전으로 상황부실장을 불러 도청의 예비병력을 출동시키라고 한 후 공원으로 가 상황이 발생되었으니 모든 기동타격대는 광천동으로 출동하라고 하고 나도 경적울 울리면서 광천동으로 달려갔다. 쏜살같이 달리는 찦차가 광천동 다리에 이르자 무전기가 다시「쇄―액」거리면서『계엄군 1명 생포』,『작전완료』를 연달아 알리고 있었다. 나는 무전기의 마이크를 잡았다.『여기는 상황실장! 상황실 나와라!』무전기에 부실장이 나왔다.『여기는 부실장! 말하라 오버』『나 상황실장인데 작전완료가 확실한가?』『확실합니다. 5분 전 작전이 끝나고 계엄군 1명 생포하여 귀대중입니다』『우리 타격대의 피해는?』『타격대원 1명이 어깨에 총상을 입었으나 큰 부상은 아니라고 합니다』『알았다! 곧 돌아갈테니 생포한 계엄군을 조사반에 넘기도록!』교신을 끝낸 나는 도청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공원에서 출동한 기동타격대원들도 자동차의 해드라이트를 켠 채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도청에 도착, 바로 부실장에게 물었다.『총알이 관통하지 않고 어깨에 스치기만 하여 병원으로 후송치 않고 간단한 치료 후 원대복귀했습니다』『다행이군. 계엄군 포로는 어디 있고?』『지시대로 조사반에 있습니다』부실장의 보고를 받고 나는 바로 상황실을 반으로 나누어 캐비넷으로 막아진 조사반으로 갔다. 조사반은 거동이 수상하다는 시민들의 제보에 의해 기동타격대에 체포되어 연행된 사람들과 조사원들의 소리로 소란스러웠다.『어서 오세요, 실장님!』조사반장 김춘봉이 인사를 하였다.『잡아온 계엄군은 어디 있소?』『저기 있습니다』조사반장이 손을 들어 사무실 한쪽을 가리켰다. 구석에는 양손에 수갑을 차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얼룩무늬 군복차림의 공수대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는 듯 입술까지 창백하게 변한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순간 증오심이 타올랐다.『어이! 조사반장, 저 자를 이리 데려오시오. 수갑도 풀어주고』손목이 자유로워지자 약간 긴장이 풀리는가 싶더니 다시 굳어지기 시작했다.『소속부대는?』『상무대 급양대 소속입니다』『이름은?』『병장 김기범입니다』『언제 어쩌다 잡혔나?』『조금 전 외곽병력에 보급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잡혔습니다』꼬박꼬박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다리는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그때 상황병이 들어와『실장님! 계엄분소에서 전화왔읍니다』하기에 잠시 심문을 중단하고 조사반을 나화 전화기를 들었다.『내가 상황실장입니다만 누구시죠?』『저는 계엄분소 김중령입니다. 조금 전 잡혀간 사병문제로 전화했습니다』『무엇이 잘못되었소?』『그건 아닙니다만 실장님! 죄송하지만 그 사병을 돌려주시지 않겠습니다?』『뭐라고요? 돌려달라고요? 그렇다면 현재까지 계엄분소로 붙잡혀간 시민과 학생들을 즉시 보내주시오』『그건 좀 곤란한 일이라서…… 아니 실은 제 소관의 일이 아니라서……』『뭐라고요?』『끌려간 시민과 학생들을 당신 마음대로 돌려보낼 수 없듯이 나 역시 혼자 결정지어 처리할 수 없소이다. 포로를 인수받고 싶으면 시민과 학생들을 돌려보내시오. 그들이 돌아오면 돌려보내겠소. 알았소?』수화기를 던지다시피 놓은 통에 여운이 오래 남았다. 부하를 걱정하는 김중령의 생각, 평소라면 높이 치하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광주시민이 받은 고통은 그것을 용서할 수도, 이해할 수도, 더구나 덮어둘 수는 절대 없는 일이었다.
되돌려보낸 계엄군 포로
공수대원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이 새끼들아! 이 악마새끼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없어져야 돼』하면서 몇가지 질문을 더 한 다음 상황병에게 경찰우의를 가져와 입히라고 지시하였으나 뜻밖에도 지시에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아니, 실장님! 어쩌시려고요?』『계엄군들이 무자비하게 학살했다고 해서 똑같은 보복을 한다면 우리는 무엇이 되는 것이요? 그래서는 안될 것이요. 그러니 포로문제는 나의 지시대로 해 주었으면 좋겠소』상황실요원과 조사반원들의 적개심을 무시해버린 채 김병장을 데리고 나왔다.『김병장! 식사했나?』『……』『임마! 입이 갑자기 붙어버렸나? 밥에 독약 넣어 죽일까봐! 나도 배가 고프니 같이 밥이라도 먹자』죽음의 공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