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 그 날의유산/‘세상은 돌고 내 남편은 정신질환’.김순자(월간경향, 198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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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특집·광주 그 날의 유산
‘세상은 돌고 내 남편은 정신질환’
김 순 자 주부
필자는 광주사태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도청 기획실장을 맡았던 김영철의 부인이다. 김영철은 이 땅의 소외받은 사람들을 위해 야학과 信協운동을 하다, 광주사태를 만났고, 그 와중에서 구속되었다. 수감 중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김영철은 결국 정신이상이 되어 출감하였다. 광주사태 8년의 세월을 맞는 오늘, 한 많은 한 「광주아내」의 看病記를 싣는다.
5월과 함께 파산된 우리 가정
또 5월이 돌아온다. 80년으로부터 8년째, 해마다 5월이 돌아오면 나는 한숨과 눈물과 분노로 5월을 보낸다. 5월은 나에게서 행복도 사랑도 즐거움도, 웃음도 보람도 다 앗아가 버렸다. 계엄공수부대의 광주진압작전이 끝난 그해 5월 27일부터 오늘까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이다. 과일장사·빵장사·우유배달·나물장사 등 먹고 살기 위해 뛰었으며 이사도 여러 차례 다녔다. 사실 고생을 하더라도 내일이 있고 보람이 있다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 5월 27일, 도청에서 연행되었던 남편(김영철)이 남들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면 이런 생활의 고통쯤이야 문제가 되겠는가. 구속된지 19개월만에 돌아온 남편은 좌수족 불구에 의식마저 온전하지 않은 상태다. 그동안 종다는 약은 다 써보고 좋다는 병원도 다 다녀보았으나 과거와 같이 온전한 모습을 지니기에는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8년 전이 엊그제만 같다. 두 눈 앞에 또렷하다. 남편과 함께 살았던 광천시민아파트(광주시 서구 광천동 소재)시절, 활달하고 건강하고 의욕적이었던 남편, 고아출신이나 의협심이 강했던 용준이 삼촌, 그리고 가난한 노동자들을 가르친다고 광천동에 온 상원이·관현이 삼촌 등의 모습이 또렷하게 어른거린다. 모두들 개인의 출세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자기보다 못 배운 청소년 노동자들을 위해서 헌신하던 착한 이들이다.
80년 5월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당했고, 끌려가 모진 고통을 당했다. 나는 살아남아 불구의 남편과 세아이를 거느린 가장으로 힘든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 현실의 생활은 참담하지만 나는 내 남편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킬 것이며, 죽어간 삼촌들의 뜻에 어긋나는 비굴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5월’피해당사자의 한 사람으로 꿋꿋하게 살아 갈 것이다.
그런 다짐으로 지나온 길을 더듬으며 이 글을 쓴다. 구구한 듯하여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를 쓴다. 80년 5월18일,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 남편과 함께 나는 교회의 낮예배를 보고 돌아와 광천시민아파트 청년들과 효우회란 계를 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김대중씨가 잡혀갔다는 등의 소식은 이미 아침나절에 들었었다. 또한 남편을 통해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삼촌도 잡혔는지 모른다고 들었다. 이웃들 사이에서도 5·18의 아침은 그 전의 아침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남편도 분노하고 용준이 삼촌은 주변의 민주인사들, 학생들을 크게 염려하는 모습이었다. 시가지 시위가 격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찍 계를 한 다음 오후에 남편은 시내로 나갔다.
시내에서의 시위소식은 그 내용이 너무나 엄청나 이웃들은 모두 분노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공수부대의 잔학상을 얘기했다. 사람들은‘난리났다’고 말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남편과 용준이 삼촌으로부터 시내에서의 시위소식을 자세히 들었다. 총을 든 계엄 공수부대원들이 마구잡이로 시민들을 때리고 무자비하게 구타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문목으로 도망해 집에 돌아왔다. 남편과 용준이 삼촌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저녁에 남편과 용준이 삼촌과 근처에 살고 있었던 상원이 삼촌, 그리고 야학의 강학들은 무엇인가를 협의하는 것 같았다. 광천시민아파트 바로 옆의 광천 천주교회와 아파트 앞의 초라한 가게방을 개조해 야학을 하고 있었는데 통금이 단축되어 수업을 못하고 웅성웅성하다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강학들만 무엇인가를 의논하는 모습이었다. 엊그제 4월까지 관현이 삼촌이 야학의 강학이었기 때문에 그를 아는 이곳 이웃들은 전남대총학생 회장으로 연설 잘하는 박관현의 안부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남편은 19일 여느 날과 같이 YWCA(당시 광주경찰서 부근에 있었음) 신용협동조합에 용준이 삼촌과 함께 출근하였다. 이날도 10시가 넘어서면서 데모가 시작되었다. 어제 있었던 공수부대의 잔학상에 대해서 전시민들이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남편과 용준이 삼촌으로부터 공수부대의 엄청난 만행을 직접 듣고 몸서리가 쳐졌다. 시위하는 시민들을 쫓아 남편과 용준이 삼촌이 근무하는 YWCA 안에까지 공수부대는 마구들어와 데모와 상관없는 사람까지 끌어내려 무자비하게 구타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YWCA에서 구타하는 모습을 보고 길건너 무등고시학원생들이 우하며 야유를 보내자 떼거리로 학원에 들어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나와 구타를 하는데, 학원생들을 건물 밖으로 끌어내 M16 개머리판으로 치고 방망이로 때리고 군화발로 질근질근 밟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한 것이다.
YWCA信協에서 이 광경을 보고 남편과 용준이 삼촌은 그만 눈이 돌아버린 것이다. 남편은“이놈의 새끼들, 짐승만도 못한 놈들”하며 오열했다. 용준이 삼촌은“총만 주어진다면 이 새끼들을 다 갈겨버려야 하는데”하면서 분노했다. 남편과 용준이 삼촌이 시민군의 일원이 되어 광주의거에 적극 참여하게 된 동기가 여기에 있었다.
「투사회보」를 만들기 위해
남편은 상원이 삼촌, 그리고 들불야학의 강학들과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는 것같았다. 통금연장으로 야학수업은 불가능했고, 밤사이 강학들이 아파트 주변을 왔다갔다 하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야학의 삼촌들(강학들)은「투사회보」를 만들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야학의 등사기를 가지고 상원이 삼촌이 쓰고 글씨 잘쓰는 용준이 삼촌이 밀었다고 들었다. 시민들이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를 쫓아낼 때까지 저녁이면 남편과 용준이 삼촌, 그리고 상원이 삼촌과 들불야학의 강학들과 학생들이 아파트 바로옆에 있는 천주교회의 야학교실과 아파트 앞 교실에서 그 작업을 계속했다. 남편과 용준이 삼촌은 신협 업무는 중단되었으나 계속 출근을 했다. 출근해서는 시민들과 데모를 하고, YWCA 신협에서 그 소식을 다른 곳으로 전화로 알리기도 했다. 22일인가 남편은 팔을 다쳐 치료를 받고 돌아왔다. 시민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해 싸우다 공수부대가 던진 돌을 맞아 어느 개인병원에서 치료하고 왔다는 것이다. 계엄군이 시내에서 완전히 물러간 다음, 남편과 용준이 삼촌은 집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한번 옷갈아 입으려고 들어온 남편을 붙들고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말렸으나 남편은 같이 있고 싶어하는 어린 딸 선형이의 팔까지 뿌리치고 시내로 나갔다.
들불야학의 삼촌들과 용준이 삼촌, 그리고 모르는 청년들이「투사회보」를 만들어 시내 변두리 주택가 등을 돌며 뿌렸다. 시민들은 모두 협조적이었다. 나도 시위대원들이 광천시민아파트까지 왔을 때 주민들과 함께 합심하여 돈을 걷고 쌀을 걷고 음료수를 걷어 그들에게 주었다.한번은 상원이 삼촌이 왔길래 남편의 안부를 물었더니, 아무 걱정말라는 자신있는 표정을 하며 시내로 나가는 것이었다. 용준이 삼촌은 25일 밤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내가 차려준 저녁밥을 먹고 다시 시내로 나갔다. 이날이 용준이 삼촌과 마지막 날이 되어 버렸다. 26일 계엄군이 진압작전을 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남편을 시내에 보낸나는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같은 국민을 그래도 마구 죽이겠는가 하면서도 안심을 할 수 없었다. 저녁 무렵 방직공장에 다니는 여동생을 시켜 시내도청에 한번 가보라고 한 후 기다렸는데, 동생은 상원이 삼촌을 만나 잘 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도청을 지키는 시민군들의 제지로 얼굴도 못보고 돌아왔다. 총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하였다.5월27일, 아침이 밝았다. 일어나자마자 사람들은 계엄군이 도청에 들어왔고 시민들을 다 죽였다고 야단이었다. 순간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죽은 시체라도 찾아야
나는 남편을 알 만한 곳에 다 전화를 해보았다. 그러나 남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27일 종일 혹시라도 하며 남편의 소식을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나는 사망한 것으로 단정하고 시신이라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궁리 저 궁리를 해보았다. 차도 다니지 않고 시내를 계엄군이 지키고 있었으며, 도청주변은 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어차피 내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5월 28일 오전 9시경 평소에 잘 아는 광천삼화신협 김길만 상무의 자전거 뒤에 타고 도청엘 갔다. 도청은 군인들이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도청 안쪽 시체를 가마니로 덮어둔 곳엔 장갑차 두 대가 가리고 있었으며, 도청뜰에도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다. 가족들을 찾으려는 시민들이 몰려와 시체라도 확인하자고 하며 들어가려고 했으나 계엄군들과 수위들이 접근을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상무관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후 상무관 벽에 사망지 이름과 주소를 적어 붙였다. 나는 가슴을 조이며 읽어나갔다. 남편의 이름도, 용준이, 상원이 삼촌의 이름도 없었고, 아는 사람들의 이름은 없었다. 잠시 후 쓰레기차 3대에 시체를 가득 싣고 상무관으로 시체를 옮겼다. 의사들이 검진하고 나서 확인을 하라며 기다리라고 했다. 저렇게 많은 시민들이 죽었으니 분명히 남편도 죽었을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 온 사림들로 상무관 앞은 야단이었다. 남편을 잘 아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남편의 생사를 알아보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분들의 얘기가 시청에도 알아보았으나 남편의 이름은 없었다고 말해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학동에 사는 재환이 삼촌이 달려오며“용준이가 YWCA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고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리내어 울었다. 남편의 생사는 알 길 없고, 고아로 어렵게 산 용준이 삼촌이 더없이 불쌍했다.
나는 남편의 생사도 꼭 확인하려고 상무관 시체더미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검진을 하고 언제 확인하게 해줄지 막막하였다. 그런데, 누군가 남편을 잘 아는 이가 와서 명단에 없는 사람들은 상무대로 잡혀 갔다고 전해주었다. 일말의 희망은 있었으나 저 많은 시체를 보니 살아있으리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오후 2시경 YWCA쪽에서, 시체 2구를 옮기는 것을 보고 용준이 삼촌이구나 하며 다가가려 했으나 제지하는 바람에 허사였다. 결국 시신확인을 못하고 저녁에 집에오자 우리집을 수색하기 위해 계엄군이 왔다고 야단이었다. 그들은 우리 방안을 수색했고, 용준이 삼촌 방을 수색해 자기들이 가져갈 것을 몽땅 챙겨가버렸다. 이웃들에게 우리가 간첩이라고 하면서 마구잡이로 수색하고 나가버렸다. 우리집만 수색한 것이 아니라, 들불야학의 천주교회 교실도, 아파트 앞 교실도, 인근 상원이 삼촌집 등도 수색해 갔다.
다음 날, 잡혀가지 않은 들불야학의 삼촌들로부터 상원이 삼촌의 사망소식을 전해들었다. 어안이 벙벙해 한동안 말문이 막혀버렸다. 엊그제까지“걱정마시라”며 안심시키더니, 그렇게 따뜻하고 좋은 분이 가시다니….
단란했던 광천시민아파트 시절
우리 부부는 1977년 봄, 광천시민아파트에 전세 10만원을 주고 입주하였다. 남편이 YWCA 협동개발단에서 소정의 교육을 받은 다음 영세민들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는 이 아파트지역을 빈민아파트지역 개발사업지역으로 선정, 우리 부부는 입주하게 된 것이었다. YWCA에도 관여했고 고아원을 운영하는 서경자씨(남편의 이모임)의 소개도 있었다. 입주 첫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은 말할 수 없이 거칠고 아파트 앞마당이며 공동화장실이며, 세탁장이며 복도 등에 청소 한번 한 흔적이 없었다. 재래식 화장실은 요석이 가득 끼어 코와 입을 막지 않으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름만 아파트지 실제로는 도시 변두리의 판자집촌과 다를 것이 없었다. 市에서 이 근처에 집단으로 사는 피난민들고 천막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아파트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런 아파트는 대한민국 천지에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남편은 이곳에서 지도자로서 생활해야 하고, 나는 내조를 해야 했다. 우리는 서서히 주민들과 사귀어가기 시작하고 우리도 융화되어 갔다. 남편은 환경정화사업부터 시작하기고 마음먹고, 매일 아침청소부터 시작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빗자루를 들고 아파트 앞마당을 쓸고, 현관과 복도, 화장실을 청소해 나갔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선 어린이들이 남편을 따랐고 어른들도 따르기 시작했다. 남편은 애들의 이름을 다 외웠고, 아침이면 함께 청소하고, 주변의 효광여중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YWCA 협동개발단에 출근하였다.저녁이면 청년들, 주민들과 만나서 아파트지역의 개발사업을 구상하였다. 남편을 따라 나도 아주머니들과 어울려 남편의 사업을 설명하고 여자들이 함께 해야 할 일을 찾았다.남편은 매일 아침의 청소는 빠뜨린 적이 없었고, 그동안 사귄 청년들, 주민들과 함께 아파트 주변 정화사업을 시작하였다. 아파트 내벽, 외벽을 청소해서 새페인트를 칠하고, 공동화장실, 공동세탁장(세대마다 화장실이나 수도시설이 되어있지 않고 공동으로 화장실과 세탁장을 사용함), 그리고 복도의 부서진 기물을 수리하고, 주변 하수구를 정비하였다. 좁다란 운동장에 화단도 설치하였다.
깨끗해진 화장실
아파트는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복도에 들어서면 코를 찌르던 화장실 냄새도 사라졌고, 외견으로나마 깨끗해 보여 사람들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주민들도 자신을 얻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을 성심껏 내조하였다. 공동으로 일할 때면 식사대접, 술대접은 물론이요, 우리 집은 지역주민들의 공동방ㆍ회의방이 되었다. 남편은 이 지역에 이름만 있었던 유진청년회에 가입, 총무가 되었고, 이 아파트 주민이 조합원이며, 사무실도 책임지고 일하는 사람도 없었던 삼화신용협동조합의 책임을 맡았다. 책걸상과 원장 등의 서류가 우리 안방을 차지했다. 우리 안방을 신협사무실로 사용한 것이다. 출자금ㆍ예금거래 등이 미미하여 남편은 어린이들의 모임을 이끌어 폐품수집 등의 사업으로 각 가정에 통장을 가질 수 있도록 하여 주민들의 관심을 끌어나갔다. 조합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어린이 애향단 모임, 유진청년회 모임 등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Y개발단’이 해체되고 남편은 급료 3만원에 YWCA신협에 다니게 되었다.
어느날 나하고 상의도 없이 청년 한사람을 데리고 왔다. 고아 출신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고, 겨울인데도 신협의 책상에서 잠자야 하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이 청년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이 분이 박용준 삼촌이다. 용준이 삼촌은 남편의 사업을 잘 도와주었다. 두사람은 의형제나 다름없었다.
고아를 의형제로 삼고
남편은 입주 이후의 활동을 주민들에게 인정받아 A동 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얼마 뒤에 남편은 또 아파트 지역‘새마을지도자’가 되었다. 평소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사는 지역, 경찰에서는 우범지역으로 알려졌던 시민아파트 주변의 사업들이 관청에도 알려져 그렇게 된 것이다. 남편은 A동ㆍB동ㆍC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광천시민아파트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어렵고 힘든 나날이었다. 7∼8평 정도의 방 두 칸의 우리 집이 신협사무실이요, 어린이 애향단청년회, 반상회 등 각종 모임의 장소, 주민교육의 장소였기 때문에 나는 모든 모임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해야 했다. 가장 힘들고 고달팠던 일이 전기세ㆍ수도세 등을 분배해서 수금하는 일이었다. 공용수도이고, 전기는 한동에 하나씩 설치되어 있어 40∼50세대 주민들에게 그것을 공평하게 분배하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었고 주민들 사이의 분쟁거리였다.
5ㆍ18 광주의거로 남편이 교도소로 끌려간 이후 1년여 동안 그 와중에서도 나는 남편을 대신해 이 일만은 책임있게 처리했다. 일이 이루어지고 주위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보람 속에 우리는 생활하였다. 주변 하수구 정비는 누구나 반대했던 힘들고 어려운 사업인데 단시간에 해내 주민들 모두가 기뻐한 보람찬 사업이었다. 이 일이 알려져 남편은 광주시장의 표창을 받았고, 어느 신문사에서 상을 준다는 제의도 해왔으나 남편은 그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서중학교와 광주일고를 나온 남편은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진학을 못했고, 잠시 5급공무원을 하다 체질에 안 맞아 그만두고 밑바닥에서부터 스스로 고쳐야 한다고 늘 주장했고,‘Y개발단’에서도 그런 교육을 받았다.
새마을지도자회의나 반장의 업무를 보다가 가장 화를 내는 대목이 박정권의 부정ㆍ부패ㆍ독재 등이었다. 회의에서 박정권을 따르라는 강요나 하고, 반상회를 자기들의 하부 조직으로 여기고 이런 지시, 저런 공문이나 보내오는 일이 생기면 남편은 나쁜 놈들이란 말을 자주 하였다. 용준이 삼촌도 그러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너그럽고 헌신적이었지만, 권력있는 사람들이나, 사기쳐서 돈번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남편과 용준이 삼촌은 이 아파트 지역의 장기종합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주민들의 생활을 조사하여 그것을 토대로 주민소득사업, 저축증대, 폐품 수집, 신협활성화, 공동작업, 지속적인 개발사업, 아파트 제값받기운동, 어린이 애향단, 유진청년회, 청소년 교육사업, 의식개발, 민주시민양성 등의 계획을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세웠다 허물었다를 반복해 완성했다. 남편은 이스라엘에서의 협동촌, 지역공동체 등에 관해 자주 얘기했으며 실제 공부도 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야학 개설
1978년 7월, 광천시민아파트 바로 옆 광천천주교회에‘들불야학’이 생기면서 남편의 사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남편은 외롭고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해왔는데, 이제 동료ㆍ동지를 만난 것을 무척 기뻐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남편의 계획서 안에 이 야간학교 개설이 들어 있기 때문에 남편은 이 야학을 자기사업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박기순ㆍ신영일ㆍ나상진ㆍ왕상원ㆍ박관현ㆍ배환중ㆍ고희숙ㆍ전용호ㆍ정재호ㆍ서대석ㆍ홍조식 등등 전남대생들로 그 후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 간 사람들이다. 동생같은 박기순이는 대학생으로 운동을 하다 퇴학당해 공장에 다니면서 야학에 열중하다 과로와 연탄가스로 78년 12월 아깝게 죽었다.
여대생 강학(교사)들은 동생같아 그냥 이름을 불렀고, 남자 강학들은 삼촌이라고 불렀다. 상원이 삼촌은 나이가 제일 많고 또 직장도 그만두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다 광주의거 때 죽었으며, 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관현이 삼촌은 똑똑하기로 유명했는데, 광주의거로 수배받다 잡혀 감옥에서 단식하다 죽었으며 신영일·전용호·배환중 등 많은 삼촌들이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엘 갔다. 상원이 삼촌이 A동에 사글세로 입주하면서, 야학의 학생들과 강학들의 공동방이 되었다. 또한 아파트 C동을 일일다방을 해 번 돈으로 전세내 야학교실을 둘이나 운영하였다. 하나는 바로 옆 광천천주교회의 교리실 교실이고, 하나는 C동의 교실이었다.
야학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대개 밤10시였다. 그 시각부터 초기에는 상원이 삼촌방에서, 나중에는 우리집에서 강학들이 만났다. 막걸이를 마시며 놀 때도 있었는데 그렇게 놀더라도 주위에 소란을 피우거나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상원이 삼촌의 구수한 창과 소리의 내력, 관현이 삼촌의 「각설이 타령」이나 「명태」, 그리고 용준이 삼촌의 성악가가 부르는 듯한 가곡 등, 노래 잘 부르고 잘 노는 삼촌들이었다. 나는 그때 「청실홍실」이란 노래를 불렀는데, 모든 삼촌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상원이·관현이 삼촌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노래부를 때마다 “아짐! 청실홍실”하며 노래불러 달라는 삼촌들의 음성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어렵고 힘들고 고달픈 나날이었지만 생기가 돌았고 활력이 있었고 재미있었다. 79년 7월부터 상원이 우리집으로 들어와 살았다. 용준이 삼촌과 함께 같은 방 거처를 했다. 상원이 삼촌은 고교생인 동생 방 얻어 줄 돈이 없어 동생을 그 방에 살게 하고 우리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래서 우리 집은 완전히 야학공동방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불평불만 한마디 삼촌들에게 하지 않았다.
신발가게 열어 뒷바라지
1979년은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남편은 반장 업무, 새마을지도자 업무에다 광천삼화신협 업무·들불야학 수업·아파트지역의 여러 모임 참가 등으로 분주했다. 이 모든 일들은 남편과 용준이 삼촌이 YWCA신협에서 퇴근한 후에 진행되었다. 얼마되지 않아 남편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꾸려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원이 삼촌은 나에게 장사를 권유했다. 남편, 용준이 삼촌 등과 협의해, 상원이 삼촌이 선배로부터 빈 90만원으로 아파트 앞에 조그만 신발가게를 인수했다. 그 때가 79년 말경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남편의 아파트 개발사업은 발전해 나갔다. 광천삼화신협은 자산이 날로 늘어나 우리 살림방에서 아파트 앞 조그만 가게로 이사해 직원을 정식 채용했고, 얼마 후에는 시민아파트 앞 대로변에 직원 네사람이 근무하는 信協으로 발전했다. 80년초 이 삼화신협의 정기총회에서 남편은 이사장에, 상원이·용준이 삼촌, 야학 삼촌 한 분, 그리고 남편과 함께 아파트 지역에서 일해왔던 여러 사람들이 신협의 간부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80년을 맞은 것이었다. 박정권 말기 야학의 삼촌들에게 정보형사들이 따라다닐 때, 한 번은 남편이 광천동 시민아파트 개발사업의 프로젝트를 가지고 학교에 찾아가 교수들을 만난 적도 있었다. 야학의 강학들이 문제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박관현 삼촌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치 친동생인 것처럼 기뻤다. 똑똑하다, 인물났다고 시민들이 얘기할 때마다 뿌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러나 5·18광주사건으로 모든 것은 끝나고, 공든 탑은 무너져 버린 것이다.나는 당시 임신 8개월의 몸으로 거동하기도 불편한 몸이었다. 게다가 살아있다는 뒷받침을 할 ‘소식’이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5월 30일 엽서 한 장이 날아들었다. 남편의 글씨였다. ‘통합병원에서 치료중이고, 걱정을 끼쳐 미안하다, 조합일·반장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눈물겹도록 반가왔다. 우선 살아있다는 사실이 그동안의 긴장을 해소시켰다.
그러나 필체를 자세히 보니 평상시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안심도 잠시였다. 오후 신문에서 도청투쟁위원회 기획실장 김영철이란 보도를 보고, 완전히 사형감이겠구나 싶었다. 이날 저녁 나는 편지를 안고 다 죽는 판에 살아있다는 사실로 눈물을 흘렸고, 사형감이겠다는 생각에 서럽게 울었다.
첫면회 때 남편은 헛소리
남편에게 최초로 면회가 허용된 것이 10월이었다. 부상당했다는 소식은 들었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도 없었는데 상무대 안의 건물에서 그를 본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용씨(현재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 회장)와 함께 나온 남편은 더러운 군복에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절뚝이며 걸어나왔다. 이마에는 3㎝가량의 흉터가 세 개나 있었다. 말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더듬더듬거리며 남편은 “상원이, 용준이가 죽은 마당에, 간첩으로 몰릴 마당에, 이놈들에게 수모당하느니 차라리 죽자”고 결심하고 자살을 시도하다 그랬다는 경위를 얘기했다. 나는 그소리를 듣고 하염없이 울었다. 내가 우니 여름에 태어난 딸 은형이도 덩달아 울었다. 남편은 정상이 아닌 환자의 몸으로 신협을 걱정하고 시민아파트의 개발계획을 걱정하고 있었다.
남편이 없는, 남편이 광주사태의 대역죄인으로 몰린 5·27이후의 일을 생각할 때 기가 막혀 마음속으로 울 수밖에 없었다. 신협은 업무가 중지되도 조합원은 탈퇴해갔으며, 반장일은 계속 봤으나 사람들의 눈초리가 그 전과는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들불야학도 중단되었으며, 신발가게도 손님의 발길이 끊겼다. 당장 생계를 꾸려갈 길이 없었다. 생계유지를 위해 만삭의 몸으로 우선 1개에 10원씩 하는 나무젓가락을 종이에 싸매는 일을 나갔다. 딸 은형은 7월 3일 출산했는데, 심한 진통중에 태어난 아이는 영양실조에 체중미달이었다. 주위의 도움도 있어 병원비는 마련했으나 인큐베이터에서 당분간 아기를 키워야 할 것이라는 의사의 얘기는 형편상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부상당해 입원한 남편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알기 위해 아는 사람들을 찾아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이마를 다쳤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대수롭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평소 워낙 건강했기 때문이었다. 8월말경, 시민아파트 청년들의 도움으로 신발가게를 청과물가게로 바꿨다. 새벽에 공판장에서 물건을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주위의 도움으로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자존심이 생기기도 했다. 아는 이웃들이 물건을 사가며 안부를 물어줄 때, 가깝게 지냈던 시민아파트의 청년들이 대가없이 공판장에서 물건을 해다 줄 때는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주위의 이런 도움을 받으면서 남편의 뜻을 꼭 지키기 위해서라도 굳세게 살아야한다고 다짐했다.
빵기계 사주신 수녀님
80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눈도 많이 왔다. 과일가게로는 수지가 안맞아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갔다. 이것을 안 광천천주교회의 마리아 수녀가 ‘화란빵기계’를 사주셨다. 나는 가게 앞에서 포장집 화란빵장사도 동시에 시작했다. 눈보라치는 겨울밤, 사랑하는 남편이 온전한 몸도 아닌 환자의 몸으로 차디찬 감옥에 있다고 생각하며 가게와 화란빵틀 앞에 있노라면 한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등에 업힌 딸 은형이는 모유도 분유도 제때 먹이지 못해 빼빼 말라 울며 보챌 때면, 남편을 빼앗아 간 사람들에 대한 피맺힌 원한과 어머니의 역할을 못해 정말 한스러웠다. 때로는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도 가슴에 쌓인 한이 눈물이 되어 나도 모르게 떨어지곤 하였다. 포장을 철거하고 가게를 닫고 동명이와 선형이에게 밥을 먹이고 은형이에게 젖을 먹일 때 피곤에 지친 나는 졸면서 젖병을 수없이 방바닥에 떨어뜨리곤 했다. 남편에게 편지해야 되는 때면 편지 한 장 쓰는 데 수일이 걸리기도 했다. 상무대 군인 감옥에서 교도소로 넘어 간 다음 면회가 허용되었다.
12월초 교도소에서 첫 면회할 때, 남편은 외래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남편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완전한 환자였다. 제한된 면회시간 3분 안에 그 얘기만을 했을 뿐 다른 것을 물어볼 시간도 전혀 없었다. 남편은 징역 10년을 두 법정에서 선고받았었다. 사형·무기가 수두룩하였지만 징역 10년도 엄청난 형으로 보여 나는 미칠 지경이었고, 모든 구속자 가족이 다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2심 재판 최후진술에서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법무사가 들어가라고 하자 ‘대한민국만세’를 부르며 들어오다가 넘어질 뻔해 동료가 부축해 주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은 다 울었다. 머리를 크게 다쳐 치료가 시급히 필요한 환자임에도 전혀 손을 쓸 수 없게 교도소 차디찬 바닥에서 살게 하니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과연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죄수를 남편으로 둔 나는 서러워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YWCA조아라회장이 아픈 사람 앞에서 웬 눈물이냐고 말씀하셨다.
남편의 병증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만날 때마다 고통은 점점 더해갔다. 주위에서 이것을 안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수녀·목사, 그리고 들불야학의 삼촌들, 아파트 청년, 남편의 신협친구들 등등. 나는 남편에게 좋다는 약을 구해다가 교도소 의무과를 통해 차입시켜 주었으나 효과가 없었는지 통 좋아지질 않았다.
더욱 악화되어간 정신병
시간이 흐르면서 구속자들이 풀려 나오건만 남편은 무거운 형을 받아서인지 제외되었다. 밖에 있는 구속자들의 가족들이 다 나같은 심정이었다. 나는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기 때문에 사회물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석방운동 등에 대해서는 구속자 가족들의 의견에 따라 같이 행동했다. 함께 모여서 기도회를 갖기도, 서울의 명동성당에 가 농성을 하기도 했으며, 석방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81년, 세 아이를 기르며 장사하랴, 면회 다니랴, 구속자모임에 나가랴 너무나 바쁜생활이라 나는 갓난아이인 은형이를 영신고아원에 임시로 맡기기로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반장일은 계속해, 1달마다 한번씩 제일 골치아픈 전기세·수도세 분배를 하고 수금을 했다. 신협도 사건 얼마 후부터 도지부의 관심과 협조로 다시 시작해 81년 정기총회에서 내가 남편을 대신해 회의를 진행해 다른 사람에게 이사장을 넘겨주었다.
5·18 일주기가 되어 나는 들불야학의 전용호·서대석·정재호 등의 삼촌들, 아파트 청년들과 함께 우리 가게방에서 원통하게 죽은 박용준 삼촌과 윤상원 삼촌의 제사를 지냈다. 의거 이후 우리집에 오랜만에 30∼40여명의 삼촌들이 모여, 장가도 가지 못하고 죽은 상원이 삼촌과, 고아출신이라 누구하나 보살펴 줄 이 없는 용준이 삼촌의 사진을 모시고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 제사를 모셨다. 또한 아직도 감옥에 계신 분들이 하루 빨리 석방될 수 있도록 기도했다. 이날 나는 망월동 묘지에 가서 용준이 삼촌과 상원이 삼촌의 묘지 앞에서 한없이 울었다.
남편의 증세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한 번은 면회갔는데 재야인사로 구속된 장두석선생의 부축을 받으며 면회를 했다. 남편은 왼쪽다리와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헛말만을 되풀이하여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전에보다 훨씬 심각했다. 환각·환청에 시달리면서 이상한 종교 얘기를 하다가 돌아가신 어머님의 얘기를 하기도 하는 등, 완전히 정신착란증세를 나타냈다. 주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신경정신과 외래의사의 진료를 받기고 했고 그들이 처방한 약을 넣어 주었으나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보내오는 편지도 온전한 정신으로 쓴 것이 아니었다.
81년 9월 면회시, 부인인 나는 물론 동생이며 처제들을 몰라보며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왼쪽 손은 축 늘어졌고 다리를 절었으며 신발을 질질 끌며 걸음도 못 걸었다.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제한된 면회시간이 끝나고 나는 접견실 앞마당을 뒹굴며 울부짖었다. “세상에 인간도 아닌 나쁜 놈들! 광주의거가 무슨 죄가 된다고 저토록 사람을 몰라보고 헛소리를 지껄이며 좌수족이 마비돼도 내보내 주지 않느냐, 이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하며 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울었다. 교도관들이 말렸으나 나는 은형이를 업고 면회장 주변에서 한참동안 그렇게 정신없이 울부짖었다. 교도소를 나오면 다시 먹고 살기 위해 새벽같이 공판장을 오가야 되는 철과일장사를 쉴 수가 없었다. 석방되어 나온 남편의 친구나 후배들이 내가 충격을 받을까 남편의 증세를 얘기해 주지 않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감옥 안에서 정상용씨·이양현씨 등이 환자인 남편을 위해 온 정성을 쏟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꼭 보답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도 남편의 석방을 위해 그들도 인간이다는 생각으로 탄원서를 보냈다. ‘헌병대 영창에서 머리를 다쳐, 뇌수술을 잘 못해 회복된 듯 하다가 교도소로 넘어가 손발이 마비되고 의식이 불안정해 기억상실증세와 환각·환청 때문에 도저히 수형생활이 무리인 사람으로 면회간 식구들의 얼굴도 못 알아보고, 헛소리를 하며 의복이며 양말·신발도 신기가 힘든 상태로……’라는 내용으로 눈물반 기도반을 섞어 남편이 폐인이 되지 않게 석방시켜 달라는 탄원서를 청와대와 법무부에 보냈으나 소식이 없었다.
겨울철에 접어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격려나 위로를 보내주었다. 고맙기 한량없어 어떤때는 눈물로 감사를 드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어두움 속처럼 암담하기만 했다. 어떻게 먹고 살며, 애들을 키워가며 남편의 자존심과 뜻을 그르치지 않을까 궁리를 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의거 가족의 한사람으로 결코 광주의거에 누가 되지 않도록 살아갈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뛰었고,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손님만 있으며 밤12시가 넘도록 가게문을 열어두었다.
느닷없이 석방된 남편
81년 12월 크리스마스 무렵, 남편을 비롯한 구속자들이 석방된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드디어 돌아오는구나. 나는 시골 친정 아버님 등 가족들에게 연락했다. 25일 새벽 교도소 정문에서 남편을 맞기 위해서, 전날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새벽 3시쯤, 샤터문을 두드리며 동명이 엄마를 부르는 소리에 깨어 일어났다. 남편의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일어나자마자 맨발로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꿈에도 그리던 남편이 서 있었다. 교도관들이 광천파출소 앞거리에다 내려주어 걸어온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남편이 환자라지만 차마 이런 모습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남편의 모습은 길거리의 걸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얼굴과 머리는 씻지도 않았고 의복은 형편없어으며, 보내주었던 담요며 속옷 등을 똘똘 말아 묶지도 않고 질질 끌며 좌수족을 못 쓰기 때문에 절뚝이며 어두운 밤길을 걸어온 것이다. 눈빛도 말소리도 그 옛날의 남편이 아니었다.
바지가랑이는 온통 흙더미로 오다 넘어졌던 흔적이 역력하였다. 비참한 꼴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뇌를 다쳐 정신이 이상해진 완전한 좌수족 불구의 정신병 환자였다. 방으로 들어와 세면을 시키고 옷을 갈아 입히고 누이려 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눕는 듯 하더니 “지금 YWCA로 가야 한다”고 보채며 옷을 갈아 입으려 했다. 나는 만류하고 잘 것을 간청했다. 석방 직후 그를 최초로 만난 날부터 나는 24시간 꼬박 붙어 있어야 했다. 새로운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남편은 정신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머리를 방바닥에 벽에 부딪치며 울부짖었다. 신발도 의복도 화장실도 세면도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남편이었다. 나는 연속 3일을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석방을 축하해 주기 위해 왔다가 실망을 하고 걱정을 해주며 돌아갔다. 사람들은 ‘세상에 이런 사람을 교도소에 가두다니, 악랄한 놈들’이라고 한마디씩 내뱉었다. 그렇다. 다쳤을 때 곧 치료했으면 나았을텐데, 나는 치밀어 오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석방되었다는 기쁨보다는 절망이 더했다. 한마디로 캄캄했으며 미칠 지경이었다. 감방안에서 시중을 들어주었다는 정상용씨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남편은 의거 이전의 일을 회상하며 도저히 불가능한 얘기를 자주 한다. YWCA에 나가서 회의를 해야 한다는 등, 지금 조직이 결성되었다는 등……. 모두를 과거의 연속선상으로 여겼고, 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반발심이 말 속에는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 내일 누구를 죽이러 간다, 혹은 누구와 싸워 이겼다는 등. 며칠 후 YWCA조아라 회장, 강신석 목사 등이 주선해 신경외과 종합진찰을 받았다. 장기간 입원치료를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요한 병원에 천주교측의 도움으로 입원하였다. 나는 다시 장사를 했고 남편을 면회하며 먹을 것과 내의 등을 넣어주었다. 2개월쯤 입원하다가 일주일 동안 외출이 허용되는 엄격한 병원생활이었다. 외출을 한 남편은 자신을 정신병 환자 취급한다면 입원을 하지 않겠다고 야단이었다. 그렇다고 차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몇차례의 외출 때마다 남편은 가지 않겠다고 야단이었다.
어떻게 하면 병을 고칠까
나는 기어코 가지 않겠다고 하는 남편을 억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도움을 주는 천주교측에는 정말 미안했다. 82년 봄, 집에 있으면서 나는 부질없을 줄 알지만 기도로 치료하면 어떨까 하고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기적이 나타나주기를 바란 것이다. 또한 좋다는 한약을 구해 열심히 다려 마시게 했다. 어느날 평소 아는 교회 집사의 권유로 서울 순복음교회에서 운영하는 오산리기도원을 찾아 금식기도를 드렸다. 예배나 기도시간에도 남편은 엉뚱한 말이나 행동을 해 한번은 전도사가 남편을 억지로 구타하기도 했다. 10여일 지난 후, 나는 집이 걱정되어 그동안 사귀었던 전도사에게 잠시 남편을 부탁하고 내려왔다. 내려온 다음날 남편이 행방불명이라는 소식이 엽서로 왔다. 나는 기력을 상실했다. 어떻게 서울 천지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묘안도, 방도도 떠오르지 않았다. 돈도 없고, 애들을 버리고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경찰서에 찾아달라고 신고했다. 9일째 되는 날 서울 응암동 정신병원에서 보호 중이라는 엽서가 왔다. 치료비와 보육비를 가지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병원에서 직원의 부축을 받고 온 남편의 모습을 보고 나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몰골이었다. 머리는 먼지투성이요, 얼굴은 누구에게 맞았는지 피명이 들고 온통 부어 있었고,의복은 말할 수 없이 더러웠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직원을 향해, 누가 때렸느냐고 추궁하며 울부짖었다. 남편을 데리고 여관에서 목욕시켰으며 새옷으로 갈아 입혔다. 집에 도착했을 때 이웃들과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모든 사람들이 혀를 차며 시국을 한탄하고, 남편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했다. 82년 여름, 주위사람들의 도움으로 장사는 잘 되었다. 수박을 몇 리어카분이나 팔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고달팠다. 번돈으로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병은 전혀 차도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남편의 건강을 회복시켜 애들과 함께 단란하게 살아야 된다는 의지와 집념이 반사적으로 생겨나는 기분을 맛보았다. 82년 겨울, 박관현 삼촌이 단식으로 교도소에서 죽어 세상이 시끌시끌하던 그 무렵, 주위의 도움으로 남편은 전남대부속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남편의 선후배·신부·목사, 여러 교수 등 여러 사람들의 남편에 대한 신경도 남다른 것이었다. 그들도 어떻게 하면 남편을 치료할 수 있을까하며 온갖 궁리를 다하였다.
84년 1월, 나는 남편을 장기간 요양치료 해야 된다는 의사들의 권유에 따라서 나주 국립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이제는 교도소와 같이 정기적으로 면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개월에 한번씩 음식이며 속내의를 준비해 가 남편과 함께 먹었고 남편의 병세를 관찰했다. 어떤 때는 좋아진 듯 하다가, 또 다시 전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됐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나를 괴롭히던 남편의 행동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남의 물건을 들고와 버리거나, 옷을 벗고 거리고 나가버리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한다고 나를 때리거나…….환청·환각에 시달리는 듯 잠을 못자고 헛소리를 하며 울면서 머리를 벽에 부딪치는 등 헤이릴 수 없었다. 자라나는 애들에게 전혀 신경을 쓸 수 없었을뿐더러, ‘XX자식의 아들’,‘너희 아빠는 XX병자’라는 소리를 듣고 와 시무룩해 하는 애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하도 막막해 술 몇잔을 했다가 주위 사람, 특히 진심으로 걱정해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분들에게 꾸중을 들은 일도 있었다.
아, 잔인했던 5月이 또…
갈수록 가게가 안되어, 84년 우유배달로 생계수단을 바꿨다. 우유배달이라고 좀 더 편한 돈벌이는 아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가사일을 보고, 저녁때는 수금나가는 일과였다. 힘들지만 할 수 없이 해야만 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발이 부르트고 누웠다 하면 잠이 들 정도로 피로했다.85년 초 남편은 일년여만에 병원생활에서 다시 시민아파트의 집으로 왔다. 입원할 당시에 비하면 휠씬 호전되었으나 완쾌된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좌수족을 제대로 못 써서 걸음 걸을 때면 절뚝거려야 하고, 의식도 정상은 아니다. 애들은 커서 모두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다.
나는 87년 봄, 그동안 해오던 우유배달을 그만두고 조그만 식당을 시작했다. 거기서 번돈으로 다섯식구가 살아가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집의 가장이 되어 버렸다. 5월이 다가온다. 지나간 8년이 번쩍 지나간 것 같고, 그때의 기억들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8여년을 회상해 볼 때 저절로 눈물이 나온다. 말로, 글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신문·방송에서 한동안 희생자 보상, 피해자 보상, 명예회복 등의 얘기를 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자기들이 광주를 이 지경으로, 우리 가정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우리 당사자들의 주장은 전혀 듣지도 않고, 다시 자기들 입으로 보상입네, 명예회복입네 떠들어 대다니 가당찮은 일이다.
79년 광천시민아파트 우리집에서의 그 재미있었던 일들이 어제 일만 같다. 죽은 박용준·윤상원·박관현, 그리고 들불야학의 삼촌들, 아파트의 삼촌들이 어울려 토론하고, 재미있게 놀며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던 다짐의 모임들이 어제일만 같다. 특히 죽은 삼촌들의 카랑카랑한 노랫소리가 금방 들리는 둣하다. 언제 또 그렇게 재미있고 보람있는 때가 나에게 오려나.
‘세상은 돌고 내 남편은 정신질환’
김 순 자 주부
필자는 광주사태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도청 기획실장을 맡았던 김영철의 부인이다. 김영철은 이 땅의 소외받은 사람들을 위해 야학과 信協운동을 하다, 광주사태를 만났고, 그 와중에서 구속되었다. 수감 중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김영철은 결국 정신이상이 되어 출감하였다. 광주사태 8년의 세월을 맞는 오늘, 한 많은 한 「광주아내」의 看病記를 싣는다.
5월과 함께 파산된 우리 가정
또 5월이 돌아온다. 80년으로부터 8년째, 해마다 5월이 돌아오면 나는 한숨과 눈물과 분노로 5월을 보낸다. 5월은 나에게서 행복도 사랑도 즐거움도, 웃음도 보람도 다 앗아가 버렸다. 계엄공수부대의 광주진압작전이 끝난 그해 5월 27일부터 오늘까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이다. 과일장사·빵장사·우유배달·나물장사 등 먹고 살기 위해 뛰었으며 이사도 여러 차례 다녔다. 사실 고생을 하더라도 내일이 있고 보람이 있다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 5월 27일, 도청에서 연행되었던 남편(김영철)이 남들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면 이런 생활의 고통쯤이야 문제가 되겠는가. 구속된지 19개월만에 돌아온 남편은 좌수족 불구에 의식마저 온전하지 않은 상태다. 그동안 종다는 약은 다 써보고 좋다는 병원도 다 다녀보았으나 과거와 같이 온전한 모습을 지니기에는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8년 전이 엊그제만 같다. 두 눈 앞에 또렷하다. 남편과 함께 살았던 광천시민아파트(광주시 서구 광천동 소재)시절, 활달하고 건강하고 의욕적이었던 남편, 고아출신이나 의협심이 강했던 용준이 삼촌, 그리고 가난한 노동자들을 가르친다고 광천동에 온 상원이·관현이 삼촌 등의 모습이 또렷하게 어른거린다. 모두들 개인의 출세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자기보다 못 배운 청소년 노동자들을 위해서 헌신하던 착한 이들이다.
80년 5월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당했고, 끌려가 모진 고통을 당했다. 나는 살아남아 불구의 남편과 세아이를 거느린 가장으로 힘든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 현실의 생활은 참담하지만 나는 내 남편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킬 것이며, 죽어간 삼촌들의 뜻에 어긋나는 비굴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5월’피해당사자의 한 사람으로 꿋꿋하게 살아 갈 것이다.
그런 다짐으로 지나온 길을 더듬으며 이 글을 쓴다. 구구한 듯하여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를 쓴다. 80년 5월18일,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 남편과 함께 나는 교회의 낮예배를 보고 돌아와 광천시민아파트 청년들과 효우회란 계를 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김대중씨가 잡혀갔다는 등의 소식은 이미 아침나절에 들었었다. 또한 남편을 통해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삼촌도 잡혔는지 모른다고 들었다. 이웃들 사이에서도 5·18의 아침은 그 전의 아침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남편도 분노하고 용준이 삼촌은 주변의 민주인사들, 학생들을 크게 염려하는 모습이었다. 시가지 시위가 격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찍 계를 한 다음 오후에 남편은 시내로 나갔다.
시내에서의 시위소식은 그 내용이 너무나 엄청나 이웃들은 모두 분노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공수부대의 잔학상을 얘기했다. 사람들은‘난리났다’고 말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남편과 용준이 삼촌으로부터 시내에서의 시위소식을 자세히 들었다. 총을 든 계엄 공수부대원들이 마구잡이로 시민들을 때리고 무자비하게 구타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문목으로 도망해 집에 돌아왔다. 남편과 용준이 삼촌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저녁에 남편과 용준이 삼촌과 근처에 살고 있었던 상원이 삼촌, 그리고 야학의 강학들은 무엇인가를 협의하는 것 같았다. 광천시민아파트 바로 옆의 광천 천주교회와 아파트 앞의 초라한 가게방을 개조해 야학을 하고 있었는데 통금이 단축되어 수업을 못하고 웅성웅성하다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강학들만 무엇인가를 의논하는 모습이었다. 엊그제 4월까지 관현이 삼촌이 야학의 강학이었기 때문에 그를 아는 이곳 이웃들은 전남대총학생 회장으로 연설 잘하는 박관현의 안부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남편은 19일 여느 날과 같이 YWCA(당시 광주경찰서 부근에 있었음) 신용협동조합에 용준이 삼촌과 함께 출근하였다. 이날도 10시가 넘어서면서 데모가 시작되었다. 어제 있었던 공수부대의 잔학상에 대해서 전시민들이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남편과 용준이 삼촌으로부터 공수부대의 엄청난 만행을 직접 듣고 몸서리가 쳐졌다. 시위하는 시민들을 쫓아 남편과 용준이 삼촌이 근무하는 YWCA 안에까지 공수부대는 마구들어와 데모와 상관없는 사람까지 끌어내려 무자비하게 구타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YWCA에서 구타하는 모습을 보고 길건너 무등고시학원생들이 우하며 야유를 보내자 떼거리로 학원에 들어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나와 구타를 하는데, 학원생들을 건물 밖으로 끌어내 M16 개머리판으로 치고 방망이로 때리고 군화발로 질근질근 밟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한 것이다.
YWCA信協에서 이 광경을 보고 남편과 용준이 삼촌은 그만 눈이 돌아버린 것이다. 남편은“이놈의 새끼들, 짐승만도 못한 놈들”하며 오열했다. 용준이 삼촌은“총만 주어진다면 이 새끼들을 다 갈겨버려야 하는데”하면서 분노했다. 남편과 용준이 삼촌이 시민군의 일원이 되어 광주의거에 적극 참여하게 된 동기가 여기에 있었다.
「투사회보」를 만들기 위해
남편은 상원이 삼촌, 그리고 들불야학의 강학들과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는 것같았다. 통금연장으로 야학수업은 불가능했고, 밤사이 강학들이 아파트 주변을 왔다갔다 하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야학의 삼촌들(강학들)은「투사회보」를 만들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야학의 등사기를 가지고 상원이 삼촌이 쓰고 글씨 잘쓰는 용준이 삼촌이 밀었다고 들었다. 시민들이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를 쫓아낼 때까지 저녁이면 남편과 용준이 삼촌, 그리고 상원이 삼촌과 들불야학의 강학들과 학생들이 아파트 바로옆에 있는 천주교회의 야학교실과 아파트 앞 교실에서 그 작업을 계속했다. 남편과 용준이 삼촌은 신협 업무는 중단되었으나 계속 출근을 했다. 출근해서는 시민들과 데모를 하고, YWCA 신협에서 그 소식을 다른 곳으로 전화로 알리기도 했다. 22일인가 남편은 팔을 다쳐 치료를 받고 돌아왔다. 시민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해 싸우다 공수부대가 던진 돌을 맞아 어느 개인병원에서 치료하고 왔다는 것이다. 계엄군이 시내에서 완전히 물러간 다음, 남편과 용준이 삼촌은 집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한번 옷갈아 입으려고 들어온 남편을 붙들고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말렸으나 남편은 같이 있고 싶어하는 어린 딸 선형이의 팔까지 뿌리치고 시내로 나갔다.
들불야학의 삼촌들과 용준이 삼촌, 그리고 모르는 청년들이「투사회보」를 만들어 시내 변두리 주택가 등을 돌며 뿌렸다. 시민들은 모두 협조적이었다. 나도 시위대원들이 광천시민아파트까지 왔을 때 주민들과 함께 합심하여 돈을 걷고 쌀을 걷고 음료수를 걷어 그들에게 주었다.한번은 상원이 삼촌이 왔길래 남편의 안부를 물었더니, 아무 걱정말라는 자신있는 표정을 하며 시내로 나가는 것이었다. 용준이 삼촌은 25일 밤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내가 차려준 저녁밥을 먹고 다시 시내로 나갔다. 이날이 용준이 삼촌과 마지막 날이 되어 버렸다. 26일 계엄군이 진압작전을 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남편을 시내에 보낸나는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같은 국민을 그래도 마구 죽이겠는가 하면서도 안심을 할 수 없었다. 저녁 무렵 방직공장에 다니는 여동생을 시켜 시내도청에 한번 가보라고 한 후 기다렸는데, 동생은 상원이 삼촌을 만나 잘 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도청을 지키는 시민군들의 제지로 얼굴도 못보고 돌아왔다. 총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하였다.5월27일, 아침이 밝았다. 일어나자마자 사람들은 계엄군이 도청에 들어왔고 시민들을 다 죽였다고 야단이었다. 순간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죽은 시체라도 찾아야
나는 남편을 알 만한 곳에 다 전화를 해보았다. 그러나 남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27일 종일 혹시라도 하며 남편의 소식을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나는 사망한 것으로 단정하고 시신이라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궁리 저 궁리를 해보았다. 차도 다니지 않고 시내를 계엄군이 지키고 있었으며, 도청주변은 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어차피 내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5월 28일 오전 9시경 평소에 잘 아는 광천삼화신협 김길만 상무의 자전거 뒤에 타고 도청엘 갔다. 도청은 군인들이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도청 안쪽 시체를 가마니로 덮어둔 곳엔 장갑차 두 대가 가리고 있었으며, 도청뜰에도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다. 가족들을 찾으려는 시민들이 몰려와 시체라도 확인하자고 하며 들어가려고 했으나 계엄군들과 수위들이 접근을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상무관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후 상무관 벽에 사망지 이름과 주소를 적어 붙였다. 나는 가슴을 조이며 읽어나갔다. 남편의 이름도, 용준이, 상원이 삼촌의 이름도 없었고, 아는 사람들의 이름은 없었다. 잠시 후 쓰레기차 3대에 시체를 가득 싣고 상무관으로 시체를 옮겼다. 의사들이 검진하고 나서 확인을 하라며 기다리라고 했다. 저렇게 많은 시민들이 죽었으니 분명히 남편도 죽었을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 온 사림들로 상무관 앞은 야단이었다. 남편을 잘 아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남편의 생사를 알아보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분들의 얘기가 시청에도 알아보았으나 남편의 이름은 없었다고 말해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학동에 사는 재환이 삼촌이 달려오며“용준이가 YWCA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고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리내어 울었다. 남편의 생사는 알 길 없고, 고아로 어렵게 산 용준이 삼촌이 더없이 불쌍했다.
나는 남편의 생사도 꼭 확인하려고 상무관 시체더미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검진을 하고 언제 확인하게 해줄지 막막하였다. 그런데, 누군가 남편을 잘 아는 이가 와서 명단에 없는 사람들은 상무대로 잡혀 갔다고 전해주었다. 일말의 희망은 있었으나 저 많은 시체를 보니 살아있으리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오후 2시경 YWCA쪽에서, 시체 2구를 옮기는 것을 보고 용준이 삼촌이구나 하며 다가가려 했으나 제지하는 바람에 허사였다. 결국 시신확인을 못하고 저녁에 집에오자 우리집을 수색하기 위해 계엄군이 왔다고 야단이었다. 그들은 우리 방안을 수색했고, 용준이 삼촌 방을 수색해 자기들이 가져갈 것을 몽땅 챙겨가버렸다. 이웃들에게 우리가 간첩이라고 하면서 마구잡이로 수색하고 나가버렸다. 우리집만 수색한 것이 아니라, 들불야학의 천주교회 교실도, 아파트 앞 교실도, 인근 상원이 삼촌집 등도 수색해 갔다.
다음 날, 잡혀가지 않은 들불야학의 삼촌들로부터 상원이 삼촌의 사망소식을 전해들었다. 어안이 벙벙해 한동안 말문이 막혀버렸다. 엊그제까지“걱정마시라”며 안심시키더니, 그렇게 따뜻하고 좋은 분이 가시다니….
단란했던 광천시민아파트 시절
우리 부부는 1977년 봄, 광천시민아파트에 전세 10만원을 주고 입주하였다. 남편이 YWCA 협동개발단에서 소정의 교육을 받은 다음 영세민들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는 이 아파트지역을 빈민아파트지역 개발사업지역으로 선정, 우리 부부는 입주하게 된 것이었다. YWCA에도 관여했고 고아원을 운영하는 서경자씨(남편의 이모임)의 소개도 있었다. 입주 첫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은 말할 수 없이 거칠고 아파트 앞마당이며 공동화장실이며, 세탁장이며 복도 등에 청소 한번 한 흔적이 없었다. 재래식 화장실은 요석이 가득 끼어 코와 입을 막지 않으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름만 아파트지 실제로는 도시 변두리의 판자집촌과 다를 것이 없었다. 市에서 이 근처에 집단으로 사는 피난민들고 천막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아파트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런 아파트는 대한민국 천지에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남편은 이곳에서 지도자로서 생활해야 하고, 나는 내조를 해야 했다. 우리는 서서히 주민들과 사귀어가기 시작하고 우리도 융화되어 갔다. 남편은 환경정화사업부터 시작하기고 마음먹고, 매일 아침청소부터 시작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빗자루를 들고 아파트 앞마당을 쓸고, 현관과 복도, 화장실을 청소해 나갔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선 어린이들이 남편을 따랐고 어른들도 따르기 시작했다. 남편은 애들의 이름을 다 외웠고, 아침이면 함께 청소하고, 주변의 효광여중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YWCA 협동개발단에 출근하였다.저녁이면 청년들, 주민들과 만나서 아파트지역의 개발사업을 구상하였다. 남편을 따라 나도 아주머니들과 어울려 남편의 사업을 설명하고 여자들이 함께 해야 할 일을 찾았다.남편은 매일 아침의 청소는 빠뜨린 적이 없었고, 그동안 사귄 청년들, 주민들과 함께 아파트 주변 정화사업을 시작하였다. 아파트 내벽, 외벽을 청소해서 새페인트를 칠하고, 공동화장실, 공동세탁장(세대마다 화장실이나 수도시설이 되어있지 않고 공동으로 화장실과 세탁장을 사용함), 그리고 복도의 부서진 기물을 수리하고, 주변 하수구를 정비하였다. 좁다란 운동장에 화단도 설치하였다.
깨끗해진 화장실
아파트는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복도에 들어서면 코를 찌르던 화장실 냄새도 사라졌고, 외견으로나마 깨끗해 보여 사람들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주민들도 자신을 얻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을 성심껏 내조하였다. 공동으로 일할 때면 식사대접, 술대접은 물론이요, 우리 집은 지역주민들의 공동방ㆍ회의방이 되었다. 남편은 이 지역에 이름만 있었던 유진청년회에 가입, 총무가 되었고, 이 아파트 주민이 조합원이며, 사무실도 책임지고 일하는 사람도 없었던 삼화신용협동조합의 책임을 맡았다. 책걸상과 원장 등의 서류가 우리 안방을 차지했다. 우리 안방을 신협사무실로 사용한 것이다. 출자금ㆍ예금거래 등이 미미하여 남편은 어린이들의 모임을 이끌어 폐품수집 등의 사업으로 각 가정에 통장을 가질 수 있도록 하여 주민들의 관심을 끌어나갔다. 조합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어린이 애향단 모임, 유진청년회 모임 등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Y개발단’이 해체되고 남편은 급료 3만원에 YWCA신협에 다니게 되었다.
어느날 나하고 상의도 없이 청년 한사람을 데리고 왔다. 고아 출신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고, 겨울인데도 신협의 책상에서 잠자야 하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이 청년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이 분이 박용준 삼촌이다. 용준이 삼촌은 남편의 사업을 잘 도와주었다. 두사람은 의형제나 다름없었다.
고아를 의형제로 삼고
남편은 입주 이후의 활동을 주민들에게 인정받아 A동 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얼마 뒤에 남편은 또 아파트 지역‘새마을지도자’가 되었다. 평소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사는 지역, 경찰에서는 우범지역으로 알려졌던 시민아파트 주변의 사업들이 관청에도 알려져 그렇게 된 것이다. 남편은 A동ㆍB동ㆍC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광천시민아파트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어렵고 힘든 나날이었다. 7∼8평 정도의 방 두 칸의 우리 집이 신협사무실이요, 어린이 애향단청년회, 반상회 등 각종 모임의 장소, 주민교육의 장소였기 때문에 나는 모든 모임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해야 했다. 가장 힘들고 고달팠던 일이 전기세ㆍ수도세 등을 분배해서 수금하는 일이었다. 공용수도이고, 전기는 한동에 하나씩 설치되어 있어 40∼50세대 주민들에게 그것을 공평하게 분배하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었고 주민들 사이의 분쟁거리였다.
5ㆍ18 광주의거로 남편이 교도소로 끌려간 이후 1년여 동안 그 와중에서도 나는 남편을 대신해 이 일만은 책임있게 처리했다. 일이 이루어지고 주위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보람 속에 우리는 생활하였다. 주변 하수구 정비는 누구나 반대했던 힘들고 어려운 사업인데 단시간에 해내 주민들 모두가 기뻐한 보람찬 사업이었다. 이 일이 알려져 남편은 광주시장의 표창을 받았고, 어느 신문사에서 상을 준다는 제의도 해왔으나 남편은 그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서중학교와 광주일고를 나온 남편은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진학을 못했고, 잠시 5급공무원을 하다 체질에 안 맞아 그만두고 밑바닥에서부터 스스로 고쳐야 한다고 늘 주장했고,‘Y개발단’에서도 그런 교육을 받았다.
새마을지도자회의나 반장의 업무를 보다가 가장 화를 내는 대목이 박정권의 부정ㆍ부패ㆍ독재 등이었다. 회의에서 박정권을 따르라는 강요나 하고, 반상회를 자기들의 하부 조직으로 여기고 이런 지시, 저런 공문이나 보내오는 일이 생기면 남편은 나쁜 놈들이란 말을 자주 하였다. 용준이 삼촌도 그러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너그럽고 헌신적이었지만, 권력있는 사람들이나, 사기쳐서 돈번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남편과 용준이 삼촌은 이 아파트 지역의 장기종합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주민들의 생활을 조사하여 그것을 토대로 주민소득사업, 저축증대, 폐품 수집, 신협활성화, 공동작업, 지속적인 개발사업, 아파트 제값받기운동, 어린이 애향단, 유진청년회, 청소년 교육사업, 의식개발, 민주시민양성 등의 계획을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세웠다 허물었다를 반복해 완성했다. 남편은 이스라엘에서의 협동촌, 지역공동체 등에 관해 자주 얘기했으며 실제 공부도 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야학 개설
1978년 7월, 광천시민아파트 바로 옆 광천천주교회에‘들불야학’이 생기면서 남편의 사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남편은 외롭고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해왔는데, 이제 동료ㆍ동지를 만난 것을 무척 기뻐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남편의 계획서 안에 이 야간학교 개설이 들어 있기 때문에 남편은 이 야학을 자기사업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박기순ㆍ신영일ㆍ나상진ㆍ왕상원ㆍ박관현ㆍ배환중ㆍ고희숙ㆍ전용호ㆍ정재호ㆍ서대석ㆍ홍조식 등등 전남대생들로 그 후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 간 사람들이다. 동생같은 박기순이는 대학생으로 운동을 하다 퇴학당해 공장에 다니면서 야학에 열중하다 과로와 연탄가스로 78년 12월 아깝게 죽었다.
여대생 강학(교사)들은 동생같아 그냥 이름을 불렀고, 남자 강학들은 삼촌이라고 불렀다. 상원이 삼촌은 나이가 제일 많고 또 직장도 그만두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다 광주의거 때 죽었으며, 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관현이 삼촌은 똑똑하기로 유명했는데, 광주의거로 수배받다 잡혀 감옥에서 단식하다 죽었으며 신영일·전용호·배환중 등 많은 삼촌들이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엘 갔다. 상원이 삼촌이 A동에 사글세로 입주하면서, 야학의 학생들과 강학들의 공동방이 되었다. 또한 아파트 C동을 일일다방을 해 번 돈으로 전세내 야학교실을 둘이나 운영하였다. 하나는 바로 옆 광천천주교회의 교리실 교실이고, 하나는 C동의 교실이었다.
야학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대개 밤10시였다. 그 시각부터 초기에는 상원이 삼촌방에서, 나중에는 우리집에서 강학들이 만났다. 막걸이를 마시며 놀 때도 있었는데 그렇게 놀더라도 주위에 소란을 피우거나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상원이 삼촌의 구수한 창과 소리의 내력, 관현이 삼촌의 「각설이 타령」이나 「명태」, 그리고 용준이 삼촌의 성악가가 부르는 듯한 가곡 등, 노래 잘 부르고 잘 노는 삼촌들이었다. 나는 그때 「청실홍실」이란 노래를 불렀는데, 모든 삼촌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상원이·관현이 삼촌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노래부를 때마다 “아짐! 청실홍실”하며 노래불러 달라는 삼촌들의 음성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어렵고 힘들고 고달픈 나날이었지만 생기가 돌았고 활력이 있었고 재미있었다. 79년 7월부터 상원이 우리집으로 들어와 살았다. 용준이 삼촌과 함께 같은 방 거처를 했다. 상원이 삼촌은 고교생인 동생 방 얻어 줄 돈이 없어 동생을 그 방에 살게 하고 우리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래서 우리 집은 완전히 야학공동방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불평불만 한마디 삼촌들에게 하지 않았다.
신발가게 열어 뒷바라지
1979년은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남편은 반장 업무, 새마을지도자 업무에다 광천삼화신협 업무·들불야학 수업·아파트지역의 여러 모임 참가 등으로 분주했다. 이 모든 일들은 남편과 용준이 삼촌이 YWCA신협에서 퇴근한 후에 진행되었다. 얼마되지 않아 남편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꾸려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원이 삼촌은 나에게 장사를 권유했다. 남편, 용준이 삼촌 등과 협의해, 상원이 삼촌이 선배로부터 빈 90만원으로 아파트 앞에 조그만 신발가게를 인수했다. 그 때가 79년 말경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남편의 아파트 개발사업은 발전해 나갔다. 광천삼화신협은 자산이 날로 늘어나 우리 살림방에서 아파트 앞 조그만 가게로 이사해 직원을 정식 채용했고, 얼마 후에는 시민아파트 앞 대로변에 직원 네사람이 근무하는 信協으로 발전했다. 80년초 이 삼화신협의 정기총회에서 남편은 이사장에, 상원이·용준이 삼촌, 야학 삼촌 한 분, 그리고 남편과 함께 아파트 지역에서 일해왔던 여러 사람들이 신협의 간부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80년을 맞은 것이었다. 박정권 말기 야학의 삼촌들에게 정보형사들이 따라다닐 때, 한 번은 남편이 광천동 시민아파트 개발사업의 프로젝트를 가지고 학교에 찾아가 교수들을 만난 적도 있었다. 야학의 강학들이 문제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박관현 삼촌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치 친동생인 것처럼 기뻤다. 똑똑하다, 인물났다고 시민들이 얘기할 때마다 뿌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러나 5·18광주사건으로 모든 것은 끝나고, 공든 탑은 무너져 버린 것이다.나는 당시 임신 8개월의 몸으로 거동하기도 불편한 몸이었다. 게다가 살아있다는 뒷받침을 할 ‘소식’이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5월 30일 엽서 한 장이 날아들었다. 남편의 글씨였다. ‘통합병원에서 치료중이고, 걱정을 끼쳐 미안하다, 조합일·반장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눈물겹도록 반가왔다. 우선 살아있다는 사실이 그동안의 긴장을 해소시켰다.
그러나 필체를 자세히 보니 평상시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안심도 잠시였다. 오후 신문에서 도청투쟁위원회 기획실장 김영철이란 보도를 보고, 완전히 사형감이겠구나 싶었다. 이날 저녁 나는 편지를 안고 다 죽는 판에 살아있다는 사실로 눈물을 흘렸고, 사형감이겠다는 생각에 서럽게 울었다.
첫면회 때 남편은 헛소리
남편에게 최초로 면회가 허용된 것이 10월이었다. 부상당했다는 소식은 들었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도 없었는데 상무대 안의 건물에서 그를 본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용씨(현재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 회장)와 함께 나온 남편은 더러운 군복에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절뚝이며 걸어나왔다. 이마에는 3㎝가량의 흉터가 세 개나 있었다. 말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더듬더듬거리며 남편은 “상원이, 용준이가 죽은 마당에, 간첩으로 몰릴 마당에, 이놈들에게 수모당하느니 차라리 죽자”고 결심하고 자살을 시도하다 그랬다는 경위를 얘기했다. 나는 그소리를 듣고 하염없이 울었다. 내가 우니 여름에 태어난 딸 은형이도 덩달아 울었다. 남편은 정상이 아닌 환자의 몸으로 신협을 걱정하고 시민아파트의 개발계획을 걱정하고 있었다.
남편이 없는, 남편이 광주사태의 대역죄인으로 몰린 5·27이후의 일을 생각할 때 기가 막혀 마음속으로 울 수밖에 없었다. 신협은 업무가 중지되도 조합원은 탈퇴해갔으며, 반장일은 계속 봤으나 사람들의 눈초리가 그 전과는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들불야학도 중단되었으며, 신발가게도 손님의 발길이 끊겼다. 당장 생계를 꾸려갈 길이 없었다. 생계유지를 위해 만삭의 몸으로 우선 1개에 10원씩 하는 나무젓가락을 종이에 싸매는 일을 나갔다. 딸 은형은 7월 3일 출산했는데, 심한 진통중에 태어난 아이는 영양실조에 체중미달이었다. 주위의 도움도 있어 병원비는 마련했으나 인큐베이터에서 당분간 아기를 키워야 할 것이라는 의사의 얘기는 형편상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부상당해 입원한 남편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알기 위해 아는 사람들을 찾아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이마를 다쳤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대수롭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평소 워낙 건강했기 때문이었다. 8월말경, 시민아파트 청년들의 도움으로 신발가게를 청과물가게로 바꿨다. 새벽에 공판장에서 물건을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주위의 도움으로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자존심이 생기기도 했다. 아는 이웃들이 물건을 사가며 안부를 물어줄 때, 가깝게 지냈던 시민아파트의 청년들이 대가없이 공판장에서 물건을 해다 줄 때는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주위의 이런 도움을 받으면서 남편의 뜻을 꼭 지키기 위해서라도 굳세게 살아야한다고 다짐했다.
빵기계 사주신 수녀님
80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눈도 많이 왔다. 과일가게로는 수지가 안맞아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갔다. 이것을 안 광천천주교회의 마리아 수녀가 ‘화란빵기계’를 사주셨다. 나는 가게 앞에서 포장집 화란빵장사도 동시에 시작했다. 눈보라치는 겨울밤, 사랑하는 남편이 온전한 몸도 아닌 환자의 몸으로 차디찬 감옥에 있다고 생각하며 가게와 화란빵틀 앞에 있노라면 한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등에 업힌 딸 은형이는 모유도 분유도 제때 먹이지 못해 빼빼 말라 울며 보챌 때면, 남편을 빼앗아 간 사람들에 대한 피맺힌 원한과 어머니의 역할을 못해 정말 한스러웠다. 때로는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도 가슴에 쌓인 한이 눈물이 되어 나도 모르게 떨어지곤 하였다. 포장을 철거하고 가게를 닫고 동명이와 선형이에게 밥을 먹이고 은형이에게 젖을 먹일 때 피곤에 지친 나는 졸면서 젖병을 수없이 방바닥에 떨어뜨리곤 했다. 남편에게 편지해야 되는 때면 편지 한 장 쓰는 데 수일이 걸리기도 했다. 상무대 군인 감옥에서 교도소로 넘어 간 다음 면회가 허용되었다.
12월초 교도소에서 첫 면회할 때, 남편은 외래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남편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완전한 환자였다. 제한된 면회시간 3분 안에 그 얘기만을 했을 뿐 다른 것을 물어볼 시간도 전혀 없었다. 남편은 징역 10년을 두 법정에서 선고받았었다. 사형·무기가 수두룩하였지만 징역 10년도 엄청난 형으로 보여 나는 미칠 지경이었고, 모든 구속자 가족이 다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2심 재판 최후진술에서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법무사가 들어가라고 하자 ‘대한민국만세’를 부르며 들어오다가 넘어질 뻔해 동료가 부축해 주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은 다 울었다. 머리를 크게 다쳐 치료가 시급히 필요한 환자임에도 전혀 손을 쓸 수 없게 교도소 차디찬 바닥에서 살게 하니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과연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죄수를 남편으로 둔 나는 서러워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YWCA조아라회장이 아픈 사람 앞에서 웬 눈물이냐고 말씀하셨다.
남편의 병증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만날 때마다 고통은 점점 더해갔다. 주위에서 이것을 안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수녀·목사, 그리고 들불야학의 삼촌들, 아파트 청년, 남편의 신협친구들 등등. 나는 남편에게 좋다는 약을 구해다가 교도소 의무과를 통해 차입시켜 주었으나 효과가 없었는지 통 좋아지질 않았다.
더욱 악화되어간 정신병
시간이 흐르면서 구속자들이 풀려 나오건만 남편은 무거운 형을 받아서인지 제외되었다. 밖에 있는 구속자들의 가족들이 다 나같은 심정이었다. 나는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기 때문에 사회물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석방운동 등에 대해서는 구속자 가족들의 의견에 따라 같이 행동했다. 함께 모여서 기도회를 갖기도, 서울의 명동성당에 가 농성을 하기도 했으며, 석방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81년, 세 아이를 기르며 장사하랴, 면회 다니랴, 구속자모임에 나가랴 너무나 바쁜생활이라 나는 갓난아이인 은형이를 영신고아원에 임시로 맡기기로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반장일은 계속해, 1달마다 한번씩 제일 골치아픈 전기세·수도세 분배를 하고 수금을 했다. 신협도 사건 얼마 후부터 도지부의 관심과 협조로 다시 시작해 81년 정기총회에서 내가 남편을 대신해 회의를 진행해 다른 사람에게 이사장을 넘겨주었다.
5·18 일주기가 되어 나는 들불야학의 전용호·서대석·정재호 등의 삼촌들, 아파트 청년들과 함께 우리 가게방에서 원통하게 죽은 박용준 삼촌과 윤상원 삼촌의 제사를 지냈다. 의거 이후 우리집에 오랜만에 30∼40여명의 삼촌들이 모여, 장가도 가지 못하고 죽은 상원이 삼촌과, 고아출신이라 누구하나 보살펴 줄 이 없는 용준이 삼촌의 사진을 모시고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 제사를 모셨다. 또한 아직도 감옥에 계신 분들이 하루 빨리 석방될 수 있도록 기도했다. 이날 나는 망월동 묘지에 가서 용준이 삼촌과 상원이 삼촌의 묘지 앞에서 한없이 울었다.
남편의 증세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한 번은 면회갔는데 재야인사로 구속된 장두석선생의 부축을 받으며 면회를 했다. 남편은 왼쪽다리와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헛말만을 되풀이하여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전에보다 훨씬 심각했다. 환각·환청에 시달리면서 이상한 종교 얘기를 하다가 돌아가신 어머님의 얘기를 하기도 하는 등, 완전히 정신착란증세를 나타냈다. 주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신경정신과 외래의사의 진료를 받기고 했고 그들이 처방한 약을 넣어 주었으나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보내오는 편지도 온전한 정신으로 쓴 것이 아니었다.
81년 9월 면회시, 부인인 나는 물론 동생이며 처제들을 몰라보며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왼쪽 손은 축 늘어졌고 다리를 절었으며 신발을 질질 끌며 걸음도 못 걸었다.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제한된 면회시간이 끝나고 나는 접견실 앞마당을 뒹굴며 울부짖었다. “세상에 인간도 아닌 나쁜 놈들! 광주의거가 무슨 죄가 된다고 저토록 사람을 몰라보고 헛소리를 지껄이며 좌수족이 마비돼도 내보내 주지 않느냐, 이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하며 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울었다. 교도관들이 말렸으나 나는 은형이를 업고 면회장 주변에서 한참동안 그렇게 정신없이 울부짖었다. 교도소를 나오면 다시 먹고 살기 위해 새벽같이 공판장을 오가야 되는 철과일장사를 쉴 수가 없었다. 석방되어 나온 남편의 친구나 후배들이 내가 충격을 받을까 남편의 증세를 얘기해 주지 않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감옥 안에서 정상용씨·이양현씨 등이 환자인 남편을 위해 온 정성을 쏟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꼭 보답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도 남편의 석방을 위해 그들도 인간이다는 생각으로 탄원서를 보냈다. ‘헌병대 영창에서 머리를 다쳐, 뇌수술을 잘 못해 회복된 듯 하다가 교도소로 넘어가 손발이 마비되고 의식이 불안정해 기억상실증세와 환각·환청 때문에 도저히 수형생활이 무리인 사람으로 면회간 식구들의 얼굴도 못 알아보고, 헛소리를 하며 의복이며 양말·신발도 신기가 힘든 상태로……’라는 내용으로 눈물반 기도반을 섞어 남편이 폐인이 되지 않게 석방시켜 달라는 탄원서를 청와대와 법무부에 보냈으나 소식이 없었다.
겨울철에 접어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격려나 위로를 보내주었다. 고맙기 한량없어 어떤때는 눈물로 감사를 드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어두움 속처럼 암담하기만 했다. 어떻게 먹고 살며, 애들을 키워가며 남편의 자존심과 뜻을 그르치지 않을까 궁리를 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의거 가족의 한사람으로 결코 광주의거에 누가 되지 않도록 살아갈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뛰었고,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손님만 있으며 밤12시가 넘도록 가게문을 열어두었다.
느닷없이 석방된 남편
81년 12월 크리스마스 무렵, 남편을 비롯한 구속자들이 석방된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드디어 돌아오는구나. 나는 시골 친정 아버님 등 가족들에게 연락했다. 25일 새벽 교도소 정문에서 남편을 맞기 위해서, 전날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새벽 3시쯤, 샤터문을 두드리며 동명이 엄마를 부르는 소리에 깨어 일어났다. 남편의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일어나자마자 맨발로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꿈에도 그리던 남편이 서 있었다. 교도관들이 광천파출소 앞거리에다 내려주어 걸어온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남편이 환자라지만 차마 이런 모습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남편의 모습은 길거리의 걸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얼굴과 머리는 씻지도 않았고 의복은 형편없어으며, 보내주었던 담요며 속옷 등을 똘똘 말아 묶지도 않고 질질 끌며 좌수족을 못 쓰기 때문에 절뚝이며 어두운 밤길을 걸어온 것이다. 눈빛도 말소리도 그 옛날의 남편이 아니었다.
바지가랑이는 온통 흙더미로 오다 넘어졌던 흔적이 역력하였다. 비참한 꼴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뇌를 다쳐 정신이 이상해진 완전한 좌수족 불구의 정신병 환자였다. 방으로 들어와 세면을 시키고 옷을 갈아 입히고 누이려 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눕는 듯 하더니 “지금 YWCA로 가야 한다”고 보채며 옷을 갈아 입으려 했다. 나는 만류하고 잘 것을 간청했다. 석방 직후 그를 최초로 만난 날부터 나는 24시간 꼬박 붙어 있어야 했다. 새로운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남편은 정신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머리를 방바닥에 벽에 부딪치며 울부짖었다. 신발도 의복도 화장실도 세면도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남편이었다. 나는 연속 3일을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석방을 축하해 주기 위해 왔다가 실망을 하고 걱정을 해주며 돌아갔다. 사람들은 ‘세상에 이런 사람을 교도소에 가두다니, 악랄한 놈들’이라고 한마디씩 내뱉었다. 그렇다. 다쳤을 때 곧 치료했으면 나았을텐데, 나는 치밀어 오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석방되었다는 기쁨보다는 절망이 더했다. 한마디로 캄캄했으며 미칠 지경이었다. 감방안에서 시중을 들어주었다는 정상용씨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남편은 의거 이전의 일을 회상하며 도저히 불가능한 얘기를 자주 한다. YWCA에 나가서 회의를 해야 한다는 등, 지금 조직이 결성되었다는 등……. 모두를 과거의 연속선상으로 여겼고, 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반발심이 말 속에는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 내일 누구를 죽이러 간다, 혹은 누구와 싸워 이겼다는 등. 며칠 후 YWCA조아라 회장, 강신석 목사 등이 주선해 신경외과 종합진찰을 받았다. 장기간 입원치료를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요한 병원에 천주교측의 도움으로 입원하였다. 나는 다시 장사를 했고 남편을 면회하며 먹을 것과 내의 등을 넣어주었다. 2개월쯤 입원하다가 일주일 동안 외출이 허용되는 엄격한 병원생활이었다. 외출을 한 남편은 자신을 정신병 환자 취급한다면 입원을 하지 않겠다고 야단이었다. 그렇다고 차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몇차례의 외출 때마다 남편은 가지 않겠다고 야단이었다.
어떻게 하면 병을 고칠까
나는 기어코 가지 않겠다고 하는 남편을 억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도움을 주는 천주교측에는 정말 미안했다. 82년 봄, 집에 있으면서 나는 부질없을 줄 알지만 기도로 치료하면 어떨까 하고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기적이 나타나주기를 바란 것이다. 또한 좋다는 한약을 구해 열심히 다려 마시게 했다. 어느날 평소 아는 교회 집사의 권유로 서울 순복음교회에서 운영하는 오산리기도원을 찾아 금식기도를 드렸다. 예배나 기도시간에도 남편은 엉뚱한 말이나 행동을 해 한번은 전도사가 남편을 억지로 구타하기도 했다. 10여일 지난 후, 나는 집이 걱정되어 그동안 사귀었던 전도사에게 잠시 남편을 부탁하고 내려왔다. 내려온 다음날 남편이 행방불명이라는 소식이 엽서로 왔다. 나는 기력을 상실했다. 어떻게 서울 천지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묘안도, 방도도 떠오르지 않았다. 돈도 없고, 애들을 버리고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경찰서에 찾아달라고 신고했다. 9일째 되는 날 서울 응암동 정신병원에서 보호 중이라는 엽서가 왔다. 치료비와 보육비를 가지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병원에서 직원의 부축을 받고 온 남편의 모습을 보고 나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몰골이었다. 머리는 먼지투성이요, 얼굴은 누구에게 맞았는지 피명이 들고 온통 부어 있었고,의복은 말할 수 없이 더러웠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직원을 향해, 누가 때렸느냐고 추궁하며 울부짖었다. 남편을 데리고 여관에서 목욕시켰으며 새옷으로 갈아 입혔다. 집에 도착했을 때 이웃들과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모든 사람들이 혀를 차며 시국을 한탄하고, 남편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했다. 82년 여름, 주위사람들의 도움으로 장사는 잘 되었다. 수박을 몇 리어카분이나 팔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고달팠다. 번돈으로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병은 전혀 차도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남편의 건강을 회복시켜 애들과 함께 단란하게 살아야 된다는 의지와 집념이 반사적으로 생겨나는 기분을 맛보았다. 82년 겨울, 박관현 삼촌이 단식으로 교도소에서 죽어 세상이 시끌시끌하던 그 무렵, 주위의 도움으로 남편은 전남대부속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남편의 선후배·신부·목사, 여러 교수 등 여러 사람들의 남편에 대한 신경도 남다른 것이었다. 그들도 어떻게 하면 남편을 치료할 수 있을까하며 온갖 궁리를 다하였다.
84년 1월, 나는 남편을 장기간 요양치료 해야 된다는 의사들의 권유에 따라서 나주 국립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이제는 교도소와 같이 정기적으로 면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개월에 한번씩 음식이며 속내의를 준비해 가 남편과 함께 먹었고 남편의 병세를 관찰했다. 어떤 때는 좋아진 듯 하다가, 또 다시 전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됐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나를 괴롭히던 남편의 행동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남의 물건을 들고와 버리거나, 옷을 벗고 거리고 나가버리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한다고 나를 때리거나…….환청·환각에 시달리는 듯 잠을 못자고 헛소리를 하며 울면서 머리를 벽에 부딪치는 등 헤이릴 수 없었다. 자라나는 애들에게 전혀 신경을 쓸 수 없었을뿐더러, ‘XX자식의 아들’,‘너희 아빠는 XX병자’라는 소리를 듣고 와 시무룩해 하는 애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하도 막막해 술 몇잔을 했다가 주위 사람, 특히 진심으로 걱정해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분들에게 꾸중을 들은 일도 있었다.
아, 잔인했던 5月이 또…
갈수록 가게가 안되어, 84년 우유배달로 생계수단을 바꿨다. 우유배달이라고 좀 더 편한 돈벌이는 아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가사일을 보고, 저녁때는 수금나가는 일과였다. 힘들지만 할 수 없이 해야만 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발이 부르트고 누웠다 하면 잠이 들 정도로 피로했다.85년 초 남편은 일년여만에 병원생활에서 다시 시민아파트의 집으로 왔다. 입원할 당시에 비하면 휠씬 호전되었으나 완쾌된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좌수족을 제대로 못 써서 걸음 걸을 때면 절뚝거려야 하고, 의식도 정상은 아니다. 애들은 커서 모두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다.
나는 87년 봄, 그동안 해오던 우유배달을 그만두고 조그만 식당을 시작했다. 거기서 번돈으로 다섯식구가 살아가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집의 가장이 되어 버렸다. 5월이 다가온다. 지나간 8년이 번쩍 지나간 것 같고, 그때의 기억들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8여년을 회상해 볼 때 저절로 눈물이 나온다. 말로, 글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신문·방송에서 한동안 희생자 보상, 피해자 보상, 명예회복 등의 얘기를 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자기들이 광주를 이 지경으로, 우리 가정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우리 당사자들의 주장은 전혀 듣지도 않고, 다시 자기들 입으로 보상입네, 명예회복입네 떠들어 대다니 가당찮은 일이다.
79년 광천시민아파트 우리집에서의 그 재미있었던 일들이 어제 일만 같다. 죽은 박용준·윤상원·박관현, 그리고 들불야학의 삼촌들, 아파트의 삼촌들이 어울려 토론하고, 재미있게 놀며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던 다짐의 모임들이 어제일만 같다. 특히 죽은 삼촌들의 카랑카랑한 노랫소리가 금방 들리는 둣하다. 언제 또 그렇게 재미있고 보람있는 때가 나에게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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